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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부드럽거나 여성적이다..섬세하다는 말을 종종 듣고 합니다.
그런데 부드러우면 부드러운 것이 섬세하다면 섬세한 것이지 왜 여성적?이라는 의문이 있었습니다. 저를 아는 분들은 여성적이라고 하는데 저는 그 개념이 잘 매치가 안되었습니다.
성격의 일부분이 바로바로 매치가 안되어서
부드러운 게 왜 여성적이지?
섬세하다는 게 왜 여성적이지?라는 좀 의아했습니다.
그런데 몇 달 전에 알았습니다.
아...여성적이라는 게 그런 의미구나..라는 것을...조금 표현하기는 어렵지만..알았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쓰는 단어 용법을요.
그 이야기를 지인에게 해보니
지인은 어린왕자의 이야기를 하시더군요.
어린왕자 책에서 이런 이야기가 나온데요.
(저는 어린왕자 책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어린이가 어른에게 집을 설명하기를 그 집은 분위가 따사롭고 창문에는 꽃병이 있고 식탁이 독특했다고..등등의 묘사를 하지만 어른은 일단 그 집 평수를 묻고 동네 이름을 묻습니다.
어른에게는 평수나 동네이름이나 거주 형태..아파트인지 단독주택인지 등등으로 사물을 이해하는 반면 어린이들은 개개의 사실(fact)로서 이해한다고 하시더군요.
제가 여성적이다고 하는 다른 이들이 언어 사용습관을 이해하게 됨이
어린이가 어른의 가치 체계를 이해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말하시더군요.
남들은 잘 아는 것을 저는 잘 모를 때가 많습니다.
가령 저는 백수 주제에 영성 이야기를 논하니 찌질이다고 심하게 비판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남들이 사용하는 '백수'라는 말이 비판의 맥락에서 들어보니 '경멸'의 용법이더군요.
제 주변에 직업이 일시적으로 없는 분들도 계시는데...그 분들이 '백수'이긴 하지만 백수라는 단어에 들어가는 모욕적인 느낌은 없었습니다. 백수라는 단어도 잘 생각나지 않았구요.
직업이 없다와 백수..라는 것이 매치가 되지 않았는데 제가 상황을 겪으므로 해서 직업이 없다는 것을 백수라는 모욕적인 단어로 치환해서 말하는구나..라고 알았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언어에 실체개념을 집어넣어 스스로의 인지를 구속시킵니다.
저는 동성애자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저는 세상의 가치 기준을 알기에 굳이 저를 적당히 표현할 길이 없어 그렇게 말할 뿐입니다.
아래 글은 언어에 대한 글입니다. 이전에 쓴 글을 여기에 올려 봅니다.
====================================================
언어의 지향성과 관념의 지향성 자체를 근거로 삼아 자신의 주장을 합리화합니다.
자 모두가 빛과 사랑으로 화해 지구상에 있어왔던 어둠을 물리칠 것입니다.
모두 천상의 빛을 요청해 보세요. 그러면 그 빛이 여러분에게 의지가 됩니다.
떠돌아다니는 메시지들은 대충 위와 같이 요약됩니다.
채널러의 사념과 신념체계가 왜곡되어 온 것이라 봅니다.
채널러가 언어의 지향성을 초월하지 않는 한 우주의 순도높은 정보가 오지 않습니다.
특히 채널러 자신이 영적 권위에 의존하는 미세심리가 있다면
자신의 신념체계를 영적 권위에 의탁하여 근거로 삼습니다.
'나는 메타트론입니다.'
'나는 관음입니다.'
'나는 아쉬타입니다.'
보통 이렇게 시작되는 메시지들은 메시지의 내용을 보게 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로부터 나오게 했는지 일단 시선을 고정시킵니다.
시선만 고정시키는 게 아니죠. 사고 작용을 마비시킵니다.
언어의 지향성은 사랑이나 평등이나 조화에 녹아 있습니다.
사랑합시다..라는 말을 하지 않더라도 사랑이라고 일단 언급하면 사랑을 해야 한다는 무의식적 의미가 같이 발생됩니다.
평등해요...라는 말을 하지 않더라도 평등이라고 언급하면 평등이라는 지향성을 띄는 에너지가 발생합니다.
그리하여 말을 하는 당사자가 자신이 생각하는 '평등의 범주'와 '사랑의 범주'에 갇혀 버리는 자기 모순에 빠집니다.
언어의 지향성은 말을 하는 당사자를 묶어 놓고 우리가 어둠이라고 부르는 것들을 계속 어둠으로 속박시켜 놓는 힘을 지닙니다.
채널러의 메시지들은
사랑, 빛, 평등이라는 단어 자체가 논거로 작용합니다. 지향성이 강한 단어들이기 때문에 '되어야 한다', '이루어져야 한다' 등의 관념이 주장의 근거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누구로부터'와 '어디에서부터'라는 것을 강조하기 때문에 메시지의 권위를 확보합니다. 영적 오만의 고상한 표현입니다.
귀부인이 거지에게 던져주는 값싼 동정이나 연민이나 사랑 이상의 것이 아닙니다.
언어의 순도는 얼마나 투명한 언어를 구사하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가치 지향성을 띄는 단어들...
'신', '영성', '조화', '평등', '사랑'으로 무언가를 설명하려 한다면 단어의 지향성으로 어떻게 되어야 한다는 주장의 지향성을 포장하는 것 밖에 되지 않습니다.
즉 얼음이 언다...와 꿈을 꾼다...라는 문장에서 얼음과 언다...꿈과 꾼다...의 의미가 동치됨에도 언어 용법에는 이상이 없는 것처럼
지향성이 녹아 있는 단어로 주장의 지향성을 이끌어낸다면 메시지는 빈껍데기입니다. 순도 자체가 낮은 단어를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지향성이 강한 단어들로 사용된 메시지들은 채널러의 의식 수준이 낮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사유 자체가 언어의 지향성에 갇혀 있고 '이렇게 되어야 한다'와 '이것이 바람직하다'의 연결고리에서 자유롭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부드러우면 부드러운 것이 섬세하다면 섬세한 것이지 왜 여성적?이라는 의문이 있었습니다. 저를 아는 분들은 여성적이라고 하는데 저는 그 개념이 잘 매치가 안되었습니다.
성격의 일부분이 바로바로 매치가 안되어서
부드러운 게 왜 여성적이지?
섬세하다는 게 왜 여성적이지?라는 좀 의아했습니다.
그런데 몇 달 전에 알았습니다.
아...여성적이라는 게 그런 의미구나..라는 것을...조금 표현하기는 어렵지만..알았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쓰는 단어 용법을요.
그 이야기를 지인에게 해보니
지인은 어린왕자의 이야기를 하시더군요.
어린왕자 책에서 이런 이야기가 나온데요.
(저는 어린왕자 책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어린이가 어른에게 집을 설명하기를 그 집은 분위가 따사롭고 창문에는 꽃병이 있고 식탁이 독특했다고..등등의 묘사를 하지만 어른은 일단 그 집 평수를 묻고 동네 이름을 묻습니다.
어른에게는 평수나 동네이름이나 거주 형태..아파트인지 단독주택인지 등등으로 사물을 이해하는 반면 어린이들은 개개의 사실(fact)로서 이해한다고 하시더군요.
제가 여성적이다고 하는 다른 이들이 언어 사용습관을 이해하게 됨이
어린이가 어른의 가치 체계를 이해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말하시더군요.
남들은 잘 아는 것을 저는 잘 모를 때가 많습니다.
가령 저는 백수 주제에 영성 이야기를 논하니 찌질이다고 심하게 비판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남들이 사용하는 '백수'라는 말이 비판의 맥락에서 들어보니 '경멸'의 용법이더군요.
제 주변에 직업이 일시적으로 없는 분들도 계시는데...그 분들이 '백수'이긴 하지만 백수라는 단어에 들어가는 모욕적인 느낌은 없었습니다. 백수라는 단어도 잘 생각나지 않았구요.
직업이 없다와 백수..라는 것이 매치가 되지 않았는데 제가 상황을 겪으므로 해서 직업이 없다는 것을 백수라는 모욕적인 단어로 치환해서 말하는구나..라고 알았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언어에 실체개념을 집어넣어 스스로의 인지를 구속시킵니다.
저는 동성애자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저는 세상의 가치 기준을 알기에 굳이 저를 적당히 표현할 길이 없어 그렇게 말할 뿐입니다.
아래 글은 언어에 대한 글입니다. 이전에 쓴 글을 여기에 올려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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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지향성과 관념의 지향성 자체를 근거로 삼아 자신의 주장을 합리화합니다.
자 모두가 빛과 사랑으로 화해 지구상에 있어왔던 어둠을 물리칠 것입니다.
모두 천상의 빛을 요청해 보세요. 그러면 그 빛이 여러분에게 의지가 됩니다.
떠돌아다니는 메시지들은 대충 위와 같이 요약됩니다.
채널러의 사념과 신념체계가 왜곡되어 온 것이라 봅니다.
채널러가 언어의 지향성을 초월하지 않는 한 우주의 순도높은 정보가 오지 않습니다.
특히 채널러 자신이 영적 권위에 의존하는 미세심리가 있다면
자신의 신념체계를 영적 권위에 의탁하여 근거로 삼습니다.
'나는 메타트론입니다.'
'나는 관음입니다.'
'나는 아쉬타입니다.'
보통 이렇게 시작되는 메시지들은 메시지의 내용을 보게 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로부터 나오게 했는지 일단 시선을 고정시킵니다.
시선만 고정시키는 게 아니죠. 사고 작용을 마비시킵니다.
언어의 지향성은 사랑이나 평등이나 조화에 녹아 있습니다.
사랑합시다..라는 말을 하지 않더라도 사랑이라고 일단 언급하면 사랑을 해야 한다는 무의식적 의미가 같이 발생됩니다.
평등해요...라는 말을 하지 않더라도 평등이라고 언급하면 평등이라는 지향성을 띄는 에너지가 발생합니다.
그리하여 말을 하는 당사자가 자신이 생각하는 '평등의 범주'와 '사랑의 범주'에 갇혀 버리는 자기 모순에 빠집니다.
언어의 지향성은 말을 하는 당사자를 묶어 놓고 우리가 어둠이라고 부르는 것들을 계속 어둠으로 속박시켜 놓는 힘을 지닙니다.
채널러의 메시지들은
사랑, 빛, 평등이라는 단어 자체가 논거로 작용합니다. 지향성이 강한 단어들이기 때문에 '되어야 한다', '이루어져야 한다' 등의 관념이 주장의 근거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누구로부터'와 '어디에서부터'라는 것을 강조하기 때문에 메시지의 권위를 확보합니다. 영적 오만의 고상한 표현입니다.
귀부인이 거지에게 던져주는 값싼 동정이나 연민이나 사랑 이상의 것이 아닙니다.
언어의 순도는 얼마나 투명한 언어를 구사하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가치 지향성을 띄는 단어들...
'신', '영성', '조화', '평등', '사랑'으로 무언가를 설명하려 한다면 단어의 지향성으로 어떻게 되어야 한다는 주장의 지향성을 포장하는 것 밖에 되지 않습니다.
즉 얼음이 언다...와 꿈을 꾼다...라는 문장에서 얼음과 언다...꿈과 꾼다...의 의미가 동치됨에도 언어 용법에는 이상이 없는 것처럼
지향성이 녹아 있는 단어로 주장의 지향성을 이끌어낸다면 메시지는 빈껍데기입니다. 순도 자체가 낮은 단어를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지향성이 강한 단어들로 사용된 메시지들은 채널러의 의식 수준이 낮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사유 자체가 언어의 지향성에 갇혀 있고 '이렇게 되어야 한다'와 '이것이 바람직하다'의 연결고리에서 자유롭지 않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