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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 사
서대문형무소의 정체


  본시 “서대문형무소”란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소위 조선침략의 전초기지로서 한국사회침투작전을 할 때 서재필 등 미리 조련된 친일결사계몽대원70여명(일본이 조선침략을 위하여 事前에 官紳視察團 12명外 군사 정치 문화 등 분야별로 61명을 선발해서 일본으로 불러들여 특수공작원으로 훈련시켜서 침투시켰던 자들)으로 하여금 “일본당(개화독립당으로도 부름)”을 만들어 세를 키우도록 하였고, 그들로 하여금 개화와 조선독립의 명분을 내세우며 청나라배격운동을 하고 수구파를 몰아내면서 일본이 틈을 비집고 들어오도록 하는데 역할을 다 했었다.

  임오군란과 동학혁명을 진압한다는 구실로 그때마다 계산되고 계획된 일본군대를 대거 강제진입 시키고는 개화독립당(일본당) 출신들의 활동력을 이용하여 청일전쟁을 유리하게 이끌면서 친일정치사회운동을 하게 하였던 바, 청일전쟁에서 승전하고 사회적 분위기가 어느 정도 장악된 뒤에는 강제한일합방을 결행하려는 마지막 단계에 이르렀었다. 이런 상황에서 작전준비일환의 시설로서 친일각료들을 종용하여 일제가 건설하게 하였던 것이 경성감옥 즉 서대문형무소였던 것이다.

   그들의 작전대로 막상 강제한일합방을 결행하였을 때는 항일투쟁을 하는 저항세력이 또다시 급증할 것이라는 우려를 하였기 때문에 애국지사들과 항일저항세력들을 모조리 잡아 가둘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당시 전국의 감옥규모와 수용능력의 167%나 되는 시설로서 단일감옥으로는 유래 없이 거대한 설계를 하였던 것이고 한일합방 15년전부터 서둘러 짓도록 추진종용 하였던 감옥소이다.

   당시 예산을 세우고 집행하였던 당국자인 우리정부에서는 그런 저의도 모른 채, “왜 경성감옥을 이렇게 크게 지으라 하느냐?” “재정이 바닥났는데 무리해서 서두를 필요가 있느냐?”는 등 반대의견을 제시하기도 하였다는 기록을 보게 된다. 결국 일본 측과 친일세력의 강압에 의해서 짓고야 말았던 것인데, 『독립문』을 준공한지 13년 만에 『독립문』을 세운 독립협회회원들의 활약에 의해서 우리는 나라를 빼앗기게 되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병이 발표되자 기다렸다는 듯이『독립문』을 건립했던 ‘독립협회회원’출신들은 일본의 왕으로부터 백작과 남작 등 최고의 귀족으로서 훈장과 돈과 보직을 받아 일제하의 친일독립협회세상이 되었고, 서대문형무소에는 우리의 항일애국지사들과 나라를 위하고 부당한 국권침탈을 규탄했던 의인들이 줄줄이 끌려가 가두어지기 시작함으로서 꽉꽉 들어차게 되었던 것인 바, 그때가 되서야 우리정부의 관료들은 서대문형무소가 조선의 식민지화화를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흉계의 시설이었구나 하는 것을 알았다는 것이다.

   서대문형무소의 활용도는 1910년부터 1945년까지 35년 동안 공포의 경성감옥소 및 서대문형무소로 악명을 떨치었던 것이며 그런 와중에서도 『독립문』은 청일전쟁의 일본승전기념개선문으로서 조선총독부가 예산을 들여가며 1928년 10월부터 한 달간 보수공사를 하게함으로서 영구히 보존하도록 경성부 토목과에 책임을 주었던 바와 같다.



독리공원은 광복공원으로  독립관은 광복관으로


   애국지사들은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빼앗긴 조국의 광복을 위하여 임시정부각의를 구성하였고 임시정부차원의 광복군을 창설하였으며 광복전투를 하였었음으로 독립운동이 항일투쟁이었다면, 광복운동은 적극적 조국수복전쟁(祖國收復戰爭)이었다.

   따라서 AD1945년 8월 15일은 독립기념일이 아니라 광복기념일인 것이고, 광복을 기념하는 기관을 광복회라고 했던 것이다. 그럼으로 “광복기념관”이라 하지 않고 “독립기념관”이라 함은 친일“독립협회”의 연장선상에서 친일“독립기념관”으로 오해될 수 있는 것이며, 특히 독립공원의 경우는 친일독립협회의 상징으로서 청일전쟁일본개선문의 의미를 담았던 “독립문”과 친일언론기관지로서 왜병을 물리치려는 의병을 말살했던 “독립신문”의 미국인 사장“필립 제이슨(舊名 서재필)”의 동상이 전면에 배치되어있기 때문에 친일독립협회의 “독립공원”으로 알려져 있는 게 현실이다.

   또 국제적으로 보더라도 “독립기념관”이라고 하는 것은 1940년대에 ‘민족자결주의’를 주창한 미국의 정책에 의해서 처음으로 국가를 가져보는 20세기의 “신생국가기념관”으로 왜곡 홍보되는 수도 있지만, “광복기념관”이라고 한다면 유구한 역사와 찬란한 문화의 조국을 한때 빼앗겼다가 다시 찾은 “조국광복기념관”이 되기 때문에 조국의 역사와 맥을 이어가는 민족국가로 확인되어지는 것이다.

  더구나 우리나라의 헌법 제1조에 따르면“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함으로서 역사성과 임시정부의 법통에 의해서 마땅히 광복운동과 광복군사령부의 적극적인 조국광복의 의의를 살려서 광복기념관으로 하거나 순수한 역사기념관으로 했어야 했다.  천안에 있는 독립기념관의 현판은 당연히 내려져야하고, “광복기념관”으로 바꾼 현판을 다시 올려야만 배달겨레로부터 이어지는 유구한 역사속의 대한민국으로 되살아나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중국이 동북공정이라는 해괴(駭怪)한 정책을 내걸고 “코리아는 1945년에 해방되어 1948년에 독립국가로서 건립된 아시아의 신생국가임으로 인터넷을 포함한 모든 역사자료에서 1945년 이전의 것은 다 지워도 된다.”고 하면서 이미 지워버리지 않았던가?

   사실상 독립운동과 광복운동은 항일투쟁의 집단행위에 있어서는 동의어로 이해될 수도 있다. 하지만 전술한바와 같이 일본이나 친일파의 입장에서는 주체인 일본으로부터 조선인들이 벗어나서 독립하고자 하는 것으로 규정하였듯이 광복 후에 집권을 하게 되었던 친일파의 당대 또는 후손들이 자기보호의 명분으로 삼고자하여 “광복”이라는 단어를 기피하면서 이완용이의 유지를 받들어 서대문의 독립문에서 독립의 의의를 찾으면서 “독립”이란 단어로 규정하려하였던 것이고, 대한민국임시정부와 구국지사들의 입장에서는 이미 일본의 틀을 벗어나 자주독립국가로서의 임시정부를 설립하였던 것임으로 이제는 영토회복과 더불어 기존의 조국을 다시 찾는 광복을 이루어야한다는 의미의 조국광복운동으로 규정하였었기 때문에 독립과 광복의 큰 차이는 있지만, 우선 압박과 설음에서 해어나려는 동포들의 입장에서 독립투쟁을 하는 것과 국내외의 항일투쟁이 연계되어야 함으로 상관하지 않았던 것이 이제 와서는 해방과 더불어 임시정부와 광복군은 입국을 못하게 하였던 데서부터 광복배제 독립우선의 풍토가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친일파들의 회유가 뒤엉킨 상황에서 독립이건 광복이건 간에 나라사랑의 구국용어로는 혼용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며 개념을 따질 겨를도 없었을 것이라는 이해를 하게 된다.
   그러나 광복60주년이 되는 지금에 와서도 조국광복의 의의를 접고 일제로부터 벗어나고자하였던 의식의 소극적 용어를 계속해야 한다는 것은 조국독립운동과 친일독립협회를 혼동하게 하려는 저의가 성공한 셈이 되고 조국에는 아픔이 치유되지 않은 채 계속 고통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이런 과정을 보아서도 1896년 당시의 “친일독립협회”가 민중에게는 자주독립으로 선전하고 있지만, 내실은 일본의 대동화국(동북아패권주의)건설을 위하여 일본에 붙는 독립으로서 아관파천을 막고 러시아와 영국과 불란서를 견제하려는 정략이었기 때문에 자주독립이란 민중을 선동과는 달리 우리의 외교권을 일본에 전담위임을 하였던 양면성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서도 부왜역적들의 모순적 “친일사대독립협회”의 본색이 들어난 만큼 순국선열의 위폐를 일본당사였던 독립관에 모신다는 것은 치욕이고 불경이다 따라서 독립관의 현판을 뜯어내고 광복관으로 개조한 후에 광복관에 모시는 것이 최소한의 도리일 것이다.

   이제 우리는 차세대의 “부왜역적”과 “사대독립협회”가 생겨나는 것을 우려해야 할 것이다. 광복 후 60년 동안이나 방치하였던 반민족 반국가적 배신의 상징물을 애국적 의미의 역사현장에 끼워 넣어 얼버무려 놓고 역사의식이 어린 아이들에게 매국노와 부왜역적들을 조국광복을 위해서 산화하신 애국자인 냥 착각하여 존경하는 인물로 마음에 자리한 후생들까지 늘어나고 있었다는 것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지금부터라도 역사의 눈으로 미래를 향해서 똑바로 보는 사회적 교육적 기반시설을 해야 할 것이다.


맺는말

   국치의 원인은 서기1882년부터 1897년까지 일본으로부터 훈련을 받았던 부왜역적들이 정치집단으로 독립(일본)당을 창당하여 종횡무진 하던 때로부터 속임수로 한일합방을 선포하고 국권강탈을 할 때까지의 국치 前28년 속에 있었음을 상기하고 수습보다는 원인제거와 예방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

   ①  친일세력들은 일본에서 훈련시킨 서재필의 신군부에 치중하고 기존의 군대에는 군량미 등 모든 지원을 중단하게 함으로서 임오군란을 유도하여 임오군란이 일어나게 하고는 그 틈을 타서 일본공사와 일인상사들이 피해를 보았다며 보상을 이유로 3백리의 국토를 일본에 양보하게 함으로서 확실하게 일인들이 발붙일 곳을 마련해 주었다.

   ②  개화독립당은 친일민권을 만들고자하였던 갑신반란이 실패의 3일천하로 끝났지만, 자신들은 일본의 보호를 받으면서 일본으로 망명을 하였고, 이 때 배후조종을 하였던 일본은 오히려 피해를 보았다면서 피해보상으로 경성, 동중, 파주, 강화, 영종도를 포함한 대부도까지 그리고 원산과 부산, 창원, 마산포, 천성도까지 반경100리로 넓혀서 일본인들이 자유롭게 생활할 수 있도록 하는 조약(김홍집)을 해 주었다.  그 외에도 일본 돈으로 10만원을 요구하고 새로 지을 일본공사관의 터와 공사비로 일본 돈2만원을 요구하였으며 일본호위병이 주둔할 기지를 요구하는 한성조약을 채결해주었다.

   ③  자생적으로 “정의와 평등사상을 가꾸고 능동적으로 개화를 하여 자주독립국이 되어야 한다.”면서 “왜놈들을 몰아내고 성도를 깨끗이 하자!”는 등의 4대강령을 발표하고 나섰던 애기장군과 녹두장군의 애국동학혁명농민군대를 소탕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던 “독립협회”는 능동적 개화를 봉쇄하고 “일본의 도움을 받아서 우리나라의 왕권을 폐지하고, 근대화를 이룬 다음 일본의 배려를 받아서 독립경영국가가 되어야 한다.”는 친일정치집단이었다면  어느 것이 참 독립의 명분이었겠는가?!
  그런데 친일개화파들은 동학농민군대소탕이라는 명분으로 계산된 일본군대의 대거침투를 감행하게 하였고 정한론의 작전에서 걸림돌이 되는 청나라와 전쟁을 벌여 승전함으로서 조정은 일본의 눈치 보기에 급급하였고, 반면에 친일파들은 각지에 흩어졌던 자들과 갑신반란군잔재들과 명성황후시해사건연루자들까지 그리고 심지어는 국적을 버리고 미국인으로 변신한 필립 제이슨(舊名서재필)까지 불러들여 “독립협회”로 재결합을 이루었던 것이다.

   ④  일본군대와 함께 친일파들은 궁궐을 침범하여 일본화의 걸림돌이 되는 명성황후를 시해하였다. 이 시역사건에 참여한 한국인 주범들은 날조한 한일합방 후에 일본의 귀족이 되었고 그의 후예들이 지금도 존경받고 있다.  명성황후의 장사를 치르고 난 후로 미루자고 하는 고종황제의 상투머리를 군대를 풀어 협박(11월15일)하면서 잘랐다. 그리고는 설을 폐지하고 일본과 같이 양력 1월 1일을 신정으로 실행하게 하였다. 그러면서도 일본왕의 어머니가 죽음에 대해서는 전국지방16곳에 빈소를 설치하고 9일 동안이나 궁내복을 행하였다.

   ⑤  독립문을 세우던 때는 고종황제가 불안에 떨면서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친일파들이 들끓는 궁궐을 피하여 러시아공관(아라사공관) 옮기었고 남의 나라 공관에 피신해 있는 것이 수치의 극에 달했으나 국권수호의 임시방편이며 신변보호의 때문에 어쩔 수 없었음의 “아관파천”이 소문으로 퍼지자 서울의 군중들이 흥분하여 몽둥이를 들었고 부왜역적들의 집을 습격함으로서 홍집총리와 병하대신은 종로에서 맞아죽었으며 고향으로 도망간 윤중은 자신의 고향애서 맞아죽었는데 대부분은 일본공관에 숨었다가 일본으로 도망간 사건이 있었다.
  부왜역적들은 이 사건을 겪고 나서 정치권을 장악하였다 하더라도 성난 군중을 장악하는 군중적 세력이 없으면 3일천하(갑신반란)와 같을 수 있다는 위기감에서 범시민적 “만민공동회”까지 만들게 되었던 것이다. 독립신문을 이용하여 신진세력을 모으고 여론을 호도하며 토론회와 강연회를 통해 만민공동회를 군중세력으로 육성하여 힘으로 몰아붙일 수 있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이상의 사례와 같이 역사의 거울에 비추어보면, 임진왜란 때, 일본군과 맞서서 싸우는 것 보다 더 어려웠던 것이 사리사욕으로 생각을 달리하는 국내정치꾼들을 극복하는 것이었듯이, 실재에 있어서 부왜역적들이 친일행각으로 개화의 미끼를 주면서 “한성순보”와 “한성주보” 그리고 “독립신문”을 통해 여론을 조작하였던 것들이 일제보다 더 국치를 당하게 하는 역할이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지금까지는 항일독립운동에 중심을 두었었지, 매국의 과정에 대해서는 소홀하였음을 깨달아야 하며, 향후의 조국번영을 위해서는 매국의 부왜역적행위가 재현되지 않도록 하는 교육에 중점을 두고 독립공원을 확연한 역사교과서가 되도록 하는 광복공원으로 다시 꾸며야 하는 것이다.


◐ 참고 문헌 ◑
      
   「새국사사전(이홍직)」 / 「서재필의 독립운동연구(홍선표)」
   「한국독립 운동사 연구(제7집)」
   「조선일보 특별기획 “풍운의 세계인 서재필”(이한우)」
   「독립신문(서재필)」 / 「독립신문연구(여중동)」
   「독립협회 연구(심용하)」 / 「근대한국 민족주의 연구-부록(한흥수)」
   「조선일보 연재소설 “광화문”(서기원)」 및 보도자료
   「서재필 자서전(김도태)」 / 「고종실록 中(21년 조)」
   「고종실록 中(34.건양원년 조)」 / 「신문보도자료(스크랲)」
   「“서재필 그는 친미주의자인가, 독립운동가인가”강의록(주진오)」
   「재평가 받아야 할 독립운동의 영웅들
     (하와이 國民會略史. 고대민족문화연구소 제공-광장1986.3월호)」
   「민족대백과 사전(정신문화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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