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아래 글은 원래 블로그내 "도덕경 夷希微" 라는 카테고리에 있던 글이었으나
단순히 이희미에 대한 간단한 덧붙임을 해석하려 남의 글을 차용하여 쓴것으로
이번에(2006/12/05) 새로이 14장 전체해석을 하게 됨에 따라 원래 있던 글만 이곳(메모로그)으로 옮겨 옵니다.
아래 글과 블로그의 새로 쓴 해석을 비교 하면서 읽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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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9.08
블로그글 오온개공에 관한 글과 함께 다른이의 느낌을 구체적으로 적은 다큐멘터리
가 다시 있더군요. 그래서 그 기록만 퍼 오고 맨 밑에 제목글과 관련하여 몇마디
적습니다. 오늘 아침 오온개공에 관한글 첨언 중에 " 말타고 활을 쏘는 것을
너무 즐겨하지 말라" 와 본 글의 제목과 관련이 있습니다.
도덕경 - 14장 - 구체적인, 너무나 구체적인 | § 김 기 태 2006/01/21 11:48
http://blog.naver.com/heo4680/100021196777
14장 - 구체적인, 너무나 구체적인
視之不見, 名曰夷.
聽之不聞, 名曰希.
搏之不得, 名曰微.
此三者, 不可致詰,
故混而爲一.
其上不교, 其下不昧,
繩繩兮不可名,
復歸於無物.
是謂無狀之狀, 無象之象,
是謂惚恍.
迎之不見其首,
隨之不見其後.
執古之道, 以御今之有.
能知古始,
是謂道紀.
視―볼 시, 夷―평평할 이, 오랑캐 이, 聽―들을 청, 希―드물 희, 바랄 희, 搏―잡을 박, 칠 박, 微―작을 미, 정교할 미, 희미할 미, 詰―물을 힐, 다스릴 힐, 꾸짖을 힐, 混―섞을 혼, 교―밝을 교, 흴 교, 昧―어두울 매, 繩―이을 승, 노 승, 줄 승, 兮―어조사 혜, 於―어조사 어, 狀―형상 상, 문서 장, 象―꼴 상, 코끼리 상, 惚―황홀할 홀, 恍―황홀할 황, 迎―맞이할 영, 首―머리 수, 隨―따를 수, 執―잡을 집, 가질 집, 御―다스릴 어, 거느릴 어, 마부 어, 紀―벼리 기, 터 기, 실마리 기
보아도 보이지 않는 것을 이름하여 가로되 이(夷)라 하고,
들어도 들리지 않는 것을 이름하여 가로되 희(希)라 하며,
잡아도 잡히지 않는 것을 이름하여 가로되 미(微)라 하나니,
이 세 가지는 어떻게 자세히 캐물어 밝힐 수 없다.
그러므로 뭉뚱그려 '하나(一)'라고 하자.
그 '하나'의 위는 밝지 않고, 아래는 어둡지 않으며,
끊임없이 이어져 오는데, 어떤 이름(名)도 붙일 수가 없구나.
다시 아무것도 없는 무(無)로 돌아가나니,
이를 일컬어 형상 없는 형상이라 하고, 모양 없는 모양이라 하며,
또한 이를 일컬어 '있는가 하면 없고, 없는가 하면 너무나도 분명히 있는 것[惚恍]'이라 한다.
앞에서 맞이하여도 그 머리를 볼 수 없고,
뒤따라 가면서 보아도 그 뒷모습을 볼 수가 없구나.
옛 도(道)를 잡고서 오늘의 있음[有]을 다스리나니,
능히 옛 비롯함을 앎, 이를 일컬어 도의 벼리[道紀]라 한다.
< 뜻풀이 >
내 나이 서른 네 살 때의 일이다. 그때 나는 대구 영남일보에서 교열부(校閱部) 계약사원으로 근무하고 있었는데, 스무 살을 넘기면서 '나는 누구인가?'로부터 시작된 내면의 방황과 오랜 갈증은 이때가 절정이었다. 사실 그 문제 하나가 마음으로부터 해결되지 않으니, 나는 그야말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자식으로서도, 남편으로서도, 아버지로서도, 한 가정의 가장(家長)으로서도 그 역할을 충분히 그리고 충실히 다 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직장생활과 인간관계에서도 나는 언제나 입술이 타는 듯했다.
아직도 선명히 기억하는 것은, 그 즈음의 어느 날 밤 태어난 지 백일을 막 넘긴 내 아들이 유난히도 울던 때의 일이다. 밤늦도록 녀석을 품에 안고 어떻게든 달래어서 재워보려고 애를 쓰고 있었는데, 그 어느 한 순간 문득 내 안에서 이런 의문 하나가 떠오른 것이다.
'나는 이 아이의 아버지이다. 그런데, 아버지로서 이 아이에게 <이것이다!>라고 말해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
아무것도 없었다. 정말이지, 아무것도 없었다! 아아, 나는 내 아들에게 '삶'에 대하여, '인간의 길'에 대하여, 그리고 '참(眞理)'에 대하여 아무것도 해 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그것은 거의 공포에 가까운 각성(覺醒)을 내게 가져다 주었고, 늘 입술이 타듯 하던 내 마음에 기름을 끼얹는 격이 되고 말았다. 나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마침내 나는 50일 단식(斷食)을 결심하고, 또다시 사표를 썼다. 풀리지 않는 내 안의 의문들을 그냥 그대로 안은 채로는 더 이상 살아갈 수가 없었고, '삶'에 대하여 '나(眞我)'에 대하여 '인간의 길'에 대하여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더 이상은 견딜 수가 없었다. 아, 그 휑한 가슴이여, 목마름이여―!
그리하여 오랜 세월 집을 떠나올 때마다 메고 다녔던 배낭을 이번에도 메고 아픈 걸음 떼며 다시 집을 나서는데, 어머니는 연신 손을 내저으시며 그저 그저 굶지 말고 밥 제때 챙겨먹으며 몸조심하라 하시고, 이제 막 백일이 지난 아들녀석을 등에 업은 아내는 발을 동동,거리며 애틋하게 나를 말렸지만, 아아 그러나 나는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떠나온 곳은 상주에 있는 '극락원'이라는 자그마한 암자였다. 나는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단식에 들어갔고, 34년 동안의 그 오랜 생(生)의 방황을 이제는 끝장낼 양으로, 온 우주를 뒤로 물린 채 면벽(面壁)하고서는 가부좌(跏趺坐)를 틀었다. 그리하여 나는 마침내 진리(眞理)를 얻으리라―!
그러나……
그 당시 나는 주로 '관법(觀法)'이라는 수행법을 행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일상생활 속에서 살아가는 이 몸의 움직임 뿐만 아니라 내면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감정과 느낌과 생각들을 <판단>하지 않고 '단지 바라보기만 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그것은 마치 비디오를 찍듯이, 이 '몸'과 내면의 '생각'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고 지켜보고 관찰하면서, 자신이 지금 이 순간 무슨 생각을 하고 있으며 어떻게 행동하고 있는가를 그때 그때마다 알아차리는 것인데, 여러 해(年) 단지 그렇게 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나 자신에 관한 많은 새로운 발견과 이해와 체험을 할 수 있어서 참 좋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또한 닿을 듯 닿을 듯 하면서도 닿지 않는 안타까움과 갈증을 언제나 내게 주었고, 진척은 있으나 아무런 확증(確證)은 없는 그 애틋함을 나는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단 한 순간도 놓치지 않는 완전한 집중과 몰두가 내겐 필요했고, 그를 위하여 나는 이번엔 처자식마저 버려둔 채 이 깊은 산 속으로 들어왔으며, 그렇게 모든 것을 버리고 완전한 고독 속에서 내면의 떠오르는 '생각'과 '마음'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고 온전히 지켜보게만 된다면, 그토록 찾아 헤매던 '나'와 '삶'과 '인간의 길'에 관한 어떤 분명한 '답(答)'이나 '결론'같은 것이 확연히 내 앞에 나타나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면 나는 마침내 진리를 얻게 되고……!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면벽하고 가부좌를 틀고서, 내면에서 떠오르는 생각과 마음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고 지켜보려 하면 할수록 오히려 놓치지 않는 경우가 드문 것이 아닌가! 슬프게도 나는 언제나 망상(妄想)과 잡생각에 사로잡혀 그 속에서 허우적댈 뿐 어느 한 순간도 제대로 지켜보고 있지 못한 자신을 발견하곤 했다.
'아, 또 놓쳤구나……!'
그러면 나는 다시 타는 듯한 마음이 되어 집중에 집중을 더하려고 애썼고……그러나 어느 순간 문득 다시 보면, 엉뚱한 생각 속에서 이미 한참을 놓치고 있는 자신을 거듭 거듭 목격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아아, 나는 그야말로 망상덩어리였다!
그렇게 일주일 동안을 단식하며 애를 써보았건만 아무런 진척이 없자, 이번엔 음식을 먹으면서 해보기로 했다. 내게 그렇게 많은 망상과 잡생각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한꺼번에 몰려오는 것은 아무래도 단식으로 인해 기력이 쇠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급한 마음에 허겁지겁 밥을 해먹고는 이번엔 띵띵해진 배를 움켜쥐고는 다시 면벽하고 앉았다. 그랬더니, 이번엔 그 많던 망상에 하나가 더 붙어, 졸음이 쏟아지는 것이었다. 얼마나 얼마나 졸았던지! 그랬던 만큼 마음은 또 얼마나 절망감에 사로잡혔던지!
'아아, 이래도 안되는구나……!'
그렇게 일주일간을 또 지나던 그 어느 한 순간 갑자기 "꽈당!" 하는 벼락치는 듯한 소리에 화들짝 놀라 눈을 떠보니, 졸던 그대로 머리를 방바닥에 부딪고 나동그라져 있는 것이 아닌가? 아아, 그 순간 나는 일어나기가 싫었다. 그냥 그렇게 나동그라진 채로 얼마나 울었던지!
'나는 결국……안될 인간인가……?'
'……'
'아니, 다시 하자! 처음부터 다시 하자! 그 오랜 세월 나 자신으로부터의 자유를 향해 몸부림쳐 온 결과가 이 모양이라면, 그리고 깨달음에 거의 다 다다랐다고 생각하고 그 마지막 도약(跳躍)을 위해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달려온 나의 몰골이 이 지경이라면, 그래,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자……!'
그리곤 마음도 비우고, 호주머니에 남아있던 얼마간의 돈도 버렸으며, 회복식(回復食)을 위해 남겨두었던 한 줌 쌀도 버려버렸다. 또다시 이대로, 아무런 '결론' 없이 산을 내려갈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처음 이곳에 왔을 때와 같은 모습으로 다시 단식하면서 면벽하고 가부좌를 틀었다.
……
"그러나 보라! 일은 전혀 뜻밖으로 결론이 나고 말았다! 나는 이미 진리 안에 있었다. 아니, 나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모든 존재가 이미 진리 안에 있었고, 단 한 순간도 그것을 떠난 적이 없었다[森羅萬象 悉皆成佛]! 내가 그토록 애타게 찾아다닌 진리는 저만치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었고, 그것을 얻기 위해 그토록 피나는 노력과 수행(修行)이 필요한 것도 아니었다. 정말 너무나 어처구니없게도, 나는 이미 처음부터 진리 안에 있었고, 그랬기에 이렇듯 애쓰고 노력하여 진리를 얻으려던 그동안의 나의 일체의 시도는 이미 처음부터 불가능을 전제로 한 것이었으며, 그것은 진리 안에 있으면서 진리를 찾으려는 어리석음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었다! 아니,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그 무엇과도 비견될 수 없는 진리를 얻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버려야 하며, 심지어 목숨마저 내놓을 각오로 열심히 수행해야 한다고 믿고서 그렇게 달려왔고, 그러면서도 일체의 경계(境界)가 사라진 밝은 깨달음의 경지가 쉽게 나타나 주질 않아 자신의 수행력의 부족함 앞에 몇 번이나 절망하며 안타까워했었는데, 더구나 이번에는 정말 마지막이라 생각하고서 달려들었다가 두 번이나 단식에 실패한 참담한 마음이었는데, 아아 이렇듯 지치고 일그러진 이 모습 이대로가 이미 완전하다니! 이 모습 이대로가 이미 진리라니! 아니, 그러고 보니 이젠 이 말도 합당치가 않구나! '완전'이니 '진리'니 하는 이런 말도 성립되지가 않는구나! 여긴 그 어떤 이름(名)도 붙여질 수 없는 자리가 아닌가! 그냥, 있는 그대로일 뿐 아무것도 아니질 않는가! 아아, 이럴 수가! 언어이전(言語以前)의 세계는 무언가 큰 깨달음을 얻고 난 이후에 그 깨달음 속에서나 나타나는 무엇이 아니라 깨달음과는 무관한, 깨달음과 수행과 체험 이전의 지금 이대로가 아닌가! 그냥, 어쩔 수 없이, 이름하여 번뇌(煩惱)요 이름하여 보리(菩提)였지, 번뇌도 보리도 아닌, 중생(衆生)도 부처도 아닌, 그냥 있는 그대로가 아닌가! 아아,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였다! 새로이 깨달을 무엇도, 얻을 무엇도 없는―!"
이것은 <마침내 모든 방황에 종지부를 찍다!>라는 제목으로 지난 94년 10월에 쓴 나의 구도기(求道記)의 마지막 부분이다. 그렇게 나는 '나(眞我)'와 '삶'과 '인간의 길'과 '참(眞理)'에 대하여 ― 이 모두는 결국 같은 말이지만 ― 모든 것을 분명하게 알게 되었고, 그와 동시에 나의 그 오랜 갈증과 의문도 끝이 났으며, 비로소 내 영혼에는 쉼이, 내 삶 속에는 평화가 깃들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다. 그렇게 '밝아진 눈'으로 알게 된 진실(眞實)은 이랬다 ― 나는 단 한 순간도 놓치지 않는 완전한 '지켜봄[觀]' 속에서 깨달음이랄까, 도(道)랄까, 인생의 궁극의 답(答) 같은 것을 구했건만, 사실은 단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지켜보려 하는 바로 그 놈[관찰자]이 미망(迷妄)이요 허구(虛構)였으며, 바로 그 놈이 분별심(分別心)이었던 것이다. 어찌된 영문인진 모르지만, 어느 순간 내 안에서 그것[분별심]이 문득 사라져 버렸고, 그러고 나니 갑자기 나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토록 끊임없이 솟구쳐 나와 나를 지치게 하고 힘들게 하던 망상과 잡생각은 여전했으나, 그것이 '망상'이라고도, '잡생각'이라고도 여겨지지 않아 거기에 아무런 걸림이 없었고, 언제나 어느 때나 목격할 수밖에 없어 늘 입술이 타듯 하던, 나의 '부족함'과 '못남'과 '결핍'을 증거해 주던 내 안의 많은 것들도 그냥 그 모두가 다 나인 것을 왜 그동안 그것을 그토록 못견뎌 했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으며, 식욕(食慾)과 성욕(性慾)과 수면욕(睡眠慾)도 나의 '자기완성'을 가로막는 더럽고 추한, 극복해야 할 욕망이 아니라, 내 삶을 한층 즐겁고 재미있고 풍요롭게 하는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것들이었다. 나는 여전히 이전과 다름없는 그대로의 나요,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건만, 그런 나를 옳다느니 그르다느니 하고 <판단>하던 그 한 마음이 사라지고 나니, 그냥 있는 그대로의 '나'가 언제나처럼 여기 이렇게 그냥 존재할 뿐이었다.
그때 나는 모든 것을 분명하게 알게 되었다. 식욕, 성욕, 수면욕을 가졌고, 잡생각이든 망상이든 번뇌(煩惱)든 온갖 것들이 잠시도 가만히 있질 않고 언제나 죽 끓듯 하며, 기쁨이나 노여움, 슬픔, 근심, 불안, 두려움, 사랑, 미움, 욕심 등등의 온갖 감정들이 시시로 변화를 거듭하는 이 있는 그대로의 '나'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그런 '나'를 부족하고 못난 중생(衆生)이라느니, 그 '나' 안에 있는 식욕이나 성욕, 수면욕과 분노, 게으름, 미움 등등을 떨쳐버리거나 극복해야 할 번뇌라고 <판단>하거나 <규정>해 버리는 바로 그 놈, 그리하여 '나'를 있지도 않는 '완전'을 향해 끝없이 내모는 바로 그 놈 ― 이름하여 분별심(分別心) ― 이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따라서 그 '한 생각'이 내려지니, 도무지 구제할 길 없는 중생(衆生)이라 여겼던 이 모습 이대로가 부처요, 너무 많고 아뜩하여 어찌 할 바를 모르던 번뇌가 그대로 보리(菩提)였으며, 주체할 길 없이 솟구치던 분노와 슬픔이 그대로 여여(如如)함이었다. 그렇게 진실(眞實)을 알고 나니, 이젠 거기엔 중생이랄 것도 없고 부처랄 것도 없었으며, 번뇌랄 것도 보리랄 것도, '부족'이랄 것도 '완전'이랄 것도, 심지어 도(道)니 진리(眞理)니 여여(如如)함이니 깨달음이니랄 것도 없었다. 그냥 단지 모든 것은 있는 그대로일 뿐 아무것도 아니었다. 아아, 우리네 삶은 이토록 단순한 것을―!
문득 삼조(三祖) 승찬(僧璨) 스님이 쓴 <신심명(信心銘)>의 한 구절이 생각난다.
不用求眞 참[도(道), 진리(眞理), 깨달음]을 구하지 말고
唯須息見 다만 옳다느니 그르다느니 하는 견해만 쉬어라.
一心不生 한 마음[分別心]이 일어나지 않으면
萬法無咎 만법(萬法)이 허물 없느니라.
欲趣一乘 일승(一乘)으로 나아가고자 하거든
勿惡六塵 육진(六塵) ― 번뇌(煩惱) ― 을 미워하지 말라.
六塵不惡 육진을 미워하지 않으면
還同正覺 홀연히 정각(正覺)이라.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으며, 잡아도 잡히지 않는……'이라고 시작되는 이 장(章)은 마치 성경에서 '하나님'을 가리켜 묘사할 때 쓰이는 많은 표현들 가운데 하나를 연상시킨다. 하나님은 그 형상(形狀)을 볼 수도 없고, 그 음성을 들을 수도 없으며, 그 무엇으로도 가닿을 수 없지만, 그러나 사실은 또한 아니 계신 곳이 없는[無所不在] 분이라고 말이다. 석가모니도 금강경(金剛經)에서 말한다. "만약에 모습[형상]으로 나를 보려하거나 음성(音聲)으로써 나를 구한다면 이 사람은 그릇된 길을 가는 것이라, 능히 여래(如來)를 보지 못하리라(若以色見我하고 以音聲求我면 是人行邪道라 不能見如來니라)." 우리는 '진리(眞理)'에 대해서도 그와 마찬가지의 이해와 표현을 하고 있다. 그리고 노자(老子)는 이 장(章)에서 '도(道)'가 바로 그러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사실 그 모두는 같은 것이며, 하나이다. 다만 그 이름(名)과 표현들이 서로 다를 뿐이다. 그런데 내가 여기에서 보다 더 강조하여 말하고 싶은 것은, 그와 같이 도(道) ― 하나님, 진리(眞理), 참나(眞我), 불법(佛法) ― 는 분명히 우리의 감각과 인식(認識)의 차원을 넘어서 있긴 하지만, 또한 명백히 그것을 떠나있지도 않다는 것이다. "도(道)는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데 속하지 않지만, 또한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것을 떠나 있지도 않다(道不屬見聞覺知, 亦不離見聞覺知)." 사실 道는 우리가 매일 매순간 경험하고 있는, 너무나 구체적인 것이다. 노자도 이 장(章)에서 정작 하고 싶어하는 얘기는 바로 이런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장(章)의 제목을 <구체적인, 너무나 구체적인>이라고 명명(命名)해 보았다. 그런데 이 장(章)의 어디를 보아도 <구체적인> 문장이나 표현은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어찌된 일일까?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으며, 잡아도 잡히지 않는……'이라고 노자가 도(道)를 말하기 시작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결코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으며 잡아도 잡히지 않는' 어떤 무엇을 따로이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道는 깊은 명상(冥想) 상태에서나 체험할 수 있는 무엇도 아니다. 道는 그렇게 특별한(?) 것도 아니요, 어떤 특정의 상태나 단계에서 열렸다 닫혔다 하는 것도 아니다. 그렇기는커녕 道는 너무나 평범한 것이다.
그렇다면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는……'이라는 것은 무슨 뜻일까? 그러한 '잡히지 않는' 표현이 어떻게 <구체적>일까?
도(道) ― 하나님, 진리(眞理), 참나(眞我), 불법(佛法) ― 는 대상화되어 있는 무엇이 아니다. 道는 '나'와 분리(分離)되어 '나' 바깥(外)에 있는 어떤 대상(對象)이 아니다. 만약 그것이 '나'와 분리된 어떤 대상이라면, 우리는 분명히 그것을 감각하거나 사고(思考) ― 혹은 마음[心] ― 로써 인식(認識)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道는 '대상(對象)'이 아니며, '나'와 분리되어 있지도 않기에 우리는 그것을 따로이 볼 수도, 들을 수도, 잡을 수도 없으며, 사고[마음]로써 찾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道는 그와 같이 감각과 인식의 '대상'이 아니라, '삶'의 영역이다.
나의 경우를 보자. 앞에서도 얘기했듯이, 나도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道[깨달음]를 구했으며, 진리를 찾았고, 그것을 얻어 마침내 자유하기를 간절히 바랐다. 나도 정말 道가 따로이 있는 줄 알았고, 참나(眞我)가 지금의 이 부족하고 못난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어딘가에 있을 줄 알았다. 그리고 그 거룩한(?) 자리에 닿으려면 수없이 많은 노력과 절제와 수행을 해야 하고, 또한 사그라들지 않는 의지를 언제나 불태워야만 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그 모두는 나의 무지(無知)요, 착각이었다. 건너가 닿아야 할 '저기[彼岸]'라는 게 아예 없었던 것이다.
어느 순간 문득 구(求)하는 마음 ― 중생(衆生)과 부처를 나누고, '여기[此岸]'와 '저기[彼岸]'를 나누었으며, 번뇌(煩惱)와 보리(菩提)를 나눈 바로 그 분별심(分別心) ― 이 사라지고 나니 모든 것은 다만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일 뿐이었다. 그러고 나니, 짜증이 곧 道도, 분노가 곧 진리였으며, 게으름이 곧 보리(菩提)였다! 탐진치(貪嗔痴)가 그대로 여여(如如)함이었으며, 미칠 것 같던 번뇌와 망상(妄想)이 그대로 부처였다! 아아, 우리네 삶, 우리네 일상(日常), 그리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나'의 안(內)과 밖(外) 그 어디, 그 어느 한 순간도 道 아님이 없었다!
그러니 道란 얼마나 <구체적>인가! 우리가 지금 현재 그렇게 살고 있지 않은가? 때로 짜증내고, 때로 분노하며, 때로 망상에 사로잡히기도 하고, 슬퍼하기도 하면서, 그렇게 오욕(五慾)과 칠정(七情) 속에서 울고 웃으며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그 모두가 다 道요, 어느 하나 진리 아님이 없으며, 이 모습 이대로가 부처인 것이다. 우리는 모두 이미 깨달아 있다! 그러니 道란 얼마나 <구체적>인가? 우리가 매일 매순간 경험하고 있는 이 모두가 다 道이니 말이다. 道란 얼마나 평범한가?
물론 이 말 속에는 오해의 소지가 있음을 안다.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의 '나'가 곧 길[道]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니, 그것을 단지 <머리>로만 듣고는, 자기 자신과 '삶'을 경홀히 여겨 함부로 살면서도 '이것이 다 道인데, 뭐!'라고 생각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렇게 아는 것>과 <그 자체가 되는 것>과의 차이라고나 할까. 나의 이 말을 <진실로> 알게 되면, 그땐 존재의 비약(飛躍)이 있게 된다. 자기 자신과 '삶'을 함부로 살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슴 벅찬 자유와 사랑과 행복이,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내면의 평화가, 진정한 겸손이 언제나 내 삶 속에 넘실대며 출렁이게 되는 것이다. 축복이어라―!
視之不見名曰夷, 聽之不聞名曰希, 搏之不得名曰微, 此三者不可致詰(보아도 보이지 않는 것을 이름하여 이(夷)라 하고, 들어도 들리지 않는 것을 이름하여 희(希)라 하며, 잡아도 잡히지 않는 것을 이름하여 미(微)라 하나니, 이 세 가지는 어떻게 자세히 캐물어 밝힐 수 없다)……노자의 이 말은 단지 道라는 것이 우리의 감각과 사고(思考)의 대상(對象)이 아니라는 것을 밝히고 있는 단순한 표현들일 뿐 아무것도 아니다.
故混而爲一(그러므로 뭉뚱그려 '하나'라고 하자)……이 '하나(一)'는 일반적으로 道를 가리킨다. 그런데 그 道의 나타난 모양은 <너무나 구체적>이어서, 지금 이 순간의 '나'의 감정과 느낌과 생각이 바로 그것이다. 지금 이 순간의 '나'의 감정과 느낌과 생각을 떠나 있는 道란 존재하지 않는다.
其上不교, 其下不昧(그 위는 밝지 않고, 그 아래는 어둡지 않으며)……이 또한 '밝다', '어둡다'라는 것 자체가 우리의 분별지(分別知)일 뿐 실재(實在)하는 것이 아님을 말하고 있다. 예를 들면, 우리는 보통 분노와 짜증, 미움, 게으름 등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이미지[昧]를 갖고 있어 그것에 저항하거나 극복하려고 한다. 반면 그에 반대되는 사랑과 덕스러움, 성실 등은 좋은 것[교]으로 여겨 그것을 추구한다. 그런데 사실은 우리가 극복하려 하는 분노나 짜증, 미움, 게으름 등은 '昧'가 아니다. 그것이 '昧'가 아닌 줄 알면, 추구해야 할 '교'도 없음을 동시에 알게 된다. '昧'니, '교'니 하는 것 자체가 실재(實在)가 아니라 우리의 분별심(分別心)이 만들어낸 허구(虛構)임을 노자는 밝히고 있는 것이다.
繩繩兮不可名(끊임없이 이어져 오는데, 어떤 이름(名)도 붙일 수가 없구나)……'끊임없이 이어져 온다(繩繩兮)'라는 이 문장을 읽을 때 사람들은 곧장 '태초(太初)'를 연상한다. 道란 태초부터 지금까지 끊이지 않고 이어져 오는 무엇이라는 것이다. 노우(No), 아니다! 이것은 그런 뜻이 아니다! '태초'라는 것은 관념이다. 道는 <시간>의 연장선상에 있지 않다. 道는 언제나 지금 이 순간 여기에 있다!
그럼, '繩繩兮'를 어떻게 읽어야 할까? 우리의 '오늘'의 삶을 생각해 보자. 아침에 눈을 떠서 밤에 잠들 때까지, 아니 꿈속에서조차 온갖 생각과 감정과 느낌들이 끊임없이 변화하며 이어져 온다. 그렇지 않은가? 그것이 바로 '繩繩兮'요, 그 하나 하나가 다 道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道 속에 살고 있다. 그리고 끊임없이 이어져 오는 그 하나 하나가 다 道라고 한다면, 道 아님이 없으니, 따로이 '道'라고 할 게 없지 않은가? 그러니 그냥 살면 되는 것이다.
'이름붙일 수 없다(不可名)'는 것은, 도덕경 1장에서도 밝혀 놓았듯이, 만물(萬物)은 본래로 이름(名)이 없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분노'다, '짜증'이다, '미움'이다 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그냥 붙여진 이름(名)일 뿐 사실은 그 모두가 자연스런 '생명에너지의 발현'일 뿐이다. 어린 아이가 때로 짜증내기도 하고 화내기도 하고 울기도 하지만, 누가 그것을 '짜증'이니 '분노'니 '슬픔'이니 라고 이름(名)하는가? 어린 아이는 그냥 그렇게 자신의 '생명에너지'를 <살고 있을 뿐>이다. "그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마태복음 11:25∼26)
復歸於無物(다시 아무것도 없는 無로 돌아가나니)……이것은 불가(佛家)의 '제행무상(諸行無常)'을 연상시킨다. 모든 것은 변한다는 것이다. 그 어떤 것도 실체(實體)로서 고정되어 있는 것은 없다. 우리의 '오늘'의 이 삶 속에서 경험하게 되는 그 어떤 감정과 느낌과 생각과 상태도 다 변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것을 그냥 가만히 내어버려 두라[Let it be!]. 나서서 간택(揀擇)하여 어떤 것을 취[取]하거나 버리지[捨] 말라. 조금만 기다리면 그것은 곧 사라져 없어지고, 다음 순간 다른 감정과 느낌과 생각이 내 안을 채운다. 이것이 '復歸於無物'이며, 또한 이를 일컬어 형상(形狀) 없는 형상이라 하고 모양 없는 모양이라 하며, 또한 이를 일컬어 '있는가 하면 없고 없는가 하면 그 순간 너무나도 분명히 있는 것[惚恍]'이라 한다(是謂無狀之狀, 無象之象, 是謂惚恍). 그렇듯 물 흐르듯이 다만 지금 이 순간을 살라.
迎之不見其首, 隨之不見其後(앞에서 맞이하여도 머리를 볼 수 없고, 뒤따라 가면서 보아도 그 뒷모습을 볼 수가 없구나)……이 또한 앞의 '其上不 , 其下不昧'와 같은 맥락으로 보면 된다. 주객미분(主客未分)으로 그냥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니, 따로이 봐야 할 게 무에 있는가?
執古之道, 以御今之有(옛 道를 잡고서 오늘의 있음[有]을 다스리나니)……사실은 '옛'도 없고, '(고정된) 지금'도 없으며, '미래'도 없다[過去心不可得, 現在心不可得, 未來心不可得]. 다만 <끊임없이 변화하는 지금, 여기에서의 삶>만이 있다. 따라서 오직 지금 이 순간에 있으라. 그것이 '執古之道'이며, 그 <현재를 삶>이 곧 '以御今之有'이다.
能知古始, 是謂道紀(능히 옛 비롯함을 앎, 이를 일컬어 도의 벼리[道紀]라 한다)……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삶, 존재의 그 새로운 눈뜸, 그것이 진정한 '能知古始'이며, 또한 그것이 바로 도의 벼리[道紀]①이다. 그 외에 다른 것이 없다.
① 그물의 위쪽 코를 꿰어 오므렸다 폈다 하는 줄. 벼릿줄. / 일이나 글의 가장 중심되는 줄거리. 핵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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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 쓴 김기태라는 분도 나와 같이 무척 많은 고련을 했는데 나하고는 약간 다른 깨달음
을 받은 듯 합니다. 사람들은 어찌 생각 할 지 몰라도 저러한 일은 본인이
싫다고 해서 안생기는 일이 아니며 그냥 찾아 오는 겁니다. 또 그사람의 개인적 환경에
따라 모두 다르게 역사 하십니다. 아뭏든 저 해석 중에서 내가 받은 해석과 다른 부분이
있다면 차삼자(此三者) 와 이희미(夷希微) 입니다.
세가지를 따라가라(此三者)
그 세가지는 이희미, 夷(동쪽활든자 이), 希(바랄 희), 微(숨길 미)
즉 동방의 민족을 바라보며 몰래 숨겨 놓고 사라진다.(노자는 한번도 설을
안하고 책만 남겨 놓고 서쪽 땅으로 사라졌슴) 노자는 현재 사찰 대웅전 위쪽에
산신각으로 위치한 자리에 있으며 태상노군이라 칭해짐.
아래는 도덕경에 관한 신문기사.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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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서재에서]파우스트와 노자의 차이
[경향신문 2004-03-12 16:57]
테의 ‘파우스트’ 앞부분에 나오는 파우스트의 탄식은 처연하다.
‘나는 철학과 법학, 의학에 신학까지 연구했다. 무엇이 가장 깊은 곳에서 세상을 다스리고 있는지 인식하고 그 근원을 관조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것만 알게 되었다.’
동양의 정신세계에는 서양의 과학적 사고와 다른 무엇이 있는 것 같다. 깊은 내면의 관조와 이에서 우러나는 직관과 통찰이다. 노자도 마찬가지다. 몇년전 도올 김용옥 교수가 EBS를 통해 강의했던 ‘노자와 21세기’는 우리 사회에 ‘노자신드롬’을 몰고왔다.
얼마후 무명의 주부 이경숙씨가 ‘노자를 웃긴 남자’를 펴내 화제가 됐다. 그는 도올의 강의를 ‘삼류 개그쇼’라고 신랄하게 공격했다. 이 책을 읽는 재미는 크다. 한문과 동양사상에 대한 실력, 나름대로의 분명한 논리 등 그 내공이 만만치 않았다.
도덕경의 첫 구절은 ‘도가도 비상도’(道可道 非常道). ‘도를 도라고 말하면 그것은 늘 그러한 도가 아니다’라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이다. 하지만 그는 ‘도를 도라고 해도 좋겠지만 그 이름이 꼭 도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고 시작부터 달리 해석했다. 도덕경 14장에 대한 그의 해석은 인상적이었다. ‘노자 당신은 어떻게 도라는 것을 알고 썰을 풀고 있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이 이 장이라는 것이다. 그는 노자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들리지 않는 것을 듣는’ 경지에서 ‘황홀’한 도를 체득했다고 강조했다.
노자의 도덕경에서 도는 궁극실재이다. 모든 존재의 근원이다. 천지의 시작이고 만물의 어머니이다. 신비스럽고 깊고 그윽한 도는 형체는 없지만 어디에나 편만한 우주의 근본원리이다.
비교 종교학자 오강남 교수(캐나다 리자이나대)는 ‘예수는 없다’는 도발적인 제목의 책으로 파장을 몰고온 바 있다. 그는 ‘도덕경’ 책도 펴냈다. 비교 종교학자로서 갈고 닦은 지적 성찰이 배어 있다. 그는 ‘도덕경이란 도(道)를 체득함으로써 자유를 구가하는 삶을 살 수 있는 능력(德)을 갖도록 가르쳐 주는 말씀(經)’이라고 정의했다. 그는 도덕경 21장을 통해 우주만물과 도의 관계를 설득력있게 설명한다. 도에는 우주의 물질적 바탕(物)과 근본형상(象)이 있고 또한 정(精)이 있다. 정은 정신과 의식의 작용을 있게 하는 무엇이 아닌가 싶다. 법정 스님이 말한 ‘텅빈 충만’이란 말이 떠오른다.
이같은 도는 불교의 공(空)과 흡사한 것 같다. 불교는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고 가르친다. 현상계인 색(色)과 공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진공에 오묘하고 신비로운 작용이 있으니 이를 진공묘유(眞空妙有)라고 말한다. 현대물리학도 진공을 단순한 없음이 아니라 ‘묘유’하는 공으로 파악하고 있는 것 같다. 진공에너지도 한 예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노자의 도나 불교의 공이나 현대물리학과 맥을 통한다는 사실은 무척 흥미롭다.
사람은 두발은 땅을 딛고 있지만 머리는 하늘을 향하고 있다. 파우스트 처럼 일상을 뛰어넘는 어떠한 근원적인 것과 깨달음에 목말라 한다. 한알의 씨앗은 껍질이 터져야 ‘대지속의 씨앗’으로 변환한다. 노자는 사람과 우주의 근원인 도와의 조화와 하나됨을 역설한다. 노자의 주장은 오늘도 울림을 주는 것 같다. ‘노자는 있다.’
〈이연재·논설위원〉
글 수 17,625
아래 글은 원래 블로그내 "도덕경 夷希微" 라는 카테고리에 있던 글이었으나
단순히 이희미에 대한 간단한 덧붙임을 해석하려 남의 글을 차용하여 쓴것으로
이번에(2006/12/05) 새로이 14장 전체해석을 하게 됨에 따라 원래 있던 글만 이곳(메모로그)으로 옮겨 옵니다.
아래 글과 블로그의 새로 쓴 해석을 비교 하면서 읽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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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9.08
블로그글 오온개공에 관한 글과 함께 다른이의 느낌을 구체적으로 적은 다큐멘터리
가 다시 있더군요. 그래서 그 기록만 퍼 오고 맨 밑에 제목글과 관련하여 몇마디
적습니다. 오늘 아침 오온개공에 관한글 첨언 중에 " 말타고 활을 쏘는 것을
너무 즐겨하지 말라" 와 본 글의 제목과 관련이 있습니다.
도덕경 - 14장 - 구체적인, 너무나 구체적인 | § 김 기 태 2006/01/21 11:48
http://blog.naver.com/heo4680/100021196777
14장 - 구체적인, 너무나 구체적인
視之不見, 名曰夷.
聽之不聞, 名曰希.
搏之不得, 名曰微.
此三者, 不可致詰,
故混而爲一.
其上不교, 其下不昧,
繩繩兮不可名,
復歸於無物.
是謂無狀之狀, 無象之象,
是謂惚恍.
迎之不見其首,
隨之不見其後.
執古之道, 以御今之有.
能知古始,
是謂道紀.
視―볼 시, 夷―평평할 이, 오랑캐 이, 聽―들을 청, 希―드물 희, 바랄 희, 搏―잡을 박, 칠 박, 微―작을 미, 정교할 미, 희미할 미, 詰―물을 힐, 다스릴 힐, 꾸짖을 힐, 混―섞을 혼, 교―밝을 교, 흴 교, 昧―어두울 매, 繩―이을 승, 노 승, 줄 승, 兮―어조사 혜, 於―어조사 어, 狀―형상 상, 문서 장, 象―꼴 상, 코끼리 상, 惚―황홀할 홀, 恍―황홀할 황, 迎―맞이할 영, 首―머리 수, 隨―따를 수, 執―잡을 집, 가질 집, 御―다스릴 어, 거느릴 어, 마부 어, 紀―벼리 기, 터 기, 실마리 기
보아도 보이지 않는 것을 이름하여 가로되 이(夷)라 하고,
들어도 들리지 않는 것을 이름하여 가로되 희(希)라 하며,
잡아도 잡히지 않는 것을 이름하여 가로되 미(微)라 하나니,
이 세 가지는 어떻게 자세히 캐물어 밝힐 수 없다.
그러므로 뭉뚱그려 '하나(一)'라고 하자.
그 '하나'의 위는 밝지 않고, 아래는 어둡지 않으며,
끊임없이 이어져 오는데, 어떤 이름(名)도 붙일 수가 없구나.
다시 아무것도 없는 무(無)로 돌아가나니,
이를 일컬어 형상 없는 형상이라 하고, 모양 없는 모양이라 하며,
또한 이를 일컬어 '있는가 하면 없고, 없는가 하면 너무나도 분명히 있는 것[惚恍]'이라 한다.
앞에서 맞이하여도 그 머리를 볼 수 없고,
뒤따라 가면서 보아도 그 뒷모습을 볼 수가 없구나.
옛 도(道)를 잡고서 오늘의 있음[有]을 다스리나니,
능히 옛 비롯함을 앎, 이를 일컬어 도의 벼리[道紀]라 한다.
< 뜻풀이 >
내 나이 서른 네 살 때의 일이다. 그때 나는 대구 영남일보에서 교열부(校閱部) 계약사원으로 근무하고 있었는데, 스무 살을 넘기면서 '나는 누구인가?'로부터 시작된 내면의 방황과 오랜 갈증은 이때가 절정이었다. 사실 그 문제 하나가 마음으로부터 해결되지 않으니, 나는 그야말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자식으로서도, 남편으로서도, 아버지로서도, 한 가정의 가장(家長)으로서도 그 역할을 충분히 그리고 충실히 다 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직장생활과 인간관계에서도 나는 언제나 입술이 타는 듯했다.
아직도 선명히 기억하는 것은, 그 즈음의 어느 날 밤 태어난 지 백일을 막 넘긴 내 아들이 유난히도 울던 때의 일이다. 밤늦도록 녀석을 품에 안고 어떻게든 달래어서 재워보려고 애를 쓰고 있었는데, 그 어느 한 순간 문득 내 안에서 이런 의문 하나가 떠오른 것이다.
'나는 이 아이의 아버지이다. 그런데, 아버지로서 이 아이에게 <이것이다!>라고 말해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
아무것도 없었다. 정말이지, 아무것도 없었다! 아아, 나는 내 아들에게 '삶'에 대하여, '인간의 길'에 대하여, 그리고 '참(眞理)'에 대하여 아무것도 해 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그것은 거의 공포에 가까운 각성(覺醒)을 내게 가져다 주었고, 늘 입술이 타듯 하던 내 마음에 기름을 끼얹는 격이 되고 말았다. 나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마침내 나는 50일 단식(斷食)을 결심하고, 또다시 사표를 썼다. 풀리지 않는 내 안의 의문들을 그냥 그대로 안은 채로는 더 이상 살아갈 수가 없었고, '삶'에 대하여 '나(眞我)'에 대하여 '인간의 길'에 대하여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더 이상은 견딜 수가 없었다. 아, 그 휑한 가슴이여, 목마름이여―!
그리하여 오랜 세월 집을 떠나올 때마다 메고 다녔던 배낭을 이번에도 메고 아픈 걸음 떼며 다시 집을 나서는데, 어머니는 연신 손을 내저으시며 그저 그저 굶지 말고 밥 제때 챙겨먹으며 몸조심하라 하시고, 이제 막 백일이 지난 아들녀석을 등에 업은 아내는 발을 동동,거리며 애틋하게 나를 말렸지만, 아아 그러나 나는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떠나온 곳은 상주에 있는 '극락원'이라는 자그마한 암자였다. 나는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단식에 들어갔고, 34년 동안의 그 오랜 생(生)의 방황을 이제는 끝장낼 양으로, 온 우주를 뒤로 물린 채 면벽(面壁)하고서는 가부좌(跏趺坐)를 틀었다. 그리하여 나는 마침내 진리(眞理)를 얻으리라―!
그러나……
그 당시 나는 주로 '관법(觀法)'이라는 수행법을 행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일상생활 속에서 살아가는 이 몸의 움직임 뿐만 아니라 내면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감정과 느낌과 생각들을 <판단>하지 않고 '단지 바라보기만 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그것은 마치 비디오를 찍듯이, 이 '몸'과 내면의 '생각'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고 지켜보고 관찰하면서, 자신이 지금 이 순간 무슨 생각을 하고 있으며 어떻게 행동하고 있는가를 그때 그때마다 알아차리는 것인데, 여러 해(年) 단지 그렇게 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나 자신에 관한 많은 새로운 발견과 이해와 체험을 할 수 있어서 참 좋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또한 닿을 듯 닿을 듯 하면서도 닿지 않는 안타까움과 갈증을 언제나 내게 주었고, 진척은 있으나 아무런 확증(確證)은 없는 그 애틋함을 나는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단 한 순간도 놓치지 않는 완전한 집중과 몰두가 내겐 필요했고, 그를 위하여 나는 이번엔 처자식마저 버려둔 채 이 깊은 산 속으로 들어왔으며, 그렇게 모든 것을 버리고 완전한 고독 속에서 내면의 떠오르는 '생각'과 '마음'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고 온전히 지켜보게만 된다면, 그토록 찾아 헤매던 '나'와 '삶'과 '인간의 길'에 관한 어떤 분명한 '답(答)'이나 '결론'같은 것이 확연히 내 앞에 나타나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면 나는 마침내 진리를 얻게 되고……!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면벽하고 가부좌를 틀고서, 내면에서 떠오르는 생각과 마음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고 지켜보려 하면 할수록 오히려 놓치지 않는 경우가 드문 것이 아닌가! 슬프게도 나는 언제나 망상(妄想)과 잡생각에 사로잡혀 그 속에서 허우적댈 뿐 어느 한 순간도 제대로 지켜보고 있지 못한 자신을 발견하곤 했다.
'아, 또 놓쳤구나……!'
그러면 나는 다시 타는 듯한 마음이 되어 집중에 집중을 더하려고 애썼고……그러나 어느 순간 문득 다시 보면, 엉뚱한 생각 속에서 이미 한참을 놓치고 있는 자신을 거듭 거듭 목격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아아, 나는 그야말로 망상덩어리였다!
그렇게 일주일 동안을 단식하며 애를 써보았건만 아무런 진척이 없자, 이번엔 음식을 먹으면서 해보기로 했다. 내게 그렇게 많은 망상과 잡생각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한꺼번에 몰려오는 것은 아무래도 단식으로 인해 기력이 쇠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급한 마음에 허겁지겁 밥을 해먹고는 이번엔 띵띵해진 배를 움켜쥐고는 다시 면벽하고 앉았다. 그랬더니, 이번엔 그 많던 망상에 하나가 더 붙어, 졸음이 쏟아지는 것이었다. 얼마나 얼마나 졸았던지! 그랬던 만큼 마음은 또 얼마나 절망감에 사로잡혔던지!
'아아, 이래도 안되는구나……!'
그렇게 일주일간을 또 지나던 그 어느 한 순간 갑자기 "꽈당!" 하는 벼락치는 듯한 소리에 화들짝 놀라 눈을 떠보니, 졸던 그대로 머리를 방바닥에 부딪고 나동그라져 있는 것이 아닌가? 아아, 그 순간 나는 일어나기가 싫었다. 그냥 그렇게 나동그라진 채로 얼마나 울었던지!
'나는 결국……안될 인간인가……?'
'……'
'아니, 다시 하자! 처음부터 다시 하자! 그 오랜 세월 나 자신으로부터의 자유를 향해 몸부림쳐 온 결과가 이 모양이라면, 그리고 깨달음에 거의 다 다다랐다고 생각하고 그 마지막 도약(跳躍)을 위해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달려온 나의 몰골이 이 지경이라면, 그래,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자……!'
그리곤 마음도 비우고, 호주머니에 남아있던 얼마간의 돈도 버렸으며, 회복식(回復食)을 위해 남겨두었던 한 줌 쌀도 버려버렸다. 또다시 이대로, 아무런 '결론' 없이 산을 내려갈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처음 이곳에 왔을 때와 같은 모습으로 다시 단식하면서 면벽하고 가부좌를 틀었다.
……
"그러나 보라! 일은 전혀 뜻밖으로 결론이 나고 말았다! 나는 이미 진리 안에 있었다. 아니, 나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모든 존재가 이미 진리 안에 있었고, 단 한 순간도 그것을 떠난 적이 없었다[森羅萬象 悉皆成佛]! 내가 그토록 애타게 찾아다닌 진리는 저만치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었고, 그것을 얻기 위해 그토록 피나는 노력과 수행(修行)이 필요한 것도 아니었다. 정말 너무나 어처구니없게도, 나는 이미 처음부터 진리 안에 있었고, 그랬기에 이렇듯 애쓰고 노력하여 진리를 얻으려던 그동안의 나의 일체의 시도는 이미 처음부터 불가능을 전제로 한 것이었으며, 그것은 진리 안에 있으면서 진리를 찾으려는 어리석음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었다! 아니,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그 무엇과도 비견될 수 없는 진리를 얻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버려야 하며, 심지어 목숨마저 내놓을 각오로 열심히 수행해야 한다고 믿고서 그렇게 달려왔고, 그러면서도 일체의 경계(境界)가 사라진 밝은 깨달음의 경지가 쉽게 나타나 주질 않아 자신의 수행력의 부족함 앞에 몇 번이나 절망하며 안타까워했었는데, 더구나 이번에는 정말 마지막이라 생각하고서 달려들었다가 두 번이나 단식에 실패한 참담한 마음이었는데, 아아 이렇듯 지치고 일그러진 이 모습 이대로가 이미 완전하다니! 이 모습 이대로가 이미 진리라니! 아니, 그러고 보니 이젠 이 말도 합당치가 않구나! '완전'이니 '진리'니 하는 이런 말도 성립되지가 않는구나! 여긴 그 어떤 이름(名)도 붙여질 수 없는 자리가 아닌가! 그냥, 있는 그대로일 뿐 아무것도 아니질 않는가! 아아, 이럴 수가! 언어이전(言語以前)의 세계는 무언가 큰 깨달음을 얻고 난 이후에 그 깨달음 속에서나 나타나는 무엇이 아니라 깨달음과는 무관한, 깨달음과 수행과 체험 이전의 지금 이대로가 아닌가! 그냥, 어쩔 수 없이, 이름하여 번뇌(煩惱)요 이름하여 보리(菩提)였지, 번뇌도 보리도 아닌, 중생(衆生)도 부처도 아닌, 그냥 있는 그대로가 아닌가! 아아,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였다! 새로이 깨달을 무엇도, 얻을 무엇도 없는―!"
이것은 <마침내 모든 방황에 종지부를 찍다!>라는 제목으로 지난 94년 10월에 쓴 나의 구도기(求道記)의 마지막 부분이다. 그렇게 나는 '나(眞我)'와 '삶'과 '인간의 길'과 '참(眞理)'에 대하여 ― 이 모두는 결국 같은 말이지만 ― 모든 것을 분명하게 알게 되었고, 그와 동시에 나의 그 오랜 갈증과 의문도 끝이 났으며, 비로소 내 영혼에는 쉼이, 내 삶 속에는 평화가 깃들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다. 그렇게 '밝아진 눈'으로 알게 된 진실(眞實)은 이랬다 ― 나는 단 한 순간도 놓치지 않는 완전한 '지켜봄[觀]' 속에서 깨달음이랄까, 도(道)랄까, 인생의 궁극의 답(答) 같은 것을 구했건만, 사실은 단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지켜보려 하는 바로 그 놈[관찰자]이 미망(迷妄)이요 허구(虛構)였으며, 바로 그 놈이 분별심(分別心)이었던 것이다. 어찌된 영문인진 모르지만, 어느 순간 내 안에서 그것[분별심]이 문득 사라져 버렸고, 그러고 나니 갑자기 나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토록 끊임없이 솟구쳐 나와 나를 지치게 하고 힘들게 하던 망상과 잡생각은 여전했으나, 그것이 '망상'이라고도, '잡생각'이라고도 여겨지지 않아 거기에 아무런 걸림이 없었고, 언제나 어느 때나 목격할 수밖에 없어 늘 입술이 타듯 하던, 나의 '부족함'과 '못남'과 '결핍'을 증거해 주던 내 안의 많은 것들도 그냥 그 모두가 다 나인 것을 왜 그동안 그것을 그토록 못견뎌 했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으며, 식욕(食慾)과 성욕(性慾)과 수면욕(睡眠慾)도 나의 '자기완성'을 가로막는 더럽고 추한, 극복해야 할 욕망이 아니라, 내 삶을 한층 즐겁고 재미있고 풍요롭게 하는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것들이었다. 나는 여전히 이전과 다름없는 그대로의 나요,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건만, 그런 나를 옳다느니 그르다느니 하고 <판단>하던 그 한 마음이 사라지고 나니, 그냥 있는 그대로의 '나'가 언제나처럼 여기 이렇게 그냥 존재할 뿐이었다.
그때 나는 모든 것을 분명하게 알게 되었다. 식욕, 성욕, 수면욕을 가졌고, 잡생각이든 망상이든 번뇌(煩惱)든 온갖 것들이 잠시도 가만히 있질 않고 언제나 죽 끓듯 하며, 기쁨이나 노여움, 슬픔, 근심, 불안, 두려움, 사랑, 미움, 욕심 등등의 온갖 감정들이 시시로 변화를 거듭하는 이 있는 그대로의 '나'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그런 '나'를 부족하고 못난 중생(衆生)이라느니, 그 '나' 안에 있는 식욕이나 성욕, 수면욕과 분노, 게으름, 미움 등등을 떨쳐버리거나 극복해야 할 번뇌라고 <판단>하거나 <규정>해 버리는 바로 그 놈, 그리하여 '나'를 있지도 않는 '완전'을 향해 끝없이 내모는 바로 그 놈 ― 이름하여 분별심(分別心) ― 이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따라서 그 '한 생각'이 내려지니, 도무지 구제할 길 없는 중생(衆生)이라 여겼던 이 모습 이대로가 부처요, 너무 많고 아뜩하여 어찌 할 바를 모르던 번뇌가 그대로 보리(菩提)였으며, 주체할 길 없이 솟구치던 분노와 슬픔이 그대로 여여(如如)함이었다. 그렇게 진실(眞實)을 알고 나니, 이젠 거기엔 중생이랄 것도 없고 부처랄 것도 없었으며, 번뇌랄 것도 보리랄 것도, '부족'이랄 것도 '완전'이랄 것도, 심지어 도(道)니 진리(眞理)니 여여(如如)함이니 깨달음이니랄 것도 없었다. 그냥 단지 모든 것은 있는 그대로일 뿐 아무것도 아니었다. 아아, 우리네 삶은 이토록 단순한 것을―!
문득 삼조(三祖) 승찬(僧璨) 스님이 쓴 <신심명(信心銘)>의 한 구절이 생각난다.
不用求眞 참[도(道), 진리(眞理), 깨달음]을 구하지 말고
唯須息見 다만 옳다느니 그르다느니 하는 견해만 쉬어라.
一心不生 한 마음[分別心]이 일어나지 않으면
萬法無咎 만법(萬法)이 허물 없느니라.
欲趣一乘 일승(一乘)으로 나아가고자 하거든
勿惡六塵 육진(六塵) ― 번뇌(煩惱) ― 을 미워하지 말라.
六塵不惡 육진을 미워하지 않으면
還同正覺 홀연히 정각(正覺)이라.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으며, 잡아도 잡히지 않는……'이라고 시작되는 이 장(章)은 마치 성경에서 '하나님'을 가리켜 묘사할 때 쓰이는 많은 표현들 가운데 하나를 연상시킨다. 하나님은 그 형상(形狀)을 볼 수도 없고, 그 음성을 들을 수도 없으며, 그 무엇으로도 가닿을 수 없지만, 그러나 사실은 또한 아니 계신 곳이 없는[無所不在] 분이라고 말이다. 석가모니도 금강경(金剛經)에서 말한다. "만약에 모습[형상]으로 나를 보려하거나 음성(音聲)으로써 나를 구한다면 이 사람은 그릇된 길을 가는 것이라, 능히 여래(如來)를 보지 못하리라(若以色見我하고 以音聲求我면 是人行邪道라 不能見如來니라)." 우리는 '진리(眞理)'에 대해서도 그와 마찬가지의 이해와 표현을 하고 있다. 그리고 노자(老子)는 이 장(章)에서 '도(道)'가 바로 그러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사실 그 모두는 같은 것이며, 하나이다. 다만 그 이름(名)과 표현들이 서로 다를 뿐이다. 그런데 내가 여기에서 보다 더 강조하여 말하고 싶은 것은, 그와 같이 도(道) ― 하나님, 진리(眞理), 참나(眞我), 불법(佛法) ― 는 분명히 우리의 감각과 인식(認識)의 차원을 넘어서 있긴 하지만, 또한 명백히 그것을 떠나있지도 않다는 것이다. "도(道)는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데 속하지 않지만, 또한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것을 떠나 있지도 않다(道不屬見聞覺知, 亦不離見聞覺知)." 사실 道는 우리가 매일 매순간 경험하고 있는, 너무나 구체적인 것이다. 노자도 이 장(章)에서 정작 하고 싶어하는 얘기는 바로 이런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장(章)의 제목을 <구체적인, 너무나 구체적인>이라고 명명(命名)해 보았다. 그런데 이 장(章)의 어디를 보아도 <구체적인> 문장이나 표현은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어찌된 일일까?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으며, 잡아도 잡히지 않는……'이라고 노자가 도(道)를 말하기 시작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결코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으며 잡아도 잡히지 않는' 어떤 무엇을 따로이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道는 깊은 명상(冥想) 상태에서나 체험할 수 있는 무엇도 아니다. 道는 그렇게 특별한(?) 것도 아니요, 어떤 특정의 상태나 단계에서 열렸다 닫혔다 하는 것도 아니다. 그렇기는커녕 道는 너무나 평범한 것이다.
그렇다면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는……'이라는 것은 무슨 뜻일까? 그러한 '잡히지 않는' 표현이 어떻게 <구체적>일까?
도(道) ― 하나님, 진리(眞理), 참나(眞我), 불법(佛法) ― 는 대상화되어 있는 무엇이 아니다. 道는 '나'와 분리(分離)되어 '나' 바깥(外)에 있는 어떤 대상(對象)이 아니다. 만약 그것이 '나'와 분리된 어떤 대상이라면, 우리는 분명히 그것을 감각하거나 사고(思考) ― 혹은 마음[心] ― 로써 인식(認識)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道는 '대상(對象)'이 아니며, '나'와 분리되어 있지도 않기에 우리는 그것을 따로이 볼 수도, 들을 수도, 잡을 수도 없으며, 사고[마음]로써 찾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道는 그와 같이 감각과 인식의 '대상'이 아니라, '삶'의 영역이다.
나의 경우를 보자. 앞에서도 얘기했듯이, 나도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道[깨달음]를 구했으며, 진리를 찾았고, 그것을 얻어 마침내 자유하기를 간절히 바랐다. 나도 정말 道가 따로이 있는 줄 알았고, 참나(眞我)가 지금의 이 부족하고 못난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어딘가에 있을 줄 알았다. 그리고 그 거룩한(?) 자리에 닿으려면 수없이 많은 노력과 절제와 수행을 해야 하고, 또한 사그라들지 않는 의지를 언제나 불태워야만 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그 모두는 나의 무지(無知)요, 착각이었다. 건너가 닿아야 할 '저기[彼岸]'라는 게 아예 없었던 것이다.
어느 순간 문득 구(求)하는 마음 ― 중생(衆生)과 부처를 나누고, '여기[此岸]'와 '저기[彼岸]'를 나누었으며, 번뇌(煩惱)와 보리(菩提)를 나눈 바로 그 분별심(分別心) ― 이 사라지고 나니 모든 것은 다만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일 뿐이었다. 그러고 나니, 짜증이 곧 道도, 분노가 곧 진리였으며, 게으름이 곧 보리(菩提)였다! 탐진치(貪嗔痴)가 그대로 여여(如如)함이었으며, 미칠 것 같던 번뇌와 망상(妄想)이 그대로 부처였다! 아아, 우리네 삶, 우리네 일상(日常), 그리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나'의 안(內)과 밖(外) 그 어디, 그 어느 한 순간도 道 아님이 없었다!
그러니 道란 얼마나 <구체적>인가! 우리가 지금 현재 그렇게 살고 있지 않은가? 때로 짜증내고, 때로 분노하며, 때로 망상에 사로잡히기도 하고, 슬퍼하기도 하면서, 그렇게 오욕(五慾)과 칠정(七情) 속에서 울고 웃으며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그 모두가 다 道요, 어느 하나 진리 아님이 없으며, 이 모습 이대로가 부처인 것이다. 우리는 모두 이미 깨달아 있다! 그러니 道란 얼마나 <구체적>인가? 우리가 매일 매순간 경험하고 있는 이 모두가 다 道이니 말이다. 道란 얼마나 평범한가?
물론 이 말 속에는 오해의 소지가 있음을 안다.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의 '나'가 곧 길[道]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니, 그것을 단지 <머리>로만 듣고는, 자기 자신과 '삶'을 경홀히 여겨 함부로 살면서도 '이것이 다 道인데, 뭐!'라고 생각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렇게 아는 것>과 <그 자체가 되는 것>과의 차이라고나 할까. 나의 이 말을 <진실로> 알게 되면, 그땐 존재의 비약(飛躍)이 있게 된다. 자기 자신과 '삶'을 함부로 살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슴 벅찬 자유와 사랑과 행복이,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내면의 평화가, 진정한 겸손이 언제나 내 삶 속에 넘실대며 출렁이게 되는 것이다. 축복이어라―!
視之不見名曰夷, 聽之不聞名曰希, 搏之不得名曰微, 此三者不可致詰(보아도 보이지 않는 것을 이름하여 이(夷)라 하고, 들어도 들리지 않는 것을 이름하여 희(希)라 하며, 잡아도 잡히지 않는 것을 이름하여 미(微)라 하나니, 이 세 가지는 어떻게 자세히 캐물어 밝힐 수 없다)……노자의 이 말은 단지 道라는 것이 우리의 감각과 사고(思考)의 대상(對象)이 아니라는 것을 밝히고 있는 단순한 표현들일 뿐 아무것도 아니다.
故混而爲一(그러므로 뭉뚱그려 '하나'라고 하자)……이 '하나(一)'는 일반적으로 道를 가리킨다. 그런데 그 道의 나타난 모양은 <너무나 구체적>이어서, 지금 이 순간의 '나'의 감정과 느낌과 생각이 바로 그것이다. 지금 이 순간의 '나'의 감정과 느낌과 생각을 떠나 있는 道란 존재하지 않는다.
其上不교, 其下不昧(그 위는 밝지 않고, 그 아래는 어둡지 않으며)……이 또한 '밝다', '어둡다'라는 것 자체가 우리의 분별지(分別知)일 뿐 실재(實在)하는 것이 아님을 말하고 있다. 예를 들면, 우리는 보통 분노와 짜증, 미움, 게으름 등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이미지[昧]를 갖고 있어 그것에 저항하거나 극복하려고 한다. 반면 그에 반대되는 사랑과 덕스러움, 성실 등은 좋은 것[교]으로 여겨 그것을 추구한다. 그런데 사실은 우리가 극복하려 하는 분노나 짜증, 미움, 게으름 등은 '昧'가 아니다. 그것이 '昧'가 아닌 줄 알면, 추구해야 할 '교'도 없음을 동시에 알게 된다. '昧'니, '교'니 하는 것 자체가 실재(實在)가 아니라 우리의 분별심(分別心)이 만들어낸 허구(虛構)임을 노자는 밝히고 있는 것이다.
繩繩兮不可名(끊임없이 이어져 오는데, 어떤 이름(名)도 붙일 수가 없구나)……'끊임없이 이어져 온다(繩繩兮)'라는 이 문장을 읽을 때 사람들은 곧장 '태초(太初)'를 연상한다. 道란 태초부터 지금까지 끊이지 않고 이어져 오는 무엇이라는 것이다. 노우(No), 아니다! 이것은 그런 뜻이 아니다! '태초'라는 것은 관념이다. 道는 <시간>의 연장선상에 있지 않다. 道는 언제나 지금 이 순간 여기에 있다!
그럼, '繩繩兮'를 어떻게 읽어야 할까? 우리의 '오늘'의 삶을 생각해 보자. 아침에 눈을 떠서 밤에 잠들 때까지, 아니 꿈속에서조차 온갖 생각과 감정과 느낌들이 끊임없이 변화하며 이어져 온다. 그렇지 않은가? 그것이 바로 '繩繩兮'요, 그 하나 하나가 다 道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道 속에 살고 있다. 그리고 끊임없이 이어져 오는 그 하나 하나가 다 道라고 한다면, 道 아님이 없으니, 따로이 '道'라고 할 게 없지 않은가? 그러니 그냥 살면 되는 것이다.
'이름붙일 수 없다(不可名)'는 것은, 도덕경 1장에서도 밝혀 놓았듯이, 만물(萬物)은 본래로 이름(名)이 없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분노'다, '짜증'이다, '미움'이다 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그냥 붙여진 이름(名)일 뿐 사실은 그 모두가 자연스런 '생명에너지의 발현'일 뿐이다. 어린 아이가 때로 짜증내기도 하고 화내기도 하고 울기도 하지만, 누가 그것을 '짜증'이니 '분노'니 '슬픔'이니 라고 이름(名)하는가? 어린 아이는 그냥 그렇게 자신의 '생명에너지'를 <살고 있을 뿐>이다. "그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마태복음 11:25∼26)
復歸於無物(다시 아무것도 없는 無로 돌아가나니)……이것은 불가(佛家)의 '제행무상(諸行無常)'을 연상시킨다. 모든 것은 변한다는 것이다. 그 어떤 것도 실체(實體)로서 고정되어 있는 것은 없다. 우리의 '오늘'의 이 삶 속에서 경험하게 되는 그 어떤 감정과 느낌과 생각과 상태도 다 변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것을 그냥 가만히 내어버려 두라[Let it be!]. 나서서 간택(揀擇)하여 어떤 것을 취[取]하거나 버리지[捨] 말라. 조금만 기다리면 그것은 곧 사라져 없어지고, 다음 순간 다른 감정과 느낌과 생각이 내 안을 채운다. 이것이 '復歸於無物'이며, 또한 이를 일컬어 형상(形狀) 없는 형상이라 하고 모양 없는 모양이라 하며, 또한 이를 일컬어 '있는가 하면 없고 없는가 하면 그 순간 너무나도 분명히 있는 것[惚恍]'이라 한다(是謂無狀之狀, 無象之象, 是謂惚恍). 그렇듯 물 흐르듯이 다만 지금 이 순간을 살라.
迎之不見其首, 隨之不見其後(앞에서 맞이하여도 머리를 볼 수 없고, 뒤따라 가면서 보아도 그 뒷모습을 볼 수가 없구나)……이 또한 앞의 '其上不 , 其下不昧'와 같은 맥락으로 보면 된다. 주객미분(主客未分)으로 그냥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니, 따로이 봐야 할 게 무에 있는가?
執古之道, 以御今之有(옛 道를 잡고서 오늘의 있음[有]을 다스리나니)……사실은 '옛'도 없고, '(고정된) 지금'도 없으며, '미래'도 없다[過去心不可得, 現在心不可得, 未來心不可得]. 다만 <끊임없이 변화하는 지금, 여기에서의 삶>만이 있다. 따라서 오직 지금 이 순간에 있으라. 그것이 '執古之道'이며, 그 <현재를 삶>이 곧 '以御今之有'이다.
能知古始, 是謂道紀(능히 옛 비롯함을 앎, 이를 일컬어 도의 벼리[道紀]라 한다)……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삶, 존재의 그 새로운 눈뜸, 그것이 진정한 '能知古始'이며, 또한 그것이 바로 도의 벼리[道紀]①이다. 그 외에 다른 것이 없다.
① 그물의 위쪽 코를 꿰어 오므렸다 폈다 하는 줄. 벼릿줄. / 일이나 글의 가장 중심되는 줄거리. 핵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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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 쓴 김기태라는 분도 나와 같이 무척 많은 고련을 했는데 나하고는 약간 다른 깨달음
을 받은 듯 합니다. 사람들은 어찌 생각 할 지 몰라도 저러한 일은 본인이
싫다고 해서 안생기는 일이 아니며 그냥 찾아 오는 겁니다. 또 그사람의 개인적 환경에
따라 모두 다르게 역사 하십니다. 아뭏든 저 해석 중에서 내가 받은 해석과 다른 부분이
있다면 차삼자(此三者) 와 이희미(夷希微) 입니다.
세가지를 따라가라(此三者)
그 세가지는 이희미, 夷(동쪽활든자 이), 希(바랄 희), 微(숨길 미)
즉 동방의 민족을 바라보며 몰래 숨겨 놓고 사라진다.(노자는 한번도 설을
안하고 책만 남겨 놓고 서쪽 땅으로 사라졌슴) 노자는 현재 사찰 대웅전 위쪽에
산신각으로 위치한 자리에 있으며 태상노군이라 칭해짐.
아래는 도덕경에 관한 신문기사.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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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서재에서]파우스트와 노자의 차이
[경향신문 2004-03-12 16:57]
테의 ‘파우스트’ 앞부분에 나오는 파우스트의 탄식은 처연하다.
‘나는 철학과 법학, 의학에 신학까지 연구했다. 무엇이 가장 깊은 곳에서 세상을 다스리고 있는지 인식하고 그 근원을 관조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것만 알게 되었다.’
동양의 정신세계에는 서양의 과학적 사고와 다른 무엇이 있는 것 같다. 깊은 내면의 관조와 이에서 우러나는 직관과 통찰이다. 노자도 마찬가지다. 몇년전 도올 김용옥 교수가 EBS를 통해 강의했던 ‘노자와 21세기’는 우리 사회에 ‘노자신드롬’을 몰고왔다.
얼마후 무명의 주부 이경숙씨가 ‘노자를 웃긴 남자’를 펴내 화제가 됐다. 그는 도올의 강의를 ‘삼류 개그쇼’라고 신랄하게 공격했다. 이 책을 읽는 재미는 크다. 한문과 동양사상에 대한 실력, 나름대로의 분명한 논리 등 그 내공이 만만치 않았다.
도덕경의 첫 구절은 ‘도가도 비상도’(道可道 非常道). ‘도를 도라고 말하면 그것은 늘 그러한 도가 아니다’라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이다. 하지만 그는 ‘도를 도라고 해도 좋겠지만 그 이름이 꼭 도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고 시작부터 달리 해석했다. 도덕경 14장에 대한 그의 해석은 인상적이었다. ‘노자 당신은 어떻게 도라는 것을 알고 썰을 풀고 있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이 이 장이라는 것이다. 그는 노자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들리지 않는 것을 듣는’ 경지에서 ‘황홀’한 도를 체득했다고 강조했다.
노자의 도덕경에서 도는 궁극실재이다. 모든 존재의 근원이다. 천지의 시작이고 만물의 어머니이다. 신비스럽고 깊고 그윽한 도는 형체는 없지만 어디에나 편만한 우주의 근본원리이다.
비교 종교학자 오강남 교수(캐나다 리자이나대)는 ‘예수는 없다’는 도발적인 제목의 책으로 파장을 몰고온 바 있다. 그는 ‘도덕경’ 책도 펴냈다. 비교 종교학자로서 갈고 닦은 지적 성찰이 배어 있다. 그는 ‘도덕경이란 도(道)를 체득함으로써 자유를 구가하는 삶을 살 수 있는 능력(德)을 갖도록 가르쳐 주는 말씀(經)’이라고 정의했다. 그는 도덕경 21장을 통해 우주만물과 도의 관계를 설득력있게 설명한다. 도에는 우주의 물질적 바탕(物)과 근본형상(象)이 있고 또한 정(精)이 있다. 정은 정신과 의식의 작용을 있게 하는 무엇이 아닌가 싶다. 법정 스님이 말한 ‘텅빈 충만’이란 말이 떠오른다.
이같은 도는 불교의 공(空)과 흡사한 것 같다. 불교는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고 가르친다. 현상계인 색(色)과 공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진공에 오묘하고 신비로운 작용이 있으니 이를 진공묘유(眞空妙有)라고 말한다. 현대물리학도 진공을 단순한 없음이 아니라 ‘묘유’하는 공으로 파악하고 있는 것 같다. 진공에너지도 한 예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노자의 도나 불교의 공이나 현대물리학과 맥을 통한다는 사실은 무척 흥미롭다.
사람은 두발은 땅을 딛고 있지만 머리는 하늘을 향하고 있다. 파우스트 처럼 일상을 뛰어넘는 어떠한 근원적인 것과 깨달음에 목말라 한다. 한알의 씨앗은 껍질이 터져야 ‘대지속의 씨앗’으로 변환한다. 노자는 사람과 우주의 근원인 도와의 조화와 하나됨을 역설한다. 노자의 주장은 오늘도 울림을 주는 것 같다. ‘노자는 있다.’
〈이연재·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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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단테1004:여기와서 이해할 수 없는게 고통과 번뇌를 가리지 않고 쓴단 말이야 고통과 번뇌는 많이 다르거든 아주많이...근데 그걸 충분히 알고 있을 사람들이 구별하지 않고 써? 물론 비불자를 위한 배려라고 생각하면 간단하지 하지만 그게 좀 서툴게 보이는 단초가 되는건 어쩔수 없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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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 내가 저렇게 행동하는 것에 대해서 너는 나를 이해할 수 없겠지. 그 답을 알려주마.
"도덕경 - 14장 - 구체적인, 너무나 구체적인 | § 김 기 태"
구체적인 것은 유위, 유전, 현실 등등의 의미도 있으리라 보고, 저 제목글 형식을 본딴 원래의 유명한 책이 있다. "니체 -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이 두꺼운 책을 내가 군대에서 전방에 있을 때 밤새도록 철책 근무 서고 들어 와서는 잠 안자고 눈에 불을 켜고 봤다.
세상에 모든 종교의 시험을 다 거치고 나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사람이 된다.
공부가 아직 덜된 애들이나 이것 저것 가리는 것이 많을 뿐 나는 걸림 없는 행동으로 항상 내 양심을 지킨다. 니도 사람이 되어 보면 알게 될거야. 봐라 내 자랑도 이렇게 떳떳하게 남들 의식하지 않고 하고 있다. 사람이 된다는 것은 자랑스러운 일이지.
니도 사람이 되어 보면 알게 될거야. 사람이 되거라.
2009/06/06 07:30: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