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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존재의 정상을 보고자 한다면 그대는 또한 심연을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만일 모든 발판이 사라질 때,
그대는 그대 자신의 머리를 밟고도 올라 갈 줄 알아야 한다,
그대가 달리 어떻게 올라갈 수 있겠는가?
그대는 그대 자신을 초월해야 한다.
그대는 그대 자신을 뒤에 남겨 두고, 그대 자신을 앞질러 나가야 한다.
그대의 꿈과 생각, 상상, 편견, 철학 등 그대의 퍼스낼리티를 형성하는 모든 것을 뒤에 남겨 두고 나아가야 한다,
뱀이 낡은 껍질을 벗듯이 그것들을 버려야 한다,
뱀은 껍질을 벗고 뒤를 돌아보지도 않는다.
자기 자신을 초월하지 못하는 한, 그대는 불가능한 것을 경험할 수 없다,
그대는 방랑과 탐구의 길에서 궁극적인 것을 경험할 수 없다.
그대는 하나의 화살과 같다, 그리고 그대에겐 맞춰야 할 표적이 없다,
그대는 전속력으로 날아가지만 아무데도 갈 곳이 없다,
이것을 이해하는 것은 그대의 존재에 대한 이해 중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될 것이다.
그대 자신의 머리 위로, 그리고 그대 자신의 심장을 넘어서 오르라!
그대의 논리를 초월하라, 그리고 그대의 사랑을 넘어서라.
이젠 그대의 가장 부드러운 부분이 가장 가혹한 것이 되어야 한다.
많은 것을 보기 위해서는 자신을 무시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산을 오르는 사람에겐 누구에게나 그런 가혹함이 필요하다.
그러나 깨달음을 구하는 자로써 자신의 눈에 너무 열중하는 자라면
어떻게 눈 앞에 보이는 것 이상을 볼 수 있겠는가?
그러나 오, 짜라투스트라여! 그대는 모든 사물의 근거와 배경을 보고자 했다,
그러므로 그대는 그대 자신을 초월해서 넘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위로, 위쪽으로 마침내 그대의 별까지도 그대의 발아래 둘 때까지!
그렇다! 나 자신과 나의 별까지도 내려다보는 것,
그것이야말로 나의 정상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이것이 최후의 정상으로 내게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가장 용감한 동물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용기를 갖고 모든 동물을 초극했다,
인간은 승리의 환호를 울리며 모든 고통을 극복했다,
그러나 인간의 고통은 가장 깊은 고통이다.
용기는 심연의 현기증도 파괴한다,
그리고 인간이 서 있는 곳 중에서 심연이 아닌 곳이 어디에 있으랴!
어디에 있든지 간에 - 아무리 그대 자신을 속인다 해도 - 그대는 심연 위에 서 있는 것이다,
그대에게 위안을 주는 모든 것은 가짜이다, 그대의 보호막은 상상일 산물일 뿐이다,
삶의 매 순간마다 그대는 심연 위에 서 있다,
그렇지 않은가? 바로 다음 순간에 그대에게 죽음이 닥칠 수도 있다,
그리고 죽음은 가장 깊은 심연이다.
본다는 것 그 자체가 심연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겠는가?
구도자의 투명한 눈을 갖게 될 수록 그대는 자신의 주변에서 더 많은 심연을 보게 될 것이다,
소경은 그곳이 심연인지로 모르므로 심연의 가장자리에 행복하게 서 있을 수 있다,
단 한 걸음만 잘못 디뎌도 그는 영원한 나락으로 굴러 떨어질 것이다,
그러나 그는 눈이 멀었으므로 아무 두려움 없이 서 있을 수 있다.
모든 ‘봄(seeing)'은 심연을 보는 것이다, 그대 존재의 정상을 보고자 한다면 그대는 또한 심연을 보아야 할 것이다.
그대가 아무 목적도 갖고 있지 않다면, 아무 곳에도 도달하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탐험 자체가 즐거움이며, 외부와 내면에서 새로운 공간을 발견하는 것이 기쁨이요 축복이라면,
그때에 정상과 심연은 아무 차이도 없을 것이다, 정상과 심연을 하나가 된다.
인간은 많은 용기를 갖고 있다, 그가 해야 할 일은 깊이 잠들어 있는 용기를 일깨우는 것이다.
일단 그대의 용기가 잠을 깬 사자처럼 포효하면,
그대는 생애 최초로 삶의 전율과 기쁨, 삶의 춤을 느끼게 될 것이다.
용기는 가장 훌륭한 파괴자이다, 용기는 동정까지도 죽인다,
그러나 동정은 가장 깊은 심연이다, 인간이 삶을 깊이 들여다본다면,
인간은 고통 또한 그만큼 깊이 들여다보는 것이다.
그러나 용기는, 공격하는 용기는 가장 훌륭한 파괴자이다, 그것은 죽음까지도 파괴한다,
왜냐하면 용기는 ‘이것이 삶이었던가? 좋다, 그렇다면 다시 한번!’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작은 일화가 생각한다. 소련에서, 한밤중에 KGB가 어떤 집 문을 두드리며 외쳤다.
“여기 긴즈버그라는 자가 살고 있는가?” 어떤 남자가 문을 열고 나왔다.
KGB가 말했다. “나는 KGB요원이다, 여기 긴즈버그라는 자가 살고 있지?”
남자가 말했다. “긴즈버그? 그는 죽었소.” “죽었다고? 당신은 누구이지?
당신 이름이 뭔가?” “내 이름은 긴즈버그요.”
KGB가 화난 목소리로 외쳤다. “이 작자가 미쳤나? 방금 긴즈버그는 죽었다고 말했잖아?”
남자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당신은 이걸 삶이라고 부를 수 있겠소? 밤중에 편안히 잘 수도 없는 인생을 살아 있다고 할 수 있겠냔 말이오!“
만일 임종의 순간에 죽음이 그대에게 “이 삶과 똑같은 삶을 한번 더 살고 싶은가?“ 하고 묻는다면 그대는 뭐라고 대답할 것인가?
나는 지성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비극적인 삶을 다시 살려고 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똑같은 부인, 똑같은 남편, 똑같은 드라마, 똑같은 대화...
그러나 비극으로써의 삶이 아니라, 새로운 경험을 위한 탐험으로써 삶을 산 사람은 다르다,
항상 더 나은 것을 찾아 움직이고, 자신을 창조하고, 내면의 쓰레기를 청소하면서
최고의 것만을 추구해 온 사람은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한 번 더 살라고? 좋아, 해로울 것은 없다!”
그러나 미지근한 삶이 아니라 전체적이고 강렬한 삶을 산 사람,
생명의 불꽃을 남김없이 태워 버린 사람만이 망설임 없이 다시 한번 살 수 있다.
그는 지금까지 있어 왔던 모든 일을 변화시킬 수 있음을 안다,
그는 새로운 공간, 새로운 별을 발견할 수 있다, 그는 새로운 산에 오를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용기를 안다,
그리고 위험스럽게 사는 것만이 유일한 삶의 방식임을 안다.
그 말 속에는 많은 승리의 환호가 있다,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진 자는 들어라!
반복되지 않는 삶을 살라,
그때에는 그대에게 다시 삶이 주어진다 해도 똑같은 삶이 반복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대의 삶은 이미 반복되고 있다, 그대에겐 다른 삶이 필요 없다,
지금 이 삶조차 반복되고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만일 모든 발판이 사라질 때,
그대는 그대 자신의 머리를 밟고도 올라 갈 줄 알아야 한다,
그대가 달리 어떻게 올라갈 수 있겠는가?
그대는 그대 자신을 초월해야 한다.
그대는 그대 자신을 뒤에 남겨 두고, 그대 자신을 앞질러 나가야 한다.
그대의 꿈과 생각, 상상, 편견, 철학 등 그대의 퍼스낼리티를 형성하는 모든 것을 뒤에 남겨 두고 나아가야 한다,
뱀이 낡은 껍질을 벗듯이 그것들을 버려야 한다,
뱀은 껍질을 벗고 뒤를 돌아보지도 않는다.
자기 자신을 초월하지 못하는 한, 그대는 불가능한 것을 경험할 수 없다,
그대는 방랑과 탐구의 길에서 궁극적인 것을 경험할 수 없다.
그대는 하나의 화살과 같다, 그리고 그대에겐 맞춰야 할 표적이 없다,
그대는 전속력으로 날아가지만 아무데도 갈 곳이 없다,
이것을 이해하는 것은 그대의 존재에 대한 이해 중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될 것이다.
그대 자신의 머리 위로, 그리고 그대 자신의 심장을 넘어서 오르라!
그대의 논리를 초월하라, 그리고 그대의 사랑을 넘어서라.
이젠 그대의 가장 부드러운 부분이 가장 가혹한 것이 되어야 한다.
많은 것을 보기 위해서는 자신을 무시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산을 오르는 사람에겐 누구에게나 그런 가혹함이 필요하다.
그러나 깨달음을 구하는 자로써 자신의 눈에 너무 열중하는 자라면
어떻게 눈 앞에 보이는 것 이상을 볼 수 있겠는가?
그러나 오, 짜라투스트라여! 그대는 모든 사물의 근거와 배경을 보고자 했다,
그러므로 그대는 그대 자신을 초월해서 넘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위로, 위쪽으로 마침내 그대의 별까지도 그대의 발아래 둘 때까지!
그렇다! 나 자신과 나의 별까지도 내려다보는 것,
그것이야말로 나의 정상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이것이 최후의 정상으로 내게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가장 용감한 동물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용기를 갖고 모든 동물을 초극했다,
인간은 승리의 환호를 울리며 모든 고통을 극복했다,
그러나 인간의 고통은 가장 깊은 고통이다.
용기는 심연의 현기증도 파괴한다,
그리고 인간이 서 있는 곳 중에서 심연이 아닌 곳이 어디에 있으랴!
어디에 있든지 간에 - 아무리 그대 자신을 속인다 해도 - 그대는 심연 위에 서 있는 것이다,
그대에게 위안을 주는 모든 것은 가짜이다, 그대의 보호막은 상상일 산물일 뿐이다,
삶의 매 순간마다 그대는 심연 위에 서 있다,
그렇지 않은가? 바로 다음 순간에 그대에게 죽음이 닥칠 수도 있다,
그리고 죽음은 가장 깊은 심연이다.
본다는 것 그 자체가 심연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겠는가?
구도자의 투명한 눈을 갖게 될 수록 그대는 자신의 주변에서 더 많은 심연을 보게 될 것이다,
소경은 그곳이 심연인지로 모르므로 심연의 가장자리에 행복하게 서 있을 수 있다,
단 한 걸음만 잘못 디뎌도 그는 영원한 나락으로 굴러 떨어질 것이다,
그러나 그는 눈이 멀었으므로 아무 두려움 없이 서 있을 수 있다.
모든 ‘봄(seeing)'은 심연을 보는 것이다, 그대 존재의 정상을 보고자 한다면 그대는 또한 심연을 보아야 할 것이다.
그대가 아무 목적도 갖고 있지 않다면, 아무 곳에도 도달하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탐험 자체가 즐거움이며, 외부와 내면에서 새로운 공간을 발견하는 것이 기쁨이요 축복이라면,
그때에 정상과 심연은 아무 차이도 없을 것이다, 정상과 심연을 하나가 된다.
인간은 많은 용기를 갖고 있다, 그가 해야 할 일은 깊이 잠들어 있는 용기를 일깨우는 것이다.
일단 그대의 용기가 잠을 깬 사자처럼 포효하면,
그대는 생애 최초로 삶의 전율과 기쁨, 삶의 춤을 느끼게 될 것이다.
용기는 가장 훌륭한 파괴자이다, 용기는 동정까지도 죽인다,
그러나 동정은 가장 깊은 심연이다, 인간이 삶을 깊이 들여다본다면,
인간은 고통 또한 그만큼 깊이 들여다보는 것이다.
그러나 용기는, 공격하는 용기는 가장 훌륭한 파괴자이다, 그것은 죽음까지도 파괴한다,
왜냐하면 용기는 ‘이것이 삶이었던가? 좋다, 그렇다면 다시 한번!’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작은 일화가 생각한다. 소련에서, 한밤중에 KGB가 어떤 집 문을 두드리며 외쳤다.
“여기 긴즈버그라는 자가 살고 있는가?” 어떤 남자가 문을 열고 나왔다.
KGB가 말했다. “나는 KGB요원이다, 여기 긴즈버그라는 자가 살고 있지?”
남자가 말했다. “긴즈버그? 그는 죽었소.” “죽었다고? 당신은 누구이지?
당신 이름이 뭔가?” “내 이름은 긴즈버그요.”
KGB가 화난 목소리로 외쳤다. “이 작자가 미쳤나? 방금 긴즈버그는 죽었다고 말했잖아?”
남자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당신은 이걸 삶이라고 부를 수 있겠소? 밤중에 편안히 잘 수도 없는 인생을 살아 있다고 할 수 있겠냔 말이오!“
만일 임종의 순간에 죽음이 그대에게 “이 삶과 똑같은 삶을 한번 더 살고 싶은가?“ 하고 묻는다면 그대는 뭐라고 대답할 것인가?
나는 지성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비극적인 삶을 다시 살려고 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똑같은 부인, 똑같은 남편, 똑같은 드라마, 똑같은 대화...
그러나 비극으로써의 삶이 아니라, 새로운 경험을 위한 탐험으로써 삶을 산 사람은 다르다,
항상 더 나은 것을 찾아 움직이고, 자신을 창조하고, 내면의 쓰레기를 청소하면서
최고의 것만을 추구해 온 사람은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한 번 더 살라고? 좋아, 해로울 것은 없다!”
그러나 미지근한 삶이 아니라 전체적이고 강렬한 삶을 산 사람,
생명의 불꽃을 남김없이 태워 버린 사람만이 망설임 없이 다시 한번 살 수 있다.
그는 지금까지 있어 왔던 모든 일을 변화시킬 수 있음을 안다,
그는 새로운 공간, 새로운 별을 발견할 수 있다, 그는 새로운 산에 오를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용기를 안다,
그리고 위험스럽게 사는 것만이 유일한 삶의 방식임을 안다.
그 말 속에는 많은 승리의 환호가 있다,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진 자는 들어라!
반복되지 않는 삶을 살라,
그때에는 그대에게 다시 삶이 주어진다 해도 똑같은 삶이 반복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대의 삶은 이미 반복되고 있다, 그대에겐 다른 삶이 필요 없다,
지금 이 삶조차 반복되고 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