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나이에 올려진 글이지만, 요즘 생각하는 내용이 나와서 가져온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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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찰자님께 올리는 두번째글...^^
관찰자님~
먼저 부족한 질문에 정성껏 답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관찰자님과 나눈 대화로 우리의 견해차이가 어디서 비록 되었는지 감을 잡은것 같습니다.
오늘은 짧게 몇가지만 여쭙겠습니다.
그리고 이 글에 답변을 해주시면 마지막으로 제 생각을 정리해서 마지막 글을 올리는것으로
이번 대화를 마무리할까 합니다.
대화가 너무 길어 진다면 소모적인 논쟁이나 감정싸움으로 변질 될 수도 있고
또한 이런 대화를 불편해 하시는 분들도 계시기에
저희들의 대화는 그쯤에서 마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물론 이번 대화에서 서로가 무엇을 얻고 무엇을 버릴지는 그저 각자의 선택에 맞기도록 하구요...^^
그럼 제 질문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1. 인간 삶의 주체는 누구입니까? 영혼입니까? 아니면 인간(에고)입니까?
2. 인간의 탄생과 죽음 그리고 그 사이의 모든 일들은 누가 선택하는 것입니까? 영혼입니까? 아니면 인간입니까?
3. 인간이 에고적 게으름과 나약함으로 퇴화하고 있다면 그때 그의 영혼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이상입니다...^^
이번에는 길게 설명해주셔도 상관없습니다.
물론 짧은 대답도 좋구요.....^^
그럼 미리 감사드리며...
-사과나무 올림-
* 그리고 유전님께 부탁드립니다.
관찰자님과 효율적인 토론을 하고 싶으니 이번 글에는 댓글을 달지 말아 주세요.
부탁드리겠습니다...^^
사과나무님, 반갑습니다.
우선 관찰자가 어떤 답변을 하더라도,
그것은 관찰자가 신나이를 해석한 패러다임, 또는 관찰자의 삶의 체험을 통한 앎과 느낌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의 견해라 받아들여 주기를 바랍니다.
또한 위에 질문하신 내용이 신나이를 제대로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되고,
그러므로 신나이언 모두가 함께 생각해 주시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첫번째 질문에 대해서 많은 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신나이에는 이 질문에 대해, 여러가지 힌트를 주는 내용이 나옵니다. 하지만 때로는 영혼이 주체인 것처럼 느끼는 표현이 있는가 하면, 인간 자신이 주체라고 생각되는 부분도 있습니다.
관찰자의 견해를 말한다면
영혼은 각 사람의 경험하는 사건, 현상, 관계 등 체험의 외적인 구조를 담당한다고 봅니다. 즉 주체라기보다는 서포트의 입장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영혼이 설정해 놓은 그러한 날마다의 현상들(사건과 인간관계의 만남, 벌어진 일)에서 어떤 체험을 하느냐 즉 어떤 레벨의 체험을 선택하느냐는 전적으로 인간의 자유의지에 달려 있다고 봅니다. 즉 단순히 체험을 의미없이 외적인 체험으로 지나갈 수도 있으며, 영혼의 마음을 이해하여 보다 깊은 영혼레벨의 체험을 할 수도 있고, 더 나아가 신적체험으로 승화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결정되어 있지 않으며, 전적으로 그순간순간마다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에 맡기고 있다고 봅니다. 우리 인간은 주체이지 자동인형이 아니겠지요~
두번째 질문을 보면서, 관찰자가 닐도 아닌데, 왜 이러한 질문에 답변을 드려야 하는지 조금 의문입니다. 모든 답변은 신나이 텍스트의 행간에 숨어 있다고 여깁니다. 다만 우리가 무심코 넘어간 부분을 면밀히 보면, 힌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신나이에서 너희라고 지칭했을 때, 그때는 두가지 경우가 있다고 봅니다. 첫번째는 인간으로서의 너희, 두번째는 인간의 체험의 구조를 만들고, 인간의 체험을 통해 함께 진화하는 영혼으로서의 너희입니다. 그리고 이 두가지를 잘 구분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해당질문에 대해 관찰자의 견해를 소개하면
인간이 탄생하는 것은 당연히 우리 자신이 원했기 때문이라 봅니다. 그때의 우리 자신이란 영혼과 하나된 상태에서 지상에 내려오기전, 육체를 가지기 전의 자신을 말합니다.
관찰자는 신나이에선 말하는 [영혼]을 인간의 본질이라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영혼의 일부로서 인간의 몸을 입었을지라도, 물질세계의 거친 파동에 들어오게 되면
일단은 모든 기억을 잃어버리게 되고, 육체인간으로서 처음부터 새롭게 시작해야 하는 입장에 서게 됩니다.
최초에는 동물적인 본능에서 시작하여, 감정을 배우고, 지성을 습득하게 되면...이제 본인의 영혼과 교류하고
육체를 입기 전의 자신의 본래의 상태에 근접하게 되어가는 것, 더 나아가 영혼과 일체가 되는 것
관찰자는 그것을 첫번째 단계의 영적 성장 또는 진화라 보고 있습니다.
그것은 육체를 입은 의식(영혼의 일부로서의)이 성장하여, 영혼의 레벨의 의식수준까지 성장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영혼은 나와 하나다] [영혼은 나와 하나일것이다]라는 식으로
책을 읽고 공부를 하여, 머리속으로 개념정리를 하고, 그것을 믿는 것과는 다릅니다.
이것은 삶의 체험을 통하여, 삶을 통해, 인간관계를 통해 배움을 주고 있는
영혼의 존재감을 점점 느껴나갈 때, 단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 봅니다.
그것을 전통적으로는 Spritual(영적)하게 된다, 또는 Spirituality(영성)을 구현하게 된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세번째 질문을 보면서 드는 생각은
우선 "우리가 이렇게 힘들어하고 있는데 노**은 어디서 뭘하고 있는가?"와 같은 느낌이 드는군요
영혼은 잘못이 없습니다.
영혼은 열심히 인간에게 영감과 사랑을 흘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에 귀를 기울이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육체를 가진 인간의 몫입니다.
만약 인간이 게으름으로 정체되고 성장하고 있지 않다면, 영혼은 우선 열심히 [그건 아니예요] [힘든 건 알지만 성장도 필요해요]라는 영감과 조언을 내면에서 흘립니다. 하지만 인간은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러면 영혼은 다음단계로 누군가를 그 사람에게 등장시켜, 또는 친구나 가족의 입을 빌려 [자네 요즘 나태한 것 같아] [정신차려야 겠어] 등 그 사람을 일깨우는 말을 듣게 해 줍니다. 하지만 인간은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러면 영혼은 다음단계로 본인이 게으르고 정체되었다는 깨달을 수 있도록, 어떤 사건을 만들어 갑니다. 하지만 본인이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그 사건의 강도는 점점 세집니다. 이때 육체를 가진 인간의 입장에서는 괴로움이 더 커진다고 느낄 수 있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영혼은 계속해서 인간이 깨닫고 성장할 수 있느 구조를 열심히 만들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육체를 가진 인간이 전혀 눈치채지 않으면 영혼이라도 어쩔 수 없습니다. 그때 다른 영혼에게 부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인간이 이렇게 아직 눈치를 채지 못하니, 당신의 인간을 통해 어떤 힌트를 주었으면 좋겠다] 만약 상대 영혼의 인간이 매우 진화하고, 언제나 본인의 영혼과 교류할 수 있는 상태라면, 상대 영혼의 요청과 호소를 느끼고, 그 사람에게 그 사람이 비록 싫어하고 불편해 하더라도 이런 저런 말을 해 줄 수 있습니다. 그러한 역할을 하는 사람을 우리는 스승이라고 말합니다.
이상으로 관찰자의 관점에서
간단하게 설명을 해 보았습니다. 이것은 관찰자의 삶의 체험과 느낌을 통해 나온 개인적 견해이므로
참고하실 분만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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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찰자님~
"그 어떤일도 영혼의 의지를 거슬러 일어나지 않는다. 죽음까지도...."
라는 신나이의 메세지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위 구절을 아주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그리고 체험적으로도 매우 공감합니다.
다만 여기에서 어떤 일이란 것이 바로 체험의 외적구조에 해당된다고 보지요.
하지만 그런 사건이나 일에서, 그것을 경험할 때
인간이 자신의 자유의지로 무엇을 선택하여,
어떤 레벨의 내적 체험을 선택할지는 결정되어 있지 않다고 봅니다.
그리고 참고로 개인적인 견해로는
인간이 고도로 진화하면, 죽음까지도 극복할 수 있는 지점이 있다고 느낍니다.
하지만 그 전까지는 영혼으로부터 흘러오는 생명에너지의 의해 육체의 지속여부가 결정된다고 봅니다.
관찰자님의 글 잘 읽었습니다.
역시 명쾌한 답변이십니다.
한가지 의문점 있어서 몇자 적습니다.
아래의 절은 신약성경 로마서 7장에 있는 구절이구요...사도바울의 "사망의 몸"에 대한 탄식
으로 알려진 유명한 구절입니다. 기독교 세계에서는....^^
19절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24절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위의 구절을 보면 인간에게는 두가지 의지가 있음을 보게되는데...바로 선의지와
그에 반해서 작동하는 또 하나의 의지.....한몸안에서 벌어지는 두의지의 처절한
싸움에서 기독교 역사상 가장 지성적이고 위대한 사도로 알려진 사도바울도
선의지에 따르지 못하고 반의지(편의상 이렇게 칭하겠습니다)에 굴복당하는
자신을 한탄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탄식은 오늘을 살아가는 대부분의 인간은 아마도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하리라 봅니다.
한몸에서 색에 대한 갈망과 공에 대한 갈망 이 현실의 삶속에서
늘 충돌하는 저역시 예외는 아니거든요.
사과나무님의 댓글에서 관찰자님은 영혼의 역활에 대해서 언급하셨는데....
바울의 탄식과 비교해서....선의지를 무엇이라 생각하시는지요?
영혼과 동일하다고 보시는지요? 아니면 자아의 인식에서 빚어진 하나의 허상으로
보시는 지요? 반의지 역시 무엇으로 보시는지요?
답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사과나무님의 질문과 상통하는 점이 있다고 여겨서 사과나무님
글에 댓글을 달았습니다.사과나무님 널리 양해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관찰자도 인간에게는 높은자아(Higherself)와 낮은자아(Lowe self)가 공존하며,
이 양자를 균형잡고 통합시키는 것이 영적진화에 중요하다고 보고 있습니다.
높은자아는 그대로 영혼이나 스피릿과 같은 고차원의 자신과 연결되어 있는 [진실한 나]이며.
낮은자아는 영혼의 일부인 자신 육체를 입으며 생긴 그림자서의 [가상의 나[라고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가상이라 해도 그것에 종속되어 있는 이상, 그것으로부터 탈각하거나 해방되기 전까지는
그것은 실제적 힘과 에너지를 지닌 실체로서 작용한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스스로의 창조력(자유의지)로 힘을 부여하고 있기 때문이죠.
관찰자에게 인간의 진화란 어떤 측면에서는
이러한 에고로서의 작은 나를 더 큰 나에 귀의시키는 것
또는 작은 의지를 더 큰의지에 조율시켜과는 과정이라 보고 있습니다.
다만 이것은 신나이적 견해는 아닙니다.
질문을 주시므로 답변을 해 보았습니다^^
답변감사합니다...^^
관찰자님께서는 인간안에 두개의 자아가 별개로 존재하고 있다고 보시는군요.
저의 견해는 높은자아 낮은자아..두개로 구분하는것은 내면 갈등구조의 오해에서
비롯된것이라고 봅니다.
높고 낮은자아가 있는게 아니라...하나의 자아가 스스로가 설정해 놓은 선과악에
대한 이분법적 인식이 만들어 놓은 허상이 아닌가 합니다.
하나의 자아가 있는것이지요.
이런 관점에서 보면 사도바울은 스스로가 만든 또 다른 허상적 선또는 악의 관념에서
고통스러워 하고 있는것이지요..결국 내면에서 답을 못찾고...외부적 구원자 예수를
통해서 스스로의 모순에 대한 해결책을 모색하고 있다고 보여집니다.
원래 선.악에 대한 실체는 없는것인데......교육으로 길들여진 자아가 허상적 실체를 만든것이지요...
내면의 갈등구조는 결국 신과의 완벽한 합일에 의해서 사라지리라 봅니다.
또는 선.악을 바라보는 인식 전환과...삶에서의 완벽한 실천적 적용으로 극복될 수도 있다고 보여집니다.
지금까지 저의 생각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