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을  신이 창조한 우주를 이해하는데 목적을 둔다면 그것은 좋은 것입니다.  과학은  신이 창조한 세계를 알고 그것을 향유하고자 하는 본능의 행위입니다.
그것은 권장할 만한 일입니다. 신이 만든 세계를 이해하고 누리는 것이 신을 이해하는 일의 한과정이기도 것이니까요. 우리가 속한 신이 만든 세계를 모르면서 신을 이해한다는 것은 어딘가 2% 부족한것입니다.

 

지금의 지구인이 하는 과학이라는 것은 자연에 깃든 마음 영성 영혼을 무시한체 자기 본위의 그 자체입니다. 그런 과학으로 신이 만든 우주를 이해할수있어도 그것을 만든 신의 마음을 이해할수는 없습나다.
진정한 영성문명의 과학은 사랑이고 나이외이 사물에 대한 관심이고 이타심이며, 신을 도외시 하지 않습니다.
신을 알려고 하는 행위가 신의 몸뚱아리만 놓고 시험관안의 표본처럼 일렬로 세워놓고 갈갈히 묘파 분석하고 정복하는 행위가 동어로 되어서는 안되고
'니콜라 테슬라'와 같이 신에 봉사하는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이성과 논리라는 것은 신을 이해하고 감각하고 진화하는데 필요한 특성중의 하나입니다. 인간이 다른 동물과는 달리 우리 수준에서 언어를 갖추고 지성을 갖춘것은 결코 우연히 아닙니다.동물은 본능적으로 신을 알지만 인간은 지성을 가지고 독립된 의식으로 신을 찾아가는 능력이 있습니다.(동물과 인간은 이런점에서 서로 진동수가 다르며 윤회하지 않습니다)신이 왜 여러분과 같은 개체를 만들었는지 알것입니다.  그것은 그 머릿수 만큼 신의 확장입니다. 하지만 다른 것과 보조를 맞추지 못하고 그것이  최고인양 우상화 하고 올인할때 그것또한 어리석은 것이 됩니다.. 지나치면 아니함만 못합니다. 그것은 갖추어야할 다른것과 함께 하나의 요소에 불과합니다.


서구의 합리주의 이성적 과학은 미신과 무지 몽미 맹신에서 벗어나  밝게 해주는 한 역활을 해왔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도가 지나칠때 인간은 연민을 모르고 냉혹해 질수 있는겁니다.
 그것도 자기를 버리는행위 주체가 되지 못하는 행위입니다. 이제 앎은 고대의 신에 대한 감성
신에 대한 섬김과 사랑과 겸허함으로 내려가 그 순수했던 자세와 하나가 되어야 하는 겁니다.


다른 한편을 누르기 위해 다른 한편으로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을 하고 있는데 이제 다른 한편도 충분히 맛보았으니 서구의 합리주의 이성주의는 반드시 동양 고유의 감성과 영적 지혜와 다시 균형을 맞추어야 합니다.


지구가 화합을 못하고 서로 조각조각 따로 놀고 끊임없이 분리를 양산해내는 데는  기름칠 안한 톱니마냥 톱니들이 서로 싸우며덜거덕 거리며 돌아가는 서구의 이 합리주의가 한 몫합니다. 비젼의 감성이 없을때 이 합리주의는 냉혹한 이기주의가 되는 겁니다.그래서 톱니바퀴사이에 스파크가 튀고 파손이 잦죠.


그에 반해 감성과 영성은 도저히 논리의 과학이 죽었다 깨어도 따라오지 못하고 하지 이해하지 못하는 일을 이해하합니다.일례로 순수한 마음에서 나오는 인간의 사랑과 정의 에너지 그것은 다층적이고도 다차원적인 특성입니다.


논리와 숫자와 기계과학은 고체와 같다면 감성과 영성은 그것이 부드러워진 윤화류와 같고 기체와 같습니다. 지성이 쇠사슬같이 딱딱 덩어리들의 연속이라면  딱딱한 고기를 부드럽게 하고 다져 놓은 것이 감성입니다. 빛의 진동수가 높아진다는 것은 몸이 유연해지고 연해지는다는 뜻입니다. 몸이 너무 연해지다 못해 영이 됩니다.
우리 하위 육체수준에서 지성체보다 감정체가 더 포괄적이며 더 진화했다는 것을 아십시요. 감정체 다음이 유체인것입니다.


즉 기계논리의 숫자의 과학이 일직선상에서 차례대로 한번에 하나씩 연산 처리하는 2mb CPU와 메모리 능력이라면 가슴이 하는 일은 한번에 수백가지일을 동시에 처리하는 수퍼 컴퓨터와 같습니다. 그것을 컴퓨터라 부를 필요는 없고 (디지털 컴퓨터는 단순한 우주의 진리를 기술적으로 모방힌것에 불과한데) 그것이 영인것입니다.


다차원 동시적인 영을 이해하는 것은 흑판에 일직선상에 줄에 한번에 하나씩 숫자들을 공식대로 늘어놓rh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동시 다층적인 시를 이해하는 것에 가깝습니다.


여러분은 학교에서 시를 배울때 시를 전체를 음미하기 보단 누군가가 규정해낸 이론대로 조목조목 나누고 난도질하며 부분 부분만을 보고 분석하려 듭니다.이것이 논리와 이성 위주의 교육이 자아낸 폐해입니다. 시를 수리적으로 분해하고 해석할수 있을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시로서 생명을 잃은 겁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가 시를 어려워 하듯이 신을 어려워 하는 겁니다. 그냥 시를 느끼면 되는데도 구절 구절 하나를 파편화 해서 숫자가 필요하고 주석이 필요하다고 여깁니다.우리의 감성은 메마르고 경직됩니다. 감성은 길을 잃기도 쉬우나 그만큼 머리나 논리보다도 먼저 신을 알아차린다는 것을 아십시요. 신도 그냥 느끼는 겁니다.   어린왕자에 나오는 구절이 있지요.'어른들은 항상 누군가  설명을 해주지 못하면 스스로 알지 못한다. 보아뱀속에 있는 코끼리 그림보단 숫자를 더 좋아한다.' 이 지구의 한 모습은 어린왕자 이야기에서 나온 숫자를 좋아하는 학자가 사는 행성과 같으며  과학을 너무 좋아해 고개가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사팔뜨기 라퓨타인과 같습니다.


생물학 없이는 꽃을 보고도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하며 문법을 모르면 시를 감상하지도 못합니다.


우주를 이해 함에 있어서 학예에 대한 조예를 갖는 일은 중요합니다.
가르침은 경전속에만 있는게 아니며 어려서부터  순도 높은 고전의 문학과 예술을 가까이 하는 것은 아이들게 정서적으로 많은 지혜와 가르침을 줍니다.
이런 것들은 대자연의 역경 앞에서 굴하지 않은 영혼의 위대함과 그것을 통해 우리가 얻을수 있는 것들이 과연 무엇인지를 잘 묘사하고 있지요.
예술을 감상하고 또 직접해보는 일 그리고 거기서 자신이 직접 느끼고 체험하는 에너지들을 통해서 여러분들 생각과 의식을 수준을 높일수 있습니다. 예술을 통해서 상승한 마스터들도 있는 것입니다. 예술은 다차원 과학이고 다차원 과학이 예술입니다. 고대에는 과학과 예술의 경계가 따로 없었습니다.
대게 여기서 새로운 것에 대해 거부감을 보이는 분들은 예술적 감성이 적다는 겁니다. 예술은 사물에 대한 자유로운 상상력과 사고를 가능하게 하고 융통성 있는 이해력을 발휘하게 해줍니다.
여러분은 학교에서 시나 예술교육을 충분히 받지 못해 왔습니다. 특히나 먹고 살기 위해 남보다 좋은 대우를 받기 위해 또는 서구문화를 받들고 경쟁하기 위해 논리와 이성을 중요시 했던 한국의 입시위주의 교육은 그렇습니다.


그러나 말초적인 감각만 취급하는 대중적인 예술은 예술이 아닙니다. 예술은 의식을 새로운 시각을 전달시키고 의식을 고양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잃는 하이틴류 감상적인 연애시들은 시는 시가 아니죠.


사람은 신명이 날때 신이 깃듭니다.
한국인은 신명과 흥의 민족입니다.
서구문명을 다루기 위해 한국인은 많은 부분을 희생해 왔던 것입니다.


예술을 스스로 함에는 그 과정을 통해서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이지 남에게 대우 받기 위함이 아닙니다.
예술은 보상이나 목적 보다는 스스로 즐기고 다 함께 즐기는 행위 과정 자체에 즐거움이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나의 즐거움을 보다 많은 사람과 함께 하고 타인에게 선사하고 남과 함께 즐기는 행위는 자신의 행복을 남과 함께 나누는 일종의 삶의 봉사입니다. 기쁨은 나눌수록 커지고 슬픔은 나눌수록 작아지는 법이지요.


문학이나 음악이나 미술작품은 사람을 행복하게 하고 그 즐거움을 통해서 다차원 에너지를 전달하고 신체와 사고를 보다 유연하게 해주고 의식을 높이는 힘이 있습니다.

서로 느끼는 것에 대한 텔레파시따위의 소통이 커뮤니케이션이  단절되어 있으니까 우리는 우리 신체 밖에서 서로의 느낌에 따른 공용할수 있는 논리와 분석 따위의 논문을 필요로 합니다. 정작 신보다도 그 논리와 논문이 중요시하게 된것이지요. 그 논문이 없다면 눈뜬 장님처럼 신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신이 어려운 존재로 여겨지는 겁니다.


신이 만든 기술 원리를 탐욕적으로 들여다 보고 집착할때 우리는 그것을 창조한 신에 대해서 눈을 동시 뜨고 있을수 없으며 경외심을 잃어버리기 일수입니다.


벌이나 개미가 아닌, 신의 확장을 위해 개체가 되어 독립된 의식을 가지고 진보하는 자는 필연적으로 감정과 감성의 영역을 거칩니다. 통합을 위해 지성도 중요하나 지성만으로는 결코 신과 합일를 위한 진화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 은하에서 가장 통일되었고 물질과학이 발달한 외계인 조차도 그 감정의 디엔에이 한조각이 얻기위해서 갖은 고초를 마다 하지 않으며 지구에 옵니다. 그것이 다양성을 보장해주고 다양성은 진화(스스로-겸험-배움-신과 합일)의 살아 있는 토대가 됩니다.그 외계인종은 이 감성에 문제가 있다고 인간의 모든 욕망과 감정을 거세하고 철저히 기계적 지성적으로만 머리통만 살아 움직이는 삶의 방식을 선택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신에 도달하기는 커녕 오히려 신에게서 멀어지고 신에 도달할수 없다는 더 큰 절망감을 깨닫게 된 것이지요. 통일성은 좋으나 획일성은 살아 있음이 아닙니다.  이 존재가 지구에 와서 여러분이 지금 현재 사용하는 광섬유와 반도체 등의 인터넷 기술들과 디지털 기술들을 빵뿌스러기 죄다 흘리고 갔습니다.(제타인을 말합니다) 다양성이 살아있으면서도 하나로 화합하는 길은 지성과 감성이 협동하는 길에 있습니다.


이 우주는 근원자 혼자서 모든것을 창조한게 아니며 그에 봉사하는 무수한 일꾼들 디자이너와 함게 창조한 것입니다. 대천사들  엘로힘들 창시자들 영적으로 높이 진화한 외계인들 말이죠...


행성과 그 행성의 자기 에너지장은 조인이 창조한것이며 그 위에 살아가는 인간과 생물들의 신체의 생물학적인 모습은 사자인(쉐크메트-고대 이집트에서 여신)이 창조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 존재들은 우리 우주로부터 출발한것은 아닌데 다른 우주로부터 그들으 우주를 성공적으로 완성시킨 후에 근원자의 옆자리에 앉었다가 그 교훈으로부터 얻은 지혜와 기술을 우리 우주에 나누어 주기 위해 우리 우주의 탄생시에 부름을 받고 참가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삶도 이들과 만찬가지로 데이터 교훈을 쌓기 위해 존재하며 그 목적은 창조입니다. 이렇게  높이 진보한 영혼은 한 우주를 완성시키고 근원에 다달으고 다시 새로운 하나의 우주를 창조하는 창조자가 되거나 그 창조를 돕는 임무를 부여 받습니다. 이들의 영적 과학과 비교하면 우리 우주에서 물질과학이 한 수준 발달되어 있다는 제타인도 유치원 수준에 불과합니다.(제타인도 에테르, 유체 수준에서 생물체를 주조하는 기술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영혼은 창조하지 못합니다. 영혼과 단절된 그들은 진화와 생존에 어려움을 겪어왔습니다)
 

진정한 과학은 기계적 이론의 일직선상에 사물을 늘어놓는 식의 과학이 아니라 다차원 영의 과학입니다.


물질과 물질을 이어주는 관계가 없다면 물질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은 사물이 아닌 사물들의 관계 속에 존재하지요. (관계가 없다면 서로 상호작용하는 움직임이 없다면 사물은 눈에 보이지도 존재하지도 않습니다)


서구의 과학은 동양과는 달리  사물 나누고 분리분석을 통한  물질 그 하나 하나 파편에만 집중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동양은 예로부터 물질보다는 그 물질들이 자아내는  이 관계를 중시해왔습니다.


과학이 발전하려면 물질 과학이 아닌 영성과학으로 발전해야 합니다.


오늘날 숫자나 셈하는것은 대단한 인기를 누리고 권력이 되었습니다.


당장은 눈에 누가 봐도 의심없이 확실한 규칙처럼 보이니까 내가 나를 버리고 의지하기 좋지만 눈에 보이는 규칙이나 틀에는 영성이 작용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에게 그것도 과학 발달과정의 하나의 시도이지 않냐고 반문할수 있으나 그것은 과학의 축에도 못 드는 것입니다. 지금의 지구인의 과학은 과학이 아닙니다. 진정한 과학은 다차원 과학입니다. 영성은 눈에 보이는 것 이면의 본질을 마음으로 꿰뚫어보는 힘입니다.


당장 스스로 생각할수 없으니까  당장 눈에 보이는 것 확고하게 손에 만질수 있는 것 딱딱 맞어떨어져 가는 것 편한것에만 외부의 논리 지식 틀에 의존하고 의지하려는 인간은 더욱 의존적이 되갑니다. 그럴수록 인간은 점점 영적으로 나약해져만 갑니다. 기계들은 여러분을 나약한 어린애로 만들고 여러분을 지배하는 것입니다.


현수준의 인간의 물리적 수학만으로는 상상할수없는 영역이 있습니다.
인간의 숫자로 나눈다는것 자체가 무의미할정도입니다. 프랙털 카오스 이론이나 양자역학등이 그한예인데 그것은 물리적 세계를 떠나 영적인 영역에 문턱에 들어서기 시작한 인간 과학의 최전방에 위치하지만 그것조차 겨우 영적세계의 초입에 불과합니다.


영성과 균형이 잡히지 않는 과학은 스스로 진화가 제한 됩니다.


우리는 그 위험성과 부작용을 현대과학문명을 통해서 보고 있지요.


영성과학이 아닌 이성과 논리만이 발달한 현대 주류의 기계 과학은 한물간 루시퍼의 부하 아눈나키의 잔재입니다.


지구의 과학은 아누나키가 과거 뿌려놓고 간 과거의 망령에 의해 통제받고 있지요.(아누나키는 살았있는 금속으로 이루어진 전자 기계 생명체입니다 이들은 냉혹 컴퓨터와도 같습니다 이들이 고대에 지구에 와서 서구인에게 가짜 신 가짜 하나님 노릇을 한겁니다.)


백인들의 서구 사회에서 어떻게해서 합리주의와 이성주의가 발달하고 그것이 현대산업과 과학기술로 이어졌는지 그와 반대로 동양에선 감성과 영적인 지혜와 공동체적 가치관이 발달했는지는 기원이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서로 가진 특성들은 성장의 요소론 다 필요하고 우열은 없으나 백인들은 우주 시작부터 시작해서 이제 막 우주를 알기 시작하면서 성장하는 어린아이와 같습니다. 반면 동양인은 그 단계를 이미 졸업하고 나이를 먹고 완성된곳에서 온것입니다. 이제 그 기원과는 상관없이 모두 지구인이 되었으나 백인들이 블럭과 부품의 단편들을 만드는 자들이라면 동양인은 그것들을 이어주고 조립하여 하나의 작품을 완성시키고 봉사하기 위해 이곳에 참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한국이 서양인만 쫒아가고 서양인처럼 노벨과학상 하나 받지못하고 과학력이 발달하지 못했다고 한탄하는 바보 소리를 하지 마십시요.
백인들이 우주의 시작점부터 시작해서 이제 막 세계를 알기 시작하고 배워가는 어린애라면 당신들은 그런것을 이미 졸업한 어른들입니다. 백인들의 외계 조상이 밖에 나가서 사냥해오는 호전적인 남성성을 상징한다면 동양인과 지구인은 집을 운용하는 여성성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동양인만이 아니라 지구인은 모두가 이 여성성을 갖추는데 있습니다.
한국인은 역활은 우주로 나아가기 위해 로켓을 만드는데 있지 않으며
백인들과는 과는 다른곳에 있다는 것을 아십시요.
그러한 재능은 천지진동후의 다음 세계에서 드러날 것이며
한국인은 서양과 경쟁하고자 로겟을 만드는 일을 그때 흥미를 그만둘것입니다. 우주 밖만 나가도 이미 널려있는게 우주선입니다.
지구인의 목적은 지구를 관리하고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사는 전 우주의 모범을 보이는데 있지 우주 탐험이 아닙니다. 당신들은 이 우주에서 이제 막 시작하고 우주로 뻗어가는 유일한 생명체가 아니고 지금은 홀로 바닷길을 개척하는 식민지 시대나 서부개척시대가 아닌데 그런 일은 이미 수백만년전에 이미 남들이 다 해먹었다는 것을 아십시요 서부는 이미 개척되어 있고 이미 바닷길이 개척되어 있고 행정 구역화 되었습니다. 널려 있는게 우주선입니다)이곳에 집을 완성시키고 그집을 지키는 주민이 되고 우주의 모범이 되는데 잇습니다.


과학은 도구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과학이 모든 것을 누군가 미리 만들어 놓고 다른 사람에게 쉽게 편리하게 해줄거라고 믿습니다.


그와 중에 인간은 자연스스로 생각한다라는 의식을 버리고 그 도구에 의존적인 노예가 되갑니다.


자동차 없으면 휴대폰없으면 한시도 살아가기 힘들어지지요.


자, 그 도구로서 목적은 가치 중립적 이라 할지라도 물질과학은 신을 버린자에게 또하나의 신이며


이러한 영성을 배제한 <지나친 이성과 논리의 집중>은 아눈나키의 특성이기도 함을 명심하십시요.

 

과학은 진화의 일부분이며 다른것과 보조를 맞추어야할 아니 다른것에 봉사해야할 하나의 요소입니다.


삶의 실질적 겸험과 배움을 통해 교훈을 얻는것 그리고 성장하는것 한계가 없는 영혼을 통해 이루어지고


영혼의 배움과 진화 그것을 먼저 우선에 두어야 합니다.


그것은 편리만을 찾는게 아니라 '스스로 느끼고 행한다'라는 자주성과 주체성 강인함을 통해서 오는 겁니다. 어떤 인위적인 편의적인것에 강제로 일률적으로 해서 되는데 아닙니다.


먼거리라면 차를 버리고 걷는 것 건강에 이롭다는 것을 알겟지요. 병원에서 수술이 아닌 자연분만이 산모와 아이의 유대감를 좋겠한다는 것은 알겠지요. '편안한것'은 찾는 것은 좋으나 '편한' 것만 찾지 마십시요.


텔레파시가 없는 인간들에게,
이성과 논리라는 것은 체계가 되고 종국에는 타자 사이에 하나의 약속으로 제도화 됩니다. 그것이 없이는 아무것도 믿지 못하고 생각하지도 소통하지도 못합니다. 다른 사람이 만들어준 도표를 보고 맞지 않으면 진리가 아니고 맞으면 진리라는 것이죠.


제한된 의식을 가진자들의 특성이긴 하지만, 증거 없이는 믿지 못하고 보이지 않는 것은 믿지 못하는 것은 얼마나  근시안적이고 스스로를 축소하는 겁니가.


그것을 외면화하고 누군가에게 도구화 시켜 편리하게 하게 의존화 한다는 것은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거기에 나는 없게 됩니다. 현대과학이 준 편리성도 있지만 한편으론 인간소외 현상을 낳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내가 내발로 걷지 않고 의존하는 목발과 같은 도구가 됩니다.


응석만 부릴줄 알지 로봇 시녀들이 없으면 아무것도 느끼지도 생각하지도 못하는것
이러한 <부르주아 의식은 영적의 진보과는 거리가 멉니다.>


우리는 '사실'을 가지고 종종 다툽니다. '사실'에 찐득이처럼 붙박혀서 옴쭉달짝도 못하고 사실에 갇히고 옭아매입니다.눈 먼 자들에게 '사실'은 막강한 권력이 되어 버렸지요. '사실'은 하나의 관점입니다. 관점에 에고를 부린다고 그 관점이 만들어내는 사실에 매달리는 악순환을 반복하고 있지요.


모든지 다른 사람이 만들어낸것에 의존하기 보다는 그것을 활용하되 매몰되지 않고 스스로 한다는 것 내안에 이미 존재한다는것 그리고 그것과 함께 한다는 의식이 필요하죠.


텔레파시가 업는 인간들에게 외부에 내어 놓아 의존하게 하는 과학분석이나 실험이 없이도 진리를 알수가 있습니다. 완전 의식이란 이러한 눈뜬 장님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입니다.


아무것도 가진게 없는 레무리어의 원주민조차도 과학 논문이라는 내 몸 외부에 따로 지참해야할 도구가 없이도 인간의 몸에 디엔에이가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내면으로 알았다고 합니다. 원자들 전자들 그것은 밤 하늘에 떠 있는 별입니다.  창조는 은하의 거대한 별무리들의 빛의 폭발입니다.그것은 말로 논리로 표현할수가 없습니다. 영안이 트이면 명상을 통해 공간을 초월해 세포를 직감적으로 느끼고 투시할수가 있는 것이며 그안에 스스로 의식이  거할수가 있는것이지요.  우리는 그러한 스스로 능력을 잃어버렸고 그것을 외부의 망원경이나 분석기나 기계가 대신해주는 겁니다.


근원자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에는 우리 우주만 존재하는게 아니며
기계들만으로 발달한 우주가 이미 존재합니다. 그런 우주는 완성이 실패했습니다.
우리 우주는 기계 시스템이 아니라 그 실패의 교훈으로부터 나온 영과 사랑의 시스템입니다.
그 우주에서 기계들이 일부 넘어와 우리 우주에 문제를 자아내기도 하는 겁니다.
그들은 근원신과의 단절한, 집나간 자식들로, 이기적인 거짓 괘락과 위선을 선택한 존재들입니다.

 

인간은 아직도 중력의 본질을 규명하지 못하며 통제하지 못합니다.
중력은 사랑이라는 말에 공감합니다. 중력은 이 행성영역에서의 에테르의 인력입니다. 행성은 그 자체가 우리와 마찬가지로 의식과 마음을 가진 하나의 살아 있는 생명체입니다. 우리 몸에 에테르 신체(유체)가 존재하듯 행성에도 에테르 신체나 경락과 경혈과 같은 격자망과 포탈들 에너지 흐름이 존재합니다. 행성에 에테르층이 없다면 중력은 발생되지 않습니다. (중력은 지표가 아니라, 대기상에서 여러가지 요소와 복합적으로 발상한다고 하며 사물의 온도 대기의 밀도와 연관이 있다고 합니다.)


신에 촛점이 맞추어지지 않은 이론과학은 철학과 마찬가지로 인간이 인위적으로 창조한겁니다. 과학은 철학입니다. 그것은 창조된것입니다.근원에서 보면 본래 없던 것이고 창조된것입니다. 과학은 근원과 상관없는 철학입니다.우리 지구인의 과학은 자기가 어떤 게임에 룰을 만들고 진짜 진리와는 상관없이 그 안에서 저희들끼리 맞네 틀리네 하는 비지니스가 되어버렸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그들이 창조한 그들의 우주입니다.


진리 또한 창조된것이고 우주마다 다릅니다. 우리 우주의 진리는 '사랑'입니다. 진리란 단순히 물질과학만을 말하지 않는데 하물며 그 진리에 조차 맞지 않는 인간이 만든 과학이란 더 말할것도 없겠지요.


그것이 과현 실지로 창조자가 선택한 자연에 진리에 맞는가는 또다른 문제입니다.
추상적인 이론 과학보다는 실제로 자연에서 겸험할수 있는 겸험과학이 실제에 진리에 가까울수 있습니다. 높은 차원의 존재들은 단순히 손으로만 잡히는 종이 위의 논문이 아니라 이것을 실지로 몸으로 체험을 통해 알수가 있는 것입니다. 몸으로 체득해서 아는데 달리 무슨 증거가 필요하겠습니까. 단지 그것을 기술화 하고 표준화는 데 외부의 과학이 필요한 것 뿐이죠.


먼저 그 초입으로 가슴은 머리보다도 진보한것이며  머리로 아는 것을 온몸으로 느끼게 해줍니다. 체험을 통해서 그가 느끼는 것 보다 확실한 증거는 없습니다.

 

신에 대한 도전은 자기 자신과 분리된 상태에서 자기 자신에 대해 도전하는 것 만큼이나 불가능한 일입니다.


신은 바로 여러분 자신이기도 하기에 도전당하지도 정복당하지 않으며


단순히 영성이 아닌 단순히 기술만으로는 자기 주위에 더 이상 나아갈곳이 없는 외부에 아무것도 없는 한계에 다달읍니다. 과학기술이 수평적이라면 영성은 한데로 조망할수 있는 수직적인 차원이 다른 영역입니다. 현재와 같은 과학만으로는 도달할수 없는 무한 배움의 영역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영혼의 여정이라고 합니다. 진화론 과학자들이 인간이 연민의 눈물을 흘리거나 감격하는 것 조차  이기적인 유전자의 작용이니 뭐니  소릴  하는데는 분노를 금할수 없지요.그만큼 현 과학은 생명에 대한 경외심없습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무생물로 보며 그럼으로서 영혼에서 스스로 떠나갑니다.


과학으로 인간이 자연을 정복하고 우주를 정복한다?
단순히 탐욕만으로 모든 신비를 벗겨낼수 있다면 과학도 더 이상 할게 없습니다. 과학도 그 즉시 죽음입니다. 그래서 탐욕적인 기술맹신주의는 자연에 겸손과 염치를 알라는 겁니다. 물질일변도의 과학은 어린애와 같은데, 염치를 아는게 성장입니다.


그것은 영성과 배움과 지혜와 교훈을 얻는데 균형을 맞추어야 합니다. 모든 것은 마스터가 되지 못하고 단편적으로 파편화되어 집중되는데 있는데 것입니다.


 맹목적 사랑은 사랑이 아니기에 사랑은 지혜도 필요하기에 그래서 감성과 지성은 신에 봉사한다는 하나의 목적아래 서로 협동하고 균형을 맞추어 야 하는 겁니다. 창조에 있어 사랑은 으뜸이지만 사랑만으론 되지 않기에 지혜외 의지와 신체를 낳았습니다.


 나아가되, 점진적으로 나아가고 여유 공간을 항상 두십시요. 그것이 존재가 숨을 쉴 공간입니다.

 

지도자들이 과학기술을 이용해 핵폭탄을 만들고 살인무기를 연구하고 만든다는 예를 들어서 과학이 해롭다고 말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과학을 정치가들이 도구로서 잘못 사용한것에 불과하겠죠.  그럼 어떤거이 좋게 사용한 거고 잘못사용한것이냐가 먼저 있어야 할것입니다. 이것만 봐도 우리수준에선 인문학은 자연과학 보다 위에 있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고도로 진보한 영성 과학은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경계가 없습니다. 그러나 현시점에서 영성과학은 인문과학에 가깝습니다. 고도로 정교하게 발달한 자연과학은 곧 인문과학이기도하나 그것은 과학의 영역은 아닙니다. 그것이 비젼이고 영성입니다.그것이 먼저 있은 다음에 과학과 협동하는 것입니다. 과학도 신에 봉사해야 합니다. 신은 이 영성이기도 한것입니다.현재 현대 과학 문명이 이 영성인 영역이 과학보다 먼저 나갔다고 보십니까.

이 비젼의 영역이 과거와 같이 에고를 부려서도 문제지만 현재 이 과학이 부리는 에고또한 만만치 않는 것입니다.


조각조각 해체만 해내는 물질과학은 신(근원자 창조자 이하 봉사자들)이 만든 세계를 이해할수는 있어도 신의 마음을 이해하지는 못합니다. 그것은 자신을 존중하고 바라봄으로서 또하나의 루미노스한 깨달음인것입니다.
과학으론 무엇이 어떻게 존재하는가는 설명할수 있어도 왜 그것이 그시작되었는가라는 질문에는 답을 못합니다.
왜 라는 질문에 그것은 신의 맘이야 라는 말보다 정확한 것이 또 있을 까요.
과학은 이 마음을 부정합니다. 방관합니다. 내소관이라는 듯이. 그런데 과학으로 어떻게 신의 모든면을 다 알수 있겠습니까. 신은 정학히 신의 이 의지 부분까지도 다 포함합니다. 무슨 호르몬 인자니 뭐니 죽음 무생물들의 우연한 작용으로만 설명하려 들죠.


장님들이라 서로를 못 알아보고 본질을 꿰둟어 볼수 없는 사람들에겐 과학이 서로의 약소 개념노릇을 하고 외부의 교통신호등 노릇을 하고 심판관과 같은 역활을 하는 것은 필연적인 일인지도 모릅니다.그것과 대조해서만이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는 것이죠. 무리를 이루고 살수 밖에 없는 개체들은 최소한의 외부적 규약은 필요하겠죠. 그럼으로 그러한 규약들은 살아가는데 필요한 최소한만 만들거이며 만들어도 신의 뜻에 합치해야 하는 겁니다. 그것이 신에 뜻ㅇ 맞는지 안하는지는 어떻게 알수 있을까요 먼저 나간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현재와 같은 과학을 통해서 입니까. 그것은 신을 찾아가는 일이지 존재하는 일은 아닙니다. 그것은 이미 존재하는 우리 자신 몸을 통한 비전과 통찰입니다. 우리가 서로가 서로의 마음을 직접 나눌수 있는 완전의식 다차원의식을 갖게 되면 외부의 규약과 언어 그것에 의존할 필요는 없어집니다. 고도로 진화한 존재들은 마음과 마음 주고 받으며 소통하며 우리가 사용하는 것과 같은 언어도 없습니다.(우리가 지구에 올때도 그런 모습이었습니다)


분명 이 우주엔 현재 인간의 과학으로 설명할수 없는 영역이 있고 신은 그것 까지 포함합니다.
내가 어렸을때 부모로 부터 사랑받지 못했어 자란 아이가 커서 그 부모님을 참된 사랑을 깨닫고 그 사랑을 깨달았을때 오는 교훈과 감동들 그것을 어떻게 과학으로 설명할수 있을까요. 신은 정확히 그러한 사건들의 총합입니다.


장애를 극복하고 골인지점에 도달한 장애인 마라토너의 인간승리의 드라마가 주는 교훈
또 챔피언을 꿈꾸는 헝그리 복서의 삶
그것을 단지 과학으로 수리적으로만 보면 생명이 없는 것입니다.


친구들이 날 사랑하지 않고 좋아하지않았어 하고 안좋은 자아상으로 아무렇게나 살아오고 파괴를 일삼던 청소년 범죄자가 어느날 사랑을 체험하고 극복하며 이제껏 살아온 
내가 부른 재앙이 스스로 파괴이고 저처한 것임을 알고 다시 태어나는 감동을 어떻게 과학으로 설명할수 있을까요. 내가 말하지만 신은 분명히 그러한 측면이라는 겁니다.


합리주의 서구의 과학은 사물에 분리분석에서 출발합니다. 모든것을 사물화하고 물질화하며 파편화하죠.
그런데 신은 그 사물의 관계와 일어나는 예측할수 없는 유동성의 일이기도 하며 그와중에 일어나는 교훈과 배움 그 자체이기도하는 겁니다. 눈을 들어 전체를 볼줄 알아야 합니다.

 

기계과학은 실수를 용납하지 않지만 영은 다릅니다.


이 영성을 추종했던 레무리어인을 미개하고 원시적이고 열등하다고 봤던 후기 아틀란티스의 과학자들과 반란자들이 어떤 입장이었는지 우리는 알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는 그 아틀란티스의 후손인 백인들이 레무리어의 후손인 아메리카 인디언을 학살함으로서 반복되었습니다. 그러나 백인들보다도 기품있고 고귀한 종족이었던 것은 야만인으로 매도된 높은 영성을 지닌 아메리카 원주민이엇습니다.


영은 그들이 실수라고 보는 것에서 오는 배움과 교훈을 통해 더 크게 무한하게 발전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애초부터 완벽한것 아니면 실수를 열등하다 경멸함으로서 실수자체에서 오는 배움을 용인하지 않는 기계과학은 영처럼 크는데 한계가 있는 겁니다.


여기서 말하는 실수 또는 실패라는 것은 정확히는 내가 하는 말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말을 빌려서, 그들이 그렇게 보는 것입니다.  외모지상주의 사회에서 '뚱보'는 사회에서 배척받는 실패이고 실수로 보일 겁니다.


다차원 완전의식을 가진 레무리언인들은 직관과 명상 여행을 통해 한없이 작아져 인간의 디엔에이를 커다랗게 볼수 있었습니다.그리고 내면 명상 여행을 통해 자기 가슴속에 소용돌이 치며 빛으로 폭발하는 은하를 겸험할수도 있었습니다.

 


1+1=2 와 같은 규칙은 이 우주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들의 존재가 하는 일입니다. 그 일을 통해서 존재는 존재성을 스스로 즐기지요. 그것이 하나의 게임이며 환상이라는 것을 알고 행하는 것은 걱정할것이 없으나 절대적이라고 믿을때는 스스로 만든 그 도구 그 환상에 갇히고 경직되고 고착되며 노예가 됩니다.


신은 알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내면에 존재하는 겁니다. 신은 알아가는 것이 아니라 행동하는 것이고 봉사하는 것입니다. 배움은 그 존재 행하는 그 무엇입니다.


1+1은 1 이 아니고 3이 될수도 있고 도로 1이 될수도 있는 것이 우리네 삶의 모습입니다. 그 삶 자체를 넓게 보고 그 전체를 다 바라보는 것이 영성입니다.


이 우주에는 우리와 아주 전혀 다른 시스템으로 창조되고 운용되는 우주도 많으며 그곳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그러한 수학이나 과학의 법칙이라는 것은 소용되지 않습니다.


비록 우리가 우리의 우주의 규칙들을 따른다해도 이것을 알고 따르십시요. 그러면 마스터가 될수 있을 것입니다.


말이나 논리로는 도저히  설명할수 없는 동시 다층적이고 압축적이면서도 무한한 영역이 있습니다 모두 각자이면서도 각자가 아니고 하나인, 작은 것 이 큰것을 포함하고 큰것이 작은 것의 일부가 되는 무한공간 그것을 무엇으로 설명할수 있을까요 그저 느끼는 것이지요. 그곳에서는 감성 몸 그 자체가 언어입니다. 반면 일직선의 과학은 해체하고 일렬로 서열을 만들며 분리분석하려 듭니다.


믿음이 아니라 앎입니다. 그러나 그 앎은 과학이 아니라 공경과 믿음의 자세까지 포함하는 앎입니다. 그러한 자세는 그 사람이 믿음과 마찬가지로 의지로 선택해야할 문제입니다. 따라서 단순히 과학의  확인 만으로는 되지 않으면 그 사람의 선택인것입니다. 믿음은 의지입니다. 내가 빨간색을 보고 그것이 아무리 아는 것이고 사실을 받아들이는거라 거라해도 그것을 믿지 못하면 거부하면 그만입니다. 믿음은 과학이 아니라 의지의 문제입니다. 자신의 감각을 '믿지' 못하고 그것이 정말로 파란색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그에게 빨간색이 아닙니다. 믿음이나 의지가 없다면 로보트죠. 거기엔 자유로운 창조 상상의 여지가 없습니다. 생명이 없다는 거죠. 왜 어떤 사람은 믿는 것을 어떤 사람을 똑 같이 믿지 못할까요. 믿음이나 의지는 영혼의 나이들, 체험을 통해서 나옵니다.


신은 죽었다는 기치 아래 과학이 모든것에서 인기를 얻고 신을 대체하며 일반인의 일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신은 특정 종교의 전유물이 되어버렸고 일반인에게서 공통적으로 신을 찾아보는 것은 어렵게 되어버려지요. 신은 문명의 공통이 되어야 합니다. 미래 사회는 모두가 자발적으로 자립하고 성숙한 상태에서 다른 종족과 화합하며 신을 섬기고 창조의 법도에 맞게 살아가는 그런 사회라는 것을 아십시요.


생각하는 일보다 중요한것이 사랑하는 일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위차원에 하위의 마음이 있고 지성이 있는 것 처럼
신성의 영역에는 신성한 마음있고 신성한 지성이 있습니다.


그것은 서로 우열을 떠나서 신이란ㄴ 하나의 공동 방향을,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협동하는 존재이나 굳이 현 수준에서 서 있는 자리 위치를 따진다면 감성이 지성보다 포괄적입니다.  왜 머리만 살아서 움직이는 똑 똑 하다고 하는 기계들이 스스로 한계에 부딪혀 진화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왜 똑똑하다고 하는 과학자들이 핵폭탄을 만들며 스스로 재앙을 자처하는 것일가요. 신성과 합치되지 않는한 지성이 반듯시 현명함과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겁니다. 그 선택은  마음이고 의지이고 자세이며  전체 그림이 없는 과학으로 설명할수는 없습니다. 그들은 어떤 한도로 상승할수 없고 어떤 장애를 앓는 것처럼 똑똑한 바보인데 항상 영적으로 현명한 선택을 못해 승리할수 없습니다.신은 공평해서 두가지 다 주지는 않는데 제한된 의식의 이기심, 탐욕심과 현명한 마음은 물과 기름처럼 섞일수 없는 것입니다.


이 우주를 돌아가게 하는 가장 효율적이고 지성적 법칙이 '사랑'입니다.  이렇게 사랑과 지성은 다르지 않습니다.사랑안에 이미 지혜와 의지가 포함됩니다.


신이라는 하나의 공통된 방향을 바라보지 않느다면, 에고는 감성이라서 부리는게 아니라 지성도 부릴수 있는 것입니다.


에고는 감성이 풍부해서 부리는게 아니라 지성과 감성 어느 쪽에서도 부릴수 있습니다.
감정체가 지성체보다 더 진보 한것입니다.
신이라는 하나의 같은 방향을 바라본다면 감성이 문제가 생기는 것은 감성이 부족하기 때문이지 그 반대가 아닙니다. 감성이 풍부하다고 해서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고 감성은 감성이 풍부할수록 문제가 적습니다. 그에 반해 지성은 상대적으로 고정된 틀과 같아서 그것들이 다가올때 감성의 윤활류가 없다면 스파크가 일어나기 쉽습니다. 신이라는 하나의 공통된 방향을 바라본다면  지성이 적절히 받쳐준다면 감성은 사물이나 타인을  이해하고 그 속을 가늠하는 능력이 지성 보다  한 발 더 앞서갑니다.감성의 문제는 감성으로 해결해야 지 감성이 문제가 있다고 감성 자체를 죽이고 더욱 지성에만 몰입하는 것도 살아 있다고 할수 없습니다. 신이라는 하나의 고통의 같은 바라보지도 않는 한 합리주의는 비젼이 없는한 겨우 제 앞만을 포용할수 있을뿐입니다. 그 합리주의 영역을 넓히는 것 그것은 당대에는 비합리주위며 비젼입니다. 비젼이 없는한 합리주의는 이기심에불과하며 이타성을 실현하는 것이 비합리적으로 보일수가 있는 것입니다.그것은 해결할 능력이 없으니 귀찮으니 과거의 눈에 보이는 보다 확실한 철칙이나 콘크리트 철근같은 틀에 맞추려 하고 매달려는데 해결하는 것과 같습니다. 감성은 미래를 향해 자신의 스스로 느낌이 있고 힘씀이 있지만 여러분 수준에서 지성은 그저 남이 만들어 놓은 것을 수동적으로 따라가는 것입니다. 세세함을 하나 하나 굽어보려고 하지 않고 이것 하나면 획일적으로 다 돼 이런것은 여러분에게 스스로 없다고 여기는, 노력이 없는 한탕주의와 같습니다.
여러분에게 그 지성이라는 것은 '나는 없다'는 자기 자신의 존재 자체마져 귀찮고 무거우니 수고하고 짐지길 싫어하는 바 아닙니까...


여기서 말하는 것은  물질기계론적 과학입니다. 신을 인정하면서 행하는 미래 신과학이나 영성과학에 대해 하는 말은 아닙니다.

 

종교수행계에서 루시퍼가 만든 우주가 우주의 전부라고 알듯이, 그의 부하 아누나키의 고향 니비류의 일부 기계 시스템의 우주가 우주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말로는 가상현실안에서 인간도 프로그램된 허상이며 기계 구조의 일부라는 것이죠. 이것은 영화 매트릭스의 안 좋은 영향이기도 한데 영화 매트릭스는 매트릭스 층 다차원 층의 현실에 대한 참신한 메시지를 주었지만 그것은 다차원 통합의 한줄기 영혼을 무시하고(상위와 연결되는 영혼이 없을때 매트릭스 갇힐것입니다) 우주를 기계적 관점으로 모방한것에 불과합니다. 우리 우주는 기계 시스템이 아니라 영과 사랑의 시스템입니다.영화 매트릭스는 니비류 영양을 받은 거라고 합니다.


불교쪽에서 이 영화에 호응을 보이는 것도 부처 또한 순수 바탕, 최초의 원점에 머물고자하는 과학원리의 에너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활동의 에너지나 창조의 에너지는 아닙니다. 불교는 영혼을 잡스럽다고 어둠의 카르마에서 벗어나기 위해 경색해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은 일그러진 모습하(루시퍼 체제)에서 나온것이지 영혼에게 절대적인게 아닙니다.  영혼은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고 가치중립적입니다. 영혼은 삶의 무대이며 불교쪽에서 진아, 대아라고 부는 것이 바로 그러한 영혼들이 총합된 상위영혼입니다. 그럼으로 상위영혼과 연결한다는 것은 불교식으로 말하자면 진아를 찾는것에 해당합니다.


그 외부에 어디에도 종속되지 않고 줏대있게 최초에 지구에 온 목적대로 영혼이 되는 것이 바로 '마음을 비우는 것'입니다. 창조는 그런상태에서 무해하게 이루어지는 겁니다.


붓다는 감정과 주정주의가 발달한 동양에 와서 지성과 논리를 중시했고 예수는 이성과 합리주의 개인주의가 발달한 서양에 와서 가슴과 행동과 사랑을 중시했습니다. 붓다는 확실히 정적이며 '액션'은 아닙니다. 그러나 붓다 또한 창조에 협동하고 근원에 봉사하며 후원하는 존재라는 것을 아십시요. 고타마 붓다가 공空을 깨닫고 어둠의 악순환과 보복의 카르마에서 벗어나기 위해 가르친것도 그것은 예수와 같이 오르뺨을 맞으면 왼뺌도 내주어라 하는 생활에서의 발휘할수 있는 가르침, 사랑과 같은 거였습니다. 무조건 최상위으로 벗어나는데 급급한것은 아니고 그 벗어나는 것은 참생활에서의 실천이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 의식과 예수가 다르듯이 부처 의식과 붓다는 다릅니다.


고타마 붓다의 주 목적은 너무 많은 신들이(이것은 지구에 날아온 외계인들의 우주 전쟁 역사이다) 난무하는 당시 힌두를 교통정리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주류 세계의 붓다의 기록을 읽어봐도 알수 있다. 붓다가 창시했다고 하는 불교는 당시 무질서해지고 혼란스러진 힌두교를 타파 하고 재정립하기 위해 나온것이다. 이것이 불교도들이 알지도 못하면서 오늘날 신들이나 영혼을 배척하게된 배경이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이런 가르침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안그래도 왠갖 외계의 잡신이 너무 많아서 자신의 존재를 보지 못하고 맹목적인  숭배를 자아내는 무지몽매한 힌두에서 고타마 붓다는 신을 말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여러분들의 외부의 그 무엇의 종속에도 떠난 자립, 독립을 위해서였지 자연 원리만이 존재하고 신이 존재하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불교에서 부처라고 말하는게 바로 신입니다.여러분들이 바로 신의 부분들로 신의 모습들입니다. 부처가 마음속에 있다고 하는 말이 그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