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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증언 동기
저는 조금이나마 이 사회에 공헌해 보려고 소외되고 병든자, 전과자 심지어 정신 이상되어 옷을 벗고 다니는 사람까지 데려다 먹여주고 치료해 주며 선도하고, 죽으면 장사를 치루어 주었으며 종교에나 사회에 흠 없이 하겠다는 뜻에서, 저를 따르는 자의 허물은 곧 저의 허물이고 책임이기에 저를 선생이라고 따르는 목사 중 이면에 말 못할 허물이 있다기에 사랑하는 마음으로 때리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저의 가르치고 행하는 것이 '공산주의 아닌가?' 의심을 받게되자 매를 맞은 목사 분 역시, 저와 같은 무리가 아니라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 폭력으로 고소하게 되어 교도소에 가게 되고 경찰들은 저희 교회에 와서 갈 곳 없어 모여온 자들을 갈 곳도 마련해 주지 않고, 못된 집단이며 공산당, 간첩의 집이라고 발로 차고 때리고 끌어내어 흩어지게 했으며
언론인들 역시, 그 당시 상황을 보지도 않고 저를 한 번 찾아와 인터뷰나 뜻을 알아 본 일도 없이, 저를 이해 못하시고 오해하신 종교 지도자들과 정신 이상되어 옷을 벗고 부르짖는 자들의 말만 듣고 왜곡하여, 흥미 위주로 보는 이로 하여금 충동, 유혹, 격분할 수 있도록 이단자, 사이비, 자칭 만왕의 왕, 심판주, 삭발종교 교주, 벌거벗고 여신도들과 나체춤을 추면서 천국댄스라고 했다며, 저 역시 무슨 말인지도 모르는 섹스교라며, 잘못을 권면하러 간 목사를 때리고 쇠고랑 차고 철장 신세가 된 교주라고 하여 서로 경쟁하듯이 각종 신문, 잡지, T.V.에서 대서 특필하여 해외 토픽거리를 만들어 혼란한 가운데 더욱 혼란을 야기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당시 군사정권, 유신체제 때 대통령 긴급조치법이 발동됐는데 저의 종교세력이 너무 커지는것 같아 종교지도자들과 정부의 사주를 받아서 그렁게 된 것이 아닐까? 하는 터무니 없는 생각도 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어떤 말을 했으며 어떻게 살았기에 기독교에서, 마귀, 사상범, 간첩이라고까지 하였던가?! 하는 것을 간추려, 보시는 이로 알 수 있게 하기 위함입니다.
변명이요 자기를 드러내려 한다고 할 지 모르나 미련하고 어리석은 탓이라고 여겨집니다.
배움이 짧아 문장도 어색하고, 그 당시 상황을 말하다 보니 차례가 바뀌고 반복된 면도 있습니다. 어찌하든지 여기에 기록한 것으로 다 말씀을 드리지는 못하였으나 더 보태고 꾸미지는 않았으며 저의 양심에 한 점도 가책 받지 않고 당당하며 떳떳하게 살았던 것이기에 이 글로 더 한 지탄을 받는다 해도 감수하겠습니다.
만일 언론에 보도된대로 잘못되었다면 온 인류는 저를 용서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교부 드림
2. 소년기 성장과정
저는 1940년 음력 4월28일 생으로 전북 익산시 왕궁면 흥암리에서 3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부모님은 농부였습니다.
저는 어려서 어머님의 젖이 부족하여 다른 분의 젖을 얻어 먹고 암죽으로 자라난 것을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왜정 말기에 기억나는 것은, 왕궁 초등학교 창시자의 기념동상이 동(銅)이라고 떼어 갔으며, 집집마다 구리, 놋쇠그릇, 수저까지도 거두어 가고 공출로 거두기 위해 일본 순사들이 칼을 차고 면서기들과 가택수색하여 벼가 있으면 빼앗아 가는 것을 뒤따라 다니며 구경을 했고, 저의 집에도 신을 신고 들어와 수색하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 당시 맏형은 일본 순사가 한국 노인을 잡아다 때리며 조사하는 것을 보고 분히 여겨 '
" 너희들은 부무도 없느냐?!"며 일본 순사를 때린 동기로 폭도가 되어 은둔생활을 하던 중 8.15 해방을 맞이했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온통 기뻐하며 만세를 부르고, 맏형은 일장기와 일본 책들을 모아 불을 지르곤 했습니다.
그 후 다시 불행한 일은, 왜정시대 일본의 앞잡이가 되어 우리 민족을 탄압하고 소실까지 두고 호의 호식하던 친일파였던 분이 다시 국가 기관에서 세력을 누리는 것을 보고 불만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을 좌익이라고 때리고 가두는 것을 본 맏형이 가만히 있지 못하고 분히 여겨 그 사람들을 죽이겠다고 투쟁하다가 폭도 또는 좌익, 공산당으로 몰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부모님은 형님을 앉혀 놓고 방바닥을 치고 가슴을 치시면서 "왜인과도 그러더니 또 다시 그러느냐? 네가 무슨 힘이 있다고 그러느냐? 벙어리되고 벙신되어야 산다."고 하셨으나 맏형은 불응하면서 "아들 하나 없는 폭 잡으시오. 그들을 죽이고 나도 죽겠다."고 말했습니다.
부모님은 "너만 죽느냐? 네 부모, 동생들도 죽게하는 것이다."고 한탄하셨습니다.
맏형은 초등학교 다니는 저에게 말타기를 가르치고 겨울에 옷을 벗겨 맨발로 달리기를 시키면서 "우리니라가 독립된 것이 아니라 일본에서 미국으로 넘어갔다. 일본의 앞잡이가 되었던 친일파들이 다시 미국의 앞잡이가 되어 선량한 백성을 탄압한다. 그들과 싸워야 한다."고 훈련을 시켰습니다.
둘째 형은 부모님께 효도했으며, 내성적이라 동네 사람들이 "새색시"라고 놀려주기도 했습니다. 맏형은 둘째 형에게 말하기를 " 너는 선하고 용하다. 땅이나 파고 살다 죽어라."고 했습니다. " 3.8.선이 통일되고 자유와 평등, 권리를 찾아야 한다."고 그 당시로는 터무니 없는 교육을 시켰던 것입니다.
저의 집은 밤낮으로 경찰들의 포위 상태에 있었으나 맏형은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자유자재로 말을 타고 왕래하던 중 결국 이리 경찰서에서 동원된 분들에게 검거되어 구속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나에게 "교부야 울지 말아라. 공부 열심히 하고 있어라. 곧 돌아오겠다."며 떠나셨습니다. 부모님은 "호랑이 입 같은 세상에 네가 무슨 힘으로 싸운다고... 바보 같은 자식"이라며 한숨을 쉬셨습니다.
이리 경찰서에서 얼마 후에 군산 법원으로 넘어갔다고 하였는데 희생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곳 누구에게도 하소연 할 길이 없었으며 시신도 인수 받지 못한 참혹한 비극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저의 집에 찾아와 말하기를 "훌륭한 사람아 죽었다." 또는 "홍길동 같은 사람이니 총을 쏘아도 죽지 않고 살 사람이다."라고 갖은 말로 위로를 했으나 결국 27세 경에 사라졌습니다.
그 후 6.25사변이 터져 아군들이 후퇴하고 인민군이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제가 처음 죽은 시신을 보게 된 것은 아군과 경찰들이 후퇴하면서 보도연맹 가담자들이라 하여 잡아다 죽여 암매장한 것을 발굴해 놓은 토막난 시신들이었습니다. 그 중에는 사촌 형도 있었습니다.
공산 치하 때도 역시 원수를 갚기 위해 민주 인사였던 사람들을 잡아다 때리고 죽였으며, 다시 민주 사회로 회복되고 보니 역시 공산치하에 부역한 자들을 잡아다 죽이는 비극들이 겹치게 된 것입니다. 그 당시 작은 형은 특별히 잘못한 일이 없다고 하면서 피신하지 않고 집에 있다가 지서에서 사람이 와서 "물어볼 말이 있다."고 하여 자기 발로 걸어갔으나 이리 경찰서로 넘어가게 되었는데 그 곳에서 얼마 있다가 군산 법원에 넘겼다고 하여 군산에 가 보았으나 넘어오지 않았다고 했으며, 수 차 확인했으나 속수 무책이었습니다. 역시 맏형과 같이 희생시키고 시신도 돌려주지 않았습니다.
저의 집은 왕궁 지서에서 제일 가까운 담 밑에 있었기에 왜정 때, 해방 후 그리고 6.25동란으로 서로 잡아다 때리고 고문하는 비명 소리 때문에 어떻게 하면 그 소리를 듣지 않을까?! 부모님은 이불이나 요를 가지고 창문을 가리며 살아온 것을 보고 자란 저로써는 " 어른들이 왜 싸우고 죽이는가?!" 어느 누구를 미워하기 보다 사회가 싫어지고 증오감이 들게 되었던 것입니다.
저의 부모님은 선하신 분들이었습니다. 형 둘이 희생되었어도 조금도 남을 원망하거나 미워하시는 소리를 듣지 못했으며 " 자식 하나 잘못 두어서 좋은 자식까지 죽고 집안이 망하게 되었다."고만 한탄하셨습니다. 겨울에 눈이 오면 지서 마당 뿐 아나라 순경들의 관사까지도 모두 눈을 치워 주시고, 저의 집이 초등학교 바로 옆이라 점심 시간이 되면 친구들을 데려 오라고 하시어 밥도 주시고 물도 끓여 주셨으며 부모 없는 고아 몇 사람을 길러 주시기도 했습니다.
아버지가 저에게 항상 하시는 말씀은 "착한 사람이 되어라. 맏형 같이 잘난 체나 똑똑한 체 말아라. 가난하여 돈이나 양식을 빌려가서 못 갚으면 안준다고 싸우지 말아라. 그 사람이 양식보다 돈보다 더 좋은 것으로 갚아주는 것이다. 말로라도 고맙다고 할 것이며 마음으로도 잊지 못할 것이다. 인심을 잃지 말고 살어라. 그것이 명예나 돈보다 낫다."고 가르쳐 주셨으며 웃음 한 번 짓지 못하고 사셨습니다.
이런 불행한 저의 가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분들은 저의 집을 마치 좌익, 공산당이라고 할 수 있고 지금도 저를 사상범으로 오해할 수 있게 하는 요소가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형제도 사촌도 없으며 독신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비참한 환경이었으며 부모님은 늙으셨고 저는 어렸으나 농번기가 되면 여러 사람들이 저의 집부터 모를 심어주시고 난 후 자기 집안일을 하시는 분들이 있었기에 외롭거나 고독하게 살지는 않았습니다. 부모님과 형님들이 그렇게 잘못만은 하지 않고 사셨던 은덕이라고 생각되어 집니다.
이것이 저의 소년기 성장과정이라고 하겠습니다.
* 운영자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7-12-06 19:54)
저는 조금이나마 이 사회에 공헌해 보려고 소외되고 병든자, 전과자 심지어 정신 이상되어 옷을 벗고 다니는 사람까지 데려다 먹여주고 치료해 주며 선도하고, 죽으면 장사를 치루어 주었으며 종교에나 사회에 흠 없이 하겠다는 뜻에서, 저를 따르는 자의 허물은 곧 저의 허물이고 책임이기에 저를 선생이라고 따르는 목사 중 이면에 말 못할 허물이 있다기에 사랑하는 마음으로 때리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저의 가르치고 행하는 것이 '공산주의 아닌가?' 의심을 받게되자 매를 맞은 목사 분 역시, 저와 같은 무리가 아니라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 폭력으로 고소하게 되어 교도소에 가게 되고 경찰들은 저희 교회에 와서 갈 곳 없어 모여온 자들을 갈 곳도 마련해 주지 않고, 못된 집단이며 공산당, 간첩의 집이라고 발로 차고 때리고 끌어내어 흩어지게 했으며
언론인들 역시, 그 당시 상황을 보지도 않고 저를 한 번 찾아와 인터뷰나 뜻을 알아 본 일도 없이, 저를 이해 못하시고 오해하신 종교 지도자들과 정신 이상되어 옷을 벗고 부르짖는 자들의 말만 듣고 왜곡하여, 흥미 위주로 보는 이로 하여금 충동, 유혹, 격분할 수 있도록 이단자, 사이비, 자칭 만왕의 왕, 심판주, 삭발종교 교주, 벌거벗고 여신도들과 나체춤을 추면서 천국댄스라고 했다며, 저 역시 무슨 말인지도 모르는 섹스교라며, 잘못을 권면하러 간 목사를 때리고 쇠고랑 차고 철장 신세가 된 교주라고 하여 서로 경쟁하듯이 각종 신문, 잡지, T.V.에서 대서 특필하여 해외 토픽거리를 만들어 혼란한 가운데 더욱 혼란을 야기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당시 군사정권, 유신체제 때 대통령 긴급조치법이 발동됐는데 저의 종교세력이 너무 커지는것 같아 종교지도자들과 정부의 사주를 받아서 그렁게 된 것이 아닐까? 하는 터무니 없는 생각도 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어떤 말을 했으며 어떻게 살았기에 기독교에서, 마귀, 사상범, 간첩이라고까지 하였던가?! 하는 것을 간추려, 보시는 이로 알 수 있게 하기 위함입니다.
변명이요 자기를 드러내려 한다고 할 지 모르나 미련하고 어리석은 탓이라고 여겨집니다.
배움이 짧아 문장도 어색하고, 그 당시 상황을 말하다 보니 차례가 바뀌고 반복된 면도 있습니다. 어찌하든지 여기에 기록한 것으로 다 말씀을 드리지는 못하였으나 더 보태고 꾸미지는 않았으며 저의 양심에 한 점도 가책 받지 않고 당당하며 떳떳하게 살았던 것이기에 이 글로 더 한 지탄을 받는다 해도 감수하겠습니다.
만일 언론에 보도된대로 잘못되었다면 온 인류는 저를 용서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교부 드림
2. 소년기 성장과정
저는 1940년 음력 4월28일 생으로 전북 익산시 왕궁면 흥암리에서 3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부모님은 농부였습니다.
저는 어려서 어머님의 젖이 부족하여 다른 분의 젖을 얻어 먹고 암죽으로 자라난 것을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왜정 말기에 기억나는 것은, 왕궁 초등학교 창시자의 기념동상이 동(銅)이라고 떼어 갔으며, 집집마다 구리, 놋쇠그릇, 수저까지도 거두어 가고 공출로 거두기 위해 일본 순사들이 칼을 차고 면서기들과 가택수색하여 벼가 있으면 빼앗아 가는 것을 뒤따라 다니며 구경을 했고, 저의 집에도 신을 신고 들어와 수색하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 당시 맏형은 일본 순사가 한국 노인을 잡아다 때리며 조사하는 것을 보고 분히 여겨 '
" 너희들은 부무도 없느냐?!"며 일본 순사를 때린 동기로 폭도가 되어 은둔생활을 하던 중 8.15 해방을 맞이했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온통 기뻐하며 만세를 부르고, 맏형은 일장기와 일본 책들을 모아 불을 지르곤 했습니다.
그 후 다시 불행한 일은, 왜정시대 일본의 앞잡이가 되어 우리 민족을 탄압하고 소실까지 두고 호의 호식하던 친일파였던 분이 다시 국가 기관에서 세력을 누리는 것을 보고 불만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을 좌익이라고 때리고 가두는 것을 본 맏형이 가만히 있지 못하고 분히 여겨 그 사람들을 죽이겠다고 투쟁하다가 폭도 또는 좌익, 공산당으로 몰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부모님은 형님을 앉혀 놓고 방바닥을 치고 가슴을 치시면서 "왜인과도 그러더니 또 다시 그러느냐? 네가 무슨 힘이 있다고 그러느냐? 벙어리되고 벙신되어야 산다."고 하셨으나 맏형은 불응하면서 "아들 하나 없는 폭 잡으시오. 그들을 죽이고 나도 죽겠다."고 말했습니다.
부모님은 "너만 죽느냐? 네 부모, 동생들도 죽게하는 것이다."고 한탄하셨습니다.
맏형은 초등학교 다니는 저에게 말타기를 가르치고 겨울에 옷을 벗겨 맨발로 달리기를 시키면서 "우리니라가 독립된 것이 아니라 일본에서 미국으로 넘어갔다. 일본의 앞잡이가 되었던 친일파들이 다시 미국의 앞잡이가 되어 선량한 백성을 탄압한다. 그들과 싸워야 한다."고 훈련을 시켰습니다.
둘째 형은 부모님께 효도했으며, 내성적이라 동네 사람들이 "새색시"라고 놀려주기도 했습니다. 맏형은 둘째 형에게 말하기를 " 너는 선하고 용하다. 땅이나 파고 살다 죽어라."고 했습니다. " 3.8.선이 통일되고 자유와 평등, 권리를 찾아야 한다."고 그 당시로는 터무니 없는 교육을 시켰던 것입니다.
저의 집은 밤낮으로 경찰들의 포위 상태에 있었으나 맏형은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자유자재로 말을 타고 왕래하던 중 결국 이리 경찰서에서 동원된 분들에게 검거되어 구속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나에게 "교부야 울지 말아라. 공부 열심히 하고 있어라. 곧 돌아오겠다."며 떠나셨습니다. 부모님은 "호랑이 입 같은 세상에 네가 무슨 힘으로 싸운다고... 바보 같은 자식"이라며 한숨을 쉬셨습니다.
이리 경찰서에서 얼마 후에 군산 법원으로 넘어갔다고 하였는데 희생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곳 누구에게도 하소연 할 길이 없었으며 시신도 인수 받지 못한 참혹한 비극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저의 집에 찾아와 말하기를 "훌륭한 사람아 죽었다." 또는 "홍길동 같은 사람이니 총을 쏘아도 죽지 않고 살 사람이다."라고 갖은 말로 위로를 했으나 결국 27세 경에 사라졌습니다.
그 후 6.25사변이 터져 아군들이 후퇴하고 인민군이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제가 처음 죽은 시신을 보게 된 것은 아군과 경찰들이 후퇴하면서 보도연맹 가담자들이라 하여 잡아다 죽여 암매장한 것을 발굴해 놓은 토막난 시신들이었습니다. 그 중에는 사촌 형도 있었습니다.
공산 치하 때도 역시 원수를 갚기 위해 민주 인사였던 사람들을 잡아다 때리고 죽였으며, 다시 민주 사회로 회복되고 보니 역시 공산치하에 부역한 자들을 잡아다 죽이는 비극들이 겹치게 된 것입니다. 그 당시 작은 형은 특별히 잘못한 일이 없다고 하면서 피신하지 않고 집에 있다가 지서에서 사람이 와서 "물어볼 말이 있다."고 하여 자기 발로 걸어갔으나 이리 경찰서로 넘어가게 되었는데 그 곳에서 얼마 있다가 군산 법원에 넘겼다고 하여 군산에 가 보았으나 넘어오지 않았다고 했으며, 수 차 확인했으나 속수 무책이었습니다. 역시 맏형과 같이 희생시키고 시신도 돌려주지 않았습니다.
저의 집은 왕궁 지서에서 제일 가까운 담 밑에 있었기에 왜정 때, 해방 후 그리고 6.25동란으로 서로 잡아다 때리고 고문하는 비명 소리 때문에 어떻게 하면 그 소리를 듣지 않을까?! 부모님은 이불이나 요를 가지고 창문을 가리며 살아온 것을 보고 자란 저로써는 " 어른들이 왜 싸우고 죽이는가?!" 어느 누구를 미워하기 보다 사회가 싫어지고 증오감이 들게 되었던 것입니다.
저의 부모님은 선하신 분들이었습니다. 형 둘이 희생되었어도 조금도 남을 원망하거나 미워하시는 소리를 듣지 못했으며 " 자식 하나 잘못 두어서 좋은 자식까지 죽고 집안이 망하게 되었다."고만 한탄하셨습니다. 겨울에 눈이 오면 지서 마당 뿐 아나라 순경들의 관사까지도 모두 눈을 치워 주시고, 저의 집이 초등학교 바로 옆이라 점심 시간이 되면 친구들을 데려 오라고 하시어 밥도 주시고 물도 끓여 주셨으며 부모 없는 고아 몇 사람을 길러 주시기도 했습니다.
아버지가 저에게 항상 하시는 말씀은 "착한 사람이 되어라. 맏형 같이 잘난 체나 똑똑한 체 말아라. 가난하여 돈이나 양식을 빌려가서 못 갚으면 안준다고 싸우지 말아라. 그 사람이 양식보다 돈보다 더 좋은 것으로 갚아주는 것이다. 말로라도 고맙다고 할 것이며 마음으로도 잊지 못할 것이다. 인심을 잃지 말고 살어라. 그것이 명예나 돈보다 낫다."고 가르쳐 주셨으며 웃음 한 번 짓지 못하고 사셨습니다.
이런 불행한 저의 가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분들은 저의 집을 마치 좌익, 공산당이라고 할 수 있고 지금도 저를 사상범으로 오해할 수 있게 하는 요소가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형제도 사촌도 없으며 독신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비참한 환경이었으며 부모님은 늙으셨고 저는 어렸으나 농번기가 되면 여러 사람들이 저의 집부터 모를 심어주시고 난 후 자기 집안일을 하시는 분들이 있었기에 외롭거나 고독하게 살지는 않았습니다. 부모님과 형님들이 그렇게 잘못만은 하지 않고 사셨던 은덕이라고 생각되어 집니다.
이것이 저의 소년기 성장과정이라고 하겠습니다.
* 운영자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7-12-06 19:54)
2007.12.14 11:21:21 (*.243.2.3)
아가동산과 이교부의 관계
글쓴이 : 독사 조회수 : 15807.05.18 02:58 http://cafe.daum.net/TCWC/4OOq/28 최근들어 아가동산 이라는 일조의 사교 집단으로 인해 가정이 파괴되었다는 사람들의 호소가 늘고 있다 아내는 남편과 강제로 이혼당했거나 아들딸내지 는 부모와의 이견으로 서로 헤어진채 눈물의 세월을보낸다는 이들의 호소가 대부분이 아가동산의 농장의 여성지도자 김기순으로 원망의 표적이 되어있 다 천국과 같은 미래가 감언이설을 믿고 온가족이 들어가 전재산을 바치고 농장일에 전념하다가 결과적으로 가족은 물론 재산까지 빼앗긴채 빈손으로 나와야 했다는 대부분의 피해자들의 호소를 확인하게 되었다.
경기도 이천군 대월면 대대2리 이천읍에서 현대전자 이천공장을 지나 국도 를 따라 20여분지나면 우측으로 두갈래 길이보이고 왼편으로 약1킬로지점 주유소 길옆에 <신나라,아가동산,협업마을 >이라새겨진 대형 화강암이 세워 져 있다 이곳이 바로 김기순(56세.여)를 아가야로 부르며 신격화 하고 3백여 인워니 집단생활을 하는 농장이다
워낙 베일에 쌓인곳으로 사전지식이 없는데다가 이곳은 2만여평이 넘는 대규모의 우선 놀라지 않을수가 없었다 이곳은 알 루미늄 샷시와 유리를 소재로한 최첨단의 대형온실 10여동이 있고 잘 다듬 어진 잔디구장과 공장시설이 있다 그리고 붉은 벽돌로 지어진 2층 양옥의 아가동산 본부가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이상이 발견되지 않는 이곳 이 사교집단촌으로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1982년경부터 그연원은 1978년으 로 거슬러 올라간다 1969년 8월 이리시 주현동 174-4 에 교파없는 주현교회가 설립되었다
살립 자는 이교부(55세) 그는 당시 머리을깍고 철저한 성경중심적 생활을 목적으 로 검소하게 살았던 김현봉목사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면서 마리를 삭발하고 승려복같은 검은옷을 입고 한복 두루마기를 입고 검정고무신을 신고 다녔다 그는 철저한 금욕 주의 .극기주의 신념으로 엄격한 율법주의적 생활을 한다 고 믿게 되었다 더구나 그의 검소함은 식생활에서도 나타나 고기를 먹지않 고 여행시에도 줄곧 늘 완행열차만을 이용했다고 한다 특히 결혼생활에 있 어서는 김현봉목사가 나이들어 천연두앓는 노처녀와혼인 부부의 연을 맺었 으나 동정을 지켜 오누이처럼 지내기로 약속하고 부부관계를 하지않는 점을 높이 평가하여 10년동안 부부로 지내온 유모라는 여인과 손목한번 잡아보지 않고 살았다고 공공연히 설교 시간에 자랑하여 사람들이 감동받았다고 주장하며 차츰 자신을 신격화하여 추종세력을 확장함 현재도 1천5여명의 모일정도로 신도들이 모일정도로 그 를 교부님 전도사님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당시에는 그가 하나님인줄 알정도 로 카리마적인 인물이었다 그러던 이교부도 마침내 단단하게 뒤집어 쏘고 있던 껍질을 벋고 인간의 자리로 내려오게 되었으니 1978년 12월 폭로 되었 던 나체댄스가 바로 그것이었다
이교부는 자신은 나체춤을 추지않았다고 완 강하 부인하면서 다음과 같은 증언의臼눼? <어려서부터 결혼도 않고 자식도 없이 살려고 했던 저였는데 어느날 이름 도 모르는 여자가 한분이 옷을 벗고 울면서 교부님 살려 주세요 용서해 주 세요 하고 부르짖는데 모든사람들이 옷를 입히려고 했는데 자꾸 벋어 던지 고 눈이 뒤집히고 기절상태가 되어 어찌할도리가 없어 제가가보니 교부님도 더러운 옷을 빨리 벗어버리고 저를 구원해 주세요 그리고 이죄많고 추한 세 상을 떠나요 하는 그여자를 보기가 너무도 아타까웠습니다 저는 심리학 공 부를 했으니 스여자가 왜 그러지 알았습니다 그녀는 마치 옷이 뱀이라고 생 각되어 이세상모든 것이 추하고 더럽다고 생각돤 모양입니다 그래서 저는 대중앞에서 그여인을 도와주지 않으면 자살할 것 같아서 부끄럽지만 그여인 을 구해주기 위해서 그여인 처럼 옷을 벋엇더니 그가 내품에 안겨 주님 저 는 행복합니다 주님품을 떠나고 싶지않아요 그래서 그연인을 품에 안고 있 었던 뿐입니다 그래서 저도 자매를 버리지 않게노라 이야기 하고 그에게 옷을 입여 주었습니다 그것은 그여인을 구하기 위해서 취한 행동일 뿐입니다>
그후 1979년 1월 10일 오후 5시경 주현교회 나체댄스를 우려하여 그를 따르 던 목사 8명이 이를 충고하려 서울서 내려간 김모목사등 8명을 신도와 함께 장작으로 두들겨맞고 목사들의 머리까지 삭발하는둥 구타 및 간혹행위로 이 교부를 구속하게 되었다
이일로 인해 실형을 선고받고 2년6개월을 복역하게 된다 김재동목사(91.사망)와 김기순 이교부를 면회하며 이교부를 신도를 빼 돌려 자기사람으로 만들었다 김기순은 아픈환자가 있으면 약도 사다주고 환 심을 사서 서울 경기 상계동주현교회들을 자기편으로 민들었다 . 그리고 81 년봄 출감한 이교부는 곧바로 집회를 시작했는데 김기순을 향해 탕자의 비 유를 통해 설교하고 또한 관속에 들어가면 소리가 난다둥의 설교하였다
그 러던중 신자가 보약을 가져와 먹으라고 권유하자 뒤업어 버리고 김기순을 불러내어 너는 뱀이다 하면 서 김기순이 좋하하는것들은 다 나가라 소리치니 그를 추종하는 신도들이 모두가 일어나 다락방으로 올라가자 이교부 추종자들은 다락방에 못을치니 김기순이가 보아라 문을닫고 못질하니 관속이 아니냐 또 찬송하니 관에서 소리가 나고 탕자의 비유를 통해 나는 둘째니 동생같이 왕의 반열에 올를 것아라면 교인들을 회유 하여 탈퇴하고 서울묵동에 2층건물을 임대하여집회 를 시작하고 이교부의 설교를 짜집기 식으로 해서 이교부의 신자를 끌어들 이기에 안갖힘을 쓰며 교세를 확장에 나감
또한 김기순은 어묵장사 ,떡장사를 해서 판돈으로 적금을 붙고 신자들에게 인정선,물질선 정욕선을자르고 마음을쏟고 물질을 바치면 바친만큼 전무후 무한 큰복을 받을것이라고 강요하며 가족의 정을 꾼고재산을 바치라고 강요 하면 2000년에 큰변화가 오는데 자신과 동참하면 영과육이 여원히 산다고 주장하면 재산을 다바치면 지금개척중이라 이자는못주고 입금시킨은 언제든 지 돌려주겠다고 속인후 모은돈이 차츰 늘어나자 82년 서울은 공해가 심하 니 공기좋은곳에 잘지내자며 이천의 야산을 사들여 개척에 나섰다
숙소도 만들고 서울이천을 왕복할 수 있는 버스도 구입하여 운행하였다 그리고 얼 마후 성부 성자 성신의 노래와춤과 웃음이라는 논리를 폈다그리고 자기는 아무런 죄가없는 아가라고 하면서 자신을 아가야라고 부르게 하고 자신을 신격화함 아가동산 사람들은 김기순을 세례요한 이교부를 재림예수로 추종 하였다 그드른 어느때에는 24시간일을시키고 보토이 12시간 노역을 시키고 일을 게을리하면 죽음의 천사가 온다고 저주까지 하였다 이들은 원칙이 있 는데 아버지가 잘못하면 아들을 자녀의 잘못은 부모에게 죄를 전가 시켜 매 로다스리고 자녀들도 학교에 다니지 못하도록 자퇴서를 쓰게하고 병역도 체 중을 줄여 이탈하게 하였다 이탈자가 생기면 이혼을 시키고 부부간에도 잠 을 자지못하게 남자 여자 숙소를 따로 만들어 동침은 물론이고 손도못잡게 하여 어길 경우 초죽음을 만들어 놓는다고 한다 그곳에서 결혼은 김기순 세명의 아들이외에는 할 수가 없고 이손자만이 아가야라고 주장한다
아가동 산에는 아가는 단한명도 태어나지 않는다 이런일이 아가동산에서 일어난 것을 이교부가 김기순 죽이기 작전을 세워 아가동산을 언론에 폭노하여 아가동산의 실체가 드러나게 된 것이다
신나라 레코드사의 공장으로 우라나라의 음반계를 지배 했던 겄이다 이모든 것은 신도들의 재산과 착취로 이루어 진 것이다 그래서 아가동산 은 지금 붕괴되고 새로히 이교부를 중심으로 전라도 익산에 이교부의 나라를 만들고 탈기도교를 선언하여 기독교 이단을 벗어 나려고 한다
이교부는 기독교의 존재는 부자되고 병나소 죽어 천당가며 볼 수 없는 하나님을 섬기고 믿으며 라고 정의하고예수의 구원은 자신의 회생이 아 니라 남을 누르고 천당가는 것이 라고 주장하며 그런 예수믿지말고 자 신을 믿으라며 활동하고 있다 지상천국이 이루어진다고 주장한다 지금 도 주현 교부라는 이름을 가지고 활동중이며 중국으로 건너가서 조선족 을 대상으로 음모를 꾸미고 있다 우리는 이들의 행동을 지켜보며 가슴이 답답하고 슬픈이유는 무엇일까?
글쓴이 : 독사 조회수 : 15807.05.18 02:58 http://cafe.daum.net/TCWC/4OOq/28 최근들어 아가동산 이라는 일조의 사교 집단으로 인해 가정이 파괴되었다는 사람들의 호소가 늘고 있다 아내는 남편과 강제로 이혼당했거나 아들딸내지 는 부모와의 이견으로 서로 헤어진채 눈물의 세월을보낸다는 이들의 호소가 대부분이 아가동산의 농장의 여성지도자 김기순으로 원망의 표적이 되어있 다 천국과 같은 미래가 감언이설을 믿고 온가족이 들어가 전재산을 바치고 농장일에 전념하다가 결과적으로 가족은 물론 재산까지 빼앗긴채 빈손으로 나와야 했다는 대부분의 피해자들의 호소를 확인하게 되었다.
경기도 이천군 대월면 대대2리 이천읍에서 현대전자 이천공장을 지나 국도 를 따라 20여분지나면 우측으로 두갈래 길이보이고 왼편으로 약1킬로지점 주유소 길옆에 <신나라,아가동산,협업마을 >이라새겨진 대형 화강암이 세워 져 있다 이곳이 바로 김기순(56세.여)를 아가야로 부르며 신격화 하고 3백여 인워니 집단생활을 하는 농장이다
워낙 베일에 쌓인곳으로 사전지식이 없는데다가 이곳은 2만여평이 넘는 대규모의 우선 놀라지 않을수가 없었다 이곳은 알 루미늄 샷시와 유리를 소재로한 최첨단의 대형온실 10여동이 있고 잘 다듬 어진 잔디구장과 공장시설이 있다 그리고 붉은 벽돌로 지어진 2층 양옥의 아가동산 본부가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이상이 발견되지 않는 이곳 이 사교집단촌으로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1982년경부터 그연원은 1978년으 로 거슬러 올라간다 1969년 8월 이리시 주현동 174-4 에 교파없는 주현교회가 설립되었다
살립 자는 이교부(55세) 그는 당시 머리을깍고 철저한 성경중심적 생활을 목적으 로 검소하게 살았던 김현봉목사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면서 마리를 삭발하고 승려복같은 검은옷을 입고 한복 두루마기를 입고 검정고무신을 신고 다녔다 그는 철저한 금욕 주의 .극기주의 신념으로 엄격한 율법주의적 생활을 한다 고 믿게 되었다 더구나 그의 검소함은 식생활에서도 나타나 고기를 먹지않 고 여행시에도 줄곧 늘 완행열차만을 이용했다고 한다 특히 결혼생활에 있 어서는 김현봉목사가 나이들어 천연두앓는 노처녀와혼인 부부의 연을 맺었 으나 동정을 지켜 오누이처럼 지내기로 약속하고 부부관계를 하지않는 점을 높이 평가하여 10년동안 부부로 지내온 유모라는 여인과 손목한번 잡아보지 않고 살았다고 공공연히 설교 시간에 자랑하여 사람들이 감동받았다고 주장하며 차츰 자신을 신격화하여 추종세력을 확장함 현재도 1천5여명의 모일정도로 신도들이 모일정도로 그 를 교부님 전도사님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당시에는 그가 하나님인줄 알정도 로 카리마적인 인물이었다 그러던 이교부도 마침내 단단하게 뒤집어 쏘고 있던 껍질을 벋고 인간의 자리로 내려오게 되었으니 1978년 12월 폭로 되었 던 나체댄스가 바로 그것이었다
이교부는 자신은 나체춤을 추지않았다고 완 강하 부인하면서 다음과 같은 증언의臼눼? <어려서부터 결혼도 않고 자식도 없이 살려고 했던 저였는데 어느날 이름 도 모르는 여자가 한분이 옷을 벗고 울면서 교부님 살려 주세요 용서해 주 세요 하고 부르짖는데 모든사람들이 옷를 입히려고 했는데 자꾸 벋어 던지 고 눈이 뒤집히고 기절상태가 되어 어찌할도리가 없어 제가가보니 교부님도 더러운 옷을 빨리 벗어버리고 저를 구원해 주세요 그리고 이죄많고 추한 세 상을 떠나요 하는 그여자를 보기가 너무도 아타까웠습니다 저는 심리학 공 부를 했으니 스여자가 왜 그러지 알았습니다 그녀는 마치 옷이 뱀이라고 생 각되어 이세상모든 것이 추하고 더럽다고 생각돤 모양입니다 그래서 저는 대중앞에서 그여인을 도와주지 않으면 자살할 것 같아서 부끄럽지만 그여인 을 구해주기 위해서 그여인 처럼 옷을 벋엇더니 그가 내품에 안겨 주님 저 는 행복합니다 주님품을 떠나고 싶지않아요 그래서 그연인을 품에 안고 있 었던 뿐입니다 그래서 저도 자매를 버리지 않게노라 이야기 하고 그에게 옷을 입여 주었습니다 그것은 그여인을 구하기 위해서 취한 행동일 뿐입니다>
그후 1979년 1월 10일 오후 5시경 주현교회 나체댄스를 우려하여 그를 따르 던 목사 8명이 이를 충고하려 서울서 내려간 김모목사등 8명을 신도와 함께 장작으로 두들겨맞고 목사들의 머리까지 삭발하는둥 구타 및 간혹행위로 이 교부를 구속하게 되었다
이일로 인해 실형을 선고받고 2년6개월을 복역하게 된다 김재동목사(91.사망)와 김기순 이교부를 면회하며 이교부를 신도를 빼 돌려 자기사람으로 만들었다 김기순은 아픈환자가 있으면 약도 사다주고 환 심을 사서 서울 경기 상계동주현교회들을 자기편으로 민들었다 . 그리고 81 년봄 출감한 이교부는 곧바로 집회를 시작했는데 김기순을 향해 탕자의 비 유를 통해 설교하고 또한 관속에 들어가면 소리가 난다둥의 설교하였다
그 러던중 신자가 보약을 가져와 먹으라고 권유하자 뒤업어 버리고 김기순을 불러내어 너는 뱀이다 하면 서 김기순이 좋하하는것들은 다 나가라 소리치니 그를 추종하는 신도들이 모두가 일어나 다락방으로 올라가자 이교부 추종자들은 다락방에 못을치니 김기순이가 보아라 문을닫고 못질하니 관속이 아니냐 또 찬송하니 관에서 소리가 나고 탕자의 비유를 통해 나는 둘째니 동생같이 왕의 반열에 올를 것아라면 교인들을 회유 하여 탈퇴하고 서울묵동에 2층건물을 임대하여집회 를 시작하고 이교부의 설교를 짜집기 식으로 해서 이교부의 신자를 끌어들 이기에 안갖힘을 쓰며 교세를 확장에 나감
또한 김기순은 어묵장사 ,떡장사를 해서 판돈으로 적금을 붙고 신자들에게 인정선,물질선 정욕선을자르고 마음을쏟고 물질을 바치면 바친만큼 전무후 무한 큰복을 받을것이라고 강요하며 가족의 정을 꾼고재산을 바치라고 강요 하면 2000년에 큰변화가 오는데 자신과 동참하면 영과육이 여원히 산다고 주장하면 재산을 다바치면 지금개척중이라 이자는못주고 입금시킨은 언제든 지 돌려주겠다고 속인후 모은돈이 차츰 늘어나자 82년 서울은 공해가 심하 니 공기좋은곳에 잘지내자며 이천의 야산을 사들여 개척에 나섰다
숙소도 만들고 서울이천을 왕복할 수 있는 버스도 구입하여 운행하였다 그리고 얼 마후 성부 성자 성신의 노래와춤과 웃음이라는 논리를 폈다그리고 자기는 아무런 죄가없는 아가라고 하면서 자신을 아가야라고 부르게 하고 자신을 신격화함 아가동산 사람들은 김기순을 세례요한 이교부를 재림예수로 추종 하였다 그드른 어느때에는 24시간일을시키고 보토이 12시간 노역을 시키고 일을 게을리하면 죽음의 천사가 온다고 저주까지 하였다 이들은 원칙이 있 는데 아버지가 잘못하면 아들을 자녀의 잘못은 부모에게 죄를 전가 시켜 매 로다스리고 자녀들도 학교에 다니지 못하도록 자퇴서를 쓰게하고 병역도 체 중을 줄여 이탈하게 하였다 이탈자가 생기면 이혼을 시키고 부부간에도 잠 을 자지못하게 남자 여자 숙소를 따로 만들어 동침은 물론이고 손도못잡게 하여 어길 경우 초죽음을 만들어 놓는다고 한다 그곳에서 결혼은 김기순 세명의 아들이외에는 할 수가 없고 이손자만이 아가야라고 주장한다
아가동 산에는 아가는 단한명도 태어나지 않는다 이런일이 아가동산에서 일어난 것을 이교부가 김기순 죽이기 작전을 세워 아가동산을 언론에 폭노하여 아가동산의 실체가 드러나게 된 것이다
신나라 레코드사의 공장으로 우라나라의 음반계를 지배 했던 겄이다 이모든 것은 신도들의 재산과 착취로 이루어 진 것이다 그래서 아가동산 은 지금 붕괴되고 새로히 이교부를 중심으로 전라도 익산에 이교부의 나라를 만들고 탈기도교를 선언하여 기독교 이단을 벗어 나려고 한다
이교부는 기독교의 존재는 부자되고 병나소 죽어 천당가며 볼 수 없는 하나님을 섬기고 믿으며 라고 정의하고예수의 구원은 자신의 회생이 아 니라 남을 누르고 천당가는 것이 라고 주장하며 그런 예수믿지말고 자 신을 믿으라며 활동하고 있다 지상천국이 이루어진다고 주장한다 지금 도 주현 교부라는 이름을 가지고 활동중이며 중국으로 건너가서 조선족 을 대상으로 음모를 꾸미고 있다 우리는 이들의 행동을 지켜보며 가슴이 답답하고 슬픈이유는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