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이 되라고 한다.
빛이 되라고 한다. 세상이 어둡다. 그래서 세상을 밝히는 빛이 되라고 한다. 빛이 있으면 거기 필연적으로 어둠이 있다. 빛이 되기 위해 빛을 향해 나아가다보면 거기 어둠이 있다. 그래서 빛과 어둠이 함께 있는 것은 필연이다. 빛이 좋다고 해서 어둠을 모두 없애 버릴 수는 없다. 빛과 어둠은 서로 하나이기 때문이다. 어둠은 빛으로 인해 밝혀지고 빛은 어둠으로 인해 돋보인다. 빛도 어둠도 하나의 일면들이다. 세상을 산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삶이란 것이 대단히 고단하다. 삶 속에는 빛만 있는 것이 아니라 어둠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움은 그 역할을 하는 것 뿐이다. 어둠이 싫은가? 그러나 어둠에 대한 저항은 어둠을 끌어 당기는 원인이 된다. 그러므로 어둠에 대해 좋거나 싫다는 것은 삶에 어둠이 짙게 드리운 채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어둠이 싫다고 떼어 내려 하지만 결코 쉽게 떼어 낼 수 없다. 그로 인해 인간은 나면서부터 고뇌하고 번민한다. 사실은 빛과 어둠은 하나다. 서로가 돌고 돈다. 어둠은 빛이 되고 빛은 다시 어둠이 된다. 빛과 어둠은 서로 돌고 돈다. 빛이란 무엇인가? 밝음이다. 밝아지고 밝아지면 어둠이 사라진다. 완전한 빛이 된다. 근원의 빛은 영원하다. 하늘의 태양은 영원히 빛을 발한다. 빛 속에 생명이 있다. 빛은 곧 생명이다. 사람들은 빛이 되기를 소망한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빛 속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이내 어둠이 와서 빛을 꺼버린다. 그래서 사람은 빛이 되었다가 다시 어둠이 되었다가를 반복한다. 진정한 빛이 되지 못한다. 이것은 마음이 한결같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세상을 사는 데는 무겁고 어두운 삶보다는 빛처럼 가볍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야 한다. 그러면 행복할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이 쉽지 않다. 인간의 삶속에 짙은 어둠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둠이 사람을 아프게한다. 어둠이 사람을 이롭게 하지 못하지만 한번 빛을 잃어버리면 어둠으로부터 쉽게 벗어나지 못한다. 그래서 결국은 어둠을 버리지 못한다. 인간이 어둠의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정말 아픈 것이다. 인간의 삶에 쉴 새 없이 몰아닥치는 것이 어둠이다. 그 어둠이 한번 몰아닥치면 커다란 고통이 시작된다. 그래서 어둠을 싫어하게 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싫은 것은 다시 좋아지고 좋았다가 싫어지기를 반복한다. 그러면서 삶이 빛으로 갔다가 어둠으로 갔다가를 반복한다. 그래서 삶이란 쉬운 것이 아니다. 이것이 보통의 인간이 걸어가는 길이다. 어둠이 짙게 깔려 아예 빛을 잃어버리고 사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고통이 이만저만한 게 아니다. 삶이 곧 지옥이다. 대부분 지구인류가 걸어가는 길이 지옥과 같이 고통스런 삶이다. 하지만 어떤 삶을 산다해도 다 적절하다! 인간은 본래 빛에서 왔다. 빛이 되어야 온전하고 편안하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어둠 속에서 살아갈 수 없다. 밝음으로 살아가야 마땅하다. 살고 싶은가? 그렇다면 빛이 되라. 빛이 되기 위해서는 아주 쉼 없이 노력해야만 한다. 완전히 빛으로 화할 때까지 빛을 향해 쉼 없이 전진해야 한다. 가만히 앉아서 쉬다보면 어느 순간 자신도 모르게 어둠이 되어 버린다. 나의 심신이 어둠 속으로 들어가 버리면 그 순간은 즐거울지 몰라도 결과적으로 더 큰 고통을 잉태하게 된다. 그러므로 빛을 잃어버리는 것은 죽음과 같다. 사람이 빛을 잃어 버리면 파멸의 길로 갈 수도 있다. 그래서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려면 더 이상 어둠으로부터 휘둘리지 않도록 해야 한다. 사람이 어둠과 싸우는 것은 어려운 방법이다. 차라리 어둠에 대한 저항보다는 빛을 향해서 나가는 것도 더 좋은 방법이다. 왜냐면 빛 속에는 어둠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빛이 되고나면 거기에 더이상 어둠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빛이 되라. 살고 싶은가? 빛을 향해 가라. 그리고 빛에 머물라. 그리하여 완전한 빛이 되라. 그러려면 처음에는 쉼 없이 빛을 향해 걸어가야 한다. 사람이 빛이 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살아남기 위해서는 빛이 되어야 한다. 빛이 되기 위해서는 쉼 없이 빛을 향해 가는 힘이 있어야 한다. 사람이 빛이 되기 위해서는 한결같은 마음이 되어야 한다. 한결같이 조금도 변함없는 마음을 한마음이라고 한다. 결국은 한마음으로 돌아가는 길이 사는 길이다. 그리하다보면 어느 순간 당신은 빛이 되어 있을 것이다. 사람이 어느 한 면 만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빛이든 어둠이든 어느 한면에만 머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좋은 것이 있으면 필연적으로 안 좋은 것이 있다. 인간의 삶속에는 이러한 이원성이 끝이 없다. 인간을 죽도록 고생시키는 이원성의 길. 의식이 이원성에 머물면 어둠이 쉼 없이 삶을 짓밟고 지나간다. 이원성의 사고를 가진 사람들은 전쟁같은 삶을 살아갈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삶이 고단하다. 이래서 대다수 대중의 삶이 고단한 것이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죽지 못해서 산다고 한다. 이 얼마나 삶이 고된 것인가? 그 당사자가 되어 보지 않고는 그 고통을 헤아릴 수도 없다. 모든 것은 내가 씨앗을 심어 놓은 것들이다. 씨앗을 자라나기 마련이다. 1 0년전 20년전 1년전에 심었던 씨앗의 결과 물들이 현실에서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누가 내 인생을 이렇게 만들었던가? 실상은 아무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모두 내 스스로 지어 만든 것이다. 나 자신의 삶이란 모두 내가 살아온 삶이다. 내가 살아온 삶에 대한 결과이다. 그러니 삶이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지난날 다 내가 지어 만든 것임을 인정하자. 그것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생각과 마음을 바꾸고 정화해야한다. 그리고 새로운 씨앗을 심어야 한다. 우리는 매순간마다 삶속에 씨앗을 심고 있다. 생각으로 마음으로 말로 행동으로 우리는 늘 씨앗을 심고 있다. 씨앗을 심어 놓으면 바로 나타나는 것도 있고 오랜 시간이 되어서야 거두는 것도 있다. 어떤 것은 다음 생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우리가 날 때부터 무언가 결함이 있거나 하자가 있다면 그것은 필연적으로 전생으로부터 이어져 오는 것들이다. 세상에 태어날 때 부터 행복한 것도 전생부터 심어놓은 씨앗의 결과이다. 이것이 이치이다. 이번 생에서 하자가 있는 것은 반드시 풀어내야 할 것이기에 그런 상황을 맞이 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지어 만든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내가 풀어야만 풀리게 되어 있다. 내가 한일은 내가 책임져야 한다. 빛이 되라고 한다. 빛을 향해 나가고 한번 빛이 되면 쉬지 않고 빛을 발한다. 이왕이면 큰 빛이 되는 것이 좋다. 그래야 세상을 넓게 밝힐 수 있다. 빛이 되기전 빛을 향해 나아가는 마음을 쉬어버리면 삶은 죽음으로 변한다. 한결 같은 마음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커다란 고통이 다가온다. 삶이란 죽느냐 사느냐의 길이다. 삶이란 빛이 되느냐 어둠이 되느냐의 길이다. 빛을 선택한 존재들은 힘들어도 나가야 하고 눈이오나 비가 오나 앞으로 전진 하고 또 전진해야 한다. 완전한 빛으로 존재할 수 있는 때까지는 전진을 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빛으로 살아갈 수 있다. 빛은 사랑이다. 빛은 인간의 본질이다. 인간은 빛으로부터 왔다. 그러니 빛으로 돌아가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인간에게 가로막고 있는 것이 있다. 바로 어둠이다. 어둠은 빛으로 나아가는 길을 방해하는 듯이 보이지만 사실은 빛이되는 길을 돕는 것이 어둠이다. 그러니 빛과 어둠은 선악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어둠의 역할일 뿐이다.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 해야 하는가? 그것은 나를 완성하기 위해서 그리고 남을 위해서 더 나아가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위해서 빛이 되어야 한다.당신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죽지 않고 살아남는 것이다. 한번 죽으면 모든 것이 다 날아간다. 여기서 사는 길이란 진정으로 사는 길을 말한다. 사람이 세상을 행복하게 잘 살아가기 위해서는 스스로 선택한 스스로에게 주어진 일에 대하여 성심을 다해야 한다. 딴마음과 딴생각을 버리고 전진하고 또 전진해야 한다. 빛이 되기 위해 빛을 향해서 전진해야 하고 빛에 머물다 빛으로 돌아가야 한다. 물론 뜻도 없고 목적도 없는 삶이라면 자신이 원하는 대로 마음대로 살아도 상관이 없다. 그러나 인간완성이라는 목적을 이루고자 한다면 사람은 세상을 아무렇게나 함부로 살 수는 없는 법이다. 지상을 덮고 있는 짙은 어둠으로부터 벗어나서 빛으로 나아가는 길만이 사는 길이다. 빛이 되라고 한다. 무엇을 심었는가? 그 씨앗이 자라서 지금의 세상을 체험한다. 내가 심었던 씨앗이 자라서 지금의 현실을 만든다. 무엇을 심었던가? 그 씨앗이 자라나서 나에게 열매를 준다. 그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현실이 고통인가? 행복인가? 그것이 무엇이든 모두 내가 선택했고 내가 씨앗을 심었던 결과이다. 미래는 지금 내가 생각하고 마음먹고 말하고 행동한 씨앗이 자라나서 추수하게 되는 것이다. 한 치의 오차도 없다. 모두 내가 심어 놓은 씨앗의 결과다. 모든 것이 내 선택이다. 매순간마다 선택한 결과이다. 그러한 선택의 씨앗이 지금의 현실을 만들었다. 삶이 고단하거든 자신을 돌아보라. 내가 평소 심어 놓았던 것을 추수하고 있다. 아무리 아파도 아무리 슬퍼도 모두 내가 심어 놓았던 것들이다. 이것은 이치다. 모든 것이 나의 모습이고 내 삶이며 나의 결실이다. 늘 행복하세요. 빛과 사랑으로.......
http://hiramid.co.kr/bbs/board.php?bo_table=49_6&wr_id=109 ------------------------------------------------------------------------------------------------
Transforming Idea! 개인이나 사회의 변화는 외부적 요인(Foreign Element)에 의해 생기고 이어 저항(Resistance)이 시작 됩니다. 이때 저항이 거세지면 원래의 상태(Late Status Quo)로 돌아가고, 외부 요인이 더 강할 때에는 균형이 깨지면서 혼돈(Chaos)으로 들어 갑니다.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혼돈의 현상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러다 혼돈의 극(極)에서 전환의 발상(Transforming Idea)이 일어나고 이어서 사회는 통합(Integration)이 됩니다. 개인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가 어느 사회에 묻혀 사는 한, 우리도 이런 커다란 변혁의 흐름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개인과 사회는 분리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깨달음을 찾는 길에 있다해도 마찬가지 입니다. 예수는 예수가 있어야 할 그때 바로 그 사회에 있었고, 석가 또한 석가가 필요한 사회에 있었습니다. 그들이 만약 다른 사회에 태어 났었다면 그들은 틀림없이 평범한 인간으로 살다가 갔을 것입니다. 지구는 빛의 길로 가려 합니다. 내면의 탐구는 바로 '빛의 길'로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현재 지구와 지구에 존재하는 사람들에게 지워진 절차이자 숙명같은 그런 것입니다. 따라서 '깨달음'이 마치 '불교적 해탈'로 가는 것이란 생각은 잘못된 것입니다. 석가는 이미 2700여년 전에 지구에 다녀가신 분입니다. 불교는 연기(모든 것은 원인과 조건이 상호 관계하여 성립되므로 독립 자존적인 것은 없고, 모든 조건과 원인이 없으면 결과도 없다는 설)에 의해 모든것이 생성 소멸을 하고 해탈을 통해 연기를 멸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깨달음'에 대한 정의는 다양하지만, 대체로 '대오(大悟)'와 '해탈'을 동일시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일본의 젊은 '각자 무묘앙 에오'(30대에 요절함)는 '대오'와 '해탈'을 명쾌하게 분류합니다. "해탈과 대오(깨달음)의 경지 까지는 같으나, 거기서 부터 개념이 갈린다는군요. 대오는 광명을 지향합니다. 빛의 존재로 가고자 하는겁니다. 그것은 차원을 상승시키는 것입니다. 그들은 빛의 존재가 되었다가 다시 존재 세계로의 귀환을 할 수가 있습니다. 다만 육체에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차원을 낮추어야 합니다. (5차원 이상의 존재들은 빛의 존재들입니다. 이들은 스스로 차원을 낮춰 육체적 물질화를 이룰 수가 있습니다.)" "반면, 해탈은 비존재로서 무(無)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단,무(無)에는 우열의 문제가 아닌 특별한 의미에서의 <희소가치>가 분명히 있습니다. 하지만 본인은 존재로부터 사라지기 때문에 본인에게는 그런 가치 자체가 무의미해집니다. 무에 대한 가치 논의는 세상에 남은 사람이 논의하는 항간에 떠도는 소문거리일 뿐이고, 사라진 자에게는 의미도 가치도 일절 관계 없습니다. 다만 무(無)로 사라지는 자에게는 원칙적으로 <자격>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육체의 죽음에 즈음하여 존재를 100% 거부하는 것입니다. 물론,이것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점에 주의할 필요는 있습니다. 그 선택은 개인의 성질과 경험적 취향에 불과 합니다. 다만 어느 쪽이 좋은가에 대한 것은 없습니다." http://kr.blog.yahoo.com/hanbang64/15075.html?p=1 내면 탐구 얼마나 명쾌합니까? 나는 '해탈'이나 '대오'에 대해서 얘기하는게 아닙니다. '내면의 탐구'에 대해서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주의 근본적인 재질이 '에너지'이고 우리의 몸은 '영'을 담은 그릇이며 우리 몸 자체는 살아있는 영혼입니다. 우리의 태어남은 우주적인 '존귀한 체험'을 위한 것이고 그것은 결국 '근원(창조주, 무, 공, 하느님)'과의 '체험의 공유'를 이루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생각, 말, 느낌, 행동은 우주에 진동하고 우주의 진동은 우리 내면이 공명을 합니다. 우리가 모든것을 창조한다는 설명에 대한 답인 것입니다. 우리사회의 혼돈이나 지구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금융대란이나 기타 모두는, 우리들의 인식의 총합에 의해 나타난 현상에 불과합니다. 빛의 길! 지구는 분명 특별한 곳입니다. 이 광활한 우주에서 지구처럼 지적 생명체가 이처럼 다양하고 역동적이게 존재하는 별을 알고 있나요? 지구는 소중한 곳이고 가슴 설레게 하는 아름다운 삶의 터전입니다. 내면 탐구는 우리 삶의 목적을 깨닫는 것입니다. "나는 여기에 왜 왔는가?" "나는 여기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대답은 내면이 알려줄 것입니다. 지구에 어느날 갑자기, '개벽'이나 '새하늘과 새땅'이 나타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지구상에 존재하는 우리 모두의 의식의 전환을 통한 '의식 상승'에 의해서 올 뿐입니다. 지구라는 '우리의 공동체'를 자각하고 더불어 살고자 하는 강한 염(念)에 의해 자신의 삶은 '가슴 뛰는 삶'이 펼쳐짐을 알게 됩니다. '내면이 알려준 삶'을 위해 살려고 하면, 기적처럼 그일을 이룰 사람들과 맞닥뜨리거나 일들이 나타납니다. 자유로운 삶이란, 남들은 아랑곳 않는 안하무인의 행위가 아니라 남들과 조화롭게 살아가는 삶이자, 혼돈의 와중에서도 중심을 갖는 삶일 것입니다. 그래서 청산이나 수도원에서의 '깨달음'보다 이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의 내면 탐구가 빛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소중한 존재란 깨달음이 바로 진정한 깨달음입니다. 누구에게나 있는 내면의 '영'을 품고있는 우리들 모두가 소중한 존재이며, 이런 소중한 존재들이 살고있는 우주적 체험의 장인 지구를 소중하게 자각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위해 살아가는 삶을 체험하는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일 것입니다. (끝). http://aksasin.tistory.com/entry 이글은 '가이아'라는 분이 내 프로필 란에다 '진동'에 대해 문의한 것이 계기가 되어 쓰게 됐고, 이글은 나의 체험을 정리한 것입니다. 그러나 내글을 올려 놓고 읽으면서 마치 내가 '커다란 깨달음'을 얻은 것처럼 비춰질까봐 우려되기도 했습니다. 내가 그동안 '자각'했던 소중한 체험이 '깨달음'이었다고 표현하지 않는 것은, 두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하나는, 나중에 혹시 나타날 '커다란 자각'을 위한 여백이고, 또 하나는, 요즘 인터넷에서 회자되는 불교적 '깨달음'과 차이를 두기 위함이었습니다.
Ellsion
- 2011.04.02
- 13:04:49
- (*.22.211.60)
빛과 어둠에 좋고 나쁨을 대입히지마라. 나쁜것을 어둠이라 표현하지마라. 천상계 최초 지구에서의 계획이 어둠에 나쁜 것만 대입하여 나쁜것은 어둠이라는 순환을 이루게 만든 악을 행하는 이들의 계획을 바꾸는데 있다. 진실은 빛을 소망하고 빛이 되려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를 소망하고 하나가 되라. 하나안에서 빛과 어둠은 밝은 마음의 드러난 형태일 뿐이고 맑은 마음은 빛과 어둠이 아닌 존재와 무 형태를 뛴다. 반에 반쪽짜리 빛으로는 자기 자신만 살 수 있을뿐 어느 누구도 그 이치로 살릴 수 없다. 강조한다. 하나를 소망하고 그곳에 집중해라. 나는 너에게 하나가 되라고 한다.
Transforming Idea!
개인이나 사회의 변화는 외부적 요인(Foreign Element)에 의해 생기고 이어 저항(Resistance)이 시작 됩니다. 이때 저항이 거세지면 원래의 상태(Late Status Quo)로 돌아가고, 외부 요인이 더 강할 때에는 균형이 깨지면서 혼돈(Chaos)으로 들어 갑니다.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혼돈의 현상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러다 혼돈의 극(極)에서 전환의 발상(Transforming Idea)이 일어나고 이어서 사회는 통합(Integration)이 됩니다.
개인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가 어느 사회에 묻혀 사는 한, 우리도 이런 커다란 변혁의 흐름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개인과 사회는 분리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깨달음을 찾는 길에 있다해도 마찬가지 입니다. 예수는 예수가 있어야 할 그때 바로 그 사회에 있었고, 석가 또한 석가가 필요한 사회에 있었습니다. 그들이 만약 다른 사회에 태어 났었다면 그들은 틀림없이 평범한 인간으로 살다가 갔을 것입니다.
지구는 빛의 길로 가려 합니다. 내면의 탐구는 바로 '빛의 길'로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현재 지구와 지구에 존재하는 사람들에게 지워진 절차이자 숙명같은 그런 것입니다. 따라서 '깨달음'이 마치 '불교적 해탈'로 가는 것이란 생각은 잘못된 것입니다. 석가는 이미 2700여년 전에 지구에 다녀가신 분입니다. 불교는 연기(모든 것은 원인과 조건이 상호 관계하여 성립되므로 독립 자존적인 것은 없고, 모든 조건과 원인이 없으면 결과도 없다는 설)에 의해 모든것이 생성 소멸을 하고 해탈을 통해 연기를 멸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깨달음'에 대한 정의는 다양하지만, 대체로 '대오(大悟)'와 '해탈'을 동일시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일본의 젊은 '각자 무묘앙 에오'(30대에 요절함)는 '대오'와 '해탈'을 명쾌하게 분류합니다.
"해탈과 대오(깨달음)의 경지 까지는 같으나, 거기서 부터 개념이 갈린다는군요. 대오는 광명을 지향합니다. 빛의 존재로 가고자 하는겁니다. 그것은 차원을 상승시키는 것입니다. 그들은 빛의 존재가 되었다가 다시 존재 세계로의 귀환을 할 수가 있습니다. 다만 육체에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차원을 낮추어야 합니다. (5차원 이상의 존재들은 빛의 존재들입니다. 이들은 스스로 차원을 낮춰 육체적 물질화를 이룰 수가 있습니다.)"
"반면, 해탈은 비존재로서 무(無)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단,무(無)에는 우열의 문제가 아닌 특별한 의미에서의 <희소가치>가 분명히 있습니다. 하지만 본인은 존재로부터 사라지기 때문에 본인에게는 그런 가치 자체가 무의미해집니다. 무에 대한 가치 논의는 세상에 남은 사람이 논의하는 항간에 떠도는 소문거리일 뿐이고, 사라진 자에게는 의미도 가치도 일절 관계 없습니다. 다만 무(無)로 사라지는 자에게는 원칙적으로 <자격>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육체의 죽음에 즈음하여 존재를 100% 거부하는 것입니다. 물론,이것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점에 주의할 필요는 있습니다. 그 선택은 개인의 성질과 경험적 취향에 불과 합니다. 다만 어느 쪽이 좋은가에 대한 것은 없습니다."
http://kr.blog.yahoo.com/hanbang64/15075.html?p=1
내면 탐구
얼마나 명쾌합니까? 나는 '해탈'이나 '대오'에 대해서 얘기하는게 아닙니다. '내면의 탐구'에 대해서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주의 근본적인 재질이 '에너지'이고 우리의 몸은 '영'을 담은 그릇이며 우리 몸 자체는 살아있는 영혼입니다. 우리의 태어남은 우주적인 '존귀한 체험'을 위한 것이고 그것은 결국 '근원(창조주, 무, 공, 하느님)'과의 '체험의 공유'를 이루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생각, 말, 느낌, 행동은 우주에 진동하고 우주의 진동은 우리 내면이 공명을 합니다. 우리가 모든것을 창조한다는 설명에 대한 답인 것입니다. 우리사회의 혼돈이나 지구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금융대란이나 기타 모두는, 우리들의 인식의 총합에 의해 나타난 현상에 불과합니다.
빛의 길!
지구는 분명 특별한 곳입니다. 이 광활한 우주에서 지구처럼 지적 생명체가 이처럼 다양하고 역동적이게 존재하는 별을 알고 있나요? 지구는 소중한 곳이고 가슴 설레게 하는 아름다운 삶의 터전입니다. 내면 탐구는 우리 삶의 목적을 깨닫는 것입니다.
"나는 여기에 왜 왔는가?"
"나는 여기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대답은 내면이 알려줄 것입니다. 지구에 어느날 갑자기, '개벽'이나 '새하늘과 새땅'이 나타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지구상에 존재하는 우리 모두의 의식의 전환을 통한 '의식 상승'에 의해서 올 뿐입니다. 지구라는 '우리의 공동체'를 자각하고 더불어 살고자 하는 강한 염(念)에 의해 자신의 삶은 '가슴 뛰는 삶'이 펼쳐짐을 알게 됩니다.
'내면이 알려준 삶'을 위해 살려고 하면, 기적처럼 그일을 이룰 사람들과 맞닥뜨리거나 일들이 나타납니다. 자유로운 삶이란, 남들은 아랑곳 않는 안하무인의 행위가 아니라 남들과 조화롭게 살아가는 삶이자, 혼돈의 와중에서도 중심을 갖는 삶일 것입니다. 그래서 청산이나 수도원에서의 '깨달음'보다 이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의 내면 탐구가 빛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소중한 존재란 깨달음이 바로 진정한 깨달음입니다. 누구에게나 있는 내면의 '영'을 품고있는 우리들 모두가 소중한 존재이며, 이런 소중한 존재들이 살고있는 우주적 체험의 장인 지구를 소중하게 자각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위해 살아가는 삶을 체험하는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일 것입니다. (끝).
http://aksasin.tistory.com/entry
이글은 '가이아'라는 분이 내 프로필 란에다 '진동'에 대해 문의한 것이 계기가 되어 쓰게 됐고, 이글은 나의 체험을 정리한 것입니다. 그러나 내글을 올려 놓고 읽으면서 마치 내가 '커다란 깨달음'을 얻은 것처럼 비춰질까봐 우려되기도 했습니다. 내가 그동안 '자각'했던 소중한 체험이 '깨달음'이었다고 표현하지 않는 것은, 두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하나는, 나중에 혹시 나타날 '커다란 자각'을 위한 여백이고, 또 하나는, 요즘 인터넷에서 회자되는 불교적 '깨달음'과 차이를 두기 위함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