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 사
통일한국 칼럼11. 삼국사기 “최치원전”의 비밀 (대문장가 최치원이 전하는 위대한 우리역사의 비밀)
사랑을 하거나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들면
누구나 시인이 된다고들 한다.
시인이 아니라 하더라도
낙엽이 지고 찬바람이 불면
학창시절에 배웠을 법한
시 한 수 읊조리게 되는 것이 인생살이인가보다.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들은
시를 잘 짓지 못한 다해도
곧잘 계절과 인생에 대하여
노래를 부르고 싶은 충동이 이는 것도 이때 쯤 일 것이다.
매년 12월 10일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수여하는 노벨문학상의 후보로 거명되었던
우리나라의 저명한 시인 고은 선생이
또 고배를 마셨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듣고서
누가 들어도 아름답고 함축적이며
감칠 맛 나고 정제된 언어인 한글로 쓰인 시가
외국어로 번역이 제대로 되지 않아
많이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 아니겠느냐는
지상의 분석 기사를 보면
더욱 씁쓸하고 뭔가 개운하지 않은 것은 비단 필자뿐일까?
중국정부 차원에서 처음으로 허가한 외국인 기념관 : '최치원 기념관'
만약 고대에도
노벨문학상과 같은 것이 있었다면
9세기 신라 최고의 문장가이고
사상가이며 대학자였던 최치원은
단연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손꼽히지 않았었을까?
신라뿐만이 아니라
당나라에서도 학문과 관리생활을 하였고 글을 썼던 최치원이었기에
요즈음 말로 한다면
국제적인 감각과 지식을 겸비하고 있었으며
최치원의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이란 글을 읽고
반란을 일으켰던 황소(黃巢)가
침상에서 굴러 떨어졌다고 하는 이야기가 전해져 올 정도로
최치원의 문장이 심원하며 대단하였었음을 알 수 있다.
학창시절의 교과서에
최치원이 쓴 시가 많이 실려 있었던 바
문학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독자들이라도
이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으로 추측된다.
최치원이 당나라 유학 시절에
쓴 것(신라로 귀국 후 썼다는 설도 있음)으로 추정되는
‘추야우중(秋夜雨中)’이라는 시는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고 있는데 다음과 같다.
秋風唯苦吟(추풍유고음) 가을바람만이 쓸쓸히 울어대고
世路少知音(세로소지음) 세상에는 내 마음 아는 이 적구나
窓外三更雨(창외삼경우) 창밖엔 밤늦도록 비는 내리고
燈前萬里心(등전만리심) 등잔 앞의 내 마음은 만 리 밖에 있구나.
이 시는 비 내리는 가을밤에
자신을 알아주는 지기(知己)가 없음을
가을바람과 비와 등잔을 통하여
자신의 외로운 심경을 토로한 오언절구의 시이다.
최치원이
당대의 최고 수준의 문장가였다는 것은
당서(唐書) 권60 예문지 제50에
최치원의 사륙집 1권과
계원필경(桂苑筆耕) 20권이 있었다는 기록을 통해서도 알 수 있으며
최치원이 당나라에서의 유학과 관리생활로 인해
그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어
최근 강소성 양주(揚州)에
‘최치원 기념관’이 문을 열고
한.중 문화와 관광의 교류 확대를 꾀하고 있다고 한다.
강소성 양주는
과거 MBC 사극인 ‘해신’에서
해상왕 장보고가 노예의 신분이 되어 끌려간 곳으로
일반 국민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으며
양자강 유역에 위치한
국제적 무역의 요충지로 명성을 떨쳤던 곳이기도 하다.
지난 10월 15일
양주시는 2001년 10월 최치원 선생이 관료생활을 했던 ‘당성유지(唐城遺址)’에
100평 규모의 ‘최치원 사료 진열관’을 마련한 뒤
2003년 8월 최치원 선생 귀국 1120주년 기념행사에서
한.중 문화교류 촉진을 위해 ‘최치원 기념관’을 건립키로 결정,
지난해 10월 15일 건립 기공식을 가진데 이어
1년 만인 이날 1천132㎡ 규모의 기념당 건립을 마무리하고 낙성식이 거행되었다 한다.
‘최치원 기념관’은
중국 중앙정부 차원에서
처음으로 허가한 외국인 기념관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깊긴 하지만
국내에 변변한 기념관 하나 없는 것과는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다.
아무튼 ‘최치원 기념관’의 개관과 함께
우리 고대사에 대한 관심과 정확한 이해를 이루었으면 하는 것이 필자의 바램이다.
<강소성 양주에 건립된 '최치원 기념관'의 아름다운 모습>
전성기 때 고구려. 백제가 백만군사를 보유했다는 기록
최치원과 관련하여
그 궤적과 사료를 찾다보면
우리의 눈을 확 잡아끄는 대목이
김부식의 삼국사기 최치원 열전이다.
과거 많은 사람들이
삼국사기 최치원전을 애써 외면하는 이유가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 대목 때문이다.
삼국사기 최치원 열전에는
앞서 이야기한 당나라에 유학을 가는 과정과
당나라에서 관료로서의 행적 등을 기술하고 있으며
신라로 귀국한 후의 일들을 기술하고 있다.
김부식은 최치원이 썼다는 문집에
태사 시중에게 올리는 장계(狀啓)를 소개하는 내용이
문제의 그 대목이다.
그 일부를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고구려와 백제는 전성 시에
강한 군사가 백만이어서
남으로는 오(吳), 월(越)의 나라를 침입하였고,
북으로는 유주(幽州)와 연(燕)과 제(齊), 노(魯)나라를 휘어잡아
중국의 커다란 위협이 되었습니다.
(高麗百濟 全盛之時 强兵百萬 南侵吳.越 北撓幽燕.齊.魯 爲中國巨蠡)”라고 되어 있어
기존의 한반도 역사인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는
충격적인 내용이 아닐 수 없다.
만주와 한반도 북부에 있어야 할 고구려가
또한 경기도와 충청도 전라도 지역에 있어야 할 백제가
지금의 중국의 북경 유역에서부터
양자강 유역까지 중국 동해안 대부분의 지역을
강한 군사 백만을 보유하고 흔들고 있어
중국의 커다란 위협이 된다니
말이 될 법한 이야기인가?
유주와 연 지역은
현 중국의 하북성과 산서성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이며
제나라와 노나라의 지역은
현 중국의 산동성과 하남성 일부를 포함하고 있는 지역이며
오나라와 월나라 지역은
양자강을 중심으로 하여 현 강소성과 현 절강성 지역을 말하는 것이니
어찌 충격적인 내용이 아니라 할 수 있겠는가?
다른 사람도 아닌
신라 최대의 석학이고 사상가이며 명문장가이며
고구려와 백제가 망한 뒤
불과 200년이 지난 뒤에 살았던 최치원의 말이다 보니
충격은 더 할 수밖에 없으며
우리가 기존에 배워왔었던 우리 역사가
뭔가 잘못되어 있었다는 것을 느낄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5 ~ 7세기 중반 약 250년은 고구려.백제의 전성기
그렇다면 고구려와 백제의 전성 시기는 언제였었을까?
그 동안에
필자가 쓴 칼럼을 계속하여 주의 깊게 읽어 본 독자라면
아마도 눈치 챘을 것이다.
고구려는
광개토태왕의 등극과 함께 주변 국가들을 정복하였으며
백제는
동성대왕 시절에
북위의 수십만의 기병을 일거에 몰살시키고
일곱 명의 태수를 위에서 말한 지역에
임명을 하였다는 칼럼의 내용을 상기한다면
이들 국가의 전성 시기를 미루어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때 당시의 중국은
위.촉.오의 삼국시대를 통일했다는 진(晉)나라가 망하고
여러 나라로 갈린 남북조 시대이다.
따라서 고구려 백제의 전성기는
진나라가 망한
5세기 무렵부터 고구려 백제가 멸망을 하기 전의
7세기 중반까지의 약 250여 년이다.
위의 삼국사기 최치원 열전에
기술된 내용이 한반도를 벗어날 수 없을 것이라는
과거에 배웠었던 역사의 인식하고 다르다 해서 위의 내용을 부정할 수만은 없다.
위에서
‘최치원 기념관’이 세워졌다는 강소성 양주인근 유역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또 다른 우리의 역사 유적지가 많이 있다.
양주의 8대 고찰중의 하나인
고민사(高旻寺)라는 절이 있는데
국가 중점 보호 사찰이다.
이 절의 창건과정을 기술한 것을 보면
수나라 때에 처음 건축이 되었었는데
원래 이곳에
의술(醫術)에 정통한 승려의 사당이 있었으며
고구려의 태자의 병을 치유하기 위하여
고구려의 왕이 금과 은 등 재물을 기증해
사원을 확장하여 세웠다하며
절을 건립할 때에는
고구려의 높을 고(高)자을 취하여
고민사(高旻寺)라 이름을 지었었다고 한다.
수나라 때에 건립이 된 것이었다면
고구려는 영양왕이 통치하던 시절에
해당이 되었을 것이고
이때는 고구려와 수나라가 국운을 건 전쟁을
여러 차례에 걸쳐 하고 있었을 시기인데
기존의 역사인식대로라면
아무리 고구려태자의 병을 치유하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적국의 깊숙한 곳에 절을 세워야 할 이유가 있었겠는가?
또한 양주에서 가까운 곳에
단양(丹陽)이라는 곳이 있다.
이곳에는 곡아미주(曲阿美酒)라 불리는
봉항주(封缸酒)와 노황주(老黃酒)가 있는데
이 술들은 고구려 미인 아희와
수양제와 얽힌 전설에서 비롯되었다 하며,
강소성 금호(金湖)라는 지역에는
고려왕성(高黎王城)이 있었다고 한다.
이 이외에도 강소성 지역에는
연개소문에 쫓겨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당태종이 세웠다는 몽롱탑 등
연개소문과 관련된 수많은 유적지가 널려 있다고 함은
과연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고구려왕이 세웠다는 강소성 양주의 고민사와 천중탑의 모습>
위대한 문장가 최치원이 전하는 우리 역사의 진실
많은 사람들이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를
사대주의적 사관에서 비롯된
사서라고들 말하고 있지만
최치원 열전 같은 기록은
삼국사기외에 그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다.
신.구당서에는
고구려의 후예인 이정기(李正己) 장군이
평.로.치.청(지금의 하북성 일부와 산동성 그리고 하남성 일부) 지역에
저들은 절도사라 하고 있지만
제(齊)나라를 세워
이납(李納), 이사고(李師古), 이사도(李師道)의 4대에 걸쳐
50여 년간 통치한 사실은
남북조 시대에
한족(漢族)의 나라들이
불과 3, 4십년 정도 밖에 존속하지 않았음에도
사서에서
자기들이 중원의 주인처럼 행세를 하고
우리를 한낱 보잘 것 없는
변방으로 기술하고 있는 행태와 비교를 하면
우리의 위세가 얼마나 대단하였었던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며
삼국사기 최치원 열전의
진실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당서에
최치원이 열전에 포함되지 않았던 이유를
고려 말의 학자인 이규보 선생은
그의 저서 <동국이상국집>에서
중국인들이 최치원 선생의 글재주와 학식을 시기한 때문이라고 하고 있다.
역사인식이
사물을 보는 관점에 미치는 영향은 실로 지대하다.
보잘 것 없는 변방의 역사로만 여겼던 우리의 역사인식이
삼국사기의 최치원 열전을 통하여
얼마나 안위하고 좁았던가를 반성하게 하고 있다.
우리는
잃어버린 우리의 역사 강역만큼이나
우리가 갖고 있던 세계관과
철학 그리고
삶의 가치관을 잃어버린 것인 지도 모른다.
우리 역사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가다듬는 것이야말로
과거 우리의 조상들이
천하를 호령하고 살았었던 시대에
대한 속죄의 시작이 될 것이다.
최치원을
위대한 문장가 사상가로 간직하고 싶은
우리의 자랑스러운 조상으로 여기는 것처럼
그가 말하고 있는
역사의 진실도
우리가 밝히고 알려서
위대한 우리의 역사로 간직하여야 할 것이다.
(完)
글 수 7,723
통일한국 칼럼11. 삼국사기 “최치원전”의 비밀 (대문장가 최치원이 전하는 위대한 우리역사의 비밀)
사랑을 하거나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들면
누구나 시인이 된다고들 한다.
시인이 아니라 하더라도
낙엽이 지고 찬바람이 불면
학창시절에 배웠을 법한
시 한 수 읊조리게 되는 것이 인생살이인가보다.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들은
시를 잘 짓지 못한 다해도
곧잘 계절과 인생에 대하여
노래를 부르고 싶은 충동이 이는 것도 이때 쯤 일 것이다.
매년 12월 10일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수여하는 노벨문학상의 후보로 거명되었던
우리나라의 저명한 시인 고은 선생이
또 고배를 마셨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듣고서
누가 들어도 아름답고 함축적이며
감칠 맛 나고 정제된 언어인 한글로 쓰인 시가
외국어로 번역이 제대로 되지 않아
많이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 아니겠느냐는
지상의 분석 기사를 보면
더욱 씁쓸하고 뭔가 개운하지 않은 것은 비단 필자뿐일까?
중국정부 차원에서 처음으로 허가한 외국인 기념관 : '최치원 기념관'
만약 고대에도
노벨문학상과 같은 것이 있었다면
9세기 신라 최고의 문장가이고
사상가이며 대학자였던 최치원은
단연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손꼽히지 않았었을까?
신라뿐만이 아니라
당나라에서도 학문과 관리생활을 하였고 글을 썼던 최치원이었기에
요즈음 말로 한다면
국제적인 감각과 지식을 겸비하고 있었으며
최치원의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이란 글을 읽고
반란을 일으켰던 황소(黃巢)가
침상에서 굴러 떨어졌다고 하는 이야기가 전해져 올 정도로
최치원의 문장이 심원하며 대단하였었음을 알 수 있다.
학창시절의 교과서에
최치원이 쓴 시가 많이 실려 있었던 바
문학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독자들이라도
이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으로 추측된다.
최치원이 당나라 유학 시절에
쓴 것(신라로 귀국 후 썼다는 설도 있음)으로 추정되는
‘추야우중(秋夜雨中)’이라는 시는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고 있는데 다음과 같다.
秋風唯苦吟(추풍유고음) 가을바람만이 쓸쓸히 울어대고
世路少知音(세로소지음) 세상에는 내 마음 아는 이 적구나
窓外三更雨(창외삼경우) 창밖엔 밤늦도록 비는 내리고
燈前萬里心(등전만리심) 등잔 앞의 내 마음은 만 리 밖에 있구나.
이 시는 비 내리는 가을밤에
자신을 알아주는 지기(知己)가 없음을
가을바람과 비와 등잔을 통하여
자신의 외로운 심경을 토로한 오언절구의 시이다.
최치원이
당대의 최고 수준의 문장가였다는 것은
당서(唐書) 권60 예문지 제50에
최치원의 사륙집 1권과
계원필경(桂苑筆耕) 20권이 있었다는 기록을 통해서도 알 수 있으며
최치원이 당나라에서의 유학과 관리생활로 인해
그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어
최근 강소성 양주(揚州)에
‘최치원 기념관’이 문을 열고
한.중 문화와 관광의 교류 확대를 꾀하고 있다고 한다.
강소성 양주는
과거 MBC 사극인 ‘해신’에서
해상왕 장보고가 노예의 신분이 되어 끌려간 곳으로
일반 국민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으며
양자강 유역에 위치한
국제적 무역의 요충지로 명성을 떨쳤던 곳이기도 하다.
지난 10월 15일
양주시는 2001년 10월 최치원 선생이 관료생활을 했던 ‘당성유지(唐城遺址)’에
100평 규모의 ‘최치원 사료 진열관’을 마련한 뒤
2003년 8월 최치원 선생 귀국 1120주년 기념행사에서
한.중 문화교류 촉진을 위해 ‘최치원 기념관’을 건립키로 결정,
지난해 10월 15일 건립 기공식을 가진데 이어
1년 만인 이날 1천132㎡ 규모의 기념당 건립을 마무리하고 낙성식이 거행되었다 한다.
‘최치원 기념관’은
중국 중앙정부 차원에서
처음으로 허가한 외국인 기념관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깊긴 하지만
국내에 변변한 기념관 하나 없는 것과는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다.
아무튼 ‘최치원 기념관’의 개관과 함께
우리 고대사에 대한 관심과 정확한 이해를 이루었으면 하는 것이 필자의 바램이다.
<강소성 양주에 건립된 '최치원 기념관'의 아름다운 모습>
전성기 때 고구려. 백제가 백만군사를 보유했다는 기록
최치원과 관련하여
그 궤적과 사료를 찾다보면
우리의 눈을 확 잡아끄는 대목이
김부식의 삼국사기 최치원 열전이다.
과거 많은 사람들이
삼국사기 최치원전을 애써 외면하는 이유가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 대목 때문이다.
삼국사기 최치원 열전에는
앞서 이야기한 당나라에 유학을 가는 과정과
당나라에서 관료로서의 행적 등을 기술하고 있으며
신라로 귀국한 후의 일들을 기술하고 있다.
김부식은 최치원이 썼다는 문집에
태사 시중에게 올리는 장계(狀啓)를 소개하는 내용이
문제의 그 대목이다.
그 일부를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고구려와 백제는 전성 시에
강한 군사가 백만이어서
남으로는 오(吳), 월(越)의 나라를 침입하였고,
북으로는 유주(幽州)와 연(燕)과 제(齊), 노(魯)나라를 휘어잡아
중국의 커다란 위협이 되었습니다.
(高麗百濟 全盛之時 强兵百萬 南侵吳.越 北撓幽燕.齊.魯 爲中國巨蠡)”라고 되어 있어
기존의 한반도 역사인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는
충격적인 내용이 아닐 수 없다.
만주와 한반도 북부에 있어야 할 고구려가
또한 경기도와 충청도 전라도 지역에 있어야 할 백제가
지금의 중국의 북경 유역에서부터
양자강 유역까지 중국 동해안 대부분의 지역을
강한 군사 백만을 보유하고 흔들고 있어
중국의 커다란 위협이 된다니
말이 될 법한 이야기인가?
유주와 연 지역은
현 중국의 하북성과 산서성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이며
제나라와 노나라의 지역은
현 중국의 산동성과 하남성 일부를 포함하고 있는 지역이며
오나라와 월나라 지역은
양자강을 중심으로 하여 현 강소성과 현 절강성 지역을 말하는 것이니
어찌 충격적인 내용이 아니라 할 수 있겠는가?
다른 사람도 아닌
신라 최대의 석학이고 사상가이며 명문장가이며
고구려와 백제가 망한 뒤
불과 200년이 지난 뒤에 살았던 최치원의 말이다 보니
충격은 더 할 수밖에 없으며
우리가 기존에 배워왔었던 우리 역사가
뭔가 잘못되어 있었다는 것을 느낄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5 ~ 7세기 중반 약 250년은 고구려.백제의 전성기
그렇다면 고구려와 백제의 전성 시기는 언제였었을까?
그 동안에
필자가 쓴 칼럼을 계속하여 주의 깊게 읽어 본 독자라면
아마도 눈치 챘을 것이다.
고구려는
광개토태왕의 등극과 함께 주변 국가들을 정복하였으며
백제는
동성대왕 시절에
북위의 수십만의 기병을 일거에 몰살시키고
일곱 명의 태수를 위에서 말한 지역에
임명을 하였다는 칼럼의 내용을 상기한다면
이들 국가의 전성 시기를 미루어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때 당시의 중국은
위.촉.오의 삼국시대를 통일했다는 진(晉)나라가 망하고
여러 나라로 갈린 남북조 시대이다.
따라서 고구려 백제의 전성기는
진나라가 망한
5세기 무렵부터 고구려 백제가 멸망을 하기 전의
7세기 중반까지의 약 250여 년이다.
위의 삼국사기 최치원 열전에
기술된 내용이 한반도를 벗어날 수 없을 것이라는
과거에 배웠었던 역사의 인식하고 다르다 해서 위의 내용을 부정할 수만은 없다.
위에서
‘최치원 기념관’이 세워졌다는 강소성 양주인근 유역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또 다른 우리의 역사 유적지가 많이 있다.
양주의 8대 고찰중의 하나인
고민사(高旻寺)라는 절이 있는데
국가 중점 보호 사찰이다.
이 절의 창건과정을 기술한 것을 보면
수나라 때에 처음 건축이 되었었는데
원래 이곳에
의술(醫術)에 정통한 승려의 사당이 있었으며
고구려의 태자의 병을 치유하기 위하여
고구려의 왕이 금과 은 등 재물을 기증해
사원을 확장하여 세웠다하며
절을 건립할 때에는
고구려의 높을 고(高)자을 취하여
고민사(高旻寺)라 이름을 지었었다고 한다.
수나라 때에 건립이 된 것이었다면
고구려는 영양왕이 통치하던 시절에
해당이 되었을 것이고
이때는 고구려와 수나라가 국운을 건 전쟁을
여러 차례에 걸쳐 하고 있었을 시기인데
기존의 역사인식대로라면
아무리 고구려태자의 병을 치유하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적국의 깊숙한 곳에 절을 세워야 할 이유가 있었겠는가?
또한 양주에서 가까운 곳에
단양(丹陽)이라는 곳이 있다.
이곳에는 곡아미주(曲阿美酒)라 불리는
봉항주(封缸酒)와 노황주(老黃酒)가 있는데
이 술들은 고구려 미인 아희와
수양제와 얽힌 전설에서 비롯되었다 하며,
강소성 금호(金湖)라는 지역에는
고려왕성(高黎王城)이 있었다고 한다.
이 이외에도 강소성 지역에는
연개소문에 쫓겨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당태종이 세웠다는 몽롱탑 등
연개소문과 관련된 수많은 유적지가 널려 있다고 함은
과연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고구려왕이 세웠다는 강소성 양주의 고민사와 천중탑의 모습>
위대한 문장가 최치원이 전하는 우리 역사의 진실
많은 사람들이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를
사대주의적 사관에서 비롯된
사서라고들 말하고 있지만
최치원 열전 같은 기록은
삼국사기외에 그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다.
신.구당서에는
고구려의 후예인 이정기(李正己) 장군이
평.로.치.청(지금의 하북성 일부와 산동성 그리고 하남성 일부) 지역에
저들은 절도사라 하고 있지만
제(齊)나라를 세워
이납(李納), 이사고(李師古), 이사도(李師道)의 4대에 걸쳐
50여 년간 통치한 사실은
남북조 시대에
한족(漢族)의 나라들이
불과 3, 4십년 정도 밖에 존속하지 않았음에도
사서에서
자기들이 중원의 주인처럼 행세를 하고
우리를 한낱 보잘 것 없는
변방으로 기술하고 있는 행태와 비교를 하면
우리의 위세가 얼마나 대단하였었던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며
삼국사기 최치원 열전의
진실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당서에
최치원이 열전에 포함되지 않았던 이유를
고려 말의 학자인 이규보 선생은
그의 저서 <동국이상국집>에서
중국인들이 최치원 선생의 글재주와 학식을 시기한 때문이라고 하고 있다.
역사인식이
사물을 보는 관점에 미치는 영향은 실로 지대하다.
보잘 것 없는 변방의 역사로만 여겼던 우리의 역사인식이
삼국사기의 최치원 열전을 통하여
얼마나 안위하고 좁았던가를 반성하게 하고 있다.
우리는
잃어버린 우리의 역사 강역만큼이나
우리가 갖고 있던 세계관과
철학 그리고
삶의 가치관을 잃어버린 것인 지도 모른다.
우리 역사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가다듬는 것이야말로
과거 우리의 조상들이
천하를 호령하고 살았었던 시대에
대한 속죄의 시작이 될 것이다.
최치원을
위대한 문장가 사상가로 간직하고 싶은
우리의 자랑스러운 조상으로 여기는 것처럼
그가 말하고 있는
역사의 진실도
우리가 밝히고 알려서
위대한 우리의 역사로 간직하여야 할 것이다.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