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섭리와 정치섭리는 내외적인 관계로서 병행하여 왔는데 특히 666의 섭리 즉 6000년 역사를 해방 이후 한민족사 60년(1948∼2007)과 제6공화국(노태우∼노무현)으로써 상극투쟁의 세상은 막을 내리기 시작하기 때문에 해방 이후 한민족사 60년 기간에는 인류역사 출발 이후 근세에 이르기까지 세계 각국에서 이땅을 거쳐간 내외적인 사명자들이 윤회환생(輪廻還生)을 하여 전생(前生)의 각본사명(脚本使命)을 재연반복하면서 역사를 엮어 나오고 있기 때문에 전생을 알지 못하고는 납득할 수 없는 일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이다.
차제에 우리 인간의 운명(運命)과 숙명(宿命)에 대하여 정의를 내린다면, 운명의 본원(本源)은 우리 인간의 겉사람(육신)을 위주로 하여 육신(肉身)이 이땅에 태어나는 년‧월‧일‧시가 적용되는 사주(四柱)에서부터 관상‧수상‧골상 등을 근거로 하여 길‧흉‧화‧복을 감정하는 운명철학으로서 인간의 부단한 노력으로 어느 정도는 개척할 수도 있지만, 숙명의 본원(本源)은 우리 인간의 속사람(정신)을 위주로 하는데 창조주이신 하늘부모님(天父‧天母)께서 인간의 속사람(精神) 즉 영혼(靈魂)을 창조하시면서 부여한 각본사명(脚本使命)이기 때문에 인간의 힘으로는 개척할 수도 없고 피해갈 수도 없는 일이다.
다시 말해서, 운명(運命)은 운수 운(運) 자와 명령할 명(命) 자에 잘 드러나 있듯이 인간의 겉사람(肉身)에게 주어진 운수가 알게 모르게 명령하여 이끌어가기 때문에 외적으로 존재하는 물질적인 힘이 크게 작용하게 되므로 주로 육신쓴 인간세상과 유착관계가 이루어지면서 변화난측(變化難測)한 일이 일어나지만, 숙명(宿命)은 잘 숙(宿) 자와 명령할 명(命) 자에 잘 드러나 있듯이 인간의 속사람(精神)에게 주어진 운수가 본인은 알 수 없는 즉 잠자고 있을 때 명령하여 이끌어가게 되므로 주로 내적으로 존재하는 영적세계(하나님‧천사‧조상영)와 유착관계가 이루어지면서 변화불측(變化不測)한 일이 일어나기 때문에 유한된 인간의 힘이나 지략으로는 어찌할 방도가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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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一장 해방 이후 한민족 정치지도자들의 섭리적 운명과 숙명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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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역사를 출발시킨 아담(환웅천왕)가정 이후 오늘까지의 6000년 역사를 해방 이후 한민족사 60년으로 수리적인 축소재연(縮小再演)을 하게 되면서 상극투쟁의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되는 666의 섭리(계 13/18) 즉 인류역사 6000년을 한민족사 60년(1948∼2007)과 제6공화국(노태우∼노무현)으로써 매듭짓게 되므로 일제압박 40년의 민족적 탕감시대를 거친 이후 새롭게 엮어지는 60년 기간에는 이땅을 거쳐간 내외적인 사명자들이 시대와 민족과 국경을 초월해서 한반도로 윤회환생(輪廻還生)하게 되면서 내적 사명자들의 예언이나 약속의 말씀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해방 이후 한민족사 60년은 성약섭리사(成約攝理史)이기도 하다. 좀 더 구체적으로 알아본다면, 이땅을 거쳐간 내적인 사명자들의 예언은 물론이고 주류섭리사(柱流攝理史)를 이끌어오면서 하늘이 인간들에게 약속했던 구약(舊約)과 신약(新約)의 말씀이 해방 이후 한민족사 60년 기간에 확연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성약섭리사(成約攝理史)를 한반도에서 살고 있는 남‧북한의 한민족이 알지 못하고 있으니 통탄할 일이 아닐 수 없다. 신약성서(베후 3/8)에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고 당부하신 말씀이 바로 인류역사 6000년을 해방 이후 한민족사 60년으로 축소재연(縮小再演)하게 되는 전무후무한 시대를 가리킨 것이다. 지금부터는 원래부터 한민족 가운데 태어났던 선조(先祖)들로서 못다 한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서 다시 윤회환생하였던 외적인 사명자들과, 시대와 민족과 국경을 초월해서 윤회환생하게 된 정치지도자들을 중심삼고 엮어지게 된 해방 이후 한민족사 60년(1948∼2007)을 섭리적 차원에서 재조명하기로 한다. |
'일생일사(一生一死)'의 천칙(天則)을 벗어날 수 없는 인간세상에서 윤회환생(輪廻還生)이 차지하는 비중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인생철학의 열쇠이기도 하기 때문에 인생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자기의 현생(現生)과 결부되는 전생(前生)을 알아야 하고 전생(前生)과 결부되는 현생(現生)을 알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윤회환생(輪廻還生)에 대한 올바른 지식이 필요하다. 지금부터 2500년 전에 이땅에 오셨던 석가세존께서 밝혀놓은 윤회환생(輪廻還生)은 바퀴 륜(輪), 돌아올 회(廻), 돌려보낼 환(還), 날 생(生) 자의 한문자가 그 의미를 내포하고 있듯이 '인류역사의 수레바퀴가 한 바퀴 돌아서 그 자리에 올 때 다시 나서 보낸다'는 뜻으로서, 이땅에 인류가 염원하는 지상천국(극락정토)이 이루어지게 되면 윤회환생이 필요 없겠지만 선천시대(先天時代) 6000년 동안은 계속적으로 시행된 인생법칙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서, 인류역사의 수레바퀴가 한 바퀴를 돌아서 다시 그 자리에 오게 되었을 때 우리 인간의 속사람이 육신을 쓰고 다시 태어나서 전시대에 못다 한 사명을 또다시 수행하게 되는 것을 윤회환생이라 하며, 오늘까지 인류역사의 수레바퀴가 세계적으로는 한 시대를 2000년으로 하여 3바퀴를 돌았기 때문에 6000년의 역사를 장식하게 된 것이며, 한 시대를 2000년으로 하는 윤회환생섭리를 종적윤회환생(縱的輪廻還生)이라고 하는데 특수한 경우에는 4000년이나 6000년만에 이루어지기도 한다. 이와는 다르게 국가나 민족적으로 특수하게 이루어지는 윤회환생의 경우로서 한 시대를 30년, 40년, 60년, 600년 등으로써 시대적 섭리의 상황에 따라 이루어지는 윤회환생섭리를 횡적윤회환생(橫的輪廻還生)이라고 하며, 전생(前生)과 현생(現生)은 일치하기 때문에 현생을 보아서 전생을 알 수도 있는데 가장 큰 문제점은 윤회환생에 대한 개념부터가 크게 잘못 되어 있다는 것이다. 섭리에 의해 돌아가는 인류역사의 수레바퀴가 작게는 30년이나 40년이나 600년만에 한 바퀴 돌아오는 경우도 있고 크게는 2000년만에 한 바퀴를 돌아서 본래의 자리로 오게 되는 경우도 있는데, 하늘부모님(天父‧天母)으로부터 창조를 받게 되는 우리 인간의 속사람이라고 하는 정신(精神) 즉 영혼(靈魂)이 하늘부모님으로부터 전시대에 못다 한 사명을 다시 부여받아 육신의 부모님(父‧母)으로부터 창조를 받은 겉사람 즉 육신(肉身)이라는 체를 쓰고 이땅에 탄생하여 육신쓴 인간으로서 전시대 사명자가 못다 한 사명을 다시 수행하게 되는 인생섭리(人生攝理)가 석가세존께서 밝혀놓은 윤회환생(輪廻還生) 진리의 올바른 지식이다. 그런데 윤회환생(輪廻還生)의 본 뜻과는 너무도 다르게 '사람이 죽은 다음에 다시 환생하게 될 때는 미물이나 짐승으로 올 수도 있다'고 믿고 있는 허황되고 그릇된 지식 때문에 석가세존께서 오랜 각고 끝에 고유사명(固有使命)으로 찾아 세운 윤회환생섭리를 놓고 문제는 불교인들부터 크게 잘못 알고 있는 왜곡된 지식으로 인하여 수많은 종교인들이나 지성인들로부터 인생철학(人生哲學)의 근본열쇠가 되어야 할 윤회환생(輪廻還生)섭리가 외면 내지는 부정당하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또한 만물지영장(萬物之靈長)으로 자처하는 우리 인간은 누구를 막론하고 겉사람(육신)과 속사람(정신)이라고 하는 유형(有形)과 무형(無形)으로써 이중구조로 창조되어 있으며 육신(肉身)은 육신의 부모로부터 기인되고 속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정신(精神) 즉 영혼(靈魂)은 하늘부모님으로부터 기인되는데, 불교인들은 정신(영혼)이 육신(겉사람)을 터로 해서 자생(自生)한다고 믿고 있기 때문에 윤회환생(輪廻還生)에 대한 근본 뜻을 다르게 해석하고 있으니 답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하늘로부터 속사람이라고 하는 정신(精神) 즉 영혼(靈魂)을 부여받은 인간들이 분명하게 알고 가야 할 내용이 있다면 영혼을 부여받지 못한 짐승들과는 근본이 다르기 때문에 만물지영장(萬物之靈長)으로 창조를 받은 인간세상의 윤회환생(輪廻還生)은 열백번을 하여도 만물지영장으로 다시 환생하게 되는 것은 확고부동한 창조진리(創造眞理)로서 만고의 진리이기도 하다. 다만 미완성한 인간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죄악성(시기‧질투‧교만‧혈기)이라고 하는 수성(獸性)을 지니고 있는데, 이땅에서 악독한 생활을 하게 된 사람은 짐승에 못지 않을 정도로 강한 수성(시기‧질투‧교만‧혈기)을 유전인자를 통해서 후손들에게 계승시키기 때문에 짐승 같기도 한 수성(獸性)을 가지고 태어날 수는 있지만 영혼(靈魂)을 소유하지 못한 짐승으로 태어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리고 이땅을 거쳐간 조상영(祖上靈)들이 육신쓰고 있는 후손들의 배후에서 협조하며 함께 하는 경우는 윤회환생(輪廻還生)과는 본질이 다른 '재림부활(再臨復活)'로서 여러 가지의 형태로 분류되며 윤회환생이나 재림부활과는 또 다른 '사자회생(死者廻生)'섭리가 있는데, 오늘까지는 주로 윤회환생이나 재림부활섭리였다면 앞으로 인간재창조(人間再創造) 섭리시대에는 조상영계의 협조로 이루어지는 사자회생(死者廻生)섭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데 이 문제는 다음에 언급하기로 한다. 결론적으로 볼 때, 물질을 위주로 하는 과학문명이 20세기를 주도하다 보니 과학적인 지식을 앞세운 유물론(唯物論)적인 사고방식 때문에 자연스럽게 형성된 무신론(無神論)주의자들에게는 우습게 여겨질지 모르겠지만, 인류역사 6000년을 해방 이후 한민족사 60년으로 종결짓게 되는 섭리에 의해 이땅을 거쳐간 내외적인 사명자들이 국가와 민족과 시대를 초월해서 한반도로 윤회환생(輪廻還生)하여 사명완수를 함에 따라 인류가 염원하는 이상세계가 꿈 아닌 현실로 우리 앞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유념해 두어야 할 것이다. |
지금부터 약 3600년 전에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출애굽노정을 출발했던 모세시대에는 내적인 종교사명이나 외적인 정치사명을 모세 한 사람이 수행하였지만, 김구 선생이 한민족을 이끌고 일제압박시대를 벗어나기 위해서 출발했던 출일본노정(出日本路程)의 시대부터는 민족과 국가를 넘어선 세계적인 시대가 도래했기 때문에 모세의 사명도 내적(종교적)인 사명자와 외적(정치적)인 사명자로 분류하게 되는데, 김구 선생은 외적인 모세로서 전생(前生)의 모세가 걸었던 외적인 노정을 다시 재연(再演)하게 된 것이다. 『구약성서』에 의하면 애굽인들이 이스라엘 민족을 심하게 학대하는 것을 목격한 모세가 울분을 참지 못하고 애굽인을 살해한 것이 탄로 나자 자기를 죽이려는 바로를 피하여 광야생활을 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당시에 이스라엘 민족의 내(종교)‧외(정치)적인 지도자로서 가나안까지 이끌어 왔지만 그렇게도 소망했던 가나안 땅을 바라보면서도 결국 입성하지 못했고 시체마저 행방불명이 되었던 비참한 말로를 맞이하게 되었던 것이다. 전생(前生)이 외적 모세로서 이를 재연(再演)했던 김구 선생도 한 때는 동학혁명에 가담했던 민족주의자로서 21세 때 ‘명성황후(민비)의 원수를 갚는다’는 분통한 심정으로 일본군 중위를 살해하고 감옥살이를 하다가 탈옥하여 전라도 일대를 방황하기도 했으며 중국 상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 주석으로 활약하는 등 민족을 위해 일생을 바쳤지만 통일정부의 꿈을 이루지 못한 채 동족의 총탄에 쓰러지는 비참한 말로를 맞이했던 것이다. 그러나 역사의 상황적 섭리로 본다면, 해방 직후 남한이 미국의 주관권에 있을 때 미국에 망명해 있던 이승만 박사를 내세우게 되면서 민족주의자였던 김구 선생이 제거됨으로써 결국 남한은 미국의 문화적 속국이 되어 버렸고, 북한도 소련의 주관권에 있을 때 일찍부터 소련에 기대어 있던 김일성 장군을 내세우게 되면서 민족주의자였던 조만식 선생을 비롯한 정치지도자들이 제거됨으로써 결국 북한은 소련의 사상적 속국이 되고 말았는데 이 또한 유대민족사와 결부된 섭리역사의 일면이다. |
그러나 전생(前生)이 사울왕으로서 피할 수 없는 섭리적 숙명으로는 전생의 사울왕 시대에도 블레셋 족속들이 갑옷과 투구를 쓴 기골이 장대한 골리앗을 앞세우고 갑자기 쳐들어오자 병사들이 싸워보지도 못한 채 법궤까지 빼앗기고 혼비백산하여 도망가고 말았듯이, 이를 재연하게 된 이승만 초대 대통령시대에도 1950년 북한군이 탱크를 앞세우고 갑작스럽게 침범하자 크게 싸워보지도 못한 채 수도 서울을 빼앗기고 혼비백산하여 정부는 부산까지 피난을 가야했던 비극의 역사를 장식하기도 했는데, 이는 전생(前生)이 사울왕이었던 이승만 대통령의 숙명이요 한민족의 섭리적 숙명이기도 하다. 아울러서 6‧25사변 이후 한국전쟁에 참여하여 인천상륙작전 당시 함포사격으로 전세를 역전시킨 맥아더 장군의 전생(前生)은 왕위에 오르기 전에 돌팔매로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이지만 맥아더 장군(다윗)의 힘을 입어 다시 남한을 통치하게 된 다윗왕의 직분은 이승만 대통령이 수행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지금부터는 이승만 대통령시대에 정치적으로 크게 부각되었던 분들의 전생(前生)에 대하여 잠깐 알아보기로 한다. 국회에서 제2대 부통령으로 선출되었으나 1년만에 사임한 김성수 선생의 전생(前生)은 부귀영화를 누렸던 솔로몬왕이요, 이기붕 선생의 전생은 솔로몬왕의 아들이었던 르호보암이며, 신익희 선생의 전생은 솔로몬왕의 신복이었던 느밧으로서 김성수 선생(전생:솔로몬왕)이 1955년 2월에 별세하였기에 1956년 대통령선거에 출마했던 것이다. 또한 조병옥 박사의 전생은 느밧(전생:신익희)의 아들로서 르호보암(전생:이기붕)의 행위에 반기를 들어 왕권에 도전했던 여로보암으로서, 이 시대에도 대통령이나 부통령에 출마했던 분들은 얽히고 설킨 전생의 인연으로 현생(現生)에 다시 만나서 정치를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해방 이후 남한에서 초대 대통령으로 등장했던 이승만 박사께서는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한 '건국의 아버지'로서 국가적으로 어려운 시대에 망명정치지도자로 활약하다보니 가정은 희생시킬 수밖에 없었던 가슴아픈 사연들이 있다. 이승만 박사가 16세 때인 1890년 아버지(이경선)가 정해준 경기도 양주 출신으로 2년 연상의 부인 박승선(朴承善)씨와 결혼하여 1892년 아들 봉수(鳳秀 또는 泰山이라고 함)를 낳았지만 1906년 외아들인 봉수는 망명해 있던 아버지를 만나러 미국에 건너갔다가 장티푸스에 걸려 어린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고, 박씨 부인이 홀로 모시고 살던 시아버지(이경선)마저 1912년 별세하게 되자 이승만 박사와 첫 부인이었던 박씨와의 관계는 그때부터 거의 두절되다시피 했다고 하는데, 그 이후의 사연들은 더욱 가슴아픈 사연들만 전해지고 있다. 혹자들은 1934년 뉴욕에서 60세의 이승만 박사가 본처는 뒤로 한 채 35세의 오스트리아 출신 프란체스카 여사를 후처로 맞이하게 된 점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프란체스카 여사의 전생(前生)은 원래 우리아의 아내였으나 후일 다윗왕의 후처가 된 밧세바로서, 맥아더 장군과 더불어 다윗왕의 직분을 수행하게 되었던 이승만 박사로서는 전생의 밧세바(프란체스카)를 후처로 맞이하게 된 것도 피할 수 없는 섭리적 숙명이라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볼 때, 이승만 박사는 1894년 배재학당에 입학하여 신학문을 공부하고 이듬해 배재학당의 영어교사가 되었다가 서재필 선생께서 독립협회를 조직하여 독립신문을 발간하게 되자 여기에 가담하여 독립사상 고취와 민중계몽에 투신하였다가 황국협회의 모함으로 결국 7년 동안이나 아까운 청춘을 감옥에서 보내야 했으니 이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한민족을 대신한 옥고이기도 하다. 1904년 출옥 후 고종의 밀서를 가지고 미국에 건너가게 되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자 그대로 미국에 머물러 워싱턴 대학에서 공부하게 되었고,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귀국하여 후진양성에 전력하다가 1912년 다시 도미한 이후 30여 년간 고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미대륙과 하와이‧상해 등지를 돌아다니며 독립운동에 헌신하였을 뿐 아니라 상해에 임시정부가 생기면서 초대 대통령에 취임하였으며, 1948년 8월 15일 초대 대통령에 취임한 건국대통령으로서 '대한민국'이라는 새로운 나라를 건국하는 데 책임과 사명을 다한 건국의 국부(國父)로 재평가되어야 한다는 것이 섭리적 판단이다. |
부언한다면, 김일성 주석의 전생(前生)은 성서(聖書)에 인류역사를 출발시킨 첫 조상(아담)가정의 장남으로 등장하는 가인이며, 부자세습으로 북한정권을 계승한 김정일 위원장의 전생은 이삭의 축복을 받아 피신하였던 야곱을 죽이려고 칼을 갈았던 에서로서, 동생인 아벨을 살해한 가인과 동생인 야곱을 죽이려고 칼을 갈았던 에서와는 일맥상통한 점이 있지만 김일성 주석이 서거한 이후부터 북한의 정치적 각본은 '에서노정'이라는 것을 인지해야 할 것이다. 일차적으로 수행한 정치적 각본은 형이었던 '가인'이 어린 동생인 아벨을 살해한 원초적 각본을 재연(再演)한 1950년의 6‧25전쟁으로서, 한민족이 1945년에 해방은 되었지만 강대국들(미‧소)의 통치에 있었고 1948년 정부는 수립되었으나 미처 국방력도 갖추지 못한 남한을 한 피를 이어받은 단일민족으로서 도와주지는 못할 망정 갑작스럽게 침범하여 피흘리는 민족적 비극을 초래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동족상쟁의 피비린내 나는 1950년의 6‧25전쟁을 놓고 북한에서는 '일시라도 민족적 염원이었던 조국통일을 이룩하신 위대한 어버이 수령의 업적이었는데 미제국주의가 개입하여 통일조국이 무산되었다'는 역사적 평가를 하고 있는 반면에, 남한에서는 김일성 주석을 민족상잔의 전범(戰犯)으로 규정하고 있을 뿐 아니라 미국이 우방으로서 국토를 다시 찾는 데 크게 공헌한 국가로 인정하고 있으므로 1950년의 6‧25전쟁을 놓고 남한과 북한은 상반된 역사관을 수립하고 있는 실정으로서 인간들의 지식적 판단으로는 쉽사리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인간은 누구라도 피해갈 수 없는 숙명(宿命)으로 주어진 김일성 주석의 전생(前生)을 섭리적 차원에서 본다면 6‧25전쟁의 비극은 첫 조상가정에서 형이었던 가인이 어린 동생인 아벨을 보호하지 못하고 살해했던 골육살인의 비극을 처음과 끝으로 매듭짓게 된 섭리적 각본으로서 작은 나라에서 일어난 동족상쟁의 비극인데 세계가 참전하여 치르고 넘을 수밖에 없는 제3차세계대전을 한반도에서 한민족을 중심삼고 매듭짓게 되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인류가 피흘리는 전쟁역사의 시원점(始原點)은 인류역사를 출발시킨 첫 조상가정에서 가인이 아벨을 살해하면서부터 시작되어 종족·민족·국가·세계로 이어지면서 그칠 날이 없었고, 그 여파는 지금부터 2000년 전 이땅에 오셨던 예수님이 세계인류를 구원하여 지상천국을 건설하려 했는데 유대민족의 불신으로 십자가 형틀에 매달려 피흘리며 돌아가시게 한 죄값을 1차적으로 이스라엘 민족부터 600만이 아이히만에게 학살당하는 비극과 2000년 동안 나라 없는 민족으로 유리애곡했던 탕감이 시작되어 세계가 치르게 된 비극이 세계대전이기 때문에 3차에 걸친 세계대전은 피할 수 없는 섭리적 숙명인데, 이러한 제3차세계대전을 1950년부터 1953년까지 한반도에서 치러놓고도 이를 결부시키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역사적으로 고찰하여 볼 때, 제1차세계대전(1914∼1918)은 동맹국(오스트리아‧독일‧투르크‧불가리아)과 협상국(러시아‧프랑스‧영국‧이탈리아‧미국)으로 나뉘어 치르게 되었고, 제2차세계대전(1939∼1945)은 연합국(영국‧프랑스‧미국‧중국‧소련)과 동맹국(독일‧이탈리아‧일본)으로 나뉘어 치르게 되었으며, 제3차세계대전(1950∼1953)은 공산진영(북한‧중공‧소련)과 민주진영(남한‧16개국의 유엔군)으로 나뉘어 한반도에서 치르게 되면서 매듭짓게 되었으니, 북한의 김일성 주석이 수행한 각본 자체는 악역(惡役)이지만 인류역사를 출발시킨 첫 조상가정의 실수를 처음과 끝으로 한반도에서 종결지을 수밖에 없는 민족적 숙명이었다는 것이 섭리적 심판이다. 또한 북한정부를 출범시킨 김일성 주석의 전생(前生)은 인류역사를 출발시킨 첫 조상가정의 장남인 '가인'이기 때문에 예로부터 장남은 부모 대신의 위치를 차지하게 되듯이 북한의 동포들로부터는 '어버이 수령'으로 모심을 받으면서 반세기 동안 북한을 통치한 정치지도자로서, 또 하나의 섭리적 각본으로는 다음 장에서 소상하게 밝히겠지만 구약시대에 역사상 처음으로 천사를 주관했던 야곱을 죽이려고 칼을 갈았던 정치적 '에서'의 각본을 수행하다보니 조국통일의 꿈을 이루기 위한 목적으로 가공할 전쟁무기 생산에 박차를 가했던 것이다. 그러나 달도 차면 기우는 법, '에서노정'의 정치적 각본을 다하였기에 1994년 7월에 세상을 떠나게 됨으로써 제1세시대(부모시대)의 정치적 에서노정은 막을 내리고 북한의 정치적 '에서노정'은 제2세시대(자녀시대)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부자세습으로 계승하게 되었는데 지금은 제3세시대(손자시대)의 에서노정을 준비하고 있는 실정이다. |
제2공화국을 출범시킨 윤보선 대통령의 전생(前生)은 신라시대의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敬順王)으로서, 경순왕도 '왕건과 싸워 보았자 승산도 없을 뿐 아니라 무고한 백성들이 피만 흘리게 된다'는 판단에서 왕건에게 나라를 내주고 함께 하면서 태자 위에 가는 벼슬(정승)을 받았듯이, 윤보선 전 대통령께서도 5‧16군사혁명이 일어나자 '올 것이 왔다'고 하면서 받아들였고 실권은 없었지만 혁명정부에서 인정해주는 대통령의 직분도 어느 기간 동안은 유지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신라의 경순왕시대에도 부자일체였던 마의태자는 승복하지 않고 잃어버린 나라를 찾으려고 나름대로는 노력해 보았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말았듯이, 윤보선 전 대통령도 대통령직에서 물러나와 부자관계인 마의태자 노정으로서 민정회복(民政回復)을 하기 위해 대통령 선거에 두 번씩이나 출마를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말았으니 이 또한 우연일 수는 없다. 역사를 들추어보면, 같은 나라는 아니지만 신라 제52대 효공왕(孝恭王)시대부터 등장하게 되는 궁예와 왕건의 묘한 관계는 역사의 수수께끼로서, 결국 왕건으로 하여금 경순왕시대에 신라까지 통합시키는 대업을 성취하는 데 있어서 궁예는 왕건이 궁지에 몰리게 될 때마다 구해주었을 뿐 아니라 왕건이 고려를 건국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주고 당시 태봉국의 장군들이었던 신숭겸‧홍유‧복지겸‧배현경 등이 의거하여 왕건(王建)을 임금으로 추대하자 궁예는 도망하다가 평강에서 피살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역사섭리노정을 그대로 재연한 것이 5‧16군사혁명을 일으킨 군부의 상황으로서,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의 전생(前生)은 궁예요 장면 국무총리의 전생(前生)은 후백제를 세운 견훤이며, 박정희 전 대통령의 전생은 왕건은 아니지만 왕건노정을 재연(再演)하게 되었는데, 신라의 경순왕도 견훤이 밀어주어서 임금이 될 수 있었듯이 윤보선씨가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것도 당시 민주당 신파의 좌장이었던 장면 총리(전생:견훤)가 밀어주었기 때문으로서 세 사람의 인연은 이때부터 전생과 직관되는 숙명노정(宿命路程)으로 이어지게 되며, 특히 장도영 참모총장과 박정희 소장은 군생활 내내 기묘한 인연의 끈으로 맺어져 오면서 여러 차례 위기에서 구해주게 된다. 좀 더 구체적으로 알아본다면, 각본섭리(脚本攝理)를 알지 못하고는 납득할 수 없는 일이 당시 육군참모총장으로서 병권을 한 손에 쥐고 있던 장도영 총장은 박정희 소장으로부터 혁명계획을 얼마 전에 들었기 때문에 알고 있었지만 적극 가담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반대도 하지 않는 즉 용인(容認)하는 입장이었으며, 거사에 참여하고 있던 이종태 대령이 거사계획을 육군참모부의 장세현 중령에게 누설하였으므로 마음만 먹으면 박정희 소장 일파를 잡아들이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는데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고, 장면 총리가 쿠데타 설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자 장도영 총장은 '염려할 것 없다'고 큰 소리만 쳤다는 것이다. 그런데 거사를 불과 몇 시간 앞두고는 비밀이 누설되자 반란주동자 체포 및 반란군의 진입저지를 명령하기도 했으나 5‧16군사혁명이 성공하자 얼굴마담 역할로서 국가재건최고회의의장직과 내각수반 겸 국방장관직까지 겸임하여 혁명내각을 발족시킴으로써 명실상부한 군사정권이 출범하지만, 20여 일만에 육군참모총장직분에서부터 계엄사령관‧국가재건최고회의의장‧내각수반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을 뿐 아니라 1961년 7월 9일에는 장도영을 위시한 44명의 군간부가 '반혁명행위 및 박정희‧김종필 암살모의혐의'로 체포‧투옥되고 말았으며, 이때부터 박정희 소장을 중심한 육사 8기 출신의 김종필 세력이 혁명정부 주류로 등장하게 된다.이러한 정치적 우여곡절은 숙명으로 주어진 윤보선 대통령의 전생(前生)과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의 전생과 박정희 소장의 정치적 왕건노정이 서로 맞아떨어진 섭리적 숙명이기 때문에 인간의 힘이나 지략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해방 이후 한민족의 섭리적 숙명이었다는 것을 인지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제2공화국을 출범시킨 윤보선 대통령시대에 일어난 5‧16군사혁명이 자칫 잘못하였다면 아군끼리 피흘리는 유혈비극은 말할 것도 없고 호시탐탐 무력통일의 기회를 엿보던 북한까지 넘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만들어 민족적 유혈비극을 초래할 수도 있었는데, 전생(前生)의 인연으로 다시 만나게 된 윤보선 대통령과 장면 총리와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이 자기 일신상의 영달보다는 국가와 민족을 염려하는 우국충정(憂國忠政)으로 이루어진 무혈구국(無血救國)이었다는 것이 섭리적 심판이다. |
고 박정희 대통령은 어려운 시대에 국가원수로 등장하여 민족적 숙원이었던 가난을 물리친 정치지도자로서 오랫동안 집권하면서 여러 가지의 정치적 각본을 수행하다보니 각본섭리(脚本攝理)를 알지 못하는 국민들로부터 '유신독재'라는 말을 듣기도 했지만, 神의 섭리를 알고 보면 인생은 운명과 숙명을 앞세운 연극이기 때문에 대통령이라고 하여 자기 뜻대로 살아갈 수 없는 일이다. 한민족이 강대국(미국‧소련)들의 힘을 빌어 일본제국으로부터 해방은 되었지만 약소민족이 존재하기 위한 신사대주의(新事大主義)로써 북한은 소련의 사상적 속국이 되었고 남한은 미국의 문화적 속국으로 화해 버린 것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역사적으로 고찰하여 볼 때, 전생(前生)의 공민왕도 당시에 세력이 강했던 원나라의 그늘에서 살아야 하는 사대주의(事大主義)에서 벗어나기 위해 국가적으로 단행한 업적이 참으로 많듯이, 이를 직시한 현생(現生)의 박 대통령도 한민족의 정통성을 회복하기 위한 위인‧성현들의 추모사업으로서 충무공의 현충사, 최수운 대신사님의 유적, 윤봉길 의사의 충의사, 추사 김정희 선생의 고택, 곽재우 장군의 유적, 전국의 사찰‧서원‧향교의 보수 및 복원사업, 밀양아랑제, 신라고도의 정화사업 등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의 문화성업(文化聖業)을 수행했으며, 경제적으로는 민족적 숙원이었던 가난을 물리친 대통령이었지만 전생(前生)과 결부된 숙명(宿命)은 피할 수 없는 것이 인생이기도 하다. 전생(前生)과 현생(現生)은 서로 뗄 수 없는 섭리적 숙명의 틀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전생의 공민왕과 현생의 박정희 대통령은 시대와 환경은 크게 달라졌지만 너무도 유사한 숙명의 인생열차를 타고 생을 마감했던 역사적 사실을 섭리적 차원에서 순차적으로 알아보기로 한다. 첫째, 고려말기에 제31대 임금으로 등장하게 되었던 공민왕이 1351년 노국공주를 왕비로 맞이한 후 1365년까지 14년 기간에 도탄에 빠져 허덕이던 고려를 구하게 되지만 노국공주가 난산 끝에 피흘리며 세상을 떠난 후부터는 실정의 늪으로 빠지기 시작하다가 급기야는 가장 가까이서 왕을 모시던 환관 최만생에게 시해 당하게 된다. 현생의 박정희 대통령도 선말후초(先末後初)시대에 국가원수로 등극하여 1961년부터 정권을 잡게 되면서 국모의 위치에 오른 육영수 여사의 보필을 받으며 1974년까지 14년 기간에 민족적 숙원이었던 가난을 물리치게 되었지만, 육영수 여사가 1974년 8‧15광복절의 저격사건으로 피흘리며 돌아가신 후 남모르는 고독의 늪으로 빠지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오른팔처럼 보필하던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게 시해당하게 된다. 둘째, 공민왕을 모시던 환관 최만생도 왕을 가까이 모시던 자제위 홍륜의 문제로 자기의 존립에 위협을 느끼게 되자 결국 자제위를 설득하여 술에 취해 자고 있는 공민왕을 시해하는 과정에서 확인사살까지 하여 놓고도 범행을 숨기려 했듯이, 전생(前生)이 최만생인 김재규 중앙정보부장도 박 대통령을 직접 보필하던 차지철 경호실장(전생:신돈)의 월권행위로 입지가 불안해지자 술자리에서 부하들을 설득하여 박 대통령을 시해하는 과정에서 확인사살까지 하여 놓고도 범행을 숨기려 했던 것이다. 셋째, 공민왕 시대에도 노국공주가 세상을 떠난 직후부터 발탁되었던 신돈이 절대적인 신임을 받으며 6년 동안 국정을 전횡하였지만 결국은 참형당하는 비참한 말로를 맞이하였듯이, 박 대통령시대에도 육영수 여사가 별세한 직후부터 박종규 경호실장 후임으로 발탁된 차지철(전생:신돈)이 무조건적인 충성심으로 박 대통령의 신임을 받아 유신공화국의 '부통령'이라는 칭호를 받을 정도로 6년 동안 권세를 부렸지만 결국은 총탄에 쓰러지는 비참한 말로를 맞이했다. 넷째, 공민왕시대에 국가적으로 크게 문제가 되었던 왕실반역사건으로서 충혜왕의 서출인 왕자 석기(釋器)가 원나라 황후의 힘을 등에 업고 이곳 저곳으로 도망다니면서 노골적인 왕실반역음모를 꾀하는 등 크게 문제가 되자 최영 장군이 자객을 보내서 처치해 버린 암살실종사건이 있었듯이, 박 대통령시대에도 크게 문제가 되었던 정부반역사건이 중앙정보부장을 6년이나 지낸 김형욱(전생:석기)이 박 대통령에 대한 역심을 품고 미국 등지로 도망다니며 반정부폭로를 하게 되므로 문제가 되자 중앙정보부장(김재규)이 정보원을 보내서 처치해버린 정치적 암살실종사건이 1979년 10월 7일 행방불명이 되어버린 김형욱 실종사건이다. 다섯째, 전생의 시대에도 공민왕이 맞이했던 혜비 이씨가 속세를 떠났던 가슴 아픈 비구니 여생이 있었듯이, 현생의 시대에도 박 대통령 전처인 김호남 여인(전생:혜비 이씨)도 속세를 떠났던 가슴 아픈 보살 여생이 있었다. 여섯째, 고려 말기에 풍문이 무성했던 공민왕과 신돈과 반야와의 관계에서 우왕의 혈통에 대한 열쇠를 가지고 있는 반야의 의문사와 유신말기에도 풍문으로 떠돌았던 박 대통령과 정일권 총리와 정인숙과의 관계에서 정성일 군의 혈통에 대한 열쇠를 가지고 있는 정인숙(전생:반야)이 한강변에서 총탄에 쓰러진 의문사는 본인이 아니고는 풀 수 없는 수수께끼로 남아져 있다. 결론적으로 볼 때, 여말선초(麗末鮮初)시대에 임금과 왕후로 등장했던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정치적 비운노정을 선말후초(先末後初)시대에 국가원수로 등장한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가 재연하였기 때문에 전생(前生)을 알지 못하고는 함부로 말할 수 없는 일로서, 두 분의 예정된 비운노정은 지금부터 2000년 전에 하나님께서 후세인들에게 새롭게 약속하신 신약(新約)의 말씀(마 24/29)에도 비유와 상징으로 밝혀놓은 섭리적 숙명이라는 것이다. 지금부터는 당시에 육군소장의 신분으로 5‧16군사혁명에 성공하여 대업을 성취하기까지는 김종필 전 총리가 절대적인 발판으로서 대들보 역할을 해주었기 때문인데 이에 대하여 잠깐 알아보기로 한다. 고 박정희 대통령께서 1961년 5‧16군사혁명을 통해 국가원수로 등장하여 민족적 숙원이었던 가난을 물리쳤고 한민족이 강대국(미‧소)들의 힘을 빌려 일본제국주의로부터 해방은 되었지만 약소민족이 존재하기 위한 신사대주의(新事大主義)로써 북한은 구 소련의 사상적 속국이 되었고 남한은 미국의 문화적 속국으로 급속하게 변하는 상황에서 한민족의 정통성을 회복하기 위한 문화성업(文化聖業)을 수행하는 등 많은 업적을 남기게 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이렇게 고 박정희 대통령이 5‧16군사혁명에 성공함으로써 국가원수로 등극하여 한민족 역사상 어느 임금이나 대통령 못지 않게 큰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김종필 전 총리의 전생(前生)이 만고의 충신 계백장군으로서 국가와 민족 앞에 정치적 대들보 사명을 타고났기 때문에 고 박정희 대통령시대부터 제14대 대통령(김영삼)과 제15대 대통령(김대중)도 국가원수로 등극하고 정치적 안정을 찾기까지는 김종필 전 총리의 정치적 협조가 필요했던 것이다. 아울러서 고 박정희 대통령께서 국가경제를 부흥시키는 데 크게 기여한 분이 박태준 전 포철회장인데 전생(前生)은 만고의 충신이었던 계백 장군과 동문수학했다고 알려진 흑치상지 장군으로서, 1961년 7월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박정희) 비서실장부터 시작하여 대한중석광업대표이사 사장, 포항종합제철대표이사 사장 등 국가발전에 중대한 업무를 수행하게 된 것은 박태준 전 포철회장이 세계적인 철강왕의 지상학적 운세를 타고났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