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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승호님은 도대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결론이 뭐냐...이 모든게 뻘짓이라는 것을 그렇게 주장해서 뭐하고자 하는 거냐...무조건 뻘짓이니 집어치우라? 마음을 비우라? 그런자는 아무것도 모를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알지못함으로 겸손과 희생이 없습니다. 자기 스스로를 자각하고 알기 위해서 신은 창조를 행했습니다.아무리 뻘짓이라고 해도 그것은 우리가 선택한 것이며 거기서 배워가는게 있습니다. 거짓인가 가짜인가 진짜인가가 그 자체가 중요한게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우리가 얻는 것이 무엇이냐 무엇을 배우는가 입니다. 거짓이라면 그 거짓을 통해 더욱 신을 배우고 진실을 배웁니다. 우주와 삶 그 존재 자체에 대한 포용성, 겸손 희생 사랑이 없는 글은 글이 아니며, 여기서 희생이라는 것이 바로 관심을 가지고 참여하여 짜임과 구조를 들여다 보는 것입니다. 무조건적인 사랑이란 것도 있지만 참여와 희생의 용기가 선행되지 않은 한 그는 다른 세계에 속하며 발언권이 없는 겁니다.
자기가 있는 자리가 어딘가 부터 바로 알아야 합니다. 불쾌를 느낄줄 알아야 쾌가 있다는 것을 알지요. 남의 감정이 그대로 전달되어 사람들이 고통받는 모습을보고 눈물을 흘리고 슬픔을 느낄줄 알아야하고, 남이 기뻐할때 같이 내 일 처럼 기뻐할줄 알아야 합니다. 나쁜 것을 보고 눈울을 흘릴줄 알고 좋은 것을 보고 기쁨의 눈물을 흘리줄 알때(이것을 거꾸로 하는 자들이 있는데 그자들은 당사자가 아니며 책임없는 구경꾼에 외부인에 불과합니다) 그것을 통해서 인간은 무엇이 옳고 그른지도 알고 무엇을 향해 나아갈줄도 알게 되는 거지요. 불도 추종자들이 그러한데 이것을 거세하려 하려 들기 바쁩니다. 감동보다 삶보다 위대하고 찬란한 것은 없습니다. 이것에 비하면 무라는 것은 옆에서 손가락만 쪽쪽 빨고 있는 존재에 불과합니다.
본래 최고의 선은 최고의 악과 연결이 안되어 있습니다. 예수나 부처처럼 선한자도 때로는 화도 내고 분개도 하는데 그것을 악으로 보면 안됩니다. 그 화나 분개는 자기 하나만을 위한 저급한 것이 아니며 왠지 모르게 신성한 권위가 담겨 있는 겁니다. 그들의 화는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완전한 자각과 통제하에 일어나는 일이며 그것은 일을 함에 전략이고 방편일뿐입니다. 단지 내가 화가 나 있다는 것을 말할뿐 그 화를 타인에게 강요하지는 않습니다. 화나 분노자체가 나쁘다고 없애려하는 것은 아닌데 어떻게 자신을 표현하느냐 입니다. 본래 최고의 선이 최고의 악과 연결되었다고 했을때 당신은 아무런 것도 좋아하지도 노력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실제적인 노력, 절차와 몸소 과정을 무시한 현 '사태'를 무시한 이것이 당신의 눈을 가리게 하는 위선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것이 진정한 사랑에 나온것이라는 것을 단지 자기 변호와 안온함과 용기없음과 편의주의 비겁함에서 나온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십시요. 진정한 사랑을 행하려면 당신은 멸망을 도와주지 않을 것이기에 무조건 적인 사랑만으로는 안되는 데 거기에는 절차와 도구와 기술이 필요합니다. 무엇이 멸망이고 생명을 살리는일인지 따라서 당신은 지혜를 얻어야 합니다. 멸망으로 가는 일에도 흥하고 그저 좋고 반응이 없는 것이 과연 고통을 자기것으로 느껴서 하는 일이 되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요. 진짜 천진한 바보일수록 나쁜것 좋지 않을 것을 볼때 울고 눈물을 흘릴줄 압니다. 다만 그것을 타인에게 권력으로 강요하지 않을 뿐이지요. 무엇을 하라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최소한 눈물을 흘릴줄 알아야 하는 겁니다. 붓다는 로봇 붓다가 아니라 눈물을 흘리줄 아는 신의 붓다입니다. 이러한 느낌을 제거, 거세하려고 하지 마십시요.그러한 도피 허부주의 불교수행은 그 자신의 성향으로서 그릇된 것입니다.
거칠고 험난한 인생을 살아오고 치여 왔기에 무기력함과 우울증에 걸린것인데, 그것을 무슨 우주네 철학이네 고매한 것으로 위장하지 마십시요. 마치 우울함 무기력함과 의미없음 흐물흐물 문어 대가리처럼 보기만해도 힘이 쭉쭉 빠지는 무기력의 신들이 지배하고 있는 타인을 말을 통해서 그런것을 보고 좋은 거라고 기뻐하는 자들이 있는데 나아가 진정한 생명의 기쁨과 감동을 추구하고 느끼는 것을 시기하고 방해하는 자들 있는데. 그자들은 볼기짝 좀 맞아야 합니다. 이 자들은 사람의 정기와 기운 을 빼앗아서 어떻게 하면 '나'같이 약하게 만들까 골몰하는 왕쥐 같은 자들입니다. 뇌사상태나 식물인간으로 누어있는 신을 신을 숭배하며 그것이 행복이고 기쁨이라고 위선을 부리며 잘못 여기고 있지요.
왜냐하면 그런 파괴심외에는 어느 것도 없는 무기력한 말들은 정말로 도움을 필요로 한다는 반증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같이 진탕 노는게 아니라 도움을 주어야 합니다. 희생의 눈물로서. 그것은 용기와 강함으로부터 나오는 겁니다. 님들은 강해지지 않으면 안됩니다.
강자만이 사랑을 줄수 있고
사랑을 주는 자가 강한 자입니다.
희생의 사랑, 그것은 참여이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있는 자리가 어딘가 부터 바로 알아야 합니다. 불쾌를 느낄줄 알아야 쾌가 있다는 것을 알지요. 남의 감정이 그대로 전달되어 사람들이 고통받는 모습을보고 눈물을 흘리고 슬픔을 느낄줄 알아야하고, 남이 기뻐할때 같이 내 일 처럼 기뻐할줄 알아야 합니다. 나쁜 것을 보고 눈울을 흘릴줄 알고 좋은 것을 보고 기쁨의 눈물을 흘리줄 알때(이것을 거꾸로 하는 자들이 있는데 그자들은 당사자가 아니며 책임없는 구경꾼에 외부인에 불과합니다) 그것을 통해서 인간은 무엇이 옳고 그른지도 알고 무엇을 향해 나아갈줄도 알게 되는 거지요. 불도 추종자들이 그러한데 이것을 거세하려 하려 들기 바쁩니다. 감동보다 삶보다 위대하고 찬란한 것은 없습니다. 이것에 비하면 무라는 것은 옆에서 손가락만 쪽쪽 빨고 있는 존재에 불과합니다.
본래 최고의 선은 최고의 악과 연결이 안되어 있습니다. 예수나 부처처럼 선한자도 때로는 화도 내고 분개도 하는데 그것을 악으로 보면 안됩니다. 그 화나 분개는 자기 하나만을 위한 저급한 것이 아니며 왠지 모르게 신성한 권위가 담겨 있는 겁니다. 그들의 화는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완전한 자각과 통제하에 일어나는 일이며 그것은 일을 함에 전략이고 방편일뿐입니다. 단지 내가 화가 나 있다는 것을 말할뿐 그 화를 타인에게 강요하지는 않습니다. 화나 분노자체가 나쁘다고 없애려하는 것은 아닌데 어떻게 자신을 표현하느냐 입니다. 본래 최고의 선이 최고의 악과 연결되었다고 했을때 당신은 아무런 것도 좋아하지도 노력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실제적인 노력, 절차와 몸소 과정을 무시한 현 '사태'를 무시한 이것이 당신의 눈을 가리게 하는 위선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것이 진정한 사랑에 나온것이라는 것을 단지 자기 변호와 안온함과 용기없음과 편의주의 비겁함에서 나온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십시요. 진정한 사랑을 행하려면 당신은 멸망을 도와주지 않을 것이기에 무조건 적인 사랑만으로는 안되는 데 거기에는 절차와 도구와 기술이 필요합니다. 무엇이 멸망이고 생명을 살리는일인지 따라서 당신은 지혜를 얻어야 합니다. 멸망으로 가는 일에도 흥하고 그저 좋고 반응이 없는 것이 과연 고통을 자기것으로 느껴서 하는 일이 되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요. 진짜 천진한 바보일수록 나쁜것 좋지 않을 것을 볼때 울고 눈물을 흘릴줄 압니다. 다만 그것을 타인에게 권력으로 강요하지 않을 뿐이지요. 무엇을 하라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최소한 눈물을 흘릴줄 알아야 하는 겁니다. 붓다는 로봇 붓다가 아니라 눈물을 흘리줄 아는 신의 붓다입니다. 이러한 느낌을 제거, 거세하려고 하지 마십시요.그러한 도피 허부주의 불교수행은 그 자신의 성향으로서 그릇된 것입니다.
거칠고 험난한 인생을 살아오고 치여 왔기에 무기력함과 우울증에 걸린것인데, 그것을 무슨 우주네 철학이네 고매한 것으로 위장하지 마십시요. 마치 우울함 무기력함과 의미없음 흐물흐물 문어 대가리처럼 보기만해도 힘이 쭉쭉 빠지는 무기력의 신들이 지배하고 있는 타인을 말을 통해서 그런것을 보고 좋은 거라고 기뻐하는 자들이 있는데 나아가 진정한 생명의 기쁨과 감동을 추구하고 느끼는 것을 시기하고 방해하는 자들 있는데. 그자들은 볼기짝 좀 맞아야 합니다. 이 자들은 사람의 정기와 기운 을 빼앗아서 어떻게 하면 '나'같이 약하게 만들까 골몰하는 왕쥐 같은 자들입니다. 뇌사상태나 식물인간으로 누어있는 신을 신을 숭배하며 그것이 행복이고 기쁨이라고 위선을 부리며 잘못 여기고 있지요.
왜냐하면 그런 파괴심외에는 어느 것도 없는 무기력한 말들은 정말로 도움을 필요로 한다는 반증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같이 진탕 노는게 아니라 도움을 주어야 합니다. 희생의 눈물로서. 그것은 용기와 강함으로부터 나오는 겁니다. 님들은 강해지지 않으면 안됩니다.
강자만이 사랑을 줄수 있고
사랑을 주는 자가 강한 자입니다.
희생의 사랑, 그것은 참여이기 때문입니다.
ㆍ글쓴이 : 골든네라 (2010.01.25 - 23:02)
[사람의 정기를 뺏아아 먹는 쥐들... ]
마음을 비우라? 그런자는 아무것도 모를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알지못함으로 겸손과 희생이 없습니다.
거짓인가 가짜인가 진짜인가가 그 자체가 중요한게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우리가 얻는 것이 무엇이냐 무엇을 배우는가 입니다.
거짓이라면 그 거짓을 통해 더욱 신을 배우고 진실을 배웁니다.
우주와 삶 그 존재 자체에 대한 포용성, 겸손 희생 사랑이 없는 글은 글이 아니며,
무조건적인 사랑이란 것도 있지만 참여와 희생의 용기가 선행되지 않은 한
그는 다른 세계에 속하며 발언권이 없는 겁니다.
자기가 있는 자리가 어딘가 부터 바로 알아야 합니다.
불쾌를 느낄줄 알아야 쾌가 있다는 것을 알지요.
남의 감정이 그대로 전달되어 사람들이 고통받는 모습을보고 눈물을 흘리고 슬픔을 느낄줄 알아야하고, 남이 기뻐할때 같이 내 일 처럼 기뻐할줄 알아야 합니다.
나쁜 것을 보고 눈울을 흘릴줄 알고 좋은 것을 보고 기쁨의 눈물을 흘리줄 알때(이것을 거꾸로 하는 자들이 있는데 그자들은 당사자가 아니며 책임없는 구경꾼에 외부인에 불과합니다)
그것을 통해서 인간은 무엇이 옳고 그른지도 알고 무엇을 향해 나아갈줄도 알게 되는 거지요.
불도 추종자들이 그러한데 이것을 거세하려 하려 들기 바쁩니다.
감동보다 삶보다 위대하고 찬란한 것은 없습니다.
본래 최고의 선은 최고의 악과 연결이 안되어 있습니다.
예수나 부처처럼 선한자도 때로는 화도 내고 분개도 하는데 그것을 악으로 보면 안됩니다.
그 화나 분개는 자기 하나만을 위한 저급한 것이 아니며 왠지 모르게 신성한 권위가 담겨 있는 겁니다.
그들의 화는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완전한 자각과 통제하에 일어나는 일이며
그것은 일을 함에 전략이고 방편일뿐입니다.
단지 내가 화가 나 있다는 것을 말할뿐 그 화를 타인에게 강요하지는 않습니다.
화나 분노자체가 나쁘다고 없애려하는 것은 아닌데 어떻게 자신을 표현하느냐 입니다.
본래 최고의 선이 최고의 악과 연결되었다고 했을때
당신은 아무런 것도 좋아하지도 노력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실제적인 노력, 절차와 몸소 과정을 무시한 현 '사태'를 무시한 이것이
당신의 눈을 가리게 하는 위선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것이 진정한 사랑에 나온것이라는 것을
단지 자기 변호와 안온함과 용기없음과 편의주의 비겁함에서 나온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십시요.
진정한 사랑을 행하려면 당신은 멸망을 도와주지 않을 것이기에
무조건 적인 사랑만으로는 안되는 데 거기에는 절차와 도구와 기술이 필요합니다.
무엇이 멸망이고 생명을 살리는일인지 따라서 당신은 지혜를 얻어야 합니다.
멸망으로 가는 일에도 흥하고 그저 좋고 반응이 없는 것이
과연 고통을 자기것으로 느껴서 하는 일이 되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요.
무엇을 하라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최소한 눈물을 흘릴줄 알아야 하는 겁니다.
붓다는 로봇 붓다가 아니라 눈물을 흘리줄 아는 신의 붓다입니다.
이러한 느낌을 제거, 거세하려고 하지 마십시요.
그러한 도피 허부주의 불교수행은 그 자신의 성향으로서 그릇된 것입니다.
거칠고 험난한 인생을 살아오고 치여 왔기에 무기력함과 우울증에 걸린것인데,
그것을 무슨 우주네 철학이네 고매한 것으로 위장하지 마십시요.
마치 우울함 무기력함과 의미없음 ,무기력의 신들이 지배하고 있는 타인을 말을 통해서
그런것을 보고 좋은 거라고 기뻐하는 자들이 있는데
나아가 진정한 생명의 기쁨과 감동을 추구하고 느끼는 것을 시기하고 방해하는 자들 있는데. 이 자들은
사람의 정기와 기운 을 빼앗아서 어떻게 하면 '나'같이 약하게 만들까 골몰하는 왕쥐 같은 자들입니다.
뇌사상태나 식물인간으로 누어있는 신을 신을 숭배하며
그것이 행복이고 기쁨이라고 위선을 부리며 잘못 여기고 있지요.
왜냐하면 그런 파괴심외에는 어느 것도 없는 무기력한 말들은
정말로 도움을 필요로 한다는 반증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같이 진탕 노는게 아니라 도움을 주어야 합니다.
희생의 눈물로서. 그것은 용기와 강함으로부터 나오는 겁니다. 님들은 강해지지 않으면 안됩니다.
강자만이 사랑을 줄수 있고 사랑을 주는 자가 강한 자입니다.
희생의 사랑, 그것은 참여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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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든네라님에게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개념의 모호성과 불분명성을 벗도록 돕는 글을 올리십니다.
많은 수행자료들을 연구하고 공부를 하는 사람은 많지만,
그것을 자신의 일상생활의 언행속에 일체화시키 줄 아는 사람은 희소한 것 같습니다.
일부사람들은 수행자료의 중요 내용은 자기 것으로 만들지 못한체,
중요치 않은 것에만 매달리고 대단한 진리의 세계인냥 주장을 하며, 타인을 비판합니다.
골든네라님은 <진정 무엇이 중요하며, 수행의 본질을 어떻게 자신안에 실천하는냐>를 각성시키는 글을 올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