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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창조주는 절대세계 하느님의 분신이다.
太極上帝...
상제는 태극의 주제적 면모를 나타내는 글자요, 태극은 상제의 원리적 면모를 나타낸다.
태극상제는 우리 우주의 창조주요, 주재자다. 이곳의 표현으로는 주(LOAD), 엘로힘, 파운더인종, 야훼 쯤 되리라.
태극이 곧 道다???
太極(☯, 음양)은 氣의 세계다.
진리의 세계는 理의 세계다.
태극은 ‘말씀’이요, 律呂요, 파동이요, 氣를 말한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요한 1:1-5)...에서의 ‘말씀’이다.
진리는 그 色의 세계, 氣의세계를 넘어선 空의 세계, 理의 세계에 존재한다.
氣는 원리를 현실에 구체적으로 드러내 주는 틀에 불과하다. 그래서 佛家에서는 無上한 것이라 강조했다.
외계인들의 하나님은 태극이다.
이 태극세상이 3계6도(三界六道)의 세상이다.
외계인들도 윤회계를 벗어나지 못한 중생들이다. 과학적으로 영적으로 높이 올라갔지만 진정한 깨달음을 얻지 못한 존재들이다.
진리의 세계, 理의 자리에 있는 것이 삼태극이요, 三眞인 성/명/정이다.
氣의 세계, 색계에 존재하는 것이 三忘인 영/혼/백이다.
외계인들은 靈的 존재이나 靈이 性화하지 못한 존재들이다.
靈은 삼망의 자리요, 性(본성)만이 삼진의 자리인 것이다.
아직 覺性하고 見性한 존재들이 아니다.
증산 왈 “공자, 석가, 예수는 내가 쓰기 위해 내려 보냈느니라."
왜 이런 거짓말이 서슴없이 나올 수 있는가?
진리-도-하느님과의 단절은 ‘스스로를 절대자’로 인식케 하는 ‘유일신적 신관’을 만들어 내며 마음대로 힘을 쓸 수 있는 권능과 무소불위의 힘을 소유케 한다. 이것이 타락이 일어나는 원인이요, 발생 메카니즘이다.
천사와 악마의 관계는 이 태극세상, 색계에서 음양의 역할을 맡은 신명계에 속한다.
역시 3계6도(三界六道)의 윤회계 속의 신명들이다.
XXX엘의 천사들도, XX퍼의 악마들도 모두 윤회계속의 고차원 중생일 뿐이다.
환웅, 예수, 석가, 공자 등의 성현들은 理의 세계에서 氣의 세계(중생계)로 파견된 분들이다. 따라서 증산 따위가 석가와 예수를 자신이 쓰기위해 내려 보냈다고 거침없이 말하는 것은 최근 채널링메시지들의 XXX엘 천사들이 예수를 내려 보냈다고 사기 치는 것과 동일한 말이 된다.
사람들은 아직도 氣의 바다속을 헤매이며 理의 진주를 찾으려 하나... 그 진주는 그곳에 존재하지 않는다. 허망한 ‘실상의 세계’를 깨닫고, 그곳을 초월한 곳에 진주가 존재함을 온몸으로 체득할 때... 비로소 진정한 창조주, 부처를 만나게 된다.
오쇼 라즈니쉬의 공관(空觀)에 대해.. ------------
음과 양, 긍정과 부정, 낮과 밤, 여름과 겨울, 삶과 죽음, 이런 것들은 양극단이다. 부정과 긍정이 만날 때, 서로 대립되는 것들이 만나 더 이상 대립되지 않을 때, 그것들이 서로의 안으로 들어가 용해될 때, 거기에 오르가슴이 있다. 오르가슴은 부정과 긍정의 만남이다. 이것은 부정과 동일하지 않다. 부정과 긍정 둘 다를 초월하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양쪽 모두를 초월해 있다. 그러나 또 어떤 의미에서는 동시에 양쪽 모두이다. 부정과 긍정의 융합, 이것이 무(無,아마 공을 말하는듯)의 정의이다. 이것이 오르가슴의 정의이며, 삼매의 정의이다. 이 점을 명심하라.
긍정과 부정의 동일성이 공(空)의 비밀이다. 이것이 무(無)와 니르바나(열반)의 비밀이다. 공은 단순히 비어 있는 상태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현존이다.아주 확고한 현존이다. 공은 대립되는 것들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포괄한다. 공은 반대극으로 가득 차 있다. 이 공은 충만하게 흘러 넘친다. 이 공은 생생하게 살아 있다. 생동감으로 충만하다. - 반야심경, 오쇼 라즈니쉬 저 p.172 ------------
理 : 진리, 원리, 이치 , 일체의 '법칙'
氣 : 그 원리를 현실에 구체적으로 드러내 주는 틀.
太極上帝...
상제는 태극의 주제적 면모를 나타내는 글자요, 태극은 상제의 원리적 면모를 나타낸다.
태극상제는 우리 우주의 창조주요, 주재자다. 이곳의 표현으로는 주(LOAD), 엘로힘, 파운더인종, 야훼 쯤 되리라.
태극이 곧 道다???
太極(☯, 음양)은 氣의 세계다.
진리의 세계는 理의 세계다.
태극은 ‘말씀’이요, 律呂요, 파동이요, 氣를 말한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요한 1:1-5)...에서의 ‘말씀’이다.
진리는 그 色의 세계, 氣의세계를 넘어선 空의 세계, 理의 세계에 존재한다.
氣는 원리를 현실에 구체적으로 드러내 주는 틀에 불과하다. 그래서 佛家에서는 無上한 것이라 강조했다.
외계인들의 하나님은 태극이다.
이 태극세상이 3계6도(三界六道)의 세상이다.
외계인들도 윤회계를 벗어나지 못한 중생들이다. 과학적으로 영적으로 높이 올라갔지만 진정한 깨달음을 얻지 못한 존재들이다.
진리의 세계, 理의 자리에 있는 것이 삼태극이요, 三眞인 성/명/정이다.
氣의 세계, 색계에 존재하는 것이 三忘인 영/혼/백이다.
외계인들은 靈的 존재이나 靈이 性화하지 못한 존재들이다.
靈은 삼망의 자리요, 性(본성)만이 삼진의 자리인 것이다.
아직 覺性하고 見性한 존재들이 아니다.
증산 왈 “공자, 석가, 예수는 내가 쓰기 위해 내려 보냈느니라."
왜 이런 거짓말이 서슴없이 나올 수 있는가?
진리-도-하느님과의 단절은 ‘스스로를 절대자’로 인식케 하는 ‘유일신적 신관’을 만들어 내며 마음대로 힘을 쓸 수 있는 권능과 무소불위의 힘을 소유케 한다. 이것이 타락이 일어나는 원인이요, 발생 메카니즘이다.
천사와 악마의 관계는 이 태극세상, 색계에서 음양의 역할을 맡은 신명계에 속한다.
역시 3계6도(三界六道)의 윤회계 속의 신명들이다.
XXX엘의 천사들도, XX퍼의 악마들도 모두 윤회계속의 고차원 중생일 뿐이다.
환웅, 예수, 석가, 공자 등의 성현들은 理의 세계에서 氣의 세계(중생계)로 파견된 분들이다. 따라서 증산 따위가 석가와 예수를 자신이 쓰기위해 내려 보냈다고 거침없이 말하는 것은 최근 채널링메시지들의 XXX엘 천사들이 예수를 내려 보냈다고 사기 치는 것과 동일한 말이 된다.
사람들은 아직도 氣의 바다속을 헤매이며 理의 진주를 찾으려 하나... 그 진주는 그곳에 존재하지 않는다. 허망한 ‘실상의 세계’를 깨닫고, 그곳을 초월한 곳에 진주가 존재함을 온몸으로 체득할 때... 비로소 진정한 창조주, 부처를 만나게 된다.
오쇼 라즈니쉬의 공관(空觀)에 대해.. ------------
음과 양, 긍정과 부정, 낮과 밤, 여름과 겨울, 삶과 죽음, 이런 것들은 양극단이다. 부정과 긍정이 만날 때, 서로 대립되는 것들이 만나 더 이상 대립되지 않을 때, 그것들이 서로의 안으로 들어가 용해될 때, 거기에 오르가슴이 있다. 오르가슴은 부정과 긍정의 만남이다. 이것은 부정과 동일하지 않다. 부정과 긍정 둘 다를 초월하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양쪽 모두를 초월해 있다. 그러나 또 어떤 의미에서는 동시에 양쪽 모두이다. 부정과 긍정의 융합, 이것이 무(無,아마 공을 말하는듯)의 정의이다. 이것이 오르가슴의 정의이며, 삼매의 정의이다. 이 점을 명심하라.
긍정과 부정의 동일성이 공(空)의 비밀이다. 이것이 무(無)와 니르바나(열반)의 비밀이다. 공은 단순히 비어 있는 상태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현존이다.아주 확고한 현존이다. 공은 대립되는 것들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포괄한다. 공은 반대극으로 가득 차 있다. 이 공은 충만하게 흘러 넘친다. 이 공은 생생하게 살아 있다. 생동감으로 충만하다. - 반야심경, 오쇼 라즈니쉬 저 p.172 ------------
理 : 진리, 원리, 이치 , 일체의 '법칙'
氣 : 그 원리를 현실에 구체적으로 드러내 주는 틀.
모나리자
- 2007.11.26
- 11:21:33
- (*.243.2.3)
창조주가 그래서 어쩌자는 것입니까?
그런 현란한 논리를 설파하는 것은 자유의지라 하더라도 그렇다면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살라는 것입니까?
태극이다, 도다,뭐다 온갖 미사여구만 늘어놓은들 당장 어떻게 해야한다는 철학이 없다면 잘난 체하는데 불과하지 않은가요?
우리가 오늘날 어떻게 어떤 자세로 살아가야 마땅한지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방법론이 나와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실례지만 농욱님은 직업이 어떻게 되십니까?
재산이 많고 수입이 일정하여 처자식을 부양하는데 별다른 지장이 없으신가요?
우리네 주변은 생활의 여유가 없어 노점상을 하거나 심지어 노숙자 신세로 전락하거나 장애를 가진 무수한 우리의 이웃이 있습니다.
그런분들한테 님의 그 현란한 말솜씨가 통할 것이라고 보십니까?
우리네가 우선 당장 의식주를 해결하는 것이 첩경이고, 그 후 배가 부른 뒤에 도다 뭐다 떠들 수가 있을 것이며 그러한 인간의 최소한의 품위유지도 못하는 지경에 이른 사람들에게는 소귀에 경읽기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소외되고 버림받은 자들에게도 한결같은 복음이 될 수 있는 영원한 진리를 설파해야 공감대를 형성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 독불장군마냥 고고한 소리를 외친다는 것은 참으로 허언을 농하는 모습이 아닐까요?
저 역시 미천하여 어떻게 사는 것이 진정한 인간의 모습인지 갈 길을 몰라 헤매는 중입니다.
미망을 벗어나 영원한 대자유인이 되는 길을 제시해 주시기 바랍니다.
단지 이 사이트에 자신의 축적된 지식을 설파하여 타인으로부터 무언가 얻으려고 한다면 이는 크나큰 우를 범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리고 이분법적인 사고를 벗어나야 봉인이 풀린다고 하셨는데 이분법적인 사고의 틀을 벗어나는 경지는 어떤 경지를 말함인가요?
이러한 댓글에 기분나쁘실줄 알지만 지금까지 농욱님이 설파한 많은 글들가운데 무엇을 어찌해야 한다는 결론이 도출되지 않은 채 이론만 무성한 느낌이 들어 결론을 내려주시기를 바라며 몇자 부치는 것입니다.
그런 현란한 논리를 설파하는 것은 자유의지라 하더라도 그렇다면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살라는 것입니까?
태극이다, 도다,뭐다 온갖 미사여구만 늘어놓은들 당장 어떻게 해야한다는 철학이 없다면 잘난 체하는데 불과하지 않은가요?
우리가 오늘날 어떻게 어떤 자세로 살아가야 마땅한지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방법론이 나와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실례지만 농욱님은 직업이 어떻게 되십니까?
재산이 많고 수입이 일정하여 처자식을 부양하는데 별다른 지장이 없으신가요?
우리네 주변은 생활의 여유가 없어 노점상을 하거나 심지어 노숙자 신세로 전락하거나 장애를 가진 무수한 우리의 이웃이 있습니다.
그런분들한테 님의 그 현란한 말솜씨가 통할 것이라고 보십니까?
우리네가 우선 당장 의식주를 해결하는 것이 첩경이고, 그 후 배가 부른 뒤에 도다 뭐다 떠들 수가 있을 것이며 그러한 인간의 최소한의 품위유지도 못하는 지경에 이른 사람들에게는 소귀에 경읽기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소외되고 버림받은 자들에게도 한결같은 복음이 될 수 있는 영원한 진리를 설파해야 공감대를 형성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 독불장군마냥 고고한 소리를 외친다는 것은 참으로 허언을 농하는 모습이 아닐까요?
저 역시 미천하여 어떻게 사는 것이 진정한 인간의 모습인지 갈 길을 몰라 헤매는 중입니다.
미망을 벗어나 영원한 대자유인이 되는 길을 제시해 주시기 바랍니다.
단지 이 사이트에 자신의 축적된 지식을 설파하여 타인으로부터 무언가 얻으려고 한다면 이는 크나큰 우를 범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리고 이분법적인 사고를 벗어나야 봉인이 풀린다고 하셨는데 이분법적인 사고의 틀을 벗어나는 경지는 어떤 경지를 말함인가요?
이러한 댓글에 기분나쁘실줄 알지만 지금까지 농욱님이 설파한 많은 글들가운데 무엇을 어찌해야 한다는 결론이 도출되지 않은 채 이론만 무성한 느낌이 들어 결론을 내려주시기를 바라며 몇자 부치는 것입니다.
허천신
- 2007.11.26
- 12:51:37
- (*.72.56.242)
최근의 인도는 어떤지 모르겠으나, 얼마전까지 인도 사람들은 삶, 지위, 경제적인 처지등을 포함하여 현세의 것에 대해서는 그 다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 사람들의 궁극의 목표는 현세 다음의 내세에 있다고 믿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누가 무슨 일을 하던, 자기의 신념이 있으면 그것으로 행복한 것이 아닐까도 생각해 봅니다. 하루하루 힘들고 미치게 산다고 생각을 하면 현세의 삶이 지옥일 것이고, 하루하루의 삶이 무엇인가 배우고 추구하는 삶이라면 그 자체가 천당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전자와 후자의 일을 똑같습니다. 다만 어떻게 생각을 하느냐의 차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사회적으로 진짜 어려운 사람들도 있겠지만, 대부분 성장하여, 정상적인 손과 발이 있는 사람들, 3D 업종 기피하고, 힘들어서 기피하고, 염색공장에서 일하기 싫어서, 인간의 삶에 반드시 필요한 것을 생산해 내야하는 공장에 우리 사람들이 일을 하기를 거부하기 때문에 외국 근로자를 수입해야 하는 현실을 어떤 식으로 생각하는 지는 모르겠으나, 저는 현 직장에서 짤리면, 거렁뱅이가 되느니, 차라리 쥐꼬리 만한 월급일지언정, 남동공단 그런 곳에 가서 떳떳하게 땀 흘리고 일을 해서 돈을 벌겠습니다. 현실은 그런 것이라 생각합니다. 추구하는 것이 다른데 그것을 반드시 자기의 생각 틀에 고정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생각해 보며, 또한 인간의 삶이 돈/경제가 전부는 아닐 것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지금도 세상 등지고 수도하는 많은 분들이 계시는 것이고, 그 모든 것이 아우러져서 이 세상이 움직이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농욱
- 2007.11.26
- 13:15:42
- (*.139.117.85)
모나리자님/
제 글에 공감되지 않으면 그냥 지나쳐 버리실 수 없는지요.
저는 제 나름대로 제 생명을 다하여 치열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중입니다.
위에서 거론한 주제가 님의 환경과 님의 마음이 처한 상황에 딱히 맞아떨어지는 주제가 아닐지언정 저 같은 중생에게는 목숨보다도 더 중요한 현재의 주제입니다.
거론하는 주제는 각자의 여정에 맞게 온갖 주제들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님이 갖고계신 절실한 주제가 있다면.... 님께서는 그 주제를 발제해 이끌어 주시기 간청합니다.
이미 꺼낸김에 님의 주제로 잠시 눈을 돌려 봅시다.
현재/삶/부와 가난/고단한 삶.... 이런 키워드로 우리 각자는 이 현실을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이런 것으로 인지됩니다.
이런 각자의 삶속에 삶과 연결된 진리라는 것을 논하자... 쓸없이 거창한 우주타령, 진리타령은 진부한 것이다.... 뭐 이런 것 같습니다.
당장 눈앞의 현실속에 피부에 와닫는 이야기를 하자는 말씀이시겠지요.
님게서 말씀하는 현실, 삶이란 주제를 가지고 저는 가장 근본적 의문을 먼저 해결해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올바른 삶’을 규정하려면 역시 진리란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 나의 주체는 무엇인가의 해답을 얻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니 이 우주와 나, 진리와 나의 궁극적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실 이런 질문에 대한 각자의 해답은 천양지차로 다른 결론을 우리 각자는 마음속에 숨기고 서로 다른 말들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어떤 이는 天神이 UFO를 타고 다니는 외계인이라고 믿고, 어떤 이는 그 세계를 넘어선 절대의 자리에 진리가 있다고 믿고 있고... 아직은 결론없이 모두다 각자의 믿음이 따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 현재의 삶속에 우리는 평등한가? 그렇지 않습니다. 개체로서 우리는 너무도 다른 외모와 다른 환경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생각의 능력도 다르고, 태어날 때부터 여러 가지 환경 자체가 다 다르게... 어찌보면 너무도 불평등하게 태어납니다. 우주에 치우침없이 편재하는 하느님의 본성이 우리에게 균등히 내재해 있다면 뭔가가 잘못된 것입니다. 과연 잘못된 것일까요? 치우친 것일까요? 이런 불평등은 이번 생만을 놓고 바라보기 때문에 드는 생각입니다. 어떤이는 심한 장애를 선천적으로 부여받고 태어나기도 합니다. 육체적 기형으로서의 불평들, 뇌구조의 장애로 인한 인식체계의 불평등도 존재합니다. ‘나’라는 인식 주체가 5감 뿐이라면 극심한 불평등 이지요. 또 그 외부정보를 인식해 내는 센서 뿐만 아니라 외부정보를 전달받아 정장하고 가공하는 ‘의식’틀 마저 장애를 선천적으로 가지고 태어났다면 더욱 불행한 불평등을 경험하는 존재로 전락한 겁니다. 이 생을 살아가는 데에 있어서 가난은 겨기에 비하면 훨씬 더 작은 불편에 속할 겁니다.
이 생이 태어남이란 시작과 죽음이란 결말로 모든 것이 끝나 버린다면 이런 불평등은 거대한 신에대한 분노로 이어질 것이고, 그 존재는 살아야할 이유를 상실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이 일정의 깨달음이 있을 때까지 끝없는 윤회의 쳇바퀴를 돌고 도는 것이라면 어떻게 될까요? 각 생마다 자신에게 부족한 각성의 주제로 그 부족한 면을 채우기 위해 내가 설계한 삶이라면 어떻게 될까요? 실제로 우리의 현실은 내가 직접 설계한 배움과 학습의 과정입니다. 당장 자신이 가장 심하게 겪는 고통이 있다면... 그것은 그 존재에게 가장 절실히 체험이 필요한, 아니면 그 고통을 통해 서원이 일어나게 하는 꼭 필요한 과정이란 것입니다. 그 고통은 자신에게 왜 필요한 것인지를 알아야 그때 비로소 사라집니다.
우리 각자는 서로 다른 영혼의 나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진화의 정도도 각자가 다릅니다.
그러니... 각자의 나이와 진화의 정도차이를 불평등 하다고 탓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것은 오히려 각자에게 더 굳센 의지를 확립하도록 각자에게 요구해야 할 사안입니다.
이 삶속에 무엇을 해야하나... 라는 질문은 본시 작자가 자신의 부족한 면을 찾아내어 각가에게 던질 질문이지 모범답안을 내놓아라 채근할 일은 아닙니다.
제 글에 공감되지 않으면 그냥 지나쳐 버리실 수 없는지요.
저는 제 나름대로 제 생명을 다하여 치열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중입니다.
위에서 거론한 주제가 님의 환경과 님의 마음이 처한 상황에 딱히 맞아떨어지는 주제가 아닐지언정 저 같은 중생에게는 목숨보다도 더 중요한 현재의 주제입니다.
거론하는 주제는 각자의 여정에 맞게 온갖 주제들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님이 갖고계신 절실한 주제가 있다면.... 님께서는 그 주제를 발제해 이끌어 주시기 간청합니다.
이미 꺼낸김에 님의 주제로 잠시 눈을 돌려 봅시다.
현재/삶/부와 가난/고단한 삶.... 이런 키워드로 우리 각자는 이 현실을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이런 것으로 인지됩니다.
이런 각자의 삶속에 삶과 연결된 진리라는 것을 논하자... 쓸없이 거창한 우주타령, 진리타령은 진부한 것이다.... 뭐 이런 것 같습니다.
당장 눈앞의 현실속에 피부에 와닫는 이야기를 하자는 말씀이시겠지요.
님게서 말씀하는 현실, 삶이란 주제를 가지고 저는 가장 근본적 의문을 먼저 해결해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올바른 삶’을 규정하려면 역시 진리란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 나의 주체는 무엇인가의 해답을 얻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니 이 우주와 나, 진리와 나의 궁극적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실 이런 질문에 대한 각자의 해답은 천양지차로 다른 결론을 우리 각자는 마음속에 숨기고 서로 다른 말들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어떤 이는 天神이 UFO를 타고 다니는 외계인이라고 믿고, 어떤 이는 그 세계를 넘어선 절대의 자리에 진리가 있다고 믿고 있고... 아직은 결론없이 모두다 각자의 믿음이 따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 현재의 삶속에 우리는 평등한가? 그렇지 않습니다. 개체로서 우리는 너무도 다른 외모와 다른 환경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생각의 능력도 다르고, 태어날 때부터 여러 가지 환경 자체가 다 다르게... 어찌보면 너무도 불평등하게 태어납니다. 우주에 치우침없이 편재하는 하느님의 본성이 우리에게 균등히 내재해 있다면 뭔가가 잘못된 것입니다. 과연 잘못된 것일까요? 치우친 것일까요? 이런 불평등은 이번 생만을 놓고 바라보기 때문에 드는 생각입니다. 어떤이는 심한 장애를 선천적으로 부여받고 태어나기도 합니다. 육체적 기형으로서의 불평들, 뇌구조의 장애로 인한 인식체계의 불평등도 존재합니다. ‘나’라는 인식 주체가 5감 뿐이라면 극심한 불평등 이지요. 또 그 외부정보를 인식해 내는 센서 뿐만 아니라 외부정보를 전달받아 정장하고 가공하는 ‘의식’틀 마저 장애를 선천적으로 가지고 태어났다면 더욱 불행한 불평등을 경험하는 존재로 전락한 겁니다. 이 생을 살아가는 데에 있어서 가난은 겨기에 비하면 훨씬 더 작은 불편에 속할 겁니다.
이 생이 태어남이란 시작과 죽음이란 결말로 모든 것이 끝나 버린다면 이런 불평등은 거대한 신에대한 분노로 이어질 것이고, 그 존재는 살아야할 이유를 상실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이 일정의 깨달음이 있을 때까지 끝없는 윤회의 쳇바퀴를 돌고 도는 것이라면 어떻게 될까요? 각 생마다 자신에게 부족한 각성의 주제로 그 부족한 면을 채우기 위해 내가 설계한 삶이라면 어떻게 될까요? 실제로 우리의 현실은 내가 직접 설계한 배움과 학습의 과정입니다. 당장 자신이 가장 심하게 겪는 고통이 있다면... 그것은 그 존재에게 가장 절실히 체험이 필요한, 아니면 그 고통을 통해 서원이 일어나게 하는 꼭 필요한 과정이란 것입니다. 그 고통은 자신에게 왜 필요한 것인지를 알아야 그때 비로소 사라집니다.
우리 각자는 서로 다른 영혼의 나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진화의 정도도 각자가 다릅니다.
그러니... 각자의 나이와 진화의 정도차이를 불평등 하다고 탓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것은 오히려 각자에게 더 굳센 의지를 확립하도록 각자에게 요구해야 할 사안입니다.
이 삶속에 무엇을 해야하나... 라는 질문은 본시 작자가 자신의 부족한 면을 찾아내어 각가에게 던질 질문이지 모범답안을 내놓아라 채근할 일은 아닙니다.
모나리자
- 2007.11.26
- 13:25:29
- (*.243.2.3)
농욱님의 언사는 구구절절 옳은 말임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바른 말을 하는 근저에는 나름대로 삶의 철학이 올바로 서야 할 것입니다.
나름대로의 치열한 삶을 살고 계시다면 어떠한 입장에서 삶을 영위하고 있는지 그 일단을 진솔하게 드러낼 수 있지 않을가요?
자기 자신에 대한 삶의 목표나 철학을 감춘채 선지식들이 이미 언급한 내용을 마치 자기 생각인양 인용하여 무슨 거창한 진리라도 되는 양 설파한다는 것은 결국 남의 생각을 전달하는 앵무세에 불과하지 않을가요?
설사 덜 익은 사과라할지언정 그 모양과 맛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농욱님이 키우는 사과를 한 번 보고 싶다는 것입니다.
남의 밭에 있는 사과를 품평한들 그 무슨 소용이 있겠나요?
자기가 손수 길러야만 그 맛을 자랑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이러한 공개된 게시판에 글을 올리게 되면 반드시 평가를 받게 되어 있기 때문에 설사 싫은 소리라 하더라도 이를 수용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제가 농욱님을 상대로 더한 댓글에 제3자가 왈가왈부한다는 것도 도리가 아닐 것입니다.
그러한 바른 말을 하는 근저에는 나름대로 삶의 철학이 올바로 서야 할 것입니다.
나름대로의 치열한 삶을 살고 계시다면 어떠한 입장에서 삶을 영위하고 있는지 그 일단을 진솔하게 드러낼 수 있지 않을가요?
자기 자신에 대한 삶의 목표나 철학을 감춘채 선지식들이 이미 언급한 내용을 마치 자기 생각인양 인용하여 무슨 거창한 진리라도 되는 양 설파한다는 것은 결국 남의 생각을 전달하는 앵무세에 불과하지 않을가요?
설사 덜 익은 사과라할지언정 그 모양과 맛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농욱님이 키우는 사과를 한 번 보고 싶다는 것입니다.
남의 밭에 있는 사과를 품평한들 그 무슨 소용이 있겠나요?
자기가 손수 길러야만 그 맛을 자랑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이러한 공개된 게시판에 글을 올리게 되면 반드시 평가를 받게 되어 있기 때문에 설사 싫은 소리라 하더라도 이를 수용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제가 농욱님을 상대로 더한 댓글에 제3자가 왈가왈부한다는 것도 도리가 아닐 것입니다.
농욱
- 2007.11.26
- 14:54:41
- (*.139.117.85)
모나리자님/
묻는 뜻을 알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동안 제 글에서 누누히 제 삶의 자세에 대해서, 살아가는 자세에 대해서 이미 다른이 보다 자세히 공개한 바 있습니다. 또다시 장황설을 푸는 것도 다른이들에겐 지겨울듯 하니... 관심있으시면 지난 저의 글을 검색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곳에 가입초기에 사용한 닉네임이 '웰빙'이고 그 후 사용한 닉은 '선사'입니다.
참고로 제 목표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이 생에서는 '해방'을 맞이하고자 합니다.
남북통일을 위해 호시탐탐 일할 기회와 여건을 만들 것이며...
그리하여 이 민족의 숙원사업인 갈등을 풀고 이민족의 압제에서 '해방'을 맞이하길 원하며...
제 개인적으론 3계의 윤회고리를 끊고 진정한 진리세계로 가능한 많은 사람들이 함께 궁극의 '해방'을 맞이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반듯이 우리 모두는 그렇게 될것입니다.
그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이번생을 택하여 지금, 여기에 저도 와있는 것으로 알고있습니다.
이것이 제가 살아있는 이유이고 살아가는 유일한 목표입니다.
묻는 뜻을 알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동안 제 글에서 누누히 제 삶의 자세에 대해서, 살아가는 자세에 대해서 이미 다른이 보다 자세히 공개한 바 있습니다. 또다시 장황설을 푸는 것도 다른이들에겐 지겨울듯 하니... 관심있으시면 지난 저의 글을 검색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곳에 가입초기에 사용한 닉네임이 '웰빙'이고 그 후 사용한 닉은 '선사'입니다.
참고로 제 목표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이 생에서는 '해방'을 맞이하고자 합니다.
남북통일을 위해 호시탐탐 일할 기회와 여건을 만들 것이며...
그리하여 이 민족의 숙원사업인 갈등을 풀고 이민족의 압제에서 '해방'을 맞이하길 원하며...
제 개인적으론 3계의 윤회고리를 끊고 진정한 진리세계로 가능한 많은 사람들이 함께 궁극의 '해방'을 맞이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반듯이 우리 모두는 그렇게 될것입니다.
그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이번생을 택하여 지금, 여기에 저도 와있는 것으로 알고있습니다.
이것이 제가 살아있는 이유이고 살아가는 유일한 목표입니다.
허천신
- 2007.11.26
- 16:35:33
- (*.72.56.242)
농욱님, 제가 알고 있는 것(책을 통해 접한 단편적인 지식들을 꿰맞추는 수준이고, 그나마 너무 숨켜 놓은 것이 많아서, 그 그림 맞추기가 영 쉽지 않습니다. )들과 방법론에서는 많이 차이가 있지만, 하여간 목표는 같은 것 같아서 항상 감사하고 있습니다. 실상의 세계로, 진리의 세계로 더 많은 인간을 데려 가는 것, 하지만 저에게 그런 능력은 없는 것 같고, 그것도 누가 데려 간다고 되는 것은 아닌 것 같고, 스스로의 깨닮음으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즉 구제란 없는 것이고, 시험을 통과한 인간만이 갈 수가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시험이란 표현이 좀 그렇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종류의 시험은 아닐 것이고, 때가 되면 저절로 가려지는 그런 것이겠지요.
김일성이 더 악한가, 박정희가 더 악한가?
공산주의가 좋은가, 자본주의가 더 좋은가?
남측의 흡수통일인가, 북측의 적화통일인가..
이런 이분법적 사고를 넘어선 곳에 통일이 존재하고, 이 복잡한 문제를 넘어설 때 비로소 한민족의 인류사적 사명이 시작된다. 봉인이 풀리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