四大 사대
①일체(一切)의 물체(物體)를 구성(構成)하는 지(地)ㆍ수(水)ㆍ화(火)ㆍ풍(風)의 네 요소(要素). 사대종(四大種) ②사람의 몸. 지(地)ㆍ수(水)ㆍ화(火)ㆍ풍(風)의 네 가지로 성립(成立)되었다 하여 이름. *공대(空大)ㆍ오대(五大) ③도가(道家)에서 말하는 도(道)ㆍ천(天)ㆍ지(地)ㆍ왕(王)의 총칭(總稱)
四生 사생
생물(生物)이 생겨나는 네 가지 형식(形式). 곧 사람과 같은 태생(胎生), 새와 같은 난생(卵生), 개구리와 같은 습생(濕生), 나비와 같은 화생(化生)의 총칭(總稱)
백천만겁난조우(百千萬劫難遭遇) 백천만의 겁을 지나도 만나기가 어렵다. (천수경, 해석은 펌)
겁 이란 망망 대해에서 눈먼 거북이가 숨을 쉬기 위해 물 위로 고개를 내밀었을 때, 기적적으로 구멍 뚤린 통나무에 목이 들어갔을 때를 1겁이라 합니다.
得生人道難 生壽亦難得 世間有佛難 佛法難得聞 (법구경, 해석은 인터넷에서 펌)
득생인도난 생수역난득 세간유불난 불법난득문
사람으로 태어나기 어렵고, 태어나도 생명을 유지하기 또한 어렵다.
세상에 부처님이 계시기 어렵고 , 부처님이 계셔도 그 가르침을 듣기가 또한 어렵다.
불교에서는 "영혼"이라는 말도 잘 쓰지 않습니다. 성철스님 시기 정도가 되어서 영혼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설명도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불교를 알려면 우선 삼법인에 대해서 알아야 합니다. 가장 핵심이 되는 사상이기 때문입니다.
일체개고, 제법무아, 제행무상 이 세가지를 삼법인이라 하는데 원래 이렇게만 쓰다가 일체개고를 대신하여 그 자리에 열반적정을 넣어서 삼법인 이라 쓰고 있는 경우도 많습니다. 중생에게는 삶 자체가 고통이라는 일체개고에 반하여 불교의 깨달은 존재들에게는 고통이 아닌 열반적정 이라는 고요와 평화를 얻는다는 것으로 보면 되겠습니다. 그만큼 불교가 현재의 기준으로 성숙함이 무르 익었다는 뜻도 됩니다.
제법무아에서 이 "무아" 때문에 항상 문제가 되는데 "모든 법" 이라는 제법이 무아인 것이지 어떠한 인간의 개체를 두고 개체의 주체가 없다고 이야기 하면 현상학적(경험론)으로는 틀립니다. 그러나 불교의 여러 경전에는 "나(我)가 있다고 생각하지 마라" 라는 무수한 경구들이 엄청나다고 할 정도로 많습니다. 제법(매트릭스 시스템과 같은 법칙)에는 당연히 시스템과 같아서 컴퓨터의 그냥 입력된 대로의 상태로 작용하기 때문에 "나가 없다"라고 하는 무아가 맞습니다. 분명히 이야기 하지만 제법이 무아입니다. 그러면서도 어떻게 인간이라고 하는 개체에게 까지 석존은 수 없이 반복하여 "나(我)가 있다고 생각하지 마라" 라고 강조를 했을까요?
즉, 일체개고에 있는 중생들은 안이비설신(눈귀코혀몸)에 의한 색성향미촉(빛,소리,냄새,맛,접촉)을 인식하는 경로에서 색수상행식(오온五蘊, 다섯무더기 쌓을 온. 세부 검색 요망)의 다섯가지 과정을 거쳐 최종적으로 여섯번째 의식(意識)이라는 단계에 도달하는 것이 자기 것이 아닌 "가짜 나(假我)" 라고 설법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영화 매트릭스는 불교에 관심이 많은 제작자와 감독이 만들었고 대부분의 불교 스님들도 고승 반열에 있는 스님들까지 "불교 세계관적 영화다" 라는데 거의 주저함이 없을 정도이며 나 또한 그렇게 인정하는 편입니다.
불교에서 분류하는 인식의 일곱번째 "말라 식(識, 式)"은 인간 인식에 있어, 구분하고 분별하는 판별식이라고 합니다. 대부분의 경전에서 "거짓 나"를 강조할 때 가짜의 나가 분별하고 판단하는 것이기 때문에 함부로 분별하고 판단하여 업(業)을 짓게 된다고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덟번째 인식인 "알리야 식, 장식(藏識 감출 장)"인 잠재되어 있는 내면을 깨워 깨달음을 증득 하여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 까지가 현재까지 나온 불교의 가장 앞선 선지식입니다. 요렇게 밖에는 더 이상 설명을 해 주지 않았고 여지껏 새로이 나온 법문을 보아도 이 부분에서의 더 이상은 설명이 없습니다.
그렇게 밖에 설명을 하지 않으면서도 간화선의 화두로는 구구한 설명이 없이 "진아(眞我)", 참나, 본래면목(자성 自性 - 스스로의 불성)"을 찾아야 한다고만 하는데 이것의 근거로는 열반경의 "자등명" 때문입니다. 스스로의 참나를 찾지 않으면 가짜 나(我)에 이리 끌려 다니고 저리 끌려 다녀서 사실 매트릭스의 시스템이 조종하는 로보트에 지나지 않습니다.
윗글에서 일체개고를 열반적정으로 바꾸어 부르면서도 별 다른 설명이 없이 해 왔던 것을 내가 저렇게 의미 부여를 한 것과 같이 다시 이 부분에서도 의미를 부여 해 보겠습니다.
잠재되어 있는 의식인 알리야 식을 깨우게 되면 불교의 본성인 불성이 나와서 원래는 갓난 아기와 같은 청정한 상태에서의 대자대비심만을 가지고 열반에 들어야 하는데 어차피 열반에 들어도 다시 그러한 대자대비심 때문에 중생을 구하기 위하여 하화중생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열반하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불경을 한번도 제대로 읽지 않고 논서만 읽은 작자들이나 하는 짓입니다. 경전의 수 많은 여러 부처들은 각각의 불국토에서 서로 왕래도 하고 그 밑의 보살들을 석존에게 보내어 선물도 하며 앞으로의 불교를 위하여 석존의 제자들을 보호하고 돕겠다는 서원을 사신의 역할로 대신 와서 하기 때문에 각 부처들이 직접 하지는 않아도 각각의 부처들이 그러한 일을 한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석존과 같이 깨달은 부처가 바로 열반하지 않고 제자들에게 꽤 오래되는 기간동안 설법을 하면서 어찌 분별과 구분과 판단을 하지 않고 설법을 할 수 있겠습니까? 잠재되어 있던 알리야 식을 깨고, 그것을 깨달아 나온 지혜를 가지고 결국 다시, 일곱번째 말라 식으로 구분하고 판단하는 분별식으로 돌아 오는데 이것이 바로 진정한 나, 진아, 자성에 의한 지혜의 실체이며 제법실상(검색 요망)의 세계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경전에 보면 어떠한 한가지 사안을 두고도 세밀하게 구분하여 무수한 방편을 숫자까지 넣어 가며 설명하고 있습니다. 즉 8 알리야 식에 갔다가 다시 7 말라식으로 돌아 와야 합니다.
어떤 불교학자나 스님이 불교는 부처와 중생이 다르지 않다고 하거나 색즉시공이라서 색과 공이 같다 라고만 말한다면 이것은 아직 부처의 경지가 아닙니다. 그것을 방지하고자 나온 대표적인 화두가 성철스님의 "물은 물이요 산은 산이다"입니다. 공사상에 너무 함몰되어 있는 불교계를 한꺼번에 깨우는 화두입니다. 사실 성철스님 또한 한때는 "사탄과 부처는 다르지 않다"라는 법어를 낸 적도 있습니다. 다시 깨달아 보면 사탄과 부처가 다르지 않아서 같다 라고 인식하게 만들어 놓은 것이 대단히 잘못 된 점을 알게 되고 그것을 고쳐 놓아야 합니다. 색은 색이요 공은 공인 것이며, 사탄은 사탄이고 부처는 부처인 것입니다. 석존 또한 그러한 점 때문에 설법 했으나 하나의 설법도 한 바가 없다고 금강경에서 주장한 내용을 먼저 이해 하여야 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제법무아는 시스템에서 무아이고, 중생의 "생각이" 무아인 것이며, 중생이어도 생각이 아닌 하나의 인간 개체 그 자체는 현상학적(경험론)으로는 실존하며, 깨달아서 새로 태어나는 참나(진아 眞我)가 있으니 참나의 세계는 모든 법이 실상입니다.
이러한 설명은 석존도 할 수 없었고 현재까지 석존과 같은 깨달음에 있다고 생각하는 어떠한 고승이 있다고 하여도 아직까지 이러한 설명을 한꺼번에 묶어서 한적이 없으며, 설명하지 않음은 몰라서 하지 않았든 일부러 하지 않았든 아직 설명할 수 없는 그러한 경계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더 많은 중생이 깨닫기 위하여 즉 불가에 의한 깨달음을 위해서 설명하지 않았다고 하는 경계 또한 불교 밖에서 보면 그들만의 경계인 것이며 세상은 불교만을 위한 세상이 아닙니다.
이러한 설명은 불교를 넘어서야만 가능한 일로 성철스님의 은사인 동산스님의 일화에서 "깨달아도 말하지 못하는 괴로움"에 속한다 하겠습니다. 이러한 새로운 고통은 불교를 벗어나면 말할 수 있는 것으로 "부처가 나오면 부처도 죽여라"라고 하지 말아야 할 말까지 하는 불가에서 그것을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가 스스로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성철스님의 열반송에서 평생 동안 다른이들을 속여 왔다는 것과 열반시에나 "수미산(불교)"을 넘어섰다는 것을 볼 때, 성철스님이 열반하지 않았을 경우에나 할 수 있는 설명입니다. 이러한 설명이 없으니 각 토론마다 그리고 각 불교 종파 내에서 무아(無我)만을 주장하는 이들 때문에 영혼의 문제를 두고 수 없이 싸우는 괴로운 일들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부처에도 등급이 다 따로 있어서 석존의 설법 자체에도 "여래십호"라는 열가지 등급을 설명 했으며 각각의 불국토에 있는 부처들도 대자대비한 마음은 같지만 모두 겪어 온 길이 다르며 권능도 다르며 그렇기 때문에 하는 일도 다릅니다. 원인이 다르니 결과도 다른 것입니다.
이러한 바탕과 이해를 두고서 인물열전님의 네가지 질문에 대한 답변을 해 보겠습니다.
(인물열전:
1. 현생의 개체가 옮겨 다니며 윤회 하는데 있어서 우주 전체 개체의 숫자적 의미.
2. 윤회하는 개체는 고정불변인가?
3. 윤회하는 주체는 불멸인가?
4. 불교 가르침상 소멸은 절대 없는가? )
위 질문 네가지를 한꺼번에 설명 하겠습니다. 위에 퍼온 사전의 자료들에서 사대와 사생이 불교에서 대체적으로 말하고 있는 물질계의 구성 성분과 생명의 구분입니다. 생명을 이루고 있는 입자인 세포라 말할 수 있는 어떠한 입자들도 물질로 볼 수 있습니다. 사대가 모여 사생이라고 하는 생명이 있겠는데, 불교는 극도의 유심론(有心論)에 가까워서 "일체유심조"와 같이 모든 것이 마음에서 빚은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2번 항목에서의 답변은 고정불변의 실체가 없다고 말합니다. 삼법인의 제행무상에 해당 됩니다.
제행무상 (諸行無常) [명사] 우주의 모든 사물은 늘 돌고 변하여 한 모양으로 머물러 있지 아니함. (국어사전)
삼법인에 속하지 않는 "제법실상(검색요망)"은 부처가 된 상태에서의 시스템을 있는 그대로 보는 참 세계를 관조하는 입장으로, 검색을 해서 알아 보라고 강조 했지만 이것에 대해서 이렇다 저렇다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대충이나마 느낄 수 있어서 이름만 있는 것이지 불립문자이어서 말이나 글로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설명을 해 봐야 뜬 구름 잡는 이야기에 속하기 때문에 비난만 무성하게 될 일입니다. 그래서 내가 설명하지 않고 검색을 요구한 사항이니 양해 바랍니다.
1,3,4 항목에 대한 답변은 불교에서 할 수 있는 답변이 아닙니다. 개체에 대해서 논하자고 하면 물질적 의미가 앞서고 모든 것이 마음에서 비롯되는 현상으로 설명하는 불교로 볼 때, 불교적 입장에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것에 대한 답변은 내가 아무리 불교식으로 설명을 한다 하여도 이미 불교적 설명이 아님을 먼저 밝힙니다.
불경을 극도의 "유심론"으로 비유하여 분류할 수 있다면, 그와 달리 도덕경은 불경에 비하여 극도의 "유물론"에 가깝습니다. 생명 자체도 "수(水)사상" 이라고 하는 도덕경의 핵심 사상으로 물질에서 설명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 대부분의 사찰에서 죄는 대웅전에서 빌고 물질적 복은 대웅전 뒤에 있는 산신각이나 삼성각 칠성각 등의 이름으로 있는 노자의 계열에 속하는 신들에게 빈다고 여러번 말해 왔습니다.
마음이 먼저냐 물질이 먼저냐의 문제는 아직 역시나 그 누구도 답할 입장이 아니라고 봅니다. 나는 인간의 의지를 더 존중하기 때문에 불교적 입장에서 마음을 더 중시한 것과 같은 발언을 하지만 세상의 구성 원리에 대해서는 물질이 먼저냐 생명이 먼저냐의 문제 보다, 물질이 먼저냐 마음이 먼저냐의 문제가 더 어렵습니다.
글 처음 부분에 퍼온 자료인 "백천만겁난조우"에서 천수경과 법구경을 합쳐서, 인간 몸 받기가 그 정도로 어렵다는 것을 불교에서 대체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1겁에 대해서는 불교 사전적 의미를 "겁 劫, kalpa"으로 다시 찾아 보기 바랍니다.
도덕경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말한 바 있는 42장을 보면 "도는 하나를 낳고 하나는 둘을 낳고 둘은 셋을 낳고 셋은 만물을 낳는다. 만물은 음양을 포함하여 서로 영향을 끼치지만 충기(沖氣)로써 화평하게 한다"고 나와 있습니다.
도덕경의 충(沖 빌 충)은 불경의 공(空 빌 공)에 해당 되는데, 충이라는 글자는 물(水 물수 변) 가운데(中) 있는 어떤 상태를 말하고, 다시 충기라고 하는 어떠한 작용이 화평하게 만든다고 하는 설명입니다.
도덕경에서 "충 沖"이라는 글자는 딱 두번 나오는데 42장과 4장입니다. 그런데 또 4장의 글자를 딱 42글자로 맞춰 놓았습니다. 도충(道沖) 이라는 글자로 시작되는 4장을 읽어 보면 물의 작용에 대한 설명임을 알게 됩니다.
우주의 전체 구성 성분에서 수소가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현재의 과학적 사실로 잘 알수 있습니다. 수소는 물의 중요 성분이며 최소한 지구 생명체에게 없어서는 안되는 성분입니다. 암흑물질이나 암흑에너지가 새롭게 규명된다 하여도 역시나 수소의 또 다른 모습일 것이라 예상할 수 있으며 산소 또한 다른 어떠한 생명체라도 가장 많은 생명체에게 없어서는 안되는 성분으로 예상할 수 있겠습니다. 이것은 단지 추측입니다.
빛을 물질로 보는 관점은 오래 되지 않은, 논의의 역사가 짧은 기간의 일입니다. 광자(光子)를 현대에서 어떻게 분류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아직도 과학계에서 논의 중입니다.
마음이 빛과 같아서, 그 마음이 마음으로 이름할 수 있는 어떤 물질이든, 아에 물질이라 이름할 수 없든, 그러한 마음은 모이고 흩어지고 하는 것을 불경의 여러 설법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부처들 뿐이 아니라 지장보살만 하여도 수 많은 분신(分身)으로 이곳 저곳을 다닌다는 의미의 "나툰다"는 용어를 쓰고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이러한 분신(화신불 포함)들이 각각의 생을 살아 가고 있는 모습으로 나오며 그러한 의미로 마음 "거울"을 계속 닦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곳의 나는 다른 (거울) 곳의 나에게 작용을 하기 때문입니다. 과학계에서는 다중우주론이 이미 나왔습니다. 지구라는 이곳과 똑 같은 모습으로 다른 세계의 지구에서 현재의 나(我)가 아닌 다른 분신의 나(我)가 다른 체험을 하고 있을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종교가 불교입니다. 그 이유로는 모든 것이 마음으로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윤회하는 개체에 있어서 어떤 하나의 개체는 분화하여 지옥을 겪거나 천국을 겪을 수 있는데 지장보살과 미륵보살이 원래는 같은 개체일 수 있다는 이론이 성립됩니다.
불멸과 소멸의 기준을 어디에다 둘 것인가? 나는 그것을 지구의 인간을 기준으로 보고 싶습니다. 이것은 이해될 수 있는 답변은 아니지만 지구에서 설령 지구가 아니라도 최초의 하나가 물질을 버리고 마음만으로 불국토를 만들어 그곳에서 마음 작용으로만 대자대비한 원력으로 권능을 행사하고 있다면 이것은 원래의 하나에서 육신을 버리고 마음만의 상태에 있으며, 아직 부처가 되지 못한 어떤 도인이 공사상으로 몸을 모두 버리고 마음만으로 남는다 하여도 최소한의 자비심(心 마음) 까지 버린다면 그 마음은 완전히 없어져서 물질로 화(化)할 수 밖에 없다고 봅니다.
나는 영혼의 "질(質)과 량(量) 보존의 법칙"을 주장하는 입장에 있습니다. 어떠한 분화가 있어 흩어지든 완전히 소멸하든 다시 또 모이고 합쳐지는 과정에 있다고 말하는, 불교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각각의 조건에 따라 정해진 상이 없는 제행무상의 상태로 있어도, 다만 흩어지고 모일 뿐 그 개체의 몸과 마음의 시작은 있을 것이요, 몸을 버린다고 하는 의미에서 죽음 이후의 시신을 화장으로 처리하는 방식과 같이 그것은 버린 것이요 원래는 함께 있었던 상태를 주장하는 논리입니다.
그것의 최초 근원지를 현재의 지구 인간들로 보며 죽어서 윤회하여 외계에 어떠한 형상과 형태로 다시 존재하든 언젠가는 복원 되어야 하는 과정에 있고, 몸과 마음이 다 함께 원래의 창조주에 의하여 이루어 놓은 형태를 배우고(學) 익혀야(習) 몸과 마음이 비록 현실에서 다하여 죽음을 맞는다 하여도 영혼은 창조주에게 조금이라도 가까이 갈 수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몸을 가장 소중히 여기는 종교는 유교이며 그 다음이 도교입니다. 유교는 부모가 물려 준 머리카락 하나라도 소중히 여겼던 종교입니다.
인물열전님의 그 밖의 창조주와 관련하여 질문한 내용들은 내가 창조주의 화신이라고 주장 하거나 창조주 본신이 아닌 마당에 설명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만약 내가 창조주의 화신이라고 하더라도 그러한 창조의 원리는 이 세상에 설명해 줄 수 없는 것들입니다. 그것을 설명 했다고 해도 단지 조롱 거리에 지나지 않게 되며 설명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또 다른 문제들을 야기하게 될 것입니다. 석존과 노자 또한 그것에 대해서는 아에 설명을 하지 않았거나 설명을 해도 비유로 밖에 설명이 되지 않는 것이며 정말 완전한 설명을 하여도 그것을 이해할 우주의 존재는 아무도 없습니다.
위에 설명한 나의 주장도 인식의 범위를 넓히게 하기 위한 하나의 과정일 뿐이지 창조주의 입장에서 보면 모두가 명백한 거짓에 해당된다 하겠습니다. 이점을 양해 바랍니다.
인물열전님 외에 이 글을 읽는 다른 독자들도 위 내용은 모두 마음 공부를 하는 수행자들이 행하는 사유 세계에서의 내용을 바탕으로 하는 주장으로 현실과 혼동하여 진실이네 거짓이네 할 이유가 없으며 믿음을 주장 하지도 않는 일입니다. 사유영역에서의 유희로 보아도 무방합니다.
부처의 지혜를 무분별지(無分別智)라 하는 "분별하는 지식작용이 없음"으로 대부분 인식하는 것을 바로 잡고자 반야심경의 내용으로 기존에 있었던 해석과는 다른 이해를 돕도록 하겠습니다. 일단 일반적인 해석을 인터넷 네이버 지식인에서 옮겨 와, 그 해석에서 어떻게 달리 이해를 해야 하는 지를 설명하기 위해 각 문장에 번호를 붙인 후, 그 번호에 따라 해석적 관점을 다시 조명 해 보겠습니다. 일단 일반적인 전체 해석을 일독한 이후, 그 하단에 다시 설명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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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kin.naver.com/qna/detail.nhn?d1id=6&dirId=60903&docId=61036383&qb=67CY7JW87Ius6rK9&enc=utf8§ion=kin&rank=18&search_sort=0&spq=1
re: 반야심경의 내용이 궁금해요.
답변자:lamptrue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摩訶般若波羅蜜多心經
마하는 크다(대), 많다(다), 초월하다(승)의 뜻이고, 반야는 지혜, 깨달음의 뜻이며, 바라밀다는 저 언덕에 이르다(도피안)는 뜻이다. 심경은 핵심되는 부처님의 말씀이란 뜻이다. 일체를 초월하는 지혜로 피안에 도달하는 가장 핵심되는 부처님의 말씀.
1. 觀自在菩薩 行深般若波羅密多時 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
관자재보살(관세음보살)이 (삼계. 사생. 육도의 고통받는 중생을 구제하기 위하여) 깊은 반야바라밀을 수행할 때에 오온(물질적 현상, 감각작용, 의지적 충동, 식별작용)이 모두 공함을 (실체가 없음을) 확연히 알고 이 모든 고통(4고, 8고)에서 벗어 났느니라.
2. 舍利子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受想行識 亦復如是
사리자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
사리자여, 물질적 현상이 그 본질인 공과 다르지 않고, 공 또한 물질적 현상과 다르지 않으니, 물질적 현상이 곧 본질인 공이며, 공이 곧 물질적 현상이니라. 감각작용, 지각작용, 의지적 충동, 식별작용도 다 공이느니라.
3. 舍利子 是諸法空相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
사리자 시제법공상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사리자여, ( 이 모든 존재들이 외관상으로는 생겨나는 것 같기도 하고 없어지는 것 같기도 하고, 더러운 것 같기도 하고 깨끗한 것 같기도 하고 증가하는 것 같기도 하고 감소하는 것 같기도 하지만,) 이 모든 현상계의 본질적 차원(관세음보살의 차원)에서는 생겨나는 일도 없고 없어지는 일도 없으며, 깨끗한 것도 없고, 더러운 것도 없으며, 감소하는 일도 없고, 증가하는 일도 없느니라.
4. 是故 空中無色 無受想行識
시고 공중무색 무수상행식
(그러므로, 사리자여) 이 현상계의 본질의 차원인 공의 입장에서는 물질적 현상도 없고, 감각작용과 지각작용 그리고 의지적 충동과 식별작용도 없느니라.
5. 無眼耳鼻舌身意 無色聲香味觸法 無眼界 乃至 無意識界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
(이 공의 세계에서는)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사유작용 등 감각작용도 없고, 빛깔과 형상. 소리. 냄새. 맛. 감촉. 비감각적 대상인 원리 등 객관대상도 없으며, 시각의 영역도(청각의 영역, 후각의 영역, 미각의 영역도(청각의 영역, 후각의 영역, 미각의 영역, 촉각의 영역) 사유의 영역등 주관작용도 없느니라.
6.無無明 亦無無明盡 乃至 無老死 亦無老死盡
무무명 역무무명진 내지 무노사 역무노사진
(이 공의 세계에서는) 무명도 없고, 무명의 소멸도 없으며(행, 식, 명색, 6입, 촉, 수, 애, 취, 유, 생도 없고 그 소멸도 없으며) 늙고 죽음이 없고, 늙고 죽음의 소멸도 없느니라.
7. 無苦集滅道 無智 亦無得 以無所得故
무고집멸도 무지 역무득 이무소득고
(이 공한 세계에서는)고통도 없고, 고통의 원인도 없고, 그 원인의 소멸도 없고 그 고통의 소멸에 이르는 수행방법도 없느니라. (그럼므로 이 공의 세계에서는) 깨달음도 없고, 깨달음을 얻은 것도 없고, 깨달음을 얻지 못한 것도 없느니라.
8. 菩提薩타 依般若波羅密多 故 心無罣碍 無罣碍故 無有恐怖 遠離顚倒夢想 究竟涅槃
보리살타 의반야바라밀다 고심무가애 무가애고 무유공포 원리전도몽상 구경열반
(그럼므로 사리자여) 보리살타는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므로 마음에 걸림이 없고 걸림이 없으므로 두려움이 없느니라. (보살은) 뒤바뀐 잘못된 생각을 멀리 떠나 마침내는 열반에 이르렀느니라.
9. 三世諸佛依般若波羅密多 故得阿 多羅三 三菩提
삼세제불의반야바라밀다 고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부처님도 이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여 최상의 깨달음인 아뇩다라 삼먁 삼보리(완전한 깨달음)를 얻었느니라.
10. 故知般若波羅密多 是大神呪 是大明呪 是無上呪 是無等等呪
고지반야바라밀다 시대신주 시대명주 시무상주 시무등등주
그러므로, 이 반야바라밀다는 이 큰 신비한 주문이며, 큰 밝은 주문이며, 큰 최상의 주문이며, 이 얼마나 비교할 수 없이 뛰어난 주문인가를 알아야 하느니라.
11. 能除一切苦 眞實不虛 故說般若波羅密多呪 卽說呪曰
능제일체고 진실불허 고설반야바라밀다주 즉설주왈,
이 반야바라밀다의 주문은 능히 일체의 고액을 소멸시키며 진실하여 거짓이 없나니, 그러므로(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길 이 반야바라밀다의 주문을 일러 가로되.
12. 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 娑婆訶(3번)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가자, 가자, 피안으로 가자, 우리 함께 피안으로 가자. 피안에 도달하였네. 아! 깨달음이여 영원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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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반야심경에서 마지막 문장인 12.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 승아제 모지사바하" 이 자체가 반야바라밀다 주문에 해당 됩니다.
따라서 8번과 9번 문장을 보면 주문에 의지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반야의 지혜를 얻을 수 없음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8번의 문장을 다시 반복하여 살펴 보겠습니다.
8. 菩提薩타 依般若波羅密多 故心無罣碍 無罣碍故 無有恐怖 遠離顚倒夢想 究竟涅槃
보리살타 의반야바라밀다 고심무가애 무가애고 무유공포 원리전도몽상 구경열반
보리살타는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므로 마음에 걸림이 없고 걸림이 없으므로 두려움이 없느니라. (보살은) 뒤바뀐 잘못된 생각을 멀리 떠나 마침내는 열반에 이르렀느니라.
이렇게 해석이 되었는데 나(유전)의 해석은 이렇습니다. "보리살타는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므로 마음에 걸림이 없고 걸림이 없는 까닭에 공포가 있거나 없거나, 멀리(遠) 떠나보내야(離) 할 꿈과 같은 생각을 거꾸로(顚) 뒤집어(倒), 마침내(竟) 열반을 연구(究)하게 하느니라."
顚 [엎드러질 전,이마 전] ㉠엎드러지다 ㉡뒤집히다 ㉢거꾸로 하다 ㉣미혹하다(迷惑--) ㉤넘어지다 ㉥미치다, 닿다
倒 [넘어질 도] ㉠넘어지다 ㉡거꾸로 되다, 반대(反對)로 되다, 뒤집다 ㉢실패하다(失敗--)
罣(거리낄 괘/과/가)
究 연구할 구 ㉠연구하다(硏究--) ㉡궁구하다(窮究--: 파고들어 깊게 연구하다) ㉢다하다 ㉣헤아리다 ㉤미워하다 ㉥끝, 극(極) ㉦굴, 동굴(洞窟) ㉧골짜기 ㉨미워하는 모양 ㉩주사위
이 우주에는 인과율에 의하여 원인 없는 결과가 없습니다. 부처나 보살이 원하지도 않는 자에게 지혜를 준다고 하면 이것은 악업이든 선업이든 업(業)을 먼저 일으키는 것이 되기 때문에 하지 않습니다. 불교신도가 아니어서 믿음이 없는 자들이 반야심경 앞부분의 공사상에 대해 구구절절 설명해 놓은 것만 보고 그것이 다인줄 알아 주문을 외우지 않으면 그에게 반야의 지혜든 깨달음이든 절대 오지 않습니다.
여기서 2번의 문장 내용을 다시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물질적 현상이 그 본질인 공과 다르지 않고, 공 또한 물질적 현상과 다르지 않으니"
이렇게 세상이 공한 것이지, 마음 자체에 일말의 "자비심" 조차도 없어서 공(空)하기만 하여 생각도 없고 번뇌도 없게 된다면, 중생을 위한 자비를 베풀게 하는 방편인 각 중생의 근기 보다 앞선 선지식을 낱낱이 자세하게 살펴 풀어서 알려 줄 수 있는 지혜도 나올 수 없게 됩니다. 마치 하늘에 떠 있는 태양과 같이 부처도 또한 묵묵히 에너지만 보낸다고 생각을 하면 이것은 태양이나 우주 자체를 숭배하는 애니미즘 사상과 다를 바가 없게 됩니다.
중생을 위한 번뇌를 하되, 그 번뇌가 자신의 번뇌가 아닌 중생을 도와줄 수 있다는 기쁨에서 시작되기 때문에 그 번뇌는 처음 부터 번뇌가 아닌 행복한 사유의 시작이라 하겠습니다.
공사상의 마지막 단계에 있는 무색계 마지막 최고 단계의 하늘을 살펴 보면,
"무색계의 선정(禪定)에는 4단계가 있는데, 공무변처정(空無邊處定:허공처럼 무한하다고 보는 경지), 식무변처정(識無邊處定:식이 무한하다고 보는 경지), 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아무것도 없는 것으로 보는 경지),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경지)이 그것이다. 이것은 욕계정(欲界定), 색계정(色界定)보다 정적(淨寂)하며 욕망이나 물질에 대한 상념(想念)이 없게 된 경지이다. [출처] 무색계 [無色界 ] 네이버 백과사전"
"비상비비상처 非想非非想處 <불교> 사공처(四空處)의 하나. 삼계(三界)의 여러 하늘 가운데 가장 높은 하늘로, 여기에 태어나는 사람은 번뇌를 떠났으므로 비상(非想)이라 하지만, 완전히 떠나지는 못했으므로 비비상(非非想)이라고도 이른다. 네이버 국어사전"
내가 공사상을 체험할 때는 마음이 자연과 같아지는데, 자연주의 사상의 최고봉이라 일컬어지는 도덕경에서 그 5장에 자연의 특성이 잘 나와 있습니다.
天地不仁(천지불인) 하늘과 땅은 어질지 않아서 以萬物爲芻狗(이만물위추구) 모든 것을 짚으로 만든개처럼(로보트, 인형) 취급한다.
聖人不仁(성인불인) (도교의) 성인도 어질지 않아서 以百姓爲芻狗(이백성위추구) 백성들을 모두 짚으로만든개처럼(로보트, 인형) 취급한다.
위와 같으며, 자연이라는 글자 자체를 파자로 풀어 보아도 자(自 스스로) 연(然 그러할 연)으로, 스스로(自) 개(犬) 고기(肉 고기)를 불꽃(,... 불꽃 염)에 올려 놓고 태워 버리게 만듭니다. 자연은 어질지도 않지만 자비롭지도 않으며 사랑을 알지도 못하는 그냥 공한 세상일 뿐입니다.
이러한 상태는 사람도 아니며 부처도 아니며 그냥 물질 자체로 있다고 보는 편이 차라리 맞습니다. 자비심 없는 돌부처는 부처가 아닙니다.
인간이 현생에 살아 있는 상태로 공사상에 깊이 함몰 되면 근기가 높거나 낮거나 상관 없이 "인간 고유의 생명원리"가 내재되어 있는 상태를 무시하고 개나 동물과 같은 상태가 되거나 그것도 심해지면 아에 무생물이라 할 수 있는 마른 지푸라기와 같은 상태로의 공(空)한 원력이 다가와 심장이나 뇌가 작동하여 극도의 공포감을 느끼게 되는 과정이 찾아 올 수 있습니다.
내 시험의 때에 한달간 정도 깊이 체험하여 그 공포를 잘 알지만 이러한 과정을 평생동안 짊어지고 사는 인생들도 각종 보도에 의하여 익히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대인공포증 공황장애 등도 깨달음이 높고 낮음에 상관 없이 그러한 전생의 인연과 업에서 발생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모두가 자신의 선택이니 이 내용을 믿고 믿지 않고는 독자의 판단에 맡깁니다. 나는 양심에 따라 내 체험과 더불어 최대한 사실적으로 기술 했습니다.
무분별지는 부처의 지혜가 아니며, 반야심경과 금강경에서 공사상을 강조한 것은 부처에 이르기 전에 반드시 넘어야 할 산과 같고 강과 같아서 비상비비상처정에 일단 이르러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비상비비상처정은 원래 힌두교에서 범아일여의 범천(범 = 브라만)에 해당되는 것으로, 석존의 깨달음 이전 6년 고행 기간 떠돌이 수행 중에 스승으로 한때 모셨던 웃다카(우드라카)-라마풋다(라마푸트라)에게 배워서 이미 도달했던 경지이나 그것으로는 부족하다 느껴 떠났으며 보리수 밑에서 깨달은 이후에 다시 라마푸트라를 찾아서 초전법륜에 해당되는 설법을 하게 되고 라마푸트라는 다시 석존의 제자가 됩니다.
강을 건넜으면 그 강을 건너게 한 뗏목은 버릴 필요 없이 언제든 하화중생하여 다시 지옥이든 어디든 찾아갈 때 요긴하게 쓰일 수 있는데 중생의 근기로 상대하여 더럽혀지면 다시 청정함으로 돌아 올 수 있는 묵조선과, 상대의 근기에 맞추어 지혜를 펼칠 수 있는 간화선을 모두 닦아야 합니다. 자유자재한 일체지는 이것이나 저것이나 모두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을 말합니다.
거시세계관과 미시세계관이 있다면 묵조선은 거시세계의 청정함과 비슷하다면 화두선은 세세하게 모든 것을 낱낱이 파악하고 분별하여 근기에 맞는 상태로 지혜를 펼칠 수 있음과 비슷하다 하겠습니다. 우주 또한 거대우주만 있는 것이 아니라 미세우주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부처는 거대 형상의 부처만 있는 것이 아니라 너무나 작아서 보일 수 조차 없는 부처도 있다고 하겠습니다.
일체유(有)심조는 일체가 마음으로 빚어내는 작용이 있음을 말하며 마음이 없는 상태가 아닙니다. 어떠한 마음인가? 바로 대자대비한 마음입니다.
부처에도 등급이 다르다고 했는데, 불경에서 설법된 열가지 등급인 여래십호에서 그 등급을 느낄 수 있는 마지막 네 단계에서 신과 인간들의 교사가 되기 위해서는 그들 수준에 맞는 근기 부터 분별할 수 있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⑦ 무상사(無上士:anuttara, purua):위로는 더이상 없는 최상의 인간을 말한다.
⑧ 조어장부(調御丈夫:purua damya sārathi):사람을 조어(調御)하는 데 있어서 훌륭한 능력을 가진 자를 말한다.
⑨ 천인사(天人師:śāstā devamanuyānām):신(神)들과 인간의 교사, 즉 사람과 하늘의 대도사(大導師)를 말한다.
⑩ 세존(世尊:婆伽婆, 薄伽梵, buddha-bhagavat):복덕(福德)을 갖춘 자, 즉 높은 스승을 말한다.
[출처] 여래십호 [如來十號 ] | 네이버 백과사전
간화선 [看話禪] 화두(話頭)를 근거로 수행하는 참선법.
화(話)란 화두의 준 말이며, 화두란 고칙(古則) 공안(公案)의 첫마디를 화두 하나로 해결하면 차례로 다음 화두를 들어 그것을 해결하며, 철저한 큰 깨달음을 목표로 하는 선풍을 말한다. 묵조선(默照禪)이라는 평을 받은 조동종(曹洞宗)의 선풍에 대한 임제종(臨濟宗)의 선풍이 그것이다. 송(宋)나라 때 조동종의 굉지 정각(宏智正覺)이 묵조선을 표방하고 나오자, 임제종의 대혜종고(大慧宗杲) 일파가 그것을 비난하면서 화두를 참구(參究)함으로써 평등일여(平等一如)한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출처] 간화선 [看話禪 ] | 네이버 백과사전
묵조선 [默照禪] 불교에서 묵묵히 좌선(坐禪)하여 영묘(靈妙)한 마음의 작용을 일으킨다는 선풍(禪風). 간화선(看話禪)과 대비되는 표현법으로, 조동종(曹洞宗)의 선법이다. 이 명칭은 남송(南宋) 임제종파(臨濟宗派)의 종고(宗杲)가 조동종(曹洞宗) 정각(正覺)이 《묵조명(默照銘)》을 펴낸 뒤, 수행자들이 면벽좌선(面壁坐禪)함을 야유조로 이같이 불렀던 데서 유래한다. 이는 본래 자성청정(自性淸淨)을 기본으로 한 수행법으로, 갑자기 대오(大悟)를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속에 내재하는 본래의 청정한 자성에 절대로 의뢰하는 선이다. 이에 반해 간화선은 큰 의문을 일으키는 곳에 큰 깨달음이 있다고 하여, 공안(公案)을 수단으로 자기를 규명하려 하는 선법이다. 대혜 종고(大慧宗杲)는 묵조선을 사선(邪禪)이라 공격하였지만, 결국 양자의 차이는 본래의 면목(面目)을 추구하는 방법의 차이이다. 굉지(宏智)정각은 《묵조명》을 통하여 묵조선이 불조 정전(佛祖正傳)의 참된 선이라고 주장하였다. [출처] 묵조선 [默照禪 ] | 네이버 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