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1987년에 6월 10일 9시에 방송됐던 'MBC 뉴스데스크'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1987년 6월 10일
MBC 뉴스데스크는 아홉시 땡 하는 소리와 함께 '전두환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오늘 열린 제 4차 민정당 전당대회에서 노태우 대표가 차기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습니다'라는 앵커의 설명이 나왔습니다.
우리가 흔히 '땡전 뉴스'라고 하는 말이 여기서 유래됐습니다.
아홉시라는 시간을 알려주는 땡 소리와 함께 항상 전두환의 근황을 먼저 보도하기 때문입니다.
1987년 6월 10일 MBC
뉴스데스크의 주요 뉴스는 민정당 대통령 후보로 노태우 대표가 선출되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노태우가 민정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던 1987년 6월10일, 대한민국 국민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1987년 6월 10일 열릴 예정이었던 '6.10대회' 행사장 입장을 막기 위해 160개 중대 2만 2,000명의
경찰이 행사장 주변과 거리에 배치됐습니다.
행사장 입장이 가로막힌 시민들은 오후 1시부터 거리로 나왔고, 서울 시내를 비롯한 전국
18개 도시에 시민 24만여 명은 가두시위를 벌였습니다.
이날 학생과 시민들은 '우리의 소원은 민주'라는 노래를 부르며
'호헌철폐,독재타도' 등의 구호를 외쳤고, 서울,부산을 비롯하여 마산과 대구, 포항과 울산, 안동, 경주, 광주, 전주, 대전, 청주와 천안,
춘천과 목포, 군산, 인천 등에서 동시다발적인 시위가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헌정사상 처음으로 대통령 재임 중 대통령 후보가 선출된
날, 수십만 명의 시민들은 왜 거리로 나와 시위를 했을까요?
1987년 1월 13일 자정에 서울대생 박종철이 하숙집에서 치안본부 대공분실 수사관에게 연행됩니다. 이들이
박종철을 연행한 이유는 수배 중이던 선배 박종운의 소재를 묻기 위해서였습니다.
밤새 고문을 받던 박종철은 14일 오전 11시 45분 물고문 도중
남영분실 509호실에서 사망합니다. (당시 동아일보 기사는 14일 오전 6시 40분 연행, 오전 11시 45분 사망으로
발표됨)
박종철이 사망하자, 강민창 치안본부장은 "책상을 '탁'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초등학생도 믿지 못할 내용을 사건
브리핑이라고 내놓았습니다.
물고문으로 사망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신민당과 재야단체는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농성에 들어갔습니다.
5월 18일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김승훈 신부가 미사에서 '치안감 박처원,경정 유정방,박원택' 등 대공 간부들이 사건을 축소
조작했다고 밝혔습니다.
재야단체와 시민들은 5월23일 '박종철군 국민추도'를 '박종철군 고문살인은폐조작'으로 바꾸고 6월 10일에
규탄대회를 열기로 했고, 이날 전국 22개 도시마다 시민들이 모였습니다.
6월 10일 거리에 모인 시민들이 '호헌 철폐'를 외친 이유가 있습니다. 박종철을 고문 살인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전두환 군부독재가 만들어 놓은 대통령 간접선출이라는 헌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박정희가 영구집권을 위해 만들어 놓은 대통령
간접선거는 말 그대로 국민이 대통령을 뽑는 것이 아닌 대리인들이 대통령 선거에 참여하는 방식입니다.
박정희 유신헌법이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방식이라면 전두환 신군부 헌법은 '대통령 선거인단'을 통해 대통령을 뽑습니다. 문제는 총선거인단 5,277명 중에
민정당 소속이 3,675명이었고 무소속 1,123명도 대부분 전두환을 지지했다는 점입니다. (1981년 12대 대통령 선거
기준)
전두환이 밝힌 '4.13 호헌조치'는 말 그대로 기존 헌법에 따라 체육관 선거를 하겠다는
의미입니다. 이럴 경우, 당연히 민정당 노태우 대표가 당선될 확률이 90% 이상이었습니다.
대통령 선거가 치러지면 당선될 후보라서 그런지, 1987년 6월 10일 MBC 뉴스데스크는 노태우 후보에 대한
영상을 대통령 당선인급으로 보도했습니다.
[노태우 대통령 후보는 어떤 사람인가] ● 나레이션: 국민은 신뢰를 먹고 삽니다. 따라서 정치인은 국민의
신뢰 속에 살아야 합니다. 안정은 기초며 바탕입니다. 이 바탕위에서 목적을 추구해야 합니다. 안정은 모든 것의 출발점입니다. 갈등은 어느 경우에
있어서나 평화적으로 해결되어야 합니다. 대화하는 자, 타협하는 자는 비겁자가 아닙니다.
[노태우 대통령 후보에 대한 은사 및
동창들의 이야기] ● 앵커: 부드러움과 결단력을 갖춘 사람, 참을성이 많고 다른 사람의 의견을 잘 경청하는 사람 또는 다른 사람을 편하게
해주는 사람, 이런 얘기들을 지금 많이 합니다만 노 후보와 오랜 시절을 함께 보낸 은사, 동창 등 주변 인사들의 증언을 통해서 한 번
보죠.
[대구시 신용동, 노태우 후보의 생가] ● 기자: 대구시 동구 신용동 596번지, 이 집이 바로 민정당 노태우 차기
대통령 후보가 태어난 생가입니다. 통일신라시대 김유신 장군의 수도장으로 알려진 팔공산 기슭에 자리 잡은 노 대표의 생가인 신용동 마을은
여느 산촌과 마찬가지로 집 앞에는 맑은 개울물이 흐르고 녹음이 우거져 있습니다.
군부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찬탈한 인물을 가리켜 '신뢰'를 말합니다. 상관을 총칼로 위협했던 자를
'부드러움'을 갖춘 사람이라고 합니다.
찬양과 칭찬을 하다가 이제 통일신라 시대 김유신 장군을 끌어다가 위인전에 나오는 영웅으로
둔갑시킵니다.
1987년 6월 9일 연세대학교 학생 이한열은 '6.10대회 출정을 위한 연세인 결의대회' 후에 열린 시위 도중
직격 최루탄에 머리를 맞아 사경을 헤맵니다.
젊은 학생이 최루탄에 맞아 목숨이 위태로운데도 MBC 정병수 해설위원은 노태우 민정당
대표위원의 대통령 후보 선출이 '평화적 정부이양의 전통의 수립'이라 칭찬하며, 이는 '민주주의 발전의 요체라고 하는 전두환 대통령의 신념과
의지가 실천된 것이다'라며 군부독재자 전두환을 찬양했습니다.
꿈과 희망을 품고 살아갈 이 땅의 젊은이를 보호해야 할 경찰이 오히려
죽음으로 몰고 갔는데도 전두환과 노태우는 샴페인을 마시며 손뼉을 치고 축하를 하고 있었습니다.
1987년 6월 10일 수십만 명의 시민이 거리로 나와 '우리의 소원은 민주'라는 노래를 목이 터져라
부르며, 이 땅의 민주주의를 지키려고 노력했습니다.
더는 대한민국의 아까운 젊은이들이 물고문과 최루탄에
맞아 죽지 않게 만들겠다며 그들은 잔인한 경찰의 진압봉과 최루탄에 맞섰습니다.
6.10을 민주항쟁이라 부릅니다. 4.19혁명처럼
혁명이라 부를 수 없는 이유를 노무현 대통령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6월 항쟁을 혁명이라 부르지 못하고, 절반의 승리가 된 까닭이 분열과 기회주의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국민의 잘못이 아니라 지도자의 잘못이라고 합니다.
군사독재와 결탁했던 수구언론이 그들 세력을 대변하는 막강한
권력으로 다시 등장하도록 허용했습니다.
무능과 부정부패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했고, 군사독재의 잔재들이 역사를 되돌리려 하고
있는데도 민주세력은 패배주의에 빠져 우왕좌왕하고 있습니다.
6.10민주항쟁 20주년 기념사 전문
<6.10민주항쟁 20주년 기념사 전문>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정말 감회가 새롭습니다. 그날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데 벌써 20년이 흘렀습니다. 4·13호헌 조치는 서슬이 시퍼랬습니다. 그러나
국민의 소망은 간절했고, 분노는 뜨거웠습니다. 마침내 두려움을 떨치고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군사독재를 무너뜨렸습니다.
국민이
승리한 것입니다. 정의가 승리하고, 민주주의가 승리한 것입니다. 참으로 감격스러운 역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들이 땀과 피를 흘리고, 목숨까지 바쳤습니다. 이 자랑스러운 역사를 위해 목숨을 바치신 분들의 고귀한 희생에 경의를 표하며 삼가
명복을 빕니다. 항쟁을 이끌어 주신 항쟁 지도부, 하나가 되어 승리의 역사를 이룩하신 국민 여러분께 깊은 존경을 표합니다.
국민
여러분, 6·10 민주항쟁은 특별히 기억에 새겨두어야 할 의미가 있는 역사입니다. 6·10 항쟁은 국민이 승리한 역사입니다. 그동안 우리
역사에는 자랑스러운 역사로 기억할만한 많은 투쟁이 있었고, 오늘날 우리는 이들을 엄숙하게 기념하고 있지만, 안타깝게도 아무런 주저 없이 승리한
투쟁으로 말할 만한 역사를 찾기는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6·10 항쟁은 승리했습니다. 항쟁 이후 20년간, 우리는 군사독재의 뿌리를 완전히 끊어내고 민주주의를 꾸준히 발전시킴으로써 6·10 항쟁을
승리한 역사로, 주저 없이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승리한 역사는 소중한 것입니다. 국민에게 자신감을 심어주고, 그 위에 새로운 역사를 지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6월
항쟁은 자연발생적인 항쟁이 아니라, 잘 조직되고 체계화된 국민적 투쟁이었습니다. 항쟁의 지도부는 잘 조직되어 있었고, 각계의 지도자들이 두루
참여하여 국민들에게 신뢰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지향하는 가치와 목표를 뚜렷이 제시함으로써 국민 모두가 참여하는 대중적 투쟁을 이끌어
냈습니다.
그리고
승리했습니다. 잘 조직된 국민의 의지와 역량이 역사의 진보를 이루어낸 것입니다. 6월 항쟁은 가치와 목표를 더욱 뚜렷하게 제시하여 국민을
통합하고, 잘 조직하면, 더 큰 역사의 진보를 이루어 낼 수 있다는 믿음의 근거가 될 것입니다.
6·10의
승리는 축적된 역사의 결실입니다. 우리 국민은 오랫동안 많은 항쟁의 역사를 축적하여 왔습니다. 부패하고 무능한 전제왕권의 학정에 맞섰던
민생·민권 투쟁, 일본 제국주의에 맞섰던 수많은 민족독립 투쟁, 그리고 군사독재에 맞선 꾸준한 민주주의 투쟁들이 그것입니다.
우리
국민은 수많은 좌절을 통하여 가슴에 민주주의의 가치와 신념을 키우고, 그리고 역량을 축적하여 왔습니다. 의미 있는 좌절은 단지 좌절이 아니라 더
큰 진보를 위한 소중한 축적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6월 항쟁의 승리를 보고 일시적인 좌절을 두려워하지 않는 지혜, 당장의 성공에 급급하여
대의를 버리지 않는 지혜를 배워야 할 것입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6월 항쟁은 그 역사적 의미로만 소중한 것이 아니라, 국가 발전의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하였다는 점에서도 큰 의미가
있습니다.
87년
이후 우리 경제는 개발 연대의 요소투입형 경제를 넘어서, 지식기반 경제, 혁신주도형 경제로 전환하고, 세계와 경쟁하여 당당하게 성공하고
있습니다. 국민총생산은 87년 세계 19위에서 2005년 12위로 상승하였습니다. 같은 기간동안 1인당 국민소득은 63위에서 48위로
상승하였습니다.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 중에는 24위입니다. 그 밖에도 많은 경제지표는 우리 경제가 87년 이후 장족의 발전을 하였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관치경제,
관치금융을 청산하여 완전한 시장경제를 실현하고, 투명하고 공정한 시장을 만들어 그 위에서 다양성을 존중하고, 자유와 창의로 경쟁할 수 있게 된
결과입니다.
6·10
항쟁의 승리와 정권교체, 그리고 지난 20년간 꾸준히 이어진 청산과 개혁이 없었더라면 이룰 수 없는 성과를 이루어낸 것입니다.
97년
경제 위기 때문에 많은 지체가 있었습니다. 아직도 그 당시의 지표를 회복하지 못한 항목이 적지 않습니다. 97년 경제 위기는 관치경제,
관치금융, 법치가 아닌 권력의 자의적 통치라는 독재시대의 낡은 체제를 신속히 개혁하고 정비하지 못했기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완전한 정권교체로
완전한 민주정부가 들어서서 신속하고 철저한 개혁으로 극복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97년 이후의 우리 경제의 지체를 빌미로 민주세력의 무능을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참으로 양심이 없는 사람들의 염치없는
중상모략입니다.
민주주의와
인권의 신장에 관하여는 굳이 설명이 필요 없을 것입니다. 저는 해외에 나가서 우리 한국이 단지 경제에만 성공한 나라가 아니라 민주주의에도 성공한
나라라는 말을 수없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민주주의 정통성을 가진 지도자가 국제사회에서 제대로 대우받고 나라의 위상도 높인다는 사실도 실감하고
있습니다. 다시 한번 민주주의를 위해 헌신해 오신 모든 분들께 깊은 존경과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국민
여러분, 그러나 6·10 항쟁은 아직 절반의 승리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난 20년 동안 우리는 정권교체를 이루고, 특권과 유착,
권위주의와 부정부패를 청산하고, 투명하고 공정한 사회를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뒤늦기는 하지만, 친일 잔재의 청산과 과거사 정리도 착실히 해나가고
있습니다.
제도의
측면에 있어서는 독재체제의 청산과 민주주의 개혁에 상당한 성과를 거두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반민주 악법의 개혁은 미완의 상태에 머물러 있습니다. 지난날의 기득권 세력들은 수구언론과 결탁하여 끊임없이 개혁을 반대하고, 진보를
가로막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국민으로부터 정통성을 부여받은 민주정부를 친북 좌파정권으로 매도하고, 무능보다는 부패가 낫다는 망언까지 서슴지
않음으로써 지난날의 안보독재와 부패세력의 본색을 공공연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나아가서는 민주세력 무능론까지 들고 나와 민주적 가치와 정책이
아니라 지난날 개발독재의 후광을 빌려 정권을 잡으려 하고 있습니다.
지난날
독재권력의 앞잡이가 되어 국민의 눈과 귀를 가리고 민주시민을 폭도로 매도해 왔던 수구언론들은 그들 스스로 권력으로 등장하여 민주세력을 흔들고
수구의 가치를 수호하는 데 앞장서고 있습니다. 저는 그들 중에 누구도 국민 앞에 지난날의 과오를 반성했다는 말을 듣지 못했습니다.
군사독재의
잔재들은 아직도 건재하여 역사를 되돌리려 하고 있고, 민주세력은 패배주의에 빠져 우왕좌왕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정으로 아직 우리 누구도 6월
항쟁을 혁명이라고 이름 붙일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모양이 된 것은 6월 항쟁 이후 지배세력의 교체도, 정치적 주도권의 교체도 확실하게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민주세력의 분열과 기회주의
때문입니다.
87년의
패배, 90년 3당 합당은 우리 민주 세력에게 참으로 뼈아픈 상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역주의와 기회주의 때문에 우리는 정권교체의 기회를
놓쳐버렸고, 수구세력이 다시 일어날 기회를 준 것입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뼈아픈 상실은 군사독재와 결탁했던 수구언론이 오늘 그들 세력을 대변하는
막강한 권력으로 다시 등장할 수 있는 기회를 허용한 것입니다.
분열과
기회주의가 6월 항쟁의 승리를 절반으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국민이 잘못한 것이 아니라 지도자들이 잘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머지
절반의 승리를 완수해야 할 역사의 부채를 아직 벗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국민
여러분, 우리 앞에 놓인 과제는 자명합니다. 나머지 절반의 책임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민주주의를 제대로 하는 것입니다.
반독재
민주화투쟁의 시대는 끝이 났습니다. 새삼 수구세력의 정통성을 문제 삼을 수는 없습니다. 민주적 경쟁의 상대로 인정하고 정정당당하게 경쟁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하여 대화와 타협, 승복의 민주주의를 발전시켜 나가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87년 이후 숙제로 남아있는 지역주의 정치, 기회주의 정치를 청산해야 합니다. 수구세력에게 이겨야 한다는 명분으로 다시 지역주의를
부활시켜서는 안 될 것입니다. 기회주의를 용납해서도 안 됩니다.
이와
함께 눈앞의 정치에 급급할 것이 아니라 후진적인 정치제도도 고쳐서 선진 민주제도를 만들어야 합니다. 대통령 단임제와, 일반적으로 선거운동을
금지하고 대통령에 대한 정치적 중립을 요구하는 선거법, 당정분리와 같은 제도는 고쳐야 합니다. 여소야대가 더 좋다는 견제론, 연합을 야합으로
몰아붙이는 인식도 이제는 바꾸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도 선진국다운 정치를 할 수 있습니다.
언론도
달라져야 합니다. 이상 더 특권을 주장하고 스스로 정치권력이 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사실에 충실하고, 공정하고 책임 있는 언론이 되어야
합니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언론의 수준만큼 발전할 것입니다. 이것은 마지막 남은 개혁의 과제입니다.
주권자의
참여가 민주주의의 수준을 결정할 것입니다. 정치적 선택에 능동적으로 참여해서 주권을 행사하는 시민, 지도자를 만들고 이끌어가는 시민, 나아가
스스로 지도자가 되는 창조적이고 능동적인 시민이 우리 민주주의의 미래입니다.
저는
우리 국민의 역량을 믿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못해낼 것이 없는 우리 국민입니다. 20년 전 6월의 거리에서 하나가 되었던 것처럼 이제 우리의
민주주의를 완성하는 데 함께 힘을 모아나갑시다. 지역주의와 기회주의를 청산하고 명실상부한 민주국가, 명실상부한 국민주권 시대를
열어갑시다.
감사합니다.
2007년 노무현 대통령이 말했던 6.10민주항쟁 기념사를 2014년에 들어도 시대적 차이를 느끼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여전히 6월 항쟁이 절반의 승리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 앞에는 나머지 절반의 승리를 완수해야 할
역사의 부채가 있습니다. 그것이 민주주의를 제대로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