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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TER http://cafe.daum.net/daeingongpo/8CIC/1313
안녕하세요?1년 전에 대인공포를 확 없애고 싶어서
여기 저기 알아보다가 우연히
이 카페와 배준표 님의 책을 알게 되었습니다.
정신병원이나 비싼 상담이나 워크샵을 가서라도
떨쳐버리고 싶었던 와중에 이 곳을 발견하게 된 것은 정말 큰 행운입니다.
대인공포는 저에게 삶의 진리를 알려준 고마운 존재입니다.
부디 여러분에게도 대인공포가 그런 존재가 되길 바라는 마음에
이 글을 씁니다. 이제 높임말은 생략하겠습니다.
나는 두려움을 사랑한다. 그래서 나는 대인공포를 사랑한다.
여러분도 대인공포가 있다면 두려움이 뭔지 알아야하지 않겠는가?
나에겐 빌어먹을 대인공포가 있다고 낙담하기 전에
두려움이 뭔지부터 고민해보자.
그런 다음에 그게 빌어먹을 존재인지 아닌지를 판단해야하지 않겠는가?
1. 어린아이는 두려움이 없다
한가지 관찰할 수 있는 것은 어린아이들은 두려움이 없다는 것이다.
물론 어떤 아이는 낯을 잘 가리고,
어떤 아이는 남들과 잘 어울리는 차이는 있다.
하지만 사람이나 상황을 미리 두려워하지는 않는다.
아니 어떤 경우에는 너무 무식하고 용감해서 감당이 안될 경우가 많다.
나 또한 어렸을 때는 그저 내성적이고 낯을 잘 가리는 소년이었다.
그치만 언제부턴가 서서히 공포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그러면 언제부터 우리는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하는 것일까?
2. 익숙함과 새로움
어린아이에게는 모든 것이 새롭다.
어린 아이는 새로움으로 가득 찬 이 세상을 즐긴다.
그들은 잠시도 쉬지 않고 기력이 다 할때까지
이 세상을 탐험하다 잠에 골아 떨어진다.
그들에게 머무름은 고통이다.
우리 어른들은 어떤가?
우리들은 익숙함을 찾아 머물려고 한다.
세상엔 별로 새로울 게 없다.
자신의 기호에 맞는 방식에 따라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것일뿐..
우리에게 새로움은 삶을 복잡하게 만드는 방해꾼일 뿐이다.
3. 두려움과 신남의 사이
어린 아이는 새로운 것을 보고 신이 난다.
그러나 어른들은 새로운 것을 보고 어려움 내지는 두려움을 느낀다.
무엇이 다른 것일까?
똑같은 것을 보았는데 왜 누구는 신이 나고 누구는 두려워하는가?
이 두 감정이 완전히 다른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새로운 상황을 받아들이는 미묘한 자세의 차이가
결국엔 180도 다른 결과를 만들어낸다.
두려움과 신남은 백지장 한장 차이일 뿐이다.
4. 울타리는 땅 위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어른들은 무한한 세상 위에 언제부턴가 울타리를 짓기 시작한다.
울타리 안은 편하고 옳은 세상이다.
울타리 밖은? 불편하고 옳지 않은 세상이다.
울타리 안은 진리요 생명이라고 굳게 믿으며
울타리 밖의 세상을 부정하고, 울타리 밖으로 나가길 거부하기 시작한다.
새로움을 거부하기 시작한다. “이 건 또 무슨 이상한 경우야?”,
“난 저런 거엔 소질이 없어!”,
“나에게는 이게 최고야!”, “세상은 잘못된 게 너무 많아!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어!
그저 이 작은 울타리에서 편하게 잠자는 것이 최고야
”
5.우리는 언제부터, 왜 울타리를 짓기 시작했는가?
신나기만 했던 이 세상이 언제부터, 왜 두려워지기 시작했을까?
왜 울타리가 필요해졌을까?
우리에겐 원래 울타리가 필요 없었다.
“실패의 경험”은 중요한 사건이다.
그 경험을 시작으로 우리는 울타리를 짓기 시작한다.
고통스러운 감정을 다시 느끼고 싶지 않다.
그 고통스러운 감정을 피하기 위해서는 무엇이라도 한다. 그러나...
6. 울타리는 점점 좁아진다
.
피하려 하면 할 수록 실패의 상처는 커진다.
처음엔 남들 앞에서 발표하다가 말을 많이 더듬었을 뿐이다.
이제 친구들의 시선이 두렵다.
친구들이 쳐다볼 때마다 병신이라고 놀리는 것 같다.
이제 수업중에 선생님이 혹시나 발표를 시킬까봐 겁난다.
이제 교실을 보면 겁이 난다.
급기야 이제 사람들이 약간만 모여있어도
다들 나를 집중할까봐 겁이 난다. 당신의 울타리는 좁아질 뿐이다.
7. 울타리를 다시 없애고 싶은가?
당신이 만들어 놓은 울타리가 두꺼우면 두꺼울 수록
그 것을 벗겨내는 작업 또한 힘이 든다.
엄청난 고통이 느껴질 것이다.
그 순간에도 고통을 피하고 싶은 것이 인간의 본능이다.
그래서 갖가지 방법을 찾아 해맨다.
명상, 심리치료, 약, 처세술... 왠지 효과가 정말로 있을 것 같다.
그치만 모두 헛소리일 뿐이다.
고통없이 울타리를 벗겨내는 방법은 절대로 없다.
증상은 당신이 만들어 놓은 울타리가
현실에 투영되어 나타나는 현상이다.
증상에 집착하지 말고 울타리를 걷어 내는 것에 집중하자.
수년동안 피해왔던 감정을 느끼는 것이다.
수백번 울 각오를 하자.
8. 울타리는 무의식에 있다.
의식은 생각, 이론이다.
무의식은 감정, 경험이다.
이 둘은 깊은 상호작용을 한다.
무의식에 있는 울타리를 없애려면 의식에서 명령을 내려줘야한다.
그러나 가장 큰 착각은 그렇게 하는 것만으로 끝났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의식이 바뀌는 것은 생각만으로도 바뀌지만,
무의식이 바뀔려면 경험이 필요하다.
자기 암시도 좋지만
경험이 배제된 자기 암시는 신선놀음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무의식은 의식처럼 빨리 바뀌지 않는다.
한결같은 인내심만이 무의식을 바꾸는 열쇠다.
9. 고통스러운 실패의 상처
울타리를 벗겨나가는 것은 실패의 상처와 다시 맞서는 과정이다.
울타리가 두꺼우면 두꺼울 수록 더욱 큰 고통이 느껴질 것이다.
이 고통스러움을 느끼는 순간이 바로 울타리가 한겹씩 사라지는 순간이다.
따라서 그 고통스러움을 피하지 말자.
능동적으로 그 고통스러움을 느껴야한다.
어린아이는 마음에 상처를 받으면 그 상처를 능동적으로 느끼면서 그칠줄
울어버린다.
마치 우는 것을 즐기는 것처럼... 그렇게 시원하게 울고 나면 어떤가?
어느새 그 상처는 사라진다.
하지만 우리 어른들은 그 고통을 느끼기 싫어 상처를 마음에 쌓아둔다.
피하는 것은 울타리를 더욱 튼튼히 만드는 것일 뿐이다.
10. 실패란 무엇인가
누구나 실패를 한다.
누구나 낯선 환경에서는 실패를 하기 마련이다.
그렇지만 실패의 쓴맛을 아는 자만이 성공의 단맛도
보게 될 것이다.
성공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실패할 수 있는 기회를 충분히 마련해주는 것이다.
울타리를 두껍게 만들어놓았다면
더욱 많은 실패의 기회를 제공해줘야한다.
사실 실패란 것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
사건과 그 사건에 대한 해석만이 존재할 뿐이다.
당신이 사건을 어떻게 포장하느냐에 따라서
이로운 경험이 될 수도 있고,
해로운 경험이 될 수도 있다.
11. 두려움을 즐기자
좀 더 많은 울타리를 찾아 벗겨내는 작업을 하자.
두려움은 발전의 원동력이다.
사람들은 긴장하지 말라고들 한다.
인간이 만든 말중에 그처럼 어리석은 말도 없을 것이다.
이 글을 읽은 당신이라면
앞으로 긴장되는 일을 더욱더 찾아내야한다.
그리고 그 울타리를 벗겨내자.
두려움은 어느새 신남으로 바뀌어 있을 것이다.
일상의 따분함은
항상 새롭고 즐거운 세상으로 바뀌어 있을 것이다.
울타리 안에서만 느낄 수 있는 행복은 참된 행복이 아니다.
상황에 지배 받지 말고 상황을 지배하는 사람이 되자.
베릭
- 2010.04.30
- 18:33:29
- (*.100.86.55)
- 내 안의 또 다른 나 - 잃어버린 자아를 찾아 떠나는 심리 치유 에세이
배준표 지음 / 작은씨앗 / 2007년 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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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책이 고전보다 더 나을 수 있다는 게 내 생각이다.
삶을 더 깊이 있게 보게 해주는 책이기 때문이다.
- 좋은 책임은 분명하나 '자아'에 이해가 되어 있지 않는 상태에서는 저자의 생각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다.
['불안'의 일어남은 잘못된 관념이 달라붙어 있다는 증거일 수 있다]
같은 상황에서 보통사람은 불안을 느끼지 않는다면 잘못된 관념이 자신에게 붙어 있는 것이다. 자기탐구장에 탐구할 좋은 케이스를 발견한 것으로 보면 되겠다.
[글을 써보면 자신의 마음이 보인다. 자신의 '사고- 행동체계'도 보인다.]
책을 읽는 중에 두 지점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 하나는 글을 써보면 마음을 볼 수 있다는 구절인데 저자는 하나님은 성경에 자신의 마음을 적었다는 것에서 힌트를 얻었다고 적고 있는 부분이다.
다른 하나는 자기탐구장에서 천 페이지를 적은 후에 ‘습관적으로 일어나는 부정적인 사고-행동 체계’를 읽어낸 부분이다. 천 페이지를 적는 것이 쉬운 것은 아니지만 자기탐기장만 계속 채웠다면 아마 저자는 대공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천 페이지를 재독하면서 흐트려져 있는 사고방식에서 공통된 사고패턴을 읽어냈다는 것은 자신이 어떤 관념에 지배되고 있었지를 보는 눈이 생겼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런 통찰은 결국 자신에게 적절한 긍정적인 사고-행동체계를 세울 수 있게 주었고 그날그날 일어났던 부정적인 감정의 실체를 좀 더 빠르고 정확하게 인식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여튼 이 두 부분에서 좀 놀라웠다.
[자신의 '습관적으로 반복되는 왜곡된 사고-행동패턴' 발견 과정 - 천 페이지의 자기탐구 후 사고 패턴 읽어내기]
책을 보면 상상 속에서 부정적인 생각이 들었던 과거의 각각의 상황과 조우한다. 당시 현장에 있던 과거의 자신에게 있었던 감정과 가치관 그리고 행동을 정확히 인지하면서 하나하나 노트에 적는다.
글로 적으면 당시의 마음을 좀 더 정확히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자기탐구를 천 페이지 정도 했는데 재독하면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사고방식, 행동방식이 있음을 깨달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자신에게 내재된 ‘습관적으로 반복되는 왜곡된 사고-행동턴’을 발견했고 이것은 긍정적인 사고-행동패턴을 정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사고-행동패턴은 개인마다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 과정을 통한 자기인식과정은 반드시 거쳐야 한다.
다시, 부정적인 감정이 일어났던 또다른 상황들과 조우한다. 당시의 어린 자신과 대화를 한다. 당시의 사고방식이 왜 좋지 않는지를 성인이 된 자신이 과거의 어린 자신에게 설명한다. 물론 처음에는 과거의 어린 자신이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할 수밖에 없었음을 수용하고 이해해 주어야 한다. 왜? 이해받지 않는 자아는 새로운 도전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시도는 실패의 연속일 것인데 그것은 질책으로 이어짐을 어린자아는 알기 때문이다. 과거의 나와의 조우로 당장 어린자아가 성장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긍정적인 사고방식이 무엇인지를 인식하게 되었을 뿐이다. 이제 두려워할 필요가 없음을 인식하게 되었을 뿐이다.
이제, 오늘을 살아가면서 그날 부정적인 감정이 일어났던 상황을 저녁에 회상한다. 상상속으로 현재의 자신의 몸을 넣고 현장의 자신과 조우하고 어떤 감정이 일어났고 어떤 가치관으로 행동했는지 살핀다.
부정적인, 과거의 사고체계의 잔재라면 새로 작성했던 긍정적인 사고체계 중의 하나로 자신을 설득한다. 물론 당분간은 이전의 습관대로 생각하고 행할 수밖에 없는 자신을 충분히 이해해야 한다.
자신의 실체에 대해 어느 정도 알게 되었으면 이제는 과거에 두려워했던 상황으로 몸을 던져 체험에 나선다.
대인관계에 어려움이 많았던 사람에게 많은 사람과의 만남은 심한 부담감으로 다가온다. 회피했지만 두려움이 적었던 상황부터 도전한다. 그렇게 몸으로 느끼고 -분명 불안이 일어났을 것이다-
저녁에 자기탐구로 긍정적인 자기암기를 계속 한다.
직접적인 체험과 자기탐구가 상당기간 반 지속되면 어린 자아를 조금씩 성장하게 된다.
2~3년 후에는 수많은 어린 자아가 성숙해 있을 것이다. 이론적인 인식만으로는 자아는 부정적인 사고를 떨쳐낼 수도 긍정적인 사고를 받아들일 수도 없다.
두 가지를 짚고 넘어가야겠다. 한 가지는 두려운 상황으로 몸을 던져 체험하다보면 두려움과 불안이 일어나 과거의 나로 도망하고 싶은 마음이 일어날 것이다. 도망을 가면 나머지 생을 과거의 나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잊으면 안되겠다.
다른 하나는 과거의 나와의 생생한 조우이다. 당시의 상황을 생생하게 그려야 하고 그 속으로 현재의 내 몸을 넣어야 과거의 나와 느낌까지 제대로 전달되는 대화를 할 수 있다.
[미숙한 자아로 고착되는 한 가지 기전 - 특정상황을 두려움으로 각인]
특정상황에서 느껴지는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하면 이 상황에 ‘두려움’의 이미지가 덧붙여 뇌에 한쪽 구석에 저장한다. 같은 상황이 겪게 되면 즉각적으로 ‘불안’이 일어난다. 이런 시스템이 나쁜 것만은 아니다. 효과적인 경우도 많다. 가령, 뱀을 보면 즉시 두려움이 일어나고 도망으로 몸의 안전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합리적인 시스템이 아닌 것은 확실하다.
[두려움으로 각인된 상황 극복 - 정면돌파뿐]
뱀에 대한 두려움은 유익하다. 바꿀 필요가 없다.
하지만 두려움으로 각인된 많은 상황은 자신의 행동반경을 좁혀 자신에게 불이익이 되는 경우도 많다. 두려움으로 각인된 상황이라 새로 도전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두려운 이미지를 띠어내는 것은 정면돌파뿐이다. 몸으로 느끼고 견디고 익숙해지면서 그 상황에 두려워할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몸으로 느끼는 수 밖에 없다. 한번으로 되겠는가. 시행착오를 수없이 겪고서야 두려움이 어느 날 편안함으로 바뀔 것이다.['카리'가 절교를 선택한 이유 - 일어났던 '사랑'이
단지 '남에게 의지'하는 마음임을 인지했기 때문]
사랑하는 능력을 키우지 않은 사람도 사랑받는 느낌을 받으면 마음이 매우 안정된다. 이때 평소 가지고 있던 불안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 이런 편안함은 상대방을 좋아하는 감정을 일으킨다. 하지만 이 느낌은 사랑이 아니다.
사랑하는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 자신을 의지하려는 행위일 뿐이다. 이런 사람과 있다고 사랑하는 능력이 생길까? 단지 마음이 편안해짐에 ‘애정’이라고 위장하는 것뿐이다.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두 발로 일어서야 한다. 자신의 내부에는 사랑을 담당하는 자아가 있다.
성장기에 능동적으로 사랑하는 연습 내지 훈련을 충분히 하지 않았기에
미숙한 상태로 남아 있는 것이다.
자신의 자아로 능동적으로 사랑하는 훈련 -다른 사람에 대한 순수한 관심에서 시작- 을 하면서 실망도 하고 괴로워도 하고 다시 좋아하기도 하면서 서서히 사랑하는 자아가 성숙하게 될 것이다.
(‘좋아함’이 단지 ‘의지’의 또다른 감정임을 인지하지 못해 많은 시간을 낭비했었다. 의지하려는 느낌이 들면 그 사람이 아무리 좋아보여도 당분간 잊고 사는 게 맞다.)
[어린 자아에게 무조건적인 사랑의 눈길이 줘야 하는 이유]
거짓자아로 성장한 사람은 무수한 자아들이 미숙한 상태로 내재되어 있다.간단하게 초딩수준에서 머물러 있다고 생각하는 게 이해에 빠르겠다.
그런 자아들에게 성인인 자신이 조언을 하면서 키워야 한다. 각각의 자아는 어려운 상황에 도전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 왜? 도전을 해 본 적도 있지만 어설픈 모습밖에 보이지 않았고 각각의 자아를 평가하는 자아에게 무시를 당한 경험이 많기 때문이다.
대안도 좋지만 그 전에 비판이 있어야 한다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비판은 어린 자아에게 상처를 줄 뿐이고 어린 자아를 움추려들게 할 뿐이다.
왜? 현재의 자신이 비난의 대상이고 더 나은 상태만 칭찬의 대상이라면 상당기간의 수련기간 동안의 정체기동안 성장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해 죄책감을 느낄 것이고 자신의 평가하는 자의 눈을 보기 두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강한 불안은 도전 자체를 거부한다는 것을 잊으면 안되겠다. 따라서 현재의 미숙한 어린 자아를 그 상태에 머물러 있을 수 밖에 없었음을 먼저 이해하고 사랑해야 한다. 다만 그 자아가 좀 더 성숙하는 게 더 낫지 않냐고 어린 자아를 설득해 보는 것이다. 어린 자아도 성숙해지는 데 동의할 것이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 시작은 미숙한 현재의 자아를 충분히 사랑해 주는 것이다.
[선택권은 여러 가지이다.
똑같은 상황도 사람마다 다르게 해석하는 경우가 많다. 해석이 다르니 당연히 행동도 다르다. 그런데 거짓자아로 살아온 사람은 하나의 상황에 하나의 해석만을 고집하는 경우가 많다.
다양한 해석이 있다는 것을 알기는 하지만 자신의 해석을 고집한다.
다른 해석은 불편한 행동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이러니 세월이 지나도 자아가 성장하지 못하는 것이다. 특정상황에서 하나의 해석이 ‘떠오르’면 그것은 과거의 방식일 것이다.
거짓자아로 살아온 사람이라면 또다른, 나은 방식은 없나를 의심하고
더 나은 해석이 있다고 확신이 들면 불편하겠지만 행동해야 한다.
[자아에 대한 믿음의 정도 -
거짓자아를 인식하기 전에는 거짓자아가 왕노릇을 하지만 거짓자아의 실체를 알게 되면 의식을 지배하는 또다른 자아가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 자아는 인간에게 내재된 모든 자아의 가치를 나름대로 평가하고 있는데
각각의 상황에서 최적의 행동을 하기 위해서이다.
성장기에 거짓자아로 살아온 사람은 그래도 거짓자아를 믿음직하게 생각한다.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을 때도 있지만 원하는 결과를 보여주는 때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린 자아들에 대해서는 거의 신뢰하지 않는다. 어린자아 중의 하나로 상황을 대처해 보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따가운 시선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어린자아에 대한 불신의 악순환은 계속되었을 것이고 결국 믿을 것은 거짓자아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거짓자아에 뭔가 석연찮은 구석이 있다는 의심이 들었을 것이다.
[거짓자아와 왜곡된 습관적인 사고-행동체계]
정상적인 자아성장과정을 거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느냐 없느냐이다.
후자는 왜곡된 시선으로 세상을 보는 경우가 많다. 이들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을 신뢰하지 않는다. 이들의 마음에는 불안으로 가득하다. 이들이 믿는 것은 거짓자아뿐이다. 왜곡된 시선으로 보기에 행동도 왜곡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이렇게 형성된 사고-행동 패턴은 고착화되어 유사상황에서는 자동으로 느끼고 자동으로 반응한다.
[거짓자아 - 불안을 잊기 위한 급조된 방어시스템]
이것에 대해서는 참 할 말이 많다. 아이의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지 못하고
부모 자신이 가치있다고 생각하는 하나의 상을 아이에게 강요하면 아이는 정신적으로 자신의 존재에 대한 위협 -많은 심리학자들이 인정하는 사실이다- 을 느낀다.
처음에는 거짓자아대로 행동하는 척 하지만 어느 순간 그것을 이상적인 인간상으로 받아들인다. 이런 과정은 무의식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아이는 의식하지 못한다. 아이가 거짓자아를 받아들인 과정을 다시 살펴보자.
부모가 제시한 제안을 따르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다.
아이는 생존의 위협을 느낀다.
인간의 정신은 합리보다는 삶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도록 진화되었다. 게다가 이성의 힘이 약한 아이이다. 결국 아이는 급조된 방어시스템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 자신을 가둔다.
[미래의 나의 모습을 현재형으로 암시하는 글과 말을 많이 하라]
저자는 외국어를 배우는 초보시절부터 해당외국인과 능숙하게 대화하는 모습을 주기적으로 상상했었다고 한다. 이런 자기암기가 외국어에 좀 더 빨리 익숙하게 했다고 한다. 어린자아들을 성숙시키는 데도 자기긍정은 큰 효과를 있다고 자주 해 볼 것을 강조하고 있다.
[사람의 크기, 인격의 크기 - 1m 내에 갇혀 사는냐, 100km내에서 활보하며 살 것인가]
사람에 따라 살고 있는 공간의 크기가 다르다. 거짓자아로 살아가는 이는 마음 속에 항상 불안, 자기불신이 내재되어 있기에 새로운 경험, 새로운 도전을 두려워한다. 특히 이전에 두려움으로 각인된 상황에 다시 도전하는 일은 거의 없다. 따라서 어떤 이는 채 1m가 안되는 공간에 자신을 가두고 그 안에서 불안에 떨며 살고 있고 어떤 이는 자신이 살고 있는 공간을 10km, 100km로 계속 늘리고 있다. 전자는 죽을 때가지 1m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각인된 두려움 때문이다.
후자는 두려움보다는 새로운 것에 대한 흥미로움에 더 끌린다.
새로운 도전은 두려움, 불안, 힘듦을 불러 일으키지만 견디면서 조금씩 익숙해지다보면 좋아하는 감정이 생긴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다. 그는 할 수 있겠단 느낌이 드는 것에 계속 도전한다.
도전의 유무는 건전한 가치관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할까로 생각해 보면
어렵지 않게 가부를 정할 수 있다.
[마음의 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성숙해지고 싶어하는 자아의 소리를 들어보라는 것]
마음에서 소리가 난다고 한다. 어떤 소리인가?
마음의 한컨에서는 두려운 상황을 되도록 피하고 익숙한 곳에서 있으라고 한다. 한마디로 살아왔던 거짓자아로 살라는 것이다. 마음 한컨이 뻥뚫린 삶이기는 하지만 새로운 도전은 죽을 것 같지 않냐는 것이다. 하지만 또다른 한컨에서는 두려워하지만 도전해야 한다고 말한다.
왜? 건전한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은 두려운 상황에서 편안해 하며 오히려 즐거워하지 않는가.
이 소리는 마음의 저 깊은 속의 어린자아가 자신에게 보내는 주요 메시지이다. 새로운 도전은 상황을 나쁘게 한다는 ‘불안’, ‘두려움’ 때문에 보통의 사람은 그 소리를 들지 못하며 산다.
덧붙임)
자기탐구장으로 '‘습관적으로 반복되는 자신만의 왜곡된 사고-행동패턴들’을 읽어내는 게 첫 번째 할 일이다.
부정적인 패턴들을 알지 못하면 자신에게 적절한 긍정적인 사고-해동패턴을 도출할 수 없기에 두려운 상황에 도전하더라도 정신적인 혼란만 가중될 가능성이 높다.
스트레스를 관리하는 방법
당신의 삶과 스케줄이 통제를 벗어났다고 느끼신 적이 있습니까?
당신이 스트레스를 제거할 수는 없지만 관리할 수는 있습니다.
문제는 얼마나 많은 스트레스를 경험하느냐가 아니라
그 스트레스를 어떻게 감당하느냐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수많은 스트레스와 압박감을 경험하셨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그것들이 그분이 누리셨던 마음의 평화를 방해하지 못했던 것처럼 보입니다.
많은 반대와 끊임없는 요구들, 그리고 극히 제한된 사생활에도 불구하고
그 분의 삶은 균형잡혀 있었고 그 분의 마음은 평온했습니다. 그 비밀은 어디에 있을까요?
예수님께서 살아가신 삶의 스타일을 세심하게 관찰하면
"스트레스"를 관리하는 비결을 발견하게 됩니다.
묵상의 원리 : 기도하는 습관을 기르라(막1:35).
얼마나 바쁘냐에 상관없이 예수님께서는 매일 홀로 기도할 시간을 구별하셨습니다.
매일의 "경건의 시간"은 훌륭한 스트레스 감압실(減壓室)이었습니다.
이 시간을 당신이 겪는 압박감과 문제들에 대해 하나님께 아뢰고,
당신의 우선권을 평가하고, 성경에서 성공적인 삶의 원리들을 발견하는 시간으로 이용하십시오.
쉼의 원리 : 삶을 즐길 시간을 가지라!(막6:30-31)
균형은 스트레스 관리의 열쇠입니다. 일은 놀이와 더불어 균형을 이루어야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