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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A.I. (2001) SF, 어드벤처, 드라마 | 미국 | 144 분 | 12세이상관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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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인간다운 로봇, 로봇같은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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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봇, 사람 그리고 그들이 공존하는 세상. 그것은 오랜 과거부터 인간이 꿈꾸어 오던 이상적인 미래였다. 그리고 서서히 로봇이 자기만의 지능, AI(artificial intelligence : 인공지능)을 가지기 시작하는 지금 이 시점에 와서, 많은 이들이 AI를 가진 로봇들의 자아문제와 그들이 과연 인간과 공존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날카로운 통찰력과 동화적 감성으로 AI와 인간의 공존(즉 로봇과 인간의 공존)의 가능성과 한계를 그려낸 영화가 바로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작품인 'AI'이다.
주인공 데이빗은 감정을 가진 로봇이다. 이는 AI가 추구하고자 하는 방향성의 극한점에 존재하는 것으로서, 로봇이 한 없이 인간화 된 시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많은 영화에서 가정하곤 하는 것이지만 그 자체만으로도 어려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바로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존재가 자아의 존재를 발견할 수 있을까라는 문제부터 시작하여, 실존적인 로봇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자아성찰과정으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그 안에서 시각화되는 것은 로봇의 문제이지만, 결국 우리는 그곳에서 우리 스스로의 모습을 본다. 'AI'또한 마찬가지이다. 스티븐 스필버그는 감정을 가진 로봇, 데이빗을 통하여 인간이 가지는 인간다움에 대해 관객들에게 되묻는다.
데이빗의 여정은 한 가정에 입양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처음에 그는 기존에 있어야 할 아이 대신에 많은 사랑을 받는다. 그러나 인간다운 로봇이기 때문에 가능한 가정적인 매력에 빠져드는 데이빗의 행복은 인간아이와의 대립으로 인해서 점점 비틀리기 시작한다. 맛있게 음식을 먹는 아이를 따라하려고 음식을 먹다가(로봇은 음식을 먹지 못하니까) 고장나기도 하고, 형제간에 흔히 있을 법한 사소한 질투를 하기도 한다. 문제는 그 이후에 일어난다. 입양한 자식은 흔히 가슴으로 낳았다. 라는 표현을 사용하지만 직접 배가 아파서 낳은 자식을 대체할 수는 없었던 것일까? 그렇게 데이빗은 가족이라는 울타리 밖으로 밀려나게 된다. 이것이 단지 '인간'에게 버림 받은 '로봇'만의 문제일까? 실제로 가족이라는 울타리 밖으로 밀려나가는 인간들의 모습을, 우리는 너무나 주위에서 자주 볼 수 있다. 그렇게 스티븐 스필버그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곳저곳을 헤메다 데이빗은 인간에 대한 불신-공격성을 가진 로봇들의 집합소로 들어가게 된다. 그 곳은 음침하고 지저분한, 이른바 슬럼가를 연상시키는 곳이다. 그 안에서 로봇들은 인간을 불신하고 미워하지만 여전히 인간에 의해 '망가진다'. 이 부분에서 인간이 다른 인간을 학대하는 것을 읽어낸 내가 특별한 것일까? 어찌되었든 데이빗 또한 인간에 의해 망가질 위기에 처한다. 그리고 그 순간 데이빗은 외친다. 살려달라고. 이것은 인간적인 로봇이 다른 인간에게 던지는 교류의 시작이다. 다시 말해, 인간이 다른 인간을 인간으로 보는 시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이 타인을 객체로 볼 때 서로를 학대할 수 있다. 그러나 도와달라고 외친(인간다움을 확인한) 순간 인간들은 데이빗을 구해준다. 이것이 우리가 가져야하는 근본적인 '휴머니즘'이다.
그렇게 '인간의 사회'와 '로봇의 사회'를 모두 경험한 데이빗이 가는 곳은 예전에 놀이공원이었던 곳이다. 지금은 수몰되어 버린 그 곳에서 데이빗은 '요정'을 만난다. 물론 그 요정은 진실된 요정이 아니다. 그리고 갑자기 빙하기가 찾아오며 데이빗은 긴 꿈을 꾼다. 이것은 양 쪽의 사회에서 희망을 잃은 데이빗이, 결국 사회와의 연결고리를 스스로 끊고 자기만의 세계로 침잠하는 것을 의미한다. 문제는 이 지점부터 작품이 길을 잃고 헤메기 시작한다는 것. 갑자기 나타난 외계인은 데이빗을 살려주고 그가 가지는 '감성'을 이해하기 위해 애쓴다. 물론 이 때의 외계인은 단순히 외계인이 아니라 너무나 많이 발달해버린 '로봇'이다. 그런 의미에서 데이빗은 그들의 선조이자, 유일하게 남은 인간다움이다. 그리고 너무나 많이 발달해 '외계인' 처럼 되어 버린 로봇이 현대인을 상징한다는 것을 읽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리고 데이빗은 자신이 원했던 이상을 '꿈꾼다'. 그것은 현실이 아니다. 그러나 데이빗은 이상적인 삶을 꿈꾸는 것에서 만족을 얻는다. 그리고 그 순간 긴 잠에 빠진다. 결국 이 시점에서 관객들은 진정한 인간성을 지닌 것이 누구인지 헷갈리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인간이 인간적인가, 로봇이 인간적인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생겨나는 다툼과 갈등은 우리네 사회가 끊임없이 가져왔던 갈등의 근본구조와 다르지 않다. 안타깝게도 'AI'는 그것을 속 시원히 해결해주지는 못한다. 그러나 행복하게 잠드는 데이빗의 모습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2시간 30분에 달하는 긴 러닝타임 동안 스티븐 스필버그는 엄청난 이야기를 작품 안에 쑤셔넣다시피 집약시켰다. 게다가 화려하게 펼쳐지는 영상들은 관객들의 눈을 현혹시키기에 충분하다. 이런 상황에서 온 정신을 가다듬어 오롯이 작품의 메세지를 이해하는 것은 상당히 힘들다. AI를 몇 번이나 본 아직도, 다시 볼 때마다 새로움을 느낄 수 있는 것은 그 만큼 AI가 가지고 있는 이야기가 다양하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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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Artificial Intelligence)’(스티븐 스필버그, 2001)
‘A.I.’는 원래 스탠리 큐브릭이 브라이언 앨디스의 단편소설에서 아이디어를 빌려와서 제작을 기획한 것이지만 생전에 완성을 보지 못하자, 큐브릭이 만화가 크리스 베이커에게 의뢰했던 스토리보드와 스케치들을 참고로 스티븐 스필버그가 완성시킨 영화다. 많은 비평가들은 큐브릭의 지적인 분위기가 스필버그의 판타지적이고 휴머니즘이 강한 색채로 변해버린 것을 몹시 못마땅하게 여기지만, 영화가 감독의 예술이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그런 비난은 정당하지 못하다. 물론 큐브릭이 완성했다면 다른 결론으로 종결지어졌을 수도 있지만, 큐브릭의 미완성 작품이라고 해서 스필버그가 큐브릭의 방식대로 제작해야 한다는 기대와 요구는 지나치다.
온실효과로 인한 이상기후로 인간과 도시는 생명을 지속시킬 수 있는 환경을 더 이상 가질 수 없었다. 식량문제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갔고, 지구상의 생존을 지속시킬 수 있게 하기 위해 인간은 대책을 마련해야만 했다. 그래서 인간은 로봇 개발을 서두르게 되었는데, 단순히 기능적인 측면만이 강화된 로봇으로는 인간의 욕구를 만족시킬 수 없었다. 더욱 진화된 형태의 로봇의 필요성이 강하게 제기되면서 하비 교수는 사랑의 감정을 가질 수 있는 아이 로봇(robot child)을 만들게 되었다. 이후로 전개되는 영화는 성격이 확연히 구분되는 세부분으로 구성된다. 첫째는 헨리와 모니카 가족 안에서 전개되는 이야기고, 둘째는 숲속에 버려진 후에 여자에게 기쁨을 주도록 설계되어 있는 조와 더불어 푸른 요정을 찾아 돌아다니며 세상을 경험하는 이야기이며, 셋째는 지극히 판타지적인 성격을 갖는 부분이다.
아이로봇 데이빗은 마틴이라는 이름의 아들을 잃은 모니카와 같은 큰 슬픔을 당한 사람들에게 큰 위로가 되었다. 처음에는 낯설고 두려웠지만 점차 데이빗에게서 인간의 감정을 느끼고 감정적으로 소통될 수 있음을 알게 된 모니카는 현실을 받아들인다. 데이빗은 엄마인 모니카의 사랑으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행복을 경험한다. 그러던 어느 날 불치병이 치료되길 기다리며 냉동처리 되었던 마틴이 건강하게 깨어났다는 소식을 듣게 되고, 마틴은 곧 정상적인 삶을 살게 된다. 엄마 모니카의 사랑이 마틴에게 향하고 있고, 또 그 사랑이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되는 것을 지켜보면서 데이빗은 강한 질투심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로봇인 자신의 현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데이빗은 엄마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기회만을 찾을 뿐이다. 마틴의 꾐에 넘어가 엄마의 머리카락을 자르려 하고, 또 마틴 친구들을 피하다 마틴과 함께 수영장에 빠져 마틴의 생명을 위협하는 사건을 계기로 데이빗은 가족을 떠나게 되는데, 제조회사에 의해 회수처리 되면 더 이상 활용이 불가능하도록 설계되었기 때문에 단순한 기계로 폐기 처분된다. 데이빗이 폐기처분되는 것을 원하지 않은 엄마 모니카는 자신을 버리지 말라는 데이빗의 애원을 물리치고 그를 숲속에 유기한다.
기계 사냥군들을 피해 도망 다니던 데이빗은 인간들에 의해서 버려진 소속이 없는 기계들이 어떻게 비참하게 파괴되는 것을 지켜보게 된다. 인간들에 의해 만들어졌지만 더 이상 소용없기 때문에 혹은 기계의 세상이 도래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폐기되고 있다는 말을 듣고 인간의 잔혹함에 놀란다. 그러나 데이빗은 구경꾼들에 의해 로봇이 아니라 인간으로 인정되어 다행히 폐기처분될 위기에서 벗어난다. 그리고 마침내 조와 더불어 자신의 꿈을 찾아 세상의 끝을 향해 떠난다.
자신을 만든 하비 박사에게서 데이빗은 자신이 더 이상 진화가 필요 없는 로봇이고, 매우 특별한 로봇이라는 말을 듣지만, 자신과 동일한 모습과 캐릭터를 가진 로봇을 만나 분노하게 되고 그것을 제거한다. 그리고 자신이 유일한 존재가 아니라 수많은 로봇의 형태로 복제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절망하며 결국 자살을 시도해 스스로 바닷물에 몸을 던진다. 그러나 바다 속에서 푸른 요정의 모습을 본 데이빗은 끊임없이 인간으로 만들어 달라는 소원을 빈다.
어느덧 2000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지구상의 인간은 빙하기를 견디지 못해 모두 사라진 시기에 외계인들의 도움으로 데이빗은 깨어난다. 데이빗의 기억을 현실로 복원시킬 수 있고 DNA로 생명체를 복제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외계인들의 도움으로 데이빗은 자신의 기억 속에 있는 공간 속에 있게 되지만, 인간복제 기술이 아직은 충분하지 못해 DNA로 복제된 엄마와 재회할 수 있는 시간은 오직 하루밖에 주어지지 않는다. 비록 하루라도 그토록 그리던 엄마와 함께 있다는 사실, 그리고 엄마로부터 사랑을 받고 또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은 데이빗에게 꿈을 이루는 일이었다. 결국 하루의 시간을 행복하게 보낸 후에 잠드는 엄마 곁에서 눈을 감고 잠을 청하는 데이빗의 모습을 보며, 그는 더 이상 로봇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인공지능 연구에서 금기로 여겨지고 있는 것은 자율적인 사고와 판단행위, 그리고 감정을 갖는 것이다. 금기라는 표현을 쓴 것은, 만일 위의 조건들을 충족시킬 경우 인공지능은 인류를 위협할 정도로 가공할 만한 위력을 가길 수 있기 때문이다. 아직까지는 현실이 아니기 때문에 위협의 모습은 오직 문학적인 상상력을 통해 제시되고 또 영상적인 상상력을 통해 볼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금기라고 말하기는 하지만 엄밀히 말해서, 그것은 인공지능 연구의 현실적인 한계이기도 하다. 현재의 기술로는 인간과 같은 사고능력이나 감정능력을 소유할 수 있는 인공지능을 생산할 수 없기 때문이다. 블레이드 러너가 수명에 한계를 설정함으로 안전장치를 설정했다 해도 무엇이 Duplicant인지 구별하기가 쉽지 않았듯이, 인공지능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 아무리 안전장치를 한다 해도 그것이 인간의 완전한 통제에 있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통제가 벗어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오직 상상력에 의지해서 생각될 수 있을 뿐이다. 인류 역사를 되돌아볼 때 인공지능에 대한 연구는 결국 안드로이드, 곧 인간의 형태를 가지고 인간과 유사한 능력을 가진 인공지능 개발을 지향할 것이다.
‘에이아이’는 바로 이런 맥락에서 감정의 문제에 초점을 맞춘 영화다. 아이 로봇에게 자율적인 생각과 판단능력은 이미 전제되어 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감정마저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 아이 로봇에게 안전장치를 설정해 놓았다면, 더 이상 성장하지 않는 영원히 아이로 머문다는 사실이다.
‘에이아이’가 인간을 성찰하는 대부분의 방식은 인간과 로봇을 비교하는 것인데, 하나는 철저히 기능적인 존재로 인간과 더불어 살기를 원하는 기계와 달리, 기계들이 자신들의 세계를 수적으로 그리고 힘으로 압도할 것이라는 염려에서 기계를 무참히 파괴하는 인간에게서 그들의 두려움과 쾌락주의를 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먹고 자고 느끼고 경험하며, 친밀한 정서적인 관계를 갖는 것 등이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데이빗이 주목하는 것은 단순히 의식주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인간이 서로 관계를 표현한다는 것에 있음을 알게 된다. 그래서 자신에게 허락되어 있지 않음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틴이 먹는 것을 흉내내다 스스로를 망가뜨리는 위험을 자초하기도 한 것이다. 무엇보다 마틴과 엄마와의 관계를 지켜보면서 일어나는 감정의 변화나 혹은 자신과 동일한 모습의 데이빗의 모습을 보았을 때 느꼈던 질투와 분노, 그리고 인간이 되고자 하는 꿈을 추구하는 모습, 자신이 세상에서 유일한 존재가 아니라 수많은 복제물이 있다는 사실을 보고 절망하는 모습은 감독이 영화를 통해서 성찰하는 인간이해의 단면들을 보여준다.
영화가 말하는 인간은 이기적이고, 다른 어떤 곳에서 동일한 것을 발견할 수 없는 독특한 존재이며, 친밀한 관계를 원하고, 이것이 방해되었을 때는 질투를 느끼는 존재다. 무엇보다 인간은 사랑을 하고, 사랑을 받으며, 꿈(희망)을 추구하고 그것이 좌절될 경우에는 절망할 수도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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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언제나 사랑했단다..."
AI중에서 최고의 명대사입니다.
데이빗이 그간 바래왔던 것을 이루었으니까요.
데이빗이 인간이 되고싶은게 아닙니다.
엄마에게 사랑을 받고싶었던것이였죠.
진짜 인간이 되면 엄마에게 사랑을 받을 수 있을것이라는 믿음 때문에
인간이 되려고 악을쓴것입니다.
영화는 이렇게 막이 내립니다.
데이빗은 로봇이라서 잘 수없고 자는척이 가능한데. 진짜로 잠을 자는것이죠.
몸은 철로 만들어졌지만, 이미 마음과 머리는 인간이라는 것.
데이빗도 결국 자신의 전원을 스스로 차단한듯 싶습니다.
테디가 침대위로 올라와 좌절한듯 털석 앉아버립니다.
사랑은 그 무엇도 초월한다는 것입니다.
진실되고 순수한 사랑만이 이 세상 모든 것을 초월합니다.
푸른요정은 종교나 신앙에 비유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항상 희망을 주시고, 세상 모든 일을 해결해주는 하느님이죠.
그렇지만, 하느님은 해결해 주시지 않습니다.
푸른요정도 마찬가지로 허구의 존재, 믿음 그 자체를
인물로서 표현한 것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