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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마의 가르침 시작 전에
카르마에 대한 금언
다음에 열거된 가르침들은 스승들께서 나에게 주신 것들이다. 어떤 것들은 글로 써서 주셨고, 또 어떤 것들은 다른 방법으로 전해 주신 것들이다. 그것들은 일반 사람들이 접할 수 없는 고대 사본에서 나온 것들이라고 말씀하셨다. 각각의 금언은 나의 이성과 판단을 위해서 제시되었다. 그것들을 깊이 숙고해 본 결과 맞는다고 생각되었기에 동료들을 위해서 출판하며 그들도 내 생각에 동감하리라 생각한다.
- W. Q. J. -
1) 카르마를 만들거나 그 결과를 경험할 존재가 없다면 카르마는 존재하지 않는다.
2) 카르마는 원인들 뒤에 따르는 결과들의 조정 과정으로, 그러한 과정을 겪는 존재는 그 조정 과정 동안 기쁨 혹은 고통을 경험한다.
3) 카르마는 균형을 회복하려는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우주에 있는 성향이며, 그것은 끊임없이 작용한다.
4) 균형을 회복하려는 작용이 얼핏 겉으로 보기에 멈춘 것처럼 보이는 것은 어떤 다른 지역이나 장소에서 일어난 혼란을 조정하기에 필요한 과정으로, 성인이나 완전한 예지자만이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카르마의 작용이 단지 보이지 않을 뿐이지 멈추는 경우는 결코 없다.
5) 카르마는 모든 만물에 다 작용한다. 미세한 원자에서부터 브라흐마에 이르기까지, 인간, 신, 엘리멘탈 등이 있는 삼계(三界)에서 진행됨으로 현현한 우주에서 그 어떤 곳도 예외가 될 수 없다.
6) 카르마는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으며, 우주에서 시간의 궁극적인 분할이 무엇인지 아는 자(者)는 카르마를 알게 된다.
7) 카르마의 본질적인 성질은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지 않으며 알 수도 없다.
8) 그러나 원인에서 결과로 이어지는 것을 계산해 보면 그 작용을 알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 결과는 원인 다음에 일어나는 게 아니라, 원인 속에 그 결과가 숨겨져 있기 때문에 이러한 계산이 가능하다.
9) 지구의 카르마는 이전 현현기(혹은 지구가 생겨 나온 진화의 흐름) 속에 있던 모든 존재들(진화 단계에 관계없이)의 행위와 생각들의 총합이다.1
10) 그런 존재들은 권능을 가진 주(主)들, 신성한 인간들, 약한 사람들. 악한 사람들 모두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지구의 존속 기간은 그 위에서 살고 있는 그 어떤 존재나 실체보다도 더 길다.
11) 지구와 그 인종들의 카르마는 인간의 정신으로 헤아리기에는 너무나 먼 과거에 일어났기 때문에, 그 카르마의 시발점을 탐구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으며 도움 될 게 하나도 없다.
12) 이미 일어난 카르마의 원인들은 그것이 다할 때까지 계속 영향을 끼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들로 하여금 동료나 의식을 가진 다른 존재들을 돕지 못하게 할 수는 없다.
13) 그 결과들은 자신이나 사람들의 생각과 행위에 의해서 완화될 수 있다. 그러면 그에 따른 결과들은 그 결과를 만들기 위해 연관된 모든 원인들의 상호작용과 그 조합이 된다.
14) 카르마는 작용하기 위한 적합한 도구가 없으면 세계나 인종 국가 혹은 인간들에게 작용할 수 없다.2
15) 적합한 도구가 있을 때까지 그것과 관련된 카르마는 소진되지 않은 채 남아 있게 된다.
16) 자신에게 제공된 도구 속에서 카르마를 경험하는 동안 아직 소진되지 않은 다른 카르마는 다른 방법이나 다른 존재들을 통해서 소진되지 않고 미래에 작용하기 위해 보존된다. 카르마의 작용이 없다고 느끼는 동안에 시간이 흘러도 카르마의 성질이 변하거나 그 힘이 약해지지는 않는다.
17) 카르마가 작용하기 위한 도구의 적합성은 어떤 생에서 자아가 사용하기 위해서 얻은 신체 정신 지성 그리고 심령적인 성질들과 카르마와의 정확한 연결 관계에 달려 있다.
18) 어떤 생이든 자아가 사용하는 모든 도구는 카르마가 그 도구를 통해서 작용하기에 적합하다.
19) 어떤 생 동안에 새로운 등급의 카르마가 작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카르마가 작용하는 도구에 변화가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는 두 가지 방식으로 일어날 수 있다.
ⓐ 강렬한 생각과 맹세의 힘을 통해서
ⓑ 오래된 카르마의 완전한 소진으로 자연스럽게 바뀌는 것을 통해서
20) 육체와 정신과 혼은 나름대로의 독립적인 활동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들 중에 어느 하나라도 다른 통로들을 통해서 작용하고 있는 카르마의 원인들보다 그 발생 시기가 더 오래되었거나 혹은 그 발생시기가 최근인 카르마의 원인들을 독립적으로 소진시킬 수도 있다.
21) 카르마는 자비로우며 정당하다. 자비와 정의는 하나라는 전체의 마주보고 있는 양극이다. 정의 없는 자비는 카르마의 작용에서 불가능하다. 소위 우리가 자비 혹은 정의라고 부르는 것은 결함이 있으며 잘못되거나 순수하지 않은 것이다.
22) 카르마는 세 종류가 있다.
ⓐ 적합한 도구를 통해서 현재 생에서 작용하고 있는 것.
ⓑ 미래에 소진되기 위해서 현재 만들어져 저장되고 있는 것.
ⓒ 과거 생에서 물려받았지만 자아가 사용하는 도구가 적합하지 않아서 혹은 현재 작용하는 카르마의 힘 때문에 억제되어 아직 작용하지 않는 것.
23) 카르마가 작용하는 세 가지 활동 영역
ⓐ 신체와 환경 ⓑ 정신과 지성 ⓒ 심령과 아스트랄계
24) 작용이 미루어지고 있는 카르마와 현재 작용하는 카르마는 카르마가 작용하는 세 가지 영역에서 개별적으로 혹은 동시에 작용할 수도 있으며 서로 다른 영역에서 서로 다른 카르마가 동시에 작용할 수도 있다.
25) 어떤 종류의 신체로 태어나서 어떤 종류의 카르마의 결과를 얻는 것은 카르마적인 성향이 우세하기 때문이다.
26) 카르마적인 성향을 억제하거나 제거하거나 혹은 반작용을 주지 않을 때 그 성향은 자아의 환생이나 자아들의 가족에게 최소한 3번의 생 동안 영향을 줄 것이다.
27) 다른 원인들을 일으킴으로써 반작용을 주거나 그 성향을 억제하려는 혹은 결함을 제거하려는 자아의 노력은 카르마적인 성향의 영향력을 바꿀 것이며 그것을 실천하는 데 쓰여진 노력의 강약에 따라서 그 영향력을 짧게 할 것이다.
28) 성인이나 진정한 투시가를 제외하고 그 누구도 다른 사람의 카르마를 판단할 수 없다. 따라서 개개인은 자기 몫의 카르마를 받으며 겉으로 드러난 모습은 틀릴 수도 있다. 가난하게 태어나거나 힘겨운 시험을 받는 것은 나쁜 카르마에 대한 벌이 아닐 수도 있다. 왜냐하면 자아의 단련을 위해서 시험들과 어려움들을 경험하는 가난한 환경 속으로 자아들은 지속적으로 환생한다. 그래서 결국에는 강해지며 용기와 동정심을 얻게 된다.
29) 인종 카르마는 배분의 법칙에 따라서 인종 속에 있는 개개인들에게 영향을 준다. 국가 카르마는 한층 집중되어진 채로 같은 법칙에 의해서 국가를 구성하는 구성원들에 작용한다. 가족 카르마는 가족이 순결하고 뚜렷하게 유지된 국가에만 작용한다. 왜냐하면 칼리 유가 시기에 그렇듯이 가족의 혼합이 있는 국가에서의 가족 카르마는 일반적으로 국가로 배분되어진다. 그러나 심지어 그런 시기에도 어떤 가족들은 오랜 기간 동안 잘 뭉쳐진 채로 있어서 그 구성원들은 가족 카르마의 영향을 느낀다. 여기서 “가족”이란 여러 작은 가족들을 포함한다.
30) 카르마는 멘탈계와 아스트랄계를 통한 연결로 자연의 재해들을 일으킨다. 재해의 원인은 내부의 불이나 공기의 혼란과 같이 즉각적인 물리적 원인으로 추적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동요는 인간의 생각이라는 역동적인 힘을 통해서 만들어진 혼란 때문에 발생된다.
31) 재해가 일어나는 지역과 카르마적인 연결 고리가 없는 자아들은 두 가지 방식으로 카르마의 작용 밖에 있게 된다.
ⓐ 그들의 내적인 본성에 영향을 주는 반발 작용
ⓑ 이 세계의 진보를 감시하고 있는 존재들에 의한 부름과 경고
각주 1
신지학의 중요한 법칙들 중에 하나가 주기성의 법칙이다. 1년의 사계절이 주기로 바뀌고 1주일이 주기적으로 반복되며 또 낮에는 깨어나서 활동하고 밤에는 잠들었다가, 낮이 되면 다시 활동하는 인간사와 태어났다가 때가 되면 죽어 사라지고 다시 태어나서 이전 생에서 하지 못한 일을 다시 시작하는 윤회 등등. 우주에 현현해 있는 모든 것은 주기적으로 나타났다가 사라..
각주 2
신지학에서는 인간의 몸을 구성하는 모든 것은 영(靈)의 도구라고 말한다. 즉 인간의 하위 네 가지 본질인 개성은 혼이 물질계에서 경험을 쌓고 배우는데 필요한 도구이며 혼은 더 높은 계에서 영의 도구가 된다.
- 신지학의 중요한 법칙들 중에 하나가 주기성의 법칙이다. 1년의 사계절이 주기로 바뀌고 1주일이 주기적으로 반복되며 또 낮에는 깨어나서 활동하고 밤에는 잠들었다가, 낮이 되면 다시 활동하는 인간사와 태어났다가 때가 되면 죽어 사라지고 다시 태어나서 이전 생에서 하지 못한 일을 다시 시작하는 윤회 등등. 우주에 현현해 있는 모든 것은 주기적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진다는 것이 주기성의 법칙이다. [본문으로]
- 신지학에서는 인간의 몸을 구성하는 모든 것은 영(靈)의 도구라고 말한다. 즉 인간의 하위 네 가지 본질인 개성은 혼이 물질계에서 경험을 쌓고 배우는데 필요한 도구이며 혼은 더 높은 계에서 영의 도구가 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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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마의 가르침
왜 정의롭지 않은 일이 일어나는가?
카르마의 법칙 하에서 불공평한 것이 있을 수 없다. 불공평한 것처럼 보이는 것은 단지 그렇게 보일 뿐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전체 그림, 즉 우리가 보는 결과들을 만들어낸 원인들과 우리가 바라보는 원인들의 결과들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졋지 씨의 소책자인 [신지학의 개요(The Epitome of Theosophy)]에서 말하길,
악과 고통 그리고 비애가 있다는 것은 박애주의자나 신학자에게는 풀 수 있는 희망이 없는 수수께끼이다. 사회 조건의 불평등, 특권과 지성을 가진 사람, 우매한 사람들, 교양이 있는 사람들과 무지한 사람들, 미덕을 가진 사람들과 비열한 사람들, 가난한 가족에게서 천재가 나오는 것 그리고 유전의 법칙과 모순 되는 다른 사실들 등등 이런 모든 문제들은 신의 변덕에 의해서 만들어졌다고 생각하거나 혹은 신지학의 카르마와 윤회의 가르침들에 의해서만 풀 수 있다.
그러나 카르마를 보상과 처벌로만 보면 그것을 잘못 이해하는 것이다.
카르마의 법칙의 작용은 가장 완전한 정의로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정확하게 가져오며 우리가 삶 속으로 내 보낸 것을 정확하게 도로 가져온다. 그러나 그것은 그 이상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가 배우기에 가장 적합하고 진화를 통하여 지속적으로 영적인 진보에 가장 적합한 환경들과 경험들 그리고 만남들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카르마의 법칙을 이런 관점에서 볼 수 있다면 아마도 그것은 가장 유익한 법칙이고 가장 친한 친구가 될 것이다.
지혜의 대스승들은 카르마라고 종종 말하는데 그 이유는 그 분들은 하는 모든 일에서 내면의 조화와 정의를 나타내는 상태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분들은 그냥 앉아서 그 법칙이 보상과 처벌의 작용을 하도록 하지 않는다. 그 분들의 모든 삶은 그 법칙을 방해하지 않으면서 인류를 돕는 것이다. 바가바드-기타에서 신성한 대스승인 크리슈나가 말하길 “오! 바라타의 아들이여! 이 세상에 악과 부정이 융성하고 미덕이 쇠퇴할 때 피조물들 사이에서 내 자신을 만든다. 이렇게 나는 정의를 수호하고 악을 파괴하고 정의를 세우기 위해서 한 시대에서 다른 시대로 계속 태어난다.”
카르마는 운명인가?
이 문제는 인간이 정말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 의문을 일으킨다. 이 오래된 의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 먼저 그 답이 반드시 그렇다 아니다 혹은 하나가 아니면 다른 것이다 라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신지학은 사실은 두 가지 다 라고 말한다.
카르마의 법칙 하에서 우리는 운명과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다. 과거에 우리가 행한 모든 행위는 언젠가 그 영향을 받도록 "운명"으로 정해져 있다. 사실 이것이 운명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자신이 만든 것이고 우리 자신이 선택한 것이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선택자이므로 계속해서 선택을 하고 있다. 우리들은 사실 선택의 결과들을 느끼기 위해서 한편 다른 면에서 보면 우리는 항상 그 카르마를 어떻게 대할 것인지 선택할 수 있다. 그것에 분노할 수도 있고 그것에 대해서 다른 사람이나 다른 것을 비난할 수도 있다. 혹은 사라질 것이라는 희망으로 피하거나 우리가 만든 것으로 받아 들이고 그것으로부터 가장 가치 있는 교훈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항상 선택을 한다. 그 선택이 아무리 미미하더라도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다음에 어떻게 하느냐 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다.
우리가 알던 모르던 우리들에게 도구들, 예를 들면 신체나 두뇌 등의 도구들을 제공하는 모든 존재들 혹은 “생명”들과 상호연관관계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이 세계에서 생명과 접촉하는데 그것들에 의존한다. 반대로 그 생명들은 자신들의 진화를 위해서 우리에게 의존한다. 그것들을 다룰 때 우리는 상호 발전을 위한 도움을 주는 연맹을 만들던지 혹은 제한을 하도록 하게 된다. 우리가 윤회하도록 “운명”으로 정해진 상태들을 우리는 만든다. 예를 들면 장소, 함께 어울리는 사람들, 다양한 능력들 등등. 우리가 변화할 때까지 습관이 운명을 정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바꿔서 운명을 다시 만들게 된다.
심지어 준엄한 운명에 묶여서 해쳐 나올 수 없을 것처럼 보일 때도 여전히 선택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으며 겉으로 보기에 해결될 수 없는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과정을 시작할 수 있다.
크로스비 씨가 [친절한 철학자]에서 말하길,
우리에게 온 운명, 즉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결과들,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조건들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할 일은 다른 더 바람직한 결과들을 낳을 수 있는 원인들을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만이 그것을 해야 한다. 어떤 다른 누구도 그것을 대신해서 할 수가 없다. 그 누구도 우리를 제지하지 않는다. 그 누구도 우리가 앞으로 가도록 밀어줄 수 없다. 우리 자신들 개개인 속에는 우주 모든 곳에 존재하는 같은 가능성들이 존재하고 있다. 지금 현재 과거의 잘못된 행동으로 아무리 구속을 받더라도 다른 더 좋은 원인들을 뿌릴 수 있는 힘을 잃어버리지 않았으며 결코 잃어버릴 수 없다.
민족들과 국가들의 카르마
어느 민족이나 국가의 카르마는 그 민족이나 국가를 형성하는 자아들의 생각들과 행위들의 직접적인 결과이다. 인간사이의 상호의존관계라는 관점에서 보면 개개인의 카르마의 총집합은 그 개인들이 속한 국가의 카르마가 되고 한층 더 나아가 모든 국가들의 카르마의 총집합은 이 세계의 카르마가 된다는 것을 알 게 된다. 어느 민족이나 국가의 “개성”을 형성하는 지속적인 특징들은 생각과 행동의 토대를 형성하는 생각들 혹은 의식의 형태들로 그 근원을 추적할 수 있다. 그것들은 종종 문제시 되지 않거나 혹은 “애국적으로” 보호되기도 한다.
금언 29번에서 “민족 카르마는 배분의 법칙에 따라서 인종 속에 있는 개개인들에게 영향을 준다. 국가 카르마는 한층 집중되어진 채로 같은 법칙에 의해서 국가를 구성하는 구성원들에 작용한다.”
졋지 씨는 [카르마]라는 글에서 더 깊이 있게 설명하고 있다.
이런 조건들을 설명하고 그 밑에 깔려있는 진리는 진실로 경제의 법칙이다. 예를 들면 어떤 특징들을 가지고 있는 국가를 보자. 이 세계는 그런 특징들과 가장 많은 조화를 이루는 실체들이 확장할 수 있는 세계이다. 최소 저항의 법칙을 따라서 들어오는 실체는 그 나라로 윤회하고 그리고 그런 특징들로 인해 일어나는 모든 카르마적인 결과들은 개개인에게 축적된다.
[신지학의 대양]에서 자아들 전체는 자신들이 만든 원인들을 다 해결할 때까지 어느 특정한 국가나 민족으로 함께 윤회하고 또 윤회할 것이다. 그 특정한 민족이나 국가도 다양한 이름과 다양한 장소로 윤회할 것이다. 그러나 자아들은 상호간의 의무들 혹은 상호간의 오해를 청산하기 위해서 함께 일해야 한다는 것이 법칙이다.
H.P.B.는 같은 주제에 대해서 또 다른 통찰력을 제시해 준다.
누구나 자신의 실패를 딛고 일어설 때마다 자신이 속한 전체 그룹을 아무리 작더라고 위로 끌어올리게 된다는 것이 오컬트 법칙이다. 마찬가지로 혼자 죄를 짖고 그 결과를 받는 것이 아니다. 실재로는 “분리”란 없다. 삶의 법칙이 허락하는 그 이기적인 상태에 가장 근접한 것은 의도와 동기 속에 있는 것이다.
과거의 카르마는 언제 나타나는가
졋지 씨는 이 점을 얘기한다: “카르마는 행위의 지속이다. 그리고 어떤 특정한 카르마가 일어나기 위해서는 그 카르마가 내재하고 있으며 작용할 수 있는 행위의 토대가 반드시 필요하다.” 금언 14번, 15번에서 “카르마는 작용하기 위한 적합한 도구가 없으면 세계나 민족 국가 혹은 인간들에게 작용할 수 없다. 적합한 도구가 있을 때까지 그것과 관련된 카르마는 소진되지 않은 채 남아 있게 된다.”
금언 16번에서 말하길, “자신에게 제공된 도구 속에서 카르마를 경험하는 동안 아직 소진되지 않은 다른 카르마는 다른 방법이나 다른 존재들을 통해서 소진되지 않고 미래에 작용하기 위해 보존된다. 카르마의 작용이 없다고 느끼는 동안에 시간이 흘러도 카르마의 성질이 변하거나 그 힘이 약해지지는 않는다.” 우리가 원인을 일으켜서 그 결과를 느낄 수 있는 카르마를 만들었더라도 어떤 특정한 때에 그것을 유익하게 다룰 수 있는 상태나 조건 속에 있지 않을 수도 있다. 그 이유는 다른 카르마가 지금 강력하게 작용하고 있어서 언젠가 다른 때에 작용하기 위해서 그 활동이 잠시 유지 상태에 있게 된다. 자아가 카르마의 작용으로부터 배울 수 있는 가장 좋은 상태에 있을 때 카르마의 작용을 전해준다는 의미에서 그 법칙은 정의로울 뿐만 아니라 유익하다.
금언 17번과 18번에서 말하길, “카르마가 작용하기 위한 도구의 적합성은 어떤 생에서 자아가 사용하기 위해서 얻은 신체, 정신, 지성 그리고 심령적인 성질들과 카르마와의 정확한 연결 관계에 달려 있다. 어떤 생이든 자아가 사용하는 모든 도구는 카르마가 그 도구를 통해서 작용하기에 적합하다.”
금언 22번에서는 말한다: “카르마는 세 종류가 있다. ⓐ 적합한 도구를 통해서 현재 생에서 작용하고 있는 것. ⓑ 미래에 소진되기 위해서 현재 만들어져 저장되고 있는 것. ⓒ 과거 생에서 물려받았지만 자아가 사용하는 도구가 적합하지 않아서 혹은 현재 작용하는 카르마의 힘 때문에 억제되어 아직 작용하지 않는 것.”
금언 19번에서는 “어떤 생 동안에 새로운 등급의 카르마가 작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카르마가 작용하는 도구에 변화가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는 두 가지 방식으로 일어날 수 있다. ⓐ 강렬한 생각과 맹세의 힘을 통해서 ⓑ 오래된 카르마의 완전한 소진으로 자연스럽게 바뀌는 것을 통해서”라고 말한다. 내적 혹은 외적인 환경이 갑작스럽게 좋게 변하거나 갑작스럽게 행운의 반전이 일어나는 사람들의 경우가 여기에 해당된다. 옛날의 카르마는 해소되어야 하며 또 그 과정이 다할 때까지 멈출 수는 없더라도 한편으로는 현재 상황에서 어떤 일이있더라도 다음 생을 위해서 혹은 생의 남은 기간을 위해서 나쁜 원인들이나 혹은 편견이 있는 원인들을 만들지 않도록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현명하다
어느 부분이 카르마의 영향을 받는가
좋은 카르마이건 좋지 않은 카르마이건 우리가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본성 그 부분에 영향을 줄 것이라는 것이 이해가 될 것이다. 우리가 없는 곳에는 카르마가 있을 수가 없다. 그 원인의 성질에 상응하는 위치나 상태에 있을 때까지 카르마는 작용을 멈추고 있다. 카르마는 변하지 않는다. 우리가 변하는 것이다.
졋지 씨는 설명한다.
그러나 행동이 포함될 수 있는 많은 세계가 있다. 감각들과 신체를 가지고 있는 물질계가 있다. 그리고 지성계가 있다. 여기서는 감각의 인상들을 일련의 전체로 묶고 이성은 사실의 저장소에 그것들을 질서 정연하게 배치한다. 지성계 너머에는 감정계가 있는데 어떤 것을 다른 것보다 더 좋아하는 선호의 세계이다. 이것이 인간의 네 번째 원리이다. 이렇게 물질계, 지성계, 감정계는 순전히 지각의 대상이 되는 것들을 다루고 카르마의 전쟁터1라고 불려진다. 또한 이것은 해야 하고, 저것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분별력의 세계인 윤리의 세계가 있다. 이 세계는 지성과 감정을 조화롭게 한다. 이 모든 세계는 카르마 혹은 행동의 세계이다. 즉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 아는 행동의 세계이다. 다양한 세계에서 행동을 하게끔 만드는 것은 욕망의 근본인 정신 혹은 마음이며 휴식과 행동의 결과들을 받을 수 있는 것도 정신 혹은 마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카르마])
삶의 목적과 인간의 완전한 본성에 대한 이해에 따라서 우리는 삶의 에너지의 대부분을 위에서 언급한 세계들 즉 물질계, 멘탈계, 감정계 혹은 윤리계에서 사용하고 그렇게 해서 카르마가 각각의 계에서 열매를 맺도록 인력의 중심점을 만든다. 우리의 관심과 우리의 헌신이 있는 곳에 카르마가 오게 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진화하는 데 아무런 가치가 없을 것이다. 사는 동안 항상 카르마는 우리에게 바람직한 것과 정신적으로 “일어서는” 때에 과거 행동들의 바람직하지 않은 결과들을 가져올 것이다.
우리의 카르마를 바꿀 수 있을까?
우리는 카르마를 바꿀 수가 없다. 그것은 절대적인 법칙이다. 그러나 우리들 자신 속에서 변화를 함으로써 그 결과들을 변경할 수 있다. 인간은 항상 선택을 한다. 그리고 만약 자신이 있는 상황에 대해서 어떤 것도 할 수 없다면 이 세계는 희망이 없는 곳일 것이다. 우리는 경험상으로 나쁜 때가 오면 그것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그것들에 어떻게 반응할지 항상 선택을 한다는 것을 안다. 울거나 불평하거나 혹은 그 상황을 이용할 수도 있고 그래서 그 속에 있는 교훈을 배울 수도 있다. 전자의 경우, 우리는 어떤 고통을 경험하고 강인함을 개발할 수 있는 황금 같은 기회를 놓쳐서 아마도 다른 때 카르마가 다시 오도록 카르마를 되돌려 보냈을 것이다. 후자의 경우, 카르마를 우리들 자신이 만든 행위의 합당한 결과로 보면서 일어나는 것에서 배울 수 있는 만큼 그 사건들로부터 우리 자신들을 분리할 수 있다.
어떤 세계에서든 집착은 고통의 근본 뿌리이다. 우리는 일시적이고 영속적이지 않는 것들에 우리 자신들이 집착하도록 허락하고 법칙에 의해서 그것들이 없어져 버리면 고통을 받는다. 모든 것이 정신으로 돌아온다. 우리가 생각하지 않는 것들에 대한 집착을 가질 수 없다. 그러므로 소위 “나쁜 카르마”라고 부르는 것의 고통을 완화하기 위해서, 우리 생각들을 결과 뒤에 있는 것, 즉 관련된 원리들과 교훈들 그리고 법칙 자체의 작용인 원인들에 집중해야 한다.
금언 27번에 보면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알 수 있다: “다른 원인들을 일으킴으로써 반작용을 주거나 그 성향을 억제하려는 혹은 결함을 제거하려는 자아의 노력은 카르마적인 성향의 영향력을 바꿀 것이며 그것을 실천하는 데 쓰여진 노력의 강약에 따라서 그 영향력을 짧게 할 것이다.”
[질문과 대답]에서 크로스비 씨는 말하길,
나쁜 카르마의 영향을 완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것에 대한 올바른 태도이다. 좋은 때가 오면 좋은 원인들을 뿌릴 수 있다. 나쁜 때가 올 때 삶에 대한 이해력과 용기 그리고 힘을 얻을 기회로 사용하면서 우리는 여전히 좋은 원인들을 뿌리려고 노력할 수 있다. 우리는 항상 나쁜 카르마는 피하고 좋은 카르마는 잡으려고 노력하는 것 같다. 그렇게 하는 것보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오는 모든 것을 이용하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가 피할 수 없는 채무자 즉 우리들 자신에게 빚을 갚게 된다.
이것이 현명하게 행동하는 방법이고 또한 나쁜 카르마라고 생각하는 것을 대면하는 실천적인 방법이다.
좋은 카르마, 나쁜 카르마
이전 부분에서 배운 것으로 미루어 보면 실제로 좋은 카르마 나쁜 카르마라고 구분하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에게 되돌아오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특정한 시기에 우리들에게 가장 유익한 교훈을 주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 자신들이 선택하는 행위이며 우리가 직면하고 그리고 우리에게 되돌아오는 것은 우리가 만들어낸 것이기 때문에 종종 옆으로 치워버리고 싶은 문제로 나타난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들에게 위대한 도전과 기회를 제공해 주는데 그것들은 우리들이 진보하는 길에서 방해하는 “개인적인” 장애물을 극복하기 위해서 필요한 지혜와 의지를 불러내기에 가장 적합한 것들이다. 만약 이런 “장애물”들이 없다면 우리 존재의 뿌리인 내면의 힘을 불러낼 이유가 없다.
크로스비 씨는 [친절한 철학자], p.232에서 말하길,
과거에 일어났던 “안 좋은” 일을 되돌아 보고 웃을 수 있다는 것이 맞는 말이 아닌가? 그 당시에는 지독한 것 같았지만 이제는 자나가 버렸고 그것들로부터 지혜와 힘과 같은 것을 얻었다. 그 누구도 자신이 극복할 수 없는 장애물을 만날 수 없다는 것이 법칙이다. 장애물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어떤 약한 점을 없앨 수 있는 기회인 것이다. 종종 우리에게 가장 힘든 것처럼 보이는 것이 우리들에게 가장 유익한 것인 것으로 판명된다.
우리들은 유쾌하지 않은 카르마라고 부르는 것이 우리들에게 돌아오는 상황들을 만들었다. 왜냐하면 우리는 생명의 법칙들과 우리들 내면의 본성의 법칙들을 망각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혼, 즉 윤회하는 자아의 입장에 있을 때 우리에게 다가오는 모든 사건에 대해서 건설적이고 다른 태도를 취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그것을 장애물이 아닌 단계, 즉 한층 더 명확한 시야와 내면의 성취감을 가지고 더 높은 곳으로 놓아 줄 수 있는 사다리로 볼 것이다.
다른 사람을 돕는게 카르마에 간섭하는 것인가
금언 12번에서는“이미 일어난 카르마의 원인들은 그것이 다할 때까지 계속 영향을 끼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들로 하여금 동료나 의식을 가진 다른 존재들을 돕지 못하게 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따라서 위에서 한 질문에 대해서 다른 관점을 가지도록 요구한다. 우리가 돕고 도움을 받는 것은 그 법칙에 간섭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법칙을 실행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인간이 행동하기를 바라는 방식이고 영적인 진보를 이루어 내는 방법이다. 그것 너머에는 우리가 카르마에 간섭할 수 있는 힘을 가졌는가 하는 의문인데 카르마는 보편적이고 깰 수 없는 법칙이다.
삶에서 단 한 순간도 활동하지 않는 때는 없으며 혼자인적도 없다. 우리는 항상 어느 계에서든 활동하고 있다. 심지어 그것이 생각 속에서만일지라도. 그리고 우리의 행동들은 어떤 형태의 다른 존재들에게 영향을 주거나 그들과 함께 혹은 그들을 통해서 일어난다. 이것이 우리에게 언제나 선택의 문제를 제시한다. 도울까 아니면 방해할까? 우리는 어떤 형태로든 그 존재들에게 영향을 주지 않고 어떤 것을 할 수도 없으며 행동할 수도 없다. 모든 생명의 상호 의존성을 더욱더 인식하게 되면 결국은 인류로 하여금 모든 동료 존재들을 같은 길 위에 있는 형제들로써 대하도록 하는 책임 의식을 가져오게 한다. 도움을 주는 행동을 통해서 앞으로 나아가게 하거나 방해하는 행동으로 뒤쳐지게 하거나 둘 중에 한 가지 방법을 통해서 “삶의 수레바퀴”를 계속 돌릴 수 있다. 법칙은 우리에게 선택하도록 한다.
진짜 문제는 우리가 다른 존재들을 어떻게 하면 진실로 도울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우리는 종종 도움을 주려고 하고 도움 주기를 바란다. 그러나 결국에는 득보다 해를 더 많이 주었다. 언뜻 보기에 다른 사람들을 돕는 방법을 아는 지혜가 필요하다. 그리고 이것 때문에 도와주려는 노력을 포기하도록 유혹을 받는다. 그러나 일단 인간의 진정한 본성에 대한 이해를 하게 되면 우리를 안내할 수 있는 어떤 규칙들을 찾아낼 수 있다. 아마도 이와 같을 것이다. 우리의 목표는 항상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도울 수 있도록 도움이 되어 주는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를 도울 수 없는 사람들을 항상 도와야 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할 일을 대신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그들에게 필요한 경험을 박탈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위대한 스승들께서 주신 도움에 대해서 생각해 보면, 지혜의 대스승들께서는 이 안내 규칙을 따른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 분들은 우리에게 생명의 근본 법칙들을 가져와서 우리들에게 영원하고 전지전능한 성질이 있다는 것을 환기시키고, 그래서 우리가 자신을 스스로 도울 수 있도록 격려하고 여러 가지 방법들을 제시해 주었다. 그리고 우리가 그 분들이 가리키는 방향인 보편적 동포애 방향으로 심지어 아주 작은 걸음을 걸을 때마다 언제든지 우리를 도울 수 있는 넓은 손을 뻗을 준비가 되어 있다.
각주 1
바가바드-기타에서는 전체 시가 “카르마에 의해서 얻어진 신체”를 의미하는 “쿠르크쉐트라(Kurukshetra)의 신성한 평원”의 전쟁터에서 일어나는 전쟁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ED. of Theosophy Company).
- 바가바드-기타에서는 전체 시가 “카르마에 의해서 얻어진 신체”를 의미하는 “쿠르크쉐트라(Kurukshetra)의 신성한 평원”의 전쟁터에서 일어나는 전쟁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ED. of Theosophy Company). [본문으로]
http://blog.daum.net/aldiwkzl703/1437
카르마의 가르침 시작
첫번째 주제에서 언급했듯이, 윤회의 가르침과 쌍둥이 격의 가르침이 바로 카르마의 가르침이다. 그것은 하나의 대법칙으로 보편적이며 어길 수 없는 영원한 법칙이다.
로버트 크로스비 씨의 말을 인용하면:
우리는 이 우주가 법칙의 우주이던가 아니면 혼돈, 운, 우연의 우주이던가 가정해야 한다. 사실 우리는 운으로 만들어진 우주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사용하고 이해하는 모든 것이 법칙 하에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들에게 어떤 일이 생기면 우리가 알 수 없는 원인을 가정하고 그것을 찾아내려고 한다. 원인 없는 결과는 상상할 수도 없다. ([친절한 철학자], p. 225.)
이 법칙이 결과로 나타날 때 우리는 그것을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이라고 부르며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말 중에 하나는 “뿌린 대로 거두리라.”일 것이다. 누가복음에서도 “너희가 댄 똑 같은 잣대로 너희도 받을 것이다.” 사실 카르마의 법칙에 대한 가르침은 모든 역사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붓다는 법구경(Dhammapada)을 이런 구절을 시작하였다: “오늘의 그대는 그대가 생각해온 것의 결과이다.”
신지학은 이 가장 중요한 법칙에 대해서 할 말이 많다. 왜냐하면 이 법칙은 그 깊은 의미에 대한 통찰력을 주고 다양한 상황들에서 적용할 때 그 결과들을 암시해 주기 때문이다. 기본적인 개념을 이해하는 대부분의 열쇠는 [카르마의 금언]이라는 글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이 글은 1893년 W.Q. 졋지 씨가 처음으로 출판한 글로 여기서 자주 인용할 것이다. 첫번째, “카르마를 만들거나 그 결과를 경험할 존재가 없다면 카르마는 존재하지 않는다.” 두 번째 “카르마는 원인들 뒤에 따르는 결과들의 조정 과정으로, 그러한 과정을 겪는 존재는 그 조정 과정 동안 기쁨 혹은 고통을 경험한다.” 세 번째 “카르마는 균형을 회복하려는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우주에 있는 성향이며, 그것은 끊임없이 작용한다.” 다른 부분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그것은 물질계에서는 균형을 회복하려는 성향이고 윤리의 세계에서는 깨진 조화를 찾으려는 성향이다. 그것은 우리 자신들의 생각들과 행동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지는 것을 우리가 볼 수 있도록 해주고 그 영향을 충분하게 느낄 수 있도록 해주는 윤리적인 원인의 은혜로운 법칙이다.
행동들은 저절로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것과 카르마가 어떤 것도 만들어 내지 않는 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우리들은 “선택자”들이며 원인들을 일으키고 카르마는 그런 선택들의 결과들을 가져온다. 그리고 그 결과들을 느끼는 것이 바로 우리들이다.
졋지 씨가 말하길;
결과는 단순히 행위의 성질이며 그 원인과 분리되어 존재할 수 없다. 카르마는 이미 존재하는 것을 나타나게 만든 것뿐이다. 행동은 시간 속에서 작용한다. 그러므로 카르마는 또 다른 시점에 있는 똑같은 행동이라고 말해진다. 더구나 원인과 결과의 관계가 있을 뿐만 아니라 원인과 그 결과를 경험하는 개인 사이에도 관계가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카르마] 참조.)
우리 자신들의 본성과 신성, 법칙 그리고 대자연에 대해서 가지는 생각들이 우리들의 행위를 결정하고 그래서 원인들을 일으킨다. 그것들은 우리들 깊은 곳에 있으며 표면으로 나올 때 우리들이 하는 선택과 행위에 영향을 주게 된다. 카르마를 이해하기 위해선 이 법칙은 우리들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최고의 본성 속에 내재해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그것은 정의를 대변하는 언제나 존재해온 내면의 목소리이다. 이것이 카르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