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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배는 반드시 놓치지 말아야 한다고
조급해하시는 분들께
수천 수만 년 동안 그대는 “하라, 하지 말라”의 노예였습니다. 죄진 존재라는 누명하에 그대는 그대 자신을 온갖 의무와 율법의 사슬로 꽁꽁 묶어 놓고는 답답함과 억울함을 하소연하곤 했습니다.
이제 그대는 “자유!”를 선언하고서 햇살과 바람과 강물이 함께 어울리는 풍요의 들판에 안기면 그만인데도, 자유의 담벼락 바깥을 헤매면서, 아니 있지도 않는 가상의 담벼락을 만들어 놓고는 ‘난 아직 벗어나지 못했다’고 쩔쩔매면서, ‘자유 속으로 걸어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또 다른 이름표를 붙여 그대 자신을 억누르곤 합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깨닫지 않으면 안 된다고, 차원 상승을 이룩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또 다른 사슬로 그대 자신을 묶어 놓으려 합니다.
하지만 분명하게 말합니다. 상승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재우침이 그대를 상승시키지 않습니다. 많이 사랑하고 기도하고 명상하라는 촉구의 말잔치가, 그대를 상승시키진 않습니다. 그대 존재의 상태가 어디에 있느냐는 주소의 문제일 뿐입니다.
그리로 가고자 하는 바람을 품는 것은 분명 원동력이 되어 줍니다. 그러나 수천 수만 년 동안 그래 왔던 것처럼, 하나의 지나친 목표 의식이 강박관념이 되어 그대 자신을 짓눌러서는 안 됩니다. “다시 없는 좋은 기회다. 12,600년 만에 돌아오는 더없는 호기다. 이번에 이 배를 놓친다면 또 다시 수백 수천 생을 허비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이 진실의 전부는 아닙니다. 기회는 지난 생에도, 지지난 생에도, 그대가 거쳐온 수많은 생애 동안에, 단 한시도 주어지지 않았던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라. 이번에는 살아서, 이 몸을 지닌 그 상태 그대로 상승할 수 있는 기회라잖아.” 하실지도 모릅니다. 물론 어느 의미에서는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 모든 시간들을 상대적으로 중요치 않는 것으로 만들어 버리고, 오직 다음에 올 배를 타는 것에만 모든 가치를 부여하는 일이라면, 다시 한 번 숙고해 보아야 합니다.
지난 수천 수만의 생애 동안에 그대가 해온 일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나는 여기에 있으면서, 구원은 늘 저기에 있었습니다. 나는 죄에 묶여 있는데, 신은 저 높은 곳에서 나를 감시하고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가위눌린 아이처럼 한 발자국도 떼어놓지 못하는 무기력에 사로잡혀, 그대의 모든 힘과 가치를 그대 자신이 아닌 바깥 어디엔가에 주어 버렸습니다. 그리고는 고독과 소외감에서 울면서 손을 내뻗었습니다.
하지만 그대는 조금씩 조금씩 ‘지금 여기’가 지니는 가치의 중요성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여기’를 놓치고 과거와 미래에만 힘을 부여하는 것은, 결국 그대의 전생애를 놓치는 일이라는 것을 터득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여기’의 중요성과 더불어, 그대는 세상과 우주 만물의 모든 것에는 신이 깃들어 있음 또한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것이 신이며, 모든 만물이 하나로 이어져 있음을 보고는, 이제야 비로소 헛된 걸음을 돌이켜, 고향으로 가는 길로 들어섰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대는 그 길을 더 빨리 가게 해줄 더없는 기회가 왔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 배를 타면, 수천 수만의 생애 동안 그대가 갇혀 있었던 두려움의 덫에서 벗어나서 온갖 크리스탈 테크놀로지의 혜택 또한 누릴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대의 혼을 빼놓을 만한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몸과 마음이 그리로 달려가지 않을 수 없는 반가운 소식이지요. 하지만 그대는 거기에 모든 힘과 가치를 부여함으로써 또다시 ‘지금 여기’를 잃어버리고 있지는 않나요? 그 어느 한 순간도 진정 버릴 것은 없으며, 그 어느 한 존재도 진정 신성과 떨어져 있어 본 적이 없다는 깨우침은, 지구 대격변을 눈앞에 두고 있다는 오늘의 이 시대에 어떻게 자리매김되어야 할까요?
그대는 진실로 그 무엇을, 어떤 상태를 얻기 위해서 여기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차나 집이나 배우자를 얻기 위해서, 눈에 보이는 어떤 것을 획득하기 위해서 살아가는 삶은, 상처와 후회와 덧없음밖에 남을 것이 없으며, 따라서 그것을 경험함은 다시는 그런 되풀이를 하지 않기 위해서임을 그대는 이미 실컷 터득하지 않았나요? 그대는 어떤 목표를 획득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대의 존재 상태를 변화시키기 위하여, 눈부신 사랑의 연금술을 배우기 위하여 여기에 온 것이 아닌가요? 5차원의 세계 또한 그대가 획득하기 위해서 달려가야 할 목표가 아니라, 그대의 존재가 변화되어야 할 하나의 상태를 가리켜 보이는 것뿐입니다.
그대가 가고자 하는 5차원의 세계는 과거에도 있었고, 지금도 언제 어디에나 존재합니다. 그리로 갈 수 있는 기회 또한 한시도 없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대가 스스로 선택하여 몸 담았던 온갖 한계와 두려움을 사랑의 빛으로 녹이기만 한다면, 그대가 스스로 지었던 고치 속에서 ‘문을 두드리고’ 나오기만 한다면, 그대는 이미 벌써 차원을 달리하여 변신을 한 상태에서 자유의 기쁨을 누리고 있을 것입니다.
목표가 저만치에 있고 그걸 얻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나요? 목표를 향해서 달려가는 것이 삶의 전부라면, 그 목표는 계속해서 그대의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물러날 것입니다. 목표를 쥐는 순간 삶이 끝나 버릴 텐데, 삶은 결코 끝나는 것이 아니므로.
시간이 임박했다는 절실함은 물론 그대 자신을 위해 필요한 촉구의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일을 재우치는 말이라면, 그것은 결국 그대가 청산해야 할 과거의 되풀이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대가 그토록 원하는 것은 ‘존재의 충만감’입니다. 영원히 오지 않는 성질을 가지고 있는 미래에 힘을 부여한 나머지, ‘지금 여기’를 잃을 수는 없습니다. 시간이 없다고 바쁘게 허둥대는 것은, 그 목표가 아무리 아름답고 굉장한 것이라 할지라도, 결국은 진정한 그대 자신을 놓치는 일입니다.
그 모든 다급함을 다 내려놓고, 지금 여기에서의 그대 자신을 들여다보고, 그대 안에 웅숭거리고 있는 두려움을 직시하고, 거기에 사랑을 가져가서 변형시키는 일이야말로, 그대가 해야 할 가장 시급한 일의 전부가 아닐까요? 그대가 수천 수만 번의 생애 동안에 키워 왔던 두려움의 아이들을 사랑의 자녀들로 눈부시게 변형시킬 수만 있다면, 5차원은 이미 그대의 것이 되어 존재의 꽃을 피울 것이고, 그 향기를 널리 전할 것입니다. 거기에는 이미 ‘차원 상승’이니 ‘깨달음’이니 하는 이름표조차 적절치 않을 것입니다.
이것은 어딘가에서 내려온 신묘한 메시지를 받아적은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내가 허울된 나에게 하는 소리이고, 진정한 그대가 허울된 그대에게 하는 그대 자신의 소리입니다.
조급해하시는 분들께
수천 수만 년 동안 그대는 “하라, 하지 말라”의 노예였습니다. 죄진 존재라는 누명하에 그대는 그대 자신을 온갖 의무와 율법의 사슬로 꽁꽁 묶어 놓고는 답답함과 억울함을 하소연하곤 했습니다.
이제 그대는 “자유!”를 선언하고서 햇살과 바람과 강물이 함께 어울리는 풍요의 들판에 안기면 그만인데도, 자유의 담벼락 바깥을 헤매면서, 아니 있지도 않는 가상의 담벼락을 만들어 놓고는 ‘난 아직 벗어나지 못했다’고 쩔쩔매면서, ‘자유 속으로 걸어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또 다른 이름표를 붙여 그대 자신을 억누르곤 합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깨닫지 않으면 안 된다고, 차원 상승을 이룩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또 다른 사슬로 그대 자신을 묶어 놓으려 합니다.
하지만 분명하게 말합니다. 상승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재우침이 그대를 상승시키지 않습니다. 많이 사랑하고 기도하고 명상하라는 촉구의 말잔치가, 그대를 상승시키진 않습니다. 그대 존재의 상태가 어디에 있느냐는 주소의 문제일 뿐입니다.
그리로 가고자 하는 바람을 품는 것은 분명 원동력이 되어 줍니다. 그러나 수천 수만 년 동안 그래 왔던 것처럼, 하나의 지나친 목표 의식이 강박관념이 되어 그대 자신을 짓눌러서는 안 됩니다. “다시 없는 좋은 기회다. 12,600년 만에 돌아오는 더없는 호기다. 이번에 이 배를 놓친다면 또 다시 수백 수천 생을 허비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이 진실의 전부는 아닙니다. 기회는 지난 생에도, 지지난 생에도, 그대가 거쳐온 수많은 생애 동안에, 단 한시도 주어지지 않았던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라. 이번에는 살아서, 이 몸을 지닌 그 상태 그대로 상승할 수 있는 기회라잖아.” 하실지도 모릅니다. 물론 어느 의미에서는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 모든 시간들을 상대적으로 중요치 않는 것으로 만들어 버리고, 오직 다음에 올 배를 타는 것에만 모든 가치를 부여하는 일이라면, 다시 한 번 숙고해 보아야 합니다.
지난 수천 수만의 생애 동안에 그대가 해온 일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나는 여기에 있으면서, 구원은 늘 저기에 있었습니다. 나는 죄에 묶여 있는데, 신은 저 높은 곳에서 나를 감시하고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가위눌린 아이처럼 한 발자국도 떼어놓지 못하는 무기력에 사로잡혀, 그대의 모든 힘과 가치를 그대 자신이 아닌 바깥 어디엔가에 주어 버렸습니다. 그리고는 고독과 소외감에서 울면서 손을 내뻗었습니다.
하지만 그대는 조금씩 조금씩 ‘지금 여기’가 지니는 가치의 중요성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여기’를 놓치고 과거와 미래에만 힘을 부여하는 것은, 결국 그대의 전생애를 놓치는 일이라는 것을 터득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여기’의 중요성과 더불어, 그대는 세상과 우주 만물의 모든 것에는 신이 깃들어 있음 또한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것이 신이며, 모든 만물이 하나로 이어져 있음을 보고는, 이제야 비로소 헛된 걸음을 돌이켜, 고향으로 가는 길로 들어섰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대는 그 길을 더 빨리 가게 해줄 더없는 기회가 왔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 배를 타면, 수천 수만의 생애 동안 그대가 갇혀 있었던 두려움의 덫에서 벗어나서 온갖 크리스탈 테크놀로지의 혜택 또한 누릴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대의 혼을 빼놓을 만한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몸과 마음이 그리로 달려가지 않을 수 없는 반가운 소식이지요. 하지만 그대는 거기에 모든 힘과 가치를 부여함으로써 또다시 ‘지금 여기’를 잃어버리고 있지는 않나요? 그 어느 한 순간도 진정 버릴 것은 없으며, 그 어느 한 존재도 진정 신성과 떨어져 있어 본 적이 없다는 깨우침은, 지구 대격변을 눈앞에 두고 있다는 오늘의 이 시대에 어떻게 자리매김되어야 할까요?
그대는 진실로 그 무엇을, 어떤 상태를 얻기 위해서 여기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차나 집이나 배우자를 얻기 위해서, 눈에 보이는 어떤 것을 획득하기 위해서 살아가는 삶은, 상처와 후회와 덧없음밖에 남을 것이 없으며, 따라서 그것을 경험함은 다시는 그런 되풀이를 하지 않기 위해서임을 그대는 이미 실컷 터득하지 않았나요? 그대는 어떤 목표를 획득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대의 존재 상태를 변화시키기 위하여, 눈부신 사랑의 연금술을 배우기 위하여 여기에 온 것이 아닌가요? 5차원의 세계 또한 그대가 획득하기 위해서 달려가야 할 목표가 아니라, 그대의 존재가 변화되어야 할 하나의 상태를 가리켜 보이는 것뿐입니다.
그대가 가고자 하는 5차원의 세계는 과거에도 있었고, 지금도 언제 어디에나 존재합니다. 그리로 갈 수 있는 기회 또한 한시도 없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대가 스스로 선택하여 몸 담았던 온갖 한계와 두려움을 사랑의 빛으로 녹이기만 한다면, 그대가 스스로 지었던 고치 속에서 ‘문을 두드리고’ 나오기만 한다면, 그대는 이미 벌써 차원을 달리하여 변신을 한 상태에서 자유의 기쁨을 누리고 있을 것입니다.
목표가 저만치에 있고 그걸 얻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나요? 목표를 향해서 달려가는 것이 삶의 전부라면, 그 목표는 계속해서 그대의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물러날 것입니다. 목표를 쥐는 순간 삶이 끝나 버릴 텐데, 삶은 결코 끝나는 것이 아니므로.
시간이 임박했다는 절실함은 물론 그대 자신을 위해 필요한 촉구의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일을 재우치는 말이라면, 그것은 결국 그대가 청산해야 할 과거의 되풀이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대가 그토록 원하는 것은 ‘존재의 충만감’입니다. 영원히 오지 않는 성질을 가지고 있는 미래에 힘을 부여한 나머지, ‘지금 여기’를 잃을 수는 없습니다. 시간이 없다고 바쁘게 허둥대는 것은, 그 목표가 아무리 아름답고 굉장한 것이라 할지라도, 결국은 진정한 그대 자신을 놓치는 일입니다.
그 모든 다급함을 다 내려놓고, 지금 여기에서의 그대 자신을 들여다보고, 그대 안에 웅숭거리고 있는 두려움을 직시하고, 거기에 사랑을 가져가서 변형시키는 일이야말로, 그대가 해야 할 가장 시급한 일의 전부가 아닐까요? 그대가 수천 수만 번의 생애 동안에 키워 왔던 두려움의 아이들을 사랑의 자녀들로 눈부시게 변형시킬 수만 있다면, 5차원은 이미 그대의 것이 되어 존재의 꽃을 피울 것이고, 그 향기를 널리 전할 것입니다. 거기에는 이미 ‘차원 상승’이니 ‘깨달음’이니 하는 이름표조차 적절치 않을 것입니다.
이것은 어딘가에서 내려온 신묘한 메시지를 받아적은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내가 허울된 나에게 하는 소리이고, 진정한 그대가 허울된 그대에게 하는 그대 자신의 소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