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우리는 지금 어디쭘 있는 것일까 ?
즉, 지금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있는 것일까?
.
.
세상은 차원 높은 영적의식들의 투사체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의식과 태도를 취하고 있는 지를 알려면
자신의 의식이 펼쳐놓은 세상을 보면 된다.
세상을 이끄는 것은 시스템화된 의식이다.
그리고 이 시스템화된 의식 중 가장 강력한 것은 정치집단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우리나라 정치집단 모습을 살펴보자
물론, 이것은 당연히 내 개인적인 이해이며
지엽적인 것들은 배제한 골자만을 말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 정치판은 크게 네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하나는 옛날 기득권을 수호하며 변화를 거부하는 집단의식의 <한나라당>이고
하나는 개별화 되기는 했으나 뚜렷한 비전이 없어 무기력하기만 한 <열린우리당>이고
또 다른 하나는 구태를 벗고 새로운 정치를 모색하기는 하나 그 방식이 새롭지않아
제대로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있는 <범여권 통합연대>이고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기존의 인맥과 정치스타일을 모두 끊고
새로운 시대와 정신에 맞는 비전을 준비하며 <새로운 방식을 모색하는 손학규와 같은 정치인들>이다.
.
.
즉, 이 네가지 형태가 지금의 샴브라적 삶을 사는 사람들(또는 빛의 일꾼들)의 모습이며,
각자가 그 중 하나를 취해 머물고 있는 것이다.
두번 째 이야기
< 빛과 어둠에 대해>
빛과 어둠은 잘못된 표현이다.
밝음과 어둠이라야 맞다. 밝음의 양과 어둠의 음이 통합되어 빛을 만들기 때문이다.
언어를 바로 쓰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언어는 에너지이므로 지속적으로 사용하는 언어는 집단의식화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언어가 잘못되면 집단의식이 모호해져 방향감각을 잃게 된다.
분명, 빛과 어둠이 아니라, 밝음과 어둠이라고 표현해야 한다.
우리는 밝음과 어둠을 구분하며
자신을 밝음의 존재라고 말하는 데
실은 체화되지 않은 존재는 늘 밝음과 어둠의 두가지 속성을 모두 가지고 있다.
오히려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가는 일반인들 보다
스스로가 <밝음의 일꾼>이라 말하며 영성계에서 다양한 활동을 하는 존재는
내면에 아주 큰 어둠적 성향이 있는 것이다.
밝음은 스스로를 밝음이라 말하지 않으며
밝음은 어둠속에서만 성장할 수 있기 때문에
어둠을 스승으로 알고 포용하기 때문이다.
또, 밝음과 어둠은 하나의 놀이 장치이기 때문에
시대적 상황에 따라 그 개념이 달라진다.
그래서 배경을 고려하지 않은 채 자신을 밝음이라고 말하는 것은
객관성을 상실한 주관적인 견해일 뿐이다.
하지만 지금은 밝음과 어둠의 기준이 아주 명확하다.
즉, 밝음은 <사유의 장>을 내려놓고 <공유의 장>을 선택하고자 하는
창조주의 뜻에 동참하고자 하는 것이고
어둠은 그 명칭이 어떠하든 이것을 방해하는 성향들을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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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금 어디쭘 있는 것일까 ?
즉, 지금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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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차원 높은 영적의식들의 투사체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의식과 태도를 취하고 있는 지를 알려면
자신의 의식이 펼쳐놓은 세상을 보면 된다.
세상을 이끄는 것은 시스템화된 의식이다.
그리고 이 시스템화된 의식 중 가장 강력한 것은 정치집단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우리나라 정치집단 모습을 살펴보자
물론, 이것은 당연히 내 개인적인 이해이며
지엽적인 것들은 배제한 골자만을 말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 정치판은 크게 네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하나는 옛날 기득권을 수호하며 변화를 거부하는 집단의식의 <한나라당>이고
하나는 개별화 되기는 했으나 뚜렷한 비전이 없어 무기력하기만 한 <열린우리당>이고
또 다른 하나는 구태를 벗고 새로운 정치를 모색하기는 하나 그 방식이 새롭지않아
제대로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있는 <범여권 통합연대>이고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기존의 인맥과 정치스타일을 모두 끊고
새로운 시대와 정신에 맞는 비전을 준비하며 <새로운 방식을 모색하는 손학규와 같은 정치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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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이 네가지 형태가 지금의 샴브라적 삶을 사는 사람들(또는 빛의 일꾼들)의 모습이며,
각자가 그 중 하나를 취해 머물고 있는 것이다.
두번 째 이야기
< 빛과 어둠에 대해>
빛과 어둠은 잘못된 표현이다.
밝음과 어둠이라야 맞다. 밝음의 양과 어둠의 음이 통합되어 빛을 만들기 때문이다.
언어를 바로 쓰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언어는 에너지이므로 지속적으로 사용하는 언어는 집단의식화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언어가 잘못되면 집단의식이 모호해져 방향감각을 잃게 된다.
분명, 빛과 어둠이 아니라, 밝음과 어둠이라고 표현해야 한다.
우리는 밝음과 어둠을 구분하며
자신을 밝음의 존재라고 말하는 데
실은 체화되지 않은 존재는 늘 밝음과 어둠의 두가지 속성을 모두 가지고 있다.
오히려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가는 일반인들 보다
스스로가 <밝음의 일꾼>이라 말하며 영성계에서 다양한 활동을 하는 존재는
내면에 아주 큰 어둠적 성향이 있는 것이다.
밝음은 스스로를 밝음이라 말하지 않으며
밝음은 어둠속에서만 성장할 수 있기 때문에
어둠을 스승으로 알고 포용하기 때문이다.
또, 밝음과 어둠은 하나의 놀이 장치이기 때문에
시대적 상황에 따라 그 개념이 달라진다.
그래서 배경을 고려하지 않은 채 자신을 밝음이라고 말하는 것은
객관성을 상실한 주관적인 견해일 뿐이다.
하지만 지금은 밝음과 어둠의 기준이 아주 명확하다.
즉, 밝음은 <사유의 장>을 내려놓고 <공유의 장>을 선택하고자 하는
창조주의 뜻에 동참하고자 하는 것이고
어둠은 그 명칭이 어떠하든 이것을 방해하는 성향들을 이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