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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AT CHRISTIANS ... DON'T WANT TO TALK ABOUT
최 이리 유카바 (Iri Ukaba)
서 문
인간이라면 누구나 철이 들어가면서 "신이 정말로 있는가?"라는 질문을 하게 될 것이고, 생각하면 할수록 의문은 계속 꼬리를 물고 일어날 것이라 생각한다. 최소한 필자의 경우에는 그러했다.
만약 어느 종교의 교리나 그 교의 성경이 과학을 설명해 줄 수 있거나, 반대로 과학이 하나님이나 신의 세계를 입증할 수 있다면 우리는 이런 질문 따위는 생각할 필요도 없을 터인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니 종교에 회의를 가지는 것이 당연한 일이 아닌가 생각한다.
필자에게는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수없이 많은 친지들, 특히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나를 자기네와 같은 신자로 만들기 위한 시도를 했던 경험이 있다. 근래에 와서는 드물지만, 옛날 젊었을 시절에는 그때마다 무척이나 따지며 토론을 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그들은 내 질문에 대답을 하지 못하거나, 그렇게 따지면 크리스천이 못 된다는 대답뿐이었다.
크리스천이 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고, 믿겠다는 마음으로 믿다 보면 신앙심이 생긴다는 것이 대부분의 설명이었다. 그러나 이런 방식으로 선교를 하는 것은 우선 괴변으로 들리고, 둘째는 자기 자신이 확고한 지식이 없이 맹목으로 신앙을 갖는다고 판단되었다.
그래서 나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하였다. 이렇게 무조건 믿는 사람들에게는 무엇인들 갖다 대고 믿으라면 못 믿겠는가? 다만 그들이 믿으려는 마음가짐을 갖도록 여건을 만들어 주든가, 미국 CIA에서 말하는 심리조절(mind control)기술만 적용하면 될 것 아닌가라고. 결국 필자는 장님과 같은 맹목적인 신앙은 못 믿겠다고 단언을 하게 되었다.
내가 청년이 되었을 때에는 여러 종류의 교회에도 나갔고, 절에도 무척 여러 번 가서 잠을 자면서 스님들의 이야기를 듣곤 하였다. 불교에서는 예수교처럼 하나님이 진흙으로 아담을 만들고 아담의 갈비 하나를 빼서 이브를 만들었다는 유치원에나 가르치는 동화 같은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절에서는 이치(理致)를 이야기하고 이치 뒤의 이치를 이야기해 마치 철학 강좌를 듣는 것 같았다. 예를 들어서 '무(無)가 아닌 무(無) (nothingless nothing)'의 관념을 이해하는 데도 상당한 세월을 소비했어야 할 정도로 불교의 신앙을 이해하는 것이 무척이나 어려웠었다. 그래서 필자는 불교에 큰 매력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알아듣기에는 아직도 과학적으로 설명하가 부족한 듯했다. 그것은 나의 지식이 모자라 이해를 못했을 수도 있고, 반대로 불교나 그리스도교의 이론이 과학을 설명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래서 필자는 과학인 형이하학(形而下學)과 신의 세계를 말하는 형이상학(形而上學)이 함께 하나의 학문으로 설명될 때까지 종교를 가질 수 없고, 그 때까지 불가지론자(不可知論者)가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필자는 항상 신앙을 가졌다고 하는 사람을 부러워하였다. 어떻게 해서 저 사람들은 의심 없이 믿음을 가질 수 있는가? 그래서 그들의 신앙을 나는 항상 존경해 왔던 것이다. 참으로 진리를 터득하고 말로 설명하기 어려울지 몰라도 본인 마음속으로는 추호의 의심도 없이 믿는 신앙인이 된다면, 그 사람은 틀림없이 행복한 사람일 것이라고 믿어 왔다.
그러나 기독교를 믿는 많은 크리스천들 중에는 어느 정도 회의심을 가진 사람도 있을 것이라 믿는다. 사회의 뉴스를 보면, 심심치 않게 교회 성직자들의 탈선행위가 나타난다. 이 사람들은 만민 앞에서 하나님의 진리를 알려 주면서 하나님을 따르라고 인도하는 지도자들이다.
만일 이 사람들이 자기네가 말하는 것처럼 추호도 의심 없이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런 몰염치한 행동을 감히 할 수 있을 것인가? 아무리 인간이라고는 하지만 보통 인간도 잘 하지 않는 그런 일을 하나님을 깊게 믿는다는 성직자라는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신앙에 추호도 의심이 없었다면 어떻게 사기, 강간, 절도 따위의 행각을 할 수 있을까라고 생각해 보았다.
이러한 점에서 도대체 어떻게 된 종교이기에 하는 생각과, 완전한 주도권을 갖고 세계화를 인도하는 서양문화의 근본을 찾아보기 위한 두 가지 목적으로 다시 여러 성경을 비교해 보고 서양문명의 기초를 이룬 토속종교 등 관련된 책들을 기회 닿는 대로 읽어 보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내가 얻은 지식과 생각하는 바를 적어 모든 크리스천과 비크리스천에게 보여 주고 싶은 충동이 생기게 된 것이다.
내가 중요하게 생각했던 요점은 첫째로 종교라는 것은 알고 믿어야 한다는 점이, 둘째로 그리스도교 신앙의 가장 중요한 주춧돌이라 할 수 있는 삼위일체, 예수의 신성, 십자가 순교, 부활, 동정녀 등의 내용과, 무엇보다도 중요한 성경 자체가 절대적으로 과오가 있을 수 없는 하나님의 성령에 의한 책인가의 여부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는 나의 애당초 기대로부터 엉뚱한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이 책에 기술한 내용은 발견한 여러 내용 중 일부를 소개한 것이다. 어떤 것은 나 자신의 생각이고, 또 어떤 것은 다른 작가들의 논리를 소개하였다.
필경 이 책을 읽으면서 많은 크리스천들 중에는 그 동안 믿어 왔던 신앙에 많은 차질을 가져온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 줄로 예상된다. 어떻게 생각하면 이 책은 믿거나 말거나 식의 책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며, 그 중에는 실망하는 분도 있을 터이고, 또는 피가 끓어오름을 느끼는 분들도 있을 것이며, 또는 그 동안 믿어 왔던 모든 점을 다시 재확인하기 위해 공부를 시작할 분들도 있을 줄 안다. 이 책이 독자로 하여금 좀더 깊은 진실을 캐는 데 도움이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쁜 일이고, 이 책을 쓴 목적이 달성되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혹시라도 감정에 치우치는 분이 계시다면, 반박의 근원을 찾기 위해서라도 확실한 근원을 찾아보기 바라는 마음이다. 분명히 말해 두고 싶은 점은 이 책을 쓴 의도가 그리스도교의 교리를 반박하려는 의도로 쓴 것이 아니며, 다만 신앙을 찾고 진실을 밝히려는 양심에 의하여 믿어지는 곧이곧대로 기술한 것뿐이라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의 근원
성경을 보면 모든 근원은 성경의 이야기에서 시작한다. 우주의 삼라만상도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이 창조하셨고, 인간도 흙으로 아담을 빚어 만든 것부터 시작된다. 따라서 야훼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태초에서부터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신앙의 원천도 성경에 근원을 둔 것이며, 그 외의 다른 신앙은 모두 야훼 하나님을 배반하여 생긴 사탄의 조작에 의해서 일어난 것이라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에 따라 성경만이 옳은 대답을 해 주는 것이라 믿고 성경과 다른 이야기는 모두 사탄의 것이라 믿는 사람들은 그렇게 믿어야 하고 다른 사람들도 그 믿음은 존중해 주어야 하겠지만, 다른 사람들이 크리스천의 신앙을 존중해 주는 만큼 크리스천도 다른 사람들의 믿음을 존중해 줘야 하지 않나 생각된다.
인류의 문명이라는 것을 과학적인 견해로 본다면 애초에 천체의 움직임을 수학적으로 계산하여 앞으로 어떻게 움직일 것이라는 예측을 할 수 있는 규칙적인 진리를 찾아내는 데부터 시작했다고 필자는 믿는다. 그리고 그 계산방법에서 수학(數學)이라는 것이 탄생하여 인간은 자연의 진리를 좀더 깨닫기 시작했다고 믿는다. 이것은 성경과 대치될 수 있는 이야기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교의 종주인 바티칸에서는 수학을 몹시 싫어하여, 셈 계산하는 산수(算數)의 영역을 넘어 공부하는 것을 무척 꺼려했고, 특히 영(零-zero)이란 관념은 하나님의 비밀, 즉 천기(天氣)를 누설하는 일이라고 생각조차 못하게 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뉴턴(Isaac Newton)이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중력(重力)이라는 자연의 법칙을 찾아냈을 때에야 겨우 영(零)의 관념을 허가했던 것이다. 그런 이유로 영을 수학이나 철학에서 중요한 인자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모두 지하로 들어가야 했다.
우리는 지하에서 대부분의 세상 사람들이 모르는 또 다른 문명으로 이 세상을 이끄는 또 하나의 역사가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래서 성경은 수학을 비롯한 과학, 고고학, 인류학 등 많은 현대의 학문과 합치가 되지 않는 일이 허다하다.
예를 들면 성경에 의한 인간의 역사는 6천 년을 초과할 수 없다. 그러나 고고학에서는 몇 십만 년, 몇 백만 년 전의 생물과 인간을 말하므로 둘 중 하나는 틀림없이 틀렸을 것이다. 맞건 틀리건 둘 중 하나를 선택해서 믿는 것은 자유이다. 그러나 문제는 자기가 선택한 내용을 다른 사람들도 자기처럼 믿도록 다그치는 일, 또는 다른 것을 믿는다고 미워하고 멸시하는 태도이다.
이런 마음가짐의 도가 지나쳐 성경 말씀에 없는 지구가 둥글다는 이론을 폈던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죽임을 당해야 했고, 사람은 환생을 하는 것이라 주장했던 지오다노 브루노(Giodano Bruno) 같은 사람은 불 태워져 죽어야 했다. 이제는 그러한 과거를 잘못으로 인정하고, 그럴 수 있는 근원을 없애야 하지 않을까 한다.
우리는 역사도 배우고 있다. 물론 성경에서 많은 역사를 다룬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성경의 역사에는 중국이나 한국이나 또는 다른 대륙의 역사는 취급하지 않았다. 이런 점을 볼 때 성경은 지구상의 전 인류를 상대로 하지 않았고 전 지역을 상대로 하지도 않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교라는 것이 생긴 것은 예수 이후에도 3백여 년 후의 일이었다.
물론 그 신앙이 그 전에 몇 백 년 동안 지하에서 내려온 것은 사실이지만,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조직된 그리스도교와는 많은 차이를 갖고 있는 신앙이란 점도 크게 고려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장에서 말하려 하는 가장 중요한 골자는 그리스도교가 있기 전에는 사람들이 모두 야만이고 문명이 없고 신앙이 없었는가 하는 질문이다. 그리고 그런 신앙이 있었다면 그들은 모두 크리스천에게서 모방해 갔는가, 아니면 크리스천이 그들의 신앙을 모방했는가라는 질문을 해보았으면 한다.
그런 점에서 사람이 신앙을 선택할 때 누구나 오직 진리를 말하는 교회만 믿을 용의가 있다고 말하고, 일단 교회를 선정하고 나면 자기가 다니는 교회만이 진리를 다룬다고 자부한다. 그러나 필자의 관찰로는 대개 처음 맞닥뜨린 교회를 평생의 신앙으로 갖는 것이 대부분이라고 믿어진다. 개중에는 신앙을 바꾸는 경우도 있지만 이는 전체 숫자에 비하면 아주 극소수일 것이다.
이런 점은 사람들이 평생을 함께 살 배우자를 구하는 일이나 정치적인 주관을 갖는 일에서처럼 대개 주어진 환경에 의한 '기회(機會-chance)'에 따르는 것 같다.
예를 들어 미군이 주둔하고 있는 남한 땅에서 민주주의자가 아니고 공산주의자가 된다면 이상한 일이고, 반대로 소련군이 주둔했던 북녘 땅에 살면서 공산주의자가 되지 않고 민주주의자가 된다는 것은 가물에 콩 나기일 것이다. 이런 사람이 있다면 위험한 사람이고 국가에 죄악을 범하는 일이라고 대부분 믿을 것이다. 또 프랑스에 살면서 불교 신자가 된다든가 네팔에 살면서 천주교 신자가 된다는 것은 기이한 일이다.
그래서 콩 심은 데 콩이 난다고 하지 않는가? 그러나 주어진 단위사회 안에서 살면서 대다수와 다른 어떤 신앙을 믿는다면 필경 그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아는 것 이외의 또 어떤 것을 알고 있을 확률이 크다.
신앙을 믿는 마당에서 이것저것 여러 가지의 신앙을 비교하고 숙고해 보는 것은 지성인이 따라야 할 진로가 아닐까. 그래야 옳은 신앙을 가질 수 있는 확률이 높은 것 아닌가? 또 자기가 이미 선택한 신앙을 다른 사람들이 비판을 할 때 본인의 양심에 입각한 정당한 판단력으로 만족스럽게 대답을 하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그 사람은 알고 믿는 사람이라고 자타가 인정할 수 있고, 존경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본다.
여기서 하려는 말은 그리스도교가 생기기 전에 이미 많은 신앙이 존재했다는 것이 가능하다는 하나의 이론으로서 여기 전개해 본다. 또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신관(神觀)이 무(無)에서 갑자기 생겨나지 않았다는 것도 생각해 볼 기회를 만들어 보는 것이다.
이것을 한낱 헛되고 조작된 마귀의 소리라고 생각하는 독자가 있다면 그것도 그의 자유이다. 그러나 자기의 믿음이 옳다고 주장하려면 그것을 뒷받침해 주는 보편타당성이 있는 근거를 충분히 갖추기 바라는 바이다. 그런 뜻에서 아래에서 몇 가지 생각나는 대로 소개해 보려 한다.
그리스도교는
조로아스터(Zoroastrianism) 신앙의 표절(剽竊)?
우리가 잘 아는 불교의 근본사상을 이룩한 인도의 인더스 강을 주변으로 하는 바라문교(Br hmanas) 또는 힌두교의 성전 베다(Vedas)의 마지막 장인 우파니샤드(Upanishad)가 씌어질 무렵, 즉 기원전 약 600∼700년경에 페르시아(지금의 이란)에 '조로아스터(Zoroaster, ca 628∼551 B.C.)'라는 현인이 있어 현재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서양문명의 한 근원을 이루는 중요한 신앙적 사상을 전파하였다.
이는 동양의 불교 또는 이와 유사한 철학 또는 종교 관념인,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며, 이 자연과 조화를 이뤄야 한다는 사상에 완전히 반대되는 관념이 되었다. 페르시아의 이러한 사상은 기원전 약 2000년경부터 시작되었지만 '조로아스터'에 이르러 완전 체계화하여 가르침을 주게 되었고, 더욱 강력하게 확산되었으며, 그 사상의 근본은 이러하다.
조로아스터는 인도에서 인간은 우주(universe)와 조화를 가져야 한다는 사상에 절대적으로 반대하였다. 그는 두 가지의 신이 존재한다고 가르쳤다. 하나는 '아후라 마즈다(Ahura Mazda)'라는 신이다. '아후라'는 신령이란 뜻이고, '마즈다'는 빛의 신령의 이름으로, 이는 모든 광명(光明), 모든 자비(慈悲), 모든 힘을 가진 전지전능(全知全能)한 창조주이며, 선(善)의 신이다.
그리고 '아후라 마즈다' 신에 반대되는 또 하나의 신은 '앙그라 마인유 (Angra Mainyu)'라고 부르는 어둡고 컴컴하며 위선적(僞善的)이고 항상 속임수를 쓰는 악(惡)의 신이다. 그의 목적은 적대관계에 있는 상대방 선의 신을 정복하는 일이다. 선의 신은 선한 세상을 창조하였고, 이 세상에는 선만 있으며 광명만 있도록 만들었다. 이러한 '아후라 마즈다' 신이 완벽한 세상을 만든 데 대하여 시기를 느낀 '앙그라 마인유'라는 신은 광명의 세상에 어둠을 드리워 그림자가 있게 만들었고, 인간을 유혹하여 악하고 사악한 일을 하도록 만드는 일이 업이 되었다.
그 결과로 인하여 우주는 선과 악이 서로 상반관계를 유지하면서 조화를 이루어 결합하는 세상이 되었다. 따라서 인간이 태어날 때에는 이미 선과 악이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태어나면서 악의 존재를 품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자연과 조화를 이루어서는 안 되는 것이며, 인간은 의지(意志)의 힘으로 결정을 내려 실제 용기 있는 행동으로 선(善)을 알아차리고 선을 행해야 되며, 악을 제거하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어려운 세상을 돕기 위하여 '사오샨트(Saoshyant)'라는 구세주가 동정녀의 몸에 잉태되어 세상에 태어나 인류에게 선의 길이 무엇인가를 가르치고 깨닫게 만들며 선을 실행하도록 인도하고 구원을 얻는 방법을 알려 준다. 그러한 결과로 구세주로 인해 깨달은 인간들이 노력을 함으로써 '아후라 마즈다'가 애초 만든 원래의 세상으로 환원하려는 노력이 생기게 되며, 따라서 광명뿐인 세상으로 향한 직선적인 향상이 있게 된다.
이렇게 하여 구원이 이루어질 수 있는 어느 시점에 도달하면 '아후라 마즈다'는 '앙그라 마인유' 신을 쳐부수는 일로 불(火)로써 말세(末世)를 고하며, 모든 인간을 심판하게 된다. 드디어 어둠은 사라지고 광명뿐인 세상의 성취가 이루어지며, 그 때에 구세주의 재림이 있게 되고, 속세에서 구세주의 가르침대로 선한 생활을 한 사람들은 주검에서 부활하여 영생을 얻게 되며, 드디어 어둠의 세상은 악의 신 '앙그라 마인유'와 함께 완전히 제거되고, 광명뿐인 세상을 이룩하여 구원을 받은 자들은 고통 없는 극락의 생활을 영위하게 된다는 내용이다.
여기서 '아후라 마즈다'를 기독교가 말하는 하나님에 비유하고, '앙그라 마인유'를 사탄에 비유하며, 구세주 '사오tis트'를 예수에 비유할 수 있으며, 여기에도 천사가 있고 제사장이 있으며 부활이 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교 사상의 원리와 무엇이 다른지 구별하기 어렵게 된다. 이러한 신앙체계는 예수가 나타나기 6∼7세기 전에 완성되어 널리 퍼졌고, 페르시아가 망한 이후에도 오랫동안 페르시아 사람들이 신봉하던 신앙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에 커다란 의문이 생기게 된다. 이러한 사상은 구약시대에 유대인들이 신봉하던 '야훼(Yaweh)' 신과 동시에 존재하고 있었을 것이며, 유대인들의 종교가 둔갑하여 예수 왕림 3백여 년 후에 현재 우리가 아는 훌륭하게 조직된 그리스도교가 로마제국의 국교로 인정되면서 탄생하게 되었고, 전세계에 전파된 것이 기정사실인 것 같다.
그러면 어떠한 연유로 '조로아스터'교는 사라지고 말만 바꾼 그리스도교가 전세계에 만연하게 되었는가? 그 내력은 아래와 같은 이유가 아닌가 사료된다.
페르시아의 전성시기에 그들은 지금의 중동지역에서부터 이집트까지를 영토로 만들었으나 지금의 유럽지방은 차지하지 못했었다. 역사상 어떤 군주나 마찬가지로 페르시아제국은 세계정복의 꿈을 갖고 우선 기원전 490년에 희랍을 치기 시작하였다. 희랍군의 몇 배나 되는 군대를 갖고 침공한 페르시아는 유명한 마라톤 벌판에서 참패하여 철수하였다.
이 이야기는 올림픽 유래 이야기에서 나오는데, 페르시아 침략군이 아테네에 상륙하자 스파르타에 원조요청을 하기 위해 뜀박질 잘하는 전령이 밤새 140마일을 뛰어 결국 시간 안에 스파르타에 도착하여 페르시아 침공소식을 전하는 말을 끝내자마자 쓰러져 죽었다는 바로 그 전쟁 이야기이다. 그리고 기원전 480년에는 새로 페르시아 왕으로 즉위한 '크세르크세스(Xerxes)' 왕이 10년 전 선왕 '다리우스(Darius)'의 참패를 보복하기 위하여 페르시아의 운명을 건 막대한 대군을 거느리고 다시 희랍을 침공하였다. 그러나 페르시아군의 10분의 1밖에 안 되는 희랍군은 상상외로 우월한 무기와 갑옷으로 무장하였고, 훈련과 경험이 풍부한 마치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의 해군처럼 희랍 해군선박의 교묘한 작전으로 인하여 페르시아는 대패하여 결국 이것으로 페르시아가 망하게 되었다.
그러나 여기서 특이한 일은 역사상의 다른 어느 국가간의 먹고 먹히는 전투와 달리 페르시아 사람들과 희랍 사람들은 지극히 서로 관대하였다. 희랍인들은 페르시아의 문화를 존중하였고, 페르시아인들도 희랍의 문화를 높이 평가하여 서로 차별대우 없이 상대방 국가에서 군대와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사이가 되었었다. 그 당시의 희랍은 지금처럼 커다란 한 나라가 아니었고 같은 문화권에서 살면서 여러 나라로 갈라져 있었으나, 서로 상대방의 의사를 존중하였고 타협으로 평화를 유지하는 것을 당연한 일로 여기는 사회였었다. 페르시아군이 침공하였을 때에도 작은 나라들의 군대들이 공동의 방어를 하기 위해 희랍 전체의 연합군을 형성하였으나 각 나라의 장군들의 작전의견이 각각 달라 의견을 합칠 수 없었다. 이러한 오합지졸이 될 수 있는 여건을 극복하기 위해 그들은 서로 번갈아 가며 차례대로 총사령관 직을 맡았고, 일단 총사령관이 된 사람의 명령에 절대 복종하기로 합의를 보고 훌륭하게 싸웠던 것이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에서 자란 희랍의 한 소국인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는 페르시아처럼 한 사람이 전체의 대국을 통치하는 것이 강국을 만드는 데 매우 중요한 조건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 결과 그는 후에 사실상의 세계를 통일한 '알렉산더 3세' 대왕이 되었으나 역시 민주주의 '데모크라시'의 근본사상을 뿌리 깊이 갖고 있어 그의 점령지에 대한 통치는 이해와 관용으로 일관하였던 것이다. 물론 페르시아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기 때문에 페르시아의 왕들은 기원전 586년에 '바빌로니아'에서 탈출한 유대인들이 '예루살렘'(평화의 도시-Jerusalem)에 정착하는 것을 허락하였던 것이며, 이러한 사회풍토와 관습으로 인하여 11세기 로마의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쳐들어갈 때에는 이미 그 곳에는 크리스천과 유대교도와 회교도들이 아주 화목하게 잘 살고 있었던 것이었고, 불행히도 예루살렘을 점령한 잔인한 십자군들은 그리스도교, 유대교, 회교들을 가리지 않고 수십만 명의 인구를 모두 죽여 없앴던 것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로마제국 시대에 예수가 왔고,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임을 당하는 일이 생겼고, 크리스천이란 말만 들어도 잡아 가두고 죽이던 '네로' 황제 등 크리스천들의 박해가 극성을 부리던 극단적인 반그리스도교적인 사회가 약 3백 년 흐르는 동안에 마침내 그리스도교가 정식으로 인정받는 사회가 되었으며, 곧 이어 그리스도교만이 허용되는 사회로 탈바꿈을 하게 되는 로마제국이 되었다.
당시 로마제국은 세계를 통일한 막강한 나라였고, 로마 황제의 결정이 전세계에 영향을 끼치는 때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리스도교가 국교가 되고 오직 그리스도교만이 허용되는 신앙이 되었을 때 그 교세(敎勢)가 파죽지세로 세계에 번지게 되었고, 다른 종교가 박해를 받게 되었다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당시 로마의 '카이사르'가 선택한 종교인 로마 가톨릭 교회와 조금이라도 다르게 믿는 종교라면, 비록 그 종교가 근원이 같은 그리스도교라 할지라도 이단(異端)이라는 낙인이 찍히게 되고 결국 장작더미 위에서 타 죽든가 갈기갈기 찢어지는 죽음을 당하는 판에, '조로아스터' 같은 종교는 더 더욱 알려지면 곤란한 종교였기 때문에 로마에 점령당한 페르시아인들이 그 종교를 전파하기는커녕 존속시키는 것도 어렵지 않았나 생각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 종교가 없어진다는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믿어진다.
이렇게 '조로아스터'교와 그리스도교의 근본사상이 너무나 비슷하다는 것은 기독교계 학자들도 모두 인정하는 것 같다. 그러면서도 자세한 내용에 들어가면 근본적으로 사상이 다르다고 한다. 글쎄, 과연 그럴까?
토속신앙과 신화와 점성학의 영향
뱀과 사탄 :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잠재의식적으로 뱀을 싫어한다. 그래서 뱀이란 동물은 나쁜 일이나 하는 아주 고약하고 요사스런 '사탄'에 비유하고 있지 않나 생각된다. 그러나 만일 '사탄' 또는 '마귀'에 비유한다면 우리는 동시에 매우 영리함을 인정하는 것도 된다.
물론 누구나 잘 알고 있다시피 성경에서 애초 에덴동산에서 '이브'에게 선악의 과실 사과를 먹으라고 꾀어낸 책임자는 뱀이다. 즉, 사탄이고 몹시도 영리하다. 하나님께서 직접 사탄과 대결하여 해결하지 못하고 순진한 죄로 사탄에게 홀려 넘어간 인간에게 비겁하게 죄를 추궁하고 있으며, 영문도 모르고 부인이 맛있다고 주는 바람에 얻어먹은 '아담'도 그 죄의 책임을 지게 되었고, 그 죄를 원죄(原罪)라고 하여 자자손손이 그 책임을 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이 저주하는 이 뱀이란 짐승이 약간 탈바꿈을 하면 용(龍)으로 둔갑하고, 그러면 사정이 완전히 뒤바뀌게 된다. 용에 대한 아름다운 이야기는 수없이 많다. 우리가 너무 잘 아는 '심청전'을 한 번 생각해 보자. 심청은 물에 빠져 바다의 신인 용왕(龍王)의 용궁(龍宮)에 들어가 그 기특함을 인정받고 인간세계로 되돌아온다. 이 용왕은 부처님처럼 자비롭고 인자하여 좋기만 한 신령이고, 우리의 관념에는 그리스도교의 하나님보다 이해심이 많고 인자한 신령인 것 같다. 그런데 문제는 이 용이라는 신령이 결국 뱀이고, 뱀이라는 동물은 요물이며 하나님과 대적하는 어둠의 신 사탄이라는 것이다. 곰곰이 생각하고 분석해 보기 바란다.
많은 사람들은 용이라는 짐승이 동양에만 존재하는 동물로 서양과는 관계가 없는 것이며, 성경의 뱀과 동양의 용은 다만 우연의 일치라기보다 유사한 비유에 그칠 뿐이라고 생각할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동양과 서양의 뱀 또는 용은 완전히 같은 관념을 갖고 있다. 동양에서의 용 이야기는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는 터이니 더 말할 나위 없는 일이고, 서양의 용을 이야기하자면 책 한 권으로도 모자라는 끝없는 이야기인 것 같다. 그러나 재미있는 이야기이기도 하고 한국에서는 거의 잘 모르는 내용이기에 성작(聖爵-the Holy Grail: 술잔) '그레일'부터 간단하게 시작해 보기로 한다.
우선 우리가 알고 있는 줄거리부터 말하면, 예수가 잡혀가기 전 열 두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할 때 포도주를 자기 피라고 하면서 돌려가며 마셨다. 이 포도주 잔이 성작(聖爵)이고 '그레일'이다. 그리고 다음 날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혀 피를 흘리고 있을 때 예수의 배다른 형 '아리마태아'의 요셉이 십자가 밑에서 예수가 흘리는 피를 받은 그릇이 전날 포도주를 마시던 '그레일'이다. 그래서 지금도 성찬식을 할 때에는 우리말로 성작(聖爵)이라고 하는 술잔을 사용하고 있으며, 이것을 '그레일'이라 부르면 그 성스러운 의미가 포함되어 바티칸의 크리스천들의 마음이 어지러워질까 두려워 성찬을 담는 그릇을 대신 '챌리스(chalice)'라고 부르고 있지 않나 한다. 그리고 예수가 죽은 후 마지막 성찬을 기념하기 위해 요셉과 그의 처남 브론(Bron)은 다시 은(銀)으로 만든 십자가와 그 위에 역시 은으로 만든 상(床)을 차렸다. 소위 '그레일 테이블(Grail table)'이라고 부르는 이 상에는 자리 하나를 비워 놓았다. 이 자리는 아무도 앉지 못하게 되어 있었고, 만일 정한 사람이 아닌 다른 사람이 앉는다면 화를 받게 되어 있었다 한다. 이 빈자리는 브론의 후손이 앉게 되어 있었던 것이며, 이 자리에 앉는 사람은 '그레일'을 갖게 된다는 것이었다. '그레일'을 갖는 사람은 하나님과 융화(融和)를 할 수 있기 때문에 중요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브론의 아들 알레인(Alain)이 나중에 앉게 되고, 브론과 알레인은 '그레일'을 얻어 유럽으로 가지고 왔다고 한다. 그리고 수백 년이 지나 사람들은 확실히 그 '그레일'이 어디 있는지 알지를 못하였고, 다만 '그레일'에 대한 이야기만 전하여 내려오게 되었다.
'그레일'에 대하여 한국에도 이미 소개되어 잘 알려진 신화학자(神話學者) 조셉 캠벨(Joseph Campbell)은 아래와 같이 보충설명을 하였다.
언젠가 하늘(天上-heaven)에서 하나님은 사탄, 즉 천사장 루시퍼(Lucifer)와 전쟁을 한 일이 있었다. 그때 어떤 천사들은 하나님 편에 가담하고, 어떤 천사들은 루시퍼 편에 가담하였다. 이때 중립을 지키던 천사들이 전쟁이 진행되는 사이에 중간으로 하늘에서부터 땅으로 내려온 것이 '그레일'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야기는 영국 웨일즈의 '엑스칼리버(Excalibur)' 검(劍)과 '원탁(圓卓)의 기사(騎士)'로 유명한 아더 왕(King Arthur) 쪽으로 연결된다. 아더 왕 막하 원탁의 기사 중 왕비 귀네비어(Guinevere)와 사랑에 빠진 랜셀롯(Lancelot), 원탁의 기사가 되기 위해 아더의 성을 향하여 길을 떠난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파르치발(Parzival), 또 다른 기사 보호르트(Bohort)와 젊은 갈라하드(Galahad), 이렇게 네 사람이 그레일을 찾아 나선다. 그러나 그레일을 찾는 일에는 순결한 정조가 아주 중요한 조건이었는데, 랜셀롯은 귀네비어와의 정사(情事) 때문에 꿈에서만 그레일을 구경하고 끝나며, 파르치발은 하나님의 뜻으로 순결을 지키게 되고, 보호르트는 실수로 정조를 잃게 되며, 아직 동정(童貞)을 갖고 있는 랜셀롯의 아들, 젊은 갈라하드는 예수의 후손이기도 하려니와 동정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결국 성공을 한다.
갈라하드는 어느 날 그레일을 찾기 위해 성을 떠나 여행을 하는 도중 한 숲길에서 다른 기사(騎士)를 만나게 된다. 이 기사는 회교도의 기사이다. 여기서 뜻하는 내용은 갈라하드는 상징적으로 에덴동산(Garden of Eden)에 살고 있었고, 길에서 만난 기사는 에덴 밖에 사는 이웃으로 이교도인 회교 신자였다는 것이다. 에덴동산 안에 사는 사람들은 크리스천들이었으며, 동산 밖에 사는 사람들을 자연(自然)의 사람이라고 불렀다. 이 둘은 랜스(lance)라고 부르는 긴 창을 갖고 마상에서 서로 달려 상대방을 찌르는 격투를 벌였는데 갈라하드는 회교도 기사를 찔러 죽이게 되고, 회교도 기사는 갈라하드의 성기(性器)에 부상을 내어 결국 갈라하드는 거세(去勢)를 당하게 된다.
이 이야기가 뜻하는 바는 그리스도교 사상에서 자연(自然)이 거세당하여 인간의 정신과 영혼, 자연적 은총과 초자연적 은총이 분리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유럽 사람들의 마음과 인생이 이것으로 인하여 메마르게 되었고, 그로 인하여 자연적으로 얻을 수 있는 진정한 영(靈)적 능력을 상실하게 되었다고 캠벨 씨는 설명하고 있다.
한편 죽음을 당한 자연인인 이방인이 그의 창 끝에 그레일이란 글을 새겨 넣은 것을 발견하였다. 이것은 자연인(自然人)인 그들은 그레일을 향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즉, 영적 생활이란 초자연적인 힘에 복종하고 의지하여 얻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인 삶을 살면서 자기의 기능을 자발적으로 발휘하여 꽃향기를 피우는 것과 같은 것이다. 따라서 그레일을 찾는다는 것은 인간의 본성 자체에 근원을 둔 의지(意志)와 인간 본성의 자발적인 충동을 통하여 갖는 인간 본연의 삶을 상징적으로 뜻하는 것이며, 그 삶이라는 것은 서로 상반되는 선(善)과 악(惡), 명(明)과 암(暗)이라는 두 극(極) 사이에 이루어진다는 것이며, 그래서 모든 행실은 선과 악의 결과를 초래하고, 모든 악행(惡行)은 선과 악 양면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은 밝은 광명(光明) 쪽으로 기울어지도록 마음자세를 가지고 그렇게 되도록 노력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광명이란 타인(他人)의 입장을 이해하고, 고통(苦痛)을 수반하는 인덕(人德)에서 기인(起因)하는 업인(業因)과 화협(和協)하고 융화(融和)하는 관계를 말한다고 한다. 그레일이 상징적으로 의미하는 것은 이러한 내용인 것이다.
즉,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解脫)과 맞먹는 이야기라 생각된다. 그리하여 그레일을 얻은 갈라하드는 그레일 왕(王)이 되고 그의 혈통은 전 유럽 역사에 대단히 중요한 인자가 된다. 예를 들어 우리 귀에 익은 신데렐라, 로빈 후드, 잠자는 미녀, 드라큘라 같은 이야기는 모두 그레일 왕의 신화에 뿌리를 갖고 있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대개 중세기 암흑시대를 지나면서 많이 둔갑을 하게 되는데, 그레일의 신화를 믿는 그리스도교는 모두 이단이라 하여 로마 가톨릭 교회는 이들을 없애는 대말살운동을 시작하였다. 그 중에서 가장 큰 경우가 지금의 프랑스 남쪽, 이탈리아에 가까운 현재의 프로방스(Provence) 지방에 중심을 두었던 카타르(Cathars) 종파(宗派)였다.
카타르와 함께 그와 비슷한 교리원칙을 믿었던 그리스도교는, 대개 윤회사상(輪廻思想)을 믿고 경험을 통하여 진리를 터득하고 해탈할 수 있다는 교리(敎理)를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남을 해치고 정복하겠다는 마음 없이 다만 자기 생활에 만족하고 신앙적으로 자신의 수도생활을 중히 여기던 이들은 권력을 추구하는 교회집단에 의하여 지구상에서 말살되어야 하는 숙명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이들이 또 하나 아끼던 상징은 '우로보로스(Ouroboros)'라는 것이다. '우로보로스'라는 것은 원불교(圓佛敎)의 상징처럼 뱀이 자기의 꼬리를 물어 원을 그린 형상이다. 이 원(圓)은 전체(全體)를 뜻하고, 융화(融和)와 영원성(永遠性)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뱀의 원형 뒤편에 십자가가 놓여지면 여성(女性)을 뜻하고, 십자가를 앞에 놓으면 남성(男性)을 표시하며, 십자가가 원형 속에 들어가면 성스러운 '그레일' 자체를 말한다. 구약성경에서는 창세기부터 뱀이 나와 요사(妖邪)를 떨지만, 고대 슈메르(Sumer-註: 외래어 표기법 상 '수메르'가 옳으나, 원발음은 슈머이며, 편의상 '슈메르'라 표기한다.), 바빌로니아, 메소포타미아 때부터 뱀을 영물(靈物)로 사용한 근거가 많이 있으며, '그레일 왕가의 혈통(Grail Dynasts)'을 다른 표현으로 '용왕(龍王)의 혈통(Dragon Kings)'이라 부르기도 했었다.
그러나 이 혈통은 생리적인 후손을 말하기도 하지만, 근대 화학(化學)의 근원인 알케미(Alchemi)의 마술(魔術)을 통하여 후계자를 '메시아(Messiah)', 즉 구세주(救世主)의 형식으로 창작해 냈던 것이다. 우리가 지금 가장 오래된 고대 문명의 발상지라고 알고 있는 슈메르 시대부터 아누나키(Anunnaki)의 신들을 만들어 내는 창조실(創造室)이 있었고 그 안에는 신비의 화석(火石-Fire Stone, 註. 단일 원자로 된 흰색의 금(金)가루)이 지금도 있으며, 그들은 바빌로니아 왕과 이집트 파라오를 광명(光明)의 육신(肉身)으로 만들기 위해 이 가루를 먹였다고 하는데, 현대 사람들이 이 가루를 먹어 보니 내분비기관에 엄청난 효과가 있었다 한다.
여하튼 이렇게 용왕(龍王)이 있었는가 하면, 그들의 부인들이나 다른 존경받는 여자들은 여왕 용(女王龍-Dragon Queens)으로 흠모를 받기도 했었다. 예를 들면 에덴동산에 살던 아담(Adam)의 첫째 부인 릴리스(Lilith), 모세의 누이 겸 부인 미리암(Miriam), 함(Ham)의 자손인 아랍인 시바(Sheba)의 딸 바트시바(Bathsheba: 솔로몬의 어머니), 예수의 부인이란 소문이 있을 정도로 예수 가까이 있던 막달라 마리아(Mary Magdalene) 같은 여인들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1209년 교황 이노센트 3세(Innocent III.)는 십자군을 보내 이단들, 특히 카타르를 모두 없애 버리도록 했던 것이다. 그리고 교황은 이 십자군을 '알비젠시안 십자군(Albigensian Crusade)'이라고 명명하였는데 알비(albi)라는 말은 카타르어로 여자 엘프(elf), 다시 말해서 서양 동화에 흔히 나오는 여자 요정(妖精)을 뜻하고, 그 단어는 'elbe' 또는 'ylbi'라는 데서 유래하게 되었으며, 카타르에서는 원래의 그레일 혈통을 지킨다는 뜻에서 'albi-gens', 즉 'Elven Bloodline'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었다. 그러니까 요사스런 요정들의 피를 받은 사람들을 정복하는 십자군이란 뜻이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이 십자군은 약 35년간 카타르 지역에서만 수십만의 양민을 학살했던 것이다. 이때 카타르는 거의 전멸되었다 한다.
카타르 신자로서 우리가 알 만한 유명한 사람들 몇을 들면 '신곡(神曲)'으로 유명한 단테, 지리상의 발견을 시작했다고 하는 콜럼버스, 예술가·과학자로 유명한 레오나르도 다 빈치 그리고 그 후에 역시 과학자로 유명한 뉴턴(Sir Isaac Newton), 소설가 위고(Victor Hugo), 음악가 드뷔시(Claude Debussy) 같은 사람들을 들 수 있다. 물론 이 사람들은 카타르의 신분을 숨겼고, 이들이 지도자급 프리메이슨이었기에 여러 곳에서 도움을 주어 피신이 가능했던 것 같다.
뱀 이야기를 하면서 너무나 샛길로 많이 빠져 나간 것 같다. 여하튼 유럽을 석권했던 로마 가톨릭의 세력과 지하에서 맞선 세력은 프리메이슨 조직이었고, 프리메이슨들의 신앙적·철학적 내용을 살펴보면 뱀이라는 상징은 루시퍼(Lucifer)를 말하며,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기 바란다. 천사장 루시퍼는 사탄의 근원에서 더 자세하게 설명하겠다.
일요일
크리스천의 기원을 구약성경에서 찾는다면 유대인들의 관습에서도 동시에 찾아야 할 것이다. 유대인들이 중요하고 성스럽다고 하는 날은 일요일이 아니고 토요일이다. 즉, 제사지내는 날이다. 그러나 현대의 크리스천들은 토요일보다 일요일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일요일은 주님의 날(Lord's Day)이라고 하여 쉬는 날로 정하고, 이 날은 일도 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여긴다.
불과 60∼70년 전만 해도 서양에서는 일요일에 난방하기 위하여 장작을 패도 일한다고 경찰이 잡아가는 웃지 못할 일이 촌에서는 흔하게 있었다. 그런데 원래 일요일을 중히 여기는 일은 '솔 인빅투스(Sol Invictus)'나 '미트라주의(Mithraism)'에서 '태양을 존경하는 날', 즉 'Sun-day'로 태양이라는 일(日)요일이었고 태양을 존경하는 의미에서 쉬는 날이었던 것이, 크리스천이 이들과 동화하기 위해서 일요일을 쉬는 날로 정하고 주님의 날이라고 이름을 붙인 것이다. 이렇게 바뀌게 된 것은 콘스탄티누스 황제에게 감사드려야할 일이 아닌가 한다.
여신(女神)과 남신(男神)
한국의 국기에는 태극이 있다. 이 태극이 철학적으로 심오한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은 모두가 잘 알고 있다. 위의 붉은 바탕은 하늘이고 양지아비라 하고, 아래쪽 푸른 바탕은 땅이고 음지어미를 뜻한다고 기억한다. 이것은 물론 동양의 철학이다. 그러나 서양에서도 하늘은 양지이고 아버지이며 남자이고, 땅은 음지이고 어머니이며 여자라고 본다. 따라서 하나님은 하늘에 있으니 '하나님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다. 그리스도교는 지금의 중동지역에서 시작한 종교이고 주로 유대인을 중심으로 태동한 종교이다. 중동지역은 사막이라고 할 정도로 메마른 땅이기 때문에 농사는 지을 수 없고 주로 양을 치는 목축업을 주업으로 하는 곳이다. 그러기에 동물과 가까운 인연을 갖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항상 힘과 완력을 중시하게 되고, 자연히 남자가 우월권을 갖게 되어 남존여비의 사상이 싹트게 된다. 때문에 남자가 가장이 되고, 훌륭한 것은 모두 남자가 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을 가지므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 어머니라는 생각은 가당치도 않은 이야기일 것이다. 반면에 농경을 주업으로 하는 곳에서는 땅에서 생명이 자라는 일에 항상 신비를 느끼게 된다. 즉, 땅은 생명을 주는 곳이다. 그리고 여자는 어머니로서 역시 새 생명을 낳아 주는 땅과 같은 존재이다. 그렇기 때문에 땅은 어머니, 여자, 음지에 비유하여 동양이나 서양에서 모두 땅을 여성으로 생각하게 된 것이다. 우리말에도 흔히 죽으면 땅으로 돌아간다는 말이 있다. 그 말은 우리가 애초에 땅에서 왔기에 땅으로 돌아간다는 의미에서 나온 말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생명을 준 것은 하늘의 아버지가 아니라 땅의 어머니라는 결론이 나오고, 아버지는 다만 하늘에서 비를 땅에게 주어 땅이 잉태하여 생명을 낳게 했을 뿐이다. 그래서 서양에서는 'mother earth', 즉 '어머니 땅'이란 말을 아주 흔하게 사용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농사가 발달한 곳에서는 여신(女神)을 주로 믿게 되고, 목축을 주로 하는 유목민족들은 남신(男神)을 섬기게 된 연유가 여기에 있다.
예를 들어 한국 같은 농경민족은 여신을 믿게 되었을 것이다. 한국 무속(巫俗)에서 무당은 주로 여자가 담당했다. 이것이 한국의 토속종교이다. 필경 많은 사람들은 무속이 미신이지 어떻게 해서 종교가 될 수 있는가라고 힐난을 할지 모른다. 그러나 무속은 지신(地神)을 믿는 엄연한 종교이다. 다만 이러한 종교들은 기독교, 회교, 불교 따위처럼 조직이 되어 있지 않고 체계가 잘 잡혀져 있지 않을 따름이다. 조직된 종교(organized religion)라는 것은 정치성을 많이 띠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힘이 필요하고, 힘이라는 것은 돈을 수반하고 권력을 수반하게 되기 때문에, 우리는 자주 이러한 조직된 종교가 세력과 영향력 때문에 교리를 위한 교리를 따로 만들어 분쟁을 하고 투쟁을 일삼는 것을 보게 된다. 그래서 교회라는 곳에는 신앙이 있을 수 없다는 말이 생긴 것이다. 반면에 조직되지 않은 종교는 틀에 잡힌 교리가 별로 중요하지 않고 믿는 자들끼리의 조직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갈라지고 싸울 필요도 없다. 많은 경우 믿음의 논리가 다른 사람을 만나면 서로의 논리나 방법 등에 대하여 비교하는 정도이며, 왜 자기가 그리하는지에 대해 서로 설명할 뿐이다. 이들은 서로 존경하기 때문에 자기가 모르는 것이나 더 좋은 것이 있으면 배우려고 할 따름이다. 그래서 많은 동조를 얻을 때에는 그런 사람들이 많아지게 되고, 그렇지 않으면 않은 대로 따로 지낼 뿐이며, 서로가 자기 나름대로의 제식을 차리고 믿으면 될 뿐이다. 이러한 연유로 한국의 무속도 마찬가지겠지만 서양의 '위카(Wicca)'도 근본 둥치의 이론만 같을 뿐이지 자세한 내용에 들어가서는 각양각색이다. '위카'는 켈트(Celt) 민족의 토속종교로서 그들이 크리스천이 되기 전 프랑스 지방에서부터 아일랜드, 영국까지 성행했던 한국의 무속과 아주 흡사한 종교이다. 보통 '위치크라프트(Witchcraft)'라고 부르며 지신(地神)인 여신을 믿는 종교이다. 일반적으로 마녀가 마술을 부리는 내용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렇게 된 이유는 크리스천들이 이 종교를 악마로 몰아 거짓 선전한 탓으로 우리는 그리스도교의 선전에 취해 있을 뿐이다. 따라서 '위치'라 하면 통상적으로 '마녀'를 연상케 되는데, 사실은 '위치(Witch)'라는 명칭이 '위카(Wicca)' 신앙을 실천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며, 로마 천주교가 마녀사냥을 할 때 모두 불태워 죽였기 때문에 위카 종교의 교리가 더욱 난맥상을 이루고 있는 실정이다. 1980∼1990년대의 통계를 보면 남·북미, 유럽 등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는 종교가 바로 위카이다. 이러한 점을 간파하여 무어(Charles Moore)라는 미국의 한 천주교 신부는, 교회는 신앙을 지킬 수 있는 곳이 못 된다고 하면서 진정한 신앙을 가지려면 교회에 나가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그 이유는 교회라는 곳은 금력과 권력을 지향하는 조직된 무리이기 때문에 죄악의 온상이 된다는 이론이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그의 이론에 동조할 것이라 믿는다.
그리고 땅, 즉 지상이 어머니라면, 비는 하늘에서 오고 비가 지상에 내려 땅을 적셔 줌으로써 비로소 곡식이 자라게 된다. 따라서 하늘은 땅이 아닌, 즉 어머니가 아닌 아버지로서, 내려 주는 비는 아버지의 정액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이것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땅에 계신 어머니가 교접하여 새 생명을 창조하는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 이스라엘이라고 부르는 옛 '가나안' 땅에서는 '가나안의 봄 혼인잔치'라 하여 임신하기 위한 축제가 있었다. 이 잔치는 들판에 있는 식물들이 마치 우리나라에서 우수(雨水), 경칩(驚蟄)하는 우수와 마찬가지 뜻에서 봄철의 단비로 새싹이 솟아나는 축제를 함께 하여 인간도 새싹을 만들었던 것이다. 이 풍습은 5천 년 이상의 역사를 가졌으니 예수가 오기 3천 년 전부터 있었던 일이다.
이러한 가나안과 세계 각지에서 일어났던 믿음과 비교하여 크리스천 믿음의 근본인 성경과 대조한다면 좋은 착상을 가질 수 있으리라 믿는다. 창세기에 뱀이 이브에게 사과를 먹으라고 하면서,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3장 5절)라고 했다. 요즈음 나도는 성경에는 하나님이 단수로 표현되었지만 라틴 불가타, 즉 성 제롬의 성경판, 다시 말해서 원래의 성경을 보면, "your eyes shall be opened, and you shall be as gods, knowing good and evil."이라고 하여 하나님을 복수로 표현하였다. 또 아담과 이브가 선악의 과실을 먹고 난 다음 하나님이 야단치고 벌을 주면서 아담과 이브에게 가죽 옷을 지어 입히고 나서,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3장 22절)라고 말했다고 한다. 즉, 여호와 하나님이 자기를 혼자라 표현하지 않고 "우리"라고 했다. 이는 여호와가 혼자가 아니고 자기와 동격의 소유자가 여럿 있었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하나가 아니고 여럿이 있었다는 증거이다. 또 1장 26절에서도 흙을 빚어 아담이라는 남자와 여자 하나를 만드는 일에 관하여 하나님이 "나의 형상에 따라 나의 모양대로 내가 사람을 만들고..."라 하지 않고, "우리의 형상에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라 하였다. 여기서도 하나님이 혼자가 아니고 복수라는 점이 강조되어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성부, 성자, 성신이라는 삼위일체의 유일한 하나님 주장은 다만 후일 크리스천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제작품이라는 증거가 되는 것이다.
세례와 유아 세례
서기 418년 가톨릭 교회는 새로 탄생한 아이들은 인간이 성교하여 만든 아이들이기 때문에 모두 악마로 태어난 것이라고 결정지었다. 따라서 곧 세례를 받지 않는 한 그들은 마귀 새끼이기 때문에 벌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한국 신부들은 어떻게 하는지 모르지만 서양에서는 아직도 "내가 깨끗지 못한 혼을
최 이리 유카바 (Iri Ukaba)
서 문
인간이라면 누구나 철이 들어가면서 "신이 정말로 있는가?"라는 질문을 하게 될 것이고, 생각하면 할수록 의문은 계속 꼬리를 물고 일어날 것이라 생각한다. 최소한 필자의 경우에는 그러했다.
만약 어느 종교의 교리나 그 교의 성경이 과학을 설명해 줄 수 있거나, 반대로 과학이 하나님이나 신의 세계를 입증할 수 있다면 우리는 이런 질문 따위는 생각할 필요도 없을 터인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니 종교에 회의를 가지는 것이 당연한 일이 아닌가 생각한다.
필자에게는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수없이 많은 친지들, 특히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나를 자기네와 같은 신자로 만들기 위한 시도를 했던 경험이 있다. 근래에 와서는 드물지만, 옛날 젊었을 시절에는 그때마다 무척이나 따지며 토론을 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그들은 내 질문에 대답을 하지 못하거나, 그렇게 따지면 크리스천이 못 된다는 대답뿐이었다.
크리스천이 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고, 믿겠다는 마음으로 믿다 보면 신앙심이 생긴다는 것이 대부분의 설명이었다. 그러나 이런 방식으로 선교를 하는 것은 우선 괴변으로 들리고, 둘째는 자기 자신이 확고한 지식이 없이 맹목으로 신앙을 갖는다고 판단되었다.
그래서 나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하였다. 이렇게 무조건 믿는 사람들에게는 무엇인들 갖다 대고 믿으라면 못 믿겠는가? 다만 그들이 믿으려는 마음가짐을 갖도록 여건을 만들어 주든가, 미국 CIA에서 말하는 심리조절(mind control)기술만 적용하면 될 것 아닌가라고. 결국 필자는 장님과 같은 맹목적인 신앙은 못 믿겠다고 단언을 하게 되었다.
내가 청년이 되었을 때에는 여러 종류의 교회에도 나갔고, 절에도 무척 여러 번 가서 잠을 자면서 스님들의 이야기를 듣곤 하였다. 불교에서는 예수교처럼 하나님이 진흙으로 아담을 만들고 아담의 갈비 하나를 빼서 이브를 만들었다는 유치원에나 가르치는 동화 같은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절에서는 이치(理致)를 이야기하고 이치 뒤의 이치를 이야기해 마치 철학 강좌를 듣는 것 같았다. 예를 들어서 '무(無)가 아닌 무(無) (nothingless nothing)'의 관념을 이해하는 데도 상당한 세월을 소비했어야 할 정도로 불교의 신앙을 이해하는 것이 무척이나 어려웠었다. 그래서 필자는 불교에 큰 매력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알아듣기에는 아직도 과학적으로 설명하가 부족한 듯했다. 그것은 나의 지식이 모자라 이해를 못했을 수도 있고, 반대로 불교나 그리스도교의 이론이 과학을 설명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래서 필자는 과학인 형이하학(形而下學)과 신의 세계를 말하는 형이상학(形而上學)이 함께 하나의 학문으로 설명될 때까지 종교를 가질 수 없고, 그 때까지 불가지론자(不可知論者)가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필자는 항상 신앙을 가졌다고 하는 사람을 부러워하였다. 어떻게 해서 저 사람들은 의심 없이 믿음을 가질 수 있는가? 그래서 그들의 신앙을 나는 항상 존경해 왔던 것이다. 참으로 진리를 터득하고 말로 설명하기 어려울지 몰라도 본인 마음속으로는 추호의 의심도 없이 믿는 신앙인이 된다면, 그 사람은 틀림없이 행복한 사람일 것이라고 믿어 왔다.
그러나 기독교를 믿는 많은 크리스천들 중에는 어느 정도 회의심을 가진 사람도 있을 것이라 믿는다. 사회의 뉴스를 보면, 심심치 않게 교회 성직자들의 탈선행위가 나타난다. 이 사람들은 만민 앞에서 하나님의 진리를 알려 주면서 하나님을 따르라고 인도하는 지도자들이다.
만일 이 사람들이 자기네가 말하는 것처럼 추호도 의심 없이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런 몰염치한 행동을 감히 할 수 있을 것인가? 아무리 인간이라고는 하지만 보통 인간도 잘 하지 않는 그런 일을 하나님을 깊게 믿는다는 성직자라는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신앙에 추호도 의심이 없었다면 어떻게 사기, 강간, 절도 따위의 행각을 할 수 있을까라고 생각해 보았다.
이러한 점에서 도대체 어떻게 된 종교이기에 하는 생각과, 완전한 주도권을 갖고 세계화를 인도하는 서양문화의 근본을 찾아보기 위한 두 가지 목적으로 다시 여러 성경을 비교해 보고 서양문명의 기초를 이룬 토속종교 등 관련된 책들을 기회 닿는 대로 읽어 보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내가 얻은 지식과 생각하는 바를 적어 모든 크리스천과 비크리스천에게 보여 주고 싶은 충동이 생기게 된 것이다.
내가 중요하게 생각했던 요점은 첫째로 종교라는 것은 알고 믿어야 한다는 점이, 둘째로 그리스도교 신앙의 가장 중요한 주춧돌이라 할 수 있는 삼위일체, 예수의 신성, 십자가 순교, 부활, 동정녀 등의 내용과, 무엇보다도 중요한 성경 자체가 절대적으로 과오가 있을 수 없는 하나님의 성령에 의한 책인가의 여부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는 나의 애당초 기대로부터 엉뚱한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이 책에 기술한 내용은 발견한 여러 내용 중 일부를 소개한 것이다. 어떤 것은 나 자신의 생각이고, 또 어떤 것은 다른 작가들의 논리를 소개하였다.
필경 이 책을 읽으면서 많은 크리스천들 중에는 그 동안 믿어 왔던 신앙에 많은 차질을 가져온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 줄로 예상된다. 어떻게 생각하면 이 책은 믿거나 말거나 식의 책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며, 그 중에는 실망하는 분도 있을 터이고, 또는 피가 끓어오름을 느끼는 분들도 있을 것이며, 또는 그 동안 믿어 왔던 모든 점을 다시 재확인하기 위해 공부를 시작할 분들도 있을 줄 안다. 이 책이 독자로 하여금 좀더 깊은 진실을 캐는 데 도움이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쁜 일이고, 이 책을 쓴 목적이 달성되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혹시라도 감정에 치우치는 분이 계시다면, 반박의 근원을 찾기 위해서라도 확실한 근원을 찾아보기 바라는 마음이다. 분명히 말해 두고 싶은 점은 이 책을 쓴 의도가 그리스도교의 교리를 반박하려는 의도로 쓴 것이 아니며, 다만 신앙을 찾고 진실을 밝히려는 양심에 의하여 믿어지는 곧이곧대로 기술한 것뿐이라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의 근원
성경을 보면 모든 근원은 성경의 이야기에서 시작한다. 우주의 삼라만상도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이 창조하셨고, 인간도 흙으로 아담을 빚어 만든 것부터 시작된다. 따라서 야훼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태초에서부터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신앙의 원천도 성경에 근원을 둔 것이며, 그 외의 다른 신앙은 모두 야훼 하나님을 배반하여 생긴 사탄의 조작에 의해서 일어난 것이라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에 따라 성경만이 옳은 대답을 해 주는 것이라 믿고 성경과 다른 이야기는 모두 사탄의 것이라 믿는 사람들은 그렇게 믿어야 하고 다른 사람들도 그 믿음은 존중해 주어야 하겠지만, 다른 사람들이 크리스천의 신앙을 존중해 주는 만큼 크리스천도 다른 사람들의 믿음을 존중해 줘야 하지 않나 생각된다.
인류의 문명이라는 것을 과학적인 견해로 본다면 애초에 천체의 움직임을 수학적으로 계산하여 앞으로 어떻게 움직일 것이라는 예측을 할 수 있는 규칙적인 진리를 찾아내는 데부터 시작했다고 필자는 믿는다. 그리고 그 계산방법에서 수학(數學)이라는 것이 탄생하여 인간은 자연의 진리를 좀더 깨닫기 시작했다고 믿는다. 이것은 성경과 대치될 수 있는 이야기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교의 종주인 바티칸에서는 수학을 몹시 싫어하여, 셈 계산하는 산수(算數)의 영역을 넘어 공부하는 것을 무척 꺼려했고, 특히 영(零-zero)이란 관념은 하나님의 비밀, 즉 천기(天氣)를 누설하는 일이라고 생각조차 못하게 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뉴턴(Isaac Newton)이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중력(重力)이라는 자연의 법칙을 찾아냈을 때에야 겨우 영(零)의 관념을 허가했던 것이다. 그런 이유로 영을 수학이나 철학에서 중요한 인자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모두 지하로 들어가야 했다.
우리는 지하에서 대부분의 세상 사람들이 모르는 또 다른 문명으로 이 세상을 이끄는 또 하나의 역사가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래서 성경은 수학을 비롯한 과학, 고고학, 인류학 등 많은 현대의 학문과 합치가 되지 않는 일이 허다하다.
예를 들면 성경에 의한 인간의 역사는 6천 년을 초과할 수 없다. 그러나 고고학에서는 몇 십만 년, 몇 백만 년 전의 생물과 인간을 말하므로 둘 중 하나는 틀림없이 틀렸을 것이다. 맞건 틀리건 둘 중 하나를 선택해서 믿는 것은 자유이다. 그러나 문제는 자기가 선택한 내용을 다른 사람들도 자기처럼 믿도록 다그치는 일, 또는 다른 것을 믿는다고 미워하고 멸시하는 태도이다.
이런 마음가짐의 도가 지나쳐 성경 말씀에 없는 지구가 둥글다는 이론을 폈던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죽임을 당해야 했고, 사람은 환생을 하는 것이라 주장했던 지오다노 브루노(Giodano Bruno) 같은 사람은 불 태워져 죽어야 했다. 이제는 그러한 과거를 잘못으로 인정하고, 그럴 수 있는 근원을 없애야 하지 않을까 한다.
우리는 역사도 배우고 있다. 물론 성경에서 많은 역사를 다룬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성경의 역사에는 중국이나 한국이나 또는 다른 대륙의 역사는 취급하지 않았다. 이런 점을 볼 때 성경은 지구상의 전 인류를 상대로 하지 않았고 전 지역을 상대로 하지도 않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교라는 것이 생긴 것은 예수 이후에도 3백여 년 후의 일이었다.
물론 그 신앙이 그 전에 몇 백 년 동안 지하에서 내려온 것은 사실이지만,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조직된 그리스도교와는 많은 차이를 갖고 있는 신앙이란 점도 크게 고려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장에서 말하려 하는 가장 중요한 골자는 그리스도교가 있기 전에는 사람들이 모두 야만이고 문명이 없고 신앙이 없었는가 하는 질문이다. 그리고 그런 신앙이 있었다면 그들은 모두 크리스천에게서 모방해 갔는가, 아니면 크리스천이 그들의 신앙을 모방했는가라는 질문을 해보았으면 한다.
그런 점에서 사람이 신앙을 선택할 때 누구나 오직 진리를 말하는 교회만 믿을 용의가 있다고 말하고, 일단 교회를 선정하고 나면 자기가 다니는 교회만이 진리를 다룬다고 자부한다. 그러나 필자의 관찰로는 대개 처음 맞닥뜨린 교회를 평생의 신앙으로 갖는 것이 대부분이라고 믿어진다. 개중에는 신앙을 바꾸는 경우도 있지만 이는 전체 숫자에 비하면 아주 극소수일 것이다.
이런 점은 사람들이 평생을 함께 살 배우자를 구하는 일이나 정치적인 주관을 갖는 일에서처럼 대개 주어진 환경에 의한 '기회(機會-chance)'에 따르는 것 같다.
예를 들어 미군이 주둔하고 있는 남한 땅에서 민주주의자가 아니고 공산주의자가 된다면 이상한 일이고, 반대로 소련군이 주둔했던 북녘 땅에 살면서 공산주의자가 되지 않고 민주주의자가 된다는 것은 가물에 콩 나기일 것이다. 이런 사람이 있다면 위험한 사람이고 국가에 죄악을 범하는 일이라고 대부분 믿을 것이다. 또 프랑스에 살면서 불교 신자가 된다든가 네팔에 살면서 천주교 신자가 된다는 것은 기이한 일이다.
그래서 콩 심은 데 콩이 난다고 하지 않는가? 그러나 주어진 단위사회 안에서 살면서 대다수와 다른 어떤 신앙을 믿는다면 필경 그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아는 것 이외의 또 어떤 것을 알고 있을 확률이 크다.
신앙을 믿는 마당에서 이것저것 여러 가지의 신앙을 비교하고 숙고해 보는 것은 지성인이 따라야 할 진로가 아닐까. 그래야 옳은 신앙을 가질 수 있는 확률이 높은 것 아닌가? 또 자기가 이미 선택한 신앙을 다른 사람들이 비판을 할 때 본인의 양심에 입각한 정당한 판단력으로 만족스럽게 대답을 하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그 사람은 알고 믿는 사람이라고 자타가 인정할 수 있고, 존경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본다.
여기서 하려는 말은 그리스도교가 생기기 전에 이미 많은 신앙이 존재했다는 것이 가능하다는 하나의 이론으로서 여기 전개해 본다. 또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신관(神觀)이 무(無)에서 갑자기 생겨나지 않았다는 것도 생각해 볼 기회를 만들어 보는 것이다.
이것을 한낱 헛되고 조작된 마귀의 소리라고 생각하는 독자가 있다면 그것도 그의 자유이다. 그러나 자기의 믿음이 옳다고 주장하려면 그것을 뒷받침해 주는 보편타당성이 있는 근거를 충분히 갖추기 바라는 바이다. 그런 뜻에서 아래에서 몇 가지 생각나는 대로 소개해 보려 한다.
그리스도교는
조로아스터(Zoroastrianism) 신앙의 표절(剽竊)?
우리가 잘 아는 불교의 근본사상을 이룩한 인도의 인더스 강을 주변으로 하는 바라문교(Br hmanas) 또는 힌두교의 성전 베다(Vedas)의 마지막 장인 우파니샤드(Upanishad)가 씌어질 무렵, 즉 기원전 약 600∼700년경에 페르시아(지금의 이란)에 '조로아스터(Zoroaster, ca 628∼551 B.C.)'라는 현인이 있어 현재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서양문명의 한 근원을 이루는 중요한 신앙적 사상을 전파하였다.
이는 동양의 불교 또는 이와 유사한 철학 또는 종교 관념인,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며, 이 자연과 조화를 이뤄야 한다는 사상에 완전히 반대되는 관념이 되었다. 페르시아의 이러한 사상은 기원전 약 2000년경부터 시작되었지만 '조로아스터'에 이르러 완전 체계화하여 가르침을 주게 되었고, 더욱 강력하게 확산되었으며, 그 사상의 근본은 이러하다.
조로아스터는 인도에서 인간은 우주(universe)와 조화를 가져야 한다는 사상에 절대적으로 반대하였다. 그는 두 가지의 신이 존재한다고 가르쳤다. 하나는 '아후라 마즈다(Ahura Mazda)'라는 신이다. '아후라'는 신령이란 뜻이고, '마즈다'는 빛의 신령의 이름으로, 이는 모든 광명(光明), 모든 자비(慈悲), 모든 힘을 가진 전지전능(全知全能)한 창조주이며, 선(善)의 신이다.
그리고 '아후라 마즈다' 신에 반대되는 또 하나의 신은 '앙그라 마인유 (Angra Mainyu)'라고 부르는 어둡고 컴컴하며 위선적(僞善的)이고 항상 속임수를 쓰는 악(惡)의 신이다. 그의 목적은 적대관계에 있는 상대방 선의 신을 정복하는 일이다. 선의 신은 선한 세상을 창조하였고, 이 세상에는 선만 있으며 광명만 있도록 만들었다. 이러한 '아후라 마즈다' 신이 완벽한 세상을 만든 데 대하여 시기를 느낀 '앙그라 마인유'라는 신은 광명의 세상에 어둠을 드리워 그림자가 있게 만들었고, 인간을 유혹하여 악하고 사악한 일을 하도록 만드는 일이 업이 되었다.
그 결과로 인하여 우주는 선과 악이 서로 상반관계를 유지하면서 조화를 이루어 결합하는 세상이 되었다. 따라서 인간이 태어날 때에는 이미 선과 악이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태어나면서 악의 존재를 품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자연과 조화를 이루어서는 안 되는 것이며, 인간은 의지(意志)의 힘으로 결정을 내려 실제 용기 있는 행동으로 선(善)을 알아차리고 선을 행해야 되며, 악을 제거하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어려운 세상을 돕기 위하여 '사오샨트(Saoshyant)'라는 구세주가 동정녀의 몸에 잉태되어 세상에 태어나 인류에게 선의 길이 무엇인가를 가르치고 깨닫게 만들며 선을 실행하도록 인도하고 구원을 얻는 방법을 알려 준다. 그러한 결과로 구세주로 인해 깨달은 인간들이 노력을 함으로써 '아후라 마즈다'가 애초 만든 원래의 세상으로 환원하려는 노력이 생기게 되며, 따라서 광명뿐인 세상으로 향한 직선적인 향상이 있게 된다.
이렇게 하여 구원이 이루어질 수 있는 어느 시점에 도달하면 '아후라 마즈다'는 '앙그라 마인유' 신을 쳐부수는 일로 불(火)로써 말세(末世)를 고하며, 모든 인간을 심판하게 된다. 드디어 어둠은 사라지고 광명뿐인 세상의 성취가 이루어지며, 그 때에 구세주의 재림이 있게 되고, 속세에서 구세주의 가르침대로 선한 생활을 한 사람들은 주검에서 부활하여 영생을 얻게 되며, 드디어 어둠의 세상은 악의 신 '앙그라 마인유'와 함께 완전히 제거되고, 광명뿐인 세상을 이룩하여 구원을 받은 자들은 고통 없는 극락의 생활을 영위하게 된다는 내용이다.
여기서 '아후라 마즈다'를 기독교가 말하는 하나님에 비유하고, '앙그라 마인유'를 사탄에 비유하며, 구세주 '사오tis트'를 예수에 비유할 수 있으며, 여기에도 천사가 있고 제사장이 있으며 부활이 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교 사상의 원리와 무엇이 다른지 구별하기 어렵게 된다. 이러한 신앙체계는 예수가 나타나기 6∼7세기 전에 완성되어 널리 퍼졌고, 페르시아가 망한 이후에도 오랫동안 페르시아 사람들이 신봉하던 신앙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에 커다란 의문이 생기게 된다. 이러한 사상은 구약시대에 유대인들이 신봉하던 '야훼(Yaweh)' 신과 동시에 존재하고 있었을 것이며, 유대인들의 종교가 둔갑하여 예수 왕림 3백여 년 후에 현재 우리가 아는 훌륭하게 조직된 그리스도교가 로마제국의 국교로 인정되면서 탄생하게 되었고, 전세계에 전파된 것이 기정사실인 것 같다.
그러면 어떠한 연유로 '조로아스터'교는 사라지고 말만 바꾼 그리스도교가 전세계에 만연하게 되었는가? 그 내력은 아래와 같은 이유가 아닌가 사료된다.
페르시아의 전성시기에 그들은 지금의 중동지역에서부터 이집트까지를 영토로 만들었으나 지금의 유럽지방은 차지하지 못했었다. 역사상 어떤 군주나 마찬가지로 페르시아제국은 세계정복의 꿈을 갖고 우선 기원전 490년에 희랍을 치기 시작하였다. 희랍군의 몇 배나 되는 군대를 갖고 침공한 페르시아는 유명한 마라톤 벌판에서 참패하여 철수하였다.
이 이야기는 올림픽 유래 이야기에서 나오는데, 페르시아 침략군이 아테네에 상륙하자 스파르타에 원조요청을 하기 위해 뜀박질 잘하는 전령이 밤새 140마일을 뛰어 결국 시간 안에 스파르타에 도착하여 페르시아 침공소식을 전하는 말을 끝내자마자 쓰러져 죽었다는 바로 그 전쟁 이야기이다. 그리고 기원전 480년에는 새로 페르시아 왕으로 즉위한 '크세르크세스(Xerxes)' 왕이 10년 전 선왕 '다리우스(Darius)'의 참패를 보복하기 위하여 페르시아의 운명을 건 막대한 대군을 거느리고 다시 희랍을 침공하였다. 그러나 페르시아군의 10분의 1밖에 안 되는 희랍군은 상상외로 우월한 무기와 갑옷으로 무장하였고, 훈련과 경험이 풍부한 마치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의 해군처럼 희랍 해군선박의 교묘한 작전으로 인하여 페르시아는 대패하여 결국 이것으로 페르시아가 망하게 되었다.
그러나 여기서 특이한 일은 역사상의 다른 어느 국가간의 먹고 먹히는 전투와 달리 페르시아 사람들과 희랍 사람들은 지극히 서로 관대하였다. 희랍인들은 페르시아의 문화를 존중하였고, 페르시아인들도 희랍의 문화를 높이 평가하여 서로 차별대우 없이 상대방 국가에서 군대와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사이가 되었었다. 그 당시의 희랍은 지금처럼 커다란 한 나라가 아니었고 같은 문화권에서 살면서 여러 나라로 갈라져 있었으나, 서로 상대방의 의사를 존중하였고 타협으로 평화를 유지하는 것을 당연한 일로 여기는 사회였었다. 페르시아군이 침공하였을 때에도 작은 나라들의 군대들이 공동의 방어를 하기 위해 희랍 전체의 연합군을 형성하였으나 각 나라의 장군들의 작전의견이 각각 달라 의견을 합칠 수 없었다. 이러한 오합지졸이 될 수 있는 여건을 극복하기 위해 그들은 서로 번갈아 가며 차례대로 총사령관 직을 맡았고, 일단 총사령관이 된 사람의 명령에 절대 복종하기로 합의를 보고 훌륭하게 싸웠던 것이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에서 자란 희랍의 한 소국인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는 페르시아처럼 한 사람이 전체의 대국을 통치하는 것이 강국을 만드는 데 매우 중요한 조건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 결과 그는 후에 사실상의 세계를 통일한 '알렉산더 3세' 대왕이 되었으나 역시 민주주의 '데모크라시'의 근본사상을 뿌리 깊이 갖고 있어 그의 점령지에 대한 통치는 이해와 관용으로 일관하였던 것이다. 물론 페르시아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기 때문에 페르시아의 왕들은 기원전 586년에 '바빌로니아'에서 탈출한 유대인들이 '예루살렘'(평화의 도시-Jerusalem)에 정착하는 것을 허락하였던 것이며, 이러한 사회풍토와 관습으로 인하여 11세기 로마의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쳐들어갈 때에는 이미 그 곳에는 크리스천과 유대교도와 회교도들이 아주 화목하게 잘 살고 있었던 것이었고, 불행히도 예루살렘을 점령한 잔인한 십자군들은 그리스도교, 유대교, 회교들을 가리지 않고 수십만 명의 인구를 모두 죽여 없앴던 것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로마제국 시대에 예수가 왔고,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임을 당하는 일이 생겼고, 크리스천이란 말만 들어도 잡아 가두고 죽이던 '네로' 황제 등 크리스천들의 박해가 극성을 부리던 극단적인 반그리스도교적인 사회가 약 3백 년 흐르는 동안에 마침내 그리스도교가 정식으로 인정받는 사회가 되었으며, 곧 이어 그리스도교만이 허용되는 사회로 탈바꿈을 하게 되는 로마제국이 되었다.
당시 로마제국은 세계를 통일한 막강한 나라였고, 로마 황제의 결정이 전세계에 영향을 끼치는 때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리스도교가 국교가 되고 오직 그리스도교만이 허용되는 신앙이 되었을 때 그 교세(敎勢)가 파죽지세로 세계에 번지게 되었고, 다른 종교가 박해를 받게 되었다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당시 로마의 '카이사르'가 선택한 종교인 로마 가톨릭 교회와 조금이라도 다르게 믿는 종교라면, 비록 그 종교가 근원이 같은 그리스도교라 할지라도 이단(異端)이라는 낙인이 찍히게 되고 결국 장작더미 위에서 타 죽든가 갈기갈기 찢어지는 죽음을 당하는 판에, '조로아스터' 같은 종교는 더 더욱 알려지면 곤란한 종교였기 때문에 로마에 점령당한 페르시아인들이 그 종교를 전파하기는커녕 존속시키는 것도 어렵지 않았나 생각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 종교가 없어진다는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믿어진다.
이렇게 '조로아스터'교와 그리스도교의 근본사상이 너무나 비슷하다는 것은 기독교계 학자들도 모두 인정하는 것 같다. 그러면서도 자세한 내용에 들어가면 근본적으로 사상이 다르다고 한다. 글쎄, 과연 그럴까?
토속신앙과 신화와 점성학의 영향
뱀과 사탄 :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잠재의식적으로 뱀을 싫어한다. 그래서 뱀이란 동물은 나쁜 일이나 하는 아주 고약하고 요사스런 '사탄'에 비유하고 있지 않나 생각된다. 그러나 만일 '사탄' 또는 '마귀'에 비유한다면 우리는 동시에 매우 영리함을 인정하는 것도 된다.
물론 누구나 잘 알고 있다시피 성경에서 애초 에덴동산에서 '이브'에게 선악의 과실 사과를 먹으라고 꾀어낸 책임자는 뱀이다. 즉, 사탄이고 몹시도 영리하다. 하나님께서 직접 사탄과 대결하여 해결하지 못하고 순진한 죄로 사탄에게 홀려 넘어간 인간에게 비겁하게 죄를 추궁하고 있으며, 영문도 모르고 부인이 맛있다고 주는 바람에 얻어먹은 '아담'도 그 죄의 책임을 지게 되었고, 그 죄를 원죄(原罪)라고 하여 자자손손이 그 책임을 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이 저주하는 이 뱀이란 짐승이 약간 탈바꿈을 하면 용(龍)으로 둔갑하고, 그러면 사정이 완전히 뒤바뀌게 된다. 용에 대한 아름다운 이야기는 수없이 많다. 우리가 너무 잘 아는 '심청전'을 한 번 생각해 보자. 심청은 물에 빠져 바다의 신인 용왕(龍王)의 용궁(龍宮)에 들어가 그 기특함을 인정받고 인간세계로 되돌아온다. 이 용왕은 부처님처럼 자비롭고 인자하여 좋기만 한 신령이고, 우리의 관념에는 그리스도교의 하나님보다 이해심이 많고 인자한 신령인 것 같다. 그런데 문제는 이 용이라는 신령이 결국 뱀이고, 뱀이라는 동물은 요물이며 하나님과 대적하는 어둠의 신 사탄이라는 것이다. 곰곰이 생각하고 분석해 보기 바란다.
많은 사람들은 용이라는 짐승이 동양에만 존재하는 동물로 서양과는 관계가 없는 것이며, 성경의 뱀과 동양의 용은 다만 우연의 일치라기보다 유사한 비유에 그칠 뿐이라고 생각할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동양과 서양의 뱀 또는 용은 완전히 같은 관념을 갖고 있다. 동양에서의 용 이야기는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는 터이니 더 말할 나위 없는 일이고, 서양의 용을 이야기하자면 책 한 권으로도 모자라는 끝없는 이야기인 것 같다. 그러나 재미있는 이야기이기도 하고 한국에서는 거의 잘 모르는 내용이기에 성작(聖爵-the Holy Grail: 술잔) '그레일'부터 간단하게 시작해 보기로 한다.
우선 우리가 알고 있는 줄거리부터 말하면, 예수가 잡혀가기 전 열 두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할 때 포도주를 자기 피라고 하면서 돌려가며 마셨다. 이 포도주 잔이 성작(聖爵)이고 '그레일'이다. 그리고 다음 날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혀 피를 흘리고 있을 때 예수의 배다른 형 '아리마태아'의 요셉이 십자가 밑에서 예수가 흘리는 피를 받은 그릇이 전날 포도주를 마시던 '그레일'이다. 그래서 지금도 성찬식을 할 때에는 우리말로 성작(聖爵)이라고 하는 술잔을 사용하고 있으며, 이것을 '그레일'이라 부르면 그 성스러운 의미가 포함되어 바티칸의 크리스천들의 마음이 어지러워질까 두려워 성찬을 담는 그릇을 대신 '챌리스(chalice)'라고 부르고 있지 않나 한다. 그리고 예수가 죽은 후 마지막 성찬을 기념하기 위해 요셉과 그의 처남 브론(Bron)은 다시 은(銀)으로 만든 십자가와 그 위에 역시 은으로 만든 상(床)을 차렸다. 소위 '그레일 테이블(Grail table)'이라고 부르는 이 상에는 자리 하나를 비워 놓았다. 이 자리는 아무도 앉지 못하게 되어 있었고, 만일 정한 사람이 아닌 다른 사람이 앉는다면 화를 받게 되어 있었다 한다. 이 빈자리는 브론의 후손이 앉게 되어 있었던 것이며, 이 자리에 앉는 사람은 '그레일'을 갖게 된다는 것이었다. '그레일'을 갖는 사람은 하나님과 융화(融和)를 할 수 있기 때문에 중요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브론의 아들 알레인(Alain)이 나중에 앉게 되고, 브론과 알레인은 '그레일'을 얻어 유럽으로 가지고 왔다고 한다. 그리고 수백 년이 지나 사람들은 확실히 그 '그레일'이 어디 있는지 알지를 못하였고, 다만 '그레일'에 대한 이야기만 전하여 내려오게 되었다.
'그레일'에 대하여 한국에도 이미 소개되어 잘 알려진 신화학자(神話學者) 조셉 캠벨(Joseph Campbell)은 아래와 같이 보충설명을 하였다.
언젠가 하늘(天上-heaven)에서 하나님은 사탄, 즉 천사장 루시퍼(Lucifer)와 전쟁을 한 일이 있었다. 그때 어떤 천사들은 하나님 편에 가담하고, 어떤 천사들은 루시퍼 편에 가담하였다. 이때 중립을 지키던 천사들이 전쟁이 진행되는 사이에 중간으로 하늘에서부터 땅으로 내려온 것이 '그레일'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야기는 영국 웨일즈의 '엑스칼리버(Excalibur)' 검(劍)과 '원탁(圓卓)의 기사(騎士)'로 유명한 아더 왕(King Arthur) 쪽으로 연결된다. 아더 왕 막하 원탁의 기사 중 왕비 귀네비어(Guinevere)와 사랑에 빠진 랜셀롯(Lancelot), 원탁의 기사가 되기 위해 아더의 성을 향하여 길을 떠난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파르치발(Parzival), 또 다른 기사 보호르트(Bohort)와 젊은 갈라하드(Galahad), 이렇게 네 사람이 그레일을 찾아 나선다. 그러나 그레일을 찾는 일에는 순결한 정조가 아주 중요한 조건이었는데, 랜셀롯은 귀네비어와의 정사(情事) 때문에 꿈에서만 그레일을 구경하고 끝나며, 파르치발은 하나님의 뜻으로 순결을 지키게 되고, 보호르트는 실수로 정조를 잃게 되며, 아직 동정(童貞)을 갖고 있는 랜셀롯의 아들, 젊은 갈라하드는 예수의 후손이기도 하려니와 동정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결국 성공을 한다.
갈라하드는 어느 날 그레일을 찾기 위해 성을 떠나 여행을 하는 도중 한 숲길에서 다른 기사(騎士)를 만나게 된다. 이 기사는 회교도의 기사이다. 여기서 뜻하는 내용은 갈라하드는 상징적으로 에덴동산(Garden of Eden)에 살고 있었고, 길에서 만난 기사는 에덴 밖에 사는 이웃으로 이교도인 회교 신자였다는 것이다. 에덴동산 안에 사는 사람들은 크리스천들이었으며, 동산 밖에 사는 사람들을 자연(自然)의 사람이라고 불렀다. 이 둘은 랜스(lance)라고 부르는 긴 창을 갖고 마상에서 서로 달려 상대방을 찌르는 격투를 벌였는데 갈라하드는 회교도 기사를 찔러 죽이게 되고, 회교도 기사는 갈라하드의 성기(性器)에 부상을 내어 결국 갈라하드는 거세(去勢)를 당하게 된다.
이 이야기가 뜻하는 바는 그리스도교 사상에서 자연(自然)이 거세당하여 인간의 정신과 영혼, 자연적 은총과 초자연적 은총이 분리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유럽 사람들의 마음과 인생이 이것으로 인하여 메마르게 되었고, 그로 인하여 자연적으로 얻을 수 있는 진정한 영(靈)적 능력을 상실하게 되었다고 캠벨 씨는 설명하고 있다.
한편 죽음을 당한 자연인인 이방인이 그의 창 끝에 그레일이란 글을 새겨 넣은 것을 발견하였다. 이것은 자연인(自然人)인 그들은 그레일을 향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즉, 영적 생활이란 초자연적인 힘에 복종하고 의지하여 얻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인 삶을 살면서 자기의 기능을 자발적으로 발휘하여 꽃향기를 피우는 것과 같은 것이다. 따라서 그레일을 찾는다는 것은 인간의 본성 자체에 근원을 둔 의지(意志)와 인간 본성의 자발적인 충동을 통하여 갖는 인간 본연의 삶을 상징적으로 뜻하는 것이며, 그 삶이라는 것은 서로 상반되는 선(善)과 악(惡), 명(明)과 암(暗)이라는 두 극(極) 사이에 이루어진다는 것이며, 그래서 모든 행실은 선과 악의 결과를 초래하고, 모든 악행(惡行)은 선과 악 양면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은 밝은 광명(光明) 쪽으로 기울어지도록 마음자세를 가지고 그렇게 되도록 노력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광명이란 타인(他人)의 입장을 이해하고, 고통(苦痛)을 수반하는 인덕(人德)에서 기인(起因)하는 업인(業因)과 화협(和協)하고 융화(融和)하는 관계를 말한다고 한다. 그레일이 상징적으로 의미하는 것은 이러한 내용인 것이다.
즉,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解脫)과 맞먹는 이야기라 생각된다. 그리하여 그레일을 얻은 갈라하드는 그레일 왕(王)이 되고 그의 혈통은 전 유럽 역사에 대단히 중요한 인자가 된다. 예를 들어 우리 귀에 익은 신데렐라, 로빈 후드, 잠자는 미녀, 드라큘라 같은 이야기는 모두 그레일 왕의 신화에 뿌리를 갖고 있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대개 중세기 암흑시대를 지나면서 많이 둔갑을 하게 되는데, 그레일의 신화를 믿는 그리스도교는 모두 이단이라 하여 로마 가톨릭 교회는 이들을 없애는 대말살운동을 시작하였다. 그 중에서 가장 큰 경우가 지금의 프랑스 남쪽, 이탈리아에 가까운 현재의 프로방스(Provence) 지방에 중심을 두었던 카타르(Cathars) 종파(宗派)였다.
카타르와 함께 그와 비슷한 교리원칙을 믿었던 그리스도교는, 대개 윤회사상(輪廻思想)을 믿고 경험을 통하여 진리를 터득하고 해탈할 수 있다는 교리(敎理)를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남을 해치고 정복하겠다는 마음 없이 다만 자기 생활에 만족하고 신앙적으로 자신의 수도생활을 중히 여기던 이들은 권력을 추구하는 교회집단에 의하여 지구상에서 말살되어야 하는 숙명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이들이 또 하나 아끼던 상징은 '우로보로스(Ouroboros)'라는 것이다. '우로보로스'라는 것은 원불교(圓佛敎)의 상징처럼 뱀이 자기의 꼬리를 물어 원을 그린 형상이다. 이 원(圓)은 전체(全體)를 뜻하고, 융화(融和)와 영원성(永遠性)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뱀의 원형 뒤편에 십자가가 놓여지면 여성(女性)을 뜻하고, 십자가를 앞에 놓으면 남성(男性)을 표시하며, 십자가가 원형 속에 들어가면 성스러운 '그레일' 자체를 말한다. 구약성경에서는 창세기부터 뱀이 나와 요사(妖邪)를 떨지만, 고대 슈메르(Sumer-註: 외래어 표기법 상 '수메르'가 옳으나, 원발음은 슈머이며, 편의상 '슈메르'라 표기한다.), 바빌로니아, 메소포타미아 때부터 뱀을 영물(靈物)로 사용한 근거가 많이 있으며, '그레일 왕가의 혈통(Grail Dynasts)'을 다른 표현으로 '용왕(龍王)의 혈통(Dragon Kings)'이라 부르기도 했었다.
그러나 이 혈통은 생리적인 후손을 말하기도 하지만, 근대 화학(化學)의 근원인 알케미(Alchemi)의 마술(魔術)을 통하여 후계자를 '메시아(Messiah)', 즉 구세주(救世主)의 형식으로 창작해 냈던 것이다. 우리가 지금 가장 오래된 고대 문명의 발상지라고 알고 있는 슈메르 시대부터 아누나키(Anunnaki)의 신들을 만들어 내는 창조실(創造室)이 있었고 그 안에는 신비의 화석(火石-Fire Stone, 註. 단일 원자로 된 흰색의 금(金)가루)이 지금도 있으며, 그들은 바빌로니아 왕과 이집트 파라오를 광명(光明)의 육신(肉身)으로 만들기 위해 이 가루를 먹였다고 하는데, 현대 사람들이 이 가루를 먹어 보니 내분비기관에 엄청난 효과가 있었다 한다.
여하튼 이렇게 용왕(龍王)이 있었는가 하면, 그들의 부인들이나 다른 존경받는 여자들은 여왕 용(女王龍-Dragon Queens)으로 흠모를 받기도 했었다. 예를 들면 에덴동산에 살던 아담(Adam)의 첫째 부인 릴리스(Lilith), 모세의 누이 겸 부인 미리암(Miriam), 함(Ham)의 자손인 아랍인 시바(Sheba)의 딸 바트시바(Bathsheba: 솔로몬의 어머니), 예수의 부인이란 소문이 있을 정도로 예수 가까이 있던 막달라 마리아(Mary Magdalene) 같은 여인들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1209년 교황 이노센트 3세(Innocent III.)는 십자군을 보내 이단들, 특히 카타르를 모두 없애 버리도록 했던 것이다. 그리고 교황은 이 십자군을 '알비젠시안 십자군(Albigensian Crusade)'이라고 명명하였는데 알비(albi)라는 말은 카타르어로 여자 엘프(elf), 다시 말해서 서양 동화에 흔히 나오는 여자 요정(妖精)을 뜻하고, 그 단어는 'elbe' 또는 'ylbi'라는 데서 유래하게 되었으며, 카타르에서는 원래의 그레일 혈통을 지킨다는 뜻에서 'albi-gens', 즉 'Elven Bloodline'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었다. 그러니까 요사스런 요정들의 피를 받은 사람들을 정복하는 십자군이란 뜻이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이 십자군은 약 35년간 카타르 지역에서만 수십만의 양민을 학살했던 것이다. 이때 카타르는 거의 전멸되었다 한다.
카타르 신자로서 우리가 알 만한 유명한 사람들 몇을 들면 '신곡(神曲)'으로 유명한 단테, 지리상의 발견을 시작했다고 하는 콜럼버스, 예술가·과학자로 유명한 레오나르도 다 빈치 그리고 그 후에 역시 과학자로 유명한 뉴턴(Sir Isaac Newton), 소설가 위고(Victor Hugo), 음악가 드뷔시(Claude Debussy) 같은 사람들을 들 수 있다. 물론 이 사람들은 카타르의 신분을 숨겼고, 이들이 지도자급 프리메이슨이었기에 여러 곳에서 도움을 주어 피신이 가능했던 것 같다.
뱀 이야기를 하면서 너무나 샛길로 많이 빠져 나간 것 같다. 여하튼 유럽을 석권했던 로마 가톨릭의 세력과 지하에서 맞선 세력은 프리메이슨 조직이었고, 프리메이슨들의 신앙적·철학적 내용을 살펴보면 뱀이라는 상징은 루시퍼(Lucifer)를 말하며,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기 바란다. 천사장 루시퍼는 사탄의 근원에서 더 자세하게 설명하겠다.
일요일
크리스천의 기원을 구약성경에서 찾는다면 유대인들의 관습에서도 동시에 찾아야 할 것이다. 유대인들이 중요하고 성스럽다고 하는 날은 일요일이 아니고 토요일이다. 즉, 제사지내는 날이다. 그러나 현대의 크리스천들은 토요일보다 일요일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일요일은 주님의 날(Lord's Day)이라고 하여 쉬는 날로 정하고, 이 날은 일도 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여긴다.
불과 60∼70년 전만 해도 서양에서는 일요일에 난방하기 위하여 장작을 패도 일한다고 경찰이 잡아가는 웃지 못할 일이 촌에서는 흔하게 있었다. 그런데 원래 일요일을 중히 여기는 일은 '솔 인빅투스(Sol Invictus)'나 '미트라주의(Mithraism)'에서 '태양을 존경하는 날', 즉 'Sun-day'로 태양이라는 일(日)요일이었고 태양을 존경하는 의미에서 쉬는 날이었던 것이, 크리스천이 이들과 동화하기 위해서 일요일을 쉬는 날로 정하고 주님의 날이라고 이름을 붙인 것이다. 이렇게 바뀌게 된 것은 콘스탄티누스 황제에게 감사드려야할 일이 아닌가 한다.
여신(女神)과 남신(男神)
한국의 국기에는 태극이 있다. 이 태극이 철학적으로 심오한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은 모두가 잘 알고 있다. 위의 붉은 바탕은 하늘이고 양지아비라 하고, 아래쪽 푸른 바탕은 땅이고 음지어미를 뜻한다고 기억한다. 이것은 물론 동양의 철학이다. 그러나 서양에서도 하늘은 양지이고 아버지이며 남자이고, 땅은 음지이고 어머니이며 여자라고 본다. 따라서 하나님은 하늘에 있으니 '하나님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다. 그리스도교는 지금의 중동지역에서 시작한 종교이고 주로 유대인을 중심으로 태동한 종교이다. 중동지역은 사막이라고 할 정도로 메마른 땅이기 때문에 농사는 지을 수 없고 주로 양을 치는 목축업을 주업으로 하는 곳이다. 그러기에 동물과 가까운 인연을 갖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항상 힘과 완력을 중시하게 되고, 자연히 남자가 우월권을 갖게 되어 남존여비의 사상이 싹트게 된다. 때문에 남자가 가장이 되고, 훌륭한 것은 모두 남자가 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을 가지므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 어머니라는 생각은 가당치도 않은 이야기일 것이다. 반면에 농경을 주업으로 하는 곳에서는 땅에서 생명이 자라는 일에 항상 신비를 느끼게 된다. 즉, 땅은 생명을 주는 곳이다. 그리고 여자는 어머니로서 역시 새 생명을 낳아 주는 땅과 같은 존재이다. 그렇기 때문에 땅은 어머니, 여자, 음지에 비유하여 동양이나 서양에서 모두 땅을 여성으로 생각하게 된 것이다. 우리말에도 흔히 죽으면 땅으로 돌아간다는 말이 있다. 그 말은 우리가 애초에 땅에서 왔기에 땅으로 돌아간다는 의미에서 나온 말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생명을 준 것은 하늘의 아버지가 아니라 땅의 어머니라는 결론이 나오고, 아버지는 다만 하늘에서 비를 땅에게 주어 땅이 잉태하여 생명을 낳게 했을 뿐이다. 그래서 서양에서는 'mother earth', 즉 '어머니 땅'이란 말을 아주 흔하게 사용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농사가 발달한 곳에서는 여신(女神)을 주로 믿게 되고, 목축을 주로 하는 유목민족들은 남신(男神)을 섬기게 된 연유가 여기에 있다.
예를 들어 한국 같은 농경민족은 여신을 믿게 되었을 것이다. 한국 무속(巫俗)에서 무당은 주로 여자가 담당했다. 이것이 한국의 토속종교이다. 필경 많은 사람들은 무속이 미신이지 어떻게 해서 종교가 될 수 있는가라고 힐난을 할지 모른다. 그러나 무속은 지신(地神)을 믿는 엄연한 종교이다. 다만 이러한 종교들은 기독교, 회교, 불교 따위처럼 조직이 되어 있지 않고 체계가 잘 잡혀져 있지 않을 따름이다. 조직된 종교(organized religion)라는 것은 정치성을 많이 띠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힘이 필요하고, 힘이라는 것은 돈을 수반하고 권력을 수반하게 되기 때문에, 우리는 자주 이러한 조직된 종교가 세력과 영향력 때문에 교리를 위한 교리를 따로 만들어 분쟁을 하고 투쟁을 일삼는 것을 보게 된다. 그래서 교회라는 곳에는 신앙이 있을 수 없다는 말이 생긴 것이다. 반면에 조직되지 않은 종교는 틀에 잡힌 교리가 별로 중요하지 않고 믿는 자들끼리의 조직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갈라지고 싸울 필요도 없다. 많은 경우 믿음의 논리가 다른 사람을 만나면 서로의 논리나 방법 등에 대하여 비교하는 정도이며, 왜 자기가 그리하는지에 대해 서로 설명할 뿐이다. 이들은 서로 존경하기 때문에 자기가 모르는 것이나 더 좋은 것이 있으면 배우려고 할 따름이다. 그래서 많은 동조를 얻을 때에는 그런 사람들이 많아지게 되고, 그렇지 않으면 않은 대로 따로 지낼 뿐이며, 서로가 자기 나름대로의 제식을 차리고 믿으면 될 뿐이다. 이러한 연유로 한국의 무속도 마찬가지겠지만 서양의 '위카(Wicca)'도 근본 둥치의 이론만 같을 뿐이지 자세한 내용에 들어가서는 각양각색이다. '위카'는 켈트(Celt) 민족의 토속종교로서 그들이 크리스천이 되기 전 프랑스 지방에서부터 아일랜드, 영국까지 성행했던 한국의 무속과 아주 흡사한 종교이다. 보통 '위치크라프트(Witchcraft)'라고 부르며 지신(地神)인 여신을 믿는 종교이다. 일반적으로 마녀가 마술을 부리는 내용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렇게 된 이유는 크리스천들이 이 종교를 악마로 몰아 거짓 선전한 탓으로 우리는 그리스도교의 선전에 취해 있을 뿐이다. 따라서 '위치'라 하면 통상적으로 '마녀'를 연상케 되는데, 사실은 '위치(Witch)'라는 명칭이 '위카(Wicca)' 신앙을 실천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며, 로마 천주교가 마녀사냥을 할 때 모두 불태워 죽였기 때문에 위카 종교의 교리가 더욱 난맥상을 이루고 있는 실정이다. 1980∼1990년대의 통계를 보면 남·북미, 유럽 등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는 종교가 바로 위카이다. 이러한 점을 간파하여 무어(Charles Moore)라는 미국의 한 천주교 신부는, 교회는 신앙을 지킬 수 있는 곳이 못 된다고 하면서 진정한 신앙을 가지려면 교회에 나가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그 이유는 교회라는 곳은 금력과 권력을 지향하는 조직된 무리이기 때문에 죄악의 온상이 된다는 이론이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그의 이론에 동조할 것이라 믿는다.
그리고 땅, 즉 지상이 어머니라면, 비는 하늘에서 오고 비가 지상에 내려 땅을 적셔 줌으로써 비로소 곡식이 자라게 된다. 따라서 하늘은 땅이 아닌, 즉 어머니가 아닌 아버지로서, 내려 주는 비는 아버지의 정액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이것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땅에 계신 어머니가 교접하여 새 생명을 창조하는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 이스라엘이라고 부르는 옛 '가나안' 땅에서는 '가나안의 봄 혼인잔치'라 하여 임신하기 위한 축제가 있었다. 이 잔치는 들판에 있는 식물들이 마치 우리나라에서 우수(雨水), 경칩(驚蟄)하는 우수와 마찬가지 뜻에서 봄철의 단비로 새싹이 솟아나는 축제를 함께 하여 인간도 새싹을 만들었던 것이다. 이 풍습은 5천 년 이상의 역사를 가졌으니 예수가 오기 3천 년 전부터 있었던 일이다.
이러한 가나안과 세계 각지에서 일어났던 믿음과 비교하여 크리스천 믿음의 근본인 성경과 대조한다면 좋은 착상을 가질 수 있으리라 믿는다. 창세기에 뱀이 이브에게 사과를 먹으라고 하면서,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3장 5절)라고 했다. 요즈음 나도는 성경에는 하나님이 단수로 표현되었지만 라틴 불가타, 즉 성 제롬의 성경판, 다시 말해서 원래의 성경을 보면, "your eyes shall be opened, and you shall be as gods, knowing good and evil."이라고 하여 하나님을 복수로 표현하였다. 또 아담과 이브가 선악의 과실을 먹고 난 다음 하나님이 야단치고 벌을 주면서 아담과 이브에게 가죽 옷을 지어 입히고 나서,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3장 22절)라고 말했다고 한다. 즉, 여호와 하나님이 자기를 혼자라 표현하지 않고 "우리"라고 했다. 이는 여호와가 혼자가 아니고 자기와 동격의 소유자가 여럿 있었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하나가 아니고 여럿이 있었다는 증거이다. 또 1장 26절에서도 흙을 빚어 아담이라는 남자와 여자 하나를 만드는 일에 관하여 하나님이 "나의 형상에 따라 나의 모양대로 내가 사람을 만들고..."라 하지 않고, "우리의 형상에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라 하였다. 여기서도 하나님이 혼자가 아니고 복수라는 점이 강조되어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성부, 성자, 성신이라는 삼위일체의 유일한 하나님 주장은 다만 후일 크리스천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제작품이라는 증거가 되는 것이다.
세례와 유아 세례
서기 418년 가톨릭 교회는 새로 탄생한 아이들은 인간이 성교하여 만든 아이들이기 때문에 모두 악마로 태어난 것이라고 결정지었다. 따라서 곧 세례를 받지 않는 한 그들은 마귀 새끼이기 때문에 벌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한국 신부들은 어떻게 하는지 모르지만 서양에서는 아직도 "내가 깨끗지 못한 혼을
2009.05.04 11:39:43 (*.131.66.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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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을 올려달라는 요청이 있어서 계속갑니다.
전체를 올리는 것보다 함께 연구하는 의미에서 나누어 올리겠슴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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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으키는 열기(熱氣)라는 의미였다. 그리하여 루시퍼라고 이름 지어진 샤헤르는 이집트 신화에서 태양신 라(Ra)의 천국에 들어가는 북문(北門)을 지키는 수문장 신이었는데, 우주를 다스리는 여러 신들(gods) 중에 왕이 되었으며, 그가 광명을 전달하는 신이었다는 글이 페피(Pepi)의 무덤 벽에 새겨져 있다. 이 광명전달의 신은 불사(不死)의 뱀(蛇, serpent)으로 가장하여 사타(Sata)라는 이름으로 사람세상에 내려왔는데, 히브리 사람들이 히브리어로 부르면서 ‘사타’가 ‘사탄(Satan)’으로 바뀐 것이다. 그래서 사탄이란 말이 생기게 된 것이고, 그 사탄이 예수의 세계에 들어와서 루시퍼와 동화시켜 하나가 되었고, 누가복음 10장 18절에 “사탄이 하늘로서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보았노라”고 말한 예수의 표현이 들어가게 되었다.
페르시아에서는 ‘헤덴의 동산(Garden of Heden)’이란 곳에 사는 최초의 인간 부부에게 지식(知識)을 갖게 해 주었다는 ‘아리만(Ahriman)’이라는 용(蛇)이 있었다. ‘아리만’은 태양신의 쌍둥이 형제로 자신의 속성(屬性)에 후브리스(性慾의 熱氣)가 포함되어 있는 죄로 천국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그러나 예수가 태어날 때 찾아왔다는 동방박사와 유사한 현명한 도사(道士)인 마기(Magi)들은 현명한 지식을 얻기 위해 그 용을 섬겼다고 한다. 또 이것은 로마에서 프로메테우스(Prometheus)가 태양신 제우스(Zeus)의 뜻을 어기고 불을 훔쳐 인류에게 지혜를 가르쳐 주기 위해 지상에 내려왔다는 이야기와 상통한다. 각 지역의 예를 모두 들다 보면 너무 장황하다. 이러한 각 지역에서 내려오는 비슷한 신화가 알려 주는 내용은, 결국 인간에게 지식을 전해 주려고 절대적 신으로부터 광명을 가지고 자의든 타의든 간에 여하튼 지상에 내려왔다는 것이다. 어디에도 이들이 인간을 해치려고 지상에 왔다는 흔적은 없다. 오히려 인간에게 지식을 알리지 못하도록 하는 하나님의 의사를 거역하고 인간에게 지식을 주어 진리를 깨닫게 하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편에서 볼 때에는 큰 죄를 지었다 할 수 있어도 인간의 편에서 볼 때에는 고마운 존체가 된다는 이론이 성립된다. 이것은 우리가 아는 정통 그리스도교에서 가르치는 가장 근본적인 교리를 완전히 뒤엎는 이야기가 된다. 다시 강조하여 말하면 여호와 하나님이란 신은 인간을 무지몽매하게 만드는 나쁜 신인 반면, 사탄이라고 하는 루시퍼는 인간에게 지혜를 넣어 주려는, 인간을 사랑하고 인간을 위한 신이라는 것이다.
14세기에 가톨릭의 ‘도미니칸 수도원(Dominican Order in Saxony)’ 종단 소속에는 독일계 사제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 von Hochheim)라는 인기가 굉장히 높았던 사람이 있었다. 에크하르트는, 루시퍼는 지옥에 거처하고 있는 천사이며 완전히 순수한 지성(知性)을 갖고 있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많은 그노시스(Gnosis) 사람들이 루시퍼를 인간에게 지성을 주려 했던 영웅으로 취급하고, 인간의 친구이자 구세주라고 격을 높이는 반면에, 루시퍼의 이러한 행동에 질투를 느끼고 인간이 현명해지는 것을 막으려 했던 여호와 신은 나쁜 신이고 인간의 적이라고까지 지탄을 하기도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러한 종교사상이 중세기 유럽에서 지하로 번져 나가자 가톨릭에서 대단히 위험한 일이라 여겼던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거기에 에크하르트가 여러 권의 책을 써냄으로써 가톨릭 내에서 가톨릭 교리를 뒤엎는 운동을 일으킨 결과가 되었다. 그 당시는 루시퍼와 하나님과의 관계 문제로 성 토마스 계열, 스코틀랜드 종파, 성 어거스틴 계열 등이 서로 맹렬한 논쟁을 벌이던 때였다. 그러나 결국 에크하르트는 이단으로 판결되어 1326년 처형을 당했으며(편집자 주: 처형당한 사실은 확실하지는 않음), 1329년 교황 요한 22세는 칙령을 내려 그의 저서 28권을 불법화시켜 모두 없애게 만들었다. 이러한 강력한 탄압으로 누구도 감히 이런 생각을 입 밖에 내지 못하게 되었으며, 그러한 전통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근래에 와서 미국의 부시(Bush) 대통령이 이라크의 후세인을 칠 때 ‘새 세계질서(New World Order)’를 크게 외치면서 동시에 일어난 ‘새 시대 운동(New Age Movement)’으로 우후죽순 격으로 사방에서 온갖 이론이 활기를 갖기 시작했다. 여하튼 종교의 자유가 보장된 헌법이 제정되고 오랜 시간 지속된 투쟁 덕분에 이제는 그리스도교 당국의 시퍼런 서슬에 위협을 덜 느끼게 된, 이견(異見)을 가진 사람들이 차차 말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사과의 근원
원죄의 발단은 사과 때문이었다. 하필 야훼는 지식의 과일이라는 사과나무를 에덴동산에 마련하여 천진난만한 이브와 아담으로 하여금 호기심을 갖도록 만들었다. 만약 그가 인자했고 사람을 사랑했다면 어째서 자기의 형상을 따라 만들었다는 인간에게 지식을 갖지 못하도록 했으며, 또 인간이 지식을 터득하는 것이 싫으면 아예 사과나무를 없앨 것이지 왜 호기심만 잔뜩 생기게 해 놓고 못 먹도록 명령을 했는가? 이것은 하나님이 고약한 심보를 갖고 행한 일이었다. 전지전능한 하나님이었기에 이미 뱀이 와서 이브에게 어떻게 말할지 알고 있었고, 이브와 아담이 어떻게 행동할지도 뻔히 알고 있었을 터이다. 크리스천들은 아담과 이브의 판단능력과 마음가짐을 시험하려고 했다며 정당성을 주장한다. 그렇다면 결과를 다 아는 시험을 하는 하나님은 무엇인가? 아예 아담과 이브에게 미리 사탄이 할 이야기를 전해 주고 그 말을 듣지 말라고 주의를 주는 게 낫지 않았을까? 어떤 식으로 따지든 하나님은 인간이 원죄를 짓도록 이미 프로그램을 짜 놓았다는 결론으로밖에 달리 해석할 수가 없다. 따라서 사과를 먹은 죄는 아담과 이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에게 있는데 사람에게 뒤집어씌운 꼴이 된다. 이러한 착한 인간에게 모함을 한 것은 여호와 하나님이었고, 이를 깨치게 해 주려고 뱀의 형상으로 세상에 왔던 사탄이란 존체에게 인간은 고마움을 느껴야 한다는 논리를 위에서 잠깐 설명했다. 그렇다면 이 문제의 사과는 그 근원이 하나님의 성경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오랫동안 세상에 내려오던 전설을 그리스도교가 채택을 했고, 마치 그리스도교에서 창조된 이야기처럼 만들기 위해 이미 존재하고 있던 다른 믿음의 체계를 이단이란 이름으로 말살하려 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사과는 인도-유럽 문화권(Indo-European culture) 전체에서는 불사영원(不死永遠)한 여신(女神)의 심장(心臟)으로 여기고 성스러운 과일로 믿어 왔다. 그래서 중국에서 신선들이 살았다는 무릉도원(武陵桃源)에 해당하는, 서양의 영생(永生)과 관계되는 정원에는 사과가 항상 있었던 것이다. 켈트(Celt) 민족은 서쪽 바다 건너편에 있다는 이 낙원을 ‘아발론(Avalon)’, 즉 ‘사과의 땅’이라 불러 주검의 여왕 ‘모간(Morgan)’이 통치했다고 믿었다. 그래서 아일랜드의 왕들은 여신에게서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신비의 사과를 받았으며, 석양에 어둠이 드리울 때 그 여신과 함께 하기 위해 어디론가 떠났다는 전설이 있으며, 삼위일체의 여신이 세 명의 여왕으로 둔갑하여 아더 왕(King Arthur)에게 와서 그를 ‘아발론(Avalon)’으로 데려갔다는 전설도 나오게 되는 것이다. 스칸디나비아 지역의 ‘노스(Norse)’ 민족은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는 사과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물건이라고 생각하여 죽은 사람을 묻을 때 사과를 함께 묻었다. 그들은 그들의 여신 ‘인둔(Indun)’이 서쪽 어느 곳에 사과밭을 갖고 있어 사과를 생산하였고, 그것을 남자 신들에게 먹여 그 남신들이 죽지 않고 계속 살 수 있도록 해 주었다고 믿었다. 또 독일의 작자 미상의 고대 신화의 서사시 ‘니벨룽겐의 노래(Nibelungenlied)’에 나오는 주인공 ‘지크프리트(Siegfried)’의 증조할머니도 사과를 먹고 잉태했다는 전설이 있다. 그리고 동짓날(크리스마스)의 풍습으로 통돼지를 구울 때에도 돼지의 입에 사과를 물렸는데, 이는 돼지가 다시 태어날 내세에 새로 갖게 될 육신의 심장이 되라고 사과를 물렸던 것이다. 희랍 신화에서도 여신 헤라(Hera)가 서쪽에 신비의 사과밭을 갖고 뱀 또는 용으로 하여금 생명의 과일나무를 지키도록 했다. 그래서 희랍에는 최상의 여신이 자기를 섬기는 신도에게 생명을 준다는 뜻으로 사과를 주는 성상(聖像)이 있었다. 이 그림은 사과나무가 있고 그 뒤에 뱀이 있으며 그 나무 밑에서 ‘헤라’가 아담과 이브처럼 생긴 사람에게 사과를 건네주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이러한 여러 근거로 그레이브스(G.M. Graves)란 학자는 ‘디 보라진(de Voragine)’이란 저서에서 성경은 아담과 이브와 뱀과 사과의 이야기를 고의적으로 변조시켰다고 주장하였다. 로마에서도 물론 마찬가지이다. 사과-어머니 여신을 ‘포모나(Pomona)’라 불렀으며, ‘폼(pom)’이란 말은 사과를 말했다. 따라서 로마의 잔칫상을 차리는 형식을 한마디로 ‘계란에서 사과까지(ab ovo usque mala)’라고 표현했다. 즉 ‘창조로 시작하여 완성으로 끝내다’라는 상징으로 마지막에 사과를 먹었으며, 로마의 꼭두각시 격이었던 헤롯 왕도 식사를 로마식으로 한다며 식사 끝에는 반드시 사과를 먹었다고 한다.
그런데 사과가 이런 대접을 받게 된 이유는 사과를 가로로 잘랐을 때 그 중심에 ‘펜타그람(Pentagram)’, 즉 오각별이 나오게 되기 때문이다. 오각별이란 꼭지가 다섯 개 달린 별인데 세상의 혼(魂)을 상징한다. 특히 프리메이슨(Freemason)이 설명하는 그 심오한 뜻으로는 인간 본연을 초월한 의식을 나타내 주는 징표(徵表)이며, 예수의 탄생을 발견한 동방박사와 같은 현자(賢者)들에게 비추어지는 별이며, 천기(天機)를 알려 주는 별이며, 왕중왕(王中王)의 완전한 지능(知能)을 말해 주는 표상(表象)인 것이며, 그의 거룩한 말씀이 형체로 보이는 것이며, 모든 천기(天機)의 상징이며, 신령(神靈)을 섬기는 모든 이들의 우상(偶像) 중의 우상이며, 예언(預言)을 풀어 주는 ‘카발라’의 모든 열쇠가 그 상징 속에 들어 있으며, 그 상징은 우주(宇宙)의 삼라만상(森羅萬象)을 한데 묶는 절대적 결정(結晶)이라 하였다. 또 이집트에서는 위의 설명과 더불어 펜타그람이 지하(地下)의 자궁(子宮)을 뜻하였으며, 이 자궁에서 잉태하여 부활을 가능케 해 주었다고 믿었다. 이런 심오한 뜻을 갖고 있는 오각별이 사과의 중심, 즉 코어(Kore 또는 Core)에 들어 있는데, 그 코어라는 것은 지상(地上)의 어머니 신 데메테르(Demeter)의 심장을 말하며, 깊이 숨겨져 있는 동정녀(童貞女)를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순결한 동정녀가 가장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고 땅의 지상신인 데메테르 여신의 심장이 간직되어 있는 표징인 펜타그람은, 생명과 영생을 뜻하고 전지(全知)의 지능을 얻을 수 있는 과일이라는 뜻이다. 그런 이유로 집시나 위치들은 사과를 항상 가로로 잘라먹는다. 이상에서 우리가 익히 아는 동정녀가 예수를 잉태했다는 이야기가 신화에 근거를 두고 있고, 데메테르 여신의 코어에서 동정녀 잉태가 된 것을 상징한 이야기가 성경의 성모 마리아가 되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과의 전설과 종교적 믿음으로 인하여 서양 각지에서는 이와 연관된 여러 가지 이야기와 풍습과 제식 등이 많이 있다. 예를 하나 들면 믿음이 각별한 집시 부부가 성교하기 전 예식으로 펜타그람이 나오도록 사과를 조심스럽게 잘라 신비의 기(氣)를 얻는 영양식으로 함께 먹는 풍습이 있는가 하면, 켈트 사회에서는 사과가 성스러운 남녀 혼합과 생명의 탄생을 상징하기 때문에 결혼식에 중요하게 사용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사과라는 것이 성경에서 아담과 이브에게 소개되기 훨씬 이전부터 서양에서는 매우 의미 깊은 과일이었다는 것을 이해하고 나서, 성경을 다시 음미해 보는 것이 어떨까 한다.
인자(人子-Son of Man)
마태복음 26장 64절에 “미래에는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른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한 것을 비롯하여 인자(人子)라는 말이 신약에서 99번이나 나온다고 한다. 인자라는 말의 뜻은 직역하면 ‘사람(남자-man)의 아들’이고, 예수가 자기 자신을 가리켜 부른 말이라 한다. 여기서 약간 혼동이 되는 점은 하나님의 아들이 자신을 남자의 아들이라고 부른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고, 구약으로 가면 ‘아들’이란 말은 출애굽기 4장 22절 등의 예를 들어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가리킨 집합적인 명사라고 교회에서 설명하기도 한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해해야 할 것은 예수가 한 말은 예수 자신이 창작한 새 용어가 아니고, 이미 그 사회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었으며, 일반인들이 그 뜻을 별도로 설명하지 않아도 모두 알아들을 수 있는 용어를 사용했으리라는 점이다. 만약 그가 새 용어를 창작해 냈다면, 분명 사도들에게 그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었다고 설명했을 것이라 믿는다. 그렇다면 인자, 즉 ‘남자의 아들(Son of Man)’이란 용어가 어떤 뜻으로 그 사회에서 통용되었는가를 먼저 알아보자.
원래 ‘남자의 아들’이란 말은 예수 훨씬 이전에 인도의 힌두교에서 ‘나라야나(Narayana)’라는 용어로서, ‘비슈누(Vishnu)’ 신을 뜻했던 말이 전파되어 헬레니즘 문화권 전체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리고 예수가 살던 팔레스타인 지역은 물론 헬레니즘 문화의 영향 아래 있었고, 그리스도교 자체가 온통 그 영향을 받았던 것이다. 이 단어의 원래의 의미는 ‘비슈누’라는 신이 완전히 사람(남자)의 형상으로 어머니라는 여자와 관계없이 남자들에 의하여 만들어졌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찬송가를 보면 비슈누는 얼마 후에 ‘칼리(Kali)’라는 어머니 상을 만들어 그녀의 신성함을 신봉하였고, 신(일반적인)이란 칼리의 모성(母性)을 근본으로 만들어진 창조물이라 하였다. 이러한 근원에서 ‘남자의 아들’은 페르시아 문화권에서는 그들의 메시아를 뜻하게 되었고, 이것이 또 에세네 부족에게는 구세주 그리스도라는 관념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따라서 페르시아나 에세네 민족에게서 이 용어는 ‘물(水)과 신령’으로 사람(남자-man)에 의하여 태어났으며, 이렇게 태어난 남자, 즉 아들은 죽지 않고 영생을 하게 된다는 의미였다. 이 말은 여자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사망이란 숙명을 당연히 갖게 된다는 뜻도 함께 포함하고 있다 할 것이다. 그래서 페르시아의 ‘사람의 아들’ 인자는 힌두교의 베다(Veda) 경전에 나오는 야마(Yama)라는 이름에서 비롯되어 “찬란한 이마(Yima the Splendid)”라고 불려지게 되었으며, “죽음의 신(Lord of Death)”으로도 불려졌고, “좋은 목자(the good shepherd)” 또는 “태어난 자 중 가장 영광스러운 이”라고도 불려지게 되었으며, 그는 홀로 인간과 짐승들에게 영생을 부여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고 믿었다. 또 예수가 마태복음 16장 27절에서 마지막 심판날에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라고 한 대목에서 사람의 아들 인자의 아버지가 과연 누구인지 성서학자들은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데, 이는 필경 페르시아의 종말론이 성경으로 살짝 삽입되면서 이렇게 애매한 문구가 섞여 들어갔으리란 추측이 가능하기도 하다.
연옥(煉獄)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연옥(煉獄)은 불교에서 따 온 사상이다. 그리스도교가 생기기 수백 년 전에 불교의 승려들은 지하세계에서 속죄하느라 고생하고 있는 조상의 영혼을 구해 극락으로 가도록 할 수 있다고 했다. 그렇게 하는 방법은 후손이 지성으로 절에 가서 불공을 드리고, 즉 중에게 돈이나 재물을 바치고, 이들을 대신하여 중이 제사를 지내고 특별한 주문을 외우면 가능한 것이라 했다. 이렇게 성직자가 개입해서 그들에게 주어진 특별한 권능을 이용하여 어떤 제식을 거치면, 죽어서 저주를 받고 고생하는 영혼이라도 천당으로 보낼 수 있다는 아이디어가 마음에 들었던 것 같다. 이러한 사고방식과 토속종교에서 행하던 관념을 합하여 만들어 낸 것이 연옥이다.
그러면 연옥(purgatory)이라는 말이 생긴 출처와 토속신앙의 어떤 것이 연옥의 근원이 되었는지 살펴보자. 토속종교를 크리스천들은 물론 이단이라고 했고, 그들을 ‘파간(pagan)’이라고 불렀다. ‘파간’이란 말은 원래 ‘파구스(pagus)’라는 라틴어로 ‘시골사람’이란 뜻이었는데, 나중에 대개가 크리스천화가 된 다음 아직도 크리스천이 안 되고 속된 세상에 사는, 즉 개화하지 못한 사람이란 뜻으로 사용된 것이 그 유래이다. 그래서 지금도 크리스천이 아니고 다른 이상한 것을 믿으면 모두 ‘파간’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런데 유럽 전체의 파간들은 자기네들의 사원 깊숙한 곳에 땅을 파고 항상 창조주(여성-creatress)의 자궁(子宮)을 의미하는 작은 방을 차려 놓았다. 그리고 이 방을 구덩이(pit 또는 grove)라고도 하고, ‘헬렐(Helel, 註: 지옥이란 말 Hell의 어원이기도 하다)’이라고도 하였으며, ‘아바돈(Abaddon)’이라고도 불렀다. 이에 대한 것은 ‘사탄의 근원’에서도 설명하였다. 그런데 그리스도교에서 신품성사(神品聖事)나 목사안수를 받는 관념과 비슷하게 파간 승려가 되는 성품을 올리는 제식의 순서로서 밤에 죽어서 땅에 묻히는 상징으로 이 ‘아바돈’이라는 구덩이 방에 들어갔고, 이 곳에서 하룻밤을 지내면서 자궁 속의 태아처럼 웅크린 자세로 있다가 다음날 아침에 창조주 여신의 자궁에서 다시 태어나 새 생명을 갖게 되는 장면을 연출했던 것이다. 그리고 처음 죽어서 그 안에 들어가면 심판을 받아 천당에 가기 위해 다시 태어날 자격이 있나 없나를 가린다. 물론 이 경우에는 모두 천당갈 자격이 있게 될 것이다. 결국 이 심판을 받고 난 다음날 다시 태어난다는 것을 죽은 후 얼마 있다 천당에 가는 것과 연결을 지으면 이 구덩이는 연옥에 해당되는 것이고, 다시 재생을 못할 경우에는 이 구덩이가 지옥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교 초기에는 그리스도교가 이 관습을 그대로 받아, 이 구덩이가 있는 사원을 ‘연옥(purgatory)’이라고 불렀다. 중세기에 가장 유명했던 연옥은 아일랜드의 도네갈(Donegal)에 있는 ‘락 덕(Lough Derg)’이란 곳의 사원이었다. 여기에는 작은 동굴이 있는데, 순례자들이 이 곳을 찾아와 동굴 속에 들어가 맨발과 무릎으로 기도를 드리고 고행을 하며 만 하루 동안 피정(避靜)을 드리는 곳으로 유명하다. 이 곳은 12세기 성 패트릭(St. Patrick)이 ‘퍼가토리(연옥)’라고 이름을 지은 성당이기 때문에, 당시 유럽 대륙에서 많은 순례자가 찾아와 유명해진 곳이다. 또한 13세기 중세의 유럽 지도에 유일하게 기록된 아일랜드의 지명일 정도로 유명했다. 이 곳에 하도 많은 신도들이 순례하였기 때문에, 1497년 교황 알렉산더 6세가 그 곳은 마귀의 집이니 폐쇄하라고 명령을 내렸지만 사람들이 계속 찾아와서 1790년까지 사용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14세기 초 단테의 작품인 ‘신곡(神曲-La Divina Comedia)’에 보면 연옥이 땅 구덩이에 있지 않고 산꼭대기에 있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이 산은 결혼식 때 사용하는 케이크처럼 층으로 되어 있었다. 결혼식 피로연에서 사용하는 케이크는 7층으로 되어 있고, 그 꼭대기에 신랑·신부가 함께 서 있는 것이 원칙이다. 이것은 바빌로니아에서 말하는 ‘지구라트(Ziggurat)’라고 하는 산을 모방한 것인데, 당시는 태양계에 7개의 행성이 있다 하여 7층으로 만들어졌고, 그 꼭대기에는 왕(王)과 여신이 나체로 교접하는 상(像)이 있어 성스러운 결혼을 상징하였으며, 그 꼭대기가 소위 지상의 낙원이라고 했던 것이다. 이것이 현세에 들어와서 나체의 두 남녀 교접상(交接像) 대신 신랑·신부의 상(像)을 올려놓게 된 것이다. ‘지구라트’가 뜻하는 바는 일곱 단계의 산을 올라가는 노력으로 값을 치르고, 정상에 도달하면 그 곳이 ‘사랑의 낙원(Love Paradise)’이라는 것이었다. 성경과는 관련을 찾을 수 없는 이 풍습이 어떻게 해서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는가? 필경 크리스천들도 사랑의 낙원이 좋았던 모양이다. 여하튼 그리스도교에서 연옥이란 관념을 채택한 것은 기정사실이다. 그것이 좀 이상했던지 하나의 에피소드가 나돌기도 하였다. 예를 들면 교황 그레고리는 트라얀(Trajan) 황제를 연옥에서 구하여 천당에 가도록 기도하여 성공했다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레고리 교황이 천당에 보내지 말아야 할 사람을 천당에 보냈다고 그 죄에 대한 벌을 주었다. 그 결과 그레고리 교황은 통풍(通風)에 걸리고 열이 나며 복부가 몹시 아파 고생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한편 개신교에서는 구원을 매매하는 행위는 있을 수 없다고 보았다. 그래서 가톨릭의 아이디어를 나쁘게 생각하여 연옥이란 것을 아예 없애 버렸다. 당시 우스갯소리로 영국의 스콧(Reginald Scot)이라는 사람이 한 말이 생각난다.
“영국에는 산 사람 보고 연옥에서 나오게 해 달라고 귀찮게 졸라대는 죽은 귀신이 몽땅 없어졌다. 그 귀신들이 어디로 갔고, 아우성은 누가 듣고, 누가 그 귀신들을 쳐다보고 있냐고? 또 어디서 귀신들이 고통스럽다고 신음소리를 내고 있냐고? 그 귀신들은 몽땅 로마로 가 버렸다. 왜냐하면 영국은 미사 드리는 돈이 너무 많이 들어서 ….”
지옥
지옥이란 말은 영어로 ‘헬(Hell)’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어둠 또는 지하(地下)의 세상을 관장한다는 여신 ‘헬(Hel)’의 이름에서 따 왔다고 한다. 여신 ‘헬(Hel)’이란 이름은 위에서 설명한 ‘아셔라’ 또는 ‘아스타테’ 또는 ‘아스타롯(Astaroth)’이라고 불리는 하나님 어머니의 별명으로 불렀던 것이며, 그 어휘는 ‘헬렐(Helel)’에서 나왔다고 했다. ‘헬렐’이란 움푹 들어간 곳(grove) 또는 웅덩이(pit)를 말했고, 이는 즉 음부 또는 요니(yoni)를 뜻한다고 했다. ‘요니’라는 어휘와 ‘팰러스(phallus)’ 또는 ‘링암(Lingam)’ 등의 남녀 성기(性器)를 표현하는 말은 고대로부터의 인간 신앙생활에서 떼어놓을 수 없는 단어이고 관념이었다. 여기서 ‘요니’는 여성됨을 상징하는 보지를 말하고, ‘팰러스’나 ‘링암’은 자지를 말한다. 그래서 지옥이라는 명사 ‘헬’은 하나님 어머니의 보지, 즉 자궁을 뜻하는 것이다. 자궁이란 곳은 새로운 생명을 낳기 위해 잉태하는 곳이다. 따라서 죽은 다음에 지옥에 간다는 말은 하나님 어머니의 자궁 속으로 들어가 다시 잉태되어 새로운 육신으로 세상에 다시 태어나는 과정에 불과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죽은 다음에 환생하기 위해 가는 곳이다. 살아생전에 좋은 일을 하고 하나님을 잘 믿어 천당에 가고 영생을 얻는다는 것은 불교식으로 말하면 해탈을 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고, 서양 관념으로 말하면 모든 진리를 깨달았다는 뜻에서 ‘광명을 얻은 자’, 즉 ‘일루미네이티드(illuminated)’라고 불렀다. 이 사람들은 영생을 얻었으니 당연히 다시 태어나기 위해 하나님 어머니의 자궁으로 들어갈 필요가 없는 사람들이고, 따라서 그들은 소위 천당이라고 하는 하나님이나 신령들이 노니는 하늘나라로 간다.
자궁에서 환생하고 새로 태어난다는 개념은 여러 면에 적용시킬 수 있다. 크리스천들은 매주 일요일에 교회에 간다. 교회에 간다는 것도 자궁으로 들어간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왜냐하면 교회건물 자체가 자궁이기 때문이다. 교회라는 자궁 속에 들어가 목사나 신부의 강론을 듣고 하나님을 섬기고 나면 정신적으로 또는 신앙적으로 거듭 태어난다. 그래서 교회건물을 보면 ‘요니’의 상징이 무수하게 많다. 근래에 와서는 사람들이 상징이라는 것을 거의 모르고 있기 때문에 소위 현대식 건축풍 또는 미술적인 감각을 살려 교회를 디자인하고 건축하고 있지만, 옛날의 교회건물을 보면 구석구석이 의미 있는 상징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은 교회건물의 출입문이나 들창의 모양인데, 이들은 아치(arch)처럼 생기고 대개는 상부 중앙에 꼭지가 있다. 이는 마치 볼록렌즈를 측면에서 본 모양 또는 은행 열매의 한 단면모양의 일부와 같다. 이런 모티프(motif)를 ‘만돌라(mandorla)’라고 부르며, 어떤 이는 생선접시 모양으로 생겼다 하여 ‘베시카 피시스(vesica piscis)’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원래는 요니(yoni)를 상징한 것이다. 그래서 교회에 가면 위에 말한 문(門)의 모양이나, 성화(聖畵)의 틀 모양이나, 심지어는 미사를 드리는 신부의 의상까지도 ‘만돌라’형을 본떴던 것이다. 그리스도교가 이렇게 된 이유는 그리스도교가 탄생하기 이전의 전 유럽에 퍼진 토속종교의 성직자들은 거의 여자였고, 여성 성기 요니가 남자 성기보다 죽음과 탄생에 관련되는 관념에 더 가까운 연관을 가졌기 때문에 생겨난 것으로 보여진다. 물론 ‘드루이즘(Druism)’이라고 하여 남자 승려도 많이 있었지만 이는 한 종파에 불과할 정도였고, 그 당시는 여자와 남자가 동등한 자격으로 함께 사회의 중요한 직책을 맡아 살고 있는 때였다. 중앙 유럽을 차지하고 있었던 고올(Gaul)에서나 북부 유럽의 노스(Norse) 문화권에서나 서부 유럽의 켈트(Celt) 문화권에서는 모두 신앙과 병 관리는 거의 여자들이 하고 있었다. 마녀사냥을 시작하게 된 동기도 그리스도교를 전파하고 절대 통치권을 갖기 위한 과정에 이런 여자들이 큰 방해물이 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는 그 여자들이 하던 풍습이나 제식을 많이 흡수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교 제사장의 의상에서부터 건물모양까지 요니의 모양을 받아들여 현대에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오래된 서양 건물, 특히 교회건물에 있는 사람형상이나 짐승형상이나 기둥이나 모서리 장식 등을 유심히 관찰하여 파고들면 일반 사람들이 모르고 있던 많은 비밀들을 알아내게 될 것이다. 이러한 것은 가문의 문장(紋章-coat of arms), 동네 이름, 사람 이름 등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고대에는 사람들이 죽으면 거의 지옥, 즉 ‘헬’에 가게 된다고 믿었고, 그 지옥이란 곳은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영원히 불 속에서 고생하는 곳이 아니라 다시 환생할 때까지 머무는 곳이고, 심지어는 번뇌와 근심걱정이 없는 동화에 나오는 천진난만한 세상이라고 믿기까지 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 교회에서 말하는 영원히 불 속에서 참기 어려운 고통을 겪어야 한다는 지옥의 이론은 어디서 왔는가? 학자들은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Zoroastrianism)’의 사상에서 왔다고 한다. 조로아스터교는 남성(男性)을 근본으로 하는 사상이어서 남성적인 고행(苦行)으로 아픔을 견디는 일이 하나님을 만족시키고 가까이 접근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이에 상반되는 여성적이란 사고(思考)는 인생을 즐기는 쾌락과 극단적 고행에서 탈피하여 심령(心靈)적 성숙을 지향하는 것이라 믿었던 것이다. 어떤 학자는 조로아스터교에서 지옥을 이렇게 험한 곳으로 소개한 이유는 여자들에게 위협을 주기 위함이라고도 한다. 이유는 여자들은 남편의 충복이 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지 못한 여자는 지옥에 가서 쇠창살로 유방을 찢어 열어 놓고, 새빨갛게 달구어진 스토브를 혓바닥으로 핥게 되며, 한 다리만 묶어 매달고 뱀과 개미와 벌레들이 육신의 모든 구멍을 드나들게 하는 형벌을 받는다고 했다. 그러나 조로아스터교에서도 이런 고통이 영원하다고는 하지 않았다. 지옥에서 영원히 고통을 받는다는 이야기는 완전히 그리스도교의 창작물인 것으로 알고 있다.
아마겟돈
다른 장에서도 간헐적으로 소개했듯이 에세네의 신앙의 근본은, 우주는 어둠과 광명의 궁극적인 신이 지배한다는 것이다. 광명의 신은 진리와 올바름의 신이고 선(善)의 신이며, 어둠의 신은 악마이고 사악한 행동만 하는 악(惡)의 신이다. 따라서 선과 악의 신이 서로 득세하고 열세하는 관계는 천체의 움직임에 따라 변하게 되며, 인간도 태어날 때의 천체의 위치에 따라 선과 악의 배합이 결정된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밝음과 어둠의 싸움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영원히 존재하게 되며, 사람에 따라 본질은 어둠이 더 많을 수도 있고 밝음이 더 많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종국에 가서는 광명의 신이 세상을 통치하게 되지만, 광명의 신을 찾아가는 길은 행하기 어려운 오랫동안의 열성과 노력이 필요하다고 했다. 이러한 오랜 노력의 결과는 ‘정의의 때(正義之時-Time of Justification)’, 후에 ‘심판의 날(Day of Judgement)’로 이름을 바꾼, 그 날이 왔을 때 효험을 보게 된다. 그러나 ‘심판의 날’이 가까워 오면서, 즉 소위 ‘유혹의 시기(Period of Temptation)’라 하여 더욱 많은 사람들이 유혹에 빠져 어둠의 신은 대단한 세력을 구축하게 된다고 믿었다. 이 때 광명의 길을 따르는 사람들은 “우리를 악마로부터 멀리하여 유혹에 빠지지 말게 해 주시옵소서”라고 기도를 드리며, 현명한 판단을 해야 한다. 그래서 그들은 전통적으로 어둠의 신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뜻으로 ‘벨리알(Belial)’이라 불렀고, ‘벨리알’의 자식들이 신명기 13장 13절에서 말하는 여호와 이외의 다른 신들을 섬긴다고 하였다. 광명의 신은 지상에 일곱 계급으로 나누어진 대행자를 두었고, 이는 ‘메노라(Menorah)’라고 부르는 일곱 가지가 뻗친 촛대로 상징된다. 이 중에서 가장 높은 지위는 다윗 왕조에 와서 사독(Zadok)이라는 승려계급으로 광명, 즉 빛과 가장 가까운 계급이었고 천사장 ‘미카엘(Michael)’로 상징되었다. 이에 대응하여 어둠의 신도 지상에 자기 대행자들을 배치하였다. 그 책임 되는 신을 ‘사탄(Satan)’이라고 부른다.
그리하여 빛과 어둠, 즉 선과 악, 두 신의 군대가 마지막에 결전하는 곳이 ‘아마겟돈(Armageddon-하르마겟돈)’이라고 요한계시록(묵시록) 16장 16절에 명시하였다. 아마겟돈 또는 천주교에서 발음하는 식의 하르마겟돈이라는 이름은 갈릴리 언덕의 남쪽에 있는 예즈릴(Jezreel) 평야에 있는 요새로, 역사적으로 전쟁을 많이 치른 일이 있는 둔덕인데 원래 이름은 ‘하르 메기도(Har Megiddo)’, 즉 ‘메기도 둔덕(the Heights of Megiddo)’이란 뜻이었다. 사해의 문서 중 ‘전쟁의 서(War Scroll)’를 보면 빛을 따르는 사람들과 어둠의 아들들이 투쟁하는 이야기가 자세히 나온다. 빛을 따르는 사람들이란 이스라엘 민족을 말하는 것이고, 어둠의 아들들이란 ‘키팀(Kittim)’이라 하여 로마인들과 그들을 따르는 여러 종류의 파벌들을 지칭하였다. 그리고 최종 결전장에서 전능(全能)의 사탄이 어떻게 행동하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고, 마지막 심판에 가서는 빛의 하나님과 대결할 정도로 막대한 힘을 가졌다는 사탄 이야기가 자취를 감추어 버리고, 전쟁은 인간사회로 둔갑하여 빛을 따르는 이스라엘 군대와 어둠을 따른다는 로마 군대의 최후 접전이 되는 것이다. 이런 애초의 이야기로 시작해 많은 시간이 경과한 후에 그리스도교의 주류파에 의하여 ‘하르 메기도’의 지역적인 인간전쟁 이야기를 따서 전세계적인 규모로 바꾸고, 빛의 하나님과 어둠의 사탄과의 마지막 결전으로 최후의 심판을 장식하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기본골자가 만들어진 것이다.
점성학의 영향
열 두(12) 띠
동양의 역리학(易理學)에서 쥐띠, 소띠, 호랑이띠 등 열 두 짐승으로 표현되는 띠는 서양의 점성학에서 짐승 대신 열 두 개의 별자리로 표현된다. 즉 양(Aries), 소(Taurus), 쌍둥이(Gemini), 게(Cancer), 사자(Leo), 처녀(Virgo), 저울(Scales), 전갈(Scorpion), 궁수(Archer), 염소(Capricorn), 물동이 남자(Aquarius, 물병자리, 보병궁), 물고기(Pisces), 이렇게 열 두 가지 상징이다. 이 12자리에 태양을 합하면 13이라는 숫자가 나온다. 그리고 예수도 12제자와 합하면 13이다.
1년이 사계절로 되어 있고 12달로 되어 있다는 것은 태양신 하느님의 한 주기를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가 죽기 전날에 차린 ‘최후의 만찬’의 그림을 보면 열 두 제자가 세 명씩 그룹을 짜 네 쪽으로 분리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리고 원(圓)을 전체 또는 하나라고 생각하고, 그 안에 수학의 방정식 그래프 X축과 Y축을 그리듯 수직과 수평의 십자를 집어넣으면 원이 4등분된다. 한쪽 선을 동지(冬至)라고 하면 반대쪽은 하지(夏至)가 될 것이며, 또 다른 한 변을 추분(秋分)선이라 하면 반대쪽은 춘분(春分)선이 될 것이다. 이것이 점성학에서 열 두 자리를 말하는 역학의 도표(The Cross of Zodiac)이고, 그리스도교에서 사용하는 십자가이다. 독자들은 십자가의 교차점을 중심으로 원이 그려져 있는 그림이나 실물을 보았을 것이다. 흔히 이것을 ‘켈트(Celtic Cross)’의 십자가라고 부른다. 따라서 십자가의 근원은 예수의 순교 훨씬 이전으로 그 유래를 거슬러 올라갈 수 있게 된다.
성경 이야기를 훑어보면 ‘열 둘’이란 말을 많이 접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왜 ‘열 둘’이란 숫자를 택했다는 설명은 없다. 이에 대한 설명은 점성학의 설명을 들으면 쉽게 해석이 될 것이다.
물고기 상징
우리는 옛날 크리스천들이 로마에서 박해를 받을 때 신자들끼리 서로 교환하던 암호가 물고기였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또 흔히 교황을 어부로 상징하는 이야기도 많이 들었다. 그러나 왜 물고기를 크리스천의 상징으로 사용하는지의 이유에 대하여는 설명해 주는 사람들을 만나기가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즉 예수는 하나님이란 뜻이고 그리스도는 구세주란 뜻인데, 이 희랍어의 머리말만 따서 연결하면 ‘익투수(ichthus: Iesous CHristos THeou Uios Soter =Jesus Christ, Son of God, Savior)’라는 단어가 되어 이는 희랍어로 물고기라는 뜻이 된다는 이야기가 있다. 또 점성가들에 의하면, 예수는 ‘물고기(Pisces)’띠 해(年), 물고기띠 달(月)에 출생하였다고도 하여 물고기 두 마리를 그리스도교의 상징으로 삼는다고도 한다. 그러나 점성학의 열 두 띠의 표식은 예수 훨씬 이전에 이미 정해져 있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마태복음 14장 17절과 19절에 두 마리의 물고기 이야기가 나온다. 두 마리의 물고기는 위에서 말한 것처럼 점성학에서 말하는 물고기띠의 상징이다. 점성학에서는 원을 사등분하고 이를 다시 30도씩 셋으로 쪼개 전체가 열둘의 띠로 나누어지며, 각 띠가 장악하는 원의 부분을 ‘집(house)’이라고 부르고, 이를 하나의 왕국(王國)으로 간주하여 전체를 말하는 원(圓) 속에는 열 두 개의 왕국이 존재한다. 그래서 과거 거의 2천 년 동안을 태양신 하나님이 물고기의 왕국(Pisces), 즉 두 마리의 물고기 집에 머물렀다는 것이다. 고대 점성학의 논리를 따르면, 하느님 태양신은 때가 되면 물고기 집에서 나와 다음 집인 물을 길어 물을 나누어 주는 ‘물동이 사람(Aquarius)’의 집으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누가복음 22장 10절에 물동이를 지고 가는 남자 이야기가 나온다. 유월절(페삭, Pesach 또는 Passover)이란 유대인들이 이집트에서 탈출한 때를 기념하여 7일 동안 부푼 음식을 먹지 않는 명절이다. 예수와 그의 제자 열 두 명이 유월절의 마지막 날에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물동이 진 남자를 만나 그의 안내로 그 물동이 진 남자의 집에 이른다는 것이 내용이다. 이것을 물고기 집에서 나와 물동이 남자 집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설명한 것이다. 점성학의 관념으로 성경을 볼 때, 성경에서 “아버지의 집에는 저택이 많이 있다”라는 말은 점성학에서 말하는 열 두 개의 집을 말한다. ‘아버지의 집’은 ‘하느님 나라’, 즉 우주 전체를 말하며, 저택이라는 것은 집, 즉 열 두(12) 집을 말한다.
또 물고기와 어부에 대한 이야기는 희랍 신화에도 근원이 깊숙이 박혀 있다. 희랍 신 ‘오르페우스(Orpheus)’는 낚시를 갖고 물고기를 낚는 어부이다. 희랍 신화에 의하면 물이란 무지(無智)의 세상이다. 따라서 물에 사는 물고기는 무지한 짐승이다. 그래서 어부가 물고기를 낚아 물 밖으로 끄집어낸다는 것은 무지의 세상에서 유지(有智)의 세상, 즉 사리를 이해하는 인간으로 만든다는 이야기도 되고, 무지한 물고기에 생(生)을 집어넣어 준다는 뜻도 된다. 필경 이런 종합적인 이유로 교황의 반지를 ‘어부의 반지’라고 부르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희랍 신화 이야기가 나온 김에 바티칸 교황청의 베드로 광장에 있는 거대한 솔방울 이야기도 곁들여 해보자. 베드로 광장에는 약 4미터 크기의 솔방울 동상이 있는데, 이것도 희랍 신화에서 유래한 것이다. 희랍 신화에 ‘캔디데이트’라는 신이 보물 바구니에서 솔방울을 끄집어낸다는 이야기가 있다. 솔방울이 중요한 이유는 솔방울 속에 들어 있는 씨가 나와 많은 종자를 퍼뜨린다는 뜻이 있기 때문이다. 이 솔방울 동상은 원래 로마 시에 있던 것을 옮긴 것이다. 물고기와 마찬가지로 솔방울도 그리스도교와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으나, 희랍의 신화나 철학을 그리스도교가 받아들임으로써 이러한 상징적인 표징이 지금도 쓰이고 있다.
말세
우리는 마지막 날, 종말, 최후의 심판 등 세상이 끝난다는 말을 무수히 들어 왔다. 마태복음 28장 20절 마지막에 보면,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라고 하였다. 세상 끝, 마지막 날이 오면 어떻게 된다는 말인가? 문제는 성경에 따라 번역이 달리 표현되었다는 점이다. 어떤 성경은 “때(시간)의 끝”이라 했는가 하면, 어떤 성경은 “날(시대)의 끝”이라고도 하였고, 또 어떤 것은 “사물에 대한 현 제도의 종말”이라고도 하였다. 희랍어로 된 성경의 원본에서 사용한 단어는 ‘이언(Aeon)’이라고 한다. 그리고 영어화된 이 단어는 ‘age’이다. ‘Age’란 말의 뜻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어떤 사람이나 사물이 존재하고 있는 동안에 일어나는 어느 기간(period)’이라고 하였다. 다시 말해서 존재의 끝장이라는 말이 아니다. 이것이 미심쩍으면 대표적인 성경사전 ‘Strong's Bible Concordance’ 같은 책을 뒤져보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 곳에는 영어 ‘age’라는 단어의 어원이 희랍어 ‘Aeon’에서 근원한다고 씌어져 있다. 그러니까 ‘이언’을 주기(週期)라고 생각하면 그런대로 우리말로는 가장 가까운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점성가들은 한 집에서의 주기는 약 2천 년 정도라고 하며, 사실상 이제 물고기, 파이시즈(Pisces)의 주기가 끝나고 ‘물동이 남자, 아콰리우스(Aquarius)’의 이언이 시작되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많은 점성가들이나 ‘아즈텍(Aztec)’ 문화를 아는 사람들은 ‘파이시즈’의 주기가 2025년에 끝나고 ‘아콰리우스’ 시대가 시작된다고 하는 형편이다. 그래서 근래에 ‘새 세계질서(New World Order)’라는 말이 흔히 나오고 ‘새 시대(The New Age)’, 즉 ‘새 이언(The New Aeon)’이란 말이 유행어처럼 번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것이 신약성서의 테마이고, 하나님의 아들이 재림하여 ‘새 시대’ 또는 ‘새로운 왕국’을 건설한다는 것은 ‘아콰리우스’ 왕국에서 일어날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그러기에 많은 크리스천들이 말하는 마지막 날에 모든 인류는 각각 개인적으로 최후의 심판을 받아 지옥에 갈 사람은 지옥에 가고 영생을 얻을 사람은 영원히 행복스럽게 살 것이라는 이야기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를 우리는 다시 한 번 숙고해 볼 필요가 있다. 사실 지금까지 크리스천들이 몇 번이나 말세라는 말들을 했는가?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을 때 그랬고, 2차 대전이 있었을 때도 아마겟돈이라고 세상이 끝난다고 했는가 하면, 심지어 한국전쟁 때에도 많은 한국의 크리스천들은 말세라고 표현했다. 인간은 자기가 처해 있는 사회에서 자기가 경험하는 혹독한 경지를 말세가 되었다고 표현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 같다.
그리고 ‘age’란 말이 나온 김에 우리가 쓰는 연대의 표기에 대해서도 잠깐 말해 보자. 거의 전세계적으로 사람들은 서력기원을 사용한다. 즉, 서기 2000년이라고 하면 예수가 태어난 해부터 2천 년이 되었다고 해서 주후(主后) 2000년 또는 A.D. 2000이라고 표기한다. 물론 여기서 A.D.라는 약어는 라틴어로 ‘anno Domini’라 하여 주후를 뜻하며, 그 이전의 연대를 기원전(紀元前)이라 하여 영어로 B.C.(Before Christ)로 표현하는 것은 우리 모두 익숙한 내용일 것이다. 그런데 요즈음에 와서는 점차로 주후를 ‘C.E.’라 하고, 기원전을 ‘B.C.E.’라고 표현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여기서 ‘C.E.’는 ‘Common Era’라는 뜻으로 우리 모두가 공동으로 표기하는 연대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교, 이슬람교, 유대교가 공동으로 사용하는 연대라는 뜻일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가 왔다 간 이후부터의 세계역사는 이 사람들이 좌지우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어떤 이는 ‘공동연대(Common Era)’ 대신에 ‘Our Era’라고 표시해 ‘우리의 연대’라는 뜻으로 표현하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 곧 한국 사람들도 ‘A.D.’나 ‘B.C.’ 대신 ‘C.E.’와 ‘B.C.E.’라는 표기에 익숙해질 것으로 믿는다. 그렇다면 동양 사람인 한국인들이 여기서 깨달을 일이란, 과연 세계의 주인이 누구인가 하는 점이다. 바야흐로 세계가 ‘하나의 세계’로 줄달음질치고 있는 것은 모두 인정하는 바이다. 그러나 ‘하나의 세계’가 완성되었을 때, 한국인들은 누구를 종주민족(宗主民族) 또는 종주국(宗主國)으로 섬겨야 할 것인가를 심각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혹시 이에 대하여 좀더 깊은 고찰을 원하는 독자가 있다면 ‘그림자 정부―정치편’과 ‘그림자 정부―경제편’을 읽어 보기 바라며, 필경 앞으로 출판되리라 믿어지는 ‘시온의 칙훈서’란 책을 읽게 되면 더욱 명확한 판단을 얻게 되리라 생각한다.
아담과 이브와 여성의 위치
하나님이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마지막 날에 자기의 형상을 따라 진흙을 이겨 남자인 아담을 우선 만들고, 그의 갈비뼈를 하나 뽑아 ‘이브’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를 만들어 그의 부인으로 삼았으며, 이브가 사탄의 꾐에 걸려 먹지 말라는 지식의 열매인 사과를 따 아담과 함께 먹었기 때문에 인간이 원죄를 지어 하나님처럼 죽지 않고 영원토록 살 것인데 그렇지 못하고 죽게 되었다고 아주 어렸을 때부터 모두들 들어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이 대목은 필자가 아주 어려 처음 학교에 들어갈 나이가 됐을까 할 때에도 이 동화 같은 이야기가 믿어지지 않아 교회 전체에 대하여 두고두고 의심을 갖게 된 대목이었다. 그러나 이 이야기가 창조론의 근원이었고, 그 수많은 과학자들이 이 황당한 말을 철저하게 믿었든가 아니면 감히 발설을 못했을 것이다. 필자는 아무리 생각해도 심청이가 용궁에 갔다 왔다는 이야기보다도 더 허황된 소리인 것 같아 아무리 믿으려 해도 믿을 수 없었던 지난날이 회상되기도 하고, 지구가 둥글다고 주장했던 갈릴레오나 찰스 다윈이 진화론을 발표한 일이 얼마나 용감했던 일이었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제 나이가 들어서 좀 파고들어 보니,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는 원래 유대인들이 갖고 있던 신화를 성경 속에 집어넣은 것이라고 짐작하면서 나름대로 이해를 하게 되었다. 다른 장에서도 잠깐 소개했지만 ‘홀리 그레일(Holy Grail)’ 술잔의 전설에도 아담과 이브가 살았다는 ‘에덴동산’의 이야기가 나오고, 에덴동산 밖에도 많은 사람들이 살았다는 말이 전해진다. 여기에서 주는 인상은 마치 성벽으로 둘러싸인 옛날 서울 사대문 안의 장안처럼 에덴동산이란 곳은 아담과 이브가 살던 한정된 어떤 지역을 말한 것이며, 물론 동산 밖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고, 하나님이 아담과 이브는 만들었는지 몰라도 다른 사람들은 하나님의 창조물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고 가상하게 되었다. 그 다음에 발견한 이야기는 ‘이브’가 ‘아담’의 첫째 부인이 아니었다는 사실이었다. 눈과 귀가 번쩍 뜨이는 일이었다. 그 다음에는 여자인 이브는 아담에게 사과를 먹인 죄 때문에 남자보다 죄를 더 많이 갖고 있으며, 그 때문에 남자를 섬겨야 한다는 주류 기독교 사회의 근본사상이 뒤집어져, 실은 여자가 남자보다 더욱 귀중한 위치에 있다는 이야기를 읽을 때에는 이제는 갈 때까지 갔구나 하는 생각마저 들게 되었다.
성경 창세기 1장 27절에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를 동시에 창조했다고 하였고, 곧 이어 2장 18절이나 22절쯤에 와서는 아담을 잠재우고 갈빗대 하나를 뽑아 이브를 만들었다고 말을 바꾸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크리스천이란 사람들이 앞의 말은 없는 것으로 치고 뒤의 말만 앞세워, 이브는 아담에게서 나왔으니 여자는 남자를 섬겨야 한다는 원리를 내세우고 사과 먹은 죄를 여자에게 크게 뒤집어씌운 것이다. 이것을 보면 완전무결한 하나님이 건망증에 걸려 이랬다저랬다 횡설수설했든가, 아니면 그 중간에 들어 있는 사연이 한참 빠진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그러면 혹시 누락되었는지 모를 내용을 유대인들의 전설에서 찾아보기로 해보자. 하나님이 흙을 빚어 아담을 만들 때 동시에 여자의 형상도 만들었고, 남자는 아담, 여자는 ‘릴리스(Lilith)’라 하였다. 그런데 아담과 릴리스는 성교를 하면서 곧 싸움을 시작하였다. 릴리스는 아담 밑에 깔리지 않겠다며 꼭 위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담은 “나는 너보다 윗사람이니, 너는 내 말에 복종해야 한다”라고 대꾸하였으나, 릴리스는 “우리는 둘 다 흙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동등하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 복종해야 할 이유가 없다”고 하면서 조물주에게 입으로 형용할 수 없는 욕지거리를 하면서 하늘로 날아가 버렸다. 그러자 어처구니가 없어진 아담은 하나님에게 “우주의 주님이시여, 당신이 마련해 준 여자는 날아가 버렸습니다”라고 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세노이(Snvi)’, ‘산세노이(Snsvi)’, ‘삼만젤로프(Smnglof)’, 이렇게 세 명의 천사를 내려보내 릴리스를 다시 데려 오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세 명의 천사들은 전에 이집트 사람들을 삼켜 버린 험한 파도가 있는 바다 한가운데에서 릴리스를 찾아 영원의 신(Eternal) 하나님이 아담에게로 돌아가라 했다는 명령을 전달하였다. 그러나 릴리스는 완강히 거부하면서, “너희들은 내가 창조된 목적이 갓난아이와 어린아이들을 벌주고 약하게 하는 것인 줄 몰랐느냐? 그러니 아이가 태어나는 날로부터 남자 아이는 여드레, 여자 아이는 스무날 될 때까지 운명이 나에게 달려 있다”고 하면서 엄포를 놓았다. 그러자 화가 난 천사들은 그녀를 여자 마귀라 부르면서 만약 돌아가지 않으면 바다에 빠뜨려 죽이겠다고 협박을 했다. 그제야 그녀는 제발 살려 달라고 애원하면서, 언제고 어린아이가 있는 곳에 세 천사들의 이름을 보게 되면 해치지 않고 아이를 떠날 것을 하나님 앞에 맹세할 터이니 아담한테 돌아가게 하는 것은 단념해 달라고 애원하였다. 이에 솔깃한 천사들은 그녀를 용서하고, 아담에게 돌아가지 않는 죄로 매일 그녀의 아이들이나 영혼이나 마귀 백 명씩 죽이기로 하였다. 이런 일이 있은 후 릴리스는 사탄과 놀아나기 시작하였다. 유대인들의 고전에는 랍비들의 옛 이야기를 엮은 책들이 여럿 있다. 그 책들에는 위에 설명한 릴리스와 천사들의 이야기가 거의 실려 있으며, 어떤 것은 세 천사의 이름으로 부적을 만들어 목걸이를 만들든가 종이부적을 어린아이의 방에 붙이는 방법까지 설명되어 있을 정도이다. 그래서 유대인 풍속으로 릴리스는 밤의 마귀, 늑대 울듯 우는 귀신 또는 메얄렐스(Meyallelth) 등으로 통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릴리스를 포기한 하나님은 이번에는 아담에게 절대 복종하는 여자를 만들어야 겠다는 생각으로 아담의 갈비뼈 하나를 뽑아 여자를 만들고 이브라고 이름 지었다. 유대인 사회에서는 철저한 남존여비사상이 존재하고, 이어서 그리스도교에서도 여자는 죄의식을 남자보다 훨씬 더 많이 갖게 하고 남자가 가장이 되어 여자를 다스려야 한다는 관념은 이러한 신화에서부터 시작된 것으로 짐작된다. 문제는 유대인 사회나 그리스도교에서는 창세기를 비롯한 구약성경에 나오는 내용을 역사적인 사실로 인정하기 때문에, 원죄를 짓게 한 이브의 잘못은 남존여비사상에 정당성을 부여하였으며, 이를 움직일 수 없는 진리로 여기게 된 것이다. 그런데 사회가 변천하고 발전함에 따라 여권이 신장되어 여자들이 성직자가 되겠다고 하고 생식기능관리에 대한 자주권을 갖겠다고 하는데, 이는 교회가 지금까지 가르쳐 온 교리와 상반되는 것이다 보니 난처한 입장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그노시스’의 교리나 ‘낙 하마다’ 문서의 내용을 보면 문제는 완전히 달라진다. 특히 ‘그노시스(Gnosis)’ 사람들은 창세기를 도덕을 가르치는 역사로 보는 것이 아니고, 의미가 담긴 신화로 본다. 그들은 아담과 이브가 실제로 있었던 역사적인 인물이 아니라 인간 각자 안에 존재하는 두 가지의 심리적 원칙을 설명한 것이라 생각했다. 즉, 아담은 혼(魂-soul, psyche)을 말하며, 이브는 영(靈-spirit, pneuma)을 뜻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혼(魂)이라는 것은 감정을 내포하고 성격을 구성하는 작용을 하도록 생각하는 기능을 소유하고 있으며, 영(靈)이란 인간의 영적인 감지능력(感知能力) 자체를 말한다고 한다. 따라서 아담의 경우는 심층심리학적인 자아(自我)에서 소아(小我)를 나타낸다고 할 수 있고, 이브의 경우는 대아(大我) 또는 차원이 높은 자아(自我)를 의미한다고 달리 풀이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로 이브는 아담보다 높은 차원의 자질을 갖고 있는 것이며, 이는 정통 크리스천의 주장처럼 이브가 아담에 비하여 열등하기 때문에 종속되어야 한다는 원칙과 반대의 입장에 서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이브는 남편인 아담을 일깨워 주는 사람으로, 아담보다 차원이 높으며 영적인 기능을 가진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는 것이다. 정통 그리스도교에서는 이브가 아담의 신체 일부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이브는 아담의 속물로 되어 있지만, 그노시스에서는 깊이 잠든 아담을 이브가 깨워 주는 장면으로 소개되어 있다. ‘낙 하마다’ 문서 중 ‘요한의 아포크리폰(Apocryphon of John)’에는 이브가 ‘프로노이아(Pronoia)’라는 이름으로 소개된다. 아담이 토굴 속에 갇혀 깊은 잠에 빠져 있는데, 이브가 들어가 “깊은 잠에 들어 있는 아담이여, 내 소리를 듣거든 일어나시오”라 하였더니 아담이 깨어나 울면서 눈물을 흘렸다. “내 이름을 부르는 그대가 누구며, 옥(獄) 속에 묶여 있는 나에게 희망을 가져다주는 연유가 무엇이오?” 이브는 대답하기를 “내 이름은 순수한 광명의 ‘프로노이아’라 하며, 순결한 영(靈)의 의식(意識)이오. … 그러니 일어나 정신을 가다듬고 당신의 근본을 찾아 나서시오. 당신의 근본은 내가…”라고 하였다. 또 같은 문서 중 ‘세상의 기원에서(On the Origin of the World)’라는 책에 이브의 근본을 자세하게 소개하였다. 그녀는 생명이란 뜻을 가진 ‘조에(Zoe)’라는 신비한 이름을 갖고 있었고, 소피아(Sophia) 최고신(最高神)의 딸이면서, 예수가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다면, 이브는 어머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 주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었다.
여기서 잠깐 ‘소피아’에 대하여 이야기해 보자. 최고신(最高神) 하나님의 신성(神性-Godhead)이 삼위일체의 삼위(三位), 즉 성부, 성자, 성신이 각각 독립된 성본(聖本-hypostasis)을 갖고 있다고 하면, 소피아 신(神)의 경우는 삼위(三位)가 아니라 이위(二位) 중의 하나라고 생각할 수 있다. 즉 위(位) 하나는 로고스(Logos)라 하여 남성 성본(男性聖本-male hypostasis)을 표방한다면, 다른 하나인 소피아는 전체 신성(神性-Godhead)의 여성 성본(女性聖本-female hypostasis)을 말하는 최고신이 된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은 하나이면서 그 안에 여성적인 면이 있고 남성적인 면이 동시에 있으며, 이 두 독립된 성본(聖本)은 동일본질(同一本質-Homoousion)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인간을 만들었다면 인간도 한 사람 속에 여성과 남성의 본질이 동시에 있고, 사람에 따라서 남성이 강할 수도 있고 여성이 강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노시스 계통의 사람들이 말하는 에덴동산의 아담과 이브 이야기는 이렇게 상징적이며, 남성과 여성을 완전히 동격으로 보았다는 이야기이다. 이 관념을 다시 삼위일체에 대입(代入)시켜 본다면, 성부(聖父), 성모(聖母), 성자(聖子)가 되는 것이다. 여기서 성모는 물론 예수를 낳은 마리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소피아를 뜻하는 것이며, 창세기에서 “엘(El)” 또는 “엘로힘(Elohim)”이라 부르는 하나님이나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기 조금 전에 “엘리, 엘리(Eloi, Eloi)”라고 부른 하나님은 소피아를 말한 것인지도 모르는 일이다. 어쩌면 많은 기독교 신자들이 이게 무슨 엉뚱한 소리냐고 의아해 할지 모른다. 그러나 소피아 신에 대한 이야기는 구약성경 집회서(Books of Ecclesiasticus: 벤시락, 바룩, 지혜서)에 나와 있다. 그러나 불행히도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에서 새로 만든 성경에는 원래의 가톨릭 성경에서 일곱 권 반을 삭제해 버렸기 때문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근래에 와서는 천주교도 개신교를 따라 개신교의 성경과 절충하여 함께 사용하고 있을 정도이다. 아마도 종교개혁가들의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에 성경의 일부를 삭제했고, 근래에 와서는 천주교도 세력이 강해진 개신교와 타협하기 위해서인지 자기네 원래의 성경을 버리고 개신교의 성경과 절충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이미 만들어진 성경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빼 없애고 새로 만드는데, 애당초 없던 성경을 만들 때에는 어떠했을까? 여하튼 요즈음 성경에는 없어져 버렸지만 옛날 천주교 성경에는 나와 있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원래의 히브리어 성경에는 소피아에 대한 이야기가 아브라함, 이삭, 야곱, 사라, 미리암, 솔로몬, 노아, 아담에 대한 이야기보다 더 많이 거론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초기에는 예수가 소피아의 말씀을 전하러 이 세상에 왔다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이해하고 있었으나, 후일에 종교지도자들이 이를 바꾸어 조정해 버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약간의 흔적은 아직 조금 남아 있다. 예를 들어 잠언 1장 20~21절을 보자. 한글 성경에 “지혜가 길거리에서 부르며, 광야에서 소리를 높이며, 훤화하는 길 머리에서 소리를 지르며, 성문 어귀와 성중에서 그 소리를 발하여 가로되” 하였다. 여기서 부르고 소리지르며 말을 하는 주어는 ‘지혜’이다. 지혜가 누구인가 영어 성경을 대조해 보면 ‘그 여자(She)’로 되어 있으며, 아주 옛날 영어 성경을 뒤져보면 ‘지혜’라는 단어 대신 ‘소피아(Sophia)’가 주어로 되어 있다. 결국 영어 성경에서 ‘소피아’를 ‘지혜’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또 잠언 8장도 마찬가지이다. 여기서 말을 하는 장본인은 바로 ‘소피아’이다. 그 외에도 집회서(Ecclesiasticus) 6장 21~23절, 지혜서(Book of Wisdom) 6장 12~14절, 7장 24절, 27절에도 나와 있으니 옛날 천주교 성경(Latin Vulgate version)을 구할 수 있는 분은 읽어 보시기 바라며, 지금은 천주교도 국제 예루살렘판(New International Jerusalem Version)을 개신교와 공동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읽을 수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러한 소피아가 이브라고 부르는 자기 딸 ‘조에’를 보내 아담을 일깨우게 하였다. 아담은 신을 이해하는 영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빛의 그릇이 될 자식을 낳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브가 자기의 동반자가 될지도 모르는 아담을 보았을 때 자기와 너무 흡사하게 생겼으면서도 영(靈)이 없기에 불쌍히 여기게 되었다. 그래서 이브가 “아담이여, 일어나시오” 했을 때 아담은 곧 잠에서 깨어나고 일어나 눈을 뜨면서 말하기를 “당신을 생명의 어머니라고 부르겠소. 왜냐하면 당신이 나에게 생명을 주었기 때문이오”라 하였다. 같은 책에 또 이런 말이 나온다. 아담이 아직 잠자고 있을 때 창조주(여기서 창조주는 하나님과 다른 신이다)와 그의 친구들이 속삭이는 이야기가 있었다. “이제 이브가 오고 있으니 아담이 깨어나기 전에 교육을 좀 시키자. 이브는 아담의 갈비뼈를 뽑아 만들었다고 가르치자. 그래서 이브는 아담에게 종속되어 평생 종사(從事)해야 하고, 아담은 그 여자 위에서 주인행세를 해야 한다고 하자”라고 상의했다는 것이다. 아마도 이 이야기가 콘스탄티누스 황제 때 마음에 들었던 것 같다. 그래서 성경 속에 이 말을 집어넣고 남성우월주의 사상을 퍼뜨린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이러한 사상은 ‘그노시스’ 그리스도교에서 여자가 남자에게 생명을 집어넣어 주고 영적인 의식을 갖도록 만들어 주었기 때문에 남자는 여자에게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상에 정면으로 대립되는 이야기였다. 따라서 정치적 세력과 힘을 얻은 정통 서방(西方) 크리스천들은 그노시스계 크리스천이 좋을 리가 없었을 것이고, 그런 이유로 남달리 더욱 심한 박해를 가했을 것이라고 믿게 되는 것이다. 여자가 남자보다 우월하다는 이야기는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에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노아(Noah)와 그의 부인 노리아(Norea)의 이야기에서도 계속된다. 노아의 홍수에 관한 이야기는 역시 ‘낙 하마다’ 문서 중의 하나인 ‘집정관의 성본(執政官의 聖本-Hypostasis of the Archons-저자역)’에 따르면, 노아의 홍수로 유명한 노아의 부인 노리아(Norea)는 (일반 성경의 창세기에는 소개되어 있지 않음) 남편보다 훨씬 더 현명한 여자였다. 노리아는 이브의 딸이고, 숨겨져 있는 사실, 즉 천기(天機)를 잘 알고 있었으며, 노아가 창조주 신과 함께 엉뚱한 계획을 갖고 공모하려는 것을 못 하도록 말려 결국 노아가 지은 방주를 불태우도록 설득한 일도 있는 매우 영특한 여자였다. 또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많은 성경의 이야기가 메소포타미아, 시리아, 가나안, 이집트 등의 지방에서 만연된 신화 중에서 뽑은 이야기들이라는 점이다. 예를 들면 성경에서 말하는 야훼 또는 여호와라고 하는 하나님은 다섯 신(하나님) 중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섬겼던 신 하나만 유일신으로 하고 나머지는 존재도 하지 않는 것으로 만들어 버린 점이다. 그리고 야훼라는 신은 창조주가 아니다. 창조주는 야훼 위에 군림하고 있는 다른 신이고, 야훼가 자신을 창조주라 여기는 것은 창조주에게 큰 죄를 범하는 일이라고 한다.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님 어머니
구약성경은 아브라함 때의 이야기부터 자세하게 나오기 시작한다. 그 당시는 유대인 사회 안에서도 여호와 신 하나로 모두 통합된 사회가 아니었고, 이스라엘 사회에서도 서로 자기 종교의 세력확장을 하는 끈질긴 투쟁사가 펼쳐졌는데, 이를 이야기한 것이 구약성경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여호와를 남자 신으로 생각했던 것은 다만 한 종파의 관념이었고, 이러한 사상은 여러 가지 심각한 문제를 야기하였다. 왜냐하면 인간은 고대부터 새 생명을 탄생시킬 때에는 여자와 남자의 정기가 합해져야 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관념은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 심지어는 동양 끝 한국의 단군 이야기에서도 곰과 결혼한 환웅에게서 태어났다는 남녀의 이야기로 엮어진다. 곰과 용에 대해서도 서양과 동양이 같은, 근본 이야기가 바닥에 깔려 있는 것이다. 대개 남자 신은 태양과 연결되어 있고, 여자 신은 달과 땅과 바다와 자손번식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리하여 태양은 만물이 생성하는 땅과 물에 기(氣)를 주고 있다고 고대부터 믿고 있었고, 이러한 사상은 매우 타당하다고 믿어졌다. 그래서 거의 모든 세상 사람들은 신의 세계도 남자와 여자의 세계로 연장시켜 생각했지만, 유독 유대교나 그리스도교의 여호와 하나님만 남자로 홀로 존재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을 다시 고찰해 보면, 필경 판단하는 관점이 달라질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일반적으로 성경에서 말하는 주님 또는 하나님이란 것은 여호와(Jehovah)를 말한다고 한다. 그런데 실은 여호와라는 단어는 야훼(YHWH 또는 Yahweh)라는 이름을 영어화한 말이다. 여호와는 야훼의 자음 ‘YHWH’에 주님이라는 뜻의 단어 아도나이(Adonai)의 모음 ‘a-o-a’를 삽입하여 ‘YaHoWaH’가 되었고, 이것이 변하여 영어로 ‘여호와(Jehovah)’가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여호와라는 말을 하지 않고 하나님을 야훼라고 부르고 있는데, 히브리어로 표현하면 자음 네 개 ‘Y-H-W-H’로 표기된다. 이 자음 네 개는 신 이름 넷의 첫 글자를 따서 만든 약어이고, 네 명의 신은 한 가족인 것이다. 즉, ‘Y’는 아버지 ‘엘(El)’을 뜻하고, ‘H’는 어머니 ‘아셔라(Ashera, or Ashtoreth)’를 뜻하며, ‘W’는 아들 ‘주님(He)’을 뜻하고, 마지막으로 ‘H’는 딸 ‘아낫(Anath)’을 뜻했다. 우리는 솔로몬 왕의 신전이 유명했던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그 신전 가장 깊숙한 곳에 성스러운 중에서도 성스럽다는 방이 있었고, 이 방을 ‘아셔라(Ashera 또는 Ashtoreth)’의 자궁(子宮)으로 여겼으며, 6세기까지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방에서 아셔라를 섬겼던 것이다. 말하자면 아셔라의 사당이라 생각할 수 있다. 물론 아셔라는 남신(男神) 엘의 부인이며, 함께 부부관계를 이룬 여신이었다. 그리고 아들은 하늘의 왕이었고, 딸 아낫은 그 왕후였다. 이것이 시간이 흐름에 따라 아버지 엘과 아들은 여호와(Jehovah) 하나로 변하게 되고, 아셔라와 아낫은 남자 신 여호와의 여자 동반자 ‘셰키나(Shekinnah)’와 ‘마트로닛(Matronit)’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리하여 전설에 의하면 아낫 역시 엘의 누이였다고도 하고, 후일에도 유대인의 어떤 종파는 땅의 여신 셰키나로 섬기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셰키나가 혼사를 치르는 신방이 예루살렘 사원(Jerusalem Temple) 안에 있었으며, 이 곳이 셰키나가 거처하는 곳이었는데, 예루살렘 사원이 파괴됨으로써 그 때부터 셰키나는 지구를 방황하기 시작했고 홀로 남은 남신 여호와가 혼자 하늘을 통치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이야기는 결국 유대 민족이 남녀 신을 모두 섬기고 있던 상황에서 유일한 남신을 섬기게 됨은, 바빌론에서 다시 추방되고도 약 50년 후에나 시작된 것이라 추정할 수 있는 것이다. 즉, 느부갓네살(Nebuchadnezzar)이 이스라엘 사람들을 추방했을 때, 유대인들의 주부족인 유다와 이스라엘 사람들은 절망적인 상황에 놓여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여호와가 선택한 민족이라는 공동의 목적을 위하여 성지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자연과 만물의 영장
우리가 미신이라고 부르는 토속신앙과 다른 모든 형태의 종교를 보면, 인간은 다만 자연의 일부로 존재한다는 것이 기본관념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와 그 근본을 함께 하는 종교는 유독 우주자연의 모두가 오직 인간을 위해 존재하고, 인간은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위해 존재한다고 가르친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사회의 주도권을 갖고 있는 그리스도교를 믿는 사람들은 인간이 필요로 할 때에는 자연의 어느 것이든 파괴해도 좋다는 생각을 갖게 되는 것 같다. 무엇이든 쓰고 버리면 되는 것으로 믿고, 자연을 청소하는 일이나 자연자원을 마련해 주는 일은 인간이 필요로 하는 한 창조주가 알아서 얼마든지 공급해 준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정신으로 물과 땅을 오염시키고 지구의 사방을 파헤치며 인간에게 귀찮은 생물은 모두 없애 버리고 좋아하는 짐승들은 보이는 대로 다 잡아먹어도 하나님이 알아서 해결해 줄 것이고, 인간은 생기는 대로 다 낳아도 역시 하나님이 알아서 먹을 것을 마련해 줄 것으로 믿는다. 비록 그 아이가 태어나 자라서 다른 생각을 할 때 이단으로 죽이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다.
반면에, 인간을 자연의 일부라고 믿는 다른 모든 신앙의 가르침은 한마디로 자연에 순응하여 살라고 하는 것이다. 생선 한 마리를 잡아먹어도, 나무뿌리 하나를 캐 먹어도 하나님이 마련해 주어 고맙다는 생각 대신에, 생명을 포기해야 하는 그 생명에게 감사기도를 드리는 것이 원칙이다. 그들은 인간이 살고 있는 지구가 한정되어 있다고 믿고 있으며, 자연의 순환절차를 파괴하면 자기 자체를 파괴하는 것으로 믿어 물 한 그릇, 나무 한 그루를 사용하는 것도 자연의 생리가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만 가능하다고 믿는다.
불행하게도 그리스도의 왕국은 보다 더 파괴능력을 가진 힘을 사랑하여 왔고, 그 힘과 항상 자리를 함께 하여 오면서 투쟁의 역사로 점철되어 왔다. 그 한 예로 미국 사람들의 아메리카 점령사를 보아도 두 사상의 차이점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미국 땅을 생활터전으로 삼아 처음 정착한 사람들은 크리스천인 필그림과 청교도들이었다. 이들이 처음 도착하여 원래 살고 있던 인디언들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모두 얼어 죽고 굶어 죽었을 것이다. 인디언들은 이들에게 따뜻한 사랑의 손길을 주어, 새로 정착해 온 백인들에게 먹을 것과 잠자리를 마련해 주면서 그들이 살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이들 크리스천들이 자리를 잡고 난 다음에는 주인이 손님 되고 손님이 주인으로 바뀌어 버렸다. 그 때부터 인디언들의 처절한 생존을 위한 투쟁이 시작되며, 백인들은 인디언들을 거의 짐승으로 취급할 정도였고, 그 결과 인디언들은 거의 멸종의 위기에 처해졌던 것이다. 이런 이야기는 모두들 익히 알고 있는 이야기일 줄로 믿고, 여기서 자세한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잔소리에 불과할 것이다. 다만 19세기 초 백인들이 미국의 서해안 도시 시애틀(Seattle)이라는 지역의 땅을 빼앗을 때, 땅을 빼앗기고 유랑을 할 것인가 아니면 땅을 지키기 위해 몰살(沒殺)을 택할 것인가 하는 두 가지 선택을 놓고 그 지역의 추장 ‘시아틀’이 자기 부족 식구들과 몇몇 백인 손님을 모아 놓고 한 연설을 되씹어 보는 것이 뜻 깊은 일일 것 같아 여기 옮겨 본다. 이 글은 한 양심적인 선교사가 그 자리에 참석하여 연설을 듣고 하도 감동하여 내용을 영어로 옮겨 쓴 것이 ‘Global Outlook News’라는 잡지에 실린 것을 옮긴 것이다.
추장 시아틀
“이 땅의 따뜻한 온기와 하늘을 어떻게 사고 팔 수 있단 말입니까? 그 사고방식이 우리에게는 이상하게만 느껴집니다. 공기의 신선함이나 물의 생기를 우리가 소유하고 있지 않는데 어떻게 그것을 살 수 있단 말입니까?
우리에게는 지구의 어느 부분도 성스럽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햇빛에 반사하는 소나무 잎사귀나, 바닷가의 모래알이나, 깊은 숲 속에 맺힌 이슬방울이나, 지저귀고 우는 벌레도 모두 하나하나가 우리 민족에게는 신성한 존재로 경험됐고 기억되고 있습니다. 나무 가지가지에 골고루 퍼지는 수액(樹液)은 바로 홍인(紅人)들의 업(業)인 것입니다.
백인들은 죽어서 뭇 별 사이로 방황하고 있을 때, 그들은 그들이 태어난 곳을 잊어버립니다. 그러나 우리는 죽어서도 아름다운 이 지구를 절대로 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지구의 일부이고, 지구는 우리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향기가 가득한 꽃들은 우리의 자매들이고, 사슴이나 말이나 위대한 독수리는 모두 우리의 형제들입니다. 하늘을 찌르듯 뾰족한 바위 봉우리와, 들판의 풀잎에 담겨 있는 단물과, 망아지의 뜨거운 열기와, 그리고 인간은 모두 한 가족에 속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워싱턴에 있는 대추장이 우리 땅을 사겠다고 하는 것은 우리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는 것입니다. 그 대추장은 우리에게 다른 땅을 주어 편안하게 살 수 있게 해 주겠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그는 우리의 아버지가 되겠다는 것이며, 우리는 그의 자식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가 우리 땅을 사겠다는 제의를 신중하게 생각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그 일이 그리 간단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 땅은 우리에게는 성스러운 땅이기 때문입니다. 여울과 강을 따라 흐르며 번뜩이는 물은 단순한 물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조상의 피를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만일 이 땅을 당신네들에게 판다면 그것이 성스러운 것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며, 우리의 자손에게 호수의 맑은 물에 반사되는 번뜩임은 우리 민족이 겪은 일과 추억을 말해 주는 성스러운 것이라고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흐르는 물의 속삭임은 우리 아버지의 아버지 말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강은 우리의 목마름을 식혀 주는 우리의 형제입니다. 강은 우리의 카누를 떠내려보내 주고 우리 아이들을 먹여 줍니다. 우리가 이 땅을 판다면 당신은 강이 당신네와 우리의 형제라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리고 당신네들의 형제에게 베푸는 친절을 강에도 베풀어야 합니다. 물론 백인들이 우리의 생활방식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잘 압니다. 당신네는 한 쪽의 땅은 여기에 있으나 저기에 있으나 모두 똑같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신네들은 밤중에 와서 그 땅에 있는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 갖고 떠나 버리는 나그네와 같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당신네들에게는 지구가 형제가 아니라 다만 적(敵)으로만 간주될 따름입니다. 당신네들은 그 땅을 정복하고 나면, 또 다른 곳을 정복하러 떠나 버릴 것입니다. 그 땅에는 당신네들 조상의 무덤만 남겨 놓고, 당신네 조상이 낳은 자식들의 타고난 권리는 망각해 버릴 것입니다. 당신들은 당신들의 어머니, 형제, 지구, 하늘 같은 것들을 마치 가축이나 구슬처럼 사서 좋은 것은 뽑아 갖고 팔아 치우는 물건으로 취급합니다. 당신네들이 그 왕성한 식욕으로 땅을 삼켜 먹고 난 다음 떠나간 자리에는 사막만 남겨 놓게 됩니다.
당신네들의 방법과 우리의 방법이 다르기 때문에, 나는 무식합니다. 당신네들이 이룩해 놓은 도시는 홍인(紅人)의 눈에는 가시로만 보입니다. 필경 그 이유는 내가 야만이고 당신네들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백인들의 도시에는 조용한 곳이 없습니다. 그 곳 아무 구석에 가도 봄철에 잎사귀가 피어나는 소리를 들을 수 없으며, 벌레가 날개를 비비는 소리를 들을 수가 없습니다. 들리는 뚝딱 소리는 다만 나의 귀를 어지럽혀 줄 뿐입니다. 밤중에 외로운 소쩍새의 울음소리를 듣지 못하고, 연못가의 개구리 싸우는 소리를 듣지 못한다면 인생에서 남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 있단 말입니까? 나는 다만 홍인종일 뿐이기에 이해하지 못합니다. 인디언들은 연못 위를 스쳐 지나온 부드러운 바람소리와, 빗물에 씻겨 청신함이 솔방울의 향기를 담아 온 그 바람의 냄새를 좋아합니다.
공기라는 것은 삼라만상이 함께 호흡을 나누기 때문에 홍인종에게는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뭇 짐승과 나무와 인간, 모두들 같은 호흡을 함께 나눕니다. 백인들은 숨쉬고 있는 공기를 의식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마치 죽은 지 여러 날 되어 썩은 시체의 냄새가 배어 의식하지 못하듯이 말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이 땅을 팔았을 때, 당신네들은 공기가 우리에게 중요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공기가 유지해 주는 모든 생명의 얼을 공기는 함께 공유(共有)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우리 조상이 첫 숨을 쉬게 만든 그 바람은 그의 마지막 한숨을 몰아 쉬게 만든 바람과 같은 바람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땅을 팔게 되면, 당신네들도 우리와 함께 맛볼 수 있는 들판의 꽃으로 달콤해진 바람이 있는 이 땅을 성스럽게 여겨 다른 땅과 달리 보존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땅을 사겠다는 당신의 제의를 숙고하는 것입니다. 만약 이 땅을 판다면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백인들이 이 땅에 있는 뭇 짐승들을 형제로 여겨 달라는 것입니다.
나는 야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달리 어떻게 이해할 수 없습니다. 나는 광야에서 백인들이 기차 타고 지나가면서 총을 쏘아 죽인 수천 마리의 들소가 썩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나는 야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생존하기 위해서만 죽였던 그 들소보다 화통이 달린 철마(鐵馬)가 더 중요한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인간이 짐승이 없다면 어떤 인간이 된단 말입니까? 만일 짐승이 모두 사라진다면 인간은 영혼이 메말라서 모두 죽고 말 것입니다. 짐승에게 일어나는 일은 얼마 안 있어서 인간에게 돌아올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네들은 당신네 자식에게 당신들이 밟고 있는 땅이 우리 조상이 불타 죽은 재라고 가르쳐야 합니다. 그러면 그들은 이 땅을 존경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지구는 우리의 형제자매로 가득 차 있다고 말해 주십시오. 또 우리가 우리 자식들에게 지구는 우리를 잉태해 준 어머니라고 가르쳤다는 것을 당신네들의 자식에게도 가르쳐 주십시오. 그래서 지구가 당하는 일은 지구의 자식들이 당하게 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인간이 생명의 거미줄을 짠 것은 아닙니다. 인간이라는 것은 다만 그 거미줄의 한 가닥일 뿐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생명의 거미줄에 대하여 무엇을 하든지 그것은 자기 자신에게 하는 행동인 것입니다.
아무리 백인들 당신네들이 하나님과 친해서 친구처럼 함께 산책하고 대화한다 하더라도 인간이 공동으로 처해 있는 운명은 어쩔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 형제라는 것입니다. 두고 보십시오. 한 가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종국에 가서 백인들의 하나님이나 우리의 하나님이나 같은 하나님일 것이라는 것을 당신네들이 깨닫게 될 것입니다. 필경 당신네들은 마치 우리의 땅을 소유하듯 당신네 하나님도 소유한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그 하나님은 인간의 하나님이고 홍인종이나 백인종 모두에게 평등한 자비심을 갖고 있는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지구는 하나님에게 매우 귀중할 것입니다. 그래서 지구에 해를 입힌다는 것은 창조주에게 욕을 주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백인들도 죽을 것입니다. 아마도 다른 종족보다 먼저 죽을지도 모릅니다. 당신네들은 자신의 잠자리를 오염시켜 언젠가는 자신의 오물에 질식하게 되는 밤이 오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네들은 그렇게 희생의 죽음을 맞이함으로써, 오히려 당신네들이 이 땅에 와서 여기에 있는 홍인들을 지배하는 특별한 사명을 주었다는 그 하나님의 위덕으로 불에 타 밝은 광명을 발한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들소들은 모두 학살당해 없어지고, 야생말이 모두 길들여져 없어지고, 숲 속 깊은 곳이 육중한 인내로 가득 차고, 보이는 언덕은 말하는 전깃줄로 얼룩졌을 때 우리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기에 당신네들의 인생살이가 우리에게는 신비롭게 보여지는 것입니다. 숲이 어디 있습니까? 사라졌습니다. 독수리는 어디 있습니까? 이것도 사라졌습니다.”
미국의 지도자들은 일요일이면 온 가족을 데리고 교회에 나가 찬송가를 부르는 것이 전통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집에는 항상 성경이 있으며, 논쟁을 할 때에도 성경 구절을 인용하는 것이 지식인으로서, 지도자로서 갖추어야 할 기본조건이었다. 그러기에 미국 호텔방에 가면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항상 성경이 있어야 하는 것이 법이었다. 그리스도의 정신이 투철하여 호텔 시행법령에까지 적용하였던 것이고, 일반 생활 구석구석에 침투하여 태어나면서부터 기독교적 생활은 몸에 배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미국 사람들이 원주민 5천만을 살해하면서, 위에 묘사한 것과 같이 그들의 땅을 약탈했다.
“내게 구하라. 내가 열방을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네가 철장으로 저희를 깨뜨림이여 질그릇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
시편 2장 8절과 9절의 이야기이다. 사실 그대로 크리스천은 죽이고 재산을 빼앗아 세계를 정복한다는 말이 아닌가? ‘폰티액(Pontiac)’이란 인디언 추장은 “애초에 그들은 성경과 신앙을 갖고 와서, 우리의 땅을 빼앗고 우리의 영혼을 분쇄해 버렸다. … 그리고 이제는 우리더러 주님을 믿게 하여 구원을 받게 해 주었으니 감사하라고 한다…”라고 했는가 하면, 탄자니아의 대통령을 했던 아프리카의 석학 줄리어스 니에레레(Julius Nyerere)는 “그들이 처음 왔을 때, 우리는 땅을 갖고 있었고 그들은 성경을 갖고 있었다. 지금은 우리가 성경을 갖고 있고 그들이 땅을 갖고 있다”라고 하였다. 또 영국의 ‘올리버 트위스트’나 ‘크리스마스 캐롤’의 저자로 유명한 찰스 디킨스는 “선교사라는 사람들은 완전히 문제의 인물들이다. 그들이 도착하는 곳은 항상 올 때보다 못사는 사회가 되니까…”라고 했다.
참으로 ‘만물의 영장’이란 관념은 인간 밖의 모든 자연을 파괴할 뿐 아니라 인간 자체도 서로 파괴하여 최후의 일인이 남을 때까지 투쟁을 계속하는 정신인 것 같다. 더 웃기는 것은 성령으로 썼다는 성경이 어떻게 생겼기에 해석이 각각 달라 2만 개 이상의 종파를 만들게 했는가 하는 점이며, 하나님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책을 만들어 놓고 인간에게 믿으라고 하는 것 같다.
하나님의 아들들과 네필림
창세기는 맨 처음 1장 1절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라는 문구로부터 시작한다. 여기서 하나님이란 단어는 우리말로 하나님 즉, 하나 밖에 없는 주님이란 뜻으로 사용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나 원서에 보면 이 ‘하나님’이란 단어는 ‘엘로힘’(Elohim)으로 표현되었다 한다. 문제는 이 ‘엘로힘’이란 히브리어 단어의 뜻이다. ‘엘’(El)이라고 하는 신은 유태인들의 신이었던 것이 크리스천들의 신, 즉 하나님이 된 것이다. 이스라엘이란 이름은 ‘이스라-엘’(Isra-El)의 복합어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이란 이름은 야곱에게 하나님이 새로 지어 준 것이라고 창세기 32장을 인용하여 설명한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혼자 있는 야곱에게 이유도 없이 어떤 남자가 와서 야곱이 밤새도록 그 남자와 씨름을 하게 된다. 야곱은 그 남자를 이기지 못하게 됨을 느끼자 그 남자의 환도뼈(자지)를 잡았다. 드디어 새벽 동이 트이게 되자 그는 야곱에게 동이 밝아 오니 그만 놓아 달라고 하였다. 그러나 야곱은 자기를 축복해 주지 않으면 놓아줄 수 없다고 한다. 그 때 이 남자는 야곱에게 이름이 무엇이냐고 묻고, 야곱이라는 대답을 듣자, 하나님과 싸워 이겼으니 다시는 야곱이라 하지 말고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으로 바꾸어 부르라고 하였다. 그러니까 밤새 싸웠던 남자는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이었다는 설명이다. 마치 옛날 한국에서 도깨비와 밤새 싸웠다는 이야기를 듣는 것 같다. 왜 하나님이 이렇게 필요도 없이 모르는 남자로 변신하고 와서 야곱과 씨름을 했는가 하는 질문이 나온다. 점잔은 하나님이 마치 잡신이나 하는 이런 유치한 행동을 할 이유가 있을까? 이에 대하여 기원전 30년에서 기원후 40년까지 살았던 알렉산드리아의 ‘필로’(Philo Judaeus)라고 하는 유명한 유대인 철학자의 설명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이름이 ‘이스라-엘’(Isra-El)이라고 하는 페니키아(Phoenicia)의 한 유태인 왕이 있었다. 그는 단 하나밖에 없는 자식인 아들 ‘예우드’(Jeud)에게 관복을 입히고, 자기 대신 그를 죽여 제물로 바쳤다고 하였다. 즉, 왕의 육신에 신성한 혼이 들어가 있다는 뜻으로 이스라엘이란 이름이 지어졌다는 것이다. 따라서 성경의 야곱도 하나님을 이겼으니 야곱이라는 육신에 하나님의 신성한 혼이 들어 있다는 뜻에서 지어졌다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이스라’도 ‘이스-라’(Is-Ra)의 복합어로 이집트의 여신 ‘이시스'(Isis)와 태양신 ‘라’(Ra)의 복합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시스’와 ‘라’가 합해진 ‘엘’이라는 신이란 뜻으로 풀이한 것이다. 또 다른 설명으로는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싸우는 사람이란 뜻이라고도 한다. 여하튼 ‘엘’(El)은 남신이다. 그리고 ‘엘’이란 신의 복수가 ‘엘로힘’이 된 것이다. 그러니까 ‘엘’이라는 하나님 혼자 천지를 창조
본문을 올려달라는 요청이 있어서 계속갑니다.
전체를 올리는 것보다 함께 연구하는 의미에서 나누어 올리겠슴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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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으키는 열기(熱氣)라는 의미였다. 그리하여 루시퍼라고 이름 지어진 샤헤르는 이집트 신화에서 태양신 라(Ra)의 천국에 들어가는 북문(北門)을 지키는 수문장 신이었는데, 우주를 다스리는 여러 신들(gods) 중에 왕이 되었으며, 그가 광명을 전달하는 신이었다는 글이 페피(Pepi)의 무덤 벽에 새겨져 있다. 이 광명전달의 신은 불사(不死)의 뱀(蛇, serpent)으로 가장하여 사타(Sata)라는 이름으로 사람세상에 내려왔는데, 히브리 사람들이 히브리어로 부르면서 ‘사타’가 ‘사탄(Satan)’으로 바뀐 것이다. 그래서 사탄이란 말이 생기게 된 것이고, 그 사탄이 예수의 세계에 들어와서 루시퍼와 동화시켜 하나가 되었고, 누가복음 10장 18절에 “사탄이 하늘로서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보았노라”고 말한 예수의 표현이 들어가게 되었다.
페르시아에서는 ‘헤덴의 동산(Garden of Heden)’이란 곳에 사는 최초의 인간 부부에게 지식(知識)을 갖게 해 주었다는 ‘아리만(Ahriman)’이라는 용(蛇)이 있었다. ‘아리만’은 태양신의 쌍둥이 형제로 자신의 속성(屬性)에 후브리스(性慾의 熱氣)가 포함되어 있는 죄로 천국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그러나 예수가 태어날 때 찾아왔다는 동방박사와 유사한 현명한 도사(道士)인 마기(Magi)들은 현명한 지식을 얻기 위해 그 용을 섬겼다고 한다. 또 이것은 로마에서 프로메테우스(Prometheus)가 태양신 제우스(Zeus)의 뜻을 어기고 불을 훔쳐 인류에게 지혜를 가르쳐 주기 위해 지상에 내려왔다는 이야기와 상통한다. 각 지역의 예를 모두 들다 보면 너무 장황하다. 이러한 각 지역에서 내려오는 비슷한 신화가 알려 주는 내용은, 결국 인간에게 지식을 전해 주려고 절대적 신으로부터 광명을 가지고 자의든 타의든 간에 여하튼 지상에 내려왔다는 것이다. 어디에도 이들이 인간을 해치려고 지상에 왔다는 흔적은 없다. 오히려 인간에게 지식을 알리지 못하도록 하는 하나님의 의사를 거역하고 인간에게 지식을 주어 진리를 깨닫게 하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편에서 볼 때에는 큰 죄를 지었다 할 수 있어도 인간의 편에서 볼 때에는 고마운 존체가 된다는 이론이 성립된다. 이것은 우리가 아는 정통 그리스도교에서 가르치는 가장 근본적인 교리를 완전히 뒤엎는 이야기가 된다. 다시 강조하여 말하면 여호와 하나님이란 신은 인간을 무지몽매하게 만드는 나쁜 신인 반면, 사탄이라고 하는 루시퍼는 인간에게 지혜를 넣어 주려는, 인간을 사랑하고 인간을 위한 신이라는 것이다.
14세기에 가톨릭의 ‘도미니칸 수도원(Dominican Order in Saxony)’ 종단 소속에는 독일계 사제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 von Hochheim)라는 인기가 굉장히 높았던 사람이 있었다. 에크하르트는, 루시퍼는 지옥에 거처하고 있는 천사이며 완전히 순수한 지성(知性)을 갖고 있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많은 그노시스(Gnosis) 사람들이 루시퍼를 인간에게 지성을 주려 했던 영웅으로 취급하고, 인간의 친구이자 구세주라고 격을 높이는 반면에, 루시퍼의 이러한 행동에 질투를 느끼고 인간이 현명해지는 것을 막으려 했던 여호와 신은 나쁜 신이고 인간의 적이라고까지 지탄을 하기도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러한 종교사상이 중세기 유럽에서 지하로 번져 나가자 가톨릭에서 대단히 위험한 일이라 여겼던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거기에 에크하르트가 여러 권의 책을 써냄으로써 가톨릭 내에서 가톨릭 교리를 뒤엎는 운동을 일으킨 결과가 되었다. 그 당시는 루시퍼와 하나님과의 관계 문제로 성 토마스 계열, 스코틀랜드 종파, 성 어거스틴 계열 등이 서로 맹렬한 논쟁을 벌이던 때였다. 그러나 결국 에크하르트는 이단으로 판결되어 1326년 처형을 당했으며(편집자 주: 처형당한 사실은 확실하지는 않음), 1329년 교황 요한 22세는 칙령을 내려 그의 저서 28권을 불법화시켜 모두 없애게 만들었다. 이러한 강력한 탄압으로 누구도 감히 이런 생각을 입 밖에 내지 못하게 되었으며, 그러한 전통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근래에 와서 미국의 부시(Bush) 대통령이 이라크의 후세인을 칠 때 ‘새 세계질서(New World Order)’를 크게 외치면서 동시에 일어난 ‘새 시대 운동(New Age Movement)’으로 우후죽순 격으로 사방에서 온갖 이론이 활기를 갖기 시작했다. 여하튼 종교의 자유가 보장된 헌법이 제정되고 오랜 시간 지속된 투쟁 덕분에 이제는 그리스도교 당국의 시퍼런 서슬에 위협을 덜 느끼게 된, 이견(異見)을 가진 사람들이 차차 말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사과의 근원
원죄의 발단은 사과 때문이었다. 하필 야훼는 지식의 과일이라는 사과나무를 에덴동산에 마련하여 천진난만한 이브와 아담으로 하여금 호기심을 갖도록 만들었다. 만약 그가 인자했고 사람을 사랑했다면 어째서 자기의 형상을 따라 만들었다는 인간에게 지식을 갖지 못하도록 했으며, 또 인간이 지식을 터득하는 것이 싫으면 아예 사과나무를 없앨 것이지 왜 호기심만 잔뜩 생기게 해 놓고 못 먹도록 명령을 했는가? 이것은 하나님이 고약한 심보를 갖고 행한 일이었다. 전지전능한 하나님이었기에 이미 뱀이 와서 이브에게 어떻게 말할지 알고 있었고, 이브와 아담이 어떻게 행동할지도 뻔히 알고 있었을 터이다. 크리스천들은 아담과 이브의 판단능력과 마음가짐을 시험하려고 했다며 정당성을 주장한다. 그렇다면 결과를 다 아는 시험을 하는 하나님은 무엇인가? 아예 아담과 이브에게 미리 사탄이 할 이야기를 전해 주고 그 말을 듣지 말라고 주의를 주는 게 낫지 않았을까? 어떤 식으로 따지든 하나님은 인간이 원죄를 짓도록 이미 프로그램을 짜 놓았다는 결론으로밖에 달리 해석할 수가 없다. 따라서 사과를 먹은 죄는 아담과 이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에게 있는데 사람에게 뒤집어씌운 꼴이 된다. 이러한 착한 인간에게 모함을 한 것은 여호와 하나님이었고, 이를 깨치게 해 주려고 뱀의 형상으로 세상에 왔던 사탄이란 존체에게 인간은 고마움을 느껴야 한다는 논리를 위에서 잠깐 설명했다. 그렇다면 이 문제의 사과는 그 근원이 하나님의 성경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오랫동안 세상에 내려오던 전설을 그리스도교가 채택을 했고, 마치 그리스도교에서 창조된 이야기처럼 만들기 위해 이미 존재하고 있던 다른 믿음의 체계를 이단이란 이름으로 말살하려 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사과는 인도-유럽 문화권(Indo-European culture) 전체에서는 불사영원(不死永遠)한 여신(女神)의 심장(心臟)으로 여기고 성스러운 과일로 믿어 왔다. 그래서 중국에서 신선들이 살았다는 무릉도원(武陵桃源)에 해당하는, 서양의 영생(永生)과 관계되는 정원에는 사과가 항상 있었던 것이다. 켈트(Celt) 민족은 서쪽 바다 건너편에 있다는 이 낙원을 ‘아발론(Avalon)’, 즉 ‘사과의 땅’이라 불러 주검의 여왕 ‘모간(Morgan)’이 통치했다고 믿었다. 그래서 아일랜드의 왕들은 여신에게서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신비의 사과를 받았으며, 석양에 어둠이 드리울 때 그 여신과 함께 하기 위해 어디론가 떠났다는 전설이 있으며, 삼위일체의 여신이 세 명의 여왕으로 둔갑하여 아더 왕(King Arthur)에게 와서 그를 ‘아발론(Avalon)’으로 데려갔다는 전설도 나오게 되는 것이다. 스칸디나비아 지역의 ‘노스(Norse)’ 민족은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는 사과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물건이라고 생각하여 죽은 사람을 묻을 때 사과를 함께 묻었다. 그들은 그들의 여신 ‘인둔(Indun)’이 서쪽 어느 곳에 사과밭을 갖고 있어 사과를 생산하였고, 그것을 남자 신들에게 먹여 그 남신들이 죽지 않고 계속 살 수 있도록 해 주었다고 믿었다. 또 독일의 작자 미상의 고대 신화의 서사시 ‘니벨룽겐의 노래(Nibelungenlied)’에 나오는 주인공 ‘지크프리트(Siegfried)’의 증조할머니도 사과를 먹고 잉태했다는 전설이 있다. 그리고 동짓날(크리스마스)의 풍습으로 통돼지를 구울 때에도 돼지의 입에 사과를 물렸는데, 이는 돼지가 다시 태어날 내세에 새로 갖게 될 육신의 심장이 되라고 사과를 물렸던 것이다. 희랍 신화에서도 여신 헤라(Hera)가 서쪽에 신비의 사과밭을 갖고 뱀 또는 용으로 하여금 생명의 과일나무를 지키도록 했다. 그래서 희랍에는 최상의 여신이 자기를 섬기는 신도에게 생명을 준다는 뜻으로 사과를 주는 성상(聖像)이 있었다. 이 그림은 사과나무가 있고 그 뒤에 뱀이 있으며 그 나무 밑에서 ‘헤라’가 아담과 이브처럼 생긴 사람에게 사과를 건네주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이러한 여러 근거로 그레이브스(G.M. Graves)란 학자는 ‘디 보라진(de Voragine)’이란 저서에서 성경은 아담과 이브와 뱀과 사과의 이야기를 고의적으로 변조시켰다고 주장하였다. 로마에서도 물론 마찬가지이다. 사과-어머니 여신을 ‘포모나(Pomona)’라 불렀으며, ‘폼(pom)’이란 말은 사과를 말했다. 따라서 로마의 잔칫상을 차리는 형식을 한마디로 ‘계란에서 사과까지(ab ovo usque mala)’라고 표현했다. 즉 ‘창조로 시작하여 완성으로 끝내다’라는 상징으로 마지막에 사과를 먹었으며, 로마의 꼭두각시 격이었던 헤롯 왕도 식사를 로마식으로 한다며 식사 끝에는 반드시 사과를 먹었다고 한다.
그런데 사과가 이런 대접을 받게 된 이유는 사과를 가로로 잘랐을 때 그 중심에 ‘펜타그람(Pentagram)’, 즉 오각별이 나오게 되기 때문이다. 오각별이란 꼭지가 다섯 개 달린 별인데 세상의 혼(魂)을 상징한다. 특히 프리메이슨(Freemason)이 설명하는 그 심오한 뜻으로는 인간 본연을 초월한 의식을 나타내 주는 징표(徵表)이며, 예수의 탄생을 발견한 동방박사와 같은 현자(賢者)들에게 비추어지는 별이며, 천기(天機)를 알려 주는 별이며, 왕중왕(王中王)의 완전한 지능(知能)을 말해 주는 표상(表象)인 것이며, 그의 거룩한 말씀이 형체로 보이는 것이며, 모든 천기(天機)의 상징이며, 신령(神靈)을 섬기는 모든 이들의 우상(偶像) 중의 우상이며, 예언(預言)을 풀어 주는 ‘카발라’의 모든 열쇠가 그 상징 속에 들어 있으며, 그 상징은 우주(宇宙)의 삼라만상(森羅萬象)을 한데 묶는 절대적 결정(結晶)이라 하였다. 또 이집트에서는 위의 설명과 더불어 펜타그람이 지하(地下)의 자궁(子宮)을 뜻하였으며, 이 자궁에서 잉태하여 부활을 가능케 해 주었다고 믿었다. 이런 심오한 뜻을 갖고 있는 오각별이 사과의 중심, 즉 코어(Kore 또는 Core)에 들어 있는데, 그 코어라는 것은 지상(地上)의 어머니 신 데메테르(Demeter)의 심장을 말하며, 깊이 숨겨져 있는 동정녀(童貞女)를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순결한 동정녀가 가장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고 땅의 지상신인 데메테르 여신의 심장이 간직되어 있는 표징인 펜타그람은, 생명과 영생을 뜻하고 전지(全知)의 지능을 얻을 수 있는 과일이라는 뜻이다. 그런 이유로 집시나 위치들은 사과를 항상 가로로 잘라먹는다. 이상에서 우리가 익히 아는 동정녀가 예수를 잉태했다는 이야기가 신화에 근거를 두고 있고, 데메테르 여신의 코어에서 동정녀 잉태가 된 것을 상징한 이야기가 성경의 성모 마리아가 되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과의 전설과 종교적 믿음으로 인하여 서양 각지에서는 이와 연관된 여러 가지 이야기와 풍습과 제식 등이 많이 있다. 예를 하나 들면 믿음이 각별한 집시 부부가 성교하기 전 예식으로 펜타그람이 나오도록 사과를 조심스럽게 잘라 신비의 기(氣)를 얻는 영양식으로 함께 먹는 풍습이 있는가 하면, 켈트 사회에서는 사과가 성스러운 남녀 혼합과 생명의 탄생을 상징하기 때문에 결혼식에 중요하게 사용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사과라는 것이 성경에서 아담과 이브에게 소개되기 훨씬 이전부터 서양에서는 매우 의미 깊은 과일이었다는 것을 이해하고 나서, 성경을 다시 음미해 보는 것이 어떨까 한다.
인자(人子-Son of Man)
마태복음 26장 64절에 “미래에는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른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한 것을 비롯하여 인자(人子)라는 말이 신약에서 99번이나 나온다고 한다. 인자라는 말의 뜻은 직역하면 ‘사람(남자-man)의 아들’이고, 예수가 자기 자신을 가리켜 부른 말이라 한다. 여기서 약간 혼동이 되는 점은 하나님의 아들이 자신을 남자의 아들이라고 부른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고, 구약으로 가면 ‘아들’이란 말은 출애굽기 4장 22절 등의 예를 들어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가리킨 집합적인 명사라고 교회에서 설명하기도 한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해해야 할 것은 예수가 한 말은 예수 자신이 창작한 새 용어가 아니고, 이미 그 사회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었으며, 일반인들이 그 뜻을 별도로 설명하지 않아도 모두 알아들을 수 있는 용어를 사용했으리라는 점이다. 만약 그가 새 용어를 창작해 냈다면, 분명 사도들에게 그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었다고 설명했을 것이라 믿는다. 그렇다면 인자, 즉 ‘남자의 아들(Son of Man)’이란 용어가 어떤 뜻으로 그 사회에서 통용되었는가를 먼저 알아보자.
원래 ‘남자의 아들’이란 말은 예수 훨씬 이전에 인도의 힌두교에서 ‘나라야나(Narayana)’라는 용어로서, ‘비슈누(Vishnu)’ 신을 뜻했던 말이 전파되어 헬레니즘 문화권 전체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리고 예수가 살던 팔레스타인 지역은 물론 헬레니즘 문화의 영향 아래 있었고, 그리스도교 자체가 온통 그 영향을 받았던 것이다. 이 단어의 원래의 의미는 ‘비슈누’라는 신이 완전히 사람(남자)의 형상으로 어머니라는 여자와 관계없이 남자들에 의하여 만들어졌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찬송가를 보면 비슈누는 얼마 후에 ‘칼리(Kali)’라는 어머니 상을 만들어 그녀의 신성함을 신봉하였고, 신(일반적인)이란 칼리의 모성(母性)을 근본으로 만들어진 창조물이라 하였다. 이러한 근원에서 ‘남자의 아들’은 페르시아 문화권에서는 그들의 메시아를 뜻하게 되었고, 이것이 또 에세네 부족에게는 구세주 그리스도라는 관념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따라서 페르시아나 에세네 민족에게서 이 용어는 ‘물(水)과 신령’으로 사람(남자-man)에 의하여 태어났으며, 이렇게 태어난 남자, 즉 아들은 죽지 않고 영생을 하게 된다는 의미였다. 이 말은 여자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사망이란 숙명을 당연히 갖게 된다는 뜻도 함께 포함하고 있다 할 것이다. 그래서 페르시아의 ‘사람의 아들’ 인자는 힌두교의 베다(Veda) 경전에 나오는 야마(Yama)라는 이름에서 비롯되어 “찬란한 이마(Yima the Splendid)”라고 불려지게 되었으며, “죽음의 신(Lord of Death)”으로도 불려졌고, “좋은 목자(the good shepherd)” 또는 “태어난 자 중 가장 영광스러운 이”라고도 불려지게 되었으며, 그는 홀로 인간과 짐승들에게 영생을 부여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고 믿었다. 또 예수가 마태복음 16장 27절에서 마지막 심판날에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라고 한 대목에서 사람의 아들 인자의 아버지가 과연 누구인지 성서학자들은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데, 이는 필경 페르시아의 종말론이 성경으로 살짝 삽입되면서 이렇게 애매한 문구가 섞여 들어갔으리란 추측이 가능하기도 하다.
연옥(煉獄)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연옥(煉獄)은 불교에서 따 온 사상이다. 그리스도교가 생기기 수백 년 전에 불교의 승려들은 지하세계에서 속죄하느라 고생하고 있는 조상의 영혼을 구해 극락으로 가도록 할 수 있다고 했다. 그렇게 하는 방법은 후손이 지성으로 절에 가서 불공을 드리고, 즉 중에게 돈이나 재물을 바치고, 이들을 대신하여 중이 제사를 지내고 특별한 주문을 외우면 가능한 것이라 했다. 이렇게 성직자가 개입해서 그들에게 주어진 특별한 권능을 이용하여 어떤 제식을 거치면, 죽어서 저주를 받고 고생하는 영혼이라도 천당으로 보낼 수 있다는 아이디어가 마음에 들었던 것 같다. 이러한 사고방식과 토속종교에서 행하던 관념을 합하여 만들어 낸 것이 연옥이다.
그러면 연옥(purgatory)이라는 말이 생긴 출처와 토속신앙의 어떤 것이 연옥의 근원이 되었는지 살펴보자. 토속종교를 크리스천들은 물론 이단이라고 했고, 그들을 ‘파간(pagan)’이라고 불렀다. ‘파간’이란 말은 원래 ‘파구스(pagus)’라는 라틴어로 ‘시골사람’이란 뜻이었는데, 나중에 대개가 크리스천화가 된 다음 아직도 크리스천이 안 되고 속된 세상에 사는, 즉 개화하지 못한 사람이란 뜻으로 사용된 것이 그 유래이다. 그래서 지금도 크리스천이 아니고 다른 이상한 것을 믿으면 모두 ‘파간’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런데 유럽 전체의 파간들은 자기네들의 사원 깊숙한 곳에 땅을 파고 항상 창조주(여성-creatress)의 자궁(子宮)을 의미하는 작은 방을 차려 놓았다. 그리고 이 방을 구덩이(pit 또는 grove)라고도 하고, ‘헬렐(Helel, 註: 지옥이란 말 Hell의 어원이기도 하다)’이라고도 하였으며, ‘아바돈(Abaddon)’이라고도 불렀다. 이에 대한 것은 ‘사탄의 근원’에서도 설명하였다. 그런데 그리스도교에서 신품성사(神品聖事)나 목사안수를 받는 관념과 비슷하게 파간 승려가 되는 성품을 올리는 제식의 순서로서 밤에 죽어서 땅에 묻히는 상징으로 이 ‘아바돈’이라는 구덩이 방에 들어갔고, 이 곳에서 하룻밤을 지내면서 자궁 속의 태아처럼 웅크린 자세로 있다가 다음날 아침에 창조주 여신의 자궁에서 다시 태어나 새 생명을 갖게 되는 장면을 연출했던 것이다. 그리고 처음 죽어서 그 안에 들어가면 심판을 받아 천당에 가기 위해 다시 태어날 자격이 있나 없나를 가린다. 물론 이 경우에는 모두 천당갈 자격이 있게 될 것이다. 결국 이 심판을 받고 난 다음날 다시 태어난다는 것을 죽은 후 얼마 있다 천당에 가는 것과 연결을 지으면 이 구덩이는 연옥에 해당되는 것이고, 다시 재생을 못할 경우에는 이 구덩이가 지옥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교 초기에는 그리스도교가 이 관습을 그대로 받아, 이 구덩이가 있는 사원을 ‘연옥(purgatory)’이라고 불렀다. 중세기에 가장 유명했던 연옥은 아일랜드의 도네갈(Donegal)에 있는 ‘락 덕(Lough Derg)’이란 곳의 사원이었다. 여기에는 작은 동굴이 있는데, 순례자들이 이 곳을 찾아와 동굴 속에 들어가 맨발과 무릎으로 기도를 드리고 고행을 하며 만 하루 동안 피정(避靜)을 드리는 곳으로 유명하다. 이 곳은 12세기 성 패트릭(St. Patrick)이 ‘퍼가토리(연옥)’라고 이름을 지은 성당이기 때문에, 당시 유럽 대륙에서 많은 순례자가 찾아와 유명해진 곳이다. 또한 13세기 중세의 유럽 지도에 유일하게 기록된 아일랜드의 지명일 정도로 유명했다. 이 곳에 하도 많은 신도들이 순례하였기 때문에, 1497년 교황 알렉산더 6세가 그 곳은 마귀의 집이니 폐쇄하라고 명령을 내렸지만 사람들이 계속 찾아와서 1790년까지 사용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14세기 초 단테의 작품인 ‘신곡(神曲-La Divina Comedia)’에 보면 연옥이 땅 구덩이에 있지 않고 산꼭대기에 있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이 산은 결혼식 때 사용하는 케이크처럼 층으로 되어 있었다. 결혼식 피로연에서 사용하는 케이크는 7층으로 되어 있고, 그 꼭대기에 신랑·신부가 함께 서 있는 것이 원칙이다. 이것은 바빌로니아에서 말하는 ‘지구라트(Ziggurat)’라고 하는 산을 모방한 것인데, 당시는 태양계에 7개의 행성이 있다 하여 7층으로 만들어졌고, 그 꼭대기에는 왕(王)과 여신이 나체로 교접하는 상(像)이 있어 성스러운 결혼을 상징하였으며, 그 꼭대기가 소위 지상의 낙원이라고 했던 것이다. 이것이 현세에 들어와서 나체의 두 남녀 교접상(交接像) 대신 신랑·신부의 상(像)을 올려놓게 된 것이다. ‘지구라트’가 뜻하는 바는 일곱 단계의 산을 올라가는 노력으로 값을 치르고, 정상에 도달하면 그 곳이 ‘사랑의 낙원(Love Paradise)’이라는 것이었다. 성경과는 관련을 찾을 수 없는 이 풍습이 어떻게 해서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는가? 필경 크리스천들도 사랑의 낙원이 좋았던 모양이다. 여하튼 그리스도교에서 연옥이란 관념을 채택한 것은 기정사실이다. 그것이 좀 이상했던지 하나의 에피소드가 나돌기도 하였다. 예를 들면 교황 그레고리는 트라얀(Trajan) 황제를 연옥에서 구하여 천당에 가도록 기도하여 성공했다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레고리 교황이 천당에 보내지 말아야 할 사람을 천당에 보냈다고 그 죄에 대한 벌을 주었다. 그 결과 그레고리 교황은 통풍(通風)에 걸리고 열이 나며 복부가 몹시 아파 고생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한편 개신교에서는 구원을 매매하는 행위는 있을 수 없다고 보았다. 그래서 가톨릭의 아이디어를 나쁘게 생각하여 연옥이란 것을 아예 없애 버렸다. 당시 우스갯소리로 영국의 스콧(Reginald Scot)이라는 사람이 한 말이 생각난다.
“영국에는 산 사람 보고 연옥에서 나오게 해 달라고 귀찮게 졸라대는 죽은 귀신이 몽땅 없어졌다. 그 귀신들이 어디로 갔고, 아우성은 누가 듣고, 누가 그 귀신들을 쳐다보고 있냐고? 또 어디서 귀신들이 고통스럽다고 신음소리를 내고 있냐고? 그 귀신들은 몽땅 로마로 가 버렸다. 왜냐하면 영국은 미사 드리는 돈이 너무 많이 들어서 ….”
지옥
지옥이란 말은 영어로 ‘헬(Hell)’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어둠 또는 지하(地下)의 세상을 관장한다는 여신 ‘헬(Hel)’의 이름에서 따 왔다고 한다. 여신 ‘헬(Hel)’이란 이름은 위에서 설명한 ‘아셔라’ 또는 ‘아스타테’ 또는 ‘아스타롯(Astaroth)’이라고 불리는 하나님 어머니의 별명으로 불렀던 것이며, 그 어휘는 ‘헬렐(Helel)’에서 나왔다고 했다. ‘헬렐’이란 움푹 들어간 곳(grove) 또는 웅덩이(pit)를 말했고, 이는 즉 음부 또는 요니(yoni)를 뜻한다고 했다. ‘요니’라는 어휘와 ‘팰러스(phallus)’ 또는 ‘링암(Lingam)’ 등의 남녀 성기(性器)를 표현하는 말은 고대로부터의 인간 신앙생활에서 떼어놓을 수 없는 단어이고 관념이었다. 여기서 ‘요니’는 여성됨을 상징하는 보지를 말하고, ‘팰러스’나 ‘링암’은 자지를 말한다. 그래서 지옥이라는 명사 ‘헬’은 하나님 어머니의 보지, 즉 자궁을 뜻하는 것이다. 자궁이란 곳은 새로운 생명을 낳기 위해 잉태하는 곳이다. 따라서 죽은 다음에 지옥에 간다는 말은 하나님 어머니의 자궁 속으로 들어가 다시 잉태되어 새로운 육신으로 세상에 다시 태어나는 과정에 불과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죽은 다음에 환생하기 위해 가는 곳이다. 살아생전에 좋은 일을 하고 하나님을 잘 믿어 천당에 가고 영생을 얻는다는 것은 불교식으로 말하면 해탈을 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고, 서양 관념으로 말하면 모든 진리를 깨달았다는 뜻에서 ‘광명을 얻은 자’, 즉 ‘일루미네이티드(illuminated)’라고 불렀다. 이 사람들은 영생을 얻었으니 당연히 다시 태어나기 위해 하나님 어머니의 자궁으로 들어갈 필요가 없는 사람들이고, 따라서 그들은 소위 천당이라고 하는 하나님이나 신령들이 노니는 하늘나라로 간다.
자궁에서 환생하고 새로 태어난다는 개념은 여러 면에 적용시킬 수 있다. 크리스천들은 매주 일요일에 교회에 간다. 교회에 간다는 것도 자궁으로 들어간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왜냐하면 교회건물 자체가 자궁이기 때문이다. 교회라는 자궁 속에 들어가 목사나 신부의 강론을 듣고 하나님을 섬기고 나면 정신적으로 또는 신앙적으로 거듭 태어난다. 그래서 교회건물을 보면 ‘요니’의 상징이 무수하게 많다. 근래에 와서는 사람들이 상징이라는 것을 거의 모르고 있기 때문에 소위 현대식 건축풍 또는 미술적인 감각을 살려 교회를 디자인하고 건축하고 있지만, 옛날의 교회건물을 보면 구석구석이 의미 있는 상징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은 교회건물의 출입문이나 들창의 모양인데, 이들은 아치(arch)처럼 생기고 대개는 상부 중앙에 꼭지가 있다. 이는 마치 볼록렌즈를 측면에서 본 모양 또는 은행 열매의 한 단면모양의 일부와 같다. 이런 모티프(motif)를 ‘만돌라(mandorla)’라고 부르며, 어떤 이는 생선접시 모양으로 생겼다 하여 ‘베시카 피시스(vesica piscis)’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원래는 요니(yoni)를 상징한 것이다. 그래서 교회에 가면 위에 말한 문(門)의 모양이나, 성화(聖畵)의 틀 모양이나, 심지어는 미사를 드리는 신부의 의상까지도 ‘만돌라’형을 본떴던 것이다. 그리스도교가 이렇게 된 이유는 그리스도교가 탄생하기 이전의 전 유럽에 퍼진 토속종교의 성직자들은 거의 여자였고, 여성 성기 요니가 남자 성기보다 죽음과 탄생에 관련되는 관념에 더 가까운 연관을 가졌기 때문에 생겨난 것으로 보여진다. 물론 ‘드루이즘(Druism)’이라고 하여 남자 승려도 많이 있었지만 이는 한 종파에 불과할 정도였고, 그 당시는 여자와 남자가 동등한 자격으로 함께 사회의 중요한 직책을 맡아 살고 있는 때였다. 중앙 유럽을 차지하고 있었던 고올(Gaul)에서나 북부 유럽의 노스(Norse) 문화권에서나 서부 유럽의 켈트(Celt) 문화권에서는 모두 신앙과 병 관리는 거의 여자들이 하고 있었다. 마녀사냥을 시작하게 된 동기도 그리스도교를 전파하고 절대 통치권을 갖기 위한 과정에 이런 여자들이 큰 방해물이 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는 그 여자들이 하던 풍습이나 제식을 많이 흡수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교 제사장의 의상에서부터 건물모양까지 요니의 모양을 받아들여 현대에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오래된 서양 건물, 특히 교회건물에 있는 사람형상이나 짐승형상이나 기둥이나 모서리 장식 등을 유심히 관찰하여 파고들면 일반 사람들이 모르고 있던 많은 비밀들을 알아내게 될 것이다. 이러한 것은 가문의 문장(紋章-coat of arms), 동네 이름, 사람 이름 등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고대에는 사람들이 죽으면 거의 지옥, 즉 ‘헬’에 가게 된다고 믿었고, 그 지옥이란 곳은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영원히 불 속에서 고생하는 곳이 아니라 다시 환생할 때까지 머무는 곳이고, 심지어는 번뇌와 근심걱정이 없는 동화에 나오는 천진난만한 세상이라고 믿기까지 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 교회에서 말하는 영원히 불 속에서 참기 어려운 고통을 겪어야 한다는 지옥의 이론은 어디서 왔는가? 학자들은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Zoroastrianism)’의 사상에서 왔다고 한다. 조로아스터교는 남성(男性)을 근본으로 하는 사상이어서 남성적인 고행(苦行)으로 아픔을 견디는 일이 하나님을 만족시키고 가까이 접근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이에 상반되는 여성적이란 사고(思考)는 인생을 즐기는 쾌락과 극단적 고행에서 탈피하여 심령(心靈)적 성숙을 지향하는 것이라 믿었던 것이다. 어떤 학자는 조로아스터교에서 지옥을 이렇게 험한 곳으로 소개한 이유는 여자들에게 위협을 주기 위함이라고도 한다. 이유는 여자들은 남편의 충복이 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지 못한 여자는 지옥에 가서 쇠창살로 유방을 찢어 열어 놓고, 새빨갛게 달구어진 스토브를 혓바닥으로 핥게 되며, 한 다리만 묶어 매달고 뱀과 개미와 벌레들이 육신의 모든 구멍을 드나들게 하는 형벌을 받는다고 했다. 그러나 조로아스터교에서도 이런 고통이 영원하다고는 하지 않았다. 지옥에서 영원히 고통을 받는다는 이야기는 완전히 그리스도교의 창작물인 것으로 알고 있다.
아마겟돈
다른 장에서도 간헐적으로 소개했듯이 에세네의 신앙의 근본은, 우주는 어둠과 광명의 궁극적인 신이 지배한다는 것이다. 광명의 신은 진리와 올바름의 신이고 선(善)의 신이며, 어둠의 신은 악마이고 사악한 행동만 하는 악(惡)의 신이다. 따라서 선과 악의 신이 서로 득세하고 열세하는 관계는 천체의 움직임에 따라 변하게 되며, 인간도 태어날 때의 천체의 위치에 따라 선과 악의 배합이 결정된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밝음과 어둠의 싸움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영원히 존재하게 되며, 사람에 따라 본질은 어둠이 더 많을 수도 있고 밝음이 더 많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종국에 가서는 광명의 신이 세상을 통치하게 되지만, 광명의 신을 찾아가는 길은 행하기 어려운 오랫동안의 열성과 노력이 필요하다고 했다. 이러한 오랜 노력의 결과는 ‘정의의 때(正義之時-Time of Justification)’, 후에 ‘심판의 날(Day of Judgement)’로 이름을 바꾼, 그 날이 왔을 때 효험을 보게 된다. 그러나 ‘심판의 날’이 가까워 오면서, 즉 소위 ‘유혹의 시기(Period of Temptation)’라 하여 더욱 많은 사람들이 유혹에 빠져 어둠의 신은 대단한 세력을 구축하게 된다고 믿었다. 이 때 광명의 길을 따르는 사람들은 “우리를 악마로부터 멀리하여 유혹에 빠지지 말게 해 주시옵소서”라고 기도를 드리며, 현명한 판단을 해야 한다. 그래서 그들은 전통적으로 어둠의 신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뜻으로 ‘벨리알(Belial)’이라 불렀고, ‘벨리알’의 자식들이 신명기 13장 13절에서 말하는 여호와 이외의 다른 신들을 섬긴다고 하였다. 광명의 신은 지상에 일곱 계급으로 나누어진 대행자를 두었고, 이는 ‘메노라(Menorah)’라고 부르는 일곱 가지가 뻗친 촛대로 상징된다. 이 중에서 가장 높은 지위는 다윗 왕조에 와서 사독(Zadok)이라는 승려계급으로 광명, 즉 빛과 가장 가까운 계급이었고 천사장 ‘미카엘(Michael)’로 상징되었다. 이에 대응하여 어둠의 신도 지상에 자기 대행자들을 배치하였다. 그 책임 되는 신을 ‘사탄(Satan)’이라고 부른다.
그리하여 빛과 어둠, 즉 선과 악, 두 신의 군대가 마지막에 결전하는 곳이 ‘아마겟돈(Armageddon-하르마겟돈)’이라고 요한계시록(묵시록) 16장 16절에 명시하였다. 아마겟돈 또는 천주교에서 발음하는 식의 하르마겟돈이라는 이름은 갈릴리 언덕의 남쪽에 있는 예즈릴(Jezreel) 평야에 있는 요새로, 역사적으로 전쟁을 많이 치른 일이 있는 둔덕인데 원래 이름은 ‘하르 메기도(Har Megiddo)’, 즉 ‘메기도 둔덕(the Heights of Megiddo)’이란 뜻이었다. 사해의 문서 중 ‘전쟁의 서(War Scroll)’를 보면 빛을 따르는 사람들과 어둠의 아들들이 투쟁하는 이야기가 자세히 나온다. 빛을 따르는 사람들이란 이스라엘 민족을 말하는 것이고, 어둠의 아들들이란 ‘키팀(Kittim)’이라 하여 로마인들과 그들을 따르는 여러 종류의 파벌들을 지칭하였다. 그리고 최종 결전장에서 전능(全能)의 사탄이 어떻게 행동하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고, 마지막 심판에 가서는 빛의 하나님과 대결할 정도로 막대한 힘을 가졌다는 사탄 이야기가 자취를 감추어 버리고, 전쟁은 인간사회로 둔갑하여 빛을 따르는 이스라엘 군대와 어둠을 따른다는 로마 군대의 최후 접전이 되는 것이다. 이런 애초의 이야기로 시작해 많은 시간이 경과한 후에 그리스도교의 주류파에 의하여 ‘하르 메기도’의 지역적인 인간전쟁 이야기를 따서 전세계적인 규모로 바꾸고, 빛의 하나님과 어둠의 사탄과의 마지막 결전으로 최후의 심판을 장식하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기본골자가 만들어진 것이다.
점성학의 영향
열 두(12) 띠
동양의 역리학(易理學)에서 쥐띠, 소띠, 호랑이띠 등 열 두 짐승으로 표현되는 띠는 서양의 점성학에서 짐승 대신 열 두 개의 별자리로 표현된다. 즉 양(Aries), 소(Taurus), 쌍둥이(Gemini), 게(Cancer), 사자(Leo), 처녀(Virgo), 저울(Scales), 전갈(Scorpion), 궁수(Archer), 염소(Capricorn), 물동이 남자(Aquarius, 물병자리, 보병궁), 물고기(Pisces), 이렇게 열 두 가지 상징이다. 이 12자리에 태양을 합하면 13이라는 숫자가 나온다. 그리고 예수도 12제자와 합하면 13이다.
1년이 사계절로 되어 있고 12달로 되어 있다는 것은 태양신 하느님의 한 주기를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가 죽기 전날에 차린 ‘최후의 만찬’의 그림을 보면 열 두 제자가 세 명씩 그룹을 짜 네 쪽으로 분리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리고 원(圓)을 전체 또는 하나라고 생각하고, 그 안에 수학의 방정식 그래프 X축과 Y축을 그리듯 수직과 수평의 십자를 집어넣으면 원이 4등분된다. 한쪽 선을 동지(冬至)라고 하면 반대쪽은 하지(夏至)가 될 것이며, 또 다른 한 변을 추분(秋分)선이라 하면 반대쪽은 춘분(春分)선이 될 것이다. 이것이 점성학에서 열 두 자리를 말하는 역학의 도표(The Cross of Zodiac)이고, 그리스도교에서 사용하는 십자가이다. 독자들은 십자가의 교차점을 중심으로 원이 그려져 있는 그림이나 실물을 보았을 것이다. 흔히 이것을 ‘켈트(Celtic Cross)’의 십자가라고 부른다. 따라서 십자가의 근원은 예수의 순교 훨씬 이전으로 그 유래를 거슬러 올라갈 수 있게 된다.
성경 이야기를 훑어보면 ‘열 둘’이란 말을 많이 접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왜 ‘열 둘’이란 숫자를 택했다는 설명은 없다. 이에 대한 설명은 점성학의 설명을 들으면 쉽게 해석이 될 것이다.
물고기 상징
우리는 옛날 크리스천들이 로마에서 박해를 받을 때 신자들끼리 서로 교환하던 암호가 물고기였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또 흔히 교황을 어부로 상징하는 이야기도 많이 들었다. 그러나 왜 물고기를 크리스천의 상징으로 사용하는지의 이유에 대하여는 설명해 주는 사람들을 만나기가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즉 예수는 하나님이란 뜻이고 그리스도는 구세주란 뜻인데, 이 희랍어의 머리말만 따서 연결하면 ‘익투수(ichthus: Iesous CHristos THeou Uios Soter =Jesus Christ, Son of God, Savior)’라는 단어가 되어 이는 희랍어로 물고기라는 뜻이 된다는 이야기가 있다. 또 점성가들에 의하면, 예수는 ‘물고기(Pisces)’띠 해(年), 물고기띠 달(月)에 출생하였다고도 하여 물고기 두 마리를 그리스도교의 상징으로 삼는다고도 한다. 그러나 점성학의 열 두 띠의 표식은 예수 훨씬 이전에 이미 정해져 있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마태복음 14장 17절과 19절에 두 마리의 물고기 이야기가 나온다. 두 마리의 물고기는 위에서 말한 것처럼 점성학에서 말하는 물고기띠의 상징이다. 점성학에서는 원을 사등분하고 이를 다시 30도씩 셋으로 쪼개 전체가 열둘의 띠로 나누어지며, 각 띠가 장악하는 원의 부분을 ‘집(house)’이라고 부르고, 이를 하나의 왕국(王國)으로 간주하여 전체를 말하는 원(圓) 속에는 열 두 개의 왕국이 존재한다. 그래서 과거 거의 2천 년 동안을 태양신 하나님이 물고기의 왕국(Pisces), 즉 두 마리의 물고기 집에 머물렀다는 것이다. 고대 점성학의 논리를 따르면, 하느님 태양신은 때가 되면 물고기 집에서 나와 다음 집인 물을 길어 물을 나누어 주는 ‘물동이 사람(Aquarius)’의 집으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누가복음 22장 10절에 물동이를 지고 가는 남자 이야기가 나온다. 유월절(페삭, Pesach 또는 Passover)이란 유대인들이 이집트에서 탈출한 때를 기념하여 7일 동안 부푼 음식을 먹지 않는 명절이다. 예수와 그의 제자 열 두 명이 유월절의 마지막 날에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물동이 진 남자를 만나 그의 안내로 그 물동이 진 남자의 집에 이른다는 것이 내용이다. 이것을 물고기 집에서 나와 물동이 남자 집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설명한 것이다. 점성학의 관념으로 성경을 볼 때, 성경에서 “아버지의 집에는 저택이 많이 있다”라는 말은 점성학에서 말하는 열 두 개의 집을 말한다. ‘아버지의 집’은 ‘하느님 나라’, 즉 우주 전체를 말하며, 저택이라는 것은 집, 즉 열 두(12) 집을 말한다.
또 물고기와 어부에 대한 이야기는 희랍 신화에도 근원이 깊숙이 박혀 있다. 희랍 신 ‘오르페우스(Orpheus)’는 낚시를 갖고 물고기를 낚는 어부이다. 희랍 신화에 의하면 물이란 무지(無智)의 세상이다. 따라서 물에 사는 물고기는 무지한 짐승이다. 그래서 어부가 물고기를 낚아 물 밖으로 끄집어낸다는 것은 무지의 세상에서 유지(有智)의 세상, 즉 사리를 이해하는 인간으로 만든다는 이야기도 되고, 무지한 물고기에 생(生)을 집어넣어 준다는 뜻도 된다. 필경 이런 종합적인 이유로 교황의 반지를 ‘어부의 반지’라고 부르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희랍 신화 이야기가 나온 김에 바티칸 교황청의 베드로 광장에 있는 거대한 솔방울 이야기도 곁들여 해보자. 베드로 광장에는 약 4미터 크기의 솔방울 동상이 있는데, 이것도 희랍 신화에서 유래한 것이다. 희랍 신화에 ‘캔디데이트’라는 신이 보물 바구니에서 솔방울을 끄집어낸다는 이야기가 있다. 솔방울이 중요한 이유는 솔방울 속에 들어 있는 씨가 나와 많은 종자를 퍼뜨린다는 뜻이 있기 때문이다. 이 솔방울 동상은 원래 로마 시에 있던 것을 옮긴 것이다. 물고기와 마찬가지로 솔방울도 그리스도교와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으나, 희랍의 신화나 철학을 그리스도교가 받아들임으로써 이러한 상징적인 표징이 지금도 쓰이고 있다.
말세
우리는 마지막 날, 종말, 최후의 심판 등 세상이 끝난다는 말을 무수히 들어 왔다. 마태복음 28장 20절 마지막에 보면,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라고 하였다. 세상 끝, 마지막 날이 오면 어떻게 된다는 말인가? 문제는 성경에 따라 번역이 달리 표현되었다는 점이다. 어떤 성경은 “때(시간)의 끝”이라 했는가 하면, 어떤 성경은 “날(시대)의 끝”이라고도 하였고, 또 어떤 것은 “사물에 대한 현 제도의 종말”이라고도 하였다. 희랍어로 된 성경의 원본에서 사용한 단어는 ‘이언(Aeon)’이라고 한다. 그리고 영어화된 이 단어는 ‘age’이다. ‘Age’란 말의 뜻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어떤 사람이나 사물이 존재하고 있는 동안에 일어나는 어느 기간(period)’이라고 하였다. 다시 말해서 존재의 끝장이라는 말이 아니다. 이것이 미심쩍으면 대표적인 성경사전 ‘Strong's Bible Concordance’ 같은 책을 뒤져보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 곳에는 영어 ‘age’라는 단어의 어원이 희랍어 ‘Aeon’에서 근원한다고 씌어져 있다. 그러니까 ‘이언’을 주기(週期)라고 생각하면 그런대로 우리말로는 가장 가까운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점성가들은 한 집에서의 주기는 약 2천 년 정도라고 하며, 사실상 이제 물고기, 파이시즈(Pisces)의 주기가 끝나고 ‘물동이 남자, 아콰리우스(Aquarius)’의 이언이 시작되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많은 점성가들이나 ‘아즈텍(Aztec)’ 문화를 아는 사람들은 ‘파이시즈’의 주기가 2025년에 끝나고 ‘아콰리우스’ 시대가 시작된다고 하는 형편이다. 그래서 근래에 ‘새 세계질서(New World Order)’라는 말이 흔히 나오고 ‘새 시대(The New Age)’, 즉 ‘새 이언(The New Aeon)’이란 말이 유행어처럼 번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것이 신약성서의 테마이고, 하나님의 아들이 재림하여 ‘새 시대’ 또는 ‘새로운 왕국’을 건설한다는 것은 ‘아콰리우스’ 왕국에서 일어날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그러기에 많은 크리스천들이 말하는 마지막 날에 모든 인류는 각각 개인적으로 최후의 심판을 받아 지옥에 갈 사람은 지옥에 가고 영생을 얻을 사람은 영원히 행복스럽게 살 것이라는 이야기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를 우리는 다시 한 번 숙고해 볼 필요가 있다. 사실 지금까지 크리스천들이 몇 번이나 말세라는 말들을 했는가?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을 때 그랬고, 2차 대전이 있었을 때도 아마겟돈이라고 세상이 끝난다고 했는가 하면, 심지어 한국전쟁 때에도 많은 한국의 크리스천들은 말세라고 표현했다. 인간은 자기가 처해 있는 사회에서 자기가 경험하는 혹독한 경지를 말세가 되었다고 표현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 같다.
그리고 ‘age’란 말이 나온 김에 우리가 쓰는 연대의 표기에 대해서도 잠깐 말해 보자. 거의 전세계적으로 사람들은 서력기원을 사용한다. 즉, 서기 2000년이라고 하면 예수가 태어난 해부터 2천 년이 되었다고 해서 주후(主后) 2000년 또는 A.D. 2000이라고 표기한다. 물론 여기서 A.D.라는 약어는 라틴어로 ‘anno Domini’라 하여 주후를 뜻하며, 그 이전의 연대를 기원전(紀元前)이라 하여 영어로 B.C.(Before Christ)로 표현하는 것은 우리 모두 익숙한 내용일 것이다. 그런데 요즈음에 와서는 점차로 주후를 ‘C.E.’라 하고, 기원전을 ‘B.C.E.’라고 표현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여기서 ‘C.E.’는 ‘Common Era’라는 뜻으로 우리 모두가 공동으로 표기하는 연대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교, 이슬람교, 유대교가 공동으로 사용하는 연대라는 뜻일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가 왔다 간 이후부터의 세계역사는 이 사람들이 좌지우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어떤 이는 ‘공동연대(Common Era)’ 대신에 ‘Our Era’라고 표시해 ‘우리의 연대’라는 뜻으로 표현하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 곧 한국 사람들도 ‘A.D.’나 ‘B.C.’ 대신 ‘C.E.’와 ‘B.C.E.’라는 표기에 익숙해질 것으로 믿는다. 그렇다면 동양 사람인 한국인들이 여기서 깨달을 일이란, 과연 세계의 주인이 누구인가 하는 점이다. 바야흐로 세계가 ‘하나의 세계’로 줄달음질치고 있는 것은 모두 인정하는 바이다. 그러나 ‘하나의 세계’가 완성되었을 때, 한국인들은 누구를 종주민족(宗主民族) 또는 종주국(宗主國)으로 섬겨야 할 것인가를 심각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혹시 이에 대하여 좀더 깊은 고찰을 원하는 독자가 있다면 ‘그림자 정부―정치편’과 ‘그림자 정부―경제편’을 읽어 보기 바라며, 필경 앞으로 출판되리라 믿어지는 ‘시온의 칙훈서’란 책을 읽게 되면 더욱 명확한 판단을 얻게 되리라 생각한다.
아담과 이브와 여성의 위치
하나님이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마지막 날에 자기의 형상을 따라 진흙을 이겨 남자인 아담을 우선 만들고, 그의 갈비뼈를 하나 뽑아 ‘이브’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를 만들어 그의 부인으로 삼았으며, 이브가 사탄의 꾐에 걸려 먹지 말라는 지식의 열매인 사과를 따 아담과 함께 먹었기 때문에 인간이 원죄를 지어 하나님처럼 죽지 않고 영원토록 살 것인데 그렇지 못하고 죽게 되었다고 아주 어렸을 때부터 모두들 들어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이 대목은 필자가 아주 어려 처음 학교에 들어갈 나이가 됐을까 할 때에도 이 동화 같은 이야기가 믿어지지 않아 교회 전체에 대하여 두고두고 의심을 갖게 된 대목이었다. 그러나 이 이야기가 창조론의 근원이었고, 그 수많은 과학자들이 이 황당한 말을 철저하게 믿었든가 아니면 감히 발설을 못했을 것이다. 필자는 아무리 생각해도 심청이가 용궁에 갔다 왔다는 이야기보다도 더 허황된 소리인 것 같아 아무리 믿으려 해도 믿을 수 없었던 지난날이 회상되기도 하고, 지구가 둥글다고 주장했던 갈릴레오나 찰스 다윈이 진화론을 발표한 일이 얼마나 용감했던 일이었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제 나이가 들어서 좀 파고들어 보니,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는 원래 유대인들이 갖고 있던 신화를 성경 속에 집어넣은 것이라고 짐작하면서 나름대로 이해를 하게 되었다. 다른 장에서도 잠깐 소개했지만 ‘홀리 그레일(Holy Grail)’ 술잔의 전설에도 아담과 이브가 살았다는 ‘에덴동산’의 이야기가 나오고, 에덴동산 밖에도 많은 사람들이 살았다는 말이 전해진다. 여기에서 주는 인상은 마치 성벽으로 둘러싸인 옛날 서울 사대문 안의 장안처럼 에덴동산이란 곳은 아담과 이브가 살던 한정된 어떤 지역을 말한 것이며, 물론 동산 밖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고, 하나님이 아담과 이브는 만들었는지 몰라도 다른 사람들은 하나님의 창조물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고 가상하게 되었다. 그 다음에 발견한 이야기는 ‘이브’가 ‘아담’의 첫째 부인이 아니었다는 사실이었다. 눈과 귀가 번쩍 뜨이는 일이었다. 그 다음에는 여자인 이브는 아담에게 사과를 먹인 죄 때문에 남자보다 죄를 더 많이 갖고 있으며, 그 때문에 남자를 섬겨야 한다는 주류 기독교 사회의 근본사상이 뒤집어져, 실은 여자가 남자보다 더욱 귀중한 위치에 있다는 이야기를 읽을 때에는 이제는 갈 때까지 갔구나 하는 생각마저 들게 되었다.
성경 창세기 1장 27절에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를 동시에 창조했다고 하였고, 곧 이어 2장 18절이나 22절쯤에 와서는 아담을 잠재우고 갈빗대 하나를 뽑아 이브를 만들었다고 말을 바꾸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크리스천이란 사람들이 앞의 말은 없는 것으로 치고 뒤의 말만 앞세워, 이브는 아담에게서 나왔으니 여자는 남자를 섬겨야 한다는 원리를 내세우고 사과 먹은 죄를 여자에게 크게 뒤집어씌운 것이다. 이것을 보면 완전무결한 하나님이 건망증에 걸려 이랬다저랬다 횡설수설했든가, 아니면 그 중간에 들어 있는 사연이 한참 빠진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그러면 혹시 누락되었는지 모를 내용을 유대인들의 전설에서 찾아보기로 해보자. 하나님이 흙을 빚어 아담을 만들 때 동시에 여자의 형상도 만들었고, 남자는 아담, 여자는 ‘릴리스(Lilith)’라 하였다. 그런데 아담과 릴리스는 성교를 하면서 곧 싸움을 시작하였다. 릴리스는 아담 밑에 깔리지 않겠다며 꼭 위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담은 “나는 너보다 윗사람이니, 너는 내 말에 복종해야 한다”라고 대꾸하였으나, 릴리스는 “우리는 둘 다 흙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동등하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 복종해야 할 이유가 없다”고 하면서 조물주에게 입으로 형용할 수 없는 욕지거리를 하면서 하늘로 날아가 버렸다. 그러자 어처구니가 없어진 아담은 하나님에게 “우주의 주님이시여, 당신이 마련해 준 여자는 날아가 버렸습니다”라고 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세노이(Snvi)’, ‘산세노이(Snsvi)’, ‘삼만젤로프(Smnglof)’, 이렇게 세 명의 천사를 내려보내 릴리스를 다시 데려 오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세 명의 천사들은 전에 이집트 사람들을 삼켜 버린 험한 파도가 있는 바다 한가운데에서 릴리스를 찾아 영원의 신(Eternal) 하나님이 아담에게로 돌아가라 했다는 명령을 전달하였다. 그러나 릴리스는 완강히 거부하면서, “너희들은 내가 창조된 목적이 갓난아이와 어린아이들을 벌주고 약하게 하는 것인 줄 몰랐느냐? 그러니 아이가 태어나는 날로부터 남자 아이는 여드레, 여자 아이는 스무날 될 때까지 운명이 나에게 달려 있다”고 하면서 엄포를 놓았다. 그러자 화가 난 천사들은 그녀를 여자 마귀라 부르면서 만약 돌아가지 않으면 바다에 빠뜨려 죽이겠다고 협박을 했다. 그제야 그녀는 제발 살려 달라고 애원하면서, 언제고 어린아이가 있는 곳에 세 천사들의 이름을 보게 되면 해치지 않고 아이를 떠날 것을 하나님 앞에 맹세할 터이니 아담한테 돌아가게 하는 것은 단념해 달라고 애원하였다. 이에 솔깃한 천사들은 그녀를 용서하고, 아담에게 돌아가지 않는 죄로 매일 그녀의 아이들이나 영혼이나 마귀 백 명씩 죽이기로 하였다. 이런 일이 있은 후 릴리스는 사탄과 놀아나기 시작하였다. 유대인들의 고전에는 랍비들의 옛 이야기를 엮은 책들이 여럿 있다. 그 책들에는 위에 설명한 릴리스와 천사들의 이야기가 거의 실려 있으며, 어떤 것은 세 천사의 이름으로 부적을 만들어 목걸이를 만들든가 종이부적을 어린아이의 방에 붙이는 방법까지 설명되어 있을 정도이다. 그래서 유대인 풍속으로 릴리스는 밤의 마귀, 늑대 울듯 우는 귀신 또는 메얄렐스(Meyallelth) 등으로 통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릴리스를 포기한 하나님은 이번에는 아담에게 절대 복종하는 여자를 만들어야 겠다는 생각으로 아담의 갈비뼈 하나를 뽑아 여자를 만들고 이브라고 이름 지었다. 유대인 사회에서는 철저한 남존여비사상이 존재하고, 이어서 그리스도교에서도 여자는 죄의식을 남자보다 훨씬 더 많이 갖게 하고 남자가 가장이 되어 여자를 다스려야 한다는 관념은 이러한 신화에서부터 시작된 것으로 짐작된다. 문제는 유대인 사회나 그리스도교에서는 창세기를 비롯한 구약성경에 나오는 내용을 역사적인 사실로 인정하기 때문에, 원죄를 짓게 한 이브의 잘못은 남존여비사상에 정당성을 부여하였으며, 이를 움직일 수 없는 진리로 여기게 된 것이다. 그런데 사회가 변천하고 발전함에 따라 여권이 신장되어 여자들이 성직자가 되겠다고 하고 생식기능관리에 대한 자주권을 갖겠다고 하는데, 이는 교회가 지금까지 가르쳐 온 교리와 상반되는 것이다 보니 난처한 입장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그노시스’의 교리나 ‘낙 하마다’ 문서의 내용을 보면 문제는 완전히 달라진다. 특히 ‘그노시스(Gnosis)’ 사람들은 창세기를 도덕을 가르치는 역사로 보는 것이 아니고, 의미가 담긴 신화로 본다. 그들은 아담과 이브가 실제로 있었던 역사적인 인물이 아니라 인간 각자 안에 존재하는 두 가지의 심리적 원칙을 설명한 것이라 생각했다. 즉, 아담은 혼(魂-soul, psyche)을 말하며, 이브는 영(靈-spirit, pneuma)을 뜻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혼(魂)이라는 것은 감정을 내포하고 성격을 구성하는 작용을 하도록 생각하는 기능을 소유하고 있으며, 영(靈)이란 인간의 영적인 감지능력(感知能力) 자체를 말한다고 한다. 따라서 아담의 경우는 심층심리학적인 자아(自我)에서 소아(小我)를 나타낸다고 할 수 있고, 이브의 경우는 대아(大我) 또는 차원이 높은 자아(自我)를 의미한다고 달리 풀이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로 이브는 아담보다 높은 차원의 자질을 갖고 있는 것이며, 이는 정통 크리스천의 주장처럼 이브가 아담에 비하여 열등하기 때문에 종속되어야 한다는 원칙과 반대의 입장에 서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이브는 남편인 아담을 일깨워 주는 사람으로, 아담보다 차원이 높으며 영적인 기능을 가진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는 것이다. 정통 그리스도교에서는 이브가 아담의 신체 일부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이브는 아담의 속물로 되어 있지만, 그노시스에서는 깊이 잠든 아담을 이브가 깨워 주는 장면으로 소개되어 있다. ‘낙 하마다’ 문서 중 ‘요한의 아포크리폰(Apocryphon of John)’에는 이브가 ‘프로노이아(Pronoia)’라는 이름으로 소개된다. 아담이 토굴 속에 갇혀 깊은 잠에 빠져 있는데, 이브가 들어가 “깊은 잠에 들어 있는 아담이여, 내 소리를 듣거든 일어나시오”라 하였더니 아담이 깨어나 울면서 눈물을 흘렸다. “내 이름을 부르는 그대가 누구며, 옥(獄) 속에 묶여 있는 나에게 희망을 가져다주는 연유가 무엇이오?” 이브는 대답하기를 “내 이름은 순수한 광명의 ‘프로노이아’라 하며, 순결한 영(靈)의 의식(意識)이오. … 그러니 일어나 정신을 가다듬고 당신의 근본을 찾아 나서시오. 당신의 근본은 내가…”라고 하였다. 또 같은 문서 중 ‘세상의 기원에서(On the Origin of the World)’라는 책에 이브의 근본을 자세하게 소개하였다. 그녀는 생명이란 뜻을 가진 ‘조에(Zoe)’라는 신비한 이름을 갖고 있었고, 소피아(Sophia) 최고신(最高神)의 딸이면서, 예수가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다면, 이브는 어머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 주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었다.
여기서 잠깐 ‘소피아’에 대하여 이야기해 보자. 최고신(最高神) 하나님의 신성(神性-Godhead)이 삼위일체의 삼위(三位), 즉 성부, 성자, 성신이 각각 독립된 성본(聖本-hypostasis)을 갖고 있다고 하면, 소피아 신(神)의 경우는 삼위(三位)가 아니라 이위(二位) 중의 하나라고 생각할 수 있다. 즉 위(位) 하나는 로고스(Logos)라 하여 남성 성본(男性聖本-male hypostasis)을 표방한다면, 다른 하나인 소피아는 전체 신성(神性-Godhead)의 여성 성본(女性聖本-female hypostasis)을 말하는 최고신이 된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은 하나이면서 그 안에 여성적인 면이 있고 남성적인 면이 동시에 있으며, 이 두 독립된 성본(聖本)은 동일본질(同一本質-Homoousion)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인간을 만들었다면 인간도 한 사람 속에 여성과 남성의 본질이 동시에 있고, 사람에 따라서 남성이 강할 수도 있고 여성이 강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노시스 계통의 사람들이 말하는 에덴동산의 아담과 이브 이야기는 이렇게 상징적이며, 남성과 여성을 완전히 동격으로 보았다는 이야기이다. 이 관념을 다시 삼위일체에 대입(代入)시켜 본다면, 성부(聖父), 성모(聖母), 성자(聖子)가 되는 것이다. 여기서 성모는 물론 예수를 낳은 마리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소피아를 뜻하는 것이며, 창세기에서 “엘(El)” 또는 “엘로힘(Elohim)”이라 부르는 하나님이나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기 조금 전에 “엘리, 엘리(Eloi, Eloi)”라고 부른 하나님은 소피아를 말한 것인지도 모르는 일이다. 어쩌면 많은 기독교 신자들이 이게 무슨 엉뚱한 소리냐고 의아해 할지 모른다. 그러나 소피아 신에 대한 이야기는 구약성경 집회서(Books of Ecclesiasticus: 벤시락, 바룩, 지혜서)에 나와 있다. 그러나 불행히도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에서 새로 만든 성경에는 원래의 가톨릭 성경에서 일곱 권 반을 삭제해 버렸기 때문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근래에 와서는 천주교도 개신교를 따라 개신교의 성경과 절충하여 함께 사용하고 있을 정도이다. 아마도 종교개혁가들의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에 성경의 일부를 삭제했고, 근래에 와서는 천주교도 세력이 강해진 개신교와 타협하기 위해서인지 자기네 원래의 성경을 버리고 개신교의 성경과 절충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이미 만들어진 성경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빼 없애고 새로 만드는데, 애당초 없던 성경을 만들 때에는 어떠했을까? 여하튼 요즈음 성경에는 없어져 버렸지만 옛날 천주교 성경에는 나와 있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원래의 히브리어 성경에는 소피아에 대한 이야기가 아브라함, 이삭, 야곱, 사라, 미리암, 솔로몬, 노아, 아담에 대한 이야기보다 더 많이 거론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초기에는 예수가 소피아의 말씀을 전하러 이 세상에 왔다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이해하고 있었으나, 후일에 종교지도자들이 이를 바꾸어 조정해 버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약간의 흔적은 아직 조금 남아 있다. 예를 들어 잠언 1장 20~21절을 보자. 한글 성경에 “지혜가 길거리에서 부르며, 광야에서 소리를 높이며, 훤화하는 길 머리에서 소리를 지르며, 성문 어귀와 성중에서 그 소리를 발하여 가로되” 하였다. 여기서 부르고 소리지르며 말을 하는 주어는 ‘지혜’이다. 지혜가 누구인가 영어 성경을 대조해 보면 ‘그 여자(She)’로 되어 있으며, 아주 옛날 영어 성경을 뒤져보면 ‘지혜’라는 단어 대신 ‘소피아(Sophia)’가 주어로 되어 있다. 결국 영어 성경에서 ‘소피아’를 ‘지혜’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또 잠언 8장도 마찬가지이다. 여기서 말을 하는 장본인은 바로 ‘소피아’이다. 그 외에도 집회서(Ecclesiasticus) 6장 21~23절, 지혜서(Book of Wisdom) 6장 12~14절, 7장 24절, 27절에도 나와 있으니 옛날 천주교 성경(Latin Vulgate version)을 구할 수 있는 분은 읽어 보시기 바라며, 지금은 천주교도 국제 예루살렘판(New International Jerusalem Version)을 개신교와 공동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읽을 수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러한 소피아가 이브라고 부르는 자기 딸 ‘조에’를 보내 아담을 일깨우게 하였다. 아담은 신을 이해하는 영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빛의 그릇이 될 자식을 낳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브가 자기의 동반자가 될지도 모르는 아담을 보았을 때 자기와 너무 흡사하게 생겼으면서도 영(靈)이 없기에 불쌍히 여기게 되었다. 그래서 이브가 “아담이여, 일어나시오” 했을 때 아담은 곧 잠에서 깨어나고 일어나 눈을 뜨면서 말하기를 “당신을 생명의 어머니라고 부르겠소. 왜냐하면 당신이 나에게 생명을 주었기 때문이오”라 하였다. 같은 책에 또 이런 말이 나온다. 아담이 아직 잠자고 있을 때 창조주(여기서 창조주는 하나님과 다른 신이다)와 그의 친구들이 속삭이는 이야기가 있었다. “이제 이브가 오고 있으니 아담이 깨어나기 전에 교육을 좀 시키자. 이브는 아담의 갈비뼈를 뽑아 만들었다고 가르치자. 그래서 이브는 아담에게 종속되어 평생 종사(從事)해야 하고, 아담은 그 여자 위에서 주인행세를 해야 한다고 하자”라고 상의했다는 것이다. 아마도 이 이야기가 콘스탄티누스 황제 때 마음에 들었던 것 같다. 그래서 성경 속에 이 말을 집어넣고 남성우월주의 사상을 퍼뜨린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이러한 사상은 ‘그노시스’ 그리스도교에서 여자가 남자에게 생명을 집어넣어 주고 영적인 의식을 갖도록 만들어 주었기 때문에 남자는 여자에게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상에 정면으로 대립되는 이야기였다. 따라서 정치적 세력과 힘을 얻은 정통 서방(西方) 크리스천들은 그노시스계 크리스천이 좋을 리가 없었을 것이고, 그런 이유로 남달리 더욱 심한 박해를 가했을 것이라고 믿게 되는 것이다. 여자가 남자보다 우월하다는 이야기는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에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노아(Noah)와 그의 부인 노리아(Norea)의 이야기에서도 계속된다. 노아의 홍수에 관한 이야기는 역시 ‘낙 하마다’ 문서 중의 하나인 ‘집정관의 성본(執政官의 聖本-Hypostasis of the Archons-저자역)’에 따르면, 노아의 홍수로 유명한 노아의 부인 노리아(Norea)는 (일반 성경의 창세기에는 소개되어 있지 않음) 남편보다 훨씬 더 현명한 여자였다. 노리아는 이브의 딸이고, 숨겨져 있는 사실, 즉 천기(天機)를 잘 알고 있었으며, 노아가 창조주 신과 함께 엉뚱한 계획을 갖고 공모하려는 것을 못 하도록 말려 결국 노아가 지은 방주를 불태우도록 설득한 일도 있는 매우 영특한 여자였다. 또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많은 성경의 이야기가 메소포타미아, 시리아, 가나안, 이집트 등의 지방에서 만연된 신화 중에서 뽑은 이야기들이라는 점이다. 예를 들면 성경에서 말하는 야훼 또는 여호와라고 하는 하나님은 다섯 신(하나님) 중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섬겼던 신 하나만 유일신으로 하고 나머지는 존재도 하지 않는 것으로 만들어 버린 점이다. 그리고 야훼라는 신은 창조주가 아니다. 창조주는 야훼 위에 군림하고 있는 다른 신이고, 야훼가 자신을 창조주라 여기는 것은 창조주에게 큰 죄를 범하는 일이라고 한다.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님 어머니
구약성경은 아브라함 때의 이야기부터 자세하게 나오기 시작한다. 그 당시는 유대인 사회 안에서도 여호와 신 하나로 모두 통합된 사회가 아니었고, 이스라엘 사회에서도 서로 자기 종교의 세력확장을 하는 끈질긴 투쟁사가 펼쳐졌는데, 이를 이야기한 것이 구약성경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여호와를 남자 신으로 생각했던 것은 다만 한 종파의 관념이었고, 이러한 사상은 여러 가지 심각한 문제를 야기하였다. 왜냐하면 인간은 고대부터 새 생명을 탄생시킬 때에는 여자와 남자의 정기가 합해져야 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관념은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 심지어는 동양 끝 한국의 단군 이야기에서도 곰과 결혼한 환웅에게서 태어났다는 남녀의 이야기로 엮어진다. 곰과 용에 대해서도 서양과 동양이 같은, 근본 이야기가 바닥에 깔려 있는 것이다. 대개 남자 신은 태양과 연결되어 있고, 여자 신은 달과 땅과 바다와 자손번식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리하여 태양은 만물이 생성하는 땅과 물에 기(氣)를 주고 있다고 고대부터 믿고 있었고, 이러한 사상은 매우 타당하다고 믿어졌다. 그래서 거의 모든 세상 사람들은 신의 세계도 남자와 여자의 세계로 연장시켜 생각했지만, 유독 유대교나 그리스도교의 여호와 하나님만 남자로 홀로 존재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을 다시 고찰해 보면, 필경 판단하는 관점이 달라질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일반적으로 성경에서 말하는 주님 또는 하나님이란 것은 여호와(Jehovah)를 말한다고 한다. 그런데 실은 여호와라는 단어는 야훼(YHWH 또는 Yahweh)라는 이름을 영어화한 말이다. 여호와는 야훼의 자음 ‘YHWH’에 주님이라는 뜻의 단어 아도나이(Adonai)의 모음 ‘a-o-a’를 삽입하여 ‘YaHoWaH’가 되었고, 이것이 변하여 영어로 ‘여호와(Jehovah)’가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여호와라는 말을 하지 않고 하나님을 야훼라고 부르고 있는데, 히브리어로 표현하면 자음 네 개 ‘Y-H-W-H’로 표기된다. 이 자음 네 개는 신 이름 넷의 첫 글자를 따서 만든 약어이고, 네 명의 신은 한 가족인 것이다. 즉, ‘Y’는 아버지 ‘엘(El)’을 뜻하고, ‘H’는 어머니 ‘아셔라(Ashera, or Ashtoreth)’를 뜻하며, ‘W’는 아들 ‘주님(He)’을 뜻하고, 마지막으로 ‘H’는 딸 ‘아낫(Anath)’을 뜻했다. 우리는 솔로몬 왕의 신전이 유명했던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그 신전 가장 깊숙한 곳에 성스러운 중에서도 성스럽다는 방이 있었고, 이 방을 ‘아셔라(Ashera 또는 Ashtoreth)’의 자궁(子宮)으로 여겼으며, 6세기까지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방에서 아셔라를 섬겼던 것이다. 말하자면 아셔라의 사당이라 생각할 수 있다. 물론 아셔라는 남신(男神) 엘의 부인이며, 함께 부부관계를 이룬 여신이었다. 그리고 아들은 하늘의 왕이었고, 딸 아낫은 그 왕후였다. 이것이 시간이 흐름에 따라 아버지 엘과 아들은 여호와(Jehovah) 하나로 변하게 되고, 아셔라와 아낫은 남자 신 여호와의 여자 동반자 ‘셰키나(Shekinnah)’와 ‘마트로닛(Matronit)’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리하여 전설에 의하면 아낫 역시 엘의 누이였다고도 하고, 후일에도 유대인의 어떤 종파는 땅의 여신 셰키나로 섬기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셰키나가 혼사를 치르는 신방이 예루살렘 사원(Jerusalem Temple) 안에 있었으며, 이 곳이 셰키나가 거처하는 곳이었는데, 예루살렘 사원이 파괴됨으로써 그 때부터 셰키나는 지구를 방황하기 시작했고 홀로 남은 남신 여호와가 혼자 하늘을 통치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이야기는 결국 유대 민족이 남녀 신을 모두 섬기고 있던 상황에서 유일한 남신을 섬기게 됨은, 바빌론에서 다시 추방되고도 약 50년 후에나 시작된 것이라 추정할 수 있는 것이다. 즉, 느부갓네살(Nebuchadnezzar)이 이스라엘 사람들을 추방했을 때, 유대인들의 주부족인 유다와 이스라엘 사람들은 절망적인 상황에 놓여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여호와가 선택한 민족이라는 공동의 목적을 위하여 성지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자연과 만물의 영장
우리가 미신이라고 부르는 토속신앙과 다른 모든 형태의 종교를 보면, 인간은 다만 자연의 일부로 존재한다는 것이 기본관념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와 그 근본을 함께 하는 종교는 유독 우주자연의 모두가 오직 인간을 위해 존재하고, 인간은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위해 존재한다고 가르친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사회의 주도권을 갖고 있는 그리스도교를 믿는 사람들은 인간이 필요로 할 때에는 자연의 어느 것이든 파괴해도 좋다는 생각을 갖게 되는 것 같다. 무엇이든 쓰고 버리면 되는 것으로 믿고, 자연을 청소하는 일이나 자연자원을 마련해 주는 일은 인간이 필요로 하는 한 창조주가 알아서 얼마든지 공급해 준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정신으로 물과 땅을 오염시키고 지구의 사방을 파헤치며 인간에게 귀찮은 생물은 모두 없애 버리고 좋아하는 짐승들은 보이는 대로 다 잡아먹어도 하나님이 알아서 해결해 줄 것이고, 인간은 생기는 대로 다 낳아도 역시 하나님이 알아서 먹을 것을 마련해 줄 것으로 믿는다. 비록 그 아이가 태어나 자라서 다른 생각을 할 때 이단으로 죽이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다.
반면에, 인간을 자연의 일부라고 믿는 다른 모든 신앙의 가르침은 한마디로 자연에 순응하여 살라고 하는 것이다. 생선 한 마리를 잡아먹어도, 나무뿌리 하나를 캐 먹어도 하나님이 마련해 주어 고맙다는 생각 대신에, 생명을 포기해야 하는 그 생명에게 감사기도를 드리는 것이 원칙이다. 그들은 인간이 살고 있는 지구가 한정되어 있다고 믿고 있으며, 자연의 순환절차를 파괴하면 자기 자체를 파괴하는 것으로 믿어 물 한 그릇, 나무 한 그루를 사용하는 것도 자연의 생리가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만 가능하다고 믿는다.
불행하게도 그리스도의 왕국은 보다 더 파괴능력을 가진 힘을 사랑하여 왔고, 그 힘과 항상 자리를 함께 하여 오면서 투쟁의 역사로 점철되어 왔다. 그 한 예로 미국 사람들의 아메리카 점령사를 보아도 두 사상의 차이점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미국 땅을 생활터전으로 삼아 처음 정착한 사람들은 크리스천인 필그림과 청교도들이었다. 이들이 처음 도착하여 원래 살고 있던 인디언들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모두 얼어 죽고 굶어 죽었을 것이다. 인디언들은 이들에게 따뜻한 사랑의 손길을 주어, 새로 정착해 온 백인들에게 먹을 것과 잠자리를 마련해 주면서 그들이 살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이들 크리스천들이 자리를 잡고 난 다음에는 주인이 손님 되고 손님이 주인으로 바뀌어 버렸다. 그 때부터 인디언들의 처절한 생존을 위한 투쟁이 시작되며, 백인들은 인디언들을 거의 짐승으로 취급할 정도였고, 그 결과 인디언들은 거의 멸종의 위기에 처해졌던 것이다. 이런 이야기는 모두들 익히 알고 있는 이야기일 줄로 믿고, 여기서 자세한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잔소리에 불과할 것이다. 다만 19세기 초 백인들이 미국의 서해안 도시 시애틀(Seattle)이라는 지역의 땅을 빼앗을 때, 땅을 빼앗기고 유랑을 할 것인가 아니면 땅을 지키기 위해 몰살(沒殺)을 택할 것인가 하는 두 가지 선택을 놓고 그 지역의 추장 ‘시아틀’이 자기 부족 식구들과 몇몇 백인 손님을 모아 놓고 한 연설을 되씹어 보는 것이 뜻 깊은 일일 것 같아 여기 옮겨 본다. 이 글은 한 양심적인 선교사가 그 자리에 참석하여 연설을 듣고 하도 감동하여 내용을 영어로 옮겨 쓴 것이 ‘Global Outlook News’라는 잡지에 실린 것을 옮긴 것이다.
추장 시아틀
“이 땅의 따뜻한 온기와 하늘을 어떻게 사고 팔 수 있단 말입니까? 그 사고방식이 우리에게는 이상하게만 느껴집니다. 공기의 신선함이나 물의 생기를 우리가 소유하고 있지 않는데 어떻게 그것을 살 수 있단 말입니까?
우리에게는 지구의 어느 부분도 성스럽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햇빛에 반사하는 소나무 잎사귀나, 바닷가의 모래알이나, 깊은 숲 속에 맺힌 이슬방울이나, 지저귀고 우는 벌레도 모두 하나하나가 우리 민족에게는 신성한 존재로 경험됐고 기억되고 있습니다. 나무 가지가지에 골고루 퍼지는 수액(樹液)은 바로 홍인(紅人)들의 업(業)인 것입니다.
백인들은 죽어서 뭇 별 사이로 방황하고 있을 때, 그들은 그들이 태어난 곳을 잊어버립니다. 그러나 우리는 죽어서도 아름다운 이 지구를 절대로 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지구의 일부이고, 지구는 우리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향기가 가득한 꽃들은 우리의 자매들이고, 사슴이나 말이나 위대한 독수리는 모두 우리의 형제들입니다. 하늘을 찌르듯 뾰족한 바위 봉우리와, 들판의 풀잎에 담겨 있는 단물과, 망아지의 뜨거운 열기와, 그리고 인간은 모두 한 가족에 속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워싱턴에 있는 대추장이 우리 땅을 사겠다고 하는 것은 우리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는 것입니다. 그 대추장은 우리에게 다른 땅을 주어 편안하게 살 수 있게 해 주겠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그는 우리의 아버지가 되겠다는 것이며, 우리는 그의 자식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가 우리 땅을 사겠다는 제의를 신중하게 생각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그 일이 그리 간단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 땅은 우리에게는 성스러운 땅이기 때문입니다. 여울과 강을 따라 흐르며 번뜩이는 물은 단순한 물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조상의 피를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만일 이 땅을 당신네들에게 판다면 그것이 성스러운 것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며, 우리의 자손에게 호수의 맑은 물에 반사되는 번뜩임은 우리 민족이 겪은 일과 추억을 말해 주는 성스러운 것이라고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흐르는 물의 속삭임은 우리 아버지의 아버지 말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강은 우리의 목마름을 식혀 주는 우리의 형제입니다. 강은 우리의 카누를 떠내려보내 주고 우리 아이들을 먹여 줍니다. 우리가 이 땅을 판다면 당신은 강이 당신네와 우리의 형제라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리고 당신네들의 형제에게 베푸는 친절을 강에도 베풀어야 합니다. 물론 백인들이 우리의 생활방식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잘 압니다. 당신네는 한 쪽의 땅은 여기에 있으나 저기에 있으나 모두 똑같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신네들은 밤중에 와서 그 땅에 있는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 갖고 떠나 버리는 나그네와 같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당신네들에게는 지구가 형제가 아니라 다만 적(敵)으로만 간주될 따름입니다. 당신네들은 그 땅을 정복하고 나면, 또 다른 곳을 정복하러 떠나 버릴 것입니다. 그 땅에는 당신네들 조상의 무덤만 남겨 놓고, 당신네 조상이 낳은 자식들의 타고난 권리는 망각해 버릴 것입니다. 당신들은 당신들의 어머니, 형제, 지구, 하늘 같은 것들을 마치 가축이나 구슬처럼 사서 좋은 것은 뽑아 갖고 팔아 치우는 물건으로 취급합니다. 당신네들이 그 왕성한 식욕으로 땅을 삼켜 먹고 난 다음 떠나간 자리에는 사막만 남겨 놓게 됩니다.
당신네들의 방법과 우리의 방법이 다르기 때문에, 나는 무식합니다. 당신네들이 이룩해 놓은 도시는 홍인(紅人)의 눈에는 가시로만 보입니다. 필경 그 이유는 내가 야만이고 당신네들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백인들의 도시에는 조용한 곳이 없습니다. 그 곳 아무 구석에 가도 봄철에 잎사귀가 피어나는 소리를 들을 수 없으며, 벌레가 날개를 비비는 소리를 들을 수가 없습니다. 들리는 뚝딱 소리는 다만 나의 귀를 어지럽혀 줄 뿐입니다. 밤중에 외로운 소쩍새의 울음소리를 듣지 못하고, 연못가의 개구리 싸우는 소리를 듣지 못한다면 인생에서 남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 있단 말입니까? 나는 다만 홍인종일 뿐이기에 이해하지 못합니다. 인디언들은 연못 위를 스쳐 지나온 부드러운 바람소리와, 빗물에 씻겨 청신함이 솔방울의 향기를 담아 온 그 바람의 냄새를 좋아합니다.
공기라는 것은 삼라만상이 함께 호흡을 나누기 때문에 홍인종에게는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뭇 짐승과 나무와 인간, 모두들 같은 호흡을 함께 나눕니다. 백인들은 숨쉬고 있는 공기를 의식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마치 죽은 지 여러 날 되어 썩은 시체의 냄새가 배어 의식하지 못하듯이 말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이 땅을 팔았을 때, 당신네들은 공기가 우리에게 중요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공기가 유지해 주는 모든 생명의 얼을 공기는 함께 공유(共有)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우리 조상이 첫 숨을 쉬게 만든 그 바람은 그의 마지막 한숨을 몰아 쉬게 만든 바람과 같은 바람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땅을 팔게 되면, 당신네들도 우리와 함께 맛볼 수 있는 들판의 꽃으로 달콤해진 바람이 있는 이 땅을 성스럽게 여겨 다른 땅과 달리 보존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땅을 사겠다는 당신의 제의를 숙고하는 것입니다. 만약 이 땅을 판다면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백인들이 이 땅에 있는 뭇 짐승들을 형제로 여겨 달라는 것입니다.
나는 야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달리 어떻게 이해할 수 없습니다. 나는 광야에서 백인들이 기차 타고 지나가면서 총을 쏘아 죽인 수천 마리의 들소가 썩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나는 야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생존하기 위해서만 죽였던 그 들소보다 화통이 달린 철마(鐵馬)가 더 중요한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인간이 짐승이 없다면 어떤 인간이 된단 말입니까? 만일 짐승이 모두 사라진다면 인간은 영혼이 메말라서 모두 죽고 말 것입니다. 짐승에게 일어나는 일은 얼마 안 있어서 인간에게 돌아올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네들은 당신네 자식에게 당신들이 밟고 있는 땅이 우리 조상이 불타 죽은 재라고 가르쳐야 합니다. 그러면 그들은 이 땅을 존경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지구는 우리의 형제자매로 가득 차 있다고 말해 주십시오. 또 우리가 우리 자식들에게 지구는 우리를 잉태해 준 어머니라고 가르쳤다는 것을 당신네들의 자식에게도 가르쳐 주십시오. 그래서 지구가 당하는 일은 지구의 자식들이 당하게 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인간이 생명의 거미줄을 짠 것은 아닙니다. 인간이라는 것은 다만 그 거미줄의 한 가닥일 뿐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생명의 거미줄에 대하여 무엇을 하든지 그것은 자기 자신에게 하는 행동인 것입니다.
아무리 백인들 당신네들이 하나님과 친해서 친구처럼 함께 산책하고 대화한다 하더라도 인간이 공동으로 처해 있는 운명은 어쩔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 형제라는 것입니다. 두고 보십시오. 한 가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종국에 가서 백인들의 하나님이나 우리의 하나님이나 같은 하나님일 것이라는 것을 당신네들이 깨닫게 될 것입니다. 필경 당신네들은 마치 우리의 땅을 소유하듯 당신네 하나님도 소유한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그 하나님은 인간의 하나님이고 홍인종이나 백인종 모두에게 평등한 자비심을 갖고 있는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지구는 하나님에게 매우 귀중할 것입니다. 그래서 지구에 해를 입힌다는 것은 창조주에게 욕을 주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백인들도 죽을 것입니다. 아마도 다른 종족보다 먼저 죽을지도 모릅니다. 당신네들은 자신의 잠자리를 오염시켜 언젠가는 자신의 오물에 질식하게 되는 밤이 오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네들은 그렇게 희생의 죽음을 맞이함으로써, 오히려 당신네들이 이 땅에 와서 여기에 있는 홍인들을 지배하는 특별한 사명을 주었다는 그 하나님의 위덕으로 불에 타 밝은 광명을 발한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들소들은 모두 학살당해 없어지고, 야생말이 모두 길들여져 없어지고, 숲 속 깊은 곳이 육중한 인내로 가득 차고, 보이는 언덕은 말하는 전깃줄로 얼룩졌을 때 우리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기에 당신네들의 인생살이가 우리에게는 신비롭게 보여지는 것입니다. 숲이 어디 있습니까? 사라졌습니다. 독수리는 어디 있습니까? 이것도 사라졌습니다.”
미국의 지도자들은 일요일이면 온 가족을 데리고 교회에 나가 찬송가를 부르는 것이 전통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집에는 항상 성경이 있으며, 논쟁을 할 때에도 성경 구절을 인용하는 것이 지식인으로서, 지도자로서 갖추어야 할 기본조건이었다. 그러기에 미국 호텔방에 가면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항상 성경이 있어야 하는 것이 법이었다. 그리스도의 정신이 투철하여 호텔 시행법령에까지 적용하였던 것이고, 일반 생활 구석구석에 침투하여 태어나면서부터 기독교적 생활은 몸에 배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미국 사람들이 원주민 5천만을 살해하면서, 위에 묘사한 것과 같이 그들의 땅을 약탈했다.
“내게 구하라. 내가 열방을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네가 철장으로 저희를 깨뜨림이여 질그릇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
시편 2장 8절과 9절의 이야기이다. 사실 그대로 크리스천은 죽이고 재산을 빼앗아 세계를 정복한다는 말이 아닌가? ‘폰티액(Pontiac)’이란 인디언 추장은 “애초에 그들은 성경과 신앙을 갖고 와서, 우리의 땅을 빼앗고 우리의 영혼을 분쇄해 버렸다. … 그리고 이제는 우리더러 주님을 믿게 하여 구원을 받게 해 주었으니 감사하라고 한다…”라고 했는가 하면, 탄자니아의 대통령을 했던 아프리카의 석학 줄리어스 니에레레(Julius Nyerere)는 “그들이 처음 왔을 때, 우리는 땅을 갖고 있었고 그들은 성경을 갖고 있었다. 지금은 우리가 성경을 갖고 있고 그들이 땅을 갖고 있다”라고 하였다. 또 영국의 ‘올리버 트위스트’나 ‘크리스마스 캐롤’의 저자로 유명한 찰스 디킨스는 “선교사라는 사람들은 완전히 문제의 인물들이다. 그들이 도착하는 곳은 항상 올 때보다 못사는 사회가 되니까…”라고 했다.
참으로 ‘만물의 영장’이란 관념은 인간 밖의 모든 자연을 파괴할 뿐 아니라 인간 자체도 서로 파괴하여 최후의 일인이 남을 때까지 투쟁을 계속하는 정신인 것 같다. 더 웃기는 것은 성령으로 썼다는 성경이 어떻게 생겼기에 해석이 각각 달라 2만 개 이상의 종파를 만들게 했는가 하는 점이며, 하나님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책을 만들어 놓고 인간에게 믿으라고 하는 것 같다.
하나님의 아들들과 네필림
창세기는 맨 처음 1장 1절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라는 문구로부터 시작한다. 여기서 하나님이란 단어는 우리말로 하나님 즉, 하나 밖에 없는 주님이란 뜻으로 사용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나 원서에 보면 이 ‘하나님’이란 단어는 ‘엘로힘’(Elohim)으로 표현되었다 한다. 문제는 이 ‘엘로힘’이란 히브리어 단어의 뜻이다. ‘엘’(El)이라고 하는 신은 유태인들의 신이었던 것이 크리스천들의 신, 즉 하나님이 된 것이다. 이스라엘이란 이름은 ‘이스라-엘’(Isra-El)의 복합어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이란 이름은 야곱에게 하나님이 새로 지어 준 것이라고 창세기 32장을 인용하여 설명한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혼자 있는 야곱에게 이유도 없이 어떤 남자가 와서 야곱이 밤새도록 그 남자와 씨름을 하게 된다. 야곱은 그 남자를 이기지 못하게 됨을 느끼자 그 남자의 환도뼈(자지)를 잡았다. 드디어 새벽 동이 트이게 되자 그는 야곱에게 동이 밝아 오니 그만 놓아 달라고 하였다. 그러나 야곱은 자기를 축복해 주지 않으면 놓아줄 수 없다고 한다. 그 때 이 남자는 야곱에게 이름이 무엇이냐고 묻고, 야곱이라는 대답을 듣자, 하나님과 싸워 이겼으니 다시는 야곱이라 하지 말고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으로 바꾸어 부르라고 하였다. 그러니까 밤새 싸웠던 남자는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이었다는 설명이다. 마치 옛날 한국에서 도깨비와 밤새 싸웠다는 이야기를 듣는 것 같다. 왜 하나님이 이렇게 필요도 없이 모르는 남자로 변신하고 와서 야곱과 씨름을 했는가 하는 질문이 나온다. 점잔은 하나님이 마치 잡신이나 하는 이런 유치한 행동을 할 이유가 있을까? 이에 대하여 기원전 30년에서 기원후 40년까지 살았던 알렉산드리아의 ‘필로’(Philo Judaeus)라고 하는 유명한 유대인 철학자의 설명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이름이 ‘이스라-엘’(Isra-El)이라고 하는 페니키아(Phoenicia)의 한 유태인 왕이 있었다. 그는 단 하나밖에 없는 자식인 아들 ‘예우드’(Jeud)에게 관복을 입히고, 자기 대신 그를 죽여 제물로 바쳤다고 하였다. 즉, 왕의 육신에 신성한 혼이 들어가 있다는 뜻으로 이스라엘이란 이름이 지어졌다는 것이다. 따라서 성경의 야곱도 하나님을 이겼으니 야곱이라는 육신에 하나님의 신성한 혼이 들어 있다는 뜻에서 지어졌다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이스라’도 ‘이스-라’(Is-Ra)의 복합어로 이집트의 여신 ‘이시스'(Isis)와 태양신 ‘라’(Ra)의 복합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시스’와 ‘라’가 합해진 ‘엘’이라는 신이란 뜻으로 풀이한 것이다. 또 다른 설명으로는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싸우는 사람이란 뜻이라고도 한다. 여하튼 ‘엘’(El)은 남신이다. 그리고 ‘엘’이란 신의 복수가 ‘엘로힘’이 된 것이다. 그러니까 ‘엘’이라는 하나님 혼자 천지를 창조
2009.05.11 13:36:08 (*.131.66.250)
그러니까 ‘엘’이라는 하나님 혼자 천지를 창조한 것이 아니라, 여러 명의 신, 즉 ‘엘로힘’이 공동으로 일을 했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라는 말을 항상 해 왔고 근래에 ‘여성권리신장 운동’이 고조되면서, 하나님이 ‘남성’이냐 ‘중성’이냐 또는 ‘여성’이냐 하는 문제를 놓고 왈가왈부 토론을 한 것으로 안다. 이제 이러한 토론이 어느 쪽으로 변할 것인지 지켜볼 일이다.
또 창세기 6장 2절에 보면, ‘하나님의 아들들’이란 말이 나온다. 여기에 나오는 ‘하나님의 아들들’이란 도대체 누구를 칭하는 것이며, 또 이 하나님의 아들들은 사람의 딸들과 결혼을 한다고 씌어져 있다. 그런데 1917년에 발행되었던 유대인의 구약성경에는 하나님 ‘God' 대신에 ‘엘로힘’의 아들들(sons of Elohim)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그리고 4절에 보면 ‘네필림’(Nephilim)이란 말이 나온다. 이 ‘네필림’이란 뜻은 과연 무엇인가? 이것은 개신교에서 사용하는 ‘킹 제임스’(King James)판이나 ‘신 국제’(New International)판 한글 성경에 씌어져 있는 단어이고, 천주교에서 사용하는 성경 ‘두에이-라임스’(Douay-Rheims)판에 보면 ‘거인들’(giants)이라 씌어져 있다. 그러나 한글 ‘킹 제임스’판에는 토를 달고 ‘장부들’(giants)라고 되어 있고 영어판 ‘킹 제임스’판에는 천주교 성경과 마찬가지로, 그대로 ‘giants'로 되어있다. 천주교 판 성경의 설명으로는 여기서 말하는 ‘거인’들이란 체구가 클 뿐 아니라, 광폭하고 야만스러워 단순히 잔인함과 육욕(肉慾)만 있는 괴물에 해당한다고 하였으며, 대홍수가 있을 때까지의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모두 이런 상태였다고 한다. 그런데 히브리어로 보면 ‘네필림’이란 말은 ‘고대의 영웅’ 또는 ‘명성을 떨친 남자’들이라 하였으며, 또 민수기 13장 32-33절에는 신장이 거대한 자들이 네필림의 후손 아낙(Anak)의 아들들 운운하였다. 아낙이라고 하는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6000년 전 메소포타미아 지방에 있던 슈메르(Sumer)때부터 내려오는 그들의 신앙에서 나오는 이야기이다. 지금 우리가 아는 크리스천이라는 것이 유태인의 원조 히브리 사람들에게서 나온 것과 같이 히브리 사람들의 신앙은 슈메르에서 나온 것이다. 슈메르에서는 하늘에서 신(神)이 내려왔고 이 신들을 ’아누나키‘(Anunnaki) 또는 아낙(Anak) 또는 아나킴(Anakim) 등의 이름으로 불렀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한 것들이 바로 아누나키인 것이다. 그리고 이들이 사람의 딸들과 교접하여 난 자식이 네필림이라 하여 아담의 자손들과 구별했다고 한다. 여기서 알아차릴 수 있는 점은 하나님의 아들들은 사람이 아니면서 사람의 딸들과 혼인했다고 하였고, 여기에서 나온 자식들이 네필림이라는 거인들이었으며, 이들은 무지막지한 야만이라는 점이다. (사실은 ‘네필림’의 아들들, ‘나피뎀’-Naphidem이 야만이었다는 설도 있다.) 여기서 만일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면 네필림의 아버지들과 (또는 ‘네필림’과) 형제 관계이던가, 아니면 서로 다른 하나님 즉, 하나가 아닌 여러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어야 한다.
바로 이 문제를 갖고 한 평생을 연구한 학자들이 있다. 그 중에서도 권위자를 말한다면 ‘싯친’(Zecharia Sitchin)과 ‘폰다니켄’(Erich von Daniken) 두 사람을 첫 손으로 꼽을 수 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의 주장은 하나님의 아들들이란 외계인(外界人)이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요즈음 한참 논쟁하고 있는 UFO의 주인공이란 말이다. 두 사람을 위시하여 많은 학자들이 동의하는 점은 ‘니비루’(Nibiru)라는 별에서 왔다는 것이다. 그들의 설명을 간단하게 표현하면 위에 말한 ‘아낙’(Anak), 또는 ‘아나킴’(Anakim), 또는 ‘아누나키’(Anunnaki)는 모두 같은 단어를 달리 표현한 것이며, 그 뜻은 바빌로니아 전에 있던 ‘슈메르’(Sumer)라는 나라의 말로 “하늘에서 땅으로 온 이들”이란 뜻이라 한다. 그 때 ‘슈메르’ 사람들은 그들이 ‘니비루’(Nibiru)라는 별에서 지구로 왔다고 하였다. 그들이 연구한 결과로는 45만 년 전에 우주선을 타고, 별과 별 사이를 왕래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얄팍한 과학을 배운 현대의 사람들은 대부분 불가능한 해괴망측한 이야기라 할 줄 안다. 1930년 ‘플루토’(Pluto)를 발견하고 아직도 태양계에는 위성이 또 하나 있다고 했을 때 과학계는 떠들썩하였다. 그런데 그 고대의 ‘슈메르’ 사람들은 현미경도 망원경도 컴퓨터도 없는 시대에 이미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역사에서 수백 년만 거슬러 올라가도 천체의 중심은 지구로 알고 있었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지구는 태양에서 수성(Mercury)과 금성(Venus)에 뒤이어 세 번째의 행성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역사도 잘 알지 못하고 있던 6,000여 년 전 ‘슈메르’시대 사람들은 지구는 7번째 행성이라고 기록하였던 것이다. 즉, 이 사람들은 태양계를 밖에서부터 계산했다. 첫째는 명왕성(Pluto), 둘째 해왕성(Neptune), 셋째 천왕성(Uranus), 넷째 토성(Saturn), 다섯째 목성(Jupiter), 여섯째 화성(Mars) 그리고 일곱 번째가 유일하게 금(金)이 있다는 지구였었다. 알다시피 명왕성은 1930년에 발견하였고, 해왕성은 1846년에, 천왕성은 1781년에 각각 발견하였었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이에 대한 유일한 답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태양계 밖에서 지구로 오면서 행성을 세어서 지구는 일곱 번째라고 지구의 사람들에게 알려 준 것이라고 밖에 할 수 없는 일이다.
지금 그리스도교 교회에서 가르치는 내용은 성경을 갖고 성부, 성자, 성신 세 명의 개성이 각각 다른 신(神)들이 본질적으로 똑같기 때문에 하나의 신을 믿는 삼위일체라는 유일신주의(有一神主義-monotheism)이다. 이것은 이해하는데 좀 복잡성이 있다. 그러나 구약을 기본으로 하는 이스라엘의 사회상을 관찰하면 ‘단일신주의’(單一神主義), ‘헤노티이즘’(henotheism)이었다. 즉, 다른 신들을 인정하면서 신 하나만 섬기는 신앙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예수 처형 이래 특히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지방에서 이미 사회에 뿌리를 내린 헬레(희랍)문화를 갖고 있는 로마 제국의 사회에 포교활동을 하면서 ‘신-플라톤주의’(Neo-platonism)와 융합하는 세력과 독자적인 교리를 창조해 내는 파가 갈려 후자가 승리하였고, 이것이 지금 우리가 아는 일반적인 그리스도교이다. 그리고 전자는 신 하나만 인정하고 신봉하는 순수한 유일신주의의 크리스천과 ‘헤노티이즘’계의 크리스천으로 나뉘어져 존재하고 있으며, 앞의 순수한 유일신주의자들은 조직적인 박해를 받으면서도 겨우 명색을 유지하고 있고, ‘헤노티이즘’계는 아직도 신비로운 존재로 그 정체를 알기 어려운 상태이며, 이제야 차차 그들의 교리를 사회에 알리기 시작할 정도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그노시스’인 것이다.
다시 위에서 말한 하늘에서 내려 왔다는 슈메르의 아누나키 이야기가 나온 길에 에녹서( Book of Enoch) 중에서 ‘거인서’(巨人書-Book of Giants)에 소개된 네필림에 대한 설명도 참고해 보자. 악한 천사의 지도자라 할 수 있는 ‘셔니하자’(Shernihaza)라는 천사의 장난으로 하늘에서 내려 온 약 200명 정도의 천사들로 하여금 사람의 딸들과 교접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부자연적인 교접으로 태어난 자식들은 450척이나 되는 거인들, 즉 네필림이었으며, 이들은 인간들을 못살게 휘두르며 인간에게 악을 가르쳤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들을 모두 홍수로 이루어지는 마지막 심판 날까지 이들을 가두어 두고 지구를 파괴하려 했던 것이며, 에녹은 하나님과 땅에 떨어진 천사들 사이에서 중간 역할을 하여 화해시키려 하였으나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는 이야기이다. 이 아누나키의 이야기는 바로 인간의 창조설의 근원이 되는 것이고 19세기에 와서 다윈(Charles Darwin)이란 사람에 의하여 진화론이라는 것이 과학이라는 간판으로 우리에게 소개되어 현대인들은 모두 학교에서 배우게 된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크리스천으로 신앙을 가지려면 창조론을 믿어야 한다. 만약 진화론을 믿거나 그 논리에 솔깃하면 그 사람은 이미 크리스천으로서 하나님의 벌을 받든가 버림을 받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창조론은 하늘에서 내려 온 인간의 조상과 진흙으로 만들어 진 아담이라는 인간의 조상과 두 가지로 또 갈라지게 된다. 일반인들의 귀에 익은 독일 나치 당원들이 우월한 인간이라고 했던 ‘아리안’(Aryan)족, 즉 노랑머리의 백인들은 바로 아누나키의 후손들이다. 그들은 크리스천이라 했지만 진흙으로 만든 아담의 자식들이 아니고 하늘에서 내려온 아누나키의 자손들이기 때문에 아담의 후손들보다 우월하여 그들이 세상을 다스려야 하고, 나머지 즉 아담의 자손들은 일하는 꿀벌처럼 그들의 노예가 되어야 한다고 믿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상은 내 놓고 말을 하지 않아 잘 모르고 있지만 사실은 지금도 건재해 있는 사상이다. 언젠가는 이들이 다시 일어나 하나님이 아니라 이들의 계획으로 만들어진 말세에 세상의 인구가 노아의 홍수 때 비슷하게 다시 조절될 지도 모르는 일이다. 여기서 귀띔해 줄 이야기는 아리안 족으로 표현되는 “으뜸인종”(Master Race)을 독일 사람들을 중심으로 생각하면 큰 실수라는 점이다. 그리고 특히 한국 사람들이 알아 둬야 할 일은 아리안 족만 하늘에서 내려 온 것이 아니라, 한국 사람도 하늘에서 내려 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늘에서 환웅(桓雄)이 태백산에 내려와 환웅천황(桓雄天皇)이 되고, 그가 인간이 된 곰과 결혼하여 낳은 자식이 단군(檀君)이 되었으며, 한국인들은 이 단군의 자손들이기 때문에 한국 사람들도 원조는 하늘에서 내려온 종자인 것이다. 그런데 아리안의 아누나키는 니비루라는 행성에서 온 외계인이지만 환웅은 하나님(桓因-帝釋天王)의 아들로 하늘 아래 세상에 내려와 종자를 퍼트렸으니 아누나키 보다는 더 우월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퍼트린 후손과 동등한 위치이니 일반 크리스천 보다는 훨씬 격이 높은 지위에 있지 않나 한다. 그래서 나의 생각으로는 한국 사람이라면 마땅히 단군을 섬겨야지, 우리 것은 팽개치고 엉뚱한 유태인의 하나님을 빌려 섬긴다는 것은 생각해 볼 문제가 아닌가 한다. 이것은 마치 유태인들이 단군을 섬기는 것과 비유된다고 생각한다. 아누나키의 이야기는 위에서 말한 것처럼 슈메르 시대 때 슈메르 사람들이 믿던 일이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불과 50년 전까지만 해도 ’슈메르’라는 나라가 존재해 있었다는 것을 하나의 전설로 믿었었다. 그것이 이제는 완전히 역사가 된 것이다. 그래서 단군의 이야기를 신화로 생각하는 일도 언젠가 명석한 고고학자에 의하여 한국의 역사로 변환될지 누가 알겠는가? 전 세계의 신화를 찾아보면 조상이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이야기는 슈메르와 한국을 제외하고는 별로 찾지 못할 것이다. 희랍신화는 신들이 사람들과 함께 생활을 했고, 대개 다른 지역의 신화들은 조상이 조개(具)나 알(卵) 같은 것에서 태어났다고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나님의 후손인 한국인들은 모두 함께 생각해 볼 일이라 생각한다.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의 근원
필자가 오랫동안 궁금했던 것은 유대교나 그리스도교가 최소한 구약성경을 함께 소중히 여긴다는 것이었다. 물론 그리스도교라고 하면 제일 먼저 생각되는 것은 바이블(Bible), 성경을 생각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또 유대교도 구약을 믿는다고 한다. 예루살렘 성지에 가면 회교도와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모두 함께 성스러운 장소로 여기고, 그 때문에 서로 주도권을 갖겠다고 또는 자유로이 들어가서 성지순례를 하겠다고 서로 싸움들이다. 이런 싸움의 유래는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고, 그 뿌리는 천 년 이상 오랜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것 같다. 그러나 필자가 주목하고 싶은 내용은 세상에서 가장 잘 조직된 이 세 종교들이 모두 근원이 같다는 점이다.
우선 유대인의 조상이라고 하는 아브라함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아브라함은 두 명의 아내를 갖고 있었는데 첫째 아내는 사라(Sarah)라는 여인이었고, 사라가 오랫동안 아이를 배지 못하므로 자식을 낳기 위해 사라가 남편에게 바친 자신의 이집트인 몸종 하갈(Hagar)이 있었다. 하갈은 곧 ‘이스마엘’이라는 아들을 낳았고, 13년 후 90세가 된 사라는 드디어 이삭(Isaac)이라는 아들을 낳게 된다. 그리고 이삭은 야곱(이스라엘)과 에서(에돔)를 낳게 되고, 야곱은 열 두 명의 아들을 낳게 되는데, 이 열 두 명의 아들들이 오늘날 현대의 유대인 열 두 부족이다. 야곱의 열 두 아들 중에 셋째 아들 레위의 후손 중에서 모세가 태어나고, 모세는 파라오의 딸에게 양자로 입적되어 파라오의 총애를 받고 있었으나 자기가 유대인의 피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는 핍박받는 유대인들의 불우한 입장을 보다 못해 그들을 이끌고 기원전 약 1230년경 그 유명한 대탈출을 하게 되었다. 그는 곧 통치자로서 히브리의 법률이라는 십계명을 만들고 유대교의 시조가 되었다 한다. 다음에 레위의 동생, 즉 야곱의 넷째 아들 유다의 후손 중에서 다윗이 태어나 소위 거인 골리앗을 돌팔매로 죽이고 왕이 되었으며, 그 후손 중에 예수가 탄생하게 되었다. 이는 모세 이후 천 년 이상이 지난 다음이었다. 모두 알다시피 예수는 그리스도교의 시조가 된다. 그리고 하갈의 아들 이스마엘도 열 두 자식을 낳게 되었고, 이스마엘은 메카로 이주하였으며, 그 아들 중 케다(Quidar)라는 사람이 아랍 종족의 시조가 되었다 한다. 그리하여 그 후손 중에서 마호메트라는 사람이 서력 570년에 태어나 이슬람교를 창시하였다는 배경 이야기이다. 결국 유대인이나 아랍인이나 예수를 섬긴 애초의 사람들은 모두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친척관계라는 이야기가 되며, 지구상 굴지의 이 세 종교는 서로 많은 연관성을 갖고 있는, 말하자면 서로 사촌간의 종교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은 서로 반목을 하고, 서로 자기네들 하느님의 정의를 위해 처절한 전쟁을 하며, 그 하느님 때문에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살생을 지금도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천 수백 년이 지난 지금에도 많은 세상 사람들이 그들의 신앙을 받아들여 현재 한국에도 그리스도교가 뿌리를 깊게 박아 창궐을 하고 있고, 이슬람교도들도 불어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크리스천이나 유대교도들은 함께 자랑삼아 하는 이야기가 있다.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던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서기 66부터 약 7년간의 유대인들의 봉기 때, 최후의 일인이 죽을 때까지 유대인들이 로마군에 저항을 하며 싸웠다는 유명한 마사다(Masada) 전투에 대한 이야기를 독자들은 익히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이는 마치 설악산의 울산바위 비슷하게 생긴 우뚝 솟은 자연적 요새에서 치러진, 옛날 임진왜란 때 부녀자 모두 합세하여 싸웠다는 행주산성 싸움보다 몇 배는 더 처절한 전쟁이었던 것 같다. 로마군에 완전 포위되어 전투에 패배하든가 굶어 죽을 것이 다만 시간문제임을 뻔히 알고 있는 유대인들은 그런 줄 알면서도 항복을 거절하고 부녀자와 어린이들까지 모두 싸울 수 있는 데까지 싸웠고, 나중에는 모두 자살하여 이를 점령한 로마 군인들도 존경해 마지않았다고 한다. 그 유대인들은 소위 젤로트(Zealot, 열심당)란 별명을 가진 에세네(Essene)라는 유대인들이었고, 마사다는 ‘사해의 두루마리 문서(The Dead Sea Scrolls)’가 발견된 사해의 서편 연안 ‘쿰란(Qumran)’ 지역에 있는 한 언덕이었다. 에세네(Essene) 부족 또는 일명 젤로트라 부르는 이 유대인들은 절대 항복을 모르고 호전적인 것으로 유명했다. 그리고 젤로트계 중에 아사신(Assassin)이란 비밀조직이 있었다. 아사신이란 말은 일본의 닌자처럼 자객(刺客)이라는 뜻이다. 로마제국의 식민지 격인 팔레스타인 지역에는 물론 많은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는데, 당연히 유대인들 중에는 로마인에게 아첨하여 편하게 사는 민족반역자 같은 사람들이 적지 않게 있었다. 마치 일본 치하에서 흔히 있던 한국의 친일파 격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로마인보다 더 미운 사람들이 이들 반역자들이었다. 이런 사회에서 아사신 회원들은 로마 요인들을 위시해서 유대인 민족반역자들을 죽이는 암살단이었다. 아사신의 다른 이름을 ‘시카리(Sicarii)’라고도 했는데, 이 뜻은 단도(短刀)라는 뜻으로 아사신 조직원들은 가슴속에 단검(短劍)을 품고 다니면서 장터 같은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에서 대중과 어울리면서 요인을 죽였다고 한다.
잠깐 ‘아사신’이라는 이 조직에 대하여 좀더 이야기해 보기로 하자. 이 암살단은 서기 50년에서 70년 사이 유대인들이 로마의 학정에 반발하여 일어난 봉기 때 조직되었고, 같은 유대인들을 많이 죽였다. 사도행전 20장 3절과 23장 12절에 사도 바울을 암살하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바울을 죽이려고 하던 유대인들이 바로 이 아사신 조직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유래를 갖고 있는 이 암살단 조직은 11세기에 들어서서 이슬람교의 이스마엘계 사람인 하산(Hassan-e Sabbah)이라는 사람에 의하여 재조직된다. 여기서 주목되는 이야기는 서구 유럽인 로마 가톨릭계의 십자군 원정 때 조직된 템플라 기사단(Knights Templar)이라는 프리메이슨 조직의 결성시기와 비슷하다는 것이다. 전에 펴낸 ‘그림자 정부’ 상권인 정치편에서 프리메이슨에 대하여 상세히 기술하였지만, 성지를 회복하기 위해 젊은 청년들이 자진하여 십자군에 지원할 때 가난한 중의 신분으로 만든 ‘템플라 기사단’은 적국이라고 할 수 있는 이슬람계의 아사신과 비밀리에 손을 잡고 크리스천들이 성지순례를 할 때 그들의 안전을 보장하는 일종의 관광사업을 벌였다. 그들은 안내비를 받아 돈을 벌었고, 역사상 최초의 국제은행을 창설하였다. 이는 원거리 여행 시 여러 가지 잡범들 때문에 피해의 위험이 많은 상황을 감안하여, 성지까지의 길목 곳곳에 지점을 차려서 순례자들이 고향의 은행에 돈을 저금하고 다음 은행지점에 도착할 때까지 필요한 약간의 노자와 입금한 증서만 몸에 지닌 채 여행하면 쓸데없는 부피와 무게를 줄일 수 있을 뿐 아니라 여행하기도 편하고 안전하였다. 그리하여 성지순례자들이 모두 이용했던 아주 용이한 은행사업을 교황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으면서 시작했던 것이다. 또 이 템플라 기사단은 ‘헤롯 왕의 신전’과 솔로몬 왕의 신전이 있던 옛 터에서 9년 동안 탐사작업을 한 결과 많은 보물을 찾게 되어 큰 부자가 되었고, 그 돈으로 그들은 왕이나 영주들이 성을 쌓고 궁전을 짓는 데 필요한 돈을 융자도 해 주었다. 프리메이슨이라는 것이 원래 석공(石工)들이었기 때문에 건축공사도 겸하여 이들이 청부맡았던 것이다. 결국 이슬람의 아사신 조직이나 그리스도교 계통의 템플라 기사단이 내적으로 서로 통할 수 있었던 것은 서로 유대계 신분이라는 유대감이 강했고, 또 그렇기 때문에 프리메이슨 조직은 바티칸과 항상 대결상태에 있으면서 애증관계를 엮어 나가는 미묘한 상황을 연출한 것으로 짐작된다.
하산은 아사신 조직을 토대로 1090년 다이람(Daylam)에 있는 알라무트(Alamut) 요새를 점령하고 이어서 1094년에는 파티미드 왕조(Fatimid)를 분리시킬 정도로 강력해졌으며 이로부터 수세기 동안 중세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전성기를 갖게 되는데, 1100년경에는 중국의 삼합회(三合會)나 황건적(黃巾敵) 같은 조직, 또 마피아 같은 인도(印度)의 범죄조직에도 깊이 관여하게 된다. 하산의 뒤를 계승한 현재의 이슬람교의 이스마엘파 지도자는 아가 칸(Aga Khan)이라는 사람이다. 아가 칸이란 사람이 누군지 아는 사람은 머리를 끄덕이게 될 줄로 믿는다. 이 아사신 조직은 프리메이슨과 마찬가지로 일반 사회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독특한 제식 등 여러 가지 전통을 갖고 있다. 아사신은 해시시(Hashish)라는 별명을 갖고도 있다. 해시시는 마리화나인데, 이는 대마초 잎사귀를 말려 담배처럼 피울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요즈음 라이브 댄스장에 도리도리인가 엑스터시(ecstasy)인가 하는 환각제가 약방의 감초처럼 따라다니는 연유는 근래에 새로 생긴 이상한 풍습이 아니라, 장기간의 역사를 갖고 있는 일종의 제식과 비슷한 유래를 갖고 있는 것이다. 아사신은 1100년경부터 인도에서 습득한 ‘수피(Sufi)’ 철학의 ‘수피 댄스(Sufi dancing)’라는 춤을 추면서 마리화나를 피우는데, 환각된 상태에서 점점 빠른 리듬의 박자에 맞추어 춤을 추노라면 쉽게 신비한 경지에 도달한다고 한다. 물론 이러한 경지에 도달할 수 있는 사람들은 해시시의 초보자들은 아니다. 대개 십대 청소년들인 아사신 입당 지원자들이 오면, 해시시를 넣어 만든 맛있는 요리로 일단 대접한다. 음식을 다 먹고 환각상태에 빠진 이 사람들을 요염한 여자들이 온갖 봉사를 해 주는 황홀의 정원으로 옮겨 달콤한 극락(極樂)의 맛에 흠뻑 빠지게 만든다. 이러한 과정을 거친 입단 지원자들은 극락의 열쇠를 갖고 있다는 하산에게 충성을 맹세하게 된다. 그리하여 일단 단원이 된 자객들은 다른 ‘샤(Shah)’ 또는 왕의 궁중으로 취직하여 들어가 그 주인에게 여러 해 동안 충성을 다하여 가까이 모시는 지위로 승급을 하게 된다. 그리하여 권력자들의 가신이 된 아사신 암살단원들은 각 지방에 침투하여 충성을 보이다가, 권력자들이 하산에 대한 적의심을 품고 있는 기색이 보이면 기회를 보아 그들의 목을 따 죽이는 것이 임무였었다. 그리하여 모두들 하산을 몹시 두려워하게 되었으며, 또한 하산은 “아무것도 진리가 아니며, 모든 것은 허락된다”라는 명문을 내걸고 가르치기도 하여, 어떤 면에서는 신비의 허무주의(nihilism)를 주장한 면도 있었다.
유대교라는 것은 일반적으로 유대인의 피를 가진 사람만이 가입할 수 있는 종교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소수에 속하는 유대교 신자나 성직자들은 정의를 달리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의 주장은 유대교를 믿는 사람들은 인종의 차별 없이 모두 유대인이라고 한다. 여하튼 대체적으로 유대인의 혈통이라고 인정되는 사람들이 유대교 신자라고 하면 틀림은 없을 줄로 안다. 이미 설명한 바와 같이 유대인의 혈통을 어디에 금을 긋고 분별하는가 하는 것이 큰 과제거리이기도 하다. 심지어는 이집트인에게도 많은 유대의 피가 섞여 있는데, 이는 많은 유대인들이 이집트에 살고 있었다는 기록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야곱의 열한 번째 아들 요셉은 아버지가 늦게 난 아들이라 남달리 귀여움을 받자, 심한 질투를 느낀 형들의 모함으로 이집트 상인에게 팔려 이집트에 가게 되고, 꿈 해몽을 잘하는 덕택에 파라오의 신임을 받아 전 이집트의 자산을 관리하는 총책으로 봉직되었을 뿐 아니라, ‘온’ 제사장의 딸 아스낫과 결혼하게 되었다. 옛날에는 종교와 정치를 분리하여 종교의 우두머리와 정치의 우두머리를 동격으로 취급하였었다. ‘온’이라고 하는 곳은 태양신을 믿던 이집트에서 태양의 도시라고 부르는, 다시 말하면 신앙의 수도라고 할 수 있는 곳이었기 때문에 ‘온’의 제사장이라는 지위는 파라오와 맞먹는 지위였었다. 따라서 공주와 같은 신분인 아스낫과 결혼한다는 것은 모세가 파라오가 될 뻔했던 것처럼, 유대인인 요셉도 비슷한 대우를 받았다고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미국의 성서학자 킴볼(Glenn Kimball)의 주장에 의하면, 아스낫은 공주와 같은 신분이었을 뿐 아니라 친척관계도 되었었다는 것이다. 몇 촌인지는 몰라도 영어로 ‘cousin’ 관계였었다고 한다. 따라서 ‘그림자 정부’에서도 잠깐 논하였지만 실제 유대인이라는 인종은 아랍인 속에 무척 많이 있으리라 짐작되며, 아랍인은 위에서도 잠깐 설명하였지만 결국 아브라함의 손자 ‘케다’의 자손들이고, 소위 오늘날 유대인이라고 부르는 민족은 아브라함의 배다른 자식의 후예라는 결론이 나온다. 그렇다면 서로 형제가 된다는 이야기이다. 그뿐이 아니다. 지금 우리가 스페인이나 포르투갈이라고 부르는 지역을 예전에는 ‘이베리아(Iberia)’라고 불렀고, 지금도 전체 지역을 ‘이베리아’ 반도라고 부르고 있다. ‘이베리아’라는 말뜻은 ‘히브리(Hebrew)’이다. 다시 말해서 유대인 땅이라는 말이다. 원래는 프랑스 남쪽 스페인과의 경계에 산맥이 있고, 그 고원지대에 사는 사람들을 ‘피레네(Pyrenees)’라고 불렀다. 지금은 그 산맥을 피레네 산맥이라고 부르지만 여기 살던 인종을 ‘이베리아’라고 했고, 이것이 퍼져 스페인, 포르투갈 전 지역을 이베리아 반도라고 부르게 된 것이며, 그 연유로 스페인의 국영 항공사 이름이 이베리아 항공사이다. 이들은 프랑스 남쪽의 산악지방으로 이주한 것뿐 아니라 발칸 반도에도 퍼져 있었는데, 구소련의 통치자 스탈린의 출신지인 발칸 반도의 ‘조지아(Georgia)’도 ‘이베리아’라고 불렀다. 왜냐하면 그 곳에도 유대인들이 집단으로 이주하여 코카시아 지방에 많이 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를 죽인 사두개인(Sadducees), 학자들을 많이 배출한 바리새인(Pharisees), 예수가 사용하던 ‘아람’어를 지금도 사용하며 아브라함의 고향인 우르(Ur)에서 예수의 원래 그리스도교를 믿고 있는 가루데인(Chaldees)과 함께 피레네(Pyrenees)라는 단어도 유대인의 한 종족을 의미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유대인들이 퍼져 있는 곳은 이 곳뿐만 아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에는 ‘렘바(Lemba)’라는 한 종족이 있다. 이들은 외양으로는 흑인이지만 유대교의 예식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분명한 유대인들이다. 하도 신기하여 DNA 조사를 한 결과 승려계급인 코헨(Cohen)이라는 가문의 그것과 일치되는 것이 증명되었다. 인도에도 마니푸르(Manipur) 지방과 봄베이에 마나세(Manaseh)라는 유대인 종족이 살고 있으며, 파키스탄의 파탄(Patan)과 마드란(Madran), 중국의 가이펭, 우즈베키스탄의 부카라, 아프가니스탄의 콴다하, 미얀마, 심지어는 일본에도 많은 유대인들이 있어 정치에도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위치에 있다고 한다. 1925년 니혼 대학교의 교수 후지사와 지카오는 그의 저서 ‘일본인과 유대인의 정신적 문화적 유사점’이란 책에서 일본 천황도 유대인의 피를 받았다고 주장하기도 했고, 1854년 요코하마, 나가사키를 개항하였을 때 많은 유대인들이 이주해 왔으며, 그 중에도 ‘사순(Sassoon)’ 가문이 유명하다고 한다.
따라서 주로 유대인으로 구성된 유대교와 이슬람교와 그리스도교, 이 셋은 같은 신령(神靈), 즉 하느님을 믿으면서 각각 이름을 달리 부르고 있으며, 인간들끼리 자의적으로 판단하여 서로 다른 신을 신봉하고 있는 양, 서로 살상을 하고 용납을 못하고 있다. 더욱이 예루살렘에서 이 세 종류의 종교 신자들이 한 자리에 와서 성지순례를 하고 있으면서도 서로 죽이고 있으니 이를 어떻게 생각해야 옳은가?
또 유대인들은 프리메이슨의 중추를 이루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림자 정부’에서 역설한 것처럼 미국은 프리메이슨이 세운 국가이고 이들이 전세계의 역사를 만드는 데 대단히 큰 역할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믿는다면, 그 힘에 대적할 수 있었던 바티칸의 투쟁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며, 그 바티칸의 영향력 안에서 혁명을 일으킨 종교개혁의 세력을 우리는 개신교 또는 프로테스탄트라고 부르고 있음도 알아야 한다. 프리메이슨에 가입하려면 가장 중요한 조건 중의 하나가 신(神)을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신은 어떤 신이건 상관이 없다. 신을 믿는 사람들은 대개 어떤 종교단체에 속해 있을 것이다. 그리고 프리메이슨들은 소속된 교회에서 교회활동을 하는 것을 적극 권장하고 있다. 이것이 신앙을 가지라고 하는 의미에서 만든 규칙인지는 분명치 않다. 혹시 ‘아사신’ 조직에서처럼 모든 세력단체 내부에 들어가 충성분자가 되고 신임을 얻음으로써 중요 인물이 되어, 첫째 주체세력의 행동을 관찰하고, 둘째 그 조직을 운영할 수 있는 지위에 달하였을 때, 더욱 큰 죽음으로써 충성을 맹세한 다른 조직의 목적을 위해 일하도록 하기 위해 만들어진 규칙은 아닐까? 생각해 볼 문제이다. 이러한 내용은 ‘시온의 칙훈서’에 자기네들은 마치 수백 개의 팔이 달린 비슈누 신(神)처럼 팔 하나하나가 각 조직에 파고들어가 정탐을 하고 조정을 한다는 이야기가 담겨 있다.
성경 속의 유대인 부족
예수가 시작했다고 할 수 있는 그리스도교는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팔레스타인 주변에서 일어난 이야기이다. 그는 같은 동족인 유대인 속에서 활동했고, 같은 동족의 모함으로 로마 당국에 의해 처형되었다. 성경의 내용을 보면 예수가 로마 당국에 이렇다 할 죄를 지은 일 없이, 다만 유대인들의 청원에 의하여 십자가라는 가장 혹독한 형벌을 당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리고 예수가 없어지고 난 후에 그의 제자들이나 가족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복음 활동을 했기 때문에 그가 만든 종교가 세계에 퍼진 것이라 믿고 있다. 또 하나 분명한 것은 베드로, 바울, 마가, 도마 같은 예수의 제자들이 선교의 방향을 유대인에 두지 않고 로마인을 목표로 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방향전환은 여러 면에서 이해될 수 있는 일이다. 유대인은 당시 피지배민족으로서 압박받는 사람들이었고, 그리스도교 신앙 자체가 로마인들에게 위협이 될 수 있는 유대인들의 신앙이었기 때문에 유대인에게만 포교를 한다는 것은 멸종의 가능성을 의미했을 것이다. 반면에 로마인들을 상대로 포교하여 지배민족인 로마인들 자체가 크리스천이 된다면, 이는 마치 호랑이 소굴에 들어가 호랑이를 쫓아내고 주인이 되는 격과 마찬가지로 대단히 고급 전략인 것이다. 그런 연유로 성경에 예수가 죽게 된 책임을 유대인들에게 돌리고 로마인들은 죄가 없다는 테마를 만들었다고 많은 학자들이 결론을 짓고 있다.
그런데 당시의 유대인 사회에는 여러 부족이 있는 것은 물론 수많은 파벌에 파벌이 있었고, 그룹과 조직이 많이 있었다. 그 중에서도 신앙적으로나 정치적으로 가장 뛰어났던 부족으로 에세네(Essenes)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에세네 부족은 로마에 대하여 가장 격렬하게 반항하여 자유의 투사로 알려져 있고, 가히 혁명적이라 부를 수 있으며, 이들이 바로 마지막 일인까지 로마에 저항하여 싸운 ‘마사다’ 전투에서의 유대인들이었으며, ‘사해의 두루마리’를 간수했던 사람들로, 신앙을 가장 철저하게 지킨 독특한 부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성경에서는 다만 바리새(Pharisees)와 사두개(Sadducees) 두 부족만을 소개한 것은 매우 이상한 일이다. 또 성경에서는 이 두 부족을 모두 나쁘게 색칠하였다. 사두개는 사원의 승려계급으로 로마 당국과 협잡한 부족이었고, 바리새는 철저하게 로마에 항거한 부족으로 색칠하여 로마인으로 하여금 마음의 위안을 받도록 한 것이다. 이것은 예수가 바리새인들과 많은 접촉은 했지만 그리스도교를 로마 사람들에게 팔기 위하여 바리새인들을 저버린 것이 아닌가 한다. 이에 대하여 어떤 학자는 복음서를 쓴 복음주의자들이 가장 애국자였던 에세네 부족 사람들을 아끼고 싶었던 증거라고 단언하였다. 그리고 예수가 질로트인이었을 것이라고 주장을 하는 사람도 있다. 다른 유대인들과 달리 질로트인들은 가슴에 칼을 품고 다닌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 이유는 질로트가 유독 로마에 무장 항쟁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로마인들은 질로트를 ‘레스타이’, 즉 강도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한다. 질로트(Zealots)라고 하는 무리는 유대인 부족의 이름이 아니고, 로마에 항거한 혁명조직체였다. 이는 바리새인과 에세네인들이 주동이 되어 ‘갈릴리의 유다(Judas of Galilee)’라는 랍비가 처음 조직한 무장 지하조직이었다. 마태복음 10장 34절에 보면 예수는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것이 아니고 검(劍)을 주러 왔다고, 즉 전쟁을 위해 왔다는 말을 했으며, 누가복음 22장 36절에 보면 검이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서라도 검을 사라 하였다. 실제 예수가 잡혀갈 때 시몬 베드로는 검을 갖고 있었고, 그 검을 휘둘렀던 것이다. 이러한 점으로 볼 때 예수가 화평주의자였다면 갖고 있던 칼도 버렸어야 옳지 않았을까? 어째서 그들은 평상시에 칼을 품고 다녔는가? 예수가 검으로 무장하라고 했고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것이 아니었다면, 원수를 사랑할 정도의 평화주의자였다는 논리를 믿기에 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예수가 질로트였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예수의 아들로 여겨지는 바라바를 질로트의 별명으로 불려지던 레스타이라고 불렀고, 이 말의 뜻은 강도였다고 이미 설명하였다. 그리고 질로트를 부르는 또 하나의 별명은 시카리(Sicarii)라는 말이다. 이 어휘는 질로트 중에서도 특별히 조직된 자객(刺客)조직인 아사신(Assassins) 단원을 말하는, 특별 신분으로 여겨지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었지만 흔히 로마인들이 레스타이와 혼동하여 사용하던 단어였다. 그런데 예수의 제자 유다(Judas)를 시카리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한다. 그리고 시몬 베드로는 마가가 쓴 마가복음의 희랍어 원본에 의하면 ‘카나나이오스(Kananaios)’라고 불렀다 한다. 이 단어는 예수와 그의 주변 사람들이 사용하던 아람어로서 질로트를 부르는 용어였다 한다. 그런데 이 단어를 ‘킹 제임스판 영어 성경’으로 번역하면서 ‘카나나이오스 베드로’를 ‘카나안나이트(Canaanite)’, 즉 ‘가나안 사람 베드로’로 오역을 했다는 것이다. 이를 확인하는 문구는 누가복음에서 시몬 베드로가 질로트 사람이었다고 명시하였고, ‘킹 제임스판 영어 성경’에도 질로트 사람 시몬(Simon the Zealot)이라고 하였으니, 예수는 질로트 사람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질로트가 속한 에세네(Essenes) 부족은 대단히 중요한 부족이었다. 예수가 활동할 당시 그 지방에 있던 바리새나 사두개 부족과 마찬가지로 중요한 부족이었기에 예수가 이들과 접촉이 없었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예수에게 세례를 준 요한은 에세네인이었다. 이에 대한 학자들의 해설은 에세네나 질로트라는 말을 성경에서 빼 없앴을 것이고, 예수와 너무 가까운 사이였기에 속일 수도 없었고, 이들을 매도할 수도 없었을 것으로 보는 것이다. 당시 에세네 사람들은 갈릴리와 사해 부근 지역을 비롯하여 타지방에도 널리 퍼져 살던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은 기원전 약 200년경부터 이 부근에 살면서 구약성경을 역사적인 사실보다는 전설적인 내용으로 믿고 있었다. 그래서 이들은 전통적인 유대교를 거부하고 그노시스(Gnosis)주의의 이원론(二元論)을 선택하였다. 즉, 태양숭배사상과 희랍의 철학가 피타고라스(Pythagoras)의 사상을 절충한 것으로 여겨지는 종교를 선택한 것이다. 이들은 그노시스의 실천으로 병을 고치는 요법을 개발한 것으로도 유명하며, 금욕생활을 많이 하고, 순결을 뜻하는 흰옷을 입는 것으로도 유명하여 첫눈에 알아볼 수 있는 부족이었다. 얼마 전에 사해의 서쪽 해안인 쿰란(Qumran)에서 발견된 사해의 두루마리 문서는 이 사람들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이들은 다윗 왕의 후손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메시아가 올 것을 대단히 중요하게 믿은 사람들이었다. 이들이 말하던 내용이나 예수가 가르친 이야기는 어구까지 같을 정도로 서로 맞아 들어가는 형편이다. 이들은 다윗 왕의 혈통을 대단히 중요시하였으며, 그런 연유로 이들이 생각했던 그리스도교는 혈통위주의 신앙이었다. 그래서 예수와 가까웠고, 예수가 죽을 때 그의 옆에 이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이 사람들은 보통 때도 그러하지만 특별한 일이 있을 때에는 거의 반드시 흰옷을 입었고, 예수도 죽어 무덤에 갈 때에 흰옷을 입었다. 마태복음 28장 3절에 천사 같은 어떤 사람이 눈같이 흰옷을 입었다 하였고, 마가복음 16장 5절에 “무덤에 들어가서 흰옷을 입은 한 청년…”이라 하여 무덤 속에 예수가 아닌 흰옷을 입은 사람이 있었음을 말해 주며, 요한복음 20장 12절에는 “흰옷을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를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운운하며 흰옷을 입은 사람들이 예수의 시체 주변에 있었음을 시사하였다. 만일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조작극이라 믿는다면, 분명히 의료기술이 발달했던 에세네 의술사가 계속 예수의 옆에 있어 십자가상의 예수에게 묘약을 먹이고 며칠 후에 되살리는 작업을 했다는 신빙성을 심어 주는 일이다. 이들이 에세네인이었기 때문에 흰옷을 입었고, 이 사람들을 모르는 다른 사람들은 이들을 천사로 오인했든가, 후에 복음서를 쓰는 사람들이 예수를 신격화하기 위해 천사로 쓴 것이 아닐까 추리할 수 있다. 여하튼 예수가 에세네 사람으로 질로트와 깊은 관계가 있었음을 이런 점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고 본다. 그리고 에세네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는 요세푸스(Flavius Josephus)의 기록을 살펴보면 가히 알 수 있는 일이다. 요세푸스는 ‘마사다의 전투’ 장에서 자세히 설명했는데, 그는 유대인들 사회의 배경과 전투사를 주관적으로 기록한 사람으로 유명하며, 당시의 유대인에 대한 그의 기록이 가장 자세하기 때문에 역사적 가치를 높이 평가받고 있는 터이다. 그의 설명에 의하면 에세네 부족은 의술(醫術)이 매우 발달되어, 약초(藥草)나 다른 광물질 등을 의약재로 사용하는 일에 굉장히 깊은 지식을 갖고 있다고 하였다. 이것은 후일에 학자들의 조사에 의하여 ‘에세네(Essenes)’라는 말 자체가 희랍어로 병을 고치는 사람이란 뜻의 ‘에세노이(essenoi)’라는 말에서 지어진 것이며, 이 말은 예수를 위시하여 에세네인들이 사용하던 아람어로 같은 뜻의 아사야(asayya)라는 말이 희랍어로 번역되면서 지어진 이름이라고 풀이를 하고 있다.
또 창세기 6장 2절에 보면, ‘하나님의 아들들’이란 말이 나온다. 여기에 나오는 ‘하나님의 아들들’이란 도대체 누구를 칭하는 것이며, 또 이 하나님의 아들들은 사람의 딸들과 결혼을 한다고 씌어져 있다. 그런데 1917년에 발행되었던 유대인의 구약성경에는 하나님 ‘God' 대신에 ‘엘로힘’의 아들들(sons of Elohim)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그리고 4절에 보면 ‘네필림’(Nephilim)이란 말이 나온다. 이 ‘네필림’이란 뜻은 과연 무엇인가? 이것은 개신교에서 사용하는 ‘킹 제임스’(King James)판이나 ‘신 국제’(New International)판 한글 성경에 씌어져 있는 단어이고, 천주교에서 사용하는 성경 ‘두에이-라임스’(Douay-Rheims)판에 보면 ‘거인들’(giants)이라 씌어져 있다. 그러나 한글 ‘킹 제임스’판에는 토를 달고 ‘장부들’(giants)라고 되어 있고 영어판 ‘킹 제임스’판에는 천주교 성경과 마찬가지로, 그대로 ‘giants'로 되어있다. 천주교 판 성경의 설명으로는 여기서 말하는 ‘거인’들이란 체구가 클 뿐 아니라, 광폭하고 야만스러워 단순히 잔인함과 육욕(肉慾)만 있는 괴물에 해당한다고 하였으며, 대홍수가 있을 때까지의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모두 이런 상태였다고 한다. 그런데 히브리어로 보면 ‘네필림’이란 말은 ‘고대의 영웅’ 또는 ‘명성을 떨친 남자’들이라 하였으며, 또 민수기 13장 32-33절에는 신장이 거대한 자들이 네필림의 후손 아낙(Anak)의 아들들 운운하였다. 아낙이라고 하는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6000년 전 메소포타미아 지방에 있던 슈메르(Sumer)때부터 내려오는 그들의 신앙에서 나오는 이야기이다. 지금 우리가 아는 크리스천이라는 것이 유태인의 원조 히브리 사람들에게서 나온 것과 같이 히브리 사람들의 신앙은 슈메르에서 나온 것이다. 슈메르에서는 하늘에서 신(神)이 내려왔고 이 신들을 ’아누나키‘(Anunnaki) 또는 아낙(Anak) 또는 아나킴(Anakim) 등의 이름으로 불렀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한 것들이 바로 아누나키인 것이다. 그리고 이들이 사람의 딸들과 교접하여 난 자식이 네필림이라 하여 아담의 자손들과 구별했다고 한다. 여기서 알아차릴 수 있는 점은 하나님의 아들들은 사람이 아니면서 사람의 딸들과 혼인했다고 하였고, 여기에서 나온 자식들이 네필림이라는 거인들이었으며, 이들은 무지막지한 야만이라는 점이다. (사실은 ‘네필림’의 아들들, ‘나피뎀’-Naphidem이 야만이었다는 설도 있다.) 여기서 만일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면 네필림의 아버지들과 (또는 ‘네필림’과) 형제 관계이던가, 아니면 서로 다른 하나님 즉, 하나가 아닌 여러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어야 한다.
바로 이 문제를 갖고 한 평생을 연구한 학자들이 있다. 그 중에서도 권위자를 말한다면 ‘싯친’(Zecharia Sitchin)과 ‘폰다니켄’(Erich von Daniken) 두 사람을 첫 손으로 꼽을 수 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의 주장은 하나님의 아들들이란 외계인(外界人)이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요즈음 한참 논쟁하고 있는 UFO의 주인공이란 말이다. 두 사람을 위시하여 많은 학자들이 동의하는 점은 ‘니비루’(Nibiru)라는 별에서 왔다는 것이다. 그들의 설명을 간단하게 표현하면 위에 말한 ‘아낙’(Anak), 또는 ‘아나킴’(Anakim), 또는 ‘아누나키’(Anunnaki)는 모두 같은 단어를 달리 표현한 것이며, 그 뜻은 바빌로니아 전에 있던 ‘슈메르’(Sumer)라는 나라의 말로 “하늘에서 땅으로 온 이들”이란 뜻이라 한다. 그 때 ‘슈메르’ 사람들은 그들이 ‘니비루’(Nibiru)라는 별에서 지구로 왔다고 하였다. 그들이 연구한 결과로는 45만 년 전에 우주선을 타고, 별과 별 사이를 왕래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얄팍한 과학을 배운 현대의 사람들은 대부분 불가능한 해괴망측한 이야기라 할 줄 안다. 1930년 ‘플루토’(Pluto)를 발견하고 아직도 태양계에는 위성이 또 하나 있다고 했을 때 과학계는 떠들썩하였다. 그런데 그 고대의 ‘슈메르’ 사람들은 현미경도 망원경도 컴퓨터도 없는 시대에 이미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역사에서 수백 년만 거슬러 올라가도 천체의 중심은 지구로 알고 있었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지구는 태양에서 수성(Mercury)과 금성(Venus)에 뒤이어 세 번째의 행성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역사도 잘 알지 못하고 있던 6,000여 년 전 ‘슈메르’시대 사람들은 지구는 7번째 행성이라고 기록하였던 것이다. 즉, 이 사람들은 태양계를 밖에서부터 계산했다. 첫째는 명왕성(Pluto), 둘째 해왕성(Neptune), 셋째 천왕성(Uranus), 넷째 토성(Saturn), 다섯째 목성(Jupiter), 여섯째 화성(Mars) 그리고 일곱 번째가 유일하게 금(金)이 있다는 지구였었다. 알다시피 명왕성은 1930년에 발견하였고, 해왕성은 1846년에, 천왕성은 1781년에 각각 발견하였었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이에 대한 유일한 답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태양계 밖에서 지구로 오면서 행성을 세어서 지구는 일곱 번째라고 지구의 사람들에게 알려 준 것이라고 밖에 할 수 없는 일이다.
지금 그리스도교 교회에서 가르치는 내용은 성경을 갖고 성부, 성자, 성신 세 명의 개성이 각각 다른 신(神)들이 본질적으로 똑같기 때문에 하나의 신을 믿는 삼위일체라는 유일신주의(有一神主義-monotheism)이다. 이것은 이해하는데 좀 복잡성이 있다. 그러나 구약을 기본으로 하는 이스라엘의 사회상을 관찰하면 ‘단일신주의’(單一神主義), ‘헤노티이즘’(henotheism)이었다. 즉, 다른 신들을 인정하면서 신 하나만 섬기는 신앙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예수 처형 이래 특히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지방에서 이미 사회에 뿌리를 내린 헬레(희랍)문화를 갖고 있는 로마 제국의 사회에 포교활동을 하면서 ‘신-플라톤주의’(Neo-platonism)와 융합하는 세력과 독자적인 교리를 창조해 내는 파가 갈려 후자가 승리하였고, 이것이 지금 우리가 아는 일반적인 그리스도교이다. 그리고 전자는 신 하나만 인정하고 신봉하는 순수한 유일신주의의 크리스천과 ‘헤노티이즘’계의 크리스천으로 나뉘어져 존재하고 있으며, 앞의 순수한 유일신주의자들은 조직적인 박해를 받으면서도 겨우 명색을 유지하고 있고, ‘헤노티이즘’계는 아직도 신비로운 존재로 그 정체를 알기 어려운 상태이며, 이제야 차차 그들의 교리를 사회에 알리기 시작할 정도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그노시스’인 것이다.
다시 위에서 말한 하늘에서 내려 왔다는 슈메르의 아누나키 이야기가 나온 길에 에녹서( Book of Enoch) 중에서 ‘거인서’(巨人書-Book of Giants)에 소개된 네필림에 대한 설명도 참고해 보자. 악한 천사의 지도자라 할 수 있는 ‘셔니하자’(Shernihaza)라는 천사의 장난으로 하늘에서 내려 온 약 200명 정도의 천사들로 하여금 사람의 딸들과 교접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부자연적인 교접으로 태어난 자식들은 450척이나 되는 거인들, 즉 네필림이었으며, 이들은 인간들을 못살게 휘두르며 인간에게 악을 가르쳤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들을 모두 홍수로 이루어지는 마지막 심판 날까지 이들을 가두어 두고 지구를 파괴하려 했던 것이며, 에녹은 하나님과 땅에 떨어진 천사들 사이에서 중간 역할을 하여 화해시키려 하였으나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는 이야기이다. 이 아누나키의 이야기는 바로 인간의 창조설의 근원이 되는 것이고 19세기에 와서 다윈(Charles Darwin)이란 사람에 의하여 진화론이라는 것이 과학이라는 간판으로 우리에게 소개되어 현대인들은 모두 학교에서 배우게 된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크리스천으로 신앙을 가지려면 창조론을 믿어야 한다. 만약 진화론을 믿거나 그 논리에 솔깃하면 그 사람은 이미 크리스천으로서 하나님의 벌을 받든가 버림을 받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창조론은 하늘에서 내려 온 인간의 조상과 진흙으로 만들어 진 아담이라는 인간의 조상과 두 가지로 또 갈라지게 된다. 일반인들의 귀에 익은 독일 나치 당원들이 우월한 인간이라고 했던 ‘아리안’(Aryan)족, 즉 노랑머리의 백인들은 바로 아누나키의 후손들이다. 그들은 크리스천이라 했지만 진흙으로 만든 아담의 자식들이 아니고 하늘에서 내려온 아누나키의 자손들이기 때문에 아담의 후손들보다 우월하여 그들이 세상을 다스려야 하고, 나머지 즉 아담의 자손들은 일하는 꿀벌처럼 그들의 노예가 되어야 한다고 믿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상은 내 놓고 말을 하지 않아 잘 모르고 있지만 사실은 지금도 건재해 있는 사상이다. 언젠가는 이들이 다시 일어나 하나님이 아니라 이들의 계획으로 만들어진 말세에 세상의 인구가 노아의 홍수 때 비슷하게 다시 조절될 지도 모르는 일이다. 여기서 귀띔해 줄 이야기는 아리안 족으로 표현되는 “으뜸인종”(Master Race)을 독일 사람들을 중심으로 생각하면 큰 실수라는 점이다. 그리고 특히 한국 사람들이 알아 둬야 할 일은 아리안 족만 하늘에서 내려 온 것이 아니라, 한국 사람도 하늘에서 내려 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늘에서 환웅(桓雄)이 태백산에 내려와 환웅천황(桓雄天皇)이 되고, 그가 인간이 된 곰과 결혼하여 낳은 자식이 단군(檀君)이 되었으며, 한국인들은 이 단군의 자손들이기 때문에 한국 사람들도 원조는 하늘에서 내려온 종자인 것이다. 그런데 아리안의 아누나키는 니비루라는 행성에서 온 외계인이지만 환웅은 하나님(桓因-帝釋天王)의 아들로 하늘 아래 세상에 내려와 종자를 퍼트렸으니 아누나키 보다는 더 우월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퍼트린 후손과 동등한 위치이니 일반 크리스천 보다는 훨씬 격이 높은 지위에 있지 않나 한다. 그래서 나의 생각으로는 한국 사람이라면 마땅히 단군을 섬겨야지, 우리 것은 팽개치고 엉뚱한 유태인의 하나님을 빌려 섬긴다는 것은 생각해 볼 문제가 아닌가 한다. 이것은 마치 유태인들이 단군을 섬기는 것과 비유된다고 생각한다. 아누나키의 이야기는 위에서 말한 것처럼 슈메르 시대 때 슈메르 사람들이 믿던 일이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불과 50년 전까지만 해도 ’슈메르’라는 나라가 존재해 있었다는 것을 하나의 전설로 믿었었다. 그것이 이제는 완전히 역사가 된 것이다. 그래서 단군의 이야기를 신화로 생각하는 일도 언젠가 명석한 고고학자에 의하여 한국의 역사로 변환될지 누가 알겠는가? 전 세계의 신화를 찾아보면 조상이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이야기는 슈메르와 한국을 제외하고는 별로 찾지 못할 것이다. 희랍신화는 신들이 사람들과 함께 생활을 했고, 대개 다른 지역의 신화들은 조상이 조개(具)나 알(卵) 같은 것에서 태어났다고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나님의 후손인 한국인들은 모두 함께 생각해 볼 일이라 생각한다.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의 근원
필자가 오랫동안 궁금했던 것은 유대교나 그리스도교가 최소한 구약성경을 함께 소중히 여긴다는 것이었다. 물론 그리스도교라고 하면 제일 먼저 생각되는 것은 바이블(Bible), 성경을 생각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또 유대교도 구약을 믿는다고 한다. 예루살렘 성지에 가면 회교도와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모두 함께 성스러운 장소로 여기고, 그 때문에 서로 주도권을 갖겠다고 또는 자유로이 들어가서 성지순례를 하겠다고 서로 싸움들이다. 이런 싸움의 유래는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고, 그 뿌리는 천 년 이상 오랜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것 같다. 그러나 필자가 주목하고 싶은 내용은 세상에서 가장 잘 조직된 이 세 종교들이 모두 근원이 같다는 점이다.
우선 유대인의 조상이라고 하는 아브라함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아브라함은 두 명의 아내를 갖고 있었는데 첫째 아내는 사라(Sarah)라는 여인이었고, 사라가 오랫동안 아이를 배지 못하므로 자식을 낳기 위해 사라가 남편에게 바친 자신의 이집트인 몸종 하갈(Hagar)이 있었다. 하갈은 곧 ‘이스마엘’이라는 아들을 낳았고, 13년 후 90세가 된 사라는 드디어 이삭(Isaac)이라는 아들을 낳게 된다. 그리고 이삭은 야곱(이스라엘)과 에서(에돔)를 낳게 되고, 야곱은 열 두 명의 아들을 낳게 되는데, 이 열 두 명의 아들들이 오늘날 현대의 유대인 열 두 부족이다. 야곱의 열 두 아들 중에 셋째 아들 레위의 후손 중에서 모세가 태어나고, 모세는 파라오의 딸에게 양자로 입적되어 파라오의 총애를 받고 있었으나 자기가 유대인의 피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는 핍박받는 유대인들의 불우한 입장을 보다 못해 그들을 이끌고 기원전 약 1230년경 그 유명한 대탈출을 하게 되었다. 그는 곧 통치자로서 히브리의 법률이라는 십계명을 만들고 유대교의 시조가 되었다 한다. 다음에 레위의 동생, 즉 야곱의 넷째 아들 유다의 후손 중에서 다윗이 태어나 소위 거인 골리앗을 돌팔매로 죽이고 왕이 되었으며, 그 후손 중에 예수가 탄생하게 되었다. 이는 모세 이후 천 년 이상이 지난 다음이었다. 모두 알다시피 예수는 그리스도교의 시조가 된다. 그리고 하갈의 아들 이스마엘도 열 두 자식을 낳게 되었고, 이스마엘은 메카로 이주하였으며, 그 아들 중 케다(Quidar)라는 사람이 아랍 종족의 시조가 되었다 한다. 그리하여 그 후손 중에서 마호메트라는 사람이 서력 570년에 태어나 이슬람교를 창시하였다는 배경 이야기이다. 결국 유대인이나 아랍인이나 예수를 섬긴 애초의 사람들은 모두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친척관계라는 이야기가 되며, 지구상 굴지의 이 세 종교는 서로 많은 연관성을 갖고 있는, 말하자면 서로 사촌간의 종교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은 서로 반목을 하고, 서로 자기네들 하느님의 정의를 위해 처절한 전쟁을 하며, 그 하느님 때문에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살생을 지금도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천 수백 년이 지난 지금에도 많은 세상 사람들이 그들의 신앙을 받아들여 현재 한국에도 그리스도교가 뿌리를 깊게 박아 창궐을 하고 있고, 이슬람교도들도 불어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크리스천이나 유대교도들은 함께 자랑삼아 하는 이야기가 있다.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던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서기 66부터 약 7년간의 유대인들의 봉기 때, 최후의 일인이 죽을 때까지 유대인들이 로마군에 저항을 하며 싸웠다는 유명한 마사다(Masada) 전투에 대한 이야기를 독자들은 익히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이는 마치 설악산의 울산바위 비슷하게 생긴 우뚝 솟은 자연적 요새에서 치러진, 옛날 임진왜란 때 부녀자 모두 합세하여 싸웠다는 행주산성 싸움보다 몇 배는 더 처절한 전쟁이었던 것 같다. 로마군에 완전 포위되어 전투에 패배하든가 굶어 죽을 것이 다만 시간문제임을 뻔히 알고 있는 유대인들은 그런 줄 알면서도 항복을 거절하고 부녀자와 어린이들까지 모두 싸울 수 있는 데까지 싸웠고, 나중에는 모두 자살하여 이를 점령한 로마 군인들도 존경해 마지않았다고 한다. 그 유대인들은 소위 젤로트(Zealot, 열심당)란 별명을 가진 에세네(Essene)라는 유대인들이었고, 마사다는 ‘사해의 두루마리 문서(The Dead Sea Scrolls)’가 발견된 사해의 서편 연안 ‘쿰란(Qumran)’ 지역에 있는 한 언덕이었다. 에세네(Essene) 부족 또는 일명 젤로트라 부르는 이 유대인들은 절대 항복을 모르고 호전적인 것으로 유명했다. 그리고 젤로트계 중에 아사신(Assassin)이란 비밀조직이 있었다. 아사신이란 말은 일본의 닌자처럼 자객(刺客)이라는 뜻이다. 로마제국의 식민지 격인 팔레스타인 지역에는 물론 많은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는데, 당연히 유대인들 중에는 로마인에게 아첨하여 편하게 사는 민족반역자 같은 사람들이 적지 않게 있었다. 마치 일본 치하에서 흔히 있던 한국의 친일파 격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로마인보다 더 미운 사람들이 이들 반역자들이었다. 이런 사회에서 아사신 회원들은 로마 요인들을 위시해서 유대인 민족반역자들을 죽이는 암살단이었다. 아사신의 다른 이름을 ‘시카리(Sicarii)’라고도 했는데, 이 뜻은 단도(短刀)라는 뜻으로 아사신 조직원들은 가슴속에 단검(短劍)을 품고 다니면서 장터 같은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에서 대중과 어울리면서 요인을 죽였다고 한다.
잠깐 ‘아사신’이라는 이 조직에 대하여 좀더 이야기해 보기로 하자. 이 암살단은 서기 50년에서 70년 사이 유대인들이 로마의 학정에 반발하여 일어난 봉기 때 조직되었고, 같은 유대인들을 많이 죽였다. 사도행전 20장 3절과 23장 12절에 사도 바울을 암살하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바울을 죽이려고 하던 유대인들이 바로 이 아사신 조직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유래를 갖고 있는 이 암살단 조직은 11세기에 들어서서 이슬람교의 이스마엘계 사람인 하산(Hassan-e Sabbah)이라는 사람에 의하여 재조직된다. 여기서 주목되는 이야기는 서구 유럽인 로마 가톨릭계의 십자군 원정 때 조직된 템플라 기사단(Knights Templar)이라는 프리메이슨 조직의 결성시기와 비슷하다는 것이다. 전에 펴낸 ‘그림자 정부’ 상권인 정치편에서 프리메이슨에 대하여 상세히 기술하였지만, 성지를 회복하기 위해 젊은 청년들이 자진하여 십자군에 지원할 때 가난한 중의 신분으로 만든 ‘템플라 기사단’은 적국이라고 할 수 있는 이슬람계의 아사신과 비밀리에 손을 잡고 크리스천들이 성지순례를 할 때 그들의 안전을 보장하는 일종의 관광사업을 벌였다. 그들은 안내비를 받아 돈을 벌었고, 역사상 최초의 국제은행을 창설하였다. 이는 원거리 여행 시 여러 가지 잡범들 때문에 피해의 위험이 많은 상황을 감안하여, 성지까지의 길목 곳곳에 지점을 차려서 순례자들이 고향의 은행에 돈을 저금하고 다음 은행지점에 도착할 때까지 필요한 약간의 노자와 입금한 증서만 몸에 지닌 채 여행하면 쓸데없는 부피와 무게를 줄일 수 있을 뿐 아니라 여행하기도 편하고 안전하였다. 그리하여 성지순례자들이 모두 이용했던 아주 용이한 은행사업을 교황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으면서 시작했던 것이다. 또 이 템플라 기사단은 ‘헤롯 왕의 신전’과 솔로몬 왕의 신전이 있던 옛 터에서 9년 동안 탐사작업을 한 결과 많은 보물을 찾게 되어 큰 부자가 되었고, 그 돈으로 그들은 왕이나 영주들이 성을 쌓고 궁전을 짓는 데 필요한 돈을 융자도 해 주었다. 프리메이슨이라는 것이 원래 석공(石工)들이었기 때문에 건축공사도 겸하여 이들이 청부맡았던 것이다. 결국 이슬람의 아사신 조직이나 그리스도교 계통의 템플라 기사단이 내적으로 서로 통할 수 있었던 것은 서로 유대계 신분이라는 유대감이 강했고, 또 그렇기 때문에 프리메이슨 조직은 바티칸과 항상 대결상태에 있으면서 애증관계를 엮어 나가는 미묘한 상황을 연출한 것으로 짐작된다.
하산은 아사신 조직을 토대로 1090년 다이람(Daylam)에 있는 알라무트(Alamut) 요새를 점령하고 이어서 1094년에는 파티미드 왕조(Fatimid)를 분리시킬 정도로 강력해졌으며 이로부터 수세기 동안 중세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전성기를 갖게 되는데, 1100년경에는 중국의 삼합회(三合會)나 황건적(黃巾敵) 같은 조직, 또 마피아 같은 인도(印度)의 범죄조직에도 깊이 관여하게 된다. 하산의 뒤를 계승한 현재의 이슬람교의 이스마엘파 지도자는 아가 칸(Aga Khan)이라는 사람이다. 아가 칸이란 사람이 누군지 아는 사람은 머리를 끄덕이게 될 줄로 믿는다. 이 아사신 조직은 프리메이슨과 마찬가지로 일반 사회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독특한 제식 등 여러 가지 전통을 갖고 있다. 아사신은 해시시(Hashish)라는 별명을 갖고도 있다. 해시시는 마리화나인데, 이는 대마초 잎사귀를 말려 담배처럼 피울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요즈음 라이브 댄스장에 도리도리인가 엑스터시(ecstasy)인가 하는 환각제가 약방의 감초처럼 따라다니는 연유는 근래에 새로 생긴 이상한 풍습이 아니라, 장기간의 역사를 갖고 있는 일종의 제식과 비슷한 유래를 갖고 있는 것이다. 아사신은 1100년경부터 인도에서 습득한 ‘수피(Sufi)’ 철학의 ‘수피 댄스(Sufi dancing)’라는 춤을 추면서 마리화나를 피우는데, 환각된 상태에서 점점 빠른 리듬의 박자에 맞추어 춤을 추노라면 쉽게 신비한 경지에 도달한다고 한다. 물론 이러한 경지에 도달할 수 있는 사람들은 해시시의 초보자들은 아니다. 대개 십대 청소년들인 아사신 입당 지원자들이 오면, 해시시를 넣어 만든 맛있는 요리로 일단 대접한다. 음식을 다 먹고 환각상태에 빠진 이 사람들을 요염한 여자들이 온갖 봉사를 해 주는 황홀의 정원으로 옮겨 달콤한 극락(極樂)의 맛에 흠뻑 빠지게 만든다. 이러한 과정을 거친 입단 지원자들은 극락의 열쇠를 갖고 있다는 하산에게 충성을 맹세하게 된다. 그리하여 일단 단원이 된 자객들은 다른 ‘샤(Shah)’ 또는 왕의 궁중으로 취직하여 들어가 그 주인에게 여러 해 동안 충성을 다하여 가까이 모시는 지위로 승급을 하게 된다. 그리하여 권력자들의 가신이 된 아사신 암살단원들은 각 지방에 침투하여 충성을 보이다가, 권력자들이 하산에 대한 적의심을 품고 있는 기색이 보이면 기회를 보아 그들의 목을 따 죽이는 것이 임무였었다. 그리하여 모두들 하산을 몹시 두려워하게 되었으며, 또한 하산은 “아무것도 진리가 아니며, 모든 것은 허락된다”라는 명문을 내걸고 가르치기도 하여, 어떤 면에서는 신비의 허무주의(nihilism)를 주장한 면도 있었다.
유대교라는 것은 일반적으로 유대인의 피를 가진 사람만이 가입할 수 있는 종교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소수에 속하는 유대교 신자나 성직자들은 정의를 달리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의 주장은 유대교를 믿는 사람들은 인종의 차별 없이 모두 유대인이라고 한다. 여하튼 대체적으로 유대인의 혈통이라고 인정되는 사람들이 유대교 신자라고 하면 틀림은 없을 줄로 안다. 이미 설명한 바와 같이 유대인의 혈통을 어디에 금을 긋고 분별하는가 하는 것이 큰 과제거리이기도 하다. 심지어는 이집트인에게도 많은 유대의 피가 섞여 있는데, 이는 많은 유대인들이 이집트에 살고 있었다는 기록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야곱의 열한 번째 아들 요셉은 아버지가 늦게 난 아들이라 남달리 귀여움을 받자, 심한 질투를 느낀 형들의 모함으로 이집트 상인에게 팔려 이집트에 가게 되고, 꿈 해몽을 잘하는 덕택에 파라오의 신임을 받아 전 이집트의 자산을 관리하는 총책으로 봉직되었을 뿐 아니라, ‘온’ 제사장의 딸 아스낫과 결혼하게 되었다. 옛날에는 종교와 정치를 분리하여 종교의 우두머리와 정치의 우두머리를 동격으로 취급하였었다. ‘온’이라고 하는 곳은 태양신을 믿던 이집트에서 태양의 도시라고 부르는, 다시 말하면 신앙의 수도라고 할 수 있는 곳이었기 때문에 ‘온’의 제사장이라는 지위는 파라오와 맞먹는 지위였었다. 따라서 공주와 같은 신분인 아스낫과 결혼한다는 것은 모세가 파라오가 될 뻔했던 것처럼, 유대인인 요셉도 비슷한 대우를 받았다고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미국의 성서학자 킴볼(Glenn Kimball)의 주장에 의하면, 아스낫은 공주와 같은 신분이었을 뿐 아니라 친척관계도 되었었다는 것이다. 몇 촌인지는 몰라도 영어로 ‘cousin’ 관계였었다고 한다. 따라서 ‘그림자 정부’에서도 잠깐 논하였지만 실제 유대인이라는 인종은 아랍인 속에 무척 많이 있으리라 짐작되며, 아랍인은 위에서도 잠깐 설명하였지만 결국 아브라함의 손자 ‘케다’의 자손들이고, 소위 오늘날 유대인이라고 부르는 민족은 아브라함의 배다른 자식의 후예라는 결론이 나온다. 그렇다면 서로 형제가 된다는 이야기이다. 그뿐이 아니다. 지금 우리가 스페인이나 포르투갈이라고 부르는 지역을 예전에는 ‘이베리아(Iberia)’라고 불렀고, 지금도 전체 지역을 ‘이베리아’ 반도라고 부르고 있다. ‘이베리아’라는 말뜻은 ‘히브리(Hebrew)’이다. 다시 말해서 유대인 땅이라는 말이다. 원래는 프랑스 남쪽 스페인과의 경계에 산맥이 있고, 그 고원지대에 사는 사람들을 ‘피레네(Pyrenees)’라고 불렀다. 지금은 그 산맥을 피레네 산맥이라고 부르지만 여기 살던 인종을 ‘이베리아’라고 했고, 이것이 퍼져 스페인, 포르투갈 전 지역을 이베리아 반도라고 부르게 된 것이며, 그 연유로 스페인의 국영 항공사 이름이 이베리아 항공사이다. 이들은 프랑스 남쪽의 산악지방으로 이주한 것뿐 아니라 발칸 반도에도 퍼져 있었는데, 구소련의 통치자 스탈린의 출신지인 발칸 반도의 ‘조지아(Georgia)’도 ‘이베리아’라고 불렀다. 왜냐하면 그 곳에도 유대인들이 집단으로 이주하여 코카시아 지방에 많이 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를 죽인 사두개인(Sadducees), 학자들을 많이 배출한 바리새인(Pharisees), 예수가 사용하던 ‘아람’어를 지금도 사용하며 아브라함의 고향인 우르(Ur)에서 예수의 원래 그리스도교를 믿고 있는 가루데인(Chaldees)과 함께 피레네(Pyrenees)라는 단어도 유대인의 한 종족을 의미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유대인들이 퍼져 있는 곳은 이 곳뿐만 아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에는 ‘렘바(Lemba)’라는 한 종족이 있다. 이들은 외양으로는 흑인이지만 유대교의 예식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분명한 유대인들이다. 하도 신기하여 DNA 조사를 한 결과 승려계급인 코헨(Cohen)이라는 가문의 그것과 일치되는 것이 증명되었다. 인도에도 마니푸르(Manipur) 지방과 봄베이에 마나세(Manaseh)라는 유대인 종족이 살고 있으며, 파키스탄의 파탄(Patan)과 마드란(Madran), 중국의 가이펭, 우즈베키스탄의 부카라, 아프가니스탄의 콴다하, 미얀마, 심지어는 일본에도 많은 유대인들이 있어 정치에도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위치에 있다고 한다. 1925년 니혼 대학교의 교수 후지사와 지카오는 그의 저서 ‘일본인과 유대인의 정신적 문화적 유사점’이란 책에서 일본 천황도 유대인의 피를 받았다고 주장하기도 했고, 1854년 요코하마, 나가사키를 개항하였을 때 많은 유대인들이 이주해 왔으며, 그 중에도 ‘사순(Sassoon)’ 가문이 유명하다고 한다.
따라서 주로 유대인으로 구성된 유대교와 이슬람교와 그리스도교, 이 셋은 같은 신령(神靈), 즉 하느님을 믿으면서 각각 이름을 달리 부르고 있으며, 인간들끼리 자의적으로 판단하여 서로 다른 신을 신봉하고 있는 양, 서로 살상을 하고 용납을 못하고 있다. 더욱이 예루살렘에서 이 세 종류의 종교 신자들이 한 자리에 와서 성지순례를 하고 있으면서도 서로 죽이고 있으니 이를 어떻게 생각해야 옳은가?
또 유대인들은 프리메이슨의 중추를 이루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림자 정부’에서 역설한 것처럼 미국은 프리메이슨이 세운 국가이고 이들이 전세계의 역사를 만드는 데 대단히 큰 역할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믿는다면, 그 힘에 대적할 수 있었던 바티칸의 투쟁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며, 그 바티칸의 영향력 안에서 혁명을 일으킨 종교개혁의 세력을 우리는 개신교 또는 프로테스탄트라고 부르고 있음도 알아야 한다. 프리메이슨에 가입하려면 가장 중요한 조건 중의 하나가 신(神)을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신은 어떤 신이건 상관이 없다. 신을 믿는 사람들은 대개 어떤 종교단체에 속해 있을 것이다. 그리고 프리메이슨들은 소속된 교회에서 교회활동을 하는 것을 적극 권장하고 있다. 이것이 신앙을 가지라고 하는 의미에서 만든 규칙인지는 분명치 않다. 혹시 ‘아사신’ 조직에서처럼 모든 세력단체 내부에 들어가 충성분자가 되고 신임을 얻음으로써 중요 인물이 되어, 첫째 주체세력의 행동을 관찰하고, 둘째 그 조직을 운영할 수 있는 지위에 달하였을 때, 더욱 큰 죽음으로써 충성을 맹세한 다른 조직의 목적을 위해 일하도록 하기 위해 만들어진 규칙은 아닐까? 생각해 볼 문제이다. 이러한 내용은 ‘시온의 칙훈서’에 자기네들은 마치 수백 개의 팔이 달린 비슈누 신(神)처럼 팔 하나하나가 각 조직에 파고들어가 정탐을 하고 조정을 한다는 이야기가 담겨 있다.
성경 속의 유대인 부족
예수가 시작했다고 할 수 있는 그리스도교는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팔레스타인 주변에서 일어난 이야기이다. 그는 같은 동족인 유대인 속에서 활동했고, 같은 동족의 모함으로 로마 당국에 의해 처형되었다. 성경의 내용을 보면 예수가 로마 당국에 이렇다 할 죄를 지은 일 없이, 다만 유대인들의 청원에 의하여 십자가라는 가장 혹독한 형벌을 당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리고 예수가 없어지고 난 후에 그의 제자들이나 가족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복음 활동을 했기 때문에 그가 만든 종교가 세계에 퍼진 것이라 믿고 있다. 또 하나 분명한 것은 베드로, 바울, 마가, 도마 같은 예수의 제자들이 선교의 방향을 유대인에 두지 않고 로마인을 목표로 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방향전환은 여러 면에서 이해될 수 있는 일이다. 유대인은 당시 피지배민족으로서 압박받는 사람들이었고, 그리스도교 신앙 자체가 로마인들에게 위협이 될 수 있는 유대인들의 신앙이었기 때문에 유대인에게만 포교를 한다는 것은 멸종의 가능성을 의미했을 것이다. 반면에 로마인들을 상대로 포교하여 지배민족인 로마인들 자체가 크리스천이 된다면, 이는 마치 호랑이 소굴에 들어가 호랑이를 쫓아내고 주인이 되는 격과 마찬가지로 대단히 고급 전략인 것이다. 그런 연유로 성경에 예수가 죽게 된 책임을 유대인들에게 돌리고 로마인들은 죄가 없다는 테마를 만들었다고 많은 학자들이 결론을 짓고 있다.
그런데 당시의 유대인 사회에는 여러 부족이 있는 것은 물론 수많은 파벌에 파벌이 있었고, 그룹과 조직이 많이 있었다. 그 중에서도 신앙적으로나 정치적으로 가장 뛰어났던 부족으로 에세네(Essenes)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에세네 부족은 로마에 대하여 가장 격렬하게 반항하여 자유의 투사로 알려져 있고, 가히 혁명적이라 부를 수 있으며, 이들이 바로 마지막 일인까지 로마에 저항하여 싸운 ‘마사다’ 전투에서의 유대인들이었으며, ‘사해의 두루마리’를 간수했던 사람들로, 신앙을 가장 철저하게 지킨 독특한 부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성경에서는 다만 바리새(Pharisees)와 사두개(Sadducees) 두 부족만을 소개한 것은 매우 이상한 일이다. 또 성경에서는 이 두 부족을 모두 나쁘게 색칠하였다. 사두개는 사원의 승려계급으로 로마 당국과 협잡한 부족이었고, 바리새는 철저하게 로마에 항거한 부족으로 색칠하여 로마인으로 하여금 마음의 위안을 받도록 한 것이다. 이것은 예수가 바리새인들과 많은 접촉은 했지만 그리스도교를 로마 사람들에게 팔기 위하여 바리새인들을 저버린 것이 아닌가 한다. 이에 대하여 어떤 학자는 복음서를 쓴 복음주의자들이 가장 애국자였던 에세네 부족 사람들을 아끼고 싶었던 증거라고 단언하였다. 그리고 예수가 질로트인이었을 것이라고 주장을 하는 사람도 있다. 다른 유대인들과 달리 질로트인들은 가슴에 칼을 품고 다닌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 이유는 질로트가 유독 로마에 무장 항쟁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로마인들은 질로트를 ‘레스타이’, 즉 강도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한다. 질로트(Zealots)라고 하는 무리는 유대인 부족의 이름이 아니고, 로마에 항거한 혁명조직체였다. 이는 바리새인과 에세네인들이 주동이 되어 ‘갈릴리의 유다(Judas of Galilee)’라는 랍비가 처음 조직한 무장 지하조직이었다. 마태복음 10장 34절에 보면 예수는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것이 아니고 검(劍)을 주러 왔다고, 즉 전쟁을 위해 왔다는 말을 했으며, 누가복음 22장 36절에 보면 검이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서라도 검을 사라 하였다. 실제 예수가 잡혀갈 때 시몬 베드로는 검을 갖고 있었고, 그 검을 휘둘렀던 것이다. 이러한 점으로 볼 때 예수가 화평주의자였다면 갖고 있던 칼도 버렸어야 옳지 않았을까? 어째서 그들은 평상시에 칼을 품고 다녔는가? 예수가 검으로 무장하라고 했고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것이 아니었다면, 원수를 사랑할 정도의 평화주의자였다는 논리를 믿기에 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예수가 질로트였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예수의 아들로 여겨지는 바라바를 질로트의 별명으로 불려지던 레스타이라고 불렀고, 이 말의 뜻은 강도였다고 이미 설명하였다. 그리고 질로트를 부르는 또 하나의 별명은 시카리(Sicarii)라는 말이다. 이 어휘는 질로트 중에서도 특별히 조직된 자객(刺客)조직인 아사신(Assassins) 단원을 말하는, 특별 신분으로 여겨지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었지만 흔히 로마인들이 레스타이와 혼동하여 사용하던 단어였다. 그런데 예수의 제자 유다(Judas)를 시카리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한다. 그리고 시몬 베드로는 마가가 쓴 마가복음의 희랍어 원본에 의하면 ‘카나나이오스(Kananaios)’라고 불렀다 한다. 이 단어는 예수와 그의 주변 사람들이 사용하던 아람어로서 질로트를 부르는 용어였다 한다. 그런데 이 단어를 ‘킹 제임스판 영어 성경’으로 번역하면서 ‘카나나이오스 베드로’를 ‘카나안나이트(Canaanite)’, 즉 ‘가나안 사람 베드로’로 오역을 했다는 것이다. 이를 확인하는 문구는 누가복음에서 시몬 베드로가 질로트 사람이었다고 명시하였고, ‘킹 제임스판 영어 성경’에도 질로트 사람 시몬(Simon the Zealot)이라고 하였으니, 예수는 질로트 사람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질로트가 속한 에세네(Essenes) 부족은 대단히 중요한 부족이었다. 예수가 활동할 당시 그 지방에 있던 바리새나 사두개 부족과 마찬가지로 중요한 부족이었기에 예수가 이들과 접촉이 없었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예수에게 세례를 준 요한은 에세네인이었다. 이에 대한 학자들의 해설은 에세네나 질로트라는 말을 성경에서 빼 없앴을 것이고, 예수와 너무 가까운 사이였기에 속일 수도 없었고, 이들을 매도할 수도 없었을 것으로 보는 것이다. 당시 에세네 사람들은 갈릴리와 사해 부근 지역을 비롯하여 타지방에도 널리 퍼져 살던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은 기원전 약 200년경부터 이 부근에 살면서 구약성경을 역사적인 사실보다는 전설적인 내용으로 믿고 있었다. 그래서 이들은 전통적인 유대교를 거부하고 그노시스(Gnosis)주의의 이원론(二元論)을 선택하였다. 즉, 태양숭배사상과 희랍의 철학가 피타고라스(Pythagoras)의 사상을 절충한 것으로 여겨지는 종교를 선택한 것이다. 이들은 그노시스의 실천으로 병을 고치는 요법을 개발한 것으로도 유명하며, 금욕생활을 많이 하고, 순결을 뜻하는 흰옷을 입는 것으로도 유명하여 첫눈에 알아볼 수 있는 부족이었다. 얼마 전에 사해의 서쪽 해안인 쿰란(Qumran)에서 발견된 사해의 두루마리 문서는 이 사람들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이들은 다윗 왕의 후손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메시아가 올 것을 대단히 중요하게 믿은 사람들이었다. 이들이 말하던 내용이나 예수가 가르친 이야기는 어구까지 같을 정도로 서로 맞아 들어가는 형편이다. 이들은 다윗 왕의 혈통을 대단히 중요시하였으며, 그런 연유로 이들이 생각했던 그리스도교는 혈통위주의 신앙이었다. 그래서 예수와 가까웠고, 예수가 죽을 때 그의 옆에 이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이 사람들은 보통 때도 그러하지만 특별한 일이 있을 때에는 거의 반드시 흰옷을 입었고, 예수도 죽어 무덤에 갈 때에 흰옷을 입었다. 마태복음 28장 3절에 천사 같은 어떤 사람이 눈같이 흰옷을 입었다 하였고, 마가복음 16장 5절에 “무덤에 들어가서 흰옷을 입은 한 청년…”이라 하여 무덤 속에 예수가 아닌 흰옷을 입은 사람이 있었음을 말해 주며, 요한복음 20장 12절에는 “흰옷을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를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운운하며 흰옷을 입은 사람들이 예수의 시체 주변에 있었음을 시사하였다. 만일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조작극이라 믿는다면, 분명히 의료기술이 발달했던 에세네 의술사가 계속 예수의 옆에 있어 십자가상의 예수에게 묘약을 먹이고 며칠 후에 되살리는 작업을 했다는 신빙성을 심어 주는 일이다. 이들이 에세네인이었기 때문에 흰옷을 입었고, 이 사람들을 모르는 다른 사람들은 이들을 천사로 오인했든가, 후에 복음서를 쓰는 사람들이 예수를 신격화하기 위해 천사로 쓴 것이 아닐까 추리할 수 있다. 여하튼 예수가 에세네 사람으로 질로트와 깊은 관계가 있었음을 이런 점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고 본다. 그리고 에세네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는 요세푸스(Flavius Josephus)의 기록을 살펴보면 가히 알 수 있는 일이다. 요세푸스는 ‘마사다의 전투’ 장에서 자세히 설명했는데, 그는 유대인들 사회의 배경과 전투사를 주관적으로 기록한 사람으로 유명하며, 당시의 유대인에 대한 그의 기록이 가장 자세하기 때문에 역사적 가치를 높이 평가받고 있는 터이다. 그의 설명에 의하면 에세네 부족은 의술(醫術)이 매우 발달되어, 약초(藥草)나 다른 광물질 등을 의약재로 사용하는 일에 굉장히 깊은 지식을 갖고 있다고 하였다. 이것은 후일에 학자들의 조사에 의하여 ‘에세네(Essenes)’라는 말 자체가 희랍어로 병을 고치는 사람이란 뜻의 ‘에세노이(essenoi)’라는 말에서 지어진 것이며, 이 말은 예수를 위시하여 에세네인들이 사용하던 아람어로 같은 뜻의 아사야(asayya)라는 말이 희랍어로 번역되면서 지어진 이름이라고 풀이를 하고 있다.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