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 사
<특보> 광개토태왕비,누가 왜 옮겼나?
37톤의 무게를 견딜 크고 견고한 받침대없이 허술하게 만들었겠는가!
성훈 칼럼니스트
(1부) 태왕비 위치에 대한 의혹제기
(2부) 옮긴 이유와 비문위조의 이유 분석
중국 길림성 집안현 통구에 고구려 19대 광개토태왕의 비가 우뚝 서있다.
광개토태왕의 원 시호(諡號)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으로 줄여서 '호태왕'이라고도 한다.
이 비는 아들인 장수왕이 414년에 세운 것으로, 비는 커다란 각력응회암(角礫凝灰岩)으로 된 불규칙한 직4각형의 기둥 모양으로 된 4면 비(碑)이다.
▲ 1927년 부터는 이층누각을 세워 비문과 위치가 조작된 비를 보호했다.
비는 1876~80년 발견된 이후부터 주목을 받아, 당시 집안현 지사였던 유천성(劉天成) 등의 모금으로 비바람의 침식을 막기 위해 1928년에 2층으로 된 비각을 설치했다.
이 비각은 1976년에 낡아서 붕괴의 위험이 있다고 하여 철거되고, 1982년에는 중국 당국에 의해 대형 비각이 세워지고, 2005년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비의 높이는 6.34m로 윗면과 아랫면은 약간 넓고 중간부분이 약간 좁다. 아랫부분의 너비는 제1면이 1.48m, 제2면이 1.35m, 제3면이 2m, 제4면이 1.46m이다.
아래에 화강암의 받침대(대석)를 만들었는데 길이 3.35m, 너비 2.7m의 불규칙한 직4각형이고, 두께는 약 15~20cm로 고르지 않다.
문자의 크기와 간격을 고르게 하기 위해 비면에 가로·세로의 선을 긋고 문자를 새겼다.
제1면 11행, 제2면 10행, 제3면 14행, 제4면 9행이고, 각 행이 41자(제1면만 39자)로 총 1,802자인 이 비문은 삼국의 정세와 일본과의 관계를 알려 주는 금석문이다. 비문의 내용은 크게
① 서언(序言)격으로 고구려의 건국 내력을, ② 광개토태왕이 즉위한 뒤의 대외 정복사업의 구체적 사실을 연대순으로 담았으며, ③ 수묘인연호(守墓人烟戶)를 서술하여 묘의 관리 문제를 적었다.
▲ 광개토태왕 비의 제원. 받침대가 3면으로만 되어있고, 작아서 하중을 이기지 못하여 여러 조각으로 깨어져 있다.
여하튼 이 광개토태왕 비는 우리 고대사의 숙제를 풀어줄 유물임에 틀림없다고 하겠다.
그러나 위치가 분명 옮겨진 것 같은 의혹이 있고, 일제가 비문의 내용 중 광개토태왕이 왜를 정벌한 부분을 조상의 수치로 여겨 전부 훼손해 버렸고,
이 비문을 일부 위조해 조선 침략의 정당성의 이론이 되는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을 조작하기도 했다.
그러나 전 서울대 천문학과 박창범교수의 <삼국사기> 일식기록 분석으로 한반도에는 백제/신라가 없었고, 일본의 전신인 왜가 있었던 위치도 현 일본열도가 아니라 중국 대륙 남쪽 광동성이나 가까운 섬이었음이 밝혀짐으로서 임나일본부설은 허구임이 명백하게 밝혀졌다.
그런데 이 비는 비문 조작뿐만이 아니라, 아래와 같이 그 위치에 대해 여러 의문이 있다.
▲ 좌측은 일본서기 628~709년의 일식분석으로, 당시 왜는 중국대륙 남단이나 남지나 해상의 섬에 있었다. 우측은 1189년 이후의 일식분석으로 정확히 일본열도이다.
628년 이전은 일본이 아니라 왜였으나 백제의 분국이나 마찬가지로 삼국과 같은 독자적인 국가로 보기 어렵다.
1) 비에 대한 기록이 왜 없을까?
처음 비가 발견된 것이 1876~80년경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렇게 거대한 비가 왜 그 이전에는 그 자리에 있었다는 우리의 어떠한 기록도 없고 어떻게 그 때까지 발견되지 않았을까?
조선시대 사서에 아래와 같이 압록강 건너 집안지역에 있는 비에 대한 몇 가지 기록이 남아 있다.
▲ 근처 아불란사 터에 있는 높이 3~4m의 이 대석이 우리 기록에서 언급한 대금황제능비로 보인다.
<용비어천가 제39장 압강(鴨江) 주해>
<皇城> 平安道江界府西越江一百四十里, 有大野中有古城 諺稱 大金皇帝城 城北七里有碑
평안도 강계부 서쪽 강 건너 백사십리에 있는 큰 들 가운데 대금황제성이라 칭하는 고성이 있고 성 북쪽 7리에 비가 있다.
<동국여지승람 권55 강계부 산천조>
<皇城平> 距滿浦三十里. 皇帝墓. 在皇城平. 世傳金皇帝墓. 碑石爲之 高可十丈
만포 삼십리 거리 황성평에 금황제묘라 전하는 황제묘가 있고 10장 높이의 비석이 있다.
<강계읍지 : 1830년 찬 1872년 교정>
<皇帝城> 在伐登鎭被鴨綠江邊. 城郭尙今宛然. 金國初都云. 皇帝墓 在皇城平上一里許 有立碑. 高可十丈. (금나라 초 도읍이라고 전해지는 성곽이 있다는 내용 외에는 위의 기록과 내용이 거의 대동소이하다.)
1830년에 편찬되고 1872년에 교정된 강계읍지에도 분명 <동국여지승람>과 똑같은 내용이 적혀 있다.
그런데 호태왕 비가 발견된 근처 아불란사 터에 높이 3~4m 정도 되는 큰 석주가 있다.
필자는 이 석주가 위의 기록과 일치하는 금황제의 비석으로 생각된다.
물론 10장(丈)의 높이가 당시 얼마였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통상적으로 1장을 3m라 했으니 약 30m 정도인데 비석의 높이로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아마 10척(尺)의 오기로 본다. 아불란사 터 석주의 높이가 약 10척이고, 호태왕비의 높이는 20척이다. 그렇다면 1872년 이전에 호태왕비는 집안에 없었다는 것을 기록으로 입증했다고 할 수 있다.
▲ 명나라의 기록인 명일통지의 조선영토
고구려 광개토태왕과 장수왕 때의 주 강역은 분명 하북성이었다. 그런데 태왕묘와 호태왕비가 한참 떨어진 집안에 있었다니 잘 믿기지는 않지만 그럴 수도 있다.
집안에는 고조선과 고구려의 것으로 추정되는 피라미드가 산재해 있다. 원래 대전 현충원과 같은 신성한 소도와 같은 분묘도시이기 때문에 집안에 태왕의 묘를 세울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호태왕비는 여러 가지 기록으로 보아 거기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집안 지역은 현재 우리 사학계에서는 부인하고 있지만 분명 고려의 영토였다. 그렇다면 고려의 사서에 이 비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 지방은 중국의 여러 기록에서‘조선의 영토는 동서이천리 남북사천리’라 했듯이 조선의 영토이기도 했는데, 설사 조선의 영토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서간도를 개척할 당시 이렇게 큰 비가 우리 주민에 의해 발견되지 않았을 리가 없다.
그런데 조선의 사서에도 이 비에 대한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호태왕비는 원래 집안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2) 왜 비문의 기록과 다른 평지에 있나?
호태왕 비문에는 ‘以甲寅年 九月九日乙酉 遷就山陵 於是立碑 銘記勳績 (갑인년 9월9일 을유에 산릉에 모시고 비를 세워 훈적을 기록한다.’고 조각되어있다.
현재 비의 서남쪽 약 300m 지점에 있는 태왕릉(太王陵)은 부근에서 "願太王陵安如山固如岳"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벽돌이 발견되어 학계에서 광개토태왕의 릉으로 비정되었다.
그런데 현 태왕릉은 산릉이 아니고 평지에 조성되어 있다.
그러므로 현 태왕릉은 분명 광개토태왕의 능이 아닌 것이 확실하다. 태왕이라는 칭호를 쓴 다른 왕이 다른 어느 시대인가 있었거나,
누군가가 비를 옮겨다놓고 명문이 새겨진 벽돌을 능에 갖다놓은 것으로 보인다.
이 능이 어느 왕조 누구의 능인지는 필자도 알 수가 없지만, 분명한 것은 그 무덤의 주인공이 광개토태왕이 아닌 것은 확실해 보인다.
▲ 1900년대 초의 비석. 압록강과 산 사이의 평지에 관석과 대석도 없이 서 있다.
옆에 민가가 있는 것으로 보아 분명 비문에 나와있는 산릉이 아니지 않은가!
그리고 이렇듯 민가도 있었는데 왜 1876년 이전에는 발견 안 되었을까?
그렇다면 현 집안에 있는 이 호태왕비는 과연 원래 어디에 있었을까?
그 위치를 정확히 추정할 수는 없지만 분명 중국 땅 어딘가에 있었기 때문에 고려나 조선의 기록에 없는 것이고,
또 그 비를 누군가가 옮겼기 때문에 비문에 기록된 산릉과 다른 평지에 비가 서있다고 보는 것이다.
만일 옮겼다면 비의 무게가 37톤이나 되기 때문에, 육상으로의 운송은 현실적으로 많은 사람의 눈에 쉽게 띄어 불가능했을 것이고 아마 강을 따라 선박으로 옮겼을 가능성이 크다.
집안이란 압록강변으로 옮겨놓은 것으로 보아, 아마 고구려의 핵심강역이었던 하북성 연산산맥 어딘가에 있었던 것을 배를 이용해 옮긴 것으로 추정한다.
참고로 김성겸선생이 해석한 남당유고집 고구려사략에 보면 ‘태왕을 황산(黃山: 서안동조양산-西安東朝陽山)에 장사지냈다’고 되어 있다.
황산의 위치는 현재 알지 못하나, 조양이라는 지명은 북경 근처에 있다. 여하튼 하북성 북부를 흐르는 강은 난하와 조백신하 그리고 영정하가 있다.
이 강 중에 고구려의 수도였던 곳으로 들어가는 강이 과연 어느 강일까?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보면, 동천왕 때 위나라 관구검이 쳐들어와 환도성을 함락하고, 수하 장수를 시켜 추격하니 왕이 남옥저로 달아나는데, 죽령에 이르러 유유와 밀우장군이 목숨을 바쳐 왕을 지키는 활약이 나온다.
여기서 남옥저는 어디일까?
사학계는 남옥저를 함경도 북청일대로 비정하고 있다.
그러나 남옥저는 함경도가 아닌 요녕성 일대에 있었다.
<한단고기 대진국본기>에 나와 있기를, ‘대진국의 남경인 남해부는 본래 남옥저의 옛 땅이다. 지금의 해성현(海城縣)이 그것이다.
’해성현은 현 지명 해성시로 요녕성 요양과 가까워 고구려 패망 시에 사비성(沙卑城)으로 여러 사서에 많이 등장하는 지명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고구려의 당시 수도였던 환도성은 현 길림성 집안이 아니라 하북성이 맞다고 하겠다.
집안에서 관구검 기공비가 발견되었다. 위나라 유주(북경)자사인 관구검이 북경 일대에서 현 집안으로 쳐들어와 환도성을 함락시키고 남옥저(요녕성)로 달아나는 동천왕을 추격한 것이 아니고,
북경 쪽에서 하북성에 있던 환도성을 함락시키고 남옥저(요녕성) 땅으로 도망온 동천왕을 계속 추격해 길림성 집안까지 왔다고 봐야 그 순서가 맞고 행적이 맞는 것이다.
필자의 견해로는, 고구려의 도읍은 국내성과 환도산성이었으므로 국내성(안시성)과 환도산성으로 추정되는 난하 중류의 현 청룡산성(한단고기의 태조대왕의 요서 10성 중 개평 동북방 70리에 있는 안시성으로 추정)과 인근의 도산(都山: 丸都山城으로 추정) 부근에 원래 호태왕의 산릉이 있었다고 보는 게 유력하다 하겠다.
▲ 좌측은 국내성과 환도성의 위치. 우측은 호태왕비와 태왕을이 있는 위치.
누군가가 고구려의 수도인 국내성의 위치를 집안으로 위조하기 위해 비석을 몰래 평지에 가져다 놓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완전범죄는 없는 법이다.
3) 받침대(대석)가 없는 비도 있나?
무게가 37톤이나 되고, 높이가 6.34m나 되는 거대한 응회암으로 된 비석을 세우려면 당연히 지반침하를 막아야 하고, 넘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거대한 받침대(대석)가 있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상식 중의 상식이다.
▲ 현재 37톤의 하중을 이기지 못하여 깨어져 있는 받침석. 120년 정도에 이렇게 깨진 받침석은 원래 것이 아니다.
그런데 사진으로 본 1900년 초의 비석은 받침대(대석) 없이 그냥 땅위에 서 있던 것으로 보인다.
받침대도 없는 상태에서 지반침하도 없이 1,500년을 버텼다는 것은 솔직히 상식으로는 잘 이해가 안된다.
▲ 발견 초기의 비석 모습. 필자 눈에는 아래에 받침석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독자들은 받침석이 보이시는지?
현재 가로 세로 2.7m X 3.35m 높이 약 20cm의 화강암으로 된 받침대가 있는데, 3부분으로 나뉘어 깨져있다.
그리고 이상한 점은 받침대 가운데 비가 있는 것이 아니고, 한쪽 끝에 비가 있다는 것이다(제원사진참조). 비신이 있던 부분은 현재 약 5cm 가량 침하되어 있고, 대석 전체가 15-20cm 침하되어 있다.
즉 받침석이 비에 비해 너무 작고 형편없이 조잡하고 약하다는 점이다. 불과 약 120년 사이에 그 정도 침하되고 훼손되었다고 보면 된다.
고구려 때 황제비의 받침대(대석)을 이렇게 허술하게 만들었을 리가 없다. 분명 37톤의 무게를 오랫동안 견디도록 받침대를 크고 견고하게 만들었을 것이고,
만일 비를 세우고 120년 만에 이렇게 침하되었다면, 분명 후대의 왕 누군가가 제대로 다시 대석을 크고 튼튼하게 만들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현재의 대석은 너무 작고 하중을 못 견딜 정도로 부실하다보니 깨지고 망가진 것이다.
▲ 1900년대 초의 태왕비는 받침석이 없던 것으로 사진에 보인다. 위 사진과 다른 방향에서 찍은 것임.
4) 관석도 없는 묘비가 있나?
▲ 조선 5대 문종대왕의 비석. 관석과 받침석이 크다.
보통 다른 묘비에는 대부분 관석이 씌어져 있다.
일반인의 묘비에도 반드시 관석를 세우는 법이다.
하물며 제왕의 공적비인데 관석을 안 세웠을 리가 없다.
호태왕비도 상부는 약간 뾰족하게 되어 있고 상부에 가공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원래 관석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그 관석은 엄청 컸을 것으로 추정되어 인력으로 쉽게 오르내리기에 분명 힘들었을 것이다. 이건 개인이 아닌 조직이 동원되어 관석이 내려진 것으로 보인다.
원래 비가 있던 장소에서 관석을 내리고, 비를 배로 옮긴 다음 집안에다 비를 세우고, 다시 관석을 올리기가 사실 쉽지 않았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래서 관석은 그냥 어딘가에 버리고 비만 달랑 받침대(대석)도 없이 세운 것으로 보인다.
비를 세우려면 비문의 기록과 같이 산릉(山陵)에 올려야 하는데 비가 워낙 커서 편의상 압록강과 산 사이의 평지에 그냥 세운 것으로 보인다.
▲ 광개토태왕 비의 맨 윗부분은 가공의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애초에는 관석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광개토태왕 비문과 위치 조작의 진실
비를 옮긴 장본인은 중국이고,비문은 중국과 일본이 훼손했다
성훈 칼럼니스트
며칠 전 광개토태왕 비를 옮겼다는 몇 가지 의문점을 언급했으나 사실 확실한 물증은 아직 없다. 그러나 심증은 99.9%로 거의 확실하다.
그럼 누가 언제 왜 비를 원래 장소에서 압록강변 집안으로 옮겼을까를 유추해 보기로 한다.
누가 언제 왜 비를 옮겼을까?
우선 비를 옮긴 시기는 조선의 강계읍지가 교정 발행된 1872년부터 비가 최초 발견된 1876년 사이로 봐야 한다.
일제가 중국에 본격적으로 진출한 때가 1894년 청일전쟁 이후이므로, 일제가 주동해 이 비를 옮겼다고 볼 수는 없고 청나라가 비를 옮겼다고 본다. 그럼 청나라는 왜 이 비를 옮겼을까?
▲ 동치제가 6살에 즉위하자 섭정은 주로 서태후가 했다.
비가 옮겨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1872~1876년 사이의 청나라는 동치제(1861~1875)와 광서제 초기시대였다. 태평천국의 난과 아편전쟁을 겪은 청나라는 이른바‘동치중흥’이라 불리는 자강(自强)의 기치를 내세운 ‘양무운동(洋務運動)’을 3기로 나누어 추진했다.
이 운동은 청일전쟁의 패배로 끝내게 되는데, 일면 성공한 듯했으나 보수 사상에서 탈피 못하고 제도개혁이 뒷받침되지 못해 소기의 성과를 올리지는 못하였다. 여하튼 당시 그러한 자각이 있어 국가의 문물을 재정비하게 되고 서구의 발달된 과학기술을 받아들이게 된다.
이 운동과정에서 분명‘중국 역사세우기’가 있었을 것이고 그 일환으로 호태왕비가 중국인에 의해 옮겨졌을 것으로 보인다. 예전부터 중국은 이런 역사왜곡을 이미 많이 해왔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사서에 나오는 요하(遼河)의 위치 변경이고, 중국은 호태왕의 업적을 중국의 수치로 여겨 중국 25사에서 그 기록을 이미 다 지워버렸다.
또한 중국(청나라)이 비를 옮겼다는 사실은 단재 신채호선생의 <조선상고사>라는 책에서 비문을 답사한 내용을 적어놓는 대목에서 찾을 수 있다. 책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전략) 광개토태왕의 비문 가운데 선비 정벌에 대한 문구가 기재되지 아니하였음은 무슨 까닭인가?
내가 일찍이 호태왕의 비를 구경하기 위해 집안현에 이르러 여관에서 만주사람 잉쯔핑(英子平)이란 소년을 만났는데, 그가 필담으로 한 비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과 같았다.
"碑가 오랫동안 풀섶 속에 묻혔다가 최근에 잉시(榮禧:만주인)가 이를 발견했는데, 그 비문 가운데 고구려가 땅을 침노해 빼앗은 글자는 모두 도부로 쪼아내서 알아 볼 수 없게 된 글자가 많고,
그 뒤에 일본인이 이를 차지하여 영업적으로 이 비문을 박아서 파는데, 왕왕 글자가 떨어져 나간 곳을 석회로 발라 알아볼 수 없는 글자가 도리어 생겨나서 진실은 삭제되고 위조한 사실이 첨가된 듯한 느낌도 없지 않다."
그러니까 이 비문에 호태왕이 선비를 정복한 큰 전공이 없음은 삭제된 때문이다. 아무튼 호태왕이 평주를 함락시키고 그 뒤에 선비의 쇠퇴를 타고 자꾸 나아갔다면 호태왕이 개척한 토지가 그 존호 이상으로 넓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말한 바와 같이 호태왕은 동족을 사랑하는 이였으므로 연(燕)나라 신하인 풍발이 연왕(燕王)을 죽이고, 고구려 선왕의 서손으로 연나라에서 벼슬하던 고운을 세워 천왕(天王)이라 일컫고 호태왕에게 보고하니,
호태왕은 “이는 동족이니 싸울 수 없다.”하고 사신을 보내 즉위를 축하하고 촌수를 따져 친족의 의를 말하고 전쟁을 그만두니 호태왕의 북진정책이 이에 종말을 고하였다. (후략)
▲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록된 광개토태왕 비의 현재 모습. 중국에 의해 누각에 갇혀 신음하고 잇다.
위 책의 내용에서와 같이 비를 옮긴 장본인은 중국(청나라)으로 고구려가 선비를 정벌한 내용을 지워버리고, 고구려의 강역을 축소왜곡하기 위해 하북성에 있던 비를 집안으로 옮겨놓은 것으로 보인다.
비가 오랫동안 풀 속에 묻혀있었다는 만주소년의 진술에서 알 수 있듯이 최초에는 비를 옮겨다가 세우지도 않고 그냥 평지에 버리고 간 것을 나중에 집안사람들이 발견하고는 세운 것으로 보인다.
중국 사람들이 비를 옮겼기 때문에 당시 비문의 내용 중 자기네와 상관없을 것으로 본 왜와 관련된 내용을 없애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삼국사기>에 언급된 것과 똑같이 고구려와 연나라(선비족)는 동족(同族) 또는 종족(宗族)이었고, 새로 왕이 추대된 고운은 친족(親族)이라는 사실을 단재선생은 말씀하시고 계시다.
연나라에서 신하였던 한족 풍발이 역시 신하였던 고운을 추대했다고 한다. 연나라 전왕(前王)들이 고씨가 아니면 이는 역성혁명이다.
왕의 성이 달라지면 당연히 다른 왕조이나, 같은 나라로 이어진 것을 보면 연나라는 자고로 고(高)씨의 나라가 맞는 것이다. 모용씨는 나중에 바꾼 것으로 보인다.
혹자는 이런 질문을 할 수도 있다. “만주족은 사실상 고구려-->대진국-->요나라-->금나라-->청나라로 이어지는 적장자인데, 청나라가 뭐 하러 조상인 고구려 광개토태왕비를 옮기겠는가?”맞는 말이다.
그러나 청나라 초기에는 자신들이 동이족의 후예임을 표방했으나, 중원을 지배한 이후로는 한족(漢族)에 동화되어 그러한 의식이 쇠약해진다.
특히 말기로 내려오면서 그런 의식이 희박해졌고, ‘동치중흥’은 중국을 중흥시키자는 정책이지, 중국인에게 만주족이 고구려의 후예임을 강조하자는 정책은 아니었다.
▲ 내몽고와 몽고는 민족과 북부여/고구려의 고향
중국은 자신들과 직접 관련된 선비족 정벌의 비문 내용을 없애면서 광개토태왕 6년 북으로 현 내몽고지방의 염수(鹽水)를 정벌하고, 8년 남으로 토곡혼(吐谷渾: 현 티베트)을 순시했다는 내용은 없애지 않았다.
즉 염수와 토곡혼은 자기네 땅이 아니란 이야기이다. 이는 청나라 만주족이 주동이 되어 비를 옮긴 것이 아니라, 중원의 한족(명나라)이 주동이 되어 비를 옮겼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암시하고 있다고 하겠다.
일제와 중국에 의해 비문이 파괴된 상태에서도 광개토태왕 시절 정복한 최대 영토가 어디까지였는지 유추할 수 있어 눈길을 끈다. 중국과 일제는 광개토태왕에게 염수의 상류와 토곡혼만 정벌 당하고 그 사이에 있는 중국 땅은 정벌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참으로 웃기는 짜장면과 우동이라 아니할 수 없다. 호태왕이 군대를 이끌고 토곡혼(티베트) 정벌할 때 공수부대 데리고 비행기라도 타고 갔단 말인가?
▲ 토곡혼(티베트)의 위치. 대륙 서남부까지 고구려의 영역이었다. 대륙 동부와 남부를 거쳐 간 것으로 보인다.
하북성에 있던 고구려가 토곡혼(티베트)을 가려면 중원을 가로질러 가던가, 중원에 있던 5호16국을 피하려면 대륙 동부인 산동성을 거쳐 양자강을 지나 남부인 복건성과 광동성을 거쳐 운남성으로 가야 한다.
즉 이는 중국 대륙의 동부(백제와 신라)와 남부(왜)가 다 광개토태왕에게 정벌 당했다는 이야기와 같고, 과학적으로 박창범교수의 일식 기록 분석이 이를 뒷받침해 주고 있다. 여하튼 이러한 사실은 중국과 일본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아 보인다.
이상과 같이 광개토태왕비가 중국에 의해 옮겨졌다는 것을 알아보았다. 그런데 이것과 비슷한 사건이 또 하나 있었다. 1913년 일제가 하북성 갈석산에 있던 점제현신사비를 평안남도 온천군으로 옮긴 것도 이것과 같은 맥락이다.
점제현 신사비는 한사군이 한반도 북부에 있었다는 것을 유물로 입증하기 위해 반도사관 정착의 일환으로 일제가 옮긴 것이다.
점제현은 한사군의 핵심인 낙랑군에 소속된 행정단위였다. 그 신사비가 있었던 낙랑군 점제현을 현 평남 온천군으로 조작하기 위해 옮긴 것이다.
▲ 일제는 갈석산에 있던 신사비를 평남 온천군으로 옮긴다. 원래 사서에 나오는 갈석산은 진장성이 끝나는 황하 동쪽 산서성 태원 위쪽에 있는 백석산으로 보인다. 이미 중국은 산 이름과 신사비 위치를 조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점제현신사비는 북한에서 과학적인 방법(핵분열 흔적법)으로 옮겨졌다는 것을 입증했다. 그러나 이 호태왕비는 현재 중국 땅에 있는 유물이므로 북한이나 우리가 마음대로 조사를 못하고 있다.
만일 조사가 허락된다면, X-Ray 투시로 비가 옮겨졌는지 아닌지 쉽게 판명할 수 있으나, 중국 자신이 옮긴 고구려의 유물이므로 중국정부가 그것을 허락할 리가 없지 않은가!
중국은 광개토태왕비를 하북성 난하 중류에서 압록강변 집안으로 옮겨다 세워놓았고, 일제는 이를 근거로 나중에 좁은 집안의 평지에서 15km2 밖에 안되는 곳을 고구려인 수도인 국내성으로 비정했고,
거기서 얼마 안 떨어진 산 정상을 환도산성으로 비정했다. 왜 그랬을까?
광개토태왕비나 점제현신사비나 둘 다 이른바 중국과 일제가 각각 추진한 역사왜곡을 유물로 정착시키기 위한 음모이며 흉계였던 것이다.
▲ 중국과 일제에 의해 조작되고, 한국의 강단사학계에 의해 고착된 고구려의 수도 국내성과 환도산성. 그러나 이 거짓말은 과학에 의해 허구임이 명백하게 밝혀진다. 고구려의 수도는 하북성에 있었다.
일제에 의한 본격적인 비문 조작
▲ 신묘년 기사는 글자 자체를 위조했다는 이론이 끊이지 않고 있다.
나중에 광개토태왕비를 수중에 넣은 일제는 관동군 정보장교 사케오가케노부(酒句景信)가 가져온 원본 탁본을 보고는 학자들에게 연구를 시킨다.
그리고 비문에 석회를 발라 글자를 훼손하고 조작하고 탁본을 떠서는 만천하에 공개한다. 특히 광개토태왕이 왜를 정벌한 내용은 철저히 없애버리고,
신묘년 기사를 위조해 조선 지배의 정통성의 이론적 근거가 되는 임라일본부설을 임의조작하게 되는 것이다.
(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羅以以爲臣)의 신묘년 기사에 대한 일본 측 해석은 "신묘년 왜가 바다를 건너와서 백제와 가야와 신라를 파해 신민으로 삼았다" 이고,
우리 해석은 고구려를 주체로 하여 (고구려는)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와 파하고, 백제.가야.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
분명한 것은 고구려 비에 왜가 주체가 될 리가 없지 않은가?
그리고 일제가 신묘년 기사의 글자를 아예 변조했다는 학설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 일본서기의 일식기록을 분석해 보니 초기 왜의 위치는 남지나 해상의 섬이었다. 중국 사서의 기록과 일치한다.
일제가 이 신묘년 기사를 강조하는 이유는 예전에 일본의 조상들이 가야 땅에 임나일본부를 설치해 200년간 지배한 적이 있다는 학설로, 조선의 조상들이 옛날에 일본의 지배를 받았으므로 지금 조선이 일본의 지배를 받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는 논리를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얼마나 이 이론이 허황된 것인지는 박창범교수가 일본서기에 나와 있는 일식기록을 분석하여 일본의 전신인 왜의 위치가 밝혀짐으로서 더 이상 학설로서의 가치가 없다고 하겠다.
일제의 허구인 임나일본부설로 인하여 조선은 단군 이래 나라를 통째로 빼앗기는 재앙 중의 대재앙을 맞는다.
36년 만에 해방을 맞이하긴 했지만 일제의 잔재는 아직도 여러 방면에 많이 남아 있다. 물론 해방 후 올바른 위정자를 만나지 못해 친일을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이유가 제일 크겠지만, 과학적인 분석으로 임나일본부설이 허황되게 날조된 이론이라는 것을 밝히게 해준 박창범교수에게 이 자리를 빌어 심심한 사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역사의 진실을 밝힐 수 있게 해 주셔서 정말로 고맙습니다.”
<한단고기>를 엮은 계연수선생은 1895년에 비를 답사하여 비문의 내용을 적어 놓았는데, 1912년 비를 재답사한 계연수선생은 비문 중 광개토태왕이 왜를 정벌한 내용이 크게 훼손되어 있음을 발견한다.
1931년 제자 이유립선생은 계연수선생의 ‘비문징실(碑文徵實)’을 세상에 선보이게 된다. 즉 일제에 의한 비문 변조는 1895년에서 1912년 사이에 있었던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일제는 계연수선생을 여섯 토막을 내는 육시(戮屍) 후 압록강에 던져 버린다. 일제는 독립 운동했다고 이렇게 잔인하게 토막내어 죽인 적이 없다.
당시 일제의 최고 인물인 이또오 히로부미를 사살한 안중근장군도 재판받고 처형당한다. 그런데 이렇게 육시까지 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계연수선생이 비문을 적어 놓았다는 사실을 일제가 알았던 것으로 보인다.
일제가 비문을 어떻게 조작했는지는 아직도 연구대상이며, 한일 간 동양사학의 첨예한 대립의 장이기도 하다. 아래는 비문징실의 내용으로 빨간색 부분이 왜와 관련된 이야기로 일제가 없애버린 글자이다.
중요한 내용은 왜가 거국적으로 항복하였다는 기사가 나와 <한단고기>의 기록과 일치한다.
▲ 광개토태왕 비에 비가 내리니 석회로 조작한 곳에서 석회물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다.
(第2面9行)官兵 跡而越來攻來背 急追至任那 加羅從拔城 城卽歸服安 羅人戍兵拔 新羅城口城 倭滿倭潰城六
(병이 왜의 자취를 밟고 넘어 급히 쫓아 임나가라에 이르러 성을 치니 성은 귀복 하였다. 아라인 수병이 "신라성"을 발하였다. 0성에 왜가 가득 있었으나 왜가 무너졌고 6성이 우리의 공격을 받아 궤멸되어 남은 것이 없었다.)
(第2面10行)被我攻口滅 無遺倭遂擧 國降死者十 之八九盡臣 率來安羅人 戌兵滿假口 口倭欲敢戰與喙己呑卓淳
(왜가 드디어 거국으로 항복하니 죽은 자가 십중팔구나 되었으며 신하를 모두 데리고 왔다. 아라인 수병이 가00에 가득 차 있었다.
왜가 훼기탄, 탁순의 제적과 더불어 감히 싸우고자 하여 00을 꾀하였으나 관병이 먼저 이들을 제압하여 바로 탁순을 빼앗았다.
(第3面1行) 諸賊謀口口 官兵制先直 取卓淳而佐 軍由淡路島 到但馬右軍經難波至武藏王直到竺 斯諸賊悉自潰
(이어 좌군은 담로도를 경유하여 단마에 이르고, 우군은 난파를 경유하여 무장에 이르고, 왕은 바로 축사에 도착하니, 제적이 스스로 무너졌다. 드디어 이를 군으로 삼았다.)
(第3面2行) 遂分爲郡安 羅人戌兵昔 新羅寐錦未 有身來口口 口國岡上廣 開土境好太 王口口新羅寐錦口口僕勾
(아라인 수병. 예전에는 신라 매금(임금)이 스스로 와서 조공하는 법이 없었는데, 이제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 때에 이르러 신라 매금이 스스로 와서 조공하고 고구려에 복속하였다.)
▲ 일제가 민족정신 말살을 위해 우리의 고대사서 20만권을 불질렀다는 신문기사
호태왕 비문의 훼손은 일제가 우리의 고대사서 20만권을 불 지르고, 중요한 사서는 일본으로 가져가는 분서갱유와 맥을 같이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인류 문명의 시조가 되는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고, 대륙을 지배했던 천자국의 천손민족(天孫民族)의 후예들을 일개 섬나라가 식민지배하기 위해서는,
그 위대했던 조상의 역사부터 말살할 필요가 있었다.
이는 일왕 특명에 의한 조선인의 민족정신 말살정책이었던 것이다.
우리의 위대했던 역사에 대해 항상 열등감이 많았던 섬나라 일본은 임진왜란 때 조선을 침략해서도 사고(史庫)를 불태우고 문화재를 가져가는 등 온갖 역사 만행을 저질렀다.
메이지유신 이후 호시탐탐 조선을 집어삼키려고 노리던 일제는 드디어 그 가능성이 보이자 미리 계획한대로 역사말살 음모부터 개시한 것으로 본다.
일제에 의해 조작된 반도사관과 임라일본부설은 이미 <한단고기>와 박창범 교수의 <삼국사기> 일식분석으로 허구임이 백일하에 명백하게 밝혀졌다.
그런데 문제는 한국의 사학계가 아직도 일제가 만들어준 반도사관에 세뇌되어 위대한 민족사를 밝힌 <한단고기>를 위서(僞書)로 몰아붙이고 있다는 것이다.
사학계는 과학적 증거와 명백한 사서의 근거를 손에 쥐어줘도 여전히 일제가 만들어준 망국과 치욕의 국사를 숭상하고 고수하고 있다.
해방 62년이 넘었건만 아직도 일제대신 우리 국민들과 학생들의 민족정신과 얼을 스스로 말살하고 있는 사학계의 이런 행위는 이제는 고쳐져야 하며 국가의 내일을 위해 민족사학과 손을 잡아야 한다.
그래야 대한민국의 희망찬 미래가 열릴 수 있기 때문이다.
다음은 ‘고구려 수도 국내성은 어디에 있었나?’가 게재됩니다. 참고로 광개토태왕 시 고구려의 영토를 상상해 보시도록 중국 지도 하나를 올려 놓습니다.
▲ 중국의 주요 성시. 섬서성 주변 몇개 성을 제외하고는 다 광개토태왕이 정벌한 고구려의 영토로 봐도 됩니다.
글 수 7,723
<특보> 광개토태왕비,누가 왜 옮겼나?
37톤의 무게를 견딜 크고 견고한 받침대없이 허술하게 만들었겠는가!
성훈 칼럼니스트
(1부) 태왕비 위치에 대한 의혹제기
(2부) 옮긴 이유와 비문위조의 이유 분석
중국 길림성 집안현 통구에 고구려 19대 광개토태왕의 비가 우뚝 서있다.
광개토태왕의 원 시호(諡號)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으로 줄여서 '호태왕'이라고도 한다.
이 비는 아들인 장수왕이 414년에 세운 것으로, 비는 커다란 각력응회암(角礫凝灰岩)으로 된 불규칙한 직4각형의 기둥 모양으로 된 4면 비(碑)이다.
▲ 1927년 부터는 이층누각을 세워 비문과 위치가 조작된 비를 보호했다.
비는 1876~80년 발견된 이후부터 주목을 받아, 당시 집안현 지사였던 유천성(劉天成) 등의 모금으로 비바람의 침식을 막기 위해 1928년에 2층으로 된 비각을 설치했다.
이 비각은 1976년에 낡아서 붕괴의 위험이 있다고 하여 철거되고, 1982년에는 중국 당국에 의해 대형 비각이 세워지고, 2005년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비의 높이는 6.34m로 윗면과 아랫면은 약간 넓고 중간부분이 약간 좁다. 아랫부분의 너비는 제1면이 1.48m, 제2면이 1.35m, 제3면이 2m, 제4면이 1.46m이다.
아래에 화강암의 받침대(대석)를 만들었는데 길이 3.35m, 너비 2.7m의 불규칙한 직4각형이고, 두께는 약 15~20cm로 고르지 않다.
문자의 크기와 간격을 고르게 하기 위해 비면에 가로·세로의 선을 긋고 문자를 새겼다.
제1면 11행, 제2면 10행, 제3면 14행, 제4면 9행이고, 각 행이 41자(제1면만 39자)로 총 1,802자인 이 비문은 삼국의 정세와 일본과의 관계를 알려 주는 금석문이다. 비문의 내용은 크게
① 서언(序言)격으로 고구려의 건국 내력을, ② 광개토태왕이 즉위한 뒤의 대외 정복사업의 구체적 사실을 연대순으로 담았으며, ③ 수묘인연호(守墓人烟戶)를 서술하여 묘의 관리 문제를 적었다.
▲ 광개토태왕 비의 제원. 받침대가 3면으로만 되어있고, 작아서 하중을 이기지 못하여 여러 조각으로 깨어져 있다.
여하튼 이 광개토태왕 비는 우리 고대사의 숙제를 풀어줄 유물임에 틀림없다고 하겠다.
그러나 위치가 분명 옮겨진 것 같은 의혹이 있고, 일제가 비문의 내용 중 광개토태왕이 왜를 정벌한 부분을 조상의 수치로 여겨 전부 훼손해 버렸고,
이 비문을 일부 위조해 조선 침략의 정당성의 이론이 되는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을 조작하기도 했다.
그러나 전 서울대 천문학과 박창범교수의 <삼국사기> 일식기록 분석으로 한반도에는 백제/신라가 없었고, 일본의 전신인 왜가 있었던 위치도 현 일본열도가 아니라 중국 대륙 남쪽 광동성이나 가까운 섬이었음이 밝혀짐으로서 임나일본부설은 허구임이 명백하게 밝혀졌다.
그런데 이 비는 비문 조작뿐만이 아니라, 아래와 같이 그 위치에 대해 여러 의문이 있다.
▲ 좌측은 일본서기 628~709년의 일식분석으로, 당시 왜는 중국대륙 남단이나 남지나 해상의 섬에 있었다. 우측은 1189년 이후의 일식분석으로 정확히 일본열도이다.
628년 이전은 일본이 아니라 왜였으나 백제의 분국이나 마찬가지로 삼국과 같은 독자적인 국가로 보기 어렵다.
1) 비에 대한 기록이 왜 없을까?
처음 비가 발견된 것이 1876~80년경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렇게 거대한 비가 왜 그 이전에는 그 자리에 있었다는 우리의 어떠한 기록도 없고 어떻게 그 때까지 발견되지 않았을까?
조선시대 사서에 아래와 같이 압록강 건너 집안지역에 있는 비에 대한 몇 가지 기록이 남아 있다.
▲ 근처 아불란사 터에 있는 높이 3~4m의 이 대석이 우리 기록에서 언급한 대금황제능비로 보인다.
<용비어천가 제39장 압강(鴨江) 주해>
<皇城> 平安道江界府西越江一百四十里, 有大野中有古城 諺稱 大金皇帝城 城北七里有碑
평안도 강계부 서쪽 강 건너 백사십리에 있는 큰 들 가운데 대금황제성이라 칭하는 고성이 있고 성 북쪽 7리에 비가 있다.
<동국여지승람 권55 강계부 산천조>
<皇城平> 距滿浦三十里. 皇帝墓. 在皇城平. 世傳金皇帝墓. 碑石爲之 高可十丈
만포 삼십리 거리 황성평에 금황제묘라 전하는 황제묘가 있고 10장 높이의 비석이 있다.
<강계읍지 : 1830년 찬 1872년 교정>
<皇帝城> 在伐登鎭被鴨綠江邊. 城郭尙今宛然. 金國初都云. 皇帝墓 在皇城平上一里許 有立碑. 高可十丈. (금나라 초 도읍이라고 전해지는 성곽이 있다는 내용 외에는 위의 기록과 내용이 거의 대동소이하다.)
1830년에 편찬되고 1872년에 교정된 강계읍지에도 분명 <동국여지승람>과 똑같은 내용이 적혀 있다.
그런데 호태왕 비가 발견된 근처 아불란사 터에 높이 3~4m 정도 되는 큰 석주가 있다.
필자는 이 석주가 위의 기록과 일치하는 금황제의 비석으로 생각된다.
물론 10장(丈)의 높이가 당시 얼마였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통상적으로 1장을 3m라 했으니 약 30m 정도인데 비석의 높이로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아마 10척(尺)의 오기로 본다. 아불란사 터 석주의 높이가 약 10척이고, 호태왕비의 높이는 20척이다. 그렇다면 1872년 이전에 호태왕비는 집안에 없었다는 것을 기록으로 입증했다고 할 수 있다.
▲ 명나라의 기록인 명일통지의 조선영토
고구려 광개토태왕과 장수왕 때의 주 강역은 분명 하북성이었다. 그런데 태왕묘와 호태왕비가 한참 떨어진 집안에 있었다니 잘 믿기지는 않지만 그럴 수도 있다.
집안에는 고조선과 고구려의 것으로 추정되는 피라미드가 산재해 있다. 원래 대전 현충원과 같은 신성한 소도와 같은 분묘도시이기 때문에 집안에 태왕의 묘를 세울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호태왕비는 여러 가지 기록으로 보아 거기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집안 지역은 현재 우리 사학계에서는 부인하고 있지만 분명 고려의 영토였다. 그렇다면 고려의 사서에 이 비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 지방은 중국의 여러 기록에서‘조선의 영토는 동서이천리 남북사천리’라 했듯이 조선의 영토이기도 했는데, 설사 조선의 영토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서간도를 개척할 당시 이렇게 큰 비가 우리 주민에 의해 발견되지 않았을 리가 없다.
그런데 조선의 사서에도 이 비에 대한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호태왕비는 원래 집안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2) 왜 비문의 기록과 다른 평지에 있나?
호태왕 비문에는 ‘以甲寅年 九月九日乙酉 遷就山陵 於是立碑 銘記勳績 (갑인년 9월9일 을유에 산릉에 모시고 비를 세워 훈적을 기록한다.’고 조각되어있다.
현재 비의 서남쪽 약 300m 지점에 있는 태왕릉(太王陵)은 부근에서 "願太王陵安如山固如岳"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벽돌이 발견되어 학계에서 광개토태왕의 릉으로 비정되었다.
그런데 현 태왕릉은 산릉이 아니고 평지에 조성되어 있다.
그러므로 현 태왕릉은 분명 광개토태왕의 능이 아닌 것이 확실하다. 태왕이라는 칭호를 쓴 다른 왕이 다른 어느 시대인가 있었거나,
누군가가 비를 옮겨다놓고 명문이 새겨진 벽돌을 능에 갖다놓은 것으로 보인다.
이 능이 어느 왕조 누구의 능인지는 필자도 알 수가 없지만, 분명한 것은 그 무덤의 주인공이 광개토태왕이 아닌 것은 확실해 보인다.
▲ 1900년대 초의 비석. 압록강과 산 사이의 평지에 관석과 대석도 없이 서 있다.
옆에 민가가 있는 것으로 보아 분명 비문에 나와있는 산릉이 아니지 않은가!
그리고 이렇듯 민가도 있었는데 왜 1876년 이전에는 발견 안 되었을까?
그렇다면 현 집안에 있는 이 호태왕비는 과연 원래 어디에 있었을까?
그 위치를 정확히 추정할 수는 없지만 분명 중국 땅 어딘가에 있었기 때문에 고려나 조선의 기록에 없는 것이고,
또 그 비를 누군가가 옮겼기 때문에 비문에 기록된 산릉과 다른 평지에 비가 서있다고 보는 것이다.
만일 옮겼다면 비의 무게가 37톤이나 되기 때문에, 육상으로의 운송은 현실적으로 많은 사람의 눈에 쉽게 띄어 불가능했을 것이고 아마 강을 따라 선박으로 옮겼을 가능성이 크다.
집안이란 압록강변으로 옮겨놓은 것으로 보아, 아마 고구려의 핵심강역이었던 하북성 연산산맥 어딘가에 있었던 것을 배를 이용해 옮긴 것으로 추정한다.
참고로 김성겸선생이 해석한 남당유고집 고구려사략에 보면 ‘태왕을 황산(黃山: 서안동조양산-西安東朝陽山)에 장사지냈다’고 되어 있다.
황산의 위치는 현재 알지 못하나, 조양이라는 지명은 북경 근처에 있다. 여하튼 하북성 북부를 흐르는 강은 난하와 조백신하 그리고 영정하가 있다.
이 강 중에 고구려의 수도였던 곳으로 들어가는 강이 과연 어느 강일까?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보면, 동천왕 때 위나라 관구검이 쳐들어와 환도성을 함락하고, 수하 장수를 시켜 추격하니 왕이 남옥저로 달아나는데, 죽령에 이르러 유유와 밀우장군이 목숨을 바쳐 왕을 지키는 활약이 나온다.
여기서 남옥저는 어디일까?
사학계는 남옥저를 함경도 북청일대로 비정하고 있다.
그러나 남옥저는 함경도가 아닌 요녕성 일대에 있었다.
<한단고기 대진국본기>에 나와 있기를, ‘대진국의 남경인 남해부는 본래 남옥저의 옛 땅이다. 지금의 해성현(海城縣)이 그것이다.
’해성현은 현 지명 해성시로 요녕성 요양과 가까워 고구려 패망 시에 사비성(沙卑城)으로 여러 사서에 많이 등장하는 지명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고구려의 당시 수도였던 환도성은 현 길림성 집안이 아니라 하북성이 맞다고 하겠다.
집안에서 관구검 기공비가 발견되었다. 위나라 유주(북경)자사인 관구검이 북경 일대에서 현 집안으로 쳐들어와 환도성을 함락시키고 남옥저(요녕성)로 달아나는 동천왕을 추격한 것이 아니고,
북경 쪽에서 하북성에 있던 환도성을 함락시키고 남옥저(요녕성) 땅으로 도망온 동천왕을 계속 추격해 길림성 집안까지 왔다고 봐야 그 순서가 맞고 행적이 맞는 것이다.
필자의 견해로는, 고구려의 도읍은 국내성과 환도산성이었으므로 국내성(안시성)과 환도산성으로 추정되는 난하 중류의 현 청룡산성(한단고기의 태조대왕의 요서 10성 중 개평 동북방 70리에 있는 안시성으로 추정)과 인근의 도산(都山: 丸都山城으로 추정) 부근에 원래 호태왕의 산릉이 있었다고 보는 게 유력하다 하겠다.
▲ 좌측은 국내성과 환도성의 위치. 우측은 호태왕비와 태왕을이 있는 위치.
누군가가 고구려의 수도인 국내성의 위치를 집안으로 위조하기 위해 비석을 몰래 평지에 가져다 놓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완전범죄는 없는 법이다.
3) 받침대(대석)가 없는 비도 있나?
무게가 37톤이나 되고, 높이가 6.34m나 되는 거대한 응회암으로 된 비석을 세우려면 당연히 지반침하를 막아야 하고, 넘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거대한 받침대(대석)가 있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상식 중의 상식이다.
▲ 현재 37톤의 하중을 이기지 못하여 깨어져 있는 받침석. 120년 정도에 이렇게 깨진 받침석은 원래 것이 아니다.
그런데 사진으로 본 1900년 초의 비석은 받침대(대석) 없이 그냥 땅위에 서 있던 것으로 보인다.
받침대도 없는 상태에서 지반침하도 없이 1,500년을 버텼다는 것은 솔직히 상식으로는 잘 이해가 안된다.
▲ 발견 초기의 비석 모습. 필자 눈에는 아래에 받침석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독자들은 받침석이 보이시는지?
현재 가로 세로 2.7m X 3.35m 높이 약 20cm의 화강암으로 된 받침대가 있는데, 3부분으로 나뉘어 깨져있다.
그리고 이상한 점은 받침대 가운데 비가 있는 것이 아니고, 한쪽 끝에 비가 있다는 것이다(제원사진참조). 비신이 있던 부분은 현재 약 5cm 가량 침하되어 있고, 대석 전체가 15-20cm 침하되어 있다.
즉 받침석이 비에 비해 너무 작고 형편없이 조잡하고 약하다는 점이다. 불과 약 120년 사이에 그 정도 침하되고 훼손되었다고 보면 된다.
고구려 때 황제비의 받침대(대석)을 이렇게 허술하게 만들었을 리가 없다. 분명 37톤의 무게를 오랫동안 견디도록 받침대를 크고 견고하게 만들었을 것이고,
만일 비를 세우고 120년 만에 이렇게 침하되었다면, 분명 후대의 왕 누군가가 제대로 다시 대석을 크고 튼튼하게 만들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현재의 대석은 너무 작고 하중을 못 견딜 정도로 부실하다보니 깨지고 망가진 것이다.
▲ 1900년대 초의 태왕비는 받침석이 없던 것으로 사진에 보인다. 위 사진과 다른 방향에서 찍은 것임.
4) 관석도 없는 묘비가 있나?
▲ 조선 5대 문종대왕의 비석. 관석과 받침석이 크다.
보통 다른 묘비에는 대부분 관석이 씌어져 있다.
일반인의 묘비에도 반드시 관석를 세우는 법이다.
하물며 제왕의 공적비인데 관석을 안 세웠을 리가 없다.
호태왕비도 상부는 약간 뾰족하게 되어 있고 상부에 가공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원래 관석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그 관석은 엄청 컸을 것으로 추정되어 인력으로 쉽게 오르내리기에 분명 힘들었을 것이다. 이건 개인이 아닌 조직이 동원되어 관석이 내려진 것으로 보인다.
원래 비가 있던 장소에서 관석을 내리고, 비를 배로 옮긴 다음 집안에다 비를 세우고, 다시 관석을 올리기가 사실 쉽지 않았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래서 관석은 그냥 어딘가에 버리고 비만 달랑 받침대(대석)도 없이 세운 것으로 보인다.
비를 세우려면 비문의 기록과 같이 산릉(山陵)에 올려야 하는데 비가 워낙 커서 편의상 압록강과 산 사이의 평지에 그냥 세운 것으로 보인다.
▲ 광개토태왕 비의 맨 윗부분은 가공의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애초에는 관석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광개토태왕 비문과 위치 조작의 진실
비를 옮긴 장본인은 중국이고,비문은 중국과 일본이 훼손했다
성훈 칼럼니스트
며칠 전 광개토태왕 비를 옮겼다는 몇 가지 의문점을 언급했으나 사실 확실한 물증은 아직 없다. 그러나 심증은 99.9%로 거의 확실하다.
그럼 누가 언제 왜 비를 원래 장소에서 압록강변 집안으로 옮겼을까를 유추해 보기로 한다.
누가 언제 왜 비를 옮겼을까?
우선 비를 옮긴 시기는 조선의 강계읍지가 교정 발행된 1872년부터 비가 최초 발견된 1876년 사이로 봐야 한다.
일제가 중국에 본격적으로 진출한 때가 1894년 청일전쟁 이후이므로, 일제가 주동해 이 비를 옮겼다고 볼 수는 없고 청나라가 비를 옮겼다고 본다. 그럼 청나라는 왜 이 비를 옮겼을까?
▲ 동치제가 6살에 즉위하자 섭정은 주로 서태후가 했다.
비가 옮겨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1872~1876년 사이의 청나라는 동치제(1861~1875)와 광서제 초기시대였다. 태평천국의 난과 아편전쟁을 겪은 청나라는 이른바‘동치중흥’이라 불리는 자강(自强)의 기치를 내세운 ‘양무운동(洋務運動)’을 3기로 나누어 추진했다.
이 운동은 청일전쟁의 패배로 끝내게 되는데, 일면 성공한 듯했으나 보수 사상에서 탈피 못하고 제도개혁이 뒷받침되지 못해 소기의 성과를 올리지는 못하였다. 여하튼 당시 그러한 자각이 있어 국가의 문물을 재정비하게 되고 서구의 발달된 과학기술을 받아들이게 된다.
이 운동과정에서 분명‘중국 역사세우기’가 있었을 것이고 그 일환으로 호태왕비가 중국인에 의해 옮겨졌을 것으로 보인다. 예전부터 중국은 이런 역사왜곡을 이미 많이 해왔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사서에 나오는 요하(遼河)의 위치 변경이고, 중국은 호태왕의 업적을 중국의 수치로 여겨 중국 25사에서 그 기록을 이미 다 지워버렸다.
또한 중국(청나라)이 비를 옮겼다는 사실은 단재 신채호선생의 <조선상고사>라는 책에서 비문을 답사한 내용을 적어놓는 대목에서 찾을 수 있다. 책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전략) 광개토태왕의 비문 가운데 선비 정벌에 대한 문구가 기재되지 아니하였음은 무슨 까닭인가?
내가 일찍이 호태왕의 비를 구경하기 위해 집안현에 이르러 여관에서 만주사람 잉쯔핑(英子平)이란 소년을 만났는데, 그가 필담으로 한 비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과 같았다.
"碑가 오랫동안 풀섶 속에 묻혔다가 최근에 잉시(榮禧:만주인)가 이를 발견했는데, 그 비문 가운데 고구려가 땅을 침노해 빼앗은 글자는 모두 도부로 쪼아내서 알아 볼 수 없게 된 글자가 많고,
그 뒤에 일본인이 이를 차지하여 영업적으로 이 비문을 박아서 파는데, 왕왕 글자가 떨어져 나간 곳을 석회로 발라 알아볼 수 없는 글자가 도리어 생겨나서 진실은 삭제되고 위조한 사실이 첨가된 듯한 느낌도 없지 않다."
그러니까 이 비문에 호태왕이 선비를 정복한 큰 전공이 없음은 삭제된 때문이다. 아무튼 호태왕이 평주를 함락시키고 그 뒤에 선비의 쇠퇴를 타고 자꾸 나아갔다면 호태왕이 개척한 토지가 그 존호 이상으로 넓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말한 바와 같이 호태왕은 동족을 사랑하는 이였으므로 연(燕)나라 신하인 풍발이 연왕(燕王)을 죽이고, 고구려 선왕의 서손으로 연나라에서 벼슬하던 고운을 세워 천왕(天王)이라 일컫고 호태왕에게 보고하니,
호태왕은 “이는 동족이니 싸울 수 없다.”하고 사신을 보내 즉위를 축하하고 촌수를 따져 친족의 의를 말하고 전쟁을 그만두니 호태왕의 북진정책이 이에 종말을 고하였다. (후략)
▲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록된 광개토태왕 비의 현재 모습. 중국에 의해 누각에 갇혀 신음하고 잇다.
위 책의 내용에서와 같이 비를 옮긴 장본인은 중국(청나라)으로 고구려가 선비를 정벌한 내용을 지워버리고, 고구려의 강역을 축소왜곡하기 위해 하북성에 있던 비를 집안으로 옮겨놓은 것으로 보인다.
비가 오랫동안 풀 속에 묻혀있었다는 만주소년의 진술에서 알 수 있듯이 최초에는 비를 옮겨다가 세우지도 않고 그냥 평지에 버리고 간 것을 나중에 집안사람들이 발견하고는 세운 것으로 보인다.
중국 사람들이 비를 옮겼기 때문에 당시 비문의 내용 중 자기네와 상관없을 것으로 본 왜와 관련된 내용을 없애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삼국사기>에 언급된 것과 똑같이 고구려와 연나라(선비족)는 동족(同族) 또는 종족(宗族)이었고, 새로 왕이 추대된 고운은 친족(親族)이라는 사실을 단재선생은 말씀하시고 계시다.
연나라에서 신하였던 한족 풍발이 역시 신하였던 고운을 추대했다고 한다. 연나라 전왕(前王)들이 고씨가 아니면 이는 역성혁명이다.
왕의 성이 달라지면 당연히 다른 왕조이나, 같은 나라로 이어진 것을 보면 연나라는 자고로 고(高)씨의 나라가 맞는 것이다. 모용씨는 나중에 바꾼 것으로 보인다.
혹자는 이런 질문을 할 수도 있다. “만주족은 사실상 고구려-->대진국-->요나라-->금나라-->청나라로 이어지는 적장자인데, 청나라가 뭐 하러 조상인 고구려 광개토태왕비를 옮기겠는가?”맞는 말이다.
그러나 청나라 초기에는 자신들이 동이족의 후예임을 표방했으나, 중원을 지배한 이후로는 한족(漢族)에 동화되어 그러한 의식이 쇠약해진다.
특히 말기로 내려오면서 그런 의식이 희박해졌고, ‘동치중흥’은 중국을 중흥시키자는 정책이지, 중국인에게 만주족이 고구려의 후예임을 강조하자는 정책은 아니었다.
▲ 내몽고와 몽고는 민족과 북부여/고구려의 고향
중국은 자신들과 직접 관련된 선비족 정벌의 비문 내용을 없애면서 광개토태왕 6년 북으로 현 내몽고지방의 염수(鹽水)를 정벌하고, 8년 남으로 토곡혼(吐谷渾: 현 티베트)을 순시했다는 내용은 없애지 않았다.
즉 염수와 토곡혼은 자기네 땅이 아니란 이야기이다. 이는 청나라 만주족이 주동이 되어 비를 옮긴 것이 아니라, 중원의 한족(명나라)이 주동이 되어 비를 옮겼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암시하고 있다고 하겠다.
일제와 중국에 의해 비문이 파괴된 상태에서도 광개토태왕 시절 정복한 최대 영토가 어디까지였는지 유추할 수 있어 눈길을 끈다. 중국과 일제는 광개토태왕에게 염수의 상류와 토곡혼만 정벌 당하고 그 사이에 있는 중국 땅은 정벌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참으로 웃기는 짜장면과 우동이라 아니할 수 없다. 호태왕이 군대를 이끌고 토곡혼(티베트) 정벌할 때 공수부대 데리고 비행기라도 타고 갔단 말인가?
▲ 토곡혼(티베트)의 위치. 대륙 서남부까지 고구려의 영역이었다. 대륙 동부와 남부를 거쳐 간 것으로 보인다.
하북성에 있던 고구려가 토곡혼(티베트)을 가려면 중원을 가로질러 가던가, 중원에 있던 5호16국을 피하려면 대륙 동부인 산동성을 거쳐 양자강을 지나 남부인 복건성과 광동성을 거쳐 운남성으로 가야 한다.
즉 이는 중국 대륙의 동부(백제와 신라)와 남부(왜)가 다 광개토태왕에게 정벌 당했다는 이야기와 같고, 과학적으로 박창범교수의 일식 기록 분석이 이를 뒷받침해 주고 있다. 여하튼 이러한 사실은 중국과 일본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아 보인다.
이상과 같이 광개토태왕비가 중국에 의해 옮겨졌다는 것을 알아보았다. 그런데 이것과 비슷한 사건이 또 하나 있었다. 1913년 일제가 하북성 갈석산에 있던 점제현신사비를 평안남도 온천군으로 옮긴 것도 이것과 같은 맥락이다.
점제현 신사비는 한사군이 한반도 북부에 있었다는 것을 유물로 입증하기 위해 반도사관 정착의 일환으로 일제가 옮긴 것이다.
점제현은 한사군의 핵심인 낙랑군에 소속된 행정단위였다. 그 신사비가 있었던 낙랑군 점제현을 현 평남 온천군으로 조작하기 위해 옮긴 것이다.
▲ 일제는 갈석산에 있던 신사비를 평남 온천군으로 옮긴다. 원래 사서에 나오는 갈석산은 진장성이 끝나는 황하 동쪽 산서성 태원 위쪽에 있는 백석산으로 보인다. 이미 중국은 산 이름과 신사비 위치를 조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점제현신사비는 북한에서 과학적인 방법(핵분열 흔적법)으로 옮겨졌다는 것을 입증했다. 그러나 이 호태왕비는 현재 중국 땅에 있는 유물이므로 북한이나 우리가 마음대로 조사를 못하고 있다.
만일 조사가 허락된다면, X-Ray 투시로 비가 옮겨졌는지 아닌지 쉽게 판명할 수 있으나, 중국 자신이 옮긴 고구려의 유물이므로 중국정부가 그것을 허락할 리가 없지 않은가!
중국은 광개토태왕비를 하북성 난하 중류에서 압록강변 집안으로 옮겨다 세워놓았고, 일제는 이를 근거로 나중에 좁은 집안의 평지에서 15km2 밖에 안되는 곳을 고구려인 수도인 국내성으로 비정했고,
거기서 얼마 안 떨어진 산 정상을 환도산성으로 비정했다. 왜 그랬을까?
광개토태왕비나 점제현신사비나 둘 다 이른바 중국과 일제가 각각 추진한 역사왜곡을 유물로 정착시키기 위한 음모이며 흉계였던 것이다.
▲ 중국과 일제에 의해 조작되고, 한국의 강단사학계에 의해 고착된 고구려의 수도 국내성과 환도산성. 그러나 이 거짓말은 과학에 의해 허구임이 명백하게 밝혀진다. 고구려의 수도는 하북성에 있었다.
일제에 의한 본격적인 비문 조작
▲ 신묘년 기사는 글자 자체를 위조했다는 이론이 끊이지 않고 있다.
나중에 광개토태왕비를 수중에 넣은 일제는 관동군 정보장교 사케오가케노부(酒句景信)가 가져온 원본 탁본을 보고는 학자들에게 연구를 시킨다.
그리고 비문에 석회를 발라 글자를 훼손하고 조작하고 탁본을 떠서는 만천하에 공개한다. 특히 광개토태왕이 왜를 정벌한 내용은 철저히 없애버리고,
신묘년 기사를 위조해 조선 지배의 정통성의 이론적 근거가 되는 임라일본부설을 임의조작하게 되는 것이다.
(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羅以以爲臣)의 신묘년 기사에 대한 일본 측 해석은 "신묘년 왜가 바다를 건너와서 백제와 가야와 신라를 파해 신민으로 삼았다" 이고,
우리 해석은 고구려를 주체로 하여 (고구려는)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와 파하고, 백제.가야.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
분명한 것은 고구려 비에 왜가 주체가 될 리가 없지 않은가?
그리고 일제가 신묘년 기사의 글자를 아예 변조했다는 학설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 일본서기의 일식기록을 분석해 보니 초기 왜의 위치는 남지나 해상의 섬이었다. 중국 사서의 기록과 일치한다.
일제가 이 신묘년 기사를 강조하는 이유는 예전에 일본의 조상들이 가야 땅에 임나일본부를 설치해 200년간 지배한 적이 있다는 학설로, 조선의 조상들이 옛날에 일본의 지배를 받았으므로 지금 조선이 일본의 지배를 받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는 논리를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얼마나 이 이론이 허황된 것인지는 박창범교수가 일본서기에 나와 있는 일식기록을 분석하여 일본의 전신인 왜의 위치가 밝혀짐으로서 더 이상 학설로서의 가치가 없다고 하겠다.
일제의 허구인 임나일본부설로 인하여 조선은 단군 이래 나라를 통째로 빼앗기는 재앙 중의 대재앙을 맞는다.
36년 만에 해방을 맞이하긴 했지만 일제의 잔재는 아직도 여러 방면에 많이 남아 있다. 물론 해방 후 올바른 위정자를 만나지 못해 친일을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이유가 제일 크겠지만, 과학적인 분석으로 임나일본부설이 허황되게 날조된 이론이라는 것을 밝히게 해준 박창범교수에게 이 자리를 빌어 심심한 사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역사의 진실을 밝힐 수 있게 해 주셔서 정말로 고맙습니다.”
<한단고기>를 엮은 계연수선생은 1895년에 비를 답사하여 비문의 내용을 적어 놓았는데, 1912년 비를 재답사한 계연수선생은 비문 중 광개토태왕이 왜를 정벌한 내용이 크게 훼손되어 있음을 발견한다.
1931년 제자 이유립선생은 계연수선생의 ‘비문징실(碑文徵實)’을 세상에 선보이게 된다. 즉 일제에 의한 비문 변조는 1895년에서 1912년 사이에 있었던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일제는 계연수선생을 여섯 토막을 내는 육시(戮屍) 후 압록강에 던져 버린다. 일제는 독립 운동했다고 이렇게 잔인하게 토막내어 죽인 적이 없다.
당시 일제의 최고 인물인 이또오 히로부미를 사살한 안중근장군도 재판받고 처형당한다. 그런데 이렇게 육시까지 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계연수선생이 비문을 적어 놓았다는 사실을 일제가 알았던 것으로 보인다.
일제가 비문을 어떻게 조작했는지는 아직도 연구대상이며, 한일 간 동양사학의 첨예한 대립의 장이기도 하다. 아래는 비문징실의 내용으로 빨간색 부분이 왜와 관련된 이야기로 일제가 없애버린 글자이다.
중요한 내용은 왜가 거국적으로 항복하였다는 기사가 나와 <한단고기>의 기록과 일치한다.
▲ 광개토태왕 비에 비가 내리니 석회로 조작한 곳에서 석회물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다.
(第2面9行)官兵 跡而越來攻來背 急追至任那 加羅從拔城 城卽歸服安 羅人戍兵拔 新羅城口城 倭滿倭潰城六
(병이 왜의 자취를 밟고 넘어 급히 쫓아 임나가라에 이르러 성을 치니 성은 귀복 하였다. 아라인 수병이 "신라성"을 발하였다. 0성에 왜가 가득 있었으나 왜가 무너졌고 6성이 우리의 공격을 받아 궤멸되어 남은 것이 없었다.)
(第2面10行)被我攻口滅 無遺倭遂擧 國降死者十 之八九盡臣 率來安羅人 戌兵滿假口 口倭欲敢戰與喙己呑卓淳
(왜가 드디어 거국으로 항복하니 죽은 자가 십중팔구나 되었으며 신하를 모두 데리고 왔다. 아라인 수병이 가00에 가득 차 있었다.
왜가 훼기탄, 탁순의 제적과 더불어 감히 싸우고자 하여 00을 꾀하였으나 관병이 먼저 이들을 제압하여 바로 탁순을 빼앗았다.
(第3面1行) 諸賊謀口口 官兵制先直 取卓淳而佐 軍由淡路島 到但馬右軍經難波至武藏王直到竺 斯諸賊悉自潰
(이어 좌군은 담로도를 경유하여 단마에 이르고, 우군은 난파를 경유하여 무장에 이르고, 왕은 바로 축사에 도착하니, 제적이 스스로 무너졌다. 드디어 이를 군으로 삼았다.)
(第3面2行) 遂分爲郡安 羅人戌兵昔 新羅寐錦未 有身來口口 口國岡上廣 開土境好太 王口口新羅寐錦口口僕勾
(아라인 수병. 예전에는 신라 매금(임금)이 스스로 와서 조공하는 법이 없었는데, 이제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 때에 이르러 신라 매금이 스스로 와서 조공하고 고구려에 복속하였다.)
▲ 일제가 민족정신 말살을 위해 우리의 고대사서 20만권을 불질렀다는 신문기사
호태왕 비문의 훼손은 일제가 우리의 고대사서 20만권을 불 지르고, 중요한 사서는 일본으로 가져가는 분서갱유와 맥을 같이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인류 문명의 시조가 되는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고, 대륙을 지배했던 천자국의 천손민족(天孫民族)의 후예들을 일개 섬나라가 식민지배하기 위해서는,
그 위대했던 조상의 역사부터 말살할 필요가 있었다.
이는 일왕 특명에 의한 조선인의 민족정신 말살정책이었던 것이다.
우리의 위대했던 역사에 대해 항상 열등감이 많았던 섬나라 일본은 임진왜란 때 조선을 침략해서도 사고(史庫)를 불태우고 문화재를 가져가는 등 온갖 역사 만행을 저질렀다.
메이지유신 이후 호시탐탐 조선을 집어삼키려고 노리던 일제는 드디어 그 가능성이 보이자 미리 계획한대로 역사말살 음모부터 개시한 것으로 본다.
일제에 의해 조작된 반도사관과 임라일본부설은 이미 <한단고기>와 박창범 교수의 <삼국사기> 일식분석으로 허구임이 백일하에 명백하게 밝혀졌다.
그런데 문제는 한국의 사학계가 아직도 일제가 만들어준 반도사관에 세뇌되어 위대한 민족사를 밝힌 <한단고기>를 위서(僞書)로 몰아붙이고 있다는 것이다.
사학계는 과학적 증거와 명백한 사서의 근거를 손에 쥐어줘도 여전히 일제가 만들어준 망국과 치욕의 국사를 숭상하고 고수하고 있다.
해방 62년이 넘었건만 아직도 일제대신 우리 국민들과 학생들의 민족정신과 얼을 스스로 말살하고 있는 사학계의 이런 행위는 이제는 고쳐져야 하며 국가의 내일을 위해 민족사학과 손을 잡아야 한다.
그래야 대한민국의 희망찬 미래가 열릴 수 있기 때문이다.
다음은 ‘고구려 수도 국내성은 어디에 있었나?’가 게재됩니다. 참고로 광개토태왕 시 고구려의 영토를 상상해 보시도록 중국 지도 하나를 올려 놓습니다.
▲ 중국의 주요 성시. 섬서성 주변 몇개 성을 제외하고는 다 광개토태왕이 정벌한 고구려의 영토로 봐도 됩니다.
광개토태왕비 논란과 임나일본부 실체
광개토태왕은 백제와 신라를 굴복시키고 나가 일본열도를 정복했다
문화부
광개토대왕릉비(廣開土大王陵碑)는 중국 지린 성 지안 시 퉁거우에 있는 고구려 제19대 광개토대왕의 능비이다.
414년 광개토대왕의 아들 장수왕이 세웠다고 전하며, 높이가 약 6.39m, 면의 너비가 1.5 m이고, 네 면에 걸쳐 1,775자가 화강암에 예서로 새겨져 있다.
이 가운데 150여 자는 판독이 어렵다. 내용은 대체로 고구려의 역사와 광개토대왕의 업적이 주된 내용이다. 이 비석은 조선 후기까지 확인된 적은 없었다.
그러다가 청의 만주에 대한 봉금제도가 해제된 뒤에야 비로소 발견되었다.
비석이 발견된 소식이 알려지자 여러 서예가나 금석학자들이 탁본을 만들었는데, 사람들이 보다 정교한 탁본을 만들기 위해 불을 피워 비석 표면의 이끼를 제거하는 과정에서 비면의 일부가 훼손되었고,
또한 석회를 발라 비면을 손상시킴으로써 이후 연구에 논란을 일으켰다. 특히 광개토대왕릉비의 신묘년조는 아직도 큰 논란거리가 되고 있다.
비석은 대체로 세 부분을 나누어진다. 고구려의 건국부터 광개토대왕까지의 역사를 다룬 첫째 부분은 묘비 제 1면 1행에서 6행까지이다.
광개토대왕의 정복 전쟁을 기술한 둘째 부분은 제1면 7행부터 3면 8행까지이다. 묘비 및 연호에 관한 마지막 부분은 제3면 8행부터 제4면 9행까지이다.
광개토대왕의 정복전쟁과 관련한 비문내용을 보면...() 안의 말은 보충 설명이다.
[395년 기사(영락 5년, 을미년) : 영락(영락은 광개토대왕의 연호로 추정됨) 5년, 그때는 을미년이었다.
왕은 비려가 붙잡아간 사람들을 귀환시키지 않자 몸소 군대를 인솔하고 토벌에 나섰다. 부산을 지나 염수의 상류에 이르러 3개의 부락 6,700 영(營)을 격파하고, 수없이 많은 소와 말,
그리고 양떼를 노획하였다. 거기서 돌아오면서 양평도를 거쳐 동쪽으로 ?성, 역성, 북풍에 이르렀다. 왕은 사냥을 준비시켰다. 그리고 국토를 즐기며 구경도 하고 사냥도 하며 돌아왔다.
396년 기사(영락 6년, 병신년) : 백잔(百殘. 백제를 낮춰 부른 말.)과 신라는 옛날에 우리의 속민이었기에 조공을 해왔다.
그런데 신묘년 이후로 백잔이 조공을 바치지 않음으로 백잔을 치고, 나가 신라 또한 공략하여 신민으로 삼았다. 영락 6년에 왕이 몸소 수군을 이끌고 백잔국을 토벌했다.
우리 군사가 백잔의 국경 남쪽에 도착하여, 일발성, 구모로성, 각모로성, (중략) , 종고로성, 구천성, 핍기국성을 공격하여 취했으며, 어느덧 백잔의 도성에 근접하였다. 그러나 백잔은 항복하지 않고 군사를 동원하여 덤볐다. 왕은 위엄을 떨치며 노하여 아리수를 건너 선두부대를 백잔성으로 진격시켰다.
백잔의 병사들은 그들의 소굴로 도망쳤으나, 곧 왕이 그들의 소굴을 포위했다. 그러나 백잔의 군주(아신왕)는 방도를 구하지 못하고 남녀 1천 명과 세포 1천 필을 바치고 왕 앞에 무릎을 꿇고 맹세하였다.
"지금부터 이후로 영원토록 노객이 되겠습니다." 이에 태왕은 은혜를 베풀고 용서하여 후에도 그가 성의를 다하며 순종하는지 지켜보겠다고 했다.
이번에 모두 백잔의 58개 성, 7백 개 촌을 얻었다. 또한 백잔주의 형제와 백잔 대신 10인을 데리고 출정했던 군대를 이끌고 도성으로 돌아왔다. (논란 부분을 참고할 것)
398년 기사(영락 8년, 무술년) : 8년 무술년에 일부 군대를 백신의 토곡에 보내 순찰하도록 했다. 그 결과 막사라성, 가태라곡의 남녀 3백여 명을 잡아왔으며, 이로부터 조공하고 정사를 보고했다.
399년 기사(영락 9년, 기해년) : 9년 기해년에 백잔이 맹세를 위반하고 왜와 화통하였다. 이에 왕은 하평양을 순시했다. 그러자 신라가 사신을 보내 왕에게 아뢰기를 그 나라에는 왜인이 가득하여 성들을 모두 파괴하고, 노객(앞서 396년 기사에서 신라를 고구려의 속민이라고 불렀으므로,
여기서의 노객은 신라 왕인 내물왕)을 천민으로 삼았으니, 의탁하여 왕의 지시를 듣고자 한다고 하였다. 태왕은 인자하여 그 충성심을 칭찬하고, 사신을 돌려보내면서 밀계를 내렸다.
400년 기사(영락 10년, 경자년) : 10년 경자년에 태왕은 교시를 내려 보병과 기병 5만을 보내 신라를 구원하게 했다. 그때 남거성으로부터 신라성에 이르기까지 왜인이 가득했다. 관군이 그곳에 이르자 왜적은 퇴각하였다.
이에 우리가 왜적의 뒤를 추적하여 임나가라(아라가야)의 종발성에 이르자 그 성은 즉시 항복하였다. 이에 신라인을 안치하여 병사를 두고 지키게 하였다. 신라성, 감성 등에서 왜구가 크게 함락되었다. 성 안에 있던 10분의 9의 신라인들은 왜를 따라가기 거부했다. 이에 신라인을 안치하여 병사를 두게 하였다.
신라성 (내용 훼손으로 알 수 없음) 나머지 왜군은 궤멸되어 달아났다. 지금껏 신라 매금(이사금)은 스스로 와서 명령을 청하고 조공논사하지 않았다. 광개토경호태왕에 이르러 신라 매금은 명령을 청하고 조공하였다.
404년 기사(영락 14년, 갑진년) : 14년 갑진년에 왜가 법도를 어기고 대방 지역을 침략하였다. 그들은 백잔군과 연합하여 석성을 공략하였다. (훼손) 늘어선 배 (훼손) 왕은 몸소 군사를 이끌고 그들을 토벌하기 위해 평양을 출발하였다.
그리고 ???봉에서 적과 만났다. 왕은 적을 막아서며 대열을 끊고 좌우에서 공격하였다. 왜군은 궤멸되었고, 죽은 적은 수없이 많았다.
407년 기사(영락 17년, 정미년) : 17년 정미년에 보병, 기병 5만을 출병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훼손) 왕은 사방 포위작전을 지시했다.
적은 대부분 궤멸되었으며, 개갑(鎧鉀) 1만여 개와 수를 헤아릴 수 없는 많은 군자기계를 획득했다. 돌아오는 길에 사구성, 누성, 우불성, ?성, ?????를 격파했다.
410년 기사(영락 20년, 경술년) : 20년 경술년, 동부여는 옛날 추모왕(동명성왕)의 속민이었으나 중도에 베반하여 조공을 하지 않았다. 왕이 몸소 군대를 이끌고 토벌에 나섰다. 군대가 부여성에 이르자 부여는 거국적으로 두려워하여 굴복했다.
그리고 (훼손) 을 바쳤다. 왕의 은덕이 모든 곳에 미치자 환국하였다. 또 그때에 왕의 교화에 감화되어 관군을 따라 미구루압로, 타사루압로, 숙사사압로, ???압로 등이 왔다. 왕은 일생 동안 64개 성, 1400촌을 공격하여 무너뜨렸다.
비문내용 중 ‘신묘년조’논란은 영락 6년(396) 기사에 실린 다음과 같은 부분에서 시작된 논란이다. "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新羅以爲臣民"-이 부분의 내용은 1888년에 일본인 학자 요코이 다다나오가 쌍구가묵본(雙鉤加墨本)을 바탕으로 한 비문내용을 공개함으로써 세상에 알려졌다.
후에 이 기사는 일본인 학자들에 의해 4세기 후반 진구 황후(신공황후)의 한반도 남부지역 정벌을 입증해주는 증거로 활용되었으며, 이후에는 임나일본부설로 이어진다.
이후 한국인 학자들에 의해 연구가 진행되면서 이 기사에 대한 다른 해석이 등장하였다. 민족주의 역사학자 정인보는 위 기사의 주어를 "倭"가 아닌 '고구려'로 보고,
"신묘년이래로 왜가 도래하자, 바다를 건너 백잔을 치고 신라를 구원하여 신민으로 삼았다."로 해석한다. 이 해석이 현재 주류, 비주류를 가리지 않고 한국인 역사학자 대부분의 해석이다.
일제가 비문을 훼손했다는 흔적을 뚜렷히 볼 수 있다. 정확한 비문의 해석은 "신묘년이후로 백잔(백제)이 조공을 바치니 아니하니 백잔을 굴복시키고 나가 신라까지 공략하여 신민으로 삼았다."가 정확한 해석이 되는 것이다.
당시 한반도와 중국대륙의 패권을 두고 벌였던 백제와 고구려와의 팽팽한 긴장관계를 이해해야만 해석이 가능해지는 대목이다.
나아가 이후 재일동포 사학자 이진희가 비문 자체가 조작되었음을 주장하였고, 이형구는 비석 자체를 검토한 바, '倭'라는 글자는 '後'를 조작한 것으로, '來渡海破'라는 글자는 '不貢因破'를 조작한 것으로 주장하여, 비문을
"신묘년 이래 (백제와 신라가) 조공을 하지 않으므로, 백잔과 신라를 치고 신민으로 삼았다."라고 해석했다.
재야사학자 박영규는 비문조작설은 부정하면서, 두 가지의 비문 해석이 모두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19세기 일본인 학자들의 주장처럼 왜가 백제와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는 것은 백제 공격을 위한 광개토대왕의 정당화작업으로 볼 수 있으며, 이후 민족주의 역사가들에 의한 해석은, 광개토대왕이 본거지인 요동 지방에서 백제의 도성이 있는 한강 지역을 바로 공략하기 위해 수군을 동원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평양과 하평양 논란’이다. 주류 사학계에서는 그동안 현대의 평양이 고조선과 고구려의 수도인 평양성으로 인식해 왔다.
그러나 흉노의 전조에서도 초기에 '평양성'을 주요 본거지로 했던 것에서 볼 수 있듯, 현대의 평양과 고구려의 평양이 반드시 같을 이유는 없다는 설 역시 제기되고 있다.
영락 9년 기사에, "백잔이 맹세를 위반하고 왜와 화통하엿다. 왕은 하평양을 순시하였다."라는 구절이 있는데,
박영규는 여기서 "王巡下平壤"라는 구절이 "왕이 아래로 내려가 평양을 순시했다."라고는 절대 해석될 수 없다면서, 동천왕이 247년에 도읍지로 정한 평양이 요동 지방에 있으며, 백제와의 전쟁을 위해 순시한 '하평양'이 현대의 평양이라고 주장하였다.
▲ 단군조선과 부여를 계승한 적통 고구려의 후손들로 천손민족 대한민국 황실을 국가적 차원에서 복원하는 것도 민족사 바로세우기 차원에서 검토할 문제라고 본다.
광개토태왕이 신라를 신민으로 만들었다는 역사적 사실은 지난 1986년 경상남도 합천군 성산리에서는 놀라운 발견이 있었다. 수물 일곱개의 거대한 봉분과 천여기가 넘는 소형고분이 천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4세기에서 6세기에 걸친 지역 수장들의 공동무덤이었다.
그런데 무덤을 발굴하는 과정에서 아주 특이한 현상이 나타났다. 5세기의 고분에서부터 이전과는 다른 전혀 새로운 유물들이 출토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철로 만든 갑주류였다.
군사들이 썼을 것으로 보이는 견고한 철제투구, 말머리에 씌운 철제 말 투구, 그리고 말에게 입힌 갑옷 조각들,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이런 유물들이 느닷없이 나타난 것이다.
좀 더 남쪽에 있는 부산 복천동 11호분은 5세기 중엽으로 추정되는 지역수장의 고분이다. 그런데 이 고분에서도 옥전고분에서 출토된 갑주류와 똑같은 모양의 유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복천동 고분에서는 철제투구외에도 철제 목 가리개와 그리고 말 엉덩이에 달았던 철제 깃발 꽂이까지 출토되었다. 이 유물들은 도대체 어디에서 온 것일까? 그 해답을 발견한 곳은 바로 고구려의 벽화였다. 벽화속에 그려진 고구려 군사의 투구와 목가리개는 두 고분에서 출토된 유물과 정확이 일치했다. 역시 고구려 군사가 타고 있는 말 투구, 꼬리장식도 유물의 모양과 똑 같았다.
이 유물들은 틀림없이 고구려의 것과 같은 것이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고구려 벽화속의 화살통 장식을 그대로 떼어낸 것처럼 가야의 고분에서 똑같은 무늬의 유물이 나온 것이다. 이렇게 고구려의 갑주가 한반도 남부에서 갑작스럽게 나타난 이유는 무엇일까?
도립 박물관장 "가장 주목되는 것은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 훈적비문(勳積碑文)에 나온 서기 400년 경자년 고구려의 낙동강 유역의 남정(南征)에 하나의 근거를 찾을 수 있지 않는냐 생각이 듭니다."
고구려는 5세기 무렵 한반도 남부 깊숙한 곳까지 세력을 뻗고 있었다.그렇다면 당시 신라와의 관계는 어떠했을까? 충청북도 중원군 입석리 당시 신라의 땅이었던 이곳에 고구려인들은 비석을 하나 세웠다.
이 중원고구려비(中原高句麗碑)의 희미한 비문 속에 두나라의 관계를 알 수 있는 열쇠가 있다. 신라토내 당주, 이것은 신라에 주둔해 있는 고구려군의 우두머리를 말한다. 이렇게 군대를 주둔시켰다는 사실은 당시 고구려가 신라를 지배하고 있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 백제 정복군주 근초고왕이 일본열도를 정복하고 일본왕에게 하사한 칠지도.일본열도는 백제왕족들의 직접 통치지역
이번에는 ‘임나 일본부’설에 대해 문제를 논하기로 하자. 먼저 일본을 왜 ‘왜’라고 하는지부터 알아 보면, '일본의 고문서 일본서기나 고사기에 나타난 인명과 씨족명을 보면 천황, 황녀, 황자 등이 위[倭]라는 인명을 가장 많이 쓰고 있다.
씨족명(氏族名)으로 "倭"를 쓰는 것은 밝지[百濟]에서 온 위한치[倭漢直]를 중심으로 위화사[倭畵師], 위마사부조[倭馬飼部造], 위군[倭君] 등으로 "倭"를 쓰는 인명이나 씨족명은 모두 천황가(天皇家)와 밝지[百濟]에서 온 씨족들에 한정되어 있다.
"倭"라는 글자가 지명(地名)으로 쓰일때는 율령시대의 대위국[大倭國]인 지금의 나라[奈良]현을 가리켰고, 후세의 야마또향(大和鄕)인 지금의 천리(天里)시 등이다.' 倭의 일본식 발음은 와(わ)인데 大和의 "和"도 "倭"와 같이 "와"로 발음된다. 결국 큰 위[大倭]나 큰와[大和]는 다 같은 발음의 같은 뜻이다. 倭= 濊(예-중국식발음은 wei)=倭=于台=上. 大和=대화는 대(大, 큰), 화(와, 倭, WEI, WUI, WAH) = 왜족으로 대동통일(大同統一)을 뜻한다.
일제가 조작한 광개토태왕비문 내용을 보면, “영락대왕10년 경자년에 태왕은 교시를 내려 보병과 기병 5만을 보내 신라를 구원하게 했다. 그때 남거성으로부터 신라성에 이르기까지 왜인이 가득했다. 관군이 그곳에 이르자 왜적은 퇴각하였다.
이에 우리가 왜적의 뒤를 추적하여 임나가라(아라가야)의 종발성에 이르자 그 성은 즉시 항복하였다. 이에 신라인을 안치하여 병사를 두고 지키게 하였다. 신라성, 감성 등에서 왜구가 크게 함락되었다. 성 안에 있던 10분의 9의 신라인들은 왜를 따라가기 거부했다.
이에 신라인을 안치하여 병사를 두게 하였다. 신라성 (내용 훼손으로 알 수 없음) 나머지 왜군은 궤멸되어 달아났다. 지금껏 신라 매금(이사금)은 스스로 와서 명령을 청하고 조공논사하지 않았다. 광개토경호태왕에 이르러 신라 매금은 명령을 청하고 조공하였다. ”
▲ 백제문화의 정수 - 백제 향로
[일본서기]의 내용에 근거하여 왜(일본)는 신공황후가 사망한 A.D 247년에 일어난 내란으로 야마대연맹이 와해되자 구태백제는 일본열도를 통치함에 있어 백제왕에게 도전할 가능성이 있는 연맹왕(聯盟王) 통치체제를 버리고 소국분립(小國分立) 통치체제로 일본열도를 직할통치하였다.
이 소국분립 통치체제는 A.D 390년에 백제가 대화 지역에 응신조(應神朝)를 세울 때까지 계속되었고, 이 시기 백제는 일본열도에 있는 수십 개의 백제계 소국에 각 담로왕(담魯王)을 보내었다.
때문에 일본서기에는 이 시기에 일본천황에 관한 역사가 적혀 있지 않고 백제왕에 관한 역사 즉 백제 근구수왕, 근초고왕, 침류왕의 즉위와 사망에 관한 사실이 연도가 120년 인상된 채 신공황후기에 짜깁기 되어 있다.
이는 A.D 247년 신공황후 사망후부터 A.D 390년 응신천황 즉위 시까지 천황공백기를 감추고 천황의 연속성을 가장하기 위하여 응신천황의 즉위시기를 연도를 120년 앞당겨 A.D 270년에 즉위한 것처럼 적어 놓았기 때문에 신공황후 사망 후부터 응신천황 즉위 사이에 일어난 사실도 연도를 120년 인상하여 적어 놓았기 때문이다.
「신공황후 55년(A.D 255년) (근)초고왕 사망(A.D 375년)하다.」[참고:255=375-120.]
「신공황후 56년(A.D 256년) (근)구수왕 즉위(A.D 375년)하다.」[참고:일본서기는 삼국사기와 달리 전 왕이 죽은 다음 해를 다음 왕의 즉위 년도로 보기 때문에 256년으로 적혀 있다.]
「신공황후 64년(A.D 264년) (근)구수왕 사망(A.D 384년)하다.」
「신공황후 65년(A.D 265년) 침류왕 사망(A.D 385년)하다. 왕자 아신(=아화.아방)이 나이가 어려 숙부 진사(辰斯)가 빼앗아 왕이 되었다.」
고구려에서는 AD 391년 광개토 태왕이 약관 17세의 어린 나이로 태열제에 등극하였는데, 양국에 있어서 국경을 마주보고 있는 지역적 상황과 백제와의 악화된 외교 상황(조부 고국원왕의 죽음)에서 서로 간의 동아시아의 패권을 놓고 한바탕의 충돌은 불가피한 과정이었다.
한반도에 아신 태자와 다시 온 응신 왜왕은 진사왕과의 전쟁보다도 먼저 신라가 조공관계를 거부하고 있으므로 신라 정벌을 선언했고 이에 위협을 느낀 신라 내물 마립간은 고구려에 사절을 보내 실성 왕자를 질자로 하여 군신관계를 맺고 구원을 요청한다.
이에 대해 고구려 광개토 태왕(이하 호태왕)은 근초고왕 최전성기에 있었던 백제국이 온조계와 비류계간의 왕권 주도를 놓고 치열하게 대립하는 내분으로 인해 국력이 현저하게 약해진 정세 판단하에서 신라와의 군사협정을 통해 외교적 명분도 얻게 되자 조부 고국원왕의 복수도 겸해 백제와의 한판 전쟁을 결심한다.
한편, 백제 침류왕의 아들 아신태자는 왜에 같이 있었던 백제 왕족인 응신과 연합해 숙부 진사에게 잃었던 왕위를 되찾기 위해 진사왕을 공격한다. 결국 아신은 백제의 왕이 되고 응신은 왜왕이 된다.
그러다가 광개토태왕의 공격을 받고 아신왕은 백년노객이 되겠다는 맹세와 함께 태왕에게 항복하고, 응신은 왜로 도망가고 광개토태왕이 정벌을 한다. 차후 고구려의 영향권에서 벗어난 응신은 405년에 야마토왜(大和倭)를 세워 일본의 고대국가 기원이 된다. 이 응신이란 인물이 현 일본 국민들이 추앙하고 있는 응신천황이다.
왜(일본)의 응신조(應神朝)는 대화(大和) 지역을 중심으로 한 소국연맹체(小國聯盟體)이다. 백제는 A.D 247년에 야마대연맹이 와해된 후 백제왕에게 도전할 가능성이 있는 연맹왕 통치체제를 버리고 소국분립(小國分立) 통치체제로 일본열도를 직할통치하다가 A.D 386년에 고주몽고구려의 태자가 된 담덕(談德)이 온 힘을 집중하여 백제 공격을 준비하자,
이에 다급해진 구태백제는 고주몽고구려 방어에 일본열도왜를 이용하기 위하여 A.D 390년에 대화(大和) 지역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소국연맹체인 응신조(應神朝)를 세웠다.
일본서기에는 응신천황이 A.D 270년에 즉위한 것처럼 적혀 있으나, 응신천황기 3년조 사실은 삼국사기 백제본기 진사왕기(辰斯王紀) 8년(A.D 392년)조 사실이므로, 응신천황이 즉위한 해는 A.D 390년이다.
「응신천황 3년(일본서기년도 A.D 272년 실제년도 A.D 392년) 이 해 백제의 진사왕(辰斯王)이 귀국(貴國)의 천황에게 무례하였다. 그래서 기각숙니(紀角宿니), 우전시대숙니(羽田矢代宿니), 석천숙니(石川宿니), 목도숙니(木도宿니)를 보내 그 무례함을 책하였다.
이 때문에 백제국은 진사왕을 죽여 사죄하였다. 기각숙니(紀角宿니) 등은 아화(阿花)를 왕으로 세우고 돌아왔다.」
이 시기 백제가 응신조(應神朝)를 九州에 세우지 않고 대화 지역에 세운 것은 구태백제가 야마대연맹을 복속시킨 후 백제계 이주민들이 이주 여지가 거의 없는 九州보다 이주 여지가 많은 本州의 이세, 대화 등지로 대량 이주함으로써 이세, 대화 등지가 백제계 이주민들의 중심지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응신조는 건국 후부터 구태백제를 보좌(補佐)하였는데, 구태백제는 A.D 391년에 응신조 왜 무력을 배경으로 신라를 위협하여 신라왕자 미해(美海)를 인질로 받아 신라를 복속시켰다.
그 후 A.D 399년에 응신조 왜는 구태백제를 보좌하여 신라를 공격하였다가 다음해 A.D 400년에 광개토왕의 공격을 받고 멸망하였고, 그 때부터 A.D 479년까지 대마도에 세워진 임나연정의 통제를 받았다.
A.D 400년에 광개토왕은 대마도(對馬島)를 점령한 후, 이어서 대화왜(伊), 구주왜(倭) 무리들로부터 항복을 받고, 10개의 나라로 구성된 연정(聯政)을 설치하여 그 치소(治所)를 대마도에 두었는데 이를 임나연정이라 한다. 이 임나연정은 A.D 479년까지 존속하였다.
위 임나연정의 임무는 한반도, 대마도, 일본열도를 군사적으로 통제하는 것이었고, 임나연정 시기 구주왜와 대화왜는 임나연정왕(任那聯政王)에게 복속하였다.
송서(宋書)에 의하면 임나연정의 초대 왕은 찬(讚)이다.
그 뒤 임나연정왕 진(珍)은 송으로부터 안동장군왜국왕(安東將軍倭國王)이라는 작호를 받았다.
A.D 443년에 임나연정왕 제(濟)는 송으로부터 안동장군왜국왕(安東將軍倭國王) 작호를 받았고, A.D 451년에 다시 송으로부터 사지절도독왜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6국제군사왜국왕(使持節都督倭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六國諸軍事倭國王)이라는 작호를 받았다.
A.D 462년에 임나연정에 내분이 일어나 반고주몽고구려계가 승리하였다. 이때부터 임나연정은 고주몽고구려의 세력권에서 벗어나 독립세력으로 변하였고, 고주몽고구려는 임나연정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하였다. 이 해 왕세자 흥(興)이 송(宋)으로부터 안동장군왜국왕(安東將軍倭國王)이라는 작호를 받았다.
일본서기에는 임나연정에 내분이 일어난 연도가 A.D 464년으로 적혀 있고, 사신을 보낸 상대국이 오국(吳國)으로 적혀 있다. 이 시기는 양자강하류에 송(宋)이 건국되어 있을 시기이고, 송서(宋書)에 왜왕 흥(興)이 송(宋)에 사신을 보낸 연도가 A.D 462년으로 적혀 있으므로,
임나연정에 내분이 일어나 제(濟)가 퇴진하고 왕세자 흥(興)이 즉위한 연도는 A.D 462년이다. 이 시기 일본서기 연도는 실제보다 2년 늦어져 있다.
일본서기에는 A.D 465년에 기소궁숙니(紀小弓宿니) 등이 신라를 공격하였으나 패하여 기소궁숙니 등이 모두 죽었다고 적혀 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왜가 신라를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물러간 사실이 A.D 463년조에 적혀 있다. 이때도 일본서기년도와 실제년도간에 2년 차이가 난다.
A.D 478년에 임나연정왕 무(武)가 송(宋)에 사신을 보내어 "倭百濟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7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國王" 작호를 내려 달라고 요청하여 송으로부터 백제를 빼고 "使持節都督倭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六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國王" 작호를 받았다.
A.D 479년에 축자(筑紫)의 안치신(安致臣), 마사신(馬飼臣) 등이 수군(水軍)을 거느리고 고주몽고구려를 쳤으나 고주몽고구려 수군에게 패배하였다.
송서(宋書)에는 이때 고주몽고구려 수군(水軍)과 싸운 주역이 무(武)로 적혀 있다. 이때 축자(筑紫)의 안치신(安致臣) 등이 임나연정왕 무(武)의 지휘 아래 있었다는 것은 A.D 479년까지 구주왜가 임나연정에 복속하고 있었음을 뜻한다.
임나연정은 이 전쟁에 패배한 후 와해되었다.
A.D 502년에 양(梁)나라가 건국되었을 때 무(武)는 양나라로부터 정동장군(征東將軍)이라는 작호(爵號)를 받았다.
무(武)는 임나연정의 마지막 왕이므로, 양서(梁書) 문구를 언뜻 보면 임나연정이 A.D 502년까지 존속한 것으로 착각할 수 있다. 그러나 무(武)가 A.D 502년에 양나라로부터 정동장군 작호를 받은 것은 임나연정이 A.D 502년까지 존속했기 때문이 아니다.
이는 A.D 479년에 임나연정이 와해된 후 A.D 487년에 대마도가 백제에 점령당하였는데, 그 후 A.D 501년에 일어난 백제왕실의 내분으로 백제가 대마도를 돌볼 틈이 없자 무(武)는 그 틈을 타서 A.D 502년에 양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정동장군 작호를 받은 것이다.
A.D 479년에 임나연정이 와해된 후부터 대마도왜(對馬島倭), 구주왜(九州倭), 대화왜(大和倭)는 각 독립세력이 되었다.
A.D 487년에 대마도(對馬島)의 기생반숙니(紀生磐宿彌)가 고주몽고구려와 통교하여 삼한(三韓)의 왕이 되어 백제의 동로(東路)를 막으려 하다가 패배하여 대마도는 백제에 점령당하였다.
A.D 487년에 대마도를 점령한 백제는 다시 구주왜와 대화왜를 평정하고 A.D 488년에 대화 지역에 소국연맹체(小國聯盟體)인 인현조(仁賢朝)를 세웠다. 이 인현조도 응신조(應神朝)처럼 백제를 보좌하였다.
▲ 일본에는 고대 백제와 일본열도와의 밀접한 관계성을 증명하는 수 많은 백제지명들이 존재한다
일본은 광개토태왕비문의 내용인 "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新羅以爲臣民"을 가지고 일본이 백제와 신라를 지배했다고 해석을 하는데, 당시 일본열도는 백제의 왕족들이 직접 통치하여 상국 백제와 형제국이나 다름없고, 문명을 전해준 강국 백제를 상국으로 떠 받들고 있는 상황인데, 백제를 지배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인 것이다.
백제가 멸망한 후 일본열도에 일본국을 건국하고 편찬한 [일본서기] 29대 킨메이(欽明) 條에 보면 [임나일본부]에 관련하여 더욱 분명해진다.
1) 킨메이(欽明) 2년 7월에는 ‘일본부 하내직이 왜와는 별도로 신라와 통했다.’
2) 킨메이(欽明) 5년 2월에는 ‘일본부는 안라에 대한 왜의 계획을 백제.신라에 가서 들었다.’
3) 킨메이(欽明) 5년 3월에는 ‘일본부는 안라를 아버지로 삼아 오직 그들만을 따른다’
4) 킨메이(欽明) 9년 4월에는 ‘일본부가 안라를 위해 고구려와 내통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임나일본부]의 북쪽에 바다가 있다"고 일본서기에 나온다 즉, 임나일본부는 한반도와 일본열도를 연결해주는 [대마도]다. "우리가 왜적의 뒤를 추적하여 임나가라(아라가야)의 종발성에 이르자 그 성은 즉시 항복하였다
. 이에 신라인을 안치하여 병사를 두고 지키게 하였다. "라는 광개토태왕비문 내용은 바로 [대마도]를 포함하여 일본열도를 정복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한 [일본서기]내용처럼 일본부가 왜의 통제를 받는 것이 아니라 안라국왕의 통제 하에 있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안라국왕]이란 당시 왜(백제계)의 왕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 왜인전(倭人傳)]에 의하면 말로국(末盧國)에서 일기국(一岐國)까지 거리가 천여리, 일기국(一岐國)에서 대마국(對馬國)까지 거리가 천여리, 대마국(對馬國)에서 구야한국(狗邪韓國 : 김해 방면)까지의 거리가 천여리이다.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 왜인전(倭人傳)]에 의하면 축자국(筑紫國)에서 2천여리 떨어져 있고 북쪽이 바다로 막혀 있는 곳은 대마도(對馬島)이다. 이는 환단고기(桓檀古記)에 적혀 있는 임나(任那)의 위치(位置)와 일치한다. [일본서기(日本書紀) 흠명천황본기(欽明天皇本紀)]에는 통틀어 임나(任那)라고 하고 세분(細分)해서는 합해서 10국이라고 적혀 있다. 임나(任那)는 대마도(對馬島)이므로, 일본서기(日本書紀)에 의하면 고대에 대마도(對馬島)에는 10국이 있었다.
[일본서기]에 보면「흠명천황(欽明天皇) 23년(A.D 562년) 춘 정월 신라가 임나의 관가를 쳐 없앴다.(일서에 말하였다. 흠명천황 21년(A.D 560년)에 임나가 망하였다고 한다. 통틀어 임나라고 하고, 세분해서는 가라국, 안라국, 사이기국,
다라국, 졸마국, 고차국, 자타국, 산반하국, 걸손국, 임례국 합하여 10국이다. 三年春正月新羅打滅任那官家一本云二一年任那滅焉總言任那別言加羅國安羅國斯二岐國多羅國卒麻國高嵯國子他國散半下國乞飡國稔禮國」 日本書紀 欽明天皇紀 23年條
임나연정(任那聯政)은 광개토왕(廣開土王)이 대마도(對馬島), 일본열도왜(日本列島倭), 한반도의 백제지역과 신라지역을 복속(服屬)시키고, 복속지(服屬地)를 통제(統制)하기 위하여 A.D 400년에 요지(要地)에 있는 10국으로 만든 연립정부(聯立政府)이다. 이 연정(聯政)의 치소(治所)는 임나(任那:대마도)에 있었다. 그 때문에 이 연정(聯政)을 임나연정(任那聯政)이라 부른다.
대마도(對馬島)를 뜻하는 임나(任那)와 임나연정(任那聯政)을 뜻하는 임나(任那)는 의미(意味)가 다르므로 꼭 구별(區別)해야 한다.
한단고기(古記)에 의하면 영락(永樂) 10년에 광개토왕(廣開土王)이 임나(任那:대마도)를 점령한 후 이(伊:대화왜), 왜(倭:구주왜)의 무리는 따르지 않는 자가 없었다고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일본열도왜(日本列島倭)는 광개토왕(廣開土王)이 대마도(對馬島)를 점령(占領)한 후 곧 항복(降伏)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대마도(對馬島)는 왜(倭) 견제(牽制)에 있어 전략적(戰略的)으로 아주 중요(重要)한 위치(位置)에 있다. 광개토왕(廣開土王)은 임나(任那:대마도)의 전략적(戰略的) 중요성(重要性)을 알고 임나(任那)에 임나연정(任那聯政)을 두고 수군(水軍)을 주둔(駐屯)시켜 왜(倭)와 백제(百濟) 간의 통로(通路)를 통제(統制)하였다.
그러나 광개토왕이 설치한 이 임나연정(任那聯政)은 A.D 479년에 멸망하였다.
A.D 501년에 대화왜가 무령왕(武寧王)을 지원하여 동성왕(東城王)을 몰아낸 후부터 대화왜와 백제와의 관계가 역전되어 대화왜는 종전까지 종주국으로 섬기던 백제를 노골적으로 무시하였고, 백제는 대화왜의 지원을 받는 처지로 전락하였다.
A.D 527년에 계체천황(繼體天皇)이 모야신(毛野臣)을 임나(任那)에 보내어 신라에 패한 바 있는 남가라(南加羅)와 록기탄(록己呑)을 회복하여 임나(任那)에 합치고자 하였으나, 구주왜 축자국조반정(筑紫國造磐井)의 방해로 중단하였다.
이는 신라가 구태백제의 세력권에 들어 있던 대마도 내 소국인 남가라, 록기탄을 점령하자 시류(時流)에 민감한 구주왜가 구태백제의 후국(侯國)인 대화왜(大和倭)에서 이탈하여 신라 편에 붙으려 한 것으로 보인다.
이 무렵 구주왜는 A.D 522년경부터 독자적인 연호(年號)를 사용하고 있었는데, 이는 백제가 일본열도왜에 대한 종주권을 상실한 후부터 구주왜가 백제나 대화왜 정부로부터 독립하여 독자적인 정부를 세우고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A.D 528년 11월에 계체천황(繼體天皇)은 장군 물부추록화(物部추鹿火)를 보내어 반정(磐井)을 토벌하였다. 이 토벌이 성공한 후 계체천황(繼體天皇)은 추록화(추鹿火)에게 독자적으로 축자(筑紫) 서쪽 지역을 다스리게 하였는데, 이 구주왜 정부는 대화왜 정부와 별도로 수(隨), 당(唐)에 사신을 보내었고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다.
A.D 552년에 백제를 통하여 불교가 전해졌다.
A.D 554년에 흠명천황(欽明天皇)이 백제를 지원하기 위하여 대화왜(大和倭) 군사를 한반도로 보냈으나 신라에 패배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이 대화왜(大和倭) 군사가 가라(加良)로 적혀 있다.
A.D 587년에 불교가 수용되었다.
A.D 603年에 12계(階)의 관위(冠位)를 만들었고, A.D 604년에 쇼오토쿠 태자가 17조 헌법을 만들었다.
A.D 607년에 대화왜는 수(隋)에 사신을 보내었고, 같은 해 구주왜도 수(隋)에 사신을 보내었다.
구당서(舊唐書) 일본전(日本傳)에는 왜국전(倭國傳)과 일본전(日本傳)이 동시에 수록되어 있고 "日本國은 倭國의 別種이다"라고 적혀 있다. 이는 수나라가 일본열도왜를 구주왜와 대화왜로 구분하고 있다는 뜻이다.
수서(隋書) 왜국전(倭國傳)을 보면, A.D 607년에 왜왕(倭王) 다리사북고(多利思北孤)가 수황제(隨皇帝)에게 보낸 국서 내용에 "日出處의 천자가 日沒處의 천자에게 서신을 보내노니..후략"라는 문구가 들어 있다.
구주왜왕(九州倭王)이 천자(天子)라는 칭호를 사용하였다는 것은 이 시기 구주왜(九州倭)가 대화왜(大和倭)로부터 독립되어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또 수서 왜국전에는 왜왕(倭王)의 후궁(後宮)이 6-7백명이었다고 적혀 있다. 이는 구주왜왕의 세력이 강하였다는 것을 뜻한다.
A.D 646년에 대화왜는 대화개신(大化改新)을 하여 중국의 정치 및 경제체제를 도입하였다. 이 대화개신 이후 대화왜(大和倭)는 점차 중앙집권체제로 변하였다.
구주왜는 A.D 648년(貞觀 22年)에 당에 사신을 보낸 것을 마지막으로 당에 사신을 보내는 것이 중지되었다. 이는 구주왜의 세력이 약해졌다는 것을 뜻한다.
▲ 민달천황과 의자대왕 혈통도. 552년 백제는 구주 영토의 지배를 공고히 하여서 성명대왕의 왕자인 민달천황을 구주백제왕으로 내보낸다. 571년 일본을 다스리던 성명대왕의 동생인 흠명천황이 서거하자 민달천황이 구주로부터 건너가서 왜국 천황이 되었다.
민달천황은 이복동생인 추고천황과 결혼하여 일본의 황후로 세웠다. 민달천황은 오사카에 백제라는 지명을 붙였다. 구주에 이어서 대화까지도 백제와 병합하려는 것이었다. [신찬성씨록]에서 민달천황(敏達天皇,538~585)이 백제왕 선광(善廣)의 조부라고 기록했다. 역시 [신찬성씨록]에서 백제왕 선광(善廣)은 백제 의자대왕의 아들이다.
즉, [신찬성씨록]만 보면 민달천황은 의자대왕의 아버지가 된다. 이는 민달천황이 백제왕가 혈통이라는 분명한 기록이다. 그러나 실제 밝혀지는 족보에는 의자대왕의 작은 할아버지가 민달천황이다.
민달천황은 누나카라후토타마시키(渟中倉太珠敷天皇)라고도 하는데 백제 성명대왕의 차자다. 성명대왕의 이름이 명농(明穠)이다. 당시 구주에는 백제 대왕과 왕자들을 위한 둔창(屯倉)이 있었으니 농왕(穠王)의 둔창이 농창(穠倉)이 되는 것이고 이것이 일본말로 누나쿠라(渟中倉)인 것이다.민달천황은 [흠명천황기]에서 552년에 황태자가 되었는데 [민달천황기]에서는 568년에 황태자가 되어 서로 기록이 다르다. 앞에 552년 기록은 민달천황의 구주백제왕으로서 즉위를 의미하는 것이고 뒤에 568년 기록은 일본 천황 황태자로 보면 맞다.
그렇다면 568년에 흠명천황은 실제 천황에서 물러난 것이 되고 그때부터 민달천황이 오사카를 통치하였다고 추정할 수 있다.
A.D 660년에 백제가 멸망하고 A.D 662년에 대화왜가 보낸 백제부흥군마저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에게 패배하자 백제관리와 지배층이 일본열도로 대량 이주하였다. A.D 670년에 나라 이름을 일본(日本)으로 바꾸었다
. A.D 698년부터 구주왜의 연호 사용이 중단되었다. 이로 보아 일본국이 일본열도 전지역을 장악한 시기는 A.D 698년경이다. A.D 710년에 나라(奈良)에 대규모인 인위적인 수도를 만들었다.
A.D 712년에 고사기(古事記)를 편찬하고, A.D 720년에 한반도와 인연을 끊는 차원에서 열등감을 감추기위해 짝이 맞지 않는 왜곡된 역사를 담고 있는 일본서기(日本書紀)를 편찬하였다. 본래 조선땅이던 대마도와 관련하여
『환단고기』에 자고로 구주, 대마도는 삼한에서 나누어 다스린 삼한 분치지역으로 본래 왜인이 대대로 살던 지역이 아니었으며 임나가 나뉘어 3가라가 되었으며 좌호는 신라에 속하고, 인위 가라는 고구려, 계지 가라는 백제에 속한다 하였다.
단군조선의 가림토 문자와 유사한 고대 일본의 신대문자.고대 일본열도는 도래한 한국인들의 거주지
대마도(對馬島), 일기도(一岐島), 구주(九州)에는 원래 토착민인 왜(倭)가 살고 있었는데, 단군조선 때는 3조선(한) 중 한반도의 마한(馬汗)지역에서 건너간 이주민들이 살고 있었다.
그 때문에 대마도,일기도,구주는 왕검조선 때 마한(馬汗)의 관경에 속하였다. 왕검조선 때는 각 한(汗)간의 관할이 엄격하게 지켜지고 있었기 때문에 진한(辰汗)이나 번한(番汗)의 관경에 속한 지역에 살던 무리들은 함부로 마한(馬汗)의 관경에 속한 대마도, 일기도, 구주 등지로 이주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중기왕검조선 때 송화강 유역에 살던 섬야노(陝野奴)가 무리를 이끌고 마한(馬汗) 몰래 구주로 이주하여 천왕(天王)을 칭하였다가 B.C 723년에 왕검조선의 사벌단제가 보낸 언파불합(彦波弗哈) 장군에 의하여 토벌되었다.
「가륵단제 무신년(B.C 2173년) 두지주(斗只州)의 예읍(濊邑)이 반란을 일으키니 여수기(余守己)에게 명하여 그 추장 소시모리(素尸毛犁)를 베게 하였다. 이때부터 그 땅을 소시모리(송화강 유역 만주 동부 지방)라고 하다가 지금은 음이 바뀌어 우수국(牛首國)이 되었다.
그 후손에 섬야노(陝野奴)라는 자가 있었는데, 바다로 도망쳐 삼도(三島:대마도.일기도.구주 지칭)에 웅거하며 스스로 천왕(天王)이라 칭했다.」 「사벌단제 무오년(B.C 723년) 언파불합(彦波弗哈)을 보내어 바다의 웅습(熊襲:고대에 구주 熊本에 근거지를 둔 나라)을 평정하였다.」
일본서기에는 위 섬야노가 소잔명존(素잔鳴尊)으로, 언파불합이 언파렴무노초즙불합존(彦波렴武노草葺不合尊)으로 각 적혀 있고, 소잔명존이 부모 2신 또는 여러 신들에 의하여 천원(天原:소잔명존이 이주했던 구주 熊本 방면 지칭)에서 쫓겨 난 후 위원중국(葦原中國:本州의 山口縣.島根縣.廣島縣 방면. 왕검조선 때 本州에 있는 위원중국은 馬汗의 관경에 속하지 않았다.)으로 가지 못하고 근국(根國:이주하기 전에 살던 나라)으로 갔다고 적혀 있다.
그리고, 광개토태왕이 임나연정을 설치했던 대마도가 본래 한국땅이라는 사실은 대마도 출신 문장가 강수도 자신이 임나 출신이라 한 적이 있고, 성종 때의 청백리 황희 정승은 '대마도는 예로부터 우리 땅으로 고려말기에 국가기강이 크게 허물어져 도적의 침입을 막지 못해 왜구가 웅거하게 되었다'고 한 바 있다.
또 이 황은 조선과 대마도의 관계를 중국 역대왕조의 대 오랑캐 정책을 원용하면서 부자관계로 비유하고 해마다 정초에 내리는 세사미두(歲賜米豆)의 의미에 대해 대마도가 충성을 다해 바다를 든든하게 지키는 수고로운 공적을 가상히 여겨 해마다 하사하는 것이라고 했으며 안 정복은 '대마도는 우리의 부속도서로 신라, 고려 이래로 국초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속도로 대해왔다.
그리고 <여지승람>에는 옛날 경상도 계림 땅에 예속되었다고 하였으며, 태종이 기해년에 대마도를 정벌할 때 교서에도 대마도는 본래부터 우리나라 땅이었다고 하였고, 그 이외에도 수많은 증거물이 있다. 그리고 그 땅을 정벌한 알은 마땅히 속도를 꾸짖은 방책이었다'고 했다.
<증보동국문헌비고>에는 '지금 비록 일본의 폭력으로 그들의 땅에 강제 편제되었으나 본래는 우리나라 동래에 속했던 까닭에 이에 대한 기록들이 우리의 고사에 많이 있어 아울러 기록한다'고 하고 '섬 안의 남자들의 언어와 부녀자들의 의복이 조선과 같았다.
대마도인들이 왜를 칭할 때는 반드시 일본이라 하였고, 일본인들도 그들을 일본 왜와는 크게 차별하여 대우하였으므로 대마도민 자체가 일본에 예속된 왜로 자처하지 않았다.'고 했다.
조선말 국운이 쇠약한 틈을 타 1869년 소위 「판적 봉환」이라는 정책아래 이즈하라 번으로 편제되었다가 1877년 나가사키 현으로 편입된 대마도가 조선 영토임을 보여주는 지도로는 <소라동천(小羅洞天)>이라는 세계지도와 부속지도인 <동국 조선 총도>, <강원도도>, <경상도도>가 남아 있어 역사의 진실을 고증하고 있다.
"무릇 대마도는 옛날에는 신라국과 같은 곳이었다.
사람의 모습도 그곳에서 나는 토산물도 있는 것은 모두 신라와 다름이 없다."(13세기 말의 일본 책인 '진대(塵袋)' 제 2권)
"대마도는 섬으로서 본래 우리 나라의 땅이다. 다만 궁벽하게 막혀 있고, 또 좁고 누추하므로 왜놈이 거류하게 두었더니 개같이 도적질하고 쥐같이 훔치는 버릇을 가지고 경인년부터 뛰어놀기 시작하였다.
"(태상왕이었던 태종이 세종 때 대마도 정벌을 하기 전에 군사들에게 내린 교유문)
다음은 대마도 정벌 이후 조선 관리인 강권선에게 일기도 영주 대내전의 관반인 노라가도로가 한 말이다. "대마도는 본래 조선의 목마지( 말 기르는 땅)이므로 대내전이 조선과 더불어 협공하여 대마도를 귀국(:조선)에 돌리고자 하다가 불행히도 세상을 떠났는데 지금의 영주는 그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 풍신수길이 조선 침략에 대비하여 무장에게 명령해서 만든 지도인 '팔도 전도'에는, 독도 뿐 아니라 대마도도 조선의 땅으로 나와 있으며, '공격 대상'이라고 적혀 있다. 일본도 대마도를 일본 땅으로 여기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1488년 명나라 동월이 황제(영종)의 명을 받아 작성한 `조선팔도총도'에도 독도와 함께 대마도가 조선의 영토로 자세히 표기돼 있다.
일본이 점유한 대마도를 찾기위한 노력은 해방과 함께 시작된다.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정부 출범 직후인 1948년 8월18일 전격적으로 '대마도 반환요구'를 발표했다.
그러자 일본에서는 요시다 시게루 총리 이하 내각이 강력하게 반발했다.
이 대통령은 아랑곳하지 않고 9월9일 재차 대마도 반환을 요구하며 대마도 속령에 관한 성명을 발표했다.
미 군정 시기인 1948년 2월 17일에 열린 제204차 입법의원 본회의에도 입법의원 허간용(서북도 관선의원) 외 62명은 대마도를 조선영토로 복귀시킬 것을 대일강화조약에 넣자는 결의안을 제출했다.
그러나 이 결의안은 정부를 만들기 위한 기초작업 폭주로 연기되다 회기가 종결됨으로써 실현을 보지 못했다. 정말로 아쉬운 역사적인 사건이다.
우리는 이같은 관점에서 독도가 일본 땅이라면 대마도는 우리 땅이라는 논리로 대응하자. 역사에 해답이 있다.
2008/03/20 [13:15] ⓒ plus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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