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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가이아나 이야기는 자리에서 일어나 주시겠습니까!
당신들의 연대상, 1976년, 미국과 러시아는 제 3차 세계 대전이자, 제 1차 핵 전쟁 준비라는 ‘일급 비밀’을 둘러싸고, 서로간의 암투로 여념이 없게 되었습니다. 이는 1976년 여름, 당시 베일에 가려져 있던, ‘수중 미사일 위기[Underwater Missile Crisis]’가 발발했을 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 후, 이 일은 전 미국에 걸친, 말 그대로, 수천 곳에 설치되어 있던 무기들을 이용한, ‘전면적인 핵 방해행위[wholesale nuclear sabotage]’로까지 확대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사건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따로 구체적으로 다룰 것입니다.) 이 무기들 가운데에는, 초대형 댐과 저수지들을 날려버릴 수 있는 메머드급 수소 폭탄에서부터, 러시아인들이 ‘미니핵폭탄[micronukes]’이라고 부르던 작은 핵 폭파 장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것들이 있었습니다.
때때로 러시아인들은, 미국 전체에 대한 전면적 핵폭발 이전의 일종의 경고조치로서, 이 미니핵폭탄들을 터뜨리곤 해 왔던 것입니다. 여전히 편하고 아늑하기만 해서, 사람들을 ‘흔들어 깨울’ 필요성을 별로 못 느끼겠습니까?
1977년 9월, 이 비밀 전쟁은 결정적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았습니다. 역시나 베일에 가려져 있던 일로, 우주 공간 상에서 펼쳐졌던 ‘하비스트 문(추석 달) 전투[Battle of the Harvest Moon]’에서, 미국의 비밀 통치자들은 예정된 핵전쟁을 치뤄 내기 위해 꼭 필요했던 ‘에이스 카드’를 그만 잃어버렸습니다. 충격적인 반전이기도 했는데, 러시아인들은 달의 코페르니쿠스 크레이터[Copernicus Crater] 내에 있던, 미국의 비밀 빔무기[beam-weapons] 기지(그렇습니다. 거기 그런 것이 있었습니다!)를 궤멸시켰던 것입니다. 그 때 이후로, 러시아는 우주 공간 상에서, 군사적으로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할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자, 잠깐만 산수 문제 하나 검토해 보기로 합시다. 대략 1975년부터 1990년(1990년 4월 30일 구술—역주)에 이르기까지라,,—음,,, 그럼 이러한 국면이 15년간 계속되어 온 셈인가요? 당신들 그동안 러시아인들이 우주 공간에서 뭘 해 왔을 것이라고 보십니까?
우리는 이 모든 주제들을 보다 면밀히 다루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가이아나[Guyana] 사건은 ‘종교적인 설정’ 속에 발생했던 일로서, 이 저널 상에서 제기되는 이러한 이야기들과 어울려 맞아 들어가는 내용인 것입니다.
이 일이 있기 전, 러시아와 미국은, 양쪽 모두에 있어서, 저마다의 리더십에 큰 변화가 있었습니다. 먼저 러시아에서는, 1917년 이후로 계속 권력을 쥐어 왔던, 원래의 통치 세력들인 무신론의 볼셰비키들이, 60년도 넘게 지속되어 왔던 내부적 투쟁의 결과로, 마침내 전복되고 말았습니다. 볼셰비키들을 악의 화신으로 간주하던, 한 기독교파 소속의, 일군의 토착 러시아인들로 구성된 강력한 세력이 크렘린[the Kremlin]의 절대 통치권을 거머쥐게 되었던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볼셰비키들은 러시아에서 쫓겨났고, 이들 대부분은 미국으로 날아들게 되었습니다. 한편, 이들은 이미 미국에서 막강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던 많은 볼셰비키들에 합류했고, 양국 볼셰비키들의 규합 세력은, 그 때까지 ‘제 3세대 록펠러 형제들[the third generation Rockfeller brothers]’로 구성된 ‘비밀 동맹[Secret Allies]’이 휘둘러 오던 권력을, 점차적으로 자기들의 것으로 만들어 나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미국에서 볼셰비키의 권력이 점점 더 커져 나가자, 이 ‘사탄의 열매[the Satanic fruits]’는 점점 더 눈에 두드러지게 되었습니다.
1978년 4월에는, 백 명도 넘는 무고한 시민들이 고의적으로 위험에 처하게 된 일도 있었는데, 이는 ‘어떤 비밀 임무[an intelligence mission]’과 연루된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대한항공 902기와 관련된 사건으로, 이 비행기는 극도로 민감한 반응을 보이던 러시아 영공으로 침입해 들어가는 바람에 피격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대한항공 여객기 사건은 전혀 우연한 사고가 아니었고, 무고한 승객들에 대한 ‘살해 위협’이 정작 이 사건의 핵심 요소였습니다. 사실, 러시아 전투기들이 이 보잉 707기(KAL 902기)를 공중에서 폭파시키는 것이, 실제 벌어졌던 일처럼, 소수의 사상자만을 내며 지상으로 끌어 내리는 것보다 훨씬 쉬운 일이었던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미국에서 볼셰비키들의 권력은 점점 더 강화되어 갔고, 이와 함께 인명을 경시하는 풍조는 날이 가면 갈수록 더해만 갔습니다. 가이아나 사건에서는 단지 백 여명이 아니라, 천 여명의 목숨이 걸려 있었는데, 결국엔 이들을 죽이는 쪽으로 일이 마무리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것도 ‘새어 나가게’ 만들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가이아나, 존스타운[Jonestown, Guyana]에서의 이 기괴한 비극은, 만약 볼셰비즘을 비롯한 다른 몇몇 카르텔 세력들을 막아내지 못한다면, 향후 전 미국에 걸쳐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 것인지에 대한 어렴풋한 전조를 보여주는 사례였던 것입니다. 볼셰비키들의 사고 패턴은 거의 정신분열적[schizophrenic]이고, 악마주의적[Satanic]이며, ‘옳음’과 ‘그름’ 사이의 분별력을 거의 상실한 듯한 양상을 띱니다.—또는 최소한 “옳은 행위”라는 가면을 쓴 채로 무슨 일이든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경향들이 무분별하게 허용되는 가운데 볼셰비키들은 권력을 쥐어 왔고, 그 결과로서 이는 사회 전체에 참담한 비극을 안겨 주어 온 것입니다.
‘살해’와 ‘자살’이라는 행위들이 거의 ‘이해의 수준’을 넘어서는 스케일 상에서 발생합니다. 75년 전 볼셰비키들이 러시아에서 정권을 잡을 때의 상황도 그러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 볼셰비키들은 미국을 차지하기 위해서 같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은 바로 당신들의 코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중입니다.
존스타운[Jonestown]의 군사적 목적
그렇습니다. 나는 “군사적”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조금 있다가, 나는 당신들에게 레오 J. 라이언 하원의원[Leo J. Ryan, Congressman]이 어떻게 이용되었는지도 알려줄 것입니다. 가이아나 비극에 관한 ‘무대 설정’은 이미 1974년에 이루어졌습니다. 이 해에, 바로 그 자리에 가이아나 미사일 기지가 있다는 사실이 폭로되었던 것입니다. 이 뉴스는 전 미국에 걸쳐 라디오 방송을 한 번 탔지만, 즉시 차단되었고, 마치 없었던 일처럼 간주되었습니다. 이게 그 해 6월의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10월에 와서, 몇몇 ‘용감한 발설자들’에 의해, 이 사실이 새롭게 대중의 주목을 받게 되었지만, 즉시 뉴스 전파를 멈추라는 위협이 또 들어 왔고, “만약 그러지 않는다면”이라는 협박도 뒤따랐습니다.
당시 알려졌던 뉴스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 “관련 문제에 관한 신뢰할 수 있는 정보원에 따르자면, 가이아나 공화국[the Republic of Guyana](남미의 베네주엘라[Venezuela] 옆에 위치)은 또 하나의 쿠바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 곳에 배치되어 있는 핵미사일들은 파나마 운하의 가툰 갑문[the Gatun Locks of the Panama Canal]과 미국의 여러 도시들을 조준하고 있다.”
물론, 당시 “왕조[Dynasty]”(록펠러 가문을 의미—역주)와 함께 ‘춤을 추고 있던’ 미국 정부는 이 사실의 진상을 조사해 보는 일조차 거부했습니다.—그들이 왜 그랬겠습니까? 왜냐하면, 그들이 이를 설치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러한 경고는 종종 다시 등장하였고, 몇몇 시민들은 필요한 정보를 얻어보려고 노력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직면해야 했던 것은, 대개, “벽보고 이야기하는 듯한 침묵”, “이중 발언” 그리고 “부인” 밖엔 없었습니다. 결국 많은 사람들은 단순히 전체 이야기 자체를 불신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중 몇몇 통찰력이 있는 자들은 ‘정부를 믿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자, 누가 더 옳은 판단을 내렸던 것 같습니까?
‘플롯’을 이해하려면 1965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만 합니다.
존스타운[Jonestown]에서의 비극으로 그 절정을 맞게 되는, 이 이야기의 발단은, 실상, 1965년도에 시작되었습니다. 가이아나는 과거 영국의 식민지인 영국령 가이아나[British Guiana]였다가, 새롭게 독립을 맞이한 나라였습니다.
그 당시, ‘비밀 록펠러/소비에트 동맹[the secret Rockefeller/Soviet alliance]’은 그들간 동맹관계의 정점에 있었고, 장기에 걸친 제휴 계획[joint plan]이기도 한, ‘통제된 핵 전쟁[a controlled Nuclear War]’ 계획은 본 궤도를 달리고 있었습니다. 양쪽 모두는 서로서로 궁극적인 ‘배반[double-cross]’을 기도하고 있었지만, 그건 당시로서는 아직 나중에야 있을 일이었습니다. 미국 측의 비용 부담을 통해, 러시아 쪽의 힘을 의도적으로 키우는 것은, ‘세계 정부와 세계 지배[World Government and conquest]’를 향한 그들 간의 제휴 계획의 일부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the Cuban Missile Crisis]는 그들의 프로그램에 일시적인 ‘장애[monkey wrench]’를 불러 일으켰습니다. 존 F. 케네디[John F. Kennedy] 대통령은 ‘개인적으로’ 이 문제에 개입하여, 쿠바의 핵무장을 막았던 것입니다. : 결국 이 일로 인해, 그리고 다른 몇 가지 “부주의한 행동들[indiscretions]”로 인해, 그는 겨우 1년 정도 지난 후, 달라스[Dallas]에서 목숨을 잃었던 것입니다.
케네디의 후임자였던 린든 존슨[Lyndon Johnson]은 ‘시나리오[the script]’를 주의깊게 준수할 것임을 보다 분명히 했습니다. 그런데, 쿠바 사태를 보면서, 소련은 카리브해 지역에 또 다른 전진 배치 기지가 하나 더 필요함을 느꼈습니다. 쿠바에서의 미사일 발사 이전에, 전략적 목적의 기지를 하나 정도 더 보유할 필요성을 느꼈던 것입니다. 이러한 목적을 충족시켜 줄 수 있는 곳으로 가이아나가 선택되었습니다. 데이비드 록펠러[David Rockefeller]는 막시스트[a Marxist]인 포브스 번햄[forbes Burnham]이 이 나라의 수상이 될 수 있도록 필요한 조치를 취해 주었습니다. 그에 대한 답례로, 체이스 맨하탄 은행[the Chase Manhattan Bank]은 가이아나 공화국의 재정 담당 은행이 되었는데, 이는 록펠러 가문이 가이아나산 금에 접근하는 일을 용이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한편, 이러한 모든 일들의 순조로운 진행을 도왔던, 또 한가지 주요 요소는, 1965년, 린든 존슨 대통령이 미 공군 기지인 앳킨슨 필드[Atkinson Field]를 가이아나 정부 측에 넘겨주기도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미국이 수 십년간 보유해 온 기지에 대한 통제권이, 적절한 구실도 없이, 하루 아침에 포기되었던 것입니다. 앳킨슨 필드는 가이아나의 수도 조지타운[Georgetown]의 남쪽에 위치해 있던 것으로, 이 후, 테메리 에어필드[Temehri Airfield]로 재명명되었습니다. 이 비행장[airfield]은 나중에 존스타운 사건이 있은 후, 미국 헬리콥터들을 이용하여, 시신들을 미국으로 공수하는 데에 이용되기도 했습니다.
존슨 대통령이 테메리 에어필드를 막시스트 국가인 가이아나에 넘겨 주었을 때, 그는 실로 러시아 측에 커다란 선물 하나를 안겨 준 셈이었습니다. 테메리 에어필드는 라틴 아메리카에서 가장 큰 비행장이기도 한데, 실제로 뉴욕 최대 공항인 존 F. 케네디 공항보다도 더 큽니다. 그리고 그 위치는 쿠바 군 병력과 물자들을 아프리카 지역으로 실어 나르는 데에도 아주 이상적인 곳입니다.
결과적으로 록펠러 가문을 대신해서 행한 존슨의 행동은, 아프리카를 잇는 중요한 병참 요충지를 미국으로부터 강탈한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또 쿠바 병력이 원활하게 드나드는 관문을 만들어 주기도 한 셈이었습니다. 나중에 문제가 되기도 했던 일로, 앙골라[Angola]와 다른 아프리카 지역에 쿠바 병력이 진출할 수 있었던 것은, 부분적으로 이에 따른 결과이기도 했습니다.
이 후 수년간에 걸쳐, 가이아나에서의 러시아 군사 작전들은, 테메리 에어필드를 부근으로 해서 집중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1974년, 그들은 이 비행장을 빙 둘러싸는 지역에 미사일들을 설치했습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두 해 동안, 이 곳의 미사일들을 이동시켜, 조지타운[Georgetown]시 서쪽에 위치한 격리된 미사일 단지[missile complex]에 배치했습니다.
이 새로운 지역에서는, 미사일들이, 직경 약 30마일에 이르는 지역에 산재된 형태로, 배치되었습니다. 그 대략적인 중심 지역에 명령 및 통제 시설이 있었고, 이 곳은 러시아 지휘관에 의해 통제되었습니다. ‘플롯’은 점점 더 탄탄해져 갔던 것입니다.
미사일 재배치가 완료되었을 때, 이 새로운 미사일 단지는 테메리 에어필드로부터 북서방향으로 70마일 정도 떨어진 곳에 그 중심지가 놓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곳으로부터 대략 70마일 정도 더 북서쪽으로 떨어진 곳에, 이스라엘식의 키부츠[Israeli-type kibbutz] 형태를 띠었던, 존스타운 인민 사원 단지[the Jonestown Peoples Temple complex]가 위치해 있었던 것입니다. 즉, 미사일 단지는 존스타운 공동체[the Jonestown commune]와 테메리 에어필드 중간 쯤에 있었던 셈입니다. 친구들이여, 인민 사원 키부츠[the Peoples Temple kibbutz]가 미사일 단지에 가까이 위치해 있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인민 사원의 기원
처음 인민 사원(기독교계 종교단체—역주)이 생겨난 것은 1950년대로, 이 때까지만 하더라도 이 단체는 정부 음모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1970년경, 미국 정보 공동체 쪽에서 동원한 ‘몇몇 요원들[certain elements]’이 이 곳에 침투해 들어가, 인민사원을 전복시켰던 것입니다. ‘록펠러 형제들’이 늘 견지해 온 표준적인 행동 지침이 있다면, 그건 일군의 권력을 쥐고 있는 세력[faction]만을 지원해 주는 것이 아니라, 이에 대한 반대세력과 스파이들도 함께 지원해 주는 것이었습니다.—어느 누가 “공짜” 자금과 금전적 후원을 마다하겠습니까? 이런 방식을 통해서, 적어도 이론상으로, 그들은 항상, 누군가 그들의 통제를 벗어나려는 자가 발생하면, 언제라도 그 자를 제거할 수 있는 위치에 설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당신들 가운데 누구라도 그들의 책략에 넘어가서 ‘우리의 작업’을 망치지 않길 바란다면, 부디 이 교훈을 잘 새겨 두십시오.
가이아나에 있어서, 록펠러 형제들은, 그들 자신의 자금을 통해 권력을 손에 쥐어 줬던, 포브스 번햄[Forbes Burnham] 수상에 대한 견제책으로, 인민 사원이라는 도구를 이용하려 했던 것입니다. 전반적으로 볼 때, CIA의 조율 아래에 있었던, 미국 정보 공동체 내부의 ‘몇몇 사람들’에게는, 바로 이 일을 성취해 내는 방법을 찾는 임무가 주어졌던 것입니다.
여러가지 옵션들을 평가해 본 결과, 인민 사원이 이상적인 도구가 될 수 있을 것으로 판명되었습니다. 이 단체의 리더인 짐 존스[Jim Jones]에 대한 심리상태 진단 기록을 보면, 그는 자신이 ‘보이지 않는 통치자들[the Unseen Rulers]’의 막강한 도구로 전환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한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통제되는 주요 언론매체들을 통해 보도된 것과는 달리, 짐 존스는 타고난 유태인으로, 그는 항상 키부츠 스타일의 조직이 이상적인 지향점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드러내곤 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이러한 ‘사고’는 의식적, 무의식적 ‘요소들’ 간의 결합으로 생겨난 산물이기도 했습니다.
‘의식적인 수준’에서는, 돈과 막강한 정치적 지지 세력들이 그의 이상 실현을 뒷받침해 주었습니다. : 한편, ‘무의식적인 수준’에서는, 심리학적 프로그래밍 기술[the technique of psychological programming](이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다음에 따로 다루도록 하겠습니다.)이 사용되었던 것입니다.
점차적으로 짐 존스는 자기 자신의 인격에 대한 통제력을 잃어갔고, 점점 ‘당신들의 보이지 않는 통치자들’이 만들어 내고 싶어 했던 짐 존스의 모습을 닮아가고 있었습니다. 그 과정은 불가피하게, 짐 존스라는 자에게 엄청난 내부적 갈등들을 야기시켰고, 결국 이 자를 문제성을 띤 위험한 인물로 바꿔 놓았던 것입니다. 친애하는 자들이여, 이것이 정확히 그에게 발생했던 일입니다.
행동 변화
1973년에 이르러, 존스의 행동 변화는 그의 친구들과 그를 따르는 자들에 의해 감지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반쯤 의식을 가진’, 죽음을 부르는 인물로 변해 있었고, 이 무렵 ‘음모’는 한창 진행 중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해에, 비록 소수의 사람들만이 그를 따랐지만, 인민 사원으로 우후죽순처럼 쏟아져 들어오는 자금은, 그로 하여금 가이아나 공화국, 존스타운에, 농장형태의 키부츠를 세우는 일이 가능하도록 만들어 주었습니다.
가이아나는 엄격한 막시스트 경찰 국가였고, 포브스 번햄의 승인 없이는, 어느 누구도 공동체 스타일의 새로운 단체를 그 곳에서 출범시킬 수가 없었습니다. : 그러나 데이비드 록펠러 쪽 요원들은 번햄이 필요로 하는 모든 보장을 다 들어 주었고, 존스가 만들려고 하는 공동체는 가이아나의 막시스트 환경에 멋지게 들어맞을 것이라고 설득했습니다.
그런데, 그와 동시에 포브스 번햄은 데이비드 록펠러를 상대로 ‘이중 속임수[double-crossing]’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정확히 록펠러가 염려했던 것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정치적으로는 록펠러에 협력하고 있었지만, 가이아나산 금괴들을 산지의 저장고[caves in the mountains]에 숨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데이비드 록펠러는 이 사실을 한참 나중에야 알게 되었지만, 이를 알게 되었을 땐, 그보다 더 큰 문제, 즉 ‘러시아의 배신’이라는 사태가 발생한 상태였었고, 우선 더 심각한 문제를 처리했어야 했기에, 번햄에 대한 응징은 뒷전으로 밀렸던 것입니다.
1974년 여름까지만 하더라도, 록펠러 형제들은 여전히 크렘린[Kremlin]과 사이좋게 잘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무렵, 이미 불길한 징조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볼 때, 이해할 수 없는 어떤 일들이 러시아에서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일이, 자신들의 오랜 동지들인 볼셰비키들이 전복되고 있는 일일 줄은 감히 상상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어쨌거나 일은 계속 진행되어 갔습니다. : 오늘날 러시아로부터 가해지는 어떠한 위협에 대한 언급도 전적으로 부인되듯이, 당시 가이아나 미사일에 대한 어떠한 경고도 역시 전적으로 부인되었던 것입니다. 정부 대변인들은 대놓고 거짓말을 했고, 이에 대해 감히 이야기하기를 주저하지 않던 자들을 ‘우스꽝스러운 바보들’로 만들어 버리곤 했습니다. 1970년대 말로 잡혀있던, ‘계획되고 예정된 핵전쟁’의 청사진이 잘 그려지고 있던 중이었는데, 대중이 이 계획을 알게 되어 일을 그르치고 싶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 그렇지만, 2년 후, ‘1976년 수중 미사일 위기[the Underwater Missile Crisis of 1976]’를 시작으로, 러시아의 미국에 대한 전면적인 군사적 배신은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정부에서는 이를 감추어 왔지만, 대부분의 당신들은 이 위기에 대해서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에 대해서도 나중에 다시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당신들의 보이지 않는 통치자들’은 이 놀라운 사건으로 심각한 타격을 입었는데, 사실 그 최초의 목적은 크렘린의 지도자들과의 비밀 동맹을 원상회복시키려는 것이었습니다. 케네디 대통령이 ‘룰’을 깨고, 쿠바 미사일을 이슈화시켰던 일이 있었던 이 후로, 한 때, 실제로 그들은 이러한 관계회복 시도에 성공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여하튼, 이러한 사건들을 거치면서, 그들은 계획 중이던 실제 전쟁 계획을 발전시켜 나감에 있어서, ‘우연성 계획들[contingency plans]’도 함께 가동시켜 나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
주요 타겟
가이아나 미사일 기지는 이제 ‘수정된 계획’에 따라, 주요 타겟들 가운데 하나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 ‘수정 계획’이 수립되기 시작하던 2년 전(1976년)만 하더라도, ‘하비스트 문 우주 전투[the Space Battle of the Harvest Moon]’(1977년)는 아직 미래에나 다가올 일이었습니다. 미국이, 조만간 달에서, 그 작동을 개시하게 될, ‘비밀 빔무기 기지[secret beam-weapons base]’를 잃게 된다는 건, 거의 상상할 수도 없는 일처럼 여겨졌던 것입니다. 이 든든한 달 기지를 보유하고 있는 동안, 당신들의 보이지 않는 통치자들은 이걸 잃을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해 본 일도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수중 미사일 위기를 통한 배신을 겪으면서, 그들은 가능한 한 많은 러시아의 군사 무기들을 철거시키길 원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또한, 처음에 ‘제휴 핵전쟁’을 계획하던 때에 가졌던 복안보다, 훨씬 더 완전하고 철저하게 러시아를 파괴시키기로 마음먹었던 것입니다.
‘가이아나 작전[Operation Guyana]’의 입안자들에겐 해결해야 할 아주 어려운 숙제가 주어졌습니다. 가이아나에서, 파나마 운하와 미국 남부 지역의 도시들을 겨누고 있던, 이 러시아 미사일 기지를 완전히 제거하는 것이 그 주목적이었습니다. : 그렇지만, 이것은 ‘(핵)전쟁 이전[pre-war]’, 비밀스럽고도 전혀 예기치 못한 놀라운 방식으로 수행되어야 할 작전이었습니다. 이것이 비밀리에 진행되어야 할 이유가 있다면, 미국도, 러시아도, 그곳에 미사일 기지 같은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일반인들에게 아예 알려지길 원치 않는 데다가, 또 알려지면 이를 감당할 길도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나아가 아주 예기치 못한 방식이면서도 완벽하게 일을 처리해야 할 이유가 있다면, 아주 짧은 시간 동안의 경고가 주어진다손 치더라도, 가이아나 기지는 쿠바 병력에 의해, 재강화되고, 탄탄하게 방어될 수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이 일은 ‘코만도 스타일의 급습 공격[a commando-style raid]’으로 처리될 필요가 있었습니다. 예를 들자면, 1976년 7월, 우간다, 엔테베 공항[Entebbe Airport in Uganda]에서 있었던 이스라엘의 급습 공격(1976년 6월 27일, 텔아비브에서 아테네를 거쳐 파리로 향하던 에어프랑스 139기는 2명의 팔레스타인인들과 2명의 독일인들에 의해 납치됨. 그들은 이스라엘에 갇혀 있던 40명의 팔레스타인인들과 서독, 프랑스 등지에 갇혀 있던 13명의 다른 수감자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친-팔레스타인 국가인 우간다, 엔테베 공항에 기착하여 장기 대치하였으나, 7월 4일 이스라엘 방어군[Israel Defense Forces]에 의한 엔테베 작전으로 종결—역주)과 유사한 방식이 요구되었던 것입니다. 당신들 독자들에게, 그 유사성과 함축적인 의미가 보다 분명하게 와 닿지 않습니까? 물론 당신들의 ‘리더들’은 다른 스타일의 공격 방식으로 접근해야 할 필요성을 느낄 때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1962년 케네디 암살 사건과 같은 일이 그러했습니다. : 이 일은 미국인들에게 진행 중인 것을 ‘널리 알리고’, ‘당신들의 지지’를 구하려 했던 사안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가이아나 건에 있어서, 당신들의 보이지 않는 통치자들은, 어떤 비용을 들여서라도, 그 어떠한 내용도 새어 나가지 않도록 하려고 마음먹었던 것입니다. 거기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충분히 큰 규모의 합동 공격 부대를, 과연 어떤 방식으로 가이아나에 보내고, 또 얼마나 신속하게 일을 처리할 수 있겠는가?
또한 가이아나에 있는 것과 같은 규모의 군사 기지를 파괴시키는 일 자체가 이미 전혀 쉬운 일이 아닌데다가, 이건 경험이 필요한 문제이기도 했습니다. 결국, 비밀 합동 군사 부대를 일시적으로 가이아나로 들여보내기 위해서는, 아주 갑작스러우면서도, 대규모로 행해지는, 거의 반강제적인 요구가 충분히 수용될 수 있을 만큼의, 그럴 듯한 구실이 필요하다는 결론이 내려졌습니다. 그 구실이란, 그것이 어떠한 것이 되었든 간에, 러시아가 가이아나에서 일궈 온 모든 것들을 포기하지 않는 이상, 가이아나에 결코 함부로 보복 조치를 취하지는 못하도록, 러시아의 손을 묶는 일을 확실히 보장해 줄 수도 있는 것이어야 했습니다. 또한 그 구실은, 그것이 어떠한 것이 되었든 간에, 군사적인 전문성을 필요로 하면서도, 마치 비군사적인 일처럼 보일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어야 했습니다. 나아가, 습격 이후, 미사일 기지 공격에 수반되는 모든 사상자들을 가이아나에서 깨끗하게 치울 수 있는 수완도 필요했는데, 만약 그러지 못하고, 가이아나에 시체들이 그대로 방치되어 있을 경우, 이는 국제적인 사건으로 비화될 위험성이 있고, 또 그렇게 된다면, 비밀 미사일 기지와는 무관한, 어떤 전혀 다른 이야기 전개로 포장될 가능성도 있는 문제였던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러시아의 지령을 추종하는 가이아나 정부가, 공격 도중 죽게 된 합동 군사 부대원들의 시체를 공개하면서, 이들은 포브스 번햄 정권에 반대하여 쿠데타를 일으키려다가, 사살되었다고 말할 수도 있는 것이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엄청나게 커다란 문제였지만, 존스타운 키부츠는 그에 대한 답을 제시해 줄 수 있었습니다. 유일하게 필요한 것이 있다면, 그건 수백명의 미국 시민들이 가이아나에서 갑자기 죽게 되는 ‘설정’, 그것도 즉각적이고 전면적인 언론 공개를 담보해 주는 조건 아래, 벌어지는 일이어야 했습니다.
이 엄청난 비극은 군사적인 개입이 요구되는 수준의 문제여야 했고, 존스타운의 위치 역시 사전의 명령에 따라 지정된 위치여야 했습니다. 헬리콥터들이 테메리 에어필드와 존스타운 사이를 왔다갔다 할 때, 자연스럽게, 미사일 단지[the missile complex](이 곳은 전문적인 위장술로 감춰져 있었지만, 그 상세한 내역은 알려져 있었습니다.) 위를 날아다녀야 했던 것입니다. 이래야만 할 이유가 있다면, 그 경우, 합동 특별 군사 부대가 미사일 기지 인근에 착륙하기도 쉽고, 또 그들이 임무를 마치고 복귀할 때에도, 상대적으로 손쉬운 방식으로, 사상자들과 함께 동승한 헬리콥터를 타고 돌아올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테메리 에어필드에 나와 있는 리포터들은 헬리콥터들이 북서 방향으로 갔다가 또 똑같은 방향에서 되돌아 오는 걸 지켜보게 되겠지만, 그들은 그저 모든 헬리콥터들이 150마일 떨어진 존스타운과 공항 사이만을 분주히 왕래하고 있는 것이라고 믿도록 유도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현실적으로 그 중 많은 헬리콥터들은 같은 방향으로 거리가 절반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러시아 미사일 기지와 공항 사이를 왕래하게 되겠지만, 리포터들이 이를 알아낼 방법은 없는 것이었습니다.
계획의 시초
미사일 기지 공격에 대한 위장으로, 존스타운에서의 ‘대량 살육’이라는 시나리오가 결정되었을 때, 존스타운은 단순히 인민 사원이 보유한 변경의 체류지[outpost] 정도로만 기능하고 있었습니다. 그 곳엔 의도된 목적에 부합할 정도로, 충분히 큰 사건을 만들어 내기에 적절한 수의 사람들도 없었습니다. 결국, 직간접적인 방법을 다 동원하여, 짐 존스 자신이, 그를 따르는 무리들을 대동하고, 직접 가이아나 키부츠로 갈 수 있도록 그를 설득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전체 인민 사원 교도들 가운데, 25%에서 30%에 이르는 사람들을 끌어 모으게 되었는데, 자연히 이 사람들은 존스에게 극단적으로 의존적인 사람들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들은 심신의 피로, 협박, 외부 도움으로부터의 단절과 같은 요소들로 인해 대단히 취약해진 사람들이기도 했습니다.—달리 말하자면, 그들은 철저히 세뇌당한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한국전쟁 이후로, 세뇌 기술은, 많은 사람들이 얼마든지 동일한 행동을 하도록 유도해 낼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발달되어 있음이 잘 알려져 있었습니다. 한국 전쟁 당시, 정신력이 강한 미군들조차도 놀라우리만치 많은 숫자가 세뇌에 희생될 수 있었는데, 왜냐하면 당시 그들은 자신들 앞에 직면해 있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를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존스타운의 희생자들은 단련된 군인들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취약한 자들이었습니다.
1977년 8월 짐 존스는 거대한 한 무리의 희생자들을 데리고 가이아나로 떠났습니다. 그런데, 같은 달, 유엔주재 미국대사였던 앤드류 영[Andrew Young]은 가이아나의 포브스 번햄 수상에서 메시지 하나를 전달했습니다. 그는 몇가지 조건 아래, 미국과 세계 은행[the World Bank]은 가이아나에 대한 원조를 더 늘리겠노라고 말했습니다.—그 말은, 경우에 따라, 번햄의 호주머니를 이전보다 열 배 이상 더 채워 줄 수 있을 것이라는 의미였습니다. 결국, 존스타운의 재앙을 담보해 줄 수 있는, 열쇠가 될만한 조치가 취해졌던 건, ‘하비스트 문 전투’가 있기 딱 하루 전의 일이었습니다.
불쌍한 레오 라이언[Leo Ryan]
전체의 비극을 불러일으키는 방아쇠 역할을 하고, 또 요란한 언론 공개를 보장해 줄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고인이 된 레오 J. 라이언[Leo J. Ryan] 하원의원의 ‘이권’이 이 사건에 개입되고, 또 사건과 함께 펼쳐질 수 있도록 잘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라이언 의원은, 오늘날 미국 하원 의원들 사이에서 사실상 거의 찾아보기 힘든 용기를 갖고서, 또 자신이 위험에 처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가이아나로 갔습니다. 그런데, 물론 그가 몰랐던 사실이 있다면, 그는 향하게 된 그 곳에는, 비극적인 결말이 사전에 미리 계획되어 있었다는 점입니다.
라이언 하원 의원과, 또 포트 카이투마 공항[Port Kaituma Airport]에서 그와 함께 죽음을 맞이했던 사람들은, 실상 제 1차 핵전쟁으로 나아가는 ‘비밀 전쟁’의 희생자들이었습니다. 물론, 소위 말하는 가이아나 존스타운에서의 “집단 자살[mass suicide]”로 죽은 수백명의 미국 시민들 역시 마찬가지였던 것입니다.
라이언 하원의원이 가이아나로 떠나기로 되어 있던, 예정된 여행 날짜가 가까워져 옴에 따라, 외교적, 군사적 수준에서의 다른 움직임들도 준비 단계에 들어갔습니다. 무엇보다가, 러시아가 미사일 기지를 보호할만한 조치를 취하기엔 너무 늦어질 순간이 될 때까지, 러시아의 시선이 가이아나를 향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일이 핵심이었습니다. 물론 서반구에 있어서, 러시아의 가장 중요한 전략 거점은 쿠바[Cuba]였습니다. 따라서, 1978년 추수감사절에 있었던 ‘가이아나 전투[Battle of Guyana]’가 일어나기 전, 마지막 몇 일 동안, 의도적인 ‘MIG-23기 위기’를 만들어서 변죽을 울렸던 것입니다.—당신들 가운데 아무도 그 사건을 기억하지 못하겠습니까? 이 사건은 러시아의 시선을 쿠바로 돌리는 데 그 원래의 목적이 있었던 것입니다. 오, 우리는 당신들에게 이야기해 줄만한, 정말 너무나도 많은 비밀들을 알고 있는 셈이군요. 그렇지 않은가요? 크렘린에서 진짜 표적은 쿠바가 아니라 가이아나였다는 사실을 알아챘을 때에는, 이미 너무 늦었던 것입니다.
1978년 추수감사절 전투
고 레오 라이언 하원 의원의 최측근들이 공개적으로 밝혀 온 바에 따르면, 그가 가이아나로 가야겠다는 불운한 결정을 내렸던 이유는, 그에게 전달된 국무부 보고서 때문이었는데, 내용이 워낙 부실해서, 그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고, 결국 직접 가봐야겠다는 결정을 내렸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상 라이언 의원의 이와 같은 반응은 정확히 예견된 것이었고, 의도적으로 계산된 일이었습니다. 선거철이 다가올 무렵, 라이언 의원은, 선거 후 맞게 되는 휴회 기간 동안, 이 곳을 한 번 방문하기로 벌써부터 작정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꽤나 자연스러운 반응이었으며, ‘무대’ 뒤에서 ‘계획을 짜는 자들’에게는 너무나도 잘 예견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어떠한 정치인도 선거를 코앞에 두고 유세 활동의 기회를 잃고 싶어 하지는 않는 것입니다.
그가 여행을 떠날 시점이 다가올 무렵, 쿠바 MIG-23기 위기라는 ‘가짜 문제’가 생겨났습니다. 사실 카터 행정부[the Carter Administration]는 거의 1년 전부터, 러시아인들이 미그 23 전투기들을 쿠바로 보내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결국, 이 문제는, 이 타이밍에, 가짜 위기를 만드는 데에는 완벽한 구실로 활용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미그 23기는 몇가지 형태의 핵무기들을 탑재할 수 있다는 주장이 제기 되었습니다. : 그렇지만, 이 경우에 있어서도, 지상 병력 혹은 해상 병력을 지원하는데 적합한 수준의 전술 핵무기 정도를 실을 수 있을 뿐이었습니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때와 마찬가지로, 미그 23 전투기 자체가 미국에 위협이 되는 건 아니었던 것입니다. : 따라서, 미국 측이 미그 23 전투기 문제를 공론화시키기 시작할 때, 크렘린은 이것이 쿠바와의 관계에 있어서, 대중적인 긴장감을 불러 일으키기 위한 의도적인 제스츄어임이 분명하다는 사실을 감지할 수 있었습니다. 다만, 문제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 미국이 정작 노리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가? 카터 행정부가 당장에 쿠바를 침공하려 들만큼 미치진 않았을 것 아닌가? 그러한 행위는 분명히 비이성적인 태도로 비춰졌습니다. 그렇지만, 실상 미국의 보이지 않는 통치자들은 그보다 훨씬 더 비이성적인 행동을 하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실은 러시아쪽에서 이런 의구심을 갖도록 만드는 것 자체도, 부분적으로, 계산된 것으로서, 크렘린의 ‘체스 플레이어들’로 하여금 얼마간 균형 감각을 잃게 만들려는 데 목적이 있었던 것입니다. 한편, 이것은, 부분적으로, 악마주의적인 정신분열증 환자들인, 볼셰비키들[Satanic schizophrenics, the Bolsheviks]이 미국에서 갖게 된 통제력의 정도가 상당히 증대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어쨌거나, 제 1차 핵전쟁 이후, 자신들이 세계를 통치하게 되길 바라던 러시아에게 있어서, 쿠바는 대단히 중요한 나라였습니다. : 쿠바는 서반구에서 러시아의 주요 교두보로 간주되었던 것입니다. 또 그렇게까지 나중을 생각하지 않더라도, 당장에 쿠바는 러시아의 카리브해 잠수함 함대[Russia’s Caribbean Submarine Fleet]의 비공인 기지이기도 했습니다. 이 함대는 앞선 두 해 동안 멕시코 만에서 지속적으로 공격적인 양상을 띠어 왔었고, 또 위기가 고조되던 시기에는 보다 적극적인 공세를 취해 왔었던 것입니다.
마치 늘 부족하다고 여기는 듯한 인상을 줄만큼, 쿠바 안에서 핵무기가 집중적으로 배치된 곳만해도 최소한 4군데가 넘었습니다. 하나는 거의 북쪽 해안가에 위치해 있는 것으로, 카르데나스[Cardenas]의 남동쪽에 있는 것으로, 내륙으로 대략 10마일 정도 들어와 있는 지점에 있었습니다. 이 곳은 플로리다주 케이프 세이블[Cape Sable, Florida]에서 정남쪽으로 150마일 떨어진 위치였습니다. 두번째 지점은 첫번째 지점에서 동-남동방향으로 150마일 정도 떨어져 있었는데, 북쪽 해안으로부터 10마일 정도 내륙으로 들어와 있었습니다. 핵무기가 집중 배치된 세번째 지점은 거기서 남동쪽으로 125마일정도 더 떨어진 곳으로, 마르티[Marti’]의 북동쪽에 있는 것으로, 역시 내륙으로 15마일쯤 들어와 있었습니다. 네번째 핵무기 집중 배치 구역은 거의 쿠바의 동쪽 끝자락에 위치해 있는 것으로, 미국의 해군 기지인 관타나모만[Guantanamo Bay]에서 북-북서 방향으로 28마일 떨어진 지점에 있었습니다.
이런 도처에 깔려 있는 위협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미그 23기 문제를 지나치게 공론화시키자, 크렘린은 그 저의가 의심스러웠습니다. 11월 초, 미국이 마침내 쿠바 상공으로 SR-71 정찰기들을 띄워 보내자 긴장이 고조되었습니다. —1962년이 생각나게 하는군요.
11월 6일, 이에 대한 반응으로, 러시아의 대서양, 태평양, 그리고 카리브해 잠수함 함대들은 미국의 동, 서해안과 멕시코 만 지역으로 천천히 이동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공격 형태의 함대 배치를 취하진 않았지만, 엄청난 숫자를 대동하여 워싱턴에 분명한 경고 사인을 주고자 했습니다. 대부분 정지 상태에 머물러 있었지만, 많은 잠수함들은 중성자 무기들을 탑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미그 23기를 빌미삼아 만든 이 가짜 위기가 클라이맥스에 이르게 된 한 주 동안, 가이아나에서의 비극적 사건이 즉각적으로 전개되었던 것입니다. 11월 14일, 화요일을 시작으로, 미국과 영국 해군이 결합된 거대한 테스크 포스[Task Force] 팀이 쿠바로 향했습니다. 그 주의 중반에 쿠바 방어군[Cuban defense forces]은 완전 경계 태세에 돌입했습니다. 11월 16일, 목요일에는 12명으로 구성된 미국 상원의원들이 (SALT 회담을 갖는다는 구실로) 모스크바에서 러시아의 코시긴[Kosygin] 수상(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코시긴[Alexey Nikolayevich Kosygin](1904-1980) : 소련의 정치인. 1964-1980 소련 수상—역주)을 만났습니다.
그 자리에서 그들은 쿠바 미그 23기와 관련된 위기 상황은 “가짜 이슈”라고 말했습니다. 전직 시험 비행기 조종사이자, 미국의 첫번째 우주인이기도 한, 글렌 상원의원[Senator Glenn]은 이미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지만, 코시긴 수상은 미그 23기와 관련된 언급들에 대해서 대단히 화를 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반응 자체가, 미국의 정보공동체에게는, 쿠바를 상대로 취한 제스츄어가 제대로 된 미끼로써 먹혀 들어갔었다는 신뢰할만한 증거이기도 했습니다. 다음 날인, 11월 17일, 러시아는 쿠바에 미그 23기들을 보낸다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인정하는 한편, 이 비행기들은 엄격히 방어용 무기들이라고 밝혔습니다.
같은 날, 워싱턴 포스트지[the Washington Post]는 사설을 통해, 쿠바 미그 23기에 대한 언론의 주목을 한 번 더 강화시켜 주었습니다. 제목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 “새로운 쿠바 미사일 위기?”
바로 다음 날인 11월 18일 토요일, 레오 라이언 하원의원과, 세 명의 기자들, 그리고 한 명의 여성은, 존스타운으로부터의 탈출구를 찾으려 애쓰다가, 포트 카이투마 공항[the Port Kaituma Airport]에서 살해되었습니다. 최소 열 두 명에 이르는 다른 사람들은 부상을 입었습니다. 하지만, 기겁을 한 채, 존스타운을 도망 나온 사람들로 가득 차 있던 비행기를, 계속해서 따라가 격추시키려는 시도는 더 이상 행해지지 않았습니다. 결국, 다수의 목격자들이 목숨을 건졌고, 이들은 그 작은 비행기를 타고, 살육 현장이 되어버린 공항을 무사히 빠져 나와, 수도인 조지타운으로 돌아와서, 그들에게 가해졌던 공격에 대해서 보고할 수 있었습니다.
즉시, 전 세계의 이목이 가이아나로 집중되었지만, 그 와중에도, 존스타운에서의 ‘대량 살육[mass murder]’(이것은 ‘집단 자살[mass suicide]’로 잘못 알려졌습니다.)은 계속 진행 중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 순간, 쿠바를 향해 던졌던 의도적인 미끼는 더 이상 필요없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국방성[the Pentagon]은 일상적인 해군 연습을 하고 있는 것으로, 쿠바에서 50마일 떨어진 곳보다 더 가까이 접근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쿠바 방어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진정한 작전’은 이제 막 가이아나에서 시작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라이언 하원의원과 세 명의 저명한 기자들을 조직적으로 살해한 일은, 존스타운이 이내 언론의 주목을 받게 될 일을 보장해 주었습니다. 이러한 확신이 담보되고 나자, 짐 존스는 마침내, 존스타운 키부츠에서 대량 학살 명령을 내렸던 것입니다.
학살의 구체적인 내역
존스타운 재앙의 완전한 내역은 결코 공개적으로 알려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내가 당신들에게 확언컨대, 극히 소수의 사람들만이 정말로 자살했다는 것입니다. 다른 대부분의 사람들은 속임수에 당했고, ‘죽음의 의식[the death rites]’이 실제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저항했지만, 그들은 쇠약했고, 어떠한 도움의 손길도 받을 수 없었으며, 그저 무장한 살해단[armed execution squads]과 직면해야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아주 여러가지 방법들이 동원되었는데, 몇 백 명에 이르는 사람들은 청산가리[potassium cyanide]로 독살되었습니다.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은 탈출하려고 애쓰며, 보다 효과적으로 저항했습니다. 그들 중 많은 자들은 떼를 지어 정글 속으로 달아났지만, 어떠한 관용도 없이 저격되었습니다.
결국 대량 살육이 완료되었을 때, 살해자들은 이 처참한 죽음의 현장 속의 시체들을 적절한 곳에다 배치하는 ‘무대 설정 작업’을 했습니다. 러시아 미사일 기지 공격에 필요한 깜짝쇼를 완수하기 위해서는, 존스타운 사건을 처음 알리게 될 기자들이, 그 장면을 보고, 대량 자살이라고 보도하게 되는 일이 대단히 중요했던 것입니다. 오직 이러한 방법만이, 그 이면에 깔려 있었던, 사실상 군사적인 작전의 실체를 은폐하여, 러시아인들을 충분히 오랫동안 속일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총격을 받지 않은 시체들만 모두 따로 모아, 주의깊게 열을 이뤄 배치하거나, 혹은 그룹을 지어 배치하였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누가 보더라도, 첫 눈에, 모든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그리고 의도적으로 죽은 것이라고 판단하게 만들기 위함이었습니다. 바로 이 모습이, 바로 이튿날인, 11월 19일, 일요일 오후 늦게, 가이아나 군병력이 처음 목격한 장면이었습니다. 키부츠의 희생자들이 죽은 지는 이미 24시간도 넘은 때였고, 짐 존스를 포함한 살해자들은 이미 자리를 떠난 상태였습니다. 나는 존스 자신에 대한 이야기는 나중에 다시 할 것입니다. 나는 앞서 그가 이스라엘에서 생을 마감했다고 말했는데, 어떻게 그렇게 된 것인지 당신들이 궁금해 하고 있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질병의 위험을 무릅쓴 숫자 파악
가이아나 군병력은 질병을 옮기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겁이 났지만, 우선 정확한 숫자부터 세어야겠다고 판단하여, 가까이 가서 만지거나, 시체를 옮기지는 않은 채, 모두 몇 구인지를 파악했습니다. 일요일 밤, 그들이 확인한 총 시체 수는 409구였습니다. 통제된 미국의 주요 언론 매체들을 통해서는, 이 사건이 집단 자살로 보인다는 첫 평가가 보도되었습니다. 구체적인 조사를 기다려 볼 것도 없이, 언론 매체들은, 마치 이미 입증된 사실인 양, 존스타운의 현장을 ‘집단 자살’이라고 규정지었습니다. 며칠 후 몇몇 사람들이 의문을 제기했지만, 그 땐 이미, 처음 보도된 장면들을 통해, 가이아나 정부가, 이 사건의 조치를 위한 미국인들의 입국을 허용하게 만들려고 했던, 원래의 목적이 완수된 후였습니다.
예를 들어, 11월 21일 목요일, 짐 존스의 생존한 아들인 스티븐[Steven]은 조지타운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집단 자살이었을 리가 없다.”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같은 날, 워싱턴 스타지[The Washington Star]는, 한 가이아나 정보원을 인용하여, 존스타운 키부츠의 죽음의 현장은 심각한 의학적 불일치가 존재한다고 알렸습니다. 그 가이아나 정보원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여기 이 사람들은 청산가리[cyanide]로 죽은 것 같은데, 만약 당신이 정말로 이를 복용하게 된다면, 당신의 신체는 경련을 일으키게 되고, 온몸이 뒤틀린 채로 죽게 된다. 그런데 존스타운의 시체들은 모두가 편안한 상황에서 가지런히 죽음을 맞은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불일치가 생겨난 이유는, 가이아나 군병력이 도착할 때까지, 모든 시체들은 재배열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시체들은 얼굴을 아래로 향한 채 놓여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마지막 고통의 순간, 일그러진 모습을 띠었던 희생자들의 얼굴이, 뉴스 매체의 사진들을 통해 공개될 경우, ‘차분한’ 죽음을 맞은 듯한 인상을 주려고 했던 최초의 의도가 흐려질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계속되는 악몽
악몽과 같은 일이 계속되는 가운데, 미국은 러시아인들을 다시금 속일 목적으로, 먼저 공개적으로 가이아나 정부에 수백 구의 시체들을 수습해서 묻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러자, 가이아나 정부는 사전에 준비된 대로 반응을 보였습니다. 가이아나 측은, 이건 미국의 문제이니, 미국이 시체들을 미국땅으로 되가져 가야 될 것이라는, 유효 적절한 대답을 했습니다.—단지 계획된 대로 했던 것입니다. 이 거대하고도 끔찍한 업무를 원활히 처리하기 위하여, 가이아나 정부는, 통상 가이아나의 법에 따라 어떤 시체라도 본국 밖으로 보내질 경우, 우선적으로 부검을 거쳐야 한다는 조항의 준수를 포기하는 것에, ‘강제적으로’ 동의했던 것입니다. 결국, 이러한 ‘설정’과 함께 미국은, 정작 그들이 원했던 것, 즉, 가이아나 미사일 기지에 군사적 목적의 접근을 행하는 일에 대한 공수표를 발급받은 셈이었습니다.
러시아 정보 당국에서 이제 곧 무슨 일이 있을 것인지를 마침내 깨닫게 된 건, 11월 20일, 이른 월요일 아침이었지만, 이를 멈추게 하기에는 이미 너무 늦어 버렸습니다. 러시아로서는 감히 세계 언론에다 대고, “우리는 가이아나에 비밀 핵 미사일 기지를 보유하고 있는데, 미국에서 이를 곧 파괴시키려고 한다.”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그 경우, 오히려 세계 여론은 모두 미국 편에 서게 될 것이었습니다. 비록 러시아의 코스모스페어들[Russian Cosmospheres](러시아 보유 UFO형태의 비행체들—역주)은 재빨리 가이아나 상공으로 날아들었지만, 비밀스런 상태로 진행되는 전투에는 그들도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코스모스페어의 충전 입자 빔 무기[Charged Particle Beam Weapons]로, 코만도 스타일로 행해지는 군부대의 작업을 방해할 수도 있었지만, 그 경우, 오히려 러시아 미사일 기지 자체를 날려버릴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바로 한 해 전, 하비스트 문 전투 이후로, 러시아 군사력에 있어서, 이 가이아나의 미사일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보다 더 낮아진 상태였습니다. 만약 러시아가 그들의 상대방에게 공개적인 선전 포고를 한다고 가정할 경우, 이 미사일들의 보유 여부가, 그 선전 포고의 여부를 결정할 만큼의 가치를 갖지는 못했던 것입니다. 결국 이런 조건들 때문에, 러시아는 존스타운의 비극이 무대 위에 올려진 이 후, 그저 무기력한 상태로 물러서 있었던 것입니다.
추수감사절이 다가옴에 따라, 미국의 수송기들, 헬리콥터들, 군부대, 그리고 언론매체 팀들까지 포함하여, 한 떼의 거대한 무리가 가이아나로 날아들었습니다. 광활한 테메리 에어필드, 한 쪽 끝 코너에 지휘통제소가 설치되었는데, 여기서 존스타운과 러시아 미사일 기지를 대상으로 한, 두가지 작전을 한꺼번에 지휘하게 되었습니다.
군병력 가운데 일부는 존스타운 키부츠를 청소하는 메스꺼운 작업을 하기 시작했고, 다른 합동 공격대[joint attack forces]는 ‘갑작스러운 습격’을 위한 준비의 일환으로, 미사일 기지를 둘러싸는 지역에 정위치하였습니다. 그러는 동안, 하루하루 시간이 흐름에도 불구하고, 존스타운의 사망자 수는 변함없이 409명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러다, 정확히 추수감사절날, 가이아나 전투가 발생했습니다. 정글을 비롯한 각종 전투 현장에서 기습작전을 펼친 경험이 많은 급습 공격대원들은, 러시아 미사일 단지 쪽으로 이동하여, 산재한 모든 미사일 시설들을 향한 동시적인 공격을 감행했습니다. 엔테베 작전에서처럼, 전투 그 자체는 오래 진행되지 않았습니다. 성공하기 위해서는 대단히 빨리 끝내야 할 일이었습니다.
우선, 각각의 미사일 설치 장소에 있던 소규모 인원들은 급작스런 공격에 당황했고, 즉시 살해되었습니다. 미사일들은 재빨리 무력화되었습니다. 그런 다음, 공격대원들은 미사일 기지의 명령 통제 센터로 모여들었는데, 이 곳에서 마침내 피가 튀는 전투가 발생했습니다.
‘먼지가 가라앉았을 때’, 러시아 지휘관들을 포함한, 미사일 기지에 근무하고 있던 사람들은 모조리 다 살해되었습니다.
전투가 종료되었을 때, 테메리 에어필드에서 온 미국 헬리콥터들은 폐허가 된 미사일 단지 안에 착륙했고, 부상자들을 실어 날랐습니다. 남아 있는 공격 부대원들은 그 곳에서 완전히 철수하기 전에 두가지 해야 할 일들이 더 남아 있었습니다. 우선, 그들은, 공격대원들의 시체는 단 한 구도 가이아나 땅에 남겨 놓지 말라는 엄격한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부대원 한 사람 한 사람의 신원을 꼼꼼히 확인해 가며, 그 광활한 지역을 샅샅이 뒤졌습니다. 그들의 시체는 존스타운의 희생자들의 시체와 마찬가지로, 베트남전에서 사용하던 것과 같은 타입의 시체 담는 가방에 넣어 봉해진 다음, 빈 공터에 모아졌습니다. 쌓여 있는 시체들은 헬리콥터가 수송해 갔습니다.
마지막으로 연합 공격 대원들에게 주어졌던 명령은 모든 미사일들의 핵탄두를 제거한 다음, 이들을 모으는 것이었습니다. 이 핵탄두들은 조지타운으로 옮겨진 다음, 비행기를 이용하여 미국으로 공수될 예정이었습니다. 공격 부대원들 가운데 특별히 훈련된 요원들은 미사일 관리 병력들을 대상으로 한 초기 공격 이후, 즉시 이 작업에 들어갔던 터였습니다.
11월 24일 금요일, 이른 아침까지, 모든 핵탄두들이 제거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탄두들도 시체 담는 가방에, 가방당 하나씩 봉해졌습니다. 정글에서 그러모은 나뭇잎들을 함께 집어 넣었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가방이 그럴듯한 외관을 갖게 만들기 위해서였습니다.
물론 테메리 에어필드에 나와 있는 리포터들 가운데 그 어느 누구도 이를 알아볼 순 없었습니다. 또 그들은 미국의 지휘 통제소에 접근하는 일이 엄격히 통제되기도 했습니다. 가이아나 전투가 있었던 추수감사절 오후, 공격 부대원들 가운데 부상을 입은 자들은 공항으로 후송되었는데, 리포터들이 이를 보지 못하도록 엄격히 차단되었습니다. 때때로 리포터들은 시체 담은 가방들이 이쪽에서 저쪽으로 옮겨지는 장면들을 보기도 했지만, 당연히 그 안에는 모두 존스타운의 희생자들만이 들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중 어떤 가방에는 사망한 코만도 대원들이 들어 있고, 또 어떤 가방에는 핵탄두들이 들어 있다는 사실을 그들이 알 도리는 없었습니다. 존스타운 키부츠로부터 시체들을 실어 나르는 일이 계속되는 동안, 가이아나 전투에 따른 여파들은 완벽하게 은폐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 모든 시체들을 어디로 가져갔던 것인가?
가이아나의 수송기들이 델라웨어[Delaware]에 있는 도버 공군 기지[dover Air Force Base]를 향했을 때, 많은 리포터들은 완전히 어리둥절했습니다. 존스타운 희생자들의 대부분은 캘리포니아 출신들이었고, 도버 기지에 있는 것과 유사한 규모의 시체 안치소는 캘리포니아, 오클랜드 공군 기지[Oakland Air Force Base in California]에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도버가 선택되었던 이유는, 러시아 핵 탄두들을 인근의 아버덴 성능 시험장[Aberdeen Proving Ground]과 무기고[Arsenal]로 옮기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작업은 도버에서 필립스 공군 기지[Phillips Air Force Base] 간을 잇는 근거리 비행을 통해 이루어 졌습니다.
가이아나 사건의 최초의 사망자 수 409명은 가이아나에 나와 있던 미국 관리들에 의해 확정적인 숫자로 받아들여 졌습니다. 하지만 이는 몇 가지 의문점을 남겼는데, 우선, 존스타운에 머물고 있던 것으로 알려진 천 여명의 사람들 가운데, 나머지는 그럼 어디로 간 것인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결국, 한창 시체 수거 작업이 진행 중이던, 추수감사절, 한 군사 대변인은 기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우리가 알아 본 바에 따르자면, 자살 사건이 일어날 당시, 존스타운에 그렇게 많은 수의 사람들이 있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가 이런 언급을 하는 도중에도, 러시아 미사일 기지에서 펼쳐지던 가이아나 전투는 진행 중에 있었습니다. 추수감사절 다음 날인 금요일 오후가 될 때까지, 이미 485구의 시체든 가방들이 테메리 에어필드에 도착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곧 도착하게 될 러시아 핵탄두 ‘시체들’은, 처음 키부츠에서 가이아나인들이 세었던 사망자수, 409명을 훨씬 초과하여, 그 수치를 더 올리게 될 예정이었습니다. 이는 엄청난 실수였고, 이러한 실수는 전투가 한창 벌어지고 있는 도중에 생겨난 일이었습니다. 무언가 신속한 조치가 취해져야만 할 상황이었습니다.
결국, 추수감사절 다음날이었던 금요일, 테메리 에어필드에 나와있던 국방성 대변인은, 숨을 채 가눌 겨를도 없이, 또 대단히 흥분된 상태에서, CBS 텔레비전 방송을 통해, 다음과 같은, 참으로 놀라운 소식을 전했습니다. : “존스타운에서 발견된 원래 사망자들의 숫자에는 심각한 오류가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지금 그 대략적인 시신 수는 전체 780구가 넘는 것으로 보입니다. 많은 시체들이 단지 다른 사람들의 시체 더미 아래에서 발견되었습니다. 덩치가 큰 성인들의 시체더미 아래에, 상대적으로 왜소한 성인들 그리고 아이들의 시체들이 발견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를 도무지 믿으려 들지 않는 기자들에게 하루종일 시달린 채, 정부측 대변인은 이 놀라운 새로운 발견에 관한 이야기의 살을 나중에 덧붙였습니다. 워싱턴 스타지[The Washington Star]는 그 동일한 대변인이 금요일 저녁에 언급한 말을 다음과 같이 인용했습니다. : “시체 더미 한 가운데 부근, 그리고 집회장 인근 몇몇 군데에는, 시체들이 세 겹으로 쌓여 있는 곳도 있었습니다. 그 층들 사이에는 담요가 깔려져 있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질서정연하게, 가지런히 열을 맞춰 서서, 이미 다른 사람들이 죽어 있는 자리 위에, 포개져서 집단 자살을 했다는 게 참으로 놀랍지 않습니까??
이 이야기는 너무나도 믿기지 않는 설명이라서, 결국 이틀 뒤, 미국 정부는 원래의 이야기를 철회하고, 담요 운운했던 것은 “루머”였노라고 밝혔습니다. 그렇더라도 여전히, 시체들 위에 시체들이 놓여 있었다는 주장은 계속 관철되었고, 결국 11월 25일 토요일, 또 다른 미공군측 대변인은 모든 설명들을 그럴 듯하게 만들려는 시도로 다음 설명을 건넸습니다. : “제가 관찰한 바에 따르자면, 사람들이 자살을 할 때, 몇 군데로 나눠진 작은 원들을 그린 모습으로 빙 둘러섰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들 앞쪽에는 아이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죽으면서 원의 안쪽 방향으로 쓰러졌고, 자연스럽게 시체들은 원의 중심을 향해 겹겹이 포개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당신들 정말로 이 터무니 없는 설명을 믿는다면, 스스로가 참으로 놀라운 장님들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그런데, 당신들은 진짜 마치 물고기들마냥, 이 기가 막힐 노릇의 미끼들을 물었습니다!
가이아나 사건의 은폐 스토리는 이런 허술한 설명력을 안은 채, 전 세계에 알려졌습니다.—그럴 수 밖엔 없었습니다. 11월 24일 금요일 오후, 가이아나 부수상[Deputy Prime Minister]이었던 레이드[Reid]는 국회에서, 가이아나 국민들에게 알릴 목적으로, 첫번째 공식 발표를 했습니다. 그런 다음, 그는 모든 질문들에 대한 답변을 거부한 채, 또 “이건 수치요, 수치”, “이건 조작이요”라고 외쳐대는 국회의원들의 고함소리를 뒤로한 채, 총총히 국회의사당을 도망치듯 빠져 나왔습니다. 한편, 미국에서는, 추수감사절, FBI 국장이던, 윌리엄 웹스터[William Webster]가 다음 사항을 알렸습니다. : “FBI 재난 처리반[FBI Disaster Squad]은 제임스 워렌 존스[James Warren Jones](짐 존스)의 시체를, 지문 기록 대조 작업 끝에 확정적으로 식별해 내었습니다.” 그렇지만, 이 말은 사실이 아니었고, 그 순간, 짐 존스는 이미 사전에 잘 계획된 대로, 가이아나를 빠져 나오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그럼, 어떻게 짐 존스는 빠져나갈 수 있었던가?
존스의 탈출 계획은 사전에 잘 짜여져 있었습니다. 대양 항해용 보트 한 대가, 조지타운에서 남서 방향으로 35마일 떨어진 강변 마을인, 바르티카[Bartica]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존스타운에서 바르티카까지 무사히 가기 위하여, 존스는 안전보장 증명서[Safe Conduct Pass]를 소지하고 있기도 했습니다.
추수감사절날 이른 아침, 가이아나 전투가 시작되고 있을 무렵, 존스는 조지타운을 향해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가이아나 시간으로 정오가 조금 지났을 무렵, 그의 보트는 에세키보 강[Essequibo River] 어귀를 떠나 대서양으로 접어들었습니다.
그곳에서부터 존스는 복잡한 여정을 따라 갔는데, 이는 혹시 모를 추적을 피하기 위해 짜여진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여정에도 불구하고, 그는 추적되고 있었습니다. 가이아나를 떠난 존스는 정동 방향으로 330마일을 간 후, 남쪽으로 꺾어서, 11월 27일 현지 시각 오전 5시 30분경에, 프랑스령 기아나, 라메르[La Mere, French Guiana] 인근에 도착했습니다. 그 곳에서 그는 육로로 수도 카옌[Cayenne]까지 갔고, 다시 비행기를 이용해 대서양을 건너, 아프리카 서부 시에라리온의 프리타운[Freetown, Sierra Leone]으로 갔습니다. 프리타운에서 그는 다시 해안을 따라 북쪽으로 비행하여, 기니-비소 공항[Guinea-Bissau Airport]에 도착하였는데, 도착시간은 현지 시각으로 11월 28일 오후 7시경이었습니다.
그 곳에서, 두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그는 다시 DC-3기로 갈아탄 후, 이륙했습니다. 동쪽으로 날아가 세네갈, 탐바쿤다[Tambacounda, Senegal]로 갔고, 다시 그곳에서 말리[Mali]쪽으로 갔는데, 도중에 세구[Segou], 몹티[Mopti], 그리고 가오[Gao]를 경유했습니다. 그런 다음, 니제르, 아가데즈[Agadez, Niger]로 향했고, 이어, 차드, 라르고[Largeau, Chad]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다시 그의 비행기는 수단, 앗바라[Atbara, Sudan]로 날아갔고,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비행하여, 포트수단[Port Sudan]에 도착하였는데, 이 때가 현지 시각으로 11월 30일 오전 4시가 막 지났을 무렵이었습니다. 포트수단에 도착했을 때, 존스는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공무 수행용 터보프롭 장착 교통편[Turboprop Executive Transport]을 발견했습니다. 이 비행기는 이스라엘 정보기관에서 보유, 운영하고 있던 것이었습니다. 20분 뒤, 이 비행기는 존스를 태운 채, 이륙하여, 홍해[the Red Sea]의 한 복판으로 날아갔고, 다시 아카바만[the Gulf of Aqaba]을 향해 갔습니다. 현지 시각, 11월 30일, 오전 6시 30분, 존스를 태운 비행기는 이스라엘의 뒷마당이라고 할 수 있는 엘라트[Elath]에 잠시 머물렀고, 이어서, 현지 시각 오전 7시 20분, 예루살렘[Jerusalem] 외곽의 한 사립 비행장에 도착했습니다. 거기서, 그는 인근의 다른 장소로 이동했고, 이 곳에서 그는 비밀 결과보고[intelligence debriefing]를 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한 복음전도사에게 일어나게 되었는가?
이전 6년간에 걸쳐, 의식적으로 서서히 비밀 정보 공통체의 요원으로 변모해 갔던 존스는, 가이아나에서 펼쳐졌던 미국과 이스라엘 정보기관들 간의 공동 작전에 참여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쪽에서는, 존스타운 키부츠를 세우고, 또 이것이 의도된 목적대로 사용될 수 있도록, 이 일의 수행과 관련된 중요한 전문지식들을 존스에게 건네 주었고, 또 핵심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부관들까지 붙여 줬습니다.
존스타운이 어떤 곳이었는지를 알길 원한다면, 사실상, 그저 백과사전에서 ‘키부츠[kibbutz]’를 찾아보기만 하면 됩니다. 예를 들어, 월드 북 백과사전[the World Book Encyclopedia]에서, “이스라엘[ISRAEL]”이라는 제목 아래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와 있습니다. : “키부츠라 불리는 집단 공동체에서, 농부들은 모든 자산을 공유하고, 자신들의 노동력도 이에 더하게 된다. 마을 행정관리소는 그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을 제공해 준다. 성인들은 큰 식당에서 함께 식사를 한다. 하지만, 결혼한 부부들과 독신자들은 저마다 사적인 숙소를 갖는다. 모든 아이들은 별도로 마련된 집에서 함께 길러진다. 부모들은 저녁 식사 전, 한시간 혹은 두시간 동안 아이들을 방문한다.”
미국에서 사용되는 의미에 따라 “코뮌[commune]”이라는 단어를 한 번 검토해 봅시다. 이는 한 자치 공동체(코뮌)[commune]에서 함께 생활함을 뜻합니다. 이스라엘 키부츠 가운데, 아주 순수한 형태의 ‘자치 공동체’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만약 한 ‘자치 공동체’가, 짐 존스와 같이, 악마주의적이고, 정신분열적 특성을 가진 사람에 의해서 운영될 경우, 존스타운에서 일어난 것처럼, 살인이나 자살과 같은 행위들이 강제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예가 한 나라 전체를 포함할 정도로 확장된다고 할 때, 우리는 ‘볼셰비키에 의해 장악된 국가’와 같은 예를 떠올려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당시에 이미 미국에는 이러한 일이 일어나고 있었고, 현재 당신들은 ‘국가적 자살[national suicide]’이라는 파멸적 상황을 향해 직접 끌려 가고 있는 중이기도 합니다.
그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데 드는 끔찍한 비용을 한 번 살펴보도록 합니다.
사건이 전개되어 감에 따라, 미국과 러시아 간의 실질적인 전쟁은 바로 그 추수감사절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미국은 하비스트 문 전투의 패배로 인해, 이미 전쟁에 져 있는 것이나 다름 없는 상태였습니다. 물론 모든 일들이 계산했던 대로, 순차적으로 진행되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당신들은 무슨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지에 대해서도, 또 그 일들이 어떤 순서로 일어나고 있는 지에 대해서도 아무런 생각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주제에 대해서 나중에 다시 다룰 것입니다. 어쨌거나, 이 때를 기점으로, 미국과 러시아 간의 ‘전쟁의 규칙들’은 영원히 바뀌어 버렸습니다.
이 후, 러시아는 SALT II를 통한, ‘무장해제 협박’으로 미국에 “항복”을 강요했습니다. 그렇지만, 미국의 ‘보이지 않는 통치자들’은 항복을 선택하는 대신, 미국의 선제 공격으로 시작되는, ‘자살적인 핵 전쟁’을 준비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던 것입니다.
가이아나 사건은 전체적인 전쟁에 대한 ‘미리보기’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이를 기획했던 자들의 관점에서 보자면, 가이아나 전투는 눈부신 성공이었습니다.—하지만, 얼마나 많은 비용을 치렀습니까! 여러 차례에 걸쳐 많은 미국인들이 고의적으로 희생되어 왔고, 그 희생자들의 수는 실제 전투에서 적들의 손에 의해 희생되는 수보다 많았습니다. 꼭 마찬가지 방식의 계획들은 여전히 진행 중에 있고, 이에 따라 일이 진행될 경우, 수백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의 죽음으로, 지금까지의 희생자들의 수는 간단히 제압되어 버릴 것입니다.
실상 가이아나 전투는 무익했던 일로, 그저 러시아의 팔을 살짝 할퀸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이 일은 하비스트 문 전투 이전에 계획된 것이었지만, 하비스트 문 전투가 먼저 일어나는 바람에, 가이아나 전투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전에, 이미 쓸모없는 짓이 되어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자, 짐 존스는 존스타운에 있는 자신의 왕좌 위에 다음과 같은 문구를 걸어두고 있었습니다. :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자들은 이를 되풀이할 운명에 처해 진다.”
이제 당신들 가운데 누구라도, 가이아나의 비극이 실질적으로 종교와 어떤 측면에서, 또 어떤 식으로 연관되어 있었던 것인지에 대해서, 계속해서 더 논문을 쓰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까? 오, 실로 불쌍한 사람들이여! 하지만, 아직도 늘 속기만 하는 당신들은, 거짓의 향연들을 여전히 즐기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고 싶거든, 계속 그렇게 하세요.
……
Gyeorgos Ceres Hatonn, 게오르고스 세레스 하톤
피닉스 저널 제 14권, “R. R. P. P. : Rape, Ravage, Pillage And Plunder of The Phoenix Vol. I.” 제 14-15장, pp.131-147에서 발췌.
http://www.fourwinds10.com/journals/
http://blog.daum.net/truthinlight
글 수 1,902
‘진짜’ 가이아나 이야기는 자리에서 일어나 주시겠습니까!
당신들의 연대상, 1976년, 미국과 러시아는 제 3차 세계 대전이자, 제 1차 핵 전쟁 준비라는 ‘일급 비밀’을 둘러싸고, 서로간의 암투로 여념이 없게 되었습니다. 이는 1976년 여름, 당시 베일에 가려져 있던, ‘수중 미사일 위기[Underwater Missile Crisis]’가 발발했을 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 후, 이 일은 전 미국에 걸친, 말 그대로, 수천 곳에 설치되어 있던 무기들을 이용한, ‘전면적인 핵 방해행위[wholesale nuclear sabotage]’로까지 확대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사건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따로 구체적으로 다룰 것입니다.) 이 무기들 가운데에는, 초대형 댐과 저수지들을 날려버릴 수 있는 메머드급 수소 폭탄에서부터, 러시아인들이 ‘미니핵폭탄[micronukes]’이라고 부르던 작은 핵 폭파 장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것들이 있었습니다.
때때로 러시아인들은, 미국 전체에 대한 전면적 핵폭발 이전의 일종의 경고조치로서, 이 미니핵폭탄들을 터뜨리곤 해 왔던 것입니다. 여전히 편하고 아늑하기만 해서, 사람들을 ‘흔들어 깨울’ 필요성을 별로 못 느끼겠습니까?
1977년 9월, 이 비밀 전쟁은 결정적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았습니다. 역시나 베일에 가려져 있던 일로, 우주 공간 상에서 펼쳐졌던 ‘하비스트 문(추석 달) 전투[Battle of the Harvest Moon]’에서, 미국의 비밀 통치자들은 예정된 핵전쟁을 치뤄 내기 위해 꼭 필요했던 ‘에이스 카드’를 그만 잃어버렸습니다. 충격적인 반전이기도 했는데, 러시아인들은 달의 코페르니쿠스 크레이터[Copernicus Crater] 내에 있던, 미국의 비밀 빔무기[beam-weapons] 기지(그렇습니다. 거기 그런 것이 있었습니다!)를 궤멸시켰던 것입니다. 그 때 이후로, 러시아는 우주 공간 상에서, 군사적으로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할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자, 잠깐만 산수 문제 하나 검토해 보기로 합시다. 대략 1975년부터 1990년(1990년 4월 30일 구술—역주)에 이르기까지라,,—음,,, 그럼 이러한 국면이 15년간 계속되어 온 셈인가요? 당신들 그동안 러시아인들이 우주 공간에서 뭘 해 왔을 것이라고 보십니까?
우리는 이 모든 주제들을 보다 면밀히 다루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가이아나[Guyana] 사건은 ‘종교적인 설정’ 속에 발생했던 일로서, 이 저널 상에서 제기되는 이러한 이야기들과 어울려 맞아 들어가는 내용인 것입니다.
이 일이 있기 전, 러시아와 미국은, 양쪽 모두에 있어서, 저마다의 리더십에 큰 변화가 있었습니다. 먼저 러시아에서는, 1917년 이후로 계속 권력을 쥐어 왔던, 원래의 통치 세력들인 무신론의 볼셰비키들이, 60년도 넘게 지속되어 왔던 내부적 투쟁의 결과로, 마침내 전복되고 말았습니다. 볼셰비키들을 악의 화신으로 간주하던, 한 기독교파 소속의, 일군의 토착 러시아인들로 구성된 강력한 세력이 크렘린[the Kremlin]의 절대 통치권을 거머쥐게 되었던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볼셰비키들은 러시아에서 쫓겨났고, 이들 대부분은 미국으로 날아들게 되었습니다. 한편, 이들은 이미 미국에서 막강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던 많은 볼셰비키들에 합류했고, 양국 볼셰비키들의 규합 세력은, 그 때까지 ‘제 3세대 록펠러 형제들[the third generation Rockfeller brothers]’로 구성된 ‘비밀 동맹[Secret Allies]’이 휘둘러 오던 권력을, 점차적으로 자기들의 것으로 만들어 나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미국에서 볼셰비키의 권력이 점점 더 커져 나가자, 이 ‘사탄의 열매[the Satanic fruits]’는 점점 더 눈에 두드러지게 되었습니다.
1978년 4월에는, 백 명도 넘는 무고한 시민들이 고의적으로 위험에 처하게 된 일도 있었는데, 이는 ‘어떤 비밀 임무[an intelligence mission]’과 연루된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대한항공 902기와 관련된 사건으로, 이 비행기는 극도로 민감한 반응을 보이던 러시아 영공으로 침입해 들어가는 바람에 피격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대한항공 여객기 사건은 전혀 우연한 사고가 아니었고, 무고한 승객들에 대한 ‘살해 위협’이 정작 이 사건의 핵심 요소였습니다. 사실, 러시아 전투기들이 이 보잉 707기(KAL 902기)를 공중에서 폭파시키는 것이, 실제 벌어졌던 일처럼, 소수의 사상자만을 내며 지상으로 끌어 내리는 것보다 훨씬 쉬운 일이었던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미국에서 볼셰비키들의 권력은 점점 더 강화되어 갔고, 이와 함께 인명을 경시하는 풍조는 날이 가면 갈수록 더해만 갔습니다. 가이아나 사건에서는 단지 백 여명이 아니라, 천 여명의 목숨이 걸려 있었는데, 결국엔 이들을 죽이는 쪽으로 일이 마무리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것도 ‘새어 나가게’ 만들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가이아나, 존스타운[Jonestown, Guyana]에서의 이 기괴한 비극은, 만약 볼셰비즘을 비롯한 다른 몇몇 카르텔 세력들을 막아내지 못한다면, 향후 전 미국에 걸쳐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 것인지에 대한 어렴풋한 전조를 보여주는 사례였던 것입니다. 볼셰비키들의 사고 패턴은 거의 정신분열적[schizophrenic]이고, 악마주의적[Satanic]이며, ‘옳음’과 ‘그름’ 사이의 분별력을 거의 상실한 듯한 양상을 띱니다.—또는 최소한 “옳은 행위”라는 가면을 쓴 채로 무슨 일이든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경향들이 무분별하게 허용되는 가운데 볼셰비키들은 권력을 쥐어 왔고, 그 결과로서 이는 사회 전체에 참담한 비극을 안겨 주어 온 것입니다.
‘살해’와 ‘자살’이라는 행위들이 거의 ‘이해의 수준’을 넘어서는 스케일 상에서 발생합니다. 75년 전 볼셰비키들이 러시아에서 정권을 잡을 때의 상황도 그러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 볼셰비키들은 미국을 차지하기 위해서 같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은 바로 당신들의 코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중입니다.
존스타운[Jonestown]의 군사적 목적
그렇습니다. 나는 “군사적”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조금 있다가, 나는 당신들에게 레오 J. 라이언 하원의원[Leo J. Ryan, Congressman]이 어떻게 이용되었는지도 알려줄 것입니다. 가이아나 비극에 관한 ‘무대 설정’은 이미 1974년에 이루어졌습니다. 이 해에, 바로 그 자리에 가이아나 미사일 기지가 있다는 사실이 폭로되었던 것입니다. 이 뉴스는 전 미국에 걸쳐 라디오 방송을 한 번 탔지만, 즉시 차단되었고, 마치 없었던 일처럼 간주되었습니다. 이게 그 해 6월의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10월에 와서, 몇몇 ‘용감한 발설자들’에 의해, 이 사실이 새롭게 대중의 주목을 받게 되었지만, 즉시 뉴스 전파를 멈추라는 위협이 또 들어 왔고, “만약 그러지 않는다면”이라는 협박도 뒤따랐습니다.
당시 알려졌던 뉴스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 “관련 문제에 관한 신뢰할 수 있는 정보원에 따르자면, 가이아나 공화국[the Republic of Guyana](남미의 베네주엘라[Venezuela] 옆에 위치)은 또 하나의 쿠바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 곳에 배치되어 있는 핵미사일들은 파나마 운하의 가툰 갑문[the Gatun Locks of the Panama Canal]과 미국의 여러 도시들을 조준하고 있다.”
물론, 당시 “왕조[Dynasty]”(록펠러 가문을 의미—역주)와 함께 ‘춤을 추고 있던’ 미국 정부는 이 사실의 진상을 조사해 보는 일조차 거부했습니다.—그들이 왜 그랬겠습니까? 왜냐하면, 그들이 이를 설치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러한 경고는 종종 다시 등장하였고, 몇몇 시민들은 필요한 정보를 얻어보려고 노력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직면해야 했던 것은, 대개, “벽보고 이야기하는 듯한 침묵”, “이중 발언” 그리고 “부인” 밖엔 없었습니다. 결국 많은 사람들은 단순히 전체 이야기 자체를 불신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중 몇몇 통찰력이 있는 자들은 ‘정부를 믿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자, 누가 더 옳은 판단을 내렸던 것 같습니까?
‘플롯’을 이해하려면 1965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만 합니다.
존스타운[Jonestown]에서의 비극으로 그 절정을 맞게 되는, 이 이야기의 발단은, 실상, 1965년도에 시작되었습니다. 가이아나는 과거 영국의 식민지인 영국령 가이아나[British Guiana]였다가, 새롭게 독립을 맞이한 나라였습니다.
그 당시, ‘비밀 록펠러/소비에트 동맹[the secret Rockefeller/Soviet alliance]’은 그들간 동맹관계의 정점에 있었고, 장기에 걸친 제휴 계획[joint plan]이기도 한, ‘통제된 핵 전쟁[a controlled Nuclear War]’ 계획은 본 궤도를 달리고 있었습니다. 양쪽 모두는 서로서로 궁극적인 ‘배반[double-cross]’을 기도하고 있었지만, 그건 당시로서는 아직 나중에야 있을 일이었습니다. 미국 측의 비용 부담을 통해, 러시아 쪽의 힘을 의도적으로 키우는 것은, ‘세계 정부와 세계 지배[World Government and conquest]’를 향한 그들 간의 제휴 계획의 일부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the Cuban Missile Crisis]는 그들의 프로그램에 일시적인 ‘장애[monkey wrench]’를 불러 일으켰습니다. 존 F. 케네디[John F. Kennedy] 대통령은 ‘개인적으로’ 이 문제에 개입하여, 쿠바의 핵무장을 막았던 것입니다. : 결국 이 일로 인해, 그리고 다른 몇 가지 “부주의한 행동들[indiscretions]”로 인해, 그는 겨우 1년 정도 지난 후, 달라스[Dallas]에서 목숨을 잃었던 것입니다.
케네디의 후임자였던 린든 존슨[Lyndon Johnson]은 ‘시나리오[the script]’를 주의깊게 준수할 것임을 보다 분명히 했습니다. 그런데, 쿠바 사태를 보면서, 소련은 카리브해 지역에 또 다른 전진 배치 기지가 하나 더 필요함을 느꼈습니다. 쿠바에서의 미사일 발사 이전에, 전략적 목적의 기지를 하나 정도 더 보유할 필요성을 느꼈던 것입니다. 이러한 목적을 충족시켜 줄 수 있는 곳으로 가이아나가 선택되었습니다. 데이비드 록펠러[David Rockefeller]는 막시스트[a Marxist]인 포브스 번햄[forbes Burnham]이 이 나라의 수상이 될 수 있도록 필요한 조치를 취해 주었습니다. 그에 대한 답례로, 체이스 맨하탄 은행[the Chase Manhattan Bank]은 가이아나 공화국의 재정 담당 은행이 되었는데, 이는 록펠러 가문이 가이아나산 금에 접근하는 일을 용이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한편, 이러한 모든 일들의 순조로운 진행을 도왔던, 또 한가지 주요 요소는, 1965년, 린든 존슨 대통령이 미 공군 기지인 앳킨슨 필드[Atkinson Field]를 가이아나 정부 측에 넘겨주기도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미국이 수 십년간 보유해 온 기지에 대한 통제권이, 적절한 구실도 없이, 하루 아침에 포기되었던 것입니다. 앳킨슨 필드는 가이아나의 수도 조지타운[Georgetown]의 남쪽에 위치해 있던 것으로, 이 후, 테메리 에어필드[Temehri Airfield]로 재명명되었습니다. 이 비행장[airfield]은 나중에 존스타운 사건이 있은 후, 미국 헬리콥터들을 이용하여, 시신들을 미국으로 공수하는 데에 이용되기도 했습니다.
존슨 대통령이 테메리 에어필드를 막시스트 국가인 가이아나에 넘겨 주었을 때, 그는 실로 러시아 측에 커다란 선물 하나를 안겨 준 셈이었습니다. 테메리 에어필드는 라틴 아메리카에서 가장 큰 비행장이기도 한데, 실제로 뉴욕 최대 공항인 존 F. 케네디 공항보다도 더 큽니다. 그리고 그 위치는 쿠바 군 병력과 물자들을 아프리카 지역으로 실어 나르는 데에도 아주 이상적인 곳입니다.
결과적으로 록펠러 가문을 대신해서 행한 존슨의 행동은, 아프리카를 잇는 중요한 병참 요충지를 미국으로부터 강탈한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또 쿠바 병력이 원활하게 드나드는 관문을 만들어 주기도 한 셈이었습니다. 나중에 문제가 되기도 했던 일로, 앙골라[Angola]와 다른 아프리카 지역에 쿠바 병력이 진출할 수 있었던 것은, 부분적으로 이에 따른 결과이기도 했습니다.
이 후 수년간에 걸쳐, 가이아나에서의 러시아 군사 작전들은, 테메리 에어필드를 부근으로 해서 집중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1974년, 그들은 이 비행장을 빙 둘러싸는 지역에 미사일들을 설치했습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두 해 동안, 이 곳의 미사일들을 이동시켜, 조지타운[Georgetown]시 서쪽에 위치한 격리된 미사일 단지[missile complex]에 배치했습니다.
이 새로운 지역에서는, 미사일들이, 직경 약 30마일에 이르는 지역에 산재된 형태로, 배치되었습니다. 그 대략적인 중심 지역에 명령 및 통제 시설이 있었고, 이 곳은 러시아 지휘관에 의해 통제되었습니다. ‘플롯’은 점점 더 탄탄해져 갔던 것입니다.
미사일 재배치가 완료되었을 때, 이 새로운 미사일 단지는 테메리 에어필드로부터 북서방향으로 70마일 정도 떨어진 곳에 그 중심지가 놓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곳으로부터 대략 70마일 정도 더 북서쪽으로 떨어진 곳에, 이스라엘식의 키부츠[Israeli-type kibbutz] 형태를 띠었던, 존스타운 인민 사원 단지[the Jonestown Peoples Temple complex]가 위치해 있었던 것입니다. 즉, 미사일 단지는 존스타운 공동체[the Jonestown commune]와 테메리 에어필드 중간 쯤에 있었던 셈입니다. 친구들이여, 인민 사원 키부츠[the Peoples Temple kibbutz]가 미사일 단지에 가까이 위치해 있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인민 사원의 기원
처음 인민 사원(기독교계 종교단체—역주)이 생겨난 것은 1950년대로, 이 때까지만 하더라도 이 단체는 정부 음모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1970년경, 미국 정보 공동체 쪽에서 동원한 ‘몇몇 요원들[certain elements]’이 이 곳에 침투해 들어가, 인민사원을 전복시켰던 것입니다. ‘록펠러 형제들’이 늘 견지해 온 표준적인 행동 지침이 있다면, 그건 일군의 권력을 쥐고 있는 세력[faction]만을 지원해 주는 것이 아니라, 이에 대한 반대세력과 스파이들도 함께 지원해 주는 것이었습니다.—어느 누가 “공짜” 자금과 금전적 후원을 마다하겠습니까? 이런 방식을 통해서, 적어도 이론상으로, 그들은 항상, 누군가 그들의 통제를 벗어나려는 자가 발생하면, 언제라도 그 자를 제거할 수 있는 위치에 설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당신들 가운데 누구라도 그들의 책략에 넘어가서 ‘우리의 작업’을 망치지 않길 바란다면, 부디 이 교훈을 잘 새겨 두십시오.
가이아나에 있어서, 록펠러 형제들은, 그들 자신의 자금을 통해 권력을 손에 쥐어 줬던, 포브스 번햄[Forbes Burnham] 수상에 대한 견제책으로, 인민 사원이라는 도구를 이용하려 했던 것입니다. 전반적으로 볼 때, CIA의 조율 아래에 있었던, 미국 정보 공동체 내부의 ‘몇몇 사람들’에게는, 바로 이 일을 성취해 내는 방법을 찾는 임무가 주어졌던 것입니다.
여러가지 옵션들을 평가해 본 결과, 인민 사원이 이상적인 도구가 될 수 있을 것으로 판명되었습니다. 이 단체의 리더인 짐 존스[Jim Jones]에 대한 심리상태 진단 기록을 보면, 그는 자신이 ‘보이지 않는 통치자들[the Unseen Rulers]’의 막강한 도구로 전환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한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통제되는 주요 언론매체들을 통해 보도된 것과는 달리, 짐 존스는 타고난 유태인으로, 그는 항상 키부츠 스타일의 조직이 이상적인 지향점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드러내곤 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이러한 ‘사고’는 의식적, 무의식적 ‘요소들’ 간의 결합으로 생겨난 산물이기도 했습니다.
‘의식적인 수준’에서는, 돈과 막강한 정치적 지지 세력들이 그의 이상 실현을 뒷받침해 주었습니다. : 한편, ‘무의식적인 수준’에서는, 심리학적 프로그래밍 기술[the technique of psychological programming](이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다음에 따로 다루도록 하겠습니다.)이 사용되었던 것입니다.
점차적으로 짐 존스는 자기 자신의 인격에 대한 통제력을 잃어갔고, 점점 ‘당신들의 보이지 않는 통치자들’이 만들어 내고 싶어 했던 짐 존스의 모습을 닮아가고 있었습니다. 그 과정은 불가피하게, 짐 존스라는 자에게 엄청난 내부적 갈등들을 야기시켰고, 결국 이 자를 문제성을 띤 위험한 인물로 바꿔 놓았던 것입니다. 친애하는 자들이여, 이것이 정확히 그에게 발생했던 일입니다.
행동 변화
1973년에 이르러, 존스의 행동 변화는 그의 친구들과 그를 따르는 자들에 의해 감지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반쯤 의식을 가진’, 죽음을 부르는 인물로 변해 있었고, 이 무렵 ‘음모’는 한창 진행 중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해에, 비록 소수의 사람들만이 그를 따랐지만, 인민 사원으로 우후죽순처럼 쏟아져 들어오는 자금은, 그로 하여금 가이아나 공화국, 존스타운에, 농장형태의 키부츠를 세우는 일이 가능하도록 만들어 주었습니다.
가이아나는 엄격한 막시스트 경찰 국가였고, 포브스 번햄의 승인 없이는, 어느 누구도 공동체 스타일의 새로운 단체를 그 곳에서 출범시킬 수가 없었습니다. : 그러나 데이비드 록펠러 쪽 요원들은 번햄이 필요로 하는 모든 보장을 다 들어 주었고, 존스가 만들려고 하는 공동체는 가이아나의 막시스트 환경에 멋지게 들어맞을 것이라고 설득했습니다.
그런데, 그와 동시에 포브스 번햄은 데이비드 록펠러를 상대로 ‘이중 속임수[double-crossing]’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정확히 록펠러가 염려했던 것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정치적으로는 록펠러에 협력하고 있었지만, 가이아나산 금괴들을 산지의 저장고[caves in the mountains]에 숨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데이비드 록펠러는 이 사실을 한참 나중에야 알게 되었지만, 이를 알게 되었을 땐, 그보다 더 큰 문제, 즉 ‘러시아의 배신’이라는 사태가 발생한 상태였었고, 우선 더 심각한 문제를 처리했어야 했기에, 번햄에 대한 응징은 뒷전으로 밀렸던 것입니다.
1974년 여름까지만 하더라도, 록펠러 형제들은 여전히 크렘린[Kremlin]과 사이좋게 잘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무렵, 이미 불길한 징조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볼 때, 이해할 수 없는 어떤 일들이 러시아에서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일이, 자신들의 오랜 동지들인 볼셰비키들이 전복되고 있는 일일 줄은 감히 상상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어쨌거나 일은 계속 진행되어 갔습니다. : 오늘날 러시아로부터 가해지는 어떠한 위협에 대한 언급도 전적으로 부인되듯이, 당시 가이아나 미사일에 대한 어떠한 경고도 역시 전적으로 부인되었던 것입니다. 정부 대변인들은 대놓고 거짓말을 했고, 이에 대해 감히 이야기하기를 주저하지 않던 자들을 ‘우스꽝스러운 바보들’로 만들어 버리곤 했습니다. 1970년대 말로 잡혀있던, ‘계획되고 예정된 핵전쟁’의 청사진이 잘 그려지고 있던 중이었는데, 대중이 이 계획을 알게 되어 일을 그르치고 싶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 그렇지만, 2년 후, ‘1976년 수중 미사일 위기[the Underwater Missile Crisis of 1976]’를 시작으로, 러시아의 미국에 대한 전면적인 군사적 배신은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정부에서는 이를 감추어 왔지만, 대부분의 당신들은 이 위기에 대해서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에 대해서도 나중에 다시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당신들의 보이지 않는 통치자들’은 이 놀라운 사건으로 심각한 타격을 입었는데, 사실 그 최초의 목적은 크렘린의 지도자들과의 비밀 동맹을 원상회복시키려는 것이었습니다. 케네디 대통령이 ‘룰’을 깨고, 쿠바 미사일을 이슈화시켰던 일이 있었던 이 후로, 한 때, 실제로 그들은 이러한 관계회복 시도에 성공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여하튼, 이러한 사건들을 거치면서, 그들은 계획 중이던 실제 전쟁 계획을 발전시켜 나감에 있어서, ‘우연성 계획들[contingency plans]’도 함께 가동시켜 나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
주요 타겟
가이아나 미사일 기지는 이제 ‘수정된 계획’에 따라, 주요 타겟들 가운데 하나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 ‘수정 계획’이 수립되기 시작하던 2년 전(1976년)만 하더라도, ‘하비스트 문 우주 전투[the Space Battle of the Harvest Moon]’(1977년)는 아직 미래에나 다가올 일이었습니다. 미국이, 조만간 달에서, 그 작동을 개시하게 될, ‘비밀 빔무기 기지[secret beam-weapons base]’를 잃게 된다는 건, 거의 상상할 수도 없는 일처럼 여겨졌던 것입니다. 이 든든한 달 기지를 보유하고 있는 동안, 당신들의 보이지 않는 통치자들은 이걸 잃을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해 본 일도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수중 미사일 위기를 통한 배신을 겪으면서, 그들은 가능한 한 많은 러시아의 군사 무기들을 철거시키길 원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또한, 처음에 ‘제휴 핵전쟁’을 계획하던 때에 가졌던 복안보다, 훨씬 더 완전하고 철저하게 러시아를 파괴시키기로 마음먹었던 것입니다.
‘가이아나 작전[Operation Guyana]’의 입안자들에겐 해결해야 할 아주 어려운 숙제가 주어졌습니다. 가이아나에서, 파나마 운하와 미국 남부 지역의 도시들을 겨누고 있던, 이 러시아 미사일 기지를 완전히 제거하는 것이 그 주목적이었습니다. : 그렇지만, 이것은 ‘(핵)전쟁 이전[pre-war]’, 비밀스럽고도 전혀 예기치 못한 놀라운 방식으로 수행되어야 할 작전이었습니다. 이것이 비밀리에 진행되어야 할 이유가 있다면, 미국도, 러시아도, 그곳에 미사일 기지 같은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일반인들에게 아예 알려지길 원치 않는 데다가, 또 알려지면 이를 감당할 길도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나아가 아주 예기치 못한 방식이면서도 완벽하게 일을 처리해야 할 이유가 있다면, 아주 짧은 시간 동안의 경고가 주어진다손 치더라도, 가이아나 기지는 쿠바 병력에 의해, 재강화되고, 탄탄하게 방어될 수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이 일은 ‘코만도 스타일의 급습 공격[a commando-style raid]’으로 처리될 필요가 있었습니다. 예를 들자면, 1976년 7월, 우간다, 엔테베 공항[Entebbe Airport in Uganda]에서 있었던 이스라엘의 급습 공격(1976년 6월 27일, 텔아비브에서 아테네를 거쳐 파리로 향하던 에어프랑스 139기는 2명의 팔레스타인인들과 2명의 독일인들에 의해 납치됨. 그들은 이스라엘에 갇혀 있던 40명의 팔레스타인인들과 서독, 프랑스 등지에 갇혀 있던 13명의 다른 수감자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친-팔레스타인 국가인 우간다, 엔테베 공항에 기착하여 장기 대치하였으나, 7월 4일 이스라엘 방어군[Israel Defense Forces]에 의한 엔테베 작전으로 종결—역주)과 유사한 방식이 요구되었던 것입니다. 당신들 독자들에게, 그 유사성과 함축적인 의미가 보다 분명하게 와 닿지 않습니까? 물론 당신들의 ‘리더들’은 다른 스타일의 공격 방식으로 접근해야 할 필요성을 느낄 때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1962년 케네디 암살 사건과 같은 일이 그러했습니다. : 이 일은 미국인들에게 진행 중인 것을 ‘널리 알리고’, ‘당신들의 지지’를 구하려 했던 사안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가이아나 건에 있어서, 당신들의 보이지 않는 통치자들은, 어떤 비용을 들여서라도, 그 어떠한 내용도 새어 나가지 않도록 하려고 마음먹었던 것입니다. 거기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충분히 큰 규모의 합동 공격 부대를, 과연 어떤 방식으로 가이아나에 보내고, 또 얼마나 신속하게 일을 처리할 수 있겠는가?
또한 가이아나에 있는 것과 같은 규모의 군사 기지를 파괴시키는 일 자체가 이미 전혀 쉬운 일이 아닌데다가, 이건 경험이 필요한 문제이기도 했습니다. 결국, 비밀 합동 군사 부대를 일시적으로 가이아나로 들여보내기 위해서는, 아주 갑작스러우면서도, 대규모로 행해지는, 거의 반강제적인 요구가 충분히 수용될 수 있을 만큼의, 그럴 듯한 구실이 필요하다는 결론이 내려졌습니다. 그 구실이란, 그것이 어떠한 것이 되었든 간에, 러시아가 가이아나에서 일궈 온 모든 것들을 포기하지 않는 이상, 가이아나에 결코 함부로 보복 조치를 취하지는 못하도록, 러시아의 손을 묶는 일을 확실히 보장해 줄 수도 있는 것이어야 했습니다. 또한 그 구실은, 그것이 어떠한 것이 되었든 간에, 군사적인 전문성을 필요로 하면서도, 마치 비군사적인 일처럼 보일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어야 했습니다. 나아가, 습격 이후, 미사일 기지 공격에 수반되는 모든 사상자들을 가이아나에서 깨끗하게 치울 수 있는 수완도 필요했는데, 만약 그러지 못하고, 가이아나에 시체들이 그대로 방치되어 있을 경우, 이는 국제적인 사건으로 비화될 위험성이 있고, 또 그렇게 된다면, 비밀 미사일 기지와는 무관한, 어떤 전혀 다른 이야기 전개로 포장될 가능성도 있는 문제였던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러시아의 지령을 추종하는 가이아나 정부가, 공격 도중 죽게 된 합동 군사 부대원들의 시체를 공개하면서, 이들은 포브스 번햄 정권에 반대하여 쿠데타를 일으키려다가, 사살되었다고 말할 수도 있는 것이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엄청나게 커다란 문제였지만, 존스타운 키부츠는 그에 대한 답을 제시해 줄 수 있었습니다. 유일하게 필요한 것이 있다면, 그건 수백명의 미국 시민들이 가이아나에서 갑자기 죽게 되는 ‘설정’, 그것도 즉각적이고 전면적인 언론 공개를 담보해 주는 조건 아래, 벌어지는 일이어야 했습니다.
이 엄청난 비극은 군사적인 개입이 요구되는 수준의 문제여야 했고, 존스타운의 위치 역시 사전의 명령에 따라 지정된 위치여야 했습니다. 헬리콥터들이 테메리 에어필드와 존스타운 사이를 왔다갔다 할 때, 자연스럽게, 미사일 단지[the missile complex](이 곳은 전문적인 위장술로 감춰져 있었지만, 그 상세한 내역은 알려져 있었습니다.) 위를 날아다녀야 했던 것입니다. 이래야만 할 이유가 있다면, 그 경우, 합동 특별 군사 부대가 미사일 기지 인근에 착륙하기도 쉽고, 또 그들이 임무를 마치고 복귀할 때에도, 상대적으로 손쉬운 방식으로, 사상자들과 함께 동승한 헬리콥터를 타고 돌아올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테메리 에어필드에 나와 있는 리포터들은 헬리콥터들이 북서 방향으로 갔다가 또 똑같은 방향에서 되돌아 오는 걸 지켜보게 되겠지만, 그들은 그저 모든 헬리콥터들이 150마일 떨어진 존스타운과 공항 사이만을 분주히 왕래하고 있는 것이라고 믿도록 유도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현실적으로 그 중 많은 헬리콥터들은 같은 방향으로 거리가 절반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러시아 미사일 기지와 공항 사이를 왕래하게 되겠지만, 리포터들이 이를 알아낼 방법은 없는 것이었습니다.
계획의 시초
미사일 기지 공격에 대한 위장으로, 존스타운에서의 ‘대량 살육’이라는 시나리오가 결정되었을 때, 존스타운은 단순히 인민 사원이 보유한 변경의 체류지[outpost] 정도로만 기능하고 있었습니다. 그 곳엔 의도된 목적에 부합할 정도로, 충분히 큰 사건을 만들어 내기에 적절한 수의 사람들도 없었습니다. 결국, 직간접적인 방법을 다 동원하여, 짐 존스 자신이, 그를 따르는 무리들을 대동하고, 직접 가이아나 키부츠로 갈 수 있도록 그를 설득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전체 인민 사원 교도들 가운데, 25%에서 30%에 이르는 사람들을 끌어 모으게 되었는데, 자연히 이 사람들은 존스에게 극단적으로 의존적인 사람들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들은 심신의 피로, 협박, 외부 도움으로부터의 단절과 같은 요소들로 인해 대단히 취약해진 사람들이기도 했습니다.—달리 말하자면, 그들은 철저히 세뇌당한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한국전쟁 이후로, 세뇌 기술은, 많은 사람들이 얼마든지 동일한 행동을 하도록 유도해 낼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발달되어 있음이 잘 알려져 있었습니다. 한국 전쟁 당시, 정신력이 강한 미군들조차도 놀라우리만치 많은 숫자가 세뇌에 희생될 수 있었는데, 왜냐하면 당시 그들은 자신들 앞에 직면해 있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를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존스타운의 희생자들은 단련된 군인들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취약한 자들이었습니다.
1977년 8월 짐 존스는 거대한 한 무리의 희생자들을 데리고 가이아나로 떠났습니다. 그런데, 같은 달, 유엔주재 미국대사였던 앤드류 영[Andrew Young]은 가이아나의 포브스 번햄 수상에서 메시지 하나를 전달했습니다. 그는 몇가지 조건 아래, 미국과 세계 은행[the World Bank]은 가이아나에 대한 원조를 더 늘리겠노라고 말했습니다.—그 말은, 경우에 따라, 번햄의 호주머니를 이전보다 열 배 이상 더 채워 줄 수 있을 것이라는 의미였습니다. 결국, 존스타운의 재앙을 담보해 줄 수 있는, 열쇠가 될만한 조치가 취해졌던 건, ‘하비스트 문 전투’가 있기 딱 하루 전의 일이었습니다.
불쌍한 레오 라이언[Leo Ryan]
전체의 비극을 불러일으키는 방아쇠 역할을 하고, 또 요란한 언론 공개를 보장해 줄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고인이 된 레오 J. 라이언[Leo J. Ryan] 하원의원의 ‘이권’이 이 사건에 개입되고, 또 사건과 함께 펼쳐질 수 있도록 잘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라이언 의원은, 오늘날 미국 하원 의원들 사이에서 사실상 거의 찾아보기 힘든 용기를 갖고서, 또 자신이 위험에 처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가이아나로 갔습니다. 그런데, 물론 그가 몰랐던 사실이 있다면, 그는 향하게 된 그 곳에는, 비극적인 결말이 사전에 미리 계획되어 있었다는 점입니다.
라이언 하원 의원과, 또 포트 카이투마 공항[Port Kaituma Airport]에서 그와 함께 죽음을 맞이했던 사람들은, 실상 제 1차 핵전쟁으로 나아가는 ‘비밀 전쟁’의 희생자들이었습니다. 물론, 소위 말하는 가이아나 존스타운에서의 “집단 자살[mass suicide]”로 죽은 수백명의 미국 시민들 역시 마찬가지였던 것입니다.
라이언 하원의원이 가이아나로 떠나기로 되어 있던, 예정된 여행 날짜가 가까워져 옴에 따라, 외교적, 군사적 수준에서의 다른 움직임들도 준비 단계에 들어갔습니다. 무엇보다가, 러시아가 미사일 기지를 보호할만한 조치를 취하기엔 너무 늦어질 순간이 될 때까지, 러시아의 시선이 가이아나를 향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일이 핵심이었습니다. 물론 서반구에 있어서, 러시아의 가장 중요한 전략 거점은 쿠바[Cuba]였습니다. 따라서, 1978년 추수감사절에 있었던 ‘가이아나 전투[Battle of Guyana]’가 일어나기 전, 마지막 몇 일 동안, 의도적인 ‘MIG-23기 위기’를 만들어서 변죽을 울렸던 것입니다.—당신들 가운데 아무도 그 사건을 기억하지 못하겠습니까? 이 사건은 러시아의 시선을 쿠바로 돌리는 데 그 원래의 목적이 있었던 것입니다. 오, 우리는 당신들에게 이야기해 줄만한, 정말 너무나도 많은 비밀들을 알고 있는 셈이군요. 그렇지 않은가요? 크렘린에서 진짜 표적은 쿠바가 아니라 가이아나였다는 사실을 알아챘을 때에는, 이미 너무 늦었던 것입니다.
1978년 추수감사절 전투
고 레오 라이언 하원 의원의 최측근들이 공개적으로 밝혀 온 바에 따르면, 그가 가이아나로 가야겠다는 불운한 결정을 내렸던 이유는, 그에게 전달된 국무부 보고서 때문이었는데, 내용이 워낙 부실해서, 그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고, 결국 직접 가봐야겠다는 결정을 내렸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상 라이언 의원의 이와 같은 반응은 정확히 예견된 것이었고, 의도적으로 계산된 일이었습니다. 선거철이 다가올 무렵, 라이언 의원은, 선거 후 맞게 되는 휴회 기간 동안, 이 곳을 한 번 방문하기로 벌써부터 작정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꽤나 자연스러운 반응이었으며, ‘무대’ 뒤에서 ‘계획을 짜는 자들’에게는 너무나도 잘 예견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어떠한 정치인도 선거를 코앞에 두고 유세 활동의 기회를 잃고 싶어 하지는 않는 것입니다.
그가 여행을 떠날 시점이 다가올 무렵, 쿠바 MIG-23기 위기라는 ‘가짜 문제’가 생겨났습니다. 사실 카터 행정부[the Carter Administration]는 거의 1년 전부터, 러시아인들이 미그 23 전투기들을 쿠바로 보내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결국, 이 문제는, 이 타이밍에, 가짜 위기를 만드는 데에는 완벽한 구실로 활용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미그 23기는 몇가지 형태의 핵무기들을 탑재할 수 있다는 주장이 제기 되었습니다. : 그렇지만, 이 경우에 있어서도, 지상 병력 혹은 해상 병력을 지원하는데 적합한 수준의 전술 핵무기 정도를 실을 수 있을 뿐이었습니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때와 마찬가지로, 미그 23 전투기 자체가 미국에 위협이 되는 건 아니었던 것입니다. : 따라서, 미국 측이 미그 23 전투기 문제를 공론화시키기 시작할 때, 크렘린은 이것이 쿠바와의 관계에 있어서, 대중적인 긴장감을 불러 일으키기 위한 의도적인 제스츄어임이 분명하다는 사실을 감지할 수 있었습니다. 다만, 문제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 미국이 정작 노리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가? 카터 행정부가 당장에 쿠바를 침공하려 들만큼 미치진 않았을 것 아닌가? 그러한 행위는 분명히 비이성적인 태도로 비춰졌습니다. 그렇지만, 실상 미국의 보이지 않는 통치자들은 그보다 훨씬 더 비이성적인 행동을 하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실은 러시아쪽에서 이런 의구심을 갖도록 만드는 것 자체도, 부분적으로, 계산된 것으로서, 크렘린의 ‘체스 플레이어들’로 하여금 얼마간 균형 감각을 잃게 만들려는 데 목적이 있었던 것입니다. 한편, 이것은, 부분적으로, 악마주의적인 정신분열증 환자들인, 볼셰비키들[Satanic schizophrenics, the Bolsheviks]이 미국에서 갖게 된 통제력의 정도가 상당히 증대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어쨌거나, 제 1차 핵전쟁 이후, 자신들이 세계를 통치하게 되길 바라던 러시아에게 있어서, 쿠바는 대단히 중요한 나라였습니다. : 쿠바는 서반구에서 러시아의 주요 교두보로 간주되었던 것입니다. 또 그렇게까지 나중을 생각하지 않더라도, 당장에 쿠바는 러시아의 카리브해 잠수함 함대[Russia’s Caribbean Submarine Fleet]의 비공인 기지이기도 했습니다. 이 함대는 앞선 두 해 동안 멕시코 만에서 지속적으로 공격적인 양상을 띠어 왔었고, 또 위기가 고조되던 시기에는 보다 적극적인 공세를 취해 왔었던 것입니다.
마치 늘 부족하다고 여기는 듯한 인상을 줄만큼, 쿠바 안에서 핵무기가 집중적으로 배치된 곳만해도 최소한 4군데가 넘었습니다. 하나는 거의 북쪽 해안가에 위치해 있는 것으로, 카르데나스[Cardenas]의 남동쪽에 있는 것으로, 내륙으로 대략 10마일 정도 들어와 있는 지점에 있었습니다. 이 곳은 플로리다주 케이프 세이블[Cape Sable, Florida]에서 정남쪽으로 150마일 떨어진 위치였습니다. 두번째 지점은 첫번째 지점에서 동-남동방향으로 150마일 정도 떨어져 있었는데, 북쪽 해안으로부터 10마일 정도 내륙으로 들어와 있었습니다. 핵무기가 집중 배치된 세번째 지점은 거기서 남동쪽으로 125마일정도 더 떨어진 곳으로, 마르티[Marti’]의 북동쪽에 있는 것으로, 역시 내륙으로 15마일쯤 들어와 있었습니다. 네번째 핵무기 집중 배치 구역은 거의 쿠바의 동쪽 끝자락에 위치해 있는 것으로, 미국의 해군 기지인 관타나모만[Guantanamo Bay]에서 북-북서 방향으로 28마일 떨어진 지점에 있었습니다.
이런 도처에 깔려 있는 위협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미그 23기 문제를 지나치게 공론화시키자, 크렘린은 그 저의가 의심스러웠습니다. 11월 초, 미국이 마침내 쿠바 상공으로 SR-71 정찰기들을 띄워 보내자 긴장이 고조되었습니다. —1962년이 생각나게 하는군요.
11월 6일, 이에 대한 반응으로, 러시아의 대서양, 태평양, 그리고 카리브해 잠수함 함대들은 미국의 동, 서해안과 멕시코 만 지역으로 천천히 이동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공격 형태의 함대 배치를 취하진 않았지만, 엄청난 숫자를 대동하여 워싱턴에 분명한 경고 사인을 주고자 했습니다. 대부분 정지 상태에 머물러 있었지만, 많은 잠수함들은 중성자 무기들을 탑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미그 23기를 빌미삼아 만든 이 가짜 위기가 클라이맥스에 이르게 된 한 주 동안, 가이아나에서의 비극적 사건이 즉각적으로 전개되었던 것입니다. 11월 14일, 화요일을 시작으로, 미국과 영국 해군이 결합된 거대한 테스크 포스[Task Force] 팀이 쿠바로 향했습니다. 그 주의 중반에 쿠바 방어군[Cuban defense forces]은 완전 경계 태세에 돌입했습니다. 11월 16일, 목요일에는 12명으로 구성된 미국 상원의원들이 (SALT 회담을 갖는다는 구실로) 모스크바에서 러시아의 코시긴[Kosygin] 수상(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코시긴[Alexey Nikolayevich Kosygin](1904-1980) : 소련의 정치인. 1964-1980 소련 수상—역주)을 만났습니다.
그 자리에서 그들은 쿠바 미그 23기와 관련된 위기 상황은 “가짜 이슈”라고 말했습니다. 전직 시험 비행기 조종사이자, 미국의 첫번째 우주인이기도 한, 글렌 상원의원[Senator Glenn]은 이미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지만, 코시긴 수상은 미그 23기와 관련된 언급들에 대해서 대단히 화를 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반응 자체가, 미국의 정보공동체에게는, 쿠바를 상대로 취한 제스츄어가 제대로 된 미끼로써 먹혀 들어갔었다는 신뢰할만한 증거이기도 했습니다. 다음 날인, 11월 17일, 러시아는 쿠바에 미그 23기들을 보낸다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인정하는 한편, 이 비행기들은 엄격히 방어용 무기들이라고 밝혔습니다.
같은 날, 워싱턴 포스트지[the Washington Post]는 사설을 통해, 쿠바 미그 23기에 대한 언론의 주목을 한 번 더 강화시켜 주었습니다. 제목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 “새로운 쿠바 미사일 위기?”
바로 다음 날인 11월 18일 토요일, 레오 라이언 하원의원과, 세 명의 기자들, 그리고 한 명의 여성은, 존스타운으로부터의 탈출구를 찾으려 애쓰다가, 포트 카이투마 공항[the Port Kaituma Airport]에서 살해되었습니다. 최소 열 두 명에 이르는 다른 사람들은 부상을 입었습니다. 하지만, 기겁을 한 채, 존스타운을 도망 나온 사람들로 가득 차 있던 비행기를, 계속해서 따라가 격추시키려는 시도는 더 이상 행해지지 않았습니다. 결국, 다수의 목격자들이 목숨을 건졌고, 이들은 그 작은 비행기를 타고, 살육 현장이 되어버린 공항을 무사히 빠져 나와, 수도인 조지타운으로 돌아와서, 그들에게 가해졌던 공격에 대해서 보고할 수 있었습니다.
즉시, 전 세계의 이목이 가이아나로 집중되었지만, 그 와중에도, 존스타운에서의 ‘대량 살육[mass murder]’(이것은 ‘집단 자살[mass suicide]’로 잘못 알려졌습니다.)은 계속 진행 중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 순간, 쿠바를 향해 던졌던 의도적인 미끼는 더 이상 필요없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국방성[the Pentagon]은 일상적인 해군 연습을 하고 있는 것으로, 쿠바에서 50마일 떨어진 곳보다 더 가까이 접근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쿠바 방어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진정한 작전’은 이제 막 가이아나에서 시작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라이언 하원의원과 세 명의 저명한 기자들을 조직적으로 살해한 일은, 존스타운이 이내 언론의 주목을 받게 될 일을 보장해 주었습니다. 이러한 확신이 담보되고 나자, 짐 존스는 마침내, 존스타운 키부츠에서 대량 학살 명령을 내렸던 것입니다.
학살의 구체적인 내역
존스타운 재앙의 완전한 내역은 결코 공개적으로 알려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내가 당신들에게 확언컨대, 극히 소수의 사람들만이 정말로 자살했다는 것입니다. 다른 대부분의 사람들은 속임수에 당했고, ‘죽음의 의식[the death rites]’이 실제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저항했지만, 그들은 쇠약했고, 어떠한 도움의 손길도 받을 수 없었으며, 그저 무장한 살해단[armed execution squads]과 직면해야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아주 여러가지 방법들이 동원되었는데, 몇 백 명에 이르는 사람들은 청산가리[potassium cyanide]로 독살되었습니다.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은 탈출하려고 애쓰며, 보다 효과적으로 저항했습니다. 그들 중 많은 자들은 떼를 지어 정글 속으로 달아났지만, 어떠한 관용도 없이 저격되었습니다.
결국 대량 살육이 완료되었을 때, 살해자들은 이 처참한 죽음의 현장 속의 시체들을 적절한 곳에다 배치하는 ‘무대 설정 작업’을 했습니다. 러시아 미사일 기지 공격에 필요한 깜짝쇼를 완수하기 위해서는, 존스타운 사건을 처음 알리게 될 기자들이, 그 장면을 보고, 대량 자살이라고 보도하게 되는 일이 대단히 중요했던 것입니다. 오직 이러한 방법만이, 그 이면에 깔려 있었던, 사실상 군사적인 작전의 실체를 은폐하여, 러시아인들을 충분히 오랫동안 속일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총격을 받지 않은 시체들만 모두 따로 모아, 주의깊게 열을 이뤄 배치하거나, 혹은 그룹을 지어 배치하였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누가 보더라도, 첫 눈에, 모든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그리고 의도적으로 죽은 것이라고 판단하게 만들기 위함이었습니다. 바로 이 모습이, 바로 이튿날인, 11월 19일, 일요일 오후 늦게, 가이아나 군병력이 처음 목격한 장면이었습니다. 키부츠의 희생자들이 죽은 지는 이미 24시간도 넘은 때였고, 짐 존스를 포함한 살해자들은 이미 자리를 떠난 상태였습니다. 나는 존스 자신에 대한 이야기는 나중에 다시 할 것입니다. 나는 앞서 그가 이스라엘에서 생을 마감했다고 말했는데, 어떻게 그렇게 된 것인지 당신들이 궁금해 하고 있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질병의 위험을 무릅쓴 숫자 파악
가이아나 군병력은 질병을 옮기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겁이 났지만, 우선 정확한 숫자부터 세어야겠다고 판단하여, 가까이 가서 만지거나, 시체를 옮기지는 않은 채, 모두 몇 구인지를 파악했습니다. 일요일 밤, 그들이 확인한 총 시체 수는 409구였습니다. 통제된 미국의 주요 언론 매체들을 통해서는, 이 사건이 집단 자살로 보인다는 첫 평가가 보도되었습니다. 구체적인 조사를 기다려 볼 것도 없이, 언론 매체들은, 마치 이미 입증된 사실인 양, 존스타운의 현장을 ‘집단 자살’이라고 규정지었습니다. 며칠 후 몇몇 사람들이 의문을 제기했지만, 그 땐 이미, 처음 보도된 장면들을 통해, 가이아나 정부가, 이 사건의 조치를 위한 미국인들의 입국을 허용하게 만들려고 했던, 원래의 목적이 완수된 후였습니다.
예를 들어, 11월 21일 목요일, 짐 존스의 생존한 아들인 스티븐[Steven]은 조지타운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집단 자살이었을 리가 없다.”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같은 날, 워싱턴 스타지[The Washington Star]는, 한 가이아나 정보원을 인용하여, 존스타운 키부츠의 죽음의 현장은 심각한 의학적 불일치가 존재한다고 알렸습니다. 그 가이아나 정보원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여기 이 사람들은 청산가리[cyanide]로 죽은 것 같은데, 만약 당신이 정말로 이를 복용하게 된다면, 당신의 신체는 경련을 일으키게 되고, 온몸이 뒤틀린 채로 죽게 된다. 그런데 존스타운의 시체들은 모두가 편안한 상황에서 가지런히 죽음을 맞은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불일치가 생겨난 이유는, 가이아나 군병력이 도착할 때까지, 모든 시체들은 재배열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시체들은 얼굴을 아래로 향한 채 놓여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마지막 고통의 순간, 일그러진 모습을 띠었던 희생자들의 얼굴이, 뉴스 매체의 사진들을 통해 공개될 경우, ‘차분한’ 죽음을 맞은 듯한 인상을 주려고 했던 최초의 의도가 흐려질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계속되는 악몽
악몽과 같은 일이 계속되는 가운데, 미국은 러시아인들을 다시금 속일 목적으로, 먼저 공개적으로 가이아나 정부에 수백 구의 시체들을 수습해서 묻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러자, 가이아나 정부는 사전에 준비된 대로 반응을 보였습니다. 가이아나 측은, 이건 미국의 문제이니, 미국이 시체들을 미국땅으로 되가져 가야 될 것이라는, 유효 적절한 대답을 했습니다.—단지 계획된 대로 했던 것입니다. 이 거대하고도 끔찍한 업무를 원활히 처리하기 위하여, 가이아나 정부는, 통상 가이아나의 법에 따라 어떤 시체라도 본국 밖으로 보내질 경우, 우선적으로 부검을 거쳐야 한다는 조항의 준수를 포기하는 것에, ‘강제적으로’ 동의했던 것입니다. 결국, 이러한 ‘설정’과 함께 미국은, 정작 그들이 원했던 것, 즉, 가이아나 미사일 기지에 군사적 목적의 접근을 행하는 일에 대한 공수표를 발급받은 셈이었습니다.
러시아 정보 당국에서 이제 곧 무슨 일이 있을 것인지를 마침내 깨닫게 된 건, 11월 20일, 이른 월요일 아침이었지만, 이를 멈추게 하기에는 이미 너무 늦어 버렸습니다. 러시아로서는 감히 세계 언론에다 대고, “우리는 가이아나에 비밀 핵 미사일 기지를 보유하고 있는데, 미국에서 이를 곧 파괴시키려고 한다.”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그 경우, 오히려 세계 여론은 모두 미국 편에 서게 될 것이었습니다. 비록 러시아의 코스모스페어들[Russian Cosmospheres](러시아 보유 UFO형태의 비행체들—역주)은 재빨리 가이아나 상공으로 날아들었지만, 비밀스런 상태로 진행되는 전투에는 그들도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코스모스페어의 충전 입자 빔 무기[Charged Particle Beam Weapons]로, 코만도 스타일로 행해지는 군부대의 작업을 방해할 수도 있었지만, 그 경우, 오히려 러시아 미사일 기지 자체를 날려버릴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바로 한 해 전, 하비스트 문 전투 이후로, 러시아 군사력에 있어서, 이 가이아나의 미사일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보다 더 낮아진 상태였습니다. 만약 러시아가 그들의 상대방에게 공개적인 선전 포고를 한다고 가정할 경우, 이 미사일들의 보유 여부가, 그 선전 포고의 여부를 결정할 만큼의 가치를 갖지는 못했던 것입니다. 결국 이런 조건들 때문에, 러시아는 존스타운의 비극이 무대 위에 올려진 이 후, 그저 무기력한 상태로 물러서 있었던 것입니다.
추수감사절이 다가옴에 따라, 미국의 수송기들, 헬리콥터들, 군부대, 그리고 언론매체 팀들까지 포함하여, 한 떼의 거대한 무리가 가이아나로 날아들었습니다. 광활한 테메리 에어필드, 한 쪽 끝 코너에 지휘통제소가 설치되었는데, 여기서 존스타운과 러시아 미사일 기지를 대상으로 한, 두가지 작전을 한꺼번에 지휘하게 되었습니다.
군병력 가운데 일부는 존스타운 키부츠를 청소하는 메스꺼운 작업을 하기 시작했고, 다른 합동 공격대[joint attack forces]는 ‘갑작스러운 습격’을 위한 준비의 일환으로, 미사일 기지를 둘러싸는 지역에 정위치하였습니다. 그러는 동안, 하루하루 시간이 흐름에도 불구하고, 존스타운의 사망자 수는 변함없이 409명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러다, 정확히 추수감사절날, 가이아나 전투가 발생했습니다. 정글을 비롯한 각종 전투 현장에서 기습작전을 펼친 경험이 많은 급습 공격대원들은, 러시아 미사일 단지 쪽으로 이동하여, 산재한 모든 미사일 시설들을 향한 동시적인 공격을 감행했습니다. 엔테베 작전에서처럼, 전투 그 자체는 오래 진행되지 않았습니다. 성공하기 위해서는 대단히 빨리 끝내야 할 일이었습니다.
우선, 각각의 미사일 설치 장소에 있던 소규모 인원들은 급작스런 공격에 당황했고, 즉시 살해되었습니다. 미사일들은 재빨리 무력화되었습니다. 그런 다음, 공격대원들은 미사일 기지의 명령 통제 센터로 모여들었는데, 이 곳에서 마침내 피가 튀는 전투가 발생했습니다.
‘먼지가 가라앉았을 때’, 러시아 지휘관들을 포함한, 미사일 기지에 근무하고 있던 사람들은 모조리 다 살해되었습니다.
전투가 종료되었을 때, 테메리 에어필드에서 온 미국 헬리콥터들은 폐허가 된 미사일 단지 안에 착륙했고, 부상자들을 실어 날랐습니다. 남아 있는 공격 부대원들은 그 곳에서 완전히 철수하기 전에 두가지 해야 할 일들이 더 남아 있었습니다. 우선, 그들은, 공격대원들의 시체는 단 한 구도 가이아나 땅에 남겨 놓지 말라는 엄격한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부대원 한 사람 한 사람의 신원을 꼼꼼히 확인해 가며, 그 광활한 지역을 샅샅이 뒤졌습니다. 그들의 시체는 존스타운의 희생자들의 시체와 마찬가지로, 베트남전에서 사용하던 것과 같은 타입의 시체 담는 가방에 넣어 봉해진 다음, 빈 공터에 모아졌습니다. 쌓여 있는 시체들은 헬리콥터가 수송해 갔습니다.
마지막으로 연합 공격 대원들에게 주어졌던 명령은 모든 미사일들의 핵탄두를 제거한 다음, 이들을 모으는 것이었습니다. 이 핵탄두들은 조지타운으로 옮겨진 다음, 비행기를 이용하여 미국으로 공수될 예정이었습니다. 공격 부대원들 가운데 특별히 훈련된 요원들은 미사일 관리 병력들을 대상으로 한 초기 공격 이후, 즉시 이 작업에 들어갔던 터였습니다.
11월 24일 금요일, 이른 아침까지, 모든 핵탄두들이 제거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탄두들도 시체 담는 가방에, 가방당 하나씩 봉해졌습니다. 정글에서 그러모은 나뭇잎들을 함께 집어 넣었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가방이 그럴듯한 외관을 갖게 만들기 위해서였습니다.
물론 테메리 에어필드에 나와 있는 리포터들 가운데 그 어느 누구도 이를 알아볼 순 없었습니다. 또 그들은 미국의 지휘 통제소에 접근하는 일이 엄격히 통제되기도 했습니다. 가이아나 전투가 있었던 추수감사절 오후, 공격 부대원들 가운데 부상을 입은 자들은 공항으로 후송되었는데, 리포터들이 이를 보지 못하도록 엄격히 차단되었습니다. 때때로 리포터들은 시체 담은 가방들이 이쪽에서 저쪽으로 옮겨지는 장면들을 보기도 했지만, 당연히 그 안에는 모두 존스타운의 희생자들만이 들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중 어떤 가방에는 사망한 코만도 대원들이 들어 있고, 또 어떤 가방에는 핵탄두들이 들어 있다는 사실을 그들이 알 도리는 없었습니다. 존스타운 키부츠로부터 시체들을 실어 나르는 일이 계속되는 동안, 가이아나 전투에 따른 여파들은 완벽하게 은폐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 모든 시체들을 어디로 가져갔던 것인가?
가이아나의 수송기들이 델라웨어[Delaware]에 있는 도버 공군 기지[dover Air Force Base]를 향했을 때, 많은 리포터들은 완전히 어리둥절했습니다. 존스타운 희생자들의 대부분은 캘리포니아 출신들이었고, 도버 기지에 있는 것과 유사한 규모의 시체 안치소는 캘리포니아, 오클랜드 공군 기지[Oakland Air Force Base in California]에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도버가 선택되었던 이유는, 러시아 핵 탄두들을 인근의 아버덴 성능 시험장[Aberdeen Proving Ground]과 무기고[Arsenal]로 옮기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작업은 도버에서 필립스 공군 기지[Phillips Air Force Base] 간을 잇는 근거리 비행을 통해 이루어 졌습니다.
가이아나 사건의 최초의 사망자 수 409명은 가이아나에 나와 있던 미국 관리들에 의해 확정적인 숫자로 받아들여 졌습니다. 하지만 이는 몇 가지 의문점을 남겼는데, 우선, 존스타운에 머물고 있던 것으로 알려진 천 여명의 사람들 가운데, 나머지는 그럼 어디로 간 것인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결국, 한창 시체 수거 작업이 진행 중이던, 추수감사절, 한 군사 대변인은 기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우리가 알아 본 바에 따르자면, 자살 사건이 일어날 당시, 존스타운에 그렇게 많은 수의 사람들이 있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가 이런 언급을 하는 도중에도, 러시아 미사일 기지에서 펼쳐지던 가이아나 전투는 진행 중에 있었습니다. 추수감사절 다음 날인 금요일 오후가 될 때까지, 이미 485구의 시체든 가방들이 테메리 에어필드에 도착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곧 도착하게 될 러시아 핵탄두 ‘시체들’은, 처음 키부츠에서 가이아나인들이 세었던 사망자수, 409명을 훨씬 초과하여, 그 수치를 더 올리게 될 예정이었습니다. 이는 엄청난 실수였고, 이러한 실수는 전투가 한창 벌어지고 있는 도중에 생겨난 일이었습니다. 무언가 신속한 조치가 취해져야만 할 상황이었습니다.
결국, 추수감사절 다음날이었던 금요일, 테메리 에어필드에 나와있던 국방성 대변인은, 숨을 채 가눌 겨를도 없이, 또 대단히 흥분된 상태에서, CBS 텔레비전 방송을 통해, 다음과 같은, 참으로 놀라운 소식을 전했습니다. : “존스타운에서 발견된 원래 사망자들의 숫자에는 심각한 오류가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지금 그 대략적인 시신 수는 전체 780구가 넘는 것으로 보입니다. 많은 시체들이 단지 다른 사람들의 시체 더미 아래에서 발견되었습니다. 덩치가 큰 성인들의 시체더미 아래에, 상대적으로 왜소한 성인들 그리고 아이들의 시체들이 발견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를 도무지 믿으려 들지 않는 기자들에게 하루종일 시달린 채, 정부측 대변인은 이 놀라운 새로운 발견에 관한 이야기의 살을 나중에 덧붙였습니다. 워싱턴 스타지[The Washington Star]는 그 동일한 대변인이 금요일 저녁에 언급한 말을 다음과 같이 인용했습니다. : “시체 더미 한 가운데 부근, 그리고 집회장 인근 몇몇 군데에는, 시체들이 세 겹으로 쌓여 있는 곳도 있었습니다. 그 층들 사이에는 담요가 깔려져 있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질서정연하게, 가지런히 열을 맞춰 서서, 이미 다른 사람들이 죽어 있는 자리 위에, 포개져서 집단 자살을 했다는 게 참으로 놀랍지 않습니까??
이 이야기는 너무나도 믿기지 않는 설명이라서, 결국 이틀 뒤, 미국 정부는 원래의 이야기를 철회하고, 담요 운운했던 것은 “루머”였노라고 밝혔습니다. 그렇더라도 여전히, 시체들 위에 시체들이 놓여 있었다는 주장은 계속 관철되었고, 결국 11월 25일 토요일, 또 다른 미공군측 대변인은 모든 설명들을 그럴 듯하게 만들려는 시도로 다음 설명을 건넸습니다. : “제가 관찰한 바에 따르자면, 사람들이 자살을 할 때, 몇 군데로 나눠진 작은 원들을 그린 모습으로 빙 둘러섰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들 앞쪽에는 아이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죽으면서 원의 안쪽 방향으로 쓰러졌고, 자연스럽게 시체들은 원의 중심을 향해 겹겹이 포개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당신들 정말로 이 터무니 없는 설명을 믿는다면, 스스로가 참으로 놀라운 장님들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그런데, 당신들은 진짜 마치 물고기들마냥, 이 기가 막힐 노릇의 미끼들을 물었습니다!
가이아나 사건의 은폐 스토리는 이런 허술한 설명력을 안은 채, 전 세계에 알려졌습니다.—그럴 수 밖엔 없었습니다. 11월 24일 금요일 오후, 가이아나 부수상[Deputy Prime Minister]이었던 레이드[Reid]는 국회에서, 가이아나 국민들에게 알릴 목적으로, 첫번째 공식 발표를 했습니다. 그런 다음, 그는 모든 질문들에 대한 답변을 거부한 채, 또 “이건 수치요, 수치”, “이건 조작이요”라고 외쳐대는 국회의원들의 고함소리를 뒤로한 채, 총총히 국회의사당을 도망치듯 빠져 나왔습니다. 한편, 미국에서는, 추수감사절, FBI 국장이던, 윌리엄 웹스터[William Webster]가 다음 사항을 알렸습니다. : “FBI 재난 처리반[FBI Disaster Squad]은 제임스 워렌 존스[James Warren Jones](짐 존스)의 시체를, 지문 기록 대조 작업 끝에 확정적으로 식별해 내었습니다.” 그렇지만, 이 말은 사실이 아니었고, 그 순간, 짐 존스는 이미 사전에 잘 계획된 대로, 가이아나를 빠져 나오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그럼, 어떻게 짐 존스는 빠져나갈 수 있었던가?
존스의 탈출 계획은 사전에 잘 짜여져 있었습니다. 대양 항해용 보트 한 대가, 조지타운에서 남서 방향으로 35마일 떨어진 강변 마을인, 바르티카[Bartica]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존스타운에서 바르티카까지 무사히 가기 위하여, 존스는 안전보장 증명서[Safe Conduct Pass]를 소지하고 있기도 했습니다.
추수감사절날 이른 아침, 가이아나 전투가 시작되고 있을 무렵, 존스는 조지타운을 향해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가이아나 시간으로 정오가 조금 지났을 무렵, 그의 보트는 에세키보 강[Essequibo River] 어귀를 떠나 대서양으로 접어들었습니다.
그곳에서부터 존스는 복잡한 여정을 따라 갔는데, 이는 혹시 모를 추적을 피하기 위해 짜여진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여정에도 불구하고, 그는 추적되고 있었습니다. 가이아나를 떠난 존스는 정동 방향으로 330마일을 간 후, 남쪽으로 꺾어서, 11월 27일 현지 시각 오전 5시 30분경에, 프랑스령 기아나, 라메르[La Mere, French Guiana] 인근에 도착했습니다. 그 곳에서 그는 육로로 수도 카옌[Cayenne]까지 갔고, 다시 비행기를 이용해 대서양을 건너, 아프리카 서부 시에라리온의 프리타운[Freetown, Sierra Leone]으로 갔습니다. 프리타운에서 그는 다시 해안을 따라 북쪽으로 비행하여, 기니-비소 공항[Guinea-Bissau Airport]에 도착하였는데, 도착시간은 현지 시각으로 11월 28일 오후 7시경이었습니다.
그 곳에서, 두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그는 다시 DC-3기로 갈아탄 후, 이륙했습니다. 동쪽으로 날아가 세네갈, 탐바쿤다[Tambacounda, Senegal]로 갔고, 다시 그곳에서 말리[Mali]쪽으로 갔는데, 도중에 세구[Segou], 몹티[Mopti], 그리고 가오[Gao]를 경유했습니다. 그런 다음, 니제르, 아가데즈[Agadez, Niger]로 향했고, 이어, 차드, 라르고[Largeau, Chad]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다시 그의 비행기는 수단, 앗바라[Atbara, Sudan]로 날아갔고,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비행하여, 포트수단[Port Sudan]에 도착하였는데, 이 때가 현지 시각으로 11월 30일 오전 4시가 막 지났을 무렵이었습니다. 포트수단에 도착했을 때, 존스는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공무 수행용 터보프롭 장착 교통편[Turboprop Executive Transport]을 발견했습니다. 이 비행기는 이스라엘 정보기관에서 보유, 운영하고 있던 것이었습니다. 20분 뒤, 이 비행기는 존스를 태운 채, 이륙하여, 홍해[the Red Sea]의 한 복판으로 날아갔고, 다시 아카바만[the Gulf of Aqaba]을 향해 갔습니다. 현지 시각, 11월 30일, 오전 6시 30분, 존스를 태운 비행기는 이스라엘의 뒷마당이라고 할 수 있는 엘라트[Elath]에 잠시 머물렀고, 이어서, 현지 시각 오전 7시 20분, 예루살렘[Jerusalem] 외곽의 한 사립 비행장에 도착했습니다. 거기서, 그는 인근의 다른 장소로 이동했고, 이 곳에서 그는 비밀 결과보고[intelligence debriefing]를 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한 복음전도사에게 일어나게 되었는가?
이전 6년간에 걸쳐, 의식적으로 서서히 비밀 정보 공통체의 요원으로 변모해 갔던 존스는, 가이아나에서 펼쳐졌던 미국과 이스라엘 정보기관들 간의 공동 작전에 참여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쪽에서는, 존스타운 키부츠를 세우고, 또 이것이 의도된 목적대로 사용될 수 있도록, 이 일의 수행과 관련된 중요한 전문지식들을 존스에게 건네 주었고, 또 핵심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부관들까지 붙여 줬습니다.
존스타운이 어떤 곳이었는지를 알길 원한다면, 사실상, 그저 백과사전에서 ‘키부츠[kibbutz]’를 찾아보기만 하면 됩니다. 예를 들어, 월드 북 백과사전[the World Book Encyclopedia]에서, “이스라엘[ISRAEL]”이라는 제목 아래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와 있습니다. : “키부츠라 불리는 집단 공동체에서, 농부들은 모든 자산을 공유하고, 자신들의 노동력도 이에 더하게 된다. 마을 행정관리소는 그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을 제공해 준다. 성인들은 큰 식당에서 함께 식사를 한다. 하지만, 결혼한 부부들과 독신자들은 저마다 사적인 숙소를 갖는다. 모든 아이들은 별도로 마련된 집에서 함께 길러진다. 부모들은 저녁 식사 전, 한시간 혹은 두시간 동안 아이들을 방문한다.”
미국에서 사용되는 의미에 따라 “코뮌[commune]”이라는 단어를 한 번 검토해 봅시다. 이는 한 자치 공동체(코뮌)[commune]에서 함께 생활함을 뜻합니다. 이스라엘 키부츠 가운데, 아주 순수한 형태의 ‘자치 공동체’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만약 한 ‘자치 공동체’가, 짐 존스와 같이, 악마주의적이고, 정신분열적 특성을 가진 사람에 의해서 운영될 경우, 존스타운에서 일어난 것처럼, 살인이나 자살과 같은 행위들이 강제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예가 한 나라 전체를 포함할 정도로 확장된다고 할 때, 우리는 ‘볼셰비키에 의해 장악된 국가’와 같은 예를 떠올려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당시에 이미 미국에는 이러한 일이 일어나고 있었고, 현재 당신들은 ‘국가적 자살[national suicide]’이라는 파멸적 상황을 향해 직접 끌려 가고 있는 중이기도 합니다.
그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데 드는 끔찍한 비용을 한 번 살펴보도록 합니다.
사건이 전개되어 감에 따라, 미국과 러시아 간의 실질적인 전쟁은 바로 그 추수감사절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미국은 하비스트 문 전투의 패배로 인해, 이미 전쟁에 져 있는 것이나 다름 없는 상태였습니다. 물론 모든 일들이 계산했던 대로, 순차적으로 진행되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당신들은 무슨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지에 대해서도, 또 그 일들이 어떤 순서로 일어나고 있는 지에 대해서도 아무런 생각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주제에 대해서 나중에 다시 다룰 것입니다. 어쨌거나, 이 때를 기점으로, 미국과 러시아 간의 ‘전쟁의 규칙들’은 영원히 바뀌어 버렸습니다.
이 후, 러시아는 SALT II를 통한, ‘무장해제 협박’으로 미국에 “항복”을 강요했습니다. 그렇지만, 미국의 ‘보이지 않는 통치자들’은 항복을 선택하는 대신, 미국의 선제 공격으로 시작되는, ‘자살적인 핵 전쟁’을 준비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던 것입니다.
가이아나 사건은 전체적인 전쟁에 대한 ‘미리보기’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이를 기획했던 자들의 관점에서 보자면, 가이아나 전투는 눈부신 성공이었습니다.—하지만, 얼마나 많은 비용을 치렀습니까! 여러 차례에 걸쳐 많은 미국인들이 고의적으로 희생되어 왔고, 그 희생자들의 수는 실제 전투에서 적들의 손에 의해 희생되는 수보다 많았습니다. 꼭 마찬가지 방식의 계획들은 여전히 진행 중에 있고, 이에 따라 일이 진행될 경우, 수백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의 죽음으로, 지금까지의 희생자들의 수는 간단히 제압되어 버릴 것입니다.
실상 가이아나 전투는 무익했던 일로, 그저 러시아의 팔을 살짝 할퀸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이 일은 하비스트 문 전투 이전에 계획된 것이었지만, 하비스트 문 전투가 먼저 일어나는 바람에, 가이아나 전투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전에, 이미 쓸모없는 짓이 되어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자, 짐 존스는 존스타운에 있는 자신의 왕좌 위에 다음과 같은 문구를 걸어두고 있었습니다. :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자들은 이를 되풀이할 운명에 처해 진다.”
이제 당신들 가운데 누구라도, 가이아나의 비극이 실질적으로 종교와 어떤 측면에서, 또 어떤 식으로 연관되어 있었던 것인지에 대해서, 계속해서 더 논문을 쓰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까? 오, 실로 불쌍한 사람들이여! 하지만, 아직도 늘 속기만 하는 당신들은, 거짓의 향연들을 여전히 즐기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고 싶거든, 계속 그렇게 하세요.
……
Gyeorgos Ceres Hatonn, 게오르고스 세레스 하톤
피닉스 저널 제 14권, “R. R. P. P. : Rape, Ravage, Pillage And Plunder of The Phoenix Vol. I.” 제 14-15장, pp.131-147에서 발췌.
http://www.fourwinds10.com/journa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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