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스승에게 매달리지 말아야>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을 창조한 아버지 어머니 신들이 보면 어린애입니다. 나도 어린애입니다. 정확히 직시하십시요. 신체의 나이가 많다고 어른이 아닙니다. 그가 영적으로 자립할때 어른입니다. 내 보기에 뭔가 스승을 찾고  비밀수행체계를 찾고 관념을 찾고 의지를 할것을 찾고 최고가 되려하고, 외부에서 최고의 힘만을 찾는 여러분 대다수 자립한게 아닙니다. 처음 걸음마를 걷는 어린애에게 도움받고 의지할것이 있는 것은 좋은 것이죠. 그런데 그것이 결과가 아니라는 것이죠. 언제까지 수행은 어려운 거라면서 제 손으로는 자립하지 않는한 그것은 스승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이기적으로 스승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외부에서 최고의 존재가 나오면 언젠든지 당신은 당신 스승을  버릴것입니다.


영적 성장은 그런것과 거리가 멉니다.
자립은 마인드(내면)에 대한 문제입니다. 이 자립은 불교식으로 말하자면 환경에 종속되지 않고 줏대를 세우는 일이며 집착과 마음 비우기 생각 비우기입니다. 최고 꼴등 비교하지도 말고  최고 1등의 단상만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도 마십시요. 최고가 되는게 아니라 최선을 다하는게 전부입니다. 그 길을 가는 과정과 여정을  즐기며 1등 못지 않게 2등 3등도 중요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님들은 자신을 끊임없이 하찮다고 여기고 배임하며 옭아매고 얽매여 강박에서 자유로워지지 못할것입니다.


이 사회를 보십시요.  미국이 무너지고 정치가 바뀌면 해결될일이지만 서양문명의 부를 따라가려는 학부모들 교육문제는  큰 문제입니다. 그들에겐 종교가 자식의 출세입니다. 동료 친구와 서열을 가리고 경쟁하며 입시지옥에 찌든 대부분의 학생들 그리고 그렇게 성인되어 사회에 나와 최고의 직장을 얻어 출세한 자들 남는 것은 냉혹하게 영혼이 매마르고 로보트가 되어버린 자기 자신입니다. 오로지 유일신만을 추종하는 기독교 문명에서 합리주의 물질주의 과학문명이 발달한 것은 우연히 아닙니다.(여기서 지성만을 중시하고 부처를 좋아하는 분들은 정확히 이 기독교의 유일신이 부처로 대체된 것입니다) 영혼을 부정하고 유일신만을 찬양하는 그들의 신은 진정한 하나님에서 루시퍼와 아눈나키입둔갑한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의 통제와 지배 권력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본래 초기 원시 기독교회는 영혼에 대해 가르쳤던 예수의 정신이 살아 있었지만 기독교 세력의 타락사가 있습니다.


'스스로'를 열등하다 하등하다 보고 외부에서 최고의 힘이나 권력만을 바라보는 것, 이런것들은 모두 어둠의 허상입니다.


부처든 하나님이든 우주의 모든 것이 악이고 환상이며 유일신만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편협한 여러분들의 종교에너지는 그것이 근원절대자의 사랑이고 그 나름의 이유가 있다해도 균형을 잃어다는 면에서 이것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무슨 수행이나 영성따위로 생각하려 들지 마십시요. 여기 있는 자신을 버리고 최고만을 바라보는 수행도 여러분을 옭아매는 집착입니다. 강박입니다. 소재가 무엇이든 에너지 적인 면에서 는 같습니다. 부처나 하나님 못지 않게 그 부처나 하나님이 낳은 자녀(영혼)들도 하나 하나 동등하다는 것을 아십시요. 인간뿐만이 아닙니다. 동식물도 그러합니다.


명상안에서 이런것들은 '무'일지 모르나 행동의 영역에서 이것들은 '허상'이 아닙니다. 명상할때는 명상이고 머리를 쓰고 손발을 써서 일을 해야 할때는 해야 하는 겁니다. 이 영역에서 버려야할 허상은 어둠이지 창조를 위한 배움의 총체인 영혼은 환상이 아닙니다.


천리길도 스스로 한걸음부터입니다.


스승도 중요하지만


가만히 앉아서 누구는 최고네 누구는 허접이네 손가락으로 가리켰쌌고 여러분들은 어떤 스승을 찾아야할지 어떤 수행체계를 가질지 아주 노예시장에서 시종을 고르는 돈많은 응석쟁이 부르주아 짓을 하고 있습니다. 한가하죠. 무슨 권능이 있나 없나 끊임없이 따졌샀고 강자에겐 아첨하고 스스로 약자라고 보는 것은 무시하고...뭘 대단한것을 바라지 마십시요. 이게 무슨 짓입니까.
영적 성장이 무슨 줄타기이고 줄세우기입니까.자기는 가만히 앉아서 다른 사람이 뒷까지 닦아주는 모든 것을 다 해주길 바라고 최고 스승이나 만나서 거져 출세해볼까 궁리합니까?

 

'스스로(self)'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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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 추종자들에게>


여러분이 추종하고 있는 전통종교수행고 물질문명은 본래 루시퍼의 체제를 견제하기 위해서 나온것으로 루시퍼가 사라지면 같이 따라 사라질것으로 차라리 루시퍼와 불가분의 쌍둥이 그림자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여러분들이 하는 것을 보십시요. 그것이 절대적인 아버지라 믿고 옹호하고 안주함으로서 여러분은 역설적으로 루시퍼의 망령을 존속시키며 추종하는 꼴이 되고 있는 겁니다.  그 수행의 지속을 위해 '루시퍼'의 체제가 계속해서 존속하고 있고 존속하길 바라는것이죠...여러분이 신의 부분이면서 스스로 신이 되려는 창조자가 되려는 루시퍼을 신으로 추종하고 있는 자들입니까. 그럼으로서 얼마나 많은 주위의 생명을 경시하고 얼마나 심술궂고 영적으로 진보하려는 다른 이들을 획책하고 방해하며 끌어내리려하며 멍청한 파괴 짓을 했습니까.  신은 여러분을 심판하지 않지만 여러분에겐 장난이지만 당신은 그에 대한 책임을 느껴야 합니다. 그것은 신에 도달하려면 언젠간 반드시 당신이 스스로 대면해야할 일입니다. 얼마나 많은 과오를 저지르고 있느지 알고 깨우쳐야만 진보가 가능합니다.


그럼으로 앎을 성취하십시요. 지구는 마치 우리나라 신군부에 의해 외부외의 교통과 통신이 두절된 80년 오월의 광주처럼 외부(내면)과의 통신과 교통을 단절된 상태입니다. 내면도 그 나름의 하나의 우주이고 조직이고 사회라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시대 상황이 있기 마련이며 거기에서 나온 가르침 조차 변화하고 유동적이며 절대적인게 아닙니다. 


거꾸로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것에 대한 책임 회피라는 것을 아십시요. 그것은 해결책이 될수 없습니다.루시퍼에서 벗어나는 길은 그것을 알고 자신이 정직하게 책임을 느끼고 벗어나는 절차에 있는 것이며 더 이상 유혹되지 않고 같은 실수를 반복 하지않는데 있습니다. 그것은 의지입니다. 나를 세우는 일입니다. 내가 없다면 그것을 할수 없습니다. 그것이 배움입니다. 하위어둠의 자아를 버리는 것은 나의 의지를 세워야 하는 일이지 나를 버리고선 이루어질수 없습니다.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그 자체가 이미 그러한 실수들의 연장입니다.내가 없을 때 당신 몸의 주인이 없을때 당신을 지배하는 것은 어둠이며 이미 모든 실질적인 면에서 당신의 몸이 그의 지배를 받고 꼭두각시처럼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루시퍼에서 벗어나기 위해 일종의 영적 자살을 하는 것인데 더 큰 문제를 자아낼것이며 그것이 어떤 의미에선 루시퍼 노리는 것중으 하나라는 것을 아십시요.


여러분을 '사랑'으로 낳은게 신인데 여러분은 신이 창조한 대로 본래의 나의 모습마쳐 없애는 것이 신과 하나가 되는 길이라고 착각합니다. 신은 그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그것이 없는 사람은 먼저 그것을 일으켜 세워서 그 다음으로 그것을 신적 자아와 합치시키는게 좋은 것입니다. 내가 없다면 바칠게 없습니다. 다시 빠꾸되어  나를 찾아와야 합니다. 그것은 그만큼 신의 한부분을 죽이는 겁니다. 내가 없는데 어떻게 존재하는,여러분들이 사랑한다는 절대자에게 나를 받쳐 하나가 될수 있습니까.  당신은 신을 사랑해도 그 신의 피를 물려받고 당신속에서 살아 숨쉬는데 자신을 사랑하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유교적으로 말하면 자신을 자학하고 학대함으로서 당신을 낳은 부모님에 대한 불효입니다. 신이 당신을 사랑하는데 당신이 자신을 사랑하지 못함은 신에 대한 반역하는 행위 입니까? 참으로 어리석습니다.


여러분들이 신체적으로 근원과 하나가 된다는 말은 근원자의 옆자리에 앉는 것이지 여러분이 근원자가 되어 근원자의 자리에 앉는게 아닙니다. 당신은 당신을 낳은 부모의 자리에 앉을수 없습니다. 그 같은 옆자리에 앉을수 있을 뿐입니다.  여러분도 정상적인 성장과정을 거쳐 누군가의 부모가 창조자가 됨으로서(루시퍼는 이 과정을 무시하고 근원자의 정당한 인가를 받지 않고 자신의 부하인 모른체 정당한 댓가나 노력없이 그 자리에서 전복해서 자신이 창조자가 되려했습니다. ) 그 근원자의 마음을 이해하고 나누는 위치에 올라서며, 그 옆자리에 같이 앉을수는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나온 존재가  그리스도 의식입니다. 근원은 오로지 근원만이 가능합니다. 당신이 근원과 신체적으로 하나가 된다고 해서 당신이 사라지고 근원이 당신으로 대체되는게 아닙니다.  신체적으로 하나가 된다는 것은 그 옆자리에 앉을 수 있다는 겁니다. 그 근원과 동질의 마음을 느낄수는 있는 것이지요. 당신은 당신이며면서도 근원과 마음을 나누고 근원과 동질의 하나가 되는 겁니다.


기독교식으로 하나님 아버지나 아들 같은 평범한, 우리 일상에서의 볼수 있는 가족같은 세속적인 대위법이 나오면 부처를 추종하는 자들은 나르시시즘에 빠져 부처가 무슨 대단한 초월인양 된양 최고 위대하다며 떠 받들고 창조자를 낮은 것으로 볼수 있으나 부처 또한 우리 우주의 창조자 안에서 부처 입니다. 창조자 안에서 창조자가 낳은 영혼들 사이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부처는 우리 우주안에서 순수의식입니다. 다른 우주에는 부처가 없습니다. 부처계열에선 아직 다른 우주로 나가본 존재가 없고 하나님에 도달한 존재가 없습니다. 창조자가 우리 우주를 대표해서 다른 우주와 관계하고 수퍼우주와 관계하며 하나님과 관계합니다. 고전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이 우리 우주의 창조자입니다.


이제 여러분을 감금하고 웅크리게 했던 루시퍼의 카르마나 영계는 더 이상 존재 하지 않습니다. 이말은 붓다가 당대의 시대적 환경탓으로 터부시했던 것들에 대한 불교의 경계 상황은 끝났다는 것입니다. 이제 불교 계열 추조자들도 균형자 입장에서 새로 시작하는 입장에서 나래를 펼치고 삶과의 창조적 융합이 필요합니다.


고대로부터 환인과 환웅에 의해 다스려져 삶속에서 살아있는 고유의 우수한 영성을 이미 보유하고 있었던 한민족은 예수나 붓다의 가르침에도 그렇게 종속되지는 않습니다. 대홍수 이후 타민족에게는 초고대로부터의 비젼이 단절되어 버렸고 미개상태로 뿔뿔히 파편화 되었던 겁니다. 예수나 붓다는 그들을 계도하기 위해 온것인데 한민족은 고대로부터 외래종교에 굳이 찾아가 가르침을 받지 않아도 좋은 영성이 삶의 모습 그 자체로 존재해왔습니다. 지금 상승은 집단 상승이며 현대인은 비젼이 필요하지 않으며 특히 한민족은  종교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한민족은 단일민족으로서 삶속에서 이미 영성을 실천해 왔던것입니다. 미래 5차원은 삶속에서 영성이 살아서 존재하는 이런 문명이라는 것을 아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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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시퍼에 대해>

 

창조란게 여러분에게 고역이며 불평부당하게 노역을 지우는 것이라고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무해한 창조가 이씁니다. 근원으로 부터 뻗어 나와 근원이 무엇인지 느끼는게 여러분이 존재하는 이유이며 그것은 근원이 스스로를 사랑함입니다. 자기 자신을 알고자 함입니다. 근원이 스스로를 사랑하고 관심이 없었다면 여러분은 존재할수 없습니다.


그럼으로 스스로 자신을 사랑하는 근원은 여러분의 지분만큼 여러분 몸에도 살아 숨쉼으로 여러분이 근원을 사랑한다면  그 근원이 당신에게도 깃들어 있음으로 그 신이 깃든 당신을 '사랑'해야 하는 겁니다.  당신 자신을 사랑하는 길이 근원자를 사랑하는 길입니다. '사랑'은 그것에 대한 관심이고 책임지 부정적 뜻의 에고나 자기만족이 아닙니다. 그것이 신의 뜻에 합치하는 길입니다. 본래 창조란 그 상태에서 무해하게 행하는 겁니다.아무런 공해도 파괴도 쓰레기도 남기지 않죠. 본래 그것은 하나의 즐거운 아이들의 무해한 놀이였습니다. 그러면서 아이들은 놀이를 통해 근원이 창조한 세계를 배움으로서 스스로를 느끼고 배우고 자기 자신은 물론 타인에 대해서도 배움으로서 타인과 어울려 살아가느 법을 배우는 겁니다 .


이 우주의 어둠의 기원은 그 와중에 신에 대한 반란을 일으켰던 한 우두머리로부터 시작했습니다. 그가 하느님의 아들로서 우리 우주의 창조자 그리스도를 보좌했던 대천사 루시퍼이죠. 그가 불교에서 마왕으로 묘사되는 자입니다. 그와 그 추종세력이 밖에 나와 놀이를 하는  여러분을 신의 집으로부터 단절시킨겁니다. 당신은 집으로 가는 문(영혼의 루트)을 잃고 혼자가 된듯 했습니다. 루시퍼의 의도는 좋았으나 너무 그 아이디어의 역활에만 충실하다 못해 매우 심술궂은 양상이 되었고 그것은 이 우주의 창조주가 보기에도 좋지 않았던 것입니다.


자기가 다스리는 우주를 얻자 이제는 창조주를 능가하고자 하는 루시퍼의 에고가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처음 루시퍼가 창조자에게 왔을땐 여러분이 근원을 알아가기 위한 게임의 효과를 극대화 하기 위한 장치, 하나의 아이디어에 불과했습니다. 어둠의 본질은 실수에 대한 스스로 용서받지 못할거란 죄의식과 공포인데, 자기를 정직하게 돌아보것을 두려워 합니다. 실수를 더욱 조장함으로서 더욱 방어적인 되고 스스로부터 날아납니다. 그들과 그 컴플렉스를 공유하는 여러분들이 증오가 증오를 복수가 복수를 낳게 하는 영원히 쳇바퀴 돌아가는 그 윤회의 환경에 빠지게 한것입니다.


루시퍼는 한때 신으로부터 단절되봄으로서 역설적으로 신에 대한 고마움을 더욱 분명히 알게 하려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루시퍼는 그를 추종하는 자들에 의해 너무 많은 불필요한  문제를 자아냈습니다. 여러분들은 진정한 자신의 기원과 전생의 기억을 잃어버렸습니다. 이제 그 계획은 실팼고 철회되었습니다. 루시퍼가 만든 윤회 시스템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창조자 그리스도를 대동하고 온 예수의 희생과 헌신을 통해서 인류에게 보복과 악순환의 카르마가 아닌 사랑의 다른 길을 제시함으로서 가능했습니다. 그가 인류에게 모범이 됨으로서 루시퍼의 영계는 서서히 와해되기 시작했죠.


왜 루시퍼의 어원이 빛인지를 생각해 보십시요. 맨날 아버지 품안에서 사랑만 받고 자라 아버지의 사랑을 몰랐던 여러분은 따분했고 아버지 사랑의 소중함도 몰랐습니다. 여러분과 아버지 동의하에 아버지의 궁궐로부터 세상 밖으로 뻗어 나와 아버지가 창조한 세상을 배움으로 아버지의 사랑을 느끼고저 했던겁니다.그리고 루시퍼라는 가짜 신 가짜 아버지 역활을 하는 무서운 삼촌에게 교육이 맞겨진 거이지요. 신이 여러분을 착취한다거나 무서운 존재로 여기게 된 피해의식은 그의 영향 때문입니다. 이것이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신들에 대한 모든 '안좋은 추억' 어둠의 신들의 기원입니다. 루시퍼는 해체 되었고 그의 부하인  아눈나키는 지구를 떠났지만 그 잔당들과 그들이 만든 시스템(정치가들 재벌들 주류과학이나 종교)은 아직도 이 지구에 존재합니다.


그럼으로 앎을 성취하고 무엇이 여러분을 여러분 답게 해주는 신으로 이끌어주는 빛인지 아니면 여러분을 가리는 가짜신들 어둠인지를 분명히 분별하여 처우 하십시요. 앎은 시야를 가리지 않습니다. 눈을 높이 든다면 당신 눈을 가릴것은 없습니다. 그 반대가 어리석음이요 무지 몽매인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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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과 넋도 소중하다>

 

영과 여러분들의 중간 사이에 존재하는
상위 영혼, 상위 대자아는 님들 하나만을 거느리지 않으며 님들 말고도 무수한 영혼과 당신들의시간선과 평행시간선에 존재하는 나툼영혼(소위 전생이라고 말하는)을 동시 다차원적으로 거느립니다.

 

건물을 건설함에
상부가 당신은 위대한 설계자이고 지도자라면 당신들은 그가 사랑하는 충직하고 유능한 목수들입니다. 여러분이 없으면 창조자도 창조자의 뜻을 펼칠수 없으며 창조자 혼자서 모든 부분에 전문가이고 우주를 창조하는게 아닙니다. 분업된 상태에서 집을 짓는다는 하나의 방향을 바라보며 협동하는 것이  효율적이죠. 그렇게 하기 위해서 근원은 자신의 몸을 수많이 나누어서 분신화한것입니다. 그것이 영인것입니다. 그 작은 하나 하나는 마치 홀로그램처럼 큰 것을 그대로 복사하고 있습니다. 근원자와 마찬가지로 당신도 근원과 똑 같은 창조능력을 부여 받았습니다.


신은 당신과 상관없는 존재가 아닙니다. 신은 당신속에 내재하며 당신이 스스로 도울때 신이 살아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될것입니다.그거싱 영혼의 능력입니다.


여러분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최고층만 중요하다며 경시하는 영과 혼-얼이라고 말하는 것 넋은 모두 상하 고저 없이 소중하다는 것을 아십시요.


얼과 넋이 없으면 창조를 위한 삶이 없고 배움이 없으며 우주는 공간낭비에 불과합니다. 창조자의 창조를 사랑하지 않음은 나약함과 이기심 무관심에 스스로 조차도 돌아보지 않는 권력 추종에 지나지 않습니다.어찌 절대자 근원자를 사랑한다면서 그가 낳은 당신과 그의 다른 생명들과 자식들은 사랑하지 못하는지요. 여러분들의 절대자에 대한 사랑은 사랑이 아니며 여러분들의 스스로 부족함  두려움과 불안을 만회하려는 이기심이 아닌지 생각해 보십시요. 출발이 그러하다면 그것을 수정해야 할때가 올것입니다.
 

어찌 우주를  하나님만 살고 있는 조그만 궁궐안으로만 축소하는지요. 지방소도시가 없다면 서울수도도 없습니다. 서울수도만 대한민국이고 지방소도시는 대한민국이 아닙니까. 혼과 얼은 그 영의 뜻을 우주 전역에 펼치기 위해 봉사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영에게도 필요한 것입니다.


영이 그 자신의 뜻을 실현화 하기 위해 물질화 한것 그것이 육체이고 그 중간자가 영혼입니다. 여기에 단절이 있어 여러분의 영혼이나 그 영혼과 여러분을 이어주는 빛의 몸에 대해 부정성도 나오고 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 영혼 중간 사다리를 거치지 않고 막바로 영이 될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이 어느 한쪽으로 가는게 아니라 하나의 줄기로  연결된채 그 전반에서 온전하게 작동하는 것 그것이 우리의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실질적으로 혼을 소거하고 영이 되는 것은 그 이후의 실질적인 업적 정당한 절차와  단계를 거쳐 이루어진다는 것을 아십시요. 그 삶이라는 업적을 쌓지 않으면 절대자 근원자는 커녕 당신은 이 삼차원도 벗어나지 못하며 어느 한도까지 진동수를 높일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영겁의 시간이며 삼차원 시간으로 환산하면 여러분들의 삶이라는 이라는 각자 실험을 중요시 하기에 우주 나이만큼이나 많은 수백만년이 걸리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것 조차 찰라입니다. 그것이 영혼의 여정입니다. 그때까지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혼과 넋이 가짜라고만 하며 그것을 없애려고만 하겠습니까. 정당한 댓가없이 그것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여기 있는 곳을 없애려는 게 아니라 여기 있느 곳도 존재하면서 상위와 하나로 연결된 상태 그 상태에서 여행하는게 정상입니다. 초자아 절대자아로의 진화는 그 상태에서 점진적으로 신에 봉사하고 이웃과 어울리고 봉사하면서 이루어지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 있으면서도 당신은 저기에 천국에 이를수 있습니다.
이 우주에 공짜는 없으며 영혼은 정직한것이며 이것 하나면 돼 이런 한탕주의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 절차가 없다면 당신이 육체로 살면서 근원이든 무이든 영이든 간에 무엇을 추구하든 정상적인 절차가 아닌한 상위영혼은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당신을  멸시한 그 하위 차원의 교실을 배워오라고 다시 삼차원 행성으로 당신을 내볼낼것입니다.그것이 윤회입니다.(4차원 영계에 들어 윤회를 담당하는 상담자들과 상담후 스스로의 심판으로 살아 있을적 스스로 풀지 못한것 가져오지 못한 것을 깨닫고 다시 가지려 삼차원으로 내려갑니다)


상위영혼은 개체 영혼이 윤회하는 영역밖에 있습니다.5차원만 되도 이미 윤회를 졸업한것입니다.카르마를 다룰줄 아는 마스터들이 사는 곳도 5차원 빛의 도시입니다.


 5차원에 존재하는 빛의 몸은 이 영으로 가기 위한 상위대자아 상위영혼과의 연결을 위한 중요한 과정입니다.  그 과정을 무시하면서 어찌 마지막 단계에 가려고 하시는 겁니까. 너무 높은 목표는 없는 거나 마찬가지인 것입니다.그것은 시작이지만 님들 수준에선 전부입니다.시작이 절반입니다. 이 것이 시작되기 전에도  전에도 어둠의 에너지를 비우는 몸의 정화라는 과정이 있지요.


(대부분 '마음의 비우라'라고 하는 지구 자체에서 개발한 불교계열 명상은 여기에서만 머물고 5차원 빛의 신체를 통한 상위와으 연결 접속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죽은 다음에도 결코 윤회에서 벗어나지 못하죠. 수동에서 능동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내면으로 들어가는 것은 수동적으로 세상을 피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능동적인 행위입니다. 내면으로 '들어가는'게 아니라, 내면으로 '나와야' 합니다. 행하지 '않는게' 아니라 행하지 않는것을 '행해야' 합니다)


내면으로 들어가 혼자서 상위든 하위든 문걸어닫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게 아닙니다. 내면 또한 하나의 조직이고 사회입니다.


5차원 부터가 모든 차원과 소통할 기회가 주어지는 본격적인 내면 세계입니다. 내면 우주입니다. 여러분들이 우주의 밖에 무엇이 있냐고 할때 그 것은 삼차원 우주를 말합니다. 삼차원 우주는 상위차원의 부분에 불과합니다.
여러분들이 내면으로 들어간다할때 내면으로들어가 문 닫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거이 아닙니다. 그것은 상위차원과의 만남입니다. 소통이고 교류이며 커뮤니케이션입니다. 내면으로 들어가는게 아니라 내면으로 나와야 하는 겁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것이 아니라 행하지 않는 것을 행해야 하는 겁니다.  현재 여러분이 어둠의 행동을 하고 있는 상태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계속 어둠의 행동입니다.  행하지 않는 것을 행해야 하는 겁니다. 그것은 능동성입니다. 능동성은 살아있다합이니다.


9차원에 존재하는 '영' 또한 하나가 아니며 영들로 이루어진 대영과 그 대영들로 이루어진 대규모 그룹들이 존재하고 그러한 그룹들이루어진 더 큰 그룹들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 이상 전체의식이 존재하지요. 이것들은 10차원에서 12차원에 걸쳐 존재합니다. 우리 우주밖에 나가면 다른 우주들이 존재하며 그 우주를 통합한 더 큰 우주가 존재하고 그  우주들을 통합하는 더 큰 우주가 존재하면 종국에는 13차원 이상의 절대자에 이릅니다.


개체 영은 9차원에 존재하고 상위영혼은 6차원 유체(빛의 몸)는 5차원에 존재합니다.
영은 근원과 이어주는 중간자이고, 영혼은 영과의 연결을 위한 중간자이고, 유체는 그 영혼과 육체를 이어주는 중간자입니다. 영으로 가기위한 유체와의 연결도 못하면서 어찌 영이 되길 바랍니까. 1학년 입학식도 하지 않으면서 벌써 학교를 졸업하는 형들을 따라가려합니까? 그런 욕구와 이상은 좋으나 거기까진 여러분들이 지금 바라볼것이 아니며 분수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아십시요.상위영혼이 빙의니 헛것이니 뭐니 싸우려 하지 마십시요. 상위영혼은 도전받지도 않을 테지만 상위영혼보다 진동수가 낮은 당신은 상위영혼을 이길수 없습니다. 그것은 자기와 싸우는 것 처럼 불가능한 일입니다. 절대자를 사랑한다면서 자기가 절대자와 연결된 그 디레토리 루트와 싸우는 일입니다. 그것은 빙의가 아니며 당신이 잎파리라면 당신을 뿌리 절대자와 연결하는 줄기인것입니다.


모든 것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단지 변화할뿐이죠. 사라진다는 것은 일직선상의 시간에서 벌어지는 겁니다. 삼차원의 세계 육체만 벗어나도 시간은 다차원 동시성으로 흐르며 일직선상의 시간은 없습니다. 오로지 존재만이 존재하고 시간이 사방으로 방사될 뿐이죠. 모든 사건과 사물은 동시에 벌어지고 존재합니다.  예를 들어 타임머신이 존재한다면 여러분들은 일직선상의 시간에서 벗어날수가 있을 겁니다. 과거의 나였던 내가 미래에 어느 시점에 내가 죽어 없어져도 과거로 돌아간다면 여전히 그곳에서 살아 있는 나를 볼수 있을 것입니다. 모든 것은 사라지지 않고 거기에 존재합니다.또 죽지 않고 미래로 가 다른 시간선에서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는 또 다른 나를 발견할수도 있겠지요 이 과거의 나와 미래의 나, 그리고 다차원 동시성의 시간선에 걸쳐 무수히 존재하는 또 다른 나를 하나로 이어주는 것이 상위영혼입니다. 상위영혼은 모든 다차원 시간선과 시간대에 걸처서 살아가는 무수한 나를 동시에 통합해 거느리죠. 영을 이해한다는 것은 일직선이 아닌 다차원 동시성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상위영혼은 어둠의 세력이 범접할수 없는 6차원 빛의 영역에 존재합니다. 상위영혼을 터치 할수 있는 것은 오로지 그로부터 상위영혼이 뻗어나온 근원자입니다. 유에프오라고 부르는 타임머신은 존재하며 타임머신은 우리의 의식을 통해 시간을 여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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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과 감정의 역활에 대해>


오늘날 지구의 자연을 파괴한것은 동양의 감성이 아닙니다. 합리성, 과학성을 주무기로 내세우는 이성적이고 냉정하다는 서구문명이 자연을 파괴한것입니다. 합리주의는 분리주의이기도 한것입니다. 이 분리 분석을 좋아하는 성향은 서구에서 기계과학을 일으켰습니다.(현재 서구 종교에서 모시고 있는 구약의 하나님은 진정한 하나님이 아닙니다-기계신 아누나키죠) 어린아이처럼 눈에 보이는 물질 단위 하나 하나 그 자체에만 흥미를 보이는게 서구입니다.  반면 동양은 사물과 사물의 관계속에서 전체를 보는 조화와 균형의 눈을 중시 해왔습니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자연 형상의 모든 곳에 신이 있다고 봤으며 그것은 자연의 존중으로 자연과 어울리며 살아가는 방식으로 나타났던 겁니다. 우리 옛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부억에도 마당에도 장독대에도 심지어는 문지방에도 신이 산다고 여겼습니다. 우리는 단순히 미신이라고 여기지만 거기에는 과학이 있고 그것은 틀린 말은 아닌데 모든 형상은 형상대로 파동을 방사하며 의식이 있고 기억이 사념이 서립니다. 모든 물건은 나름대로 살아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영혼을 가진 인간들은 수학논문이 없어도 직감적으로 알았던 것입니다. 거기에 자신을 잃고 너무 매몰되도 문제지만 서구문명의 도입으로 우리는 이런 자연에 대할때의 자세 경외심이 순박함을 잃어버린것도 사실입니다.


물질위주의 개인주의 합리주의 서구적 방식을 따라가다 보니 우리는 우리 동양인의 풍부한 감정을 어느덧 천한것 처럼 열등한것처럼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렇게 감정이 풍부하면서도 역설적으로 동양인은 서구인에게 비해 외모의 차이가 덜합니다. 서구인이 동양인을 처음 보면 별차이를 느끼지 못하고 다 똑 같이 생겼다고 말하는 것도 그것입니다. 반면 서구인은 외모의 차이가 뚜렷하나 감정의 공감능력이 덜 발달되어 있습니다. 서구인은 그 뚜렷한 외모만큼이나 다분히 호전적입니다. 동양인 감성성은 역설적으로 이러한 백인들의 다양성과 통합에 대한 실패의 교훈에서 나온것이며 이것은 서로 분리된체 장차 뼈처럼 덜그덕 거리고 부딪히는 백인들을 한데로 이어주고 통합해주는 살과 같은 토대가 됩니다. 서로 각자 따로 노는 개인주의 분리주의 백인들로만은 지구는 완성될수 없기에 창조자는 동양인이라는 소스를 집어넣었습니다. 지구를 갖은 양념으로 마치 한국 음식인 비빔밥 버무리듯 버무렸습니다. 다른 행성은 목성과 같이 거대한 행성에서도 하나나 둘 이상의 종족이 밖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창조자의 종자 행성이자 전시행성으로서 다양성이 다채롭게 버무려진 지구와 같은 행성은 이 우주에도 몇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서구인이 이제막 세상 물질들을 알기 시작하는 호기 어린 청년이라면 동양인은 노인들과 같으며 오랜 연륜에서 나온 지헤가 담겨있습니다. 한민족은 단일민족이자 집단혼으로서 살아가는 일을 중시하지 서구인과 같이 개인이 파편적으로 느끼는 어린아이가 물질에 보이는 과학같은것에 흥미가 덜한 면이 있습니다.그런것은 이미 그들 영겁의 시절 이전에 어렸을때 뗀것입니다.살아가는 지혜가 그 임무입니다. 백인들은 무대에서 뛰는 주인공이나 통일성과 다양성을 푸는 열쇠는 바로 동양인에게 있는 겁니다. 장차 이 아시아에서 이 한반도에서 세상을 이끌어갈 지혜가 나올것입니다..


감정은 감정이라서 악한게 아니고 에고 악한것은 감성 지성 어느 것과도  결합할수 있는 겁니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무시당했을때 '나는 감정도 없는줄 아냐'고 우리는 흔히 항변 하듯 말합니다. 그것은 자신의 존재 인정받고자 하는 입니다.
감정 느낌이 없을때 우리는 벌이나 개미와 같이 되며 우리는 타인의 고통이나 기쁨을 내 몸 같이 아파하거나 즐거워하는 공감 능력 또한 발달하지 못하는 겁니다.
머리로는 알지만 왜 하는지 그것을 몸으로 아는게 감정입니다. 내 감정이 있기에 타인의 감정도 압니다. 그것이 신성한 것과 결합하든 안하든 감정은 다양성을 보장해줍니다. 다양성은 진화의 전제 조건입니다.
비록 악한 의도는 없다해도 감정이, 느낌이 없는 무감각한 외계인들이 인간을 잡아 '파리를 잡아 날개를 찟듯' 실험한다해도 별수 없는 것이지요. 그들은 감정이 없습니다. 감정은 머리로 아는 것의 몸의 체화이며 그것이 '실질적' 진화의 모습의 한 단면입니다. 내가 어떤 행위를 했을때 타인도 나처럼 아픔을 느낀다는 것을 안다면 그는 그 행위를  저지르지 않을 것입니다. 아예 감정이라는 것 자체가 없다면  그렇게 진화하는 기회조차 얻지 못하겠지요.

수행이나 수련도 종족들 우주의 진화에 이바지 하기 위함입니다. 진화의 관점에서 보면 많이 웃고 많이 울고 많이 감동하는 것은 다양성을 보장하고 생글거리게 하며 그것이 살아 있는 자만이 할수 있으며 신이 바라는 바라는 것을 아십시요. 기쁘든 슬프든 울고 싶을때 우는 것은 추한것이아닙니다. 어린아이처럼 자연스러운 것입니다.울고 싶을때 우는 것이 약하게 보인다고 억압하는 것도 하나의 폭력이죠. 그렇게 해서 현대 산업 사회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가슴에서 떠나가고 기계처럼 냉혹해집니다. 감정이 풍부해서가 아닙니다. 근본적으로 제한된 의식이 문제이며, 감정이 제 대로 표출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이러한 환경에서 가슴이 메말라버린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 환자와 같습니다.