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정전협정 체결 60주년이 되는 해다. 보수언론들은 청소년들이 한국전쟁 발발일을 모른다며 역사교육이 어떻고 안보관이 어떻고 개탄한다. 하지만 전쟁 발발만큼이나 중요한 전쟁 중단에 대해서는 대다수 사람들이 그다지 관심을 갖지 않는다. 정전협정 체결일이 몇 일인지는커녕 몇 년인지조차 모르는 경우도 많다.
1953년 7월 27일 체결된 정전협정은 지금까지 한반도 질서를 규정하는 가장 중요한 합의다. 그리고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하기 위한 시도 역시 60년 동안 계속되어 왔다. 한반도 질서를 이해하고 예측하기 위해서는 정전협정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가 필요하다. 그런 차원에서 <동북아의 문>은 특집 <정전협정 60년>을 연재하기로 하였다.
연재 순서는 다음과 같다.
1. 미국은 왜 정전협상을 시작했는가 2. 748일의 대장정 3. 휴전협정인가 정전협정인가 4. 누가 정전협정을 파기하였나 5. 이미 시작된 평화협상 6. 반복되는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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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시작된 한국전쟁은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38선을 중심으로 고착국면으로 넘어갔다. 지리한 소모전이 계속되면서 전쟁 당사자와 유관국들은 군사적 방법이 아닌 정치적 해법을 찾기 시작했다.
물론 그 전부터 휴전 혹은 정전에 대한 논의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인천상륙작전 직후인 1950년 9월 16일 미 국무부 매튜(H. F. Matthews) 차관보는 국무부 대외군사문제 및 원조담당특별보좌관 번스(J. H. Burns) 장군에게 북한의 휴전 제의에 대비한 휴전 구상 지침을 사령관에게 전달해야 한다는 1급 비밀문서를 보냈다. (김명기, <한반도평화조약의 체결>(서울:국제법출판사, 1994), 40~41쪽) 아마 미국은 전황이 불리해진 북한이 먼저 휴전 제의를 할 것으로 예측했을 것이다. 그러나 북한은 후퇴 과정에서 반격을 준비했을 뿐 휴전 제의는 하지 않았다.
10월 1일 유엔 결의 위반 논란 속에 한국군 3사단이 38선을 넘어 북진을 감행했으며 2일에는 맥아더(D. MacArthur) 유엔군 사령관이 전 부대에 북진작전 명령을 하달했다. 10월 7일에야 유엔은 총회 결의 376(V)를 하였는데 그 내용 역시 ≪한반도 전체에 걸쳐 안정상태를 확보하기 위해 모든 적절한 조치를 취할 것≫으로 38선 북진 승인 여부에 대한 논란이 여전히 남았다.
▲유엔 총회 결의 376(V)
유엔군의 북진은 중국을 자극했다. 저우언라이(周恩來) 중국 수상은 10월 3일 주중 인도대사 파니카(K. M. Panikkar)와 면담을 갖고 유엔군이 38선을 넘는다면 중국은 전쟁에 개입하겠다고 하면서 이를 미국에 전달해달라고 하였다. 그러나 미국은 이를 무시하고 북진을 계속했다. 결국 10월 16일 밤 제42군 124사단 370연대가 샤오젠페이(簫劍飛) 부사단장의 인솔 아래 압록강을 넘어 북한 영내 30km 남짓 진입했다. (이상호, <맥아더와 한국전쟁>(서울:푸른역사, 2012), p252, 264)
대패하는 미국
그러나 당시 맥아더 사령관은 전황을 오판하고 있었다. 10월 15일 태평양의 웨이크섬(Wake Island)에서 열린 트루먼 미 대통령과 맥아더 사령관 회담에서 맥아더 사령관은 중국의 참전 가능성에 대해 ≪개입의 공산은 극히 적다. ... 그들은 공군이 없기 때문에 만일 평양을 확보하기 위해 남하할 경우에는 사상 최대의 섬멸전에 의해 희생되고 말 것이다≫고 하였고 ≪전쟁은 11월 23일의 추수감사절까지는 끝을 내고, 크리스마스 때까지 제8군을 일본으로 복귀시키고 싶다≫고 호언장담했다. 이런 판단 아래 10월 24일 ≪전 병력을 투입해 최대한 빨리 압록강과 두만강 선까지 진격하라≫는 이른바 <추수감사절 공세>를 개시했다.
추수감사절 공세는 막대한 피해로 끝이 났다. 한국군 제6사단과 미군 제8기병연대는 부대가 와해되었으며, 한국군 제1, 8사단, 미군 제1기병사단도 큰 타격을 입었다. (강경표 외, <(한권으로 읽는)6·25전쟁사>(인천:진영사, 2012), p211, 226~227) 그러나 맥아더 사령관은 여전히 전황을 낙관하고 11월 24일 이른바 <크리스마스 공세(Home by Christmas)> 작전을 명령했다.
그러나 2차 총공세 바로 다음날 북한군과 중국 인민지원군이 총반격에 돌입하면서 유엔군은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한국군 제7사단은 덕천지역에서, 제2군단은 청천강에서 붕괴됐다. 터키여단은 1/3 이상의 병력손실을 입었다. 미 제8군단은 심각한 붕괴위기에 휩싸였고, 제2사단은 3천여 명의 사상자와 대부분 장비를 상실하여 완전히 와해되었으며 사단장은 직위해제됐다. 특히 장진호 철수 과정에서 미 제1해병사단은 2, 3중 포위를 당해 8천여 명의 사상자를 내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전쟁≫이라 부를 만큼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강경표 외, <(한권으로 읽는)6·25전쟁사>(인천:진영사, 2012), p231~239)
결국 맥아더 사령관은 긴급 작전회의를 소집, 철수를 승인했다. 이에 따라 유엔군은 12월 4일 평양에서 철수했으며, 연말에는 38선까지 후퇴했다. 동부전선은 퇴로가 차단돼 미10군단과 기타 패잔 부대들이 흥남항에서 해상으로 철수했다.
정전카드를 꺼내다
두 차례 대공세가 실패로 끝나자 1950년 12월 14일 유엔 총회 결의 384(V)는 ≪한국에서 원만한 정화(cease-fire)가 이뤄질 수 있는 근거를 결정하고, 조속한 시일 내에 권고를 이행하기 위해 자신을 포함한 3명의 그룹을 구성할 것을 요청≫했다. 이에 따라 캐나다의 피어슨(L. Pearson), 이란의 엔테잠(N. Entezam), 인도의 라우(B. N. Rau)가 정화 3인단으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중국과 교섭에 실패했다.
▲유엔 총회 결의 384(V)
1951년이 되어 유엔군이 서울을 재탈환(3월 14일)하기 직전인 3월 12일 미8군 사령관 리지웨이(M. B. Ridgeway)는 ≪38도선에서 휴전이 된다면 유엔군의 대승리≫라고 이야기하였다. 이는 38선 이북으로 재진격이 어렵다는 뜻이기도 했다. 38선 부근에서 유엔군과 북한군 양측 모두 진격이 쉽지 않은 상황에서 전선은 고착 국면에 접어들었다.
이에 1951년 6월 들어 미국은 본격적으로 소련과 물밑 접촉을 시도한다. 6월 1일과 5일 조지 케난(George C. Kennan) 전 주소련 대사가 말리크(J. Malik) 유엔주재 소련대사와 만나 정전에 대해 논의했다. (김상원 외, <휴전회담 개막과 고지쟁탈전>,(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12), p32) 그 결과 형식적으로는 전쟁 당사국이 아니었던 소련이 먼저 정전협상을 제안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이에 따라 6월 16일 트뤼그베 리(Trygve H. Lie) 유엔사무총장이 휴전을 보장하는 성명을 발표했고, 23일에는 말리크 유엔주재 소련대사가 라디오 방송 연설을 통해 휴전을 암시했으며, 27일에는 그로미코(A. A. Gromyko) 소련 외무차관이 휴전을 제안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에 6월 30일 리지웨이 장군은 유엔군 총사령부 방송을 통해 휴전협상을 제안했고, 7월 1일 김일성 북한군 최고사령관과 펑더화이(彭德懷) 중국 인민지원군 총사령관이 공동 명의로 동의를 표했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은 이런 움직임을 격렬히 반대했다. 이 대통령은 정전논의가 본격화되기 전인 1951년 3월 24일 중국 국경까지 진격하기 전에 정전은 안 된다고 담화문을 발표하였다. 6월 9일에도 38선 휴전 결사반대를 선언하였고, 6월 27일에는 그로미코 소련 외무차관의 휴전 제안 성명을 거부하였다.
결국 유엔군과 북한군, 중국 인민지원군은 한국 정부를 배제한 채 7월 8일 개성 북쪽 래봉장에서 예비회담을 열고 곧바로 10일 본회담을 개최했다. 본회담에는 터너 조이(C. T. Joy) 미 극동해군 사령관, 호데스(H. I. Hodes) 8군 참모부장, 크레이기(L. C. Craigie) 극동공군 부사령관, 알레이 버크(A. A. Burke) 극동해군 참모부장, 백선엽 한국군 1군단장이 유엔측 대표로, 남일 대장(수석대표), 이상조 소장, 장평산 소장, 덩화(鄧華) 중장, 세팡(謝方) 소장이 북한군과 중국 인민지원군 대표로 참석했다.
유엔군이 북한, 중국 인민지원군과 정전회담을 개최하기로 결정한 과정은 전적으로 미국의 판단 아래 이루어졌다. 트뤼그베 리 사무총장은 ≪미국은 유엔 총회나 안보리의 추가적인 허가나 지침 없이 정전이나 휴전협정을 체결할 권리를 갖는다≫고 입장을 정리했다. (이상철, <한반도 정전체제와 유엔사의 위상>, Gaury Cyber Study Community, 2004.12.4.) 이는 사실상 미군이 유엔군을 좌지우지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정전협상을 할 수밖에 없었던 미국
이상과 같이 정전협상이 시작된 과정을 살펴보면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첫째, 미국은 전황이 자신들에게 유리한 경우에는 전쟁을 계속했지만 불리해지자 곧바로 협상에 돌입했다는 점이다. 어찌 보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지만 북한은 정반대로 행동했다. 북한은 자신들이 후퇴할 때는 협상에 관심이 없다가 자신들에게 유리한 상황이 되자 협상 개시에 합의했다.
실제로 정전협상이 개시되기 직전인 1951년 6월까지 미국은 78,800명의 인명손실, 100억 달러를 상회하는 전쟁비용을 감당해야 했다. 이는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 첫 1년 동안 입은 손실의 두 배가 넘었다. 그럼에도 전쟁 승리의 전망이 보이지 않고, 미국 내 여론도 부정적이었다. (김상원 외, <휴전회담 개막과 고지쟁탈전>,(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12), p28) 정전협상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둘째, 이승만 정부는 정전협상을 반대하고 전쟁을 통한 무력통일을 추진했다는 점이다. 이는 전황을 전혀 파악하지 못했거나, 전황을 알면서도 승전 가능성과 무관하게 별도의 정치적 목적이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아마도 반공반북을 기본으로 하는 자신의 정치적 지지기반을 강화하기 위한 판단으로 보인다.
이후 정권들도 이런 행태를 공통적으로 반복했다. 북미 사이에 대화가 진행되면 극단적인 반북 언행을 통해 이를 방하는 식이다. 예를 들어 지난 1월 10일 박근혜 당선인은 중국 정부 특사인 장즈쥔(張志軍) 외교부 부부장을 만나 ≪북한의 핵 개발은 국가의 안보 및 국민의 안위를 위해 절대 용납할 수 없다≫며 ≪추가적 도발에 대해서는 단호히 대응할 것≫이라고 했다. 지역 안정과 평화를 강조하는 중국 정부의 특사에게 한 얘기치고는 상당히 강경한 발언이다. 오바마 미 대통령이 북미직접 대화를 주장하던 존 케리(John F. Kerry)를 국무부장관 지명하고 에릭 슈미트 구글 회장이 방북한 것에 대한 반발 심리가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셋째, 미군이 유엔군을 실질적으로 주도하였다는 점이다. 이는 정전협정 체결 권리를 유엔이 아닌 미군이 가지고 있었다는 점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에 따라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해야 할 당사자도 사실상 미국임을 알 수 있다.
다음 글에서는 정전협상 과정에 어떤 우여곡절이 있었으며 이를 통해 북한과 미국의 협상 전략과 특성을 살펴보고, 평화협정 체결 과정이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 예측해볼 것이다. (2013.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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