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론적으로 보면, 맨 마지막 혹은 가장 낮은 단계, 즉 흙의 원소 단계에서 시작할 수도 있습니다. 흙의 원소 단계에서 보면, 현재 에너지의 밀도가 매우 높으며, 또한 지구의 자연환경도 불균형의 정도도 아주 심각한 상태에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흙의 정령들에게 부정적인 에너지의 부담을 과다하게 주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전하고자 하는 것은 여러분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물질세계를 바라보는 시각이 완전히 잘못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물질이 여러분의 감각으로는 단단하게 느껴지겠지만, 과학을 통해 물질이 단단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 물질은 분자라고 하는 아주 작은 건축용 블록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분자는 다시 원자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내가 말한 것처럼, 원자의 대부분은 빈 공간입니다.
따라서 심지어 돌의 경우도, 밀도가 아주 높고, 단단하게 보이겠지만, 돌의 대부분이 빈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돌을 손에 쥐면, 신체적인 촉감으로는 단단하게 느껴질 것입니다. 그 이유는 신체적인 촉감이 육체와 아주 밀접하게 관련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신체적인 촉감은 육체가 지닌 밀도에 적응이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기본적으로 육체 역시도 돌과 동일한 물질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며, 어느 정도 단단하게 느껴지는 육체에 돌은 훨씬 더 단단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물리적인 물질이 전혀 단단하지 않으며, 또한 영원하지도 않다는 사실을 마음속으로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직선적인 이미지를 전하기 위해, 주위에서 보게 되는 물리적인 물질이 스크린에 비친 이미지처럼, 이미지가 투사된 것이라고 생각해보십시오. 영화를 볼 때, 영화에 몰입하게 되면, 보이는 것들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지게 됩니다. 예를 들어, 영화 속에서 일몰 장면을 보고 있다면, 영화관에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해변가에 서서, 수평선 너머로 해가 지고 있는 것을 실제로 보고 있다고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처럼 깊이 몰입하지 않고, 한걸음 뒤로 물러서서 보면, 스크린에 비친 이미지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단지 스크린에 투사된 이미지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 이미지는 스크린에 칠이 되어 있는 이미지처럼 늘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매초마다 스크린에는 많은 이미지들이 투사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게 되면, 물질세계에서 볼 수 있는 것들이 영원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물질세계는 삶이라는 스크린, 즉 물질의 빛(Ma-ter light)이라는 스크린 위에 매초마다 수많은 이미지들이 투사되고 있는 유동적인 세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미지를 투사하고 있는 기제(機制:mechanism)는 원소의 정령들이며, 이들은 영사기(movie projector)에 비유될 수가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영사기는 여러 개의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영사기에서의 원동력은 전구이며, 이 전구는 에너지의 흐름, 즉 영적 세계로부터 흘러나오는 에너지가 에테르의 단계를 거쳐, 정신, 감정, 물질의 단계로 내려오는 흐름에 비유될 수가 있습니다. 물질 우주를 구성하는 네 개의 단계들은 필름에 해당된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영사기에는 네 장의 필름이 들어 있으며, 전구에서 나오는 빛은 네 장의 필름을 통과하여, 스크린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한 장의 필름이 아니라, 네 장의 필름이 들어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한 장의 필름이 아니라, 네 장의 필름이 들어 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면, 이것을 이해하기가 그다지 어렵지 않습니다. 이것을 가장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은 여러분이 특정한 장면을 연기하고 있는 영화 속의 인물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한 장의 필름 속에는 산이나 숲과 같은 배경이 담겨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또 다른 한 장은 마을과 같이, 가장 가까이에 있는 환경을 담고 있습니다. 세 번째 필름은 장면의 일부로서, 어떤 동물을 나타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네 번째 필름은 특정한 장면의 일부인 실제의 인물을 나타낸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스크린에 비친 이미지는 이러한 네 장의 필름을 통해 투사되는 것이 나타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이미지는 효과적인 수단으로, 여러분에게 매우 중요한 어떤 것을 보여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이 네 장의 필름들이 서로 조화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상상해보십시오. 예를 들어, 여러 인물들이 해변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면, 첫 번째 필름의 배경은 당연히 해변을 나타내는 장면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첫 번째 필름에 등장하는 인물이 해변과 잘 어울리는 의상을 입고 있는데, 배경은 도시를 나타내는 장면이 나온다고 상상해보세요.
바꾸어 말하면, 네 개의 단계들, 즉 네 장의 필름 사이에 동시성(synchronicity)이 결여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4개 단계의 원소의 정령들 간에 동시성이 결여된다면, 당연히 물질의 단계에 이르면 어떠한 불균형이나 무질서 혹은 혼란스러움이 생길 수밖에 없게 될 것입니다. 물의 정령들에게 약간이라도 동시성이 결여된다면, 흙의 정령들에게 어떠한 일들이 생기게 될까요? 그리고 공기의 정령들과 물의 정령들 사이에 동시성이 결여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기타 등등.
물론, 스크린에 제대로 된 이미지가 나타나기 위해서는, 공기를 통해 빛이 스크린에 전달되듯이, 그 외에도 빛의 흐름에 방해가 되는 것이 존재하지 않아야 합니다. 따라서 이러한 과정에 지장을 줄 수 있는 다양한 현상들이 일어난다고 생각해보세요. 예를 들어, 영화관에 많은 연기가 발생해서, 빛이 이 연기를 통과해야 된다면, 필름에 담겨 있는 순수한 형상이 스크린에 제대로 도달할 수 없게 될 것이며, 빛은 연기로 인해 뒤틀리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영사기에서 나오는 빛 속으로 실제로 빛을 내보낼 수가 있으며, 이로 인해 스크린에 비치는 이미지에도 영향을 줄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현상이 원소의 정령들에게도 일어날 수 있으며, 따라서 인류가 투사하는 부조화한 에너지들로 인해, 이 정령들은 많은 부담을 떠안을 수밖에 없게 될 것입니다.
예를 들어, 흙의 정령들이 너무 많은 부담을 짊어지게 된다면, 제대로 된 싱그러운 밀밭(wheat field)을 만들어낼 수가 없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원소의 정령들은 식물들에게 여러 형태의 질병을 일으키게 하거나, 심지어 열매도 조금밖에 맺지 못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물의 정령들은 밀밭을 풍성하게 해줄 충분한 비를 내리지 않게 할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공기의 정령들이 아주 많은 부담을 짊어지고 있다면, 곡식을 망가뜨릴 태풍을 불러올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현재의 지구 상황을 살펴보면, 이상적인 시나리오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 엘로힘께서 불의 정령들에게 어떠한 사념체를 새겨 넣고, 이러한 사념체가 창조적인 자극에 따라 4개의 모든 단계들을 빠르게 통과하여, 엘로힘께서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는 것과 정확히 일치하는 꽃을 물질적인으로 구현해낼 수 있는 시나리오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 대신, 4개의 단계들에 존재하는 정령들에게는 방해물 혹은 정체물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이 존재합니다. 방송하는 사람의 목소리를 정확하게 듣기 위해, 깨끗한 전파의 신호를 수신하는 것이 아니라, 정체된 상태의 신호를 받게 됨으로써, 조각난 메시지 밖에는 들을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현상은 흙의 정령들, 물의 정령들, 공기의 정령들 그리고 불의 정령들 차원에서 반복적으로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제 한 단계를 뛰어넘어, 가장 높은 단계를 살펴보기로 합시다. 여러분의 에테르체는 여러분의 기본적인 정체성, 즉 기본적인 세계관을 간직하고 있는 몸체입니다. 그동안 인류는 지구 행성에서 이원성적인 의식에 현혹되어 왔으며, 또한 타락한 존재들로 인해 길을 잘못 들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사례는 이브가 에덴동산에서 뱀의 유혹에 어떻게 속아 넘어가게 되었는지 창세기의 이야기 속에 상징적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모든 인간이 뱀의 유혹에, 다시 말해 기본적으로 분리에 기초한 뱀과 같은 의식에 속아온 것이 사실입니다. 가장 근본적인 분리는 물질세계가 영적 세계와 분리되어 있다는 것과 하나님의 피조물들이 하나님과 분리되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타락한 존재들은 이러한 환상을 고차원의 세계에서부터 받아들였으며, 이들은 그 이후부터 이러한 생각을 지니게 되었으며, 지구에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러한 생각을 각인시키려고 시도해 왔습니다. 두 말할 필요도 없이, 그들은 이러한 생각들을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주입시키는데 성공했으며, 이러한 환상에 대해 사람들은 의심조차하지 않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에테르의 차원에서부터 이러한 교활한 환상을 받아들이게 되면서부터, 자기 자신을 분리된 존재로 인식하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이로 인해, 의식적인 여러분(Conscious You)은 분리된 자아, 즉 분리된 정체성을 만들어내게 되었으며, 그 이후부터 세상 속으로 들어가, 분리된 자아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이로 인해 의식적인 여러분이 지닌 근본적인 실체가 변화한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은 여전히 순수한 의식이지만, 분리된 자아라는 필터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것뿐이며, 이것은 마치 한 인간으로서 여러분이 색안경을 쓰고 세상을 바라보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따라서 정체성의 몸체(identity body)에서, 분리된 자아라는 필터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면, 지구에서 느낄 수 있는 가장 근원적인 느낌에 의해 영향을 받게 되며, 이러한 느낌은 바로 죽음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분리된 자아를 통해 세상을 체험하게 됨으로써 지불하게 되는 대가는 죽음이라는 두려움으로부터 도망칠 수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심리학자들의 말에 따르면, 인간에게는 두 개의 기본적인 감정들, 즉 두려움과 사랑이 존재한다고 합니다. 이러한 관점은 유효한 것입니다.
분리된 자아라는 필터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지 않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여러분의 존재할 현존으로부터 여러분을 통해 흐르며, 여기 아래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들을 향해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두려움을 전혀 가지지 않게 될 것이며, 모든 두려움을 쫓아낼 완벽한 사랑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의 정체성의 몸체 속에는 존재할 현존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창조적인 흐름을 방해하거나, 왜곡시킬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정체성의 몸체는 완벽하게 열린 문이 되어, 현존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사념체와 에너지적인 자극들을 받아들이게 될 것이며, 그런 다음, 이러한 창조적인 자극들을 완화되지 않은 순수한 형태로 정신체에게 전달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정체성의 몸체가 분리된 자아라는 환상에 의해 영향을 받게 되면, 존재할 현존으로부터 내려오는 사념체를 가장 순수한 형태로 받아들일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사념체들은 정체성의 몸체에서부터 분리라는 환상에 의해 어느 정도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여러분은 현존으로부터 제공되는 모든 사념체들이 물리적인 실체로 구현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념체들이 물질을 지배할 수 있는 힘이 없으며, 또한 물질로 표현될 수 있다는 가능성마저 의심하거나, 심지어 부정하게 될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현상은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에게서 볼 수 있으며, 그들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눈가에 땀을 흘리면서, 육체적인 능력을 사용하여,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또한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정체성의 몸체에는 어떠한 진동이 만들어지게 됩니다. 바꾸어 말하면, 신적 자아로부터 흘러나오는 에너지적인 자극들은 순수한 사랑이며, 일정한 수준 이상에서 진동하는 에너지들입니다. 정체성의 몸체 속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존재한다면, 순수한 사랑은 진동수가 떨어지게 될 것이며, 따라서 순수한 사랑보다 낮은 형태의 에너지를 띠게 될 것입니다. 두려움을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 그리고 죽음과 죽음에 대한 가능성에 관심을 집중하면 할수록 - 이러한 부조화한 에너지들이 더 많이 만들어지게 될 것입니다.
4장의 필름이 들어 있는 영사기에 관한 이야기로 돌아가서, 정체성의 몸체는 개인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즉 개인적인 영사기 속에 존재하는 첫 번째 필름에 해당하며, 따라서 존재할 현존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빛이 이 필름을 가장 먼저 통과하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 첫 번째 필름에 어떠한 장애가 발생했다고 상상해보세요. 예를 들어 필름의 뒤쪽에서 연기가 피어오른다거나, 필름이 흔들린다고 가정해볼 수 있으며, 따라서 빛은 이 필름을 쉽게 통과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달리 표현하면, 정체성의 몸체에 어떠한 장애가 발생하여, 잡음이 생기게 되고(static), 흔들리는 현상이 일어났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 스스로가 분리된 존재라고 믿는다면, 가장 높은 정체성의 단계에서부터 자신이 지닌 창조력을 실제로 제한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 인간으로서, 여러분이 어떠한 것들을 이룰 수 있다는 사실을 결코 믿지 않게 될 것입니다. 심지어 빛이 여러분의 정신체를 통과할 수 있다는 가능성마저 인정하려 들지 않을 것입니다.
달리 표현하면, 사념체와 에너지적인 자극이 여러분의 정체성을 통과해갈 때, 사념체, 즉 필름의 이미지는 왜곡되고, 정체성 속에 저장되어 있는 두려움의 에너지로 인해 방해를 받게 됨으로써, 에너지적인 자극, 즉 창조적인 자극 역시도 강도(强度)가 떨어지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창조적인 자극이 정신체 속으로 들어갈 때 쯤이면, 이러한 자극들은 이미 왜곡되고, 힘도 많이 약해지게 될 것입니다. 물론 정신체 속에도 또 다른 왜곡의 층들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사고(思考)의 단계에도 많은 믿음들, 즉 여러분 자신과 여러분이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해 그리고 세상이 어떻게 작동되는지, 그리고 어떤 것이 가능하고, 어떤 것이 가능하지 않은지 등등과 같은 많은 믿음들이 존재합니다.
따라서 정체성의 단계에서는 죽음에 대한 원초적인 두려움이 존재하지만, 정신체의 단계에서는 대다수 사람들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의심입니다. 이것은 무엇이 가능하고, 무엇이 가능하지 않은지에 대해 앞뒤로 왔다 갔다 하면서 추론하는 능력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따라서 정신체가 지닌 가장 기초적인 속성은 아주 지적이고 지성적인 사람들이 어떤 주제에 대해 찬성하거나 혹은 반대하며, 논쟁을 벌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실질적인 면에서 보면, 이러한 사람들은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물론, 창조적인 자극은 이로 인해 왜곡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다른 의심의 에너지 - 다른 특정한 진동을 지닌 - 로 인해, 창조적인 자극이 지닌 힘 혹은 강도도 훨씬 줄어들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창조적인 자극이 정신체를 통과하여, 감정체로 들어갈 때에는 더 심하게 왜곡되고, 강도도 더 많이 줄어들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감정체에도 또 다른 여러 개의 층들이 존재하며, 실질적으로 이 속에도 어떠한 믿음들이 존재합니다. 예를 들어, 감정의 단계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분노가 도움이 되며, 적어도 불가피한 반응이라고 믿으며, 또한 많은 경우, 분노로 대응하는 것이 전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다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감정의 단계에서의 주된 감정은 분노입니다. 분노는 특정한 에너지로서, 특정한 진동을 지니고 있으며, 이로 인해, 창조적인 자극의 힘은 보다 더 많이 줄어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 가지 믿음들로 인해, 여러분의 행위들은 또다시 왜곡될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현재 처해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반응하는 것이 적절한지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자극이 물질의 단계로 내려가게 되면, 그 곳에도 여러 개의 층들로 구성된 믿음들이 존재합니다. 물질의 단계에서 가장 심하게 왜곡되어 있는 믿음은 타락한 존재들이 만들어낸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할 수 있다”라는 환상이며,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환상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달리 표현하면, 성경에는 “살인하지 말라”라고 말하고 있지만, 시대를 통틀어서 많은 종교인들이 어떠한 상황에서는 세상을 구하려는 하나님의 계획에 위협이 되는 존재들을 죽여도 된다는 환상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으로 인해, 창조적인 이미지는 더 많이 왜곡되고, 자극의 강도도 줄어들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믿음들 때문에, 물질의 단계에서의 주요 감정이라 할 수 있는 것, 다시 말해 싫어하는 감정이 강화되어 분개라는 형태로 표출되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의식의 48단계 아래에 있는 사람들은 실질적으로 자신들의 존재할 현존으로부터 어떠한 사념체도 받을 수 없게 된다는 것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념체가 하위의 4개 몸체들에 투사되자마자, 그러한 사념체들은 왜곡되며, 물질의 단계에 도달할 때쯤에는, 원래의 형태는 거의 남아 있지 않게 될 것이며, 이러한 사람들의 의식은 오로지 물질의 단계와 육체에만 관심이 집중되어 있을 뿐입니다. 또한 현존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에너지적인 자극의 힘도 현저하게 줄어들어, 겨우 육체가 살아 있을 정도로, 다시 말해 불의 원소가 세포가 삶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로만 주입되는 것을 목격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간신히 살아 있을 뿐이며, 이런 이유로, 아주 많은 사람들이 병을 앓거나, 늙게 되는 것이며, 결국에는 세포의 진동수와 생명력이 현저하게 줄어들어, 육체가 실제로 살아 수 있을 수 있는 기간보다 훨씬 짧은 수명을 누리고, 삶을 마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이러한 이해를 원소의 정령들에게 적용시켜 보기로 합시다. 사실, 원소의 정령들은 인간과 아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엘로힘께서는 실제로 인간에게 지구를 지배할 수 있는 권한을 주셨습니다.
오랜 시간이 흐르면서, 인류의 집단의식은 마음이 지닌 여러 단계들, 즉 4개의 단계들, 다시 말해 정체성, 정신체, 감정체 그리고 육체에 부정적인 에너지의 웅덩이(pool)를 실제로 만들어 왔습니다. 그 후, 이러한 에너지들은 원소의 정령들에게 투사되었으며, 이로 인해 원소의 정령들이 많은 부담을 짊어지게 됨으로써, 자신들이 수행해야 하는 주요한 기능들에 막대한 지장이 초래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엘로힘께서 원소의 정령들에게 투사하신 사념체들마저 물질의 단계에서 원래의 형태대로 구현될 수 없는 상태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4개의 단계에 존재하는 원소의 정령들이 아주 심하게 왜곡되어 있으며, 또한 이미지도 아주 심하게 흔들려 있어, 원소의 정령들이 그러한 이미지들을 실행에 옮길 수가 없으며, 순수한 형태대로 구현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물론, 인류는 지금까지 많은 사념체들 혹은 정신적인 이미지들을 창출해 왔으며, 원소의 정령들에게 이러한 것들을 투사해 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 가지 자연재해와 변덕스러운 날씨 패턴, 흉작, 농작물과 나무 혹은 동물에서의 질병들을 목격하게 되는 이유를 이것이 잘 설명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깊이 들어가면, 엘로힘께서 결코 상상하지도 않았던 상황들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