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blog.daum.net/aldiwkzl703/1428
진화에 대하여
서론
신지학에서 가르치는 진화란 서구 사회의 정교에서 말하는 창조론과 다윈의 연구에서 나온 다양한 이론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어떤 의미에서 그 중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인류학자들이 관찰한 결과들과 서구 종교의 입장을 인정하는 위치라 할 수 있다. 즉 이 거대한 진화란 “위로부터의 도움” 없이 이루어 질 수 없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 해석과 설명에서 서로 다르게 보고 있다. 무에서의 창조는 있을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하며 또한 세익스피어 같은 정신이 순전히 우연에 의해서 진화했다는 것도 단호하게 부정한다.
생명과 인간은 결코 시작도 없고 혹은 어떤 위대한 존재의 행위로 어디선가에서 시작된 것도 아니며 우연히 진흙 속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영원하다는 이전의 가정을 진전시켜야 한다. 여기에 정신 혹은 최고의 생각의 집합체인 우주심(Universal mind)은 언제나 존재하고 모든 존재의 뿌리에 있다는 것과 이것이 인간과 대자연 속에 현현하는 지성의 바탕이 되는 근원이라는 것을 더 추가해야 한다. 이것을 넘어서 우연이나 기적이 없으며 법칙으로 이루어진 우주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모든 것은 법칙에 따라 움직이고 생명은 윤회를 통해서 주기적으로 현현한다.
이상하면서 놀라운 것처럼 보이지만 인간과 모든 생명의 진화의 근간을 이루는 또 다른 사실이 있다. 진화의 낮은 단계에 있는 존재들은 위해서 이미 앞서 간 존재들의 자발적인 희생 없이는 진보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진보는 아무 도움이 없는 바닥에서 솟아나올 수 없다. 마치 식물이 태양의 빛과 따뜻함에 이끌리듯이, 진보란 위로 이끌리는 것이다. 이 주제에 대해서는 제 4장에서 많아 다루었다.
이런 가정을 바탕으로 진화하는 것은 무엇이든 이전에 존재했던 어떤 것으로부터 오며, 이전에 존재했던 그것 속에는 진화하는 씨앗이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지성은 지성에서 와야 한다. 우리가 실수들로부터 배운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지성은 무지에서 올 수 없다. 무지는 유일한 탈출구로써 지식의 탐구를 제시하는 조건을 종종 만든다. 그러나 만약 무지가 지식의 씨앗이라면 우리들 모두는 매우 현명해질 수 있을 것이다.
마치 꽃이 봉오리에서 펼쳐지듯이, 나무가 씨앗 속에 있는 계획으로부터 펼쳐지듯이, 진화란 내면으로부터 펼쳐지는 것이다. 우리의 진화는 모나드 속에 있는, 상위 자아(Higher Self) 속에 있는, 그리고 우주심(Universal Mind) 속에 있는 잠재된 지성, 우리들 속에 씨앗 형태로 갇혀 있는 지성이 펼쳐지는 것이다. 성장은 본질적으로 지성의 표현과 범위가 확장되는 것을 의미한다. 형태의 발전은 내적인 성장의 부산물로 항상 부수적으로 일어나는 것이다.
진화하는 그것은 무엇인가
어떤 사람들은 진화하는 것이 의식이라고 말한다. 신지학에서는 아니라고 말한다. 의식은 항상 존재한다. [씨크릿 독트린] 15p.에서 말하길, “유일의 실재, 절대자(the Absolute)인 파라브라흠(Parabrahm)은 절대 의식의 장이다. 즉, 제한된 존재들과 모든 관계가 없는 그 본질로 의식을 가진 존재가 그 상징이다.” 진화하는 것은 의식이 아니라 의식을 사용하는 것이고, 의식의 범위로 진화하는 지각의 넓이와 폭이다. 진화하는 것은 보편적 형제애라는 사실, 대아의 보편성과 진리를 개개인이 인식하는 것이다. 모든 다른 진화는 이 발전에 달려있다.
우리가 삶의 교훈을 배움에 따라서 표면 밑에 있는 것을 보기 시작하고 모든 존재의 근본적인 단일성을 보여주는 관계를 보기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이런 깨달음이 커져갈수록 우리가 환생해서 들어가는 도구들이 점점 더 섬세해질 것이다. 형태들은 그 자체로 진화하지 못한다. 마치 집이 스스로 커갈 수 없지만, 그것을 사용하려는 사람이 만들었듯이, 마찬가지로 형태들도 자기 표현을 위해서 도구들을 만드는 지성들의 결과이다. 건축가가 지성적이면 지성적일수록, 그 집은 더욱 더 조화롭고 유용하게 된다. 진화하는 지성체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형태들도 마찬가지다. 하나의 집이 다른 집으로 진화할 수 없듯이, 한 가지 형태가 다른 형태로 진화할 수 없다. 형태를 사용하는 존재는 자신의 필요에 맞는 다른 형태를 개발하고 오래된 형태는 그것을 사용할 수 있는 존재들에게 남겨준다. 마치 오래된 집을 그 집에 맞는 다른 사람들에게 넘겨 주듯이.
진화 뒤에 있는 힘은 무엇인가
진화의 힘은 “유일한 생명”인 모나드(Monad) 속에 있다. 그 힘이 진화를 촉진하기 위해서 사용되는 방법은 지성적인 존재에게 달려 있으며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는 존재에게 대부분 달려있다. [씨크릿 독트린 1권] 274p. 에서 그것을 이렇게 설명한다:
우주는 내면에서 밖으로 작용하고 안내된다. 위에서처럼 아래에서도, 하늘에서처럼 땅에서도; 그리고 대우주의 작은 복사본이자 소우주인 인간은 이런 우주 법칙과 그 법칙의 활동 및 방식에 대한 살아있는 증인이다. 전체 대우주는 의식을 가진 존재들—각자 나름 대로 수행할 사명을 가지고 있다—의 무한한 하이어라키에 의해서 안내되고 통제되고 활력을 받는다. 그리고 우리가 그런 존재들을 어떻게 부르던 혹은 그런 존재들을 디얀-쵸한(Dhyan-Chohan)이라고 부르건 천사들이라고 부르건, 모두가 카르마의 법칙과 우주 법칙들의 대리인들이라는 의미에서 “메신져들”이다. 왜냐하면 이 존재들 각각은 현재는 아니지만 과거에 인간이었거나 다가오는 미래에(만반타라) 인간이 되기 위해서 준비하고 있다.
만약 처음의 안내를 따른다면 아마도 우리를 위해서 자동적으로 진화하는 것은 큰 가치가 없다는 것에 동의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생명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개념에도 들어맞지 않는다. [씨크릿 독트린]의 세 번째 명제에서 말하길: “ 비전철학의 중추적인 가르침에서는 인간에게 어떤 특권이나 특별한 선물을 인정하지 않는다. 단지 오랜 기간 동안의 변형과 환생 동안 내내 스스로의 노력과 과실을 통해서 자신의 자아(Ego)가 얻어낸 것들을 제외하고는 어떤 것도 인정하지 않는다.” 우리들의 모든 진화는 카르마에 의해서 제약을 받으면서 “자기 자신이 스스로 유도하고 만들어낸 노력들”의 산물이다. 이것이 무슨 의미인가?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우주의 유일한 “선택자”인 인간은 카르마의 영향을 만들고 느끼는 자라는 의미이다. 즉 인간은 자신의 진화 과정을 결정하는 방식으로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한다는 것이다. 생명의 개별 단위 속에, 인간 개개인 속에 배울 수 있는 무한한 힘이 있다. 이 힘은 변하지 않고 아무리 많이 사용하더라도 줄어들지 않는다. 존재들은 생명의 단위들로 자신들 속에 내재하고 있는 그 힘을 사용한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성장하거나 진화한다. 예를 들면, 한 사람이 어떤 것을 배운다. 그는 자신 속에 내재하고 있는 배움의 힘을 사용함으로써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 힘은 사용하더라도 변하거나 줄어들지 않는다. 여전히 이용가능하고 그렇게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의 지성을 증대시켜 왔다. 그 지성을 사용할 수 있는 능력과 같이. 그리고 그렇게 사용하기 위해서 지성을 한층 더 완전하게 했다는 것도 주목해야 한다. 자신 속에 있는 그 “변하지 않는” 것 때문에 변화를 볼 수 있고 말할 수 있으며 이렇게 해서 경험과 지식을 쌓게 되는 것이다. 변하지 않는 것은 변화가 가능한 것에 토대가 항상 된다.
진화는 언제 시작했고 왜 진화과정을 경험해야 하는가
진화는 생명이 그렇듯이 시작도 끝도 없다. [신지학의 대양]에서 졋지 씨가 말하길:
인간이 이 지구에 언제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있을지 모르나 인간의 궁극적인 기원 혹은 시작은 찾을 수 없다. 인간은 결코 존재하지 않았던 적이 없다. 이 지구 상은 아니더라도 어떤 다른 구체(지구 같은 별)에서 언제나 존재했으며, 대우주의 어딘가에서 항상 존재할 것이다. 천상의 인간(Heavenly Man)의 이미지를 완성시켜가며 거기에 도달하기 위해서 인간은 항상 되어간다(becoming).
“시작”과 “끝”이라는 말은 생명의 표현에 쓸 수 있지만, 생명 그 자체에는 아니다. 생명은 진화하지도 성장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진화하는 힘이고 진화자이다. 진화가 진행되는 것은 생명 때문이다. 자연의 모든 다른 과정처럼, 진화는 이전 장에서 언급한 주기의 법칙에 따라서 진행된다. 진화의 주기는 시작과 끝이 있다. 그리고 현재 진화 주기도 시작했고 끝나게 될 것이다. 우리의 지구는 지성체들의 집합체이며 다른 육체처럼 죽음과 윤회를 할 것이다. 인류라고 불려지는 인간의 집합이 다른 지구들에 있던 때가 있었으며, 마지막으로 있던 죽어가는 행성이 달이다. 그리고 카르마를 통해서 오래된 육체가 그 용도를 다하면 새로운 육체를 만드는 것과 마찬가지로, 존재들의 집합체도 그 수확을 흡수하기 위해서 일정 기간 동안 오래된 행성에서 물러나서 에너지 센터들을 내보내고, 그것들은 결국에 나중에 더 심오한 진화를 위해서 새롭고 보다 나은 집을 만들게 된다. 그렇다면 진화에는 끝이 있을까? 배울 힘이 무한한데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만약 우리가 본질적으로 완전하다면, 왜 우리는 진화과정을 경험해야 하는가?
우리가 진화를 경험하고, 진리로 돌아가기 위해서 실수를 경험해야 하는 두 가지 좋은 이유가 있다. 자아(Ego)는 기본적으로 혹은 근본적으로 완전하다. 아니 본질적으로 완전하다고 하는 표현이 더 맞는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잠재적인 면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실제 완전성을 얻기 위해서는 삶 속에서 그것을 증명해야 하고, 분리심 및 이기심과 대면해서 형제애를 증명해야 한다. 그는 자신의 가장 내면의 존재의 일부분인 진리들을 실제 증명해야 한다. 그는 불협화음에서 화음으로 바뀌어야 한다. 이것에 대해서, [씨크릿 독트린]에서 말한다: “완전하게 깨어있는 신성한 신이 되기 위해서 아니 심지어 가장 높은 신이 되기 위해서 태초의 영적인 지성적인 존재들(INTELLIGENCES)은 인간의 단계를 지나가야 한다고 가르침은 말한다. 개별 존재는 스스로의 경험을 통해서 자기 스스로 신성하게 될 권리를 얻어야 한다.” 그리고 H.P.B.는 II권에서 같은 주제에 대하여 어느 정도 도발적인 말을 한다: “투쟁이 없는 곳에는 성과도 없다. 완전하게 되는 것은 불완전한 것에서 태어나야 한다. 불멸적인 것은 부패해서 사라지는 것에서 자라나야 한다. 그리고 후자는 매개체이자 토대가 된다.”
이것이 첫 번째 이유다. 진화는 인간에게 신성이라는 힘들을 자신의 개체성 속에서 만들 수 있도록 기회를 주는 것이고, 의식적인 신성한 상태(god-hood)의 위업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다. 두 번째 이유는 진화는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도구(육체 등)들을 구성하는 의식의 점들 혹은 생명체들에게 도움을 주어서 그들 자신의 진화의 사다리를 올라갈 기회를 주도록 한다. 이해하겠지만, 일반적인 생각과는 반대로 “낮은 생명체들”의 진보는 인간의 행동들에 달려 있고, 우리가 영적인 인식을 얻음에 따라, 대자연을 구성하는 지성체들도 그런 인식을 표현할 수 있는 능력과 세련됨을 얻게 된다. 우리가 생명의 법칙들에 대한 이해도가 커감에 따라서 진화의 대계획 속에 있는 다른 존재들을 도와줄 수 있는 위치를 더욱 명확하게 보게 된다는 것이 흥미롭다. 그리고 다른 존재들을 도와줌에 따라서 생명의 법칙들에 대한 더 많은 통찰력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물질적 진화와 영적 진화는 같은 것인가
[씨크릿 독트린]에서 말하길, “대자연 속에 삼중 구조의 진화 계획 속에 진화의 세 가지 계획들이 존재한다는 것이 이제는 명백해졌다. 그리고 그것들은 우리 태양계 속 모든 지점에서 풀 수 없을 정도로 상호 연결되어 서로 겹쳐져 있다. 그것들은 모나드(혹은 영적인) 진화, 지성적인 진화 그리고 물질적인 진화이다.” 물론 모나드는 변하지 않지만 다른 두 갈래의 진화가 진보함에 따라서 점점 더 높은 차원의 활동 단계들을 나타낸다는 의미에서 모나드도 진보한다. 지성은 인간에게 지성과 의식을 준 마나사-디야니스(Manasa-Dhyanis)들을 나타낸다. 그리고 물질의 진화는 육체의 성장 및 완성과 관계된 진화이다. H.P.B.가 계속해서 말하길, “이 세 가지 흐름 각각은 나름 대로의 법칙들을 가지고 있으며 서로 다른 최고의 디야니스 혹은 로고스들(Logoi)에 의해서 안내되고 통치되고 있다. 각각은 위대한 대우주의 소우주인 인간의 구성 요소 속에서 나타난다. 그리고 이 세 가지 흐름들이 서로 합쳐져 있기 때문에 현재의 인간이 그렇게 복잡한 존재가 된 것이다.”
진화의 과정은 무엇인가
모나드 라는 용어처럼 진화라는 용어도 과학과 철학 분야에서 신지학에 의해서 채택되었지만, 또 다른 용어에 친숙해짐으로써 진화에 대한 신지학의 가르침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즉, 발산 혹은 방사(emanation)라는 용어이다. 신지학 용어집에서, H.P.B.는 “발산(혹은 방사)의 가르침을 말한다:
발산의 가르침은 한 때는 보편적이었다. 그 가르침은 인도인들과 알렉산드리아인들, 이집트 철학자들, 칼데아인들 그리고 고대 그리스 사제들과 히브리 사람들 사이에서 가르쳐졌다. 진화론자들은 “불가지 존재(the Unknowable)”의 경계에서 모든 질문들을 멈춘다. 발산론자들은 그 어떤 것도 먼저 내적으로 연관되지 않고는 겉으로 나올 수 없다고 혹은 그 말이 의미하듯이 태어나올 수 없다고 믿는다. 그리고 이것은 생명은 무엇보다도 영적인 잠재성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암시한다.
발산(emanation)이란 생명(LIFE)이 최고 상태인 합일(UNITY)에서 점점 더 분화되어 가장 낮은 세계인 물질계에 도달할 때까지 지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실제 진화는 하강(involution)에서 시작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거대한 구조나 조직의 두뇌가 그것과 연결된 모든 것을 자극시키고 활력을 주고 안내하는 것처럼, 생명, 영(Spirit), 지성은 먼저 물질 속에 말려들어야 한다. 모든 진화는 두 가지 근원에 의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첫째, 불가지자(Unknowable)에 대한 영원하고 아무런 제한이 없는 잠재적인 진리이고, 둘째, 어두운 시간에서부터 축적된 인류의 지식과 진보이다. 첫째는 “영원히 되어가는(ever becoming)” 무한한 잠재성이고, 둘째는 그 속에 있는 인종과 단위들의 진보 혹은 한계이다. 물론 이것은 우리가 아는 인류뿐만 아니라 우리 지구의 진화와 연결되어 있는 모든 진보한 혼들도 다 포함한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우리는 대자연 속에서 규칙적인 변화를 본다. 즉, 깨어나고 잠들고, 낮과 밤, 활동과 휴식, 그리고 생명과 죽음. 그러므로 우리들에게는 존재라는 깨어나서 활동하는 날이 있고, 잠자는 휴식이라는 밤이 있다. 보편적인 생명은 형태의 우주로 흘러 들어가서 형체가 없는 무체(No-Thing)로 되돌아간다. 그것은 영원하고 보이지 않지만 편재하는 유일 생명의 주기적인 들숨과 날숨이다.
활동하는 기간은 만반타라(Manvantara)이고, 휴식하는 기간은 프랄라야(Pralaya)이며, 이것들은 끊임없이 연속하여 일어난다. 분화의 “새벽”은 만반타라의 새벽이고, 주기가 프랄라야와 함께 끝날 때까지 끝없는 진화의 시작이다. [씨크릿 독트린]에서 만반타라 주기의 시작을 어렵지만 간략하게 제시한다:
우주개념(Cosmic ideation) 혹은 우주심(Universal Mind)이 다시 깨어나면서 미분화된 프랄라야 상태에서 우주 물질(Cosmic Substance)의 시초 출현과 동시에 만반타라의 충동이 시작된다. 만반타라 기간 동안 우주 물질은 우주심의 도구이다. 그러면 절대적 지혜는 자신을 우주 개념 속에 반영하고 그 결과로 우주 에너지(포하트(Fohat))가 나타나며, 포하트는 우주 개념이 활동하도록 자극하여 우주 의식의 일 곱 세계에서 시초의 분화를 안내하게 된다.
[신지학의 대양]에서 졋지 씨는 이것을 한 단계 나아가 설명한다:
제아무리 높은 정신을 가진 인간이 탐구한다 해도 탐구가 불가능한 미지의 존재에서 우주가 진화해 나오고, 그 우주는 일곱 계 혹은 모든 세계에서 일곱 가지 방식으로 진화해 간다. 우리의 지식은 분화와 함께 시작되며, 현현한 모든 것들, 존재들 혹은 힘들은 “거대한 미지의 존재”의 분화에 불과하다. 시간적 의미의 첫 번째 분화는 ‘영(Spirit)’이고, 그것과 함께 물질과 마인드가 나타난다. 아캬샤는 물질과 영으로부터 생겨나고, 의지는 영의 힘이 활동하는 것이고, 생명은 영에 의해서 물질 위를 움직이는 아캬샤 활동의 결과이다.
마인드는 우주의 지성적인 부분이며, 위에서 개략적으로 설명할 일곱 가지 세계들 속에 우주의 계획이 찍혀서 담겨있다. 하나의 세계 혹은 여러 세계가 모여서 만들어진 더 큰 하나의 시스템이 진화해 갈 때마다, 계획이 우주심 안에 세워져 있으며, 원초적인 힘은 영으로부터 오고, 그 토대는 보이지 않는 물질이다. 그리고 대생명은 생명을 필요로 하는 모든 형태들을 유지해 준다. 또한 아카샤는 물질과 영-마인드 사이를 연결시켜주는 고리이다.
라운드와 인종들은 무엇인가
인류라고 알고 있는 “생명의 파도(Life Wave)”는 라운드(Round)라고 알려진 일련의 일곱 가지 진보 단계를 경험하는 과정 속에 있다. 그리고 각각의 라운드는 일곱 인종으로 나누어지고 각각의 인종은 일곱 아인종으로 나누어진다. 약간만 계산 해보면 거의 끝없이 많은 숫자들의 조합에 도달할 것이다. 일단 라운드와 인종 그리고 아인종이 인간의 칠중 구조에 상응하는 나름대로의 독특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면, 결과로 일어나는 다양한 조합들과 진화와 교육을 위해 필요한 독특한 조건들의 중요성을 이해하기 시작할 것이다. 생명의 목적은 배우는 것이고 이런 체계가 진화하는 혼을 위해서 가장 다양한 경험들을 제공해 준다.
다른 관점에서 졋지 씨가 [신지학의 대양]에서 설명한다.
앞 페이지에서 개략적으로 설명한 내용과 마찬가지로 지구도 칠중 구조이다. 그것은 하나의 실체이며 단순한 물질 덩어리가 아니다. 이와 같이 지구는 칠중 구조를 가진 하나의 실체이기 때문에, 공간 속에서 함께 회전하는 다른 여섯 개의 구체(球體)가 있다. 이 일곱 구체(球體)를 “지구 체인” 혹은 “혹성 체인”이라고 부른다. 지구는 인간의 의식 상태에 따라서만 일곱 구체 중에 하나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일곱 개중에 어떤 한 구체에서 활동할 때, 그는 그것을 뚜렷이 구별되는 하나의 구체로 인식하고 나머지 여섯 개는 인식하지 못한다. 이것이 바로 다른 여섯 본질을 가지고 있는 인간 자신과 완전히 일치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네 번째 구체인 지구에서 활동하고 있고, 그의 육체는 지구를 나타내기 때문에 자신의 육체만이 보일 뿐이다. 일곱 구체 전체는 하나의 덩어리 혹은 거대한 구체로 상호 침투해 있다.
편의상 이 구체들을 A, B, C, D, E, F, G 라고 부르자. 생명의 파도인 진화의 충동은 A에서 시작되고, 오랜 발전 기간이 지난 후에 B라는 다른 물질 상태 속에서 경험할 준비가 된다. 그렇게 생명의 파도는 가장 조밀한 물질인 D를 경험하고 점점 더 미세한 구체인 G까지 경험하면서 일곱 구체를 지나간다. 그런 후에 계속 하기 전에 활동의 휴식기인 프랄라야가 있다. 이렇게 일곱 구체를 지나가는 것을 하나의 라운드라고 부른다. 일곱 라운드는 하나의 행성 주기(Planetary Cycle)를 이루며 그 후에 행성 프랄라야(Planetary Pralaya)가 있다.
앞에서 말한 다양한 경험을 하기 위해서 각각의 구체는 해당하는 물질 상태에 적합한 일곱 인종들과 감각들, 능력들 그리고 힘들을 개발하기 위해서 필요한 환경을 제공해 준다. [신지학의 대양]에서 말했듯이, “라운드는 혹성의식의 일곱 센타를 순환하는 것이다. 인종은 일곱 구체 중의 하나에서 인종의 발전을 이루는 것이다. 각 구체에는 일곱 인종이 있으며, 총 49 아인종들이 일곱 근본 인종을 형성하게 되고, 각 구체에서 진화하는 일곱 인종들은 사실상 일곱 가지의 구성요소 혹은 일곱 가지의 독특한 기능이나 힘을 가진 하나의 인종이다.”
이런 진화 계획에서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이런 경험의 다양성을 한층 깊게 하기 위해서 각각의 인종은 일곱 아인종을 가지고, 각각의 아인종은 거의 무한한 경험의 가능성을 제공하는 일곱 가족-인종(family-race)을 가진다. 우리는 현재 제 4라운드의 제 4근원인종의 제5 아인종에 있다고 한다. 이제 상응의 법칙을 이용하면, 다섯 번째 계가 마나스에 상응하며 네 번째는 카마 혹은 욕망에 대응된다는 것을 안다. 그러면 현재의 경험은 욕망에 바탕을 둔 정신적, 지성적, 이성적인 활동을 강하게 하는 것 중에 하나라고 추론해 볼 수 있다.
주기들이 상호 교차한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지구 상에 오래된 인종들과 이인종들의 잔여물이 있다고 철학에서 제시한 사상을 받아들일 수 있다. 이것들은 다양한 상태로 분해되고 있으며 어떤 것들은 역사상 기억 속에서 완전히 사라졌을 것이다. 한편 우리를 앞서서 출현하는 미래 인종들과 아인종들인 선구자 인종들이 있다. 이 점에 대해서, 졋지 씨가 [신지학의 대양]에서 말한다: “아메리카에서 새로운 인종 즉 제 6인종이 진화할 것이라고 분명하게 가르침을 받았으며, 지구상의 모든 인종들은 지금 거대한 통합의 시기에 있으며, 그 결과로 고도로 발달한 아인종이 나타나게 될 것이고, 새로운 인종이 완성될 때까지 다른 인종들도 비슷한 과정에 의해서 진화할 것이다.”그러나 여전히 의문은 남는다.
인간이 어떻게 해서 오늘날의 인간이 되었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세 가지로 구분되는 진화의 계획의 발전을 따라 올라가서, 자의식적이고 사고하는 인간을 형성하기 위해서 그것들이 뭉쳐진 것을 추적해야 한다. 모든 진화의 바탕으로써 잠재하고 있는 모나드가 점진적으로 개화된다. 그것의 진화 여행은 영적인 것으로부터 응축되어 있고 조건이 있는 물질 속으로 들어가서 다시 영적인 상태로 되돌아 가는데, 그런 과정 속에서 경험을 획득해서 가져간다. 이것은 이전 “지구들”로부터 넘어온 패턴들의 토대 위에 세워진, 초기 라운드에서 시작된 형태의 진화라는 두 번째 계획 속에 있다. 개개인들로써 우리들은 우리 자신들로부터 물려받기 때문에, 이전 환생에서 얻었던 것들을 따라서 형성된 패턴이 있는 체들과 두뇌들 그리고 성향들 속에 있는 우리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전체 인류도 이전 만반타라가 끝날 무렵까지 개발할 수 있었던 최상을 나타내는 형태들과 능력들 속에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매개체의 초기 진화와 발전은 대체적으로 자동적이기 때문에, 지구에서의 초기 진화는 영적인 부모들의 도움을 받아서 대자연의 힘들에 의해서 수행되었다. 영적인 부모들의 임무는 우리가 계속 진화할 수 있도록 이전에 남겨놓은 것보다 좀 더 나은 형태를 만드는 것이다. [신지학의 대양]에서 말하길,
이 시점이 바로 정신으로부터 간섭과 지성적인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점이다. 그런 도움과 간섭은 있었고 사실이다. 왜냐하면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한 대자연은 일을 올바르게 할 수 없다. 그러나 신(God)이나 천사가 간섭해서 도와 주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일을 한 것은 인간이다. 오늘 날의 인간처럼 약하고 무지한 인간이 아니라, 엄청난 힘과 지식 그리고 지혜를 가진 신성하고 고귀한 위대한 혼들이다.
바로 이 시점에서 진화의 세 번째 측면, 즉 자의식적이며 사고하는 인간 자신을 소개해야만 한다. [씨크릿 독트린]에서 말하길, “인간은 분명히 어떤 특별한 창조물이 아니라, 지구 상에 살고 있는 다른 단위처럼 대자연의 점진적인 완전한 작품이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인간의 육체에 관한 것이다. 인간 속에서 생각하고 살고 있으며 진화의 걸작인 육체가 죽은 후에도 살고 있는 그것은 “영원의 순례자(Eternal Pilgrim)”로 알 수 없는 유일의 절대자가 시간과 공간 속에서 분화된 존재이다.
우리의 진화 주기인 전체 일곱 라운드에서 현재 위치는 중간 지점으로, 인간의 하위 네 가지를 구성하는 육체의 진화는 인간의 정신의 도움 없이는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그러므로 그들의 성장은 지금까지 연관된 하위 지성체들에 의해서 준비된 무대에 들어선 자의식적인 인간이 주는 자극과 방향에 달려 있는 유도된 성장이고 그렇게 될 것이다.
아트마(Atma)와 붓디(Buddhi)인 모나드는 형체들 위해서 내려다 보고 “자기가 만들고 유도한” 행동들 속에서 그 형체들과 합쳐질 때까지 더 이상의 확장의 힘을 경험할 수 있다. 필요한 것은 두 개를 연결시키고 “천상의 인간(Heavenly Man)”을 완성시키며 인류의 진화의 또 다른 주기를 시작할 수 있는 인간의 자아(Ego)와 정신 사이에 연결고리이다. 이것이 제 4라운드의 제 3근원인종의 중간지점이고 우리의 진화에서 희생이 우리 존재의 필수 불가결한 부분이 되는 곳이다. 크로스비 씨는 [보편 신지학(Universal Theosophy)]에서 말하길, “진정한 가르침은 영적인 존재로써 인간 자신이 영계 혹은 영적인 자의식 상태에서 물질의 모든 응집단계들을 거쳐서 한 단계 한 단계 내려오는 것이다. 그리고 하위 왕국들로부터 올라오는 형태의 상승 파도를 만나고, 모든 형태 중에 가장 완전한 형태가 최고의 발전 단계까지 개발되었을 때, 그 형태 속으로 들어간다. 그 “보이지 않는” 인간이 물질적인 도구 속으로 들어가기 전까지 인류는 존재할 수 없다.” 혼은 우주의 하위 생명을 흡수하고 영성화시키면서 시대가 흘러가면서 힘이 자라나는 것이다.
인간에게 정신의 불을 준 것이 바로 프로메데우스의 이야기로 인류 자신의 이야기이다. 신성하며 윤회하는 자아를 나타내는 프로메데우스 신은 지금까지 정신이 존재하지 않던 형태들 속에서 사고하는 능력을 일깨우기 위해서 정신의 불을 훔쳤다. 그러나 정신적인 암흑으로부터 구원하였지만, 자의식을 가짐으로써 수반되는 모든 고통들도 인간에게 가져왔다; 전체 자연에 대한 책임과 관련된 지식; 과거에 잘못된 선택을 해서 오는 고통의 결과들; 생각하는 인간에게 오는 모든 비애들과 고통들. 프로메데우스는 법칙 하에서 이런 고통들이 불가결하다고 받아들였고 혼은 기꺼이 가격을 지불하고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만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씨크릿 독트린 II]에서 H.P.B.는 가장 신비스러우며 호기심을 자극하는 우리 인류의 역사를 이런 식으로 제시한다:
씨크릭 독트린에서 가르치길, “불의 데봐들(Fire-Devas),” “루드라들(Rudras),” 그리고 “쿠마라들(Kumaras),” “처녀-천사들(Virgin-Angels)”1은 존재들(자신의 형제들에게서 나온 그림자들)의 비참함을 보는 것보다 환생의 저주(curse of incarnation)와 지상의 존재 및 재탄생의 긴 주기를 선택했다. 그래서 전통 속에서 처음에는 완전하고 신과 같은 존재로 창조된 인류를 구원하고 인류에게 인간적인 애정과 열망들을 넣어주기 위해서 자신들을 자발적인 희생물로 바치는 천상의 요기들(Yogis)을 보게 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그들은 자신들의 자연적인 지위를 포기하고, 지구로 내려와서 마하유가(Mahayuga) 전체 주기 동안 지구 상에서 거주해야 하는데, 이것은 그들의 존재의 지복을 지구상에서의 삶의 저주로 교환하는 것이다.
이것이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이다. 그러나 모든 문명들과 위대한 가르침들 속에서 한 두 가지 형태로 발견한다. 육체적으로는 완성의 상태에 도달했지만 정신의 원리에는 빛을 붙일 수 없는 형태들 속에 잠재하고 있는 마나스들에 불을 붙이는 데 정신과 자유 의지를 가진 인간이 필요하다. 이것은 위로부터 이루어져야 하고 이미 빛을 가지고 있는 누가 형태들 속으로 환생, 즉 희생해야 하고, 자신들의 정신과 정신이 없지만 잠재하고 있는 마나스 원리를 융합시킴으로써 대자연의 하위 생명들과 함께 자의식적인 신성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장구한 진화의 행진을 시작하게 된다. 이것이 4장에서 설명한 “마나스에 불을 붙이다.”라는 주제의 이야기 이다. 이것은 우리 각자의 이야기이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대자연과 계획들을 수행하는 “달의 아버지들(Lunar Pitris)”에 의해서 만들어진 체들 속에서 환생하고 있는 “태양의 아버지들(Solar Pitris)”들이기 때문이다.
http://blog.naver.com/challngr/60026257658
제1장 도입
이 책을 쓰게 된 데에는 세 가지 바램이 있었다. 첫째로는 유물론적 또는 현상계의 심리학과 내성적 또는 내면계의 심리학을 결합시키려는 바램이고, 둘째로는 과거의 과학적 심리학을 인류의 사고와 인류의 심리학이라는 더 넓은 영역에서 보기 때문에 물질주의적인 서양과 내성적인 동양을 조화시키려는 바램이고 마지막으로 이들이 대립하는 것이 한 가지 진리의 여러 국면들이며, 이들이 함께 하나의 현실을 구성한다는 것을 제시하고 싶은 바램이다.
이 바램들은 현재 세계적으로 심리학적 교육 수준에서 나오고 있다. 오늘날 지배적인 심리학의 형태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철학의 저택들The Mansions of Philosophy”에서 윌 듀런트가 잘 요약하고 있다.
“우리가 본 것처럼 사람을 연구하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하나는 환경과 더불어 외부에서 시작하여, 적응 메카니즘으로 사람을 설명한다. 그것은 사상을 사물로, ‘마음’을 ‘물질’로 환원하고 스펜서의 변장한 유물론과 왓슨의 행동주의로 귀결한다... 또 다른 방식은 내면에서 시작한다. 그것은 환경을 연구하고 사용하고 정복하려는 필요, 충동 그리고 욕망 체계로 사람을 본다. 그것은 사물을 사상으로, 물질을 마음으로 환원하기를 좋아할 것이다. 그것은 (내면의 목적이 모든 형태를 결정한다고 주장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엔텔레키(질료가 형태를 얻어 완성하는 현실)’와 더불어 시작하고 베르그송의 생기론Vitalism과 윌리엄 제임스의 실용주의로 귀결한다.” 윌 듀런트, 철학의 저택, p. 257
W. B. 필스베리는 이 이중적인 체계는 불필요하게 중복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행동주의적 이론을 취하면, 우리는 두 가지 심리학, 즉 내적 심리학과 외적 심리학을, 다시 말해 외부로부터 고찰한 심리학과 내부로부터 고찰한 심리학을 연구해야 한다. 이것은 기껏해야 불필요한 혼란을 일으키는 것으로 생각된다.” 필스베리, W. B. 박사, 철학사, p. 298.
이 중복된 상황을 인식하면서, 그리고 두 가지 노선의 해석이 불필요하다는 필스베리 박사에 동의하면서 나는 두 가지가 제 삼의 단일한 것으로 융합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확신한다. 그래서 나는 기계론적 학파의 정당성과 마찬가지로 내성주의적 학파의 입장도 정당하다는 것을 입증하는 가정을 제시하려고 노력하고 있으며, 두 학파 모두 사실들을 통일적으로 설명할 필요가 있다는 것과 각 학파는 진정으로 상대 학파를 보완해 준다는 것을 보이려고 한다. 그런다면 서양의 정확한 지식과 동양의 내성적인 지혜에 기초하는 제 삼의 합성 학파가 세워질 수도 있다.
이들 두 심리학파를 고려해 보면, 현대 심리학이 대부분 물질주의적이면서 매우 대중적인 학파라는 것이 분명하다. 유럽과 미국의 많고 다양한 학파에서 나온 심리학에 대한 최근의 책들을 연구하면, 대다수가 행동주의 학파의 기계론 철학을 승인 또는 거부하는 데에 주된 관심을 두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만약 그렇지 않는 경우라면 또 다른 형태의 물질주의적 심리학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볼프강 쾰러는 게슈탈트 심리학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한때는 어떤 태도를, 이후에는 또 다른 태도를 취해야 한다고 느끼는 것이 세속인의 믿음이다. 또한 대부분 어떤 특별한 상황에서는 한 가지를 하고 이어지는 다른 상황 아래에서는 분명히 다른 일을 하는 성향이 있는 이유를 그는 직접 알고 이해한다. 그의 관점에서 보면, 그는 동적인 맥락, 즉 정신적인 삶을 구성하는 발전 과정에서 진실로 많은 것을 경험하고 있다. 이 믿음에 반해서 그리고 그와 완전히 이질적으로 현재 매우 학식있는 심리학자의 관점들이 제시되어 있다. 그들의 관점에서 보면, 사람은 어떤 때는 이 일을 하지만 다른 때는 다른 것을 하는 성향이 있다. 왜냐하면 첫 번째 경우에는 어떤 신경 경로들이 활기를 띄는 것이고, 두 번째 경우에는 다른 경로들이 열리기 때문이다. 다행스럽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실제로 투과성이 좋은 경로들을 지니고 있다!” 볼프강 쾰러, 게슈탈트 심리학, p. 349.
그러나 모든 것이 혼란스러운 상태에 있고, 윌 듀런트가 말했던 것처럼 “심리학은 인간의 행동과 욕망에 대한 이해를 시작하지도 못한 상태이며, 조절할 수 있는 것도 거의 없다. 거기에는 신비주의와 형이상학이 뒤섞여 있으며, 정신분석, 행동주의, 성적인 신화와 사춘기 질병이 혼합되어 있다.” 윌 듀런트, 철학의 저택, p. 376.
심리학은 신경이건 원자 또는 생기이건 에너지, 힘, 에테르 파동, 그리고 전류와 전하, 리비도라고 하는 심리학자들의 자유 부동력(freely floating force)이라는 단어들로 위엄을 갖춘 불가시적인 경계 지대에서 방황하고 있다. 모든 과학들은 규정할 수 없는 영역에 있는 이와 같은 비인간의 거주처로 수렴되는 것처럼 보인다. 장막이 들어 올려지면 인간의 꿈과 열망으로 이루어진 약속의 땅이 우리에게 드러날 것이다. 불확실성과 기대감은 현대 과학의 확실성과 냉엄한 사실들과 평행을 이루고 있다. 그것은 마치 인류가 우주적인 무대에 드리워져 있는 커튼 앞에 서서 지성적으로 참여하기 위해 다음 막을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서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인류가 오랜 과거를 지녀서 많은 경험을 얻고 지식을 축적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완전히 기대하지 않았던 계시와 발전에 참여하기 위해 부름을 받았을 수도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러기에는 현재의 삶의 장치와 이해가 부적절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 동안 이 우주적인 무대에서, 그리고 다양한 노선들을 통한 진리에로의 접근 과정에서 사람들은 과학에 의해 알려진 사실들을 정비해 왔고, 향후 가능한 발전을 찾아내고 있으며, 옳은지 그른지 실험과 시험을 할만한 가정에 서서 많은 분야에서 활동을 진전시키고 있다. 인간 지식의 모든 분야의 학도들을 위해 어떤 마음가짐을 갖어야 하는지를 지적하면서 버트란트 러셀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믿으려는 의지가 아니라 정확히 반대가 되는, 발견하고자 하는 소망이다.” 버트란트 러셀, 회의적인 에세이, p.157.
오늘날의 이러한 과학적 상황에 대처하는 가장 좋은 자세는 회의론적인 것과, 불가지론적인 것이겠지만 단호하고 공정하게 탐구하면서 의문을 갖지만, 가정된 사실들이 증거에 유효하다고 증명되는 때 기꺼이 확신하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열린 마음 가짐으로, 편견없는 다수의 공식화된 진실에서만 하나의 진리가 알려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소심한 소인배만이 신념이 없고atheistical, 독단적이고, 파괴적인 비판을 일삼으며, 빛이 되돌아 오고, 새날이 밝아올 때 꼼짝하지 않는다.
이 탐구, 물음, 과학적인 태도와 연구는 특별히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지식분야지만, 아직도 진정한 과학적 연구 분야로 들어 가고 있는 중인 가장 신생의 심리학에 적절하다. 더 많은 것이 알려질 때까지 의견을 보류하여 특별한 학파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전체로서 이 분야를 고찰할 때에만, 탐구자는 시야가 제한되어 고립된 관점으로만 보고 자신이 놓여 있는 광경을 보지 못해서 완전한 단위를 이루지 못한 단편들과 사소함만을 다루는 위험을 회피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 시기의 가장 바람직한 징후들 중 하나는 동양적 관점에 대한 이해와 이를 연구하려는 경향이 자라고 있는 것이다. 지구의 동쪽과 서쪽은 대단히 다르고 진리에 이르는 접근법이 다르기 때문에 학도들은 최근에서야 비로소 그들의 기본적인 통일성의 가능성을 숙고하게 되었으며, 사람과 그 환경에 대한 새로운 견해가 삶의 동양적 해석과 서양적 해석의 융합으로부터 출현하게 될 것이다. 낡은 해석들은 사라지게 될 것이고, 고대의 진실이 수립될 것이다. 낡은 오해는 오류로 인식될 것이지만, 현실은 보다 분명한 빛과 아름다움을 발할 것이다. 서양인들에게 매우 익숙한 구조의 이해에 기초해서 이들이 지닌 것과는 다른 과학, 사상 그리고 추론이 결합되고, 구조를 움직이고 이끌어가는, 동양에서는 친숙한 에너지 또는 영혼의 이해에 기초하는 새로운 심리학이 나타날 것이다. 구조와 동력은 적대적이지 않고, 서로 의존하고 있다. 그들은 본질적인 통일을 이루고 있다.
서양 심리학은 우선 구조에, 즉 확인할 수 있는 객관적인 우주, 그리고 그 세계에 대한 사람의 객관적 반응에 관심을 갖는다. 그것은 사람을 활동하는 육체로 다루고, 자연의 역학mechanics과 인간이 사용하는 도구를 강조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역학이며, 시험과 실험을 할 수 있는 것만을 다룬다. 그것은 몸을 연구하여 감정과 정신력을 설명하고, 이른바 혼에 대해서도 몸으로 설명한다. eb런트는 이러한 태도를 다음과 같은 말로 지적하고 있다. “자아 또는 혼에 대해서 말하자면, 그것은 유전적인 성격과 획득된 유기체의 경험의 총합일뿐이다.” 윌 듀런트, 철학의 저택, p.75.
이것은 다양한 유형과 기질을 메카니즘으로 설명한다. 루이스 버먼은 자신의 흥미있는 책에서 이 입장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인간에 대한 가장 값진 지식은 그가 내분비선으로 이루어진 생물이라는 것이다. 즉, 특이한 유기체로서 인간은 구성 부분들을 조절하는 많은 세포 공장의 산물, 부산물이다. 이것은 마치 자동차 공장의 부서들이 차의 부품들을 만드는 것과 같다. 이 화학 공장들은 세포로 구성되어 있고, 몸을 구성하는 다른 세포들에 작용하는 특별한 물질들을 만들어서 이른바 생명이라는 무수한 과정들을 조절하고 결정한다. 생명, 몸 그리고 혼은 조용한 화학 공정에서 이루어지는 신비한 분비물의 활동에서 출현하는데, 이것은 주석염의 용액에서 시작되는 화학 반응에서 전류에 의해 주석 결정수가 나오는 것과 동일하다.
사람은 내분비선에 의해 조절된다. 5만년 동안 사람은 자신을 정의하고 알려는 노력을 해 온 뒤에 1920년대에 진입해서야, 위의 사실을 자신에 대한 진실로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이것은 심오한 결론이지만, 많은 사실에 의해 지지받는 분명한 결론일 뿐이다.” 루이스 버먼 의학박사, 개성을 조절하는 분비선들, p. 26.
서양 심리학은 물리적인 것과 가시적인 것을 강조하며, 선택하는 분야가 과학적이다. 그것은 환상적인 신비가의 태만하고 몽상적인 추측을 체질적으로 싫어한다. 그러한 노력의 결과로 사람과 그 행동 그리고 자질에 대한 진실을 효과적으로 구현하는 사실들에서 몸을 분리시켜 버렸다. 이 지식은 더 섬세한 인종에게 작용할 수 있는 메카니즘을 만드는 데에 매우 가치있는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보다 극단적인 학파들의 경우에 서양 심리학은 육체의 세포와 기관들의 작용에 감정, 사고 그리고 활동을 모두 연관시키기 때문에 매우 결정론적이다. 그러므로 자유 의지는 주로 유기체, 신경 장치, 그리고 내분비계에 의해 지배된다. 다음의 인용은 이러한 태도를 보여 주고 있다.
“‘행동주의자의 관점에서 본 심리학’에서 왓슨은 ‘감정은 전체적으로는 몸의 메카니즘이지만, 부분적으로는 내장과 분비계의 큰 변화를 포함하는 유전 유형 반응pattern-reaction’(p.195)이라는 점과 ‘생각은 언어 메카니즘의 움직임’(페이지 316)이라는 점, 그리고 ‘고도로 통합된 육체적 활동일뿐’(p. 325)이라는 점을 가르치려고 했다. 또한 그는 ‘우리가 내재적인 육체 과정을 연구하는 경우에 생각을 연구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따르면 왓슨은 대뇌 피질의 해당 부위에서 일어나는 활동과 사고를 동일시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언어 활동을 할 때 음성 도구, 횡경막, 손, 손가락, 눈의 움직임 등, 말하고, 쓰고, 동작하는 것과 명시적으로 묵시적으로 관련되는 모든 육체 과정과 동일시한 것이다.(p. 324). 머톤 프린스, 1925년의 심리학, p.208
“심리학은 세계와 그 속에 있는 사람을 함께 연구한다. 즉 그것은 경험을 신경계에 종속된 것으로 연구하지만, 반면에 물리학은 경험을 신경계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연구한다. 심리학은 그러므로 일반 과학들과 함께 마음의 일반적인 특성들을 드러내는 학문 분야로서 분류되어야 한다. 이에 의하면 마음은 ‘신경계에 의존한다고 생각되는 인간 경험의 총합’으로 정의된다...심리학은 (인간) 신경계에 영향을 미치는 순간에만 존재한다고 보는 전체적인 환경을 연구하는 반면, 물리학은 (인간) 신경계에 영향을 미치는 순간을 넘어 존재한다고 보이는 전체 환경을 연구한다. 월터 S. 헌터, 1925년의 심리학, p.95.
“세 번째로 기계론자들의 믿음은 우리가 조심스럽게 구분해야 하는 두 가지 가정들을 포함하고 있다. 그중 하나는 참이라고 해도 다른 하나는 잘못된 것이다. 이 두 가지 가정은 (1) 세계의 모든 과정들은 기본적으로 한 가지 종류로만 이루어져 있고 (2) 이 모든 과정들은 자연을 무기적으로 해석하는 경우에 물리학이 일반적으로 취하는 것이다. 즉 기계적이거나 엄밀하게 결정되고 그래서 엄밀하게 예측가능한 사건들로 이루어져 있다.” 윌리엄 맥도걸, 1925년의 심리학, p.303.
루빈 박사는 이렇게 말한다. “개체의 육체적 모습, 심령적 성격, 또는 혼의 과학이라고도 부를 수 있는 것은 다양한 분비선의 내분비물의 성질과 총량에 의해 대개 증명된다.” 허먼 H 루빈 의학박사, 인간의 신비한 분비선들, p.54.
어떤 학파들은 의식 일반을 부정하는 데에까지 가서 이를 물질에 고유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동양적 연구자는 그들이 정확하게 보는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리어리 박사는 이렇게 말한다. “의식이 신경을 특징짓는 것은 파동이 물질의 형태를 특징짓는 것과 같다.” 다니엘 H. 리어리 철학박사, 현대 심리학: 정상과 비정상, p.116.
그래서 의식은 다른 곳에서 이렇게 정의된다. “말, 그리고 동작 메카니즘과 밀접하게 관련되거나 이를 포함하는 육체 활동의 복합적인 통합과 연속, 그래서 자주 사회적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왈터 S. 헌터, 1925년의 심리학, p.91.
왓슨은 독자들에게 “의식에 대한 언급들, 즉 감각, 지각, 주의, 의지, 심상과 같은 용어들에 대해 설명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의를 주고 있다. “이 용어들은 대중적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연구를 수행할 때, 그리고 학도들에게 학문 체계로서 심리학을 소개할 때면 언제나 그러한 개념들이 없어도 일을 진행할 수 있다는 것을 느껴왔다. 솔직이 그 의미를 모르며, 다른 누구도 일관되게 그것을 사용할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1925년의 심리학, p.201, 각주
마지막으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심리학이 심령과 완전히 결별해서 ‘의식’이라는 단어를 대체물, 즉 ‘마음’과 ‘기억’과 함께 살아 있는 것과 함께하는 것으로 만든다. 그때 인간의 행동은 과학적인 기초 위에 세워질 것이고, 문학이나 철학 또는 종교적인 사색의 한 분야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마음’은 개성, 즉 일정한 학식있는 행동을 보여 주는 ‘의식’에, ‘기억’은 개인의 가로무늬근 또는 민무늬근 조직의 일부에서 나오는 신호에 길을 내줄 것이다.” 조지 A. 도시, 우리는 왜 인간처럼 행동하는가, p. 333.
이렇게 완고한 서양 심리학의 물질주의적 경향은 심리학psychology이라는 말의 어원이 ‘논logos’과 심령psyche 또는 혼soul과 관련되어 있다 것을 기억할 때 더 놀라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서양에는 그러한 입장에 반대하는 목소리도 있다. 이들은 내성주의자, 정신주의자mentalist라고 더 잘 알여져 있는 내성적인 심리학파이다. 이들은 의식의 사실성을 인정하고 의식적 실재를 추정한다. 리어리 박사는 이 부류들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내성주의자들은 의식, 인식, 인식의 인식, 자아, ‘나(I)’의 심상, 그리고 경직된 훈련과 완고한 기법을 지닌 행동주의자가 경멸, 무시 그리고 부정하는 모든 종류의 개념들에 관심을 갖고 있다... 내성주의자는 관심을 내면으로 돌린다. 자아 성찰로부터 자료들을 얻고, 다른 사람들에게 이러한 것을 묻는다. 이론적으로 행동주의자는 인간을 생명의 낮은 형태로 다루기 때문에 동물과 동일하게 다루며, 동물이 같은 방식으로 반응하는 행동을 명백하고 객관적으로만 관찰한다. 이는 연구실에서 물체나 화합물의 반응을 관찰할 때 물리학자나 화학자들이 사용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더우기 주관적 학파는 초이성적이고 체계적인 경향이 있고, 행동주의 학파는 보다 경험적이고 실용적이다...
“정신주의자들은 심령적 행동이 물리적 행동의 반영만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몸과 뇌 이상으로 다른 수준에는 다른 것이 있으며, 이는 원한다면, 마음, 영혼, 의식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생각은 물질의 기능이 아니다. 다른 한편 유물론자들은 이와는 다르지만, 그와 반대되는 주장을 한다. 즉 모든 것은 물리적이며, 생각, 느낌, 감정이라 할지라도 인간의 모든 행동은 모두 물리적, 물질적인 세포의 기능이며, 그러한 구조 없이는 활동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물리적인 행동이 무엇이건 그것은 작용한다. 한편으로 인간은 육체의 구조를 사용하는 정보력이나 영혼을 갖고 있고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불가결하게 복잡하기도 하고, 미묘하기도 하며, 고상하다고 할지라도 도덕이나 종교에 의해 작동할 수 있는 기능을 하는 유일한 구조를 기초로 갖고 있다.” 대니엘 B. 리어리 박사, 현대 심리학: 정상과 비정상, pp. 6-7.
내성주의자들과 물질주의자들은 그러나 자신의 견해를 과학적으로 증명하지 못했으며, 이들 학파의 주장은 심리학이 분리되면서, 다양하고 많은 집단들에 의해 훨씬 더 약화되었다. 하바드 대학의 호킹 박사는 말한다.
“심리학은 정말 한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 동적 심리학, 목적 심리학, 형태 심리학 그리고 반응 심리학, 프로이드 심리학, 구조 심리학, 행동주의 심리학, 그리고 그 외의 다양한 학파들이 있다. 그들은 자아를 다르게 묘사한다. 그러나 그들의 합은 특징적으로 심리학적 색조를 갖는다. 우리는 행동주의를 순수한 실례로 간주하는데, 그것이 이 성격 중에서 극단적인 예이기 때문이다.” Wm. E. 호킹, 자아 그 몸과 자유, pp.17,18.
프린스 박사는 광범위하고 일반적인 구분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심리학자들은 세 가지 진영으로 나뉘어진다. 자아 심리학자들, 비자이 심리학자들 그리고 중도적 입장들. 첫 번째 집단은 모든 의식적 과정의 내용이 자아, 즉 자아, 자아의식의 인식을 포함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모든 의식은 자아에 의해 어떤 것을 의식 또는 인식하는 것이다.
“비자아 심리학자들인 두 번째 집단은 성찰에 의해서는 어떤 자아나 자아 의식을 발견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나’와 ‘너’는 언어의 필요에 의해 요구되는 강제된 표현일뿐이다.” 머토 프린스, 1925년의 심리학, p. 223.
서양 심리학은 대체로 분명히 물질주의적이다. 그것은 기계와 기계 장치의 시대에 번성하는 기계론이다.
서양 기계론적 심리학자의 입장은 그러므로 확고부동하게 완고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알려진 진실에 기초해서 사실을 입증하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입장을 증명할 수 있고, 자신의 경우들을 인용할 수 있고, 그 자신이 인간 전체라고 주장하는 인간의 메카니즘에 대한 지식이 객관적이고 명백한 결과를 지닌 실험과 시험에 기초해 있다.
이 물질주의적 심리학에 반대해서 즉시 제기된 비판은 서양 심리학이 주로 비정상적이고 결함이 많고 병적인 케이스만을 배타적으로 연구한다는 것이었다. 비범하고 천재적이고 이른바 매우 영적인 개인은 무시되고, 일반인에게 아름답고, 본질적이며, 진실한 많은 것이 설명에서 배제된다. 만약 심리분석가가 그리스도를 분석했다면, 그는 틀림없이 “여호와 콤플렉스”로 고생하고 있다고 도식화되고 분류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사용했던 형태의 구조와 “그의 신경계를 특징짓는 의식”의 성격은 여러 시대에 영향을 미쳤던 것이었다. 어떻게 그러한 구조가 다시 재현될 수 있었는가? 비슷한 메카니즘을 재생해낼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현대 심리학은 단지 발전의 초입에 머물러 있을뿐이고, 그래서 왈트 휘트먼은 더 큰 영역을 보고 있다.
“긍정적인 과학 만세! 정확한 증거 만세!”...
여러분이 보여 주는 사실은 이용할만 하지만, 내가 머물 곳은 아니지,
나는 그것으로 내가 거주하는 곳으로 들어갈 뿐이라네” 왈트 휘트먼, 풀잎들, p. 10.
서양에서 독립적으로 출현하긴 했지만 내성주즤자들과 정신주의자들의 모호한 반영일뿐인 동양학파는 서양 학파들과 정반대이다. 동양의 심리학은 형태 뒤에 놓여 있는 것을 다룬다. 그것은 영적이고 초월적이다. 그것은 혼과 영혼을 가정하고 있으며, 그로부터 나오는 모든 추론과 결론들이 이 전제에 기초하고 있다. 그것은 형태와 구조를 완전히 인정하지만, 형태와 에너지를 이용하여 전진시키는 자를 강조한다. 그것은 생명과 에너지의 심리학이다.
태고의 시간으로부터 이것은 동양의 사고였으며, 인도의 유서깊은 경전, 바가바드 기타에서 분명하게 묘사되고 있다.
“몸 속에 들어 있는 지고의 영혼은 보는 자, 사고하는 자, 유지하는 자, 맛보는 자, 주님, 상위 자아라고 불리네.
“모든 감각 안의 힘에 의해 비추어지나 모든 감각력으로부터 자유롭고, 초월적이고, 모두를 지지하고, 여러 가지 힘들로 분리되지 않고 모든 힘을 즐기는 자일세.
“그것은 미묘함 때문에 모든 존재의 외부와 내면에 존재하며, 움직임 없이, 움직이고, 지각되지 않네, 그것은 떨어져 있지만 아주 가까이 있네. XIII: 22. 14, 15.
“이 일시적인 몸들은 몸의 영원하고,불멸하며, 무량한 주님에 속해 있도다. II: 17.
"사람들은 감각력들이 대상보다 더 높다고 말하고 감각력보다 감정이 더 높다고 하며, 감정보다 이해가 더 높다고 하지만, 이해보다 높은 것은 그라네. III: 42.”
이렇게 동양의 심리학은 원인, 창조자, 자아를 다룬다. 그리고 그 자아가 정신적, 감정적, 그리고 물리적 활동으로 이루어진, 자신의 작은 세계에서 작용하는 인간의 성스러운 자아(divine self: 신아)인지 더 작은 자아들이 모두 살아 움직이며 자아 존재를 지니는 거대한 자아(great Self)인지를 다룬다. 동양의 심리학은 그것의 위대한 논증자들이라고 주장하고 자아(the Self)를 알고 있고, 그 앎을 통해 주관적인 진아, 상위혼(Over Soul: 에머슨이 말한 만물을 생성시키는 영혼)과 결합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을 배출해 왔다. 이 주장들은 그들의 방법을 연구하려는 자와 특별한 훈련을 받아들이는 자는 누구나 입증하고 증명할 수 있다고 말한다. 동력을 주는 진아, 즉 배후에 존재하고 초월해 있는 영혼 쪽에서 그들의 위치는 형태의 영역에 있는 서양 심리학자의 그것만큼 분명하다.
이 두 체계의 결점은 명백하고 각각의 경우에 개탄스러운 결과를 만든다. 서양은 메카니즘을 강조하고, 혼을 부정하고, 동기를 부여하는 지성적 힘을 부정하는 경향을 갖는다. 그 때문에 사람의 코구멍 속으로 먼지가 들어갈 뿐 신의 영혼을 드리쉴 수는 없다. 동양은 물리적인 것을 인정하나 그것을 경멸하며, 그로 인해 동양의 비참한 물리적인 조건에 책임이 있게 된다. 이렇게 결함이 심하다면, 이 둘이 결합하면 힘이 나는 것은 진실이 아니겠는가?
자아(the Self)는 존재하고 (이것은 반드시 증명되어야 한다) 의식적인 신성한 혼이 있다면, 그것이 물리계를 인식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 성스러운 결합을 인식할 수 없겠는가? 만약 그것이 지배적인 에너지로 모든 것을 현현시킨다면 (이것은 반드시 증명되어야 한다) 가장 좋은 결과들이 성취될 수 있는 정도로 현명하고 의미있게 그 에너지는 진아가 사용하는 구조에 적응될 수 없을까? 혼의 완벽한 표현이 메카니즘의 매질을 통해 만들어질 수 있도록 형태에 대한 서양의 과학적인 지식과 혼의 본성에 대한 동양의 축적되고 상속된 지혜가 지성적으로 결합될 수는 없을까? 물질이 위로는 마음과 혼과 영혼에 이르고, 향상을 촉진시키는 영혼이 육체를 완벽하게 해서 그것을 증명하면 더 분명하게 밝혀질 수 있지 않을까?
내가 이 글을 쓰는 것은 물질주의적 심리학과 내성적 심리학을 결합시키고, 서양과 동양을 조화시켜서 그 결합이 강력하고 진실되게 하려는 바램이 있기 때문이다.
http://blog.naver.com/challngr/60026257632
제6장 일곱 가지 에너지 센터들
동양의 가르침에 따르면 생기체 또는 에텔체는 에테르로 구성되어 있으며, 생명 원리인 뿌라나의 지휘자 역할을 하고, 물질에 활기를 불어넣고, 형상을 만들어낸다는 것을 우리는 전장에서 살펴 보았다. 또한 생기체는 혼이라는 자연의 지각 원리를 구체화하는 혼의 표현 매체이다.
혼의 주요 특성은 의식이다. 생명으로써 혼은 “가슴에 자리잡고” 있으며, 이성적인 영적 의식은 “양미간에 있는 옥좌에 앉아 있다.” 르네 궤농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그러므로, 물리적 관점에서 생명 센터에 거주하는 것은 에테르이고, 심령적 관점에서 그것은 ‘살아 있는 혼’이다. 현재 우리는 개별적인 가능성의 영역을 벗어나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또한 무엇보다도 형이상학적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원리적이고 무조건화된 ‘자아’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진정 ‘우주 영혼’ (아뜨마)이고, 실제로 브라마, ‘지고의 지배자’ 그 자체이다. 그래서 이 센터를 브라마-뿌라라고 부르는 것은 완전히 정당하다. 이렇듯 내면의 인간으로 간주되는 (이와 아울러 이것을 모든 존재 상태와 관련되어 있다고 볼 수도 있는) 브라마는 뿌루샤라고 불리는데 그 까닭은 그것이 개별성 안에 안식하거나 머무르기 때문이다... 적절하기도 하고 말 그대로 한 마을(뿌리-샤야)이라는 단어 속에서 뿌라pura가 마을을 의미하는 것과 같다. 르네 궤농, 인간과 그 생성, pp. 44.45.
생명력은 육체와 접하는 일곱 센터를 갖고 있다.
이들 일곱 생명력 센터는 생명력을 전달하고 혼이 머무는 지점이다. 그들은 육체적으로 실존을 유지하고 그것에 활동을 일으킨다.
드리머는 자신의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러면 사람의 센터란 무엇인가? 그것은 자아의 우빠디upadhi의 핵 속에 각각 반영된다. 생명파라고도 불리는 신성 에너지에 의한 물질의 형성 작용을 연구해 보면, 물질이라는 객관성의 한계 속으로 자아를 투사하여 특정한 성질이 어떻게 물질로 나투어 이른바 따뜨바tattvas로 발전하는 지를 알게 될 것이다. 각각의 따뜨바는 혼을 불어넣은 생명에 대해 탄마뜨라, 또는 신성한 의식의 변형을 이루고 있다. 그러므로 각각의 따뜨바에서 우리는 중심적 생명으로서 신 의식을 지니는 반면, 저항의 관념은 외벽을 형성한다.”
“자아는 현현력에 의해 각각의 계 속에서 자신의 대행자뿐만 아니라 우빠디들의 핵을 일시에 그리고 동시에 형성하는 인공적인 센터들을 발전시키면서 다양한 우빠디들에서 반영되는 것을 우리는 목격해 왔다.” 드리머, 바가바드 기타 연구, pp. 37, 40, 107.
생명 센터의 인도식 이름은 “차크라”이다. 일곱 가지 에너지 센터의 위치를 (인도식 이름과 함께) 머리에서부터 기저에 이르기까지 제시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머리 센터 -샤하스라라 챠끄라
2. 양미간 센터 -아즈나 챠끄라
3. 목 센터 -비슈따 차끄라
4. 가슴 또는 심장 센터 - 아나하따 챠끄라
5. 태양총 센터 -마니뿌라 챠끄라
6. 천골 또는 성적 센터 -스와디스타나 챠끄라
7. 척추의 기저 센터 -물라다라 챠끄라
횡격막 위에 네 가지 센터들이 있고, 그 아래에 세 가지가 있다는 것을 독자는 알아차리게 될 것이다.
이들 에너지 센터 또는 챠끄라에 대한 글은 많이 쓰여졌고, 그보다 더 많은 내용이 이야기될 수 있지만, 개괄적으로는 다음과 같이 요약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생명 센터들은 몸의 모든 부분에 뿌라나 에너지를 전하고 세 부분의 신경계, 즉 뇌척추 신경, 교감 신경과 말초 신경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에너지 센터들로부터 생기 에너지 또는 뿌라나 에너지는 미세한 지시선을 따라 분포되어 있다. 이 선들은 “나디nadis”라고 불리며, 신경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고, 동시에 동맥과 관련되어 있다. 그것들은 육체의 신경계에 기초가 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사람과 그 생성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미세한 형태의 나디 또는 동맥에 대해 말하자면, 그들과 혈액 순환을 일으키는 육체의 동맥을 혼동해서는 안된다. 이것들은 오히려 생리학적으로 신경계의 가지에 상응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표현상 이들은 빛나는 것으로 설명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이 어딘가에서 발생해서 열과 빛으로 양극화되면, 미세한 상태는 두 가지의 보충적인 방식들, 즉 열의 성질에 해당하는 혈액에 의해, 그리고 빛의 성질에 해당하는 신경계에 의해 육체 상태와 연결된다. 그러나, 나디와 신경은 단순히 상응하기만 하고, 동일한 것은 아니다. 그 이유는 전자가 육체적인 것이 아니라는 점과, 완전한 개별성 속에서 두 가지 다른 영역을 실제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이해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호흡이 생명 유지에 본질적이고 주요한 생명 활동에 진정으로 관련되기 때문에 나디와 호흡 작용 사이에 어떤 관계가 확인된다 해도, 그것들은 공기가 순환하는 통로의 일종이라는 설명을 결론으로 삼아서는 안된다. 이것은 육체적 요소와 미세한 현현에 속하는 적절한 ‘생기 호흡’(뿌라나)을 혼동하게 만들 것이다.
나디의 총 수는 7만 2천개이지만, 다른 문헌에 따르면 7천 2백만개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실제와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왜냐면 이 수들은 상징적인 것이지 숫자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르네 궤농, 사람과 그 생성, pp. 136. 137.
인도 말 로뚜스(lotus: 연꽃)를 챠끄라나 에너지 센터에 관련해 사용하는 라마 쁘라사드는 이런 맥락에서 흥미있는 언급을 하고 있다.
“현대 해부학자들이 말하는 신경총은 이러한 센터들과 일치한다. 위에서 언급했던 것으로부터 이 센터들이 혈관으로 구성된다는 것이 드러날 것이다. 그러나 신경과 혈관 사이의 유일한 차이는 양적인 뿌라나와 음적인 뿌라나의 매개들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이다.
신경은 양적인 몸의 체계이고, 혈관은 음적인 몸의 체계이다. 신경이 있는 곳에는 어디나 상응하는 혈관이 있다. 그들 양자는 모두 구분 없이 나디라고 불린다. 한 쌍은 심장의 연꽃에서 중심을 잡고 있고, 다른 쌍은 천 장의 꽃잎을 이루면서 머리에 중심을 잡고 있다. 혈관계는 신경계의 정확한 그림이고, 사실 그 그림자일 뿐이다. 가슴과 같이 머리에는 그 상위와 하위 부분, 즉 대뇌와 소뇌가 있고 또한 좌우 반구가 있다.” 라마 쁘라사드, 자연의 미세한 힘들, pp. 45-46.
에너지 센터들은 척추와 머리 안에 위치하고 있다. 아더 아발론은 말한다.
“차끄라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먼저 서양 해부학과 중추 신경계와 교감 신경계의 생리학을 설명해야 한다. 둘째, 딴뜨라의 신경계와 차끄라에 대해 설명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해부학적이고 생리학적인 면에서 가능하다면, 두 체계의 상호 작용에 대한 설명이 포함되어야 한다. 나머지 것은 일반적으로 탄트라 신비주의에 특이한 것이기 때문이다.
차끄라와 샤하스라라에 대한 딴뜨라 이론은 두개골 속에 들어 있는 뇌나 뇌수를 중추신경계와 척추(메루딴다) 내에 들어 있는 척수와 비교하는... 생리학적 측면에 관심을 두고 있다.
앞으로 다섯 센터들(차끄라)에 대해 설명하겠지만, 척추는 다섯 영역으로 나누어진다. 기저에서부터 차례로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네 개의 불완전한 척추뼈가 결합하여 미저골coccyx이라는 뼈를 이루고 있는 미저골 영역, 다섯 개의 척추뼈가 결합되어 천골이라는 하나의 뼈를 형성하는 천골 영역, 요추 영역 또는 다섯 개의 척추뼈로 이루어진 요부region of the loins, 12 개의 척추뼈로 이루어진 등dorsal 영역, 또는 등뼈 영역, 그리고 7 개의 척추뼈로 구성되는 경부, 또는 목의 영역. 순차적으로 제시된 것처럼, 척수는 각기 다른 영역에서 서로 다른 특징들을 보인다. 간단히 말해서 이들은 물라다라, 스와디스타나, 마니뿌라, 아나하따, 그리고 비슈따 센터, 또는 차끄라가 조절하는 영역에 상응한다. 이 지역들은 척추 기저, 천골 센터, 태양총 센터, 심장 센터, 목 센터이다,
중추계는 31 개의 척추 신경과 12 개의 두개골 신경을 통해 말초신경계와 연결되어 있고, 이 두 가지는 모두 구심성 신경과 원심성 신경 또는 감각 신경과 운동 신경으로 감각을 일으키거나 행동을 자극한다. 뇌신경 중에는 척추 구(연수)로부터 마지막 6 가지 신경이 올라오고 후각 신경과 시신경을 제외한 다른 6 가지 신경은 연수 바로 앞에 있는 뇌 부분들에서 올라온다. 참고로 요가와 딴뜨라 학파의 저자들은 신경에 대해 나디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그들은 또한 의학 서적에서 설명하는 것처럼 쉬라스Shiras를 이용해서 동맥을 설명하지 않고, 이것이 뇌신경을 의미한다고 지적해 왔다. 그렇지만, 요가 나디들은 일반적으로 물질적 신경이 아니라 생기력이 통과하는 더 미세한 지시선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척추골 사이의 유공(작은 구멍)에서 빠져나온 척추 신경은 척추의 양쪽에 있는 교감 신경계의 신경절과 교신한다.
척추건spinal cord은 인체의 경우 제 1 경추의 상부 경계에서부터 확장되어 연수 속으로 들어가고 마지막으로 제 4 뇌실로 들어가 두 번째 요추로 내려가는데, 거기서 그것은 필라멘트 말단filum terminale이라는 지점으로 점차 얇아진다.” 아더 아발론, 뱀의 힘, pp. 123-125.
앞의 인용은 탄트라 체계에 대한 설명이기 때문에, 최고의 도덕적 자질을 지니고, 생활과 생각이 순수한 사람에게만 안전한, 인도의 에너지 조절 체계라는 것을 잘 알아야 한다. 동서양 모두에서 일어나는 현상이지만, 딴뜨라 수행을 가르치는 이른바 비속화된 수행과 학파들은 지나치게 비난받아도 가혹하지 않을 것이다.
이들 에너지 센터들은 우리가 방금 살펴 본 것처럼 척추와 머리 위에 위치해 있을 뿐만 아니라, 척추의 매질을 통해 서로 연결되어 있는데, 여기서 상술하기에는 너무 복잡하다.
일곱 개의 센터 중에서 두 개는 머리 속에 있고 5 개는 척추 속에 있다. 머리 속에 있는 두 센터들은 정신력과 운동력에 직접적으로 관계하고 있다. 천 장의 꽃잎으로 이루어진 연꽃이라고 불리는 샤하스라라 센터(머리 센터)는 영적 에너지의 구현이며, 의지, 추상적 마음mind 또는 영적 마음, 그리고 직관이라고 설명된다. 아즈나 센터, 또는 미간 센터는 인간이라고 부르는 통합된 유기체, 즉 개성의 하위 마음과 심령적 본성과 관련된다.
척추 안의 다섯 센터들은 사람이 자신의 동물적 본능, 감정적 반응, 그리고 삶의 의도를 드러내는 유기체의 다양한 활동과 관련된다. 그들은 주로 두 가지 머리 센터로 들어가고 그로부터 나오는 에너지의 지휘를 받는다.
뱀의 힘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센터들은 의지적인 운동에 관계되는 근육 결합 조직들에만 영향을 미치는 것과 아울러 척수 안에서 근접한 센터가 위치해 있는 유관 신경 분포, 배설 등의 기능에도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대뇌 센터들은 의지, 느낌, 그리고 감정의 현현과 관계될 때에만 이 기능들을 조절한다고 지적되고 있다. 반면 부교감 신경계와 관련된 센터들은 지속적인 유기체의 실존에 본질적인 다양한 자극 조건과 일치하는 무의식적인 적응 메카니즘을 구성한다고 하며, 연수는 또한 상위 센터들과 말초 신경 사이의 통신 경로이자 신경계에서 가장 중요한 기능들을 조절하는 독립적인 센터이다. 머리에서 척추까지 내려오는 운동 자극을 전달하는 신경 섬유들이 척추구(연수)를 통과해 경로가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교차된다는 것을 주의해야 하는데, 이것은 묵따 뜨리베니의 설명을 보면 딴뜨라에서 언급되어 왔던 사실이다.
후자는 수많은 구심성 신경관과 원심성 신경관에 의해 소뇌와 대뇌의 신경절과 연결되어 있다. 소뇌 위에 대뇌가 있는데, 이는 대개 의식적인 의지와 관념 작용과 수의voluntary 운동이 일어나는 것과 관련되는 활동을 한다. 그러나 내관적인introspctive 심리학의 주관적 물질인 의식이라는 개념은 심리학적 작용 개념과 혼동해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단순히 ‘의식’이 하나의 유기적 포착conception이 아니고 의식이 내관적인 면을 나타내는 에너지의 생리학적 이해와 전혀 관련되지 않기 때문에 의식에는 어떤 기관도 없다. 내면의 의식은 아뜨마이다. 마음과 몸은 둘 다 의식의 불완전하거나 베일을 쓴(veiled: 가려진) 표현들로 몸의 경우 너무나 가려져 있어서 무의식의 모습을 갖고 있다. 살아 있는 뇌는 뿌라나에 의해 주입된 감지할 수 있는 거친 물질(마하부따)로 구성되어 있다. 그 물질은 마음(안따까라나)의 형상 속에서 의식이 표현하기에 적합한 매체를 구성할 수 있도록 집성(集成)되어 있다.
의식은 몸의 속성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은 또한 단순히 몸의 작용도 아니다. 정신적 의식이 뇌의 장애에 영향을 받거나 사라져버린다는 사실은 그런 의식의 표현에 대해 후자의 필요성을 증명하고, 의식이 뇌 속에만 고유한 것이 아니거나 그것이 같은 것의 속성이라는 것을 증명한다. 척추의 양쪽에는 교감 신경관 (이다와 핑갈라)라는 신경 섬유와 연결된 일련의 신경절이 있는데, 두개골의 기저로부터 미저골까지 쭉 확장되어 있다. 이것은 척수와 소통하고 있다. 비록 경부 영역에서 대부분 사라진다 해도, 대단히 규칙적으로 각 척추 신경에 상응하는 신경절의 각 마디가 흉관 영역과 요추 영역에 있다는 것과 신경 구조의 매우 큰 다발들은 심장, 위, 그리고 폐, 즉 각각 아나하타, 마니뿌라, 그리고 비슈따에 의해 조절되는 영역들, 즉 이하에서 설명되는 다섯 차끄라 중 위쪽의 세 차크라에서 발견된다는 것은 주목할만하다.
양쪽의 교감신경의 연쇄로부터 신경 섬유들은 복부와 흉곽의 장기로 이어진다. 이로부터 또한 신경들이 방출되어 척추 신경으로 되돌아 가고, 다른 신경들은 몇몇 뇌신경들 속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이들은 사지, 몸통, 다른 부분들로 분산되어 척추 신경 또는 뇌신경으로 이어진다. 교감 신경들은 주로 다양한 조직의 소동맥의 근막과 내장의 근 조직을 조절하는 자극을 전달한다. 혈관의 색조가 연수에 있는 혈관 운동 센터의 활동에 의해 유지되는 것은 교감신경을 통해서이다.
그러나 교감 신경은 중추신경계로부터 확산되는 자극을 유도한다. 이들은 교감 신경 자체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척추 신경의 앞쪽 뿌리에 의해 척추로부터 자극이 나와 짧은 가지들을 거쳐서 교감 신경의 연쇄로 들어간다. 교감신경계는 순환, 소화, 그리고 호흡을 조절하고 그에 영향을 미친다.
중추 신경계의 해부학적 배열은 매우 복잡하고 한편 섬유, 세포 그리고 원(原) 섬유의 엉킴속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아직도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리고 중추 신경계의 생리학을 설명할 때, 신경계의 한 부분과 또 다른 부분 사이에서 자극이 통과할 수 있는 경로를 추적하는 것과 해부학적 연관으로부터 어느 정도의 가능성을 갖고 그 부분들이 서로 그리고 몸의 나머지와 형성하는 생리학적 관련성을 추측하는 것 이외에는 현재 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특별한 메카니즘, 즉 감각, 분지, 또는 운동, 그리고 이른바 비뇨생식기 센터와 같은 그 센터들과 특별히 관련되는 중추신경계 내의 신경 센터들이 존재한다고 가정하는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다. 왜냐하면 어떤 주어진 생리학적 행위는 척추의 특정 부분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것은 여기에 차끄라라고 불리는 마야 샥띠(Maya Shakti)의 표현들과 같은 센터들의 미세한 국면이다. 이들은 차례로 물라다라, 스와디스타나, 마니뿌라, 아나하따, 그리고 비슈따 차끄라들과 궁극적으로 관련있는 생식, 배뇨, 소화, 심장 활동, 그리고 호흡의 거친 기관들과 간접적인 조절 기관들을 통해 관계되고 있다. 이것은 여러 가지 관tracts이 배타적이지 않고, 다양한 지각, 의지, 그리고 관념화 과정과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과 흡사하다.” 아더 아발론, 뱀의 힘, pp. 126-129.
이 센터들은 개인의 진화 상태에 따라 활동성이 달라진다. 어떤 사람은 어떤 센터들이 “깨어 있고” 다른 사람은 똑같은 센터들이 상대적으로 잠자고 있을 수 있다. 어떤 유형은 태양총 센터가, 다른 유형은 심장이, 또한 다른 유형은 목이 활동적이거나 잠든 상태일 것이다. 머리 센터가 활동적인 경우는 아직 극소수에 불과하다.
대략적으로 말해서 미개한 사람들과 진화가 많이 되지 않은 경우에는 횡경막 아래의 세 가지 센터들, 즉 척추의 기저 센터, 천골 센터, 태양총 센터들이 살아 있고, 지배적이지만, 횡경막 위의 센터들은 “잠자고” 있다. 보통 사람들은 목 센터에서 느낌을 받지만, 머리와 가슴 센터들은 여전히 잠자고 있다. 진화가 많이 이루어진 사람들, 종족의 지도자, 직관적인 철학자와 과학자, 그리고 위대한 성자들은 머리와 가슴 센터가 파동, 즉 감정적 정신적 의식의 유형과 성질에 의해 머리와 가슴에서 중요한 느낌을 받고 있다.
사람의 발전에 따라서 이 에너지 센터들은 살아나고 현저하게 되고, 그 생생함에 따라 다양한 활동이 나타난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횡경막 아래의 센터들은 사람과 동물 양쪽에서 모두 발견되는 물질적 형태의 육체적 삶과 동물 혼적인 삶을 지배한다. 횡경막 위의 센터들은 지성적이고 영적인 삶에 관여하면서, 자신의 상태가 동물의 삶과는 달리 더 높은 진화의 사다리를 올라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활동들을 하게 한다.
요약한 내용은 7 가지 에너지 센터 또는 차크라에 대한 동양의 가르침이다.
서양의 분비선 이론과 동양의 일곱 가지 센터 이론을 비교하면, 우선 그 위치에서 현저한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일곱 가지 에너지 센터들은 분비선이 위치하는 동일한 곳에서 발견되고, 에너지 센터들 각각은 상응하는 분비선에 대한 힘의 근원이고 생명의 근원이라고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인도의 가르침에 따르면 확실한 사실이다) 다음의 비교표는 이 위치가 동일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센터들 분비선
머리 센터 송과선
양미간 뇌하수체
목 센터 갑상선
심장 센터 흉선
태양총 센터 췌장
천골 센터 생식선
척추 기저 센터 부신
첫 번째 사실보다 훨씬 더 현저한 두 번째 것은 깨어 있는 에너지 센터들이 분비선으로 확인된다는 것이다. 그 작용은 이미 알려져 있고, 대부분의 분비물 또는 호르몬이 여기서 발견된다. 인류 중에서 선진적인 사람들의 잠자거나 깨어 있는 센터들은 그 기능이 상대적으로 알려져 있지 않지만 분비선에 따르는데, 그 분비물은 대개 추출되지 않고 있다. 예를 들면 뇌하수체나 흉선 둘 중 하나 안에 있는 송과선의 분비물은 부신 수질의 분비물과 같이 미확인으로 분류되어 있다고 버먼 박사는 언급하고 있다. 이것들은 잠자거나 깨어있는 심장 센터, 목 센터, 머리 센터, 그리고 척추 기저 센터에도 해당한다.
이것은 흥미있는 일치일까? 또는 각각의 경우에 발견되지 않은 호르몬이 있는 분비선들이 일반인들의 경우 자고 있는, 아직 각성이 일어나지 않은 센터에 적용된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인가?
여러 가지 분비선은 이 센터들의 에너지를 통해 존재하게 된다는 사실이 확인될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왜냐하면 일반인들의 경우 각성되서 작용하는 센터들이 분비선들과 연결되어, 그 특이한 분비와 이미 알고 있는 혈류와 관계된 작용이 격리된 반면, 아직 잠자며 개발되지 않은 센터들은 그 분비가 부분적으로만 알려졌거나 완전히 알려지지 않은 분비선들과 결합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쨌든 고려할 가치가 있다.
사람은 분비선이 만들어낸 것이며 인간은 특이한 분비계 자체라고 서양 심리학자들이 말하는 것은 결국 정당하다. 그러나 그 이유는 에너지 센터들에 대한 동양적 이론의 정당함에 있을 수도 있다. 분비선과 기능 항진super-activity 또는 기능 저하의 조건, 그리고 정오(正誤)의 기능은 이러한 센터들의 상태에 의해 결정될 수 있다. 이러한 분비선들은 훨씬 더 크고 더 복잡한 체계의 외부적 상징, 가시적인 것, 물질적 국면일 뿐이다. 그것들을 통해 작용하는 혼 생명의 성질, 그리고 모든 것을 조절하고 지배하는 혼에 의해 결정된다.
그런데 이러한 센터들의 상태는 그를 통해 진동하는 혼 에너지의 형태와 성질에 의존한다. 미개발된 사람의 경우에 그것은 활동하고 나타나는 생명 에너지, 뿌라나일뿐이다. 이것은 동물에게 생명을 주고 하위 센터들(척추 기저 센터와 천골 센터)에 활동성을 준다. 사람이 발전하면 의식, 즉 혼 국면이 점차 그 현존을 느끼게 만들고, 태양총 센터를 활동하게 만든다. 이 센터는 사람과 동물에서 하위의 심령 감각적 삶의 자리이고, 본능적인 뇌라고도 불린다. 바가반 다스는 이렇게 가르친다.
“산스끄리뜨 문헌에서 배꼽이 심장보다 유기체에 더 중심적이고, 더 본질적인 것이라고 다루는 경우가 있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심장의 중요성은 아무리 지적해도 부족함이 없고, 그것은 진실이지만, 생리학적으로 ‘배꼽’은 진화의 초기 단계에 보다 더 중요한 기관이었으며, 현 단계에서도 욕망 작용과 관련되는 것으로 생각될 수 있는 가슴보다도 더 적절하게 욕망과 본질적으로 관련되어 있다.” 바가반 다스, 성스러운 말씀의 과학, I권, p. 82, 각주
그는 다음 문단에서 베산트 여사도 인용하고 있다.
“‘배꼽’은 태양총을 나타내는데, 아마 교감 신경계 중에서 가장 중요한 신경총일 것이다. 그것은 식도와 생식기와 함께 소화관을 조절하고, 간장, 비장, 위로 신경 가지가 이어진다. 그것은 또한 폐와 심장으로도 이어져 있다. 그것은 교감 신경계의 뇌로 간주될 수 있으며, 생각에 위험한 이완에 반응하며, 이에 대한 무분별한 집중은 불치의 신경병을 일으키기도 한다. 그것이 흥분하여 감정이 폭발하기도 하고, 감정적인 충격에 따르는 혐오감을 일으키는 경우도 있다.” 바가반 다스, 성스러운 말씀의 과학, I 권. p. 83
오늘날 사람은 대부분 이 세 가지 센터들을 통해 작용한다. 몸의 에너지들은 생식선을 통해 성적 생활에 만족을 주고 이를 자극하는 작용을 하며, 전투의 분비선이자 투쟁의 분비선인 부신을 통해 싸우고 진화하려는 충동을 만들어낸다. 그들은 태양총을 통해 마음의 본능적 삶을 다스린다. 그래서 개인이 발동되면 의식적 감각적 인간으로 된다. 진화가 진전되면, 자아 또는 혼이 사람 속에서, 그의 육체적 실존에서, 점점 더 활동적이고 지배적이 되고, 조금씩 조금씩 에테르 구조의 모든 부분들이 생기있게 깨어나게 된다. 점차 상위 센터들은 활동성이 증가하게 되며, 몸을 통해 쏟아지는 힘의 강조점이 횡경막 위의 센터들로 이동한다. 목 센터가 깨어나면 창조적인 작업의 기관으로 된다. 심장 센터는 활기있게 되고, 사람은 자신의 혼적 관계, 자기 집단의 책임과 생명 혼의 포괄성을 의식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머리 센터들이 깨어나 또 다른 범위의 지각들이 그의 의식으로 들어온다. 그는 혼으로서 자신을 인식하게 되고, 개성으로서 통합되고, 그 뒤에도 영혼의 세계, 신적인 세계, 그리고 영혼들의 보이지 않는 세계, 그리고 혼 생활을 실재로 증명하는 “수많은 증거”를 인식하게 된다.
인간 진화의 목적들 중에는 이것을 성취하는 것이 들어 있다. 척추 기저 센터와 심장 센터는 완전히 기능하는 활동 상태가 되어야 하고, 그렇게 되면 물질 그 자체에 내재하고 척추 기저 센터에 내장된 에너지와, 가슴에 자리잡은 혼의 에너지와 머리에 집중된 영혼의 에너지의 혼합을 통해 인간은 완성의 최고점에 이르게 된다. 에너지의 이러한 융합을 통해 그는 몸이 진정 혼을 위한 매체이고, 그 혼은 진정 의지의 표현이자 영혼의 목적이 되도록 신의 적극적 표현, 즉 영혼, 혼, 몸이 된다.
지상에 살았을 때 그리스도는 무엇이라 말씀했는가?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것이다.”(요한 XIV: 9) 그는 또한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들을 할 것이고; 이보다 더 큰 일도 할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내 아버지에게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그는 영혼인 아버지를 드러내며 몸에 육화된 혼이었고, 몸의 메카니즘을 통해 혼의 권능을 증명하였는데, 이것은 센터들의 각성에 따르는 것이라고 인도인들은 주장한다. 그 목록은 다음과 같다.
1. 아니마... 모든 몸에 스며들어 죽은 자에게 생명을 가져다 주는 권능. 그리스도는 보이지 않게 방으로 들어 올 수 있었고, 죽은 자를 일으킬 수 있었다. (누가 24: 36, 마가 16: 14, 요한 20: 19, 요한 11.).
2. 마히마... 자신을 포함하거나 확대시키거나 또는 우주를 포괄하는 권능. (마테 12:25, 요한 2: 24, 요한 6:64.)
3. 라기마... 공중 부양을 하거나 물 위를 걸을 수 있도록 자신을 빛으로 만드는 권능. 그리스도는 물 위를 걸었다. (마테 12: 25, 요한 2: 24, 요한 6: 64.)
4. 가리마... 자신을 무겁게 만드는 권능. 기독교 성경에는 그리스도가 이 권능을 수행한 기록이 나오지 않는다.
5. 쁘랍띠... 사건들을 예언했고 (그리스도는 자신의 십자가 처형을 예언했다. 마테 26: 2, 누가 24: 7) 질병을 고치는 권능 (그리스도는 수 백명을 고쳤다, 마테 12: 15, 14: 15), 그리고 투시력과 투청력. (그리스도는 투시력, 요한 1: 48, 그리고 투청력, 요한 12: 29.)를 보였다.
6. 쁘라까메가... 몸을 보존하는 권능. 그리스도는 사후에 제자들 앞에 그들이 알고 있던 동일한 몸으로 분명히 다시 나타났다. (요한 20:20-27)
7. 비시뜨반... 자기 조절의 권능, 동물과 사람들을 조절하는 권능. 마귀 들린 사람들의 조절과 경사진 곳으로 달려 내려가 바다에 빠진 돼지들의 예에서도 볼 수 있듯이(마테 8, 마가 5, 마가 9) 그리스도는 이 모든 것을 증명했다.
8. 이샤뜨반... 일반 주권의 권능. 이것은 모든 곳에서 그리스도에게 주장되었고,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권능들의 소유와 우리가 더 큰 것도 할 것이라는 그리스도의 예언 성취는 서양인이 상식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반하는가? 라디오의 경우 음파가 방송되고 조절되고 증폭되지만, 무엇보다도 본래의 미세한 형태로 흘러들어 오는 음파를 수신기는 보강한다. 사람은 기계적인 보강 장치를 만들어 문제 없이 미묘한 음파를 수신하게 되었는데, 이것을 바로 투청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은가? 그리고 생각의 전달은 (대단히 회의적인 사람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특별한 종류의 방송과 다른 것이 아니지 않는가? 그래서 다른 “기적들”과 함께 물질 세계는 더 미세한 에너지와 힘에 의해 조절되고 더 미세한 장에서 적기에 작동하는 법을 배우면 간단히 물리적인 것과 물질에 대한 지배력을 획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혼과 영혼의 발달을 통해, 모든 센터들의 깨어남을 통해 사람은 자신의 완성과 영광에 다가간다는 것이 인도의 오래 된 믿음이다.
[출처] [본문스크랩] [혼과 그 메카니즘] 6장 일곱 가지 에너지 센터들 |작성자 피노코
http://blog.naver.com/challngr/60026257619
제5장 혼, 에테르 그리고 에너지에 대한 동양적 가르침
“그 미세함 때문에 모든 곳에 퍼져 있는 에테르는 접해 있지 않는 것처럼, 몸 전체에 위치한 혼도 접해 있지 않다.
하나의 태양이 이 모든 세상을 비추는 것처럼, 몸 안에 거주하는 그는 모든 장field을 비춘다.
지혜의 눈으로 장과 장을 보는 사람을 분간하는 자, 그리고 자연으로부터 존재의 해방을 분간하는 자들은 지고의 존재에게 간다.” 바가바드 기타, XIII, pp. 32, 33, 34.
혼과 그 표현, 즉 물리계에서 에텔체 또는 생기체를 다루는 동양의 문헌은 이 책 뒤에 있는 불충분한 참고 자료를 보면 알겠지만, 광범위하다. 우파니샤드와 뿌라나스 도처에는 이 가르침을 다루는 수천의 문구들이 흩어져 있다. 가장 중요한 정보원들 중에서 두 가지를 든다면 그것은 쉬브-삼히따와 샤챠끄라 니루빠남이다.
존 우드로프 (아더 아발론) 경은 이 동양의 가르침과 혼의 발전 기법에 대한 지식을 서양에 전하려고 책을 통해 많은 일을 했다. 그는 그것을 하나씩 발표하는 형태로 대중이 가장 위험한 과학을 지나치게 빨리 이해하지 않도록 보호했다. 서양 의학과 과학에 기초하여 어떤 인도 철학자가 쓴 신비한 꾼달리니(배산트 G. 렐)라는 소책자도 진정 가치있는 것이다.
이 과학의 위험은 좀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는 것이다. 어떤 기법을 앎으로써 사람이 생기체를 통해 작용하는 자신의 본성 에너지를 적극적으로 조절할 수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현대의 의사들은 사람과 관련된 에너지 요소들을 점점 더 인식하고 있다. 자연계에 존재하는 모든 형태들이 그런 것처럼 육체가 원자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지니는 전기적 성질은 필연적인 인식의 자연스러운 결과이다.
서양 과학자들은 에테르와 그 운동을 인식한다. 동양의 스승들은 아까샤와 뿌라나에 대해 말한다. 양자는 모두 모든 형상에 스며 있는 활력있는 생명을 다루고 있고 그것은 에테르의 일관성, 감각성, 그리고 실존의 결과이다. 께노빠니샤드의 다음 구절은 이를 구체적으로 보여 줄 것이다.
“위대한 힘은 비현현이요, 비형상이며, 빛을 주는 하나의 수여자, 그로부터 소리를 내는 에테르(아까샤)를 세상에 냈고, 그로부터 감지되는 에테르를 탄생시켰네.
감지되는 에테르로부터 빛나는 에테르, 이로부터 맛보는 에테르, 그로부터 냄새나는 에테르가 생겨났네. 이들은 다섯 에테르이고 오중(五重)으로 확장했네.
이들로부터 우주가 나왔다네. 이들에 의해 우주가 연속되네, 이들 안으로 그것은 사라지네. 이들 중에서 그것은 자신을 다시 나타낸다네.” 께노빠니샤드, “자연의 미세한 힘”에서 라마 쁘라샤드에 의해 인용
고대 인도 문헌들에 나오는 빛나는 에테르와 현대 과학자들의 광파 사이에 유사한 점이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라마 쁘라사드는 자연의 미세한 힘이라는 매우 흥미있는 책에서 미세한 물질의 네 가지 상태를 이렇게 나열했다.
1. 뿌라나 또는 생명 물질
2. 심령 물질
3. 정신 물질
4. 영 물질
그리고 이 네 가지는 아까샤를 표현 매질로 사용하는 에너지의 성질들이다. 동양서를 연구하면 우리는 힘의 주관적 세계에 의해 존재하고, 활기를 얻는 물질 세계의 그림을 얻게 된다. 이는 에테르(아까샤)를 운동장으로 사용하면서 현상계에서 모든 형태, 성질 그리고 차별화를 일으킨다.
'뱀의 힘The Serpent Power'으로부터 뽑은 다음의 인용은 물질과 에테르에 대한 동양적 가르침을 제시한다.
“최신의 과학적인 연구는 이 원래의 물질이 과학적인 ‘물질’일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준다. 즉 질량, 무게, 관성을 갖지 않는다. 물질은 현재의 가정에 따라, 감각에 의해 알려진 ‘물질’과는 매우 다른 것에 의해 탈물질화되었고, 제거되었다. 이 궁극적인 물질은 운동 상태에 있는 에테르라고 불린다. 현재의 과학적 가설은 다음과 같을 것이다. 과학적인 ‘물질’이라는 것은 없다. 만약 그렇게 보이는 것이 있다면, 환상Maya과 같은 샥띠Shakti의 움직임 때문이다. 우주가 만들어낸 궁극적이고 가장 단순한 물질적 요소는 ‘에테르’라는 어떤 본체의 움직임이고 이 속에 있는 것이다. 이 물질의 움직임들은 실재적 관점으로부터 ‘물질’이라는 개념으로 올라가는 것이다. 물질은 그래서 그 형태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토대가 되는 것이다. 그 궁극적인 원소는 일종의 최종 분석이며, 다양한 종류의 물질의 차이들은 궁극적인 입자의 다양한 운동과 그 연속적인 결합에 의존한다. 그러한 기초적인 통일성을 얻게 되면, 한 형태의 물질이 또 다른 형태로 이전할 수 있게 된다.” 아더 아바론(존 우드로프 경), 뱀의 힘, p. 89.
또 다른 책에서 아더 아발론은 말한다.
“첫째로, 모든 가능한 힘들이 추가되어도 ‘물질’은 빛의 현상과 같은 많은 현상들을 설명하기에는 불충분하며, 따라서 ‘에테르’라는 물질이 존재한다는 하나의 과학적 믿음에 이르게 된다. 우주를 채우는 매질은 빛, 열, 전기, 그리고 아마도 천체들 사이에서 작용하는 인력처럼 먼 거리에서의 운동의 방사를 파동으로 운반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에테르는 ‘물질’ 이 아니라, 그와는 완전히 다르며, 보통의 물리적 의미에서 감각 기관을 통해서만 알 수 있는 ‘물질’과 비교해서 설명하려고 할 때, 어쩔 수 없는 지식의 불명확성을 확인할 뿐이다. 그러나 에테르의 실재를 가정하면, 그 속에 잠겨 있는 ‘물질’ 체들은 그 안에서 위치를 변화시킬 수 있다. 사실 인도의 표현을 사용한다면, 아까샤 따뜨바(Akasha Tattvas: 아까샤의 성질)의 파동의 특성은 다른 따뜨바와 그 파생물이 존재하는 공간을 만드는 것이다. 순전히 ‘과학적인 서양의 이론들은 그 질료인 ‘물질’과 ‘에테르’로 세계를 건설하려고 노력해 왔다.” 존 우드로프, (아더 아발론) 샥띠와 샥따, p. 167.
“많은 사람들이 마야(환상)라는 관념을 비웃었고, 여전히 이를 비웃는 사람도 있다. 만약 물질이 충분히 확고하고, 영원하며, 실재하지 않는다면 어떨 것인가? 그러나 과학에 따르면 (물질적 존재로써) 우리는 무엇에 기초해 있는가? 그 답은 상대적으로 안정되어 있지만, 본질적으로 가변적인 형상으로 물질화되는 대단히 빈도가 낮은 무형상의 에너지라는 것이다... 나의 친구가 견고한 물질(빠르티바부따)의 ‘껍질’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그 미세함이 발전할 때까지 점차 더 거칠어지는 과정이 계속된다. 그것이 지속되는 동안 이것은 충분히 감각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영원히 지속되지는 않고 어떤 방사하는 본체 속에서 우리의 눈 앞에서 분열한다.” 존 우드로프 경 (아더 아발론), 샥띠와 샥따, p. 170.
인도의 혼을 보여 주는 많은 내용을 서양에 전달한 비베카난다는 말한다.
“인도 철학자들에 따르면, 온 우주는 두 가지 물질로 이루어진다. 하나는 아까샤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곳에 스며들어 있는 편재하는 것이다. 형상을 갖고 있는 모든 것, 취합의 결과인 모든 것은 이 아까샤로부터 진화된다. 공기로 되는 것, 액체로 되는 것, 고체로 되는 것이 바로 아까샤이다. 태양, 지구, 달, 별, 혜성이 되는 것이 바로 아카샤이다. 몸, 동물의 몸, 행성, 우리가 보는 모든 것, 감각될 수 있는 모든 것, 존재하는 모든 것은 아까샤이다. 그것은 그 자체로 파악될 수 없다. 그것은 미세하기 때문에 모든 일반적인 지각을 넘어서 있다. 그것은 거칠게 되어 형상을 지니게 될 때에만 목격될 수 있다. 창조가 시작되었을 때, 이 아까샤만 존재한다. 주기의 끝에 고체, 액체, 그리고 기체는 모두 다시 한번 아까샤로 녹아 들었으며, 다음 창조는 이와 같이 이 아까샤로부터 나온다.
어떤 힘에 의해 이 아까샤가 우주를 형성하는가? 뿌라나의 힘에 의해서이다. 아까샤가 우주의 무한히 편재한 물질인 것처럼 이 뿌라나는 무한히 편재하는 이 우주의 현현력이다. 한 주기의 처음에 그리고 마지막에 모든 것은 아까샤가 되고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힘들은 용해되어 뿌라나로 다시 들어간다. 이 뿌라나로부터 다음 주기에 에너지라고 부르는 모든 것, 즉 힘이라고 부르는 모든 것이 진화된다. 운동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은 뿌라나이다. 중력으로, 즉 자기magnetism로 나타나고 있는 것은 바로 뿌라나이다. 몸의 움직임으로, 신경 전류로, 사고력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은 바로 뿌라나이다. 상념으로부터 최하위 물리력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은 뿌라나의 현현일뿐이다. 정신적인 것이건 물리적인 것이건 용해되어 그 원 상태로 되돌아 간 때 우주의 모든 힘의 총합은 뿌라나라 불린다...” 스와미 비베카난다, 라자 요가, pp. 29. 30.
현대적인 작가, 라마차라까는 말한다.
“여러 가지 이론들이 이름이 지닌 위대한 원리를 오해하지 않도록, 우리는 그 원리를 ‘뿌라나’라고 부를 것이다. 이 말은 ‘절대적인 에너지’를 뜻하는 산스크리트 단어이다. 많은 오컬트 권위자들에 따르면 힌두이즘의 ‘뿌라나’는 에너지 또는 힘의 보편적인 원리이고, 모든 에너지나 힘은 그 원리로부터 파생된 것이거나, 그것의 특별한 형태로 그 원리가 현현한 것이라고 가르친다... 그것은 아메바로부터 인간에 이르기까지, 식물의 가장 기초적인 형태로부터 동물의 최고 형태에 이르기까지 모든 생명 형태에서 발견된다. ‘뿌라나’는 편재해 있다. 그것은 생명을 갖고 있는 모든 것 속에서 발견된다. 오컬트 철학은 생명이 모든 사물 속에, 즉 모든 원자 속에 있으며, 무생물의 경우에도 생명이 덜 현현한 것일 뿐이라고 가르치기 때문에, ‘뿌라나’는 모든 것 속에, 모든 곳에 존재한다는 가르침을 이해할 수 있다. 모든 혼 속에 있는 신의 일부이고, 그 주변에 물질과 에너지를 모이게 하는 에고와 이 ‘뿌라나’를 혼동해서는 안된다. ‘뿌라나’는 그 물질적 현현 속에서 에고에 의해 사용되는 에너지의 한 형태일 뿐이다. 에고가 몸을 떠나면, 더 이상 통제를 받지 않는 ‘뿌라나’는 몸을 형성하는 개별적인 원자, 또는 원자 집단의 질서에만 반응하고, 몸이 원래의 원소들로 해체되고, 분해되면, 각 원자는 그와 함께 새로운 결합을 형성시킬 수 있는 충분한 ‘뿌라나’를 취한다. 사용되지 않은 ‘뿌라나’는 자기가 나왔던 거대한 우주적 저장고로 다시 되돌아 간다. 통제받는 에고와 함께, 응집이 생겨 원자들은 에고의 의지에 의해 결합된다.
“‘뿌라나’는 일반적인 원리를 지시하는 이름으로 그 원리는 중력, 전기, 행성의 회전, 그리고 생명의 형태 중 최고로부터 최저에 이르기까지 그 어디에서나, 모든 운동, 힘 또는 에너지의 본질을 이룬다. 그것은 모든 형태를 띠는 힘과 에너지의 혼이라고 부를 수 있으며, 특정한 방식으로 작동하면서 생명을 동반하는 운동 형태를 만든다.” 요기 라마차라까, 숨의 인도 요가학, pp. 16. 17.
이 뿌라나는 그러므로 모든 형태의 일반적인 생명 원리이고, 이른바 인체의 에너지나 생명은 어떤 특이한 인간 혼이 지녀온 보편적 원리가 분화된 것이다.
우주 내에 아까샤 (에테르)를 이용한 에너지들은 시대를 초월한 지혜에 따르면 세 가지 주요 부분으로 나뉜다.
1. 포하뜨, 이는 기독교인들이 영으로 간주하는 것과 유사하다. 이것은 존재 의지이며, 신의 결정적인 생명 원리이다. 이 신은 우리가 모든 형상의 총합이고 모든 의식 상태의 총합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신성한 목적이며, 능동적으로 작용한다.
2. 뿌라나, 이는 의식 원리의 활동, 즉 기독교의 혼과 유사하다. 이 뿌라나는 영혼이나 생명, 그리고 물질이나 본체의 결합 결과이고, 신성한 목적을 수행하는 결합, 활기 그리고 예민함을 산출해낸다.
3. 쿤달리니, 이는 인간 형태와 관련될 때, 물질 자체에 잠재하는 힘이다. 이것은 원자의 통합적 생명이다. 그 원자가 경험의 소주기에 참여하는 어떤 형태와도 분리되어 있다.
샥띠는 힘 또는 에너지이다. 아더 아발론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도대체 샥띠란 무엇이고, 사물 안에는 무의식의 원리가 있다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어떻게 나타나는가. 샥띠는 ‘할 수 있다’ ‘힘을 갖는다’는 ‘샥’이라는 어원에서 온 것이다. 그것은 어떤 활동에 적용될 수 있다. 탈 수 있는 힘은 불의 샥띠이다. 이들은 모두 궁극적으로 다른 모든 형태의 힘이 나오는 근원적인 샥띠(아드야 샥띠)로 환원될 수 있다.” 존 우드로프 경 (아더 아발론), 샥띠와 샥따, p. 207.
그러므로 이 세 형태의 에너지는 하나의 보편적인 생명의 국면들이다. 에테르를 매체 또는 활동장으로 이용하며 그로부터 모든 객관적인 형상들을 만들면서 태양계를 통해 스스로 표현된다. 그 과정은 인도 철학에 따르면 사람에게서 반복된다.
육체는 세 번째 형의 에너지의 구성 부분들 또는 원자들로 표현된 것이며, 그 원자 에너지의 총합을 꾼달리니라고 한다.
“말하자면 나머지 감각 모두가 저장된 센터가 물라다라 차끄라이고, 또아리를 튼 활동 에너지가 꾼달리니, 즉 ‘또아리 튼 것’이다.”
그것은 우주를 창조하고 유지하는 거대 우주적 힘(샥띠)의 개별 육체적 표현이다.” 배산트 G. 렐, 신비한 꾼달리니, p. 40.
육체 그 자체를 인간계의 몸 속에 있는 한 원자로 보면, 척추 기저 센터에 있다고 상정되는 꾼달리니 에너지는 본성 상 양의 원자핵일텐데, 이는 전자로 간주되는 다른 원자들과 함께 하고 있다.
생기체, 또는 에텔체는 이른바 뿌라나라는 감각적인 활기를 부여하는 이원성인 생명 혼이 표현되는 매체이다. 이 이중적 에너지는 생기체에, 그에 따라 육체에도 두 가지 양의 센터를 갖고 있다. 하나는 감정과 감각이 집중된다고 주장되는 심장에, 다른 하나는 마음과 영적 의식이 표현되는 머리에 있다.
렐 박사는 “적절한 뿌라나는 후두와 심장 기저 사이에 위치한다고 말한다.”
“우빠니샤드의 사상가들은 머리보다 가슴(heart: 경우에 따라 심장이라고도 옮긴다)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 거기에 생명의 숨이 거주한다. 다섯 개의 뿌라나와 아울러 눈, 귀, 말, 마음도 가슴에서 나온다. 머리가 아니라 가슴이 마음의 고향이다. 그러므로 가슴은 의식적 생명의 중심이기도 하다. 잠잘 때 혼의 기관들은 가슴에 머물고, 또한 죽을 때 그들은 거기에 모인다. ‘가슴을 통해 우리는 형상을 인식한다,’ 가슴을 통해 우리는 믿음을 인정하고, 아이를 낳고, 진실을 알고, 말 또한 거기에 기초를 두고 있지만, 가슴이 무엇에 기초해 있는가라는 질문을 덧붙이면 화를 내며 대답을 거절한다. 그러나 기관들만이 아니라 모든 존재들은 가슴에 기초해 있고, 그것의 지지를 받는다. 가슴이 브라만이라는 실제적인 정의를 제외해도, 그곳은 혼의 경험적인 고향이고, 그래서 브라만의 고향이다. ‘여기 가슴 안에 한 동공이 있어, 그 속에 우주의 주님, 우주의 지배자, 우주의 장(長)인 그가 거주한다.’ 가슴은 흐리다얌hridayam이라 불린다. 왜냐하면 ‘가슴 안에’ 사는 ‘자는 그’이기 때문이고 (hridi ayam, Chand. 8.3.3.) 한톨의 쌀이나 보리처럼 작다. 즉 가슴에서 창조된 것의 자아로써 뿌루샤(purusha: 보는 자)는 몸 가운데에서 1 인치 높이로 거주한다.” 폴 듀센 박사, 우빠니샤드의 철학, pp. 286, 287.
“이처럼 후기 우빠니샤드의 수많은 문구들은 ‘가슴의 동공에 들어 있는’ 브라만을 경배한다. 우주의 아트마와 내면의 아트만의 일치는 송가. 6.8-16의 따뜨 뜨밤 아시(tat tvam asi)로 표현되고, 또한 이의 모방일 가능성이 있는 브리흐Brih. 5.4의 ‘진리 안에서 이것은 그것이다’라는 뜻인 에따뜨 바이 따뜨(etad vai tad)로도 표현된다. 동일한 공식이 시구에 덧붙여진 산문 구절 속에 있는 까트 4. 3-6. 1에서 12 번 발견된다. 까트 5.14에 따르면 최고의 지복은 이 사고의 의식에 존재한다. 우리는 이와 관련해서 까트. 4. 12-13만을 인용한다.
1인치 높이로, 여기 몸 속에
뿌루샤는 사는구나,
과거와 미래의 주님
그를 알고 있는 자는 더 이상 초조하지 않고,
진리 속에서 이것은 그것이다.
연기 없는 불꽃처럼, 1 인치 높이로
뿌루샤는 크기 안에 있고,
과거와 미래의 주님
그것은 오늘의 그이고 또한 미래의 그라네,
진리 속에 이것은 그것이네 폴 듀센 박사, 우빠니샤드의 철학, p. 170.
여기서 푸루샤가 연기 없는 불꽃에 비유되는 것처럼 S'vet. 6. 19에 나오는 이 문구의 모방 구에는 그것이 연료를 소모하는 불에 비유된다. 반면 S'vet5.9에서는 내면의 아트만과 우주의 아트만 사이의 대조가 극단적으로 이뤄진다.
머리카락 끝을 백번 쪼개고
그로부터 100분의 1을 취해서
혼의 크기를 판정하는 것
그것은 불멸로 간다.
아트만이 가슴에 있는 연기 없는 불꽃이라는 설명은 요기 우빠니샤드에서는 가슴 속에서 타오르는 불꽃 형상을 한 혀의 모습으로 발전되었는데, 이것은 마한. 11.6-12인 초기의 일이었을 것이다. 폴 듀센 박사, 우빠니샤드의 철학, p. 171.
”
문헌들은 자아인 아트만이 가슴 속에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한 설명으로 가득 차 있다. 그로부터 그것은 혈액을 통해 생명 원리로 표현되고 있다. 혼의 본성, 또는 이성적 마음과 자아 의식적 개인은 머리에서 표현되고 그 위치에서 신경계를 다스린다.
“최고 센터들은 대뇌피질에 위치하고, 여기에서 반응과 감각의 지식이 현현된다는 것이 이제 증명되었다. 이 센터들은 수용하고, 즉 지각하고 있고, 지시하고, 즉 감시하고 있고, 뇌의 양쪽 반구에 있는 기초 신경절basal ganglia이라는 두 가지 큰 융기부 안의 보조 센터들을 갖고 있다. 이들은 시상과 corpus striatum으로 알려져 있다. 첫째 것은 주요 감각 센터에 보조적이며, 둘째 것은 대뇌피질에 있는 주요 운동 센터에 보조적이다. 일반적으로 보조 운동 센터들은 의지에 의해 어느 정도는 조절된다... 요기는 시상에 있는 부수적인 신경 센터들에 관심이 있다. 시상의 일반적인 기능은 몸의 모든 부위로부터 감각을 받아들여, 척추를 통해 중계하여 주요 센터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뇌에 있는 최고 반사 센터이고 모든 느낌이 이곳으로 올라가기 때문에 우다나뿌라나Udanaprana라고 불린다. 자극을 받아들이는 척수 안에서 마지막으로 코 뿌리 높이에 있는 벌브Bulb라는 척수 부분으로부터 중계된다.
마음이 흐트러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우다나뿌라나를 의식적으로 조절하여 들어가고 나가는 모든 감각을 요기는 제압하고, 조절하여야 한다.” 배산트 G. 렐, 신비한 쿤달리니, p. 70.
슈리니와사 이엔갈Srinivasa Iyengar은 다음과 같은 공식을 만들었는데, 조잡한 허무주의 학파를 제외하고는 이를 받아들이고 있다고 한다.
1. 인간은 의식, 마음 그리고 몸의 복합체이다.
2. 아트마(자아)는 의식의 본성이며 변할 수 없다.
3. 마음은 비록 내부 기관이기는 하지만,
물질적이며 아트만과 다른 것이다.
4. 우주의 모든 에너지는 개성적이고, 의식과 관련되어 있다.
5. 이 에너지는 뿌라나이며, 마음과 물질 사이의 매개자이다.
“인도 철학은 뿌라나를 우주의 기본적인 에너지이고 운동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뿌라나는 뿌루샤로부터 오거나, 그로부터 시작하는, 그리고 물질에 작용하는 힘으로 이해된다.(영혼의 국면-A.A.B.)”
“동물의 에너지는 그것이 근육을 떠나 외부 대상에 작용할 때까지 모두 신경 에너지이다. 이 신경 에너지가 뿌라나라고 불린다. 서양 과학은 백 년 동안 기계적인 운동 형태로 신경 에너지를 설명하여 왔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동양 철학은 그러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으며, 뿌라나로부터 기계적인 운동을 설명하거나, 의식에 수반되는 에너지로부터 기계적인 움직임을 끌어낸다.
뿌라나는 사이키콘Psychikon 심령, 즉 그리스 철학의 동물 영혼에 상응한다. 이것은 영혼과 물질 사이를 매개하고, 그들을 서로 관계맺게 하는 부류이다.” 슈리니와사 P. T. 이엔갈, 인도 철학의 개요, pp. 58.59.
아더 아발론은 말한다.
“다양한 사람들이 혈액, 심장, 그리고 숨과 같은 육체의 다양한 부분을 ‘혼의 자리’ 또는 생명의 자리로 지정해 왔다. 바이딕Vaidik 체계는 가슴을 의식의 주요 센터로 위치지우고 있는데, 그의 견해는 ‘마음에 세기다(take it to heart)’와 ‘암기하다(learn by heart)라는 어구에서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삐따의 5 가지 기능 중 하나이자, 가슴에 위치한 사다까는 율동감 있게 심장의 수축을 지속함으로써 인식 기능의 수행에 간접적으로 도움을 주었다. 인도 생리학자들이 인식의 자리로 심장을 거론했던 경향이 있었던 것은 심장의 구조를 보는 이런 견해 때문이었다. 그러나 딴뜨라에 따르면, 비록 심장도 뿌라나의 그 국면에서 지바뜨마, 또는 육화된 영혼의 자리로 알려져 있긴 하지만, 의식의 주요 센터들은 두뇌-척추의 차끄라들과 상부의 뇌(샤하스라라)에 존재한다.” 아더 아발론(존 우드로프 경),뱀의 힘, p. 3.
이러한 두 가지 관점이 인간의 현상을 설명한다. 진화가 진행되면서, 물질적인 형태의 생명을 위해 양의 센터 또는 핵은 척추의 기저에 위치해 있고, 감각적이고 의식적인 인간 생명을 위한 양의 센터는 가슴 안에 있지만, 마음과 영적인 생명 원리에 대한 양의 센터는 머리에 있다는 것이 발견되고 입증될 수 있다.
인간 내부의 센터들에 대한 동양적 가르침의 도식과 기법은 모두 증가하는 뿌라나 또는 생명 혼 에너지가 발휘되는 것에 주목하고 있다. 이것을 이해하면 (육체의 자동 제어를 통해서) 영적 인간, 혼의 유산인 혼의 권능과 영적 성격을 입증할 수 있다.
그러므로 모든 방법과 수행의 목적은 혼과 의식적으로 결합하는 것이며, 두 가지 하위 에너지와 물질, 감각적 정신적 본성을 세 가지 에너지들 중에서 최고인, 영적인 생명에 복종시키는 것이다. 이것이 성취되면 영적인 생명 원리는 그 메카니즘을 최고 상태의 완전함에 이르게 하기 때문에 혼은 활기를 얻어 어떤 장애나 한계도 알지 못하게 된다. 물질은 하늘로 상승하게 되어, (어머니라고 불리기도 하는) 물질의 에너지인 쿤달리니 불이 결국 척추의 기저에서 머리 위로 그 위치가 올라간다고 인도인들은 가르친다. 이것은 동정녀 성모가 하늘로 승천하여 자신을 아들인 그리스도, 즉 혼 옆에 자리하게 한다는 로마 카톨릭의 가르침에 상응하는 것이다. 이것은 마음과 뇌 의식 속에 자리잡은, 그리고 그곳으로부터 모든 자연인의 에너지를 통제하는 혼 또는 자아에 의해 의식적으로 일어나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요가 또는 결합으로 신비적 경험일 뿐만 아니라, 생기적이거나 육체적인 것이기도 하다. 이것이 기독교인들이 말하는 하나됨(at-one-ment: 속죄)이다. 이것은 완전한 인간, 즉 물리적, 감각적, 그리고 정신적, 그리고 보편적인 혼과의 의식적 결합이다. 렐 박사는 말한다.
“‘요가’라는 말은 결합 또는 융합한다는 ‘유가’라는 어원에서 파생된 것이다. 용접할 때 동일한 두 금속 조각이 열처리와 망치질에 의해 하나로 되듯이 인도 철학의 요가에서도 보편적 영혼 ‘빠라마뜨마’의 일부인 육화된 영혼 ‘지바뜨마’는 특정한 육체적 정신적 훈련에 의해 보편적인 영혼과 하나가 된다.
요가는 상위 파동에 반응하는 마음의 능력을 고양시켜 우주에서 우리 주변에서 진행되는 무한한 의식적 운동을 지각, 파악, 그리고 흡수하는 과학이다.” 배산트 G. 렐, 신비한 꾼달리니, pp. 13.14.
르네 궤농은 이 결합의 결과를 다음과 같은 말로 요약한다.
“우리가 이미 말했던 것처럼 해방 또는 결합은 똑같은 것으로 ‘상위에서’ 모든 상태들을 포섭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완전한 실현(사다나sadhana)이고, 존재의 온전함이기 때문이다. 이들 상태가 실제로 현현되는지 아닌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들은 형이상학적으로 고려되어야 하는 영원하고 변함 없는 가능성일 뿐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의지의 단순한 효과에 의해 여러 가지 상태의 주인인 요기는 활기를 주는 호흡(뿌라나) 없이 다른 상태에서 벗어나 오직 한 상태와 관계한다. 도구가 많이 있는 것처럼, 그는 등불 하나가 심지 이상의 역할을 하는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다수의 형상에 활기를 줄 수 있다.’ 아니루따는 이렇게 말한다. ‘요기는 우주의 원초적인 원리와 직접 연계되어 있으며, 결과적으로 (이차적으로) 공간 전체, 시간 전체, 그리고 사물 전체와 연계되어 있다.’ 다시 말해 현현과, 그리고 더 상세하게 말해 그 모든 변용된 인간 상태와 직접 연계되어 있다.
[출처] [본문스크랩] [혼과 그 메카니즘] 5장 혼, 에테르 그리고 에너지 |작성자 피노코
http://blog.naver.com/myogasan/30001185133
제7장 결론
이 책에서 우리는 심리학의 두 체계, 동양적인 것과 서양적인 것을 살펴 보았다. 이를 종합하면 우리는 사람이 살아 있는 영혼으로서 어떤 메카니즘을 통해 작용하고 있다는 완전한 그림을 얻을 것이다. 센터들이 위치한 에텔체는 미세하고 보이지 않으며, 오감의 범위를 벗어나 있고, 내분비선들과 신경계 안에서 밀도 있는 물리 영역, 즉 밀도 높은 물리적 현현의 나머지를 조절하고 있다.
혼은 항상 거대한 실재이며, 한 생명의 표현이며, 에텔체와 밀도 높은 몸으로 구성되어 있다. 몸 속에서 특화된 센터들을 진화시키고 밀도 높은 물리적인 것에 영향을 미치는 에텔체에 영향을 미치고 그를 통해 작용하는 것은 바로 혼의 힘이다.
서양인에게 가장 강력한 호소력을 미치는 문제는 어떻게 수술 시에 보다 큰 효율을 얻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혼인 사람은 그의 도구의 조건에 의해 수술 효율이 제한된다. 만약 혼의 중심이 분비선, 신경계 그리고 에텔체를 조정할 수 없고 적절하게 작용하지 않는다면, 혼으로서 사람은 그것들을 고치거나 치유해야 한다. 인간의 분비선이 적절하게 작용하지 않아도 이를 연구, 개선 그리고 완성시키는 데에 별 진척이 없는 것은 인간이 본질적으로 살아 있는 혼이기 때문이다.
의약의 사용을 통해 그리고 다른 수단에 의해 분비선과 신경 센터들에 직접 가하는 작용은 본질적으로 그 작동을 수정하는 것이고, 문제되는 특정인에 의해 원래 창조된 특정의 분비선과 신경 센터들의 최고 상태를 제한하는 것이다. 호흡, 만트라, 자세로 이루어지는 동양적 수행에 의해 영향을 맏을 수 있는 에텔체 내의 센터들도 동일하며, 더더욱 진실이다. 그러한 수행들은 대단히 위험하고, 정신 이상에 이를 수도 있다. 결국 바라건데, 우리는 여러 가지 센터들에 대한 충분한 지식과 정보를 갖고 수행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연구 결과로 세 가지 이론이 분명해졌는데, 사람을 생명, 자기 의식, 그리고 지성적 목적을 표현하는 유기체로 설명하는 삼중의 가설이 형성되게 되었다.
첫 번째는 분비선과 신경계에 사람은 영향을 받는다. 그의 기질, 자연적인 성질, 삶의 경험과 환경의 지성적인 처리는 그의 내분비계에 의해 결정된다. 서양에서는 이것을 강조한다.
두 번째는 에너지 센터들에 의해 사람은 영향을 받는다. 인간 내부의, 즉 에텔체의 특정한 에너지 초점의 정지 또는 활동은 그의 기질, 표현 방법, 몸의 형태와 수명을 결정한다. 물리계에서 그의 활동은 센터들을 통해 흐르는 에너지의 성질에 완전히 의존한다. 동양에서는 이것을 강조한다.
세 번째는 센터들과 아울러 분비선과 신경증은 혼이 발휘하는 조절 또는 조절 부족에 의해 조건지워진다. 우리가 물질적인 면을 모두 보이지 않고 증명될 수 없는 영역으로 내몰아갔다고 주장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주장이 옳을까? 지나간 시대의 결론이 처음에는 모든 면에서 모호한 가정에 기인하는 것으로 생각되지 않았던가? 과거에 증명될 수 없는 것으로 간주된 것이 현 시대에는 증명되었고 입증되지 않았는가? 현재 모호한 요소들을 보다 분명하게 지각하기 위해 직접 이용할 수 있는 많은 증거를 통해 적기에 충분한 방법을 채택하고 기술을 적용할 수는 없을까?
우리가 구조에 관한 사실들을 보았던 것처럼 서양은 진보하고 있다. 사람의 메카니즘은 내분비계와 신경계, 반응 장치에 의해 결정된다. 우리는 이러한 관점으로부터 이 주제에 접근할 수 있고, 사람의 분비선을 다룸으로써 인체의 완성을 꾀하여 결국 사람을 혼이 충만한 빛으로 이끌 수 있을까? 또는 센터들은 혼에 대한 표현 매체이고, 신경계와 분비선들을 통해 몸의 구성과 조절을 맡고 있다는 동양적 주장을 받아들여, 승인하기 힘든 방법을 연구, 적용하여 센터들에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지 않을까?
순전히 물리적인 접근법도 아니고 미숙하게 센터들을 깨어나게 할 위험도 피할 수 있는 제 삼의 길은 있는가? 혼이 그 도구를 완전히 사용하여 센터들의 올바른 활동이 일어나는 데에 요구되는 혼과 몸 사이의 완벽한 상호작용을 이룰 수 있는 해법과 방법을 얻는 것은 가능하지 않은가?
사람은 하나의 혼이며, 따라서 표현 도구, 즉 삼중의 하위 본성인 심령적 정신적 상태의 총합을 조절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이 방법을 통하면 각각의 체계 중에서 가장 좋은 측면들을 전체 인류가 이용할 수 있도록 동양의 지혜와 서양의 지식의 결합을 이뤄내는 것이 가능하다. 사람은 혼이고 몸을 갖고 있고, 하나의 에너지체를 통해 이 둘을 연결시키는 통일적인 매체가 있다는 작업 가설을 가정해 본다.
혼이 실존하고 기관에 활기를 준다는 사실을 확인해 보려는 사람들은 두 집단으로 나눌 수 있다. 열망과 감정, 그리고 물리적 수단을 사용해 왔던 신비가들이 있고, 보다 정신적으로 순수하게 영적인 지식에 이르기 위해 지성과 마음을 사용해 왔던 사람들이 있다. 이렇게 장구한 계열의 신을 아는 자들은 혼을 자아, 사랑하는 자, 하나, 또는 신, 또는 그리스도 등의 용어를 사용해서 표현하고 있지만, 우리의 목적을 위해서는 그들이 뭐라고 이름했는 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신비가는 단식과 과도한 수련을 통해 몸을 채찍질하고 학대했다. 그래서 그는 육적인 욕구를 줄였다. 여기에 사랑하는 자에 대한 강렬한 헌신과 일별에 대한 열망을 더했다. 격렬한 수행의 세월 끝에 찾았던 것을 발견하고 그 사랑하는 자와 통일되었다.
두 번째 집단은 이성을 사용했고, 마음 조절법mindcontrol을 수행하고, 엄격한 감정적 육체적 조절을 더했다. 집중적인 탐구를 통해서 그들도 실재를 발견했고 영원한 계획의 광범위한 의식으로 들어가 보편적인 혼과의 결합에 이르렀다.
두 집단은 모두 혼 경험의 진실을 증명하지만, 자신의 특별한 성향과 방법에 제한되었고, 그 증거는 일방적이었다. 하나는 너무 환상적이고, 신비적이며 감정적이다. 다른 것 또한 너무 학구적이고 지적이며 형구축적form-building이다. 이제, 인간 지식의 폭넓은 유포와 문헌, 대화와 왕래를 통해, 이들 간의 긴밀한 교제를 통해 최초로 융합이 가능하게 되었으며, 서양과 동양의 철학자들과 성자들의 결론으로부터 현 시대에 영적인 성취 방식이 될 수 있는 하나의 체계와 하나의 방법을 종합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시작 단계를 어떻게 밟는 것이 실용적인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a) 서양의 지식을 이용한 육체에 대한 분별력있는 대우, 특히 내분비계의 예방 의학과 일반 건강과 관련해서 그러하다.
(b) 현대 심리학과 분별력있는 심리 분석의 기본적인 사실의 지적인 이해와 적용, 그래서 혼이 표현하는 정신적, 감정적 그리고 육체적 메카니즘의 지식을 얻는다.
(c) 육체는 욕망과 감정적 본성에 반응하고 그에 의해 조절되는 자동 기계이고, 그래서 (음식에 대한 사랑에서부터 신에 대한 사랑에 이르기까지) 이 의식의 감정적인 상태는 이성적인 마음에 의해 조절될 수 있다.
(d) 이 모두로부터 마음의 법칙에 대한 연구가 성장해서 마음과 뇌 사이의 관계가 이해되고 이용될 수 있을 것이다.
이 네 가지 요점이 파악되어 사람의 개성에서 그 효과가 느껴지면 우리는 통합적이고 협동적인 유기체를 갖게 될 것이다. 그러면 그 구조는 혼이 지도할 준비가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위의 단계들은 순차적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동시적으로 전진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또한 혼과 혼이 드러내는 세계의 완전히 지성적인 앎은 이 요약된 자질을 갖춘 사람에게만 가능하다는 것이 명백하다. 신에 대한 직감, 진실과 아름다움에 대한 감사, 그리고 신비한 광경과의 접촉은 가슴 센터가 깨어나 작용하는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가능하다.
그러한 신의 연인들은 모든 시대에 존재한다. 그들은 느끼고, 직감하고, 사랑하며 찬미하지만, 혼, 마음 그리고 머리 사이의 연결은 부족하다. 이런 신비적 자질에 지성적인 것이 더해지면, 머리 센터는 깨어나고, 송과선은 더 이상 위축 상태에 있지 않고, 혼의 자리와 지휘하는 영적 의지의 자리로 알려지게 된다. 이 두 센터들이 모두 깨어나면 인류는 성화된 가슴과 두뇌를 갖고 일하는 영적인 개성들에 대한 큰 이해를 얻게 되고, 세계적 사상에 그들은 봉인을 남길 것이다. 지금까지는 신비가들의 방식이 다수를 위한 것이었고, 지성의 방식은 소수를 위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인류는 이제 그 전제를 다수의 신비한 경험에 두면서 감정과 찬미로부터 지식으로, 그리고 신의 사랑으로부터 신의 지식으로 전진할 수 있다.
이것은 동양의 지혜가 서양의 지식에 추가되고 혼의 과학의 기법이 서양의 지성적 유형에 부여되는 경우일 것이다. 이 기법을 상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지만, 다음과 같이 8 단계로 나누어서 간단히 정리해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1. 타인과의 관계의 조절. 동양의 오계(五戒)에서 규정되어 있는 무해함이라는 말로 요약된다. 오계란 무해함, 모든 존재에 대한 진실, 절도 행위 금지, 음란 행위 금지, 탐욕의 금지. 엘리스 A. 베일리, 혼의 빛, p. 184.
이다.
2. 다섯 가지 규칙으로 요약되는 삶의 청정함: 내적 외적 정화, 만족, 열렬한 열망, 영적인 학습과 이슈와라(신성아)에 대한 헌신. 상동, p. 187.
3. 균형
4. 생명 에너지의 올바른 조절과 에텔체에 대한 혼의 직접적인 활동. 이 에너지 조절과 그로 인한 센터들과 육체의 조절은 청정함과 균형이 이루어진 뒤에만 가능하다. 그는 훈련을 통해 동물적 기질의 조절을 배우고 더 이상 노여움과 이기심에 의해 휘둘리지 않는 시점에 이를 때까지 에너지를 다스리는 법칙에 대한 앎이 허락되지 않든다.
5. 추상 작용. 자기 의식을 머리에 집중해서 거기서 혼으로 작용하거나 객관적이고 구체적인 사물로 나가 있는 의식을 회수해서 내면으로 돌리는 능력을 이르는 말이다.
6. 주의 또는 집중. 이것은 한 점을 향하는 살아 있는 마음으로, 감정 대신에 활동으로 방향을 돌리게 한다. 그래서 감정적이고 육체적인 인간은 집중된 마음에 의해 조절된다.
7. 명상은 주의력이나 집중력이 확장된 것이며, 혼과 그 관심 사항에 마음을 집중하는 능력을 주는 것이다. 이것은 유기체에서 급격한 변화가 일어나게 만들어 “생각하는 대로, 존재한다.”는 명제의 진실을 실증한다.
8. 정관contemplation은 자기 왕국 속에서 형상들을 바라보는 혼의 행위이며, 본성 상 다섯 번째 또는 영적 왕국에서 발견되는 에너지들을 접한다. 이 행위 뒤에는 (조절된 마음에 의해서) 머리 속으로 혼의 지식과 에너지가 흘러 들어온다. 이러한 혼의 활동은 이른바 광명을 이뤄낸다. 그것은 전신을 에너지화시키고 적절한 리듬과 진보 속에서 에너지 센터들이 깨어나게 한다.
생기체와 에너지 센터들을 통해 작용하는 이 의식적으로 지휘된 영적인 에너지는 우리가 완벽한 건강과 혼의 표현을 위해 육체와 내분비계가 결국 완벽한 기관을 갖추어야 함을 제시한다. 이런 식으로 사람은 명확한 혼의 지식에 이를 수 있으며, 명백한 목적을 지니고 그 메카니즘을 사용할 수 있는 “더 심오한 존재”임을 알 수 있다는 가르침을 배운다.
위의 방법을 따름으로써 동서양의 위대한 신비가들, 성자들, 그리고 달인들Adepts의 삶을 연구하면 많은 환각과 정신병적 조건의 기미를 뺀 뒤에 현상적인 효과들에 대해 많은 정보를 얻을 것이다. 여러 가지 형태의 투시, 예지 그리고 텔레파시 의사소통, 투청력과 신비화된 특별한 능력을 우리는 종종 본다. 그러나 이 모든 힘들은 자신의 영적인 현현들과 하위의 현현들도 생기게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A. E. 포웰은 이렇게 말한다.
“두 가지 종류, 즉 낮은 투시와 높은 투시가 있다. 낮은 것은 중앙 아프리카의 원시인들과 같이 미개발된 사람들에서 일어나기도 하는데, 특화된 기관을 통해 소통되는 정확하고 명확한 감각 지각보다는 에텔체 전체에서 일어나는 모호하고 포괄적인 느낌의 일종이다. 그것은 실제로 인간의 조절 범위를 넘어선다. 신경계와 지나치게 밀접하게 관계맺고 있는 에텔 복체 중 하나에 대한 작용은 다른 하나에 신속하게 반응한다. 낮은 투시에서는 상응하는 신경의 교란이 교감 신경계 내에서 거의 대부분 일어난다.
보다 발전된 인종에서는 모호한 민감성은 정신 능력이 개발되면서 대개 사라진다. 그 이후 영적인 인간이 전개되기 시작하면 그는 다시 투시력을 얻게 된다. 그러나 이 시기의 능력은 의지의 조절 아래에서 정밀하고 정확하며 감각 기관을 통해 수련된다. 신경 작용은 뇌척추계에서 거의 전적으로 일어나게 된다.
하위 형태의 심령력은 대부분 동물과 대단히 비지성적인 인간에게 자주 나타난다. 병적으로 흥분하고 통제되지 못한 심령력은 뇌 발달과 교감 신경계의 지배가 미약하고 에텔 물질의 지나친 비대화를 포함한 신경계에서 핵을 지닌 신경절 세포가 큰 핵을 지니고 있어서 조잡한 아스트랄 파동에 쉽게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A. E. 포웰, 에테르 복체, pp. 102. 103.
고양이와 개와 저급한 인간들은 정상적이고 보다 지적인 사람에게 나타날 수 없는 것을 빈번히 보고 들을 수 있다. 그러나 이 능력은 무의식적이고, 사람은 환각의 희생자가 된다. 이처럼 성자와 투시자도 보고 듣지만, 그들의 능력은 의지에 따라 이용되고, 완전히 조절된다. 이 문제에 대한 연구는 대부분 모든 심령적 연구가들에게 열려져 있고, 생기체와 센터들의 전제를 받아들이면 실제적인 지식을 많이 얻을 수 있다.
다양한 센터들이 깨어나면 물리적인 것보다 더 미세한 물질의 상태가 드러난다는 것을 혼의 과학을 가르치는 동양의 스승들은 주장한다. 그러나 영적인 사람이 관심을 갖는 것은 횡경막 위의 센터들이 대부분인데, 이는 자신의 동료들의 영적 지각, 정확한 이해 그리고 해석과 같은 능력을 수여하여 그리스도가 사람의 내면에 있다는 것을 알고, 사람이 존재하는 이유와 행위하는 이유를 파악할 수 있다. 영감의 에너지, 즉 그 모든 것의 최상의 힘은 목 센터를 통한 창조적인 작업과 심장 센터를 통한 인도주의적 사업에 대해 영감을 준다.
이 부류에 의해 주장되는 두 번째 효과는 횡경막 아래의 힘을 위의 센터들로 옮기는 것이다. 진화와 명상의 효과에 의해 특정한 양식의 소화 기관과 생식계와 신경 메카니즘들이 작업을 진척시킬 수 있도록, 자동적으로 몸을 에너지화시키는 정상 기능을 수행하는 세 가지 하위 센터들(척추 기저, 천골 센터와 태양총)을 벗어나 세 가지 주요 차크라들(머리, 심장, 그리고 목)에 사람은 의식적으로 작용을 가할 수 있다. 이 이론에 따르면 대다수 사람이 “횡경막 아래”의 삶을 살고 생명력은 순전히 동물적이고 감각적인 삶에 집중되어 있으며, 성적인 생활과 감정적인 삶은 잠들어 있고, 천골과 태양총으로 그리고 거기를 통해 흐르는 모든 힘은 어떤 생리학적이고 하위 심령적 과정들을 자극한다. 그러나 사람이 진화하면서, 힘의 방향이 변한다. 우리는 그 힘이 이중적인, 즉 한편으로는 생명력이고 한편으로는 혼의 힘으로 하나는 혈액을 통해 표현되고 다른 하나는 신경계를 통해 표현된다는 것을 보았다. 생명력의 측면은 모든 몸의 기관과 구조를 생기있게 하고 능력을 부여하는 기능을 계속 수행해 나가지만, 지금까지 상대적으로 정적인 혼의 힘은 위로 향하기 시작한다. 척추 기저 센터의 생명력은 차례로 각 센터를 통과하여 각 지점에서 혼의 에너지를 모아 증가시키면서 척추 통로를 통해 머리로 전달된다.
이러한 의식 전달의 심리학적 효과는 흥미있다. 혼이 머리 안에서 (과학적인 동양의 서적들에 적혀 있는 것처럼) “옥좌에 앉아” 자기의 힘을 통해 척추 기저에 있는 힘을 끌어 올린다. 그러면 영적인 에너지와 물질 자체 내에 있는 힘이 혼의 인력 에너지를 통해 완전히 섞이게 된다. 이것은 쿤달리니 에너지가 오른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혼의 지배적인 자기력에 의해 수행되어야 하고 특정한 센터에 대한 명상이나 물질 에너지에 대한 의식적인 행위에 의해 이루어져서는 안된다.
천골 센터의 혼 에너지는 최고의 창조 센터인 목으로 옮겨져야 한다. 그래서 집단을 위해 발전되는 창조 작업이 강조될 것이고, 이와 관련된 사람의 활동적인 성 생활을 강조하지는 않을 것이다.
태양총 센터의 에너지는 이와 함께 심장으로 이동하여 전달되어야 하고, 의식은 더 이상 자기 중심적이지도 순전히 이기적이지도 않지만, 사람은 사람과 삶에 대한 태도에서 집단의식적이고 포용적이 된다. 그는 더 이상 적대적이고 배타적이지 않다. 그는 알고 이해한다. 그는 동정, 사랑 그리고 봉사한다. 센터와 센터 사이, 그리고 센터와 분비선 사이의 이러한 관계가 일단 파악되면 폭넓은 연구 분야가 존재하게 된다. 심령적인 효과와 아울러 생리학적인 효과는 자세한 연구를 보증할 것이다.
시대를 초월한 지혜에 대하여 공부하는 학도들이 또 다른 주장을 하는 것도 흥미있다. 사람이 목 센터가 작용하는 매우 높은 진화 상태에 이르면, 세계의 일에서 자기 위치를 갖기 시작한다. 그는 세계 활동 중의 어떤 분야에서 특정한 결과를 얻는다. 그의 개성은 체계화된 것으로 간주될 수 있고, 스스로 성숙에 이르렀다고 생각할 수 있다. 심리학자들은 뇌하수체는 감정과 정신적 특성의 자리라고 말한다. 한 엽lobe에 추론적인 마음이 자리하는 한편, 다른 엽은 상상적인 감정적 능력과 시각화 능력을 담당하고 있다.
창조적인 능력을 지녀서 개발된 개성을 갖은 사람의 경우에는 뇌하수체의 두 가지 엽들은 그러한 요구를 감당할 수 있고, 혼이 움직이고 표현되는 물질적 국면의 상태, 메카니즘이 그것들로부터 유래할 수 있다. 이 분비선은 미간 센터와 관련된다. 이 센터는 혼의 에너지에 반응하는 머리 센터에 음성적이다. 개괄한 기법과 일치해서 혼이 통제력을 얻어, 머리 센터를 활성화하고 위축된 송과선을 어릴 때처럼 작용하는 상태로 바꾸면, 긍정적인 국면이 그 부분을 작동시키기 시작한다. 부정적인 센터와 그 대응 센터인 뇌하수체 사이에서, 그리고 긍정적인 센터와 그 대응 센터인 송과선 사이에서는 어떤 관계가 세워진다.
시간이 경과하면, 자기장이 세워지고, 혼과 몸이 만나 아버지와 어머니가 관계하면 혼은 사람의 의식 속에서 탄생하게 된다고 한다. 이것은 신의 고향에서 그리스도가 탄생하는 것이고, 진정한 인간이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육체의 성 기관들과 그 생식 활동들은 외부적으로 구체화된 상징이다. 매우 광범위하게 만연되어 있는 성 주술의 남용은 혼과 몸 사이의 관계를 보여 주는 머리 속에 있는 두 가지 에너지 센터들 사이의 진정한 영적인 결합 또는 혼합에 왜곡을 낳는다. 진정한 과정은 머리 속에 집중된 인간 자신의 본성 안에서 진전되며, 그 관계는 남녀 사이에서 일어나는 대신에 혼과 몸 사이에서 일어난다.
두 가지 머리 센터와 그에 상응하는 분비선들 사이의 이러한 관계에 대해 주장하는 또 다른 효과는 둘 사이의 상호작용은 빛이 나타나게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제자들에게 “그들의 빛이 나타나게 하라”는 명령을 한 것을 포함해서 세계의 경전들에는 이와 관련된 확실한 증거가 많이 있다. 신비가들의 삶에서도 산적한 증거들이 있다. 이들은 저작에서 자신들이 목격해 왔던 빛을 저작을 통해 증언하고 있다.
나는 일군의 학도들에게 자신들의 일의 결과로 어떤 흥미있는 현상을 알게 되었는지를 묻는 편지를 보냈다. 그 편지는 신경과민증 환자들과 몽상가적 유형의 사람들에게는 보내지 않았지만, 비즈니스, 예술과 문학 분야에 종사하는 남녀에게 보내졌는데, 그들은 신뢰를 보내왔다. 75 퍼센트가 머리에서 빛을 보았다고 증언했다. 환각 상태였을까? 그들은 상상의 희생자들이었을까? 그들이 본 것은 무엇일까? 그리고 항상 보는 것일까?
여기에도 흥미있는 연구 분야가 있으며, 그 결과들은 지금 과학에 의해 인식되고 있는 것처럼 빛이 물질이며, 물질이 빛이라는 사실에 기초를 두고 있을 것이다. 만약 혼이 작용하고 있고, 사람이 그 혼과 의식적인 결합을 이뤘다면, 관련된 특별한 자극을 통해 신체의 가장 중요한 센테, 즉 머리 센터에서 육체와 관련된 주요 점에서 에텔체의 빛을 인식할 것이다. 바조니 교수는 말한다.
“우리는 지구 상에 있는 모든 형태의 물질이 92 개의 다른 종류의 원자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들은 모여서 분자를 이루고, 셀 수 없이 많은 것으로 결합되어 주변에서 보는 모든 체들을 형성하고, 그 물질들로 우리 몸들을 형성한다. 이제 이들 92 가지 종류의 원자 중에 어떤 하나가 과학자들이 잘 알고 있는 방식으로 자극되면, 빛, 일반적으로 색채를 지닌 빛을 방출하게 할 수 있는데, 이 빛의 본성은 92 가지 원자마다 각각 특이하고 특징적이다.” C. B. 바쪼니, 우주의 핵, p. 31.
에텔체의 가정을 받아들인다면 이것은 우리의 문제에 어떤 빛을 던져 주는 것인가? 동서양의 고대 그림들에서 성자들과 신의 머리 주변에 있는 후광은 예술가들이 영적인 의미만을 부여한 것이 아니라 물리적인 의미에서 깨달은 사람들을 그리고 있다는 것을 예술가들이 알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닐까? 이것들은 연구되어 증명되거나 논박되어야만 한다.
혼의 제어 기법에 기초한 서양의 성취와 동양 철학에 의해 단일한 인간에 대한 설명을 찾는 두 가지 위대한 사상 학파들을 통일하는 가능성은 하나의 실험과 같다. 서양 학도가 전제로 간주하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마음을 연다면, 이 책에서 제시한 논증들을 진실로 증명하거나 틀렸다고 거부하려면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매터링크는 다음과 같은 결과에 대해 허버트 스펜서를 인용한다.
“능력을 최대로 신장하려고 하지만, 그것이 무익한 상상이라고 포기해 버리기 때문에 우리가 헛되이 파악해 보려는 위대함을 다른 과정보다 완전히 깨달을 수 있다... 계속해서 알아내려고 하지만 앎이 불가능하다고 확신하면서 포기하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사물의 존재를 통해 그것을 알 수 없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 최고의 지혜와 최고의 의무와 똑같다는 의식을 생생하게 유지할 수도 있다.” 모리스 매터링크, 빛을 넘어서, p. 95.
그러나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해도 전망을 어느 정도 분명하게 하고, “확신을 깊게” 하면, 우리가 “살아 있고 움직이며 존재성을 갖추고 있는” 알 수 없는 본질적인 현실을 은폐하는 형태와 측면들을 더 잘 이해하게 된다.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인간 가족이든 혼의 왕국에서 시각화되고 접촉되는 형태이든, 그것이 현상 세계라는 것을 인정하면, 결국 점진적으로 (존재의 크기가 커지는) 형상들은 그 본질적인 삶에 대한 확장된 진실을 우리에게 드러내 줄 수 있다. 메카니즘이 개발되고 개선됨에 따라 우리의 신성의 개념도 그렇게 될 것이다. 에드워드 카펜터는 이러한 생각을 다음과 같은 말로 표현하고 있다.
“위대한 저작인 황금 가지에서 프레이저 박사는 독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로 끝을 맺고 있다. ‘자연의 법칙들은 우리가 세계와 우주의 고상한 이름들로 위엄을 갖춰 놓은, 계속 변화하는 주마등과 같은 생각을 설명하기 위해 고안된 가정일 뿐이다. 과거의 분석에서 마법, 종교 그리고 과학은 오직 (생각의) 이론일 뿐이며, 과학이 그 선구자들을 밀어내면, 그 이후 몇 가지 더 완벽한 가정에 의해, 즉 현상을 보여 주는 스크린 위에 그림자가 나타나는, 아마 현 시대에 사는 사람들이 생각할 수 없는, 완전히 다른 방법에 의해 대체될 것이다.’
나는 프레이저 박사가 ‘현상을 보는 방법’이 과학적인 방법과는 다르다고 생각한 것은 올바르다고 본다. 그러나 이 변화는 과학 자체의 성장에 의하거나 그 ‘전제들’의 확장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가슴의 성장과 확장에 의해, 그리고 그 심리학과 인식력에서 변화가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한다.” 에드워드 카펜터, 이교도와 기독교 교의; 그 기원과 의미, p. 278.
매터링크는 이것을 매우 간결하게 이렇게 요약한다. “우리의 시야로부터 일광을 가리는 안개는 저지대에서만 퍼져나오는 것처럼 우리는 몸에서부터 나오는 개념들을 맑게 할 필요가 있다. 파스칼은 단호하게 말했다. ‘우리 존재의 협소한 한계들은 우리의 시야로부터 무한성을 가로막는다.’”
(이렇게 표현될 수 있다면) 초자연적인 것을 논박하고, 신비가와 투시가가 증언하는 주관적인 상태가 단지 자연 에너지와 힘을 증명하는 것일뿐이라는 점을 밝히기 위해 실제적으로 암시가 이루어져야 한다. 지금은 최소한 어느 정도 이해하고, 사용할 수 있는 힘들을 수 세기 전에는 인정할 수 없었던 것처럼 현대 문명의 영광인 그러한 힘들을 현재 인정하고 사용할 수 없다. 이 혼의 힘들 중에서 하나가 자연적인 사실이라는 것이 증명되면 새로운 세계의 입구가 인류 앞에 열릴 것이다. 리어리 박사는 이것을 이렇게 평가한다.
“어떤 육체적인 구조의 활동으로 설명될 수 없는 개성의 기질, 특성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단순한 미신이라고 간단히 결론지워버릴 수 있는 논점도 아니다. 그것은 널리 유포되어 있고, 감정으로 꽉 차 있고, 심리학자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을 정도로 무시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영적이거나 아니거나 그러한 특성이 있다면 다시 한번 언급할 가치가 있으며, 정의 또는 가정 상 구조에 기초해 있지 않고, 가장 사소하고 가장 중요하지 않은 것을 인정하는 태도를 조금이라도 허용하면 과학의 전 분야에 불가피하게 그리고 완전히 부정적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그것은 결정론이 진정한 결정론인 것은 반드시 그래야만 하기 때문이다.” 다니엘, H. 리어리 박사, 현대 심리학: 정상과 이상, pp. 191. 192.
우선 활력있는 혼과 관련된 동양 철학도의 주장이 증명되거나 논박될 수 있는 실험실이 있어야만 한다. 죽음의 현상은 혼의 철수라는 각도에서 연구될 수 있다. 물론 인체의 빛 방사는 관심을 끌어 왔다. 척추와 에너지 센터들과의 관계에 대한 연구는 빠리 솔본느 대학의 바라둑 박사가 45 년 전에 몇 가지 흥미있는 작업을 했지만, 아직 새로운 연구 분야이다. 그의 책 L’Ame Vitale은 추측이긴 하지만, 암시적이고, 그의 주장은 증명될 필요가 있다.
생기체와 이것이 신경계와 분비선에 미치는 효과라는 주제 전체는 광범위한 연구 분야를 열어 놓는다. 인간의 에텔체와 신경 기관의 관계 뿐만 아니라 행성적 에텔체 또는 유기체로서 그 위치를 갖고 있는 에테르와의 관계는 아직 다루어지지 않은 분야이다.
둘째로 빈번히 증명되는 머리의 빛에 대한 사실과 본질에 대해서 증거를 모으는 것이 가능해야 한다.
텔레파시의 본성에 대한 최근의 두드러진 실험들은 올바른 방향에서 이루어지고 있으나 텔레파시 기법은 아직 유치한 단계에 있다.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지는 의사소통 사이에 구분이 생기면 많은 것이 드러날 것이다. 앞의 것은 정신적 텔레파시이지만, 혼과 혼, 그리고 혼과 뇌 사이에서 벌어지는 교신은 훨씬 더 드문 것이다. 이 후자의 형태는 영감이라고 불려 왔고, 세계의 경전들과 이른바 “영감을 받은” 저술들로 나타났으며, 위대한 발명가와 과학자들, 시인들과 예술가들의 정신적 과정들을 인도해 왔다.
텔레파시와 영감은 빛 그 자체나 라디오처럼 개별적인 인간 에텔체와 이것이 우주적 에텔체와 맺는 관계에 의존적이다. 그들은 영혼과 혼의 더 미세한 세계를 증언한다.
새로운 개혁이라는 책의 맺음말에서 푸핀은 이렇게 말한다.
“이 초물질적인 물질의 의미를 우리가 해독하려고 시도할 때 혼의 창조력은 유일한 안내자이다. 그것은 한 사람의 혼을 다른 사람의 혼과 비교하고 하위의 동물의 혼과 비교하는 가장 믿을 만한 기준을 제공한다. 양적인 측정의 과학적인 방법들을 어느 정도 닮은 이러한 비교는 문명이 시작된 이래 계속되어 왔다. 여러 가지 면에서 이 연구 절차는 관찰, 실험 그리고 계산에 의한 과학적인 연구 방법에 상응한다.
그것이 정밀성이 부족한 것은 주의깊은 비교 고찰에 의해 여러 세기 동안 정성적qualitative 측정을 하면서 생겨난 엄청난 시행착오들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의 혼이 동물 혼에 비해 훨씬 더 우월할 뿐만 아니라, 이러한 차이가 몸 구조의 차이보다 훨씬 더 크다는 일반적인 판단에 이르게 된다. 또한 비교에 의해서 다른 모든 차별화된 요소들 위에 우뚝 솟은 한 가지 요소가 드러났다. 그것은 영적인 요소였다. 인간 혼의 창조력은 인간 의식에서 새로운 세계를 창조했는데, 그것이 바로 영적 세계이다.” 미카엘, 푸핀, 새로운 개혁, pp. 264, 265.
가능성이 있는 다른 연구 분야로는 인간의 오라aura에 대해 킬르너 박사가 작업을 진전시킨 것이 있다. 그는 이것을 인간의 분위기라는 책에서 구체화했다. 비범한 힘에 대해 많은 계열들의 연구를 독자들을 위해 잘 요약해 놓은 것으로는 피더랄 인디펜던트라는 호주의 정기간행물에 나오는 최신의 글이 있다. 이로부터 두 문단을 인용한다.
“아인슈타인의 최신 상대성 이론을 연구해 온 과학자가 최근에 그리스도가 물 위를 걸었던 사건을 새롭게 조명했다. 연구 결과로 H. H. 쉘던은 회의주의자들이 오랜 동안 조롱해 왔던 성경의 이야기가 과학적 법칙으로 설명 가능한 사실이라고 주장했다. ‘기적은 회의주의적 마음을 지닌 사람들에게도 받아들여질 수 있다. 상대성 역학의 법칙과 전기 법칙은 하나의 공식으로 환원될 수 있고, 전자기 힘이 중력에 영향을 미쳐, 이를 완전히 조절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다면 그것을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라고 셀던 교수는 말했다.
아인슈타인의 최근 수학 이론에 따르면, 오직 하나의 본체가 있으며, 전기 및 중력 성분을 포함하는 하나의 보편적인 법칙이 있고, 양자는 모두 다른 것에 영향을 미친다. 이제 이러한 발견이 이루어진 결과로써 비행기를 엔진이나 물질적인 지지 없이 고도를 유지시키고 창에서 떨어지는 것을 두려워 하지 않고 공중에서 걸어나오는 일들이 쉽게 일어날 수 있음을 보여 주는 연구 분야라고 셀던 박사는 믿고 있다.
‘만약 이 이론이 전기와 중력이 사실상 같다는 것을 증거로 세운다면 우리는 실제로 중력 에너지로부터 우리 자신을 격리시킬 수 있다’고 그는 선언했다. 이러한 믿을 수 없어 보이는 가능성의 실제적인 증거로 쉘던 박사는 자기에 민감한 퍼멀로이(니켈과 철의 합금) 막대기가 자석 밑에 놓이면 어떻게 공중에 혼자 매달리게 되는지를 들었다.
아인슈타인의 새로운 이론적 조명으로 발이 물 표면에 닿자마자 밑으로 가라앉게 하는 중력 법칙에서 그리스도가 자유로웠던 것은 몸 속에 막대한 양의 전자기가 있었기 때문이었으며,
이것은 그의 개성과 생명력으로부터 솟아나는 어떤 에너지에 기인한 것이었다. 그리스도의 모든 그림에는 머리 주변에 후광이 그려져 있다. 한때 이 후광은 그의 사도들이 과도하게 상상한 결과로 생각되었다. 그
러나 지난 몇 년 동안 심령 현상을 연구한 많은 학도들과 함께 과학은 모든 인간에게 어떤 강력한 전기 기계에서 방출되는 발광과 흡사한 후광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실제적인 실험으로 보여 주고 있다.
그러한 주장은 과학이 영적인 일들과 물질적인 것을 구분짓는 경계선을 급속히 관통하고 있다는 진전된 증거이다. 일단 상위 법칙의 지식은 하위 법칙들의 저항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으면, 우리는 진정한 영적인 유산으로 들어갈 것이다.”
우리는 종교가 과학적인 근거에 서게 될 그 날의 여명을 고대하고 있으며, 푸핀 박사가 덧붙여 말한 것처럼 여러 시대 동안 목격한 진실들이 증명되고 입증될 것이다.
“그렇다, 신의 영적인 현실들은 볼 수 없지만, 형성되어 있는 물리적인 사물들 속에서 드러나는 물리적 실재에 의해 설명되고 이해될 수 있게 된다. 사도의 말에 대한 이런 해석에 따르면 물리적인 현실과 영적인 현실은 서로를 보완한다.
그들은 동일한 현실의 두 가지 극단terminals으로, 한 극단은 인간의 혼 속에 거주하며 다른 것은 외적 세계의 사물 안에 있다. 과학과 종교가 왜 서로를 보충해야 하는지 기본적인 이유 한 가지가 여기에 있다. 그것들은 신성이 거주하는 세계로 인간 혼이 들어가는 입구에 세워진 두 개의 기둥이다.” 미카엘 푸핀, 새로운 개혁, p. 272.
그때 새로운 능력, 새로운 이상, 신과 물질에 대한, 생명과 영혼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지닌 새로운 인종이 출현할 것이다. 그 인종을 통해 그리고 미래의 인류를 통해 메카니즘과 구조와 아울러 그 메카니즘을 사용하여 그 자신의 본성, 즉 사랑, 지혜 그리고 지성을 나타내는 혼, 즉 본체도 알게 될 것이다.
과학은 이 궁극적인 가능성을 알게 되었고, 진화 과정의 경향은 형상과 생명 사이의 보다 완벽한 적응을 향해 가는 것이라는 점을 주목해 왔다. 모든 창조를 통해 모든 곳에서 한 가지 목적이 작용하고 있으며. 완벽을 향한 의지가 현현하고 있다.
그 목적과 의지는 사랑과 지혜에 의해 조절되고 그 두 가지 형태의 에너지, 즉 영혼의 목적과 혼의 견인력은 물질 측면의 완성에 지성적으로 적용되어 있다. 영혼, 혼 그리고 몸의 성스러운 삼개조(triplicity: 삼위일체)는 세계 속에서 풍부한 심상, 색채, 형태로 현현하고, 세계의 경전 속에서 인류를 위해 표현된 완성을 향해 모두 전진해 갈 것이다. 이러한 진리에 대한 브라우닝의 환상과 묘사는 우리의 연구 결과를 요약해 줄 것이고, 이 글을 끝맺는 데에 어울릴 것이다.
“-그리고 신은 새롭게 하시니
고대의 환희를. 그래서 모든 것 속에 살고,
생명의 순간적인 시작으로부터, 마지막에 이르기까지
사람에게는 이 계획의 완성
존재의 그것, 그의 특성들은 여기로 그리고 저기로
가시적인 세계 도처에 흩어졌으나,
결합되기를 청하였네, 희미한 단편들이 원했으니
어떤 경이적인 전체 속에서 결합되기를
불완전한 성질이 창조를 모두 경과하여
하나의 피조물을 만들자고 제안하여,
이 모든 흩어진 광선들이 만나야 하는 어떤 점
사람의 능력 속에 수렴되는...
모든 종족이 똑같이 완성될 때
사람으로서, 말하자면 모두가 인류를 향해
그리고 그 목적을 만들어 저 멀리 두었네
그러나 완성된 인간 내면에서 새롭게 시작하는
신을 향한 성향. 예언은 말했으니
사람의 근접함을, 그래서 사람은 자아 속에서 일어나
8월의 대망, 상징, 유형들
희미한 광채 중에 계속 전진해 가는
저 영원한 원 속에서 생명은 추구하네.
사람들이 자기 본성의 경계를 통과하기 시작하여
확실히 바뀐 새로운 희망과 돌봄 발견하고
적절한 기쁨과 슬픔, 너무나 크게 자라네
옳고 그름의 편협한 신조, 사라지고
측량하기 힘든 선에 대한 갈증 앞에, 평화
그들 내면에서 점점 더 상승하네.
그런 사람들이 지금도 지구에 있구나,
평온히. 반쯤 이룬 피조물들의 라운드 가운데에” 로버트 브라우닝, 파라켈수스
[출처] [본문스크랩] [혼과 그 메카니즘] 7장 결론 |작성자 피노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