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상인간 시리즈:성계시광(聖界時光)
작가:대법제자 소연(小蓮)
【정견망 2007년 1월 4일】
머리말
나는 《윤회이야기》 시리즈 문장을 쓸 때 천상의 일을 써내겠다고 한 적이 있다. 그러나 자신의 정력과 시간 등 여러 가지 제한으로 인해 그동안 써내지 못했다. 이 자리를 빌려 독자 여러분들의 양해를 구한다.
《윤회이야기》 시리즈 문장은 주로 윤회방면과 역사가 인류의 각 방면에 다져준 문화였다는 것으로 일체는 모두 ‘법을 위해 왔다’는 주제를 실증한 것이다. 《탄거봉진(撣去封塵)》 시리즈 문장은 주로 내가 개인적으로 각종 문화와 기타 해석할 수 없는 미혹에 대한 개인적인 정견(正見)이다. 그리고 이 시리즈에서는 주로 천상의 각종 정황을 통해 사람들의 시야를 넓혀주고 사람들의 내심에 있는 불성(佛性)을 일깨워주는 것이 목적이다.
수련인에 대해 말한다면 이 시리즈 문장은 우주의 진상을 점차적으로 표현한 것일 따름이다. 사실 우주 공간은 너무나 복잡하기에 사존(師尊)을 제외한 그 어떤 생명도 철저하고 똑똑히 표현할 수는 없다. 때문에 내가 이야기하는 것은 나 자신이 지극히 제한된 이 층차에서 보고 알게 된 것이다. 이것은 모두 아주 국부적이고 아주 제한되었으며 보잘 것 없는 정황이다. 그 진실성을 보증하기 위해 예전의 문장처럼 매 한편에 대해 나는 모두 반복적으로 대조하고 반복적으로 음미한 후 글을 썼다. 아마도 각기 다른 사람이 이런 것을 보게 되면 같지 않은 생각이 있을 것이다. 나는 이해하고 이해하지 못하고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며 이것을 그냥 이야기로 간주하고 보기 바란다.
여기서 내가 설명하고 싶은 또 한 가지 문제는, 나 역시 아직 수련 중에 있기 때문에 가끔 완전하게 보지 못하는 정황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또 내가 본 것이 어쩌면 다른 사람이 본 것과 다를 수도 있다. 나는 이것이 부동(不同)한 경지의 부동한 진상이라고 생각한다. 때문에 내가 써낸 일체는 사실 아주 큰 제한성이 있다. 이 일체는 단지 졸렬한 글을 통해 보다 좋은 글들을 끌어내기 위함이다.
수련을 하지 않는 많은 친구들은 이렇게 말한다. "당신들은 하루 종일 책을 보고 법공부를 하는 것 외에 위험을 무릅쓰고 도처로 다니며 진상을 알려야 하니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든가. 우리는 하루 종일 먹고 마시고 재미있게 놀며 또 좋은 차를 끌고 다니고 양주를 마신다. 부부간에는 서로 사랑하고 아이는 귀엽고 부모님은 자애로우며 형제들은 우애가 깊다."는 등등. 심지어 문예작품에서도 늘 어떤 사람 혹은 선녀(仙女)나 누군가가 인간세상의 어느 여자나 남자와 눈이 맞아 그 ‘무정하고 의리도 없는(無情無義, TV에 나오는 대사)’ 천상을 떠났다고 한다.
사실 한번 생각해보자. 만약 천상(天上)이 좋지 않다면 옛날부터 오늘날까지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고생스럽게 추구하고 심지어 왕위를 버리거나 심지어 팔이 끊어지더라도 법을 구하려 했겠는가? 더욱이 동굴 속에서 고생스럽게 몇 십 년간 수련을 했겠는가?
본문에서는 한 신(神)의 정황을 통해 사람이 추구하는 일체와 간단히 비교해 보고자 한다.
사람의 수명은 백 살, 거북이는 천 살, 산(山)은 천만년, 지구는 몇 십 억년이며 우주는 더 긴 시간이다.
그렇다면 신(神)으로서 말한다면, 물론 삼계 밖의 신을 말하는데, 그의 일생은 거의 시간 개념이 없는 것과 같다. 두 신이 천상에서 한창 이야기를 나누는 순간 이 사람이 태어났고 또 두어 마디 하니 이 사람은 백년이 지나 땅에 묻힌다. 심지어 막 두어 마디 하자마자 사람이 알고 있는 이 우주가 형성되었고 또 두어 마디 하니 이 우주가 해체되었다. 바로 이렇게 빠르다! 아마도 수련하지 않는 친구들은 이에 대해 그리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예를 들어 인류의 공간은 고층차(高層次)에서 볼 때 그 빠름이 우리 고에너지 물리학자들이 관찰하는 기본입자의 수명과 같다. 사실 그보다 더 짧은 느낌이다. 그렇다면 만약 우리가 그 기본입자의 공간마당에 처해 있으면서 만약 인류의 공간마당을 알게 된다면 생각해보라, 우리는 기본입자의 공간마당에 비해 상대적으로 ‘영원’한 것이 아니겠는가?! 이는 수련하지 않는 친구들이 이해할 수 있는 각도에서 한 말이다.
사람들은 신으로 수련성취 되면 재미가 없다고 여긴다. 우리는 얼마나 좋은가, 이렇게 많은 즐거움이 있다고 한다.
신은 속인이 상상하는 것처럼 나무토막 같이 무정하고 의리가 없는 것이 전혀 아니다.
신에게는 사람의 정이 없고 더욱이 사람의 의(義)가 없다는 것은 맞다. 왜냐하면 ‘정(情)’과 ‘의(義) ’는 모두 사람에게 배치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은 자비롭고 중생을 위해 일체를 내려놓을 수 있는 무사무아(無私無我)의 초연한 경지이다!
즐거움을 말한다면 그 신의 예를 들겠다. 그는 늘 연꽃을 밟고 아주 많은 천국세계를 두루 유람한다. 천상에도 산이 있고 물이 있다. 정이 없기 때문에 번뇌(煩惱)가 전혀 없으며 아주 즐겁다. 그는 아주 많은 물건들을 변화해 내어 보는데, 가끔 그들과 놀기도 한다. 예를 들어 한번은 그가 나뭇가지와 잎이 무성한 큰 나무를 변화해 냈다. 그 자신은 나뭇잎으로 변해 그 속에 숨었다. 그리고 다른 나뭇잎과 늘 위치를 바꾼다. 가끔 많은 동물과 새들을 불러들이기도 하는데 선학(仙鶴)도 있고 하늘의 백조도 있다. 또 사슴과 같은 것도 있다. 그들은 서로 상대방의 언어를 배운다. (천상에서는 각종 동물도 신이며 각기 다른 동물은 자신의 언어체계가 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그 경지의 법왕(法王)의 말씀을 들을 수 있다.) 또 한 번은 그가 집 밖에 선학(仙鶴)이 하나 있으며 그곳에 앉아 움직이지 않는 것을 발견했다. 손을 내밀자 손은 벽을 통과하여 선학을 손 등에 올렸다. 그 선학은 아주 귀여웠고 그의 손 위에서 춤을 추었다!
사람은 이 공간의 물체가 움직이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다른 공간의 물체는 모두 이동하고 변화하며 서로 투과하는 것은 아주 정상적인 일이다.
사람은 지금 비단 옷을 입고 산해진미를 먹으면 아주 좋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신은 더 아름다운 옷을 입는데 옷의 색상과 옷을 입는 방식은 변화무쌍하다. 이런 종류의 옷은 입으면 아주 편안하며 부드럽고 아주 상화하며 장엄하다. 만약 이런 옷을 사람이 입는다면 그 사람은 곧바로 병업과 번뇌가 없어진다. 왜냐하면 신의 물건이기 때문에 자연히 신의 자비의 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천상에는 인간세상의 춘하추동 계절의 변화나 춥고 더운 날씨의 변화가 없다. 때문에 신은 항상 그렇게 장엄하고 신성하다. 신이 먹는 것은 인간세상의 이른바 ‘색과 향기와 맛(色香味)’이 있는 물건이 아니다. 그들이 먹는 것은 먹고 나면 신체가 일종 보다 투명한 느낌이 든다. 그리고 많은 음식물 역시 모두 투명하다.
사람은 좋은 차를 운전하면 기뻐서 어쩔 줄 모른다. 그러나 신은 연화(蓮花) 또는 상서로운 구름(祥雲, 물론 어떤 때는 신마다 다르다)을 타고 다니는데 아무리 멀지라도 인간의 시간개념으로는 한순간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사람은 무엇을 하든지 간에 시간이 필요하다. 이것은 그 신이 존재하는 공간의 정황이다. 사실 만약 공간을 초월하자면 역시 시간이 필요하다. 물론 부동한 고층 공간은 자체의 시간의 개념도 다르다. 천상의 일은 인간세상처럼 1+1=2가 아니다. 천상의 일은 무척 복잡한 것이다.
이번 문장은 간단히 여기까지만 쓴다. 앞으로 나는 이런 시리즈를 견지하여 써낼 것이다. 독자들이 보다 많은 의견을 보내주기 바란다.
출처: 파룬따파 정견망 www.zhengjian.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