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에 비해 리더의 교주화는 명상 자체가 가지고 있는 위험성의 한 요소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위에서 거론한 대부분의 단체에 해당되는 사항이기도 한다. 겉으로 볼 때는 심신의 건강을 위주로 하는 건전한 단체를 표방하고 표면적으로는 전혀 리더를 교주화 하지 않지만 속으로 들어가 보면 리더를 절대적인 스승으로 추앙하여 종교조직의 냄새를 풍기는 단체도 있다. 어떤 단체에서는 수련의 과정 중에 그 단체의 리더를 석가나 예수보다 더 위대하며 인류가 낳은 최고의 스승으로 인정해야 그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고 하는 경우도 있다. 리더가 빛의 주님과 삼세제불을 대신해서 제자들의 붓다됨을 인가해주는 붓다필드의 경우 제자들의 스승에 대한 신뢰는 절대적이다.
리더를 최고의 영적 스승으로 추앙하는 것 자체는 개인적인 취향의 문제이므로 명상의 위험성과 직접적으로 상관관계는 없는 듯이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로 인해 불합리한 인간관계가 형성되고 그것이 결국 여러 가지 폐단을 낳게 된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사이비 종교단체에서 종종 볼 수 있는 금전적 피해나 성폭력 피해 같은 것도 리더에 대한 절대적 신봉이 바로 그 전제가 된다. 그러므로 명상단체에서의 스승에 대한 필요이상의 추앙이나 숭배는 명상을 불건전한 방향으로 이끌 수 있는 소지가 많다.
또 하나 신비적 세계관이나 미래의 재앙에 대한 예언 또한 여러 단체의 공통점 중의 하나이다. 수선재의 리더인 문화영은 『오 메시아 노』라는 저서를 통해 자신이 깊은 명상상태에서 예수와 대화를 나누었다는 주장을 하기도 하였고 또한 명상상태에서 황진이와의 대화를 통해 황진이가 선도 수련을 하였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붓다필드의 리더인 신종현 역시『신비의 문』이라는 저서를 통해 UFO, 아틀란티스대륙과 무대륙 등이 실재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태양계의 11번째 행성인 니비루 행성에는 1500미터의 거인들이 살고 있다는 주장을 하기도 하고 예수의 전생이 중국의 노자였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하였다. 단월드의 리더인 이승헌은 공개적으로 신비적 예언이나 세계관을 펼친 적은 없지만 내부멤버들 사이에서는 미래에 대한 예언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도화재, 천도선법 등의 리더 또한 신비적 세계관이나 예언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하였다고 한다.
김경호--->1500미터의 거인?너무 추상적으로 거짓말을 했다고 봄
깨달은 스승 예수가 전생에 노자였다?
현재로써는 예수는 지구의 삶이 그리스도로 온것이 최초이며 마지막이며 재림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에 예수가 지구의 삶을 전생에 살았다면 노자가 깨달지 못한 자라면 그럴수도 있겠지만, 질문한 제자들에게 예수는 전생에 누구누구라고 말하지도 않을뿐더러 그러한 항당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으며,
또 한 일단 깨달음 해탈을 한자는 다시 온다는 것은 인간개념과는 아주 동떨어져있고 다시 재림하지는 않고 무수히 새대를 걷쳐 깨달은 스승들이 온다.
인간적인 시각에서는 깨달은 스승은 신이고 부처이고 그리스도이지만, 깨달음 일세해탈을 한 존재에게는 그러한 관념이 없고 인간에게 방편적으로 설명해주는 것 밖에 없다. 또 한 깨달은 스승은 본인이 신이고 본인이 신의 화신이라는 동시적인 입장에 서있다.
개인적 중용적으로 살펴본다면 인간이던 깨달은 스승이던, 깨달은 스승은 삼천대천세계가 수도 없지만, 깨달은 스승은 자체가 '진아'이면서 화신이라는 동시적인 뜻을 담고 있으며 동시에 제자나 수행자들은 그들 진정한 신이자 부처이자 깨달은 스승이자 신의 화신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어떻게 보면 부처다 신의 화신이다 이런 개념은 존재 하지 않을 수도 있다. 모든 세계에 부처들이 동시에 다른 시간때에 다른 차원때에 신의 화신들이 나타나서 모든 중생들을 살피기때문이다.<
신비적 세계관이나 미래의 재앙에 대한 예언 또한 명상의 위험성과 직접적인 상관관계는 없는 듯이 보일지도 모른다. 오히려 때로는 사람들의 호기심을 끌기도 하고 명상 리더의 권위를 높이는 수단으로 쓰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부분이 보통 사람들에게는 사이비 단체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의 하나로 여겨진다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허황된 예언이나 신비적 세계관에 심취하거나 때로 그것을 실제적 사실로 받아들이는 경우 현실감각이 무디어지고 집단구성원을 제외한 일반사람과의 소통이 점차 힘들어지고 심한 경우 건전한 삶을 부정하여 여러 가지 심각한 물질적 정신적 피해를 발생시키기도 한다.
김경호--->위의 줄은 일반적인 대중들의 도취되는 것을 살펴본다면 두가지로 분류해야 한다.
ⓐ 수많은 생을 걷쳐 현생에 태생적으로 그러한 영적인 길을 가고자한 습성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에게는 어느정도 지혜와 어느정도 그와 같은 세계를 인지할정도 이며 현실이 태어날때부터 인식해온 지구의 음양 선악 현실자체 부적절하다는 것을 인지판단하고 모든 것이 다른 인간들과는 판이하게 판단하고 이세계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지한다. 때로는 삶이 부정적으로 느껴지고 회의적으로 느껴질리가 있지만, 일단 깨달음과 진리 탐구와 관련한 수행에 접어들게 되면 그것이 자동적으로 중심을 잡고 부정적인 모든 외부의 것들을 긍정적인 삶을 통해 수행으로 진전을 보아 높히 영적으로 이끌어진다.
ⓑ 일반적 대중 수행과 명상 영적인 신성한 깊히와는 관련이 미세하여 깨달음과 정신세계에 대한 자각이나 인연따위가 흐려서 초기 이런곳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 이도저도 혼란스럽게 되어 심리적 부작용적인 삶이 싫어지고 부당하고 현실이 도피되고 싶어하고 현실이 잘못되었다고 느끼게 된다.
그러나 현실이 잘 못 되었다는 두가지 중 하나는 현실을 재대로 볼때 부정과 긍정 선악 음양을 이재 어느정도 인지하게 되므로써 자신 스스로가 판별하게 되는 경우이고, 그것을 부정적으로 자신 마음을 몰아세우느냐 현실을 받아드리고 긍정적 마인드로 개척을 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또 두번째는 영적인 탐구나 진리와는 거리가 먼 다른 여러 병패적인 신비주의나 사이비에 초능력에 도취되어 잘 못 인식하여 현실에 삶에 막대한 지장을 초해하는 쪽도 있다. 예를 들어 체널링에도 긍정성과 부정성 여러 측면이 있지만, 그러한 것을 찾다가 개인의 성향에 따라 긍정성으로 바뀌거나 부정적으로 바뀌거나 하는 것이며 이것이 영적 성장과는 거리가 멀다. 개인이 어떻게 세계를 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극단적인 예이지만 몇 년 전 기독교단체 가운데서 휴거를 실제적인 사실이라고 주장하고 구체적인 날짜까지 예언한 다미선교회라는 단체가 있었는데 열렬한 신도들 가운데서는 직장도 그만두고 집도 팔고 심지어 대입 수능시험을 앞둔 자녀의 수능시험도 그만두게 하고 매일 교회에 모여서 열심히 기도하다가 예언 당일 아무 일이 없자 정신적 공황에 빠져 정신병원에 간 사람도 많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허황된 예언이나 신비적 세계관을 주장하는 단체에는 이러한 위험성의 소지가 항상 있다.
김경호--->외국에 헤분게이트 천국의문 사건 CIA 심리조종 실험 일환인 '피플스 템플' Peoples Temple '집단 자살 사건 또는 '찰슨맨슨'사교집단으로 인해 광신적으로 폐악이 발생하기도 한다. 종교 또한 하나의 심리조종과 국가가 안정을 취하기 위해 심리컨트롤과 비슷한 것도 있다.
잘못된 명상 수련을 하다가 심신에 부작용이 일어나는 경우는 명상의 위험성이 직접적으로 드러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명상을 하게 되면 우선적으로 심신을 이완시키고 집중력을 향상시켜주는 효과를 볼 수 있다. 그리고 감각을 일깨워 민감성을 높여주고 자신에 대한 성찰능력을 키워준다. 그러나 때로는 몸과 마음에 여러 가지 부작용이 나타나기도 한다. 호흡이 답답하고 머리가 무거워지는 경우도 있고, 몸의 특정부위에 원인 모를 통증을 느끼거나 몸 전체가 무기력해지는 경우도 있고, 감정이 지나치게 예민해져서 극도로 좋은 상태와 극도로 나쁜 상태가 반복되는 경우도 있고, 심한 경우 환청이나 환시 등의 현상이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김경호--->두가지
ⓐ 3차원적 정신병적 환시 환청에 시달리는 경우.
ⓑ '주화입마'걸려드는 경우인데 여기서 주화입마에도 여러 설이 있고 복잡한 요소짜여있어 어느 것이 주화입마에 든다던가 아니다던가 정밀한 깨달은 스승에게 질문 하는 것이 필요하고 일명 투시를 통해 본 사실이 다 주화입마에 빠지는 증상이 아니고 때에따라 그것이 신성한 목적에 기반하여 자신이 체험해야 할 필요성이 있는 것에 중점이 되고 지혜안을 개발하고 더 높은 등급의 차원과 불보살세계 불국토 부처의 세계 빛 음을 초월하여 그것을 필히 개발해야 하는목적도 있다.
일반적으로 투시를 한다고 했을때 수많은 것을 볼수도 있고 거의 불가능한 것이 없다. 그러나 그 투시를 하나의 초능력으로 삿된 마음가짐으로 부정적인 의도로 그것을 쓸때는 나중에 상태는 치명적이게 된다는 것이다. 수행자들은 이런 영적 탐구와 지혜가 필요하고 또 한 의식의 진보에 따라 지혜가 발달되어진다.
지나치게 영리를 추구하는 단체에서 이러한 부작용이 많이 나타나는 경향이 많은데 그 이유는 단기간에 빠른 효과를 보기 위해 자극적인 명상법을 동원하기 때문이다. 주로 특이한 호흡법이나 주문, 자극적인 상상이나 무리한 집중법 등을 사용하는 단체에서 이러한 부작용이 많이 나타난다. 물론 이러한 방법을 사용한다고 해서 모든 사람에게 그러한 부작용이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심신이 허약하거나 어떤 육체적 정신적 질병이 있는 경우에 이러한 부작용이 나타날 확률이 높다. 그리고 수련하는 당사자의 자세와도 많은 관련이 있다. 빠른 시간에 어떤 경지를 체험하고픈 욕심에 무리하게 수련을 해서 피해를 자초하는 경우도 많다. 이 때문에 대부분의 명상단체에서는 이러한 피해에 대해 명상법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수련자 개인의 문제로 돌리는 경우가 많다.
김경호--->모든 것에 완벽한 깨달은 스승이 지도하지 않기때문에 그러한 일이 벌어지고 부작용은 늘 벌어지는 것이다.
또 한 깨달은 스승이 없더라도 이런 단체들이 방편적으로 행하는 모든 수련과 수행에서 정밀한 고대의 지식과 지혜 깨달은 스승들의 전해저오는 비전을 통해 정밀하게 탐구하여 행해야 하며 한치의 오차도 없어야 하며 부적절한 몸과 마음과 의식의 정화가 없이 극단적으로 시도할때 부작용이 발생한다.
명상전에 나이에 따라 수년에 따라 육식을 하므로써 또는 명상전에 부정적인 경험이나 의도가 있을때 명상시 부작용이 발생한다.
깨달은 스승들의 말에는 신구를 청결히 하라하고 육신과 마음과 의식을 청결히 하라일렀다.
이런 피해가 나타나는 경우 물론 당사자에게도 일정부분의 책임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엄밀히 말하면 그러한 특이한 수련법을 지도하고 분위기상으로 열심히 수련할 것을 강조하는 수련원에도 책임이 있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제약회사에 약을 개발할 때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는 가능성을 무시하고 개발을 강행하는 것과 같다. 일반적인 경우 제약회사에서 약을 개발할 때는 부작용의 가능성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최대한 노력해야 하고 부작용이 일어날 가능성에 대해서 미리 경고를 하는 것이 법적 의무로 되어 있다. 그런데 명상계는 그렇지가 않다. 명상의 효과에 대해서 과장광고만 할 뿐, 부작용의 가능성에 대해서 일체 언급하지 않는다. 이것은 분명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마지막으로 수련으로 인한 가정불화의 문제를 다루도록 하자. 이 문제는 매우 포괄적인데, 심신의 부작용이 문제가 되어 주변의 가족에게 정신적 경제적 부담을 주어 가정불화가 생기는 경우도 있고, 수련에 과도한 비용을 지출하여 가정불화가 발생하는 경우도 있고, 수련에 지나치게 심취하여 현실감각이 저하되어 가정을 제대로 돌보지 않아 가정불화가 일어나는 경우도 있다. 앞의 두 경우는 이미 거론하였던 위험성과 중복이 되므로 여기서는 마지막 항목을 중점적으로 다루고자 한다.
김경호--->이 모든 것이 개인이 인류를 위해서 출가승이 된다면 할수 없겠지만, 대부분 수행을 할때 부모와 처 자식 가족을 버려서는 않되고 이모든 균형성을 맞추어야 하는데 현실적으로 어렵고 가족관 생각이나 의도 자체가 확연하게 다르기때문에 불화가 장애로 발생한다. 또 한 이러 한 것들이 무지한 사람들에게는 저급한 무당치급을 받는 것이 일수 이다.
사실 명상에 심취하여 가정에 불화가 생기는 문제는 위에서 거론한 명상단체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명상 전체의 패러다임에 해당하는 문제이다. 원래 명상은 종교적 수도를 위한 것이었고 오랫동안 깊은 산중의 암자나 높은 담으로 격리된 수도원에서 수련되어지던 것이었다. 그래서 명상의 전반적인 시스템이나 지향점은 속세를 초월한 종교적 깨달음에 맞추어져있다. 물론 간혹 현실과의 조화를 강조하기도 하지만 대체로 초월 세계에 초점이 맞추어져있다. 힌두교의 사마디 내지는 우주의식, 불교의 니르바나, 유대교나 기독교나 이슬람 등의 명상에서 추구하는 유일신과의 합일 내지는 유일신의 현전의 체험 등 거의 모든 명상법에서 최고의 목표로 삼는 것은 현실 너머의 세계이다.
명상이 도시의 일반인들에게 공개되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는다. 도시의 일반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주로 육체적인 건강과 미용 다이어트, 스트레스 감소와 마음의 평화 정도이다. 그래서 이러한 목적 아래 명상테크닉의 일부, 특히 초입 단계의 테크닉을 활용하는 편이다. 비록 현대인의 구미에 맞게끔 명상을 약간씩 개량하였다고는 하지만 그 기본적인 틀은 별로 변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초입 단계의 테크닉을 통해 명상에 맛을 느끼고 점차 명상에 깊게 들어갈수록 명상이 원래 추구하던 초월적 영성의 성향이 강하게 나타나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초월적 영역의 각성에 지나치게 많은 에너지를 쏟는 경우 아무래도 현실감각이 점차 저하되는 경향이 있다. 우리 마음의 에너지는 유한하기 때문이다. 물론 처음부터 출가자의 신분으로 수행을 하거나 종교적 울타리의 보호를 받는 경우에는 그것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고 오히려 장려를 받을 수 있지만 일반인, 특히 가정을 지니고 있는 사람에서는 가정불화의 원인이 되기가 쉽다. 앞에서 명상은 원래 종교의 알맹이였기 때문에 명상을 효율적으로 잘 활용하면 종교를 성숙시키는 힘이 있음을 이야기하였다. 그러나 관점을 달리해서 보면 명상 속의 담겨져 있는 종교적 성스러움이 일반 사람들에게는 상당한 부담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
김경호--->명상을 통해서도 어느정도 자신의 몸과 마음과 의식이 높은 세계와 비교 절절히 맞추어져 마치 피라밋 계단 처럼 올라 상승을 통해 氣에너지 공명 맞추어져야 한다고 본다. 자신의 정화정도가 낮은데 지나치게 높은 에너지를 받을때는 과부화가 걸릴 수 있다는 영적비전에 자주 언급되어있는 듯 하다. 모든 것이 그자신이 소화해낼 수 있는 상태로 전진해야 한다.
이상으로 시중의 명상단체에서 나타나는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중심으로 명상이 지니고 있는 위험성에 대해서 간략하게 언급해 보았다. 이중 어떤 것들은 명상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고 어떤 것들은 간접적으로 관련이 있다. 어떤 것들은 일부 명상단체에만 해당되고 어떤 것은 전체 명상계의 문제점이다. 물론 사안에 따라 그 위험성이 심각하게 드러나는 것도 있지만 대체적으로 보았을 때 그 위험성이 뚜렷하지 않다고 볼 수도 있다. 그리고 피해자 수나 피해상황도 사회적으로 이슈가 될 정도의 심각성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 당장은 비록 그 위험성이 뚜렷하지 않고 피해상황도 심각하지 않지만 점차 명상이 대중화될 때는 상당한 문제를 발생시킬 소지가 많다. 더 중요한 것은 명상이 문명전환과 사회변혁의 동력이 되기 위해서는 보다 적극적인 차원에서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김경호--->단전호흡을 통해 잘못된 가르침과 개인이 잘 못으로 氣혈이 막히거나 반병신이 되거나 호흡을 참아 3일 정도 참을 수 있다는 사람이 몸에 독소가 펴저 모든 치료로부터 회생할 수 없이 사망하게 되는 사례들이며 본래 단전호흡에는 일정한 호흡의 균형에 있는 것을 잘못된 무지로 인해 아까운 생을 마감하게 되는 쪽도 있다고 한다.
깨달은 스승이 전하는 모든 수행들중 8만4천가지에 이른다고 한다. 그러나 이모든 것은 최고의 목적을 이룰수 없다고 하며 빛과 소리를 관하는 것이 최고라고 한다. 또한 깨달은 스승이 있어야 한다. 스승의 보호력과 인도가 필요하다.
4. 명상계의 성숙을 위하여
앞에서 명상이 지니고 있는 무한한 가능성에 대해 언급하였다. 명상 속에 아무리 긍정적인 측면이 많고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 해도 명상이 지니고 있는 위험성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면 명상이 보다 많은 대중에게 다가서기는 쉽지 않다. 설령 상업적으로 일시적인 붐을 일으킬지는 몰라도 그것이 운동의 차원으로 승화되기는 힘들다. 발표자는 명상이 지니고 있는 위험성의 해결이라는 차원의 넘어 성숙의 방편으로 다음의 세 가지를 제안하고 싶다.
첫째가 명상의 민주화이다. 지금의 시대는 민주주의 시대이다. 그것은 단순한 시대조류의 문제가 아니라 역사 진보의 결과로 나타난 것이다. 명상이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보편적인 지지를 얻으려면 명상 또한 민주주의 시대의 조류에 부응해야 한다.
김경호--->지금 지구 현실이 시대적으로 바뀌고 있으며 성숙기를 지나 열매를 맺는 시기이므로 자연적으로 영적인 붐이 찾아드므로써 이런 영적인 흐름속에서도 옳 바른 관점과 부작용이 필요악으로 작용되어지므로 하나의 정화작용을 통해 성숙된 인류의 인식과 지혜가 필요하다. 또 한 이 지구사회는 너무나 잘못된 습관과 부정성에 몰입되어있기 때문에 이런 위대한 목적에서도 엊절 수 없이 피해가 발생한다.
민주주의는 사회의 각 영역을 민주화시켰고 종교 또한 옛날에 비해서는 많이 민주화되었다. 그러나 본질적인 차원에서 보면 아직도 종교권력이 신부, 목사, 승려 등의 성직자들에게 집중되어 있는 봉건체제에 머무르고 있다. 물론 퀘이커교 같이 목회자를 따로 두지 않는 진보성을 보이는 종파도 있지만 대부분의 종교에서는 여전히 성직자에 대한 권위가 절대적이다. 특히 목회자에 대한 비판은 하느님으로부터 용서받을 수 없는 죄 가운데 하나임을 강조하는 일부 몰지각한 목사들의 설교나 재가자에 대한 출가수도자의 절대적인 우위를 강조하는 오만한 승려나 신부들의 행위들을 보고 있으면 종교의 민주화는 참으로 머나먼 길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실 그것은 지도자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성직자들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신도들의 의식수준과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관행이 어우러져 나타난 현상이다.
김경호--->이재 모든 종교의 폐단이 사라져야 할 시기이며 만약에 종교들이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 지향한다면, 본래의 것 본래의 참뜻 더 순수한 의도로 지향한다면 모든 지구사회의 종교가 이름은 달라도 하나 같은 참 깨달음을 지향한다면 그것은 통일이라고 볼 수 있다.
종교와 과학 철학이 단지 인류의 의식의 참 근원으로 가는 1%를 봉사했다면, 이재 헤겔 법철학 서문에 나오는 미네르바 부엉이의 황혼에 날다와 같이 어둠의 베일 갑옷을 벚고 지혜가 눈떠야 한다.
원래 명상은 종교에서 나온 것이지만 본질적인 측면에서 볼 때 종교보다는 훨씬 민주적이다. 인도사상사를 보면 초기의 베다 시대의 종교행위는 제사장인 브라만계급 중심이 되어 희생제의와 기복행위를 위주로 하였는데 범아일여사상을 제창한 우파니샤드 시대에 이르러 희생제의와 기복행위보다는 스스로 눈을 감고 자아를 탐구하는 명상이 유행하기 시작하였다. 범아일여사상이란 우주의 실재인 브라만과 내 속의 진아인 아트만은 서로 하나라는 것을 주장하는 사상이다. 여기서 브라만이니 아트만이니 하는 개념은 힌두이즘의 코스몰로지에서 나온 것이지만 그 속에는 보편적 측면이 있다. 범아일여 사상의 핵심은 우리의 내면에는 절대적 진리가 내재해있다는 것으로서 그것은 힌두이즘 외에 다른 종교에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불교에서 모든 중생에게는 불성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나 기독교에서 천국은 바로 마음속에 있다는 주장 또한 진리의 내재성을 강조한 것이다. 범아일여 사상이 유행하면서 사람들은 제사의식을 통해 외재적 초월자에 복을 구하기보다는 자기 속에 내재하는 참나를 발견하는 데 마음을 쏟게 되고 이것은 바로 명상의 발달을 낳았던 것이다.
김경호--->명상이나 참나아 진아를 찾는 것은 더이상 종교가 아니고 과학도 아닌 초월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명상의 발달은 제사행위를 하는 사제에게 집중되어 있던 종교권력을 개인에게 분산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제사장을 거치지 않고 스스로의 명상을 통해서 진리에 이를 수 있다는 주장은 사실 혁명적인 전환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그 당시에 종교권력이 일반 민중에게까지 분산되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제사를 담당하던 소수의 브라만 계층에 국한되어 있던 종교권력이 보다 많은 대중에게 확산된 것은 사실이다. 이런 면에서 볼 때 명상은 그 태생부터 민주적 요소를 지니고 있다.
실제로 제대로 된 명상에서는 외재적인 종교 권력을 인정하지 않는다. 심지어 스승에 대한 권위도 인정하지 않는다. 인도의 요가 명상에서도 본질적인 스승은 자기 속에 있음을 강조하고 있고 중국의 선사들은 살불살조도 서슴지 않았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볼 때 명상계에서는 스승에 대해 상당한 권위를 부여하고 있으며 때에 따라서는 종교보다 더 심한 경우도 있다. 왜냐하면 성직자가 단순히 진리의 전달자라는 차원에 머무르는 반면 명상스승은 직접적으로 진리에 이르는 길을 가르쳐주는 영혼의 스승으로 추앙될 수 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명상스승은 중간단계의 스승이 아니라 최고단계의 스승을 가리킨다.
위에서 언급한 명상리더의 교주화의 문제가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 물론 모든 명상 단체가 다 그런 것은 아니다. 어떤 명상 단체의 리더들은 노골적으로 교주화의 양태를 보여주고 있지만 어떤 명상단체 리더들은 상당히 민주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들은 친구와 같은 스승임을 강조하면서 매우 민주적이고 서민적인 태도를 보여주기도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명상 단체에서는 스승의 깨달음에 대한 권위에 대해서는 절대적인 복종을 강요하는 분위기이다. 물론 그것은 노골적인 강요가 아니라 암묵적인 강요이다. 그래서 많은 명상 단체에서 스승의 권위는 절대적이다. 위대한 스승이 서민적인 모습을 보일 때 제자들의 감동은 더욱 커지고 그래서 비이성적인 헌신도 각오하게 만든다.
김경호--->대부분 인류 사회에 어떤 등급 불보살 아라한 같은 깨달은 등급 스승이나 완전히 부처의 깨달음의 스승이 자리 하지 않기때문에 그러한 부작용이 발생하며, 예전시대는 제자가 수행을 정진하면서 깨달은 스승으로 부터 온갓 시험과 꾸짓음을 격었야 비롯소 옳바르게 성장할 수 있었다.
현대에 부처가 온다면 아주 민주적인 방식으로 제자들을 가르친다. 때로는 제자에게 가볍은 호통을 치기도 하지만, 만약에 스승이 제자가 불성실하고 부적절한 행동을 한다면 만약의 경우 제자가 아주 질이 좋치않다면 차라리 스승은 그를 아무상관않한다. 아무 상관을 않하는 것은 제자에게는 크나큰 재앙이다.그것은 더 이상 깨달음의 길을 갈수 없다는 것이다.
모든 스승은 제자중에 질이 좋고 나쁘건 똑 같이 공평하게 가르침을 주지만, 그 당사자 제자가 어떻게 자신을 처신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며 또한 비전속에도 준비가 된 제자만이 스승으로부터 사랑받는다. 제자의 선과 덕망과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인품을 성품 숭고한 품성을 갇춘 제자를 더 가르침을 준다.
왜냐 이미 갇추어진 제자를 더 높은 가르침을 주어야 이혜하고 더 발전될 수 있으므로 하나라도 열매를 맺는 것이 더 좋기 때문이다. 이것은 누구를 편견하고 편중하는 것이 아닌 자연적인 발생이다. 제자의 자질에 따라 달라진다.
명상이 보다 많은 사람들의 삶의 벗이 되려면 이제는 보다 근본적인 차원에서 명상을 민주화시킬 필요성이 있다. 이제는 봉건적인 차원의 스승과 제자의 관계에서 합리적이고 민주적인 차원의 선생과 학생의 관계를 확립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그리고 본질적인 스승은 결국 자기 속에 있다는 관점이나 스스로의 독립성을 강조하는 관점이 좀 새롭게 조명되고 부각되어야 할 필요성이 있다.
김경호--->민주적인 것은 좋치만, 배우는 입장 수행하는 입장에서 제자가 세상공부잘하는 존재라면 문제 없지만, 부정성과 온 갓 삿된 것에 집중한다면 또 너무 자유를 풀어준다면 그 제자는 셋길로세어 에고의 타락에 길려간다. 어느정도 끌고 밀고 잡아댕기는 유인력이 필요하다.
또 한 가지 주의를 기울려야 할 부분은 개인의 태도의 문제가 아니라 깨달음을 바라보는 관점의 문제이다. 많은 사람들이 깨달음이란 절대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바로 이 때문에 깨달음을 얻은 스승은 여러 가지 인간적 결함에도 불구하고 완전한 각자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스승에 대한 비판은 아예 엄두도 내지 못한다. 이제는 깨달음의 절대성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아야 한다. 발표자는 어떠한 깨달음도 절대적이지는 않고 어떠한 대각자도 완전하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상대적 우위가 있을 뿐 실제 삶에 있어서는 오히려 일반인들보다 못한 면이 많다. 실제로 우리나라의 명상계의 스승들 중에서 그의 삶이 그 집단의 제자들의 눈만이 아니라 일반인의 눈에도 건전하고 아름답게 비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아무튼 이제는 명상의 스승에게 주어지는 맹목적인 권위를 타파하고 명상계 전체의 분위기를 좀 더 민주화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김경호--->아직까지 성숙한 수행의 시대가 아님으로 진정 최고의 경지에 도달하려한다면 진정한 깨달은 스승이 필요하다. 사회의 일면에는 사이비교주자체가 깨달음을 과정하여 온 갓 악을 행하므로써 그것이 문제이다.
예로 개신교 사이비 하늘동산 가명 교주가 하나님이라고 자칭하여 온갓 신도를 끌어드리고 또 한 교주의 아들이 신자의 딸을 강간하여 그것을 무마하기위해 살해까지 서슴치않는 극악무도한 사이비교주들도 있다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명상의 과학화이다. 명상의 세계는 아직도 필요 이상의 신비적 요소가 많이 남아 있고 서로 상충되는 부분도 많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명상의 과학화 체계화가 시급하다. 근래에 들어 구미에서는 명상의 생리적 심리적 효과를 밝히는 논문과 저서들이 많이 나오고 있는데 이것은 명상의 과학화에 매우 고무적인 현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아직은 개별 명상에 대한 효과를 부분적으로 밝히는 데 그치고 있을 뿐 다양한 명상을 체계적으로 비교 연구하면서 그 속에 담겨 있는 보편적인 원리를 밝히는 단계에 이르지는 못하고 있다.
여기서 반드시 지적해야 할 하나의 문제는 어떠한 명상법을 하면 어떠한 심리적 생리적 효과가 있다는 연구결과들이 대부분의 특정 단체의 홍보용으로 쓰이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어떠한 명상법도 열심히 수련하면 일정 부분의 심리적 생리적 효과를 얻을 수 있다. 그 속에는 그 수련법 자체가 가지고 있는 효과도 있지만 플라세보 효과 또한 무시할 수 없다. 어떤 면에서는 플라세보 효과가 더 큰 비중을 차지할 수도 있다. 그런데 그러한 부분을 배제한 채 수련을 통해 얻은 심리적 생리적 효과들이 특정한 수련법 자체에서 나온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매우 편향된 연구결과이다.
명상의 심리적 생리적 효과에 대한 계량적 통계적 차원에서의 과학화도 중요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명상에 대한 합리적 사고를 가지는 것이다. 과학의 기본은 합리적 사유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합리적 사유의 기초는 맹신보다는 회의를 중시하는 태도에서 출발한다. 데까르뜨의 회의야말로 중세의 신비주의와 맹목적 신앙을 넘어서 근대과학을 낳게 한 철학적 기초였다. 명상계에도 아직도 중세적인 신비주의와 맹목적 신앙이 많이 남아있다. 명상의 과학화를 위해서는 먼저 이러한 회의가 필요하다.
김경호--->중세 카톨릭 기독교 세력에 의해 마녀사냥으로 수십만이 화형당했다면 정치적 목적과 돈과 부에 관련하고 이단에 관련하여 수십만 여인을 화형시켰다. 끔찍하다. 현대에도 일설에 UN군이 한 마음에 마녀로 몰린 여인을 구출한 사건이 있다.
인류는 무지하다. 이런 설만이 아닌 모든 인간 사회의 부분들이 부적절고 무지하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합리성이란 현재 수준의 과학의 능력으로 설명되지 않는 모든 현상을 부정하거나 폄하하는 편협한 성격의 합리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과학이 발달해도 세상의 모든 것을 다 밝힐 수는 없는 것이다. 설명할 수 없는 것이라고 무조건 부정할 때 우리의 안목은 제한될 수밖에 없다. 이제는 좀 더 차원 높은 중도적 합리성을 추구해야 할 때이다. 어설픈 신비주의나 맹목적 신앙에 대해서는 회의의 힘으로 냉정하게 비판하되 현재의 이성과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부분에 대해서는 회의하면서도 미지의 영역으로 보류하는 태도가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과학적 태도가 확립되었을 때 명상법의 효과에 대해서도 훨씬 더 신중하고도 조심스럽게 접근할 수 있다. 그리고 어떤 명상법에 대해서도 장점만 보는 것이 아니라 단점도 보게 되고 부분적이고 가시적인 효과에만 집착하지 않고 좀더 전체적인 관점에서 어떤 생리적 심리적 영향을 끼치는가를 바라볼 수 있다. 이런 안목이 있을 때 잘못된 명상으로 인한 부작용을 최소화할 수 있다.
또 하나 필요한 과학적 태도는 주관과 객관을 구분하는 합리성이다. 명상 속에는 주관적 현상과 객관적 현상이 혼재되어 있다. 예를 들어 명상을 할 때 깊은 이완을 체험하면서 몸과 마음의 휴식과 재충전을 체험하거나 집중력이 향상되는 것 등은 객관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명상을 하다보면 그 속에 담긴 특정한 세계관이나 인생관에 대해 강력한 확신이 생기는 경우가 많다. 그러한 것들은 집단주관적인 착각의 소지가 있다. 명상의 초기 단계에서는 별로 못 느끼지만 명상에 본격적으로 심취하게 되면 대체로 이런 현상이 나타난다.
명상 중에 체험하게 되는 우주관이나 인생관 속에는 분명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요소도 있지만 주관적이고 특수한 요소도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상을 체험하는 당사자는 그 체험의 강렬함으로 인해 그 모든 것을 절대적인 진리로 확신하게 된다. 그리고 만약 어떤 집단의 구성원이 공통적으로 그러한 확신에 빠지게 되는 경우 그 확신은 더욱 강해진다. 즉, 개개인의 주관적 확신은 쉽게 깨어질 수 있지만 그것이 집단 전체의 주관적 확신이 될 경우에는 잘 깨어지지 않는다. 그 집단의 규모가 커질수록 집단주관적 확신을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진리로 착각할 가능성은 더욱 높아진다.
이렇게 집단주관적인 착각에 빠지는 경우 가장 크게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현상은 소통기능의 저하이다. 물론 집단구성원들 사이의 소통은 더욱 원활해진다. 문제는 타 집단과의 소통이 잘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때로는 사회적으로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진리에 대해서도 잘 소통하지 못하기도 한다. 주관과 객관을 구분하는 합리성이 확보될 때 타인과 타집관과의 소통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명상 전체의 틀을 이해하는 데에도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다. 서로의 소통이 원활해지고 다양한 명상을 포괄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틀이 나올 때 명상은 훨씬 더 대중화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들 수 있는 것은 명상의 범상화이다. 범상화에서의 범은 범속함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성스러움의 반대어이고 상은 일상을 가리키는 말로서 초월세계의 반대어이다. 일반적으로 명상에 심취하게 될 때 성스러움과 초속성에 함몰되어 점차 현실과 괴리되는 현상이 나타난다. 물론 명상을 하는 사람들 중에는 건전하게 일상생활을 잘 하는 사람도 있지만 때로는 현실도피적인 태도를 보이는 사람도 많다. 많은 사람들이 명상이 지닌 이러한 성향 때문에 명상에 뛰어드는 것을 꺼려하는 것이 사실이다. 이제 명상은 좀더 평범해져야 할 필요성이 있고 또한 일상과 더 많은 조화를 이루어야 할 필요성이 있다.
김경호--->이런설에 대해서는 구지 물질적 시각에 편중한 입장에서는 부적절하게 보일수도 있지만, 영적인 관점에서는 이것이 부적절하게 작용하지는 않는다.
명상은 기본적으로 내면의 세계로 향하는 것이다. 앞에서도 몇 차례 언급하였듯이 명상은 전통적으로 현실을 넘어선 초월의 세계를 체험하기 위해서 발달되어왔다. 비록 현대인의 구미에 맞게끔 명상을 약간씩 개량하였다고는 하지만 그 기본적인 틀은 별로 변하지 않았다. 그래서 명상의 세계에 깊게 들어갈수록 현실적인 감각이 떨어지고 그것이 집단주관적인 착각과 동반될 때는 현실과 소통이 힘들어지고 심한 경우에는 현실검증능력을 상실하기도 한다.
김경호--->이것을 부정적으로 해석하느냐 긍정적으로 해석하는냐에 따라 달라진다. 논평자 말이 정확하다고 볼수는 없는 것이다. 진정한 길을 추구하느냐 물질적인 세속을 추구하느냐에 따라 그 어느 한쪽의 양팔저울에서의 관점은 달라진다.
물론 현실을 넘어선 초월의 세계를 체험하기를 강렬히 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특히 현실의 세계를 몽환의 세계로 바라보는 사람에게는 현실 자체가 의미가 없다고 여긴다. 그들에게는 일상의 생활이나 현실의 문명과 역사에 대한 관심은 없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오로지 궁극적인 세계에 대한 깨달음이다.
김경호--->수조년을 통한 마야 허상이 아닌 진실된 세계에 자각하려는 주관에 있다. 그것은 생명의 모든 종착역이다. 모든 깨달음 해탈 진아와 합일하는 종착역이란 그것은 범 우주적 모든 산라만상 생명이 감추어진 진실속에 객과적 사실이다.
필자의 관점에서는 이러한 관점은 미성숙한 관점이다. 세상과 괴리된 깨달음은 자칫 주관적인 착각에 머물기가 쉽다. 사실 명상은 원래 주관적인 속성이 강하기 때문에 본인은 깊은 깨달음을 체험하였다고 하지만 주관적인 착각의 소지가 많다. 그래서 많은 명상단체나 종교단체에서는 스승의 검증이나 인가를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집단주관적인 착각의 여지가 있다. 사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명상단체마다 구루마다 깨달음의 기준이 조금씩 다르다. 이제는 집단주관적 기준이 아니라 좀 더 보편적인 기준이 필요할 때이다. 보다 보편적인 기준을 이야기하자면 현실의 삶의 요소를 배제할 수 없다. 이제는 내면적 깨달음 일변도에서 외면 현실 속에의 삶이 얼마나 아름답게 피어나는가도 보아야 한다.
김경호--->깨달은 스승은 제자들에게 입문을 통해 말로 하지않는 행동으로 증명해준다. 그것도 체험자의 상태 질에 받을 수 있는 만큼 시기에 따라 달리 보여준다. 그렇치않으면 체험자가 부작용이 발생하고 에너지가 과다하여 과부화 되어 수많은 부작용도 발생하므로 그러나 그 증명이나 체험을 비 입문자나 입문자들에게 발설하는 것을 금한다. 깨달음은 초능력에 있는 것이 아니고 기적에 있는 것이 아닌 그 이상적인 참과 진실에 기반하기 때문이다. 스승이 주는 축복을 통해 내면 체험을 발설하여 잃어버릴 수도 있고 모든 사람으로부터 시기심이나 불난을 만들고 자칫 일반인들이 깨달음과는 별개인 초능력에 감탄하거나 그것을 삿된 초능력을 갇기위해 입문하려들고 깨달음과는 거리가 먼 일이 발생하기도 할수 있다.
또 하나, 자신의 내면적 초월적 깨달음에만 머물러 있고 현실의 일상 세계로 돌아오지 못하는 것은 미완의 깨달음이다. 애벌레가 나비가 되기 위해 번데기의 과정을 거치는 것은 필요한 것이지만 계속 번데기 속에만 갇혀있으면 그것은 성장의 멈춤이다. 다시 나비가 되어 꽃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어야 한다. 명상가가 오로지 성스러움과 초월의 세계만을 지향하는 것은 번데기의 과정과 같은 것이다. 다시 세상 속으로 나올 수 있을 때 비로소 나비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김경호--->일단 깨달음을 완성하여도 부모와 처와 자식 버릴필요도 없도 세상을 조화롭게 이끌어나갈 수 있다. 꼭 열반을 통해 죽음을 당장 격어야 할 필요성은 없다. 깨달은 자는 자기만을 생각하지 않는다. 인류와 모든 중생을 위해 사랑으로 구제를 하기위해 앞장선다. 모든 것이 우리이고 이웃이고 가족이고 자신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노자가 말한 화광동진 또한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화광동진은 노자 수양의 최후의 단계로서 노자의 깨달음의 깊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화광동진이란 성스러움과 초월의 반대말이 아니라 그것을 포괄하면서 다시 범속함과 일상의 세계로 돌아오는 것을 강조하는 말이다. 노자 화광동진의 영향을 받은 선종 또한 깨달음의 마지막 경지를 현실세계로 돌아오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십우도에서도 깨달음의 마지막 경지는 다시 저자거리로 돌아오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이제는 명상계도 좀 더 범상화의 길을 갈 필요성이 있다. 내면의 성스럽고 지고한 기쁨과 시공을 초월한 깨달음만 추구할 게 아니라 희노애락이 일렁이는 일상의 세계로 돌아오고 이 역사와 현실 속으로 다시 돌아와야 한다. 물론 성스러움과 초속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범속함과 일상성과 서로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사실 진정한 성스러움이란 범속함과 대립적인 것이 아니라 그것을 포괄하는 것이고 진정한 초월의 세계 또한 일상의 현실과 대립적인 것이 아니라 일상의 현실을 포괄하는 것이어야 한다. 일상의 현실을 포괄하지 않는 초월이란 사실 현실도피의 한 형태일 뿐이다.
김경호--->저자의 표현이 어떤 측면에 있는가에 따라 그냥 말일뿐이다. 깨달은 스승은 중생을 구제하기위해 지혜와 사랑의 기운을 펼쳐줄수도 있다.
이상으로 명상의 민주화, 과학화, 범상화를 이야기하였는데 사실 이 세 가지는 자세히 보면 서로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덩어리이다. 삶의 전체성을 보지 못하고 특정한 내면의 의식상태를 체험에만 경도될 때 현실과 괴리될 가능성도 높아지고 집단주관적 착각에 빠지게 될 가능성도 높아지고 단체의 리더와 구성원간의 관계도 봉건적인 양상을 보일 가능성이 높다. 이제는 시대의 흐름을 따라 민주화, 과학과, 범상화의 길을 가야 한다. 그러할 때 명상은 단순히 개인의 육체적 정신적 스트레스를 해소시키고 내면의 성장을 가져다줄 뿐 아니라 사회의 많은 병폐들을 해결하고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나아가 문명의 전환에도 기폭제가 될 수 있다.
이렇게 수많은 가능을 지니고 있는 명상을 좀 더 성숙시키고 활성화시키기 위해서는 명상의 전문가들이 개인의 내면적인 황홀경에 도취되어 현실을 무시하거나 집단주관적 착각 속에서 봉건적 왕국의 세력을 확장하는 데만 열을 올릴 게 아니라 현실로 다시 돌아와서 사회적 안목을 키워야 하고 보다 민주적이고 과학적인 태도로써 다른 집단의 사람들과 서로 대화하고 소통하며 보다 큰 공동선을 위해 힘을 모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