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게시판
신효순, 심미선의 6주기를 맞아 과연
한국에 있어 미국은 우방인가,
미국에 있어 한국은 식민지인가
효순, 미선이 사건이 군사훈련중에 일어난 단순한 교통사고인가?
이 사건은 미국인의 속마음을 한국인의 속마음을 들킨 사건이 아닌지?
미국인은 한국을 아직도 식민지로 생각하고 있으며
종미.사대주의, 한나라,뉴라이트, 기독교 세력, 일반 대중의 일부는 아직도 미국을
메시아로 여기고 있는지 ?
[퍼온 글입니다]
탱크 조종 전문가 '이기환'씨의 사건 보고서
미군 장갑차 여중생 압살 사건의 충격적인 진실을 말한다
미군이 운행하는 장갑차에 의해 한국의 신효순 심미선 두 여중생이 깔려죽은 사건은
단순한 사고사가 아니라 여중생들을 닭 몰듯 장난 삼아 몰고 희롱하며 깔아 죽였다는 사실이고
그것도 모자라 전 후진을 반복하여 확인 압살까지 강행한 천인공노할 만행이었다는 사실이다.
이 그림을 보자. 그림은 미군 장갑차 살인범국민대책위원회 사무실에 있는 사진을 확대하여
전문가의 눈으로 보고 그린 것이다.
이 그림을 보라.
이 글을 쓰는 필자는 탱크 장갑차 교육학교인 육군 기갑 학교를 졸업하고 우리 나라에서는
26사단 탱크중대에서 탱크를 조종했고 71년도 베트남전에 참전해서는 백마부대
장갑차파견대에서 밀림왕 7호라는 장갑차를 1년간 조종하며 베트남의 간선도로인
일번국도를 매일 같이 누비고 다녔고 3만Km이상의 무사고 조종경력을 갖고 있는
장갑차와 탱크 조종 전문가 출신이다.
1950년생 52세 이름은 이기환.
처음 장갑차 압살 사고에 대해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나는 그것이 주행중에 어쩔 수 없이
일어난 사고라고 생각했고 또 그렇게 믿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신문이나 방송에서 여러 사람들이 고의에 의한 압살 살인이라 했을 때도
나는 그것이 주행중에 충돌을 피하기 위해 급히 방향을 틀거나 아니면 급커브를 돌다가 난
사고라고 믿었다.
사람을 그것도 둘씩이나 고의로 깔아 죽인다는 것은 전쟁터에서 부딪힌 적군이라고 해도
상상하기 힘든 일이고 또한 전차병은 전차자체가 대형 무기이기 때문에 탱크나 장갑차
승무원들은 사관학교생들처럼 군기가 엄하고 특히 전차병 조종수는 정신과 몸이
강건한 자가 맡기 때문에 고의로 인한 사고는 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살인을 믿지 않고 있다가 미군 장갑차병의 진술이 다 거짓이라는 것을
알면서부터 사고 현장에 찾아가 보게 되었고 사건현장에서 나는 고의에 의한 살인임을
직감하고 치를 떨었다. 그리고 8월 26일자로 인터넷에 글을 올렸었다.
(박동익 선생님이 대신 올려줌)
제목은 어는 장갑차의 분노라는 것이었는데 그 글은 필자가 컴퓨터 문외한(컴맹) 이라서
사건 현장사진을 보지 못하고 현장 답사만으로 쓴 것이기에 지금과 같은 글을 쓸 수 없었다.
그러다 8월 31일날 사건 현장사진을 20여장 보고서야 충격적인 사실에 대한
확증을 갖게 되었고 따라서 이제야 확실한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단정짓는 근거는 다음 세 가지다.
첫째
사건 현장답사결과 시각장애인이 장갑차를 운행하지 않는 한 그 같은 참사가 날
자리가 아니었다고 판단했고
둘째
사건 주범들이 사고사라고 해명하며 내놓는 말들이 탱크, 장갑차 조종전문가의 눈으로
볼 때 모두 다 시커먼 거짓말이었고
셋째
사건 현장 사진 판독 결과 소녀들이 죽음을 맞은 자리와 시신의 상태 그리고 장갑차의
궤도 자욱의 선명한 흔적들, 거기다 멀리 뒤로 떨어져 있는 신발 짝들이 모든 상황을 명확히
대변해주고 있었다.
이제 이번 사건이 사고사가 아니고 희롱 압살 후 확인 압살까지 자행한 잔인한
살인인가를 구체적으로 입증해 보이겠다.
방법은 사건현장 조사를 한 판단과 20여장의 현장 사진 판독 증거와 장갑차 조종
전문가로서 견해를 가지고 살인마들의 거짓 변명을 하나하나 조목조목 따져가며
분쇄해 버리고 그 위에 내 주장의 확실함을 입증해 보이겠다.
첫째장:
살인마들의 거짓 주장에 대한 전문가로서 철퇴 반박
1. 장갑차 조종수(운전병)가 여중생들을 못 봤다고 하는 거짓말에 대한 답
시야 장애가 없이 고개까지 50m 이상 쭉 뻗은 직선 도로가 사건 지점 이전부터 펼쳐져 있었고
사건 당일 6월 13일 오전 10시경 맑은 날씨였기에 눈밝은 조종수가 못 볼 이유가 없다
토끼 새끼 한 마리도 정확히 볼 수 있는 상황인데 두 명의 여중생을 못 봤다니 그것을
말이라고 하는가 그것도 커브를 돌고 나서 오르막길을 오르느라 시속20Km이하로 달리는
상황에서 15m전방의 사람들을 못 봤다니,
이 살인마들아!
장갑차나 탱크의 조종수는 시력과 정신력이 좋은자만 뽑는다는 사실
말도 안되는 소리지만 조종수가 못 봤다면 전차장이나 전방사수가 본다는 사실
2. 장갑차 조종수가 중대장과의 교신을 하느라 신경을 쓰다가 여중생들을 못 봤다고 하는
거짓말에 대한 답
장갑차 조종수는 오로지 전방 관찰과 운전에만 신경 쓰는 것이 주 임무지 중대장 등과의
교신은 조종수의 책무가 아니다
중대장이나 대대장 등과의 교신은 당연히 전차장(지휘관)의 임무고 그의 권한이다
조종수는 전차장의 명령을 따르면 되는 것이다 단 하나 예외라면 전차장이 죽었거나
의식불명일 때 조종수가 중대장 등과의 교신을 하며 지시를 받을 수 있다
따라서 조종수가 중대장과의 교신에 신경을 쓰다가 두 여중생을 못 봤다는 말은 것은
거짓말이다
그것을 말이라고 내뱉는가 설사 중대장과 교신을 했다해도 그것은 장갑차 조종에
별 영향을 주지않는다 조종수는 늘상 무전교신을 하며 조종을 하고 다니기 때문이다
3. 충돌이나 추돌의 위험을 피하기 위해 급히 조종간을 오른쪽으로 틀다가
사고가 났다고 하는 거짓말에 대한 답
장갑차가 오르막 10m를 남겨두고 앞으로 진행하고 있는데 앞에서 어떤 차량이 중앙선 지점을
먹은채 달려와 충돌위험이 있었다면 장갑차 조종수는 5m정도의 짧은 거리에서 상대차량과
마주쳤기에 반사적으로 온 힘을 다해 조종간(운전대)을 우로 당겼어야 한다
그랬다면 사건 현장도로에 오른쪽궤도(쇠바퀴)의 찍어물린 자욱이 선명하게 남아있어야 하고
또한 두 여중생들의 시신이 일렬 종대로 누워있을 수가 없다. 횡으로 흩어져 쓰러져
있었을 것이다.
또한 앞서가는 차량과의 추돌 위험이 있었다면 앞서의 충돌 현상시 발생하는 것과 같은
상황이 전개되었어야 한다.
그러나 전혀 아니다.
따라서 충돌과 추돌의 위험이 있어 사고가 났다는 말은 거짓이다.
4. 과속으로 인해 사고가 났다고 하는 거짓말에 대한 답
장갑차는 차량자체가 무거운데다 일반차량과는 달리 엔진에서 나오는 동력이 스프라겟트라는
쇠톱같은 톱니바퀴에 전달되어 그 톱니바퀴에 1톤이나 되는 쇠바퀴가 씌워져 굴러가는
것이기에 평균 시속 50Km이하 정도밖에 달릴 수 없다.
사건 지점 오르막길에서는 커브를 돌고 난 직후 바로 오르막이라서 시속 20Km정도로
달렸을 것이다
따라서 과속으로 인해 사고가 날 일은 결코 없었다
5. 도로폭이 좁아 사고가 났다고 하는 거짓말에 대한 답.
도로는 그림에서 보다시피 대형 버스 두 대가 비켜지나갈 정도의 폭이고 큰 도로에 비해
폭이 좁은 만큼 조심하게 되고 오르막길에서 장갑차가 거의 속력이 없는 상태에서
과속이 어쩌고 도로폭이 어쩌고 하는 얘기는 쓰잘데 없는 헛소리다.
6. 미군 장갑차 여중생 살인범들은 앞서의 여러 가지 변명들이 통하지 않을 것 같자
이제 마지막으로 입을 모아 통신 장애 때문에 사고가 났다고 둘러대고 있다
통신장애 때문이란 거짓말에 대해 답을 내리기 전에 왜 범인들이 통신장애라는
변명을 늘어놓는가 라는 점에 이해가 있어야 한다
일반 차량의 경우에는 운전자가 혼자서 전방을 주시하며 차량을 운행하는 것이 상례지만
장갑차나 탱크는 조종수가 혼자서 운전해 가는 것이 아니라 전차장이나 전방사수 등
전원이 전후방을 주시하며 보조 운전자가 된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만에 하나 조종수가
사람이나 전방의 사물을 보지 못하고 사고 위험에 처했을 때 전차장등이 곧바로 헬멧에
장착된 통신 장구를 통해 상황을 알려 사고 위험을 막게 되어있다
이 같은 사실로 인해 조종수가 두 여중생을 보지 못해 사고가 났다는 말이 설득력이 없자
그들 살인범들은 마지막 모의 끝에 마지막 거짓말을 꺼내놓은 것이다.
그것은 통신장비가 고장이 나서 즉 통신장애가 있어 조종수에게 알려줄 수가 없어
압살 사고가 났다는 것이다.
통신 장애 때문에 사고가 났다는 거짓말에 대해 이 거짓말에 대해 답하기 전에 다시한번
강조하고 싶은 사실은 사고 장갑차 조종수(운전병)가 정신 이상이나 혼수상태에 빠지지 않는
한 두 여중생들을 못 볼 이유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다
시각이 180도로 활짝 열려있고 전방시야가 곧은 도로로 50m까지 확 트인 상태에서
시속 20Km정도로 서행하는 상황에서 조종수는 장갑차 앞 15m전방의 직선도로
갓길을 걷고 있는 여중생들을 반드시 보았다.
확실히 보고서 오히려 갓길 바깥쪽으로 장갑차를 붙여 소녀들을 몰아댄 것이다.
장갑차는 기동성과 통신이 생명이기 때문에 어지간한 사고로는 통신장애가 나지 않는다
내가 월남에서 장갑차를 몰았던 1년 동안 한번도 통신고장이 없었다는 사실
통신 장애 때문에 사고가 났다는 거짓말에 대한 마지막 답
이 같은 거짓말은 유치원생이 들어도 웃을 일이다. 몇 주전까지만 해도 너희 살인범들은
조종수가 중대장과의 교신(통신)에 신경을 쓰다가 사고가 났다고 하지 않았는가
미군 장갑차 살인범들아 너희들은 우리가 조삼모사에 속는 원숭이쯤으로 보이는가
살인범들과 그들을 감싸고 있는 주한 미군들은 들어라
이제 우리 민족과 이 나라는 너희들 손아귀에서 놀아야하는 원숭이가 아니란 말이다
둘째장: 사건 현장에 남겨진 살해 증거들
1.신발
우리의 소녀들인 효순이와 미선이가 깔려죽은 자리에서 아래쪽으로 5m와 7m지점에
운동화 한짝씩이 갓길과 갓길옆 풀섶위에 떨어져 있었다.
그들은 그 지점 이전부터 깔려죽은 자리까지 누구엔가 무엇엔가 쫓겨와서 죽었다는 사실이다.
무엇에 쫓겨와서 죽었을까?!
2.궤도 자욱
사건 현장 사진 20여장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은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소녀들을 궤도로
5차에 걸쳐 깔아 죽였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앞으로 전진해서 압상(쓰러뜨리고)
뒤고 후진하여
옆으로(대각선으로) 전진하여 미선이의 배 아랫부분과 다리를 깔아 뭉개고
뒤로 후진하고
다시 전진하며 정확히 정조준하여 S자로 천천히 조종해가며 미선이의 가슴과 머리
효 순이의 배와 가슴 머리를 정확히 짓이기고 지나갔다.
사진은 범대위 사무실에 있음.
위와 같은 사실들로 인해 살인마들의 주장은 완전 거짓으로 들어 났다.
이제 사건 현장 주변과 현장 사진의 증거를 가지고 실제 상황을 말해 보겠다.
미군이 운행하는 사건 장갑차는 마을을 지난 지점의 급커브를 막 돌아서 오르막
직선도로를 들어서면서 시속 20Km 이하의 속력상태로 오르며 직선도로 옆 15 m 전방의
갓길을 걸어 가고 있는 원색 옷차림의 소녀들을 보았고 장갑차 조종수인 워커 마크 병장은
15 m 전방의 소녀들을 보는 순간부터 광기에 사로잡힌 살인귀가 되어 장갑차를 갓길로
붙여 조종하며 소녀들을 몰아 대었고 왼쪽 옆과 뒤를 살피며 가던 소녀들
효순이와 미선이는 앞서 지나가던 장갑차들과는 달리(앞서 지나간 장갑차들은
도로 중앙쪽으로 붙여 운행하며 갓길쪽의 여유를 남겨두고 지나갔다.)
자신들이 걷고 있는 갓길로 차를 몰아 등뒤로 무섭게 쫓아오는 살인귀의 장갑차를 보고
앞으로 뛰기 시작했다.
(사람은 등뒤에서 뭐가 쫓으면 본능적으로 앞으로 뛰게 되어있고
그리고 갓길 바로 옆으로는 1.8 m정도 언덕이 길게 막혀 있어 옆으로는
도망칠 수가 없는 곳이다.)
워커마크라는 살인귀는 더욱 광기 어린 눈깔로 속력을 내어 소녀들을 몰았고
장갑차에 함께 탔던 놈들-전차장과 전방사수라는 것들도 야수가 되어가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이미 암묵적인 교감으로 야수짓하기로 합의가 되어 있었을 것이다.
광란의 살인귀들은 등뒤로 쫓고-
소녀들은 순간적으로 일어난 일에 놀라며 살기 위해 정신없이 앞으로 뛰었다.
상상해 보라. 이 광경을-
외마디 소리가 나오고 신발이 벗겨져 나가도록 살기 위해 뛰었지만 끝내
살인귀들의 장갑차에 덮침을 당하고 말았다.
직선도로 오르막길 30m지점 우리의 어린 소녀들이 생을 마감하는 자리였다.
소녀들은 살기 위해 공포감으로 15m를 뛰었고 장갑차의 살인마들은
새디즘적 살인 쾌감을 즐기며 30m를 달려 덮쳤다.
소녀들이 10m만 앞으로 더 뛰었으면 살았을텐데...
그러면 높은 밭언덕이 사라지는 곳이 라서 옆으로 달아나 살 수 있었는데...
직선도로 오르막길 30m지점 우리의 어린 소녀들인 효순이와 미선이는 이 자리에서
이렇게 장갑차에 덮침을 당해 쓰러졌다.
그러나 이 때까지는 장갑차 하판 아래서 경상을 입은 채 기절해 누워있는 상태였다.
(탱크나 장갑차는 차 아래 하판이 판판하고 높게 제작되어 있어 사람이나 동물이
차 아래로 기어다닐 수 있기에 저속으로 오르막을 올라가는 장갑차에 덮쳐 깔렸다
해도 궤도에 깔리지 않는 한 죽지 않는다.
앞으로 뛰는 사람과 뒤쫓는 장갑차의 속력이 별 차이가 없는 상황이었다면 죽지 않는다.)
하판 아래서 살아서 누워있는 우리의 소녀들은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깨어나
제 발로 일어날 아이도 있었다.
그러나 광기어린 살인마들은 장갑차를 뒤로 후진하여
본 바 아직 정신을 제대로 차리지 못하고 쓰러져 있는 소녀들을 확인하고 옆으로
전진과 후진을 하여 한번 깔고 다시 전진하여 소녀들의 배와 가슴 머리를 1cm의
오차도 없이 정확히 짓이기고 나갔다.
효순이와 미선이의 시신위로 궤도 자욱이 너무도 선명하게 나와있다.
골이 터지고
창자가 터져 나오고 뭐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광경이다.
우리의 꿈 많고 어린
소녀들인 신효순과 심미선양은 이렇게 죽음을 당했다.
소녀들이 죽음을 당한 아래쪽엔 두 개의 신발이 떨어져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고
한
짝은 5m아래 떨어져 궤도에 깔린 자욱으로 있었고 한 짝은 7m아래 갓길 풀섶에
곱게 떨어져 있었다.
미선이의 운동화였다.
소녀들이 죽음을 당한 현장 주변에는 꿈을 접은 시신과 함께 살인 광란의 축제를
벌이고 간 살인마들의 발자국(궤도자욱)이 여기저기에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사건의 진상과 결말
미군 장갑차에 의해 죽은 우리의 어린 두 소녀 신효순과 심미선양은 사고로 죽은
것이 아니라 앞머리에서 필자가 단호히 판단을 내리고 확인을 했듯이
희롱 압살 후
확인 압살을 자행한 고의적인 잔인한 살인 범죄란 사실이다.
이 기막힌 사실을 이 천인공노할 만행을 우리는 온 나라와 온 세계에 알려야 한다.
어린 소녀들이 외국 군인에게 무자비하게 학살당했는데도 소파협정 때문에
처벌하지 못한 다면 온 국민이 나서서 싸워 살인마들을 처단해야 한다.
개인의
생명이나 민족의 생명을 업수히 여기는 자들과는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한다.
나는 내 나라와 내 민족 나의 사랑하는 후손들을 위해 비장한 각오로
이 글을 쓴다.
편안한 삶을 위해, 죽음이 무서워 범죄와 싸우지 않는다면
우리는 범죄의 하수인으로 살 수 밖에 없다.
대 책
행위라고 하는 것은 그것이 어떤 행위든 겉으로 보면 상황에 대처한 몸동작이고
그
결과지만 속내를 들여다 보면 행위는 의식의 외부적인 표출이기도 하다 끊임없이
계속되는 주한 미군들의 폭력 강도 강간 살인 등 악랄한 범죄 행위는 범죄자
개개인의 문제이기보다 그들의 머리속을 지배하고 있는 한국민에 대한 집단의식
속에서 발생한다는 사실이다.
주한 미군 그들이 갖고있는 한국민에 대한 집단의식은
식민지 땅의 주민들쯤이라는 것이다
윤금이 여성 살해 및 금번 신효순 심미선양 살해와 같은 주한미군들의 흉악한
범죄행위는 이런 의식에서부터 벌써 자라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의 한국민에 대한 못된 집단의식과 범죄행위는 그들 탓만이 아니다
우리가 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그렇게 하도록 마당을 만들어 바친 것이다.
생각해 보라 피 끓는 젊은 군인들이 남의 나라에 주둔하면서 폭력을 휘두르든
강간을 하든 살인을 하든 그 나라 법에 엄중히 처벌받지 않고 자기나라 사람들에
의해 자유롭게 슬슬 조사 받고 풀려나는데 그 어떤자가 본능적인 범죄
유혹으로부터 철저히 자신을 방어하고 다니겠는가
따라서 우리는 더 이상의 살상을 방지하고 우리의 자존과 평화로운 삶을 위해서
이번 신효순 심미선양 살인 만행에 대해 범국민적으로 궐기해 우리 법으로
살인마들을 처벌하여 주한미군의 한국민에 대한 잘못된 집단의식에
철퇴를 가하고
쐐기를 박아야 한다
글 수 1,288
신효순, 심미선의 6주기를 맞아 과연
한국에 있어 미국은 우방인가,
미국에 있어 한국은 식민지인가
효순, 미선이 사건이 군사훈련중에 일어난 단순한 교통사고인가?
이 사건은 미국인의 속마음을 한국인의 속마음을 들킨 사건이 아닌지?
미국인은 한국을 아직도 식민지로 생각하고 있으며
종미.사대주의, 한나라,뉴라이트, 기독교 세력, 일반 대중의 일부는 아직도 미국을
메시아로 여기고 있는지 ?
[퍼온 글입니다]
탱크 조종 전문가 '이기환'씨의 사건 보고서
미군 장갑차 여중생 압살 사건의 충격적인 진실을 말한다
미군이 운행하는 장갑차에 의해 한국의 신효순 심미선 두 여중생이 깔려죽은 사건은
단순한 사고사가 아니라 여중생들을 닭 몰듯 장난 삼아 몰고 희롱하며 깔아 죽였다는 사실이고
그것도 모자라 전 후진을 반복하여 확인 압살까지 강행한 천인공노할 만행이었다는 사실이다.
이 그림을 보자. 그림은 미군 장갑차 살인범국민대책위원회 사무실에 있는 사진을 확대하여
전문가의 눈으로 보고 그린 것이다.
이 그림을 보라.
이 글을 쓰는 필자는 탱크 장갑차 교육학교인 육군 기갑 학교를 졸업하고 우리 나라에서는
26사단 탱크중대에서 탱크를 조종했고 71년도 베트남전에 참전해서는 백마부대
장갑차파견대에서 밀림왕 7호라는 장갑차를 1년간 조종하며 베트남의 간선도로인
일번국도를 매일 같이 누비고 다녔고 3만Km이상의 무사고 조종경력을 갖고 있는
장갑차와 탱크 조종 전문가 출신이다.
1950년생 52세 이름은 이기환.
처음 장갑차 압살 사고에 대해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나는 그것이 주행중에 어쩔 수 없이
일어난 사고라고 생각했고 또 그렇게 믿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신문이나 방송에서 여러 사람들이 고의에 의한 압살 살인이라 했을 때도
나는 그것이 주행중에 충돌을 피하기 위해 급히 방향을 틀거나 아니면 급커브를 돌다가 난
사고라고 믿었다.
사람을 그것도 둘씩이나 고의로 깔아 죽인다는 것은 전쟁터에서 부딪힌 적군이라고 해도
상상하기 힘든 일이고 또한 전차병은 전차자체가 대형 무기이기 때문에 탱크나 장갑차
승무원들은 사관학교생들처럼 군기가 엄하고 특히 전차병 조종수는 정신과 몸이
강건한 자가 맡기 때문에 고의로 인한 사고는 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살인을 믿지 않고 있다가 미군 장갑차병의 진술이 다 거짓이라는 것을
알면서부터 사고 현장에 찾아가 보게 되었고 사건현장에서 나는 고의에 의한 살인임을
직감하고 치를 떨었다. 그리고 8월 26일자로 인터넷에 글을 올렸었다.
(박동익 선생님이 대신 올려줌)
제목은 어는 장갑차의 분노라는 것이었는데 그 글은 필자가 컴퓨터 문외한(컴맹) 이라서
사건 현장사진을 보지 못하고 현장 답사만으로 쓴 것이기에 지금과 같은 글을 쓸 수 없었다.
그러다 8월 31일날 사건 현장사진을 20여장 보고서야 충격적인 사실에 대한
확증을 갖게 되었고 따라서 이제야 확실한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단정짓는 근거는 다음 세 가지다.
첫째
사건 현장답사결과 시각장애인이 장갑차를 운행하지 않는 한 그 같은 참사가 날
자리가 아니었다고 판단했고
둘째
사건 주범들이 사고사라고 해명하며 내놓는 말들이 탱크, 장갑차 조종전문가의 눈으로
볼 때 모두 다 시커먼 거짓말이었고
셋째
사건 현장 사진 판독 결과 소녀들이 죽음을 맞은 자리와 시신의 상태 그리고 장갑차의
궤도 자욱의 선명한 흔적들, 거기다 멀리 뒤로 떨어져 있는 신발 짝들이 모든 상황을 명확히
대변해주고 있었다.
이제 이번 사건이 사고사가 아니고 희롱 압살 후 확인 압살까지 자행한 잔인한
살인인가를 구체적으로 입증해 보이겠다.
방법은 사건현장 조사를 한 판단과 20여장의 현장 사진 판독 증거와 장갑차 조종
전문가로서 견해를 가지고 살인마들의 거짓 변명을 하나하나 조목조목 따져가며
분쇄해 버리고 그 위에 내 주장의 확실함을 입증해 보이겠다.
첫째장:
살인마들의 거짓 주장에 대한 전문가로서 철퇴 반박
1. 장갑차 조종수(운전병)가 여중생들을 못 봤다고 하는 거짓말에 대한 답
시야 장애가 없이 고개까지 50m 이상 쭉 뻗은 직선 도로가 사건 지점 이전부터 펼쳐져 있었고
사건 당일 6월 13일 오전 10시경 맑은 날씨였기에 눈밝은 조종수가 못 볼 이유가 없다
토끼 새끼 한 마리도 정확히 볼 수 있는 상황인데 두 명의 여중생을 못 봤다니 그것을
말이라고 하는가 그것도 커브를 돌고 나서 오르막길을 오르느라 시속20Km이하로 달리는
상황에서 15m전방의 사람들을 못 봤다니,
이 살인마들아!
장갑차나 탱크의 조종수는 시력과 정신력이 좋은자만 뽑는다는 사실
말도 안되는 소리지만 조종수가 못 봤다면 전차장이나 전방사수가 본다는 사실
2. 장갑차 조종수가 중대장과의 교신을 하느라 신경을 쓰다가 여중생들을 못 봤다고 하는
거짓말에 대한 답
장갑차 조종수는 오로지 전방 관찰과 운전에만 신경 쓰는 것이 주 임무지 중대장 등과의
교신은 조종수의 책무가 아니다
중대장이나 대대장 등과의 교신은 당연히 전차장(지휘관)의 임무고 그의 권한이다
조종수는 전차장의 명령을 따르면 되는 것이다 단 하나 예외라면 전차장이 죽었거나
의식불명일 때 조종수가 중대장 등과의 교신을 하며 지시를 받을 수 있다
따라서 조종수가 중대장과의 교신에 신경을 쓰다가 두 여중생을 못 봤다는 말은 것은
거짓말이다
그것을 말이라고 내뱉는가 설사 중대장과 교신을 했다해도 그것은 장갑차 조종에
별 영향을 주지않는다 조종수는 늘상 무전교신을 하며 조종을 하고 다니기 때문이다
3. 충돌이나 추돌의 위험을 피하기 위해 급히 조종간을 오른쪽으로 틀다가
사고가 났다고 하는 거짓말에 대한 답
장갑차가 오르막 10m를 남겨두고 앞으로 진행하고 있는데 앞에서 어떤 차량이 중앙선 지점을
먹은채 달려와 충돌위험이 있었다면 장갑차 조종수는 5m정도의 짧은 거리에서 상대차량과
마주쳤기에 반사적으로 온 힘을 다해 조종간(운전대)을 우로 당겼어야 한다
그랬다면 사건 현장도로에 오른쪽궤도(쇠바퀴)의 찍어물린 자욱이 선명하게 남아있어야 하고
또한 두 여중생들의 시신이 일렬 종대로 누워있을 수가 없다. 횡으로 흩어져 쓰러져
있었을 것이다.
또한 앞서가는 차량과의 추돌 위험이 있었다면 앞서의 충돌 현상시 발생하는 것과 같은
상황이 전개되었어야 한다.
그러나 전혀 아니다.
따라서 충돌과 추돌의 위험이 있어 사고가 났다는 말은 거짓이다.
4. 과속으로 인해 사고가 났다고 하는 거짓말에 대한 답
장갑차는 차량자체가 무거운데다 일반차량과는 달리 엔진에서 나오는 동력이 스프라겟트라는
쇠톱같은 톱니바퀴에 전달되어 그 톱니바퀴에 1톤이나 되는 쇠바퀴가 씌워져 굴러가는
것이기에 평균 시속 50Km이하 정도밖에 달릴 수 없다.
사건 지점 오르막길에서는 커브를 돌고 난 직후 바로 오르막이라서 시속 20Km정도로
달렸을 것이다
따라서 과속으로 인해 사고가 날 일은 결코 없었다
5. 도로폭이 좁아 사고가 났다고 하는 거짓말에 대한 답.
도로는 그림에서 보다시피 대형 버스 두 대가 비켜지나갈 정도의 폭이고 큰 도로에 비해
폭이 좁은 만큼 조심하게 되고 오르막길에서 장갑차가 거의 속력이 없는 상태에서
과속이 어쩌고 도로폭이 어쩌고 하는 얘기는 쓰잘데 없는 헛소리다.
6. 미군 장갑차 여중생 살인범들은 앞서의 여러 가지 변명들이 통하지 않을 것 같자
이제 마지막으로 입을 모아 통신 장애 때문에 사고가 났다고 둘러대고 있다
통신장애 때문이란 거짓말에 대해 답을 내리기 전에 왜 범인들이 통신장애라는
변명을 늘어놓는가 라는 점에 이해가 있어야 한다
일반 차량의 경우에는 운전자가 혼자서 전방을 주시하며 차량을 운행하는 것이 상례지만
장갑차나 탱크는 조종수가 혼자서 운전해 가는 것이 아니라 전차장이나 전방사수 등
전원이 전후방을 주시하며 보조 운전자가 된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만에 하나 조종수가
사람이나 전방의 사물을 보지 못하고 사고 위험에 처했을 때 전차장등이 곧바로 헬멧에
장착된 통신 장구를 통해 상황을 알려 사고 위험을 막게 되어있다
이 같은 사실로 인해 조종수가 두 여중생을 보지 못해 사고가 났다는 말이 설득력이 없자
그들 살인범들은 마지막 모의 끝에 마지막 거짓말을 꺼내놓은 것이다.
그것은 통신장비가 고장이 나서 즉 통신장애가 있어 조종수에게 알려줄 수가 없어
압살 사고가 났다는 것이다.
통신 장애 때문에 사고가 났다는 거짓말에 대해 이 거짓말에 대해 답하기 전에 다시한번
강조하고 싶은 사실은 사고 장갑차 조종수(운전병)가 정신 이상이나 혼수상태에 빠지지 않는
한 두 여중생들을 못 볼 이유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다
시각이 180도로 활짝 열려있고 전방시야가 곧은 도로로 50m까지 확 트인 상태에서
시속 20Km정도로 서행하는 상황에서 조종수는 장갑차 앞 15m전방의 직선도로
갓길을 걷고 있는 여중생들을 반드시 보았다.
확실히 보고서 오히려 갓길 바깥쪽으로 장갑차를 붙여 소녀들을 몰아댄 것이다.
장갑차는 기동성과 통신이 생명이기 때문에 어지간한 사고로는 통신장애가 나지 않는다
내가 월남에서 장갑차를 몰았던 1년 동안 한번도 통신고장이 없었다는 사실
통신 장애 때문에 사고가 났다는 거짓말에 대한 마지막 답
이 같은 거짓말은 유치원생이 들어도 웃을 일이다. 몇 주전까지만 해도 너희 살인범들은
조종수가 중대장과의 교신(통신)에 신경을 쓰다가 사고가 났다고 하지 않았는가
미군 장갑차 살인범들아 너희들은 우리가 조삼모사에 속는 원숭이쯤으로 보이는가
살인범들과 그들을 감싸고 있는 주한 미군들은 들어라
이제 우리 민족과 이 나라는 너희들 손아귀에서 놀아야하는 원숭이가 아니란 말이다
둘째장: 사건 현장에 남겨진 살해 증거들
1.신발
우리의 소녀들인 효순이와 미선이가 깔려죽은 자리에서 아래쪽으로 5m와 7m지점에
운동화 한짝씩이 갓길과 갓길옆 풀섶위에 떨어져 있었다.
그들은 그 지점 이전부터 깔려죽은 자리까지 누구엔가 무엇엔가 쫓겨와서 죽었다는 사실이다.
무엇에 쫓겨와서 죽었을까?!
2.궤도 자욱
사건 현장 사진 20여장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은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소녀들을 궤도로
5차에 걸쳐 깔아 죽였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앞으로 전진해서 압상(쓰러뜨리고)
뒤고 후진하여
옆으로(대각선으로) 전진하여 미선이의 배 아랫부분과 다리를 깔아 뭉개고
뒤로 후진하고
다시 전진하며 정확히 정조준하여 S자로 천천히 조종해가며 미선이의 가슴과 머리
효 순이의 배와 가슴 머리를 정확히 짓이기고 지나갔다.
사진은 범대위 사무실에 있음.
위와 같은 사실들로 인해 살인마들의 주장은 완전 거짓으로 들어 났다.
이제 사건 현장 주변과 현장 사진의 증거를 가지고 실제 상황을 말해 보겠다.
미군이 운행하는 사건 장갑차는 마을을 지난 지점의 급커브를 막 돌아서 오르막
직선도로를 들어서면서 시속 20Km 이하의 속력상태로 오르며 직선도로 옆 15 m 전방의
갓길을 걸어 가고 있는 원색 옷차림의 소녀들을 보았고 장갑차 조종수인 워커 마크 병장은
15 m 전방의 소녀들을 보는 순간부터 광기에 사로잡힌 살인귀가 되어 장갑차를 갓길로
붙여 조종하며 소녀들을 몰아 대었고 왼쪽 옆과 뒤를 살피며 가던 소녀들
효순이와 미선이는 앞서 지나가던 장갑차들과는 달리(앞서 지나간 장갑차들은
도로 중앙쪽으로 붙여 운행하며 갓길쪽의 여유를 남겨두고 지나갔다.)
자신들이 걷고 있는 갓길로 차를 몰아 등뒤로 무섭게 쫓아오는 살인귀의 장갑차를 보고
앞으로 뛰기 시작했다.
(사람은 등뒤에서 뭐가 쫓으면 본능적으로 앞으로 뛰게 되어있고
그리고 갓길 바로 옆으로는 1.8 m정도 언덕이 길게 막혀 있어 옆으로는
도망칠 수가 없는 곳이다.)
워커마크라는 살인귀는 더욱 광기 어린 눈깔로 속력을 내어 소녀들을 몰았고
장갑차에 함께 탔던 놈들-전차장과 전방사수라는 것들도 야수가 되어가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이미 암묵적인 교감으로 야수짓하기로 합의가 되어 있었을 것이다.
광란의 살인귀들은 등뒤로 쫓고-
소녀들은 순간적으로 일어난 일에 놀라며 살기 위해 정신없이 앞으로 뛰었다.
상상해 보라. 이 광경을-
외마디 소리가 나오고 신발이 벗겨져 나가도록 살기 위해 뛰었지만 끝내
살인귀들의 장갑차에 덮침을 당하고 말았다.
직선도로 오르막길 30m지점 우리의 어린 소녀들이 생을 마감하는 자리였다.
소녀들은 살기 위해 공포감으로 15m를 뛰었고 장갑차의 살인마들은
새디즘적 살인 쾌감을 즐기며 30m를 달려 덮쳤다.
소녀들이 10m만 앞으로 더 뛰었으면 살았을텐데...
그러면 높은 밭언덕이 사라지는 곳이 라서 옆으로 달아나 살 수 있었는데...
직선도로 오르막길 30m지점 우리의 어린 소녀들인 효순이와 미선이는 이 자리에서
이렇게 장갑차에 덮침을 당해 쓰러졌다.
그러나 이 때까지는 장갑차 하판 아래서 경상을 입은 채 기절해 누워있는 상태였다.
(탱크나 장갑차는 차 아래 하판이 판판하고 높게 제작되어 있어 사람이나 동물이
차 아래로 기어다닐 수 있기에 저속으로 오르막을 올라가는 장갑차에 덮쳐 깔렸다
해도 궤도에 깔리지 않는 한 죽지 않는다.
앞으로 뛰는 사람과 뒤쫓는 장갑차의 속력이 별 차이가 없는 상황이었다면 죽지 않는다.)
하판 아래서 살아서 누워있는 우리의 소녀들은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깨어나
제 발로 일어날 아이도 있었다.
그러나 광기어린 살인마들은 장갑차를 뒤로 후진하여
본 바 아직 정신을 제대로 차리지 못하고 쓰러져 있는 소녀들을 확인하고 옆으로
전진과 후진을 하여 한번 깔고 다시 전진하여 소녀들의 배와 가슴 머리를 1cm의
오차도 없이 정확히 짓이기고 나갔다.
효순이와 미선이의 시신위로 궤도 자욱이 너무도 선명하게 나와있다.
골이 터지고
창자가 터져 나오고 뭐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광경이다.
우리의 꿈 많고 어린
소녀들인 신효순과 심미선양은 이렇게 죽음을 당했다.
소녀들이 죽음을 당한 아래쪽엔 두 개의 신발이 떨어져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고
한
짝은 5m아래 떨어져 궤도에 깔린 자욱으로 있었고 한 짝은 7m아래 갓길 풀섶에
곱게 떨어져 있었다.
미선이의 운동화였다.
소녀들이 죽음을 당한 현장 주변에는 꿈을 접은 시신과 함께 살인 광란의 축제를
벌이고 간 살인마들의 발자국(궤도자욱)이 여기저기에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사건의 진상과 결말
미군 장갑차에 의해 죽은 우리의 어린 두 소녀 신효순과 심미선양은 사고로 죽은
것이 아니라 앞머리에서 필자가 단호히 판단을 내리고 확인을 했듯이
희롱 압살 후
확인 압살을 자행한 고의적인 잔인한 살인 범죄란 사실이다.
이 기막힌 사실을 이 천인공노할 만행을 우리는 온 나라와 온 세계에 알려야 한다.
어린 소녀들이 외국 군인에게 무자비하게 학살당했는데도 소파협정 때문에
처벌하지 못한 다면 온 국민이 나서서 싸워 살인마들을 처단해야 한다.
개인의
생명이나 민족의 생명을 업수히 여기는 자들과는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한다.
나는 내 나라와 내 민족 나의 사랑하는 후손들을 위해 비장한 각오로
이 글을 쓴다.
편안한 삶을 위해, 죽음이 무서워 범죄와 싸우지 않는다면
우리는 범죄의 하수인으로 살 수 밖에 없다.
대 책
행위라고 하는 것은 그것이 어떤 행위든 겉으로 보면 상황에 대처한 몸동작이고
그
결과지만 속내를 들여다 보면 행위는 의식의 외부적인 표출이기도 하다 끊임없이
계속되는 주한 미군들의 폭력 강도 강간 살인 등 악랄한 범죄 행위는 범죄자
개개인의 문제이기보다 그들의 머리속을 지배하고 있는 한국민에 대한 집단의식
속에서 발생한다는 사실이다.
주한 미군 그들이 갖고있는 한국민에 대한 집단의식은
식민지 땅의 주민들쯤이라는 것이다
윤금이 여성 살해 및 금번 신효순 심미선양 살해와 같은 주한미군들의 흉악한
범죄행위는 이런 의식에서부터 벌써 자라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의 한국민에 대한 못된 집단의식과 범죄행위는 그들 탓만이 아니다
우리가 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그렇게 하도록 마당을 만들어 바친 것이다.
생각해 보라 피 끓는 젊은 군인들이 남의 나라에 주둔하면서 폭력을 휘두르든
강간을 하든 살인을 하든 그 나라 법에 엄중히 처벌받지 않고 자기나라 사람들에
의해 자유롭게 슬슬 조사 받고 풀려나는데 그 어떤자가 본능적인 범죄
유혹으로부터 철저히 자신을 방어하고 다니겠는가
따라서 우리는 더 이상의 살상을 방지하고 우리의 자존과 평화로운 삶을 위해서
이번 신효순 심미선양 살인 만행에 대해 범국민적으로 궐기해 우리 법으로
살인마들을 처벌하여 주한미군의 한국민에 대한 잘못된 집단의식에
철퇴를 가하고
쐐기를 박아야 한다
2008.06.14 06:46:28 (*.219.131.206)
.
효순 미선, 같은 수사기록 다른 결론... 여기 대한민국 맞아?
[마이데일리 2005-06-29 10:35]
[마이데일리 = 김한준 기자]
"손을 들면서 있는 힘껏 멈추라고 고함을 쳤다."
(
사고차량의 맞은 편에 있던 브래들리 장갑차의 병사, 패트릭 존스)
"사고 전차를 향해 멈추라고 고함을 쳤다.
하지만 나를 보지 못했는지 (전차는) 소녀들을 치고 말았다."
(사고차량의 바로 앞 장갑차, 조슈아 레이)
28일 방송한 MBC PD수첩 '최종분석 미군 전차 사건의 진실(연출 한학수 김만진)'은 2002년 효순이 미선이의 죽음과 관련해 새로운 사실을 밝혔다. 당시 사건을 수사했던 CID(미군사범죄수사대)와 한국 검찰의 수사기록을 공개한 것. 비밀리에 가려져 있었던 당시 수사기록은 유족들과 시민단체들의 요구한지 2년 4개월만인 지난 3일 공개됐다.
수사자료를 통해 새롭게 밝혀진 사실은 두 가지다. 주위 전차 병사들이 위험을 막기 위해 필사적으로 수차례 경고를 했다는 것이고, 사고당시 알려졌듯이 사고전차가 맞은 편에서 오던 전차를 피하려다 사고가 난 것이 아니라는 점.
당시 사고를 일으킨 전차장 페르난도 니노 병장과 운전병 마크 워커가 탑승했던 전차는 AVLM(부교 운반용 전차). 앞 부분 중앙에 철제 구조물이 있어 운전병은 우측 일부를 볼 수 없는 구조였다. 운전병의 사각은 리노 병장이 주시해야 했고 실제로 그는 운전병에게 4번이나 사고의 위험을 알렸다고 말했다. 하지만 워커 병장은 "네 번째 경고만 들었을 뿐이며 그때는 이미 늦었다"고 진술했다. 재판정은 통신장비의 이상으로 발생한 사건이라 규정했고, 두 명은 무죄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이에 대해 당시 전차의 통신병이었던 듀란은 "워커의 마이크로폰이 고장났던 것은 사실이지만 부품을 교체했고 이상이 없는 것을 확인후 전차가 출발했다"고 반박했다. 실제로 사고 발생 15초전까지 니노와 듀란은 통신장비로 연락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두 소녀를 치는 그 순간만 통신상태가 불능이었다는 말이다.
통신장비에 결함이 있었다면 리노는 워커에게 사고위험을 알릴 수 없었을까. 이에 대해 제작진은 둘의 사이는 83cm로 수신호로 충분히 신호보낼 수 있는 거리였다고 반론한다. 당시 니노 병장도 "너무 얼어서 하지 못했다. 그렇게 해야 한다는 생각이 정말 떠오르지 않았다"고 말했다.
당시 워커의 변호사였던 가이 워맥은 "재판 결과는 도덕적으로 옳지 않다"며 "니노는 당황했다고 자백했고 기소 과정에서 검사가 더 잘했더라면 유죄를 받았을 것이다"라는 의견을 밝혔다. 신승남 변호사 역시 "형법상 과실 치사에 해당하는 범죄"라고 확인했다.
즉 주위 전차의 병사들이 사전에 충분히 위험신호를 했고, 통신장비와 상관없이 니노 병장도 운전병에게 신호를 보낼 수 있었던 상황인데도 참극을 막지 못한 것이다. 더욱이 앞 전차를 피하려다 소녀들을 쳤다는 과거의 주장은 어불성설로 밝혀진 것이다.
그런데 왜 무죄라는 판결이 나왔을까. SOFA(한미 주둔군 지위협정)규정에 의해 공무수행중 발생한 미군범죄는 미군이 재판권을 갖게 돼 있는 탓이다. 당시 변호인 측은 통신장비 때문이라고 일관되게 주장한 반면 검사 측은 마땅한 공격을 하지 않았었다. 미군의 주도 하에 모든 수사와 재판이 이뤄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 정부는 제대로 항의하지 못했다. 오히려 당시 한국 검사는 미군보다 먼저 사고의 원인이 통신장비의 이상이라고 주장했다.
정확한 사실 확인을 위해 미국을 찾아간 제작진에게 니노 병장은 "내 삶을 살아야 한다"며 인터뷰 대가로 1000달러를 요구했다. 제작직이 이에 응했지만 그는 더 이상 연락이 되지 않았다. 정신적 충격으로 하루에 4시간 정도밖에 자지 못한다는 워커는 "사고에 대해 할 수 있는 말은 미안하다는 말 뿐이다"라고 말했다. 사고 위험을 알려준 주위 전차 병사들의 수신호를 정말 보지 못했느냐는 질문에는 답변하지 않았다.
사건 당시 부대의 중대장 메이슨 대위 역시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았다. 이제는 전역한 니노와 워커와는 달리 그는 아직도 군 생활을 하고 있었다. 사고 당일 소녀들에 대해 경고신호를 하지 않았던 그도 지휘체계상 책임을 피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는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게 낫다"고 말했다.
한국검찰은 여전히 통신장애가 주 요인이라고 보고 있다. 조정철 당시 수사검사는 "통신 장비 때문에 사고가 생긴 것이지 통신 장애가 아니면 사고가 어떻게 생기겠습니까"라고 말했다. 제작진은 "이미 3년 전 미군의 사건 조사 기록을 봤을 텐데 결과는 이렇게 다르다"며 "같은 수사기록을 놓고 다른 결론을 내렸지만, 결국 판단은 국민의 몫이다"라고 말했다.
설령 진실이 밝혀지더라도 이 사건을 법적으로 바로잡을 수는 없다. 미국의 법 규정상 배심원이 무죄를 선고하면 검사는 항소할 수 없기 때문이다.
최승호 책임프로듀서는 프로그램의 말미에서 "바뀌는 건 없지만 한 웅큼의 사실을 두 아이들에게 바칠 수는 있다"며 "너희들의 희생이 조금 더 떳떳한 조국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두 여중생의 죽음 이후 미군 주둔 규정도 일부 바뀌었고, 최근 미군에 의한 사고가 발생했을 때 미국 대통령이 즉시 사과하는 등 변화된 모습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었다.
한 가지 아이러니한 사실은 미군과 일부 한국인의 의견이 이상할 정도로 비슷하다는 점. "큰 사건이 아니에요. 단순한 교통사고를 김정일을 추종하는 좌익들이 살인한 것처럼 해서 반미감정을 부추기고" "할말은 하겠다는데 할말이 뭐가 있냐. 동맹인데" 이것은 미군의 말이 아니라 한국의 예비역 장교와 안보 전문가의 말이다.
[문제의 AVLM 전차. 전차장과 운전병의 사이가 83cm임을 보여주고 있다(왼쪽) 오른쪽은 희생당한 효순이와 미선이. 사진제공 = MBC]
(김한준 기자 star@mydaily.co.kr)
.
효순 미선, 같은 수사기록 다른 결론... 여기 대한민국 맞아?
[마이데일리 2005-06-29 10:35]
[마이데일리 = 김한준 기자]
"손을 들면서 있는 힘껏 멈추라고 고함을 쳤다."
(
사고차량의 맞은 편에 있던 브래들리 장갑차의 병사, 패트릭 존스)
"사고 전차를 향해 멈추라고 고함을 쳤다.
하지만 나를 보지 못했는지 (전차는) 소녀들을 치고 말았다."
(사고차량의 바로 앞 장갑차, 조슈아 레이)
28일 방송한 MBC PD수첩 '최종분석 미군 전차 사건의 진실(연출 한학수 김만진)'은 2002년 효순이 미선이의 죽음과 관련해 새로운 사실을 밝혔다. 당시 사건을 수사했던 CID(미군사범죄수사대)와 한국 검찰의 수사기록을 공개한 것. 비밀리에 가려져 있었던 당시 수사기록은 유족들과 시민단체들의 요구한지 2년 4개월만인 지난 3일 공개됐다.
수사자료를 통해 새롭게 밝혀진 사실은 두 가지다. 주위 전차 병사들이 위험을 막기 위해 필사적으로 수차례 경고를 했다는 것이고, 사고당시 알려졌듯이 사고전차가 맞은 편에서 오던 전차를 피하려다 사고가 난 것이 아니라는 점.
당시 사고를 일으킨 전차장 페르난도 니노 병장과 운전병 마크 워커가 탑승했던 전차는 AVLM(부교 운반용 전차). 앞 부분 중앙에 철제 구조물이 있어 운전병은 우측 일부를 볼 수 없는 구조였다. 운전병의 사각은 리노 병장이 주시해야 했고 실제로 그는 운전병에게 4번이나 사고의 위험을 알렸다고 말했다. 하지만 워커 병장은 "네 번째 경고만 들었을 뿐이며 그때는 이미 늦었다"고 진술했다. 재판정은 통신장비의 이상으로 발생한 사건이라 규정했고, 두 명은 무죄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이에 대해 당시 전차의 통신병이었던 듀란은 "워커의 마이크로폰이 고장났던 것은 사실이지만 부품을 교체했고 이상이 없는 것을 확인후 전차가 출발했다"고 반박했다. 실제로 사고 발생 15초전까지 니노와 듀란은 통신장비로 연락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두 소녀를 치는 그 순간만 통신상태가 불능이었다는 말이다.
통신장비에 결함이 있었다면 리노는 워커에게 사고위험을 알릴 수 없었을까. 이에 대해 제작진은 둘의 사이는 83cm로 수신호로 충분히 신호보낼 수 있는 거리였다고 반론한다. 당시 니노 병장도 "너무 얼어서 하지 못했다. 그렇게 해야 한다는 생각이 정말 떠오르지 않았다"고 말했다.
당시 워커의 변호사였던 가이 워맥은 "재판 결과는 도덕적으로 옳지 않다"며 "니노는 당황했다고 자백했고 기소 과정에서 검사가 더 잘했더라면 유죄를 받았을 것이다"라는 의견을 밝혔다. 신승남 변호사 역시 "형법상 과실 치사에 해당하는 범죄"라고 확인했다.
즉 주위 전차의 병사들이 사전에 충분히 위험신호를 했고, 통신장비와 상관없이 니노 병장도 운전병에게 신호를 보낼 수 있었던 상황인데도 참극을 막지 못한 것이다. 더욱이 앞 전차를 피하려다 소녀들을 쳤다는 과거의 주장은 어불성설로 밝혀진 것이다.
그런데 왜 무죄라는 판결이 나왔을까. SOFA(한미 주둔군 지위협정)규정에 의해 공무수행중 발생한 미군범죄는 미군이 재판권을 갖게 돼 있는 탓이다. 당시 변호인 측은 통신장비 때문이라고 일관되게 주장한 반면 검사 측은 마땅한 공격을 하지 않았었다. 미군의 주도 하에 모든 수사와 재판이 이뤄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 정부는 제대로 항의하지 못했다. 오히려 당시 한국 검사는 미군보다 먼저 사고의 원인이 통신장비의 이상이라고 주장했다.
정확한 사실 확인을 위해 미국을 찾아간 제작진에게 니노 병장은 "내 삶을 살아야 한다"며 인터뷰 대가로 1000달러를 요구했다. 제작직이 이에 응했지만 그는 더 이상 연락이 되지 않았다. 정신적 충격으로 하루에 4시간 정도밖에 자지 못한다는 워커는 "사고에 대해 할 수 있는 말은 미안하다는 말 뿐이다"라고 말했다. 사고 위험을 알려준 주위 전차 병사들의 수신호를 정말 보지 못했느냐는 질문에는 답변하지 않았다.
사건 당시 부대의 중대장 메이슨 대위 역시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았다. 이제는 전역한 니노와 워커와는 달리 그는 아직도 군 생활을 하고 있었다. 사고 당일 소녀들에 대해 경고신호를 하지 않았던 그도 지휘체계상 책임을 피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는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게 낫다"고 말했다.
한국검찰은 여전히 통신장애가 주 요인이라고 보고 있다. 조정철 당시 수사검사는 "통신 장비 때문에 사고가 생긴 것이지 통신 장애가 아니면 사고가 어떻게 생기겠습니까"라고 말했다. 제작진은 "이미 3년 전 미군의 사건 조사 기록을 봤을 텐데 결과는 이렇게 다르다"며 "같은 수사기록을 놓고 다른 결론을 내렸지만, 결국 판단은 국민의 몫이다"라고 말했다.
설령 진실이 밝혀지더라도 이 사건을 법적으로 바로잡을 수는 없다. 미국의 법 규정상 배심원이 무죄를 선고하면 검사는 항소할 수 없기 때문이다.
최승호 책임프로듀서는 프로그램의 말미에서 "바뀌는 건 없지만 한 웅큼의 사실을 두 아이들에게 바칠 수는 있다"며 "너희들의 희생이 조금 더 떳떳한 조국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두 여중생의 죽음 이후 미군 주둔 규정도 일부 바뀌었고, 최근 미군에 의한 사고가 발생했을 때 미국 대통령이 즉시 사과하는 등 변화된 모습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었다.
한 가지 아이러니한 사실은 미군과 일부 한국인의 의견이 이상할 정도로 비슷하다는 점. "큰 사건이 아니에요. 단순한 교통사고를 김정일을 추종하는 좌익들이 살인한 것처럼 해서 반미감정을 부추기고" "할말은 하겠다는데 할말이 뭐가 있냐. 동맹인데" 이것은 미군의 말이 아니라 한국의 예비역 장교와 안보 전문가의 말이다.
[문제의 AVLM 전차. 전차장과 운전병의 사이가 83cm임을 보여주고 있다(왼쪽) 오른쪽은 희생당한 효순이와 미선이. 사진제공 = MBC]
(김한준 기자 star@mydaily.co.kr)
.
2008.06.14 06:51:06 (*.219.131.206)
.
효순이 미선이 사건의 진실 그날의 기억
2007/06/11 13:55
효순이 미선이 사망 사건의 진실
1>사건경위와 진상과정
2002년 6월 13일 친구 생일잔치를 가던 신효순, 심미선 두 여중학생이 미군장갑차에 의해 희생당하였다. 갓길을 걷던 두 여중생이 대북군사훈련에 참가하던 주한미군의 장갑차에 깔려 숨을 거둔 것이다.
50톤 장갑차에 깔린 두 여중생은 전신 뼈마디가 으깨지고 뇌수가 터져 참혹하게 죽었다. 놀라운 사실은 일반인이 보행하는 길거리에서 어떻게 거대한 궤도전차가 안전표식 하나 없이 훈련을 벌일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2002년 6월 13일은 미군의 고압선에 의해 처참하게 사지가 절단당하여 1년 가까운 시간동안 고통스러운 투병생활을 했던 전동록씨의 장례식을 치룬 이틀 뒤였다.
-사건 발생 다음날 6월 14일 미 제2사단은 사회단체를 배제하고 유족들만 참여시킨 채 현장브리핑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주한미군의 현장브리핑이란 것이 사건에 대한 기초조사도 하지 않고, 빠르게 사건을 덮어버리려고 하는 목적으로 요식행위로 진행하여 거센 항의를 받게 되었다.
게다가 이 자리에서 왜 훈련을 하기 전에 마을이장이나 관공서에 그 사실을 통보하지 않았냐는 질문에 미군측은 훈련 사실을 미리 통보했다는 새빨간 거짓말로 주민들을 기만하였다. 결국 주한미군은 사람을 죽인 궤도전차에는 아무 잘못이 없고 궤도전차에 깔려죽은 두 학생이 잘못이라는 궤변을 늘어놓았던 것이다.
주한미군은 이처럼 저들의 권력과 힘을 이용하여 사건을 축소, 은폐하려고 획책하였다. 이들은 사건에 대한 사죄와 진상조사 등 최소한의 전제조건도 없이 유족들에게 군, 경, 공안기관을 압박하여 장례를 치루게 한 것이다.
사건 직후 주한미군의 범죄적 행각을 자세히 살펴보자.
-주한미군은 장례식 이전에는 일단 두 여중생의 장례식을 치르면 미2사단과 면담을 해주겠다고 약속하더니, 약속을 믿고 유족들이 장례식을 치르자 장례식 후 태도를 돌변하며 유족과의 면담을 거부하고 유족들에게 이 사건이 사회여론화가 되지 않는 조건으로 4억원을 주겠다고 매수를 시도하는 등 사건진상을 규명할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사건을 은폐하려고만 하였다.
-6월 28일 미2사단 공보실장인 브라이언 메이커 소령은 여중생 죽음과 관련하여 ‘어느 누구의 과실도 없었다’ ‘궤도차량은 사고 당시 모든 안전수칙을 이행했다. 한미 합종조사 결과 누구도 힐책 받아야 할 사람이 없고 어느 누구의 과실도 아닌 것으로 결론났다’고 밝혔다. 주한미군은 사건의 진상에는 예초부터 관심이 없었고, 어차피 SOFA에 기대어 판결내리면 되니까 한국 국민의 여론은 발톱의 때만큼도 여기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7월 3일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에서 여중생 사망사건 진상조사 중간발표를 했다. 발표의 주요내용은 대한민국 검찰과 경찰이 참여시키지 않은 조사는 한미합동조사라고 볼 수 없으며, 운전병이 여중생들을 보지 못했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도 30미터 가량의 거리면 특별한 사정이 없는 이상 시야가 확보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의견을 피력하였다. 또 사고차량의 선임탑승자는 제때 운전자에게 경고할 수 없었다고 하고 운전자는 소음이 심해서 경고를 듣지 못한 것처럼 조사결과에서 기재하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도 민변은 반론을 제기하였다. 다시 말해 사건 가해자들이 전방의 여중생을 파악하였을 때 서로 의견을 주고받을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는 것은 말이 안되고 더불어 하필이면 그때 무선통신의 문제가 발생하였다는 것은 더욱 의구심이 가는 일이기에 정확한 조사가 필요하다는 등의 미 2사단의 조사결과 발표에 대한 의문사항 7가지를 발표한 것이다.
-이처럼 사건에 대한 파장이 일파만파로 번져가자 주한미군은 허겁지겁 사건을 얼버무리려고 시도하였다. 사건발생 보름께인 7월 4일 주한미군의 총대장이 전면에 나선 것이다. 리언 러포트 당시 주한미사령관은 여중생사망과 관련하여 ‘미 육군이 이 비극적인 사고에 대한 전적인 책임이 있음을 안정한다. 사고에 대해 전적으로 책임을 통감하며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모든 조치를 강구할 것’이라며 지금까지 주한미군의 과실은 없다는 공식입장을 뒤집어엎고, ‘그동안 여러 가지 조언과 협조를 아끼지 않은 한국군과 한국 경찰에게 심심한 사의를 표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것은 주한미군의 진심어린 사과가 아니라 일단 위기를 벗어나려는 가증스러운 기만술책임이 드러났다.
이후 사건의 전개과정을 살펴보자.
-7월 8일 여중생사망사건과 관련하여 서울지검 의정부지청이 주한미군들을 상대로 사고경위들을 조사할 예정이라고 발표했다. 미군의 공무집행 중 일어난 사건이 경우 1차적 재판관할권은 미군에 있으나, 법무부는 미군들에 대한 조사결과를 토대로 미군측의 자체조사 결과의 타당성을 판단하여 11일까지 재판권 포기요청여부를 결정1)하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주한미군은 주한미군주둔군지위협정(SOFA)의 불평등한 조항을 십분 활용하여 두 여중생사건의 책임을 회피하여 얼버무리려고 시도하였다.
-첫째, 주한미군은 한국 법무부의 사건조사에 불성실하게 응하였다. 주한미군은 7월 8일 신변위협을 이유로 서울지검 의정부지청의 소환을 취소시켰고, 10일에는 출석은 하였으나 신변안전이 보장되지 않았다며 조사를 거부하고 돌아갔고, 7월 29일에야 마지못해 출석하여 조사를 받았다.
-둘째, 주한미군은 형사재판권 관할권 포기요청을 거부하였다.
7월 10일 한국 법무부는 SOFA의 규정에 의해 미행정부에 여중생을 숨지게 한 미군장갑차 운전자 ‘마크 워크’병장, 선입탑승자 ‘페르난도 니노’병장 등 2명에 대한 ‘형사재판 관할권 포기요청’을 보냈다.
11일 주한미군사령부는 한국법무부의 형사재판 포기요청을 신중히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머지않아 이는 거짓임이 드러났다. 7월 27일 주한미군사령부는 재판권이양 거부의 뜻이 담긴 성명을 발표한 것이다. 주한미군은 “자국 군인이 공식적 업무를 수행하는 동안 발생한 사건에 대해 군이 재판권을 보유하는 전통은 미군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사고와 관련된 미군들은 깊이 뉘우치고 있다” 는 등의 발언을 하면서 사실상 주한미군측이 재판권 이양의사가 없음을 비췄다. 8월 7일 주한미군 사령부는 ‘주한미군은 비극적인 사고가 발생했을 당시 미군들은 동맹국의 준비태세에 필요한 인가된 연합작전에 참가하여 그들의 공무를 수행하고 있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러한 사실과 정황으로 미루어볼 때 재판관할권을 유지하는 것이 합당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는 내용의 뻔뻔한 공문을 법무부에 보낸 것이다. 이같은 주한미군의 무례한 행동은 한미간의 불평등 조약인 SOFA가 있는 한 어쩔 수 없는 결과다. 결국 주한미군은 결코 한국의 이익과 한국 국민들의 목숨을 귀중하게 여기지 않으며 오로지 저들을 위해 살아가는 침략적 존재라는 것이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놀라운 것은 이같은 주한미군의 철면피같은 행동에 한국군도 동조하였다는 것이다. 한국 국방부는 7월 16일과 20일, 미8군 사령관과 대책회의를 가졌다.
그리고 22일은 국방부 황의돈 대변인이 브리핑을 통해 “현재 우려할만한 수준의 반미감정 때문에 미군이 사건대응에 어려워하고 있어서 국방부가 대신 나서기로 했다.”는 것이다. 이는 사건을 적당히 은폐, 무마하려는 주한미군의 의도를 국방부가 대신하겠다는 것으로 자기나라 국민의 목숨보다 주한미군의 압력에 두말하지 못하고 굴복하는 한국정부의 대미예속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8월 5일 의정부지청은 여중생 사망사고의 주된 원인은 운전병과 선입탑승자 사이의 통신에 장애가 있었던 때문이라고 발표하였다. 의정부지청은 이에 기초하여 미군측이 재판권을 포기할 경우 사고장갑차의 운전병과 선입탑승자를 업무상 과실치사죄로 기소하겠다고 조사결과를 발표했으나 주한미군의 반대로 결국에는 재판장에 가해자를 세우지도 못했다.
-이러한 주한미군의 무례한 태도가 극치를 보인 것은 사건발생 5개월 뒤인 11월 20일, 사건전반에 대한 재판결과가 공개되면서였다. 11월 20일 주한미군 군사법정은 두 여중생 사망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되던 장갑차 선입탑승자 페르난도 니노 병장에게 무죄, 22일 운전병 마크워커 병장에게도 무죄를 선고했다.
미국 형사재판 절차에 따르면 1심 평결에 대해 변호사는 항고할 수 있지만 검사는 항고할 수가 없다. 결국 재판은 여기서 무죄로 모든 절차가 끝난 셈이다.
배심원단의 무죄평결이 발표되자 피고인석에 앉아 있던 페르난도 니노 병장은 한숨을 크게쉰 뒤 웃는 모습으로 부인과 포옹하고 변호인단과 악수를 하며 기뻐하였다. 재판이 끝나자마자 켐벨 주한미군사령관은 “법적으로는 잘못이 없다는 판단이다”고 기자회견에서 발표하였다. 결국 주한미군의 뻔뻔스런 태도에 의해 여중생의 죽음은 가해자 없는 죽음이 된 것이다.
나아가 미대사관은 유족들의 항의서한마저 수령하기를 거부했다. 언제는 유족에게 사과하더니 언제는 유족의 항의서한마저 거부하다니 이제 재판으로 모든 것이 정리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이를 통해 볼 때 지금까지 주한미군의 사과는 늑대의 탈을 쓴 양의 행동과 같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005년 6월에는 의정부지청의 수사기록이 공개되었다. 의정부 지방검찰청 수사기록은 2005년 5월 27일 대법원의 확정판결로 2년 6개월만에 공개가 결정된 것이다. 수사기록은 1천여쪽에 이르는 분량으로, 미 육군범죄수사대의 조사보고와 수사보고를 비롯해 피의자 진술서, 미 교통사고전담반의 자료, 한국 검찰이 미 2사단에 보낸 수사자료들이 포함되어 있다. 수사기록들을 검토한 결과 당시의 장갑차의 운전병은 두 여중생을 볼 수 있었으며, 운전병과 선입탑승자 사이의 통신장애도 없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한국검찰이 9월 3일 보낸 검토 의견서에서는 당시 이동행렬의 지휘관이었던 메이슨 중대장은 여중생들이 협소한 도로의 우측 가장자리를 이용해 보행하고 있는 것을 목격하였으면서도 뒤따라오는 장갑차 대열에게 “주의를 촉구했어야 함에도 이를 게을리 한 사실은 인정되었다”고 서술됐으나 11월 5일자로 미 2사단에 보낸 의견서에는 메이슨 중대장과 관련된 부분을 삭제함으로써 지휘체계상의 책임을 면책시켜줬다.
이것은 한국검찰은 미국의 압박에 굴욕적으로 은폐조작 하여 미군에게 면죄부를 준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한미관계의 현주소인 것이다.
이후 워커의 변호사 가이워맥도 “3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진실을 공개한다”며 “재판이 적절하게 진행됐다면 선입탑승자 니노의 과실은 명백한 유죄이며 중대장도 지휘책임을 피할 수 없다"고 실토한 바 있다.
2>사건의 진실
운전병과 탑승자는 효순이 미선이가 앞에 지나가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선도차량도 그들을 보았다. 그리고 사건발생 전이나 직전, 운행시작 전과 운행중에도 통신은 정상작동하고 있었다는 것이 수사기록의 공개로 밝혀졌다.
주한미군은 사실을 은폐시키기 위해서 사건이 발생하자마자 재빠르게 움직이고 대응하였다. 주한미군은 SOFA에 기대어 재판권을 포기하지 않았고 미군법정에서 통신장애의 문제점으로 돌리면서 무죄판결을 내리고 두 범죄자를 미국으로 돌려보냈다.
이 사건의 진실은 두 범죄자를 조사했던 의정부지청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미군의 압박에 굴욕적으로 조사내용을 은폐 조작했다. 은폐조작된 내용이 미군의 무죄판결 결과를 가져오게 하는 뒷받침이 되었다.
결론적으로 여중생 사망사건은 SOFA문제로 여중생을 죽인 주한미군이 한국의 법정에 서지 못했고, 미군 법정에 세워진 주한미군은 미국과 한국검찰에 의해 조작 은폐된 자료를 근거로 무죄선고를 받았던 사건으로 종속적인 한미관계 속에서 나올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사건이었다. 이러한 두 여중생 사망사건은 지금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고 내일에도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이란 점이 충격적이다.
[출처] 효순이 미선이 사건의 진실|작성자 괴물퇴치
.
효순이 미선이 사건의 진실 그날의 기억
2007/06/11 13:55
효순이 미선이 사망 사건의 진실
1>사건경위와 진상과정
2002년 6월 13일 친구 생일잔치를 가던 신효순, 심미선 두 여중학생이 미군장갑차에 의해 희생당하였다. 갓길을 걷던 두 여중생이 대북군사훈련에 참가하던 주한미군의 장갑차에 깔려 숨을 거둔 것이다.
50톤 장갑차에 깔린 두 여중생은 전신 뼈마디가 으깨지고 뇌수가 터져 참혹하게 죽었다. 놀라운 사실은 일반인이 보행하는 길거리에서 어떻게 거대한 궤도전차가 안전표식 하나 없이 훈련을 벌일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2002년 6월 13일은 미군의 고압선에 의해 처참하게 사지가 절단당하여 1년 가까운 시간동안 고통스러운 투병생활을 했던 전동록씨의 장례식을 치룬 이틀 뒤였다.
-사건 발생 다음날 6월 14일 미 제2사단은 사회단체를 배제하고 유족들만 참여시킨 채 현장브리핑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주한미군의 현장브리핑이란 것이 사건에 대한 기초조사도 하지 않고, 빠르게 사건을 덮어버리려고 하는 목적으로 요식행위로 진행하여 거센 항의를 받게 되었다.
게다가 이 자리에서 왜 훈련을 하기 전에 마을이장이나 관공서에 그 사실을 통보하지 않았냐는 질문에 미군측은 훈련 사실을 미리 통보했다는 새빨간 거짓말로 주민들을 기만하였다. 결국 주한미군은 사람을 죽인 궤도전차에는 아무 잘못이 없고 궤도전차에 깔려죽은 두 학생이 잘못이라는 궤변을 늘어놓았던 것이다.
주한미군은 이처럼 저들의 권력과 힘을 이용하여 사건을 축소, 은폐하려고 획책하였다. 이들은 사건에 대한 사죄와 진상조사 등 최소한의 전제조건도 없이 유족들에게 군, 경, 공안기관을 압박하여 장례를 치루게 한 것이다.
사건 직후 주한미군의 범죄적 행각을 자세히 살펴보자.
-주한미군은 장례식 이전에는 일단 두 여중생의 장례식을 치르면 미2사단과 면담을 해주겠다고 약속하더니, 약속을 믿고 유족들이 장례식을 치르자 장례식 후 태도를 돌변하며 유족과의 면담을 거부하고 유족들에게 이 사건이 사회여론화가 되지 않는 조건으로 4억원을 주겠다고 매수를 시도하는 등 사건진상을 규명할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사건을 은폐하려고만 하였다.
-6월 28일 미2사단 공보실장인 브라이언 메이커 소령은 여중생 죽음과 관련하여 ‘어느 누구의 과실도 없었다’ ‘궤도차량은 사고 당시 모든 안전수칙을 이행했다. 한미 합종조사 결과 누구도 힐책 받아야 할 사람이 없고 어느 누구의 과실도 아닌 것으로 결론났다’고 밝혔다. 주한미군은 사건의 진상에는 예초부터 관심이 없었고, 어차피 SOFA에 기대어 판결내리면 되니까 한국 국민의 여론은 발톱의 때만큼도 여기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7월 3일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에서 여중생 사망사건 진상조사 중간발표를 했다. 발표의 주요내용은 대한민국 검찰과 경찰이 참여시키지 않은 조사는 한미합동조사라고 볼 수 없으며, 운전병이 여중생들을 보지 못했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도 30미터 가량의 거리면 특별한 사정이 없는 이상 시야가 확보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의견을 피력하였다. 또 사고차량의 선임탑승자는 제때 운전자에게 경고할 수 없었다고 하고 운전자는 소음이 심해서 경고를 듣지 못한 것처럼 조사결과에서 기재하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도 민변은 반론을 제기하였다. 다시 말해 사건 가해자들이 전방의 여중생을 파악하였을 때 서로 의견을 주고받을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는 것은 말이 안되고 더불어 하필이면 그때 무선통신의 문제가 발생하였다는 것은 더욱 의구심이 가는 일이기에 정확한 조사가 필요하다는 등의 미 2사단의 조사결과 발표에 대한 의문사항 7가지를 발표한 것이다.
-이처럼 사건에 대한 파장이 일파만파로 번져가자 주한미군은 허겁지겁 사건을 얼버무리려고 시도하였다. 사건발생 보름께인 7월 4일 주한미군의 총대장이 전면에 나선 것이다. 리언 러포트 당시 주한미사령관은 여중생사망과 관련하여 ‘미 육군이 이 비극적인 사고에 대한 전적인 책임이 있음을 안정한다. 사고에 대해 전적으로 책임을 통감하며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모든 조치를 강구할 것’이라며 지금까지 주한미군의 과실은 없다는 공식입장을 뒤집어엎고, ‘그동안 여러 가지 조언과 협조를 아끼지 않은 한국군과 한국 경찰에게 심심한 사의를 표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것은 주한미군의 진심어린 사과가 아니라 일단 위기를 벗어나려는 가증스러운 기만술책임이 드러났다.
이후 사건의 전개과정을 살펴보자.
-7월 8일 여중생사망사건과 관련하여 서울지검 의정부지청이 주한미군들을 상대로 사고경위들을 조사할 예정이라고 발표했다. 미군의 공무집행 중 일어난 사건이 경우 1차적 재판관할권은 미군에 있으나, 법무부는 미군들에 대한 조사결과를 토대로 미군측의 자체조사 결과의 타당성을 판단하여 11일까지 재판권 포기요청여부를 결정1)하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주한미군은 주한미군주둔군지위협정(SOFA)의 불평등한 조항을 십분 활용하여 두 여중생사건의 책임을 회피하여 얼버무리려고 시도하였다.
-첫째, 주한미군은 한국 법무부의 사건조사에 불성실하게 응하였다. 주한미군은 7월 8일 신변위협을 이유로 서울지검 의정부지청의 소환을 취소시켰고, 10일에는 출석은 하였으나 신변안전이 보장되지 않았다며 조사를 거부하고 돌아갔고, 7월 29일에야 마지못해 출석하여 조사를 받았다.
-둘째, 주한미군은 형사재판권 관할권 포기요청을 거부하였다.
7월 10일 한국 법무부는 SOFA의 규정에 의해 미행정부에 여중생을 숨지게 한 미군장갑차 운전자 ‘마크 워크’병장, 선입탑승자 ‘페르난도 니노’병장 등 2명에 대한 ‘형사재판 관할권 포기요청’을 보냈다.
11일 주한미군사령부는 한국법무부의 형사재판 포기요청을 신중히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머지않아 이는 거짓임이 드러났다. 7월 27일 주한미군사령부는 재판권이양 거부의 뜻이 담긴 성명을 발표한 것이다. 주한미군은 “자국 군인이 공식적 업무를 수행하는 동안 발생한 사건에 대해 군이 재판권을 보유하는 전통은 미군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사고와 관련된 미군들은 깊이 뉘우치고 있다” 는 등의 발언을 하면서 사실상 주한미군측이 재판권 이양의사가 없음을 비췄다. 8월 7일 주한미군 사령부는 ‘주한미군은 비극적인 사고가 발생했을 당시 미군들은 동맹국의 준비태세에 필요한 인가된 연합작전에 참가하여 그들의 공무를 수행하고 있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러한 사실과 정황으로 미루어볼 때 재판관할권을 유지하는 것이 합당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는 내용의 뻔뻔한 공문을 법무부에 보낸 것이다. 이같은 주한미군의 무례한 행동은 한미간의 불평등 조약인 SOFA가 있는 한 어쩔 수 없는 결과다. 결국 주한미군은 결코 한국의 이익과 한국 국민들의 목숨을 귀중하게 여기지 않으며 오로지 저들을 위해 살아가는 침략적 존재라는 것이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놀라운 것은 이같은 주한미군의 철면피같은 행동에 한국군도 동조하였다는 것이다. 한국 국방부는 7월 16일과 20일, 미8군 사령관과 대책회의를 가졌다.
그리고 22일은 국방부 황의돈 대변인이 브리핑을 통해 “현재 우려할만한 수준의 반미감정 때문에 미군이 사건대응에 어려워하고 있어서 국방부가 대신 나서기로 했다.”는 것이다. 이는 사건을 적당히 은폐, 무마하려는 주한미군의 의도를 국방부가 대신하겠다는 것으로 자기나라 국민의 목숨보다 주한미군의 압력에 두말하지 못하고 굴복하는 한국정부의 대미예속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8월 5일 의정부지청은 여중생 사망사고의 주된 원인은 운전병과 선입탑승자 사이의 통신에 장애가 있었던 때문이라고 발표하였다. 의정부지청은 이에 기초하여 미군측이 재판권을 포기할 경우 사고장갑차의 운전병과 선입탑승자를 업무상 과실치사죄로 기소하겠다고 조사결과를 발표했으나 주한미군의 반대로 결국에는 재판장에 가해자를 세우지도 못했다.
-이러한 주한미군의 무례한 태도가 극치를 보인 것은 사건발생 5개월 뒤인 11월 20일, 사건전반에 대한 재판결과가 공개되면서였다. 11월 20일 주한미군 군사법정은 두 여중생 사망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되던 장갑차 선입탑승자 페르난도 니노 병장에게 무죄, 22일 운전병 마크워커 병장에게도 무죄를 선고했다.
미국 형사재판 절차에 따르면 1심 평결에 대해 변호사는 항고할 수 있지만 검사는 항고할 수가 없다. 결국 재판은 여기서 무죄로 모든 절차가 끝난 셈이다.
배심원단의 무죄평결이 발표되자 피고인석에 앉아 있던 페르난도 니노 병장은 한숨을 크게쉰 뒤 웃는 모습으로 부인과 포옹하고 변호인단과 악수를 하며 기뻐하였다. 재판이 끝나자마자 켐벨 주한미군사령관은 “법적으로는 잘못이 없다는 판단이다”고 기자회견에서 발표하였다. 결국 주한미군의 뻔뻔스런 태도에 의해 여중생의 죽음은 가해자 없는 죽음이 된 것이다.
나아가 미대사관은 유족들의 항의서한마저 수령하기를 거부했다. 언제는 유족에게 사과하더니 언제는 유족의 항의서한마저 거부하다니 이제 재판으로 모든 것이 정리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이를 통해 볼 때 지금까지 주한미군의 사과는 늑대의 탈을 쓴 양의 행동과 같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005년 6월에는 의정부지청의 수사기록이 공개되었다. 의정부 지방검찰청 수사기록은 2005년 5월 27일 대법원의 확정판결로 2년 6개월만에 공개가 결정된 것이다. 수사기록은 1천여쪽에 이르는 분량으로, 미 육군범죄수사대의 조사보고와 수사보고를 비롯해 피의자 진술서, 미 교통사고전담반의 자료, 한국 검찰이 미 2사단에 보낸 수사자료들이 포함되어 있다. 수사기록들을 검토한 결과 당시의 장갑차의 운전병은 두 여중생을 볼 수 있었으며, 운전병과 선입탑승자 사이의 통신장애도 없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한국검찰이 9월 3일 보낸 검토 의견서에서는 당시 이동행렬의 지휘관이었던 메이슨 중대장은 여중생들이 협소한 도로의 우측 가장자리를 이용해 보행하고 있는 것을 목격하였으면서도 뒤따라오는 장갑차 대열에게 “주의를 촉구했어야 함에도 이를 게을리 한 사실은 인정되었다”고 서술됐으나 11월 5일자로 미 2사단에 보낸 의견서에는 메이슨 중대장과 관련된 부분을 삭제함으로써 지휘체계상의 책임을 면책시켜줬다.
이것은 한국검찰은 미국의 압박에 굴욕적으로 은폐조작 하여 미군에게 면죄부를 준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한미관계의 현주소인 것이다.
이후 워커의 변호사 가이워맥도 “3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진실을 공개한다”며 “재판이 적절하게 진행됐다면 선입탑승자 니노의 과실은 명백한 유죄이며 중대장도 지휘책임을 피할 수 없다"고 실토한 바 있다.
2>사건의 진실
운전병과 탑승자는 효순이 미선이가 앞에 지나가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선도차량도 그들을 보았다. 그리고 사건발생 전이나 직전, 운행시작 전과 운행중에도 통신은 정상작동하고 있었다는 것이 수사기록의 공개로 밝혀졌다.
주한미군은 사실을 은폐시키기 위해서 사건이 발생하자마자 재빠르게 움직이고 대응하였다. 주한미군은 SOFA에 기대어 재판권을 포기하지 않았고 미군법정에서 통신장애의 문제점으로 돌리면서 무죄판결을 내리고 두 범죄자를 미국으로 돌려보냈다.
이 사건의 진실은 두 범죄자를 조사했던 의정부지청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미군의 압박에 굴욕적으로 조사내용을 은폐 조작했다. 은폐조작된 내용이 미군의 무죄판결 결과를 가져오게 하는 뒷받침이 되었다.
결론적으로 여중생 사망사건은 SOFA문제로 여중생을 죽인 주한미군이 한국의 법정에 서지 못했고, 미군 법정에 세워진 주한미군은 미국과 한국검찰에 의해 조작 은폐된 자료를 근거로 무죄선고를 받았던 사건으로 종속적인 한미관계 속에서 나올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사건이었다. 이러한 두 여중생 사망사건은 지금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고 내일에도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이란 점이 충격적이다.
[출처] 효순이 미선이 사건의 진실|작성자 괴물퇴치
.
2008.06.14 06:59:03 (*.219.131.206)
.
“여중생 압살사건 은폐에 한국검찰이 더 적극적이었다.”
‘평화와 통일을 여는 사람들’(평통사)은 10일 프레스센터에서
‘주한미군의 두 여중생 압살사건에 대한 의정부 지방 검찰청 수사기록
검토 결과
발표 기자회견’을 갖고 “여중생 압살사건을 은폐하는데 주한미군보다
한국검찰이 더 적극적이었다”고 주장했다.
평통사는 지난 3일과 9일 의정부지방검찰청으로부터 여중생 압살사건에 관한
수사기록을 넘겨받아 검토한 결과 “사고 장갑차 운전병은 두 여중생을 볼 수
있었으며, 운전병과 관제병 사이에 통신장애가 없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평통사는 “한국 검찰이 이같은 사실을 알고도 고의적으로 은폐해 사건
진상규명을 어렵게 만들었다”며 “한국 검찰이 주한미군에 협조를 ‘너무’
잘한다”고 꼬집었다.
평통사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2002년 6월 13일 여중생 압살사고가 난 후 주한미군
이 사건 수사결과를 발표했으며,
이에 대해 한국검찰이 8월 5일 수사결과를 발표하고 9월 3일 ‘미 부교장갑차
대한민국 여중생 치사사건 수사결과에 따른 법률적 검토의견’을 보냈는데,
이 기록에서 사건을 은폐하는 결정적인 내용이 있었다.
한국 검찰, 미군에 보낸 최초 서류 통해 중대장 혐의 이미 밝혀
▲ 두 여중생 추모 3주기를 앞두고 고 신효순, 심미선 여중생 압살사건(2002.6.10)에 대한 의정부 지방 검찰청 수사기록 검토 결과 발표 기자회견이 10일 한국언론재단에서 열렸다. ⓒ2005 데일리서프라이즈 박항구 기자
평통사는 “의정부 지검이 2002년 9월 미군에 보낸 법률적 검토의견에는
운전병과 관제병의 혐의가 나타나 있다.
하지만 11월 초 같은 제목의 의견서를 미군에 다시 보내면서 중대장에 관한 부분
을 삭제했다”며 “미국 군사재판을 앞두고 중대장을 기소하지 않기 위해
주한미군이 한국 검찰에게 요구한 게 아닌가”라고 주장했다.
“주한미군이 통신장애를 이유로 다른 모든 상황을 묻어버리고 관제병·운전병까지
무죄로 끌어가기 위한 것이었다.
한국 검찰이 여기에 적극 참여해 새로운 혐의를 입증하기는 커녕 이미 밝혀진
혐의까지도 빼버렸다.”
평통사는 이같이 주장하며 “의정부 지검은 이 사실을 숨기기 위해 법원의
정보공개 명령에도 불복했다”고 말했다.
평통사 관계자는 “의정부지검은 2002년 9월에 작성한 검토의견은 끝까지
숨기려 했으며, 이는 주한미군의 지시사항이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에 따르면 의정부 지검이 최초로 주한미군에게 보낸 검토의견에는
여중생이 사각지대 밖에 있었다는 사실과 당시 통신장애가 없었다는 사실,
주한미군이 안전규범을 무시하고 작전을 진행했다는 사실 등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는데 중요한 사실이 담겨 있었다.
주한미군은 이를 검토한 후 ‘비공개’ 처리할 것을 의정부지검에
신신당부하며 “희생자의 부모, 언론 등에 일체 공개하지 말라”고 요구했다.
▲ ⓒ2005 데일리서프라이즈 박항구 기자
의정부지검은 이 서류를 완전히 밀봉해 관계서류 가장 밑바닥에 놓고
대법원이 관련자료 일체 공개 명령을 내렸을 때도 내놓지 않았다.
이 관계자는 “서류를 넘겨받을 때 담당자도 모르는 것이라고 하면서도
공개를 꺼렸다.
어렵게 서류를 받아 내용을 확인하니 주한미군과 한국검찰이 발표한 내용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내용이었다”라며 “한국 검찰 스스로 자신이 밝혀낸 내용을
숨기고 허위로 국민에게 발표해 미군에게 면죄부를 주었다”고 주장했다.
한국 검찰, 두 여중생 사각지대 밖에 있었다는 사실 숨겨
사고 직후 수사를 맡은 주한미군은 2002년 6월 19일 수사결과 보고서를 통해
“사고 장갑차의 관제병은 30m 전방에서 여중생 볼 수 있었다”고 밝혔지만
한국 검찰은 8월 5일 “관제병은 두 여중생을 15m 전방에서 발견했으며,
사고지점이 오른쪽으로 굽은 오르막길이고, 우측 갓길에 풀이 우거져 30m
전방에서 보기 곤란하고 20m 전방에서 보는 것은 가능했을 것으로 판단된다”고
밝혔다.
평통사는 “한국검찰이 운전병의 두 여중생 발견 지점을 주한미군의 수사결과보다
짧은 20m로 밝힌 것은 장갑차의 사각지대가 12~2시 방향, 차량 전방
2.5~21.6m라는 사실에 맞추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검찰은 사고현장에서 실제 사건을 재현해 본 결과 사고차량은 우회전을
하면서 12~4시 방향의 시야를 확보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직선으로 주행할 때 보다 넓게 시야를 확보할 수 있다는 얘기다.
하지만 검찰은 이 같은 사실은 밝히지 않고 두 여중생이 사각지대에
있었기 때문에 관제병이 사고방지를 위한 적극적인 조치를 취할 수 없다고 밝혔다.
평통사는 “한국검찰은 피의자인 미군들에게 면죄부를 주기 위해 사실을 은폐했다”
라며 “의정부 지검은 이러한 자료를 공개하지 않기 위해 대법원의 정보공개
판결에 불복했다”고 주장했다.
운전병, 여중생 발견직후 브레이크 밟았으면 사망사고까지 일어나지는 않았을 것
▲ 지난 2002년 12월 미군 장갑차 여중생 압살사건 여중생 추모 집회 현장.(자료사진) ⓒ2005 데일리서프라이즈 박항구 기자
또한 운전병이 여중생을 발견하고 바로 브레이크를 밟았다는 진술도
사실이 아니라고 평통사는 밝혔다.
당시 “운전병은 사고 직전 미선이와 탱크 거리는 6인치(15.24cm)였다.
발견 즉시 브레이크를 밟았는데 60cm를 더 가서 멈췄다”고 진술했다.
하지만 장갑차를 몰아본 대부분의 운전병은 “궤도차량은 정지거리가 짧아
운전병의 진술대로 8~16km 주행했으면 앞으로 10cm정도 밖에 가지 않았을 것”
이라고 말한다.
운전병의 주장이 사실이라 해도 뒤에 있었던 미선이는 하반신까지,
앞에 가던 효순이는 종아리 정도에 부상을 입었을 것이다.
즉, 사망까지 가는 큰 사고는 아니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하지만 사고 직후 사진을 보면 효순이 위로 미선이가 겹쳐 있었으며,
효순이 가슴이 미선이 등 중앙정도에 와 있었다.
또한 당시 사고 현장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사고 차량들이 50~60km로
고속주행했다고 증언해 8~16km의 속도로 갔다는 미군측 주장도 신뢰할 수
없는 것이 됐다.
평통사는 “이는 장갑차가 효순이와 미선이를 완전히 깔고 지나갔다는 것을
말한다.
운전병이 관제병의 고함소리를 듣고 브레이크를 밟았다는 것은
거짓진술이었음을 증명한다”며 “
왜 미군이 그토록 서둘러 이동을 해야 했는지는 아무도 설명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관제병, 손만 뻗어도 운전병에게 경고할 수 있어
운전병과 관제병 사이에 통신장애가 있었다는 운전병의 주장 역시
거짓으로 증명됐다.
당시 주한미군과 한국 검찰은 “관제병인 니노가 여중생을 발견하고
내부 통신마이크를 통해 운전병 워커에게 정지지시를 내렸으나 통신장비의
잡음 등 장애가 있어 운전병이 이를 듣지 못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미군육군범죄수사대(CID)의 수사자료와 피의자 진술서에 의하면
통신장비는 작전에 들어가기 30분 전에 이미 정비를 한 상태였으며,
운행 도중에도 관제병과 운전병은 교신을 했던 것이 밝혀졌다.
두 미군 병사의 증언에 따르면 출발 전에 최소한 세 번 통신장비를 점검해
내부통신을 교신하고 외부통신도 점검했으며 모두 정상적으로 작동했다.
사고 후에도 통신장비는 여전히 정상적으로 작동했다.
통신상의 문제가 있다 해도 관제병과 운전병 사이의 거리는 82.8cm로 관제병이
손만 뻗으면 운전병에서 경고신호를 보낼 수 있다는 점에서 통신장애는
구차한 변명에 불과하다.
마주오던 브래들리 탑승자의 경고신호를 못봤다는 운전병의 진술 역시
거짓이었다.
워커는 “브래들리의 옆면과 운전병, 장갑차의 코너에 주시하느라 운전병과
관제병, 중대장이 보낸 정지신호를 못봤다”고 진술했지만 맞은편에서 오던
장갑차를 운전했던 운전병은 “차량을 멈추게 하기 위해 운전석 해치 밖으로
나와 손을 흔들었다”고 밝혔다.
평통사는 “통신도 무시하고 맞은 편 장갑차에 탑승한 사람들의 경고도
무시한 것은 두 여중생이 알아서 비키겠거니 하는 안이한 생각 때문이었거나
아니면 교행을 위해 사고가 날 것을 뻔히 알면서도 무리한 운행을 했음을
보여준다”고 강조했다.
.
근본적인 사고 원인은 한국 국민의 안전 무시하는 주한미군 지휘체계
근본적인 사고의 원인은 주한미군의 지휘체계에 있다.
평통사는 “주한미군은 도로 폭보다 더 큰 차량을 운행시킨 것은 한국의 도로교통법을 무시한 것”이며 “군작전시 안전규정을 담은 작전교범(FM)조차 무시했다”고 주장했다.
관제병 니노는 “지휘계통에서 운전자와 관제병 사이에 통신이 안 될 경우 운전자는 반드시 차량을 세워야 한다고 말한 사람은 없었지만 매뉴얼에는 적혀있다”며 “우리는 출발시간, 종료시간에 관해 어떤 설명도 듣지 못했으며 행군용 지도도 없었고, 어디로 가는지도 몰랐다”고 진술했다.
또한 당시 작전에 참여했던 하사관들은 무한궤도차량은 위험하고 자주 이동하면 고장도 잘 나기 때문에 트레일러로 옮길 것을 제안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진술했다.
평통사는 “이는 주한미군의 만성화된 규율위반이며 안전에 관한 정당한 건의조차 묵살하는 미군지휘관의 독단이 밝혀지고 있다”고 말했다.
이는 엄연히 당시 지휘를 맡은 메이슨 중대장의 직무유기이며 여중생 압살사고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얘기다. 하지만 메이슨 중대장은 가장 가벼운 징계인 경고처분만을 받았다.
작성일시 : 2005-06-10 15:14
데일리 서프라이즈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영등포동 7가 64-44 우)150-037 | TEL : 02-2678-7230 | FAX : 02-2678
.
“여중생 압살사건 은폐에 한국검찰이 더 적극적이었다.”
‘평화와 통일을 여는 사람들’(평통사)은 10일 프레스센터에서
‘주한미군의 두 여중생 압살사건에 대한 의정부 지방 검찰청 수사기록
검토 결과
발표 기자회견’을 갖고 “여중생 압살사건을 은폐하는데 주한미군보다
한국검찰이 더 적극적이었다”고 주장했다.
평통사는 지난 3일과 9일 의정부지방검찰청으로부터 여중생 압살사건에 관한
수사기록을 넘겨받아 검토한 결과 “사고 장갑차 운전병은 두 여중생을 볼 수
있었으며, 운전병과 관제병 사이에 통신장애가 없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평통사는 “한국 검찰이 이같은 사실을 알고도 고의적으로 은폐해 사건
진상규명을 어렵게 만들었다”며 “한국 검찰이 주한미군에 협조를 ‘너무’
잘한다”고 꼬집었다.
평통사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2002년 6월 13일 여중생 압살사고가 난 후 주한미군
이 사건 수사결과를 발표했으며,
이에 대해 한국검찰이 8월 5일 수사결과를 발표하고 9월 3일 ‘미 부교장갑차
대한민국 여중생 치사사건 수사결과에 따른 법률적 검토의견’을 보냈는데,
이 기록에서 사건을 은폐하는 결정적인 내용이 있었다.
한국 검찰, 미군에 보낸 최초 서류 통해 중대장 혐의 이미 밝혀
▲ 두 여중생 추모 3주기를 앞두고 고 신효순, 심미선 여중생 압살사건(2002.6.10)에 대한 의정부 지방 검찰청 수사기록 검토 결과 발표 기자회견이 10일 한국언론재단에서 열렸다. ⓒ2005 데일리서프라이즈 박항구 기자
평통사는 “의정부 지검이 2002년 9월 미군에 보낸 법률적 검토의견에는
운전병과 관제병의 혐의가 나타나 있다.
하지만 11월 초 같은 제목의 의견서를 미군에 다시 보내면서 중대장에 관한 부분
을 삭제했다”며 “미국 군사재판을 앞두고 중대장을 기소하지 않기 위해
주한미군이 한국 검찰에게 요구한 게 아닌가”라고 주장했다.
“주한미군이 통신장애를 이유로 다른 모든 상황을 묻어버리고 관제병·운전병까지
무죄로 끌어가기 위한 것이었다.
한국 검찰이 여기에 적극 참여해 새로운 혐의를 입증하기는 커녕 이미 밝혀진
혐의까지도 빼버렸다.”
평통사는 이같이 주장하며 “의정부 지검은 이 사실을 숨기기 위해 법원의
정보공개 명령에도 불복했다”고 말했다.
평통사 관계자는 “의정부지검은 2002년 9월에 작성한 검토의견은 끝까지
숨기려 했으며, 이는 주한미군의 지시사항이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에 따르면 의정부 지검이 최초로 주한미군에게 보낸 검토의견에는
여중생이 사각지대 밖에 있었다는 사실과 당시 통신장애가 없었다는 사실,
주한미군이 안전규범을 무시하고 작전을 진행했다는 사실 등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는데 중요한 사실이 담겨 있었다.
주한미군은 이를 검토한 후 ‘비공개’ 처리할 것을 의정부지검에
신신당부하며 “희생자의 부모, 언론 등에 일체 공개하지 말라”고 요구했다.
▲ ⓒ2005 데일리서프라이즈 박항구 기자
의정부지검은 이 서류를 완전히 밀봉해 관계서류 가장 밑바닥에 놓고
대법원이 관련자료 일체 공개 명령을 내렸을 때도 내놓지 않았다.
이 관계자는 “서류를 넘겨받을 때 담당자도 모르는 것이라고 하면서도
공개를 꺼렸다.
어렵게 서류를 받아 내용을 확인하니 주한미군과 한국검찰이 발표한 내용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내용이었다”라며 “한국 검찰 스스로 자신이 밝혀낸 내용을
숨기고 허위로 국민에게 발표해 미군에게 면죄부를 주었다”고 주장했다.
한국 검찰, 두 여중생 사각지대 밖에 있었다는 사실 숨겨
사고 직후 수사를 맡은 주한미군은 2002년 6월 19일 수사결과 보고서를 통해
“사고 장갑차의 관제병은 30m 전방에서 여중생 볼 수 있었다”고 밝혔지만
한국 검찰은 8월 5일 “관제병은 두 여중생을 15m 전방에서 발견했으며,
사고지점이 오른쪽으로 굽은 오르막길이고, 우측 갓길에 풀이 우거져 30m
전방에서 보기 곤란하고 20m 전방에서 보는 것은 가능했을 것으로 판단된다”고
밝혔다.
평통사는 “한국검찰이 운전병의 두 여중생 발견 지점을 주한미군의 수사결과보다
짧은 20m로 밝힌 것은 장갑차의 사각지대가 12~2시 방향, 차량 전방
2.5~21.6m라는 사실에 맞추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검찰은 사고현장에서 실제 사건을 재현해 본 결과 사고차량은 우회전을
하면서 12~4시 방향의 시야를 확보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직선으로 주행할 때 보다 넓게 시야를 확보할 수 있다는 얘기다.
하지만 검찰은 이 같은 사실은 밝히지 않고 두 여중생이 사각지대에
있었기 때문에 관제병이 사고방지를 위한 적극적인 조치를 취할 수 없다고 밝혔다.
평통사는 “한국검찰은 피의자인 미군들에게 면죄부를 주기 위해 사실을 은폐했다”
라며 “의정부 지검은 이러한 자료를 공개하지 않기 위해 대법원의 정보공개
판결에 불복했다”고 주장했다.
운전병, 여중생 발견직후 브레이크 밟았으면 사망사고까지 일어나지는 않았을 것
▲ 지난 2002년 12월 미군 장갑차 여중생 압살사건 여중생 추모 집회 현장.(자료사진) ⓒ2005 데일리서프라이즈 박항구 기자
또한 운전병이 여중생을 발견하고 바로 브레이크를 밟았다는 진술도
사실이 아니라고 평통사는 밝혔다.
당시 “운전병은 사고 직전 미선이와 탱크 거리는 6인치(15.24cm)였다.
발견 즉시 브레이크를 밟았는데 60cm를 더 가서 멈췄다”고 진술했다.
하지만 장갑차를 몰아본 대부분의 운전병은 “궤도차량은 정지거리가 짧아
운전병의 진술대로 8~16km 주행했으면 앞으로 10cm정도 밖에 가지 않았을 것”
이라고 말한다.
운전병의 주장이 사실이라 해도 뒤에 있었던 미선이는 하반신까지,
앞에 가던 효순이는 종아리 정도에 부상을 입었을 것이다.
즉, 사망까지 가는 큰 사고는 아니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하지만 사고 직후 사진을 보면 효순이 위로 미선이가 겹쳐 있었으며,
효순이 가슴이 미선이 등 중앙정도에 와 있었다.
또한 당시 사고 현장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사고 차량들이 50~60km로
고속주행했다고 증언해 8~16km의 속도로 갔다는 미군측 주장도 신뢰할 수
없는 것이 됐다.
평통사는 “이는 장갑차가 효순이와 미선이를 완전히 깔고 지나갔다는 것을
말한다.
운전병이 관제병의 고함소리를 듣고 브레이크를 밟았다는 것은
거짓진술이었음을 증명한다”며 “
왜 미군이 그토록 서둘러 이동을 해야 했는지는 아무도 설명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관제병, 손만 뻗어도 운전병에게 경고할 수 있어
운전병과 관제병 사이에 통신장애가 있었다는 운전병의 주장 역시
거짓으로 증명됐다.
당시 주한미군과 한국 검찰은 “관제병인 니노가 여중생을 발견하고
내부 통신마이크를 통해 운전병 워커에게 정지지시를 내렸으나 통신장비의
잡음 등 장애가 있어 운전병이 이를 듣지 못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미군육군범죄수사대(CID)의 수사자료와 피의자 진술서에 의하면
통신장비는 작전에 들어가기 30분 전에 이미 정비를 한 상태였으며,
운행 도중에도 관제병과 운전병은 교신을 했던 것이 밝혀졌다.
두 미군 병사의 증언에 따르면 출발 전에 최소한 세 번 통신장비를 점검해
내부통신을 교신하고 외부통신도 점검했으며 모두 정상적으로 작동했다.
사고 후에도 통신장비는 여전히 정상적으로 작동했다.
통신상의 문제가 있다 해도 관제병과 운전병 사이의 거리는 82.8cm로 관제병이
손만 뻗으면 운전병에서 경고신호를 보낼 수 있다는 점에서 통신장애는
구차한 변명에 불과하다.
마주오던 브래들리 탑승자의 경고신호를 못봤다는 운전병의 진술 역시
거짓이었다.
워커는 “브래들리의 옆면과 운전병, 장갑차의 코너에 주시하느라 운전병과
관제병, 중대장이 보낸 정지신호를 못봤다”고 진술했지만 맞은편에서 오던
장갑차를 운전했던 운전병은 “차량을 멈추게 하기 위해 운전석 해치 밖으로
나와 손을 흔들었다”고 밝혔다.
평통사는 “통신도 무시하고 맞은 편 장갑차에 탑승한 사람들의 경고도
무시한 것은 두 여중생이 알아서 비키겠거니 하는 안이한 생각 때문이었거나
아니면 교행을 위해 사고가 날 것을 뻔히 알면서도 무리한 운행을 했음을
보여준다”고 강조했다.
.
근본적인 사고 원인은 한국 국민의 안전 무시하는 주한미군 지휘체계
근본적인 사고의 원인은 주한미군의 지휘체계에 있다.
평통사는 “주한미군은 도로 폭보다 더 큰 차량을 운행시킨 것은 한국의 도로교통법을 무시한 것”이며 “군작전시 안전규정을 담은 작전교범(FM)조차 무시했다”고 주장했다.
관제병 니노는 “지휘계통에서 운전자와 관제병 사이에 통신이 안 될 경우 운전자는 반드시 차량을 세워야 한다고 말한 사람은 없었지만 매뉴얼에는 적혀있다”며 “우리는 출발시간, 종료시간에 관해 어떤 설명도 듣지 못했으며 행군용 지도도 없었고, 어디로 가는지도 몰랐다”고 진술했다.
또한 당시 작전에 참여했던 하사관들은 무한궤도차량은 위험하고 자주 이동하면 고장도 잘 나기 때문에 트레일러로 옮길 것을 제안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진술했다.
평통사는 “이는 주한미군의 만성화된 규율위반이며 안전에 관한 정당한 건의조차 묵살하는 미군지휘관의 독단이 밝혀지고 있다”고 말했다.
이는 엄연히 당시 지휘를 맡은 메이슨 중대장의 직무유기이며 여중생 압살사고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얘기다. 하지만 메이슨 중대장은 가장 가벼운 징계인 경고처분만을 받았다.
작성일시 : 2005-06-10 15:14
데일리 서프라이즈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영등포동 7가 64-44 우)150-037 | TEL : 02-2678-7230 | FAX : 02-2678
.
2008.06.14 13:51:43 (*.218.188.126)
.
'아!!! 피지도 못한 두소녀의 삼가 명복을 빕니다"
제목: [뉴스] 미군 여중생을 한번치고 확인살인한 것으로 밝혀져..
"전후진 반복하며 확인 압살했다"
탱크조종 전문가 이기환씨 충격보고서 통해 주장 최근 육군 기갑 학교를 졸업해
월남전에서 장갑차파견대로 활동한 바 있는 장갑차·탱크 조종 전문가 한 명이
여중생 사건과 관련해
'이번 사건은 미군이여중생 2명을 희롱 압살 후 전·후진을 반복해 확인 압살까지
자행한 잔인한살인이라고 새롭게 주장하고 나섰다.
26사단에서 탱크를 조종했던 이기환(52세)씨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이씨는 기자와의 전화통화를 통해 "
처음 여중생 소식을 접했을때는 주행중에 충돌을 피하기 위해 급히 방향을
틀거나 아니면 급커브를 돌다가 난 사고라고 생각했다"며
"하지만 사고 현장과 사진을 확인 후에는 오랜 탱크병의 경험상
고의에 의한 살인임을 직감했다"고 밝혔다.
이씨의 주장에 대해 여중생 사건 범국민 대책위에서는
"주관적인 부분이 있긴 하지만 경험이 많은 전문가의 객관적 정황을 근거론
한 사실들이라 이번 사건 에 중요한 근거가 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대책위에 따르면 현재 기갑병 들의 제보가 계속 이어지고 있으면
이번달 14일을 전후로 그동안의 사건 조사 에 대한 종합발표가 있을
예정인 것으로 알려졌다.
다음은 이씨와의 일문일답.
[어떤 계기에서 이런 주장을 하게 되었나]
전차병들의 경우 전차 자체가 대형무기이기 때문에 상당히 군기가 엄하고 직각보행을 원칙으로 하며 정신력이 강한 사람들이 할 수 있다. 그래서 처음에는 대책위에서 주장하는 살인이라는 것을 믿지 않고 주행중에 충돌을 피하기 위해 급히 방향을 틀거나 아니면 급커브를 돌다가 난 사고라고 생각했었다.
하 지만 직접 현장 방문을 하고 현장사진을 확인하고 나서는 명백한 살인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리고는 누군가는 나서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이렇게 글을 쓰 게 되었다.
[살인이라고 얘기하는 근거가 무엇인가]
시야 장애가 없는 직선도로인데다 커브를 돌고 나서 오르막길을 오르느라 시속20Km이하로 달리는 상황에서 15m전방의 사람들을 못 본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더더욱 맑은 날씨에 눈에 잘 띄는 원색 옷을 입은 두 사람을 못본다는것은‥ 장갑차나 탱크 조종사는 시력과 정신력이 좋은 사람만 뽑는다.(구체적 인 근거는 자료를 보면 된다)
[어떤 조사과정을 통해 그런 확신을 하는가]
이 문제를 한 달 가까이 조사하고 고민했다. 글을 쓰는데도 1주일 가까이 걸렸다 사건 현장을 혼자 가면 객관성을 잃을까봐 6명과 함께 가서 조사해봤다.마을주민들과도 얘기해보고, 직접 사고현장에서 옛 경험을 살려 차를 몰아재연해보기도 했다. 사고현장의 언덕 높이와 궤도차량 자국들도 다시 유심히관찰했다.
[글에서 얘기하지 못한 부분이 있다면]
탱크안에 들어가 있으면 쇳덩어리속에 둘러싸여 있게 되면서 사람의 심리상태 가 사나워지기가 쉽다. 그래서 예전 탱크병을 할때는 조종수들이 포악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농담을 하기도 했다. 사건 당시 조종수의 경우도 심리상태가 불안정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이런 사건이 다시 일어나지 않기 위해서는 이번 사건에 대해 단호히 대처해야한다. 국민들이 관심을 가지고 목소리를 높여갔으면 하는 바램이다.
미군이 운행하는 장갑차에 의해 한국의 신효순 심미선 두 여중생이 깔려죽은사건은 단순한 사고사가 아니라 여중생들을 닭 몰듯 장난 삼아 몰고 희롱하며 깔아죽였다는 사실이고 그것도 모자라 전 후진을 반복하여 확인 압살까지 강행한천인공노할 만행이었다는 사실이다.
이 글을 쓰는 필자는 탱크 장갑차 교육학교인 육군 기갑 학교를 졸업하고 우리나라에서는 26사단 탱크중대에서 탱크를 조종했고 71년도 베트남전에 참전해서는백마부대 장갑차파견대에서 밀림왕 7호라는 장갑차를 1년간 조종하며 베트남의 간선도로인 일번국도를 매일 같이 누비고 다녔고 3만Km이상의 무사고 조종경력을갖고 있는 장갑차와 탱크 조종 전문가 출신이다.
1950년생 52세 이름은 이기환.
처음 장갑차 압살 사고에 대해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나는 그것이 주행중에 어쩔수없이 일어난 사고라고 생각했고 또 그렇게 믿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신문이나방송에서 여러 사람들이 고의에 의한 압살 살인이라 했을 때도 나는 그것이주행중에 충돌을 피하기 위해 급히 방향을 틀거나 아니면 급커브를 돌다가 난 사고라고 믿었다.
사람을 그것도 둘씩이나 고의로 깔아 죽인다는 것은 전쟁터에서 부딪힌
적군이라고해도 상상하기 힘든 일이고 또한 전차병은 전차자체가 대형 무기이기 때문에탱크나 장갑차 승무원들은 사관학교생들처럼 군기가 엄하고 특히 전차병 조종수는정신과 몸이 강건한 자가 맡기 때문에 고의로 인한 사고는 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살인을 믿지 않고 있다가 미군 장갑차병의 진술이 다 거짓이라는 것을알면서부터 사고 현장에 찾아가 보게 되었고 사건현장에서 나는 고의에 의한살인임을 직감하고 치를 떨었다. 그리고 8월 26일자로 인터넷에 글을 올렸었다.
.
'아!!! 피지도 못한 두소녀의 삼가 명복을 빕니다"
제목: [뉴스] 미군 여중생을 한번치고 확인살인한 것으로 밝혀져..
"전후진 반복하며 확인 압살했다"
탱크조종 전문가 이기환씨 충격보고서 통해 주장 최근 육군 기갑 학교를 졸업해
월남전에서 장갑차파견대로 활동한 바 있는 장갑차·탱크 조종 전문가 한 명이
여중생 사건과 관련해
'이번 사건은 미군이여중생 2명을 희롱 압살 후 전·후진을 반복해 확인 압살까지
자행한 잔인한살인이라고 새롭게 주장하고 나섰다.
26사단에서 탱크를 조종했던 이기환(52세)씨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이씨는 기자와의 전화통화를 통해 "
처음 여중생 소식을 접했을때는 주행중에 충돌을 피하기 위해 급히 방향을
틀거나 아니면 급커브를 돌다가 난 사고라고 생각했다"며
"하지만 사고 현장과 사진을 확인 후에는 오랜 탱크병의 경험상
고의에 의한 살인임을 직감했다"고 밝혔다.
이씨의 주장에 대해 여중생 사건 범국민 대책위에서는
"주관적인 부분이 있긴 하지만 경험이 많은 전문가의 객관적 정황을 근거론
한 사실들이라 이번 사건 에 중요한 근거가 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대책위에 따르면 현재 기갑병 들의 제보가 계속 이어지고 있으면
이번달 14일을 전후로 그동안의 사건 조사 에 대한 종합발표가 있을
예정인 것으로 알려졌다.
다음은 이씨와의 일문일답.
[어떤 계기에서 이런 주장을 하게 되었나]
전차병들의 경우 전차 자체가 대형무기이기 때문에 상당히 군기가 엄하고 직각보행을 원칙으로 하며 정신력이 강한 사람들이 할 수 있다. 그래서 처음에는 대책위에서 주장하는 살인이라는 것을 믿지 않고 주행중에 충돌을 피하기 위해 급히 방향을 틀거나 아니면 급커브를 돌다가 난 사고라고 생각했었다.
하 지만 직접 현장 방문을 하고 현장사진을 확인하고 나서는 명백한 살인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리고는 누군가는 나서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이렇게 글을 쓰 게 되었다.
[살인이라고 얘기하는 근거가 무엇인가]
시야 장애가 없는 직선도로인데다 커브를 돌고 나서 오르막길을 오르느라 시속20Km이하로 달리는 상황에서 15m전방의 사람들을 못 본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더더욱 맑은 날씨에 눈에 잘 띄는 원색 옷을 입은 두 사람을 못본다는것은‥ 장갑차나 탱크 조종사는 시력과 정신력이 좋은 사람만 뽑는다.(구체적 인 근거는 자료를 보면 된다)
[어떤 조사과정을 통해 그런 확신을 하는가]
이 문제를 한 달 가까이 조사하고 고민했다. 글을 쓰는데도 1주일 가까이 걸렸다 사건 현장을 혼자 가면 객관성을 잃을까봐 6명과 함께 가서 조사해봤다.마을주민들과도 얘기해보고, 직접 사고현장에서 옛 경험을 살려 차를 몰아재연해보기도 했다. 사고현장의 언덕 높이와 궤도차량 자국들도 다시 유심히관찰했다.
[글에서 얘기하지 못한 부분이 있다면]
탱크안에 들어가 있으면 쇳덩어리속에 둘러싸여 있게 되면서 사람의 심리상태 가 사나워지기가 쉽다. 그래서 예전 탱크병을 할때는 조종수들이 포악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농담을 하기도 했다. 사건 당시 조종수의 경우도 심리상태가 불안정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이런 사건이 다시 일어나지 않기 위해서는 이번 사건에 대해 단호히 대처해야한다. 국민들이 관심을 가지고 목소리를 높여갔으면 하는 바램이다.
미군이 운행하는 장갑차에 의해 한국의 신효순 심미선 두 여중생이 깔려죽은사건은 단순한 사고사가 아니라 여중생들을 닭 몰듯 장난 삼아 몰고 희롱하며 깔아죽였다는 사실이고 그것도 모자라 전 후진을 반복하여 확인 압살까지 강행한천인공노할 만행이었다는 사실이다.
이 글을 쓰는 필자는 탱크 장갑차 교육학교인 육군 기갑 학교를 졸업하고 우리나라에서는 26사단 탱크중대에서 탱크를 조종했고 71년도 베트남전에 참전해서는백마부대 장갑차파견대에서 밀림왕 7호라는 장갑차를 1년간 조종하며 베트남의 간선도로인 일번국도를 매일 같이 누비고 다녔고 3만Km이상의 무사고 조종경력을갖고 있는 장갑차와 탱크 조종 전문가 출신이다.
1950년생 52세 이름은 이기환.
처음 장갑차 압살 사고에 대해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나는 그것이 주행중에 어쩔수없이 일어난 사고라고 생각했고 또 그렇게 믿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신문이나방송에서 여러 사람들이 고의에 의한 압살 살인이라 했을 때도 나는 그것이주행중에 충돌을 피하기 위해 급히 방향을 틀거나 아니면 급커브를 돌다가 난 사고라고 믿었다.
사람을 그것도 둘씩이나 고의로 깔아 죽인다는 것은 전쟁터에서 부딪힌
적군이라고해도 상상하기 힘든 일이고 또한 전차병은 전차자체가 대형 무기이기 때문에탱크나 장갑차 승무원들은 사관학교생들처럼 군기가 엄하고 특히 전차병 조종수는정신과 몸이 강건한 자가 맡기 때문에 고의로 인한 사고는 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살인을 믿지 않고 있다가 미군 장갑차병의 진술이 다 거짓이라는 것을알면서부터 사고 현장에 찾아가 보게 되었고 사건현장에서 나는 고의에 의한살인임을 직감하고 치를 떨었다. 그리고 8월 26일자로 인터넷에 글을 올렸었다.
.
효순이·미선이를 기억해야하는 이유
2008/06/05 01:27
[분류없음]
Posted by 레피니언 어온
촛불의 시작, 효순이·미선이를 기억하세요?
ⓒ민중의소리
수만 개의 촛불이 뜨겁게 시청을 달구고 있다. 국민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있는 정부의 태도에 반대하는 수많은 국민들의 촛불은 비가 와도, 탄압이 심해져도 꺼지지 않고 오히려 거세지고 있다.
사람들은 이런 촛불 속에서 과거를 기억한다. 20대들은 2002년 월드컵과 여중생사망사건을, 30·40대들은 87년 6월 항쟁을, 그리고 그 윗세대들은 4·19를 기억한다. 국민의 힘으로 역사를 다시 쓰던 과거의 모습을 지금의 광우병집회에서 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촛불을 들고 거리에 나온 건 언제부터였을까? 시작은 2002년 효순이·미선이 추모집회였다. 그 때의 촛불은 월드컵열풍에 묻혔던 두 여중생의 죽음에 대한 가슴 아픔과 11월 가해자 미군병사가 무죄판결을 받은 것에 대한 분노를 담고 있었다.
사람들은 효순이·미선이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나
집회현장에서 우리가 만난 사람들은 효순이·미선이를 광우병과 동등한 선상에서 기억하고 있지 않은 듯 보였다. 몇몇 20대들은 ‘잘 기억이 안난다’ 혹은 ‘효순이·미선이 문제는 광우병문제만큼 급박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 집회와 이 집회는 성격이 다르지 않나’라는 말을 했다. 또한 대부분 ‘시간이 지나면 잊히는 것은 어쩔 수 일 아니냐’면서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촛불집회 근처인 광화문 교보문고 앞에 세워져 있던 촛불기념비가 있었다면 사람들은 여중생사건을 조금이라도 기억했을까? 다들 알다시피 국민성금을 통해 효순이·미선이 1주기 때 효순이·미선이 촛불기념비를 세워놨었다. 한 달 후 누군가 기념비를 훼손해서 다시 제작했고, 2004년 말에는 불법적치물이라는 이유로 종로구청에서 강제철거를 하고 압수해버렸다. 그 뒤 행방이 묘연해진 촛불기념비가 청운공원 뒤 야산에 버려져 있다는 소식을 듣고 ON20는 청운공원으로 갔었다. 그러나 관리자는 ‘구청에 합법적인 절차’를 거치지 않았다는 이유로 열람조차 하지 못하게 했다. 존재여부조차 확인할 수 없는 촛불기념비,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 그 돌덩어리에서 효순이·미순이사건을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느낄 수 있었다.
‘효순이·미선이를 잊어버리면 역사가 반복될 수 있다’
ⓒ민중의소리
지은씨(21)는 2002년 중학교 2학년이었던 당시 여중생추모집회에 참가했었다. 인터넷에서 본 동갑내기 두 여중생의 죽음이 너무 처참했고, 이 모든 게 불평등한 한국과 미국관계 때문에 생긴 일이라는 것을 알기에 촛불을 들 수밖에 없었다. 당시에도 교육청에서 공문이 내려와 학생참여를 막으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녀는 당시 촛불집회를 회상하면서 “우리나라는 왜 이러는 걸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제시대에나 있던 치외법권에 이어서 미국한테 또 이럴까하면서 정말 답답한 마음밖에 들지 않았다”고 말했다.
당시 효순이·미선이의 문제를 해결하던 주한미군범죄근절운동본부의 고유경 사무국장은 “광우병집회와 여중생집회의 공통점은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는 가능성 때문에 국민들이 들고 일어서고 있다는 것이다. 아무도 광우병에 걸리지 않았지만 ‘광우병의 위험성’을 방지하기 위해서, 미군범죄 때문에 억울하게 당하는 사람들이 없도록 사람들은 촛불을 들었던 것이다”고 말했다. 비록 그 가능성을 알게 된 대가는 컸지만, 여중생사망사건은 우리가 배운 하나의 역사적 교훈이라는 것이었다. 우리가 효순이·미선이를 잊지 말아야하는 이유인 것이다.
미국이 우리나라를 무시했던 것은 최근의 광우병사태에서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최근에 버시바우 주한미국대사의 ‘실망발언’에 사람들은 또 한 번 분노하고 있다. 우리를 이렇게 무시할 수 있냐면서 야당은 물론 국민들까지 들고 일어섰다. 2002년도에 이미 미국의 우리나라를 하나의 주권국가로 대하지 않는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닳은 것을 생각하면 다소 둔한 반응인 듯하다. 만약 2002년도에 효순이·미선이사건을 통해 미국과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서 우리가 잊지 않고 끊임없이 노력했었다면 과연 지금도 미국은 똑같은 태도를 취했을까. 지금의 사태는 결국 효순이·미선이를 잊어버린 것에 대한 벌인 것이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효순이·미선이의 사건을 보수언론의 말처럼 ‘단순한 교통사고’로 생각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두 여중생의 억울한 죽음, 그것에 대해서 잘못되었다고 할 수 없는 미국과의 관계로 기억하고 있었다. 이렇듯 두 여중생의 죽음은 가족만의 상처가 아닌 사회 모두의 상처이다.
더 이상의 희생을 그 누구도 바라지 않는다
우리가 월드컵을 즐기고 있을 때, 언론의 관심밖에 머물다가 5개월이 지나서야 빛을 봤던 효순이·미선이 사건. 이 사건은 3년이 지나서 겨우 수사기록이 공개되는 바람에 제대로 된 재판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때 같이 주장했던 또한 소파개정또한 아직 정부는 얻어내지 못했다. 그러는 동안 미군범죄는 더욱 더 일어나고 한 맺힌 사람들은 계속 늘어나고 있었다. 최근엔 효순이·미선이가 사고가 났던 마을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무건리에 마을주민들을 쫓아내버리고 훈련장을 짓겠다고 해서 주민들이 분통해 하고 있다. 이들은 우리가 잊는 바람에 또다시 고통 받고 있는 제 2의 효순이·미선이인 것이다.
의정부에서 효순이·미선이 집회를 하면 늘 비가 왔었다고 한다. 어린 여중생들이 얼마나 한이 맺혔으면, 외로운 싸움을 하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더욱 새까맣게 태우는 비가 내리는 걸까.
※ 6/14일 효순이·미선이 6주년 추모행진이 있다. 사건현장부터 지금 훈련장확장논란이 되고 있는 무건리까지 걷는 행사이다. 이 날 ‘우린 너희를 잊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다면 좋을 것 같다. 신청은 hau94@hanmail.net으로 하면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