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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란시아서. 예수의 일생과 가르침. 제 136편. 세례와 사십일
4. 대중 사업을 위한 계획
날마다 산에서, 예수는 유란시아 수여에서 여생(餘生)을 위하여 계획을 세웠다. 먼저 요한과 같은 시기에 가르치지 않기로 작정하였다. 요한의 일이 목적을 이룰 때까지, 아니면 갑자기 갇혀서 요한이 멈추기까지, 비교적 은둔 상태에 남아 있기로 계획하였다. 예수는 요한의 두려움 없고 요령(要領) 없는 전도가 곧 집권자들의 두려움과 적의를 일으킬 것을 잘 알았다. 요한의 불안한 상황에 비추어서, 예수는 민족과 세계의 이익을 위하여, 그의 광대한 우주에 두루, 사람 사는 모든 세계를 위하여, 대중 임무 계획을 분명히 세우기 시작했다. 사람으로 미가엘의 자신 수여는 유란시아에서 있었지만, 네바돈의 모든 세계를 위한 것이었다.
자기의 프로그람을 요한의 운동과 조정하는 대강 계획을 살펴본 뒤에, 예수가 먼저 한 일은 머리 속에서 이마누엘의 지시(指示)를 검토하는 것이었다. 수고하는 방법에 관하여 받은 충고, 혹성(惑星)에 아무런 영구 기록을 남겨서는 안 된다는 것을 조심스럽게 생각해 보았다. 모래를 빼고, 예수는 결코 다시 어떤 것에도 글을 쓰지 않았다. 다음에 나사렛을 방문할 때, 동생 요셉이 아주 서운해하였지만, 예수는 목수 작업장 근처의 판자들에 보존되어 있고, 옛 집의 벽에 걸려 있던 기록을 모조리 없애 버렸다. 그가 발견한 세상에 대한 경제,사회,정치적 태도에 관하여 이마누엘이 준 총고(忠告)를 곰곰이 생각하였다.
예수는 혼자 있는 이 40일 동안에 금식하지 않았다. 먹을 것이 없이 지낸 가장 오랜 기간은 산 속에서 처음 이틀이었고, 그 때 생각에 너무 골똘하여 먹는 것을 모두 잊어 버렸다. 그러나 사흘째에 먹을 것을 찾아서 갔다. 이 기간에 이 세상에서 주둔하거나 어느 다른 세상에서 온, 어떤 악한 영이나 반란 성격자들에게 시험 받지도 않았다.
이 40일은 인간 지성과 신(神) 지성 사이에 마지막 회의가 있은 기회, 아니 오히려 이 두 지성이 이제 하나가 되어 처음으로 정말로 활동하는 때였다.이 중대한 명상의 시간으로부터 생긴 결과는, 신의 지성이 인간의 지능을 이기고 영적으로 지배했음을 확고히 보여 주었다. 이 때부터 계속, 사람의 지성은 하나님의 지성이 되었고, 비록 사람 지성의 자아(自我)가 늘 자리에 있었어도, 영적으로 변화된 인간 지성은 언제나 말한다. "내 뜻이 아니라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이 중대한 시간에 일어난 거래는 굶고 허약해진 지성이 황홀한 환상을 본 것이 아니고, "황야에서 받은 예수의 시험"이라고 나중에 기록에 남은, 뒤범벅이 된 유치한 상징(象徵)도 아니었다. 오히려 이 기간은 유란시아 수여에서 중대하고 다채로운 생애 전체에 대하여 생각하고, 한편 또한 반란으로 고립된 모든 다른 구체를 개선하는 데 무언가 이바지하면서, 이 세상에 최선(最善)으로 쓰이도록 계속 봉사하는 계획을 조심스럽게 세우기 위한 것이었다. 안돈과 폰타의 시절부터, 아담의 실수를 거쳐서, 또 살렘에 있던 멜기세덱의 봉사에 이르기까지, 예수는 유란시아에서 인간 생활의 폭 전체를 생각해 보았다.
한동안 유란시아에 머무르기로 할 경우에, 자신을 세상에 나타낼 수 있는 방법이 두 가지 있다고 가브리엘은 예수에게 상기시켰다. 이 문제에서 그의 선택은 우주 통치권이나 루시퍼 반란의 종결과 아무 상관이 없으리라는 것이 예수에게 뚜렷이 전달되었다. 세계에 봉사하는 두 가지 길은 다음과 같다:
1. 자기의 길-이 세상의 직접적 요구와 자신의 우주를 현재, 교육하는 관점에서 가장 쾌적하고 유익하게 보일까 싶은 길.
2. 아버지의 길-온 우주의 파라다이스 행정을 맡은 높은 성격자들이 상상하는 바 피조물 생명의 이상, 멀리 내다보는 이상을 모범으로 보이는 것.
땅에서 여생(餘生)을 정리할 수 있는 두 가지 길이 이처럼 예수에게 뚜렷해졌다. 이 길들은 각기, 눈앞의 상황에 비추어서 볼 때, 좋다고 볼 수 있는 무엇이 있었다. 이 두 가지 행동 방법 사이의 선택은 우주 통치권을 받는 것과 아무 상관이 없으리라는 것이 사람의 아들에게 분명해졌다. 그것은 이미 결정되었고 온 우주의 기록에서 봉인(封印)된 문제요, 친히 청구하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예수가 언제나 아버지의 뜻에 복종하여 그렇게 고귀하게 시작한 것처럼, 땅에서 육신화하는 생애를 마치는 것을 좋게 본다면, 파라다이스 형 이마누엘에게 큰 만족감을 주리라는 것이 지적되었다. 이렇게 혼자 있는 가운데 사흘째, 예수는 땅에서 생애를 마치려고 세상으로 돌아가겠다고, 두 가지 길이 있는 상황에서 언제나 아버지의 뜻을 택하리라고 다짐하였다. 그 결심에 언제나 충실하게, 땅에서 여생을 끝까지 살았다. 쓰디쓴 끝날까지 군주의 뜻을 하늘 아버지의 뜻에 변함없이 복종시켰다.
산의 불모지에서 40일 동안은, 큰 시험을 받는 기간이 아니라, 오히려 주가 큰 결정을 내린 기간이었다. 자신과 혼자서, 아버지의 가까운 계심과-성격화된 조절자와-교통하던 이 기간에 (개인 수호 천사가 이제 더 없었다) 하나씩 큰 결정에 도달했고, 이것은 땅에서 여생 동안 그의 정책과 행위를 통제하게 되었다. 큰 시험이 있었다는 전통(傳統)이 나중에, 이 고립된 기간에 달라붙게 되었는데, 이는 헤르몬 산에서 있었던 투쟁에 관한 이야기 조각들과 뒤섞여, 더 나아가서 금식하고 기도했다고 생각된 이 기간을 거침으로써, 모든 위대한 선지자와 인간 지도자가 공생애(公生涯)를 시작하게 만드는 것이 관습이었기 때문이었다. 새롭거나 심각한 어떤 결정에 부닥쳤을 때, 하나님의 뜻을 알기를 추구하려고, 자신의 영과 교통하려고 은둔하는 것이 언제나 예수의 관습이었다.
땅에서 여생의 이 모든 계획에서, 예수는 두 가지 상반되는 행동 과정 때문에 인간 마음이 언제나 갈등이 있었다:
1. 민족-그리고 전 세계-가 그를 믿고 영적인 새 하늘나라를 받아들이도록 설득하려는 강력한 소망을 품었다. 오시는 메시아에 관하여 그들이 가진 생각을 잘 알고 있었다.
2. 아버지가 승인하리라고 생각한 대로 살고 일하며, 곤경에 빠진 다른 세계들의 이익을 위하여 일을 처리하고, 하늘나라를 세우는 일에 계속 아버지를 드러내고, 아버지의 신성한 사랑하는 성품을 보여 주는 것.
이 중대한 기간 내내, 예수는 고대(古代)의 바위 동굴 안에서 살았고, 여기는 바이트 아디스라고 언젠가 부른 마을 가까이, 산 옆에 있는 피난처였다. 그는 이 바위 피난처 가까이 있는 산 옆에서 나온 작은 샘물로부터 물을 마셨다.
4. 대중 사업을 위한 계획
날마다 산에서, 예수는 유란시아 수여에서 여생(餘生)을 위하여 계획을 세웠다. 먼저 요한과 같은 시기에 가르치지 않기로 작정하였다. 요한의 일이 목적을 이룰 때까지, 아니면 갑자기 갇혀서 요한이 멈추기까지, 비교적 은둔 상태에 남아 있기로 계획하였다. 예수는 요한의 두려움 없고 요령(要領) 없는 전도가 곧 집권자들의 두려움과 적의를 일으킬 것을 잘 알았다. 요한의 불안한 상황에 비추어서, 예수는 민족과 세계의 이익을 위하여, 그의 광대한 우주에 두루, 사람 사는 모든 세계를 위하여, 대중 임무 계획을 분명히 세우기 시작했다. 사람으로 미가엘의 자신 수여는 유란시아에서 있었지만, 네바돈의 모든 세계를 위한 것이었다.
자기의 프로그람을 요한의 운동과 조정하는 대강 계획을 살펴본 뒤에, 예수가 먼저 한 일은 머리 속에서 이마누엘의 지시(指示)를 검토하는 것이었다. 수고하는 방법에 관하여 받은 충고, 혹성(惑星)에 아무런 영구 기록을 남겨서는 안 된다는 것을 조심스럽게 생각해 보았다. 모래를 빼고, 예수는 결코 다시 어떤 것에도 글을 쓰지 않았다. 다음에 나사렛을 방문할 때, 동생 요셉이 아주 서운해하였지만, 예수는 목수 작업장 근처의 판자들에 보존되어 있고, 옛 집의 벽에 걸려 있던 기록을 모조리 없애 버렸다. 그가 발견한 세상에 대한 경제,사회,정치적 태도에 관하여 이마누엘이 준 총고(忠告)를 곰곰이 생각하였다.
예수는 혼자 있는 이 40일 동안에 금식하지 않았다. 먹을 것이 없이 지낸 가장 오랜 기간은 산 속에서 처음 이틀이었고, 그 때 생각에 너무 골똘하여 먹는 것을 모두 잊어 버렸다. 그러나 사흘째에 먹을 것을 찾아서 갔다. 이 기간에 이 세상에서 주둔하거나 어느 다른 세상에서 온, 어떤 악한 영이나 반란 성격자들에게 시험 받지도 않았다.
이 40일은 인간 지성과 신(神) 지성 사이에 마지막 회의가 있은 기회, 아니 오히려 이 두 지성이 이제 하나가 되어 처음으로 정말로 활동하는 때였다.이 중대한 명상의 시간으로부터 생긴 결과는, 신의 지성이 인간의 지능을 이기고 영적으로 지배했음을 확고히 보여 주었다. 이 때부터 계속, 사람의 지성은 하나님의 지성이 되었고, 비록 사람 지성의 자아(自我)가 늘 자리에 있었어도, 영적으로 변화된 인간 지성은 언제나 말한다. "내 뜻이 아니라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이 중대한 시간에 일어난 거래는 굶고 허약해진 지성이 황홀한 환상을 본 것이 아니고, "황야에서 받은 예수의 시험"이라고 나중에 기록에 남은, 뒤범벅이 된 유치한 상징(象徵)도 아니었다. 오히려 이 기간은 유란시아 수여에서 중대하고 다채로운 생애 전체에 대하여 생각하고, 한편 또한 반란으로 고립된 모든 다른 구체를 개선하는 데 무언가 이바지하면서, 이 세상에 최선(最善)으로 쓰이도록 계속 봉사하는 계획을 조심스럽게 세우기 위한 것이었다. 안돈과 폰타의 시절부터, 아담의 실수를 거쳐서, 또 살렘에 있던 멜기세덱의 봉사에 이르기까지, 예수는 유란시아에서 인간 생활의 폭 전체를 생각해 보았다.
한동안 유란시아에 머무르기로 할 경우에, 자신을 세상에 나타낼 수 있는 방법이 두 가지 있다고 가브리엘은 예수에게 상기시켰다. 이 문제에서 그의 선택은 우주 통치권이나 루시퍼 반란의 종결과 아무 상관이 없으리라는 것이 예수에게 뚜렷이 전달되었다. 세계에 봉사하는 두 가지 길은 다음과 같다:
1. 자기의 길-이 세상의 직접적 요구와 자신의 우주를 현재, 교육하는 관점에서 가장 쾌적하고 유익하게 보일까 싶은 길.
2. 아버지의 길-온 우주의 파라다이스 행정을 맡은 높은 성격자들이 상상하는 바 피조물 생명의 이상, 멀리 내다보는 이상을 모범으로 보이는 것.
땅에서 여생(餘生)을 정리할 수 있는 두 가지 길이 이처럼 예수에게 뚜렷해졌다. 이 길들은 각기, 눈앞의 상황에 비추어서 볼 때, 좋다고 볼 수 있는 무엇이 있었다. 이 두 가지 행동 방법 사이의 선택은 우주 통치권을 받는 것과 아무 상관이 없으리라는 것이 사람의 아들에게 분명해졌다. 그것은 이미 결정되었고 온 우주의 기록에서 봉인(封印)된 문제요, 친히 청구하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예수가 언제나 아버지의 뜻에 복종하여 그렇게 고귀하게 시작한 것처럼, 땅에서 육신화하는 생애를 마치는 것을 좋게 본다면, 파라다이스 형 이마누엘에게 큰 만족감을 주리라는 것이 지적되었다. 이렇게 혼자 있는 가운데 사흘째, 예수는 땅에서 생애를 마치려고 세상으로 돌아가겠다고, 두 가지 길이 있는 상황에서 언제나 아버지의 뜻을 택하리라고 다짐하였다. 그 결심에 언제나 충실하게, 땅에서 여생을 끝까지 살았다. 쓰디쓴 끝날까지 군주의 뜻을 하늘 아버지의 뜻에 변함없이 복종시켰다.
산의 불모지에서 40일 동안은, 큰 시험을 받는 기간이 아니라, 오히려 주가 큰 결정을 내린 기간이었다. 자신과 혼자서, 아버지의 가까운 계심과-성격화된 조절자와-교통하던 이 기간에 (개인 수호 천사가 이제 더 없었다) 하나씩 큰 결정에 도달했고, 이것은 땅에서 여생 동안 그의 정책과 행위를 통제하게 되었다. 큰 시험이 있었다는 전통(傳統)이 나중에, 이 고립된 기간에 달라붙게 되었는데, 이는 헤르몬 산에서 있었던 투쟁에 관한 이야기 조각들과 뒤섞여, 더 나아가서 금식하고 기도했다고 생각된 이 기간을 거침으로써, 모든 위대한 선지자와 인간 지도자가 공생애(公生涯)를 시작하게 만드는 것이 관습이었기 때문이었다. 새롭거나 심각한 어떤 결정에 부닥쳤을 때, 하나님의 뜻을 알기를 추구하려고, 자신의 영과 교통하려고 은둔하는 것이 언제나 예수의 관습이었다.
땅에서 여생의 이 모든 계획에서, 예수는 두 가지 상반되는 행동 과정 때문에 인간 마음이 언제나 갈등이 있었다:
1. 민족-그리고 전 세계-가 그를 믿고 영적인 새 하늘나라를 받아들이도록 설득하려는 강력한 소망을 품었다. 오시는 메시아에 관하여 그들이 가진 생각을 잘 알고 있었다.
2. 아버지가 승인하리라고 생각한 대로 살고 일하며, 곤경에 빠진 다른 세계들의 이익을 위하여 일을 처리하고, 하늘나라를 세우는 일에 계속 아버지를 드러내고, 아버지의 신성한 사랑하는 성품을 보여 주는 것.
이 중대한 기간 내내, 예수는 고대(古代)의 바위 동굴 안에서 살았고, 여기는 바이트 아디스라고 언젠가 부른 마을 가까이, 산 옆에 있는 피난처였다. 그는 이 바위 피난처 가까이 있는 산 옆에서 나온 작은 샘물로부터 물을 마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