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9일(현지시간) 월스트리트저널(WSJ)이 잘 알려지지 않은 한 탈북자단체의 보고서를 인용해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대남·대미파를 대거 처형하고 재산을 몰수했다”고 보도했다.
이에 2월 20일 연합뉴스, 한국일보, 뉴시스, 조선일보 등 한국 언론은 WSJ를 재인용해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대남·대미파를 대거 처형하고 재산을 몰수했다”는 보도를 일제히 쏟아냈다. 제목에는 하나같이 ‘대거 숙청’ 같은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표현이 등장했다.
눈을 잡아끄는 기사의 헤드라인(표제) 설정은 무척 중요하다. 독자들은 주로 언론사나 기자가 설정한 제목을 보고 ‘아 이런 내용이겠구나’를 짐작하며 기사를 읽을지 말지 결정을 내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목달기에는 선을 넘지 않는, 도리를 지키는 뚜렷한 기준이 있어야 한다.
같은 민족이자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관계”인 북한, 남북관계를 다루는 경우엔 그 어느 때보다 엄격한 기준이 요구되어야 한다. 무엇보다 최근, 남북·북미관계가 지금까지 없던 한반도-동북아시아의 평화체제 구축을 향해 진전하고 있는 역사적 시기다.
이미 1995년 한국기자협회, 전국언론노동조합, 한국PD연합회가 ‘평화통일과 남북화해 협력을 위한 보도제작 준칙’을 첫 제정했고 2017년 10월 24일 개정된 바 있다. 개정된 준칙 전문에는 “남과 북의 평화공존과 민족동질성회복에 힘쓰며 민족공동이익을 증진하고 궁극적으로 남과 북이 단결하여 자주적 평화적으로 통일을 이루도록 노력한다”고 명시됐다. 아울러 이어진 내용 중 준칙 2항과 5항에는 다음의 내용이 담겼다.
2. 우리는 냉전시대에 형성된 선입견과 편견에서 벗어나 객관적으로 보도·제작함으로써 남북 사이의 공감대를 넓혀 나간다.
3. 우리는 통일문제에 관한 사회 각계의 다양한 의견을 공정하게 반영하여 민주적인 여론형성에 기여한다.
이러한 상황을 복합적으로 고려해 정성과 품을 들인 ‘제목 짓기’가 당연히 동반되어야 한다.
이건 기사쓰기의 근본원칙이다. 그런데 앞서 소개한 기사의 제목과 내용에는 4.27판문점선언과 9월 평양공동선언에서 두 정상이 나눈 남북 간 상호존중은 도무지 찾을 수 없었다.
아니 그렇기는커녕 북한이 ‘잔인한 독재국가’라는 인상마저 준다. 앞서 살펴봤듯 반북, ‘혐북’이라고 부를만한 표현들이 가득하다.
‘언론이 주장하는 숙청은 틀렸다’ 숙청의 진짜 의미
언론은 확인되지도, 확인할 수도 없는 ‘미확인 정보’로 남북관계를 깨트릴 셈인가. 위와 같은 얼토당토 않는 글이 기사로 포장되고 있으니 그 의도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한국의 북한 관련 보도에서 “숙청”이란 표현이 나오면 일단, 처형 또는 재산 몰수 등의 과격함이 아닌 ‘뭔가 다른 이유’를 생각해야 한다. ‘공정한 사실보도’가 기능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국민은 언론의 북한 보도를 끊임없이 의심해야 하는 것이다. 촌극도 이런 촌극이 또 어디 있을까.
과거를 돌이켜보면 ‘북한에서 숙청된 사람들이 잔혹하게 처형 된다’는 식의 보도는 신빙성이 무척 떨어진다. 가령 지난 2015년 11월 7일 당시 최룡해 노동당 비서는 북한이 보도한 인민군 명단에서 이름이 빠졌고 한국 언론은 어김없이 ‘숙청설’을 제기했다. 한 때 위세가 대단했던 당 내 ‘2인자’ 최룡해 비서가 권력암투에서 밀려나 처형당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취지였다.
그런데 최룡해 비서는 2016년 8월, 국무위원회 부위원장이라는 무게감 있는 직위로 자리를 옮겨 건재함을 알렸다. 당장 2019년 2월 16일만 해도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비롯한 최고위관부들과 금수산문화궁전을 참배한 장면이 포착됐다. 언론의 주장처럼 밀려나기는커녕 완전히 정반대로 더욱 막중한 역할을 맡게 된 것이다.
또 다른 사례를 들어보자. 지난해 ‘평창동계올림픽·패럴림픽 성공 기원 특별공연’으로 강릉과 서울을 찾은 현송월 삼지연관현악단 단장의 등장에 많은 사람들이 놀랐다. 그야 그럴 수밖에. 조선일보를 비롯한 여러 언론은 현 단장이 김정은 위원장의 눈에 들지 않아 숙청(처형)당했다며 죽은 사람으로 취급했기 때문이다.
조선일보는 2013년 12월 10일 “현송월 기관총으로 공개총살…국정원 확인”이라는 자극의 정점을 찍는 보도를 냈다. 당시 조선일보는 문화일보를 인용, 여권(새누리당) 고위관계자가 국정원이 현송월을 포함한 북한 예술인 10여 명이 지난 8월 기관총으로 공개 처형됐다는 사실을 확인했다며 ‘증거’를 내밀었다.
시간이 흘렀고 남북관계가 열리자 악의적인 거짓 선동에 지나지 않는 소설임이 단번에 확인됐다. 현 단장이 멀쩡히 살아서, 게다가 남북 문화교류를 총괄하는 직급으로 남북 관계의 전면에 나섰고 한국의 모두가 그 장면을 화면으로 생생히 봤으니까. 숙청을 처형으로, 산 사람을 죽은 사람으로 뒤바꾸는 언론의 신묘한 기적(?)에 할 말을 잃게 된다.
‘현송월 처형’ 보도를 낸 조선일보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됐을까? 아니, 위 기사에 대한 정정과 사과는커녕 당당히 인터넷판에 기사를 공개하고 있다. 만약 한국을 찾은 직접피해자 현 단장이 조선일보 기자에 “왜 그런 말도 안 되는 가짜뉴스를 유포했냐. 나는 여기 잘 살아있지 않나”라고 콕 집어 물었다면? 그 순간 기자는 “예 기사를 잘 못 썼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라고 고개 숙여 사과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일보는 이후에도 미확인 정보를 뉴스로 가공해 보도했을 가능성이 높다. 당장 현 단장 ‘생존 확인’ 뒤에도 익명의 국정원 관계자니, 신원을 밝힐 수 없는 대북소식통이니, 미국 또는 탈북자단체가 작성한 보고서에 따라 숙청을 일삼는 북한사회가 불온하다는 취지의 보도가 끊임없이 양산되고 있으니 말이다.
인터넷에서 숙청(肅淸)의 뜻을 검색해보면 “어지러운 상태를 바로잡음”이라고 나온다. 북에서도 딱 이만큼의 의미다. 이 점은 1980년대 북한의 청춘사회를 묘사한 남대현 작가의 장편소설 <청춘송가>에서도 확인된다. 이 소설에서는 ‘특정 업무를 잘 하지 못하게 된 일꾼이, 조직(조선노동당)에 의해 다른 일터로 옮기는 경우’를 숙청이라 일렀다. 이런 뜻을 담은 숙청이, 황당하게도 ‘처형’으로 둔갑된 것이다.
왜 정체 모를 가짜뉴스는 계속되는가
첫머리에 소개한 ‘대남·대미파 숙청’ 기사에서도 “미 안보 분석가” “한국 전직 정보당국자” 등 정체를 알 수 없는 익명의 인물들이 또 등장했다. 누군가의 말을 전해 들어 보도한 지난날의 현송월 단장 처형 보도 때와 방식이 거의 같다. 딱 하나 다른 부분이 있다면 ‘숙청당한 것으로 보인다’라고 모호하게 표현한 대목이랄까.
보도 방식도 참 이상하다. WSJ는 ‘탈북자’가 운영하는 한국의 싱크탱크 북한전략센터의 보고서를 인용했다고 한다. 순서를 짚어보면 한국 연구기관의 보고서 작성 -> 미 유력지가 인용 -> 한국 언론들이 미 유력지를 재인용하는 방식이다. 자국에서 생산된 보고서 내용을 미국의 눈을 통해 재전달하는 기형적이며 납득할 수 없는 구조다.
이런 상황을 맞닥뜨리고 있노라면 한국 언론이 미국 언론의 기관지라는 ‘합리적 의심’마저 든다. 잠자코 있다가 미국에서 악의적인 보도가 나오면 여러 언론사가 보도를 쏟아내는 장면을 보고 있노라면 사전에 그러기로 약속이나 한 것 같다.
북미대화가 한동안 교착됐던 지난해 2018년 11월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미 뉴욕타임스의 11월 12일 “북한이 16개의 숨겨진 기지에서 탄도미사일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거대한 속임수를 쓰고 있다”는 보도에 한국 전체가 술렁였다. 삽시간에 북한이 싱가포르 북미공동성명에서 합의한 정상 간 비핵화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있다는 가짜뉴스가 퍼졌다.
뉴욕타임스가 인용한 국제전략문제연구소(CSIS) 보고서에 따르면 황해북도 황주군 삭간몰 비밀 탄도미사일기지가 발견됐다는 것. 그러나 사진이 찍힌 날짜는 6.12북미정상회담 한참 이전인 3월 29일이다. 사실과 거짓이 교묘하게 혼재된 명백히 악의적인 가짜뉴스에 한국 전체가 술렁였다.
청와대는 모처럼 쌓은 남북관계가 무너질까 뉴욕타임스의 보도에 대해 “삭간몰 기지는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북한이 이 미사일 기지를 폐기하겠다고 약속한 적이 없고, 해당 기지를 폐기하는 게 의무조항인 어떤 협정도 맺은 적이 없다”고 언론에 여러 차례 밝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일보 등 언론은 “청와대가 북한 편을 든다”며 적반하장 격으로 뉴욕타임스의 가짜뉴스를 꿋꿋하게 참 열심히도 실어 날랐다.
왜 북미대화를 코앞에 두고 자꾸 이런 일이 되풀이될까? 위의 보도가 나오자마자 북미협상을 반대하는 미국 민주당 의원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협상을 관두라’며 판을 흔들었다. 적어도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바라지 않는 미국의 네오콘 또는 군산복합체의 압력이 한국에 폭 넓게 가해지고 있다는 추정은 가능하다.
추정이 사실이라면, 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여 북한에 가보지도 않고 미국의 적대적인 대북관점을 뽑아대는 한국 언론의 수준이 정말 형편없다는 진단을 내릴 수 있다.
만약 북미 고위급대화와 미국과의 정상회담 의지를 밝힌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신년사가 없었더라면, 위 내용은 사실처럼 굳어져 모처럼 쌓은 남북관계가 무너졌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미국발 가짜뉴스를 받아쓴 과오에 대해 ‘반성합니다 앞으로 다시는 그러지 않겠습니다’라며 책임을 지는 언론은 없다. 오늘도 악의적인 미확인 보도는 되풀이되고 있다.
이 땅의 민중은 물론 같은 민족에 대한 기본예의도 없는 한국 언론의 북한 보도.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미국이 그렇게 보도했으니 상관없다는 것일까. 언제까지고 ‘아니면 말고’ 식으로 넘어가선 안 될 일이다. 장기화된 분단으로 북한사회의 작동원리를 모른다면, 솔직히 인정하고 북한 바로알기 공부부터 열심히 해 다가올 현장취재를 대비하는 것이 상책이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어지러운 상태를 바로 잡음”이라는 숙청의 뜻을 되새겨보자. 진정 숙청당해야 할 대상은 북한의 고위급 인사들이 아니라, 줏대 없이 대북 적대와 미국의 수렁에서 허우적대는 대다수의 한국 언론일지도 모르겠다. 이 모두를 분단의 비극으로 치부하기엔 입맛이 참 쓰다.
아직 “냉전시대에 형성된 선입견과 편견에서 벗어나 남북 사이의 공감대를 넓혀 간다”는 보도준칙 2항조차 시동이 걸리지 않고 있는 현실이다.
한반도의 평화·번영·통일은 기다린다고 거저 오는 게 아니다. 더 늦기 전에 언론계에 쌓인 북한에 대한 왜곡과 무지, 대미추종의 ‘적폐’부터 깔끔히 걷어내야 한다.
언론은 스스로 자주적 통일지향이라는 새로운 출발점에 서야한다. 그래야 비로소 통일시대의 제 몫을 담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진지하게 뇌리에 새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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