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반도와 동북아 정세에서 주목할 두 정상회담이 있었다. 12일 중국-러시아 정상회담과 13일 한미 정상회담이 그것이다. 두 정상회담은 한-미-일과 북-중-러로 양분된 동북아의 세력 판도가 어떻게 재편되고 있는지 대비시켜 보여주는 상징적인 정치일정이었다.
달러체제에 대항하는 중-러 경제 협력 국내
언론에서는 크게 주목하지 않았지만 11~12일 푸틴 러시아 총리의 중국방문과 중러 정상회담은 여러 측면에서 동북아 정세에 시사하는 바가 컸다.
▲후진타오 주석과 만난 푸틴 총리
일단 현상적으로는 중러 경제 협력을 강화하기 위한 내용이 중심이었다. 이번 푸틴의 방문에 러시아 국영 천연가스 회사인 가즈프롬을 비롯한 160여 명의 대규모 경제 사절단이 포함된 것도 이를 잘 보여준다. 양국은 이번 방문을 통해
에너지, 금융, 농업 등 분야에서 70억 달러 규모의 경제·무역 협력 협정과 계약을 체결했다. 또 중국 국부펀드인 중국투자공사(CIC)는 러시아 정부와 관련된 직접
투자기금에 10억 달러를 투자하기로 했으며 오는
2020년까지 양국 연간 교역규모를 2000억달러로 끌어올리는 내용도 합의했다.
특히 1조 달러의 잠재적 가치를 갖고 있다는 시베리아산 천연가스 가격 협상이 주목을 받았다. 중국은 러시아와 2016년부터 30년간 시베리아산 천연가스를 공급받기로
2009년에 이미 합의했으나 가격 문제로 좀처럼 협상이 타결되지 않고 있었다. 러시아 입장에서는 유럽에 이어 중국에 천연가스를 안정적으로 수출하게 되면 막대한 경제적 이익을 얻을 수 있으며, 중국 입장에서도 제조업 발전에 에너지 공급이 필수적이다. 푸틴은 정상회담 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시베리아산 천연가스와 관련 “협상이 마지막 단계에 근접했다”고 말해 타결 가능성을 높였다.
한편 푸틴 방중 직전인 지난 10일부터 중국은 위안화와 러시아의 루블화의 은행간 외환시장 거래에서 수수료율을 폐지했다. 통상
외환거래는 기준환율에 일정 수수료율을 붙여 거래되는데 위안화와 루블화의 거래에서는 기준환율로만 거래를 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양국의 무역거래를 활성화하기 위한 조치인데 나아가 국제 기축통화인 달러에 대항하는 측면도 간과할 수 없다. 푸틴 역시 11일 밤 중국 관영
신화통신과 인터뷰에서 “미국의 달러 독점체제는 기생충”이라며 달러체제에 일침을 가했다.
▲달러체제가 무너지고 있다
이와 관련 지난 12일 미국 상원이 위안-달러 환율 상승에 대응해 보복 관세를 부과하는 ‘환율 조작 제재법’을 찬성 63표, 반대 35표로 통과시켜 주목받고 있다. 미국이 중국에 환율전쟁을 선포한 셈이다. 중국 정부는
세계무역기구(WTO) 규정 위반이며 중미 관계를 악화시킬 것이라고 반발했다. 미국 경제가 회복은커녕 더블딥에 진입하면서 달러체제가 흔들리는 속에서 중미 환율전쟁이 벌어지고 여기에 중국과 러시아의 경제 협력이 강화되는 흐름은 향후 세계 경제에서 중국, 러시아의 비중이 더욱 커질 것임을 예고한다.
미국 중심의 질서를 대체하는 북-중-러 동맹 푸틴의 중국 방문의 의미는 경제 협력에만 있지 않다. 12일자 조선일보는 푸틴의 중국방문을 보도하면서 이번 방중의 의미를 “미국·유럽 등 서방 세계에 대응하는 포괄적인 중·러 협력 관계 구축이라는 더 큰 전략적 목표가 있다”고 분석하였다. 푸틴은 사실상 내년 3월 러시아 대선에서 당선이 확실시되고 있으며 대선 출마를 선언한 후 첫 해외 방문지로 중국을 선택하였다. 이는 향후 러시아가 중러 관계를 중시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중국과 러시아가 최근 들어 국제 사회에서 한 목소리를 내는 일이 잦아지고 있다. 작년에 러시아를 방문한 중국 차기 최고 지도자인 시진핑 부주석에게 푸틴은 “러시아는 모든 국제적 현안에서 중국 입장을 지지할 것”이라고 하여 중러 관계를 과시하였다. 실제로 나토의 리비아 공습에 대해 두 나라는 반대 입장을 밝혔고, 지난 4일 유엔의 시리아 비난 결의안에도 양국은 거부권을 행사했다. 물론 러시아가 나중에 리비아 반군 측의 국가과도위원회(NTC)를 인정하면서 미묘한 갈등 양상이 나타나기도 하였으나 큰 흐름에서는 양국의 국제공조가 탄탄하다고 평가할 수 있다.
중러 사이의 정치, 경제적 관계가 강화되는 현상을 양국의 군사력과 연계지어 고려하면 국제질서 변화에 중요한 의미가 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세계 1위 핵보유국인 러시아와 세계 1위 육군 병력을 보유한 중국은 최근 스텔스기와 미사일방어(MD)체제 회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등 첨단 무기 개발에도 상당 수준에 올랐다고 평가받고 있다. 양국은 2005년부터 대규모 합동군사훈련인 평화사명(
Peace Mission)을 진행하면서 군사 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이런 양국의 군사력을 합하면 최근 첨단 무기 개발에 연이어 실패하고 있는 미국을 이미 능가하고 있다는 평가까지 나오고 있다.
▲평화사명 훈련 장면
이렇게 보면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 협력을 강화하고 있는 중러 양국이 지금까지의 미국 유일패권체제에 심각한 위협이 될 것임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특히 동북아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제거하면서 동북아 질서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것이다. 여기에 흥미로운 점이 하나 있는데 바로 북한의 존재다.
지난 13일 인터넷 ‘프레시안’의 “미국의 시대는 끝났다.
2012년 한반도는...”이라는 보도는 동북아 변화의 열쇠를 쥔 나라로 북한을 지목했다. 이 보도는 미국의 국제문제 전문가인 존 페퍼 포린폴리시인포커스(
Foreign Policy in
Focus) 소장이 지난 4일 정치평론 사이트 ‘톰 디스패치’에 기고한 글을 번역한 것이다. 여기서 존 페퍼는 미국 입장에서 동북아에 다가오는 놀라운 변화를 촉진하는 나라는 “북한”이 될 것이며, “미국은 (동북아시아에서) 따돌림 당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존 페퍼가 내세우는 근거는 북한이 “세계에서 가장 경제가 활발한 지역의 심장부에 위치하고 있다는 결정적인 입지 조건”을 가지고 있다는 점과, 최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방중, 방러로 북한이 중국, 러시아와의 관계를 급격히 강화하고 있다는 점 등이다.
실제로 중국과 러시아는 과거 사회주의 시절부터 경쟁관계에 있으면서 관계가 그리 긴밀하지 않았다. 지난 5~60년대 중소분쟁과 베트남전에 대한 입장차는 양국의 관계를 보여주는 역사적 사례들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그간 북한은 이런 불편한 관계에 있는 양국 사이에서 시종일관 중립적인 입장을 취해 왔다. 중소분쟁 과정에서는 소련에 더 비판적이었고, 베트남전 논란에서는 중국을 비판하면서 북한은 ‘자주외교노선’을 고수했다. 이를 통해 북한은 중러 사이를 연결시키는 교량자의 역할은 물론, 북-중-러 동맹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결론적으로 북한의 북중, 북러 정상회담에 이어 중러 정상회담으로 북-중-러 동맹은 더욱 굳건해지고 있으며 동북아에서 이들의 영향력은 급격히 증가할 것으로 예측된다.
MB 국빈방문 입장료는 14조? 한편 이명박 대통령의 미국 방문과 한미 정상회담은 색다른 모습을 연출하여 관심을 끌었다. 일단 대외적 핵심 이슈였던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문제와 관련해 미국 의회가 먼저 비준 동의를 하면서 한국 국회를 압박했다. 이는 기존의 예속적 한미관계를 기준으로 볼 때는 의외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만큼 미국 경제주체들이 다급한 것 아니냐는 분석도 가능하다. 하지만 한미 FTA는 이미 협상이 끝났고 미국도 비준 동의를 했고 한국 정부와 여당도 어떻게든 통과시키겠다는 입장이기에 이번 정상회담에서 심각하게 논의할 문제는 아니었을 것으로 보인다. 겉으로는 안보동맹에 이어 경제동맹까지 포함하는 다차원동맹으로 확장하는 데 합의했다고 강조했지만 이는 이전 정상회담에서도 이미 나왔던 이야기에 불과하다.
▲펜타곤 탱크룸에서 브리핑받는 이명박 대통령
더 특이한 모습은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미국의 파격적 대우다. 우선 미 국방부의 초청으로 공식일정에도 없던 펜타곤을 방문하여 ‘탱크룸’에서 미 합참의장에게 한반도 안보정세에 대한 브리핑을 받았다. 탱크룸은
전시 미 합참의장이 각 군에게서 전시상황을 보고 받고 작전을 지시하는 곳으로 외국 정상이 탱크룸에서 미 합참의장에게 브리핑 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한다. 또 오늘은 상하원 합동회의 연설도 계획되어 있다. 한국 대통령의 상하원 합동연설은 13년 만에 처음이다. 그리고
디트로이트도 함께 방문하기로 해 두 정상이 함께하는 시간이 장장 13시간에 달한다는 분석도 있다.
미국이 한국 대통령에게 이런 파격적인 대우를 하는 것은 그만큼 큰 무언가를 바라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단순히 한미 FTA 비준 촉구는 아닐 것이다. 오히려 한반도 문제, 정치군사적 문제일 가능성이 높다. 사실 이번 정상회담 전부터 한반도 문제와 관련된 몇 가지 움직임들이 있었다.
우선 지난 9월 21일 6자회담 남측 수석대표 위성락
외교통상부 평화교섭본부장과 북측의 리용호 외무성 부상이 중국 베이징에서 2차 남북 비핵화 접촉을 가졌다. 그리고 그 결과를 보고하기 위해 임성남 신임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이 임명된 지 하루만인 지난 6일 미국을 방문했다. 또 커트 캠벨 미국무부 동아태차관보가 7일 방한해 이명박 대통령과 외교통상부장관, 통일부장관 등을 만나고 갔다. 외교가에서는 한미 정상회담이 끝나면 10월 안에 2차 북미 고위급 회담이 열릴 것이라는 발언도 이어지고 있다. 클린턴 미국무부장관도 지난 11일 로이터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수주일 내에 북미간 추가 대화가 있을 수 있음을 강력히 시사했다. 정부 소식통은 “유럽의 제3국에서 열릴 것”으로 전망했다.
그렇다면 대북정책과 관련해 한미 정상은 어떤 이야기를 나눴을까? 확대 정상회담에 앞서 오벌 오피스에서 1시간 동안 열린 단독정상회담에는 한국측에서 이명박 대통령과 김성환 외교장관, 김관진 국방장관, 한덕수 주미대사, 천영우 청와대 외교안보수석, 김태효 대외전략비서관, 이혁 외교비서관이 배석했고, 미국측에서 오바마 대통령과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 리온 파네타 국방장관, 윌리엄 데일리 백악관 비서실장, 토머스 도닐런 국가안보보좌관 등이 배석했다. 말이 단독정상회담이지 사실상 외교안보회담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대북정책을 조율했을 것으로 보인다.
▲한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함께하는 한미 정상
미국이 무엇을 요구했든 이명박 정부가 어떤 입장이었을지는 쉽게 예상할 수 있다. 이명박 대통령은 이번 한미 정상회담에서 최근 국내 이슈로 떠오른 주한미군 범죄 문제나 주둔군 지위협정(SOFA)에 대해 일언반구 꺼내지 않았다. 오히려 국빈방문을 하기 위한 ‘입장료’를 냈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지난 12일자 내일신문 보도에 따르면 “정부 마지막해인 내년에 미국에서 직구매하는 무기 계약액이 사상 최대인 14조원에 육박할 것으로 보인다”며 “미국이 이 대통령을 국빈자격으로 초청한 배경도 세계 최대 무기수입국에 대한 예우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고 의혹을 제기했다. 이처럼 자국민들이 미군에게 연이어 성폭행당하는 속에서도 미국에게 엄청난 혈세를 보내는 이명박 정부가 미국의 요구를 100% 수용할 것은 당연한 이치다.
‘전쟁 카드’를 쓸 수 없는 미국의 선택은? 미국이 이명박 대통령에게 파격적인 대우를 하고 또 펜타곤에 불러 미군 수뇌부 전원이 참석한 가운데 “한반도 안보에 대해 어떤 상황이 와도 확실히 준비하고 대처하겠다”고 안심시키는 것을 통해 상반된 두 가지 가능성을 짐작해볼 수 있다. 첫째는 북미대화가 예상외로 빨리 진행되어 주한미군이나 평화협정, 북미수교 등과 관련한 중대한 합의들이 나올 수 있다는 점이다. 그래도 미국은 한국을 지켜줄 테니 걱정하지 말라는 내용의 ‘한국 정부 달래기’일 수 있는 것이다.
둘째는 정반대로 북미대화가 지지부진해지면서 심각한 정치군사적 충돌이 예상되고 이에 대한 대비를 하는 차원일 수 있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한국 정부가 총대를 메고 북한과 대결에 앞장서야 한다는 주문도 있을 수 있다. 물론 두 가지 모두 공통점은 있다. 어떤 상황에서도 미국은 한국을 지켜줄 테니 미국만 믿고 따라오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미국의 의중은 무엇일까? 지난 11일 미국 워싱턴에서 전략국제
문제연구소, 한미
경제연구소, 코리아 소사이어티 공동 토론회가 열렸다. 여기서 빅터 차 전 미국 국가안보회의 아시아 담당 보좌관은 북한을 오랫동안 방치할 경우 또다시 군사행동이나 핵실험을 강행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한미 정상이 잘 알고 있다면서, 북한의 핵과 미사일 개발을 억제하고 군사행동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본격적인 대북협상을 재개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빅터 차
그의 주장처럼 내년 재선에 도전하는 오바마 대통령 입장에서는 북한의 핵실험이나 미사일발사 같은 군사행동이 치명타로 작용할 것이다. 그렇다고 북한과 협상에 속도를 낸다면 ‘불량국가와의 협상’이라는 공격을 당할 수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일단 미국은 협상은 하되 관계를 발전시키지는 않는
위기관리 전략을 구사하려 할 것이다. 하지만 북한이 그런 알맹이 없는 협상에 관심을 가질 이유는 없다. 북한 입장에서는 핵실험 준비만 보여줘도 미국이 움직일 수밖에 없기에 결국 열쇠는 북한이 들고 있는 셈이다.
미국이 북한에 끌려가지 않을 유일한 방법은 전쟁뿐이다. 사실 지금의 경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가장 절실한 것도 대규모 전쟁일 것이다. 하지만 앞서 살펴본 것처럼 북-중-러 동맹이 갈수록 강화되는 상황은 미국에게 ‘전쟁 카드’를 던질 수 없게 압박하고 있다. 전쟁이 불가능하다면 결론은 하나밖에 없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미국의 세기는 끝이 나는 것일까? (2011.1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