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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고대사를 새로 쓰는 사람들의 주장  



한국고대사를 새로 쓰는 사람들의 주장

한민족의 고대사의 범위는 [12환국]영토였던 유라시아 대륙 전역이다
  
문화부  
  
고대 우리 민족사에 대한 관심이 날로 증폭되어 가고 있다.

그것은 중국의 동북공정과 함께 일본이 조선침략 후 역사적인 열등감을 감추기 위해 36년간 반도사관으로 치밀하게 조작왜곡했으며, 수 많은 고서들과 유물들을 일본으로 반출해 갔기 때문이다.

또한 소수 민족들로 구성된 중국 또한 중국의 통합차원에서 서북.서남.동북공정이라는 정부차원의 역사왜곡과 조작작업를 정치적인 차원에서 진행해 왔기 때문이다.

또한 정치경제군사적인 침략과 독점을 목적으로 하는 제국주의적 차원에서 역사를 왜곡하고 조작하는 행위는 인류적인 범죄행위로써 인류양심과 민족정기차원에서 좌시할 수 없는 문제로 적극 대응해야 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러 분야에서 종사하면서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우리 역사찾기 차원에서 우리 민족사에 대한 새로운 견해를 제시하고 있는데, 대표적인 사례들을 제시한다.



고대12환국의 위치를 기록하고 있는 고대 중국의 지도-상세보기는 지도클릭

지금까지 식민사관에 주입세뇌되어온 사람들이 들으면 당혹스런 역사해석들을 들어 보자.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과 가야는 중국에 있었다.

왜(倭)는 본래 대만에 있다가 열도로 자리를 옮겨 일본이 됐다. 이성계(李成桂)의 부모는 여진인으로 출생지 함주는 함흥이 아니고 허난성(河南省) 통허현이다.

이성계는 중국에서 배를 타고 1427년 황해도 해주로 들어와 한반도에 조선왕조를 세웠다.

이는 재야사학자 이중재(66, 한국 상고사학회장)씨의 주장이다.

그렇다면 그 이전 한반도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다시 그의 말, "그때 한반도는 국가 체제도, 지방행정도 없는 황무지, 즉 평민들이 살던 구석 땅이었다.

중국에 남은 고려는 명나라 주원장(朱元璋)에 의해 멸망했다."

박용숙(62, 동덕여대 회화과) 교수의 가설을 대하면 더 숨이 가쁘다.

한민족은 고대 메소포타미아 역사를 개막한 수메르족이다.

그들은 1천8백년간 환인 시대를 유지하다 기원전 2333년 침공해온 아카드의 사르곤과 결합한다.

사르곤은 수메르의 여신과 결혼해 단군을 낳았고, 그 후손은 제국의 최고 지배계층이 된다. 이 사르곤이 곧 한웅(桓雄)이며 중국역사의 황제(皇帝)와 동일 인물이다.

한민족의 일부는 서쪽으로 가 미케네 문명을 일으키고 원래 땅에 남은 사르곤의 연합제국은 고조선과 부여(페르시아 제국)로 이어져 기원전 7세기까지 계속된다.

이후 부여 태자 고열가가 지금의 이란땅 하그마다나에 북부여(메디아 제국)를 세우고 자칭 천제 해모수(解慕漱)가 중앙아시아 타슈켄트에 동부여(일명 부여별종)을 세운다.

동부여에서 고구려가 나타나며 여기서 다시 백제, 신라로 이어진다. 박교수의 말대로라도 한반도는 역시 공백이다.

잠시 호흡을 가다듬자. 이들의 역사확장은 끝이 없어 보인다.

이중재씨와 비슷한 역사관을 펴고 있는 재야사학자 정용석(44)씨를 통해 새로운 역사해석의 의미를 들을 필요가 있어 보인다.

"후세들이 자존심 충만한 후예로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 확장정신 또는 광역정신이 필요하다. 누구라도 지금의 정사(正)에 부정(反)의 역사 논리를 들이댐으로써 나중 함(合)의 새로운 역사관을 세워야 하지 않는가."

간혹 이런 파괴론을 '세기말'과 연관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재야 또는 비주류 사학들의 입장은 다르다. '바로잡아 달라'는 역사의 '소리없는 아우성'을 지우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史實)도 그렇다. 역사해석의 열망은 사실적 총체로서의 역사와 역사서(歷史書)로서의 역사 사이에서 진동하게 마련이다.  

게다가 어느 시대건 위서(僞書)파문이 있어 역사를 제대로 읽기가 난망하다.

내친 김에 더 달리자. 역사의 '지평 넓히기'가 뭐 나쁘랴.

박용숙 교수는 한민족의 강역을 지금의 이라크, 터키, 시리아, 레바논 등이 자리잡고 있는 서남아시아 지역으로 확장한다.

고구려는 서남아시아 일대를 장악한 리디아, 페르시아 제국, 백제는 이란 동부의 파르티아 왕국, 신라는 파키스탄 인근 박트리아 왕국이었다. 가야는 인더스강 하류에 자리잡았다.

이중재, 정용석씨의 경우 서로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우리 역사를 시간적으로는 1만년 이상, 공간적으로는 중국대륙 전체와 서역, 몽골, 바이칼호 지역과 동남아시아까지 옮긴다.

문헌 대조와 해석을 통한 한국, 중국 지명의 1대 1 대응은 꽤나 현란하다. 예컨대 이중재씨 주장대로라면 신라의 경주는 중국 간쑤(甘肅)성 경양현이며 백제의 공주는 허난성 웅진이다.

박혁거세(朴赫居世)와 김유신(金庾信) 묘는 장쑤(江蘇)성 오현에 있다. 의주는 허난성 급현이며 압록강은 여기에 흐르고 있다.

현직 국사교사 이희옥(李熙玉, 60, 서울 중앙중학교)씨의 입장은 좀 다르다.

두번의 역사날조로 한민족의 무대가 위축됐다는 것이다.

"그 하나는 삼국사기를 편찬(1145년)했던 김부식(金富軾)이 고의로 B.C. 3000년이던 고구려의 건국연대를 B.C. 33년, 기원전 2~3세기에 세워진 백제를 B.C. 18년에 건국했다고 기록한 것이다. 6세기 이후 국가모습을 갖춘 신라가 뒤늦게 중심에 위치하기 위해선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가 말하는 또 한번의 결정적인 역사왜곡은 8~10세기에 걸쳐 일본에서 진행된 것이다.

당시 일본에서는 멸망한 가야, 백제, 고구려계 영주, 호족들이 대대적인 '역사만들기' 작업에 나섰다. 그들의 손에 의해 없던 '일본'이 소설처럼 만들어졌다.

그리고 나서 백제의 사서(史書)를 모두 없앴다는 것이다.

재야사학자 정용석씨의 사례 한토막 - 그는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입수한 『고려도경(高麗圖經)』(중국 북송 휘종시대 徐兢 著)을 번역하면서 가벼운 흥분 상태다.

고려로 가는 북송의 사신이 지금의 한반도가 아니라 마카오 쪽으로 가는 까닭이다. 뿐만 아니라 고려를 발판으로 일본정벌에 나선 중국 원나라의 출병 근거지도 광시(廣西)성 합포로 그려져 있다.

역사는 말이 없고 오직 역사가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인가. 오랜 논란거리였다.

심지어 역사가가 갖춰야 할 제1의 덕목은 무지라는 야유도 있다. 그래야 사안을 단순화하고 선택, 생략할 수 있다는 의미다.

하지만 실증주의자들은 역사는 스스로 말을 한다는 논리를 폈다. 독일의 역사학자 랑케의 한마디로 글을 맺자. "그것이 진정 어떠했는가"(Wie es eigentlich gewesen). 정말 그것이 궁금하다.

한민족은 인류조상인 삼묘족의 후예> - 재야사학자 이중재씨

상고사학회 이중재 회장은 일본 메이지대 법과 2년 수료의 학력 소지자다. 51년 째 한문 서적을 독파하면서 한민족 역사를 연구해 왔다.

'한민족사' '상고사의 새 발견' '한민족 우주 철학사상' '새 고려사의 탄생' 등의 저서에 이어 최근 '고대조선과 일본의 역사'를 펴냈다.

그의 주장 한토막 - "한민족은 인류의 조상인 삼묘족 후예로 기원전 8936년에 반고환인이 처음으로 나라를 세웠다.

중국의 三皇五帝, 堯舜이 모두 우리 조상이며 주나라까지도 한민족의 나라다.

삼국은 주나라의 봉토국인 晋이 분열된 韓, 魏, 趙 세나라에서 비롯됐다."

일본에 대한 역사해석도 특이하다. 중국의 魏나라가 망한 후 흩어지면서 작은 위(魏)란 뜻으로 倭라고 불렸는데 신라와 백제에 흡수됐다는 것.

이들은 나중에 백제 유민과 손잡고 대만에서 나라를 세운 후 섬을 따라 이동해 지금의 일본땅으로 나라를 옮겼다.

<백제를 공격한 말갈은 로마군이었다> - 미술사 전공 대학교수 박용숙씨

동덕여대 회화과 박용숙교수는 고대 한민족의 신화와 그리스 신화의 유사점을 근거로 우리 고대 문명은 지중해 문명과 관련 깊다는 가설을 펴고 있다.

그는 이를 최근 펴낸 '지중해 문명과 단군조선 - 수메르 신화에서 알타이 신화까지'라는 책에 담았다. 박교수는 '삼국유사' 등에 기록된 '백제를 공격한 말갈군'을 파르티아를 공략한 로마군이라고 추정한다.

로마군의 공격에 밀려 고구려와 백제는 육로로, 신라와 가야는 해로로 한반도로 이동했다. 인근에 있던 중국도 이때 함께 옮겨와 역사를 현재의 중국땅에서 벌어진 것처럼 재구성했다.

<신라의 삼국통일은 바로 삼국의 멸망> - 국사교사 이희옥씨

중앙중학교 국사교사 이희옥씨에게는 학교가 좁다. 교과서는 '오류투성이'건만 학생들에게 자신의 역사시각을 일방적으로 일러주기 곤란한 탓이다. 혼란을 걱정하는 학부모들의 항의도 여간 신경쓰이는게 아니다.

그는 신라의 삼국통일이라는 말대신 삼국멸망이라는 표현을 즐겨 쓴다. 통일신라 역시 중국 당의 지배에 놓였기 때문이다.

고대 우리민족의 영토은 고구려와 부여가 만리장성 동북쪽 중국대북을 전부 차지했고 한반도는 마한, 진한, 변한이 나누어 다스리고 있었다.

이후 백제왕국은 마한지역을 재통일하며 등장했고 진한과 변한지역에 가야왕국이 세워졌다.

왜곡된 역사가 바로잡히지 않는 이유에 대해 그는 "역사교과서가 일제 식민사관을 근간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이교사의 독특한 역사관은 중국과 일본의 역사책에서 앞뒤가 맞지 않는 부분을 바로 잡는 과정에서 정립된 것이다.  


▲  [사진설명] 『삼국사기』 천문기록에 의한 삼국의 수도 비정도.

『삼국사기』에 나오는 천문기록을 근거로 삼국의 수도를 비정한 결과 삼국의 전반기에는 모두 중국 지역에 위치했다는 놀라운 결과가 나왔다.

박창범 교수는 비록 후대에 쓰인 것이지만 고려의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에 나온 천문기록을 근거로 삼국의 수도가 어디인가를 비정할 수 있는, 즉 관측자의 위치가 어디인지를 조사했다.

『삼국사기』, 『삼국유사』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시대에 일어난 일식이 67회, 혜성출현이 65회, 유성과 운석의 낙하가 42회, 행성의 이상 현상이 40회, 오로라 출현 12회로 총 226회의 천체현상이 기록되어 있다.

연구에 사용된 일식 기록은 서기전 54년에서 서기 201년까지의 초기신라 일식 16회, 787년 이후의 후기신라 일식 9회, 백제 전 기간의 일식 20회와 고구려의 일식 8회였다. 결론은 삼국이 서기 200년 이후에 수준 높은 천체관측을 했으며 기원전부터 천체관측은 삼국이 독자적으로 수행했다는 것이다.  



<고구려, 백제, 신라는 한반도에 없었다> - 재야사학자 정용석씨


정용석씨는 기상청에서 21년을 근무한 경력자다. 남들과는 달리 기상, 지리, 지질 등을 역사의 보조과학으로 이용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고구려, 백제, 신라는 한반도에 없었다.' '참과 거짓의 역사 1,2,3'에 이어 최근 '일본은 열도에 없었다'를 펴냈다.

'기후현상으로 본 삼국의 역사' '지각운동으로 고찰한 삼국역사' '광개토왕릉비에 대한 진실과 왜의 비밀' 등 특이한 논문도 있다.



재야.민족사학자들이 주장하고 중국대륙의 삼국과 왜


흥미있는 주장 하나 - "경주라는 이름 자체가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하면서 생긴 이름인데 지금의 경주시가 신라의 천년고도라니!

식민사관에 의해 억지로 만들어진 것이다.

토함산은 어디 있어야 하는가. 화산이 폭발한 산이면서 휴화산이니 자연이 함산(含山)인데 그것은 대륙의 양자강 북쪽 안휘성 남부 함산현에 있다."

<광개토태왕비는 중국이 옮겼고,일본이 비문을 조작했다>-역사 칼럼니스트 성헌씨


민족정론지 '플러스코리아'의 역사칼럼니스트인 성헌씨는 광개토태왕비는 중국에 의해 하북성에서 만주로 이전했고, 일제하에서 일본이 비문을 조작했다는 내용을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논리로 주장하고 있다.

그의 주장을 들어 보면 "우선 비를 옮긴 시기는 조선의 강계읍지가 교정 발행된 1872년부터 비가 최초 발견된 1876년 사이로 봐야 한다.

일제가 중국에 본격적으로 진출한 때가 1894년 청일전쟁 이후이므로,  일제가 주동해 이 비를 옮겼다고 볼 수는 없고 청나라가 비를 옮겼다고 본다. 그럼 청나라는 왜 이 비를 옮겼을까?



▲  동치제가 6살에 즉위하자 섭정은 주로 서태후가 했다.


비가 옮겨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1872~1876년 사이의 청나라는 동치제(1861~1875)와 광서제 초기시대였다. 태평천국의 난과 아편전쟁을 겪은 청나라는 이른바‘동치중흥’이라 불리는 자강(自强)의 기치를 내세운 ‘양무운동(洋務運動)’을 3기로 나누어 추진했다.

이 운동은 청일전쟁의 패배로 끝내게 되는데, 일면 성공한 듯했으나 보수 사상에서 탈피 못하고 제도개혁이 뒷받침되지 못해 소기의 성과를 올리지는 못하였다. 여하튼 당시 그러한 자각이 있어 국가의 문물을 재정비하게 되고 서구의 발달된 과학기술을 받아들이게  된다.

이 운동과정에서 분명‘중국 역사세우기’가  있었을 것이고 그 일환으로 호태왕비가 중국인에 의해 옮겨졌을 것으로 보인다."고 주장했다(내용보기).

<史料 비판없는 我田引水 해석 일본 황국사관과 뭐가 다르냐>

이와 같은 재야.민족사학자들의 주장에 대해 경희대 사학과 조인성 교수같은 사람은 '한국사 시민강좌' 제20집에서 '국수주의 사학과 현대의 한국사학'이라는 글을 통해 특히 고조선사를 둘러싼 일부 재야 사학자들의 입장을 비판했다.

민족주의를 내세워 고조선의 강역을 넓히고 건국연대를 수천년 당기는 것은 비학문적이라는게 그의 지적이다.

재야.민족사학자들이 제시하는 사료는 [환단고기(桓檀古記)]다.

그러나 일제 반도사관으로 역사를 왜곡하는데 앞장선 이병도의 후학들로 대한민국 국사학계를 지배해온 식민사관 학자들은 [한단고기]를 위서라며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이처럼  대한민국내에서의 역사논쟁 또한 본질적으로 진실과 거짓과의 싸움이며, 민족과 반민족이라는 전쟁이라는 의미가 된다.





[환단고기]한민족의 위대한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민족사 바로 찾기에 나선 재야.민족사학자들은 일본의 식민사관과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해 지나친 감정과 흥분을 배제하고 모두가 과학적이고 합리적으로 공감하고 인식할 수 있는 차원에서 객관적이고도 구체적이고 명확한 고대 문헌들의 비교분석 제시와 고고학적 유물유적, 유전학적 근거제시가 요구된다.

왜냐하면 역사란 자신의 국가와 민족을 위한 독점적이고 이기주의적인 인식론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드러나야 하는 진실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아무쪽록 개방적인 자세로 치열한 역사논쟁이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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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의 고대사의 범위는 [12환국]으로 대변되는 유라시아 대륙 전체이다

[자료]고대 중국 문헌이 증언하는 고대12환국

한국(桓國)과 한국의 12 연방국(聯邦國) 실체 ㅡ 위치 1편  



고대 중국[진서(晉書)-사이전(四夷傳)]에서 전한다.  

裨離國在肅愼西北  馬行可二百日  領戶二萬  養雲國去裨離馬行又五十日  領戶二萬
비리국재숙신서북  마행가이백일  령호이만  양운국거비리마행우오십일  령호이만

寇莫汗國去養雲國又百日行  領戶五萬餘  一群國去莫汗又百五十日  計去肅愼五萬餘裡
구막한국거양운국우백일행  령호오만여  일군국거막한우백오십일  계거숙신오만여리

해설:"비리국은 숙신의 서북쪽에 있는데 말을 타고 200일을 가며 가구의 수는 2만호이다.양운국은 비리국에서 또 말을 타고 50일을 가며 가구의 수는 2만호이다. 구막한국은 양운국에서 50일을 가며 가구의 수는 5만여호이다. 일군국은 구막한국에서 150일을 가야하는데 이를 계산해보면 숙신에서 5만여리를 가야하는 거리이다."  



고대12환국의 위치를 기록하고 있는 고대 쥐나의 지도-상세보기는 지도클릭


숙신(肅愼)은 파나류산(派奈留山) 아래 파나류국을 일컫는 말로 곧 한국(桓國)을 뜻하는 것이지만 한국(桓國)의 12연방국 중 본국(本國)을 의미한다. 즉 천해의 동쪽 땅에 하늘나라에서 내려오신 한인(桓因)께서 처음으로 세상을 여신 곳이다.

숙신의 원음(原音)은 조선(朝鮮)이라고도 전하는데, 진서(晉書)에 기록하기를 12연방국중 4곳의 나라 이름과 대략적인 위치와 거리를 기록하고 있다. 진서는 당나라 태종(이세민)때인 서기 644년 편찬된 책이며, 한인(桓因)께서 세상에 내려오셔서

한국(桓國)을 여신지 7840 여년이 흐른 후의 기록이다.진서가 만들어진 서기 7세기경 당시에는 숙신(肅愼)은 흑룡강성과 연해주 일대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이곳 숙신으로 부터 말을타고 서북쪽 방향으로 200일 가면 12연방국중 하나인 비리국(裨離國)이 있다고 전하는 것으로 보아 7세기 까지 비리국과 관련된 국가나 혹은 후손들이 끊어지지않고 연결이 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진서(晉書) 에서 전한다.
肅愼氏一名邑婁  在不咸山北  去夫餘可六十一行  東濱大海  西接寇漫汗國
숙신씨일명읍루  재불함산북  거부여가육십일행  동빈대해  서접구만한국

北極弱水  其土界廣무數千里
북극약수  기토계광무수천리

해설:"숙신씨는 일명 읍루라 하는데 불함산 북쪽에 있으며 부여에서 60일을 가야한다. 동쪽은 큰 바다에 닿았으며 서쪽은 구만한국에 접해있고 북쪽으로는 약수에 닿았다. 그 땅의 경계는 넓고 길어 수천리에 이른다."

숙신과 읍루는 모두 한국(桓國)을 지칭하는 것이며, 불함산은 현재의 백두산이라고도 전한다. 부여(夫餘)는 해모수 단군이 건국하셨던 북부여(北夫餘)를 가리키는 듯하고, 약수(弱水)는 현재의 흑룡강 즉 아무르(Amur)강 이다.

진서(晉書)가 편찬된 시대는 서기 644년이지만, 그 역사서의 내용은 동진(東晉)과 서진(西晉)의 역사인 서기 3세기부터 서기 5세기때가지의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때문에 진서(晉書)의 기록에 보이는 대부분의 지명(地名)은 그 당시의 지명이거나 혹은 수 세기 앞선 지명으로 봐야한다. 물론 수 백년동안 혹은 수 천년동안 변하지 않는 지명(地名)도 있을 수 있으나 거의 대부분 지명 등 명칭은 국가나 땅을 지배했던 민족(民族)들에 의해 변경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오랫 옛적 한국이 세워질때의 흑수(黑水)와 약수(弱水)는 각각 다른 강이었으나 후세의 배달국(培達國)이 세워지면서 모든 강과 산의 지명이 동쪽으로 배달국(培達國)을 따라 이동하였고 약수와 흑수는 같은 강으로 인식되어진 것이다.

따라서 진서(晉書)에 기록된 약수(弱水)는 흑수(黑水)와 같은 강으로 인식되어졌으며, 오늘날의 흑룡강(黑龍江)이다.

서기전 7199년 안파견(安巴堅) 한인께서 세우신 한국(桓國)이 3301년의 세월이 지난 후, 그 뒤를 이어서 거발한 한웅(居發桓 桓雄)의 신시(神市) 즉 배달국(培達國)이 건국되었으며 지명(地名)의 이름이 같아도 그 위치가 달라졌으니 후세의 자손들이 한국(桓國)과 신시(神市) 즉 배달국(培達國)을 분리하지않고 하나의 역사로 보았기 때문이다.

물론 지위리 한인(智爲利 桓因)의 뒤를 이어 거발한 한웅께서 건국한 신시 배달국(神市 培達國)이므로 같은 역사라고 인식하는 것도 큰 무리는 아닐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한국(桓國)은 한인께서 천산에 거주하시면서 파내류산 아래 천해의 동쪽땅에 세우신 나라이고 신시 배달국은 거발한 한웅께서는 한국(桓國)의 뒤를 이어 삼위태백(三危太百)의 지역(地域)에 건국하신 나라이니 현재의 지도상 위치로 보면 한국(桓國)과 신시 배달국(培達國)은 약 4,000km 정도의 거리 차이가 있다.

즉 한국(桓國)으로 부터 동쪽으로 4,000km 정도 떨어져서 신시배달국(神市 培達國)이 세워진 것이다.






[자료]'한단고기'가 증언하는 12환국과 신시배달국
  

한국(桓國)과 한국의 12 연방국(聯邦國) 실체 ㅡ 위치 2편

[한단고기-삼성기(三聖記)]에서 전한다.

日降童女童男八百  於黑水白山之地  謂之桓國
일강동녀동남팔백  어흑수백산지지  위지한국

해설:"어느날 동녀동남 800명이 흑수 백산의 땅에 내려왔다. 이를 한국이라고 한다."

後桓雄氏繼興  奉天神之詔  降于白山黑水之間
후한웅씨계흥  봉천신지고  강우백산흑수지간

해설:"뒤에 한웅씨가 계승하여 일어났다. 천신의 뜻을 받을어 백산과 흑수의 사이에 내려왔다."

흑수(黑水)와 백산(白山)은 한국시대(桓國 時代)때의 기록과 더불어 한웅(桓雄)의 신시 배달국의 기록에도 같은 지명(地名)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한국(桓國)시대 때의 흑수(黑水)와 백산(白山)은 신시 배달국(神市 培達國) 때와 비교하면 지명은 같으나 위치(位置)는 전혀 다른 곳이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한국과 신시 배달국의 역사를 후손들이 동일(同一)한 한 역사로 보았기 때문에 흑수와 백산을 같은 지역으로 당연하게 생각한 오류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현재 흑수(黑水)는 흑룡강성과 러시아의 국경을 따라 흐르는 흑룡강(黑龍江) 즉 아무르(Amur) 강으로 인식하는 것이 일반적 견해이다.

또한 백산(白山)은 현재의 백두산 또는 강원도에 위치한 태백산(太白山) 혹은 북경 서남쪽 섬서성(陝西城) 서안(西安 고대의 장안長安)의 서쪽에 있는 태백산(太白山)으로 보는 등 여러 갈래의 견해가 있다.

그러나 여러 사서(史西)들의 기록에 나오는 한국시대의 흑수(黑水)와 백산(白山)은 한웅시대 즉 신시 배달국(神市 培達國)의 흑수(黑水) 백산(白山)과는 전혀 다른 곳임을 알아야한다.

앞서 수 차례 언급한 바와 같이 한국(桓國)은 파나류산(派奈留山) 아래에 즉 현재의 천산산맥과 발하슈 호수를 포함한 지역이고, 한웅의 신시 배달국은 삼위태백(三危太百)의 지역으로 바이칼 호수와 흑룡강 그리고 대흥안령산맥, 소흥안령산맥, 장백산맥으로 포함한 지역이기 때문에 한국과 신시 배달국은 서로 전혀 다른 지역에서 건국한 각각의 나라이기 때문이다.

한국(桓國) 시대의 흑수(黑水)와 백산(白山)을 살펴보면,

흑수(黑水)는 현재의 내몽고 자치구와 감숙성 동부 지역에 있는 위치한 고원(固原)의 북쪽에 있는 강이다. 또한 감숙성 북서부 지역인 장액(張掖)의 부근에는 약수(弱水)도 있다.

사기(史記)에서 전(傳)하기를 고원(固原)의 북쪽에 흑수(黑水)가 있으며, 북쪽으로 흘러가 대하(大河)에 유입한다고 하였다. (又北有黑水 北流入於大河) 즉 흑수는 고원을 지나 황하(黃河)로 흘러가는 강이다.

백산(白山)은 중앙 아시아에 위치한 키르기스스탄(Kyrgyzstan)과 카자흐스탄 그리고 신강 위구르 자치구(新疆維吾爾族自治區)지역 사이에 위치하는 천산산맥(天山山脈)의 수 많은 봉우리 중 한 봉우리 또는 천산산맥에 속하며 항시 눈이 덮여있는 봉우리 전체일 것임에 틀림없다.

백산(白山)은 말 그대로 하얀 설산(雪山)을 일컫는 말로, 빙하(氷河 Glacier)가 덮여있으므로써 연중 어느 시기에 보아도 하얀 모습을 드러내는 산이므로 빙하가 생성되는 최소 3,000m 이상의 고봉(高峰)일 것이다.

현재 천산산맥의 최고봉은 포베다산(7,439m)이며, 평균고도 3,000m~4,000m 이상의 고봉들로 이루어져있다.



한웅의 신시 배달국(神市 培達國)에서의 흑수(黑水)와 백산(白山)을 살펴보면, 흑수(黑水)는 흑룡강(黑龍江) 즉 아무르(Amur)강이며, 흑룡강성과 러시아의 국경을 따라 오호츠크해로 들어가는 강이다.

백산(白山)은 현재 흑룡강성의 하얼빈 동쪽 통하(通河)의 북쪽에 있는 평정산(平頂山)이다. 원래의 이름은 태백산(太百山)인데 후에 백산(白山)으로 산명(山名)이 바뀌었고, 다시 현재에 이르러서는 평정산(平頂山)으로 불리우는 산이다.

[자료]유전자 분석으로 보는 한민족

한국인은 대부분 남방의 농경문화 민족에서 그리고 일부는 북방의 유목·기마 민족에서 비롯돼 ‘이중의 민족기원’을 지닌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또 한국인과 몽골인이 유전적으로 매우 가깝다는 최근 다른 연구결과와 달리, 한국인은 유전적으로 중국 베이징 한족과 만주족, 일본인과 매우 가까운 것으로 분석됐다.

이 연구결과는 지금까지 한국인의 민족기원과 관련한 연구 가운데 가장 오랜 기간에 걸쳐 가장 많은 표본집단을 대상으로 이뤄진 것이다.

김욱 단국대 교수(인류유전학) 연구팀은 “한국인을 비롯한 중국·일본·베트남·몽골 등 동아시아 11개 민족집단에서 1949명의 유전자를 조사·분석한 결과 한국인은 북방계보다는 주로 남방계에서 비롯한 것으로 나타났다”며

“그러나 북방계도 뚜렷해 ‘이중의 민족기원’ 현상이 두드러진다”고 밝혔다.

이런 결과는 저명한 국제학술지 〈휴먼 지네틱스〉에 발표됐다.연구팀은 이번 연구를 위해 세대가 바뀌어도 변하지 않고 고스란히 유전되는 두가지 염색체의 디엔에이(DNA)를 이용해 민족의 기원과 이동을 추적했다.

하나는 아버지에서 아들한테만 전수되는 ‘와이(Y) 성염색체’의 디엔에이이며, 다른 하나는 난자 세포에만 존재해 모계로 전수되는 미토콘드리아 디엔에이다. 김 교수 연구팀은2001~2003년 한국과학재단 지원으로 11개 민족 738명의 와이염색체를, 2002~2003년엔 8개 민족 1211명의 미토콘드리아 염색체를 비교 분석해 이런 결과를 얻어냈다.

먼저, 와이염색체를 분석한 결과는 ‘한국인의 원류는 북방 민족’이라는 세간의 인식과 크게 다른 것이어서 눈길을 끈다.김 교수는

“16만년 전 아프리카에서 출현한 현대인(호모 사피엔스)은 6만~8만년 전 다른 대륙으로 이동하기 시작했으며 이주 집단의 한 갈래가 2만~3만년 전 아시아 남쪽으로 가는 과정에서 와이염색체에 돌연변이를 일으켜 ‘엠(M)175’라는 유전자형을 지니게 됐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라며 “이번에 Y염색체를 비교해보니 한국인 75%에서 이런 유전자형이 발견됐다”고 말했다.

한국인10명 가운데 7, 8명이 아시아 남쪽으로 이동하던 2만~3만년 전의 집단과 동일한 와이염색체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또한 몽골인을 뺀 동아시아인 대부분에서 엠175 유전자형은 주류를 이루는 것으로 조사됐다. 연구팀은 이런 사실은 엠175 유전자형 집단이 중국 중북부인 황허·양쯔강 유역에서 농경문화를 이룩해 인구의 대팽창을 일으키면서 5천년 전쯤 한반도와 다른 아시아 남부로 퍼져나갔다는 유전적 증거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번 연구에선 중국 중북부 농경민족을 비롯한 동남아시아의 남방계와 별개로, 한국인에선 몽골·시베리아 북방계 와이염색체의 유전자형(20%)도 발견됐는데, 이는 남방계가 대규모로 옮아오기 이전에 알타이산맥이나 시베리아 바이칼 주변에서 빙하기를 피해 남하한 집단이 먼저 존재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로 풀이된다.



  

결국 “지금의 한국인은 한반도에 먼저 들어온 일부 북방계와, 대규모로 이동해 들어온 남방계 농경민족이 섞여 이뤄졌다”는 것이 연구팀의 결론이다.이와 함께 연구팀은 이번 11개 민족집단의 비교분석을 통해, 2300년 전쯤 농경문화를 전한 야요이족이 한반도를 통해 일본 본토로 이주했다는 유전적 증거도 발견됐다고 덧붙였다.

한국인이 주로 중국 중북부 농경문화에서 비롯했다는 와이염색체의 분석결과는 이 연구팀이 따로 벌인 미토콘드리아 디엔에이의 분석결과와도 대체로 일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편, 김 교수 연구팀의 결론은 ‘한국인과 몽골인은 유전적으로 매우 가깝다’는 최근 다른 연구팀의 연구결과와 달라 논란을 일으킨다.

김종일 한림대 교수(생화학교실)는 ‘한국인 66명과 몽골인 72명의 미토콘드리아 디엔에이를 분석한 결과 두 민족은 유전적으로 매우 가까운 것으로 나타났다’는 중간 연구결과를 밝힌 바 있다

.이와 관련해 김 교수는 “우리는 한국·몽골인 사이의 유전적 관련성만을 연구한 것이며 연구방식에서도 큰 차이가 있다”며 “이런 점에서 다른 결론이 나온 것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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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득력 더해가는 '삼국의 대륙존재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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