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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아무 것도 없는 것이었지만 또한 그게 모든 것이었습니다.
그 '아무 것도 아닌 것이자 모든 것인 것' 속에서 뭔가가 생겨났습니다.
그 '뭔가'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이자 모든 것인 것' 속에서 그것의 빛과 에너지를
받으며 행복했습니다.
'아무 것도 아닌 것이자 모든 것인 것(*이하 '아모'로 줄입니다)'의 빛과 에너지가
'뭔가'에게 기쁨과 행복이 된 것이었고, 그것은 곧 '아모'가 빛과 에너지를 써 '뭔가'를
통해 하나의 속성이자 본성을 발현한 것과 같았습니다.
'아모'가 스스로 드러내기 위해 매질 역할을 할 '뭔가'를 만들어낸 것인지,
'뭔가'가 한마디로 좋은 것 뿐인 '아모'의 빛과 에너지를 받기 위해 '스스로' 생겨난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뭔가'는 차츰 '아모'의 빛과 에너지를 받기만 하는 것이 '스스로' 부끄러워집니다.
그래서 자기도 '아모'처럼 '스스로' 빛과 에너지가 되고, '아모'처럼 그것을 나눠주는 역할을
소망하게 됩니다.
드디어 '뭔가'는 더 이상 '아모'의 빛과 에너지를 받기를 거부하기로 '결정'합니다.
꽝!
그 순간 일대 변혁이 일어납니다.
과학자들은 그 순간을 '빅 뱅'이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빅 뱅'으로 생겨난 새로운 세계,
'뭔가'는 스스로 '아모'가 되기 위한 소망을 품고 빅뱅의 세계 곳곳으로 갈갈이 찢어집니다.
그것을 과학자들은 '팽창'이라고 이름 붙였고, '뭔가'의 팽창은 현재진행형입니다.
헤아릴 수 없는 '뭔가'의 파편들이 끊임없이 '빅 뱅의 세계'를 '팽창'시키면서 개개의 '뭔가'들이 됩니다.
'아모'처럼 되기 위한 '소망'을 가장 밑바닥에 간직한 채...
지구에 사는 개개의 '뭔가'들은 그 '소망'을 태어나면서 깜빡합니다.
그 소망을 놓쳐 버리고 다른 욕망에 몸부림치다가,
죽으면서 깜빡 되살립니다.
다시 태어나면서 또 깜빡 까먹습니다. 죽으면서 또 깜빡 기억해냅니다. 그리고 태어나면서
또 다시 깜빡...
다행히 삶의 도중에 기억해낸다고 해봤자 별 수 없습니다.
'뭔가'는 빛이 되길 소망합니다.
받는 것은 더 이상 원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빛이 되길 소망합니다.
'아모'는 결코 그 길을 알려주지 않습니다.
'뭔가'가 '스스로' '결정'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뭔가'는 받아본 적 밖에 없으므로 '스스로' 하고 되는 것엔 '무지'합니다.
'아모'는 여전히 '뭔가'에게 속속들이 깃들어 빛과 에너지를 비춰주고 있습니다.
가지 못하는 곳이 없고 이르지 못하는 곳이 없는 '아모'에게 '빅 뱅의 세계' 따위가
장애가 될 수가 없습니다.
'아모'는 여전히 '아모'입니다.
그러나 더 이상 받기만 하지 않기로 '결정'한 '뭔가'는 이미 처음의 '뭔가'가 아닙니다.
'뭔가'와 '아모' 사이엔 시공간을 초월한 거리와 벽과 장애가 생겨났고,
그것을 만든 것은 '뭔가' 입니다.
바뀐 것은 '아모'가 아니라 '뭔가'이기 때문입니다.
'뭔가'가 '스스로' 해낸 것은 그 거리와 벽과 장애를 만들어낸 것 뿐입니다.
그리고 '스스로' 만든 그것들에 갇혀서 방황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만들어 낸 그것들을 치우고 '아모'를 만나는 길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뭔가'는 이제 바보에 쪼다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엉뚱한 곳만 쳐다보면서 방황하고 탄식하며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그 엉뚱한 곳에 길이 있다고 스스로를 착각시켜 만족하고 기뻐하며
더욱 본격적이고 구체적인 바보에 쪼다가 되기도 합니다.
어떤 '뭔가'들은 스스로 만들어낸 그 장애와 벽에 악이니 어둠이니 사탄이니 하는
이름들을 붙여 책임을 실체도
아무 것도 없는 것이었지만 또한 그게 모든 것이었습니다.
그 '아무 것도 아닌 것이자 모든 것인 것' 속에서 뭔가가 생겨났습니다.
그 '뭔가'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이자 모든 것인 것' 속에서 그것의 빛과 에너지를
받으며 행복했습니다.
'아무 것도 아닌 것이자 모든 것인 것(*이하 '아모'로 줄입니다)'의 빛과 에너지가
'뭔가'에게 기쁨과 행복이 된 것이었고, 그것은 곧 '아모'가 빛과 에너지를 써 '뭔가'를
통해 하나의 속성이자 본성을 발현한 것과 같았습니다.
'아모'가 스스로 드러내기 위해 매질 역할을 할 '뭔가'를 만들어낸 것인지,
'뭔가'가 한마디로 좋은 것 뿐인 '아모'의 빛과 에너지를 받기 위해 '스스로' 생겨난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뭔가'는 차츰 '아모'의 빛과 에너지를 받기만 하는 것이 '스스로' 부끄러워집니다.
그래서 자기도 '아모'처럼 '스스로' 빛과 에너지가 되고, '아모'처럼 그것을 나눠주는 역할을
소망하게 됩니다.
드디어 '뭔가'는 더 이상 '아모'의 빛과 에너지를 받기를 거부하기로 '결정'합니다.
꽝!
그 순간 일대 변혁이 일어납니다.
과학자들은 그 순간을 '빅 뱅'이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빅 뱅'으로 생겨난 새로운 세계,
'뭔가'는 스스로 '아모'가 되기 위한 소망을 품고 빅뱅의 세계 곳곳으로 갈갈이 찢어집니다.
그것을 과학자들은 '팽창'이라고 이름 붙였고, '뭔가'의 팽창은 현재진행형입니다.
헤아릴 수 없는 '뭔가'의 파편들이 끊임없이 '빅 뱅의 세계'를 '팽창'시키면서 개개의 '뭔가'들이 됩니다.
'아모'처럼 되기 위한 '소망'을 가장 밑바닥에 간직한 채...
지구에 사는 개개의 '뭔가'들은 그 '소망'을 태어나면서 깜빡합니다.
그 소망을 놓쳐 버리고 다른 욕망에 몸부림치다가,
죽으면서 깜빡 되살립니다.
다시 태어나면서 또 깜빡 까먹습니다. 죽으면서 또 깜빡 기억해냅니다. 그리고 태어나면서
또 다시 깜빡...
다행히 삶의 도중에 기억해낸다고 해봤자 별 수 없습니다.
'뭔가'는 빛이 되길 소망합니다.
받는 것은 더 이상 원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빛이 되길 소망합니다.
'아모'는 결코 그 길을 알려주지 않습니다.
'뭔가'가 '스스로' '결정'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뭔가'는 받아본 적 밖에 없으므로 '스스로' 하고 되는 것엔 '무지'합니다.
'아모'는 여전히 '뭔가'에게 속속들이 깃들어 빛과 에너지를 비춰주고 있습니다.
가지 못하는 곳이 없고 이르지 못하는 곳이 없는 '아모'에게 '빅 뱅의 세계' 따위가
장애가 될 수가 없습니다.
'아모'는 여전히 '아모'입니다.
그러나 더 이상 받기만 하지 않기로 '결정'한 '뭔가'는 이미 처음의 '뭔가'가 아닙니다.
'뭔가'와 '아모' 사이엔 시공간을 초월한 거리와 벽과 장애가 생겨났고,
그것을 만든 것은 '뭔가' 입니다.
바뀐 것은 '아모'가 아니라 '뭔가'이기 때문입니다.
'뭔가'가 '스스로' 해낸 것은 그 거리와 벽과 장애를 만들어낸 것 뿐입니다.
그리고 '스스로' 만든 그것들에 갇혀서 방황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만들어 낸 그것들을 치우고 '아모'를 만나는 길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뭔가'는 이제 바보에 쪼다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엉뚱한 곳만 쳐다보면서 방황하고 탄식하며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그 엉뚱한 곳에 길이 있다고 스스로를 착각시켜 만족하고 기뻐하며
더욱 본격적이고 구체적인 바보에 쪼다가 되기도 합니다.
어떤 '뭔가'들은 스스로 만들어낸 그 장애와 벽에 악이니 어둠이니 사탄이니 하는
이름들을 붙여 책임을 실체도
김경호
- 2008.07.27
- 01:17:28
- (*.61.133.57)
이문제에서 닉네임 '도사'님이 언급한 답변은 글과는 다르게 좀 더 도사님이 순수성을 드러내기 때문에 순수성의 바탕으로 보게 되어 그것을 요약해낸 것이라 봅니다. 보편적인 읽기 쉬운 문장에서는 우리가 알아보기도 합니다만, 좀 처럼 어려운 말을 할때는 우리가 우리 바탕으로 해석하는 면도 있습니다. 언어는 완벽하지 못하기에 글쓴이의 의도와 해석자와의 생각이 다른 것 입니다. 또 한 내가 말하는 순수하다는 단어 자체도 때에 따라 다르게 찰란한 순간 순간마다 에너지가 다르기 때문에 때에 따라 달라집니다.
저는 동문서답했습니다.
저는 동문서답했습니다.
분열에서 통합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예전엔... 거피,설탕,프림이 각각 따로 있었지만..
지금은 통합된 커피믹스를 보더라도 우주가 통합시기임을
우리는 알수 있지요..
성경에... 하늘에서 이루어지는 것과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