앎이란 무엇인가?
1993년 9월 21일
미국 콜로라도 보울더에서
마샬 비안 서머즈에게
계시되었다
큰공동체에서 앎은 모든 종교적 체험의 본질이자 실체이다. 그래서 행성에 따라 크게 달라지는 신학·종교의식·영적수행에서 이 체험에 대해 표현한 것을 초월한다. 그러나 종교에서 동기를 부여하는 요인, 종교적 체험에서 오는 진정한 부름 등과 같은 영성의 본질은 앎이다.
앎은 당신과 모든 생명체가 본래부터 결합된 관계를 나타낸다. 하지만 앎에는 당신의 특별 사명 또한 담겨 있다. 즉 당신이 발견하여 받아들여야 하는 사명, 그래서 온전히 당신 것으로 만들어 완수해야 하는 구체적으로 정해진 사명이 있다. 달리 말하자면, 앎은 당신 내면에 있는 모든 것이 아니라, 모든 것에 당신의 연결이다. 앎은 지성이 있으며, 목적을 이루기 위해 세상에 있다. 앎은 당신 마음의 한 부분으로 영적이며 영원하다. 이 마음은 당신이 누구인지, 왜 세상에 내려왔는지, 누구를 만나야 하는지, 무엇을 성취해야 하는지 안다.
앎은 지금 당신 내면에 있지만, 당신이 붙잡아둘 수는 없다. 당신은 앎을 취하여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앎과 관계를 회복하여 앎을 따르는 것이다. 이때 세상에서 조건화되는 개인적 마음과 저세상에서 당신과 함께 온 비개인적 마음, 이 두 마음이 세상에서의 큰 목적이나 세상과의 관계, 그 목적을 지지하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기반으로 의미 있게 재결합한다.
여기서 내린 정의는 모두 가치 있는 것이지만, 그 가치를 알려면 깊이 숙고해 보아야 한다. 당신이 새롭고 혁신적인 것을 접했을 때, 만약 “이 정의는 마음에 드는데,” “저 정의는 마음에 들지 않는데,” 혹은, “이 말은 맞아 보이는데,” “저 말은 맞지 않아 보이는데,” 등과 같이 말한다면, 당신은 단지 자신의 과거 판단이나 결론, 체험 등에만 결부시켜 보려고 할 뿐이다. 만약 당신이 이렇게 한다면, 우리가 여기서 말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당신은 그저 자신의 과거 믿음·생각·결론을 더욱 굳힐 뿐 새로운 것을 배우지 못할 것이다. 자신의 생각이나 가정을 넘어서 훨씬 더 큰 것에까지 뻗어 나가보려는 것이야말로 진정 용기 있는 마음이고 성실한 자세이며, 개인의 성장뿐만 아니라 사회 공헌에도 깊이 헌신하는 일이다. 이것이 앎으로 가는 길이다.
앎은 당신과 함께 있으며, 당신 안에 있다. 그러나 당신은 앎을 붙잡아볼 수도 만져볼 수도 없으며, 자신을 위해 이용해볼 수도 없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앎은 당신 내면에 위대한 참자아가 있음을 나타내고, 세상에서 이루어야 할 큰 목적과 세상 속에 큰 관계가 있음을 나타낸다. 여기서 큰 관계는 당신 삶 저변에 흐르는 목적과의 관계, 당신이 이루어야 하는 구체적인 어떤 일을 바르게 이해하고 깨달았을 때 서로 만나서 함께 성장해나가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말한다. 당신은 이때 자신의 목적을 정하지 않은 채로 놔두어야 한다. 왜냐하면 큰 목적은 실제로 당신에게 매우 천천히 다가오는 어떤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쉽게 “바로 이거야. 바로 이것 때문에 내가 여기 왔어. 이것이 내가 할 것이야.”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많은 사람이 이렇게 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야심일 뿐, 무모한 짓이고 조바심이 나서 참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큰 목적과 앎을 실제로 발견하는 일은 이와 사뭇 다르다.
앎을 세상 삶 속에서 현실적으로 정의해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앎은 행동으로 이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개념이나 이상으로만 바라보면, 앎의 가치는 매우 제한적이다. 그러나 당신을 이끌고 안내하며 때로는 개인적 관심사와 무관한 일을 하도록 촉구하는 원동력으로 바라볼 때, 앎이 의미 있게 정의된다. 앎은 이렇게 해서 체험된다.
당신은 앎을 이해할 때, 신이라는 말이나 그 밖에 친숙한 종교에서 익히 들어온 말들과 혼동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앎은 영성의 핵심이다. 당신은 앎을 통해 신과 결합하고, 앎을 통해 자신과 결합하며, 앎을 통해 다른 사람들과 결합한다. 앎이 이 모든 것의 매개체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앎을 각기 다른 여러 가지로 정의하며, 그것들은 모두 다소 별개처럼 보일 것이다. 왜냐하면 앎은 대단히 크며, 매우 다양한 모습을 띠기 때문이다. 앎은 지구뿐만 아니라 큰공동체 전역에서 생명체 지성 안의 가장 중심에 있다. 당신은 앎을 한 면만 보고 쉽게 정의할 수 없다. 앎은 삶에서 표현된 모든 것 뒤에 있는 큰 존재이다. 앎은 이곳에서도 보이고 저곳에서도 보이며, 그 모습이 각각 달라 보인다. 그러니 그때마다 당신은 앎을 새롭게 체험하고, 앎은 당신에게 새로운 것을 가져다준다. 앎은 당신의 큰 부분이며, 물질세계에서 사는 당신에게 우주의 뜻을 세상의 일상 체험으로 전환해준다. 당신이 앎에 더 가까이 다가가 앎에 주의를 기울이고 앎에 마음을 열면, 이 전환이 더 자주, 더 깊이 일어날 것이다.
앎이 당신에게 드러나 당신 내면에서 울려 퍼질 것이니, 당신은 가슴속에서 앎을 환영할 것이다. 앎은 당신이 아직 거의 체험해보지 못한 당신의 한 부분에서 울려 퍼질 것이다. 그리하여 당신의 가장 깊은 핵심까지 그 울림이 전달될 것이다. 비록 당신 마음이 앎에 반대하고 당신에게 두려움·혼란·분노·저항이 일어나더라도, 앎은 참이니 당신에게도 참이 될 것이다. 이것이 소통이고 삶이며 목적이다. 또한 세상적인 모든 것을 뛰어넘는 본질이다. 앎은 생각이나 믿음, 문화적 정체성, 정치조직, 심지어 당신의 개인적 의지까지 모든 것을 뛰어넘는다. 이것이 앎이다.
앎의 실체를 이해하려면 먼저 그 징표부터 보아야 한다. 그 징표는 당신 체험에서 찾아볼 수 있다. 당신은 어떤 일에는 하고 싶은 마음이 들고, 어떤 일에는 전혀 마음이 내키지 않으며, 때로는 어떤 일에 전혀 이치에 맞지 않게 저항감을 느끼기도 한다. 그리고 어떤 일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보거나 알기도 한다. 또한 무심코 어느 곳에 가게 되어 어떤 일을 하게 되기도 하고, 누구를 만나기도 하며, 누구와 헤어지기도 한다. 이런 일들은 당신 삶 깊은 곳의 흐름을 보여주며, 단순히 당신의 생각·감정·기분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이것은 당신 내면 깊은 곳에 있는 어떤 것으로 당신의 바탕에서 당신을 움직이게 한다. 이것이 앎의 징표이다.
자신이 전에 계획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길, 다른 방향으로 삶을 선회하여 어떤 일을 해야겠다는 마음이 들 때, 이것이 앎의 징표이다. 무언가 안 좋은 일이 일어날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위험한 상황을 피하려고 행동했을 때, 이것이 앎의 징표이다. 서로 개성차를 극복하여 다른 사람들과 깊은 관계를 맺을 만큼 그런 강한 영향을 서로 받았을 때, 이것이 앎의 징표이다. 삶과 친근감을 느끼고 다른 사람과 친근감을 느낄 때, 이것이 앎의 징표이다. 큰 일을 해내려고 삶에서 크게 동기부여를 받았을 때, 또 그 순간은 무엇인지 모르지만 꼭 이루어야 하는 목표를 향해 갈 때, 이것이 앎의 징표이다.
당신은 이 말을 듣고 “음, 직관을 말하는군.”하고 말할지도 모른다. 천만에, 우리는 직관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직관은 앎의 외적 표현이다. 마치 폭풍이 몰아치기 전에 눈발이 휘날리는 것과 같다. 앎은 직관보다 훨씬 더 큰 것이다. 직관은 개인적 생존체계의 일부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그들은 앎이 자신의 큰 근원임을 깨닫지 못한다. 앎은 직관이라 불리는 작은 표현보다 훨씬 더 큰 것이다. 당신은 이 둘을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앎은 지성이 있고 살아 있으며, 지금 이 순간에도 생각하고 있다. 앎은 당신의 마음과 몸에 내재된 단순한 반사 작용이 아니다.
당신은 두 가지 다른 수준에서 산다. 생각하는 수준에서도 살고, 아는 수준에서도 산다. 어떤 종교든 참된 종교라면 당신 삶을 아는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것이 그 목적이다. 당신이 아는 수준에서 살 때, 창조주와 결합하고 당신의 큰 목적과 결합하며 앎으로 되돌아간다. 왜냐하면 신이나 큰 목적은 생각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신은 오직 바로 알 수만 있다. 그리고 당신의 목적이나 참된 충동, 삶에서 참된 관계 또한 오직 바로 알 수만 있다. 이러한 것들에 대한 생각은 부차적이며, 오히려 앎을 인식하는데 방해만 되는 경우가 많다. 당신이 창조주나 큰 목적을 믿을 수는 있지만, 믿음에는 그 바탕이 되는 실제 체험이 있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믿음은 자신을 속이는 일이 된다.
앎은 지금 이 순간에도 당신 내면에 살아 있다. 그러나 당신은 생각과 감각 속에서 살고, 지각작용을 통해 세상을 바라본다. 당신은 물질계·정신계 모두에서 설명하기 어려운 세력들에게 지배받고 살지만, 이것은 오직 삶의 표면에서만 일어나는 일이다. 당신 삶을 움직이는 진짜 흐름인 앎의 흐름은 안쪽 깊은 곳에서 흐른다. 그 흐름은 당신을 서서히 새로운 곳으로 데려가 당신이 삶의 다음 단계를 밟는 데 필요한 것들을 배울 수 있고 찾아낼 수 있게 해준다. 앎은 당신에게 현실을 자각하게 하고 이해하게 한다. 또한 당신과 만나기로 정해진 사람, 당신과 함께해야 할 사람 쪽으로 데려간다.
어떤 것이 미리 정해졌다고 해서 그것이 꼭 일어난다는 뜻은 아니다. 이 점을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당신은 기회를 놓쳐 자신의 목적을 찾지 못할 수 있으며, 그 목적에 의미 있는 사람들을 찾아내지 못할 수 있다. 그들도 마찬가지로 실패할 수 있다. 실제 이런 일은 끊임없이 일어난다. 당신은 어쩌면, “곧 다른 기회가 찾아올 거야.”라고 생각하며 자위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당신이 살아온 삶 전체를 되돌아보라. 그러면 몇 번 안 되는 기회가 얼마나 중요한지, 기회는 왜 그처럼 드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당신에게는 개인적 목표·바람·두려움·야심·관계·활동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앎은 당신이 운명을 따르고 큰 목적을 찾아 이루도록 이끈다. 당신이 원하는 모든 것이 앎에서 나왔다고 생각하지 말라. 당신이 갖고 싶고, 하고 싶고, 되고 싶은 모든 것이 앎에서 나왔다고 생각하지 말라. 당신은 자신에게 매우 정직하고 솔직해야 한다. 그래서 어떤 이득을 얻을 수 있는가보다는 어떤 것이 바른가를 생각해야 한다. 앎을 회복하려면 당신은 처음부터 이렇게 해야 한다. 당신의 관념 너머에서 움직이는 큰 욕구와 큰 충동을 당신은 존중해야 한다. 앎길 여행은 이렇게 해서 시작된다.
앎은 당신에게 부나 명성, 사랑, 즐거움을 제공하지 않는다. 앎은 당신에게 훨씬 더 큰 것, 훨씬 더 값진 것을 제공한다. 당신이 제대로만 본다면, 사람들의 관심·생각·행동을 지배하는 그 어떤 것도 앎이 제공하는 것과는 견줄 수 없음을 알 것이다.
앎은 우주 종교다. 앎을 체험하면, 문화가 다르거나 행성이 달라도 누구에게나 통하는 영성을 체험한 것이다. 앎은 우주적으로 통하는 영성, 우주적으로 서로 소통하고 알아보고 교류하는 영성에 해당한다. 앎이라고 하는 이런 큰 매개체를 통하면, 당신은 우주에 있는 누구하고든 소통할 수 있다. 상대방이 당신과 환경·기질·소망·관심사·가치관이 다르거나 몸의 구조, 사회적 조건, 기술 능력 등이 달라도 당신은 그들과 소통할 수 있다.
어쩌다 한 번씩 잠깐 스쳐 지나가며 확실하지도 않아 보이는 것이 실제로는 삶의 정수다. 마찬가지로 매우 웅장하고 강하며 훌륭하고 당당하며 위압적으로 보이는 것이 삶에서 가장 작은 것들이다. 이것을 알게 되면 생각에 대역전이 일어나고 새롭게 이해할 수 있는 돌파구가 열린다.
큰공동체를 말할 때, 우리는 앎을 가장 중요하게 다룬다. 왜냐하면 앎은 당신 마음에서 유일하게 오염되지 않는 것이며, 영향이나 통제를 받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개인적 마음은 대중매체나 정부, 가까운 사람들 등에 오염되고 영향과 통제를 받는다. 그러나 당신 내면에 있는 앎은 오염될 수 없다. 당신은 앎을 잘못 적용하거나 해석할 수 있지만, 오염시킬 수는 없다. 앎은 신성을 지녔으며, 당신 권한 밖에 있다. 세상 또한 앎을 오염시킬 수 없다. 앎은 세상의 영역 너머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앎이 삶에서 당신 자유의 근원이고, 당신 참모습의 근원이다. 또한 당신 사명을 왜곡하거나 손상시키지 않은 상태에서 실행에 옮길 수 있게 해준다. 당신은 자신의 사명을 왜곡하거나 손상시킬 수도 있지만, 앎의 수준에서는 그 사명이 여전히 온전하다.
앎을 멋대로 쓸 수 없다는 말은 앎을 망가뜨리거나 더럽힐 수 없다는 뜻이다. 만약 당신이 앎을 멋대로 쓰려 하면 마음이 상당히 불편할 것이다. 이런 불편함은 사람들이 널리 체험하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앎이 무엇인지, 어디에 머무는지, 어떻게 기능하는지, 무엇을 아는지, 당신이 모르더라도 앎을 거슬러서 어떤 일을 하면, 당신은 그때마다 자신과 이질감을 느끼며 불편할 것이다. 이런 불편함은 앎이 당신을 벌해서가 아니라 당신이 앎에 거슬러 갔기 때문이다. 내면의 앎을 거스르면 가슴 깊이 파고드는 불편함이 생긴다. 이런 불편함이 생기면, 당신은 아무리 많은 치료를 받아도 벗어날 수 없다. 즐거움 속으로 도피하거나 다른 일에 몰두해도 여전히 이 불편함에서 벗어날 수 없다. 당신은 내면의 앎과 화합하면서 살아야 한다. 당신은 이 화합을 체험할 수 있으며, 이 체험을 통해 당신이 잘하고 있는지 잘못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앎과 화합하지 못한 데서 오는 불편함은 매우 깊고 강하다. 마음 표면에서 느끼는 것과는 다르다. 그러나 많은 사람은 이미 이런 불편함에 순응하여 세상 일에 적절히 타협하고 가치관을 바꾸면서 살아간다. 이런 불편함은 그들의 기분이나 사는 방식에서 드러난다. 또한 그들이 왜 필사적으로 도망가려 하고, 보지 않으려 하며, 자신을 속이려 하고, 한곳에 깊이 빠지려 하며, 온갖 부정직에서 헤어나질 못하는지 잘 설명해준다.
그러나 이런 모든 일 아래에는 앎이 있다. 앎을 영이라 부를 수도, 영적 마음이라 부를 수도 있지만, 무어라 불리든 앎은 그 정의를 초월한다. 앎으로 가는 길은 신성으로 가는 길이자 삶의 큰 목적과 의미를 깨닫는 길이다. 큰공동체에서는 그 의미가 더욱 커진다. 앎은 개인적인 관념·습관·믿음을 뛰어넘게 해줄 뿐만 아니라 훨씬 더 완벽하고 우주적이며 어디서나 통할 수 있는 것을 얻을 수 있도록 세상의 관념·관습·믿음을 뛰어넘게 해준다. 큰공동체 관점에서 보면, 당신은 다양한 다른 지적 생명체와 공유할 수 있는 근원적인 것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이 근원적인 것은 이성·개성·문화·관습 등이 있는 표면이 아니라, 앎이 있는 깊은 곳에 있다.
큰공동체 앎길은 큰공동체 종교를 대표한다. 그러므로 세상 어디에서든 종교적 체험과 표현의 큰 맥락을 보여준다. 종교를 옆으로 제쳐 두면, 거기에는 영성이 있다. 왜냐하면 영성을 신성시하고 재현하고 입증하려 할 때, 또 자신의 영적 체험이 더욱 커지는 것을 보장받으려 할 때, 그 영성 위에 세워진 것이 종교이기 때문이다. 앎은 당신 영성의 원천이며, 당신 내면에 심어져 있다. 앎은 선물이며, 우리가 당신을 앎에게로 다시 이끌어주고 있다. 앎은 당신과 항상 함께 있었지만, 당신에게 새로운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앎을 존중하고 그 실체를 받아들여 앎을 향해 나아가려면, 당신은 삶의 한 전환점에 도달해야 한다. 즉, 세상에서 이룬 것이 무엇이든 당신이 거기에 만족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 만큼 세상에 실망해야 한다. 이때 당신은 당신 삶의 여정에 있는 전환점에 도달한다. 이 전환점에서 당신은 무언가 큰 것, 즉 자신을 기다리며 부르는 것, 자신에게 내재되어 있으며 지금도 함께 머무는 것이 당신 삶에 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이런 깊고도 심오한 자아의식과 목적의식을 다시 체험하는 것은 당신이 삶에서 부·명성·즐거움 등을 얻으려고 한 어떤 일과도 비교할 수 없음을 안다. 모든 사람은 앎이 있다는 것을 자각하는 시작점인 이 전환점을 향해 가고 있다.
자신의 직관이 항상 매우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직관적이라고 해서 전환점, 즉 앎이 정말 중요하게 되어 앎에 시간과 정성을 쏟을 가치가 있다고 느껴지는 지점에 도달했다는 뜻은 아니다. 직관은 자신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정보만을 주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그들은 직관을 마치 자신이 살아가면서 받아야 하는 영적 복지제도의 일부처럼 여긴다. 참으로 감상적인 생각이다. 이렇게 접근한다면, 당신은 자신의 목적이나 영감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절대 알아내지 못할 것이다. 또한 앎길을 따르고 앎으로 가는 계단을 밟으려면, 먼저 배우고 해야 하는 일들이 있는데, 그 일들을 결코 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앎은 당신의 아는 능력과 관련되어 있다. 우리는 앎을 아는 마음이라고도 부른다. 그러나 아는 마음이라고 부를 때 문제는 아무 때나 이용할 수 있는 아는 마음이 자신에게 있다고 사람들이 주로 생각한다는 점이다. 결코 그렇지 않다. 앎이 당신에게 다가간다.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앎이 당신에게 다가갈 수 있도록 준비해놓는 것이다. 그리고 당신은 큰 것이 당신에게 드러날 수 있도록 고요히 받아들이는 법을 배워 준비할 수 있고, 또 판단을 보류하는 법, 선호·충동·관념·믿음 등과 떨어져 있는 법을 배워 준비할 수 있다. 이 준비는 당신이 해야 한다. 앎은 당신이 붙잡아서 당신 마음에 맞게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당신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큰 것이 당신 내면에 있다. 이 큰 것은 당신 개인의 소유가 아니며, 당신이 모든 생명체와 함께 공유하는 것이다. 당신이 종교 교육을 받았든 받지 못했든, 어떤 종교 배경에서 태어났든, 당신 내면에는 앎이 있다.
앎이 당신 삶에서 표현할 수 있으면, 당신을 통해 큰 가치·의미·목적을 세상에 보여줄 수 있다. 이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인생을 바꿀 만한 큰 영향을 줄 것이다. 앎이 표현하면, 다른 사람의 인생을 영원히 바꿀 수 있다. 당신이 사람들에게 무엇을 베풀었든, 심지어 배고플 때 음식을 주었다 하더라도, 이 선물과는 비교할 수 없다. 그러나 당신 자신이 그 선물을 준 것은 아니다. 당신은 다만 당신을 통해 표현되도록 허용한 것뿐이다. 그러면 그 선물은 다른 사람에게 베풀어진다.
지구에서 앎이 귀하듯, 큰공동체에서도 앎은 귀하다. 그리고 무엇이 앎이고 누가 앎과 함께 있는지에 대한 속임수가 지구에서 많듯이 큰공동체에서도 많다. 앎은 당신에게 가장 가치 있고 귀한 선물이자 능력이다. 앎과 함께 있으면, 당신은 다른 사람들을 알아볼 수 있고 분별할 수 있다. 또한 남들이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고, 남들이 알 수 없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남들이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할 수 있고, 남들이 느낄 수 없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앎은 당신을 삶의 선두에 세운다. 앎은 당신의 몸을 회복시키고 마음을 새롭게 해준다. 또한 당신 내면의 상반된 감정이나 동기를 모두 삶과 조화·균형을 이루게 해준다. 앎이 아니면 다른 어떤 것도 당신을 온전한 인간으로 통합할 수 없다. 생각·이상·체계·스승·힘 등 그 어떤 것도 당신을 온전하게 할 수 없으며, 오직 앎만이 할 수 있다.
당신이 보려고만 한다면, 삶에서 나타나는 모든 현상에서 앎이 있다는 징표를 찾아볼 수 있다. 앎은 자신을 내보이거나 전시하지 않지만, 항상 그 자리에 있다. 당신이 보려고 하면 찾을 수 있지만, 먼저 보아야 한다. 탐욕스럽거나 이기적인 마음, 자신이 옳고 최고라는 마음이 아니라 열린 마음으로 보아야 한다. 앎을 찾으려 할 때, 당신은 실제로 자신이 품고 있는 영적 관념이나 믿음마저도 포기해야 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앎은 그런 것들을 모두 뛰어넘기 때문이다.
당신은 앎이 무엇인지, 앎이 무엇을 할 것인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해서는 절대 안 된다. 앎을 잘 알려면, 당신 마음이 앎에 밀착해 있어야 한다. 앎은 순간순간 당신과 관계를 맺으며, 당신에게 절실히 필요한 일이나 깊은 믿음이 있을 때, 내면에서 열리는 통로다. 자신을 위해 앎을 쓰려면 얻지 못하겠지만, 앎에 마음을 열면 앎이 당신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앎과 함께 있으면, 당신은 통찰력이 생겨 큰공동체에서 온 이들이 어떤 존재인지 이해할 것이다. 앎과 함께 있으면, 다른 이들과 관계를 맺기도 전에 그 관계의 결말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앎과 함께 있으면, 어떤 특정 일들에서 운명을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앎은 당신을 어떤 곳으로는 가게 하고 어떤 곳으로는 가지 못하게 하며, 어떤 사람과는 관계를 맺게 하고 어떤 사람과는 관계를 맺지 못하게 할 것이다. 이 모든 일을 할 때, 아무런 비판이나 비난 없이 할 것이다. 당신에게 앎 자체를 체험하는 것보다 더 자연스러운 일은 없다. 그래서 앎 자체를 체험하는 일이야말로 가장 근원적인 일인데, 사람들 대부분이 완전히 놓치고 산다. 마치 항상 나는 소리인데도 사람들이 다른 소리만 들으려 하므로 전혀 들을 수 없는 소리와 같다.
앎에 다가가려면, 당신은 먼저 준비해야 한다. 이 준비는 당신 혼자 힘으로 할 수 없다. 큰공동체 수준의 앎을 배우려면, 큰공동체 앎길을 배워야 한다. 당신은 책을 읽거나 다른 전통 방식의 영적 수행을 하여 독학으로 큰공동체 앎길을 배울 수 없다. 자신의 방식대로 공부하면, 지금 서 있는 자리에 그대로 머무를 것이다. 당신은 당신 혼자 만들지 않은 길을 택할 때, 전에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에 이르게 되고, 전에 한 번도 발견하지 못한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당신 마음에 드는 생각이나 이상을 따르지 말고, 앎이 당신을 이끌게 하라.
세상에서 진정한 영적 성장이란 바로 이것을 말한다. 인류뿐만 아니라 모든 종족이 진보하는 것은 바로 이런 영적 성장이 있을 때다. 또한 지구에서뿐만 아니라 큰공동체 전역에 걸쳐 앎이 계속 살아있도록 하는 것도 바로 이런 영적 성장이 있을 때다. 우주에 앎이 계속 살아있게 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창조주의 목적이다. 앎이 어느 만큼 생생하게 살아있느냐에 따라 모든 곳의 모든 이들이 삶 자체와 완벽한 조화 속에서 재결합하는 진보를 할 수 있다.
참된 앎이란 무엇인가? 마샬 비안즈님의 메시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