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http://blog.naver.com/gusdn1218?Redirect=Log&logNo=40006830461
두려움이 생긴 이유는 사랑이 영원하다는 기억으로 부터 나오게 되었다.
사랑은 무한히 확장하는 방향으로 진행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랑은 창조되어진 것이다. 그러기에 영원성도 창조되어진 것이다.
사랑으로 영원히 존재할 수 있지만, 아름답게 멋지게 살수도 있지만,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상태에서의 자신이 자신이라 여기는 자신이 사라지게 된다면
자신은 스스로 커다란 두려움을 쏟아나게 된다.
즉 자신이 완전 사라지지 않을까 하는 미래에 대한 불확신에서 나오는 두려움이다.
이 두려움이 자신의 사라지지 않으려고 현 상태를 지극히 유지시키려는 사랑의 다른 극성의 측면인 것이다.
그 두려움이 사랑의 (-) 측면이다.
사랑과 두려움은 하나이기에 사랑이 장대하게 펼쳐졌을때 그 사랑 끝의 모습은 두려움으로 변하게 되었다.
자신이 자신을 사랑하는 만큼 자신이 사라지면 그 크기와 똑같은 두려움을 쏟아나게 된다.
즉 자신을 사랑하고 남을 사랑하는 마음이 크면 클수록, 사랑이 처음이고 끝이라는 전제하에의 자신의 모든 것의
사라짐은 그 두려움도 더욱더 커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모든 실체를 품는 사랑은 커다란 두려움도 함께 짊어 지게 되는 것이다.
이미 마음에서 두려움이 자리 잡게 되면 그것은 이미 존재하게 된다. 그것이 창조의 모습이다.
창조는 오로지 마음을 통해서 즉 자기 자신의 뜻에 의해서 태어나고 죽는다.
그러기에 세상에 선과 악이 공존하며 사랑과 두려움이 공존하며, 기쁨과 슬픔이 함께 공존하는 것이다.
죽음이 존재하는 것이고, 병이 존재하는 것이고, 고통이 존재하는 것이다.
아이니컬하게도 항상 즐겁고 행복한 순간을 실아가는 것이 아닌
어떠한 이유에서이든지 영원성을 추구하는 모든 삶은 죽음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마음의 방향성에 달린 문제이다. 어느 존재든지 그 자체로 죄가 없다. 단지 그 마음의 방향성이,
상생으로 가느냐 상극으로 가느냐인데 그것 또한 죄가 없다. 무엇을 해도 아무런 죄가 없다.
사랑이 없어도 죄가 없는 것이고, 영원하지 않아도 죄가 없는 것이다.
그것으로 자신의 마음의 경계를 긋지 마라. 무조건 사랑의 잣대로 판단하지 마라.
사랑이전에 존재하는 실체들은 도대체 왜 슬픈 광대가 되어야 하는가?
광대는 그냥 광대이다.
사랑이 최초로 창조되기전의 상태는 무가 아니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그 곳에는 단지 사랑이 없어도 형태가 없어도, 단지 뜻으로 존재하고 있다.
그것이 뜻만있어도 존재가 가능하다는 이야기다. 사랑이 없어도 말이다.
사랑이 없다고 죽은 것이 아니며, 사랑이 없다면 가치가 없는 것이 아니다.
어느 실체라도 그것은 존재이유가 있으며 창조이유가 있는 것이다.
사랑과 가치는 창조안에서의 진리에서 나오는 것이다. 사랑이전에 진리가 먼저 창조 되었다.
진리는 조화로운 모든 존재가 함께 상생할 수 있는 창조의 뜻이다.
진리는 사랑안에서 극대화 된다.
~~~~~~~~~~~~~~~~~~~~~~~~~
잡초는 보통 어느 누구에게도 관심을 받지 못하고 무가치하게 스쳐지나는 이름모를 풀이라도
밟아도 밟아도 다시 그자리에 그 곳에 항상 존재하고 있다.
그 자리에서 스스로 태어나고 죽는다.
자신을 사랑하면 그 어떤 무엇도 헤쳐나갈 수 있다.
자신을 사랑하면 그 어떤 무엇도 헤쳐나갈 수 있다.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진정한 용기이고, 진정한 믿음이며, 진정한 희망이다.
* 말투가 거칠었어도 이해해주세요 활성화님들~ 감사합니다 *
사랑하기때문에 보낼 수 있는거야. 항상 편안한 길이 되도록 기도할께.
글 수 18,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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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이 생긴 이유는 사랑이 영원하다는 기억으로 부터 나오게 되었다.
사랑은 무한히 확장하는 방향으로 진행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랑은 창조되어진 것이다. 그러기에 영원성도 창조되어진 것이다.
사랑으로 영원히 존재할 수 있지만, 아름답게 멋지게 살수도 있지만,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상태에서의 자신이 자신이라 여기는 자신이 사라지게 된다면
자신은 스스로 커다란 두려움을 쏟아나게 된다.
즉 자신이 완전 사라지지 않을까 하는 미래에 대한 불확신에서 나오는 두려움이다.
이 두려움이 자신의 사라지지 않으려고 현 상태를 지극히 유지시키려는 사랑의 다른 극성의 측면인 것이다.
그 두려움이 사랑의 (-) 측면이다.
사랑과 두려움은 하나이기에 사랑이 장대하게 펼쳐졌을때 그 사랑 끝의 모습은 두려움으로 변하게 되었다.
자신이 자신을 사랑하는 만큼 자신이 사라지면 그 크기와 똑같은 두려움을 쏟아나게 된다.
즉 자신을 사랑하고 남을 사랑하는 마음이 크면 클수록, 사랑이 처음이고 끝이라는 전제하에의 자신의 모든 것의
사라짐은 그 두려움도 더욱더 커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모든 실체를 품는 사랑은 커다란 두려움도 함께 짊어 지게 되는 것이다.
이미 마음에서 두려움이 자리 잡게 되면 그것은 이미 존재하게 된다. 그것이 창조의 모습이다.
창조는 오로지 마음을 통해서 즉 자기 자신의 뜻에 의해서 태어나고 죽는다.
그러기에 세상에 선과 악이 공존하며 사랑과 두려움이 공존하며, 기쁨과 슬픔이 함께 공존하는 것이다.
죽음이 존재하는 것이고, 병이 존재하는 것이고, 고통이 존재하는 것이다.
아이니컬하게도 항상 즐겁고 행복한 순간을 실아가는 것이 아닌
어떠한 이유에서이든지 영원성을 추구하는 모든 삶은 죽음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마음의 방향성에 달린 문제이다. 어느 존재든지 그 자체로 죄가 없다. 단지 그 마음의 방향성이,
상생으로 가느냐 상극으로 가느냐인데 그것 또한 죄가 없다. 무엇을 해도 아무런 죄가 없다.
사랑이 없어도 죄가 없는 것이고, 영원하지 않아도 죄가 없는 것이다.
그것으로 자신의 마음의 경계를 긋지 마라. 무조건 사랑의 잣대로 판단하지 마라.
사랑이전에 존재하는 실체들은 도대체 왜 슬픈 광대가 되어야 하는가?
광대는 그냥 광대이다.
사랑이 최초로 창조되기전의 상태는 무가 아니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그 곳에는 단지 사랑이 없어도 형태가 없어도, 단지 뜻으로 존재하고 있다.
그것이 뜻만있어도 존재가 가능하다는 이야기다. 사랑이 없어도 말이다.
사랑이 없다고 죽은 것이 아니며, 사랑이 없다면 가치가 없는 것이 아니다.
어느 실체라도 그것은 존재이유가 있으며 창조이유가 있는 것이다.
사랑과 가치는 창조안에서의 진리에서 나오는 것이다. 사랑이전에 진리가 먼저 창조 되었다.
진리는 조화로운 모든 존재가 함께 상생할 수 있는 창조의 뜻이다.
진리는 사랑안에서 극대화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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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초는 보통 어느 누구에게도 관심을 받지 못하고 무가치하게 스쳐지나는 이름모를 풀이라도
밟아도 밟아도 다시 그자리에 그 곳에 항상 존재하고 있다.
그 자리에서 스스로 태어나고 죽는다.
자신을 사랑하면 그 어떤 무엇도 헤쳐나갈 수 있다.
자신을 사랑하면 그 어떤 무엇도 헤쳐나갈 수 있다.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진정한 용기이고, 진정한 믿음이며, 진정한 희망이다.
* 말투가 거칠었어도 이해해주세요 활성화님들~ 감사합니다 *
사랑하기때문에 보낼 수 있는거야. 항상 편안한 길이 되도록 기도할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