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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명상중 진아(眞我)에 대해 자문하며...
진아(眞我)가 자아(自我 - 또는 가아(假我)) 이며, 자아(自我)가 진아(眞我) 이다.(동전의 양면)
하나(一)는 진아 이고, 둘(二)은 진아와 자아이며, 셋(三)은 진아와 자아와 삼라만상이다.
(얼핏 천부경의 천일일(天一一), 지일이(地一二), 인일삼(人一三)에 대입해서 이(二)와 삼(三)이 뒤바뀐듯 하나, 천부경은 진아(眞我)로부터 삼라만상이 생겨난 순서대로의 나열이고, 윗글은 숫자상의 의미를 뜻하는 것이나, 이역시 천부경에 대입하면 천일일(진아/자아),지일이(삼라만상),인일삼(사람),순이나 천일일이 진아 이자 자아이고 인일삼의 삼인 사람(人)은 영(靈-自我)이없는 육(肉)으로써의 사람이므로, 운삼사성(運三四成)(사람(三)의 육신을빌려 깃든 진아(四) - 즉 사람몸을 받는순간 자아가 되나 이때의 진아와 자아는 서로떨어져 있지않은 곧 하늘이자 사람(人卽天)이다.)의 이치이다.)
이것이 하나 안에 셋이 담긴 이치이며, 셋이 곧 하나인 이치이다.
세상의 모든 수는 셋(三)을 넘지 아니하며, 나머지 모든수는 하나(一) 둘(二) 셋(三)의 조합에서 만들어 진다.
하나(一)가 먼저이며, 숫자0 즉 무(無)는 그 다음이다.
1뒤에 0을 50개 붙이면 매우 큰 수가 되지만, 1을 빼버리면 無로 돌아가는 이치이다.
무(無)는 아무것도 없지만, 하나(一)는 모든것을 담고있으며, 시작과 끝이없다.
무(無 = 0)는 자아가 만들었다. 모든 상(狀)도 번뇌(煩惱)도 형(形) 무형(無形)도 자아가 만들었다.
삼라만상의 모든 상(狀)과 형(形)은 자아가 설계했고 그 재료는 진아 이다.
진아는 부동(不動)이나 자아는 유동(流動)이며, 하나이자 둘인 이것은 끈임없이 서로 바뀌어가며(찰라생(生) 찰라멸(滅) - (동전을 바닥에 세워놓고 손가락으로 팅겼을때를 상상하면 될듯...))변화와 진화를 향해 달려간다.
진아(眞我)는 항상 깨어있으나, 자아(自我)는 잠을 자는동안 조금길게 사라지기도(꿈과 꿈사이) 한다.
이때 자아(自我)는 스스로 조금길게 사라짐(滅)을 자각치 못한다.
진아(眞我)는 항상 존재하며, 자아(自我)가 사라지는(滅) 동안 둘(二 - 진아,자아)은 하나(一 - 진아)만 남고, 셋(三 - 삼라만상)은 존재치 않는다.
진아(眞我)는 항상 존재하며, 자아(自我)가 나타나면(生) 둘(二 - 진아,자아)이 셋(三 - 진아,자아,삼라만상)이되고, 그 순간 셋(三 - 삼라만상)은 존재한다.
둘(二)은 경계(經界)지음의 시작(始作)이다. 둘(二)은 셋(三)을 존재케한 무명(無明)이다.
무명(無明)은 하나(一)가 둘(二)이된 순간을 잊어버림을 의미하는 기억(記憶)의지움 이다.
깨달음은 잊혀진 기억(記憶)을 되찾는 순간이다. 단지 참나(眞我)가 기억을 잊고 있었다는걸 깨닫는 것이다.
최초 동전이 팅겨지기전 가만히 멈춰있던 동전인 참나는 오로지 멈춰있기만한 자신의 존재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스스로 무명(無明)이라는 손가락으로 자신을 팅겼다.
동전이 팅겨지고 힘차게 돌기 시작함과 동시에 참나는 자신이 존재하고 있음을 인식했으며, 이렇게 존재하는 자신이 무한히 사랑스러웠다.
끝없이 돌아가는 동전의 재미에 빠져버린 참나는 이윽고 돌아가는 동전이 나라는 착각속으로 빠져들었다.
즉 자아(自我 - 또는 가아(假我))가 되버린 것이다.
한동안은 돌아가는 나가 참나가 아닌 가아임을 알았으나, 단지 존재하는 자신을 너무나 사랑한 참나는 오랜세월을 돌다보니 결국 가만히 멈춰있었던 참나인 자신를 잊어버리고 가아를 나로 착각할만큼 완전히 돌아버렸다.
스스로가 만든 무명(無明)으로 인해 자아(自我)라는 경계(經界)를 지었으나, 자신을 너무나 사랑한 참나는 가아까지도 사랑하였다.
그것은 또한 스스로에 대한 무한한 자비 이기도 하다.
사랑은 자비이며 자비는 사랑이다. 이 두가지가 모든 번뇌(煩惱 )와 모든 감정(感情)들의 바탕이다.
모든 번뇌와 모든 감정은 무한한 사랑과 무한한 자비에서 나왔다.
이것이 바로 모든 번뇌와 괴로운 감정들이 사랑이나 자비가 다가가면 사라지는 이치이다.
나왔다.
이것이 바로 모든 번뇌와 괴로운 감정들이 사랑이나 자비가 다가가면 사라지는 이치이다.
참나를 찾는것은 자아가 진아였던 기억을 잊어버렸음을 깨닫는 것이다.
그것은 자아를 버리는것이 아니라 단지 기억을 되찾는 것이기에 현재의 자신이 없어지는것이 아니므는것이 아니다.
단지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아 깨달음을 얻고나서는 무한한 사랑과 무한한 자비로 염화시중의 미소를 입가에 머금은체 돌아가는 동전을 즐겁게 바라보는 것이다.
단지 지금 내가 해야 할것은 하루빨리 잊혀진 기억을 되찾는 방법을 강구하는 것이다.
그것이 고행이든 수행이든 아니면 참나 이면서 자아인척 하는 나에게 삼배하고 일심으로 기억을 돌리도 하는 방법이 통할지도......ㅡㅡ;
P.S: 이글은 제가 명상중에 스스로 진아에 대한 화두를 물어 알음알이로 안것들과 명상중에 문득문득 떠오르는 작은 깨침들을 서로 혼합하여 혼자 짜깁기한 내용을 정리하여 올린것입들과 명상중에 문득문득 떠오르는 작은 깨침들을 서로 혼합하여 혼자 짜깁기한 내용을 정리하여 올린것입니다.
이미 깨쳐 아신분들은 염화시중의 미소로 넘어가주시기 바라며, 그외의 의미(마
진아(眞我)가 자아(自我 - 또는 가아(假我)) 이며, 자아(自我)가 진아(眞我) 이다.(동전의 양면)
하나(一)는 진아 이고, 둘(二)은 진아와 자아이며, 셋(三)은 진아와 자아와 삼라만상이다.
(얼핏 천부경의 천일일(天一一), 지일이(地一二), 인일삼(人一三)에 대입해서 이(二)와 삼(三)이 뒤바뀐듯 하나, 천부경은 진아(眞我)로부터 삼라만상이 생겨난 순서대로의 나열이고, 윗글은 숫자상의 의미를 뜻하는 것이나, 이역시 천부경에 대입하면 천일일(진아/자아),지일이(삼라만상),인일삼(사람),순이나 천일일이 진아 이자 자아이고 인일삼의 삼인 사람(人)은 영(靈-自我)이없는 육(肉)으로써의 사람이므로, 운삼사성(運三四成)(사람(三)의 육신을빌려 깃든 진아(四) - 즉 사람몸을 받는순간 자아가 되나 이때의 진아와 자아는 서로떨어져 있지않은 곧 하늘이자 사람(人卽天)이다.)의 이치이다.)
이것이 하나 안에 셋이 담긴 이치이며, 셋이 곧 하나인 이치이다.
세상의 모든 수는 셋(三)을 넘지 아니하며, 나머지 모든수는 하나(一) 둘(二) 셋(三)의 조합에서 만들어 진다.
하나(一)가 먼저이며, 숫자0 즉 무(無)는 그 다음이다.
1뒤에 0을 50개 붙이면 매우 큰 수가 되지만, 1을 빼버리면 無로 돌아가는 이치이다.
무(無)는 아무것도 없지만, 하나(一)는 모든것을 담고있으며, 시작과 끝이없다.
무(無 = 0)는 자아가 만들었다. 모든 상(狀)도 번뇌(煩惱)도 형(形) 무형(無形)도 자아가 만들었다.
삼라만상의 모든 상(狀)과 형(形)은 자아가 설계했고 그 재료는 진아 이다.
진아는 부동(不動)이나 자아는 유동(流動)이며, 하나이자 둘인 이것은 끈임없이 서로 바뀌어가며(찰라생(生) 찰라멸(滅) - (동전을 바닥에 세워놓고 손가락으로 팅겼을때를 상상하면 될듯...))변화와 진화를 향해 달려간다.
진아(眞我)는 항상 깨어있으나, 자아(自我)는 잠을 자는동안 조금길게 사라지기도(꿈과 꿈사이) 한다.
이때 자아(自我)는 스스로 조금길게 사라짐(滅)을 자각치 못한다.
진아(眞我)는 항상 존재하며, 자아(自我)가 사라지는(滅) 동안 둘(二 - 진아,자아)은 하나(一 - 진아)만 남고, 셋(三 - 삼라만상)은 존재치 않는다.
진아(眞我)는 항상 존재하며, 자아(自我)가 나타나면(生) 둘(二 - 진아,자아)이 셋(三 - 진아,자아,삼라만상)이되고, 그 순간 셋(三 - 삼라만상)은 존재한다.
둘(二)은 경계(經界)지음의 시작(始作)이다. 둘(二)은 셋(三)을 존재케한 무명(無明)이다.
무명(無明)은 하나(一)가 둘(二)이된 순간을 잊어버림을 의미하는 기억(記憶)의지움 이다.
깨달음은 잊혀진 기억(記憶)을 되찾는 순간이다. 단지 참나(眞我)가 기억을 잊고 있었다는걸 깨닫는 것이다.
최초 동전이 팅겨지기전 가만히 멈춰있던 동전인 참나는 오로지 멈춰있기만한 자신의 존재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스스로 무명(無明)이라는 손가락으로 자신을 팅겼다.
동전이 팅겨지고 힘차게 돌기 시작함과 동시에 참나는 자신이 존재하고 있음을 인식했으며, 이렇게 존재하는 자신이 무한히 사랑스러웠다.
끝없이 돌아가는 동전의 재미에 빠져버린 참나는 이윽고 돌아가는 동전이 나라는 착각속으로 빠져들었다.
즉 자아(自我 - 또는 가아(假我))가 되버린 것이다.
한동안은 돌아가는 나가 참나가 아닌 가아임을 알았으나, 단지 존재하는 자신을 너무나 사랑한 참나는 오랜세월을 돌다보니 결국 가만히 멈춰있었던 참나인 자신를 잊어버리고 가아를 나로 착각할만큼 완전히 돌아버렸다.
스스로가 만든 무명(無明)으로 인해 자아(自我)라는 경계(經界)를 지었으나, 자신을 너무나 사랑한 참나는 가아까지도 사랑하였다.
그것은 또한 스스로에 대한 무한한 자비 이기도 하다.
사랑은 자비이며 자비는 사랑이다. 이 두가지가 모든 번뇌(煩惱 )와 모든 감정(感情)들의 바탕이다.
모든 번뇌와 모든 감정은 무한한 사랑과 무한한 자비에서 나왔다.
이것이 바로 모든 번뇌와 괴로운 감정들이 사랑이나 자비가 다가가면 사라지는 이치이다.
나왔다.
이것이 바로 모든 번뇌와 괴로운 감정들이 사랑이나 자비가 다가가면 사라지는 이치이다.
참나를 찾는것은 자아가 진아였던 기억을 잊어버렸음을 깨닫는 것이다.
그것은 자아를 버리는것이 아니라 단지 기억을 되찾는 것이기에 현재의 자신이 없어지는것이 아니므는것이 아니다.
단지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아 깨달음을 얻고나서는 무한한 사랑과 무한한 자비로 염화시중의 미소를 입가에 머금은체 돌아가는 동전을 즐겁게 바라보는 것이다.
단지 지금 내가 해야 할것은 하루빨리 잊혀진 기억을 되찾는 방법을 강구하는 것이다.
그것이 고행이든 수행이든 아니면 참나 이면서 자아인척 하는 나에게 삼배하고 일심으로 기억을 돌리도 하는 방법이 통할지도......ㅡㅡ;
P.S: 이글은 제가 명상중에 스스로 진아에 대한 화두를 물어 알음알이로 안것들과 명상중에 문득문득 떠오르는 작은 깨침들을 서로 혼합하여 혼자 짜깁기한 내용을 정리하여 올린것입들과 명상중에 문득문득 떠오르는 작은 깨침들을 서로 혼합하여 혼자 짜깁기한 내용을 정리하여 올린것입니다.
이미 깨쳐 아신분들은 염화시중의 미소로 넘어가주시기 바라며, 그외의 의미(마
김경호
- 2008.08.21
- 19:48:20
- (*.61.142.84)
공명:: <무(無)는 아무것도 없지만, 하나(一)는 모든것을 담고있으며,
시작과 끝이없다.무(無 = 0)는 자아가 만들었다. .. .
그것은 자아를 버리는것이 아니라 단지 기억을 되찾는 것이기에 현재의 자신이 없어지는것이 아니므로, 조금의 두려움도 걱정도 할 필요가 없는것이다.>
-------------------------------------------------------------------------
비전님께서 공명님 글에 반문한 내용 어느정도 맞습니다.
------현재의 자아는 사라지는 것이 아닌 기억해내는 것이다.-----------공명님이 위 내용과 비슷하게 맞습니다.
그리고 공명님이 언급한 내용중 자아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제관점에서는 둘달 맞습니다.
단지 느끼는 것 언어 단어에 따라 달라지기때문에 조심스럽게 다듬어야 혼동을 않합니다.
-無0은 자아가 만들었다 라는 개념에 이면에는 느낌을 단어로 옴기는되 실수 했을 것이라 봅니다.-------
0無무는 본래부터 영원히 있던 것 입니다.
-------------------------------------------------------------------------
꺼꾸로 자아가 maya를 창조하지요 진료는 神에 의해서 얻어집니다.
---------비전님 언급: "무(無)는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 아니랍니다."
맞습니다. 제관점과 아주 일치 합니다. 없는 것은 환상에 창조한 것이 없는 것입니다. 환상 마음까지 말이죠.
------------------------------------------------------------------------
환상계에 자아는 진아와 연결이 되어있습니다.
아주 근치한것은 기억을 해복하는 방식 입니다. 기억을 회복하면서 본래의 모습으로 드러나게 변화가 이루어집니다.
無0 무극에는 변하지 않는 진아가 있지만,
마야속의 에고 자아는 늘 변화와 개성이 달라집니다.
그런데도 Ego에고 자아가 '나는 누구인가? 내적으로 심적으로 강하게 의문 물을때 바로 그찬라한 순간부터 이어집니다.
망각한 기억을 회복하는 단계 입니다.
-------------------------------------
일반적으로 오컬트 의미에서 단어적으로 완벽하게 해석이 않됩니다.
단어와 감각세계와는 완전히 다릅니다.
시작과 끝이없다.무(無 = 0)는 자아가 만들었다. .. .
그것은 자아를 버리는것이 아니라 단지 기억을 되찾는 것이기에 현재의 자신이 없어지는것이 아니므로, 조금의 두려움도 걱정도 할 필요가 없는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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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전님께서 공명님 글에 반문한 내용 어느정도 맞습니다.
------현재의 자아는 사라지는 것이 아닌 기억해내는 것이다.-----------공명님이 위 내용과 비슷하게 맞습니다.
그리고 공명님이 언급한 내용중 자아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제관점에서는 둘달 맞습니다.
단지 느끼는 것 언어 단어에 따라 달라지기때문에 조심스럽게 다듬어야 혼동을 않합니다.
-無0은 자아가 만들었다 라는 개념에 이면에는 느낌을 단어로 옴기는되 실수 했을 것이라 봅니다.-------
0無무는 본래부터 영원히 있던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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꺼꾸로 자아가 maya를 창조하지요 진료는 神에 의해서 얻어집니다.
---------비전님 언급: "무(無)는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 아니랍니다."
맞습니다. 제관점과 아주 일치 합니다. 없는 것은 환상에 창조한 것이 없는 것입니다. 환상 마음까지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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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계에 자아는 진아와 연결이 되어있습니다.
아주 근치한것은 기억을 해복하는 방식 입니다. 기억을 회복하면서 본래의 모습으로 드러나게 변화가 이루어집니다.
無0 무극에는 변하지 않는 진아가 있지만,
마야속의 에고 자아는 늘 변화와 개성이 달라집니다.
그런데도 Ego에고 자아가 '나는 누구인가? 내적으로 심적으로 강하게 의문 물을때 바로 그찬라한 순간부터 이어집니다.
망각한 기억을 회복하는 단계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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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오컬트 의미에서 단어적으로 완벽하게 해석이 않됩니다.
단어와 감각세계와는 완전히 다릅니다.
공명
- 2008.08.22
- 02:30:57
- (*.46.92.48)
비전님 김경호님 반갑습니다.^^
진지하게 댓글 주셔서 감사합니다.
먼저 사람마다 자신이 생각하고 이해하는 부분이 다 다르므로 딱히 꼭집어 이것이 확실한 답이다라고 하기는 어려움이 있다는걸 우린 이해해야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깨달음이 필요한 것이겠지요.
그런면에서 두분이 말씀하신것들이 모두다 맞을수도있습니다.
하지만 제 견해에서 조금만 더 토를 단다면 無0 를 단지 아무것도 없는 개념으로 인식해야지 無안에 무엇인가 내포된것 이라는 의미를 부여하면 그것은 바로 有가 되어버리는 것을 의미하게 됩니다.
특히 비전님 말씀중에 깨달은 붓다들을 언급하셨는데 불교에서의 無개념은 空개념을 넘지 못합니다.
모든 깨달은 붓다들이 하나같이 언급하는 "모든것의 근원은 空이다" 입니다.
그리고 제가 언급한 그 하나(一)가 바로 그 空입니다.^^
또한 깨달은 붓다들은 깨달음에 도달하게되면 엄청난 환희와 희열을 느낀다고 했지 공포를 경험한다고 했다는 비전님의 말씀은 전혀 처음듣는 얘기로군요.
특히 "자아가 사라져서 자신들의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은 아직 준비가 안 된 존재들에게는 엄청난 죽음의 공포를 불러 일으킬 수 있습니다." - 이부분은 요즘 채널러들이 얘기하는 5차원 상승 어쩌구 하는 채널내용중 발췌하신것 같습니다만.
그리고 만약 깨달음이 자아를 상실하는 것이라면, 석가 부처가 깨달음을 얻고 맨처음 설법하러 자신의 제자들을 찾아 간것은 어떻게 설명할수 있을까요?
자아를 상실했다면 자신주위 친구, 가족, 제자 기타 자신이 자라온 환경들에 대한 기억을 잃어버리게 됨을 의미한다는 것인데 석가 부처나, 예수 그외 깨달은 성인들이 현생의 자신을 잃어버리고 자아를 상실했다는 얘기도 들어본적이 없군요.^^
그리고 空이 가장 근원이라면 모든것을 가진 없음이 인정이 되나, 無 즉 아무것도 있을수 없는 완전한 없음에서 과연 무엇이 만들어 질수있을지....
그리고 끝으로 김경호님 말씀처럼 진리를 글이나 말로 표현함으로써 활구가 아닌 사구가 되어버린다는 말씀은 100% 공감합니다.
진정한 의미의 전달은 말과 글이 아닌 감성으로써의 전달이겠지요^^
암튼 옳고 그르고를 떠나 참나를 찾아가는 진화의 여정에서 진리를 참구하시는 열정을 나투시는 두분께 항상 빛과 사랑이 함께하길 기원합니다^^
진지하게 댓글 주셔서 감사합니다.
먼저 사람마다 자신이 생각하고 이해하는 부분이 다 다르므로 딱히 꼭집어 이것이 확실한 답이다라고 하기는 어려움이 있다는걸 우린 이해해야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깨달음이 필요한 것이겠지요.
그런면에서 두분이 말씀하신것들이 모두다 맞을수도있습니다.
하지만 제 견해에서 조금만 더 토를 단다면 無0 를 단지 아무것도 없는 개념으로 인식해야지 無안에 무엇인가 내포된것 이라는 의미를 부여하면 그것은 바로 有가 되어버리는 것을 의미하게 됩니다.
특히 비전님 말씀중에 깨달은 붓다들을 언급하셨는데 불교에서의 無개념은 空개념을 넘지 못합니다.
모든 깨달은 붓다들이 하나같이 언급하는 "모든것의 근원은 空이다" 입니다.
그리고 제가 언급한 그 하나(一)가 바로 그 空입니다.^^
또한 깨달은 붓다들은 깨달음에 도달하게되면 엄청난 환희와 희열을 느낀다고 했지 공포를 경험한다고 했다는 비전님의 말씀은 전혀 처음듣는 얘기로군요.
특히 "자아가 사라져서 자신들의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은 아직 준비가 안 된 존재들에게는 엄청난 죽음의 공포를 불러 일으킬 수 있습니다." - 이부분은 요즘 채널러들이 얘기하는 5차원 상승 어쩌구 하는 채널내용중 발췌하신것 같습니다만.
그리고 만약 깨달음이 자아를 상실하는 것이라면, 석가 부처가 깨달음을 얻고 맨처음 설법하러 자신의 제자들을 찾아 간것은 어떻게 설명할수 있을까요?
자아를 상실했다면 자신주위 친구, 가족, 제자 기타 자신이 자라온 환경들에 대한 기억을 잃어버리게 됨을 의미한다는 것인데 석가 부처나, 예수 그외 깨달은 성인들이 현생의 자신을 잃어버리고 자아를 상실했다는 얘기도 들어본적이 없군요.^^
그리고 空이 가장 근원이라면 모든것을 가진 없음이 인정이 되나, 無 즉 아무것도 있을수 없는 완전한 없음에서 과연 무엇이 만들어 질수있을지....
그리고 끝으로 김경호님 말씀처럼 진리를 글이나 말로 표현함으로써 활구가 아닌 사구가 되어버린다는 말씀은 100% 공감합니다.
진정한 의미의 전달은 말과 글이 아닌 감성으로써의 전달이겠지요^^
암튼 옳고 그르고를 떠나 참나를 찾아가는 진화의 여정에서 진리를 참구하시는 열정을 나투시는 두분께 항상 빛과 사랑이 함께하길 기원합니다^^
이보이트
- 2008.08.22
- 05:19:29
- (*.53.179.29)
진아가 뭘까요?
진아라는 게 일러서..그러니까 말해서 표현될 수 있을까요?
아~~말해질 수도, 말해질 수 없기도 하겠지요.
나는 어떻게해도 진아를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저 진아 아님을 드러내거나 말할 수 있을 뿐입니다.
다만 한 가지,
구구한 묘사나 아주 멋들어지고 그럴듯한 설정...그런 모든 그림을 그려대는 마음을 넘어설 때
그 진아를 만나게 될 거라는 점은 말할 수 있습니다.^^
그나저나
진아라는 것에 왜 그렇게들 깊은 애착을 보이는 걸까요?
진아를 찾아 보는 게 삶에서 가장 가치있는 일이라고...
혹 어디선가 누군가로부터 전해받은 소식.정보...때문은 아닐까요?
나는 살아 있습니다.
살아 있기 때문에 시간과 공간의 경과를 실감합니다.
살아 가면서 나는 만납니다.
살아가면서 만나는 그것들을 나는 나의 안에서 느낍니다. 단 하나의 에외도 없이...
님들은 어디서, 도대체 어디서
살아가면서 만나는 그것들을 만나고 있습니까?
진아라는 게 일러서..그러니까 말해서 표현될 수 있을까요?
아~~말해질 수도, 말해질 수 없기도 하겠지요.
나는 어떻게해도 진아를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저 진아 아님을 드러내거나 말할 수 있을 뿐입니다.
다만 한 가지,
구구한 묘사나 아주 멋들어지고 그럴듯한 설정...그런 모든 그림을 그려대는 마음을 넘어설 때
그 진아를 만나게 될 거라는 점은 말할 수 있습니다.^^
그나저나
진아라는 것에 왜 그렇게들 깊은 애착을 보이는 걸까요?
진아를 찾아 보는 게 삶에서 가장 가치있는 일이라고...
혹 어디선가 누군가로부터 전해받은 소식.정보...때문은 아닐까요?
나는 살아 있습니다.
살아 있기 때문에 시간과 공간의 경과를 실감합니다.
살아 가면서 나는 만납니다.
살아가면서 만나는 그것들을 나는 나의 안에서 느낍니다. 단 하나의 에외도 없이...
님들은 어디서, 도대체 어디서
살아가면서 만나는 그것들을 만나고 있습니까?
비전
- 2008.08.25
- 00:59:08
- (*.53.15.33)
엄청난 환희와 희열은 에고가 완전히 사라졌을 때나 거의 사라졌을때 나타나는 현상으로 알고 있습니다.
오쇼 라즈니쉬나 무묘앙 에오 등도 깨달음이 발생하기 전까지는 자아가 사라질때 나타나는 죽음의 공포가 있었다고 합니다.
다른 깨달은 이들의 가르침 중에도 집중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런 언급이 약간씩 나오는 경우를 봤습니다.
그런 현상이 없이 깨달은 사람이 있는지는 저도 모르겠네요.
그리고 자아가 사라진다고 해서 의식이 사라지는게 아니라는 건 많은 깨달은 이들이 누누히 말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무나 공이라는 단어에 집착하지 마세요.
그건 그냥 단어일 뿐입니다.
오쇼나 무묘앙 에오 등의 가르침에 보면 무는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 아니며,그런것을 초월한 순수한 의식이라고 한 것 같습니다.
오쇼 라즈니쉬나 무묘앙 에오 등도 깨달음이 발생하기 전까지는 자아가 사라질때 나타나는 죽음의 공포가 있었다고 합니다.
다른 깨달은 이들의 가르침 중에도 집중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런 언급이 약간씩 나오는 경우를 봤습니다.
그런 현상이 없이 깨달은 사람이 있는지는 저도 모르겠네요.
그리고 자아가 사라진다고 해서 의식이 사라지는게 아니라는 건 많은 깨달은 이들이 누누히 말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무나 공이라는 단어에 집착하지 마세요.
그건 그냥 단어일 뿐입니다.
오쇼나 무묘앙 에오 등의 가르침에 보면 무는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 아니며,그런것을 초월한 순수한 의식이라고 한 것 같습니다.
님의 글 다른 내용들은 잘 모르겠고 님의 말 중 위부분에 대해서 제가 알고 있는 한에서 말씀드리자면,
무(無)는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 아니랍니다.
우리와 우주만물의 근원이 바로 무이며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모든것의 근원으로 존재하는 것이라합니다.(붓다들의 가르침에 의하면 존재 비존재라는 언어의 영역을 초월한 상태라 합니다)
하나가 모든것을 담은게 아니고 무(無)가 모든 것을 담고 있다고 해야 맞겠지요.
무는 자아가 만든게 아니고 자아의 근원이 무라고 말하는게 맞을 겁니다.
깨달음은 자아를 버리는것이며 현재의 자신이 사라지는 것이라고 모든 붓다들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자아를 진짜 자신으로 착각하고 살아온 대부분의 생물체들에게는 깨달음에 대한 준비가 되있지 않은 상태에서 자아가 사라지는 순간이 다가 온다면 엄청난 공포에 휩싸이게 될겁니다.
그것이 모든 존재들이 육체의 죽음을 맞고도 자신의 근원인 무(진아,불성,신성, ...)로 돌아가지 못하고 자아(에고)에 집착해서 다시 환생하는 이유일겁니다.
자아가 사라져서 자신들의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은 아직 준비가 안 된 존재들에게는 엄청난 죽음의 공포를 불러 일으킬 수 있습니다.
아마도 굳이 비유하자면 물에 빠져 질식해서 숨막혀 죽기 일보 직전의 그런 공포스런 상태가 아닐까요?(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