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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우리의 정신은 양독에 오염되었다. 서양의 의복을 입고, 서양의 음약을 들으며 서양식 주거문화속에 거하고 우리의 아이들은 햄버거와 피자, 치즈를 김치/된장찌개/밥 보다 좋아한다. 의식주의 완전한 예속화가 완성된 것이다.
의식주만의 문제에 국한된것은 아니다. 이미 우리 DNA 깊은 곳에까지 서구화는 진행되어 있다. 이제 정신문명의 종주국 동이들에게도 국악은 매우 이질적이다.
서양과 동양문화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이 매우 이질적, 정반대이면서도 상호보완적이다.
서양음악을 들으면 발바닥과 다리가 리듬을 탄다. 국악의 음악은 다리가 움직이지 않는다. 어깨와 머리가 음율에 따라 흔들거린다. 서양음악은 精이 반응하는 것이고 국악은 神이나는 것이다. 서양음악은 정기를 소진하는 반면 국악은 운기를 시켜주며 기운을 조울하고 축기가 된다. 한국무용, 춤사위는 이러한 상태에서의 운기동작이다. 따라서 선도수련에서 축기가 한참 되었을시 저절로 우주 율려의 리듬에 따라 운기되는 ‘운기심공’의 동작과 정확히 한동작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운기심공의 동작은 아무리 오래 한다해서 기운이 소진하는 법이없다. 오히려 기운이 펄펄 나고 몸이 새털처럼 가벼워짐을 느낀다. 삼국시절 8월 한가위에 모여 추수감사축제를 벌이던 '영고'등의 행사에서 3일밤낮을 음주가무하며 즐겼다는 옛 기록은 뻥이 아니다. 고래로 우리민족의 음악과 춤은 선도수행이 생활화된 문화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이다.
한민족의 문화가 정신에 기반한 반면 서양의 문화는 육신과 精에 기반한다. 의료체계 역시 만찬가지이다. 서양음악은 심취하면 精이 발하고 이에 음주가 더해지면 色이 동한다. 술-여자-마약이 함께하는 구조이다. 이는 다 이유가 있다.
이제 우리의 전통문화가 서양문화에 떠밀려 그 주인공들 에게서 조차 잊혀져 가고 있다. 우수운 처지이나 서양의 문화는 이제 자세한 부연설명이 필요없어진 반면, 우리의 전통문화에 대해서는 세세한 설명이 필요하다 하겠다.
그렇다면 우리의 원형정신, 문화는 무엇인가?
그 진수를 한시를 통해 비유해 본다.
이 무식한 본인은 불과 몇 달전에야 비로소, 한 지인이 선물한 한권의 책(한시미학산책-정민 지음) 한시의 참맛에 대해 조금 눈뜨며 스스로에게 얼마나 창피하였는지 모른다. 여러분도 한번 일독을 권한다. 우선 시 한수를 감상해 보자.....
흰둥개가 앞서가고 누렁개가 따라가는
들밭 풀가에는 무덤들이 늘어섰네.
제사마친 할아버지는 밭두둑 길에서
저물녘에 손주의 부축을 받고 취해서 돌아온다.
조선 중기의 이달이라는 시인의 작품이다. 이 시의 제목은 <무덤에 제사 지내는 노래>이다. 그냥 글귀만 보면 이게 무신 시인가??? 하는 생각이 들것이다. 아무것도 잡혀지는게 없다. 한가한 시골밭에 개 두 마리와 할아버지, 손자가 있고 무덤에 제사를 지내고 귀가하는 시골풍경 뿐이다. 정민교수의 해설을 들어보면 이 밋밋한 싯귀에서 진짜 진한 국물이 배겨 나오기 시작한다................. 자! 이제 조용히 눈을감고, 이 시속의 풍경을 그림으로 떠올려보자. 강아지 두 마리와 밭두둑이 보인다. 무덤들도 있다. 그리고 할아버지와 손자. 지금 여러분의 머릿속에는 어떤 생각이 지나가는가? 우리는 지금도 추석 때나 한식 날이되면 조상의 산소에 성묘를 간다. 아! 지금 할아버지와 손자는 조상의 산소에 성묘를 갔던 모양이로구나. 혹시 여러분 가운데 부모님을 따라서 할아버지나 증조할아버지의 산소에 성묘를 갔던 기억이 있는 사람들은 이 시속에 광경이 더 친숙하게 여겨질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만 보기에는 위 시의 내용이 왠지 너무 심심하다. 그래서 어쨌다는 걸까? 과연 시인이 말하려고 한 것은 이것이 전부일까? 주의깊게 살펴보면 이상한 부분을 발견해 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무엇일까? 우선 왜 아버지는 없고 할아버지와 손자만 성묘를 갔을까 하는 점이 궁금하기 짝이없다. 왜 산 위도 아니고, 밭두둑가에 풀밭에 무덤이 많다고 했을까? 보통 풀밭에는 무덤을 쓴지 않는데 말이다. 또 할아버지는 왜 술에 취했을까? 저물녘이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왜 할아버지는 하루종일 그렇게 술을 마시면서 무덤 옆을 떠나지 못했던 것일까? 이런 의문을 품고 이 시를 새로이 읽어보면 앞서와는 전혀다른 느낌이 일어난다. 이 시는 그냥 단순히 조상의 성묘를 갔다 온 장면을 노래한 것이 아니다.......................................................
두 사람이 제사를 지내준 주인공은 바로 시속에 나오는 할아버지의 아들이고, 손자의 아버지다. 받두둑 옆 풀밭에는 왜 그렇게 무덤이 많았을까? 아마도 전쟁이나 전염병 같은 재해나 병겁으로 한꺼번에 많은 사람들이 죽었던 모양이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북어서 사람들은 죽은 사람들을 양지바른 산위에다 묻을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소년의 아버지도 전쟁같은 전재지변을 만나 돌아가신 것이 틀림없다. 할아버지는 먼저간 아들의 무덤에서 속이 상했을 것이고 쉽게 마음을 정리못해 술취해 저녘녘에나 순수의 손에 이끌려 귀가하는 중이다. 이런 그림을 그리며 시를 다시 읽어보면 몇자 않되는 싯귀에서 참 많은 이야기와 감상이 넘쳐난다.
시인은 시 속에서 벌써 다 말하고 있지만 겉으론 이런 사실을 하나도 표현하지 않았다. 그렇게 돌려서 말하고 감추어 말하는 가운데, 저도 모르게 느낌이 일어나고 깨달음이 생겨난다. 이렇게 해서 생겨난 느낌과 깨달음은 지워지지 않고 오래도록 내 마음에 남는다.
이것은 마치 불가에서 행하는 ‘화두선법’과 같다. 한시의 예에서 보듯이 동양의 문화는 정신적 기반이며 구체적 실사를 억제한다. 실체의 모습보다 象을 더 중시한다. 보다 더 근원적인 것에 가치를 두기 때문이다.
말하지 않고 말하며, 보여주지 않고 보여주며, 다 보여주지 않고, 많은 부분을 생략하고 넉넉한 여백을 중시한다.
이런 태도는 음악에서도 여실히 나타난다.
요즘 젊은세대들의 대중가요를 들어보시라! 별의 별 악기가 다 동원되어 꽉 들어차다 못해, 현란하다 못해 어지럽고 터질 지경이다. 가수 김창완씨는 언젠가 이를두고 ‘꽉찬, 꾹꾹눌러싼 김밥같은 음악’이라고 표현하던데 매우 공감했다. 이런 음악은 오래들으면 피곤해 진다. 정서적으로 촉촉해 지는것이 아니라 말라 버린다.
이에 반해 국악은 어떤가?
졸릴 정도로 선율이 단순하고, 따분할 정도로 늘어진다. 오늘날 음악에 비해...
동양화 또한 마찬가지 이다. 서양화는 사진처럼 정교한 면을 기반으로 하나 동양화는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생략과 여백을 강조한다. 실물을 그리기 보다 ‘상’과 메시지를 그린다.
뒤에서 추가로 언급하겠지만....
우리문화의 이런 배경은 우리민족 근원태생이 정신세계(천상세계, 마음과 영의 세계)에서 출발하였기 때문이며, 서양문명은 물질세계(지상세계, 물리적 우주)에서 출발하였기 때문이다.
의식주만의 문제에 국한된것은 아니다. 이미 우리 DNA 깊은 곳에까지 서구화는 진행되어 있다. 이제 정신문명의 종주국 동이들에게도 국악은 매우 이질적이다.
서양과 동양문화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이 매우 이질적, 정반대이면서도 상호보완적이다.
서양음악을 들으면 발바닥과 다리가 리듬을 탄다. 국악의 음악은 다리가 움직이지 않는다. 어깨와 머리가 음율에 따라 흔들거린다. 서양음악은 精이 반응하는 것이고 국악은 神이나는 것이다. 서양음악은 정기를 소진하는 반면 국악은 운기를 시켜주며 기운을 조울하고 축기가 된다. 한국무용, 춤사위는 이러한 상태에서의 운기동작이다. 따라서 선도수련에서 축기가 한참 되었을시 저절로 우주 율려의 리듬에 따라 운기되는 ‘운기심공’의 동작과 정확히 한동작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운기심공의 동작은 아무리 오래 한다해서 기운이 소진하는 법이없다. 오히려 기운이 펄펄 나고 몸이 새털처럼 가벼워짐을 느낀다. 삼국시절 8월 한가위에 모여 추수감사축제를 벌이던 '영고'등의 행사에서 3일밤낮을 음주가무하며 즐겼다는 옛 기록은 뻥이 아니다. 고래로 우리민족의 음악과 춤은 선도수행이 생활화된 문화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이다.
한민족의 문화가 정신에 기반한 반면 서양의 문화는 육신과 精에 기반한다. 의료체계 역시 만찬가지이다. 서양음악은 심취하면 精이 발하고 이에 음주가 더해지면 色이 동한다. 술-여자-마약이 함께하는 구조이다. 이는 다 이유가 있다.
이제 우리의 전통문화가 서양문화에 떠밀려 그 주인공들 에게서 조차 잊혀져 가고 있다. 우수운 처지이나 서양의 문화는 이제 자세한 부연설명이 필요없어진 반면, 우리의 전통문화에 대해서는 세세한 설명이 필요하다 하겠다.
그렇다면 우리의 원형정신, 문화는 무엇인가?
그 진수를 한시를 통해 비유해 본다.
이 무식한 본인은 불과 몇 달전에야 비로소, 한 지인이 선물한 한권의 책(한시미학산책-정민 지음) 한시의 참맛에 대해 조금 눈뜨며 스스로에게 얼마나 창피하였는지 모른다. 여러분도 한번 일독을 권한다. 우선 시 한수를 감상해 보자.....
흰둥개가 앞서가고 누렁개가 따라가는
들밭 풀가에는 무덤들이 늘어섰네.
제사마친 할아버지는 밭두둑 길에서
저물녘에 손주의 부축을 받고 취해서 돌아온다.
조선 중기의 이달이라는 시인의 작품이다. 이 시의 제목은 <무덤에 제사 지내는 노래>이다. 그냥 글귀만 보면 이게 무신 시인가??? 하는 생각이 들것이다. 아무것도 잡혀지는게 없다. 한가한 시골밭에 개 두 마리와 할아버지, 손자가 있고 무덤에 제사를 지내고 귀가하는 시골풍경 뿐이다. 정민교수의 해설을 들어보면 이 밋밋한 싯귀에서 진짜 진한 국물이 배겨 나오기 시작한다................. 자! 이제 조용히 눈을감고, 이 시속의 풍경을 그림으로 떠올려보자. 강아지 두 마리와 밭두둑이 보인다. 무덤들도 있다. 그리고 할아버지와 손자. 지금 여러분의 머릿속에는 어떤 생각이 지나가는가? 우리는 지금도 추석 때나 한식 날이되면 조상의 산소에 성묘를 간다. 아! 지금 할아버지와 손자는 조상의 산소에 성묘를 갔던 모양이로구나. 혹시 여러분 가운데 부모님을 따라서 할아버지나 증조할아버지의 산소에 성묘를 갔던 기억이 있는 사람들은 이 시속에 광경이 더 친숙하게 여겨질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만 보기에는 위 시의 내용이 왠지 너무 심심하다. 그래서 어쨌다는 걸까? 과연 시인이 말하려고 한 것은 이것이 전부일까? 주의깊게 살펴보면 이상한 부분을 발견해 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무엇일까? 우선 왜 아버지는 없고 할아버지와 손자만 성묘를 갔을까 하는 점이 궁금하기 짝이없다. 왜 산 위도 아니고, 밭두둑가에 풀밭에 무덤이 많다고 했을까? 보통 풀밭에는 무덤을 쓴지 않는데 말이다. 또 할아버지는 왜 술에 취했을까? 저물녘이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왜 할아버지는 하루종일 그렇게 술을 마시면서 무덤 옆을 떠나지 못했던 것일까? 이런 의문을 품고 이 시를 새로이 읽어보면 앞서와는 전혀다른 느낌이 일어난다. 이 시는 그냥 단순히 조상의 성묘를 갔다 온 장면을 노래한 것이 아니다.......................................................
두 사람이 제사를 지내준 주인공은 바로 시속에 나오는 할아버지의 아들이고, 손자의 아버지다. 받두둑 옆 풀밭에는 왜 그렇게 무덤이 많았을까? 아마도 전쟁이나 전염병 같은 재해나 병겁으로 한꺼번에 많은 사람들이 죽었던 모양이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북어서 사람들은 죽은 사람들을 양지바른 산위에다 묻을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소년의 아버지도 전쟁같은 전재지변을 만나 돌아가신 것이 틀림없다. 할아버지는 먼저간 아들의 무덤에서 속이 상했을 것이고 쉽게 마음을 정리못해 술취해 저녘녘에나 순수의 손에 이끌려 귀가하는 중이다. 이런 그림을 그리며 시를 다시 읽어보면 몇자 않되는 싯귀에서 참 많은 이야기와 감상이 넘쳐난다.
시인은 시 속에서 벌써 다 말하고 있지만 겉으론 이런 사실을 하나도 표현하지 않았다. 그렇게 돌려서 말하고 감추어 말하는 가운데, 저도 모르게 느낌이 일어나고 깨달음이 생겨난다. 이렇게 해서 생겨난 느낌과 깨달음은 지워지지 않고 오래도록 내 마음에 남는다.
이것은 마치 불가에서 행하는 ‘화두선법’과 같다. 한시의 예에서 보듯이 동양의 문화는 정신적 기반이며 구체적 실사를 억제한다. 실체의 모습보다 象을 더 중시한다. 보다 더 근원적인 것에 가치를 두기 때문이다.
말하지 않고 말하며, 보여주지 않고 보여주며, 다 보여주지 않고, 많은 부분을 생략하고 넉넉한 여백을 중시한다.
이런 태도는 음악에서도 여실히 나타난다.
요즘 젊은세대들의 대중가요를 들어보시라! 별의 별 악기가 다 동원되어 꽉 들어차다 못해, 현란하다 못해 어지럽고 터질 지경이다. 가수 김창완씨는 언젠가 이를두고 ‘꽉찬, 꾹꾹눌러싼 김밥같은 음악’이라고 표현하던데 매우 공감했다. 이런 음악은 오래들으면 피곤해 진다. 정서적으로 촉촉해 지는것이 아니라 말라 버린다.
이에 반해 국악은 어떤가?
졸릴 정도로 선율이 단순하고, 따분할 정도로 늘어진다. 오늘날 음악에 비해...
동양화 또한 마찬가지 이다. 서양화는 사진처럼 정교한 면을 기반으로 하나 동양화는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생략과 여백을 강조한다. 실물을 그리기 보다 ‘상’과 메시지를 그린다.
뒤에서 추가로 언급하겠지만....
우리문화의 이런 배경은 우리민족 근원태생이 정신세계(천상세계, 마음과 영의 세계)에서 출발하였기 때문이며, 서양문명은 물질세계(지상세계, 물리적 우주)에서 출발하였기 때문이다.
청학
- 2007.07.25
- 20:00:49
- (*.112.57.226)
지금은 두 문명이 만나는 시대입니다. 만나서보니 단지 기운만 다른 음양적 차이일 뿐! 물질과 에너지의 이기론 밖에 더 되나요? 동양의 기문명을 리문명<물질문명>으로 자리매김을 한 물질문명도 나름 역활을 하고 있습니다. 좋고 나쁨은 후대에서 따져볼 일이고..... 그 물질문명때문에 덕을 본 나라중에 대표적인 국가가 한국이기도 합니다.
표현상 두 문명을 나누는 건 그렇다해도 지금은 두 문명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의사들이 사상체질론과 침술을 많이 배우고 탐독하는 정도는 아실 겁니다. 그래서 대체의학을 미국은 한국보다 더 빨리 허용하게 된 것입니다.
대체의학이 영어로 다 아시죠?
alternative
환자가 자신의 고질병을 고칠 수 있도록 법이 선택을 준 것입니다.
하지만 한국은 선택이 없습니다.
법에서 선택을 안주었습니다.
오히려 미국이 더 동양적이라는 말을 하고 싶네요.
표현상 두 문명을 나누는 건 그렇다해도 지금은 두 문명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의사들이 사상체질론과 침술을 많이 배우고 탐독하는 정도는 아실 겁니다. 그래서 대체의학을 미국은 한국보다 더 빨리 허용하게 된 것입니다.
대체의학이 영어로 다 아시죠?
alternative
환자가 자신의 고질병을 고칠 수 있도록 법이 선택을 준 것입니다.
하지만 한국은 선택이 없습니다.
법에서 선택을 안주었습니다.
오히려 미국이 더 동양적이라는 말을 하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