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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연의는 역사서인가 소설책인가?
정사서인 <삼국지>와 역사소설인 <삼국지연의>를 구별해야 한다
성훈 칼럼니스트
본 글은 아래 3부작의 2부입니다.
(1부) 적벽대전, 역사적 사실인가 허구인가?
(2부) 삼국지연의는 역사서인가 소설책인가?
(3부) 불태워 없애버려야 할 동묘의 관우상
우선 <삼국지연의>의 작가 나관중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자.
나관중은 중국 원말명초 시기의 소설가로 산서성 태원 출생이다. 이름은 본(本)이고, 호는 호해산인(湖海散人)이며, 관중(貫中)은 자(字)이다. 항원운동에 참가했으며, 전당에서 시내암과 함께 <수호전(水滸傳)>을 지었다.
수십 종의 장편소설 중 대표작은 단연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와 <수호전(水滸傳)>이며, <수당양조사전(隋唐兩朝史傳)> <잔당오대사연의(殘唐五代史演義)> <삼수평요전(三遂平妖傳)> 등과 희곡으로는 <송태조용호풍운회(宋太祖龍虎風雲會)>가 전한다.
정사서 <삼국지>와 소설 <삼국지연의>의 차이
우리 국민들 대부분은 <삼국지연의>를 위.오.촉 삼국의 정통역사서로 알고 있다. 그러나 <삼국지연의>는 정통역사서가 아니라, 후대(명나라)의 나관중이란 소설가가 역사를 각색한 단순 역사소설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그다지 많지가 않다. 게다가 우리는 소설 <삼국지연의>를 흔히들 <삼국지>라 부르고 있는데, 이것도 역시 대단히 잘못된 것이라 하겠다.
위.오.촉 삼국의 정사서(正史書)로는 진수가 쓴 <삼국지>가 있다. 이 정사 <삼국지>와 역사소설인 <삼국연의>와는 내용이 많이 다름에도, 우리 국민들 대부분은 소설 <삼국지연의>를 <삼국지>라 부르며 정사서로 알고 있다는 것이 큰 문제라 하겠다. 참고로 나관중 소설의 원제목은 <삼국연의>이며, 우리나라에는 <삼국지연의> 또는 그냥 <삼국지>로 알려져 있다.
전국 유명서점에 출시된 역사망상소설 <삼국지>의 종류가 1,300여종이 넘는다. 문제는 우리나라 많은 작가들이 나관중의 소설 <삼국연의>를 번역해서는 <삼국지>라는 이름을 붙인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나라 국민들이 소설 <삼국지연의>와 정사 <삼국지>를 혼돈하는 하나의 원인이기도 하다.
이는 그동안 정사서인 <삼국지>가 번역 출간되지 않은 영향도 있겠지만, 근세조선시대 이래로 줄곧 내려온 중화모화사대주의 사상 때문일 것이다. 그럼 <삼국지>와 <삼국지연의>와는 어떻게 다른 것인지 자세히 알아보기로 하자.
간단히 말해, 소설 <삼국지연의>는 정사 <삼국지>의 역사상 인물과 역사적 사실을 빌려와 뻥튀기로 새롭게 내용을 고쳐 쓴 것으로 보면 된다. <삼국지연의>는 오랫동안 이민족의 지배에 시달려 온 한족들에게 희망과 자부심을 주기 위해 명나라 정부 차원에서 만든 소설책일 뿐이다. 따라서 그 내용이 <삼국지>와 다르게 엄청나게 많이 부풀려져 있다.
지금까지 우리나라는 이상스럽게도 자신의 역사를 말살한 <삼국지연의>가 허황된 소설 속의 꿈같은 이야기라는 언급을 회피하고 있으며, 이 소설이 마치 정사서 <삼국지>로 착각하게끔 분위기를 조장하고 있다. 그리고 정부나 사학계 차원에서도 <삼국지연의>의 문제점에 대해 지적을 제대로 한 적도 없고, 또 그 문제점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 것 같다.
오히려 공무원 필독서 1위의 자리를 꾸준히 누리고 있으며, 수많은 작가에 의해 책이 계속번역 출간되고, 심지어는 만화로까지 나와 자라나는 어린이들에게도 많이 읽히고 있는 실정이다. 이 책의 가장 큰 문제점은 동이족(우리 민족)의 역사를 대륙에서 추방해 버린 것인데 그런 사실도 모르고 한국 사람들은 <삼국지연의>를 역사상 최고의 작품으로 꼽는데 주저하지 않고 있다. 참으로 한심하고 무지몽매한 국민들이라 아니할 수 없다.
▲ 소설 삼국연의가 만화 <삼국지>로 둔갑되어 있다
정사 <삼국지>를 통해 본 소설 『삼국지연의』의 실체
나관중의 소설인 <삼국연의(三國演義)>의 오리지날이 진수가 지은 역사서인 <삼국지(三國志)>임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나관중 자신도 <삼국연의>의 앞머리에 “진나라 평양후 진수가 남긴 역사 기록을 후학 나관중이 순서에 따라 편집했다.(晉平陽侯陳壽史傳, 後學羅貫中編次.)”라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청나라 중기의 역사가 장학성(章學成)이 “칠실삼허(七實三虛 : 열 중 일곱은 사실이고 셋은 허구다.)”라고 하였듯이, 정사 <삼국지>가 없었다면 소설 <삼국연의>는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동안 정사서인 <삼국지>가 번역되지 않은 탓에 대한민국 독자들은 소설책인 <삼국연의(三國演義)>를 역사서로 오인하게 되었고, <삼국연의>의 허구와 과장으로 인해 그동안 왜곡된 역사를 진실로 받아들여 왔다는 점이 큰 문제라 하겠다.
즉 대한민국 국민들은 <삼국지연의>를 정사로 오판하는 등 정사 <삼국지>는 오히려 소설의 그늘에 가려져 있다. 정사서는 읽기가 딱딱해 재미가 없고, 소설은 픽션의 이야기체이기 때문에 재미있게 읽을 수 있어 그 파급력이 큰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앞으로는 소설 <삼국지연의>를 읽으면서 “이것은 사실이 아니고 허구이다.”라는 개념을 가지고 읽어야 우리 역사를 제대로 찾을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정사 <삼국지>는 조조의 "위 정통론"을 내세우고 있는데 반해, 소설 <삼국지연의>는 유비의 "촉 정통론"으로 바뀌었다. 나관중은 원말명초 시기를 살았기에 한족이 이민족(동이족인 몽골)에게 지배당하는 현실을 비통해 하였고, 한족의 정통성을 기치로 내걸고자 천 년 전에 사라진 한나라를 이상형으로 삼았다.
이는 곧 한(漢) 황실을 계승한 유비의 촉나라가 정통성을 가졌다는 ‘촉한정통론’으로 이어졌다. 이후 소설 속 ‘촉한정통론’은 한족이 이민족의 지배를 받거나 정치적 결속력을 다져야 할 때마다 강화되었고, 청나라 모종강의 재편집을 거쳐 오늘날까지 지속되었다.
건안 문단(建安文壇)을 선도한 시인이자 문학과 사상의 진흥에 앞장선 문치의 제왕으로 정사 <삼국지>에 기록된 영웅 조조가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극악무도하고 파렴치하고 교활한 간웅(奸雄)으로 탈바꿈되고, 유능한 정치가이기는 했지만 군사는 잘 쓰지 못했던 제갈량이 신출귀몰한 군사 전략가로 변신한 데에는 이러한 정치적 사상적 배경이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정사 <삼국지>를 보면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명장면들이 대부분 허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대표적인 것이
유비와 관우와 장비가 탁주(북경)에서 도원결의를 하는 장면,
관우가 술이 식기 전에 화웅의 목을 베는 장면과 안량/문추를 단 칼에 베는 장면,
왕윤이 초선을 이용하여 동탁과 여포 사이를 이간질하는 장면,
유비가 삼고초려하여 제갈량을 영입하는 과정,
장비가 장판교에서 고함 한마디로 적장을 죽이고 적의 추격을 지연시키는 장면,
조자룡이 아두를 안고 적진을 뚫고 나오는 장면,
제갈량이 적벽대전에서 동남풍을 불러들여 조조가 100만 대군을 잃는 내용 등이다.
위와 같이 대부분 ‘촉한정통’의 기준에 따라 촉나라의 인물들을 부풀려 미화하고 있다. 반면에 <위서 동탁전>에서 뛰어난 장군이자 개혁가의 면모를 보인 동탁은 단지 변방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소설에서 희대의 패륜아로 매도되기도 하며, 양아들인 여포에게 공격을 받고 죽는 한심하고 못난 인간으로 묘사된다.
▲중국 대학교재에 나와 있는 적벽대전의 지도. 오나라의 수도 건업은 적벽에서 멀지 않은 곳으로 보인다.
소설 <삼국지연의>를 읽다 보면 이런 의문이 든다. 위나라는 계속 패전만 거듭하고 촉나라는 믾이 이기는 것으로 묘사된다. 그렇다면 삼국의 통일은 당연히 촉나라에 의해 이룩되었어야 하는데 실제로 삼국은 나중에 위나라에 의해 통일된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삼국지연의>가 소설 속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제 역사를 보는 시각을 바로 잡아야 한다. 명나라의 의도대로 소설 <삼국지연의>에 열광하고 그 마약에 마취되는 행위는 앞으로 없어야 할 것이다. 220-280년 즉 불과 60년 동안 서화/항성 서쪽에 있었던 위.오.촉의 역사를 마치 중국 대륙 전체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과대포장한 소설책 <삼국지연의>의 실체를 우리는 바로 보아야만 한다.
한족은 우리 동이족의 역사를 말살하기 위해 역사소설을 만들었는데, 막상 피해자인 우리는 그 소설에 매료되고 환호하는 이 슬픈 현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삼국지연의>는 과대망상소설로 역사적 사실을 엄청나게 부풀려 놓은 허구의 이야기인데 그것도 모르고 한국 사람들은 <삼국지연의> 속의 이야기가 마치 실제로 일어난 역사인양 착각하고 있다.
우리의 정신을 죽이는 소설 <삼국지연의>는 더 이상 이 나라에서 팔리면 안되고, 적벽대전과 같은 영화가 상영되어서도 안될 것이며, 더욱이 이런 영화에 투자라는 것은 앞으로 절대 없어야 할 것이다. 더 이상 역사에 대한 무지함을 보이지 말아야 할 것이며, 올바른 역사의 진실에 대해 교육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다는 일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한 대목이기도 하다.
▲ 영화 적벽대전의 한 장면. 강건너 보이는 곳이 적벽이다. 이렇게 강폭이 좁은 곳에서 100만대군이 전쟁을 했다는 것은 소설이 아니고서는 있을 수가 없다. <삼국지연의>는 사실보다 엄청 부풀려진 소설일 뿐이다.
정사 <삼국지>가 번역 출간되었다.
<정사 삼국지>가 김원중선생 번역으로 민음사에서 4권으로 2007년도에 출시되었다. 정사 <삼국지>를 읽어보면 역사망상소설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명장면들이 대부분 허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소설 <삼국지연의>를 <삼국지>란 이름으로 출간한 작가들은 반드시 정사서(正史書)를 읽어보고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깨달아야 한다.
아무리 돈 버는 것도 좋지만, 스스로 민족혼을 말살하는 일에 앞장선다는 것은 지식인으로서 할 짓이 아니라는 것을 느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작품이 중국의 동이역사 말살 정책인 '동북공정'에 얼마나 크게 조력하고 있는지도 곰곰히 생각해보아야 한다.
한족의 우월성을 나타내기 위해 역사를 조작한 허무맹랑한 소설을 숭상하여 전 국민을 소중화 사상에 빠지게 만드니 이 무슨 훼괴한 일인가? 대학과 직장에서 그리고 공무원들까지 “삼국지를 10회 이상 읽지 않은 자와는 대화를 하지마라.”다고 말하는 것은 소중화 사상에 빠져 동북공정에 조력하는 역적이 되겠다는 말과 같은 것이다.
일만년 천손민족의 자존심과 단군조선의 정통을 계승한 웅대한 기상은 대체 어디로 갔단 말인가? 역사망상소설 삼국지연의 숭상현상은 반드시 중단되어야 한다. 그래야 이 나라의 밝은 미래가 열릴 수 있다.
삼국지연의/수호전/열국지는 동이의 역사말살 소설이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는 14세기말에 나관중이 창작했다.
수호전(水滸傳)은 시내암(施耐唵)이 쓰고 나관중이 집성한 것이다.
열국지(烈國志) 또한 명대의 작품이다.
명나라는 1368년-1662년까지 존재했는데, 위의 소설들은 모두 명나라 때 작품이다. 이 소설들은 위.오.촉 삼국이 패망한 이후 약 천년 이상 지난 다음에 정치적 사상적 목적에 의해 쓰여진 작품들이다.
요(遼)의 남쪽인 하남성에 서화(西華)와 항성(項城)이 있다. 9세기 이전에는 장안(서안) 중심의 한족과 당시 서화/항성의 동쪽에 있었던 동이(東夷: 우리 민족)가 같이 대륙에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동이의 영역이 명나라 때는 한족의 영역으로 변해버리고, 명나라는 소설을 통해 동이의 대륙역사까지도 반도의 역사로 축소시키게 된다.
<중국 25사>에서는 한족과 동이의 경계를 요서(遼西)와 요동(遼東)으로 기록하고 있다. 6-7세기의 경계를 보면 은산, 고대인성, 신성, 석문, 석성, 항성, 덕안으로 이어지고 있는데 산서성 요(遼)중심의 동쪽에 남북으로 있는 지명이다. 그런 역사적 사실을 명나라는 역사왜곡소설을 통해 없애버린다.
▲ 요동 요서의 구분의 기준은 산서성 요라는 지명이다. 이 근처를 흐르는 요수가 -->난하-->현 요하 로 바뀌면서 역사가 왜곡된다. 요나라가 들어서면서 현 요하를 요수라 했으니 삼국시대의 요하는 산서성 요 지역을 흐르는 강으로 황하나 그 지류를 말함이다.
명나라는 서화/항성 동쪽에 있었던 동이역사를 밀어내기 위하여, <삼국지연의>를 중국대륙 전체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알도록 지어냈다는 것이다. 즉 정사인 <삼국지>의 대륙 서쪽에서 일어난 역사를 <삼국연의>를 통하여 대륙 전체의 영역으로 뻥튀기 했다고 보면 된다.
B.C 11세기부터 9세기 이전까지 한족이 세운 국가 중 어떤 나라도 대륙 전체를 통일한 적이 없었다. 만약 대륙 전체를 통일했다면, 중국의 <25사>는 모두가 거짓말이 되고 말 것이다. 진시황의 천하통일도 실상을 알고 보면 대륙의 반인 서쪽의 통일에 불과한 것이었다.
중국25사의 기록과 상당부분 틀린 <삼국지연의>는 동이의 역사를 대륙에서 삭제시키려는 명나라의 의도에 의하여 지원되고 창작되었다고 본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막상 그런 역사말살을 당한 우리는 <25사>의 내용을 숨기면서까지 <삼국지연의>를 위대한 소설이라고 극구 칭찬하고 있다는 것이다. 참으로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구리(九黎)시대 치우천자의 상징이란 동두철액(銅頭鐵額)이 있다. 치우천자는 철가면과 갑옷을 입고 수많은 전쟁에서 모두 승리해 황제헌원의 무릎을 꿇린다. 치우천자에게 엄청 시달린 한족 입장에서는 그것이 나쁜 의미겠지만 우리 입장에서는 치우천자의 상징으로 좋은 의미로 봐야 한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현재 철면피를 나쁜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우리 스스로 철면피의 진정한 본뜻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전설의 고향’의 단골 메뉴인 구미호도 마찬가지 경우이다. 구미호는 구리(九黎)시대 우리 민족을 상징하는 단어였으나, 지금은 나쁜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게다가 우리는 까마귀를 흉측하고 불길한 새로 알고 있다. 그런데 삼족오(三足烏)는 바로 우리의 상징이었다. 이런 것들을 보면 참으로 안타깝다 하겠다.
이 모든 것은 일제강점기 때 일제가 그렇게 만들어 놓은 것이다. 문제는 해방 6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우리는 그런 사실을 전혀 모르고 철면피/구미호/까마귀를 그저 나쁜 의미로만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우리 민족의 혼을 파괴한 일제의 추종자인 매국식민사학계가 이러한 것을 바로잡지 않았기 때문이다.
▲ 일제와 중국에 의해 나쁜 의미로 해석된 구미호와 까마귀. 우리는 오히려 까치가 길조인 것으로 알고 있다.
서화 동쪽은 예부터 동이의 강역
<삼국지연의>는 동이 5국(고구려.백제.신라.가야.왜)이 서화/항성의 동쪽에 있을 때 그 서쪽에 있었던 위.오.촉 삼국을 토대로 하여 만든 역사소설인데, 그것을 마치 대륙 전체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볼 수 있게 써졌다는 것이다. 참고로 기자가 살던 땅인 서화는 하화족(夏華族)과 동이족인 고조선의 경계로 봐야 한다. 즉 서화 동쪽은 대대로 우리의 강역이었던 것이다.
광개토대왕비문도 서화/항성에서 반도까지를 우리 민족의 영역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삼국지연의>에 마취된 애독자들은 서화/항성 동쪽의 우리 역사를 전혀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구리--> 고조선--> 열국시대를 이어온 서화/항성 동쪽의 동이 기록을 구분하고, 아울러 <삼국지연의>와 <삼국지>도 역사소설과 역사서의 경계를 분명히 하여 소설을 통해서 역사를 오도하는 일이 앞으로 없어야 할 것이다.
중국 25사의 동이전과 삼국유사/삼국사기/광개토대왕비 등에서 서화에서 반도까지는 우리 민족의 영역이었고, 역사기록도 구리시대에서 9세기까지로 되어 있다. <수호전>의 중심이 되어 있는 양산박 주위는 우리 민족의 중심부 중의 하나였다. 양산박 주위인 동평군 수장현에는 구리시대 치우천자의 능이 있으며, 백제 의자왕의 지명인 황산/동명/대산/백마하가 있다.
▲ 배달국 시절부터 서화 이동은 대대로 동이족의 강역이었다. 춘추전국시대의 연, 제, 노는 대륙 동부로 옮겨진다.
669년과 672년 당나라에 자석과 침을 보낸 신라의 석성/항성도 양산박의 서쪽에 있다. 우리가 중국의 발명품으로 알고 있는 나침반(羅針盤)도 실상은 신라에서 만든 신라침반(新羅針盤)이 그 유래가 된다. 기자 때부터 양잠을 시작했는데 삼국시대에 발달한 신라금(新羅錦: SILK = SILLA KEUM의 약자)의 생산지 저(雎, 양읍)도 양산박의 서쪽에 있다. 최치원이 태수로 있었던 태산(太山)은 양산박의 동쪽에 있다.
<열국지> 또한 서화의 서쪽 장안중심의 한족과 동쪽인 동이의 역사를 바르게 정립하지 않은 소설이다. 이 또한 서화 동쪽의 동이 역사가 배제된 상태에서 만들어진 소설이라 할 수 있다. 나중에 춘추전국시대의 연(燕),제(濟),노(魯)나라의 위치는 원래 장안 근처였는데 대륙 동부로 이전하게 된다.
위.오.촉 삼국은 대륙의 서쪽에서 싸웠다. 위의 수도는 후한의 수도였던 하남성 낙양 근처의 허창이며, 촉의 수도는 사천성 성도이며, 오의 수도는 건업이다. 중국에서는 건업을 양자강 하구로 말하고 있으나, 건업은 적벽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으로 본다. 위.오.촉 삼국이 모여 최대의 전쟁을 치른 적벽은 호남성에 있으며 양자강 중류이다. 또 삼국을 통일한 서진의 수도도 낙양이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 중국에서 <삼국지연의>를 토대로 만든 위.오.촉 삼국의 지도. 역사를 왜곡해 대륙 동쪽에 있었던 동이의 역사를 밀어내 버렸다.
적벽에 있는 양자강 중류의 강폭은 서울에 있는 한강의 폭과 비슷해 보인다. 이런 곳에서 삼국의 100만 대군이 전쟁을 벌였다는 것은 소설이 아니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인 것이다. 왜 그들의 도읍이 대륙의 서쪽이며, 양자강 중류인 적벽에서 전쟁을 치렀는지를 잘 생각해 보면 그 해답이 저절로 나온다.
그리고 만일 <삼국지연의>처럼 대륙 전체가 자기네 무대였다면 삼국의 도읍을 하남성 낙양과 같은 서쪽에 정할 이유가 전혀 없다. 더 동쪽으로 내려와 물자가 풍부한 동부평야지대에 도읍을 정해야 하는 것이 올바른 이치 아니겠는가? 고대 중국의 수도 위치만 놓고 보더라도 당시 한족의 영역이 어떠했는지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왜 한족은 낙양에서 동진(東進)하지 못했을까? 참고로 하남성 낙양은 서쪽 산악 지대에서 평야지대로 나오는 길목에 있고, 전통적으로 한족의 수도인 서안은 낙양의 서쪽 산악지대 안에 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새겨볼 일이다. 그 이유는 당시 대륙의 동쪽 즉 양자강/황하 하류의 평야지대에는 강력한 우리의 삼국인 고구려.백제.신라가 자리를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백제는 당시 초고왕과 구수왕이 통치하던 시절로 국세가 강했을 때이고, 고구려는 요동의 서안평을 습격하여 깨트렸다가, 한 때 위나라 관구검에게 고구려의 수도가 함락당하고 동천왕이 도망가는 수모도 겪기도 했지만, 대체로 위.오.촉에 대해 대등하거나 우월한 지위였던 것으로 보인다. 백제의 기록은 없어 구체적인 것은 잘 모르겠고, 남당 박창화선생의 유고집인 <고구려사 초.략>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
“11대 동양대제(동천왕) 7년(233년) 9월 손권이 사신을 보내어 “바치려 했던 금보전대를 공손연에게 빼앗겼으니 죽을 죄를 면할 길 없다”고 하였다. 이에 제(帝)는 멀리에서 왔음을 보아 흡족해 하며 술과 음식을 내려 주었고, 손권에게는 초피와 갈계피 등을 내려주면서 “공손연은 사람됨이 뒤집기를 잘 하여 믿을 자 못된다.”고 일렀다. 나중에 들으니 공손연이 손권의 사신을 죽여 그 목을 위나라로 보냈다.(이하생략)” (삼국사기에는 고구려가 손권의 사신을 죽여 그 목을 위로 보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8년(234년) 4월 조예(조조의 손자)가 사신을 보내어 병서.보검.옥침대 등을 바치며 함께 공손연을 멸하고 오(吳)를 토벌하기를 청하였다.”
“10년(236년) 2월에 오나라 손권의 사신이 찾아와 배알하며 화친을 청하였는데 그 언사가 심히 방자하고 그 예물 또한 야박하여 사신을 옥에 가두었다.”는 기록이 있다. 외국의 사신을 함부로 옥에 가둘 수 있는 고구려의 위상을 어찌 보아야 하겠는가?
“12년(238년) 위나라의 사마의가 사신을 보내와서는 함께 공손연을 멸하자고 청하여 5천 군사를 보내 8월에 공손연을 멸했는데, 8월에 사마의가 약속을 저버리고 교만 방자해져 임금이 노하여 교통을 끊었다.”는 기록이 있다. 위나라의 최고실권자에게 절교를 선언할 수 있는 고구려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16년(242년) 5월 임금이 직접 10만 군사를 이끌고 서안평(西安平)을 쳐 빼앗았다. 이것이 안평대전(安平大戰)이다.”는 기록이 있다. 즉 서안평은 위와 고구려가 서로 뺏고 빼앗기는 요충지였다. 그럼 서안평이 어디인지를 살펴보면 당시 위나라와 고구려의 국경지대가 어디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 중국 25사와 우리 사서에 자주 등장하는 서안평의 위치는 하북성 석문(석가장) 밑에 있다.
“18년 위 관구검이 현토에 침입하여 노략질하기에 임금이 보병과 기병 2만을 이끌고 나가 크게 이기고 3천여 수급을 베었고 이를 비수대전이라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물론 19년(245년)에는 위나라 관구검에게 도성이 함락당하는 수모를 당하지만 여하튼 당시 고구려는 위.오.촉 삼국을 통일한 위나라와 이런 식으로 대등하게 대치한다.
이러한 동이 3국의 역사를 지우려고 각색된 것이 바로 나관중의 과대망상소설인 <삼국지연의>인 것이다. 그런데 이상스럽게도 한국 사람들은 이 소설에 찬사를 보내고 있다. 그 이유는 우리의 역사 교육이 근본적으로 잘못되어 있기 때문이다. 지금부터라도 역사의 진실을 바로 배워 일제의 식민사관을 과감히 떨쳐내고 새롭게 이 나라의 대륙역사를 세워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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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사서인 <삼국지>와 역사소설인 <삼국지연의>를 구별해야 한다
성훈 칼럼니스트
본 글은 아래 3부작의 2부입니다.
(1부) 적벽대전, 역사적 사실인가 허구인가?
(2부) 삼국지연의는 역사서인가 소설책인가?
(3부) 불태워 없애버려야 할 동묘의 관우상
우선 <삼국지연의>의 작가 나관중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자.
나관중은 중국 원말명초 시기의 소설가로 산서성 태원 출생이다. 이름은 본(本)이고, 호는 호해산인(湖海散人)이며, 관중(貫中)은 자(字)이다. 항원운동에 참가했으며, 전당에서 시내암과 함께 <수호전(水滸傳)>을 지었다.
수십 종의 장편소설 중 대표작은 단연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와 <수호전(水滸傳)>이며, <수당양조사전(隋唐兩朝史傳)> <잔당오대사연의(殘唐五代史演義)> <삼수평요전(三遂平妖傳)> 등과 희곡으로는 <송태조용호풍운회(宋太祖龍虎風雲會)>가 전한다.
정사서 <삼국지>와 소설 <삼국지연의>의 차이
우리 국민들 대부분은 <삼국지연의>를 위.오.촉 삼국의 정통역사서로 알고 있다. 그러나 <삼국지연의>는 정통역사서가 아니라, 후대(명나라)의 나관중이란 소설가가 역사를 각색한 단순 역사소설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그다지 많지가 않다. 게다가 우리는 소설 <삼국지연의>를 흔히들 <삼국지>라 부르고 있는데, 이것도 역시 대단히 잘못된 것이라 하겠다.
위.오.촉 삼국의 정사서(正史書)로는 진수가 쓴 <삼국지>가 있다. 이 정사 <삼국지>와 역사소설인 <삼국연의>와는 내용이 많이 다름에도, 우리 국민들 대부분은 소설 <삼국지연의>를 <삼국지>라 부르며 정사서로 알고 있다는 것이 큰 문제라 하겠다. 참고로 나관중 소설의 원제목은 <삼국연의>이며, 우리나라에는 <삼국지연의> 또는 그냥 <삼국지>로 알려져 있다.
전국 유명서점에 출시된 역사망상소설 <삼국지>의 종류가 1,300여종이 넘는다. 문제는 우리나라 많은 작가들이 나관중의 소설 <삼국연의>를 번역해서는 <삼국지>라는 이름을 붙인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나라 국민들이 소설 <삼국지연의>와 정사 <삼국지>를 혼돈하는 하나의 원인이기도 하다.
이는 그동안 정사서인 <삼국지>가 번역 출간되지 않은 영향도 있겠지만, 근세조선시대 이래로 줄곧 내려온 중화모화사대주의 사상 때문일 것이다. 그럼 <삼국지>와 <삼국지연의>와는 어떻게 다른 것인지 자세히 알아보기로 하자.
간단히 말해, 소설 <삼국지연의>는 정사 <삼국지>의 역사상 인물과 역사적 사실을 빌려와 뻥튀기로 새롭게 내용을 고쳐 쓴 것으로 보면 된다. <삼국지연의>는 오랫동안 이민족의 지배에 시달려 온 한족들에게 희망과 자부심을 주기 위해 명나라 정부 차원에서 만든 소설책일 뿐이다. 따라서 그 내용이 <삼국지>와 다르게 엄청나게 많이 부풀려져 있다.
지금까지 우리나라는 이상스럽게도 자신의 역사를 말살한 <삼국지연의>가 허황된 소설 속의 꿈같은 이야기라는 언급을 회피하고 있으며, 이 소설이 마치 정사서 <삼국지>로 착각하게끔 분위기를 조장하고 있다. 그리고 정부나 사학계 차원에서도 <삼국지연의>의 문제점에 대해 지적을 제대로 한 적도 없고, 또 그 문제점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 것 같다.
오히려 공무원 필독서 1위의 자리를 꾸준히 누리고 있으며, 수많은 작가에 의해 책이 계속번역 출간되고, 심지어는 만화로까지 나와 자라나는 어린이들에게도 많이 읽히고 있는 실정이다. 이 책의 가장 큰 문제점은 동이족(우리 민족)의 역사를 대륙에서 추방해 버린 것인데 그런 사실도 모르고 한국 사람들은 <삼국지연의>를 역사상 최고의 작품으로 꼽는데 주저하지 않고 있다. 참으로 한심하고 무지몽매한 국민들이라 아니할 수 없다.
▲ 소설 삼국연의가 만화 <삼국지>로 둔갑되어 있다
정사 <삼국지>를 통해 본 소설 『삼국지연의』의 실체
나관중의 소설인 <삼국연의(三國演義)>의 오리지날이 진수가 지은 역사서인 <삼국지(三國志)>임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나관중 자신도 <삼국연의>의 앞머리에 “진나라 평양후 진수가 남긴 역사 기록을 후학 나관중이 순서에 따라 편집했다.(晉平陽侯陳壽史傳, 後學羅貫中編次.)”라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청나라 중기의 역사가 장학성(章學成)이 “칠실삼허(七實三虛 : 열 중 일곱은 사실이고 셋은 허구다.)”라고 하였듯이, 정사 <삼국지>가 없었다면 소설 <삼국연의>는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동안 정사서인 <삼국지>가 번역되지 않은 탓에 대한민국 독자들은 소설책인 <삼국연의(三國演義)>를 역사서로 오인하게 되었고, <삼국연의>의 허구와 과장으로 인해 그동안 왜곡된 역사를 진실로 받아들여 왔다는 점이 큰 문제라 하겠다.
즉 대한민국 국민들은 <삼국지연의>를 정사로 오판하는 등 정사 <삼국지>는 오히려 소설의 그늘에 가려져 있다. 정사서는 읽기가 딱딱해 재미가 없고, 소설은 픽션의 이야기체이기 때문에 재미있게 읽을 수 있어 그 파급력이 큰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앞으로는 소설 <삼국지연의>를 읽으면서 “이것은 사실이 아니고 허구이다.”라는 개념을 가지고 읽어야 우리 역사를 제대로 찾을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정사 <삼국지>는 조조의 "위 정통론"을 내세우고 있는데 반해, 소설 <삼국지연의>는 유비의 "촉 정통론"으로 바뀌었다. 나관중은 원말명초 시기를 살았기에 한족이 이민족(동이족인 몽골)에게 지배당하는 현실을 비통해 하였고, 한족의 정통성을 기치로 내걸고자 천 년 전에 사라진 한나라를 이상형으로 삼았다.
이는 곧 한(漢) 황실을 계승한 유비의 촉나라가 정통성을 가졌다는 ‘촉한정통론’으로 이어졌다. 이후 소설 속 ‘촉한정통론’은 한족이 이민족의 지배를 받거나 정치적 결속력을 다져야 할 때마다 강화되었고, 청나라 모종강의 재편집을 거쳐 오늘날까지 지속되었다.
건안 문단(建安文壇)을 선도한 시인이자 문학과 사상의 진흥에 앞장선 문치의 제왕으로 정사 <삼국지>에 기록된 영웅 조조가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극악무도하고 파렴치하고 교활한 간웅(奸雄)으로 탈바꿈되고, 유능한 정치가이기는 했지만 군사는 잘 쓰지 못했던 제갈량이 신출귀몰한 군사 전략가로 변신한 데에는 이러한 정치적 사상적 배경이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정사 <삼국지>를 보면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명장면들이 대부분 허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대표적인 것이
유비와 관우와 장비가 탁주(북경)에서 도원결의를 하는 장면,
관우가 술이 식기 전에 화웅의 목을 베는 장면과 안량/문추를 단 칼에 베는 장면,
왕윤이 초선을 이용하여 동탁과 여포 사이를 이간질하는 장면,
유비가 삼고초려하여 제갈량을 영입하는 과정,
장비가 장판교에서 고함 한마디로 적장을 죽이고 적의 추격을 지연시키는 장면,
조자룡이 아두를 안고 적진을 뚫고 나오는 장면,
제갈량이 적벽대전에서 동남풍을 불러들여 조조가 100만 대군을 잃는 내용 등이다.
위와 같이 대부분 ‘촉한정통’의 기준에 따라 촉나라의 인물들을 부풀려 미화하고 있다. 반면에 <위서 동탁전>에서 뛰어난 장군이자 개혁가의 면모를 보인 동탁은 단지 변방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소설에서 희대의 패륜아로 매도되기도 하며, 양아들인 여포에게 공격을 받고 죽는 한심하고 못난 인간으로 묘사된다.
▲중국 대학교재에 나와 있는 적벽대전의 지도. 오나라의 수도 건업은 적벽에서 멀지 않은 곳으로 보인다.
소설 <삼국지연의>를 읽다 보면 이런 의문이 든다. 위나라는 계속 패전만 거듭하고 촉나라는 믾이 이기는 것으로 묘사된다. 그렇다면 삼국의 통일은 당연히 촉나라에 의해 이룩되었어야 하는데 실제로 삼국은 나중에 위나라에 의해 통일된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삼국지연의>가 소설 속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제 역사를 보는 시각을 바로 잡아야 한다. 명나라의 의도대로 소설 <삼국지연의>에 열광하고 그 마약에 마취되는 행위는 앞으로 없어야 할 것이다. 220-280년 즉 불과 60년 동안 서화/항성 서쪽에 있었던 위.오.촉의 역사를 마치 중국 대륙 전체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과대포장한 소설책 <삼국지연의>의 실체를 우리는 바로 보아야만 한다.
한족은 우리 동이족의 역사를 말살하기 위해 역사소설을 만들었는데, 막상 피해자인 우리는 그 소설에 매료되고 환호하는 이 슬픈 현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삼국지연의>는 과대망상소설로 역사적 사실을 엄청나게 부풀려 놓은 허구의 이야기인데 그것도 모르고 한국 사람들은 <삼국지연의> 속의 이야기가 마치 실제로 일어난 역사인양 착각하고 있다.
우리의 정신을 죽이는 소설 <삼국지연의>는 더 이상 이 나라에서 팔리면 안되고, 적벽대전과 같은 영화가 상영되어서도 안될 것이며, 더욱이 이런 영화에 투자라는 것은 앞으로 절대 없어야 할 것이다. 더 이상 역사에 대한 무지함을 보이지 말아야 할 것이며, 올바른 역사의 진실에 대해 교육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다는 일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한 대목이기도 하다.
▲ 영화 적벽대전의 한 장면. 강건너 보이는 곳이 적벽이다. 이렇게 강폭이 좁은 곳에서 100만대군이 전쟁을 했다는 것은 소설이 아니고서는 있을 수가 없다. <삼국지연의>는 사실보다 엄청 부풀려진 소설일 뿐이다.
정사 <삼국지>가 번역 출간되었다.
<정사 삼국지>가 김원중선생 번역으로 민음사에서 4권으로 2007년도에 출시되었다. 정사 <삼국지>를 읽어보면 역사망상소설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명장면들이 대부분 허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소설 <삼국지연의>를 <삼국지>란 이름으로 출간한 작가들은 반드시 정사서(正史書)를 읽어보고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깨달아야 한다.
아무리 돈 버는 것도 좋지만, 스스로 민족혼을 말살하는 일에 앞장선다는 것은 지식인으로서 할 짓이 아니라는 것을 느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작품이 중국의 동이역사 말살 정책인 '동북공정'에 얼마나 크게 조력하고 있는지도 곰곰히 생각해보아야 한다.
한족의 우월성을 나타내기 위해 역사를 조작한 허무맹랑한 소설을 숭상하여 전 국민을 소중화 사상에 빠지게 만드니 이 무슨 훼괴한 일인가? 대학과 직장에서 그리고 공무원들까지 “삼국지를 10회 이상 읽지 않은 자와는 대화를 하지마라.”다고 말하는 것은 소중화 사상에 빠져 동북공정에 조력하는 역적이 되겠다는 말과 같은 것이다.
일만년 천손민족의 자존심과 단군조선의 정통을 계승한 웅대한 기상은 대체 어디로 갔단 말인가? 역사망상소설 삼국지연의 숭상현상은 반드시 중단되어야 한다. 그래야 이 나라의 밝은 미래가 열릴 수 있다.
삼국지연의/수호전/열국지는 동이의 역사말살 소설이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는 14세기말에 나관중이 창작했다.
수호전(水滸傳)은 시내암(施耐唵)이 쓰고 나관중이 집성한 것이다.
열국지(烈國志) 또한 명대의 작품이다.
명나라는 1368년-1662년까지 존재했는데, 위의 소설들은 모두 명나라 때 작품이다. 이 소설들은 위.오.촉 삼국이 패망한 이후 약 천년 이상 지난 다음에 정치적 사상적 목적에 의해 쓰여진 작품들이다.
요(遼)의 남쪽인 하남성에 서화(西華)와 항성(項城)이 있다. 9세기 이전에는 장안(서안) 중심의 한족과 당시 서화/항성의 동쪽에 있었던 동이(東夷: 우리 민족)가 같이 대륙에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동이의 영역이 명나라 때는 한족의 영역으로 변해버리고, 명나라는 소설을 통해 동이의 대륙역사까지도 반도의 역사로 축소시키게 된다.
<중국 25사>에서는 한족과 동이의 경계를 요서(遼西)와 요동(遼東)으로 기록하고 있다. 6-7세기의 경계를 보면 은산, 고대인성, 신성, 석문, 석성, 항성, 덕안으로 이어지고 있는데 산서성 요(遼)중심의 동쪽에 남북으로 있는 지명이다. 그런 역사적 사실을 명나라는 역사왜곡소설을 통해 없애버린다.
▲ 요동 요서의 구분의 기준은 산서성 요라는 지명이다. 이 근처를 흐르는 요수가 -->난하-->현 요하 로 바뀌면서 역사가 왜곡된다. 요나라가 들어서면서 현 요하를 요수라 했으니 삼국시대의 요하는 산서성 요 지역을 흐르는 강으로 황하나 그 지류를 말함이다.
명나라는 서화/항성 동쪽에 있었던 동이역사를 밀어내기 위하여, <삼국지연의>를 중국대륙 전체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알도록 지어냈다는 것이다. 즉 정사인 <삼국지>의 대륙 서쪽에서 일어난 역사를 <삼국연의>를 통하여 대륙 전체의 영역으로 뻥튀기 했다고 보면 된다.
B.C 11세기부터 9세기 이전까지 한족이 세운 국가 중 어떤 나라도 대륙 전체를 통일한 적이 없었다. 만약 대륙 전체를 통일했다면, 중국의 <25사>는 모두가 거짓말이 되고 말 것이다. 진시황의 천하통일도 실상을 알고 보면 대륙의 반인 서쪽의 통일에 불과한 것이었다.
중국25사의 기록과 상당부분 틀린 <삼국지연의>는 동이의 역사를 대륙에서 삭제시키려는 명나라의 의도에 의하여 지원되고 창작되었다고 본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막상 그런 역사말살을 당한 우리는 <25사>의 내용을 숨기면서까지 <삼국지연의>를 위대한 소설이라고 극구 칭찬하고 있다는 것이다. 참으로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구리(九黎)시대 치우천자의 상징이란 동두철액(銅頭鐵額)이 있다. 치우천자는 철가면과 갑옷을 입고 수많은 전쟁에서 모두 승리해 황제헌원의 무릎을 꿇린다. 치우천자에게 엄청 시달린 한족 입장에서는 그것이 나쁜 의미겠지만 우리 입장에서는 치우천자의 상징으로 좋은 의미로 봐야 한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현재 철면피를 나쁜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우리 스스로 철면피의 진정한 본뜻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전설의 고향’의 단골 메뉴인 구미호도 마찬가지 경우이다. 구미호는 구리(九黎)시대 우리 민족을 상징하는 단어였으나, 지금은 나쁜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게다가 우리는 까마귀를 흉측하고 불길한 새로 알고 있다. 그런데 삼족오(三足烏)는 바로 우리의 상징이었다. 이런 것들을 보면 참으로 안타깝다 하겠다.
이 모든 것은 일제강점기 때 일제가 그렇게 만들어 놓은 것이다. 문제는 해방 6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우리는 그런 사실을 전혀 모르고 철면피/구미호/까마귀를 그저 나쁜 의미로만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우리 민족의 혼을 파괴한 일제의 추종자인 매국식민사학계가 이러한 것을 바로잡지 않았기 때문이다.
▲ 일제와 중국에 의해 나쁜 의미로 해석된 구미호와 까마귀. 우리는 오히려 까치가 길조인 것으로 알고 있다.
서화 동쪽은 예부터 동이의 강역
<삼국지연의>는 동이 5국(고구려.백제.신라.가야.왜)이 서화/항성의 동쪽에 있을 때 그 서쪽에 있었던 위.오.촉 삼국을 토대로 하여 만든 역사소설인데, 그것을 마치 대륙 전체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볼 수 있게 써졌다는 것이다. 참고로 기자가 살던 땅인 서화는 하화족(夏華族)과 동이족인 고조선의 경계로 봐야 한다. 즉 서화 동쪽은 대대로 우리의 강역이었던 것이다.
광개토대왕비문도 서화/항성에서 반도까지를 우리 민족의 영역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삼국지연의>에 마취된 애독자들은 서화/항성 동쪽의 우리 역사를 전혀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구리--> 고조선--> 열국시대를 이어온 서화/항성 동쪽의 동이 기록을 구분하고, 아울러 <삼국지연의>와 <삼국지>도 역사소설과 역사서의 경계를 분명히 하여 소설을 통해서 역사를 오도하는 일이 앞으로 없어야 할 것이다.
중국 25사의 동이전과 삼국유사/삼국사기/광개토대왕비 등에서 서화에서 반도까지는 우리 민족의 영역이었고, 역사기록도 구리시대에서 9세기까지로 되어 있다. <수호전>의 중심이 되어 있는 양산박 주위는 우리 민족의 중심부 중의 하나였다. 양산박 주위인 동평군 수장현에는 구리시대 치우천자의 능이 있으며, 백제 의자왕의 지명인 황산/동명/대산/백마하가 있다.
▲ 배달국 시절부터 서화 이동은 대대로 동이족의 강역이었다. 춘추전국시대의 연, 제, 노는 대륙 동부로 옮겨진다.
669년과 672년 당나라에 자석과 침을 보낸 신라의 석성/항성도 양산박의 서쪽에 있다. 우리가 중국의 발명품으로 알고 있는 나침반(羅針盤)도 실상은 신라에서 만든 신라침반(新羅針盤)이 그 유래가 된다. 기자 때부터 양잠을 시작했는데 삼국시대에 발달한 신라금(新羅錦: SILK = SILLA KEUM의 약자)의 생산지 저(雎, 양읍)도 양산박의 서쪽에 있다. 최치원이 태수로 있었던 태산(太山)은 양산박의 동쪽에 있다.
<열국지> 또한 서화의 서쪽 장안중심의 한족과 동쪽인 동이의 역사를 바르게 정립하지 않은 소설이다. 이 또한 서화 동쪽의 동이 역사가 배제된 상태에서 만들어진 소설이라 할 수 있다. 나중에 춘추전국시대의 연(燕),제(濟),노(魯)나라의 위치는 원래 장안 근처였는데 대륙 동부로 이전하게 된다.
위.오.촉 삼국은 대륙의 서쪽에서 싸웠다. 위의 수도는 후한의 수도였던 하남성 낙양 근처의 허창이며, 촉의 수도는 사천성 성도이며, 오의 수도는 건업이다. 중국에서는 건업을 양자강 하구로 말하고 있으나, 건업은 적벽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으로 본다. 위.오.촉 삼국이 모여 최대의 전쟁을 치른 적벽은 호남성에 있으며 양자강 중류이다. 또 삼국을 통일한 서진의 수도도 낙양이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 중국에서 <삼국지연의>를 토대로 만든 위.오.촉 삼국의 지도. 역사를 왜곡해 대륙 동쪽에 있었던 동이의 역사를 밀어내 버렸다.
적벽에 있는 양자강 중류의 강폭은 서울에 있는 한강의 폭과 비슷해 보인다. 이런 곳에서 삼국의 100만 대군이 전쟁을 벌였다는 것은 소설이 아니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인 것이다. 왜 그들의 도읍이 대륙의 서쪽이며, 양자강 중류인 적벽에서 전쟁을 치렀는지를 잘 생각해 보면 그 해답이 저절로 나온다.
그리고 만일 <삼국지연의>처럼 대륙 전체가 자기네 무대였다면 삼국의 도읍을 하남성 낙양과 같은 서쪽에 정할 이유가 전혀 없다. 더 동쪽으로 내려와 물자가 풍부한 동부평야지대에 도읍을 정해야 하는 것이 올바른 이치 아니겠는가? 고대 중국의 수도 위치만 놓고 보더라도 당시 한족의 영역이 어떠했는지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왜 한족은 낙양에서 동진(東進)하지 못했을까? 참고로 하남성 낙양은 서쪽 산악 지대에서 평야지대로 나오는 길목에 있고, 전통적으로 한족의 수도인 서안은 낙양의 서쪽 산악지대 안에 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새겨볼 일이다. 그 이유는 당시 대륙의 동쪽 즉 양자강/황하 하류의 평야지대에는 강력한 우리의 삼국인 고구려.백제.신라가 자리를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백제는 당시 초고왕과 구수왕이 통치하던 시절로 국세가 강했을 때이고, 고구려는 요동의 서안평을 습격하여 깨트렸다가, 한 때 위나라 관구검에게 고구려의 수도가 함락당하고 동천왕이 도망가는 수모도 겪기도 했지만, 대체로 위.오.촉에 대해 대등하거나 우월한 지위였던 것으로 보인다. 백제의 기록은 없어 구체적인 것은 잘 모르겠고, 남당 박창화선생의 유고집인 <고구려사 초.략>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
“11대 동양대제(동천왕) 7년(233년) 9월 손권이 사신을 보내어 “바치려 했던 금보전대를 공손연에게 빼앗겼으니 죽을 죄를 면할 길 없다”고 하였다. 이에 제(帝)는 멀리에서 왔음을 보아 흡족해 하며 술과 음식을 내려 주었고, 손권에게는 초피와 갈계피 등을 내려주면서 “공손연은 사람됨이 뒤집기를 잘 하여 믿을 자 못된다.”고 일렀다. 나중에 들으니 공손연이 손권의 사신을 죽여 그 목을 위나라로 보냈다.(이하생략)” (삼국사기에는 고구려가 손권의 사신을 죽여 그 목을 위로 보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8년(234년) 4월 조예(조조의 손자)가 사신을 보내어 병서.보검.옥침대 등을 바치며 함께 공손연을 멸하고 오(吳)를 토벌하기를 청하였다.”
“10년(236년) 2월에 오나라 손권의 사신이 찾아와 배알하며 화친을 청하였는데 그 언사가 심히 방자하고 그 예물 또한 야박하여 사신을 옥에 가두었다.”는 기록이 있다. 외국의 사신을 함부로 옥에 가둘 수 있는 고구려의 위상을 어찌 보아야 하겠는가?
“12년(238년) 위나라의 사마의가 사신을 보내와서는 함께 공손연을 멸하자고 청하여 5천 군사를 보내 8월에 공손연을 멸했는데, 8월에 사마의가 약속을 저버리고 교만 방자해져 임금이 노하여 교통을 끊었다.”는 기록이 있다. 위나라의 최고실권자에게 절교를 선언할 수 있는 고구려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16년(242년) 5월 임금이 직접 10만 군사를 이끌고 서안평(西安平)을 쳐 빼앗았다. 이것이 안평대전(安平大戰)이다.”는 기록이 있다. 즉 서안평은 위와 고구려가 서로 뺏고 빼앗기는 요충지였다. 그럼 서안평이 어디인지를 살펴보면 당시 위나라와 고구려의 국경지대가 어디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 중국 25사와 우리 사서에 자주 등장하는 서안평의 위치는 하북성 석문(석가장) 밑에 있다.
“18년 위 관구검이 현토에 침입하여 노략질하기에 임금이 보병과 기병 2만을 이끌고 나가 크게 이기고 3천여 수급을 베었고 이를 비수대전이라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물론 19년(245년)에는 위나라 관구검에게 도성이 함락당하는 수모를 당하지만 여하튼 당시 고구려는 위.오.촉 삼국을 통일한 위나라와 이런 식으로 대등하게 대치한다.
이러한 동이 3국의 역사를 지우려고 각색된 것이 바로 나관중의 과대망상소설인 <삼국지연의>인 것이다. 그런데 이상스럽게도 한국 사람들은 이 소설에 찬사를 보내고 있다. 그 이유는 우리의 역사 교육이 근본적으로 잘못되어 있기 때문이다. 지금부터라도 역사의 진실을 바로 배워 일제의 식민사관을 과감히 떨쳐내고 새롭게 이 나라의 대륙역사를 세워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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