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글 수 17,677
유란시아 글의 기원
윌리암 에스 새들러 박사(Dr. William S. Sadler)
(이 글의 저자에 관한 소개는 맨 마지막에 소개되어 있습니다.)
유란시아 글의 탄생을 가능하게 하였던 그 초기의 "예비접촉"그룹의 여러 명은 초자연 현상이나 심령분야의 조사와 분석에 권위와 명성을 얻고 있는 의사, 학자와 과학자들이었다. 나중에 유란시아 기록에 참여하게 되는, 이 그룹에서는 "접촉자"와 관련되어 일어나는 현상들이, 그때까지 밝혀진 그 어떤 초자연 현상이나 또는 심령 현상으로도 결코 설명될 수 없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이 현상들은 최면, 무의식적 기록, 투시력, 신들린 상태, 영매, 텔레파시 또는 이중 인격체등 그 어떤 현상으로도 설명할 수 없었다. 유란시아 기록들이 나타나기 그 이전의 현상들도, 인간이 아닌 존재들과의 일반적인 교신이나 영적교류등에서 나타내는 속칭 "심령"현상과는 전혀 관련 지울 수 없다는 것이 명백했다.
유란시아 글들을 가능하게 한 접촉행위
유란시아 기록들이 탄생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보이지 않는 친구"들은 우리들을 오랫동안 대화방법과 기술에서 훈련시키고, "접촉위원회"가 구성되게 하였으며 그리고 "접촉매개자"를 철저하게 시험해온 것이라는 사실을 나중에 결론적으로 알게 되었다.
처음 여러 해 동안 우리들은 "우주의 우주"와 지구에서의 인간 생애에 대하여 많은 새롭고도 생소한 개념을 배우게 되었다. 우주론과 철학에서의 이 많은 새로운 개념을 통하여 아래와 같은 것을 알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1.
광범위한 우주에 대한 개념
2.
생명체가 존재하는 수백만개의 행성
3.
신성한 하늘세계에 존재하는 서로 다른 고유성을 가진 이들과 그들의 등급
4.
진화하는 천체에서의 인간의 기원에 대한 증거
5.
여러 창조자 신의 암시
6.
우리가 가진 신앙 개념의 시험과 우리의 종교관 및 철학적 사고 발전 가능성의 판단
7.
20년이상을 통하여 알지 못하는 사이, 우리가 보는 종교의 기본개념과 자세에 끼친 변화
8.
"첫째 근원과 중심", "하보나", "초우주" 그리고 "최극존재"과 같은 용어에 대하여, 비록 아직까지도 진정한 의미를 모르지만,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9.
마찬가지로 진정한 의미가 조금 파악되는 한계 내에서, "주(主) 영" "공간 외부" 및 "주권자"와 같은 용어들을 알게 되었다.
10.
우리가 생각하는 의미가 애매 모호한 "생각조절자"에 대한 얘기
11.
새로운 개념의 단어로서 "하급"을 사용한 "존재의 하급차원"에 대한 개념 인식
12.
여러 "접촉"과정에서 자주 얘기를 나누어 중도자들을 완전히 알게 됐으며 이 접촉을 관리하는 2차 중도자를 완전히 이해하였다.
13.
루시퍼 반란에 대하여는 여러 얘기를 들었으나, 아담과 이브에 관하여서는 많이 듣지 못하였다.
14.
유란시아에서의 예수님 소명봉사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는 점에 대하여 감명을 얻게 되었으나, 계시되지 않아야 하는 그 본래의 이유는 거의 혹은 상세히 알 수 없었다.
15.
종종 예수님의 생애와 가르침을 기준하여 얘기를 들었으나 미가엘의 유란시아 증여에 관하여 새로운 개념을 소개할 때 그들은 매우 조심스러워 하였다. 모든 유란시아 계시 중에서 예수님에 관한 글은 가장 놀라운 것이었다.
16.
"최종자 무리단" 계층에 대하여는 듣지 못하여,구원 받은 인간의 목적지는 낙원(파라다이스)일 것이라는 막연한 개념을 도입하였다.
우리의 "초인간 친구"들은 이러한 것들 때문에 우주에 대한 우리의 시야를 향상시키고, 신학적 개념을 확대시키고 전반적인 철학적 사고를 넓히기 위하여 20년을 사용한 것이었다.
글들이 도착되기 전 까지는 우리의 신학적 사고가 얼마나 확대되었는지 결코 깨닫지 못하였다. 계시가 진행되는 동안, 우리는 "예비접촉"을 통하여 20년 동안 받은 예비-교육으로 우리의 종교적 믿음에 엄청난 변화가 준비되었었다는 점을 알고 무한한 감사를 가지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볼 때 유란시아 기록들을 내 놓게 되는 우리의 역할을 위해 그동안 받은 제자훈련은, 중도자들과의 접촉을 제외하고는 동시에 접촉이 일어나는 일이 없도록 진행되었다.
종종 유란시아 방문자와도 만나기도 하였으며 모든 접촉은 모두 완전히 달랐다. 이 모든 것은 준비된 교육으로, 우리의 우주관, 종교관 및 철학관을 확장시키는 체험을 가져왔으며, 광범위한 우주 사물의 배열에 대한 개념이나 새로운 관념을 우리 스스로의 소개로서 거론되지 않도록 하였다.
"예비접촉" 중에, 중도자들이 예수님의 일생과 사역에 관하여 제한적으로 얘기 한 것은, 미가엘 헌신 얘기를 일 년 동안에 걸쳐 나중에 다시 할 때 명확히 밝힌 것처럼, 허락받은 범위 내에서만 그들이 얘기해야 했던 때문이었다.
우리는 야간에 교대해 가면서 참여했던 처음에는 우리가 어떤 "초자연 세계"와 접촉하고 있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다. 이들의 메시지가 글씨로 전해지는 그 원인과 방법을 추정하고 이를 과학적으로 철저하게 폭로하려는, 초기 몇 년 동안에 걸친 우리의 모든 관찰과 조사는 완전히 실패로 끝났다.
유란시아 기록들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접촉체험"이 있은지 대략 20년이 지난, 어느 야간 교대 중에 한 "학습 방문자" 가 이 잠자는 매개자를 통하여 우리 질문 중 하나에 대하여 이야기하면서, 말하기를 " 당신들이 지금 접촉하고 있는 상대방이 어떤 존재인지를 안다면 그렇게 의도적인 질문들은 하지 않을 것이다. 차라리 인간의 삶에서 무엇이 최고 가치인지 그러한 해답이 나올 수 있는 질문들을 하는 것이 더 좋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이 얘기는 우리에게 약간의 충격과 부드러운 질책과 같은 것이었고, 이로 인해 우리는 현재의 특별한 경험을 새롭고 다른 방법으로 조명하게 되었다. 그 밤이 지나 우리 중 한명이 말하였다. "저들이 요청한대로, 인간으로서는 답변할 수 없는 질문들을 해 보기로 하자"
이제 이야기를 여기에서 잠시 멈추고, 새롭고 다른 얘기로 돌리는 것이 매우 좋을 듯 하다.
토론회(Forum)는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윌리암 새들러(Dr. William S Sadler)박사는 처음에는 조사자 및 관찰자의 자격으로, 나중에 "토론회(Forum)"로 알려진 그룹에 참여했던 사람들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얘기한다.
"캔사스 대학 몇 군데에서 형태심리학 강의를 하기 위해 가는 중에, 내 아들에게 의사들은 오래된 환자와의 접촉을 유지해야 한다고 얘기하면서 편지를 보내서 , 엄마에게 일요일 오후 1-2시간쯤 오랜 친구들을 초대하여 서로 만나 일상생활과 정세얘기를 할 수 있는지를 알아보라고 했다. 시카고로 돌아온 어느 일요일 아침에, 아내가 그 날 오후 3시에 우리의 오랜 환자들을 우리집에서 만나도록 주선한 것을 알았다. 이로서 일요일 오후모임이 시작되어, 맨 처음 건강얘기-감기치료법, 원인과 처방 및 후유증-를 하였고 차를 마신 후에는 질문과 답변 형식으로 허물없는 얘기를 하게 되었다.
시일이 지나면서, 이 모임은 의사, 법률가, 정부관리, 교사등 각계의 남, 녀 전문가들과 농부, 주부, 사무원, 비서 일반 근로자등 일상생활 각 분야의 개인이 참여하는 하나의 범 계층적 모임이 되었다."
"접촉자(Contacts)"를 "토론회(Forum)" 소개
그때, 나는 '정신건강' 혹은 '심령현상들'에 관한 연속 강연을 요청받고 있었는데, 처음 강연을 시작하면서 나는 말하였다.
"한 두개의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 이제껏 내가 조사한 모든 심령현상은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인 속임수라는 것이 밝혀졌다. 많은 것들은 아주 교묘한 속임 이었으며 여타 특별한 경우는 스스로의 무의식에 자기도 모르게 속고 있는 희생자들이었다. "
이때 모임의 한 명이 " 박사님, 방금 한 두게 예외가 있다고 하셨는 데, 상대하신 것 중에서 그 예외라고 하신 이해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 얘기해 주시면 아주 재미있을 것 같은데요" 하고 말 했을 때, 위에서 소개한 '어떤 현상인지 분석할 수가 없는 사례"라는 얘기 외에는 더이상 할말이 없어서 나는 그 대신, 그 접촉을 통해서 얻은 내용들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소개하려고 레나 박사(Dr. Lena)에게 최근에 얻은 기록자료들을 모임에서 읽어보라고 요청했다.
이때까지는 이 사건과 관련하여 어떤 비밀도 없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유란시아 글들은 이때에는 나타나지 않았었다. 우리집에서의 일요일 오후 모임이 "토론회(Forum)"라고 불리게 된 것이 이 때쯤이다.
모임에서 소개된 이 기록의 사례와 내용은, 내가 그동안 강연해온 여러 의학관련 발표에서도 얻지 못했던 굉장한 관심을 끌었다. 이렇게 해서 그 내용에 대한 격의없는 토론이 매 주마다 계속 이어지게 되었고, 우리에게 좀더 진지한 질문을 하면 인간의 가치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거라는 권유를 듣기까지 되었다.
"토론회(Forum)"의 질문 시작
우리는 "토론회(Forum)"에 이 사례와 관련된 모든 것을 얘기하고, 질문내용을 만드는데 모두 동참하도록 초청하였으며 그 시대의 어떠한 사람들의 지식으로도 알 수없는 우주의 기원, 신, 창조등에 관련된 질문을 시작하기로 결정하였다.
그 다음 일요일에 수백개의 질문이 모아졌고, 우리는 이 중에서 공정하게, 중복되는 것을 추리면서 이 질문들을 정리하였다. 이때부터,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대답으로 최초의 유란시아 글이 나타나게 되었다. 처음 질문부터, 마지막 질문까지 답변하는 글들이 나타나면서 질문들은 차츰 줄어들었다.
이것이 유란시아 기록들을 수년간에 걸쳐 받게 된 과정이다.
질문이 없어지자 더 이상의 글도 없었다.
"토론회(Forum)"가 배타적인 모임으로 되다.
이 즈음, 예전 성격의 "토론회(Forum)"는 우리에게서 점차 멀어져 가기 시작했으며, 우리는 이 "토론회(Forum)"를 회원에 한하여 기록들을 토의하고 그 내용에 대한 비밀을 지킬 것에 서명하는 배타적인 모임으로 만들 것을 권유 받았다.
이로서 회원을 모집하게 되었고, 30명의 회원이 모여 설립하게 되었다. 이 조직이 구성된 것은 1925년 9월이었고 설립회원중 17명이 현재까지 생존하고 있다.
질문들을 모으고 손으로 적은 기록본을 타자본과 비교하는 임무를 맡은 회원들을 "접촉위원회"로 부르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접촉위원회" 회원들만이 "접촉"에 참가하면서 "접촉매개자"를 통하여 기록된 전갈들을 받게 되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새로운 회원이 설립회원의 면담을 통하여 그리고 모임의 서약서에 서명함으로서 "토론회(Forum)"에 가입하게 되었다.
이 서약서 내용은 " 소속회원 이외의 누구와도 유란시아 계시와 그와 관련된 주제에 관하여 토론하지 않을 것과 , 비밀을 지킬 것과, 어떠한 공개 장소에서도 기록이나 비망록을 읽거나 논의하지 않으며 우리가 읽은 모든 내용을 복사하지 않는다" 이었다.
17년 동안 계속 내려온 이 "토론회(Forum)"의 총 회원 수는 486명 이었으며 마지막 모임은 1942년 3월 31이었다. 유란시아 기록들을 받은 기간 동안, 300 이상의 각 개인이 계속 이어지는 이러한 질문을 만드는데 참여하였고, 몇 개를 제외하고는, 모든 질문은 유란시아 기록들로 답변되었다.
유란시아 기록을 받음
유란시아 기록의 출처가 어디인지를 알 수 있는 것이 여러 군데에서 찾을 수 있다.
유란시아서 안의 참조표에서 이들의 목록을 볼 수 있다.
몇 개의 예를 간단히 살펴보자.
1.
페이지1, 문단 2.
이 단락에서 영어와 같은 인간의 언어를 사용하면서 광범위한 영적 개념을 알려주는 것에 어려움이 있음을 알 수 있다.
2.
페이지1, 문단 4.
"오르본톤 위원회"가 계시에 참여하며 머릿말을 작성했다.
[3번-12번의 내용은 번역소개를 생략합니다. -상세사항은 영문페이지 참조 바랍니다]
13.
페이지1007, 문단 1.
계시들은 진화되는 상태와 항상 연관성을 유지하며 그 시대의 구원에 알맞게 되어진다.
새로운 계시는 그 전의 계시들과 관련하여 일관성이 유지된다.
왜 우리들은 "유란시아"글을 단 한번에 받을 수 없었는가
최근, '유란시아' 책을 공부하고 있는 북 인디아나의 목사모임에서 새들러 박사와 함께 저녁 내내 "왜 '유란시아서' 전체로서 한꺼번에 받을 수 없었을까"를 토론하였다. 다음이 그 요지이다.
나중에 유란시아 기록이 탄생될 수 있게 한, 처음의 예비 "접촉"에 참여했던 일부 회원은 심령현상에 대한 분석에서 권위있는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 모임은 이미 처음에 나타났었던 개체현상이 여지껏 알려진 최면, 무의식적 기록, 투시력, 신들린 상태, 영매, 텔레파시 또는 이중 인격체 등 그 어떤 심령학적 현상으로도 설명될 수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유란시아 기록을 통하여 나중에 이것이 "고유성을 가진 어떤 영적존재"와 연관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유란시아 기록들이 나타나기 이전에 있었던 이러한 현상들은,일반적으로 인간이 아닌 존재들과의 교신이나 영적교류등을 나타내는 속칭 아래와 같은 심령. 정신적 현상과는 전혀 연관성이 없다는 점이 명확했다.
만약 이러한 과학적이고 철저한 확인과 분석을 오랜 기간 거치지 않았다면, 또한 계시 진리내용을 이해할 수 있을 만한 지적 성장이 없었다면, 유란시아서의 진리계시가 나타나는 데 큰 장애가 되었을 것이다.
초자연적,심령적 현상 : 한계의식에 닿은 상태에서의 신기한 작용들로 알려진 일반적인 잠재의식적 심리상태
1. 무의식적 저술, 기록
2. 무의식적 대화
a. 입안에서 중얼거림
b. 신 들린 상태
c. 영혼과의 교신
d. 카탈렙시
6. 무의식적 기억
a. 투시력
b, 텔레파시
c. 점성가 (대부분이 속는)
d. 음악적, 수학적 불가사이
3. 무의식 청취 - 영으로 듣는 능력
a. "음성" 듣기
4. 무의식 보기
a. 꿈 현상 - 불확실한 정신상태
b. 환시 - 무의식적 각본
c.환상 - 순간적 실체 느낌
7. 무의식적 행위
a. 무의식 습관 - 히스테리상태, 요술
b. 무의식 동작 - 충동
c. 무의식 과잉 - 과대망상
d. 무의식 보행 - 몽유병
5. 무의식적 사고
a. 무의식 공포 - 불안 노이로제
b. 무의식 의식화 - 강박관념
c. 무의식 판단 - 직관력 "예감" 예언
d. 무의식 예측 - 초 감각적 인지능력
e. 무의식적 추론 -망상-꿈, 최면
8. 무의식적 개체화
a. 무의식적 망각 - 기억상실
b. 무의식적 분열 - 이중 또는 다중 인격체
c. 정신분열증 - 영 개체
9. 복합적 및 결합적 기타 정신 상태
주 : 유란시아 글들을 영어로 받게 되었을 때의 현상은 이러한 한계의식에서의 어떠한 경우이거나 혹은 그것들이 복합적으로 표현되는 경우와 비슷하거나 비교할 수가 없었다.
유란시아 상세한 기원에 대하여 침묵하는 이유
유란시아 기원에 대한 개인적 경험 토론을 하지 말도록 요청받은 여러 이유 중에 주요한 두 가지는 다음과 같다.
1.
알지 못한 미지의 모습: 유란시아 기록에서는 많은 것들이 인간으로서는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나타난다. 우리들도 어떻게 이런 현상들이 실현되었는지 진정 모른다. 이러한 계시가 어떻게 영어 기록으로 나타나게 되었는가를 우리가 이해하는데 많은 연결고리가 빠져있다. 만약 어느 한 사람이 그동안 우리가 수년동안 얻는 이 계시의 전해진 방법과 기법을 모두 안다고 주장하면, 아무도 납득하지 않을 것이다- 너무도 많은 연결고리가 빠져있다.
2.
"접촉매개자"의 신분을 밝히지 않은 주된 이유는 하늘 계시자들이 유란시아 서를 어떠한 사람과도 연관되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 계시가 그 자체로서 선포되고 또 가르침이 알려지기를 원했다.
그들은 다음 세대에서, 인간과의 연결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상태에서 이 책을 가질 수 있도록 결정하였다. 그들은 성 베드로, 성 바울, 루터, 칼빈 또는 웨슬리를 원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 책을 발행한 인쇄자의 이름을 새기는 것조차도 허락하지 않았다.
저자가 누구인지, 작곡자가 누구인지 모르면서도 우리는 좋은 시와 음악을 감상할 수 있다는 것을 상기해야만 한다.
최초의 유란시아 글들
처음 글들은 57편 이었다. 우리가 좀더 높은 지식의 질문을 하도록 제안받은 후, 새 질문에 따라 우리에게 전달된 글은 57편이었다.
이것은 예정된 것이었다 : 우리는 일요일 오후부터 읽기 시작하였으며, 다음 일요일에 새로운 질문을 하게 되었다. 다시 이것들은 분야별 혹은 항목별로 정리되었다. 이러한 일정은 수년간에 걸쳐 진행되었고 마침내 현재의 유란시아 서에 수록된 196편의 글들이 모아지게 되었다.
완전한 글들의 수신
3번의 제시가 있었다. 196편의 글을 받은 후, "계시 무리단"은 우리에게 모든 글을 다시한번 읽어보고 "개념설명"이나 "애매 모호한 글의 삭제" 에 관하여 의견을 말하라고 얘기했다. 이 작업에 또 다시 몇 년이 소요되었다. 이 기간 중에 알게 된 새로운 정보는 아주 적었다.
이때 기록된 것이 특별히 유란시아 서의 1부, 2부 및 3부에 실려있다. 제4부-예수님 글-는 기원이 약간 다르다. 이 4부는 "중도자 위원회"에 의해 만들었으며 다른 글보다 몇 년 후에 완료되었다. 처음 3 부분이 완료되고 우리에게 확인한 것은 서기 1934년이었다. 예수님 글들은 1935년까지도 우리에게 전해지지 않았다.
예수님 글들을 늦게 받음
예수님 글-유란시아 서 제4부-들을 1년이 지난 후에 받은 이유는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중도자들은 우주법정에서의 기브리엘 대 루시퍼 소송의 진행에 관여되지 않을까 많은 염려를 하였다. 몇 달이 지나 유란시아 "중도자위원회"는 관리 받고 있는 "유버사"로부터 미가엘이 육신으로 유란시아에 온 것과 그 생애와 가르침에 관한 얘기를 계시하도록 권한을 받았으며, 유버사 법정은 이를 그들의 모욕죄로 생각하지는 않겠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그 대신 이 임무를 수행하는데 지연하거나 방해하거나 하는 것을 삼가도록 명령하였다.
"접촉위원회"의 기능
초기 몇 년 동안 접촉위원회는 교신과 안내에 관한 많은 기록을 받았다. 대부분의 이 메세지들은 마지막 페이지 아래쪽에 " 유란시아 서가 출판되기 전에 태워 없앨 것" 이라는 단서가 있었다. 이것은 우리의 보이지 않는 친구들이 유란시아 서의 출판이 끝에 가서는 "유란시아 경전"으로 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계획이었다.
이 모든 것은 우리에게 언젠가는 유란시아 글들이 출판될 수 있다는 것을 확신시켜 주었다. 이 점은 우리가 오랜 세월 기다리는 동안의 희망이 되었다.
실제로 그 기간 중에 죽거나 불가피하게 접촉위원회에서 빠지게 되어 새 회원으로 대체되는 일은 없었으며 우리들은 우리 중 누군가가 살아있는 동안 책이 출판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위원들은 유란시아 필사본의 보관자들 이었으며 방화금고에 타이프 복사본과 함께 보관하였다. 이들은 또한 책의 출판과 관련하여 세부사항을 감독하는 책임을 맡게 되었으며 전 세계 관련 저작권을 갖게 되었다.
우리는 접촉대상자의 신분에 관한 토의를 금지할 것과, 책이 출판된 후에는 "접촉매개자"에 대하여 그가 살아있거나 죽었거나 관계없이 항상 거론하는 것을 금지할 것을 요청 받았다.
70인
1939년에, 우리는 유란시아 글들을 좀더 진지하고 조직적으로 연구할 수 있도록 구성할 때가 왔다고 생각하였다. 이 계획은 "토론회(Forum)"에 제시되었고, 이러한 새 모임 결성에 참여를 원하는 사람이 70명이 모이게 되었다.
이 연구회는 수년간 "70인"으로 불리웟으며, 2-3년 지나자 이 비공식연구회 70인은 수요일 저녁에 모임을 갖게 되었다.
1939년 4월 3일부터 1956년 여름까지 70인은 조직적으로 유란시아 글을 연구하였고, 나중에 "유란시아 협회(Urantia Brotherhood) 학교"가 되는 계기가 되었다.
3년동안 70인에는 107명의 학생이 등록되었다. 17년 동안 70인은 연구와 논문발표 그리고 교육훈련 일에 봉사하였다. 이 기간 중에 유란시아의 "행성관리자"와 연결되어있는 진보 성(聖)천사로부터 8개의 기록 교신이 70인에게 주어졌다.
출판 위임
긴 시간의 마지막, 유란시아 글들의 출판 허락이 내려졌다. 이 위임의 서두는 다음과 같다 :
"우리는 인류사회의 발전적 진화모습을 보여주기 위한 것으로 유란시아 글의 의미를 둔다. 이것은 비록 인간사회가 하나의 변혁으로 탄생되는 시기를 나타내고 있다고 해도, 결코 신기원으로서의 광대한 변혁에 관한 얘기는 아니다. 이 책은 현재의 이데올로기적 혼란이 종결되자마자 이어지는 그 새로운 기원에 속해있다. 이 새로운 기원에서의 인간은 진리와 정의를 알고자 할 것이다. 인간과의 관계에서 향상되고 새롭게 된 우주의 구성은, 현재의 혼란으로 인한 무질서가 사라질 때가 되서야 비로서 가능해 질 것이다. 이 책이 예비된 것은 지구에서의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순서를 보다 앞 당기기 위함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의 출판을 그러한 것들이 달성되는 그 먼 날까지 연기할 수는 없다. 책의 출판을 앞 당김으로서 지도자와 선생을 훈련시키는 일이 빨라지게 될 것이며, 또한 책이 출현됨으로서 다른 언어로 번역하기 위한 후원을 통하여 그것을 가능토록 하는 사람들의 관심을 가져오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안내를 받고, 접촉위원회는 유란시아 서의 출판과 배포계획을 준비하는 과업에 들어갔다. 글들은 우리가 받은 그대로 출판되었으며, 접촉위원회는 어떠한 편집 권한도 가지지 못하였다. 우리의 작업은 "철자법, 대문자로 쓰기, 구두점 찍기"에만 제한되었다.
새들러 레나 박사 (Dr. Lena K. Sadler)가 1939년 8월 사망하기 전까지, 그녀는 출판기금으로 20,000불을 모았으며 이 기금은 책 출판을 위한 타자 및 식자판 마련에 사용되었다.
유란시아 재단
유란시아 재단을 만들게 된 계기는 유란시아 서의 이러한 인쇄용 원판이었다. 이 재단은 1950년 1월11일 일리노이 주 법령에 따라 설립되었고, 최초 원판보관자(Trustee) 이사회는,
회장 윌리암 헤일스(William M. Hales)
부회장 윌리암 에스.새들러 쥬니어 (William S. Sadler, Jr.)
총무 엠마 엘.크리스틴슨 (Emma L. Christensen)
회계 윌프레드 씨.켈로그 (Wilfred C. Kellogg)
부 총무 에디스 쿠크(Edith Cook) 이었다.
"토론회(Forum)"의 부유한 회원 중 한 사람이 출판을 위하여 50,000불을 후원하고 싶어했으나 거절되었다. 왜냐하면 출판기금에는 모든 사람이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 최선이라고 그들이 우리에게 얘기했기 때문이다.
이를 기화로, 50,000불의 금액이 10,000부를 출판하기 위한 기금목표가 되었고, 이 반응은 즉시 나타났다. 총 기부금은 49,000불을 초과하였고 재단 사무실에 전달된 첫번째 기금은 북극탐험가인 허버트 윌킨스경이 보낸 10,000불이었다.
책은 국제판권을 가지면서 1955년 10월 12일에 출판되었다.
유란시아 협회 (Urantia Brotherhood)
유란시아 서 가르침의 확산으로 여러 자매 단체가 구성되어지는 것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관심있는 모든 이들은 유란시아의 가르침이 그리스도를 맹신하는 신자와 대립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유란시아의 계시가 어떤 새로운 교회를 시작할 목적이 아니라는 것은 명백했다.
이에 따라, 1955년 1월 2일, 책의 가르침을 믿는 사람들이 시카고에 모여 성명을 내고 유란시아를 믿는 자발적이고 친목을 위한 기구인 유란시아 협회(Urantia Brotherhood)를 만들게 되었다. 설립회원은 36명이었다.
내규와 지침이 마련되었고 그 이후 미국 전역에 많은 모임들이 태어났다.
유란시아서의 가르침을 잘 알고 또 믿는 사람이 10명 정도되면, 그들은 유란시아 모임으로 만들어 질 수 있다. 어떤 교회나 교파에 속한 사람이든지 유란시아 모임의 회원이 되는데 간섭받지 않는다.
협회의 초기설립자와 그 후임자들이 처음 9년간 단체를 이끌었고, 그 후에는 많은 유란시아 모임의 대표들로 구성되는 Triennial Delegate Assembly (3년마다 열리는 대의원 총회)의 결정에 따라 운영되었다.
협회의 각 부서는 다음과 같다.
조정위원회 (Judicial Committee)
설립위원회 (Charter Committee)
협력 위원회 (Fraternal Relations Committee)
국내전파 위원회 (Domestic Extension Committee)
해외전파 위원회 (Foreign Extension Committee)
교육위원회(Committee on Education)
[이후의 규약전문은 협회의 선언문으로 번역소개를 생략합니다. - 영문페이지 참조]
36명이 설립회원이 되었고 첫번째 모임에 가입한 회원은 142명이었다.
유란시아 협회 (Urantia Brotherhood)의 활동
유란시아 재단(Urantia Foundation)과의 상호 협력 속에서, 협회는 현재 유란시아 서의 용어색인을 완료하는 작업을 하고 있으며, 이 출판은 1961년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우리 모두는 불어번역을 진행하고 있으며 1961년 말경에 출판될 수 있도록 마지막 검토 중에 있다.
협회는 최근 성서와 유란시아 서에서 적절하게 선정한 장례식 절차를 완료하였다.
협회는 회원과 일반 관심인에게 년 4회 소식지를 발간. 배포하는 집행위원회를 지원하고 있으며, 미 국내 및 세계 여러 곳의 홍보를 통하여 연구회 결성과 이들의 활동을 돕고 있다. 지난 몇 년간, 2명의 활동대표를 임명하여 각 지역의 유란시아 모임을 촉진시키고 주기적으로 그들을 방문하도록 하였다.
1959년 12월, 미국 재무당국으로부터 유란시아 재단, 유란시아 협회, 유란시아사가 비 영리-면세 단체로 지정되어 모든 기부금 및 활동비용이 원천 면세받을 수 있게 되었으며, 유란시아 협회 상벌내규에 따라 1959년 1월 25일 유란시아 협회 학교의 대표가 첫번째 표창을 받았다.
[이 후 내규의 내용은 번역 생략-원문 참조]
유란시아 서의 배포
유란시아 서의 출판에 즈음하여 배포방법에 참고가 되는 많은 충고를 받게 되었다. 이들을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1.
예수님이 지구에 오셔서 그의 일을 가르치고 행하신 방법을 배우라-처음에는 조용히 행하시었고 - 기적을 나타내신 이후에도 그 수혜자에게 "아무에게도 네게 일어난 일을 말하지 말라" 말씀하셨다.
2.
우리들은 빠른 시일 내에 그리고 놀랄만한 전파를 달성하려는 노력을 피하라는 충고를 받았다.
3.
처음 5년 동안, 이 방법을 이행하였다. 매년 배포가 증가되었고 지금은 50개 이상의 서점에서 이 책을 취급하고 있다.
협회의 많은 대다수가 이 조용하고도 점진적인 방법으로 책을 소개하였고, 아주 일부는 배포를 확산시키기 위해 쉬지 않고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 주었다.
한가지 명백히 해야 할 것이 있다.
일상 생활 속에서 그리고 자신의 주위에, 유란시아서를 적극적으로 그리고 열정적인 노력으로 소개하는 사람을 방해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이다.
--------------------------------------------------------------------------------
이 글을 쓴 새들러 박사는 당시 세계적인 정신.심리 분석가이자 의사였으며 미신, 토속신앙 혹은 정신감응에서 오는 모든 현상이나 주장이 순전히 개인의 잠재의식과 초심리 현상에서 오는 허구라는 것을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입증함으로서 일반 사람들이 이러한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많은 학문적 업적을 쌓은 사람입니다. 이 글은 대략 1961년 이전에 쓰여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 역자 주
--------------------------------------------------------------------------------
윌리암 에스 새들러 박사(Dr. William S. Sadler)
(이 글의 저자에 관한 소개는 맨 마지막에 소개되어 있습니다.)
유란시아 글의 탄생을 가능하게 하였던 그 초기의 "예비접촉"그룹의 여러 명은 초자연 현상이나 심령분야의 조사와 분석에 권위와 명성을 얻고 있는 의사, 학자와 과학자들이었다. 나중에 유란시아 기록에 참여하게 되는, 이 그룹에서는 "접촉자"와 관련되어 일어나는 현상들이, 그때까지 밝혀진 그 어떤 초자연 현상이나 또는 심령 현상으로도 결코 설명될 수 없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이 현상들은 최면, 무의식적 기록, 투시력, 신들린 상태, 영매, 텔레파시 또는 이중 인격체등 그 어떤 현상으로도 설명할 수 없었다. 유란시아 기록들이 나타나기 그 이전의 현상들도, 인간이 아닌 존재들과의 일반적인 교신이나 영적교류등에서 나타내는 속칭 "심령"현상과는 전혀 관련 지울 수 없다는 것이 명백했다.
유란시아 글들을 가능하게 한 접촉행위
유란시아 기록들이 탄생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보이지 않는 친구"들은 우리들을 오랫동안 대화방법과 기술에서 훈련시키고, "접촉위원회"가 구성되게 하였으며 그리고 "접촉매개자"를 철저하게 시험해온 것이라는 사실을 나중에 결론적으로 알게 되었다.
처음 여러 해 동안 우리들은 "우주의 우주"와 지구에서의 인간 생애에 대하여 많은 새롭고도 생소한 개념을 배우게 되었다. 우주론과 철학에서의 이 많은 새로운 개념을 통하여 아래와 같은 것을 알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1.
광범위한 우주에 대한 개념
2.
생명체가 존재하는 수백만개의 행성
3.
신성한 하늘세계에 존재하는 서로 다른 고유성을 가진 이들과 그들의 등급
4.
진화하는 천체에서의 인간의 기원에 대한 증거
5.
여러 창조자 신의 암시
6.
우리가 가진 신앙 개념의 시험과 우리의 종교관 및 철학적 사고 발전 가능성의 판단
7.
20년이상을 통하여 알지 못하는 사이, 우리가 보는 종교의 기본개념과 자세에 끼친 변화
8.
"첫째 근원과 중심", "하보나", "초우주" 그리고 "최극존재"과 같은 용어에 대하여, 비록 아직까지도 진정한 의미를 모르지만,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9.
마찬가지로 진정한 의미가 조금 파악되는 한계 내에서, "주(主) 영" "공간 외부" 및 "주권자"와 같은 용어들을 알게 되었다.
10.
우리가 생각하는 의미가 애매 모호한 "생각조절자"에 대한 얘기
11.
새로운 개념의 단어로서 "하급"을 사용한 "존재의 하급차원"에 대한 개념 인식
12.
여러 "접촉"과정에서 자주 얘기를 나누어 중도자들을 완전히 알게 됐으며 이 접촉을 관리하는 2차 중도자를 완전히 이해하였다.
13.
루시퍼 반란에 대하여는 여러 얘기를 들었으나, 아담과 이브에 관하여서는 많이 듣지 못하였다.
14.
유란시아에서의 예수님 소명봉사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는 점에 대하여 감명을 얻게 되었으나, 계시되지 않아야 하는 그 본래의 이유는 거의 혹은 상세히 알 수 없었다.
15.
종종 예수님의 생애와 가르침을 기준하여 얘기를 들었으나 미가엘의 유란시아 증여에 관하여 새로운 개념을 소개할 때 그들은 매우 조심스러워 하였다. 모든 유란시아 계시 중에서 예수님에 관한 글은 가장 놀라운 것이었다.
16.
"최종자 무리단" 계층에 대하여는 듣지 못하여,구원 받은 인간의 목적지는 낙원(파라다이스)일 것이라는 막연한 개념을 도입하였다.
우리의 "초인간 친구"들은 이러한 것들 때문에 우주에 대한 우리의 시야를 향상시키고, 신학적 개념을 확대시키고 전반적인 철학적 사고를 넓히기 위하여 20년을 사용한 것이었다.
글들이 도착되기 전 까지는 우리의 신학적 사고가 얼마나 확대되었는지 결코 깨닫지 못하였다. 계시가 진행되는 동안, 우리는 "예비접촉"을 통하여 20년 동안 받은 예비-교육으로 우리의 종교적 믿음에 엄청난 변화가 준비되었었다는 점을 알고 무한한 감사를 가지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볼 때 유란시아 기록들을 내 놓게 되는 우리의 역할을 위해 그동안 받은 제자훈련은, 중도자들과의 접촉을 제외하고는 동시에 접촉이 일어나는 일이 없도록 진행되었다.
종종 유란시아 방문자와도 만나기도 하였으며 모든 접촉은 모두 완전히 달랐다. 이 모든 것은 준비된 교육으로, 우리의 우주관, 종교관 및 철학관을 확장시키는 체험을 가져왔으며, 광범위한 우주 사물의 배열에 대한 개념이나 새로운 관념을 우리 스스로의 소개로서 거론되지 않도록 하였다.
"예비접촉" 중에, 중도자들이 예수님의 일생과 사역에 관하여 제한적으로 얘기 한 것은, 미가엘 헌신 얘기를 일 년 동안에 걸쳐 나중에 다시 할 때 명확히 밝힌 것처럼, 허락받은 범위 내에서만 그들이 얘기해야 했던 때문이었다.
우리는 야간에 교대해 가면서 참여했던 처음에는 우리가 어떤 "초자연 세계"와 접촉하고 있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다. 이들의 메시지가 글씨로 전해지는 그 원인과 방법을 추정하고 이를 과학적으로 철저하게 폭로하려는, 초기 몇 년 동안에 걸친 우리의 모든 관찰과 조사는 완전히 실패로 끝났다.
유란시아 기록들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접촉체험"이 있은지 대략 20년이 지난, 어느 야간 교대 중에 한 "학습 방문자" 가 이 잠자는 매개자를 통하여 우리 질문 중 하나에 대하여 이야기하면서, 말하기를 " 당신들이 지금 접촉하고 있는 상대방이 어떤 존재인지를 안다면 그렇게 의도적인 질문들은 하지 않을 것이다. 차라리 인간의 삶에서 무엇이 최고 가치인지 그러한 해답이 나올 수 있는 질문들을 하는 것이 더 좋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이 얘기는 우리에게 약간의 충격과 부드러운 질책과 같은 것이었고, 이로 인해 우리는 현재의 특별한 경험을 새롭고 다른 방법으로 조명하게 되었다. 그 밤이 지나 우리 중 한명이 말하였다. "저들이 요청한대로, 인간으로서는 답변할 수 없는 질문들을 해 보기로 하자"
이제 이야기를 여기에서 잠시 멈추고, 새롭고 다른 얘기로 돌리는 것이 매우 좋을 듯 하다.
토론회(Forum)는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윌리암 새들러(Dr. William S Sadler)박사는 처음에는 조사자 및 관찰자의 자격으로, 나중에 "토론회(Forum)"로 알려진 그룹에 참여했던 사람들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얘기한다.
"캔사스 대학 몇 군데에서 형태심리학 강의를 하기 위해 가는 중에, 내 아들에게 의사들은 오래된 환자와의 접촉을 유지해야 한다고 얘기하면서 편지를 보내서 , 엄마에게 일요일 오후 1-2시간쯤 오랜 친구들을 초대하여 서로 만나 일상생활과 정세얘기를 할 수 있는지를 알아보라고 했다. 시카고로 돌아온 어느 일요일 아침에, 아내가 그 날 오후 3시에 우리의 오랜 환자들을 우리집에서 만나도록 주선한 것을 알았다. 이로서 일요일 오후모임이 시작되어, 맨 처음 건강얘기-감기치료법, 원인과 처방 및 후유증-를 하였고 차를 마신 후에는 질문과 답변 형식으로 허물없는 얘기를 하게 되었다.
시일이 지나면서, 이 모임은 의사, 법률가, 정부관리, 교사등 각계의 남, 녀 전문가들과 농부, 주부, 사무원, 비서 일반 근로자등 일상생활 각 분야의 개인이 참여하는 하나의 범 계층적 모임이 되었다."
"접촉자(Contacts)"를 "토론회(Forum)" 소개
그때, 나는 '정신건강' 혹은 '심령현상들'에 관한 연속 강연을 요청받고 있었는데, 처음 강연을 시작하면서 나는 말하였다.
"한 두개의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 이제껏 내가 조사한 모든 심령현상은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인 속임수라는 것이 밝혀졌다. 많은 것들은 아주 교묘한 속임 이었으며 여타 특별한 경우는 스스로의 무의식에 자기도 모르게 속고 있는 희생자들이었다. "
이때 모임의 한 명이 " 박사님, 방금 한 두게 예외가 있다고 하셨는 데, 상대하신 것 중에서 그 예외라고 하신 이해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 얘기해 주시면 아주 재미있을 것 같은데요" 하고 말 했을 때, 위에서 소개한 '어떤 현상인지 분석할 수가 없는 사례"라는 얘기 외에는 더이상 할말이 없어서 나는 그 대신, 그 접촉을 통해서 얻은 내용들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소개하려고 레나 박사(Dr. Lena)에게 최근에 얻은 기록자료들을 모임에서 읽어보라고 요청했다.
이때까지는 이 사건과 관련하여 어떤 비밀도 없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유란시아 글들은 이때에는 나타나지 않았었다. 우리집에서의 일요일 오후 모임이 "토론회(Forum)"라고 불리게 된 것이 이 때쯤이다.
모임에서 소개된 이 기록의 사례와 내용은, 내가 그동안 강연해온 여러 의학관련 발표에서도 얻지 못했던 굉장한 관심을 끌었다. 이렇게 해서 그 내용에 대한 격의없는 토론이 매 주마다 계속 이어지게 되었고, 우리에게 좀더 진지한 질문을 하면 인간의 가치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거라는 권유를 듣기까지 되었다.
"토론회(Forum)"의 질문 시작
우리는 "토론회(Forum)"에 이 사례와 관련된 모든 것을 얘기하고, 질문내용을 만드는데 모두 동참하도록 초청하였으며 그 시대의 어떠한 사람들의 지식으로도 알 수없는 우주의 기원, 신, 창조등에 관련된 질문을 시작하기로 결정하였다.
그 다음 일요일에 수백개의 질문이 모아졌고, 우리는 이 중에서 공정하게, 중복되는 것을 추리면서 이 질문들을 정리하였다. 이때부터,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대답으로 최초의 유란시아 글이 나타나게 되었다. 처음 질문부터, 마지막 질문까지 답변하는 글들이 나타나면서 질문들은 차츰 줄어들었다.
이것이 유란시아 기록들을 수년간에 걸쳐 받게 된 과정이다.
질문이 없어지자 더 이상의 글도 없었다.
"토론회(Forum)"가 배타적인 모임으로 되다.
이 즈음, 예전 성격의 "토론회(Forum)"는 우리에게서 점차 멀어져 가기 시작했으며, 우리는 이 "토론회(Forum)"를 회원에 한하여 기록들을 토의하고 그 내용에 대한 비밀을 지킬 것에 서명하는 배타적인 모임으로 만들 것을 권유 받았다.
이로서 회원을 모집하게 되었고, 30명의 회원이 모여 설립하게 되었다. 이 조직이 구성된 것은 1925년 9월이었고 설립회원중 17명이 현재까지 생존하고 있다.
질문들을 모으고 손으로 적은 기록본을 타자본과 비교하는 임무를 맡은 회원들을 "접촉위원회"로 부르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접촉위원회" 회원들만이 "접촉"에 참가하면서 "접촉매개자"를 통하여 기록된 전갈들을 받게 되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새로운 회원이 설립회원의 면담을 통하여 그리고 모임의 서약서에 서명함으로서 "토론회(Forum)"에 가입하게 되었다.
이 서약서 내용은 " 소속회원 이외의 누구와도 유란시아 계시와 그와 관련된 주제에 관하여 토론하지 않을 것과 , 비밀을 지킬 것과, 어떠한 공개 장소에서도 기록이나 비망록을 읽거나 논의하지 않으며 우리가 읽은 모든 내용을 복사하지 않는다" 이었다.
17년 동안 계속 내려온 이 "토론회(Forum)"의 총 회원 수는 486명 이었으며 마지막 모임은 1942년 3월 31이었다. 유란시아 기록들을 받은 기간 동안, 300 이상의 각 개인이 계속 이어지는 이러한 질문을 만드는데 참여하였고, 몇 개를 제외하고는, 모든 질문은 유란시아 기록들로 답변되었다.
유란시아 기록을 받음
유란시아 기록의 출처가 어디인지를 알 수 있는 것이 여러 군데에서 찾을 수 있다.
유란시아서 안의 참조표에서 이들의 목록을 볼 수 있다.
몇 개의 예를 간단히 살펴보자.
1.
페이지1, 문단 2.
이 단락에서 영어와 같은 인간의 언어를 사용하면서 광범위한 영적 개념을 알려주는 것에 어려움이 있음을 알 수 있다.
2.
페이지1, 문단 4.
"오르본톤 위원회"가 계시에 참여하며 머릿말을 작성했다.
[3번-12번의 내용은 번역소개를 생략합니다. -상세사항은 영문페이지 참조 바랍니다]
13.
페이지1007, 문단 1.
계시들은 진화되는 상태와 항상 연관성을 유지하며 그 시대의 구원에 알맞게 되어진다.
새로운 계시는 그 전의 계시들과 관련하여 일관성이 유지된다.
왜 우리들은 "유란시아"글을 단 한번에 받을 수 없었는가
최근, '유란시아' 책을 공부하고 있는 북 인디아나의 목사모임에서 새들러 박사와 함께 저녁 내내 "왜 '유란시아서' 전체로서 한꺼번에 받을 수 없었을까"를 토론하였다. 다음이 그 요지이다.
나중에 유란시아 기록이 탄생될 수 있게 한, 처음의 예비 "접촉"에 참여했던 일부 회원은 심령현상에 대한 분석에서 권위있는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 모임은 이미 처음에 나타났었던 개체현상이 여지껏 알려진 최면, 무의식적 기록, 투시력, 신들린 상태, 영매, 텔레파시 또는 이중 인격체 등 그 어떤 심령학적 현상으로도 설명될 수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유란시아 기록을 통하여 나중에 이것이 "고유성을 가진 어떤 영적존재"와 연관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유란시아 기록들이 나타나기 이전에 있었던 이러한 현상들은,일반적으로 인간이 아닌 존재들과의 교신이나 영적교류등을 나타내는 속칭 아래와 같은 심령. 정신적 현상과는 전혀 연관성이 없다는 점이 명확했다.
만약 이러한 과학적이고 철저한 확인과 분석을 오랜 기간 거치지 않았다면, 또한 계시 진리내용을 이해할 수 있을 만한 지적 성장이 없었다면, 유란시아서의 진리계시가 나타나는 데 큰 장애가 되었을 것이다.
초자연적,심령적 현상 : 한계의식에 닿은 상태에서의 신기한 작용들로 알려진 일반적인 잠재의식적 심리상태
1. 무의식적 저술, 기록
2. 무의식적 대화
a. 입안에서 중얼거림
b. 신 들린 상태
c. 영혼과의 교신
d. 카탈렙시
6. 무의식적 기억
a. 투시력
b, 텔레파시
c. 점성가 (대부분이 속는)
d. 음악적, 수학적 불가사이
3. 무의식 청취 - 영으로 듣는 능력
a. "음성" 듣기
4. 무의식 보기
a. 꿈 현상 - 불확실한 정신상태
b. 환시 - 무의식적 각본
c.환상 - 순간적 실체 느낌
7. 무의식적 행위
a. 무의식 습관 - 히스테리상태, 요술
b. 무의식 동작 - 충동
c. 무의식 과잉 - 과대망상
d. 무의식 보행 - 몽유병
5. 무의식적 사고
a. 무의식 공포 - 불안 노이로제
b. 무의식 의식화 - 강박관념
c. 무의식 판단 - 직관력 "예감" 예언
d. 무의식 예측 - 초 감각적 인지능력
e. 무의식적 추론 -망상-꿈, 최면
8. 무의식적 개체화
a. 무의식적 망각 - 기억상실
b. 무의식적 분열 - 이중 또는 다중 인격체
c. 정신분열증 - 영 개체
9. 복합적 및 결합적 기타 정신 상태
주 : 유란시아 글들을 영어로 받게 되었을 때의 현상은 이러한 한계의식에서의 어떠한 경우이거나 혹은 그것들이 복합적으로 표현되는 경우와 비슷하거나 비교할 수가 없었다.
유란시아 상세한 기원에 대하여 침묵하는 이유
유란시아 기원에 대한 개인적 경험 토론을 하지 말도록 요청받은 여러 이유 중에 주요한 두 가지는 다음과 같다.
1.
알지 못한 미지의 모습: 유란시아 기록에서는 많은 것들이 인간으로서는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나타난다. 우리들도 어떻게 이런 현상들이 실현되었는지 진정 모른다. 이러한 계시가 어떻게 영어 기록으로 나타나게 되었는가를 우리가 이해하는데 많은 연결고리가 빠져있다. 만약 어느 한 사람이 그동안 우리가 수년동안 얻는 이 계시의 전해진 방법과 기법을 모두 안다고 주장하면, 아무도 납득하지 않을 것이다- 너무도 많은 연결고리가 빠져있다.
2.
"접촉매개자"의 신분을 밝히지 않은 주된 이유는 하늘 계시자들이 유란시아 서를 어떠한 사람과도 연관되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 계시가 그 자체로서 선포되고 또 가르침이 알려지기를 원했다.
그들은 다음 세대에서, 인간과의 연결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상태에서 이 책을 가질 수 있도록 결정하였다. 그들은 성 베드로, 성 바울, 루터, 칼빈 또는 웨슬리를 원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 책을 발행한 인쇄자의 이름을 새기는 것조차도 허락하지 않았다.
저자가 누구인지, 작곡자가 누구인지 모르면서도 우리는 좋은 시와 음악을 감상할 수 있다는 것을 상기해야만 한다.
최초의 유란시아 글들
처음 글들은 57편 이었다. 우리가 좀더 높은 지식의 질문을 하도록 제안받은 후, 새 질문에 따라 우리에게 전달된 글은 57편이었다.
이것은 예정된 것이었다 : 우리는 일요일 오후부터 읽기 시작하였으며, 다음 일요일에 새로운 질문을 하게 되었다. 다시 이것들은 분야별 혹은 항목별로 정리되었다. 이러한 일정은 수년간에 걸쳐 진행되었고 마침내 현재의 유란시아 서에 수록된 196편의 글들이 모아지게 되었다.
완전한 글들의 수신
3번의 제시가 있었다. 196편의 글을 받은 후, "계시 무리단"은 우리에게 모든 글을 다시한번 읽어보고 "개념설명"이나 "애매 모호한 글의 삭제" 에 관하여 의견을 말하라고 얘기했다. 이 작업에 또 다시 몇 년이 소요되었다. 이 기간 중에 알게 된 새로운 정보는 아주 적었다.
이때 기록된 것이 특별히 유란시아 서의 1부, 2부 및 3부에 실려있다. 제4부-예수님 글-는 기원이 약간 다르다. 이 4부는 "중도자 위원회"에 의해 만들었으며 다른 글보다 몇 년 후에 완료되었다. 처음 3 부분이 완료되고 우리에게 확인한 것은 서기 1934년이었다. 예수님 글들은 1935년까지도 우리에게 전해지지 않았다.
예수님 글들을 늦게 받음
예수님 글-유란시아 서 제4부-들을 1년이 지난 후에 받은 이유는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중도자들은 우주법정에서의 기브리엘 대 루시퍼 소송의 진행에 관여되지 않을까 많은 염려를 하였다. 몇 달이 지나 유란시아 "중도자위원회"는 관리 받고 있는 "유버사"로부터 미가엘이 육신으로 유란시아에 온 것과 그 생애와 가르침에 관한 얘기를 계시하도록 권한을 받았으며, 유버사 법정은 이를 그들의 모욕죄로 생각하지는 않겠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그 대신 이 임무를 수행하는데 지연하거나 방해하거나 하는 것을 삼가도록 명령하였다.
"접촉위원회"의 기능
초기 몇 년 동안 접촉위원회는 교신과 안내에 관한 많은 기록을 받았다. 대부분의 이 메세지들은 마지막 페이지 아래쪽에 " 유란시아 서가 출판되기 전에 태워 없앨 것" 이라는 단서가 있었다. 이것은 우리의 보이지 않는 친구들이 유란시아 서의 출판이 끝에 가서는 "유란시아 경전"으로 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계획이었다.
이 모든 것은 우리에게 언젠가는 유란시아 글들이 출판될 수 있다는 것을 확신시켜 주었다. 이 점은 우리가 오랜 세월 기다리는 동안의 희망이 되었다.
실제로 그 기간 중에 죽거나 불가피하게 접촉위원회에서 빠지게 되어 새 회원으로 대체되는 일은 없었으며 우리들은 우리 중 누군가가 살아있는 동안 책이 출판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위원들은 유란시아 필사본의 보관자들 이었으며 방화금고에 타이프 복사본과 함께 보관하였다. 이들은 또한 책의 출판과 관련하여 세부사항을 감독하는 책임을 맡게 되었으며 전 세계 관련 저작권을 갖게 되었다.
우리는 접촉대상자의 신분에 관한 토의를 금지할 것과, 책이 출판된 후에는 "접촉매개자"에 대하여 그가 살아있거나 죽었거나 관계없이 항상 거론하는 것을 금지할 것을 요청 받았다.
70인
1939년에, 우리는 유란시아 글들을 좀더 진지하고 조직적으로 연구할 수 있도록 구성할 때가 왔다고 생각하였다. 이 계획은 "토론회(Forum)"에 제시되었고, 이러한 새 모임 결성에 참여를 원하는 사람이 70명이 모이게 되었다.
이 연구회는 수년간 "70인"으로 불리웟으며, 2-3년 지나자 이 비공식연구회 70인은 수요일 저녁에 모임을 갖게 되었다.
1939년 4월 3일부터 1956년 여름까지 70인은 조직적으로 유란시아 글을 연구하였고, 나중에 "유란시아 협회(Urantia Brotherhood) 학교"가 되는 계기가 되었다.
3년동안 70인에는 107명의 학생이 등록되었다. 17년 동안 70인은 연구와 논문발표 그리고 교육훈련 일에 봉사하였다. 이 기간 중에 유란시아의 "행성관리자"와 연결되어있는 진보 성(聖)천사로부터 8개의 기록 교신이 70인에게 주어졌다.
출판 위임
긴 시간의 마지막, 유란시아 글들의 출판 허락이 내려졌다. 이 위임의 서두는 다음과 같다 :
"우리는 인류사회의 발전적 진화모습을 보여주기 위한 것으로 유란시아 글의 의미를 둔다. 이것은 비록 인간사회가 하나의 변혁으로 탄생되는 시기를 나타내고 있다고 해도, 결코 신기원으로서의 광대한 변혁에 관한 얘기는 아니다. 이 책은 현재의 이데올로기적 혼란이 종결되자마자 이어지는 그 새로운 기원에 속해있다. 이 새로운 기원에서의 인간은 진리와 정의를 알고자 할 것이다. 인간과의 관계에서 향상되고 새롭게 된 우주의 구성은, 현재의 혼란으로 인한 무질서가 사라질 때가 되서야 비로서 가능해 질 것이다. 이 책이 예비된 것은 지구에서의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순서를 보다 앞 당기기 위함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의 출판을 그러한 것들이 달성되는 그 먼 날까지 연기할 수는 없다. 책의 출판을 앞 당김으로서 지도자와 선생을 훈련시키는 일이 빨라지게 될 것이며, 또한 책이 출현됨으로서 다른 언어로 번역하기 위한 후원을 통하여 그것을 가능토록 하는 사람들의 관심을 가져오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안내를 받고, 접촉위원회는 유란시아 서의 출판과 배포계획을 준비하는 과업에 들어갔다. 글들은 우리가 받은 그대로 출판되었으며, 접촉위원회는 어떠한 편집 권한도 가지지 못하였다. 우리의 작업은 "철자법, 대문자로 쓰기, 구두점 찍기"에만 제한되었다.
새들러 레나 박사 (Dr. Lena K. Sadler)가 1939년 8월 사망하기 전까지, 그녀는 출판기금으로 20,000불을 모았으며 이 기금은 책 출판을 위한 타자 및 식자판 마련에 사용되었다.
유란시아 재단
유란시아 재단을 만들게 된 계기는 유란시아 서의 이러한 인쇄용 원판이었다. 이 재단은 1950년 1월11일 일리노이 주 법령에 따라 설립되었고, 최초 원판보관자(Trustee) 이사회는,
회장 윌리암 헤일스(William M. Hales)
부회장 윌리암 에스.새들러 쥬니어 (William S. Sadler, Jr.)
총무 엠마 엘.크리스틴슨 (Emma L. Christensen)
회계 윌프레드 씨.켈로그 (Wilfred C. Kellogg)
부 총무 에디스 쿠크(Edith Cook) 이었다.
"토론회(Forum)"의 부유한 회원 중 한 사람이 출판을 위하여 50,000불을 후원하고 싶어했으나 거절되었다. 왜냐하면 출판기금에는 모든 사람이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 최선이라고 그들이 우리에게 얘기했기 때문이다.
이를 기화로, 50,000불의 금액이 10,000부를 출판하기 위한 기금목표가 되었고, 이 반응은 즉시 나타났다. 총 기부금은 49,000불을 초과하였고 재단 사무실에 전달된 첫번째 기금은 북극탐험가인 허버트 윌킨스경이 보낸 10,000불이었다.
책은 국제판권을 가지면서 1955년 10월 12일에 출판되었다.
유란시아 협회 (Urantia Brotherhood)
유란시아 서 가르침의 확산으로 여러 자매 단체가 구성되어지는 것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관심있는 모든 이들은 유란시아의 가르침이 그리스도를 맹신하는 신자와 대립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유란시아의 계시가 어떤 새로운 교회를 시작할 목적이 아니라는 것은 명백했다.
이에 따라, 1955년 1월 2일, 책의 가르침을 믿는 사람들이 시카고에 모여 성명을 내고 유란시아를 믿는 자발적이고 친목을 위한 기구인 유란시아 협회(Urantia Brotherhood)를 만들게 되었다. 설립회원은 36명이었다.
내규와 지침이 마련되었고 그 이후 미국 전역에 많은 모임들이 태어났다.
유란시아서의 가르침을 잘 알고 또 믿는 사람이 10명 정도되면, 그들은 유란시아 모임으로 만들어 질 수 있다. 어떤 교회나 교파에 속한 사람이든지 유란시아 모임의 회원이 되는데 간섭받지 않는다.
협회의 초기설립자와 그 후임자들이 처음 9년간 단체를 이끌었고, 그 후에는 많은 유란시아 모임의 대표들로 구성되는 Triennial Delegate Assembly (3년마다 열리는 대의원 총회)의 결정에 따라 운영되었다.
협회의 각 부서는 다음과 같다.
조정위원회 (Judicial Committee)
설립위원회 (Charter Committee)
협력 위원회 (Fraternal Relations Committee)
국내전파 위원회 (Domestic Extension Committee)
해외전파 위원회 (Foreign Extension Committee)
교육위원회(Committee on Education)
[이후의 규약전문은 협회의 선언문으로 번역소개를 생략합니다. - 영문페이지 참조]
36명이 설립회원이 되었고 첫번째 모임에 가입한 회원은 142명이었다.
유란시아 협회 (Urantia Brotherhood)의 활동
유란시아 재단(Urantia Foundation)과의 상호 협력 속에서, 협회는 현재 유란시아 서의 용어색인을 완료하는 작업을 하고 있으며, 이 출판은 1961년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우리 모두는 불어번역을 진행하고 있으며 1961년 말경에 출판될 수 있도록 마지막 검토 중에 있다.
협회는 최근 성서와 유란시아 서에서 적절하게 선정한 장례식 절차를 완료하였다.
협회는 회원과 일반 관심인에게 년 4회 소식지를 발간. 배포하는 집행위원회를 지원하고 있으며, 미 국내 및 세계 여러 곳의 홍보를 통하여 연구회 결성과 이들의 활동을 돕고 있다. 지난 몇 년간, 2명의 활동대표를 임명하여 각 지역의 유란시아 모임을 촉진시키고 주기적으로 그들을 방문하도록 하였다.
1959년 12월, 미국 재무당국으로부터 유란시아 재단, 유란시아 협회, 유란시아사가 비 영리-면세 단체로 지정되어 모든 기부금 및 활동비용이 원천 면세받을 수 있게 되었으며, 유란시아 협회 상벌내규에 따라 1959년 1월 25일 유란시아 협회 학교의 대표가 첫번째 표창을 받았다.
[이 후 내규의 내용은 번역 생략-원문 참조]
유란시아 서의 배포
유란시아 서의 출판에 즈음하여 배포방법에 참고가 되는 많은 충고를 받게 되었다. 이들을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1.
예수님이 지구에 오셔서 그의 일을 가르치고 행하신 방법을 배우라-처음에는 조용히 행하시었고 - 기적을 나타내신 이후에도 그 수혜자에게 "아무에게도 네게 일어난 일을 말하지 말라" 말씀하셨다.
2.
우리들은 빠른 시일 내에 그리고 놀랄만한 전파를 달성하려는 노력을 피하라는 충고를 받았다.
3.
처음 5년 동안, 이 방법을 이행하였다. 매년 배포가 증가되었고 지금은 50개 이상의 서점에서 이 책을 취급하고 있다.
협회의 많은 대다수가 이 조용하고도 점진적인 방법으로 책을 소개하였고, 아주 일부는 배포를 확산시키기 위해 쉬지 않고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 주었다.
한가지 명백히 해야 할 것이 있다.
일상 생활 속에서 그리고 자신의 주위에, 유란시아서를 적극적으로 그리고 열정적인 노력으로 소개하는 사람을 방해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이다.
--------------------------------------------------------------------------------
이 글을 쓴 새들러 박사는 당시 세계적인 정신.심리 분석가이자 의사였으며 미신, 토속신앙 혹은 정신감응에서 오는 모든 현상이나 주장이 순전히 개인의 잠재의식과 초심리 현상에서 오는 허구라는 것을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입증함으로서 일반 사람들이 이러한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많은 학문적 업적을 쌓은 사람입니다. 이 글은 대략 1961년 이전에 쓰여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 역자 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