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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통광대한 무수한 신들이 왜 즉시 인간에게 경제복 안주나
예전엔 인간 스스로 자기 욕심 속에서 엎어지는 가운데 깨달아야 했던 천기를 명백하게 밝힙니다.
- 1999 뉴질랜드 -
문 : 우리 대법은 불가·도가와 기문의 이치를 포함하였는데, 기타 여래가 증오한 일부 법리는 우리에게 대하여 지도작용이 있는가?
사부 : 없다. 대법은 일체를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어느 한 소도(小道)·소문(小門)이나 혹은 어느 한 여래의 이치를 덧붙여 들여올 수 없다. 그것은 당신으로 하여금 깨달음을 빗나가게 할 뿐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주대법과 더불어 논할 수 없기 때문이다. 부동한 층차의 인식과 과위는 모두 법이 육성한 것이다. 당신들이 이 대법 중에서 수련한 일체도 당신자신이 법에 대하여 증오한 요소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당신들 자신이 얻은 과위이다.
우리는 말한 김에 여러분에게 말해주겠다. 우리 여기에 자리한 이들 중 처음에 온 사람이 있는데 아직 나의 책을 본 적이 없다. 우리의 수련생이나 혹은 친척들이 데리고 왔다. 여러분들이 여기에 앉아 있는 것은 아마 모두 연분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에게 알려주겠다. 당신들이 제출한 문제는 나는 해답해 줄 시간이 없다. 무엇 때문인가? 내가 여기에 한번 오기가 아주 쉽지 않으며 그들도 몇 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이런 한 차례의 법회를 연다. 그들의 수련 중의 허다한 문제를 내가 해답해줌을 필요로 하므로 이 시간은 수련인으로 말하자면 지극히 진귀한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시간을 당신들에게 줄 수 없는 바 당신들이 부디 양해하기 바란다. 무엇 때문인가? 당신들이 제출한 문제는 흔히 모두 속인의 문제인데 그러나 인류사회의 일을 나는 상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 어떤 사람이 방금 전에 제출한 바, 당신의 사부가 그렇게 능력이 있다면 무엇 때문에 국가의 경제를 잘해놓지 않는가? 하고 말한다. 누구나 다 알다시피 인류사회의 발전은 규율에 따라 발전하고 있으며, 어느 한 단계에 이르러 마땅히 어떻게 해야 한다는 그것은 신이 정해놓은 것이다. 불·도·신은 모두 이 일체를 보호하고 있으며 절대로 함부로 하지 않는다. 그렇게 많은 신들이 어떻게 하고 싶어서 어떻게 한다면 당신의 경제를 좋게 하기는커녕 천하가 벌써 크게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를 제출한 것을 보면, 첫째 그는 우리 수련인이 아니며, 둘째 일종의 도전성을 지니고 있으며, 셋째 그는 인간의 이 기점에 서서 문제를 생각하고 있다. 인간이 무엇을 하고 싶으면 신이 바로 당신에게 무엇을 해주어야 하는가? 인간이 무엇을 하려고 하면 그렇다면 하늘이 당신에게 무엇을 해주어야 하는가? 신이 모두 당신 인간의 지휘에 따라야 하는가? 당신이 국가 경제를 잘해놓는 것이 중요하다고 느끼지만, 당신은 아는가? 신은 기타의 일을 더욱 중요하게 본다! 당신은 아는가? 인간이 복이 없는 것은 그의 도덕이 안되고 인심이 너무나 나쁘기 때문이다. 만약 인심이 모두 좋아지면 그도 곧 복이 있을 것이고 그도 곧 번창할 것이다. 당신은 이 도리를 아는가?! 인간이 그렇게 나쁘게 변했는데도 또 이것을 가지려고 하고 저것을 가지려고 하는데 누가 당신에게 줄 것인가?! 나는 여기에서 어느 한 민족, 어느 한 국가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나는 하나의 보편적인 법리를 말하고 있는 바 바로 이런 이치이다. 복(福分)이 있으려 하고 사람이 복이 있으려고 한다면 그렇다면 바로 업을 감소해야 하는데 대덕이 있어야만 비로소 부강해질 수 있다. 우선 또한 반드시 인간의 마음이 선을 향해야 하고 업력이 작아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경제가 좋지 못할 뿐만 아니라 천재(天才)와 인화(人禍) 무엇이든 다 있게 될 것인데 면면히 끊기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 그는 깨닫지 않는다. 그는 이 일체에 모두 안배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그는 바로 인간이 어떻게 하고 싶으면 어떻게 할 수 있다고 여긴다.
- 1998 스위스 제네바 -
문: 사부님께서 인과관계와 자비심에 대하여 좀 이야기해 줄 수 있습니까?
사부: 당신이 자비를 언급하니 나는 당신의 사상을 바로 잡아주어야 하겠으므로 나는 당신에게 무엇이 자비인지를 알려주겠다. 사람들은 속인 사회 중에서 내가 편안하게 지내고, 재해가 없으며, 난이 없고, 하루종일 아주 편안하며, 소요(逍遙)하고, 돈도 부족하지 않으며, 필요한 것이 다 있다면 사람은 하느님(上帝)이 사람에게 자비하다고 느끼고 사람에게 너무 잘 대한다고 느낀다. 내가 여러분에게 알려주겠다. 하느님은 이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정말로 이렇다면 그것은 당신에게 너무 좋지 못하게 대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의 이치는 모두 반대로 된 것이기 때문이다. 여러분 알다시피 사람이 세상에 살면 사회와 왕래가 있어야 하는데 그렇다면 사람은 업을 지을 것이다. 예수는 사람에게 죄가 있다고 말하였다. 왜냐하면 죄가 있으므로 비로소 속인 이 공간에 떨어져 온 것이기 때문이다. 이 공간에서 세세생생 모두 업을 짓고 있으며 죄를 짓고 있는데 당신이 편안하려고 하는 것은 바로 업을 갚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업을 갚지 않고 더군다나 금생에 진 업을 더한다면 다음 생에는 당신은 인체마저도 얻지 못하며 당신은 아마 더욱 좋지 못한 것으로 전생할 것이다. 당신이 거듭 업을 지으면 당신은 지옥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으며 더 아래로 떨어지면 바로 소각되어 버리는데 그렇다면 당신이 말해보라. 이 이치적으로 보았을 때 하느님은 당신에게 어떻게 대해야만 비로소 좋은 것인지를. 이것이 바로 인과이다.
그러나 나는 진정한 자비에 대하여 어떻게 보는가? 만약 한 사람이 정말로 괜찮다면 이 일생 중에서 그는 허다한 마난에 부딪칠 것이다. 이런 마난 중의 목적은 그로 하여금 그가 예전에 진 업을 갚게 하고 이 일생을 다그쳐 재빨리 다 갚게 한다. 인체가 있는 이 일생에 빚을 다 갚고 당신이 천국에 가서 영원히 복을 누리도록 하기 위해서 속인 중에서 그는 고생을 할 것이다. 그렇다면 여러분 생각해 보라. 어느 것이 진정한 자비인가? 부처가 문제를 보는 것과 인간이 문제를 보는 것은 절대로 다르다. 속인은 부처가 그로 하여금 속인 중에서 복을 누리게 하면 이것이 바로 부처가 그에게 자비를 베풀고 神이 그에게 자비를 베풀었다고 여긴다. 반대로 그가 고생을 하면 그는, 아이고,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돌보지 않는가? 나는 실의에 빠진(失落) 사람인데! 하고 하늘과 땅을 원망한다. 오히려 하느님은 당신을 돌보면서 당신에게 업을 갚고 돌아갈 수 있게끔 하는데 영원히 불생불멸(不生不滅)하여 아래로 떨어지지 않는 곳으로 돌아가면 얼마나 좋은가?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자비이다. 여러분이 알다시피 당신들은 수련하고 있는데 나는 왜 당신들의 모든 고생을 다 제거해버리지 않는가, 당신들이 고비를 넘을 필요도 없고 당신들을 위로 올려다 놓으면 끝이 아닌가, 이것은 얼마나 자비한가! 이러면 안 된다! 당신들이 진 빚은 당신들 자신이 갚아야 하고 빨리 갚고 빨리 갚아야 나는 비로소 되도록 빨리 당신들을 제도할 수 있는데 이런 도리가 아닌가? 나는 다른 하나의 각도로부터 무엇이 자비인가를 이야기하였다. 법은 당신들에게 이야기해 주는 것이지만 그러나 속인에게 이야기해 주는 것이 아니므로 당신들은 영원히 이 점을 기억해야 한다. 속인은 영원히 미혹 중에 있으며 그는 이런 도리를 알 수 없는데 인간은 바로 인간이다. 그러나 당신들 수련생은 바로 수련생이며 수련하는 사람과 속인은 영원히 다른 것이다.
내가 당신들에게 한가지 알려 줄 수 있는 것이 있다. 천하의 일은 우연한 것이 없으며 神은 거기에서 보고 있다. 이 공간에는 윤회전생을 책임지는 神이 있고 사회안정을 책임지는 神이 있으며 사회체계를 배치하는 神이 있고 지구 안정을 조종하는 神이 있으며 공기·각종 공기 성분을 책임지는 神이 있고 또 부동한 神이 지구상에서 어떤 일을 하는가 지켜보는 神도 있다. 이 속에는 어떠한 神도 모두 있는데 그가 이 일을 관여하지 않겠는가? 마음대로 속인사회 중에서 어떤 것이 나타나도록 하려한다 하여 바로 어떤 것이 나타날 수 있는가? 절대로 불가능한 것이다.
부처는 사람을 제도하지 보우(保佑)하는 것이 아니다
불가는 사람더러 횡재하라고 근본 말하지 않는다. 병은 업력으로 인한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어떻게 병을 제거하고 몸을 건강히 하라고 알려주지도 않았다. 석가모니교가 중생을 제도함을 이야기함은 사람으로 하여금 보통사람의 고통스러운 환경 중에서 열반(涅槃)의 피안(彼岸)으로 제도되어감을 이야기한 것인데 이는 석가모니부처가 이야기한 것이다. 바로 당신으로 하여금 천국으로 가게 함이다. 예수가 이야기한 것도 이 뜻으로서 누가 높고 누가 낮음을 담론할 수 없다. 다만 현대화한 사람은 깨닫지를 못하고 부처는 능히 사람을 보우(保 佑)하며 병을 제거하고 횡재하게 하며 대각자의 위력이 무궁하여 사람을 제도할 수 있다고 말한다. 보통사람은 부처가 사람을 제도함을 사람에 대한 보호로 간주하기 때문에 곧 부처에게 그가 횡재하게끔 보우(保佑)하여 주기를 빌며 부처가 그에게 병을 제거하여주기를 비는가 하면 여하여하하게 해달라고 한다. 기실 부처는 이런 일을 근본 상관하지 않는다. 이것은 현대의 부패한 인류관념이 발생한 부패한 인식, 변이(變異)이다. 불경의 내포(內涵)중에는 본래 이러한 것이 없었다. 그러므로 나는 이 문제를 경상적으로 이야기한다. 당신이 향불을 피우고 부처에게 횡재하게 해달라고 비는 것을 말한다면 부처는 당신이 횡재하든 횡재하지 않든지를 근본 상관하지 않는다.
당신이 부처에게 빌어도 그 부처는 당신이 어떻게 횡재하는 문제를 상관하지 않으며 반대로 당신으로 하여금 그런 탐욕스러운 마음을 제거하게끔 한다. 만약 생활이 정말로 곤란하다면 그 역시 당신의 안전을 보증하기 위하여 물질 상에서 하나의 편리를 제공하는 것이며 그는 당신에게 재산이 없기에 횡재하게끔 하지 않을 것이다. 병에 대하여 말한다면 전세(前世)에서 빚진 업이라고 부처는 여긴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은 불상에 대고 절을 하면서 횡재해달라고 비는데 결국은 정말로 횡재를 하게 된다. 기실 무슨 횡재를 하였는가? 그 불상에는 부처가 없으며 빌어 나오게 된 가짜부처가 있다. 또 어떤 것은 여우가 올라가 붙었거나 혹은 뱀, 족제비요 하는 난잡한 것들이다. 그것들이 당신을 도와서 횡재하게 하는데 당신이 그것에게 절을 하고 그것에게 빈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가 당신을 도와 횡재함은 조건이 있는 것이다. 이 우주 중에는 하나의 이치가 있는데 잃지 않으면 얻지 못한다고 한다. 그것들은 이 이치의 틈을 타서 그것들은 사람의 몸을 얻으려고 생각한다. 그 사람은 횡재하게 해달라고 비는데 횡재하라! 그 사람이 만약 몸에 가진 것이 좋지 못하면 그것들은 또 당신을 거들떠보지도
않는데 횡재하려 해도 하지 못하며 헛되게 절만 하게 된다. 그것들이 당신의 몸에 좋은 것이 있다고 느껴지면 그는 곧 당신으로 하여금 재물을 얻게 하는데, 그러고 나서야 그것은 당신의 좋은 것을 가져갈 수 있게 된다. 당신이 돈을 요구하면 그것은 당연히 당신에게 준다. 하지만 사람자신은 모르고 있으며, 잃어버린 것은 가능하게 영원히 다 만회할 방법이 없는 손실일 것이다. 사람은 일생뿐만이 아닌 것이다. 내세(來世)에 가능하게 더욱 비참할 것이다!
-전법륜-
그럼 왜 수련하는 사람에게는 해줄 수 있는가? 왜냐하면 수련하는 사람은 가장 진귀하기 때문이다. 그가 수련하고자 생각하기 때문에 발산하는 이 일념(一念)이 가장 진귀한 것이다. 불교에서는 불성(佛性)이라는 것을 말하는데, 불성이 나오기만 하면 각자(覺者)들은 그를 도와줄 수 있다. 무슨 뜻인가? 나더러 이야기하라고 한다면, 내가 고층차에서 공을 전수하기 때문에 고층차의 이치와 관련되며, 관련되는 문제가 몹시 크다. 이 우주 중에서 우리가 사람의 생명을 볼 때, 속인사회에서 생긴 것이 아니다. 사람의 진정한 생명의 생김은 우주공간에서 생긴 것이다. 왜냐하면 이 우주에는 생명을 만들어 내는 대단히 많은 각종 물질이 있기 때문에 이런 물질의 상호운동 하에서 생명이 생길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사람의 가장 일찍한 생명은 우주에서 온 것이다. 우주공간은 본래 선량한 것이고 바로 眞、善、忍(진선인) 이런 특성을 갖고 있어 사람이 태어나서는 우주와 동성(同性)이었다. 그러나 생명체가 많이 생겨남에 따라 일종 군체적인 사회관계가 발생하게 되었다. 그중 일부 사람은 아마 사심이 더 많아지게 되므로 그들의 층차가 천천히 낮아지게 되어 이 한 층차에 있을 수 없게 되었고 그들은 곧 아래로 떨어져야만 하였다. 하지만 다른 한 층차에서 또 나쁘게 변하여 그들은 또 있지 못하고 계속 아래로 떨어지게 되었는데, 마지막에는 인류란 이 층차 중에까지 떨어져 내려오게 되었다.
전반 인류사회는 모두 이 층차 속에 있다. 이 지경에 떨어진 것을 공능의 각도에서 보거나 혹은 대각자(大覺者)의 각도에 입각하여 본다면, 워낙 이런 생명체들은 마땅히 없애버려야 하였다. 하지만 대각자들은 자비심을 베풀어 그들에게 다시 한 차례의 기회를 주고자 이런 하나의 특수한 환경, 특수한 공간을 구성하였다. 그러나 이 공간의 생명체는 우주 중의 모든 공간의 생명체들과는 다 다르다. 이 공간의 생명체는 다른 공간의 생명체를 보지 못하고 우주의 진상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인간들은 미혹 속에 빠진 것과도 같다. 만일 병이 낫고 난(難)을 제거하고 소업(消業)하려면, 이런 사람들은 반드시 수련을 하여 반본귀진(返本歸眞)하여야 한다. 각종 수련에서는 이것을 모두 이렇게 보고 있다. 사람이 반본귀진하려는 이것이야말로 비로소 인간이 된 진정한 목적이다. 그러므로 이 사람이 수련하려고 생각하면 불성(佛性)이 나왔다고 인정한다. 이 일념(一念)이 가장 진귀하다. 왜냐하면 그가 반본귀진하려 하고 속인의 층차에서 벗어나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아마 불교에서 이런 한 마디 말을 들었을 것이다. “불성(佛性)이 나오면 시방세계(十方世界)를 진동한다”. 누가 보든 지간에 모두다 그를 도와주려 하며 무조건으로 그를 도와준다. 불가는 사람을 제도함에 조건을 논하지 않고 대가도 없으며 무조건으로 그를 도와 줄 수 있다. 때문에 우리는 수련생들에게 아주 많은 일을 해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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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일은 그가 움직이려고 하여도 속인으로서는 전혀 움직이지 못한다. 움직일 수 있는 방법이 또 하나 있다. 바로 이 사람이 나쁜 짓을 기껏 하고 악한 짓이란 악한 짓을 다 하게 되면, 그는 가히 그의 인생을 개변할 수 있다. 하지만 그가 직면한 것은 철저한 궤멸이다. 우리가 고층차에서 볼 때, 사람은 죽었지만 元神(원신)은 불멸이다. 어찌하여 元神(원신)은 불멸하는가? 사실 우리들이 보건대 사람이 죽은 후에 영안실에 놓인 그 사람, 그는 다만 우리 이 공간 중의 인체세포에 불과할 따름이다. 내장이나 신체 속의 각개 세포 조직, 온 하나의 인체, 이 공간 중의 세포가 탈락된 것이지, 다른 공간의 분자․원자․질자 등 성분이 더욱 작은 물질 미립자의 신체는 전혀 죽지 않았다. 그것은 다른 공간 속에서, 미시적 아래에서의 공간 속에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악한 짓이란 악한 짓을 다한 사람이 직면한 것은 바로 전체 세포의 전부 해체이라, 불교에서는 형신전멸(形神全滅)이라고 한다.
사람으로 하여금 그의 일생을 고치게 하는 또 하나의 방법이 있다. 이것은 유일한 하나의 방법으로서, 바로 이 사람은 이때로부터 수련의 길을 걷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수련의 길을 걷게 되면 그의 인생을 개변할 수 있는가? 이것을 누가 쉽게 움직일 수 있는 것인가? 왜냐하면 이 사람이 수련의 길을 걷겠다는 생각을 하여, 이 의념(意念)이 움직이면 마치 금과도 같이 빛을 뿌려 시방세계(十方世界)를 진동하기 때문이다. 불가가 우주에 대한 개념은 시방세계 학설이다. 고급생명이 볼 때 사람의 생명은 인간이 되기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인간의 생명은 우주 공간에서 생긴 것으로서, 우주와 동일한 성질이고 선량한 것이며 眞、善、忍(진선인) 이런 물질로 구성된 것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그도 군체적인 관계를 갖고 있어, 그가 군체 속에서 사회관계를 발생할 때 일부는 좋지 않게 변하였기 때문에 아래로 떨어졌다. 이 층차 중에서 그는 또 있을 수 없게 되었으며 그는 더욱 나쁘게 변하여 그는 또 한 층차 떨어지게 되었다. 떨어지고, 떨어지고, 떨어져, 마지막에는 속인의 이 층차에까지 떨어져 왔다.
이 층차 중에서 이 사람은 마땅히 훼멸되고 소멸되어야만 하였다. 그러나 그런 대각자들은 대자비심이 우러나와 특별히 이러한 공간을 만들어 준 것이 바로 우리 인류사회, 이 공간 같은 것이다. 이 공간에서 그에게 사람의 육신을 하나 더 주었고 우리 이 물질공간에만 국한되어 물체를 볼 수 있는 한 쌍의 눈을 더 주었다. 즉 미혹 속에 떨어져서 그로 하여금 우주의 진상을 보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기타 공간에서는 모두 볼 수 있는 것이다. 이 미혹 중에서, 이 상태에서 그에게 이런 하나의 기회를 남겨주었다. 미혹 속에 있기 때문에 가장 고달프며 이 신체가 있기에 그로 하여금 고생을 겪게 한다. 사람이 이 공간에서 되돌아 올 수 있다면, 도가의 연공에서는 반본귀진을 말하는데, 그에게 수련하려는 마음이 있기만 하면 바로 불성(佛性)이 나온 것으로 이 하나의 마음을 가장 진귀하게 보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도와 줄 수 있다. 사람이 이처럼 고생스러운 환경 속에서도 아직 방향을 잃지 않고 또 되돌아가려고 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도와줄 수 있으며 무조건적으로 도와주며 무엇이든 모두 그를 도와줄 수 있다. 왜 수련하는 사람을 위하여 우리는 이런 일을 할 수 있지만 속인에게는 할 수 없는가? 바로 이 이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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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제도함에 조건을 논하지 않고 대가를 논하지 않으며 보수를 따지지 않고 이름도 따지지 않는 것으로 속인 중의 모범인물보다는 훨씬 더 높다. 이는 완전히 자비심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법륜대법 이홍지-
예전엔 인간 스스로 자기 욕심 속에서 엎어지는 가운데 깨달아야 했던 천기를 명백하게 밝힙니다.
- 1999 뉴질랜드 -
문 : 우리 대법은 불가·도가와 기문의 이치를 포함하였는데, 기타 여래가 증오한 일부 법리는 우리에게 대하여 지도작용이 있는가?
사부 : 없다. 대법은 일체를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어느 한 소도(小道)·소문(小門)이나 혹은 어느 한 여래의 이치를 덧붙여 들여올 수 없다. 그것은 당신으로 하여금 깨달음을 빗나가게 할 뿐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주대법과 더불어 논할 수 없기 때문이다. 부동한 층차의 인식과 과위는 모두 법이 육성한 것이다. 당신들이 이 대법 중에서 수련한 일체도 당신자신이 법에 대하여 증오한 요소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당신들 자신이 얻은 과위이다.
우리는 말한 김에 여러분에게 말해주겠다. 우리 여기에 자리한 이들 중 처음에 온 사람이 있는데 아직 나의 책을 본 적이 없다. 우리의 수련생이나 혹은 친척들이 데리고 왔다. 여러분들이 여기에 앉아 있는 것은 아마 모두 연분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에게 알려주겠다. 당신들이 제출한 문제는 나는 해답해 줄 시간이 없다. 무엇 때문인가? 내가 여기에 한번 오기가 아주 쉽지 않으며 그들도 몇 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이런 한 차례의 법회를 연다. 그들의 수련 중의 허다한 문제를 내가 해답해줌을 필요로 하므로 이 시간은 수련인으로 말하자면 지극히 진귀한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시간을 당신들에게 줄 수 없는 바 당신들이 부디 양해하기 바란다. 무엇 때문인가? 당신들이 제출한 문제는 흔히 모두 속인의 문제인데 그러나 인류사회의 일을 나는 상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 어떤 사람이 방금 전에 제출한 바, 당신의 사부가 그렇게 능력이 있다면 무엇 때문에 국가의 경제를 잘해놓지 않는가? 하고 말한다. 누구나 다 알다시피 인류사회의 발전은 규율에 따라 발전하고 있으며, 어느 한 단계에 이르러 마땅히 어떻게 해야 한다는 그것은 신이 정해놓은 것이다. 불·도·신은 모두 이 일체를 보호하고 있으며 절대로 함부로 하지 않는다. 그렇게 많은 신들이 어떻게 하고 싶어서 어떻게 한다면 당신의 경제를 좋게 하기는커녕 천하가 벌써 크게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를 제출한 것을 보면, 첫째 그는 우리 수련인이 아니며, 둘째 일종의 도전성을 지니고 있으며, 셋째 그는 인간의 이 기점에 서서 문제를 생각하고 있다. 인간이 무엇을 하고 싶으면 신이 바로 당신에게 무엇을 해주어야 하는가? 인간이 무엇을 하려고 하면 그렇다면 하늘이 당신에게 무엇을 해주어야 하는가? 신이 모두 당신 인간의 지휘에 따라야 하는가? 당신이 국가 경제를 잘해놓는 것이 중요하다고 느끼지만, 당신은 아는가? 신은 기타의 일을 더욱 중요하게 본다! 당신은 아는가? 인간이 복이 없는 것은 그의 도덕이 안되고 인심이 너무나 나쁘기 때문이다. 만약 인심이 모두 좋아지면 그도 곧 복이 있을 것이고 그도 곧 번창할 것이다. 당신은 이 도리를 아는가?! 인간이 그렇게 나쁘게 변했는데도 또 이것을 가지려고 하고 저것을 가지려고 하는데 누가 당신에게 줄 것인가?! 나는 여기에서 어느 한 민족, 어느 한 국가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나는 하나의 보편적인 법리를 말하고 있는 바 바로 이런 이치이다. 복(福分)이 있으려 하고 사람이 복이 있으려고 한다면 그렇다면 바로 업을 감소해야 하는데 대덕이 있어야만 비로소 부강해질 수 있다. 우선 또한 반드시 인간의 마음이 선을 향해야 하고 업력이 작아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경제가 좋지 못할 뿐만 아니라 천재(天才)와 인화(人禍) 무엇이든 다 있게 될 것인데 면면히 끊기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 그는 깨닫지 않는다. 그는 이 일체에 모두 안배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그는 바로 인간이 어떻게 하고 싶으면 어떻게 할 수 있다고 여긴다.
- 1998 스위스 제네바 -
문: 사부님께서 인과관계와 자비심에 대하여 좀 이야기해 줄 수 있습니까?
사부: 당신이 자비를 언급하니 나는 당신의 사상을 바로 잡아주어야 하겠으므로 나는 당신에게 무엇이 자비인지를 알려주겠다. 사람들은 속인 사회 중에서 내가 편안하게 지내고, 재해가 없으며, 난이 없고, 하루종일 아주 편안하며, 소요(逍遙)하고, 돈도 부족하지 않으며, 필요한 것이 다 있다면 사람은 하느님(上帝)이 사람에게 자비하다고 느끼고 사람에게 너무 잘 대한다고 느낀다. 내가 여러분에게 알려주겠다. 하느님은 이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정말로 이렇다면 그것은 당신에게 너무 좋지 못하게 대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의 이치는 모두 반대로 된 것이기 때문이다. 여러분 알다시피 사람이 세상에 살면 사회와 왕래가 있어야 하는데 그렇다면 사람은 업을 지을 것이다. 예수는 사람에게 죄가 있다고 말하였다. 왜냐하면 죄가 있으므로 비로소 속인 이 공간에 떨어져 온 것이기 때문이다. 이 공간에서 세세생생 모두 업을 짓고 있으며 죄를 짓고 있는데 당신이 편안하려고 하는 것은 바로 업을 갚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업을 갚지 않고 더군다나 금생에 진 업을 더한다면 다음 생에는 당신은 인체마저도 얻지 못하며 당신은 아마 더욱 좋지 못한 것으로 전생할 것이다. 당신이 거듭 업을 지으면 당신은 지옥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으며 더 아래로 떨어지면 바로 소각되어 버리는데 그렇다면 당신이 말해보라. 이 이치적으로 보았을 때 하느님은 당신에게 어떻게 대해야만 비로소 좋은 것인지를. 이것이 바로 인과이다.
그러나 나는 진정한 자비에 대하여 어떻게 보는가? 만약 한 사람이 정말로 괜찮다면 이 일생 중에서 그는 허다한 마난에 부딪칠 것이다. 이런 마난 중의 목적은 그로 하여금 그가 예전에 진 업을 갚게 하고 이 일생을 다그쳐 재빨리 다 갚게 한다. 인체가 있는 이 일생에 빚을 다 갚고 당신이 천국에 가서 영원히 복을 누리도록 하기 위해서 속인 중에서 그는 고생을 할 것이다. 그렇다면 여러분 생각해 보라. 어느 것이 진정한 자비인가? 부처가 문제를 보는 것과 인간이 문제를 보는 것은 절대로 다르다. 속인은 부처가 그로 하여금 속인 중에서 복을 누리게 하면 이것이 바로 부처가 그에게 자비를 베풀고 神이 그에게 자비를 베풀었다고 여긴다. 반대로 그가 고생을 하면 그는, 아이고,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돌보지 않는가? 나는 실의에 빠진(失落) 사람인데! 하고 하늘과 땅을 원망한다. 오히려 하느님은 당신을 돌보면서 당신에게 업을 갚고 돌아갈 수 있게끔 하는데 영원히 불생불멸(不生不滅)하여 아래로 떨어지지 않는 곳으로 돌아가면 얼마나 좋은가?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자비이다. 여러분이 알다시피 당신들은 수련하고 있는데 나는 왜 당신들의 모든 고생을 다 제거해버리지 않는가, 당신들이 고비를 넘을 필요도 없고 당신들을 위로 올려다 놓으면 끝이 아닌가, 이것은 얼마나 자비한가! 이러면 안 된다! 당신들이 진 빚은 당신들 자신이 갚아야 하고 빨리 갚고 빨리 갚아야 나는 비로소 되도록 빨리 당신들을 제도할 수 있는데 이런 도리가 아닌가? 나는 다른 하나의 각도로부터 무엇이 자비인가를 이야기하였다. 법은 당신들에게 이야기해 주는 것이지만 그러나 속인에게 이야기해 주는 것이 아니므로 당신들은 영원히 이 점을 기억해야 한다. 속인은 영원히 미혹 중에 있으며 그는 이런 도리를 알 수 없는데 인간은 바로 인간이다. 그러나 당신들 수련생은 바로 수련생이며 수련하는 사람과 속인은 영원히 다른 것이다.
내가 당신들에게 한가지 알려 줄 수 있는 것이 있다. 천하의 일은 우연한 것이 없으며 神은 거기에서 보고 있다. 이 공간에는 윤회전생을 책임지는 神이 있고 사회안정을 책임지는 神이 있으며 사회체계를 배치하는 神이 있고 지구 안정을 조종하는 神이 있으며 공기·각종 공기 성분을 책임지는 神이 있고 또 부동한 神이 지구상에서 어떤 일을 하는가 지켜보는 神도 있다. 이 속에는 어떠한 神도 모두 있는데 그가 이 일을 관여하지 않겠는가? 마음대로 속인사회 중에서 어떤 것이 나타나도록 하려한다 하여 바로 어떤 것이 나타날 수 있는가? 절대로 불가능한 것이다.
부처는 사람을 제도하지 보우(保佑)하는 것이 아니다
불가는 사람더러 횡재하라고 근본 말하지 않는다. 병은 업력으로 인한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어떻게 병을 제거하고 몸을 건강히 하라고 알려주지도 않았다. 석가모니교가 중생을 제도함을 이야기함은 사람으로 하여금 보통사람의 고통스러운 환경 중에서 열반(涅槃)의 피안(彼岸)으로 제도되어감을 이야기한 것인데 이는 석가모니부처가 이야기한 것이다. 바로 당신으로 하여금 천국으로 가게 함이다. 예수가 이야기한 것도 이 뜻으로서 누가 높고 누가 낮음을 담론할 수 없다. 다만 현대화한 사람은 깨닫지를 못하고 부처는 능히 사람을 보우(保 佑)하며 병을 제거하고 횡재하게 하며 대각자의 위력이 무궁하여 사람을 제도할 수 있다고 말한다. 보통사람은 부처가 사람을 제도함을 사람에 대한 보호로 간주하기 때문에 곧 부처에게 그가 횡재하게끔 보우(保佑)하여 주기를 빌며 부처가 그에게 병을 제거하여주기를 비는가 하면 여하여하하게 해달라고 한다. 기실 부처는 이런 일을 근본 상관하지 않는다. 이것은 현대의 부패한 인류관념이 발생한 부패한 인식, 변이(變異)이다. 불경의 내포(內涵)중에는 본래 이러한 것이 없었다. 그러므로 나는 이 문제를 경상적으로 이야기한다. 당신이 향불을 피우고 부처에게 횡재하게 해달라고 비는 것을 말한다면 부처는 당신이 횡재하든 횡재하지 않든지를 근본 상관하지 않는다.
당신이 부처에게 빌어도 그 부처는 당신이 어떻게 횡재하는 문제를 상관하지 않으며 반대로 당신으로 하여금 그런 탐욕스러운 마음을 제거하게끔 한다. 만약 생활이 정말로 곤란하다면 그 역시 당신의 안전을 보증하기 위하여 물질 상에서 하나의 편리를 제공하는 것이며 그는 당신에게 재산이 없기에 횡재하게끔 하지 않을 것이다. 병에 대하여 말한다면 전세(前世)에서 빚진 업이라고 부처는 여긴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은 불상에 대고 절을 하면서 횡재해달라고 비는데 결국은 정말로 횡재를 하게 된다. 기실 무슨 횡재를 하였는가? 그 불상에는 부처가 없으며 빌어 나오게 된 가짜부처가 있다. 또 어떤 것은 여우가 올라가 붙었거나 혹은 뱀, 족제비요 하는 난잡한 것들이다. 그것들이 당신을 도와서 횡재하게 하는데 당신이 그것에게 절을 하고 그것에게 빈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가 당신을 도와 횡재함은 조건이 있는 것이다. 이 우주 중에는 하나의 이치가 있는데 잃지 않으면 얻지 못한다고 한다. 그것들은 이 이치의 틈을 타서 그것들은 사람의 몸을 얻으려고 생각한다. 그 사람은 횡재하게 해달라고 비는데 횡재하라! 그 사람이 만약 몸에 가진 것이 좋지 못하면 그것들은 또 당신을 거들떠보지도
않는데 횡재하려 해도 하지 못하며 헛되게 절만 하게 된다. 그것들이 당신의 몸에 좋은 것이 있다고 느껴지면 그는 곧 당신으로 하여금 재물을 얻게 하는데, 그러고 나서야 그것은 당신의 좋은 것을 가져갈 수 있게 된다. 당신이 돈을 요구하면 그것은 당연히 당신에게 준다. 하지만 사람자신은 모르고 있으며, 잃어버린 것은 가능하게 영원히 다 만회할 방법이 없는 손실일 것이다. 사람은 일생뿐만이 아닌 것이다. 내세(來世)에 가능하게 더욱 비참할 것이다!
-전법륜-
그럼 왜 수련하는 사람에게는 해줄 수 있는가? 왜냐하면 수련하는 사람은 가장 진귀하기 때문이다. 그가 수련하고자 생각하기 때문에 발산하는 이 일념(一念)이 가장 진귀한 것이다. 불교에서는 불성(佛性)이라는 것을 말하는데, 불성이 나오기만 하면 각자(覺者)들은 그를 도와줄 수 있다. 무슨 뜻인가? 나더러 이야기하라고 한다면, 내가 고층차에서 공을 전수하기 때문에 고층차의 이치와 관련되며, 관련되는 문제가 몹시 크다. 이 우주 중에서 우리가 사람의 생명을 볼 때, 속인사회에서 생긴 것이 아니다. 사람의 진정한 생명의 생김은 우주공간에서 생긴 것이다. 왜냐하면 이 우주에는 생명을 만들어 내는 대단히 많은 각종 물질이 있기 때문에 이런 물질의 상호운동 하에서 생명이 생길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사람의 가장 일찍한 생명은 우주에서 온 것이다. 우주공간은 본래 선량한 것이고 바로 眞、善、忍(진선인) 이런 특성을 갖고 있어 사람이 태어나서는 우주와 동성(同性)이었다. 그러나 생명체가 많이 생겨남에 따라 일종 군체적인 사회관계가 발생하게 되었다. 그중 일부 사람은 아마 사심이 더 많아지게 되므로 그들의 층차가 천천히 낮아지게 되어 이 한 층차에 있을 수 없게 되었고 그들은 곧 아래로 떨어져야만 하였다. 하지만 다른 한 층차에서 또 나쁘게 변하여 그들은 또 있지 못하고 계속 아래로 떨어지게 되었는데, 마지막에는 인류란 이 층차 중에까지 떨어져 내려오게 되었다.
전반 인류사회는 모두 이 층차 속에 있다. 이 지경에 떨어진 것을 공능의 각도에서 보거나 혹은 대각자(大覺者)의 각도에 입각하여 본다면, 워낙 이런 생명체들은 마땅히 없애버려야 하였다. 하지만 대각자들은 자비심을 베풀어 그들에게 다시 한 차례의 기회를 주고자 이런 하나의 특수한 환경, 특수한 공간을 구성하였다. 그러나 이 공간의 생명체는 우주 중의 모든 공간의 생명체들과는 다 다르다. 이 공간의 생명체는 다른 공간의 생명체를 보지 못하고 우주의 진상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인간들은 미혹 속에 빠진 것과도 같다. 만일 병이 낫고 난(難)을 제거하고 소업(消業)하려면, 이런 사람들은 반드시 수련을 하여 반본귀진(返本歸眞)하여야 한다. 각종 수련에서는 이것을 모두 이렇게 보고 있다. 사람이 반본귀진하려는 이것이야말로 비로소 인간이 된 진정한 목적이다. 그러므로 이 사람이 수련하려고 생각하면 불성(佛性)이 나왔다고 인정한다. 이 일념(一念)이 가장 진귀하다. 왜냐하면 그가 반본귀진하려 하고 속인의 층차에서 벗어나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아마 불교에서 이런 한 마디 말을 들었을 것이다. “불성(佛性)이 나오면 시방세계(十方世界)를 진동한다”. 누가 보든 지간에 모두다 그를 도와주려 하며 무조건으로 그를 도와준다. 불가는 사람을 제도함에 조건을 논하지 않고 대가도 없으며 무조건으로 그를 도와 줄 수 있다. 때문에 우리는 수련생들에게 아주 많은 일을 해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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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일은 그가 움직이려고 하여도 속인으로서는 전혀 움직이지 못한다. 움직일 수 있는 방법이 또 하나 있다. 바로 이 사람이 나쁜 짓을 기껏 하고 악한 짓이란 악한 짓을 다 하게 되면, 그는 가히 그의 인생을 개변할 수 있다. 하지만 그가 직면한 것은 철저한 궤멸이다. 우리가 고층차에서 볼 때, 사람은 죽었지만 元神(원신)은 불멸이다. 어찌하여 元神(원신)은 불멸하는가? 사실 우리들이 보건대 사람이 죽은 후에 영안실에 놓인 그 사람, 그는 다만 우리 이 공간 중의 인체세포에 불과할 따름이다. 내장이나 신체 속의 각개 세포 조직, 온 하나의 인체, 이 공간 중의 세포가 탈락된 것이지, 다른 공간의 분자․원자․질자 등 성분이 더욱 작은 물질 미립자의 신체는 전혀 죽지 않았다. 그것은 다른 공간 속에서, 미시적 아래에서의 공간 속에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악한 짓이란 악한 짓을 다한 사람이 직면한 것은 바로 전체 세포의 전부 해체이라, 불교에서는 형신전멸(形神全滅)이라고 한다.
사람으로 하여금 그의 일생을 고치게 하는 또 하나의 방법이 있다. 이것은 유일한 하나의 방법으로서, 바로 이 사람은 이때로부터 수련의 길을 걷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수련의 길을 걷게 되면 그의 인생을 개변할 수 있는가? 이것을 누가 쉽게 움직일 수 있는 것인가? 왜냐하면 이 사람이 수련의 길을 걷겠다는 생각을 하여, 이 의념(意念)이 움직이면 마치 금과도 같이 빛을 뿌려 시방세계(十方世界)를 진동하기 때문이다. 불가가 우주에 대한 개념은 시방세계 학설이다. 고급생명이 볼 때 사람의 생명은 인간이 되기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인간의 생명은 우주 공간에서 생긴 것으로서, 우주와 동일한 성질이고 선량한 것이며 眞、善、忍(진선인) 이런 물질로 구성된 것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그도 군체적인 관계를 갖고 있어, 그가 군체 속에서 사회관계를 발생할 때 일부는 좋지 않게 변하였기 때문에 아래로 떨어졌다. 이 층차 중에서 그는 또 있을 수 없게 되었으며 그는 더욱 나쁘게 변하여 그는 또 한 층차 떨어지게 되었다. 떨어지고, 떨어지고, 떨어져, 마지막에는 속인의 이 층차에까지 떨어져 왔다.
이 층차 중에서 이 사람은 마땅히 훼멸되고 소멸되어야만 하였다. 그러나 그런 대각자들은 대자비심이 우러나와 특별히 이러한 공간을 만들어 준 것이 바로 우리 인류사회, 이 공간 같은 것이다. 이 공간에서 그에게 사람의 육신을 하나 더 주었고 우리 이 물질공간에만 국한되어 물체를 볼 수 있는 한 쌍의 눈을 더 주었다. 즉 미혹 속에 떨어져서 그로 하여금 우주의 진상을 보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기타 공간에서는 모두 볼 수 있는 것이다. 이 미혹 중에서, 이 상태에서 그에게 이런 하나의 기회를 남겨주었다. 미혹 속에 있기 때문에 가장 고달프며 이 신체가 있기에 그로 하여금 고생을 겪게 한다. 사람이 이 공간에서 되돌아 올 수 있다면, 도가의 연공에서는 반본귀진을 말하는데, 그에게 수련하려는 마음이 있기만 하면 바로 불성(佛性)이 나온 것으로 이 하나의 마음을 가장 진귀하게 보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도와 줄 수 있다. 사람이 이처럼 고생스러운 환경 속에서도 아직 방향을 잃지 않고 또 되돌아가려고 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도와줄 수 있으며 무조건적으로 도와주며 무엇이든 모두 그를 도와줄 수 있다. 왜 수련하는 사람을 위하여 우리는 이런 일을 할 수 있지만 속인에게는 할 수 없는가? 바로 이 이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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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제도함에 조건을 논하지 않고 대가를 논하지 않으며 보수를 따지지 않고 이름도 따지지 않는 것으로 속인 중의 모범인물보다는 훨씬 더 높다. 이는 완전히 자비심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법륜대법 이홍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