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페르니쿠스보다 100년 먼저 지동설을 주장한 조선(세종대왕 시기)의 과학자 이순지를 아시나요?
코페르니쿠스보다 100년 전에
지동설 주장한 조선의 과학자 이순지를 아시나요?
1983년 일본에서 발간한 <세계과학사기술사 사전>은 15세기 세계의 최첨단 과학기술 52가지를 열거하고, 그 가운데 29개가 조선에서 개발됐고, 중국에서 개발된 것이 5개, 일본은 하나도 없다고 기술했습니다.
조선에서 개발된 당시 세계의 최첨단 기술 스물아홉 개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은 세종임금 때의 과학자 이순지가 개발한 “한양을 기준으로 한 천체의 움직임을 관찰하고 그 운행이론을 정리한 칠정산 내편과 외편”입니다.
우리 세대는 초등학교 때부터 세계 최초로 지동설을 주장한 사람이 코페르니쿠스이고(1543년), 증명한 사람이 갈릴레오(1632)라고 배우며 자랐습니다.
그러나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주장한 1543년보다 100년이나 더 앞서서 지동설을 주장하고 증명한 과학자가 바로 이순지입니다.
이순지는 세종임금에게 공식적으로 발탁되기 이전, 1427년에 과거시험에 급제하여 승문원의 외교문서 담당자로 일하고 있하면서, 월식을 보고 월식이 진행될 때 보이는 그림자가 바로 지구의 그림자이고, 그 그림자가 둥글다는 것을 관찰하여 '지구는 둥글고 태양의 주위를 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자 다른 문신들이 '그렇다면, 월식이 언제 발생하는지를 증명해낸다면 그 말을 믿겠다'고 했고, 이순지는 월식이 몇 년 몇월 몇일 몇시 몇분에 발생해서 언제 끝나는지를 계산했고, 그의 계산과 같은 시각 월식이 발생하는 것을 보고 다른 문신들도 믿게 됐다고 합니다.
지동설을 주장하고 증명한 갈릴레오를 종교재판정에 세워, 그로 하여금 천동설을 인정하게 강압한 16세기 서구사회의 분위기에 비교하면, 15세기 조선사회가 훨씬 더 학문에 대한 분위기가 진취적이었음을 증명하는 일화가 아닐 수 없습니다.
세종 임금 재위 초만 해도 조선에는 자체의 책력이 없어서 동지상사라 하여 동짓달 중국에 온갖 진귀한 선물들을 바리바리 챙겨가서 책력을 얻어왔습니다.
세종 임금은 이 책력을 보고, 해 뜨는 시각과 해 지는 시각이 다른 중국의 책력이 우리나라와 맞을 수 없다고 여겨, 이순지에게 수학자와 과학자들을 모두 서운관에 모아 조선의 책력을 만들 것을 명했습니다. 이 때 세종 임금과 정승 판서도 아닌 스물아홉 살의 당하관이었던 이순지가 주고받은 대화를 들어보십시오.
세종임금으로부터 “우리 조선의 실정에 맞는 책력을 만들라!”는 명을 받은 이순지는 그 자리에서 “불가(不可)하다.“고 아룄습니다. 세종 임금은 의아하여 “무슨 까닭인고 ?“ 하고 물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서운관에는 인재들이 모이지 않습니다.“
“어찌하여?“
“서운관은 승차(진급)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럼, 다른 부서보다 승차가 빠르도록 명을 내리겠노라!“
“그래도 안 옵니다.“
“어찌하여?“
“서운관은 봉록이 너무 적습니다.“
“그럼, 봉록을 올려주면 되느냐?“
“그래도 안 옵니다.”
“또 왜?“
“서운관은 중인들이 일하던 곳이어서 학문을 한 사대부들이 안 옵니다”
“그럼 공조의 노비 장영실을 면천하고, 서운관에서 일하는 중인들과 함께 벼슬을 주어 양반신분을 만들어 주면 되겠느냐?”
“그래도, 서운관 관장의 위엄이 없으면, 연구 진척이 되지 않습니다.”
지엄한 왕명에 잇달아서 토를 다는 이순지에게 세종임금은 나즈막히 물었습니다.
“허면 서운관 관장이 누구여야 하는고?”
“강한 사람을 보내주되, 전하의 측근으로 보내주소서!”
“그게 누군데?”
“영의정 정인지를 보내주소서!”
이렇게 하여 당대 학자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던 영의정 정인지가 전례에 없는 세종임금의 파격인사로 졸지에 천민과 중인들이나 드나들던 하급기관인 서운관의 책임자가 됐습니다.
영의정 정인지의 막강한 후광을 받아 이순지는 마음 놓고 인재들을 모아 천문을 관측하고 이론을 정리하여 드디어 1444년에 조선의 책력(칠정력)을 만들어 냈습니다.
이순지가 칠정력을 설명한 <칠정산외편>에 보면,
이순지는 지구가 태양을 도는 데 걸리는 시간은 365일 5시간 48분 45초라고 계산해 놓았습니다. 오늘날 물리학적인 계산은 365일 5시간 48분 46초입니다. 1초 차이가 나게 1400년대에 계산을 해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세종 임금이 새파란 신진학자에 지나지 않는 이순지의 방자한 대답에 노여워하기는 커녕, 사실상 그의 요구를 다 들어주어, 우리나라 실정에 정확하게 들어맞는 책력을 만들고자 했던 강한 의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또한 그 의지와 노력으로 만들어진 칠정력을, 중국의 눈치를 보지 않고 <본국력>이라 이름하여 백성들에게 배포한 자주정신, 애민정신 또한 당시로서는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현대인들은 대부분 달력을 일정표 또는 시간표 정도로 가볍게 여기지만, 농업 생산이 경제 활동의 핵심이었던 옛날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천체의 규칙적인 운행 주기와 질서를 측정하고 계산하여 만드는 책력은 국가통치의 중요한 도구였습니다.
한 해 전인가 방영된 TV드라마 <선덕여왕>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한낱 왕실의 여사제(璽主)에 지나지 않았던 미실(고현정 역)이 신라왕조 세 임금대에 걸쳐서 권력의 중심에 있을 수 있었던 까닭이 바로 당나라 사신으로부터 전해 받은 책력을 독점하여, 나라의 안위를 내다보기 위한 점성술(占星術)로 활용했기 때문입니다. 전통 사회에서는 하늘에서 일어나는 일과 인간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 사이에 일종의 상응 관계, 즉 천인상응(天人相應) 관계가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천문은 곧 인문(人文)이기도 했습니다.
임금이 나라와 하늘의 질서를 보다 잘 파악하고 이해한다는 것은, 그 임금이 하늘이 맡긴 나라의 통치권을 튼튼하게 확보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세종 임금이 외형적인 군주의 위엄을 버리면서까지 천문기상학을 비롯한 자연과학 연구에 노심초사한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보아도 무리가 아닐 것입니다.
이순지가 세종 임금의 눈에 들게 된 계기는, “한양의 북극 고도를 계산하라!“는 임금의 명을 받자 즉석에서 “한반도의 가운데가 북위 38도”라는 것을 보고한 일입니다.
임금은 반신반의했지만, 중국에서 들여 온 역서(曆書)를 통해 이순지가 계산한 결과가 정확하다는 것을 알고 크게 기뻐하며, 1431년부터 이순지에게 천문 관측과 역법에 관한 일을 맡겼고, 1434년에는 새로운 동철(銅鐵) 활자인 갑인자(甲寅字) 주조 사업도 맡겼습니다.
1443년 세종은 승정원에 다음과 같이 지시했습니다.
“산학(算學=오늘날의 수학)은 비록 술수(術數)라 하겠지만 국가의 긴요한 사무이므로, 역대로 내려오면서 모두 폐하지 않았다. 정자(程子)와 주자(朱子)도 비록 이에 전력을 다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알았을 것이다. 토지를 측량할 때 만일 이순지와 김담(金淡) 등이 아니었다면 어찌 쉽게 측량할 수 있었겠는가. 지금 산학을 익히게 하려면 그 방책이 어디에 있는지 의논하여 아뢰라.”
이순지는 세종이 이러한 지시를 내리기 얼마 전에 하연, 정인지, 김담 등과 함께 경기 안산에서 토지를 측량하는 임무를 맡아 성공적으로 수행했습니다. 토지 측량은 농업 생산과 세금 징수를 위해 매우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이순지가 1436년 종5품 봉상판관(奉常判官)으로 간의대(簡儀臺- 조선시대의 천문대)에서 천문 관측 임무를 맡고 있다가 모친상을 치르기 위해 직에서 물러나고자 할 때 세종 임금은, “이순지를 대신할 사람을 천거하되 대신할 만한 사람이 없으면 나는 마땅히 그 사람을 기복(起復- 상을 당해 휴직 중인 관리를 복상 기간 중에도 직무를 보게 함)시킬 것이다. 나는 큰일에 관계되는 사람이 아니면 기복시키지 않으려 했는데, 지금 내가 간의(簡儀)에 뜻을 두는 것이 지극하니, 간의는 결코 작은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라고 이순지를 보내주지 않으려고 했다.
승정원은 집현전의 김담을 후임으로 천거했지만, 세종 임금은 이듬해 1437년에 이순지를 정4품 호군으로 승진시켜 기복시키고자 하면서, 특히 이순지의 아버지 이맹상에게도 ‘아들이 벼슬에 다시 나오도록 하라’는 왕명을 내렸습니다. 기복의 명을 받은 이순지는 그로부터 열흘 뒤 사직시켜줄 것을 바라는 뜻을 아뢰었지만 세종 임금은 이를 허락하지 않고 기어이 임금의 곁으로 불러올린 결과 15세기 세계 최첨단 과학기술 이론으로 공인되고 있는 <칠정산>이 탄생한 것입니다.
칠정산이란, 태양과 달의 운행, 일식과 월식 현상, 다섯 행성(수성, 금성, 지구, 화성, 목성)의 운행, 그리고 달과 다섯 행성이 서로 가리는 현상 등을 다루고 있습니다.
집현전 학자들이 주도한 ‘칠정산 내편’은 중국 천문역법과 산학 전통을 따르기 때문에
원주를 365.2575도, 1도를 100분, 1분을 100초 등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에 비해 조금 늦게 이순지가 주도하여 펴낸 ‘칠정산 외편’은, 아라비아 천문학 전통에 따라 각각 360도, 60분, 60초로 바꾸어 계산했습니다.
또한 평년의 한 해를 365일로 하고 128년에 31일의 윤일을 두었는데,
1태양년이 365일 5시간 48분 45초로, 오늘날의 수치와 비교했을 때 1초만 짧을 정도로 정확합니다. 1년의 기점을 중국이 동지에 둔 것과 달리 춘분에 두었으며, 일식과 월식 계산에서도 ‘외편’이 ‘내편’보다 정확합니다.
‘내편’을 통해 한양을 기준으로 한 정확한 천문 계산이 가능해졌으며 ‘외편’을 통해 발달된 아라비아 천문학의 성과를 우리 실정에 맞게 수용함으로써 조선의 천문학은 아라비아, 중국과 함께 당시 세계에서 가장 발달된 수준에 도달했습니다.
일본은 1643년 조선에서 보낸 통신사 박안기에게 배워 1682년에 이르러서야 일본에 맞는 정향력(貞享曆)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옛부터 중국은 “땅이 넓고 자원이 다양한 나라(地大物博)”라고 불리어왔지만, 등소평의 개방정책과 과학기술자 우대 정책에 힘입어 빠른 속도로 발전하여 이제는 모든 산업 분야에서 한국을 앞서거나 위협하고 있습니다.
그 원동력은 중국 정치지도자들이 과학기술자들에게 보여주고 있는 진심어린 존경의 자세와 정책 시행에 있습니다. 등소평 이후 중국 정치지도자들은 해마다 중국과학원의 엘리트 가운데 원로들을 “원사(元師:으뜸 스승)“로 추대하고, 이들이 종신토록 국가경비로 연구에 종사할 수 있는 특전을 줄 뿐만 아니라, 해마다 정초가 되면 국가지도자들이 이들을 예방하여 새해인사를 올리는 존경의 예를 보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올해 1월 18일에도 후진타오 중국수상은 이들 원사들을 차례로 예방하여 새해 인사를 올린 일이 뉴스로 보도되기도 했습니다.
여기에 비해 기술강국을 외치는 한국 정치지도자들이 보여주고 있는 과학기술자들에 대한 태도가 비교되지 않습니까? 중국이 진정 무서운 것은 정치지도자들의 이러한 자세입니다.
[참고] 코페르니쿠스
“지구는 우주의 중심점이라는 엄청난 특권을 포기해야 했다. 이제 인간은 엄청난 위기에 봉착했다. 낙원으로의 복귀, 종교적 믿음에 대한 확신, 거룩함, 죄 없는 세상, 이런 것들이 모두 일장춘몽으로 끝날 위기에 놓인 것이다. 새로운 우주관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사상 유례가 없는 사고의 자유과 감성의 위대함을 일깨워야 하는 일이다.” (지동설의 부각에 대한 괴테의 언급 중에서)
천문학자로서의 소양을 쌓은 크라쿠프 시절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는 1473년 폴란드 왕국의 프로이센 지방 토룬 시에서, 독일계 상인 아버지 슬하의 막내로 태어났다. 어머니도 부유한 상인 집안 출신이었다.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는 라틴어이며, 폴란드에서는 ‘미코와이 코페르니크’로 부른다. 코페르니쿠스는 폴란드어, 독일어, 라틴어에 능통했고 이탈리아어와 그리스어도 어려움 없이 구사했다.
현존하는 그의 문헌들 대부분은 당시 유럽의 학문 공용어인 라틴어로 쓴 것들이며, 독일어로 쓴 편지가 일부 있다. 그가 태어난 토룬이 독일어권이었기에 그의 모어(母語)가 독일어였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적어도 공식적으로 그는 ‘폴란드 출신의 천문학자’다. 코페르니쿠스가 10살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고, 고향에서 학교를 다닌 뒤 1491년 폴란드 남부 크라쿠프 대학에 입학하여 4년간 수학, 천문학, 고전학 등을 공부했다. 바르미아 주교였던 외삼촌의 도움 덕분이었다.
코페르니쿠스는 크라쿠프 대학 철학교수 알베르트 브루제브스키가 학교 바깥에서 개설한 천문학 강좌에 참여하고 다른 몇 명의 교수들에게도 천문학을 배웠다. 크라쿠프에서 그는 기하학, 대수학, 우주구조론, 천문 계산, 광학 등을 배우고 고대의 철학적 자연학을 익히면서 천문학자로서의 소양을 쌓았다. 또한 이 시기부터 그는 천문학 문헌을 수집하여 탐독하며 기존 천문이론들 사이의 모순점을 인식하게 되었다.
짧은 논문을 통해 지동설에 관한 구상 세워
코페르니쿠스가 4년간 공부한 크라쿠프대학
(오늘날 야기엘론스키 대학)에 있는 그의 동상
코페르니쿠스는 외삼촌의 도움으로 1496년 이탈리아로 가서 볼로냐 대학에서 신학, 법학, 고전학을 공부했지만 주된 관심은 천문학이었다. 파도바 대학, 페라라 대학 등에서도 공부한 그는 1500년 로마에 머무르며 수학과 천문학을 강의했다. 페라라 대학에서 교회법학 박사학위를 받고 의학도 공부한 뒤 귀국한 그는 1505년경부터 플라우엔부르크 성당에 자리를 잡았다. 그는 의학 지식을 바탕으로 병든 사람을 치료하고, 법학 지식으로 교구 행정에 참여했으며, 수학 지식으로 통화(通貨)와 경제 분야에서도 활동했다. 성당 참사회 입장에서 그는 매 우 쓸모가 많은 ‘준비된 인재’였다.
1513년 코페르니쿠스는 성당 참사회의 상회에서 800개의 돌과 석회를 구입했다. 천문 관측을 위한 지붕 없는 탑을 쌓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당시 천문 관측기술의 한계 탓에, 그의 관측이 새로운 천문이론을 세우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1514년에는 교황의 비서관으로부터 교회력 개정을 위한 회의 참석을 요청 받았지만 거절했고, 다만 달력 개정을 위해서는 태양과 달의 관계를 정확히 밝혀야 한다는 의견만 제출했다.
1510~1514년 사이 코페르니쿠스는 태양 중심 천문체계에 관한 개략적인 생각을 발전시켜 나갔다. 그리고 그것을 짧은 논문으로 작성했다. ‘천체 운동에 관해 구성한 가설에 대한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의 소론(小論)’, 줄여서 [소론]이라 일컫는 논문이다. 논문 제목은 코페르니쿠스 자신이 아니라 그것을 필사하여 유포시킨 이들이 붙인 것이다. 코페르니쿠스는 이 논문을 소수의 지인들에게만 배포했다(정식 인쇄본 출간은 1878년). 이 논문에서 그는 본격적인 수학적 설명을 시도하지는 않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 천문학 체계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지구가 움직이는 태양 중심 체계를 가설로 제시했다.
점진적 혁명, “지구는 태양 주위를 도는 별에 지나지 않는다.”
코페르니쿠스가 태양중심체계, 즉 지동설을 구상하게 된 것은 이탈리아 유학 시기 플라톤주의의 영향을 받아, 우주가 수학적 조화를 이루고 있다고 확신하게 된 것이 중요한 계기였다. 또한 고대 문헌을 조사하면서 이미 태양을 중심으로 하는 우주체계를 생각한 고대인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도 계기였다. 남은 문제는 새로운 우주체계에서 행성의 위치를 수학적으로 풀어나가는 것이었다. [소론]을 내놓은 이후 꾸준한 연구를 통해 코페르니쿠스는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De revolutionibus orbium coelestium)를 1532년경 거의 마무리 지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책에서 그는 먼저 우주와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얘기한다. 또한 지구는 스스로 돌면서 태양 주위를 1년에 한 번 도는 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만물의 중심에는 태양이 있다. 전체를 동시에 밝혀주는 휘황찬란한 신전이 자리 잡기에 그보다 더 좋은 자리가 또 어디 있단 말인가. 혹자는 그것을 빛이라 불렀고, 혹자는 영혼이라 불렀고, 또 어떤 이는 세상의 길잡이라 불렀으니 그 얼마나 적절한 표현인가. 태양은 왕좌에서 자기 주위를 선회하는 별들의 무리를 내려다본다.”
코페르니쿠스의 새로운 체계는 전통적인 교회의 입장과 다른 것이었지만, 적어도 당대에는 탄압받지 않았다. 오히려 교황청의 일부 인사들은 그의 이론을 옹호하기까지 했다. 물론 비판이 없지는 않았다. 예컨대 그와 동시대인인 종교개혁가 루터는 이렇게 말했다. “하늘이나 하늘의 덮개, 해와 달이 아니라 지구가 회전한다는 것을 입증하려고 발버둥치는 오만불손한 주장이 나왔다. 그 바보는 천문학 전체가 뒷걸음치는 걸 바라고 있다.” 코페르니쿠스의 새로운 체계가 우주에 대한 인간의 인식과 세계관을 바꾸어놓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필요했다. 요컨대 그것은 ‘점진적 혁명’이었다.
종교개혁이 많은 신자들로 하여금 교황청에 등 돌리게 만들었다면, 코페르니쿠스의 우주론은 신으로부터 등 돌리게 만들 수 있는 엄청난 파괴력을 지닌 것이었다.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1543)에 실린 태양중심체계 그림
그것은 지구와 그곳에 사는 인간의 우주적 의미를 보잘것없는 차원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었다. 인간은 정말로 신의 사랑을 독자치하는 존재인가? 무한한 우주를 창조한 신은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왜 굳이 지구로 보냈단 말인가? 코페르니쿠스의 체계는 서양 중세의 우주관, 인간관, 세계관의 뿌리를 뒤흔들기에 충분했다.
교황청 금서가 된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
2005년에 발굴된 코페르니쿠스의 유골을 바탕으로
재현한 그의 말년의 얼굴
과학사가 토머스 S. 쿤은 코페르니쿠스가 “최초의 근대 천문학자이면서 마지막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자였다”고 평가한다. 사실 코페르니쿠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 체계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고, 천문 계산에서도 프톨레마이오스의 체계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그는 모든 천체가 붙어 있는 투명한 수정구(水晶球)들이 있다고 확신했다. 그는 또한 행성의 불규칙한 운동을 여러 원들의 결합을 통해 설명하려 했다는 점에서 프톨레마이오스 체계를 따랐다. 그러나 코페르니쿠스는 행성들을 각각 따로 다루었던 프톨레마이오스와 달리, 태양을 중심으로 한 행성 체계를 설정함으로써 ‘행성들의 관계’를 부여했다.
1539년 5월 젊은 천문학자, 수학자 레티쿠스가 코페르니쿠스를 찾아왔다. 코페르니쿠스는 레티쿠스에게 자신의 노트를 보여주었다. 레티쿠스는 코페르니쿠스의 새로운 체계에 대한 확신을 굳게 지니게 되었다. 그는 코페르니쿠스의 체계에 관한 해설서를 집필해 1540년에 출간하고, 코페르니쿠스에게 노트를 책으로 출간하자고 강력히 권했다.
결국 1542년부터 레티쿠스는 뉘른베르크에서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 인쇄 작업을 감독했지만 루터파 신학자 안드레아 오시안더에게 감독 작업을 맡겨 이듬해 출간됐다. 오시안더는 교회와 마찰을 일으킬 것을 걱정하며 코페르니쿠스의 허락을 받지 않고 서문을 써넣었다. 그는 서문에서 코페르니쿠스의 체계가 ‘계산상의 편의를 위한 추상적인 가설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1543년 프라우엔부르크에서 세상을 떠난 코페르니쿠스는 그곳 성당에 묻힌 것으로 알려졌으나 2005년에 와서야 성당 지하에서 유골 일부가 발견됐다. 스웨덴 웁살라 대학 도서관에 있는 코페르니쿠스가 소장했던 책에서 찾은 머리카락과 유골의 DNA가 일치했다. 전설에 따르면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 첫 인쇄본을 그의 손에 쥐어주자, 뇌졸중으로 혼수상태에 빠져있던 그가 잠깐 깨어났다가 곧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코페르니쿠스는 생전에 천문학자로서 어느 정도 명성을 누렸지만, 그의 공적(公的) 생애는 어디까지나 교회 회계감사, 평의원, 교구장 등 충실한 교회 성직자였다.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는 1616년 교황청의 금서 목록에 올랐다가 19세기 초에 금서에서 풀려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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