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자연의 산 초대작가 김동진
자연의 산
나이가 늘어갈수록 자연과 가까이하고싶어진다는 로인들의 말씀을 실없는 소리로 여겨왔었는데 내가 나이를 조금 먹고보니 과연 그러할줄이야. 자연에서 나와 자연에로 돌아갈수밖에 없는 사회적인간의 귀숙원리를 능히 스스로 깨우칠수 있는 고개에 이르렀다는 표징 같기도 하다. 아무리 다채롭다 해도 울타리속에서 돌아치는 직장생활에 권태를 느껴서인지 아니면 밤낮없이 열기를 띤 거리의 소란스러움과 매캐한 내음에 반감이 들어서인지 무작정 이런 환경을 벗어나 어데론가 자연이 살아있는 곳에 가서 시원한 공기를 싫도록 마시고픈 생각이다.
모든 직장인이 대체로 그러하듯이 나도 너무나 오랫동안 자연에 굶주려왔다. 비록 시골 태생이긴 하지만 사업터의 일정표에 따라 움직이는 기계적 삶을 살아 왔기에 본의 아니게 점차 자연과 멀어지고 만것이다. 터놓고 말해서 큰일을 하지 못하면서 바쁘게 살다보니 자연을 가까이 하고 느긋하게 흠상할수 있는 한가로움을 마련할수 없었다. 그래서 이따금 들꽃의 미소와 산새의 지저귐, 수림의 설렘과 내물의 조잘거림 같은 순수한 자연속에 나를 세워보는 상념에 빠지는것일까?
자연이 그립다는것은 산이 그립고 물이 그립고 나아가서는 흙내음, 풀내음까지 그립다는 말이 된다. 그런데 시가지의 자연은 인공자연이여서 자연맛이 슬하고 시교의 자연은 현대문명의 피해를 입어 자연답지 못하다. 우주가 만들어놓은 순수하고 진실한 자연은 오직 편벽한 산촌에 가야만 만날수 있는것이다. 그래서 나의 시골꿈은 항시 아늑하고 정가로운 산향의 모습을 떠올리는것이였다.
때로는 아주 작은 소망도 이루기 힘든게 생활이라면 때로는 막연하게 생각하던 어떤 기대가 뜻밖에 이루어지는것도 생활인가 보다. 마침내 절호의 기회가 왔다. 시내에서 50여 리 상거한 산골림장마을의 어느 사인기업에서 아내를 계절공으로 채용하게 되였는데 나더러 함께 몇달만 거들어달라는것이였다. 나는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칠세라 창작원이라는 명색에 생활체험이라는 간판을 걸고 본 단위에 중요한 행사에 어김없이 참가한다는 약조를 남겨놓고 서둘러 행장을 꾸미였다. 이렇게 나는 한해 여름 개방도시의 들끓는 소음을 떠나 옛풍경 같은 시골에서 “피서객”의 행운을 맛볼수 있게 되였다.
뒤로는 맑디맑은 골물이 흘러내리고 앞에는 검푸른 두만강이 굽이치고 뒤문을 열면 뒤산이 다가서고 앞문을 열면 앞산이 다가오는 자그마한 림장마을의 자연은 말 그대로 산 좋고 물 좋고 공기 좋은 별유천지였다. 새벽이면 고운 산새들의 우짖음을 들으며 버섯 뜯기도 하고 쾌청한 날엔 개울물에 뛰여들어 미역을 감고 고기잡이도 하고… 이 모든것이 똑 마치 한수의 전원시를 방불케 하는 목가적인 생활이여서 나는 실로 오래동안 굶주렸던 자연을 마음껏 향수할수 있었다.
그중에도 푸른 자석마냥 나의 마음을 끄당긴것은 울창한 수림으로 짙은 녹음을 펼치고 있는 산의 자연이였다. 푸른 생명, 푸른 숨결이 무르녹아 내리는 산의 품에 안긴다는것은 두 다리가 아프고 땀벌창이 된다고 해도 가슴 뿌듯한 즐거움이 아닐 수 없다. 산에 오르는 즐거움속엔 언제나 푸른 랑만이 출렁인다. 더덕이 어떤것인지 몰라 표본을 손에 들고 더덕 캐러 다니기도 했고 락엽밑에 깔린 화분용 부식토가 욕심나서 가지러 가기도 했으며 애고사리 꺾으러 나물밭을 찾아가기도 했다. 어떤 날에는 산발을 타고 골짜기를 몇개씩 넘어도 보았으며 산열매를 맛보려고 사처로 쏘다니기도 했다. 때로는 이름 모를 산꽃과 마주앉아 무언의 대화를 나누기도 하고 때로는 골연의 개울가에서 말쑥하게 흐르는 사연을 묻기도 했다. 자연의 산은 나로 하여금 자연의 서정속에 잠기게 했던것이다.
무릇 자연이라고 이름 지어진것은 그것이 어떻게 생겼든지간에 아름답지 않은것이 없다. 나는 산속에서 자연의 아름다움은 인간이 즐겨 말하는 웅위로움과 숭엄함과 기이함보다 우선 자연 본체의 자연스러움에 있다는것과 이런 자연스러움은 미중의 미로서 다른 모든 미가 미로 될수 있는 전제임을 터득하였다. 학교에서 배운적 없고 서책에서 읽은적 없는 참신한 도리 하나를 깨우쳤으니 이 어찌 작은 수확이라고 하랴!
물을 자연의 몸에 흐르는 피라고 한다면 산은 자연의 기둥뼈인 척추이다. 보기에는 들쑹날쑹 험하고 가파르고 거친 산이지만 일단 사귀고보면 안온하고 태연하고 너그러운 덕성을 지녔음을 알게 된다. 수다스러움 없이 입을 꾹 다물고 있는 산, 산은 내내 정직하고 진솔하다. 계절 따라 묵묵히 그 많은 풀과 나무를 키우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익히는 산, 산에서는 귀청을 째는 악음이거나 눈을 아프게 하는 광란하는 빛이 없어 구태여 귀를 막거나 눈을 감을 필요가 없다. 살아 있는 생명 외에도 주검이 묻힌 무덤까지 안고 사는 산, 산의 포섭능력은 이처럼 우리 인간의 포옹력을 훨씬 초월하고있다. 약뿌리 캐는 괭이에 생살이 찢기여도, 방목하는 우마의 발굽에 가슴이 짓밟혀도 원성 한마디 없이 인내할줄 아는 산의 덕성은 너무나 높고 크고 깊은것이여서 나의 빈약한 언어로는 도저히 다 표현할 수가 없다.
비정비리가 꼬리 물고 일어나는 인간사화와는 달리 자연의 산은 부정부패라는 더러운 단어를 모른다. 이것을 산의 청고함과 결백함이라 할 때 이러한 산앞에서 천만년 살것처럼 티격태격하는 령혼들을 생각하면 가소롭기 그지없다. 안정과 단결이야 될대로 되라고 제멋대로 날뛰는 무리들과 도덕을 외면하고 가짜만들기에 미친 돈귀신들의 몰골을 보는 산의 가슴은 얼마나 쓰리게 아플것인가? 산은 온갖 위선을 비웃으며 인간세상을 굽어보고 있다. 우리 인간이 자연스러우면서 아름다운 풍치와 높은 덕성을 지닌대로 살아가는 산의 듬직함을 깨닫는다면, 그리고 한오리 부끄러움도 한조각 가식도 없이 주어진 형상 그대로 살아가는 산의 듬직함을 깨닫는다면 우리도 산이 반기는 참된 이웃으로 살아갈수 있으리라. 산만큼 생명을 사랑하고 산처럼 너그럽고 의젓하게 살수 있는 인생은 결코 저질인생이 아닐 게다.
한번의 통쾌한 시골걸음에 산은 나에게 너무나 많은것을 베풀어주었다. 산은 나의 머리를 맑아지게 하였고 나의 시야를 넓혀주었으며 또한 나의 정감도 키워주었다. 지금은 돌아와 원래의 생활권안에서 맴돌고있지만 나는 나의 현주소를 두곳에 나누어 놓고 자연과 친할수 있었던 지난여름 같은 풍경이 다시 한번 더 있기를 갈구해본다.
이른바 “륜회설”이나 “재생설”처럼 사람이 죽어 다시 태어날수 있다면 나는 산으로 태어나고싶다. 히말라야산처럼 높은 산도 말고 황산이나 태산처럼 멋진 산도 말고 그저 백두산줄기에서 뻗어내린 어느 한 지맥에 곁달린 자그마한 이름 없는 산으로 말이다. 그러면 천리 두만강여울소리를 들으며 꽃도 기르고 새도 기르고 나무도 기르고 토끼와 다람쥐, 노루 사슴도 기르면서 하얀 바람벽에 고추다래 줄져선 우리네 농가들과 이웃하여 재미나게 살수 있지 않겠는가. 하지만 인생은 한번 가면 그뿐. 열번 죽는다 해도 한줌의 흙 아니면 한줌의 재로 될수밖에 없는것이다. 그럼에도 기어코 산이 되고싶다는것은 산의 자연과 덕성에 감화된 나의 욕념으로서 말이 그렇다는 말이다.
산이 될수 없으면서 산이 되고픈 나와 같은 사람들은 자연의 산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인간을 사랑하면서 산의 덕성으로 내 삶의 위치 하나를 풍요롭게 가꾸어가는게 명지한 처사가 아닐까. 순수한 자연의 산---아름다운 청산은 오늘도 내 가슴속에 가없이 설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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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싱그런 속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