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말의 요지는 영적인 스승은 철저한, 혹은 맹목적인 복종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실, 스승은 학생들이 영적으로 자립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은 학생들이 때로는 스승의 안내보다는 내면의 지시를 따르는 법을 반드시 익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새로운 학생은 하나님의 법칙들에 대해 내적인 지식을 전혀 가지고 있지 못함으로, 무지한 상태에 있습니다. 영적인 스승으로부터 가르침을 받게 되지만, 학생 스스로가 내적인 지식을 개발하지 않는다면, 스승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외적인 스승은 학생들이 점차적으로 내적인 스승을 의지하게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내적인 스승을 따르기 위해, 학생은 외적인 스승의 지시를 거역하게 되는 시험에 반드시 직면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학생들이 성숙해짐에 따라, 외적인 스승에게 복종하지 않는 것은 당연한 것이며,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미묘하지만, 대단히 중요한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스승이 학생들에게 스스로 의사결정을 할 수 있게 하기 위해, 더 많은 여지를 제공할 때, 학생은 스승과의 거리감을 키워갈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학생은 고의적으로 어떤 것들을 스승에게 숨기려고 할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학생이 스승과 연결되어 동안에는, 이것조차도 허용이 될 것입니다. 큰 문제는 이제 학생이 - 스스로 독립하고자 할 때 - 자신의 내적인 스승을 따를 것인지, 아니면 또 다른 외적인 스승을 따를 것인지를 결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성숙해지고 있는 학생은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이브가 보여준 것 같은 과정을 반드시 마주해야 합니다. 이러한 과정은 선악을 알게 하는 어떠한 의식 상태로 표현되어 있으며, 뱀으로 상징화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개념들과 이러한 개념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나중에 훨씬 더 자세하게 살펴보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무지에도 두 가지의 형태가 있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기로 합시다.
새로운 학생의 경우, 이 학생은 순수한 형태의 무지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런 학생은 더 좋은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실수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스승과 스스로의 체험들을 통해, 자신이 어떤 것을 알고 있지 못 하다는 것이 입증됨에 따라, 그 학생은 솔직하게 그리고 열심히 교훈을 배우게 되고, 새로운 이해를 내면화하게 됨으로써, 특정한 실수를 반복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숙해짐에 따라, 학생은 자발적으로 배움을 계속할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실수를 숨기거나, 정당화할 것인지를 시험받게 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됩니다.
이제 학생은 고의적인 무지 속으로 뛰어들고 싶은 유혹과 싸우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러한 유혹은 정말로 더 잘 알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지만, 자신의 행동을 바꾸려 하지 않고, 따라서 “더 잘 아는 것(knowing better)”을, 없었던 것으로 상쇄시키려고 할 때,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유사한 과정을 지구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아이들, 특히 십 대들이 지시를 따르지 않거나, 어떠한 행위들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이것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 상황에서, 이러한 사례들을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현재 나이와 성숙도 미치지 못하는, 다시 말해 나잇값을 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계속 행동하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다양한 구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일반적인 무지는 단지 지식의 부재인 반면, 고의적인 무지는 전혀 다른 형태의 마음가짐이라는 것을 이제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제 어린 시절로 되돌아가서, 어둠에 대한 두려움을 처리하는 과정에 처해 있다고 회상해 보세요. 상황을 분석해보면, 실제로는 어둠을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두려워했던 것은 괴물이 어둠 속에 숨어 있다가, 밖으로 나와, 여러분을 해칠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며, 이러한 괴물들은 밝은 낮에는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을 두렵게 했던 것은 괴물이 존재할 거라는 가능성이었으며, 이것이 어둠에 대한 두려움으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두려움을 이겨내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오직 한 가지의 것을 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두려움을 무서워했던 것입니다. 그 한 가지란 어두운 방으로 들어가, 괴물이 없다는 것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어둠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게 된 것은 바로 두려움과 마주하고, 괴물이 존재한다는 믿음이 합리적이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의식은 어떤 것도 숨길 수 없는 빛에 비유될 수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은 행위를 평가할 수 있는 절대적인 기준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행동들은 하나님의 법칙들과 조화를 이루든지, 아니면 조화를 이루지 않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회색 지대, 불분명한 중간 지대는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과녁에서 빗나간 행위들을 숨기고, 정당화하거나 혹은 변명할 수가 없게 됩니다. 여러분의 행위들은 삶에 도움이 되든지, 아니면 삶을 타락하게 만들든지 둘 중에 하나이어야 하며, 이런저런 논의는 할 필요가 없습니다.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새로운 존재는 어느 정도의 어둠이 남아 있는 구체에서 시작하게 됩니다. 이 말은 그 구체가 영적인 세계처럼 빛으로 채워져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그 존재는 분리되고, 자기중심적인 정체성을 지니고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어둠이 남아 있기 때문에, 무지의 상태로 태어날 수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이러한 어둠으로 인해 그 존재는 옳지 않은 행위들을 숨길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 존재가 성숙해짐에 따라, 어둠을 이용하여, 고의적인 무지 속에 머물 수가 있으며, 심지어 겉으로 보이는 겉치레를 만들어서 자신의 내적인 생각과 의도를 숨길 수도 있습니다.
이기적인 믿음과 욕망 그리고 의도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마치 이기적이지 않은 것처럼, 사심 없는 모습을 연출할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례를 지구에서도 분명히 찾아볼 수가 있으며, 마음은 이기적이면서도, 선한 것처럼, 심지어 종교적인 것처럼 가장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이들은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마태복음 7:15)”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속임수가 가능하게 되는 것은 지구의 에너지 장 속에 아직도 어둠이 많이 남아 있어, 생각과 감정을 숨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영적 세계에는 거짓말과 속임수가 절대 존재할 수가 없으며, 온전한 정직만이 삶을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내 말은 지구 행성이 숨길 수가 있는 무지의 베일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장소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무지는 단지 어둠에 불과한 것입니다. 어둠은 빛의 부재이며, 무지 자체는 어떠한 실체나 의도도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빛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어둠은 “괴물들(monsters)”을 숨길 수가 있으며, 이러한 괴물들은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목적과 일치하지 않는 실체 (비록 일시적이지만)와 의도들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개념에 대해서는 추가적인 검토가 필요합니다.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모든 것은 두 개의 상호 보완적인 힘들의 상호 작용으로 인해 창조되었으며, 이 두 개의 힘들은 형태의 세계를 창조하고, 유지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의 극성을 형성하며, 나머지 극성은 하나님과 반대되는 것, 즉 종종 악마로 의인화되는 악(惡)이라고 주장하면서, 두 개의 극성을 극단으로 몰고 가는, 영적 및 종교적인 가르침들이 이 행성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선과 악은 우주의 그림을 완성하는데 필요하며, 하나는 다른 하나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고 합니다. 따라서 어떤 존재든, 그 존재는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할 수 있으며, 그 존재는 선과 악의 길을 따름으로써, 고향으로 돌아갈 수가 있다고 합니다. 눈치가 빠른 학생들은 앞에서 이야기한 것들을 토대로 하여, 이러한 가르침들이 진실과 동떨어진 것이며, 또한 그 이유를 알 수 있어야 합니다.
창조주께서는 가장 먼저 전체(Allness) 내에서 어떠한 경계를 설정하셨으며, 그 후 허공 속에 존재하는 특이점 속으로 자신의 존재를 수축시켰습니다. 허공은 창조주와 반대되는 것이 아니며, 단지 어떤 것의 부재였습니다. 따라서 허공 속에는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 어떠한 형태나 실체도 존재하지 않았으며, 악이 존재할 여지도 없었습니다. 허공 속에 창조된 모든 것들은 하나님이라는 실체와 존재로부터 창조되었으며, 그가 없이는 만들어진 어떤 것도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 자신의 본질로부터 만들어졌기 때문에, 하나님이 존재하는 모든 것이라면, 결과적으로 하나님과 반대되는 것은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에게는 반대되는 것이 존재하지 않으며, 우주 전체를 완성하기 위해, 하나님에게 반대되는 극성이 필요하지도 않다는 말입니다. 창조주께서는 그 자체로 완전하시며, 어떠한 극성도 필요치 않습니다. 내가 말하는 것에 주목하기 바랍니다. 악은 자체적으로 실체가 없으며, 물질의 빛(Ma-ter Light)을 제외하고는 어떠한 실체도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악처럼 보이는 것은 단지 물질의 빛이 하나님의 법칙과 일치하지 않는 형태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악은 일시적으로만 존재할 수 있으며, 결국 물질의 빛은 원래의 순수한 상태로 돌아갈 것이며, 악의 형태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하나이셨던 창조주께서 자기 자신을 확장하고, 수축하는 두 개의 극성으로 나타내셨던 것은 바로 창조가 시작될 무렵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두 개의 극성들은 상반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보완적인 힘들입니다. 따라서 하나가 선이고, 다른 하나는 악이라고 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입니다. 악이라는 개념은 그리스도의 의식이 창조되고 난 이후에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내가 설명한 것처럼, 창조의 목적이 개별적인 존재들에게 자각을 성장시킬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의식이 만들어지게 되었으며, 이것은 개별적인 존재들이 자유의지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자유의지가 존재함으로써, 존재들이 하나님의 법칙들과 맞지 않는 선택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칙을 일부러 거역할 필요는 없지만, 존재들에게 그러한 선택권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온전한 자유의지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어떤 존재는 자유의지로 인해 분리 속에서 길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의식은 하나됨으로 돌아올 수 있는 길을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존재가 하나님의 법칙들을 거역하는 데에도 두 가지의 방법이 존재합니다. 하나는 무지 때문이며, 그 존재는 단지 더 좋은 것을 알지 못할 뿐입니다. 부모들은 아이들이 이기적인 행동을 해도, 대개 벌을 주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아이들은 단지 자신들이 하고 있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아이들은 자기 생각에는 잘못된 행동이 아니며, 따라서 포기하고 싶지 않은 것을 하고자 하는 습성을 키워갈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습성으로 인해, 아이는 일시적으로 편하게 느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이가 성숙해짐에 따라, 아이는 더 좋은 것을 알게 되고, 거기에 맞춰 자신의 행동을 개선하게 될 것입니다.
영적 학습장에 있는 학생이 성숙해짐에 따라, 그 학생은 고차원적인 이해에 기초하여 자신의 습성을 개선할 것인지, 아니면 자기의 습성을 고수할 것인지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됩니다. 그 학생은 단순한 무지에 기초하여, 자신이 행한 행동을 더 이상 정당화할 수 없게 되며, 따라서 그 밖에 다른 형태의 변명거리를 찾아야만 합니다. 그 학생은 그리스도의 마음과는 대조적으로, 옳고 그름에 대한 절대적인 기준을 가지고 있지 못한 마음 상태를 이용함으로써, 이렇게 할 수가 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고의적인 무지는 어둠이 존재한다는 것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이러한 어둠은 진실을 숨길 수가 있으며, 심지어 거짓말이 진실인 것처럼 보이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의식은 학생들에게 자신들의 자유의지를 행사하기 위한 절대적인 기준을 제공해주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사용함으로써, 학생들은 무한한 창조력을 표현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의 법칙이라는 테두리 내에 머물게 됩니다. 이것은 곧 학생들의 노력이 자신 자신들과 모든 생명을 끌어올리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자유의지를 안내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의식이 계획된 후, 논리적인 면에서 보면, 그리스도의 의식은 반대되는 것을 가져야만 하며, 그래야 존재들이 하나님의 법칙을 어길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상호 배타적이며, 서로를 상쇄시키는 반대라는 개념은 하나님의 단계에서는 존재하지 않으며, 확장하고 수축하는 힘 속에 내재되어 있지도 않습니다. 반대되는 것들은 아들의 단계, 즉 자유의지를 행사하는 자의식을 지닌 존재들의 단계에서만 존재하게 됩니다. 따라서 악은 하나님에게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게 반대되는 것입니다. 선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통해, 존재들이 자신들의 자유의지를 행사한 결과물입니다. 악은 그리스도의 진리가 존재하지 않는 무지라는 어둠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마음과 반대되는 것, 즉 반-그리스도의 마음을 통해, 존재들이 자신들의 자유의지를 행사한 결과물입니다.
[출처] KEY 9 : 그리스도와 반-그리스도에 대한 이해 (3/4)|작성자 목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