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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는 것만이 진실은 아니다


3부 삶의 근원속으로



제7장 우리는 영원한 존재


삶의 근원 속으로


개인적인 차이는 있지만 사람들은 대부분 현재보다 미래를 중요시하는 경향이 있다. 미래의 전망이 좋으면 현재의 고통을 쉽게 견디지만 미래가 불안하면 현재 상태가 아무리 좋아도 만족하고 기뻐하지 못한다.
이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은 현재가 아닌 미래에 살고 있는데, 미래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걱정은 죽음에 대한 것이다. 이런 걱정은 성인뿐만 아니라 어린이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태어나서 몇 해 지나지 않아 어린이들은 인간의 육체가 결국 죽어 없어진다는 사실을 알고 나름대로 죽음의 공포에 시달린다. 그리고 죽은 뒤에는 과연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보이게 된다.

사후세계의 문제는 인생의 근본 화두인 ꡐ나는 누구이며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가ꡑ 하는 것과 연결된다. 사람들은 이 문제에 대한 확신을 가지지 못하고 그 의문에 대한 답을 찾는 것조차 포기한 채 하루하루 살아간다. 그러다 갑작스런 부음을 전해 듣고 며칠 전까지만 해도 같이 웃고 떠들며 이야기하던 친구가 화장터에서 한줌 재로 변하는 것을 목격하고는 다시금 그 근본적인 화두를 떠올리고 사후세계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기독교 신앙체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ꡐ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고 있으며, 하나님께 봉사하는 삶을 살다가, 죽어서는 천국에서 영원한 복을 누릴 것이다ꡑ라고 생각하지만 무언가 미흡하다고 느낄 것이다. 불교 신앙 체계를 갖고 있는 사람은 ꡐ나는 윤회하는 존재이고, 이 생에서 베푸는 삶을 살면 다음 생에서 행복을 누릴 수 있다ꡑ라고 생각하지만 이 역시 뭔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일부 무신론자로 자처하는 사람들은 ꡐ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ꡑ고 중얼거리며 인생무상을 절감하지만, 그들도 죽고 나면 정말 모든 것이 사라지는지 확신하지 못한다.


2부에서 우리는 인간이 우주의 근원적인 기운의 개별화된 존재라는 것을 발견하였지만, 우리가 왜 인생이라는 힘든 항해를 해야 하는지,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지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20세기 물리학은 우리가 사는 진짜 세상이 파동으로 가득한 텅 빈 공간으로서 하나의 완벽한 가상현실이라는 것을 시사하고 있지만, 이렇게 속고 사는 우리 인생의 의미에 대해서는 살펴보지 않았다. 인생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기 위해서는 ꡐ우리가 죽고 나면 어떻게 될 것인가?ꡑ 하는 사후세계에 대한 앎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지금부터는 지난 세기 동안 축적된 과학적 연구 결과들을 바탕으로 사후세계를 여행해 보고 이를 통해 인생의 의미를 찾아보기로 한다. 또한 지금까지 행해진 동서양의 예언들을 살펴보고, 그 예언들이 무엇을 시사하는지 음미해 보기로 한다.


윤회론
각 종교에서 제시하고 있는 사후세계는 매우 다양하지만 크게 인도에서 유래한 윤회론(輪廻論)과 기독교에서 제시하는 천국․지옥론으로 나눌 수 있다. 20세기 후반 들어 이들 두 견해 가운데 윤회사상을 뒷받침하는 다양한 증거들이 계속 제시되어 왔고, 그 결과 서양에서도 윤회를 믿는 사람들이 급증하고 있다. 미국과 영국 사람들 가운데 과반수가 윤회나 환생을 믿고 있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고, 일부 조사에 따르면 미국 국민의 70% 정도가 윤회를 믿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의식 변화를 반영하듯 미국의 책방에는 윤회를 다룬 뉴 에이지 관련 책들이 책꽂이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고, 뉴 에이지 관련 음악과 영화들이 대중의 인기를 끌어모으고 있다.
인도 우파니샤드 철학과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윤회론은 우주의 창조와 파괴가 끝없이 계속된다는 우주론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우리의 영혼이 오랜 세월 동안 연속되는 생을 거치면서 서서히 진화하여 궁극에는 완성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환생설(還生說)ꡑ은 윤회론과 비슷하지만 진화의 개념을 갖고 있지 않다. 이는 불멸하는 순수 영혼이 존재하고, 이 영혼이 육신을 바꾸어 태어나고 죽는 과정을 되풀이한다는 것으로 피타고라스, 엠페도클레스, 플라톤, 플로티누스 같은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과 영국과 프랑스 북부 지역에 살았던 고대 켈트족의 사제 계급인 드루이드, 유대의 카발라 철학 등에서 나타났다. 하지만 요즘은 많은 경우 환생이 윤회와 같은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다.


윤회와 같은 인간의 사후세계에 대한 정보는 단순히 우리의 호기심을 만족시키는 차원을 넘어 우주와 인생에 대한 심오한 가르침을 제시해 준다. 윤회설을 받아들이게 되면 우리의 존재가 현재의 삶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따라서 우리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에 대해 새로운 눈을 뜨게 된다.


하지만 대부분의 독자들에게 이론으로서의 윤회론이나 천국론은 별다른 흥미를 유발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이 사실로 받아들여질 때 중요한 것이고,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일부 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의 흥미를 끌 수 있을 뿐이다. 이런 점에서 먼저 윤회라는 것이 과연 존재하는 것인지를 살펴 보는 것이 가장 중요할 것이다.




윤회의 증거들
지금까지 서양에서는 사후세계에 대하여 다양한 과학적 연구가 진행되어 왔고 이 연구들은 전생과 윤회에 대해 수많은 증거를 쏟아놓았다. 전생을 기억하는 어린이들에 대한 사례가 계속 축적되고 있고, ꡐ연령퇴행 최면요법(hypnotic age-regression)ꡑ으로 전생의 기억을 되살림으로써 환자의 정신적 질환을 치료하는 전생 치료사들이 전 세계에서 활동하고 있다. 죽었다는 진단을 받은 후에 다시 살아난 사람들의 사후세계 및 환생에 대한 증언들도 많이 축적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에드가 케이시 같은 초능력자들은 많은 사람들의 전생을 읽고 이를 바탕으로 그들의 질병을 치유했으며, 수련자들은 깊은 명상중이나 특별한 계기를 통해 자신의 전생이라고 확실히 느껴지는 영상을 보기도 한다.


윤회와 관련되는 이러한 사례들은 무수히 많지만, 그것이 과학적 증거로 채택되려면 우선 그 기억들이 구체적이고 자세해야 한다. 또 전생에 전혀 유명하지 않은 사람들에 관한 것일수록 좋고, 마지막으로 그 이야기가 사실임을 입증할 수 있어야 한다. 현재 이 모든 조건을 거의 완벽하게 만족시키는 윤회의 증거들이 많이 존재하고 있고, 또 부정하기 어려울 만큼 감동적인 전생 이야기를 담은 책들이 속속 출판되고 있다.



1) 전생을 기억하는 어린이들
전생을 기억하는 어린이들은 전 세계에 많이 존재한다. 이들은 대부분 열 살 미만인 경우가 많은데, 그 나이로는 달리 알길이 없을 특정인의 일생 즉, 자신의 전생에 대해 자세히 기억하고 있으며, 실제 조사한 결과가 그 기억과 정확하게 들어맞는 경우에는 윤회의 과학적 증거로 인정받게 된다.
이안 스티븐슨(Ian Stevenson) 박사는 버지니아대학교 정신과 교수로 30년 이상이나 전생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어린이들을 탐문하고 연구해 왔다. 그는 전 세계에서 수천 건의 사례들을 모아서 분석하고, 그 주요 결과들을 《전생을 기억하는 아이들》(Twenty Suggestive Cases of Reincarnation)이라는 책으로 발간하였다.


뉴 에이지 운동의 리더 중 한 사람인 지나 서미나라(Gina Cerminara)는 전생을 기억하는 어린이들에 관한 대표적인 사례로서 다음 두 가지를 언급하고 있다.


인도 델리에 사는 샨티 데비라는 소녀는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가끔 이상한 말을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샨티 데비는 자신이 전생에 무트라 시에 살았다고 하면서 그때 일을 하나하나 더듬어 아주 자세히 기억해 냈다. 그는 꼭 한번 그곳에 가보고 싶다고 부모를 졸랐고, 이에 부모가 샨티 데비를 무트라 시로 데리고 갔다.


샨티 데비는 저명한 변호사, 유력한 신문사 편집장 등 여러 사람이 증인으로 참석한 가운데 전생의 남편과 오빠, 자신이 죽어가며 낳은 아들을 찾아냈고, 부부생활에서 있었던 시시콜콜한 일들까지도 모두 기억해 냈다.


일본의 여덟 살 난 가츠고로는 자신이 전생에 호도쿠보라는 마을에 살았다고 말했다. 당시 자신의 이름은 도조였고, 아버지는 규베이로 불리는 농부였으며, 어머니의 이름은 싯주였다고 했다. 자신은 아버지가 죽은 다음 해에 여섯 살 나이로 천연두에 걸려서 죽었다며 자신의 장례식 광경을 자세히 묘사하고, 그 당시 부모와 살던 집의 모습을 그림 그리듯 자세히 설명했다.
가츠고로는 현생의 부모와 함께 호도쿠보를 방문했는데, 아무런 안내를 받지 않고도 전생에 살던 집을 찾아냈고, 전생의 부모를 찾아냈으며, 자신이 말한 다른 이야기들도 사실이었음을 입증해 냈다.
스티븐슨 박사의 연구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어린이들이 자신의 다른 생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하는 것은 두 살에서 네 살 사이로 보통 10여 건의 전생을 기억해 낸다고 한다. 그 내용 가운데는 흔히 자신의 이름, 식구들과 친구의 이름, 살았던 장소, 집 생김새, 직업, 죽게 된 경위 등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이렇게 전생을 기억하는 어린이들도 자라면서 홍수처럼 밀려드는 새로운 정보와 사건에 파묻히게 되고, 전생의 기억은 점점 희미해지다가 열 살 무렵이면 안개처럼 사라지고 만다고 한다.


어린이들이 자신의 전생에 대한 이야기나 열린 감각을 통해 입수한 다양한 정보를 이야기하는 경우는 드물지 않지만, 대부분의 부모들은 어린이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거나 그들의 말을 무시함으로써 그 사례들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고 한다. 특히 윤회를 인정하지 않는 문화권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스티븐슨 박사의 또 다른 발견은 전생이 현생의 육체 조건이나 모습에 뚜렷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영국의 비행기 조종사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미얀마 상공에서 격추되어 죽은 뒤 미얀마에서 다시 태어난 사람이 있는데, 이 경우를 보면 다른 형제들에 비해 유난히 밝은 머리색과 피부색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한다.특징적인 얼굴 생김새 등이 다음 생으로 이어지는 경우를 발견할 수 있었고, 신체의 부상이나 흉터 등이 다음 생에 나타나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2) 전생을 기억하게 해주는 최면요법


연령퇴행 최면요법이란 최면을 통해 환자를 조금씩 어린 시절로 돌아가게 하고 현재의 정신질환과 관련이 있는 기억들을 살려냄으로써 환자를 치료하는 정신과 치료 기법이다. 최근 들어 이 기법을 이용해 특정인을 전생으로 유도함으로써 당시 일들을 기억해 내게 하고, 또 그것으로 현생의 질병이나 고민의 해답을 얻는 일들이 자주 일어나고 있다.
물론 최면을 통한 전생 기억이 전생의 존재를 입증하는 과학적 증거로 채택되기 위해서는 전생의 인물이 별로 유명하지 않아야 하는 등 앞서 언급한 조건들에 잘 들어맞아야 한다.


과학적 증거로 인정받는 가장 유명한 사례로는 1956년에 일어난 브라이디 머피 사건을 들 수 있다. 미국 콜로라도 주 프에블로 시에 사는 모리 번스타인(Morey Bernstein)은 루이 시몬스라는 여성에게 최면을 걸어 그녀가 전생에 브라이디 머피라는 사람이었음을 기억해 내게 했다. 또한 루이 시몬스는 19세기 아일랜드에서 자신이 살았던 장소, 특정한 사건, 화폐제도, 농작물, 문화, 책 등에 대한 수많은 기억들을 가지고 있었는데, 조사 결과 모두 정확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미국 마이애미대학 정신과 교수이며 정신의학계의 귄위자인 브라이언 와이스(Brian Weiss) 박사는 최면에 의한 전생퇴행으로 수많은 사람을 치료함으로써 ꡐ전생 박사ꡑ로 불리게 되었다. 본래 정통 유대인으로 성장한 와이스 박사는 전생과 윤회에 대해 철저히 부정적인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유 없이 불안과 공포 증세에 시달리는 정신병 환자인 캐서린을 만나고 치료하는 과정에서 와이스 박사 스스로 엄청난 변화를 경험하게 되었다.


와이스 박사는 연령퇴행 최면요법으로 캐서린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캐서린의 전생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이러한 전생퇴행이 여러 차례 진료에서 반복됨에 따라 캐서린은 전생에 대한 많은 기억들을 찾아냈고, 또 그렇게 전생을 회상함으로써 자연스럽게 병이 치유되었다.


최면상태에서 캐서린은, 한 생에서 다음 생으로 전이하는 과정인 ꡐ바르도ꡑ 상태에 들어가기도 하였는데, 이 상태에서 만난 ꡐ영적 존재(spirit entity)ꡑ들은 삶과 죽음에 대한 많은 비밀을 전달해 주었다. 캐서린을 통한 이러한 충격적 체험은 와이스 박사를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바꾸어 놓았고, 그는 이러한 감동을 《나는 환생을 믿지 않았다》(Many Lives, Many Masters)라는 책을 통해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다.


토론토대학 정신과 교수인 조엘 휘튼(Joel Whitton) 박사도 수십년 동안 윤회의 증거들을 모아왔다. 그의 전생에 대한 연구 결과 중에는 윤회의 원리와 관련된 중요한 발견이 있다. 최면을 통해 사람들을 삶과 삶 사이의 과도기로 퇴행시키면 피험자들은 눈부신 빛으로 가득 찬 세계로 인도되는데, 피험자들은 이 세계가 그들이 다음 생에서 경험할 중요한 사건과 상황을 설계하는 데 필요하다고 진술했다. 현재의 생은 이 세상에 나오기 전 스스로가 설계한 것이라고 진술한다는 것이다.
그밖에도 전생 치료사로 널리 알려진 임상심리학자 헬른 웸바크(Helen Wambach)와 모리스 네더톤(Morris Netherton), 에디스 피오레(Edith Fiore), 알렉산더 캐넌(Alexander Cannon) 등도 그들의 저서를 통하여 전생을 증언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신경정신과 의사인 김영우가 최면을 통한 전생체험에 관한 책을 출판했으며, 설기문, 엄영문 등은 전생 치료사로 활동하고 있다. 요즘은 방송사 카메라 앞에서 이루어지는 공개 전생체험도 시도되고 있는데, 프로그램 관련자들의 진지하지 못한 태도가 아쉬움을 남긴다.



3) 임사체험자들의 공통된 증언


ꡐ임사체험(臨死體驗, Near-Death Experience)ꡑ이란 사망 진단을 받았다가 소생한 사람들의 체험을 말하는데 전 세계에 수많은 임사체험 사례들이 축적되어 있다.


미국의 정신과 전문의로 의학박사이며 철학박사이기도 한 레이먼드 무디(Raymond Moody)는 이 분야에 대해 많은 연구를 해온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가 오랜 세월 연구한 결과들을 보여주는 《삶 뒤의 삶》(Life After Life)이라는 책에는 임사체험자들의 체험담들이 실려 있는데, 사람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긴 하지만 이 체험담들에는 상당한 공통점이 있다고 한다.


이들은 먼저 자신이 육체적으로 죽었다고 인식한 후 잠시 동안 평화롭고 유쾌한 기분을 느끼며 공중을 떠다니다 터널을 통과하거나 강을 건너 어떤 고귀한 ꡐ빛의 존재ꡑ를 만난다. 다음으로 자신의 지나온 인생을 생생하게 되돌아보는 기회를 갖고, 이 세상에 돌아오기 싫다는 기분을 느끼며 다시 세상으로 돌아오게 되었다는 것이 대체로 공통되는 줄거리이다.


1990년대 말에 행해진 갤럽여론 조사에 따르면 임사체험은 미국인 약 1,300만명이 경험하였고, 죽음에 이른 환자들 약 3분의 1이 경험하고 있을 정도로 흔하다. 이 임사체험자들은 그들이 있는 곳에서 도저히 알 수 없는 병원 안팎의 일들을 자세히 진술하고 있으며, 또 이 진술들이 진실로 판명되고 있다. 예를 들어 문병 온 친지들이 병실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나눈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다든지, 의사나 간호사만이 알 수 있는 일을 알고 있는 것 등이다. 이러한 사실은 임사체험자들의 사후세계에 대한 진술의 신뢰성을 높여주고 있다.


이제까지의 임사체험 연구 결과를 보면 임사체험을 경험한 사람들 대부분이 급격한 인격 변화와 더불어 삶의 전환을 경험한다고 한다. 임사체험자들은 이전보다 행복하고 낙관적인 사람으로 변하게 되며, 마음이 편안해진 것을 느끼게 된다.


더욱 놀라운 변화는 그들 모두 사랑이 크게 증대되어 가족들에게 냉담하던 가장은 따뜻하고 부드러운 사람으로, 내성적이던 사람은 외향적인 사람으로 변한다고 한다. 이들은 또한 영적인 변화를 경험하는데 인간 영혼의 불멸을 확고히 믿게 되며, 윤회설이나 동양의 종교에 대해 열린 태도를 갖게 된다. 또한 임사체험자 가운데 상당수는 영능력을 가지게 되는데 흔히 텔레파시나 치유능력이 생기고 미래를 투시하는 능력도 많이 발현된다고 한다.


임사체험자들이 자신의 체험을 직접 저술한 책도 여러 권 출간되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대니언 브링클리(Dannion Brinkley)가 쓴 《죽음 저편에서 나는 보았다》(Saved by the Light)이다. 이 책은 브링클리 자신이 경험한 두 차례의 임사체험과 체험 이후의 삶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브링클리는 죽음의 문턱에 이르러 ꡐ빛의 존재ꡑ를 만났고, 그 존재의 안내를 받아 영계(靈界) 곳곳을 돌아다녔다. 그는 인류의 앞날을 예언해 주는 117가지 영상을 보았는데, 자신이 본 영상들이 대부분 현실로 나타났다고 진술하고 있다. 그는 임사체험 후 상대방의 마음을 읽을 수 있게 되었고, 또 누군가를 보거나 그의 소지품을 보는 것만으로도 그 사람의 과거를 영상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4) 그밖의 증거들


에드가 케이시는 자기최면 상태에서 ꡐ신체영독(身體靈讀, physical reading)ꡑ 혹은 ꡐ신체투시ꡑ라고 불리는 능력을 이용해 병의 원인을 찾아내고, 전생영독을 통해 사람의 전생을 읽음으로써 수많은 사람들을 치유할 수 있었다. 또한 윤회의 패턴을 찾아냈으며, 미래에 대해 수많은 예언을 남기기도 했다.
다른 영능력자들의 경우와 달리 케이시가 영독한 것에 대한 기록은 매우 방대하고 후손들에 의해 잘 보관되고 있다. 이러한 케이시의 기록들은 20세기 후반 서양에서 전생의 존재와 윤회의 의미를 일반인들에게 알리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또한 앞서 소개한 바바라 브레넌을 비롯해 수많은 영능력자들도 전생영독을 하고 있고, 많은 기 수련자들도 자신의 전생을 보았다고 증언하고 있다.


전생에 대한 직접 증거나 경험은 아니지만 신동들의 존재 또한 전생의 존재를 강력히 시사해 준다. 크리스찬 프리드리히 하이네켄은 신동들 가운데 대표적인 사람으로 1721년 독일에서 태어나 네 살 때 죽었다. 그는 태어난 지 몇 시간 만에 말을 하고, 죽기 전까지 성경의 역사와 세계사, 지리학을 숙달했으며, 독일어뿐만 아니라 라틴어와 프랑스어까지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는 이미 네 살 때 미뉴에트과 피아노 협주곡, 소나타 등을 작곡했다. 또 19세기 영국의 유명한 철학자이자 경제학자였던 존 스튜어트 밀은 세 살 때 그리스어를 익혔으며 여섯 살 때는 크세노폰, 헤로도투스, 이솝, 루시앙의 책을 읽고 이해했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신동의 존재는 전생을 가정하지 않고서는 설명하기 힘든 것으로, 환생을 믿었던 플라톤이 남긴 다음 말은 신동과 전생의 관계를 잘 설명해 준다.


ꡒ쉽게 얻어지는 지식은 영속적인 자아가 전생에서 이미 갖고 있던 것이다. 그래서 그토록 쉽게 복구되는 것이다.ꡓ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윤회의 증거는 매우 다양하고 풍부하며, 이러한 증거들은 전생의 존재를 부정하는 다른 어떤 가설로도 설명되기 어렵다. 다시 말해, 지금까지 제시된 증거들에 근거해 볼 때 전생이 존재하지 않을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전생 체험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윤회의 존재를 받아들이지 않으며, 전생을 인정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별다른 확신이 없이 그냥 막연히 그럴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기수련 전까지만 해도 저자 역시 전생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알 수 없는 사후세계에 대하여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한다는 것은 오직 시간 낭비일 뿐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러다 몸과 마음의 근본적 변화를 겪으며 그동안 인정하지 않거나 무시해 왔던 많은 것들에 대해 열린 자세, 열린 마음을 가지게 되면서 전생의 존재도 점차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하지만, 전생과 윤회라는 것이 확신을 넘어서 그것을 생생히 느끼기 시작한 것은 나의 직접적인 체험을 통해서였다. 특히 어떤 여자분의 전생체험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전생의 존재 뿐 만 아니라 전생의 의미에 대해서 확실히 깨달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이 분의 경우, 처음에는 자신과 나의 전생을 읽고 그것을 이야기해 주는 것으로 시작하였지만 곧 자신의 전생 의식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최면상태로 유도되는 과정이 없이 스스로 자연스럽게 전생의 의식 속으로 들어갔는데, 5600년 전 고대 중국의 삶으로 들어가서는 그 때의 생생한 감정 속에서 연인과 주고 받았던 이야기를 그 당시의 언어로 반복하여 이야기하였다. 티벳의 림포체로 살았던 생으로 들어가서는 몽고족의 침입으로 백성들이 고통받고 있음을 괴로워하는 등 많은 것들을 티벳어로 이야기하고, 일본에서의 전생에서는 일본어로 이야기하면서 당시 유행하던 일본 노래를 중얼대기도 하였고, 미국에서의 전생에서는 자동차 사고의 현장에서 외쳤던 소리 등을 영어로 반복하기도 하였다. 인간에게는 전생을 살면서 전개되었던 삶의 장면들 뿐만 아니라 그 때 그 때의 감정상태까지 고스란히 기억되어 있음을 확실히 알게 해 주는 체험이었다.


이후 나는 몇몇 사람들에게 직접 최면을 걸어 전생으로 유도해 보기도 하였다. 최면이 제대로 되지 않은 경우 피최면자는 뚜렷한 영상을 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느껴지는 바도 아주 희미하고, 또한 피최면자의 진술에는 자신의 의식이 개입될 가능성이 높아 그것을 신뢰하기는 어렵다. 반면, 완전한 최면 상태에서 전생으로 들어가면, 피최면자는 자신이 오감으로 인지하며 살아가는 일상 생활과 마찬가지의 생생함을 경험하게 된다.

 

서양의 여러 전생치료사들이 보고한 바와 같이, 전생 퇴행의 과정에서 특정의 생(生)이 아닌 생과 생의 사이 즉 바르도(Bardo)라고 불리는 상태로 들어가기도 하였고, 우주 공간으로 빠져나가거나 우주에 있는 고향별에서의 생활을 기억해 내는 것도 여러 번 지켜보았다.


이러한 경험은 나에게 전생과 윤회의 존재를 확인시켜 주었을 뿐만 아니라 전생이 현재의 생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를 깨닫게 해 주었다. 과거 전생에서 경험했던 것들은 모두 인체의 오라에 기억되어 있고, 그 때 살면서 경험하였던 감정들과 앎은 지금의 삶에서 내가 어떤 의사결정을 할 때 혹은 어떤 사람들을 대함에 있어 직접적인 영향을 미침을 알게 해 주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처음 보는 사람에 대하여 이유없이 호감을 갖는다든지 혹은 적의를 가진다면 그것은 전생에서 경험했던 그 존재와의 기억이 느낌의 형태로 와 닿아서 그런 것이 보통인 것이다.

 


종교에서 바라보는 윤회설


윤회설은 힌두교의 가장 오래된 경전인 《리그베다》에 ꡒ인간의 육체는 죽음과 함께 없어지지만 그 영혼은 불멸한다ꡓ라는 관념으로 제일 먼저 나타났다고 한다. 이것이 힌두교의 철학체계가 완성되는 우파니샤드 시대의 철학자 야쥬냐발카가 주장한 선악의 업(業), 즉 카르마(Karma)의 관념과 결부되면서 현재의 선행이 내세의 행복으로 이어진다는 인과응보적 윤회관으로 정착되었다.


대승불교에서는 이러한 윤회설을 이야기하면서 신들의 세계 천(天), 인류의 세계 인(人), 신들의 적인 마신(魔神)의 세계 아수라(阿修羅), 동물류의 세계 축생(畜生), 죽은 자의 영혼이 머무르는 아귀(餓鬼), 지옥(地獄) 등 여섯 세계를 돌고 도는 육도윤회(六道輪廻)를 말하고 있다.


우파니샤드와 불교 윤회설의 근본적 차이는 윤회하는 주체에 관한 것이다. 우파니샤드에서는 윤회의 주체로 영혼의 존재, 다시 말해 자아(自我)를 인정하고 있다. 사물이나 사건들의 궁극적이고 근원적 존재인 브라만이 인간 영혼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트만이며, 윤회의 주체라는 것이다.


이에 반해 불교에서는 무아설(無我說), 다시 말해 무아윤회(無我輪廻)를 주장한다. 이 생에서 다음 생으로 계속 이어지는 영혼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고, 영혼이나 자아 없이 인과적 계속성에 의해 윤회가 진행된다고 하는 카르마의 윤회를 이야기한다. 즉 한 물결이 다른 물결에 연결되는 것처럼 새롭게 태어나는 인간 또한 선행(先行)했던 존재의 결과일 뿐 윤회의 주체는 없다는 것이다.


윤회 주체가 있느냐 없느냐에 대한 우파니샤드와 불교의 차이는 얼핏 보기에 엄청나게 커 보인다. 하지만 이는 하나의 사실을 두 측면에서 바라보고 다르게 표현한 것일 수도 있다.


제6장에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우리들 각자는 우주의 근본기운이 개별화된 존재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수없이 많은 윤회를 거듭하고 있고, 따라서 윤회하는 개별 영혼은 분명히 존재한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동일한 우주기운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나라고 주장하는 윤회의 주체는 사라지고 다만 윤회 현상만이 남게 된다. 따라서 윤회의 주체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인간을 개별화된 존재로 인식하느냐, 인간 모두를 하나의 우주기운으로 인식하느냐 하는 관점의 차이에서 기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윤회나 환생설이 처음부터 기독교 교리에 어긋나는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초기 교회 지도자들은 환생을 인정했고,

 특히 그노시스주의자(Gnostics)들은 환생을 확신했다고 한다.


환생의 개념이 기독교 교리에서 축출된 것은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대제로부터 시작되었는데, 그는 서기 325년 니케아 종교회의를 소집하고 환생이 언급된 신약 부분을 삭제하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그로부터 200여 년이 지난 서기 553년,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콘스탄티노플 종교회의를 소집해 환생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환생설을 악마의 재림이라 경고했는데 이때부터 기독교에서 환생 개념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고 한다.

 


카르마의 원리


많은 사람들은 윤회가 카르마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받아들이고 있다. 우리가 경험하는 현상계의 모든 것은 서로 의존 관계, 즉 연기(緣起) 관계에 있고, 각 개인이 전생에서 행한 행동이나 말, 생각이 잠재적인 힘이 되어 현생(現生)을 결정하며, 현생의 행위가 다시 내생(來生)을 결정한다는 것이 카르마의 법칙이다. 우리의 영혼은 오랜 세월 동안 연속되는 생을 거치면서 서서히 진화를 계속해 카르마에서 벗어남으로써 궁극에는 완성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지나 서미나라는 에드가 케이시가 행한 전생영독 사례 수천 건을 분석해 나름대로 윤회의 법칙을 정리했다. 그녀가 지은 《윤회의 진실》(Many Lives, Many Loves)에 따르면 카르마에는 연속성과 보복성, 두 가지가 있다고 한다.


카르마의 연속성이란 인간이 가진 어떤 특성들이 여러 생에서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오랫동안 연마된 재능이나 능력은 내생에서도 계속해서 나타나고,교와 인종, 정치, 성, 동물 등에 대한 태도와 관심도 내세에서 계속 나타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반면 카르마의 보복성이란 다른 사람의 행복을 해치는 행동을 하면 반드시 적절한 방법으로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받게 되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전생에 다른 사람의 눈을 멀게 한 사람은 현생에 장님이 되어 태어나고, 전생에 과식하던 사람은 현생에서 소화기관 이상으로 고통받으며, 전생에 도움을 청하는 말에 귀기울이지 않은 사람은 현생에서 말 그대로 귀머거리가 되어 태어난다는 것이다. 또 현생에서 심한 고독감이나 소외감에 시달리는 것은 전생에서 자살을 했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그밖에도 지나 서미나라는 모든 영혼이 의지의 자유를 가지며, 그 자유의지가 심하게 오용되고 있을 때만 카르마의 법칙에 의해 간섭을 받는다고 이야기한다. 또 환생하는 영혼은 자석이 쇠에 이끌리는 것처럼 자신의 신체적 유전과 과업 수행에 필요한 환경을 제공할 수 있는 부모에게 이끌리게 되는데 신체적 유전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정신적 유전이 그에 우선한다고 한다.


그러나 지나 서미나라가 분석한 결과들, 특히 카르마에 연속성과 보복성이 있다는 해석은 오해의 소지가 있고 좀더 명확한 해석이 필요하다. 인간의 일부 특성들이 여러 생을 거치는 동안에도 계속 나타나는 것을 카르마의 연속성으로, 한 생에서의 환경이 다음 생에서 완전히 뒤집혀 나타나는 것을 카르마의 보복성으로 이해할 수는 있지만, 이는 피상적 분석에 따른 잘못된 해석일 수 있다.


카르마의 연속성으로 거론되고 있는 인간의 일부 특성들, 예를 들어 인종과 종교에 관한 편견들이 여러 생에 걸쳐 나타나는 것은 사람들이 이러한 편견이 잘못된 것임을 깨닫고 그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수없이 많은 생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시사한다. 우리의 영혼은 서로 다른 인종으로 태어나고 서로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으로 태어남으로써 결국에는 잘못된 편견에서 벗어나지만 그렇게 되기까지 수없이 많은 생을 살면서 윤회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카르마의 보복성에 대해서도 신중히 해석해야 할 필요가 있다. 최면에 의한 전생퇴행을 통해 수십 년 동안 윤회의 증거를 수집해 온 조엘 휘튼 교수나 전생을 기억하는 어린이를 연구해 온 이안 스티븐슨 교수, 임사체험을 연구해 온 사람들은 모두 카르마의 보복성을 인정하지않고 있다. 현재의 생은 우리가 전생을 마감하고 생과 생 사이의 바르도 상태에 있을 때 ꡐ빛의 존재ꡑ의 도움을 받아 스스로 계획한 것으로, 우리의 행위에 대해 우주적으로 단죄를 받는다는 아무런 단서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이다.


휘튼 교수는 전생에서 관계를 가졌던 사람들이 내생에서도 가까운 주위 사람으로 나타나는 현상에 대해 ꡒ그들은 그 이전 생에서 잘못을 저질렀던 사람들에게 보상할 기회를 주기 위해 그들과 함께 태어나는 길을 택했다고 말하고 있다. 이안 스티븐슨 교수는 ꡒ우리의 행위에 대한 외부의 심판은 없다. 잘잘못에 따라 우리를 삶에서 삶으로 배치시키는 어떤 존재도 없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영혼을 빚어내는 자이다ꡓ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해 볼 때, 우파니샤드 시대 야쥬냐발카에 의해 시작되고, 여태껏 인도인과 불교도들 사이에서 광범위한 믿음으로 전해 내려 온 윤회사상에 대한 인과응보적 해석은 이제 재고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우주를 움직이는 근본 힘은 사랑이고 우주 변화의 대원칙은 진화이다. 전생에서 이러이러한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에 현생에서 이러이러한 고통을 받아야 한다는 것은 사랑과 진화라는 우주의 원리에 어긋난다. 뿐만 아니라 인간은 우주의 모든 것을 움직이는 창조주이며 우주의 근원적 기운인데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징벌한다는 말은 설득력이 없다.


사람은 한 생과 다음 생 사이의 바르도 상태에 있을 때 자신의 인생을 미리 설계하지만 육신을 가지지 않은 영혼의 상태에서는 육신을 가진 상태에서 받게 될 고통에는 개의치 않는다. 오직 영혼의 성장을 꾀하려는 목적으로 영적인 스승 ꡐ빛의 존재ꡑ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인생을 설계한다. 전생에서 어떤 행위를 했는지 가장 효과적으로 깨닫고 배우기 위해서는 그 정반대 처지를 경험해야 하고, 바로 이 때문에 현생에서 전생과 반대되는 처지에 있게 되는 경우가 많은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윤회현상이 인과응보적이고 보복성이 있는 카르마로 비춰질 수도 있지만 사실은 모든 것을 우리 스스로가 계획하고 선택하여 이 세상에 나온 것으로 생각된다.




인간은 왜 윤회하는가


인간이 윤회한다는 사실은 우리의 삶에 대한 심오하고도 다양한 뜻을 내포하고 있다. 윤회는 무엇보다도 육신은 죽어 없어지지만 영혼은 결코 소멸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하고, 이는 인간의 가장 근원적 두려움인 죽음을 더 이상 두려워할 필요가 없음을 의미한다.


죽음이란 인체 에너지의 재구성을 의미하고, 영혼의 측면에서는 휴식이나 재충전을 의미한다. 영혼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생생한 체험이 필요하고 이 때문에 우리의 영혼은 몸을 받아 인생을 살아가게 된다. 하지만 육신이 병들고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면 영혼은 그 육신을 떠날 수밖에 없다. 이때 우리 몸에 깃들어 있던 영과 혼은 육신과의 관계를 끊어버리고, 몸을 에워싸고 있던 에너지 일부와 함께 떠나게 되는데, 이것이 죽음이라 불리는 과정이다. 이러한 죽음을 통해 영혼의 에너지는 다시 구성되고, 다음 인생이 시작될 때까지 휴식의 시간을 갖게 된다.


죽는다는 것이 헌 차를 버리고 새 차를 구입하는 것이나 해진 옷을 벗어버리고 새 옷으로 갈아입는 것, 혹은 애벌레가 허물을 벗고 더욱 성숙한 모습으로 나타날 준비를 하는 과정 같은 것으로 인식되면 이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사라진다. 또 우리들 모두가 끊임없이 변화하는 존재라는 것을 이해하게 되면 ꡐ변화ꡑ에 대한 우리의 근본 태도도 바뀌게 마련이다. 변화가 두려워 현재 상태에 머물려고 하는 보수성에서 벗어나면 새로운 것을 더욱 쉽게 받아들일 수 있고, 새로운 상황에 잘 적응할 수 있다.


윤회를 받아들일 때 죽는다는 것은 새로운 삶을 맞이하는 하나의 통과의례로 인식되고 따라서 죽음이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축복으로 여겨지게 된다. 대다수 인도인들이 너무나도 차분히 죽음을 맞아들일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윤회를 확신하기 때문이다.


윤회는 또한 우리가 진화를 향해 끊임없이 나아가고 있으며, 언젠가는 우리 모두가 해탈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이 한평생 살다 없어지는 존재일 뿐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감정과 육체적 욕망의 굴레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욕망을 좇아 제멋대로 살아가는 것이 더 합리적일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깨달음이라는 궁극적 목표를 향해 끊임없이 나아가는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게 되면 감각적이고 물질적인 생활이 일시적 체험을 위해서는 필요할지 모르나 장기적으로는 합리적이지 못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인간이 윤회하는 존재임을 깨닫는 것은 잠시 동안 필요한 물질을 위해 영원히 함께 할 다른 존재를 해치며 사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음을 의미하고, 우리에게 소중한 것은 물질이 아니라 영원히 지속되는 다른 존재들과의 관계임을 알게 되는 것을 뜻한다.


윤회의 존재는 인생이 영혼의 성장을 위한 수련장임을 의미한다.

사람들은 수많은 편견과 잘못된 고정관념 때문에 분별하고 집착한다.

 

인간의 분별심은 모든 사물과 인간이 오직 하나의 기운으로부터 나왔다

우주의 전일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데서 말미암은 것이고, 인간의 집착은 끊임없이 변하는 우주와 인생의 본질미처 깨닫지 못한 무지(無知)와 무명(無明)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우리는 수없이 다른 생을 거듭하며 때로는 남성에서 여성으로,

때로는 여성에서 남성으로, 낮은 신분에서 높은 신분으로,

이 민족에서 저 민족으로 거듭 태어나면서 분별과 집착에서 해방된다.

남성에서 여성으로 다시 태어남으로써 성적 편견에서 벗어날 수 있고,

낮은 신분으로 살면서 신분제도의 모순을 뼈저리게 깨달을 수 있으며,

서로 적대적이었던 다른 민족으로 다시 태어남으로써 민족주의나 국수주의의 허구성을 알게 되고 민족간 반목과 불화가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 체험하게 된다.

또한 여러 종교의 신앙인으로 거듭 태어남으로써 다른 종교를 포용하는 마음을 배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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