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을 초월한 양심 도덕
그 훌륭한 사람들은 예수에게 도전했습니다. “모세의 율법에 따르면 이 여인은 돌에 맞아 죽어야만 합니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예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모래 위에 손가락으로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이 거짓말쟁이 무리들아.” “여러분 중 아무 죄도 짓지 않았고, 자신이 가장 순수하고 성스럽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먼저 돌을 던져 보시오.” 이 말을 듣고 모두 다 조용하고 빠르게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예수가 그녀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을 비난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당신을 저주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별첨 오해하지 마시길 저는 입문자도 제자도 아니며 스승이라고 하는 분들의 좋은 말씀을 자주 인용합니다. 어떤 스승을 부정하는 것은 말리지도 않으며 단지 너무 비난하지는 말았으면하는 것은 저를 지칭한 것이 아닌, 스승들이란 존재의 비난이 모든 개인에게 반사되어 도리어 비난이 돌아기때문입니다. 우리들이 각자 따르는 스승은 달라도 상대의 스승을 욕되게 하지말며 적대게 하지말며 양심과 순수한 마음의 동기로 배울것은 배우고 놓아줄것은 놓아주는 방식으로 오컬티스트로써 배울점은 받아드린다는 것입니다. 즉, 누가 그를 스승으로 인정하느냐 하지않하느냐 부정하느냐 관점은 본인 개인들에게 있으므로 자유입니다. 또 한 개인적으로 깊은 !!!그것을 느끼고 또 깨달은 존재다 아니다 라는 차원에서 옹호하거나 인용하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 순수한 동기에서 출발하여 언급하는 것이니 오해 하지 마시길바랍니다. 김경호.
최근 선희님이 올려주신 뉴스를 보고 충격적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남자친구가 많아서…" 10대 딸 생매장한 아빠 체포' 한편 메딘메미의 가족들이 *저지른 살인은 터키 남동쪽에 거주하는 쿠르디스탄 사람들 사이에서는 '명예로운 살인'이라고 불린다.* *“꽃들과 새들과 바람처럼 슬픔은 많은 면면을 지니고 있지만, 나는 가까운 몇몇 친구들을 통해서 슬픔과 사랑과 비애를 말하려 했다. 비록 이해할 수 없고 믿어지지 않을지라도.” 위 인용문은 영화가 시작되기 전에 이 영화를 연출한 터키의 감독 일마즈 귀니가 이 영화를 보는 사람들에게 띄우는 작품의 배경과 의도에 대한 은유적 독백이다.*
문화와 관습과 낡은원형의 관념의 벽이 허물어지지않은 저외딴 나라의 슬픈역사와 비극이 한편의 명화 시사어구를 통해 처절하게 전해지는듯 합니다. 인류는 정말 휴머니즘이 살아있고 생동하는 생명체일까? 라는 의문을 가질만한 주제들입니다.
20세기를 막 넘은 시점 21세기의 최첨단 시대에 우리는 걷고 있습니다. 달에 입성하고 화성 여행을 꿈꾸는 장래의 우리들에게 진정 우리 인류는 정말 똑똑한 존재인가 바보 멍청이인가를 의문을 가지지 않을수가 없는 것입니다.
머리가 똑똑한 것이아님 마음(가슴)이 똑똑해야 하는 것임을 깨닫게 해주는 주제들입니다. 마음의 심술을 잠제우고 비워내어 똑똑한 이성과 온혈이 흐르는 따뜻한 가슴의 판단과 분별없는 그 순수한 가슴의 동기와 음직임이 절실히 필요한때라고 보아집니다.
사고체가 닫히고 가슴이 막인 로봇인류의 메모리식 칩의 기억력과 관습과 낡은관념과 낡은원형에 의해 우리자신을 내맞낀다는 것은 불운한 일입니다.
도덕의 기준은 머리가 아니라 가슴에서 울어나오는 순수한 동기 부여가 필요한 때입니다. 도덕의 기준은 진실한 가슴에서 흘러나와 양심이 펼처저야할 주제들입니다.
그것은 같은 하늘아래 생명으로써 우주와 만물과 모든 개인들은 일체 넥세스 되어 가족이자 너와 나와 너희들을 나눌수 없는 순수한 일체이며 사랑이라는 것이 모든 경전과 성인들이 말씀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도덕의 기준은 머리가 아니라 순수한 가슴에서 동기가 발생해야 합니다.
이렇듯 인류의 역사 이면에 어두운 그림자중 하나도 피비린내가 나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크리스트와 예수 신을 따르던 저 카톨릭과 기독교종파의 변절된 타락성에 의해 중세시대의 마녀사냥으로 수십만 여성들이 고문과 화형당하고 십자군전쟁을 통해 많은 희생을 내었으며 어리석은 인간의 욕망에 의해 피범벅으로 덫칠해진 얼룩의 역사 이면들이 종교와 권력를 잡은 모든 것은 인간에게 비롯되었으며 이우주에 어리석은 중생들에 의해 조종되었던 것입니다.
이모든 것은 종교와 권력을 잡은 엘리트만이 아닌, 인류 개개인에게 잠제되어있으며 인류는 완전하지 않으므로 개개인의 내면에 선과 악이 항상 대결하며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이모든 것이 통일을 이루어야만이 모든 생명이 너나없이 상생의 길을 열어야만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도덕의 기준은 생명의 존귀함이 그 첫째여야합니다. 도덕의 근본이유는 그것을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무묘앙애오의 한편이 떠오르는 것은 이 우주에서 높은 층에 창조신들은 인류의 고통에 아랑곳하지 않고 개미보다 못한 생물로 인식한다는 구절이 아련하게 다가옵니다.
그러므로 완전히 깨달은 태양을 탄생시킨 성인과 블랙홀의 관문을 열은 부처들은 중생과 함께 체험하여 중생의 마음을 이해하여 연민과 자비심을 내어 중생을 재도하는 것이라 봅니다.
그것은 삼계三界 넘어 고층차 신들은 인류가 고통받는 것을 전혀 인식못하는 관념의 벽들이 층층이 둘러싸여 인류 또한 무량수 무량광을 볼수 없을 정도로 왜곡된 미혹한 세계에 추락하여 듣지도 보지도 못하는 일종에 딜레마에 빠져있습니다.
인류의 고통을 호소해본들 고층차 신들은 귀머어리요 벙어리입니다.
그러므로 완전히 깨달은 무량수 부처들과 불보사 보살대중들이 인류와 같은 우주중생들을 구재하기위해서 과거세와 현재 미래에도 여전이 올 것입니다. 그외 관세움보살과 같은 많은 우주적 존재들이 자신의 화신을 나투어 인류와 같은 중생들에 눈과 귀를 기우릴 것입니다.
김경호
12가지 거짓의 노래
고독 |
경호님이 더 좋아지는 느낌이 문득 드는군요 ^^
좋은 글 감사합니다.
그 중 특히 해리 팔머의 글이 제겐 너무도 크게 닿아오는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