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서기 1023년 북송 인종(仁宗) 시기의 일이다. 나는 부귀한 관리의 집안에 태어났다. 대신 송화(宋和 나중에 관직이 상서까지 오름)의 딸로 환생했으며 이름을 숙아(淑雅)라 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거문고, 바둑, 글씨, 그림 등 못하는 것이 없었다. 부친이 점치는 사람을 불렀다. 부친은 나와 두 오빠 그리고 여종의 출생 팔자를 함께 역술가에게 주며 미래의 운명을 봐 달라고 했다. 역술가는 네 사람의 팔자 중에서, 내가 장래에 반드시 크게 부귀하게 될 것이라고 풀어냈다. 과연 역술가의 풀이대로 후에 나의 운명은 그대로 나타났다. 나는 17세 때 후궁으로 간택되어 입궁했다. 성격이 단아하고, 총애를 다투지 않았으므로, 황제의 총애를 많이 받아 귀비로 봉해져, 황궁에서 아무런 근심 걱정 없이 편안한 나날을 보냈다.
그러던 중 황제의 신변에서 한 가지 큰 사건이 발생했는데, 바로 황제가 자기의 생모를 찾은 일이었다. 여러분은 아마 ‘살쾡이와 태자를 바꾼 이야기’를 알 것이다. 사실 그것은 허구가 아니라 진실한 사건이었다. 그것은 인종의 부친인 진종(眞宗) 시기의 일이었다. 두 명의 후비 유비(劉妃)와 이비(李妃)가 동시에 아이를 가졌는데, 유비는 위인됨이 총명했고, 이비는 성정이 온후했다.
진종은 누구든 아들을 낳는 사람을 황후로 앉히겠다고 했다. 그러자 유비와 태감 곽괴(郭槐) 등이 음모를 꾸몄다. 만약 이비가 아들을 낳으면, 가죽을 벗긴 살쾡이로 태자를 바꿔치기해서 이비가 괴물을 낳았다고 음해하기로 한 것이다. 정말로 이비가 아들을 낳자, 유비 측에서는 계획대로 음모를 진행했다. 그래서 곽괴는 구주(寇珠)를 사주해 태자를 살해하게 했다. 하지만 구주는 차마 태자를 죽이지 못하고 태감 진림(陳琳)에게 맡겼고, 진림은 태자를 팔현왕(八賢王)의 부(府)로 보냈다.
마침 그 때 팔현왕의 부인이 딸을 낳았다. 팔현왕은 외부에 용봉(龍鳳)의 태를 낳았다고 하고는, 진림이 보낸 태자를 자신의 아들로 삼았다. 이때 유비 역시 딸을 낳았다. 유비와 곽괴는 구주가 태자를 죽이지 않았다고 의심했다. 그러나 구주는 태자는 죽었다고 잘라 말하며, 유비와 곽괴가 더 이상 의심하지 않도록 기둥에 머리를 부딪혀 자살했다.
이비는 괴물을 낳았다는 이유로 냉궁에 갇혔고 나중에는 서민으로 전락하여 온갖 고생을 다 겪고, 두 눈은 실명되었다. 진종 황제가 붕어한 후 팔현왕의 아들(바로 태자)이 즉위하니, 이가 바로 인종황제였다. 나중에 이 사건의 진상이 밝혀져 이비는 다시 후궁으로 돌아왔고, 유 태후는 자살했으며 이비가 진정한 태후가 되었다.
민간에서 이에 대한 이야기가 하나의 야사로 전해지는데, 비교적 진실하여 때로는 나도 깜짝 놀란다. 어떻게 민간에 유전되는 것이 역사의 기록보다 더 진실한가? 당연히 어떤 것들은 정사(正史)에 기록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렇다면 진실이 전해져 내려올 수 있는 것은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하나는 당시 진상을 아는 사람이 입으로 전해서 내려온 것이다. 다른 하나는 바로 역대로 하늘의 일을 아는 고인(高人)이 그가 본 진실한 정황을 전해준 것이다. 전하는 과정 중에 다소의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대체적으로는 진실하다. 인류사회에 무엇이 유전되어 내려오는 것은 절대 아무 이유가 없는 것이 아니다. 일종 하늘의 안배로서 인류 사회에 어떤 것을 남겨주거나 하나의 이치를 알려주려는 것이다.
이 태후는 큰 난을 당하면서 인간의 고초를 많이 겪었으므로 사람은 더욱 선량해졌다. 늘 황상에게 백성의 고생에 관심가지라고 권했다. 태후는 늘 말하기를, 유비는 명리를 너무 중하게 여겨 다른 사람을 해치고 스스로도 해쳤다고 말했다. 또한 그녀는 자신이 젊을 때 나와 매우 유사했다고 말하며 나에 대한 사랑이 극진했다. 가끔은 내가 궁중에 가서 문안을 드리면, 주위 사람들이 별로 없을 때는 늘 자기 옆에 앉으라고 하며 자기의 경험담을 이야기해 주곤 했다.
그녀가 상심했던 일을 회상하며 말 하면 나도 함께 눈물을 흘렸다. 황상은 태후에게 농담조로 “숙아는 모후의 딸 같습니다.” 라고 하기도 했다. 당시 나의 생활은 평화롭고 부귀했으나, 명이 짧아 32년 밖에 못살았다. 인두염으로 죽었으며, ‘설아’라는 이름의 딸을 하나를 남겼다. 그 일세 중 풍운 인물들은 포증(包拯 포청천), 전소(展昭 포청천 무사), 공손책, 범중엄 등으로 그들의 형상은 지금도 내 눈에 역력하다. 말하는 김에 여기에서 공능으로 본 이비와 유비의 과거세의 인연관계를 말해보고자 한다.
송 태종(太宗) 시기에 한림학사 왕장평(王章平)은 왕취평(王翠)이라는 이름의 사촌을 아내로 맞았다. 결혼 후 5년이 되어도 아들이 없자, 왕장평은 또 첩을 맞아 들였는데 이름이 백지평(白芷平)이었다. 취평은 남편의 총애를 너무 의지하면서 자신이 정실이라는 점을 내세워 질투가 아주 심했다. 그래서 지평을 온갖 방법으로 괴롭혔다. 조금의 실수만 있어도 지평에게 가법(家法)을 들어 남편이 집안에 없는 틈을 타서 채찍질을 가하거나, 때로는 무릎을 꿇게 하여 욕을 퍼부었을 뿐만 아니라 화나면 때리고 발로 차기도 했다. 지평이 아이를 가진 후 취평은 겉으로는 좀 조심하는 듯했으나, 학대하는 수법은 점점 더 음험해졌다. 지평이 마시는 탕에 기혈(氣血)을 상하게 하는 약을 넣기도 했다.
지평이 아이를 가진지 3개월이 되었을 때 문안 인사를 갔는데, 그녀가 오기 전에 미리 바닥에 오동나무기름을 발라 지평이 미끄러져 유산하게 만들었다. 지평은 이것이 모두 취평이 한 짓임을 모두 알고, 취평을 더욱 미워하여 원한을 가졌다. ‘네가 내 혈육을 죽였지. 내가 나중에 너의 혈육을 떨어지게 할테다.’ 지평이 유산한지 반년 후 왕장평은 또 작은 첩을 들였는데 이름이 ‘녹로(綠露)’였다. 그녀 역시 마찬가지로 취평의 미움을 샀다. 녹로는 지평처럼 참을 수 없었으며 늘 지평을 꼬드겨 보복을 하자고 했다. 가끔 지평과 상의했는데, 마침내 두 사람은 힘을 합해 비상으로 취평을 독살시켰다.
취평이 죽은 후 지평의 몸은 줄곧 좋지 못했으며, 기혈이 상해서 다시는 아이를 갖지 못했다. 녹로는 나중에 아들을 낳았으므로 왕장평이 정실로 들였으며, 때로 지평을 조롱했다. 지평은 하루 종일 우울하게 지내다가 42세에 세상을 떠났다. 나중에 취평은 이비로 태어나고, 지평은 유비로 전생했으며 녹로는 구주로 환생한 것이다. 이들의 관계는 마치 아래의 노래의 가사 같다.
사람 마음에 일념이 생기니
천지가 다 아는 구나,
선악에 보응이 없다면
하늘의 사심이 있다고 할 수밖에!
人心生一念
天地悉皆知
善惡若無報
乾坤必有私
이들은 모두 천년의 윤회를 거쳐 이비와 유비는 오늘 대법제자가 되었는데, 모두 내 신변의 동수들이다.
숙아는 죽은 후 2년도 안된 1057년 또 산동 청주부(青州府) 태평장(太平莊)의 송원외(宋員外)의 집에 태어났다. 송원외는 착하고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하는 사람으로 딸 하나만 두었는데, 딸을 출생할 때 자색 구름이 감도는 것을 보고 이름을 ‘자운(紫雲)’이라 지었다. 어렸을 때 점을 쳐보니, 운명이 평탄하지 못하고 일찍 죽어 끝이 좋지 않을 것이라고 되어 있었다. 그래서 부모는 늘 절에 가서 자운을 위해 많은 보시를 하며 불공을 드렸다. 자운은 예쁘고 품행이 단정했다. 17세 되던 해에 절에 가서 향을 올리기 위해 가마를 타고 좁은 산길을 가던 중에 바람이 불어 가마의 발이 바람에 날리자 자운의 고운 얼굴이 드러났다.
이때 길을 가던 사람이 자운의 미모에 놀라워했는데, 그녀의 인생은 이때부터 뒤틀어지게 된다. 이 사람은 다름 아닌 이룡산(二龍山)의 도적 두목으로 이름이 구평(邱平)으로, 그는 관청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산으로 쫓겨 도망쳐 도적이 된 사람이었다. 마침 산속에 일이 없어 산에서 내려와 시내로 들어가 산보를 다니다가 산에 올라 점괘를 뽑아보고 가는 길에 풍경을 감상하고 싶었다. 그 때 마침 작은 가마가 지나가는데 길이 매우 좁아 길옆에 잠시 비켜섰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했던가. 마침 바람이 불어와 주렴이 들려지는 바람에 자운의 빼어난 용모를 보게 된 것이다.
그는 자운을 보자 놀란 가슴이 두근거렸으며 온 정신은 자운밖에 없었다. 그래서 줄곧 소리 죽여가며 조심스럽게 자운의 가마 뒤를 따랐다. 자운 일행은 조금도 눈치를 채지 못 했다. 밤이 되자 자운은 좀 불안을 느꼈다. 부모는 그녀의 몸이 불편한 것을 보고 좀 쉬라고 했으나, 자운은 뒤척이며 잠이 들지 못했다. 구평은 기회를 보아 미향을 꺼내어 자운을 혼미시킨 후 자운을 들쳐업고 태평장을 떠났다.
불쌍한 자운이 깨어나 보니 이미 수레 위에 있는데 몸은 포목으로 감겨 묶여있고, 입을 열어 말을 하려 해데 입이 막혀 있었다.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산채에 도착하자 구평은 사람을 보내 자운을 살펴보라고 했다. 자운은 처음에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자살을 생각했으나, 그럴 기회가 없었다. 구평은 여자를 끔찍이 위하는 사람이라 가끔씩 와서 부드러운 말로 달랬다. 구평이 없을 때 그의 부하 형제가 와서 자운에게, 말을 잘 들으면 좋게 될 것이고, 듣지 않을 시는 어떻게 나쁜지를 분석해 주며 겁을 주었다. 또한 그들은 두목인 구평에게 시집가면 어떻게 좋을 것인가에 대해서 계속 말해 주었다. 그러나 자운은 그렇게 며칠을 대치하다 그만 기절했다.
나중에 깨어나 보니 구평이 자기에게 물을 먹여주고 있었는데, 눈에는 부드러운 정이 가득 충만해 있었다. 자운은 마음이 좀 풀어졌다. 이 사람은 천성에 양심이 사라지지 않고, 인간성이 그대로 있는 사람임을 보았던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속마음은 달갑지 않았다. 그래서 두 눈을 감고 이를 꼭 다물었다. 구평이 이 모습을 보고 그릇을 내려놓고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이번 생에 소저와 연을 맺기를 소망합니다. 만약 저의 소망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이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겠습니다.” 자운은 가만히 있었다.
구평은 한참 있다가 또 말했다. “이생에 소저와 연을 맺기를 바랄 뿐입니다. 딴 마음을 먹지 않을 것이며 소저를 잘 돌볼 것입니다. 만약 소저를 잘 돌보지 못하면 난도질을 당해 죽겠습니다.” 자운은 자기도 모르게 진저리를 쳤다. 두 눈을 뜨고 망연히 아무 말도 없이 속으로 생각해 보다가 다시 눈을 감았으며, 눈가에 눈물이 천천히 흘러내렸다. 이때 마침 구평이 머리를 들었는데 이 장면을 보고 수건으로 자운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자운은 허공중에 어떤 사람이 탄식하는 것 같았다. “그의 진실한 정을 헛되게 하지 말아라.” 무슨 뜻인지 몰랐지만 마음은 점점 부드러워져 구평에게 말했다. “당신은 하필 이같이 독한 맹세를 하시나요?”
구평이 말했다. “이 생에 나는 소저만 마음에 두고 소저와 연을 맺기만을 소원합니다.” 자운은 어렸을 때 부모가 운명을 봐준 것을 생각했다. 자기도 모르게 탄식이 나왔다. “일어나세요.” 아마 운명이 이런가보다 했다. 자운은 얼굴 표정은 점점 가벼워졌고, 결연히 거부하는 느낌이 없었다.
구평은 크게 기뻐하며 일어나서 부하에게 흰죽을 끓이라고 이르고, 기쁜 마음에 입을 다물지 못한 채 자운의 앞뒤에서 돌봐주기 바빴다. 자운은 점점 음식을 먹기 시작했으며, 자신의 인생길을 깊이 생각해 보고는, 며칠 후 구평의 요구에 응낙하여 산채의 부인이 되었다. 그 후 그들의 사이는 좋아져서 구평이 한가할 때 늘 자운을 동반했으며, 때로는 같이 풍경을 구경하고 자운에게 노래를 불러주기도 하며 자운을 매우 잘 대해 주었다. 시간이 길어지자 두 사람의 감정은 점점 깊어졌다. 자운은 때때로 함부로 살인을 하지 말라고 권고하였고, 양가의 부녀가 산에 잡혀오는 것을 보게 되면 타일러서 그들을 돌려보내도록 했다.
한 번은 잡혀왔던 어느 처녀를 놓아줘 돌려보냈는데, 이것 때문에 부두목에게 죄를 짓게 되었다. 부두목은 성이 왕(王)이고 이름은 와(窪-웅덩이)였는데, 그의 모친이 그를 임신했을 때 웅덩이에 미끄러져 넘어지는 바람에 조산을 하여, 이름을 ‘왕와’ 라고 지은 것이었다. 이 사람은 마치 그 이름처럼 마음이 음험하고 도덕심이 없는 품행이 저질인 사람이다. 그는 두목인 구평이 늘 부인인 자운의 말만 듣고 큰 재물을 취하지 못 한다고 불만을 품고 있었으며, 더구나 지난번에 놓아준 처녀는 그가 마음에 들어 아내로 삼으려고 했던 것이었다.
그래서 악한 마음이 생겨 기회를 엿보다가 두목이 없는 틈을 타서 음식에 미약을 넣어 자운을 기절시킨 다음, 포대에 넣어 산 아래로 가져다가 심복을 시켜 먼 외지 청루에 팔아버렸다. 청루의 주인은 자운의 미색을 보고 자운에게 손님 접대를 하라고 했는데, 자운은 맹세코 따르지 않았으며 죽으려고 했다. 그러나 죽지도 못하고 나중에 청루의 주인과 타협을 했다. 접객은 하되, 몸은 팔지 않겠다고. 그래서 그는 손님에게 거문고를 타고 노래만 하였다. 그녀는 매우 처량한 심사로 슬픔 속에서 나날을 지냈다. 이따금씩 부모가 생각났으나, 처지로 보아 깊이 생각할 수 없었고 그저 수치스러웠다. 또 가끔 구평도 생각하며 산채에서 지낸 5년의 생활을 회상하기도 했다.
일 년 후 어느 날 창문에 기대어 밖을 내다보다가 길을 지나가는 부자 상인의 눈에 들었다. 그 상인은 자운의 미모에 놀라 청루에 들어와서 고액으로 자운의 웃음을 사려고 했다. 그는 자운이 예능만 할 뿐 몸은 팔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는, 그 자리에서 거금의 은자를 꺼내어 자운의 몸값을 지불하겠다고 했다. 자운은 이를 보고 좀 헤아려보다가 응낙했다. 청루에서 나온 후 상인을 따라 양주에 도착했다.
상인의 이름은 송화(宋華)였는데 소금을 판매하는 상인이었다. 집안의 큰 부인에게는 이미 두 아들이 있었는데, 큰 아들은 송평(宋平), 둘째는 송창(宋暢)이었다. 송창은 자운을 보고 마음이 흔들렸으나, 감히 함부로 하지는 못했다. 부친은 늘 외출했으므로 시간이 길어지자 송창은 늘 둘째 어머니 자운에게 눈독을 드렸으나 자운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러자 애가 탄 송창이 은근하게 접근하며 말로 떠보았으나 단호히 거절당했다. 그는 드디어 원한을 품고 늘 밤낮을 엿보았다. 이때 자운은 몸에 항상 비수를 숨기고 다니며 위급한 상황에 대처했는데, 마침 큰 부인이 눈치를 채고 아들을 단속했다.
큰 부인은 현숙하고 단정하여, 자운은 큰 부인을 매우 존경하며 아침저녁으로 문안드리고 태만히 하지 않았다. 그러자 큰 부인은 두 사람을 보내 자운을 지키게 하면서, 둘째 아들 송창에게 아내를 구해 주었다. 하지만 송창은 그래도 자운을 향한 나쁜 마음을 버리지 않았고, 갈수록 더 생각이 나서 마침내 독계를 품었다. 자운이 병이 났을 때 약속에 몰래 독을 넣어 독살시켰는데, 그때가 32세이었다. 자운이 송가에서 지낸지 9년이 되던 해다.
이야기는 다시 산채로 돌아간다. 부두목 왕와는 자운을 몰래 청루에 팔아버린 후 자신의 죄상을 감추기 위해 산채에 불을 질렀다. 구평이 돌아온 후 자운이 보이지 않자, 왕와는 울며불며 구평에게 큰 불이 난 후 형수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고 거짓을 말했다. 구평은 사람을 풀어 사방으로 자운을 찾아보았으나 찾을 수 없었다. 그 때 이후 구평은 다시는 부인을 들이지 않았다. 자운이 산채를 떠난 지 3년 후 관병이 산채를 토벌할 때 구평은 병사를 데리고 포위망을 뚫으려 했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마침내 관병의 칼에 난도질을 당해 죽었다. 이전에 자운에게 약속한대로 “소저를 잘 돌보지 못하면 난도질당해 죽겠소”라고 한 말이 그대로 실현되었던 것이다.
말이 나온 김에 여기서 구평과 자운의 몇 세에 얽힌 연분을 말해보자. 자운은 지난번 생에서 숙아였고, 구평은 그녀 집안의 노복이었는데 송평(宋萍)이라 했다(당시 가노는 주인의 성을 따랐다). 나이는 숙아와 비슷했고, 마음속으로 숙아를 사모했다. 하지만 신분이 미천했으므로 감히 드러내지 못했다. 매일 소저의 얼굴을 한번 보았으면 했을 뿐 그 외에 바라지는 않았다. 소저가 입궁한 후 다시는 만날 수 없어 상사병이 되었고 우울해 하다가 죽었다. ‘죽기 전에 소저를 한번 보았으면,’ 하며 잊지 못했다. 그래서 이번 세에 그들 두 사람의 연분이 이렇게 된 것이었다.
천년 이후 오늘 대법 수련을 통하여 공능이 나오자, 나는 천년의 역사를 뚫고 이 일체를 투철히 보았다. 천년 후의 오늘 나는 마침내 알았다. 자운이 산채의 허공 중에서 들었던 그 목소리 “그의 진실한 정을 헛되게 하지 말아.” 하던 그 말의 진정한 뜻이 있는 곳을 알았다. 사람은 너무나 불쌍하다. 무지 중에 다른 사람에게 일으킨 상해를 모두 갚아야 한다. 사람은 늘 자신의 운명을 주재하려고 생각하지만, 오히려 자기의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
이 문장을 쓸 때 나는 구평이 지금은 어디 있을까 생각해 보았는데, 놀랍게도 그는 지금의 남편이었다.(전에 나는 지금의 남편과 삼세에 걸친 부부의 연분을 알고 있었다). 나중에 구평은 또 프랑스의 루이 15세로 전생했다. 그 일세에 나는 봉파두르 후작 부인이었는데, 아름답고 재능이 있어 루이 15세의 총애를 받았다. 나중에 국왕이 새 애인이 생겨 나를 버리자 나는 질투하고, 한이 맺혀, 마침내 우울하게 지내다가 병이 나서 일찍 죽었다. 또 한 번 업을 상환한 셈이었다.
옛 사람들은 남녀가 서로 물건을 주고받으면 안 된다고 했다. 남녀 방면에 많은 도덕규범이 있는데, 더욱이 여자에 대한 규범이 더 엄격했다. 사실 그것은 당시 사회의 도덕표준만이 아니라 더욱 깊은 원인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남녀 사이에 불필요하게 업을 빚는 일을 면하기 위한 것이었다. 지금의 사람은 감정에 대해 무책임해 부주의로 다른 사람에게 상해를 조성하는데, 그것은 모두 갚아야 한다.
만일 정말 어떤 사람이 당신을 사모하다가 병이 되어 억울하게 일생을 마친다거나, 혹 당신 때문에 질투하다가 죽게 되면, 장래에 당신은 아마 일생 혹은 몇 생으로 갚아야 할 것이다. 비록 당신이 알고 그랬던 모르고 그랬던, 그에게 고통을 준 것이 당신 때문에 생긴 것이라면 말이다. 왜냐하면, 신은 이 방면을 가장 중요하게 보기 때문이다. 당연히 이 역시 낡은 우주의 이치가 완전하지 않은 곳이다. 장래에 정법이 끝난 후 아마 모두 변화가 일어날 것이며 바로잡힐 것이다.
자운은 죽은 그 해에 바로 환생했는데 아주 가난한 집이었다. 이번에는 이규(李逵)라는 이름의 남자였다. 이번 생에 그는 매우 못생겼고, 힘이 매우 세어 늘 문제를 일으켰다. 부친이 일찍 죽자 그를 더는 단속할 사람이 없었다. 그는 늘 불만을 터뜨렸다. 때문에 사람들이 집으로 따지러 찾아오곤 했다. 22세 때 불만으로 사람을 때려 죽여, 그 때문에 떠돌아 다녀야 했다. 그러던 중 송강을 만나 의형제를 결연하여 수박양산(水泊梁山)으로 들어갔다.
싸움에는 용맹했으므로 늘 전투에서 선봉을 섰다. 하늘에 의지하여 식구들을 돌보았는데, 항상 놀람은 많았지만 위험 없이 전투를 하며 지내왔다. 양산에서 일어난 의병은 송강의 지휘 하에 북으로는 요, 남으로는 방랍을 정벌하는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그러나 후일 조정의 권력자 고구 등이 질투하고 있었는데, 마침내 기회를 틈타 황상이 상으로 내린 어주에 독을 넣었으며, 이 독주를 송강이 마신 후 잘못되었음을 알았다. 그는 자기가 죽은 후에 의형제 이규가 반란을 일으켜 그 재앙이 여러 형제들에게 미칠 것을 염려하여, 이규를 불러와 그와 함께 술을 마시면서 사실을 말했다. “이번 생에 형제에게 미안하네, 다음 생에 다시 연을 맺어 잘 돌보겠네.”(이 약속을 위해 송강은 나중에 영국에 태어나 나의 이모가 된다)
이규는 돌아간 후 술독이 점점 전신에 퍼졌고, 마음속 슬픔이 파도처럼 일어났다. 독이 심장에 도달했을 때 마음은 칼로 찌르는 듯했으며, 극도의 고통으로 죽었는데, 그 때 나이가 32세였다. (주: 나중에 나는 영국에 환생하여 유명한 작가 샬롯 브론테(유명한 제인에어의 작가)가 되었는데, 당시 양산박의 송강, 임충, 화화상 노지심은 그 생에 각각 나의 이모, 어머니, 다섯째 동생 에밀리가 되었다)
이규가 죽은 후 같은 해에 농가에 태어났는데 이름이 장맹이었다. 코와 입이 반듯하여 의젓하고 당당한 외모를 지녔고, 어려서부터 무술을 좋아했다. 북송 정권이 금나라에 의해 멸망된 후 조구(趙構 남송의 고종)가 남쪽에서 나라를 다시 세웠는데 바로 남송이다. 금군은 중원에서 불태우고, 죽이고, 약탈하며 온갖 나쁜 짓을 다 했다. 남송 정권의 장병들은 군대를 조직하여 잃어버린 나라를 수복했다. 장맹은 신혼에서 얼마 되지 않은 아내에게 이별을 고하고, 악가군(岳家軍-남송의 장수 악비가 이끄는 항금 군대)에 참가했는데, 그때 나이 17세였다.
장군 악비는 무예가 출중하고 정직하여 사병을 잘 돌보며 잘 이끌었다. 그래서 악가군은 전쟁에 용감하고, 기율이 엄해 전투력이 높았다. 금나라 군사들은 그 소문만 듣고도 풀이 죽었으며, 백성들의 지지와 성원을 받았다. 악가군은 진용이 강대할 때는 25만 명이나 되었는데, 이 군대는 십몇 년이 지난 후에도 시종 왕성한 전투력을 유지하여 실로 보기 드문 일이었다. 악가군은 당시 대금 항쟁의 중요한 힘이었는데, 꾸준히 잃은 땅을 회복해 갔다.
1140년 한바탕의 유명한 전투가 있었는데 ‘언성대첩(郾城大捷)’ 이라 한다. 이 전투는 악비장군의 지휘로 금나라의 올술(兀術-금태조 완안아골타의 넷째 아들)이 이끄는 군대와 대결을 펼쳤다. 금군은 철부도(鐵浮圖)와 괴자마(拐子馬)에 의지했기에 악가군 정도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상태였다. 철부도란 중기갑병을 말하는데 머리에는 탑 모양의 철갑을 두르고 몸에는 갑옷을 입고, 말의 가슴에도 갑옷을 입혀 정면에 내세운 부대였다. 괴자마(拐子馬)란 좌우에 나뉘어 있는 양 날개 같은 기병인데, 전투가 시작될 때 철부도를 선봉으로 하여 중앙에서 앞으로 쓸고 나가면, 괴자마는 양 날개가 된다. 이런 진세의 전술을 미리 갈파한 악비는 대책을 세웠다.
두 병사가 큰 방패를 함께 들었는데 이 방패는 특별히 만든 것이었다. 평소의 방패보다 두 배가 되는 것으로, 방패 뒤 양쪽 아래 위에 두 개의 손잡이가 있어 두 병사가 각자 한 개씩 잡는다. 위에 손잡이를 잡은 병사는 왼손으로 큰 칼을 잡고 적의 머리를 공격 했으며, 아래 손잡이를 잡은 병사는 오른손으로 양날 칼을 가진 비수로 말의 다리를 잘라 철부도를 파괴했다. 또 괴자마에 대해서는, 장병들에게 창끝에 갈고리가 달린 창으로 적의 말을 넘어뜨리게 하여 괴자마가 걸려 넘어지게 했다.
바로 이 언성대첩에서 나와 이제(李齊)가 협력했는데 부대는 최정예 부대였으며, 악비의 아들 ‘악운’ 이 이끌었다. 금군이 악가군의 소문만 들어도 벌벌 떠는 이유는 전투력이 매우 강했으며, 더욱이 생을 탐하고 죽음을 두려워하는 무리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대원수(악비)는 여러 번 아들 악운에게 대대를 이끌게 하여 출격시켰는데, 악운이 세운 전공을 대원수는 기억하지 못했으나 기타 장교들은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매번 전투가 끝나면 대원수는 친히 사병을 위문했다. 또 이런 작은 일도 기억난다. 한 번은 전투가 끝난 후 손발이 저려 재대로 움직이지 못해 손을 흔들어 뿌리치고 있었다. 이때 대원수가 지나가다가 친히 무슨 일인가 물어보기도 해서 나는 매우 감동했었다.
백성들은 악가 군사들을 매우 지지했으며 늘 음식 등을 보내 격려해 주었다. 어느 한 성을 함락시키고 나자, 백성들이 환영을 하느라고 길에 늘어섰는데 어떤 사람은 향로를 탁자에 받쳐 들었고, 어떤 사람은 무릎을 꿇어 환영을 표시했다. 그때를 회상하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돈다. ‘언성대첩’ 이 있고나서 금군은 ‘산을 흔들기는 쉬워도, 악가군을 흔들기는 어렵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다. 금올술(金兀術)은 통곡하며 후퇴했고, 악가군은 승세를 타고 많은 성을 함락시키고 개봉에 육박했다.
대원수는 호언을 했다. “곧 바로 황룡부(금나라의 수도)로 쳐들어가서 제군들과 함께 실컷 취해보세!” 하지만 고종 조구는 간신 진회의 꾐에 빠져, 악비군이 금나라를 함락시키면 그곳에 잡혀있는 휘종과 흠종(徽欽)이 구출되고 그렇게 되면 그들을 맞아들여야 한다. 그럴 경우 자기의 제위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운 마음으로, 마침내 악비장군에게 12도 금패(金牌-황제의 명을 전하는 신물)로 연달아 전령을 보내어 군사를 회군 하도록 명 했다. 어쩔 수 없이 명을 받들어 군사들이 돌아갈 때 백성들의 울음소리가 하늘을 진동했고, 어떤 사람들은 군대를 따라 남쪽으로 이주하기도 했다.
진회는 이에 그치지 않고 악비를 모함하여 어쩌면 모반을 일으킬지도 모른다는 죄명으로 악비를 풍파정에서 살해했다. 악비가 죽은 후 악가군은 크게 흔들렸으며, 비분강개하여 적지 않은 사람들이 악 대장군을 위해 원한을 갚으려고 했다. 어떤 사람은 진회를 암살하려고 밤에 몰래 들어가다가 다른 사람에게 가로막혔다. “대원수가 나라를 위해 충성한 명성”을 지키기 위해서 한때의 용기를 과시하지 말라는 (다른 사람의 간절한 충고에) 많은 사람들이 눈물로 슬픔을 참을 수밖에 없었다.
악비장군이 죽자, 풍운은 변하여 거센 북풍이 몰아치고 북방의 금군은 소리 높여 노래를 부르며 진격해 오는 데 막을 방법이 없었다. 남송 조정은 1141년 금과 협약을 맺어 경계를 그어 동쪽으로 회수, 서쪽으로 대산관으로 하여, 그 이남은 송, 북쪽은 금으로 하기로 했다. 한바탕의 장엄한 대 연극은 슬픈 노래 속에 결말이 났다. 나중에 악가군은 조정에 의해 해산되었으며 적지 않은 사병들이 우울하여 흰머리가 생겼다.
어려서 우리집에 악가군의 그림이 있었는데, 그때 나는 악비를 매우 존경했다. 한번은 ‘만강홍’ 이라는 가곡을 들었을 때 듣자마자 신체내의 층층이 진동이 일어나는 것 같았다. 그런 진동 중에서 8백여 년의 감정이 소생하는 듯했다. 이제는 일체의 정감은 모두 이유가 없는 것이 아님을 안다.
예를 들어 진회에 대한 통한, 금나라 군대의 야만성에 대한 의분, 한세충의 부인 양홍옥에 대한 찬탄(당시 한가군이 전쟁할 때 양홍옥은 북을 울려 진을 돋구었다) 같은 것들이 다 이유가 있었다. 또 이제 다시 생각해 보니, 북송시기 양산박 의병군대의 적지 않은 사람이 전사 후에 또 환생하여, 남송 시기에 악가군에 참여했으며, 또 현재 적지 않은 사람이 대법 수련 중에 있거나 대법제자와 인연을 맺었다. 예를 들면 나의 두 오빠(아직 수련하지 않음)는 모두 당시 악가군의 사병이었다. 바로 이렇다 :
슬픈 노래 한곡 한 잔의 술에
일대 영웅의 호기가 자라네
바른 기운이 중원을 보우하니
중생은 법을 얻어 출항하네.
一曲悲歌酒一觴
一代英雄浩氣長
正氣護佑中原處
眾生得法正啟航
고개를 돌려 나의 네 번의 전생을 살펴보니 감개가 무량하다. 전생에 세 번이나 32세까지 밖에 못살았다. 윤회는 매우 빨라 연극의 한 막 같이 총총히 환생하여 태어나는데, 그것은 다음 한 막 연극을 열기 위한 준비였다. 어떤 때 텔레비전을 보거나 소설을 읽으면 그중 인물의 우여곡절은 조금도 허구가 없는 나 자신의 인생경력보다 못함을 본다. 그래서 어떤 때는 나 자신을 보자고 생각한다. 우리가 역사상의 어느 인물이나, 또는 역사의 한 사건을 보았을 때, 자발적으로 영혼의 깊은 곳에서 진동이 일어나거나, 오랫동안 마음에 남아있다거나, 잊어지지 않는다면, 아마 그것은 그 인물과 혹은 사건과 관련이 있거나, 그 사건에 참여자 일수도 있고, 또 어쩌면 그 인물과 역사상 깊은 인연이 있거나 바로 당신이 그 인물의 역할을 했을 수도 있다.
또 당신이 전에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어떤 곳에 갔을 때 영문 모르게 이전에 알았던 느낌이 들거나, 흥분하거나 매우 쓰라린 감정이 들거나 하면 그곳은 아마 당신이 전세에 한때 거쳐 갔던 곳일 수 있으며, 이런 정경은 당신의 심령 깊은 곳에 있는 오랜 역사속의 기억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예컨대 한 동수가 기차를 타고 산해관을 지나가는데 자기도 모르게 마음이 쓰려 눈물이 흘러내림을 금할 수 없었다. 알고 보니 그가 한 때 명나라 성조 시대에 한 장군이었는데 그곳은 그가 주둔했던 곳이었다고 한다.
수련인이 무엇 때문에 과거세에 윤회전생한 정황을 알 수 있는가는 수련하지 않는 사람은 아마 그리 이해하기 쉽지 않다. 사실은 바로 수련과정 중에 일종의 공능이 나타나서 생긴 작용이다. 이것을 숙명통이라고 한다. 여기에서 대법서적 『전법륜(轉法輪)』중의 몇 단락을 인용하여 여러분에게 무엇이 숙명통인지 말해 보겠다.
“또 천목과 직접 관계가 있는 한 가지 공능이 있는데, 숙명통(宿命通)이라고 한다. 현재 세계적으로 여섯 가지 공능이 공인받고 있는데, 그중에 천목, 요시가 포함되며 또 숙명통이 있다. 무엇을 숙명통이라고 하는가? 바로 한 사람의 장래와 과거를 알 수 있고, 크게는 사회의 흥망성쇠를 알 수 있으며, 더욱 크게는 온 천체(天體) 변화의 법칙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이 바로 숙명통공능이다.”
“우리는 물질불멸(物質不滅)을 말하지 않는가? 어떤 특정한 공간 중에서, 사람들이 이 일을 마치면, 즉 사람이 손을 한번 휘둘러 어떤 일을 하면 모두 물질로 존재하며, 어떤 일을 하든지 모두 영상과 정보가 남을 것이다. 다른 공간에서 그것은 불멸하는 것으로서 영원히 그곳에 존재할 것이며, 공능이 있는 사람은 과거에 존재했던 광경을 보기만 하면 곧 알 수 있다. 장래에 당신이 숙명통공능이 있게 된 후, 당신이 오늘 우리가 여기서 강의하고 있는 그런 형식을 보려 하면 그것은 여전히 존재할 것이며 이미 동시에 그곳에 존재하고 있다. 한 사람이 태어날(降生) 때에 하나의 특수하고 시간개념이 없는 공간 중에 사람의 일생이 이미 동시에 존재하고 있는데, 어떤 사람은 일생뿐만이 아니다.”
“숙명통공능의 형식은 사람의 앞이마 부분에 텔레비전의 작은 형광판과 같은 것이 하나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앞이마 이 부분에 있고, 어떤 사람은 앞이마와 거리가 아주 가까우며, 어떤 사람은 앞이마 속에 있다. 어떤 사람은 눈을 감고 볼 수 있으며, 만약 그것이 아주 강하다면 어떤 사람은 눈을 뜨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데, 이는 그의 공간장(空間場) 범위 내의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런 공능이 나온 후에, 또 일종의 공능을 운반체로 삼아 다른 공간 중에서 본 광경을 반영해 오기 때문에 바로 이 천목 중에서 보는 것이다. 한 사람의 장래를 보고 한 사람의 과거를 보는데, 보는 것이 아주 정확하다. 점을 아무리 잘 친다 해도, 작은 일이나 세부적인 것은 역시 추산해 내지 못하는데, 그는 오히려 아주 똑똑히 볼 수 있고, 연대(年代)까지도 보아낼 수 있다. 변화된 세부까지도 모두 보아낼 수 있는데, 그가 보는 것은 바로 부동(不同)한 공간의 사람 또는 사물의 진실한 반영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전법륜 (轉法輪)』「논어」의 한 구절로 본문의 말미를 삼는다.
“우주・시공(時空)・인체의 수수께끼를 완전히 밝혀낼 수 있는 것은 오직 ‘불법’뿐인바, 그는 진정한 선과 악, 좋고 나쁨을 구분할 수 있으며, 일체 그릇된 견해를 타파하고 올바른 견해를 가져다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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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의 인어공주의 윤회이야기의 필자의 그 후의 윤회 이야기 입니다.
【정견10주년 원고】양송(兩宋)의 네 차례 윤회
작자/ 계항 (啟航)
【정견망】 십여 년의 대법수련 중에 사부님께서는 끊임없이 나의 지혜를 열어주셨고 나는 점차 과거 윤회의 정경을 보게
되었다. 내가 한 때 역할을 맡았던 역사를 보았는데, 과거 어떤 때는 평범했고, 어떤 때는 파란이 많았으며, 어떤 때는 비장한
인생경험이 있었음을 보고 감개가 무량했다. 본문에서 기술하는 것은 내가 무수히 윤회 전생한 것의 일부 단편일 뿐이다.
북송(北宋)과 남송(南宋) 시기에 역사의 큰 막은 끊임없이 상영되어 사람을 감동시키는 많은 일들이 있었다. 그 한 단락의 역사
중에 나도 운이 좋았던지, 아니면 어쩔 수 없었던지 나의 역할을 맡아야 했다.
첫번째 세(世):귀비(貴妃) 숙아(淑雅 1023-1055년)
서기 1023년 북송 인종(仁宗) 시기의 일이다. 나는 부귀한 관리의 집안에 태어났다. 대신 송화(宋和 나중에 관직이 상서까지 오름)의 딸로 환생했으며 이름을 숙아(淑雅)라 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거문고, 바둑, 글씨, 그림 등 못하는 것이 없었다. 부친이 점치는 사람을 불렀다. 부친은 나와 두 오빠 그리고 여종의 출생 팔자를 함께 역술가에게 주며 미래의 운명을 봐 달라고 했다. 역술가는 네 사람의 팔자 중에서, 내가 장래에 반드시 크게 부귀하게 될 것이라고 풀어냈다. 과연 역술가의 풀이대로 후에 나의 운명은 그대로 나타났다. 나는 17세 때 후궁으로 간택되어 입궁했다. 성격이 단아하고, 총애를 다투지 않았으므로, 황제의 총애를 많이 받아 귀비로 봉해져, 황궁에서 아무런 근심 걱정 없이 편안한 나날을 보냈다.
그러던 중 황제의 신변에서 한 가지 큰 사건이 발생했는데, 바로 황제가 자기의 생모를 찾은 일이었다. 여러분은 아마 ‘살쾡이와 태자를 바꾼 이야기’를 알 것이다. 사실 그것은 허구가 아니라 진실한 사건이었다. 그것은 인종의 부친인 진종(眞宗) 시기의 일이었다. 두 명의 후비 유비(劉妃)와 이비(李妃)가 동시에 아이를 가졌는데, 유비는 위인됨이 총명했고, 이비는 성정이 온후했다.
진종은 누구든 아들을 낳는 사람을 황후로 앉히겠다고 했다. 그러자 유비와 태감 곽괴(郭槐) 등이 음모를 꾸몄다. 만약 이비가 아들을 낳으면, 가죽을 벗긴 살쾡이로 태자를 바꿔치기해서 이비가 괴물을 낳았다고 음해하기로 한 것이다. 정말로 이비가 아들을 낳자, 유비 측에서는 계획대로 음모를 진행했다. 그래서 곽괴는 구주(寇珠)를 사주해 태자를 살해하게 했다. 하지만 구주는 차마 태자를 죽이지 못하고 태감 진림(陳琳)에게 맡겼고, 진림은 태자를 팔현왕(八賢王)의 부(府)로 보냈다.
마침 그 때 팔현왕의 부인이 딸을 낳았다. 팔현왕은 외부에 용봉(龍鳳)의 태를 낳았다고 하고는, 진림이 보낸 태자를 자신의 아들로 삼았다. 이때 유비 역시 딸을 낳았다. 유비와 곽괴는 구주가 태자를 죽이지 않았다고 의심했다. 그러나 구주는 태자는 죽었다고 잘라 말하며, 유비와 곽괴가 더 이상 의심하지 않도록 기둥에 머리를 부딪혀 자살했다.
이비는 괴물을 낳았다는 이유로 냉궁에 갇혔고 나중에는 서민으로 전락하여 온갖 고생을 다 겪고, 두 눈은 실명되었다. 진종 황제가 붕어한 후 팔현왕의 아들(바로 태자)이 즉위하니, 이가 바로 인종황제였다. 나중에 이 사건의 진상이 밝혀져 이비는 다시 후궁으로 돌아왔고, 유 태후는 자살했으며 이비가 진정한 태후가 되었다.
민간에서 이에 대한 이야기가 하나의 야사로 전해지는데, 비교적 진실하여 때로는 나도 깜짝 놀란다. 어떻게 민간에 유전되는 것이 역사의 기록보다 더 진실한가? 당연히 어떤 것들은 정사(正史)에 기록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렇다면 진실이 전해져 내려올 수 있는 것은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하나는 당시 진상을 아는 사람이 입으로 전해서 내려온 것이다. 다른 하나는 바로 역대로 하늘의 일을 아는 고인(高人)이 그가 본 진실한 정황을 전해준 것이다. 전하는 과정 중에 다소의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대체적으로는 진실하다. 인류사회에 무엇이 유전되어 내려오는 것은 절대 아무 이유가 없는 것이 아니다. 일종 하늘의 안배로서 인류 사회에 어떤 것을 남겨주거나 하나의 이치를 알려주려는 것이다.
이 태후는 큰 난을 당하면서 인간의 고초를 많이 겪었으므로 사람은 더욱 선량해졌다. 늘 황상에게 백성의 고생에 관심가지라고 권했다. 태후는 늘 말하기를, 유비는 명리를 너무 중하게 여겨 다른 사람을 해치고 스스로도 해쳤다고 말했다. 또한 그녀는 자신이 젊을 때 나와 매우 유사했다고 말하며 나에 대한 사랑이 극진했다. 가끔은 내가 궁중에 가서 문안을 드리면, 주위 사람들이 별로 없을 때는 늘 자기 옆에 앉으라고 하며 자기의 경험담을 이야기해 주곤 했다.
그녀가 상심했던 일을 회상하며 말 하면 나도 함께 눈물을 흘렸다. 황상은 태후에게 농담조로 “숙아는 모후의 딸 같습니다.” 라고 하기도 했다. 당시 나의 생활은 평화롭고 부귀했으나, 명이 짧아 32년 밖에 못살았다. 인두염으로 죽었으며, ‘설아’라는 이름의 딸을 하나를 남겼다. 그 일세 중 풍운 인물들은 포증(包拯 포청천), 전소(展昭 포청천 무사), 공손책, 범중엄 등으로 그들의 형상은 지금도 내 눈에 역력하다. 말하는 김에 여기에서 공능으로 본 이비와 유비의 과거세의 인연관계를 말해보고자 한다.
송 태종(太宗) 시기에 한림학사 왕장평(王章平)은 왕취평(王翠)이라는 이름의 사촌을 아내로 맞았다. 결혼 후 5년이 되어도 아들이 없자, 왕장평은 또 첩을 맞아 들였는데 이름이 백지평(白芷平)이었다. 취평은 남편의 총애를 너무 의지하면서 자신이 정실이라는 점을 내세워 질투가 아주 심했다. 그래서 지평을 온갖 방법으로 괴롭혔다. 조금의 실수만 있어도 지평에게 가법(家法)을 들어 남편이 집안에 없는 틈을 타서 채찍질을 가하거나, 때로는 무릎을 꿇게 하여 욕을 퍼부었을 뿐만 아니라 화나면 때리고 발로 차기도 했다. 지평이 아이를 가진 후 취평은 겉으로는 좀 조심하는 듯했으나, 학대하는 수법은 점점 더 음험해졌다. 지평이 마시는 탕에 기혈(氣血)을 상하게 하는 약을 넣기도 했다.
지평이 아이를 가진지 3개월이 되었을 때 문안 인사를 갔는데, 그녀가 오기 전에 미리 바닥에 오동나무기름을 발라 지평이 미끄러져 유산하게 만들었다. 지평은 이것이 모두 취평이 한 짓임을 모두 알고, 취평을 더욱 미워하여 원한을 가졌다. ‘네가 내 혈육을 죽였지. 내가 나중에 너의 혈육을 떨어지게 할테다.’ 지평이 유산한지 반년 후 왕장평은 또 작은 첩을 들였는데 이름이 ‘녹로(綠露)’였다. 그녀 역시 마찬가지로 취평의 미움을 샀다. 녹로는 지평처럼 참을 수 없었으며 늘 지평을 꼬드겨 보복을 하자고 했다. 가끔 지평과 상의했는데, 마침내 두 사람은 힘을 합해 비상으로 취평을 독살시켰다.
취평이 죽은 후 지평의 몸은 줄곧 좋지 못했으며, 기혈이 상해서 다시는 아이를 갖지 못했다. 녹로는 나중에 아들을 낳았으므로 왕장평이 정실로 들였으며, 때로 지평을 조롱했다. 지평은 하루 종일 우울하게 지내다가 42세에 세상을 떠났다. 나중에 취평은 이비로 태어나고, 지평은 유비로 전생했으며 녹로는 구주로 환생한 것이다. 이들의 관계는 마치 아래의 노래의 가사 같다.
사람 마음에 일념이 생기니
천지가 다 아는 구나,
선악에 보응이 없다면
하늘의 사심이 있다고 할 수밖에!
人心生一念
天地悉皆知
善惡若無報
乾坤必有私
이들은 모두 천년의 윤회를 거쳐 이비와 유비는 오늘 대법제자가 되었는데, 모두 내 신변의 동수들이다.
두 번째 세 - 송원외의 딸 자운 (紫雲 1057-1089년)
숙아는 죽은 후 2년도 안된 1057년 또 산동 청주부(青州府) 태평장(太平莊)의 송원외(宋員外)의 집에 태어났다. 송원외는 착하고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하는 사람으로 딸 하나만 두었는데, 딸을 출생할 때 자색 구름이 감도는 것을 보고 이름을 ‘자운(紫雲)’이라 지었다. 어렸을 때 점을 쳐보니, 운명이 평탄하지 못하고 일찍 죽어 끝이 좋지 않을 것이라고 되어 있었다. 그래서 부모는 늘 절에 가서 자운을 위해 많은 보시를 하며 불공을 드렸다. 자운은 예쁘고 품행이 단정했다. 17세 되던 해에 절에 가서 향을 올리기 위해 가마를 타고 좁은 산길을 가던 중에 바람이 불어 가마의 발이 바람에 날리자 자운의 고운 얼굴이 드러났다.
이때 길을 가던 사람이 자운의 미모에 놀라워했는데, 그녀의 인생은 이때부터 뒤틀어지게 된다. 이 사람은 다름 아닌 이룡산(二龍山)의 도적 두목으로 이름이 구평(邱平)으로, 그는 관청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산으로 쫓겨 도망쳐 도적이 된 사람이었다. 마침 산속에 일이 없어 산에서 내려와 시내로 들어가 산보를 다니다가 산에 올라 점괘를 뽑아보고 가는 길에 풍경을 감상하고 싶었다. 그 때 마침 작은 가마가 지나가는데 길이 매우 좁아 길옆에 잠시 비켜섰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했던가. 마침 바람이 불어와 주렴이 들려지는 바람에 자운의 빼어난 용모를 보게 된 것이다.
그는 자운을 보자 놀란 가슴이 두근거렸으며 온 정신은 자운밖에 없었다. 그래서 줄곧 소리 죽여가며 조심스럽게 자운의 가마 뒤를 따랐다. 자운 일행은 조금도 눈치를 채지 못 했다. 밤이 되자 자운은 좀 불안을 느꼈다. 부모는 그녀의 몸이 불편한 것을 보고 좀 쉬라고 했으나, 자운은 뒤척이며 잠이 들지 못했다. 구평은 기회를 보아 미향을 꺼내어 자운을 혼미시킨 후 자운을 들쳐업고 태평장을 떠났다.
불쌍한 자운이 깨어나 보니 이미 수레 위에 있는데 몸은 포목으로 감겨 묶여있고, 입을 열어 말을 하려 해데 입이 막혀 있었다.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산채에 도착하자 구평은 사람을 보내 자운을 살펴보라고 했다. 자운은 처음에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자살을 생각했으나, 그럴 기회가 없었다. 구평은 여자를 끔찍이 위하는 사람이라 가끔씩 와서 부드러운 말로 달랬다. 구평이 없을 때 그의 부하 형제가 와서 자운에게, 말을 잘 들으면 좋게 될 것이고, 듣지 않을 시는 어떻게 나쁜지를 분석해 주며 겁을 주었다. 또한 그들은 두목인 구평에게 시집가면 어떻게 좋을 것인가에 대해서 계속 말해 주었다. 그러나 자운은 그렇게 며칠을 대치하다 그만 기절했다.
나중에 깨어나 보니 구평이 자기에게 물을 먹여주고 있었는데, 눈에는 부드러운 정이 가득 충만해 있었다. 자운은 마음이 좀 풀어졌다. 이 사람은 천성에 양심이 사라지지 않고, 인간성이 그대로 있는 사람임을 보았던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속마음은 달갑지 않았다. 그래서 두 눈을 감고 이를 꼭 다물었다. 구평이 이 모습을 보고 그릇을 내려놓고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이번 생에 소저와 연을 맺기를 소망합니다. 만약 저의 소망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이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겠습니다.” 자운은 가만히 있었다.
구평은 한참 있다가 또 말했다. “이생에 소저와 연을 맺기를 바랄 뿐입니다. 딴 마음을 먹지 않을 것이며 소저를 잘 돌볼 것입니다. 만약 소저를 잘 돌보지 못하면 난도질을 당해 죽겠습니다.” 자운은 자기도 모르게 진저리를 쳤다. 두 눈을 뜨고 망연히 아무 말도 없이 속으로 생각해 보다가 다시 눈을 감았으며, 눈가에 눈물이 천천히 흘러내렸다. 이때 마침 구평이 머리를 들었는데 이 장면을 보고 수건으로 자운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자운은 허공중에 어떤 사람이 탄식하는 것 같았다. “그의 진실한 정을 헛되게 하지 말아라.” 무슨 뜻인지 몰랐지만 마음은 점점 부드러워져 구평에게 말했다. “당신은 하필 이같이 독한 맹세를 하시나요?”
구평이 말했다. “이 생에 나는 소저만 마음에 두고 소저와 연을 맺기만을 소원합니다.” 자운은 어렸을 때 부모가 운명을 봐준 것을 생각했다. 자기도 모르게 탄식이 나왔다. “일어나세요.” 아마 운명이 이런가보다 했다. 자운은 얼굴 표정은 점점 가벼워졌고, 결연히 거부하는 느낌이 없었다.
구평은 크게 기뻐하며 일어나서 부하에게 흰죽을 끓이라고 이르고, 기쁜 마음에 입을 다물지 못한 채 자운의 앞뒤에서 돌봐주기 바빴다. 자운은 점점 음식을 먹기 시작했으며, 자신의 인생길을 깊이 생각해 보고는, 며칠 후 구평의 요구에 응낙하여 산채의 부인이 되었다. 그 후 그들의 사이는 좋아져서 구평이 한가할 때 늘 자운을 동반했으며, 때로는 같이 풍경을 구경하고 자운에게 노래를 불러주기도 하며 자운을 매우 잘 대해 주었다. 시간이 길어지자 두 사람의 감정은 점점 깊어졌다. 자운은 때때로 함부로 살인을 하지 말라고 권고하였고, 양가의 부녀가 산에 잡혀오는 것을 보게 되면 타일러서 그들을 돌려보내도록 했다.
한 번은 잡혀왔던 어느 처녀를 놓아줘 돌려보냈는데, 이것 때문에 부두목에게 죄를 짓게 되었다. 부두목은 성이 왕(王)이고 이름은 와(窪-웅덩이)였는데, 그의 모친이 그를 임신했을 때 웅덩이에 미끄러져 넘어지는 바람에 조산을 하여, 이름을 ‘왕와’ 라고 지은 것이었다. 이 사람은 마치 그 이름처럼 마음이 음험하고 도덕심이 없는 품행이 저질인 사람이다. 그는 두목인 구평이 늘 부인인 자운의 말만 듣고 큰 재물을 취하지 못 한다고 불만을 품고 있었으며, 더구나 지난번에 놓아준 처녀는 그가 마음에 들어 아내로 삼으려고 했던 것이었다.
그래서 악한 마음이 생겨 기회를 엿보다가 두목이 없는 틈을 타서 음식에 미약을 넣어 자운을 기절시킨 다음, 포대에 넣어 산 아래로 가져다가 심복을 시켜 먼 외지 청루에 팔아버렸다. 청루의 주인은 자운의 미색을 보고 자운에게 손님 접대를 하라고 했는데, 자운은 맹세코 따르지 않았으며 죽으려고 했다. 그러나 죽지도 못하고 나중에 청루의 주인과 타협을 했다. 접객은 하되, 몸은 팔지 않겠다고. 그래서 그는 손님에게 거문고를 타고 노래만 하였다. 그녀는 매우 처량한 심사로 슬픔 속에서 나날을 지냈다. 이따금씩 부모가 생각났으나, 처지로 보아 깊이 생각할 수 없었고 그저 수치스러웠다. 또 가끔 구평도 생각하며 산채에서 지낸 5년의 생활을 회상하기도 했다.
일 년 후 어느 날 창문에 기대어 밖을 내다보다가 길을 지나가는 부자 상인의 눈에 들었다. 그 상인은 자운의 미모에 놀라 청루에 들어와서 고액으로 자운의 웃음을 사려고 했다. 그는 자운이 예능만 할 뿐 몸은 팔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는, 그 자리에서 거금의 은자를 꺼내어 자운의 몸값을 지불하겠다고 했다. 자운은 이를 보고 좀 헤아려보다가 응낙했다. 청루에서 나온 후 상인을 따라 양주에 도착했다.
상인의 이름은 송화(宋華)였는데 소금을 판매하는 상인이었다. 집안의 큰 부인에게는 이미 두 아들이 있었는데, 큰 아들은 송평(宋平), 둘째는 송창(宋暢)이었다. 송창은 자운을 보고 마음이 흔들렸으나, 감히 함부로 하지는 못했다. 부친은 늘 외출했으므로 시간이 길어지자 송창은 늘 둘째 어머니 자운에게 눈독을 드렸으나 자운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러자 애가 탄 송창이 은근하게 접근하며 말로 떠보았으나 단호히 거절당했다. 그는 드디어 원한을 품고 늘 밤낮을 엿보았다. 이때 자운은 몸에 항상 비수를 숨기고 다니며 위급한 상황에 대처했는데, 마침 큰 부인이 눈치를 채고 아들을 단속했다.
큰 부인은 현숙하고 단정하여, 자운은 큰 부인을 매우 존경하며 아침저녁으로 문안드리고 태만히 하지 않았다. 그러자 큰 부인은 두 사람을 보내 자운을 지키게 하면서, 둘째 아들 송창에게 아내를 구해 주었다. 하지만 송창은 그래도 자운을 향한 나쁜 마음을 버리지 않았고, 갈수록 더 생각이 나서 마침내 독계를 품었다. 자운이 병이 났을 때 약속에 몰래 독을 넣어 독살시켰는데, 그때가 32세이었다. 자운이 송가에서 지낸지 9년이 되던 해다.
이야기는 다시 산채로 돌아간다. 부두목 왕와는 자운을 몰래 청루에 팔아버린 후 자신의 죄상을 감추기 위해 산채에 불을 질렀다. 구평이 돌아온 후 자운이 보이지 않자, 왕와는 울며불며 구평에게 큰 불이 난 후 형수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고 거짓을 말했다. 구평은 사람을 풀어 사방으로 자운을 찾아보았으나 찾을 수 없었다. 그 때 이후 구평은 다시는 부인을 들이지 않았다. 자운이 산채를 떠난 지 3년 후 관병이 산채를 토벌할 때 구평은 병사를 데리고 포위망을 뚫으려 했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마침내 관병의 칼에 난도질을 당해 죽었다. 이전에 자운에게 약속한대로 “소저를 잘 돌보지 못하면 난도질당해 죽겠소”라고 한 말이 그대로 실현되었던 것이다.
말이 나온 김에 여기서 구평과 자운의 몇 세에 얽힌 연분을 말해보자. 자운은 지난번 생에서 숙아였고, 구평은 그녀 집안의 노복이었는데 송평(宋萍)이라 했다(당시 가노는 주인의 성을 따랐다). 나이는 숙아와 비슷했고, 마음속으로 숙아를 사모했다. 하지만 신분이 미천했으므로 감히 드러내지 못했다. 매일 소저의 얼굴을 한번 보았으면 했을 뿐 그 외에 바라지는 않았다. 소저가 입궁한 후 다시는 만날 수 없어 상사병이 되었고 우울해 하다가 죽었다. ‘죽기 전에 소저를 한번 보았으면,’ 하며 잊지 못했다. 그래서 이번 세에 그들 두 사람의 연분이 이렇게 된 것이었다.
천년 이후 오늘 대법 수련을 통하여 공능이 나오자, 나는 천년의 역사를 뚫고 이 일체를 투철히 보았다. 천년 후의 오늘 나는 마침내 알았다. 자운이 산채의 허공 중에서 들었던 그 목소리 “그의 진실한 정을 헛되게 하지 말아.” 하던 그 말의 진정한 뜻이 있는 곳을 알았다. 사람은 너무나 불쌍하다. 무지 중에 다른 사람에게 일으킨 상해를 모두 갚아야 한다. 사람은 늘 자신의 운명을 주재하려고 생각하지만, 오히려 자기의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
이 문장을 쓸 때 나는 구평이 지금은 어디 있을까 생각해 보았는데, 놀랍게도 그는 지금의 남편이었다.(전에 나는 지금의 남편과 삼세에 걸친 부부의 연분을 알고 있었다). 나중에 구평은 또 프랑스의 루이 15세로 전생했다. 그 일세에 나는 봉파두르 후작 부인이었는데, 아름답고 재능이 있어 루이 15세의 총애를 받았다. 나중에 국왕이 새 애인이 생겨 나를 버리자 나는 질투하고, 한이 맺혀, 마침내 우울하게 지내다가 병이 나서 일찍 죽었다. 또 한 번 업을 상환한 셈이었다.
옛 사람들은 남녀가 서로 물건을 주고받으면 안 된다고 했다. 남녀 방면에 많은 도덕규범이 있는데, 더욱이 여자에 대한 규범이 더 엄격했다. 사실 그것은 당시 사회의 도덕표준만이 아니라 더욱 깊은 원인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남녀 사이에 불필요하게 업을 빚는 일을 면하기 위한 것이었다. 지금의 사람은 감정에 대해 무책임해 부주의로 다른 사람에게 상해를 조성하는데, 그것은 모두 갚아야 한다.
만일 정말 어떤 사람이 당신을 사모하다가 병이 되어 억울하게 일생을 마친다거나, 혹 당신 때문에 질투하다가 죽게 되면, 장래에 당신은 아마 일생 혹은 몇 생으로 갚아야 할 것이다. 비록 당신이 알고 그랬던 모르고 그랬던, 그에게 고통을 준 것이 당신 때문에 생긴 것이라면 말이다. 왜냐하면, 신은 이 방면을 가장 중요하게 보기 때문이다. 당연히 이 역시 낡은 우주의 이치가 완전하지 않은 곳이다. 장래에 정법이 끝난 후 아마 모두 변화가 일어날 것이며 바로잡힐 것이다.
세 번째 세 - 양산박 이규 (梁山泊 李逵 1089 -1121년)
자운은 죽은 그 해에 바로 환생했는데 아주 가난한 집이었다. 이번에는 이규(李逵)라는 이름의 남자였다. 이번 생에 그는 매우 못생겼고, 힘이 매우 세어 늘 문제를 일으켰다. 부친이 일찍 죽자 그를 더는 단속할 사람이 없었다. 그는 늘 불만을 터뜨렸다. 때문에 사람들이 집으로 따지러 찾아오곤 했다. 22세 때 불만으로 사람을 때려 죽여, 그 때문에 떠돌아 다녀야 했다. 그러던 중 송강을 만나 의형제를 결연하여 수박양산(水泊梁山)으로 들어갔다.
싸움에는 용맹했으므로 늘 전투에서 선봉을 섰다. 하늘에 의지하여 식구들을 돌보았는데, 항상 놀람은 많았지만 위험 없이 전투를 하며 지내왔다. 양산에서 일어난 의병은 송강의 지휘 하에 북으로는 요, 남으로는 방랍을 정벌하는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그러나 후일 조정의 권력자 고구 등이 질투하고 있었는데, 마침내 기회를 틈타 황상이 상으로 내린 어주에 독을 넣었으며, 이 독주를 송강이 마신 후 잘못되었음을 알았다. 그는 자기가 죽은 후에 의형제 이규가 반란을 일으켜 그 재앙이 여러 형제들에게 미칠 것을 염려하여, 이규를 불러와 그와 함께 술을 마시면서 사실을 말했다. “이번 생에 형제에게 미안하네, 다음 생에 다시 연을 맺어 잘 돌보겠네.”(이 약속을 위해 송강은 나중에 영국에 태어나 나의 이모가 된다)
이규는 돌아간 후 술독이 점점 전신에 퍼졌고, 마음속 슬픔이 파도처럼 일어났다. 독이 심장에 도달했을 때 마음은 칼로 찌르는 듯했으며, 극도의 고통으로 죽었는데, 그 때 나이가 32세였다. (주: 나중에 나는 영국에 환생하여 유명한 작가 샬롯 브론테(유명한 제인에어의 작가)가 되었는데, 당시 양산박의 송강, 임충, 화화상 노지심은 그 생에 각각 나의 이모, 어머니, 다섯째 동생 에밀리가 되었다)
네 번째 세 - 악가군의 사병 장맹 (岳家軍 士兵 長猛 1121 - 1157년)
이규가 죽은 후 같은 해에 농가에 태어났는데 이름이 장맹이었다. 코와 입이 반듯하여 의젓하고 당당한 외모를 지녔고, 어려서부터 무술을 좋아했다. 북송 정권이 금나라에 의해 멸망된 후 조구(趙構 남송의 고종)가 남쪽에서 나라를 다시 세웠는데 바로 남송이다. 금군은 중원에서 불태우고, 죽이고, 약탈하며 온갖 나쁜 짓을 다 했다. 남송 정권의 장병들은 군대를 조직하여 잃어버린 나라를 수복했다. 장맹은 신혼에서 얼마 되지 않은 아내에게 이별을 고하고, 악가군(岳家軍-남송의 장수 악비가 이끄는 항금 군대)에 참가했는데, 그때 나이 17세였다.
장군 악비는 무예가 출중하고 정직하여 사병을 잘 돌보며 잘 이끌었다. 그래서 악가군은 전쟁에 용감하고, 기율이 엄해 전투력이 높았다. 금나라 군사들은 그 소문만 듣고도 풀이 죽었으며, 백성들의 지지와 성원을 받았다. 악가군은 진용이 강대할 때는 25만 명이나 되었는데, 이 군대는 십몇 년이 지난 후에도 시종 왕성한 전투력을 유지하여 실로 보기 드문 일이었다. 악가군은 당시 대금 항쟁의 중요한 힘이었는데, 꾸준히 잃은 땅을 회복해 갔다.
1140년 한바탕의 유명한 전투가 있었는데 ‘언성대첩(郾城大捷)’ 이라 한다. 이 전투는 악비장군의 지휘로 금나라의 올술(兀術-금태조 완안아골타의 넷째 아들)이 이끄는 군대와 대결을 펼쳤다. 금군은 철부도(鐵浮圖)와 괴자마(拐子馬)에 의지했기에 악가군 정도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상태였다. 철부도란 중기갑병을 말하는데 머리에는 탑 모양의 철갑을 두르고 몸에는 갑옷을 입고, 말의 가슴에도 갑옷을 입혀 정면에 내세운 부대였다. 괴자마(拐子馬)란 좌우에 나뉘어 있는 양 날개 같은 기병인데, 전투가 시작될 때 철부도를 선봉으로 하여 중앙에서 앞으로 쓸고 나가면, 괴자마는 양 날개가 된다. 이런 진세의 전술을 미리 갈파한 악비는 대책을 세웠다.
두 병사가 큰 방패를 함께 들었는데 이 방패는 특별히 만든 것이었다. 평소의 방패보다 두 배가 되는 것으로, 방패 뒤 양쪽 아래 위에 두 개의 손잡이가 있어 두 병사가 각자 한 개씩 잡는다. 위에 손잡이를 잡은 병사는 왼손으로 큰 칼을 잡고 적의 머리를 공격 했으며, 아래 손잡이를 잡은 병사는 오른손으로 양날 칼을 가진 비수로 말의 다리를 잘라 철부도를 파괴했다. 또 괴자마에 대해서는, 장병들에게 창끝에 갈고리가 달린 창으로 적의 말을 넘어뜨리게 하여 괴자마가 걸려 넘어지게 했다.
바로 이 언성대첩에서 나와 이제(李齊)가 협력했는데 부대는 최정예 부대였으며, 악비의 아들 ‘악운’ 이 이끌었다. 금군이 악가군의 소문만 들어도 벌벌 떠는 이유는 전투력이 매우 강했으며, 더욱이 생을 탐하고 죽음을 두려워하는 무리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대원수(악비)는 여러 번 아들 악운에게 대대를 이끌게 하여 출격시켰는데, 악운이 세운 전공을 대원수는 기억하지 못했으나 기타 장교들은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매번 전투가 끝나면 대원수는 친히 사병을 위문했다. 또 이런 작은 일도 기억난다. 한 번은 전투가 끝난 후 손발이 저려 재대로 움직이지 못해 손을 흔들어 뿌리치고 있었다. 이때 대원수가 지나가다가 친히 무슨 일인가 물어보기도 해서 나는 매우 감동했었다.
백성들은 악가 군사들을 매우 지지했으며 늘 음식 등을 보내 격려해 주었다. 어느 한 성을 함락시키고 나자, 백성들이 환영을 하느라고 길에 늘어섰는데 어떤 사람은 향로를 탁자에 받쳐 들었고, 어떤 사람은 무릎을 꿇어 환영을 표시했다. 그때를 회상하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돈다. ‘언성대첩’ 이 있고나서 금군은 ‘산을 흔들기는 쉬워도, 악가군을 흔들기는 어렵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다. 금올술(金兀術)은 통곡하며 후퇴했고, 악가군은 승세를 타고 많은 성을 함락시키고 개봉에 육박했다.
대원수는 호언을 했다. “곧 바로 황룡부(금나라의 수도)로 쳐들어가서 제군들과 함께 실컷 취해보세!” 하지만 고종 조구는 간신 진회의 꾐에 빠져, 악비군이 금나라를 함락시키면 그곳에 잡혀있는 휘종과 흠종(徽欽)이 구출되고 그렇게 되면 그들을 맞아들여야 한다. 그럴 경우 자기의 제위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운 마음으로, 마침내 악비장군에게 12도 금패(金牌-황제의 명을 전하는 신물)로 연달아 전령을 보내어 군사를 회군 하도록 명 했다. 어쩔 수 없이 명을 받들어 군사들이 돌아갈 때 백성들의 울음소리가 하늘을 진동했고, 어떤 사람들은 군대를 따라 남쪽으로 이주하기도 했다.
진회는 이에 그치지 않고 악비를 모함하여 어쩌면 모반을 일으킬지도 모른다는 죄명으로 악비를 풍파정에서 살해했다. 악비가 죽은 후 악가군은 크게 흔들렸으며, 비분강개하여 적지 않은 사람들이 악 대장군을 위해 원한을 갚으려고 했다. 어떤 사람은 진회를 암살하려고 밤에 몰래 들어가다가 다른 사람에게 가로막혔다. “대원수가 나라를 위해 충성한 명성”을 지키기 위해서 한때의 용기를 과시하지 말라는 (다른 사람의 간절한 충고에) 많은 사람들이 눈물로 슬픔을 참을 수밖에 없었다.
악비장군이 죽자, 풍운은 변하여 거센 북풍이 몰아치고 북방의 금군은 소리 높여 노래를 부르며 진격해 오는 데 막을 방법이 없었다. 남송 조정은 1141년 금과 협약을 맺어 경계를 그어 동쪽으로 회수, 서쪽으로 대산관으로 하여, 그 이남은 송, 북쪽은 금으로 하기로 했다. 한바탕의 장엄한 대 연극은 슬픈 노래 속에 결말이 났다. 나중에 악가군은 조정에 의해 해산되었으며 적지 않은 사병들이 우울하여 흰머리가 생겼다.
어려서 우리집에 악가군의 그림이 있었는데, 그때 나는 악비를 매우 존경했다. 한번은 ‘만강홍’ 이라는 가곡을 들었을 때 듣자마자 신체내의 층층이 진동이 일어나는 것 같았다. 그런 진동 중에서 8백여 년의 감정이 소생하는 듯했다. 이제는 일체의 정감은 모두 이유가 없는 것이 아님을 안다.
예를 들어 진회에 대한 통한, 금나라 군대의 야만성에 대한 의분, 한세충의 부인 양홍옥에 대한 찬탄(당시 한가군이 전쟁할 때 양홍옥은 북을 울려 진을 돋구었다) 같은 것들이 다 이유가 있었다. 또 이제 다시 생각해 보니, 북송시기 양산박 의병군대의 적지 않은 사람이 전사 후에 또 환생하여, 남송 시기에 악가군에 참여했으며, 또 현재 적지 않은 사람이 대법 수련 중에 있거나 대법제자와 인연을 맺었다. 예를 들면 나의 두 오빠(아직 수련하지 않음)는 모두 당시 악가군의 사병이었다. 바로 이렇다 :
슬픈 노래 한곡 한 잔의 술에
일대 영웅의 호기가 자라네
바른 기운이 중원을 보우하니
중생은 법을 얻어 출항하네.
一曲悲歌酒一觴
一代英雄浩氣長
正氣護佑中原處
眾生得法正啟航
고개를 돌려 나의 네 번의 전생을 살펴보니 감개가 무량하다. 전생에 세 번이나 32세까지 밖에 못살았다. 윤회는 매우 빨라 연극의 한 막 같이 총총히 환생하여 태어나는데, 그것은 다음 한 막 연극을 열기 위한 준비였다. 어떤 때 텔레비전을 보거나 소설을 읽으면 그중 인물의 우여곡절은 조금도 허구가 없는 나 자신의 인생경력보다 못함을 본다. 그래서 어떤 때는 나 자신을 보자고 생각한다. 우리가 역사상의 어느 인물이나, 또는 역사의 한 사건을 보았을 때, 자발적으로 영혼의 깊은 곳에서 진동이 일어나거나, 오랫동안 마음에 남아있다거나, 잊어지지 않는다면, 아마 그것은 그 인물과 혹은 사건과 관련이 있거나, 그 사건에 참여자 일수도 있고, 또 어쩌면 그 인물과 역사상 깊은 인연이 있거나 바로 당신이 그 인물의 역할을 했을 수도 있다.
또 당신이 전에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어떤 곳에 갔을 때 영문 모르게 이전에 알았던 느낌이 들거나, 흥분하거나 매우 쓰라린 감정이 들거나 하면 그곳은 아마 당신이 전세에 한때 거쳐 갔던 곳일 수 있으며, 이런 정경은 당신의 심령 깊은 곳에 있는 오랜 역사속의 기억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예컨대 한 동수가 기차를 타고 산해관을 지나가는데 자기도 모르게 마음이 쓰려 눈물이 흘러내림을 금할 수 없었다. 알고 보니 그가 한 때 명나라 성조 시대에 한 장군이었는데 그곳은 그가 주둔했던 곳이었다고 한다.
수련인이 무엇 때문에 과거세에 윤회전생한 정황을 알 수 있는가는 수련하지 않는 사람은 아마 그리 이해하기 쉽지 않다. 사실은 바로 수련과정 중에 일종의 공능이 나타나서 생긴 작용이다. 이것을 숙명통이라고 한다. 여기에서 대법서적 『전법륜(轉法輪)』중의 몇 단락을 인용하여 여러분에게 무엇이 숙명통인지 말해 보겠다.
“또 천목과 직접 관계가 있는 한 가지 공능이 있는데, 숙명통(宿命通)이라고 한다. 현재 세계적으로 여섯 가지 공능이 공인받고 있는데, 그중에 천목, 요시가 포함되며 또 숙명통이 있다. 무엇을 숙명통이라고 하는가? 바로 한 사람의 장래와 과거를 알 수 있고, 크게는 사회의 흥망성쇠를 알 수 있으며, 더욱 크게는 온 천체(天體) 변화의 법칙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이 바로 숙명통공능이다.”
“우리는 물질불멸(物質不滅)을 말하지 않는가? 어떤 특정한 공간 중에서, 사람들이 이 일을 마치면, 즉 사람이 손을 한번 휘둘러 어떤 일을 하면 모두 물질로 존재하며, 어떤 일을 하든지 모두 영상과 정보가 남을 것이다. 다른 공간에서 그것은 불멸하는 것으로서 영원히 그곳에 존재할 것이며, 공능이 있는 사람은 과거에 존재했던 광경을 보기만 하면 곧 알 수 있다. 장래에 당신이 숙명통공능이 있게 된 후, 당신이 오늘 우리가 여기서 강의하고 있는 그런 형식을 보려 하면 그것은 여전히 존재할 것이며 이미 동시에 그곳에 존재하고 있다. 한 사람이 태어날(降生) 때에 하나의 특수하고 시간개념이 없는 공간 중에 사람의 일생이 이미 동시에 존재하고 있는데, 어떤 사람은 일생뿐만이 아니다.”
“숙명통공능의 형식은 사람의 앞이마 부분에 텔레비전의 작은 형광판과 같은 것이 하나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앞이마 이 부분에 있고, 어떤 사람은 앞이마와 거리가 아주 가까우며, 어떤 사람은 앞이마 속에 있다. 어떤 사람은 눈을 감고 볼 수 있으며, 만약 그것이 아주 강하다면 어떤 사람은 눈을 뜨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데, 이는 그의 공간장(空間場) 범위 내의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런 공능이 나온 후에, 또 일종의 공능을 운반체로 삼아 다른 공간 중에서 본 광경을 반영해 오기 때문에 바로 이 천목 중에서 보는 것이다. 한 사람의 장래를 보고 한 사람의 과거를 보는데, 보는 것이 아주 정확하다. 점을 아무리 잘 친다 해도, 작은 일이나 세부적인 것은 역시 추산해 내지 못하는데, 그는 오히려 아주 똑똑히 볼 수 있고, 연대(年代)까지도 보아낼 수 있다. 변화된 세부까지도 모두 보아낼 수 있는데, 그가 보는 것은 바로 부동(不同)한 공간의 사람 또는 사물의 진실한 반영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전법륜 (轉法輪)』「논어」의 한 구절로 본문의 말미를 삼는다.
“우주・시공(時空)・인체의 수수께끼를 완전히 밝혀낼 수 있는 것은 오직 ‘불법’뿐인바, 그는 진정한 선과 악, 좋고 나쁨을 구분할 수 있으며, 일체 그릇된 견해를 타파하고 올바른 견해를 가져다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