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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낭당에 오줌 누면 벌 받는다라는 식의 미신적 두려움이 있습니다.
실제로 서낭당에 불경한 짓을 하면 벌 받는 사례가 있지요.
옛날 선승들은 불상을 장작개비로 만들어 태웠다고 합니다.
불상에 붙여진 의미 부여가 일종의 환상임을 스스로 밝히신 것이지요.
그러나 어떤 분이 두통에 시달리여 전생 퇴행을 했습니다.
퇴행에서 그는 무사였는데 연습을 하다가 지장보살의 석상을 깨부셨답니다.
머리를 깼다고 해요.
그 이후 그 사람의 전생들은 두통에 시달렸다고 합니다.
대개 전생퇴행이 그러하듯 전생의 이유를 알면 고통이 사라진다고 하죠.
두통에 시달린 그 사람도 그저 돌을 부순 것임을 알았으니 두통에서 해방되었겠죠.
그런데 왜 서낭당에 불경한 짓을 한 사람은 그 생에서 천벌받아 뒈지고(뒈진다는 표현을 해서 죄송..이럴 때는 이 표현을 해야 제 맛이죠..)
스님은 불상을 장작개비로 만들었는데 그냥 곱게 돌아가시냐구요...
그것은 스님은 두려움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인 나 두려움이 없어..라고 호언장담하는 두려움이 아닙니다.
미세심리...즉 스스로 부여한.. 권위를 깨면 벌 받을 거라는 신성에 대한 두려움...을 깬 분들이 과거의 스님들이었던 것입니다.
지장보살의 석상을 부순 그 무사도 그냥 돌로만 보았다고 여겼지만
마음 한 구석에는 성상의 모습을 한 돌에 대한 의미부여가 있었습니다.
또한 서낭당 나무 가지를 벤 인부가 급살맞아 죽는 것도 서낭당이라는 권위를 스스로 부여했기 때문입니다. 미세심리 차원에서요.
현대 버전으로 바꾸어 말합니다.
우주의 법칙으로
카르마의 법칙으로
에너지 등가의 법칙으로
그렇게 두려움을 줍니다. 대개 자신이 기분 나쁘면 우주 법칙을 말합니다. 에너지 등가의 법칙으로 벌 받으리라 말합니다. 그런 경우 스스로 봐야 할 자신의 에고를 놓치고 타인의 벌 받음을 확신함으로써 스스로 안심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왜냐하면 우주의 법칙이니까...벌 받을 것이고 나는 아무 잘못이 없으니까..
그런데 잘못이라는 시시비비보다 왜 우주 법칙을 이야기하는지 그것부터 스스로에게 질문해야 할 것으로 봅니다.
마음의 세계는 주관의 세계이자 실체의 세계.
칼날이 허상일지라도 있다고 믿으면 다치는 세계입니다.
그렇기에 카르마 법칙에 너무 연연하지 마십시오. 지나칠 정도로 양심적인 사람이 어쩌면 카르마 법칙을 철저히 준수하는 사람입니다. 윤회의 흐름 속에 괴로워할 수 있지요..
인간에게 권위를 강조하는 채널링 메시지의 메타트론, 미카엘, 관음 등등의 존재에 대해서
회의적입니다.
그들이 상위 차원의 존재라면 인간의 노력을 강조하고 천상의 계획이 변경되었다고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조차도 하위 매트릭스 자체도 신의 흐름 안에 있다는 것을 모르는 이상 그들은 고차원 존재가 아닙니다.
권위를 강조함은 곧 인간에게 스며있는 신성에 대한 두려움을 자극하여 자신의 메시지의 진정성을 확보하려는 모습입니다.
근원의 의지가 다층적 매트릭스를 통해 구현됨을 모르는 고차원 존재는 없을 뿐더러
존재를 구속하게 하는 에너지 연결 명상을 강조하는 고차원 존재는 없습니다.
꽃이 누굴 통해서 꽃이 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인간은 누굴 통해서..어느 고차원 존재를 통해서 완성을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실제로 서낭당에 불경한 짓을 하면 벌 받는 사례가 있지요.
옛날 선승들은 불상을 장작개비로 만들어 태웠다고 합니다.
불상에 붙여진 의미 부여가 일종의 환상임을 스스로 밝히신 것이지요.
그러나 어떤 분이 두통에 시달리여 전생 퇴행을 했습니다.
퇴행에서 그는 무사였는데 연습을 하다가 지장보살의 석상을 깨부셨답니다.
머리를 깼다고 해요.
그 이후 그 사람의 전생들은 두통에 시달렸다고 합니다.
대개 전생퇴행이 그러하듯 전생의 이유를 알면 고통이 사라진다고 하죠.
두통에 시달린 그 사람도 그저 돌을 부순 것임을 알았으니 두통에서 해방되었겠죠.
그런데 왜 서낭당에 불경한 짓을 한 사람은 그 생에서 천벌받아 뒈지고(뒈진다는 표현을 해서 죄송..이럴 때는 이 표현을 해야 제 맛이죠..)
스님은 불상을 장작개비로 만들었는데 그냥 곱게 돌아가시냐구요...
그것은 스님은 두려움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인 나 두려움이 없어..라고 호언장담하는 두려움이 아닙니다.
미세심리...즉 스스로 부여한.. 권위를 깨면 벌 받을 거라는 신성에 대한 두려움...을 깬 분들이 과거의 스님들이었던 것입니다.
지장보살의 석상을 부순 그 무사도 그냥 돌로만 보았다고 여겼지만
마음 한 구석에는 성상의 모습을 한 돌에 대한 의미부여가 있었습니다.
또한 서낭당 나무 가지를 벤 인부가 급살맞아 죽는 것도 서낭당이라는 권위를 스스로 부여했기 때문입니다. 미세심리 차원에서요.
현대 버전으로 바꾸어 말합니다.
우주의 법칙으로
카르마의 법칙으로
에너지 등가의 법칙으로
그렇게 두려움을 줍니다. 대개 자신이 기분 나쁘면 우주 법칙을 말합니다. 에너지 등가의 법칙으로 벌 받으리라 말합니다. 그런 경우 스스로 봐야 할 자신의 에고를 놓치고 타인의 벌 받음을 확신함으로써 스스로 안심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왜냐하면 우주의 법칙이니까...벌 받을 것이고 나는 아무 잘못이 없으니까..
그런데 잘못이라는 시시비비보다 왜 우주 법칙을 이야기하는지 그것부터 스스로에게 질문해야 할 것으로 봅니다.
마음의 세계는 주관의 세계이자 실체의 세계.
칼날이 허상일지라도 있다고 믿으면 다치는 세계입니다.
그렇기에 카르마 법칙에 너무 연연하지 마십시오. 지나칠 정도로 양심적인 사람이 어쩌면 카르마 법칙을 철저히 준수하는 사람입니다. 윤회의 흐름 속에 괴로워할 수 있지요..
인간에게 권위를 강조하는 채널링 메시지의 메타트론, 미카엘, 관음 등등의 존재에 대해서
회의적입니다.
그들이 상위 차원의 존재라면 인간의 노력을 강조하고 천상의 계획이 변경되었다고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조차도 하위 매트릭스 자체도 신의 흐름 안에 있다는 것을 모르는 이상 그들은 고차원 존재가 아닙니다.
권위를 강조함은 곧 인간에게 스며있는 신성에 대한 두려움을 자극하여 자신의 메시지의 진정성을 확보하려는 모습입니다.
근원의 의지가 다층적 매트릭스를 통해 구현됨을 모르는 고차원 존재는 없을 뿐더러
존재를 구속하게 하는 에너지 연결 명상을 강조하는 고차원 존재는 없습니다.
꽃이 누굴 통해서 꽃이 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인간은 누굴 통해서..어느 고차원 존재를 통해서 완성을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