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성북동 길상사에서 만난 폴 니터 교수는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나의 영과 혼을 아버지께 모두 바칩니다’라고 외쳤다. 그건 불교의 ‘무아(無我·No-self)’와 맥이 통한다”고 말했다. [김성룡 기자]
그리스도교와 불교는 물과 기름일까. 5일 서울 성북동 길상사를 찾았다. 종교간 대화의 세계적인 석학이자 신학자인 미국 뉴욕 유니언신학대의 폴 니터(71·Paul Knitter) 석좌교수를 만났다. 그는 그리스도인이다. 동시에 불교식 명상을 병행한다. 그는 “붓다로 인해 그리스도의 신비, 그리스도의 생명에 더 가까이 가게 된다”고 말한다.
그의 저서 『붓다 없이 나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었다(Without Buddha I could not be a christian)』는 서구사회에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길상사 선방에서 그에게 십자가와 연꽃을 동시에 물었다.
-사람들은 말한다. “불교와 그리스도교는 물과 기름이다.” 둘은 결코 어울릴 수 없는 건가.
"아니다. 둘 사이에는 중요한 연결고리가 있다. 그리스도인이 진정 원하는 게 뭔가. 아주 깊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는 거다. 그렇게 그리스도의 신비를 깨닫는 거다. 그러나 사람들은 방법을 모른다. 뜻밖에도 불교가 실질적인 방법(Practical tools)을 제시한다. 그리스도인에게 작은 도움(Small help)’이 아니라 ‘결정적인 도움(Determining help)’을 준다.”
그의 저서 『붓다 없이 나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었다(Without Buddha I could not be a christian)』는 서구사회에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길상사 선방에서 그에게 십자가와 연꽃을 동시에 물었다.
-사람들은 말한다. “불교와 그리스도교는 물과 기름이다.” 둘은 결코 어울릴 수 없는 건가.
"아니다. 둘 사이에는 중요한 연결고리가 있다. 그리스도인이 진정 원하는 게 뭔가. 아주 깊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는 거다. 그렇게 그리스도의 신비를 깨닫는 거다. 그러나 사람들은 방법을 모른다. 뜻밖에도 불교가 실질적인 방법(Practical tools)을 제시한다. 그리스도인에게 작은 도움(Small help)’이 아니라 ‘결정적인 도움(Determining help)’을 준다.”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그리스도교는 이미지를 통해서 바라본다. 이미지를 통해서 예수님을 보고, 또 하느님(하나님)을 본다. 그런데 하느님(하나님)과 예수님은 이미지 너머에 있다. 우리는 늘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의 생각, 우리의 개념, 우리의 이미지를 우리가 뛰어넘기는 쉽지 않다.”
- 그럼 어찌해야 하나.
“그리스도교에는 성스러운 예식이 있다. 포도주와 빵을 나누기도 하고, 몸을 물속에 담그는 침례를 하기도 한다. 예수님과 하나 되기 위한 수단이다. 모두 이미지다. 이미지 너머의 신비를 봐야 하는데 사람들은 이미지를 붙들고 만다. 불교식 명상은 다르다. 불교는 모든 이미지를 허물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니터 교수는 ‘달과 손가락’ 이야기를 꺼냈다. “예수님의 말씀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과 같다. 손가락이 아니라 달을 봐야 한다. 말이 아니라 말 뒤의 신비를 봐야 한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에게 성경 말씀은 화두(話頭)와 같다. 예수의 메시지를 들여다보라. 이해가 가지 않는 말이 많다. ‘나를 찾고 싶다면 나를 놓아라. (If you want to find yourself, you must lose yourself)’ ‘자신을 사랑하려면 이웃을 사랑하라. (If you want to love yourself, you must love others)’ 이런 말은 모순적이다. 우리의 가슴이 ‘딱!’하고 도전에 직면한다. 예수님께선 우리에게 그런 도전을 던져주셨다.”
-깨우침이 쉽진 않다. 성경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는 이도 많다.
“그게 우리 그리스도인의 문제다. 예수님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데 그치기 때문이다. 그 문자 뒤에, 문자를 넘어가는 신비가 있는데, 거기까진 들어가지 못한다. 결국 표피적으로 문자만 붙들고 만다.”
- 그리스도교에 대한 아쉬움, 불교에 대한 아쉬움은 뭔가.
“그리스도인은 불교도를 향해 이렇게 말한다. ‘방석 위에 앉아만 있어서 안 된다. 정치적·경제적으로 고통 받는 이들을 위해 행동을 해야만 한다.’ 불교도는 이렇게 반박한다. ‘맞다. 동의한다. 그런데 방석 위에 앉는 과정을 뺀 채 사회적 행동만 한다면 당신도 결국 이루지 못할 것이다.’ 저는 양쪽 다 필요하다고 본다. 그래서 틱 낫한 스님의 말을 좋아한다. ‘이 세상에 평화를 만들고 싶은가. 그럼 너 자신이 평화가 되라! (If you want to make peace, you have to be peace!)’”
- 그리스도교의 이웃사랑, 불교의 명상은 수레의 두 바퀴인가.
“그렇다. 둘이 같이 가야만 진정한 힘을 얻을 수 있다. 1980년대 중반, 남미의 엘살바도르에선 독재정권에 의해 학살이 자행됐다. 저는 아내와 함께 그곳에 갔다. ‘살바도르의 평화를 위한 크리스천’이란 단체에서 학살을 막는 활동을 했다. 당시 엘살바도르에 가는 길에 뉴욕에 들러 잠깐 불교 명상을 했다. 제 안에선 갈등이 있었다. 앉아서 명상을 계속 하고픈 마음과 엘살바도르에 가서 사람을 죽이는 이들을 멈추게 하고픈 마음이 충돌했다. 공부를 점검하는 인터뷰 시간에 젠(禪)마스터에게 물었다. 그랬더니 ‘그 둘을 다 해야 한다. 왜냐하면 둘 다 있어야 해결이 되니까’란 답이 돌아왔다. 그는 이런 말도 했다. ‘당신이 사람을 죽이러 돌아다니는 이들과 하나라는 걸 알 때만 엘살바도르에 평화를 가져올 수 있을 것이다. 이 말은 지금도 내게 화두다.”
-영화 ‘아바타’를 봤나. 영화 속의 나비족도 하나로 연결돼 있다.
“영화 ‘아바타’는 아름다운 샘플이다. 정말 모든 게 연결돼 있다. 깨달음의 세계, 사랑의 세계에서 어떻게 배려하고 살아갈 것인가를 영화가 보여준다. 불교의 깨달음, 그리스도교의 사랑은 다르다고 말한다. 그러나 불교도가 깨달아서 하는 행동과 그리스도인이 하느님(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실천한 결과는 너무도 비슷하다. 영화 속의 나비족처럼 말이다.”
-예수는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버지께 갈 자가 없다”고 했다. 그래서 어떤 이는 “그리스도교는 배타적일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아니다. 예수님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선 아버지께 갈 자가 없다’고 하셨다. ‘나를 통하지 않고선’은 ‘길과 진리와 생명을 통하지 않고선’이란 뜻이다. 그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인 삶을 살 때 아버지께 갈 수 있다는 얘기다. 그리스도교는 닫힌 종교가 아니다.”
글=백성호 기자
사진=김성룡 기자
“그리스도교는 이미지를 통해서 바라본다. 이미지를 통해서 예수님을 보고, 또 하느님(하나님)을 본다. 그런데 하느님(하나님)과 예수님은 이미지 너머에 있다. 우리는 늘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의 생각, 우리의 개념, 우리의 이미지를 우리가 뛰어넘기는 쉽지 않다.”
- 그럼 어찌해야 하나.
“그리스도교에는 성스러운 예식이 있다. 포도주와 빵을 나누기도 하고, 몸을 물속에 담그는 침례를 하기도 한다. 예수님과 하나 되기 위한 수단이다. 모두 이미지다. 이미지 너머의 신비를 봐야 하는데 사람들은 이미지를 붙들고 만다. 불교식 명상은 다르다. 불교는 모든 이미지를 허물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니터 교수는 ‘달과 손가락’ 이야기를 꺼냈다. “예수님의 말씀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과 같다. 손가락이 아니라 달을 봐야 한다. 말이 아니라 말 뒤의 신비를 봐야 한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에게 성경 말씀은 화두(話頭)와 같다. 예수의 메시지를 들여다보라. 이해가 가지 않는 말이 많다. ‘나를 찾고 싶다면 나를 놓아라. (If you want to find yourself, you must lose yourself)’ ‘자신을 사랑하려면 이웃을 사랑하라. (If you want to love yourself, you must love others)’ 이런 말은 모순적이다. 우리의 가슴이 ‘딱!’하고 도전에 직면한다. 예수님께선 우리에게 그런 도전을 던져주셨다.”
-깨우침이 쉽진 않다. 성경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는 이도 많다.
“그게 우리 그리스도인의 문제다. 예수님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데 그치기 때문이다. 그 문자 뒤에, 문자를 넘어가는 신비가 있는데, 거기까진 들어가지 못한다. 결국 표피적으로 문자만 붙들고 만다.”
- 그리스도교에 대한 아쉬움, 불교에 대한 아쉬움은 뭔가.
“그리스도인은 불교도를 향해 이렇게 말한다. ‘방석 위에 앉아만 있어서 안 된다. 정치적·경제적으로 고통 받는 이들을 위해 행동을 해야만 한다.’ 불교도는 이렇게 반박한다. ‘맞다. 동의한다. 그런데 방석 위에 앉는 과정을 뺀 채 사회적 행동만 한다면 당신도 결국 이루지 못할 것이다.’ 저는 양쪽 다 필요하다고 본다. 그래서 틱 낫한 스님의 말을 좋아한다. ‘이 세상에 평화를 만들고 싶은가. 그럼 너 자신이 평화가 되라! (If you want to make peace, you have to be peace!)’”
- 그리스도교의 이웃사랑, 불교의 명상은 수레의 두 바퀴인가.
“그렇다. 둘이 같이 가야만 진정한 힘을 얻을 수 있다. 1980년대 중반, 남미의 엘살바도르에선 독재정권에 의해 학살이 자행됐다. 저는 아내와 함께 그곳에 갔다. ‘살바도르의 평화를 위한 크리스천’이란 단체에서 학살을 막는 활동을 했다. 당시 엘살바도르에 가는 길에 뉴욕에 들러 잠깐 불교 명상을 했다. 제 안에선 갈등이 있었다. 앉아서 명상을 계속 하고픈 마음과 엘살바도르에 가서 사람을 죽이는 이들을 멈추게 하고픈 마음이 충돌했다. 공부를 점검하는 인터뷰 시간에 젠(禪)마스터에게 물었다. 그랬더니 ‘그 둘을 다 해야 한다. 왜냐하면 둘 다 있어야 해결이 되니까’란 답이 돌아왔다. 그는 이런 말도 했다. ‘당신이 사람을 죽이러 돌아다니는 이들과 하나라는 걸 알 때만 엘살바도르에 평화를 가져올 수 있을 것이다. 이 말은 지금도 내게 화두다.”
-영화 ‘아바타’를 봤나. 영화 속의 나비족도 하나로 연결돼 있다.
“영화 ‘아바타’는 아름다운 샘플이다. 정말 모든 게 연결돼 있다. 깨달음의 세계, 사랑의 세계에서 어떻게 배려하고 살아갈 것인가를 영화가 보여준다. 불교의 깨달음, 그리스도교의 사랑은 다르다고 말한다. 그러나 불교도가 깨달아서 하는 행동과 그리스도인이 하느님(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실천한 결과는 너무도 비슷하다. 영화 속의 나비족처럼 말이다.”
-예수는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버지께 갈 자가 없다”고 했다. 그래서 어떤 이는 “그리스도교는 배타적일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아니다. 예수님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선 아버지께 갈 자가 없다’고 하셨다. ‘나를 통하지 않고선’은 ‘길과 진리와 생명을 통하지 않고선’이란 뜻이다. 그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인 삶을 살 때 아버지께 갈 수 있다는 얘기다. 그리스도교는 닫힌 종교가 아니다.”
글=백성호 기자
사진=김성룡 기자
◆폴 니터=1939년 미국 시카고 출생. 13세 때 가톨릭신학교에 들어가 사제가 됐다. 36세 때 “독신주의가 자연스럽진 않다”며 바티칸의 허락을 얻고 수도회를 떠났다. 현재 뉴욕 유니언신학대 석좌교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