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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이란 것을 분리하면 ○ ┼ ○ 입니다.
인식과 인식사이의 자유로운 오고 감입니다.
영안에서 □ 는 무의 역할인 없음의 공간을 형성하게 되고,
그 안에서 무안의식인 초의식이 태어납니다.
초의식은 도를 따라 흐르는 것이 아닌 각 각 하나 하나가 전체의식입니다.
즉 초의식은 서로 만나지 않습니다. 각 각 존재하는 전체의식입니다.
이 초의식이 모여 하나의 전체의식을 이루면 그것을 무의식이라 불립니다.
무의식과 초의식은 의지가 존재하질 않습니다. 텅 비어있고 공입니다.
의지에 기인한 인식을 통한 의식은 무의식이 아닙니다.
보통 말하는 3이라는 숫자가 무의식을 말합니다.
무의식상태에서
공간에 흐르는 조화로운 도의 짜임안에 형태가 갖추어지는데
그 무의식이 영에 의지를 가지고 하나의 도의 짜임 형태안으로 들어오게 되면,
그것이 바로 하나 하나 존재하는 각 각의 분화된 빛의 의식들입니다.
빛의 의식들은 형태를 갖추고 있으며, 하나의 뚜렷한 흐름을 가지게 됩니다.
우리또한 어느 하나의 빛의 의식이 아닌 자유로운 무의식에서 먼저 서로의 생각을
교류합니다.
나의 생각이 당신의 생각이고 당신의 생각이 나의 생각인 까닭은
우리 모두의 의식적인 존재상태가 무의식에서 기인합니다.
무의식에서 짜임을 짜게 됨으로써 도가 흐르고 그 안에 의식이 들어가
빛으로 빛나게 되기 위해 우리 각각은 무의식안의 각 각의 전체적인 초의식을 표현하여
드러냅니다.
초의식이 도안으로 들어올때는 서로 전체적이기 때문에
서로 극의 의식이라면 커다란 충돌이 생김니다.
삶과 죽음, 안다와 모른다 처럼 말입니다.
그것은 그 자체로는 충돌이 일어나지 않지만 의지를 가지고 도안에 들어올때는
각 각이 전체적을 대변하기 때문입니다.
무엇도 서로가 옳지만 그 안에서 무의식중에 선택한 의지만을 고집하게 되었을때 충돌
이 일어나는것입니다.
그것이 서로의 선택한 짜임안의 초의식적 드러냄이 충돌하지 않고 자유롭게 흘렀을때
바로 빛의 의식이 태어납니다. 그것은 각 각 짜임안의 들어온 무의식안의 조화로움이
고, 그것의 무의식안의 조화라는 느낌은
"이 모든 세상에서 자기 자신은 존재하질 않는다. 나 자신은 존재하지 않지만 모든 존재는 존재한다. 나는 단지 나 자신은 없지만 인식하고 있다.나는 아무 것도 모른다. 나는 단지 나만을 인식할뿐이고 텅비어있기 때문이다.그러기에 세상의 창조는 내가 한것이 아니다. 나 이외의 모든 존재가 스스로 드러낸것이다. 그러기에 나는 항상 배운다. 나는 없기 때문이다. 나는 그러기에 받아들인다" 라고 생각합니다.
빛의 의식은 도안에 흐르는 조화로운 무의식입니다.
우리 각 각은 의식적인 시작에서는 모두 무의식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각 각에게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 안에서 각 각 무의식이
육신이라 말하는 우리 몸에 깃들고 그 몸을 선택한 것이 바로 무의식이라는 것입니다.
새들도 나무도 구름도 모두 마찬가지 입니다.
자신의 이름도 이름이 아니며 어떠한 되어짐도 자신이 단지 선택한것이지
본래 자신은 다른 존재와는 달리 여기서 기인한다 그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의식적인 상태에서는 모두 무의식에서 시작되었고,
또 영에서 시작되었고, 또 표현되어질 수 없는 그 비어있음으로부터 우리는 함께
시작되었고, 차원이 분리되어 드러나려면 우리가 각 각이 선택하여 그 안에서
부딪히며 조화롭게 모두 이루어졌을때 그 차원공간이 비로써 존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조화로움은 의지로 되는 일이 아니며, 어떤 무엇을 하고자함에서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좋은 형태라 하더라도 조화가 이루어질 려면 의지가 들어가면 이루어
지지 않습니다.
그 모든것을 놓아버리고, 그 상태에 존재하는 것.
그 상태에서 의지라는 것은 그냥 아무것도 붙이지 않은 "하고자 함"이면 됩니다.
그 하고자 함은 내가 드러나지 않았던 텅빔에서
삶이라는 형태의 도의 짜임안으로 들어와 육신의 도의 흐름도 느껴보고 그 표현되는
것을 즐기는 것입니다. 모든 형태는 이미 태어나있으며, 우리는 단지 선택하여
각 각 태어난 것입니다.
이 초의식들간의 조화는 영의 의지로부터 시작합니다.
서로의 인식을 통한 오고 감입니다.
서로가 인식을 하려면 인식의 확장은 자신의 몫입니다.
인식의 확장은 스스로를 항상 돌아볼때 일어납니다.
"모두 내 자신이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 라는 머무름이 아니라,
"모두 내 자신이라면 나는 이제부터 이런 선택을 하겠다."
라는 스스로의 확장된 변화입니다.
본래 자신의 전체적인 모습을 찾는 것은 어느 누가 도울 수 있는 일은 아니지만,
함께 서로를 이해해 주고 존중해주고 복돋아 준다면 서로에게 큰 힘이 되어집니다.
그러나 결국은 스스로의 몫입니다.
누가 높거나 누가 낮은것도 아니고, 누가 잘난거나 못난것도 아닙니다.
다 똑같습니다.
자신이 정말로 소중했던 것이 깨닮음인가? 사랑인가? 하나인가? 가르침인가?
한번 되돌아 볼 필요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당장 자신이 지위 모든 것을 버리고 자신의 모든 것을 걸 수 있는 것.
정말 자신에게 삶에 희망과 행복을 줄 수 있는것. 그것이 도대체 무엇일까요?
영은 인식을 통한 서로의 만남 그리고 교류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알아주려 할때 희망은 피어납니다.
안다는 것도 알아주고 모른다는 것도 알아주고, 믿음도 알아주고 배신도 알아주고,
존재도 알아주고 무도 알아주고,
결국은 자신이 받아들일때 어느 자세인가가 중요한듯 싶습니다.
저도 노력해야 될것 같습니다.
인식과 인식사이의 자유로운 오고 감입니다.
영안에서 □ 는 무의 역할인 없음의 공간을 형성하게 되고,
그 안에서 무안의식인 초의식이 태어납니다.
초의식은 도를 따라 흐르는 것이 아닌 각 각 하나 하나가 전체의식입니다.
즉 초의식은 서로 만나지 않습니다. 각 각 존재하는 전체의식입니다.
이 초의식이 모여 하나의 전체의식을 이루면 그것을 무의식이라 불립니다.
무의식과 초의식은 의지가 존재하질 않습니다. 텅 비어있고 공입니다.
의지에 기인한 인식을 통한 의식은 무의식이 아닙니다.
보통 말하는 3이라는 숫자가 무의식을 말합니다.
무의식상태에서
공간에 흐르는 조화로운 도의 짜임안에 형태가 갖추어지는데
그 무의식이 영에 의지를 가지고 하나의 도의 짜임 형태안으로 들어오게 되면,
그것이 바로 하나 하나 존재하는 각 각의 분화된 빛의 의식들입니다.
빛의 의식들은 형태를 갖추고 있으며, 하나의 뚜렷한 흐름을 가지게 됩니다.
우리또한 어느 하나의 빛의 의식이 아닌 자유로운 무의식에서 먼저 서로의 생각을
교류합니다.
나의 생각이 당신의 생각이고 당신의 생각이 나의 생각인 까닭은
우리 모두의 의식적인 존재상태가 무의식에서 기인합니다.
무의식에서 짜임을 짜게 됨으로써 도가 흐르고 그 안에 의식이 들어가
빛으로 빛나게 되기 위해 우리 각각은 무의식안의 각 각의 전체적인 초의식을 표현하여
드러냅니다.
초의식이 도안으로 들어올때는 서로 전체적이기 때문에
서로 극의 의식이라면 커다란 충돌이 생김니다.
삶과 죽음, 안다와 모른다 처럼 말입니다.
그것은 그 자체로는 충돌이 일어나지 않지만 의지를 가지고 도안에 들어올때는
각 각이 전체적을 대변하기 때문입니다.
무엇도 서로가 옳지만 그 안에서 무의식중에 선택한 의지만을 고집하게 되었을때 충돌
이 일어나는것입니다.
그것이 서로의 선택한 짜임안의 초의식적 드러냄이 충돌하지 않고 자유롭게 흘렀을때
바로 빛의 의식이 태어납니다. 그것은 각 각 짜임안의 들어온 무의식안의 조화로움이
고, 그것의 무의식안의 조화라는 느낌은
"이 모든 세상에서 자기 자신은 존재하질 않는다. 나 자신은 존재하지 않지만 모든 존재는 존재한다. 나는 단지 나 자신은 없지만 인식하고 있다.나는 아무 것도 모른다. 나는 단지 나만을 인식할뿐이고 텅비어있기 때문이다.그러기에 세상의 창조는 내가 한것이 아니다. 나 이외의 모든 존재가 스스로 드러낸것이다. 그러기에 나는 항상 배운다. 나는 없기 때문이다. 나는 그러기에 받아들인다" 라고 생각합니다.
빛의 의식은 도안에 흐르는 조화로운 무의식입니다.
우리 각 각은 의식적인 시작에서는 모두 무의식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각 각에게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 안에서 각 각 무의식이
육신이라 말하는 우리 몸에 깃들고 그 몸을 선택한 것이 바로 무의식이라는 것입니다.
새들도 나무도 구름도 모두 마찬가지 입니다.
자신의 이름도 이름이 아니며 어떠한 되어짐도 자신이 단지 선택한것이지
본래 자신은 다른 존재와는 달리 여기서 기인한다 그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의식적인 상태에서는 모두 무의식에서 시작되었고,
또 영에서 시작되었고, 또 표현되어질 수 없는 그 비어있음으로부터 우리는 함께
시작되었고, 차원이 분리되어 드러나려면 우리가 각 각이 선택하여 그 안에서
부딪히며 조화롭게 모두 이루어졌을때 그 차원공간이 비로써 존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조화로움은 의지로 되는 일이 아니며, 어떤 무엇을 하고자함에서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좋은 형태라 하더라도 조화가 이루어질 려면 의지가 들어가면 이루어
지지 않습니다.
그 모든것을 놓아버리고, 그 상태에 존재하는 것.
그 상태에서 의지라는 것은 그냥 아무것도 붙이지 않은 "하고자 함"이면 됩니다.
그 하고자 함은 내가 드러나지 않았던 텅빔에서
삶이라는 형태의 도의 짜임안으로 들어와 육신의 도의 흐름도 느껴보고 그 표현되는
것을 즐기는 것입니다. 모든 형태는 이미 태어나있으며, 우리는 단지 선택하여
각 각 태어난 것입니다.
이 초의식들간의 조화는 영의 의지로부터 시작합니다.
서로의 인식을 통한 오고 감입니다.
서로가 인식을 하려면 인식의 확장은 자신의 몫입니다.
인식의 확장은 스스로를 항상 돌아볼때 일어납니다.
"모두 내 자신이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 라는 머무름이 아니라,
"모두 내 자신이라면 나는 이제부터 이런 선택을 하겠다."
라는 스스로의 확장된 변화입니다.
본래 자신의 전체적인 모습을 찾는 것은 어느 누가 도울 수 있는 일은 아니지만,
함께 서로를 이해해 주고 존중해주고 복돋아 준다면 서로에게 큰 힘이 되어집니다.
그러나 결국은 스스로의 몫입니다.
누가 높거나 누가 낮은것도 아니고, 누가 잘난거나 못난것도 아닙니다.
다 똑같습니다.
자신이 정말로 소중했던 것이 깨닮음인가? 사랑인가? 하나인가? 가르침인가?
한번 되돌아 볼 필요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당장 자신이 지위 모든 것을 버리고 자신의 모든 것을 걸 수 있는 것.
정말 자신에게 삶에 희망과 행복을 줄 수 있는것. 그것이 도대체 무엇일까요?
영은 인식을 통한 서로의 만남 그리고 교류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알아주려 할때 희망은 피어납니다.
안다는 것도 알아주고 모른다는 것도 알아주고, 믿음도 알아주고 배신도 알아주고,
존재도 알아주고 무도 알아주고,
결국은 자신이 받아들일때 어느 자세인가가 중요한듯 싶습니다.
저도 노력해야 될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